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친구 -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
하기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십층짜리 맨션 리틀 타워에 거주하는 두명의 독신 여인이 살해당한다. 피해자는 요시자키 마키코와 다미야 요코.
마키코는 살해당한 뒤 자궁을 적출당하는 등 난도질 당하고, 다미야 요코는 범인이 도망가는 것을 목격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로 야마구치 게이타로가 체포된다. 그는 매춘을 일삼던 요시자키 마키코의 고객이었던 것.
그가 범인이 아님을 직감한 르포라이터 나라모토 노에는 사건의 진상을 쫓으며 취재한 내용을 연재 기사로 발표하는데....
그간 격조했습니다. 설 연휴 등으로 최근 몇일간 통 책을 읽기 힘들었거든요. 이제 언제나처럼의 일상이 시작되었으니 블로그도 다시 달려봐야죠.
이 작품은 어딘가에서 추천을 받고 체크해 두었었는데 추천의 출처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여튼, 읽기 전에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작가가 생소한 탓도 있었고요.
그런데 의외로 생각보다는 재미있더군요. 나라모토 노에의 르포 연재물과 현실이 섞인 전개가 상당히 흥미로울 뿐더러 문체도 그렇지만 잘 짜여진 내용을 통해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독자를 설득하다시피 하는 르포가 사실은 잘못된 것이었고, 진상이 따로 있다는 중반부의 클라이막스까지는 정말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였어요.
또 나라모토 노에의 르포를 통해 밝혀지는 충격적인 진상들도 재미에 한 몫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와세다 대학 법대생으로 재학 중 이미 사법고시에 합격했지만 이후 평범한 직장을 전전하다가 살해당한다. 한 연극 배우에게 너무나 빠진 나머지 사채에다가 입던 속옷, 심지어 몸까지 팔고 임신과 낙태를 반복한다는 마키코 관련 이야기는 우리나라 네이트판 등에 올라오는 판춘문예 고백 수기에 못지 않을 정도로 흡입력있는 이야기였어요. 인터넷 상에 올렸다면 상당한 반향 (혹은 어그로)을 불러 일으켰으리라 생각될 정도로요.
그 외에도 중반에 나오는, 한때 잘 나갔지만 지금은 맨션 구입비 융자 상환으로 허덕이며 가정 파탄 일보 직전의 상태로 약간의 허영심만 남아 있는 이자와 시오리, 르포에서는 별볼일 없고 헛점 투성이로 묘사되지만 사실은 실력있는 꾸준한 노력파인 여검사 다마키 등 다른 캐릭터들 역시 아주 생생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범인이 아닌 것으로 확신한 야마구치 게이타로가 실제로 마키코를 죽였다는 진상이 괜찮습니다. 무엇보다도 동기의 설득력이 넘쳐요. 마키코가 매춘 상대에게 임신했다고 협박하며 돈을 뜯어내는데 야마구치 게이타로는 진심으로 접근하여 임신한 아이를 책임지겠다, 결혼하자고 하는 것에서 비극이 시작되는데 아주 그럴듯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부동산 거품 시절 분양받은 맨션이 분양가의 반값 이하로 거래되는 상황과 같은, 잘 알기에 더욱 와 닿는 설정도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뉴스에 흔히 회자되었던, 고액으로 전세를 끼고 분양받았는데 팔려고 보니 전세금보다도 떨어진 깡통 아파트와 유사한 케이스죠. 분양가보다 저렴하게 구입한 사람의 이사를 분양받은 입주민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막았다는 뉴스도 떠오르네요.
그러나 아쉽게도 좋았던 것은 여기까지고 이후 마키코에서 다미야 요코로 이야기의 중심축이 옮겨지고 나서는 재미가 크게 반감됩니다. 충격적이지만 그래도 있음직해 보이는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다미야 요코는 정말 비현실인데다가 밝혀지는 진상 -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달래기 위해 낙태한 태아를 섭취한다, 그것을 위해 살해당한 마키코의 자궁까지 적출한다는 - 이 너무 과해서 전혀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인육을 섭취한다는 류의 작품은 많고 많지만 낙태한 태아라니... 솔직히 불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요코가 마키코의 시체를 발견하고 자궁을 적출하는 일련의 과정은 우연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라 잘 짜여졌다고 보기 힘들었어요. 피, 식인을 바토리 에르제베트 백작 부인과 연결하는 식의 작위적이면서도 유치한 발상의 연장선상에 있달까요. 자살했다는 결말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보다는 남편의 불륜 상대 (마키코)와 자신이 오래 전 구입했지만 반 값 이하로 밖에 팔 수 없었던 집을 저렴하게 구입한 입주자(요코) 모두에게 극심한 살의를 품은 이자와 시오리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나라모토 노에의 실패한 시나리오가 더 그럴듯했어요. 아니면 차라리 마키코의 충격적인 과거, 즉 어린 동생을 살해하고 그 피를 빨아먹었다는 어린 시절 기억과 고등학교 시절 절친한 친구 가나에에게 결혼을 약속한 남자를 빼앗기지만 그 뒤에도 교우 관계를 유지하여 결국 부부 사이를 파탄나게 만들었다는 것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던가...
게다가 마지막의 나라모토 노에가 사실은 요코의 인터넷 친구 아키였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친구였던 요코의 추악한 비밀을 폭로하려 한다는 마지막 에필로그는 사족일 뿐입니다. 그리고 인터넷 친구였다는 것은 심각한 모순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나라모토 노에의 르포에서는 한결같이 요코가 컴퓨터가 없어서 인터넷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견지하는데 이건 말도 안되죠. 요코의 노트북을 아버지가 경찰 수사 전 몰래 챙겨 갔다는 사실까지는 몰랐어도 어떤 식으로든 요코가 인터넷을 이용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중반까지는 역대급 재미였다 생각했는데 마무리에 실패했어요. 별점은 2.5점. 기대치가 낮았던 탓에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쉬움이 훨씬 큽니다. 그래도 전개와 발상은 독특한 점이 있는 만큼 한번쯤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덧붙이자면. 저도 네이트 판 등에 올라오는 이른바 '판춘문예'를 좀 더 열심히 들여다 봐야 겠습니다. 잘 정리하면 이 작품 속 마키코처럼 소설로 구체화할만한 무언가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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