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십자 저택의 피에로 -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
미즈호는 이모 요리코의 급작스러운 자살 사건 이후, 1주기를 맞아 다케미야가(家)의 십자 저택을 찾았다. 그러나 1주기 다음날 그녀와 다케미야 가족, 그리고 손님들 앞에 현재 다케미야 산업 사장인 무네히코와 정부 미타 리에코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미즈호는 새벽에 깨었을 때 발견했던 단추가 현장에서 조작된 것 등으로 집안 사람 중 누군가 범인일 것으로 의심하고, 마침 누군가의 공작으로 다케미야 산업의 이사인 가쓰유키가 범인으로 밝혀지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 얼론 작품으로, 34살 때 발표한 비교적 초기작이지요. 정통 본격물로 독자에게 정정당당히 승부를 거는 내용, 인형사 고조라는 독특한 캐릭터 및 피에로 시점의 묘사가 들어가는 등 여러가지 참신한 시도에서 확실히 젊은 작가의 패기가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과 시도는 작품에 좋게 작용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우선 설정과 트릭 모두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단점이 큽니다. 본격물 대부분이 작위적이긴 하지만, 십자 저택이라는 공간은 아무리 봐도 트릭을 위해 만들어진 티가 물씬 납니다. 공들인 설정일 수는 있지만 흔하게 볼 수 없는 구조인 탓에, 이를 활용한 트릭이 있으리라는건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그리고 인형과 인형사의 등장은 뜬금없습니다. 요리코 자살 사건 당시 장식장의 인형을 피에로 인형으로 바꿔치기한 이유, 인형에 묻어 있을지 모르는 지문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건 잘 설명되지만 이 정도 역할을 위해 "비극을 부른다"는 인형, 정체불명의 인형사를 등장시킬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장식장에 인형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좌우 대칭인 소품은 화분 등이라도 무방했을 테니까요. 게다가 인형사 고조에게 만화 같은 기묘한 캐릭터성을 부여한건 유치했습니다. 피에로 시점의 묘사 역시 독특하기는 하지만 불필요한 건 마찬가지고요. 이야기의 흥미를 돋우고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추가한 설정으로 보이는데 괜히 복잡해지기만 했어요.
미치코와 고조 두 명이 아니, 중간에 살해당하는 아오에마저 탐정이니 무려 세 명이나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전개도 좋지 않습니다. 상호 보완하는 관계가 아니라 둘 다 동일한 정보를 제공받아(아오에의 단서 포함) 동일한 결론에 이르는 탓입니다. "W의 비극"처럼 외부인에 가까운 미치코 혼자 탐정 역할을 하는 것이 훨씬 깔끔했을 겁니다. 진짜 사건의 핵심인 가오리의 역할만 고조의 입으로 설명되는데, 미치코만 단독물로 쓰였더라도 전개에 문제는 없었을 거예요. 덧붙이자면 중간에 진상을 파악한 탐정역 (사람들이 싫어하는)이 살해당하고 다른 인물이 뒤를 이어받는다는 전개는 크리스티 여사의 "누명"이 떠오르는데, 차라리 "누명"처럼 심리 서스펜스 분위기로 끌고가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네요.
그 외의 디테일들, 초중반 상자가 찢어진 것을 발견한 경찰의 수색, 무네히코가 마술책에 메모를 남긴 것, 나가시마가 리에코의 집에 침입해 워드프로세서의 리본을 교체하는 것 등 모두 지나치게 편의적입니다. 요리코로 분장한 미타 리에코의 지문이 인형에 묻어있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단서가 되리라는 생각도 안 들고요. 심하지는 않다고 해도 막장 재벌 가문의 설정도 너무 진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년탐정 김전일"의 초기 연재 에피소드와 유사한 설정, 트릭도 거슬린 부분입니다. 물론 이 작품이 1989년에 발표되었고 "김전일"은 1992년 이후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허나 "김전일"이 더 설득력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도 어려워요. 예를 들어 어머니를 농락하고 버려 힘들게 살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는 "이인관촌 살인 사건"과 유사합니다. 타 작품에서도 흔하게 쓰였지만 범인의 심리는 왠지 모르게 비슷했거든요. 하지만 어머니를 살해하는 극한 심리를 보여준 "이인관촌 살인 사건" 쪽이 설득력 측면에서는 한 수 위였습니다.
십자 저택의 구조를 활용한 거울 트릭도 "학원 7대 불가사의 사건"과 거의 동일한데, 사용된 소품과 방법 모두 "학원 7대 불가사의 사건"이 훨씬 설득력이 높다는건 마찬가지고요.
그래도 건질 게 없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장애가 있는 다케미야 가오리의 나가시마에 대한 집착은 아주 인상적이에요.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난 뒤 복수를 위해 사람들을 조종하고, 나가시마를 지배하려 한다는 것인데 여성 심리 묘사에 탁월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솜씨가 더해져 상당히 섬찟하게 다가옵니다.
범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시즈카 할머니와 가정부 스즈에 아주머니를 통해 증거가 조작되어 사건이 미궁에 빠지게 된다는 초반 전개도 나쁘지 않습니다. 정통 본격물답게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미덕 역시 잘 살아 있습니다. 읽는 재미도 작가의 명성에 어울리는 수준이고요.
허나 단점이 많아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찾아볼 필요 없는 범작입니다.
여러모로 욕심이 너무 과했다는 느낌입니다. 불필요한 부분을 들어내고 보다 깔끔하게 정리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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