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싸리 정사 - |
"회귀천 정사"에서 이어지는, 꽃을 주제로 한 연작 미스터리입니다. 메이지~쇼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서정적인 꽃 미스터리 단편 세 편과, 가벼운 현대물 유머 미스터리인 "양지바른과 사건부" 시리즈 세 편이 실려 있습니다.
꽃 미스터리 시리즈는 꽃을 소재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 표면적인 사건과는 다른 진상이 숨어 있다는 점에서 전작과 동일하지만, 전작에 비해 다소 처지는 작품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작은 "도라지꽃 피는 집"과 "회귀천 정사"라는 확실한 투톱 에이스가 중심을 잡아준 반면, 이번에는 "국화의 먼지" 한 편만이 이름값을 하기 때문이죠. "양지바른과 사건부" 시리즈는 유쾌하고 즐겁기는 했으나, 추리적인 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별점은 3점. 전체적으로 평범하지만 "국화의 먼지" 한 편이 압도적인 완성도를 보여 점수를 많이 끌어올렸습니다. 이 작품 한 편만큼은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붉은 꽃 글자"
"내 몸 안에 동백꽃이 떨어진 거야.... 떨어진 채 빨간, 새빨간 피 같은 색으로 피어 있어...."
자신의 친구와의 가슴 아픈 사랑 후 죽어간 여동생을 위한 복수극… 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철저한 계획살인이었다는 의외의 반전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진짜 동기가 뒤에 숨어 있는 구조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근친상간의 감정마저 보이는 캐릭터들을 꽃잎으로 대표되는 탐미적인 묘사로 넘칠 듯이 그려낸 전개가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진짜 악당인 주인공의 1인칭 시점에서 그려지는 이야기가 너무 탐미적으로 묘사되다 보니, 심리묘사가 지나치게 아름다운 쪽에만 치우쳐 있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반전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악당다운 모습을 더 보여주었더라면, 반전이 더욱 극대화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또한, 복수를 위해 동기(미즈사와와 미쓰의 관계)를 설정하는 과정이 과연 생각대로 가능했을까 하는 점도 다소 미심쩍었습니다.
그래도 "정사" 시리즈의 이름값에는 준하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저녁싸리 정사"
유명한 정사 사건과 관련된 당사자의 일기를 토대로, 어린 시절 우연히 정사 사건을 목격했던 주인공이 감추어졌던 진상을 밝혀낸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세간에 아름답게 알려진 사랑 이야기와는 다른 진상이 있었다는 점, 그 와중에 몇몇 본격물스러운 트릭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회귀천 정사"의 판박이입니다.
그러나 "회귀천 정사"에 비하면 확실히 처집니다. 정사 사건에 감춰진 진상, 즉 몰락한 사족의 후예인 신노스케가 가진 사회주의자로서의 야망과, 그를 이용해 오히려 사회주의자를 말살하려 한 다지마의 계획은 정사 사건과 어울리지 않아 괴리감이 느껴졌어요. 화자의 어린 시절 짧은 기억에 의지하는 부분은 논리적 비약이 심했고요.
무엇보다도, 신노스케가 다카미 내무대신을 살해한다면 다지마가 굳이 유우와 함께 알리바이 트릭을 만들지 않더라도 진신샤를 타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거라는 큰 약점이 있습니다. 실제로도 진신샤의 암살이라고 공표된 후, 신노스케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잖아요? 게다가, 다지마 유우의 장지문을 이용한 그림자 트릭을 신노스케가 고심 끝에 알아내 살인에 이용한다는 설정도 억지스러웠으며, 신노스케의 이름과 싸리꽃의 발음이 같다는 점을 이용한 증언 역시 일본어 말장난에 가까워 한국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와닿지 않았어요..
서정적인 묘사는 여전히 뛰어나지만, "전편만 한 속편이 없다"는 격언이 떠오르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국화의 먼지"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날을 배경으로 한 단편입니다. 그날 자살한 전 육군 기병연대 장교의 죽음에 우연히 관련된 "나"가 사건에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된다는 내용인데, 걸작이라 할 만합니다.
짧지만, 작가 특유의 서정적인 묘사와 "나"의 일기가 교차되며 전개되는 방식이 훌륭하고, 적절한 "원격조종" 트릭을 활용한 정통 추리물로서의 가치 역시 뛰어납니다. 무엇보다도 막부가 몰락하고, 막부를 따르던 무사 가문의 후예들과 천황을 추종하는 군인이라는 인물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 등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십분 활용하여 역사 추리물로서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이 시대가 아니면 그려내기 힘든 트릭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별점은 5점. 이 단편만큼은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양지바른과 사건부 제 1화 하얀 밀고"
다이토 신문사의 잔반처리과인 신문 자료부 제2과는 ‘양지바른과’라고 다른 부서 직원들에게 놀림받는 신세였다. 그러한 양지바른과에 다이토 신문사 기자 살인사건의 범인이 신문사 직원 "시즈타"라고 밀고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여사원 아이코가 그 이야기를 사회부에 전한 얼마 뒤, 같은 목소리로 269명에 대해 추가로 밀고하는 전화가 걸려오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사뭇 다른, 현대를 배경으로 한 코믹 미스터리 연작입니다. 결함 있는 사원들만 모여 있는 독특한 집단 ‘양지바른과’의 설정과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상당히 유쾌합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코지 미스터리가 연상될 정도로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었습니다. 너무 만화 같지 않나 싶을 정도로 과장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스타일은 이 바닥 고전인 마크 트웨인의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니 감안해야겠죠. 덧붙여, 작가의 묘사력은 감출 수가 없는지 "범인의 목소리가 하얗다"라는 아이코의 느낌에서 ‘하얀 밀고’라는 단어를 이끌어내는 표현이 인상적이었고, 아이코와 타로의 밀고 당기는 사랑 이야기 또한 귀여웠습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일단 협박 전화를 건 이유부터가 설득력이 부족하며, 이러한 협박 전화를 걸면 결국 범인이 신문사 모든 직원을 알고 있는 내부 직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뿐이라는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또, 사건의 발단이 된 아이코가 이름을 잘못 알아듣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고요. 게다가, 과정이야 어쨌든 범인을 체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도 시마다 과장이 왜 욕을 먹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경찰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겁고 유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러한 유머 미스터리를 작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감탄스럽네요. 역시 재능이라는 것이겠죠.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기에 만족스러웠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제 2화 네잎 클로버"
1화의 5개월 뒤, 양지바른과 멤버인 오가와가 학예부로 이동하는 송별회에서 아이코는 다시 타로와 재회했다. 재회의 장소는 타로가 신문사를 그만두고 개업한 좁디좁은 라면집이었다...
오가와가 인터뷰를 맡은 인기 혼성 듀엣 ‘라라와 루루’의 라라가 살해된 사건을 다룬 단편입니다. 라라가 쌍둥이였다는 가십이 터진 후, 사라진 라라의 쌍둥이가 용의자로 급부상하는 이야기인데, 루루의 독특한(?) 취미 등 억지스러운 설정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습니다. 라라의 성형수술 등 불필요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도 감점 요소였습니다. 한마디로, 추리적으로는 부족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나마 전편에서부터 이어지는 아이코와 타로의 밀당과, 아이코의 복잡미묘하지만 순진하고 귀여운 심리 묘사가 더 재미있었던 작품입니다. 유머 미스터리라기보다는 미스터리 터치의 로맨틱 코미디에 가까웠달까요.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는 않지만,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은 다소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제 3화 새는 발소리도 없이"
"증발 중인 부인이 돌아왔다 뭐 그런 거요."
"그 여잔 앞으로도 당분간 기체로 지낼 걸."
로쿠스케에게 정체불명의 여자가 접근하여, 수배 중인 테러범 "철뇌조"의 거처에 대해 밀고하게 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더해 로쿠스케의 가출한 아내 이야기, 아이코와 타로의 여전한 사랑 이야기가 곁가지로 펼쳐집니다.
앞선 두 편과는 달리 폭탄 테러범 등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장난스러운 밀고 전화를 중심으로 한 일상계 추리물에 가깝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는 일상계 미스터리에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머와 재기 발랄한 대사,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죠. 전작들은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강력 범죄가 등장해 조화가 깨진 느낌도 있었는데, 이 에피소드는 일상계 느낌이 아주 잘 어울려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추리적으로 너무나 별 볼 일 없다는 것입니다. 예상 가능한 이야기였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사건성도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도 유쾌한 캐릭터들의 소동은 읽는 내내 즐거웠고, 완벽한 해피엔딩 역시 귀여운 작품에 걸맞은 마무리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거장이 그린 소품으로는 아주 적절했어요. 귀여운 이야기를 계속 접하고 싶은데, 시리즈 후속작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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