어둠의 변호사 - 도진기 지음/들녘(코기토) |
어둠의 변호사라 불리는 고진은 남광자라는 여인에게서 오빠의 유산 상속과 관련된 의뢰를 받았다. 유산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남씨 집안과 같은 저택 1층에 거주하는 서씨 집안 사이에서 벌어졌던 과거의 참극, 그리고 2년 전 살인사건에 대해 전해 듣고 흥미가 생긴 고진은 남씨 집안의 무남독녀 남진희를 만난 뒤, 시각장애가 있는 그녀를 돕기 위해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남진희가 살해당하는데...
오래전 남씨, 서씨 가문에서 벌어진 이분희 살인사건, 2년 전의 박은순 살인사건, 남진희 살인사건, 마지막의 서형일 살인사건까지 총 4건의 연쇄살인이 벌어지며, 의외의 진상과 함께 다양한 트릭이 사용된 한국 본격 추리물입니다.
복잡하고 치밀한 인간관계, 과거에서 이어진 비극, 악마적인 핏줄에 의한 범죄 등 여러 비현실적인 설정 - 요코미조 세이시가 떠오르네요 -을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에 녹여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가문이 얽히게 된 이유인, 전 남편이 도망간 뒤 아이들을 데리고 재혼한 이분희와의 관계라든가, 서형일을 입양시킨 이유 등은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로 보이거든요. 주요 등장인물의 설정, 주택 명의, 집을 나간 아버지, 죽은 어머니에 대한 설명 등도 상세하게 덧붙여 설득력이 높습니다.
트릭도 뛰어납니다. 이분희 사건의 진상도 놀랍고, 서형일 사건의 다잉 메시지도 설득력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박은순 사건과 남진희 사건 두 건에서 사용된 여러 트릭은 풍성하면서도 추리 애호가를 충분히 만족시킬 만한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굳이 흠을 잡자면, 박은순 사건에서 알리바이를 조작하기 위해 ‘위조 여권 전문가’라는 특이한 전문가가 필요했다는 점, 그리고 현지에서 벌인 돼지피 사건은 경찰에 검거될 위험성이 컸다는 점(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위조 여권 등이 밝혀지며 모든 것이 끝장날 상황)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또한, 남진희 사건의 경우 별장의 설계 자체와 함께 수원 톨게이트에서의 소동 등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점도 감점 요소였고요.
그러나 이는 극의 흐름을 저해할 정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전개의 문제가 더 컸는데, 탐정 역할을 맡은 고진을 비롯해 용의자로 등장하는 서씨 가문의 형제들의 캐릭터가 천편일률적이었고, 주요 용의자들에 대한 수사가 지나치게 알리바이에만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현대물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애매하게 빠져나가는 부분이 많아서 뒤로 갈수록 지루해집니다. 주요 용의자들에 대한 혐의를 독자들이 끝까지 가져가도록(특히 서두리) 구성한 것 같지만, 방식이 세련되지 못했어요. 차라리 서씨 가문의 형제들을 동시에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소거법 형태로 진행했더라면 더 흥미로웠을 겁니다.
단서 제공 방식도 공정하지 못합니다. 유언장의 첫 번째 버전이나, 서형일의 배낭여행 당시 친구의 행적 등 당연히 조사되었어야 할 단서들이 뒤늦게 등장하는데, 현대 경찰 수사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전개에 우연이 많이 개입된 것도 본격 추리물로서는 감점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더부살이하는 노인의 정체와, 그로 인해 밝혀지는 저주받은 핏줄의 정체가 우연히 밝혀지는 과정은 다소 개연성이 부족했습니다.
그 외에, 판사 출신 작가가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음에도 법률적인 요소가 두드러지지 않는데, 단점은 아니지만 전문 분야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단점을 많이 언급했지만,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본격 추리소설일 뿐만 아니라, 완성도와 트릭 면에서도 한국 추리소설 장르에 깊이를 더해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첫 장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놀랄 만한 수준이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가와 시리즈였습니다. 시리즈 후속작을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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