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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6

여자 친구 - 마리 유키코 / 김은모 : 별점 2.5점

여자 친구 - 6점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십 층짜리 맨션 리틀 타워에 거주하는 두 명의 독신 여성 요시자키 마키코와 다미야 요코가 살해당했다. 마키코는 죽은 뒤 자궁을 적출당하는 등 난도질당했고, 다미야 요코는 범인이 도망가는걸 목격해 살해된 것으로 보였다. 유력한 용의자로 매춘을 일삼던 요시자키 마키코의 고객 야마구치 게이타로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게이타로가 범인이 아님을 직감한 르포라이터 나라모토 노에는 사건의 진상을 쫓으며 취재한 내용을 연재 기사로 발표하는데...

그간 격조했습니다. 설 연휴 등으로 최근 며칠간 책을 읽기 힘들었거든요. 이제 언제나처럼의 일상이 시작되었으니 블로그도 다시 달려봐야죠. 이 작품은 어딘가에서 추천을 받고 체크해 두었었는데 추천의 출처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여튼, 읽기 전에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작가가 생소한 탓이 컸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생각보다 재미있더군요. 나라모토 노에의 르포 연재물과 현실이 섞인 전개도 흥미롭지만, 문체와 잘 짜여진 내용을 통해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독자를 설득하다시피 하는 르포가 사실은 잘못된 것이었고 진상은 따로 있다는 중반부 클라이맥스까지는 정말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나라모토 노에의 르포를 통해 밝혀지는 충격적인 진상들도 재미에 한몫 단단히 합니다. 와세다 대학 법대생으로 재학 중 이미 사법고시에 합격했지만 이후 평범한 직장을 전전하며, 연극 배우에게 너무나 빠진 나머지 사채에다가 입던 속옷, 심지어 몸까지 팔고 임신과 낙태를 반복했다는 마키코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나라 네이트 판 등에 올라오는 ‘판춘문예’ 고백 수기에 못지않을 정도로 흡입력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올렸다면 상당한 반향(혹은 어그로)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생각될 정도입니다.
중반에 나오는, 한때 잘나갔지만 지금은 맨션 구입비 융자 상환으로 허덕이는 가정 파탄 직전 상태로 약간의 허영심만 남아 있는 이자와 시오리, 르포에서는 별 볼 일 없고 허점투성이로 묘사되지만 사실은 실력 있는 꾸준한 노력파인 여검사 다마키 등 다른 등장인물들도 아주 생생하고요.

추리적으로도 알고보니 야마구치 게이타로가 정말 마키코를 살해했다는 진상이 괜찮습니다. 동기의 설득력이 넘친 덕분입니다. 마키코가 매춘 상대에게 임신했다고 협박하며 돈을 뜯어냈지만, 야마구치 게이타로는 임신한 아이를 책임지겠다, 결혼하자는 진심을 밝혀 비극이 시작된건데 아주 그럴듯했어요.

여기에 더해 부동산 거품 시절 분양받은 맨션이 분양가의 반값 이하로 거래되는 등, 잘 알기에 더욱 와 닿는 설정도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뉴스에 흔히 회자되었던, 고액 전세를 끼고 분양받았는데 팔려고 보니 전세금보다도 떨어진 깡통 아파트와 같은 경우이지요. 분양가보다 저렴하게 구입한 사람의 이사를 분양받은 입주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막았다는 뉴스도 떠오르네요.

그러나 아쉽게도 좋았던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이후 마키코에서 다미야 요코로 이야기의 중심축이 옮겨지고 나서는 재미가 크게 반감됩니다. 충격적이지만 그래도 있음직해 보이는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다미야 요코는 정말 비현실적이었고, 밝혀지는 진상 —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달래기 위해 낙태한 태아를 섭취한다, 그것을 위해 살해당한 마키코의 자궁까지 적출한다는 — 이 너무 과해서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인육을 섭취한다는 류의 작품은 많지만, 낙태한 태아라니... 솔직히 불편하기까지 했습니다.
요코가 마키코의 시체를 발견하고 자궁을 적출하는 일련의 과정도 우연으로 이루어져 잘 짜여졌다고 보기 힘듭니다. 피, 식인을 바토리 에르제베트 백작 부인과 연결하는 식의 작위적이면서도 유치한 발상의 연장선상이지요. 자살했다는 결말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정보다는 남편의 불륜 상대(마키코)와 자신이 오래전 구입했지만 반값 이하로밖에 팔 수 없었던 집을 저렴하게 구입한 입주자(요코) 모두에게 극심한 살의를 품은 이자와 시오리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나라모토 노에의 실패한 시나리오가 더 그럴듯했습니다. 아니면 차라리 마키코의 충격적인 과거, 즉 어린 동생을 살해하고 그 피를 빨아먹었다는 어린 시절 기억과 고등학교 시절 절친한 친구 가나에에게 결혼을 약속한 남자를 빼앗기지만 그 뒤에도 교우 관계를 유지하여 결국 부부 사이를 파탄 나게 만들었다는 것을 중심으로 풀어내는게 더 나았을거에요.

게다가 마지막의 나라모토 노에가 사실은 요코의 인터넷 친구 아키였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친구였던 요코의 추악한 비밀을 폭로하려 한다는 마지막 에필로그는 사족인데다가 인터넷 친구였다는건 심각한 모순을 불러옵니다. 나라모토 노에의 르포에서는 한결같이 요코가 컴퓨터가 없어서 인터넷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견지했기 때문입니다. 요코의 노트북을 아버지가 경찰 수사 전 몰래 챙겨 갔다는 사실까지는 몰랐어도, 어떤 식으로든 요코가 인터넷을 이용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요약하자면 중반까지는 역대급 재미였다 생각했는데 마무리에 실패한 작품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전개와 발상은 독특한 점이 있는 만큼, 한 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저도 네이트 판 등에 올라오는 이른바 ‘판춘문예’를 좀 더 열심히 들여다봐야겠습니다. 잘 정리하면 이 작품 속 마키코처럼 소설로 구체화할 만한 무언가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2019/11/16

역사를 바꾼 총 AK47 - 마쓰모토 진이치 / 이정환 : 별점 2점

역사를 바꾼 총 AK47 - 4점
마쓰모토 진이치 지음, 이정환 옮김/민음인

일본 르포라이터 마쓰모토 진이치의 르포입니다. 

책에 대해 전혀 모른 상태에서 AK 47의 등장과 주요 전장, 활약을 다룬 글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소말리아를 중심으로 제대로 된 정부가 기능하지 않는 무법 천지에서 총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대로 된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지 등을 고발하고 알려주는 르포이기 때문입니다.

시에라리온이나 소말리아와 같은 위험 지역의 현재 상황을 직접 발로 뛴 정보를 통해 알려준다는 점은 좋습니다. 세계의 위험지역을 누비며 취재하는, "용오"와 같은 일본 만화에서 가끔 등장하는 그런 르포라이터가 실재로 존재한다는게 조금 신기하기도 했고요.
 또 아직 살아있던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영국 작가 프레더릭 포사이스와 직접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이런저런 새로운 사실도 몇 가지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전쟁의 개들"이 실제로 진행되었던 용병을 고용한 국가 전복 작전을 토대로 창작된 이야기로, 이 작전에 포사이스가 출자(?) 했다는 소문이 있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역시, 진짜같은 픽션을 쓰려면 이 정도의 깊숙한 개입은 필요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AK 47의 신뢰성 높은 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 등 AK 47에 대한 정보도 괜찮은 편이고요.

하지만 비참한 상황을 고발하는 인터뷰와 현지 취재를 제외하면, 결론은 마지막 부분에서 너무 쉽게 요약됩니다. 실패한 국가는 경찰, 병사, 교사의 급료를 지불하지 않는 국가라는 것입니다. 경찰과 병사는 국민의 안전한 생활을 지키는, 최소한의 의무를 직접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교사는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는 사업의 핵심이기 때문이지요. 이래서야 누구나 아는 이야기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너무 긴 분량을 할애한 셈입니다.
또 AK 47이 특유의 단순함, 신뢰성으로 이러한 무법 천지에서 사랑받는다는건 잘 알겠지만, 제목처럼 AK 47이 역사를 바꾸었다는건 어폐가 있습니다. 이런 지역에서는 AK 47이 아니라 M16이건, K-2이건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이 정도라면 제목 사기라고 해도 무방하겠지요.

그나마 "각료들 절반 이상이 자제를 유럽이나 미국의 학교에 보낸다거나 자신의 가족은 국외에서 생활하게 하고 있는 나라, 그런 나라 역시 실패한 국가"라는 멋진 말이 마지막에 등장해서 최악은 면한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동의하는 바에요. 부득이한 이유 - 예를 들어 해당 국가에서 태어났다거나, 해당 국가 국민과 결혼 등으로 국적을 취득했다던가, 정말로 그 국가에서만 제공하는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기 위해 유학을 갔다던가 등 - 을 제외한다면,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인사의 자녀들은 모두 국내에서 거주하며 생활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마찬가지 이유로 국내에서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은 자식을 둔 인물을 주요 공직에 임명하는 것도 불가한 일입니다.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에게 국가를 맡긴다는건 가당치도 않죠.
그 뒤 안정된 국가로서 소임을 다하고자 하는 소말리랜드의 상황을 현지 취재로 알려주며, 제대로 된 국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짚으며 책이 마무리 되는 구성도 괜찮아요. 앞서의 비참한 다른 국가들의 상황과 대비되어 더 잘 와 닿더라고요. 고위 공직자들의 양심적이면서 성실한 모습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기대와 예상과는 백만년 정도 떨어져 있지만 주장하는 메세지 중 일부는 공감할 만 했습니다. 그러나 총기 AK 47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딱히 읽어보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저 역시 딱히 읽어볼 필요는 없었던 책이라는 뜻이지요...

2005/07/23

정인숙 사건 - 나명순 르포집 : 별점 2점

1988년에 나온 책이니 당시에는 화제가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냥 잊혀진 한국 현대사의 한토막인 정인숙 사건에 대한 르포집입니다.

정인숙 사건은 아마 지금은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간략히 소개한다면, 박정희 독재 당시 주미대사를 손가락으로 부르며 상당한 재력과 권력을 손에 넣었던 미모의 여인(아마도 고급 콜걸?) 정인숙이 1970년 자동차를 타고 귀가중 운전하던 오빠 정종욱의 총을 맞고 살해당한 사건을 말합니다. 당시에, 그리고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미스테리가 몇 가지 존재하기 때문에 이 여인의 이름이 역사에 한토막으로 남게 되었지요.

미스테리는 크게 2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정인숙이 낳은 아이는 누구인가? 이미 수차례의 임신 중절 수술을 경험했으며 직업 특성상 아이를 가지는 것이 불리했을 것이 당연한 정인숙이 애써 낳아 기른 아이는 누구의 아이였을까? 이 아버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정인숙을 죽이고 희생양으로 오빠 정종욱을 내세워 이 사건의 수사를 졸속으로 처리하게 하였을까?
  2. 집에서 가까운 위치에 동기마저 불명확한 오빠의 충동적 살인은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진범은 과연 누구인가?
물론 이외에도 사건에 관련된 소소한 수수께끼들, 예컨데
  1. 결국 발견하지 못한 권총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2. 범행에 사용된 권총을 제공했다는 신현정씨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등도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앞서 말한 저 두 가지라 생각됩니다.

첫 번째 미스테리는 정인숙의 부와 권력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던 부분이기도 해서 더욱 관심을 자아내는데, 일단 이 책에서는 소문과 추론을 통해 인물을 두 명, "박정희"와 "정일권"으로 좁히고 있습니다.
두 번째 미스테리도 당시 수사와 재판은 졸속이었고 다른 곳에서 살해당해 옮겨졌다라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을 만큼 정종욱은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추론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고요. 거기에 사건의 정황에서 수사 과정과 재판 과정, 그리고 정인숙의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 까지의 행적, 당시 사회상 등을 소상하게 추적하여 기술하고 있고 관련자 인터뷰도 진행하는 등 소문보다는 "사실"에 가까운 무언가를 전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별로 팩트에 기초한 것 같지는 않고 추정과 당시의 소문 등에 많은 할애를 하고 있어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어요. 무엇보다도 미스테리 자체를 밝혀내는데에는 결국 실패했다는 점에서 실망이 큽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새롭게 알 수 있는 사실이 없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르포집이라는 책을 읽어본 것은 처음인데 나름 좋은 경험이었어요. 국내 현대사에도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 많은 만큼 이런 장르의 책들도 많이 나와 주길 바랍니다.

덧 : 그나저나, 몇년전에 아들인 정승일이 정일권씨에게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여 DNA검사를 했지만 결국 친자가 아닌것으로 증명된 일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친부는 누구였을까요? 정말이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2021/08/06

FoP 소설 : 산책하는 침략자 - 마에카와 도모히로 / 이홍이 : 별점 2점

FoP 소설 : 산책하는 침략자 - 4점
마에카와 도모히로 지음, 이홍이 옮김, 최재훈 그래픽/알마

축제에서 금붕어를 손에 넣은 할머니가 아들 부부를 살해하고 본인 몸도 난자하여 자살했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손녀 아키라는 심한 충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사건 취재 차 마을을 찾은 르포 기자 사쿠라이는 자기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고교생 아마노를 만났고, 취재를 위해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한편, 나루미는 남편 신지가 축제에 갔다가 금붕어 하나를 가진 채 병원에 입원한 뒤, 신지가 이전 남편과 전혀 다른 무엇이라는걸 알아챘다.

사람들로부터 '개념'을 빼앗는 외계인인 아마노와 아키라가 만나서 지구 정복을 계획하고, 이를 막기 위해 사쿠라이는 나루미, 신지와 함께 도망친다. 신지는 나루미로부터 '사랑'이라는 개념을 빼앗게 되는데...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SF 소설로 별다른 정보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입부는 정말 대박입니다. 정확하게는 할머니가 축제에서 낚은 금붕어를 집에서 '회'라고 하면서 산 채로 잡아 먹고, 그 다음날 아들 부부를 살해하고 자살하는 장면까지요. 굉장히 짧은 분량 속에서 공포심과 흥미를 모두 불러 일으킨 덕분입니다. 

중반부까지도 그런대로 재미있습니다. 이른바 '외계인'들이 선보이는 독특한 능력 덕입니다. 외계인들은 대화하는 상대방이 특정한 단어의 이미지를 머릿 속에 떠올리면, 그걸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빼앗긴 사람은 그게 뭔지를 잊어 버리게 되고요. '개념'을 수집한다는 목적을 위해서인데, 이를 통해서 여러가지 해프닝이 벌어지게 됩니다. 나루미의 동생 아스미로부터 신지가 '가족' 이라는 개념을 빼앗아 온 뒤, 아스미가 가족에 대해 모든걸 잊고 아빠를 변태로 생각해서 경찰에 신고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중반 이후 결말까지는 완전 별로였습니다. 외계인의 지구 침략 계획을 막기 위한 르포 기자 사쿠라이의 노력이 그려지는데, 하는건 외계인 아마노가 외계인 아카리를 만난 뒤 도망친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밖에 하는 일들 거의 모두가 즉흥적이라 치밀한 느낌은 전무합니다.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제대로 된 설명도 부족합니다. 신지를 다른 두 외계인과 못 만나도록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외계인들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설명되지 않는 것 처럼요. 

이야기의 다른 한 축인 나루미와 신지 이야기는 잔잔한 사랑 이야기일 뿐이라 지루합니다. 사랑 이야기가 나쁜건 아닙니다. 저도 아주 좋아하고요. 하지만 나루미에게서 '사랑' 이라는 개념을 빼앗은 신지가 새롭게 태어나서, 나루미를 위해 살아갈 결심을 하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 황당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잔혹한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 결말이 "사랑이 지구를 구한다"라니, 독서에 들인 시간이 아까울 정도입니다.

핵심 설정인 "개념 빼앗기"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앞서 아스미는 "가족" 이라는 개념을 빼앗긴 뒤, 가족을 아예 기억하지 못했지요. 의사는 아예 폐인이 되어 버렸고요. 하지만 신지에 대한 "사랑"을 빼앗긴 나루미는 멀쩡한 채로 신지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건 전개를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을 바꾼, 편의적 발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볼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결론적으로는 수준 이하였습니다. 차라리 "기생수"처럼 개념을 빼앗는 외계인들의 냉혹한 행각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전개가 더 나았을거에요. 선한 마음을 가진 신지와 개념 빼앗기에 골몰하는 아마노, 아키라의 행각을 대비시키면서요. "개념" 빼앗기는 "죠죠" 시리즈에 등장했던 스탠드 능력과 흡사한만큼, "죠죠", 혹은 "기억파단자"처럼 두뇌 배틀처럼 그렸어도 괜찮았을 것 같고요. "사랑"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메시지 전달이 핵심인 현재의 작품에는 전혀 맞지 않는 방향이었겠지만, 최소한 지금보다야 재미는 있었을 겁니다.

2017/09/14

누런개 - 조르주 심농 / 임호경 : 별점 2.5점

누런개 - 6점
조르주 심농 지음, 임호경 옮김/열린책들

브르타뉴의 항구 도시 콩카르노에서 지역 유지 모스타구엔이 총격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메그레 반장이 부하 루르와와 함께 수사를 위해 현장으로 향했지만, 모스타구엔의 절친이며 항상 라미랄 호텔에서 만나던 지인들인 장 세르비에르, 르포므레가 각각 실종되고 독살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또 다른 지인 닥터 미슈까지 구금된 상황에서, 메그레는 서서히 사건의 진상에 접근해 가는데....

'열린책들'의 메그레 시리즈 5편입니다. 메그레 시리즈 중에서도 대표작이지요. 과거 국내에서 여러 번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읽어봤었지만, 너무 옛날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던 차에 알라딘의 15일간 무료 대여 이벤트 기회를 통해 다운로드 받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역시나, 대표작은 대표작이네요. 메그레 시리즈의 모든 장점이 잘 드러나 있는 덕분입니다. 우선 당대 프랑스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아주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패하고 방종한 지역 유지들과 피해자인 엠마, 레옹 커플의 비참한 삶과 현실을 대비시키는 부분은 백미이고요. 사회의 모순, 가진 자들의 횡포를 비난한다는 점에서 시공을 초월한 사회파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아울러 사건 현장마다 나타나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자극하는 누런개를 둘러싼 긴장감도 잘 드러나고요.

또 인간 심리를 깊게 파고들어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메그레 반장의 능력도 유감없이 펼쳐질 뿐 아니라, 그동안 추리적으로는 별볼일 없었던 다른 메그레 시리즈와는 다르게 메그레 반장의 추리법인 '소거법'이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반장은 모스타구엔 사건, 라미랄 호텔 독살 미수 사건, 장 세르비에르 실종 사건, 르포므레 독살 사건에 대해 각각 범행이 가능한 인물을 설정하고, 여러가지 이유를 통한 소거법으로 결국 범인을 추리해내지요.

진범 닥터 미슈에게 단두대 행이 아니라는 것은 아쉽지만 나름의 응징이 가해지고, 불행했던 엠마 커플이 단란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결말도 마음에 듭니다.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결말이 대부분인 다른 메그레 시리즈와 사뭇 분위기가 다른데, 저는 이런 결말이 더 좋더라고요. 고생은 이미 할 만큼 한 엠마에게 더 이상 괴로운 일이 없었으면 했으니까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전개에 있어 작위적인 부분이 눈에 많이 띕니다. 초반부, 페르노에 다량의 스트리크닌이 함유된걸 닥터 미슈가 알아챈게 대표적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는 순전한 우연에 불과해서 정교한 맛은 부족합니다.
메그레 반장이 옥상에 숨어 엠마와 레옹 커플의 애정 행각을 엿보는 동안 총격 사건이 발생하여 레옹이 진범이 아님을 눈치챈다는 것 역시 완전한 우연입니다. 또한 이 때 레옹의 은신처를 알아낸 방법도 설명되지 않고, 결국 마지막 추리쇼에서 진상을 장황하게 이야기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는 등, 디테일한 부분에서 설득력이 부족한 것 역시 단점이고요.
이러한 점들 때문에 추리적으로 괜찮다고 해도 메그레 시리즈 기준이지 일반적인 추리소설 기준으로 보면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지금 읽기에 낡았다는 것도 분명하고요. 하지만 고전으로서, 또 유명 시리즈의 대표작으로서의 가치는 아직 유효합니다. 고전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09/04/27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 존 르카레 / 이종인 : 별점 3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 6점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열린책들

수십 년 전 모스크바는 영국 정보부 내에 자신들의 스파이를 심어 놓는다. 그리고 지금 그 스파이는 정보부 최고위직에 올라 있다. 모든 작전이 그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고, 중요한 정보망은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이다. 혐의자는 정보부장을 포함한 최고위 간부 네 명. 과연 그중 스파이는 누구인가? 은퇴한 정보부 요원 조지 스마일리는 어떤 동료도,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상황에서 혼자 힘으로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책 소개에서 인용)

존 르 카레의 냉전시대를 무대로 한 유명한 스파이 소설입니다. 썩 좋아하는 쟝르는 아니지만 이 책은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책 중 한권이기에 출간된지는 좀 오래되었지만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일단 좋은점 부터 이야기하자면 우선 유명세만큼이나 무시무시한 디테일은 확실히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조직의 구성과 각종 직책의 명칭에서 시작해서 실제 작전과 임무에 대한 설명은 소설이 아니라 르포를 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심지어는 저자가 "창조한" 용어가 나중에 실제 정보기관에서 쓰이는 일상용어가 되었다라는 이야기까지 있으니 거의 이쪽 용어를 확립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서커스", "두더쥐", "램프라이터", "베이비시터" 등이 있겠죠.
두번째로는 스파이 답지 않은 조지 스마일리라는 돋보이는 주인공 캐릭터를 들고싶네요. 대니 드 비토를 연상시키는 키가 작고 땅딸막한 외모에 액션하고는 거리가 먼 인물로 (TV 드라마에서는 알렉 기네스가 맡아 연기했다고 하는데 비쥬얼적으로는 미스 캐스팅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내에게마저 버림받은 비참한 존재, 한마디로 하찮은 동네 아저씨지만 그 정체는! 영국정보부에서도 나름 다섯손가락안에 꼽히는 거물 스파이라는 것! 모종의 이유로 은퇴한 이후에도 정부의 부름을 받고 홀로 엄청난 작전을 수행한다는 설정은 상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이웃집 아저씨가 연쇄살인범이라는 이야기와 왠지 비슷한 맥락이랄까요. 돌아온 제5전선 (미션 임파서블) 간지도 좀 나고 말이죠. 배우는 비록 대니 드 비토나 정현돈이겠지만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그다지 와 닿지도 않는 이야기라 개인적으로 몰입해서 읽기는 좀 힘들었습니다. 냉전이 끝난 것도 10년도 훨씬 더 전이니 당연하겠죠. 장점이기도 한 디테일한 묘사 역시 대단한 수준을 넘어서서 너무 장황했다 느껴졌고요. 물론 이러한 묘사에서 후대에 인정받는 문학적 성취가 있었겠지만 지나치게 길 뿐더러 불필요한 심리묘사 등이 너무 많았습니다... 또한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이중 간첩의 정체를 밝혀내는 이야기가 정교하거나 세련된 복선도 없고 추리적 요소 역시 전무한 상태로 단지 주인공 스마일리의 여러가지 조사와 심문, 그리고 자백에 가까운 녹취에 의해 밝혀진다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했기에 나름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제가 기대한 것과 너무 달라서 실망스러웠어요. 약간의 추리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굉장히 미미한 수준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기에는 역부족이었고요.

한마디로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는 크게 흥미롭지도 않은 작전을 무려 500여 페이지로 기록해 놓았을 뿐으로, 저자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처럼 스파이 작전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을 대변하는 묵직한 주제의식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나마도 없어서 저에게는 실망이 조금 더 컸던, 알고있던 명성에는 값하지 못한 작품이었습니다. 스마일리와 동료들의 권력과 돈 앞의 쇠락한 모습이 현실적인 부분을 대변하기는 하겠지만 역시나 상식선에서 그치는 뻔한 묘사였으니까요. 아무래도 저는 스파이 소설하고는 잘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다시 드는군요. 스파이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바이블적인 작품임에는 분명하나, 확실히 지금 읽기에는 확실히 너무 낡아버린 주제와 낡아버린 이야기인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ps : 전 제목이 주인공들의 직업이라 생각했었는데 읽고보니 일종의 암호-코드명이더군요. 요거 하나는 참 신선하고 재미있었습니다.^^

2008/12/03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 하라 료 / 권일영 : 별점 4점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 8점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사립탐정 사와자키는 1억엔, 그리고 그만한 양의 각성제를 가지고 도주한 전 파트너 와타나베 때문에 야쿠자와 경찰 양쪽 모두에게서 괴롭힘을 당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남자가 찾아와 르포라이터 사에키라는 인물에 대해 문의를 했다. 그 뒤 사에키의 아내가 실종된 사에키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하였다. 알고보니 사에키는 도신 그룹 가문의 사위였다. 
곧바로 조사에 착수한 사와자키는 사에키가 작성하고 있던 기사를 보고, 그가 도쿄 도지사 저격 사건에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자신을 찾아왔던 정체불명의 남자가 저격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라는 것을 밝혀내는데...

하라 료사와자키 탐정 시리즈 첫 작품으로 기다린 보람이 있던지 드디어 출간되었군요. 생일선물로 형에게 늦게나마 전달받아 이틀만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소설입니다. 비록 일본 작가가 일본을 무대로 쓴 일본인 탐정의 이야기이지만, 탐정의 캐릭터와 소설의 전개 모두 미국의 정통파에 못지 않은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전에 읽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인 "내가 죽인 소녀" 때와 감상이 좀 비슷한데 장점이 그만큼 똑같을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폐차직전의 똥차 블루버드, 필터없는 담배로 대표되는 사와자키의 캐릭터는 여전히 매력적이며, 굉장히 스케일이 큰 사건이 연달아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현실감을 느끼게 해 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예를 들자면 탐정의 조사가 대부분 탐문, 주변인물 조사 같은 형태로만 이루어진다는 거라던가, 탐정 자신이 커버하는 일에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 등이 있겠죠.
마지막 순간에 터트리는 진상에 대한 설명도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솔직히 추리적으로 완벽하게 앞뒤가 딱 들어맞는다던가, 증거가 완벽하게 준비된다는 것은 없이 사와자키의 말로만 설명된다는 약점은 있지만 이러한 탐정의 말빨에 의한 추리쇼도 하드보일드 소설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니 만큼 비난하기는 어렵겠죠. 어쨌건 충분히 설득력도 있고 재미도 있는 결말이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2004년 대만 천수이볜 총통 저격 사건과 유사점도 느껴졌기에 더욱 재미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하드보일드 소설의 단점도 그대로 지니고 있어서 약간 아쉬운데, 일단 모든 사건이 "우연"이 겹쳐져 계속 순차적으로 일어나고, 해결되어 나간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사에키나 그의 아내 사에코나 의문의 사나이 가이후 등등 모든 인물이 사와자키에게 연락을 하게 되는 것도 우연. 사와자키 사무실에 침입한 인물의 차 넘버를 알게되는 것도 우연. 애시당초 기억상실증에 걸린 인물이라는 설정이 굉장히 작위적인 우연이니 뭐 할말이 더 있겠습니까... 본토박이 하드보일드의 자취가 너무 곳곳에 있어서 일본작품이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 것 역시 장점보다는 아무래도 단점쪽에 더 가깝겠죠. 그 외에도 이건 책 자체의 문제인데 오타가 몇개 있는 것도 약간 몰입을 저해했습니다. 마지막 부분의 "회장이 행복해서 (원래 문맥상은 회복해서)" 는 정말 코미디였어요.

그래도 단점보다는 앞서 설명했듯 장점이 더욱 많고 재미도 있기에, 또한 하드보일드의 완벽한 적자 사와자키라는 캐릭터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하드보일드를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적극 추천할만한 완성도 높은 작품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서야 소개되는 것이 사실 의아한 작품이기도 한데 좀 잘 팔려서 국내에서도 이런 좋은 작품을 보다 자주 만나보게 된다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개인적인 별점은 4점입니다. 5점 만점을 주기에는 단점이 약간 있긴 합니다..^^ 4점도 높은 점수니까....

2025/01/17

도쿄의 가장 밑바닥 - 겐콘 이치호이 / 김소운 : 별점 2.5점

도쿄의 가장 밑바닥 - 6점
겐콘 이치호이 지음, 김소운 옮김/글항아리

1893년, 저자 겐콘 이치호이(본명: 마쓰바라 이와고로)가 빈민가로 알려진 시타야 만넨정, 요쓰야 사메가하시, 시바 신아미정 등 3대 빈민굴을 직접 찾아 하층민들의 생활을 관찰하고, 이를 생생하게 글로 옮긴 논픽션입니다. 일본 근대 르포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하네요.

특징이라면 단순히 빈곤의 현상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빈민들의 식생활, 일상적인 노동, 그리고 지역 경제의 구조적 문제까지 구체적이며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는 점입니다. '차부'(인력거꾼)에 대한 상세한 설명처럼요. 그들의 영업과 업무 행태, 하루 벌이, 주요 먹거리, 생활상과 나이 들었을 때의 비참한 모습까지, 뭐 하나 빠짐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독자는 그들의 생존 방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드리운 가난의 무게를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대 초기를 이해하는 데에도 참고가 되리라 생각되고요. "경성탐정록"의 "운수 좋은 날"을 쓰기 전에 읽었더라면 좋았을 뻔 했네요.

차부 외에도 고물상, 경매 시장, 일용직과 도급 인부들, 아침장과 야시장 등 다양한 하층민 직업에 대한 설명 및 하층민들의 생계 방식이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잔반을 모아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잔반야'의 존재와 그들이 판매하는 잔반들에 대한 묘사는 당시의 생존 환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음식들 설명도 많은데, '후카가와 메시'가 차부들을 대표하는 식사 중 하나로 바다 비린내가 심해서 먹기 힘들다는게 새롭더군요. 지금은 지역 먹거리로 유명한 음식이니까요. 조리법의 문제였을까요? 원래는 꿀꿀이죽과 다를게 없었던 우리나라의 '부대찌개'의 유래와 현재 위치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또한, 지금 시점에 읽어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도 돋보입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망하면 3년을 못 간다는 '좌식산공'에 대한 언급,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자들의 무자비한 행태, 가증스러운 도급업자들에 대한 서술은 지금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막걸리는 1홉(0.18리터)에 2센이며 잘 마시는 사람은 한 번에 5동이에서 7동이를 해치운다. 그중에는 옷가지를 잡히고 홧술로 10동이 이상 기울이는 사람도 있다."는 설명은 더 말할 것도 없을테고요.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특성 모두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으며, 당시 일본 사회에 대해 잘 모른다면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당시 사회의 모순과 빈민들의 고단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책입니다. 인간의 생존 본능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3/02/12

불과 해류 - 마쓰모토 세이초 / 이하윤 : 별점 2.5점

불과 해류 - 6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하윤 옮김/해문출판사

표제작을 포함하여 총 4편의 중단편이 실려있는 단편집입니다. 마츠모토 세이초의 단편집은 이미 미야베 미유키가 엮은 대작 단편집으로 정점을 찍었다 생각했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얼마 전 읽은 "미스터리의 계보"가 괜찮아서 집어들게 되었네요.

표제작인 "불과 해류"는 다이몬지로 유명한 교토와 이즈 7도를 연결하는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합니다. 기발한 트릭은 아니지만 쿠마시로 - 아즈마 형사 컴비의 철저한 수사를 통해 철벽의 알리바이가 서서히 벗겨지는 묘미는 일품입니다. 교토의 다이몬지, 미나즈루 곶, 미야케지마 등 다양한 곳에서 수사가 진행되는 덕분에,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주는 것도 좋았고요.

그러나 알리바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건 밝혀냈으나, 결국 결정적 증거는 잡지 못하고 진상은 범인 시바무라의 자살과 유서를 통해 증명된다는 결말은 개운치 못했습니다. 철벽의 알리바이를 만들다 보니 생긴 문제라는 점에서 "점과 선"이 떠오릅니다. 결말마저도 비슷하니까요. 작품의 수준을 떠나, 알리바이를 파헤치고 결말에 이르는 과정의 깔끔함은 모리무라 세이이치 쪽이 한 수 위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증언의 숲"은 르포 느낌이 나는 건조한 전개의 작품으로 경찰이 조작한 증거로 형을 살게 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추리적으로 눈여겨볼 부분은 없고 2차대전 종전 전을 무대로, 당시 경찰의 무식한 수사와 조작이 눈에 띈 정도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종족동맹"은 무식한 촌부의 국선변호를 하면서 무죄평결을 이끌어내지만, 이후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는 변호사의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알리바이 + 순간이동 트릭이 핵심인데, 진상이 밝혀지면서 개미지옥보다 더한 수렁에 빠져드는 주인공의 심리가 드러나는 결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읽으면서 찌릿찌릿할 정도였어요.
렌페이의 순간이동을 증명할 만한 공정한 묘사가 없고, 펜던트에 대해서는 주인공의 의견이 더 설득력이 높다는 점 등의 단점은 있지만 평균 이상은 충분히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산"은 다른 단편집에서 접했던 작품으로 상세한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결론적으로 평균 별점은 2.5점 정도? 아주 뛰어나지 않으나 거장의 편린은 느낄 수 있는 단편집이었어요. "종족동맹" 한 편만으로도 값어치는 충분히 하니까요. 그러나 마츠모토 세이초를 아직 접하지 못하셨다면, 이 책보다는 미야베 미유키가 엮은 단편집부터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4/09/20

레드 스퀘어 - 마틴 크루즈 스미스 : 별점 3.5점

레드 스퀘어 - 8점
마틴 크루즈 스미스/영림카디널

러시아의 형사부장 아르카디 렌코는 검사와 상층부가 관련된 밀수 사건을 파헤치다가 숙청당해 시베리아 어선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던 중 러시아의 개혁, 개방 분위기와 함께 복직된다. 그리고 맡게 된 암시장 환전상 루디 로젠을 감시하는 임무 수행 중 루디가 눈 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경찰청 장군 페니야긴, 렌코의 부하 야크마저 살해되자 렌코는 사건에서 밀려나게 된다.
루디에게 발송된 "레드 스퀘어는 어디 있나요?"라는 수수께끼의 Fax 메시지가 독일에서 발송되었다는 점, 그리고 루디의 사업 파트너로 알려진 독일인 보리스 벤츠를 찾기 위해 뮌헨으로 날아간 아르카디 렌코는 옛 연인 이리나를 다시 만나게 되고 이리나를 통해 사업가 막스 알보프를 만난 뒤, 그는 이 모든 사건이 러시아 미술품을 밀반출 하려는 거대한 음모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되는데...

주의! 하기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틴 크루즈 스미스의 러시아 형사 아르카디 렌코 시리즈 3번째 작품. 1작인 "고리키 파크"와 2작 "북극성" 모두 재미있게 읽었기에 큰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1작에서 검사가 관련된 사건을 다루며 결국 권력 상층의 밀수 사건을 적발해 내는 아르카디 렌코, 그는 원래 촉망받는 형사 반장으로 2차대전의 전쟁영웅 렌코 장군의 아들이라는 설정이죠. 허나 1작 사건 해결 후에는 사건의 핵심 인물이자 연인인 이리나의 미국 망명을 조건으로 혼자 소련에 남습니다. 당연히 숙청당해 시베리아 원양 어선 "북극성"호에서 일하게 되죠. 북극성호에서 발생한 여자 승무원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여 미국 어선과 얽힌 음모를 밝혀낸다는 것이 2작 "북극성"입니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는 북극성 사건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다시 형사반장으로 복귀한 이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네요.

냉전이 한창이던, 그래서 "철의 장막"에 둘러 쌓여 있던 소련을 배경으로 한 1, 2작과는 확실히 다른 것은 해빙 무드가 본격적으로 무르익던 고르바쵸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러시아, 체첸 마피아들의 음모에 많은 거물급 인물들이 얽혀있다는 식으로 전작들보다 이야기의 스케일은 훨씬 큽니다. 그러나 커진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핵심 이야기는 깔끔하게 전개되는 편이라 전작들보다도 오히려 읽기는 쉬웠으며, 첩보 스릴러물 비슷하게 여러 단체들의 암투와 그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하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주인공의 활약이 흥미진진하게 묘사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번역이 가장 최신인 만큼 가장 잘 되었다라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또한 가장 중요한 단서 중 하나인 "레드 스퀘어"라는 단어와 러시아 마피아의 관계에 대한 초, 중반부 수수께끼가 풀리는 반전이 굉장히 좋습니다. 유명한 장소인 "붉은 광장"이 아니라 러시아 현대 미술의 대작가 말레비치의 전설적인, 절대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는 반전인데, 이 반전을 통해 전반부의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과 사건, 그리고 복선이 연결고리를 찾게 되는 이야기 구성이 상당히 매끄럽기 때문이에요. 결과적으로 악역이 파멸하는 해피엔딩이라는 것도 제 취향이었고요.
무엇보다도 역사의 큰 흐름이었던 "페레스트로이카" 당시를 배경으로 하여 러시아의 사회 실상을 치밀한 사전 연구 및 조사를 통해 르포 형식으로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실제 그 흐름에 휩쓸린 아르카디 렌코를 비롯한 주인공들이 격동의 역사 속 현장에서 살아 숨쉬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묘사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예를 들자면 고르바쵸프의 개방 정책에 불만을 품은 군부의 쿠데타라는 실재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는 와중에 마피아 보스 보리스 벤츠와 알보프를 상대로 마지막 승부를 펼치는 식이죠.
아주 약간의 문제라면 보리스 벤츠가 보리야 구벤코였다는 반전아닌 반전이 책 옆날개의 캐릭터 소개로 밝혀진다는 것 정도에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 최근의 흐름이기도 한 역사와 추리를 섞은 작품들이 대부분 공상과 허구에 기반하는데 반해, 이 작품은 실제 시대 분위기를 잘 전해주는 실감나는 묘사로 현실감을 극대화하는 매력이 넘칩니다. 말레비치의 실제 생애와 역사를 절묘하게 조합하면서도 러시아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디테일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작가의 사전 조사와 구성력이 놀라울 뿐입니다. 더군다나 작가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에서 한번 더 놀라게 되네요.
전 3편에 달하는 마틴 크루즈 스미스의 이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읽기 편했고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아마존을 뒤져봤더니 다른 시리즈도 있는 듯 하던데요, 냉소적이면서도 너무나 인간적인 아르카디 렌코의 팬인 만큼 후속 시리즈도 빨리 번역되길 소망합니다.

덧 : 말레비치에 대하여 - 카사미르 말레비치는 키예프 출신의 러시아 화가로 몬드리안과 칸딘스키와 더불어 추상예술의 개척자이다. 처음에는 후기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으니 나중에 M.F.라리오노프 및 러이사 전위파 시인들과 친교를 맺고, 쉬프레타티즘을 주창하였다. 1911년에는 ‘다디아의 책’이라는 그룹에 참가하여 러이아의 입체파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2년 파리 여행후 레제풍의 기하학적 추상화를 발표하고 급속히 자기 방법을 발전히켜 12년 <흰 바탕에 검은 네모꼴>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어 원.십자가.삼각형을 추가하고, 그러한 기본형태에 의한 추상예술을 이론화하여 절대주의라 이름 짓고 15년 V.V 마야코프스키와 함꼐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형명직후 교수직에 임명되기도 했으니, 미술정책의 반동적 전환으로 상페테르부르크에서 자유를 잃은채 지냈다. 26년에 독일로 이주해 절대주의 선언을 상세히 설명한 <비구상의 세계>를 바우하우스를 통해 간행했다.

2004/04/14

얼굴에 흩날리는 비 - 기리노 나쓰오 : 별점 3.5점

顔に降りかかる雨 (文庫) - 8점
기리노 나쓰오/講談社

무라노 미오는 어느날 낯선 남자들의 습격을 받는다. 그들은 4,500만엔이라는 조직의 거금을 가지고 사라진 미오의 친구 우사가와 요오꼬의 행방을 쫓는 조직의 하청업자이자 요오꼬의 애인인 나루세와 조직원들이었다. 미오는 요오꼬의 마지막 전화상대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주일 시한으로 나루세와 같이 요오꼬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요오꼬의 사무실과 집, 자주 찾던 점술가까지 조사하는 미오는 요오꼬의 숨겨졌던 진실을 점차 밝혀낸다. 그러는 와중에 자기를 협박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나루세와 서로 호감을 느끼게 되며 그에게 자신의 상처받은 과거의 치유를 원하게 된다.
결국 미오는 르포라이터인 요오꼬의 마지막 작품에서 요오꼬가 독일에서 목격한 신나찌 그룹 살인사건과 실종 사건의 연관성을 눈치채고 최후의 순간에 진범을 알아내게 되는데...

제 39회 에도가와 란포상 최우수 수상작. 
독특하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제목부터 인상적인 작품으로, 여성 작가다운 섬세한 심리 표현과 디테일한 묘사가 일품이었습니다. 시간 제한 내 특정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 - 남성 컴비를 주인공으로 한 추리 스릴러는 상당히 많은 편이죠. 그러나 이 작품은 앞서 말씀드린 표현과 묘사들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고 읽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캐릭터도 독특합니다. 가정 불화 끝에 남편이 자살한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미오는 어쩐지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남자주인공 나루세가 상당히 괜찮아서 충분히 커버가 되네요. 약간 안티 히어로적인 느낌이 많이 나는 것이 전형적인 일본 소설 주인공과 비슷하긴 한데 확실히 뭔가 특출난 맛이 있거든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기복이 심한 편입니다. 독일 신나찌 그룹 살인사건과 실종사건을 엮는 과정은 억지스럽고, 요오꼬의 과거를 추적해서 밝혀내는 사생활들은 사건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오히려 너무 오버해서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에요. 몇몇 캐릭터의 설정 및 등장에 있어서도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이 존재하며, 결정적으로 마지막에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부분의 전개가 정말로! 별로여서 아쉽습니다. 기껏 추적 잘 하다가 단 한번의 목격으로 모든 사건을 마무리 짓다니… (물론 이 목격의 전 단계에서 추적에 의해 얻은 단서가 실마리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요)

이런 점을 본다면 이야기 자체가 정통 추리물보다는 스릴러 영화에 가까워 보입니다. 기본 캐릭터도 괜찮고 이야기 중간 중간의 스릴과 흡입력은 상당한데 추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2% 부족하달까요. 보다 추리적인 부분에 신경을 썼으면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군요.

뭐 그래도 기본적인 재미는 충분하고 디테일한 여러 묘사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란포상 최근 수상작들 중 “테러리스트의 파라솔”에는 대 실망했고 “희고 긴 복도”도 트릭이 불만스러웠는데 간만에 괜찮은 작품을 읽을 수 있었네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일본 여성 작가 중 미야베 미유키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것 같은데, 최근작인 “아웃”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2010/09/10

얼굴에 흩날리는 비 - 기리노 나쓰오 / 권일영 : 별점 4점

얼굴에 흩날리는 비 - 8점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얼굴에 흩날리는 비 - 기리노 나쓰오

무라노 미로는 어느날 낯선 남자들의 습격과도 같은 방문을 받는다. 그들은 미로의 친구인 르포라이터 작가 우사가와 요코의 행방을 쫓는 조직의 하청업자이자 요코의 애인 나루세와 조직원 기미지마였다. 요코는 1억엔이라는 조직의 거금을 가지고 사라진 상태였다. 미로는 요코의 마지막 전화상대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주일안에 그녀의 행방을 찾아 돈을 가지고 와야 한다는 협박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나루세와 같이 요오꼬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한 미로는 요코의 사무실과 집, 자주 찾던 점술가까지 조사해 나갔고, 그러던 중에 자신을 협박하고 감시하기 위해 동행하는 나루세에게 호감을 느껴 그에게 자신의 상처받은 과거의 치유를 원하게 되었다.
결국 미로는 요코의 마지막 작품을 통해 사건의 진상과 이 사건의 연관성을 눈치채게 되며 최후의 순간에 진범을 알아내는데....

6년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제 39회 에도가와 란포상 최우수 수상작이기도 한 작품이죠. 당시에는 절판된 책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는데 새로운 번역의 완역본으로 다시 출간되어 미스터리 애호가로서 굉장히 기뻤습니다. 푸대접받던 친구가 금의환향한 느낌이거든요.

남-녀 커플의 시한부 설정 하드보일드 스릴러로 6년전에 읽었을 때도 언급했었지만, 상당히 흔한 설정이기는 합니다. 헐리우드 영화에는 널리고 널린 소재죠. (헐리우드 작품으로는 영화 D.O.A를 강추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보통 남자쪽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나루세보다는 무라노 미로가 주인공이라 보다 여성적인 시각으로 전개되며, 이러한 시각을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묘사로 돋보이게 만든다는 점, 아울러 말랑말랑한 러브라인없는 하드보일드다운 묵직하고 건조한 전개로 다른 작품들과 차이를 보입니다.
하드보일드 추리물 자체로도 높은 수준이라는 것 역시 매력적인 부분이에요. 탐정의 딸이기는 하나, 평범한 백수에 불과한 미로의 수사와 추리 과정은 현실적이라 설득력이 높고, 곳곳에 장치된 복선과 단서들을 통해서 복잡한 사건의 구조를 잘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의 반전으로 이끄는 과정도 데뷰작으로 보기 힘들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고요. 이러한 단서들이 무라노 미로의 섬세한 시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들 - 장신구나 의상, 욕실에서의 흔적 등 - 이라는 것도 작품의 분위기와 잘 맞아 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완역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6년전 작품과는 완전 다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훨씬 길기도 하지만 추리 소설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멋진 제목에 어울리는, 깊이 있는 묘사를 즐길 수 있을뿐 아니라 6년전에 읽었을 때 조금 어색했던 미로에 대한 설정과 오버스러웠던 독일 신나치 그룹이 얽힌 사건 역시 완역본으로 읽으니 비어있던 퍼즐이 채워지듯 딱 들어맞는 느낌이었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마지막 단 한번의 목격으로 진범을 알아낸다는 억지스러웠던 전개 역시, 완역본에서는 충분히 설명됩니다.

물론 범인이 어차피 해외 도피를 꿈꾸고 있었는데 구태여 살인을 저지를 필요가 있었는지?라는 의문과 1억엔이라는 돈이 여러가지 일을 벌이기에 매력적인 금액이 아니라는 약점은 있습니다. 그래도 데뷰작 답지 않은 완성도의 작품으로 기리노 나쓰오 작품 중에서도 자신있게 추천할만한, 대중성과 문학성을 모두 갖춘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주인공 이름이 6년전에는 무라노 미오였는데 무라노 미로로 바뀐 점, 사라진 돈이 6년전의 4,500만엔에서 1억엔으로 인상되어 있는 등의 세세한 수정사항을 더듬어보는 것도 절판본을 읽어본 독자만의 보너스겠죠. 별점은 4점입니다.

정식 완역본이 너무 늦게 소개된 것이 아쉽기만 한데, 굉장히 독특하고 매력적이었던 무라노 미로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물의 다른 작품들도 이제부터라도 정식으로 소개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7/06/02

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 - 마에카와 유타카 / 이선희 : 별점 2.5점

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 - 6점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창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85년 여름, 한 남자가 여섯 여자와 집단 자살을 했다. 남자는 과거 도쿄대 조교수 출신의 기우라 겐조로 자살 전 무려 10명을 살해한 혐의로 쫓기고 있었다. 사건 당시 정보 누설이 알려져 자살한 이가라시 형사의 조카인 '나'는 이 사건을 추적하는 논픽션을 쓸 것을 결심하고, 여러가지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사건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재구성해 나가는데...

마에카와 유타카의 2015년 작품입니다. 30년 전 벌어진 연쇄 살인, 집단 자살 사건을 현대의 르포 작가가 뒤쫓아 그 진상을 밝혀낸다는 내용으로, 과거 시점의 이야기와 현재 시점의 인터뷰가 교차되어 전개되는 구성입니다.

그런데 작가의 전작 "크리피"와의 유사성이 눈에 많이 뜨입니다. 가장 큰 유사점은 주위 사람들을 일종의 세뇌 상태로 만들어 범죄에 끌어들이거나 피해자로 만든다는 기우라 겐조의 독특한 능력입니다. "크리피"의 "위장 살인마" 야지마의 능력 - 한 가족에 침입하여 가장 행세를 하며 가족들을 한 명씩 차례로 죽이는 - 과 아주 흡사해요. 핵심이 공포, 협박, 좁은 (갇힌) 공간이라는 3가지 요소를 갖춘 마인드 콘트롤이라는 점도 같고요. 

그러나 "크리피" 이후 발표된 덕인지, 마인드 콘트롤을 보다 상세하게 묘사하여 설득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기우라가 여관 하기노야를 손에 넣기 위해 하기노야의 주인 세이지 일가족을 극한으로 몰아가다가 한 명씩 살해하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적나라하면서도 세밀한 묘사를 통해 굉장한 흡입력과 설득력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흡입력, 설득력은 실존했던 일본의 '스미다 미요코 사건'의 배역을 살짝 바꾸어 묘사한 덕으로 보이기도 하네요. 한 가족을 대상으로 이간질 후 범행에 끌어들여(고이치) 제일 약한 사람부터(세이지) 한 명 씩 죽게 만든다는 전개는 스미다 미요코 사건과 같으니까요.

추리적인 디테일도 나쁘지 않습니다. 히라가나로 쓰여진 고발 편지와 초밥에 비소를 넣은 사람이 우타라는게 밝혀지는 부분처럼요. 정보가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고, 진범이 누구인지도 중요하지 않지만 나름 의표를 찌르는 맛은 있었습니다.
80년대가 무대인 작품답게 마지막을 야쿠시마루 히로코의 노래 "세일러복과 기관총"이 장식하는 것도 이채로왔고요.

하지만 "크리피"와 단점 역시 비슷합니다.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설명이 부족해요. 특히 기우라가 왜 이렇게 잔혹한, 무려 10명이나 살해하는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설명하지 않는 탓이 큽니다. 이성과 잔혹함, 정신병의 경계에 있다는 캐릭터 설정만으로 때울 수 없어요.
게다가 작중 묘사에 따르면 2가구 6명을 포함한 10명을 살해하면서 하기노야를 손에 넣지만, 정작 현금 수익은 세이지 가족의 적금 1,500만엔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래서야 수지가 전혀 맞지 않지요. 그 돈도 범행 계획에는 들어있지 않은 공돈이나 마찬가지고요. 물론 하기노야는 권리증이 없더라도 시간만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현금화는 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어요. 3천만엔을 빌려준 것 만큼은 명확한 사실이니 고이치를 사장으로 앉히는 것 만으로도 여관을 손에 넣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테니까요. 게다가 생각해보면 이렇게까지 여관을 손에 넣을 이유도 사실 없습니다. 단지 매춘업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면 이미 성공하기도 했고요.
마지막 자살 여행에서 여자들에게 현금을 나눠주는 묘사를 보면 대충 1억엔 이상은 현금으로 뿌립니다. 이 정도로 성공한 인물이 왜 이런 범행을 저지른 걸까요? 마지막 묘사 탓에 이유는 더욱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또 작가의 이상한 묘사로 캐릭터가 모호해져 버린 것도 문제입니다. 이지적인 모습이 보였다, 카리스마가 있는 리더일 뿐 손을 더럽히는 모습은 없었다는 식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마지막 집단 자살 묘사는 그 중에서도 최악이죠. 너무 꿈처럼 그려졌을 뿐더러 지나칠 정도로 신사적이라 모호한 상황을 더욱 극단적으로 만듭니다.
또 그가 누나와 근친상간을 통해 우타를 낳았다는건 이러한 극단적인 범행과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아내가 누나와 굉장히 닮았으며, 아내가 누나와의 관계를 눈치채어 살해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완전히 사족에 불과했어요.
이렇게 모호하게 그릴 것이라면 차라리 '돈'이 목적이고 타고난 악인이었다고 설명하는 쪽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한가운데 직구를 넣었다면 깔끔하게 처리했을텐데 괜히 변화구, 변화구를 고집하다가 주자를 쌓아 놓고 한방 크게 얻어맞는 느낌이에요. "주자가 켜켜이 쌓인 9회말"이랄까... 좋은 공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아쉽네요.

그리고 기껏 손해를 보아가면서까지 도쿄대 출신임을 밀어 붙였다면 이렇게 무식한 야쿠자 스타일 협잡보다는 더 그럴듯한 무언가를 보여주었어야 했는데, 세이지 일가를 옭아매는 과정은 전형적인 감금, 협박과 다르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범행의 여러 과정에 걸쳐 허술한 관리로 수많은 위기를 만나게 되는 것을 보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즉흥적으로, 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묻지마 범죄와 다를게 없어 보일 정도에요. 중간에 수사 나온 형사를 설득하여 돌려보내는 장면 정도는 그럴싸하지만 기대에 값하는 수준은 아닙니다.

또한 범행 과정의 적나라한 묘사를 통한 생생함은 발군이나 들여다보면 구멍이 많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유키가 정상적인 사고를 거두고 매춘까지 끌려나가게 되는 과정처럼요. 제대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부로가 급작스럽게 유키와 가까와진다는 것도 작위적이고요. 하기사 유키를 죽이지 않는 것 부터가 뾰족한 이유가 없네요. 상식적이라면 진작에, 아무리 늦어도 고이치 살해 시점에는 정리했을 것입니다. 더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하기노야를 손에 넣는 중후반부까지의 압도적인 묘사는 충분히 흥미롭습니다만 설득력이 부족한 설정 탓에 감점합니다. "크리피"보다는 낫지만 단점은 여전히 동일한데, 작가의 다음 작품을 읽어봐야 할지 살짝 고민되는군요.

덧붙이자면, 범행의 규모나 희생자 수를 본다면 현실의 '스미다 미요코 사건'이 더 큰 사건이니 그냥 '스미다 미요코 사건'의 논픽션을 쓰는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2014/07/17

외천루 - 이시구로 마사카즈 : 별점 3점

외천루 - 6점
이시구로 마사카즈 지음/미우(대원씨아이)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로 유명한 이시구로 마사카즈의 SF 추리 연작 단편집입니다. '외천루'라는, 증축과 개축을 반복해 미로와 같이 변해버린 독특한 공간을 무대로 와니누마 남매를 중심으로 한 아홉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록작 장르가 다양한데 추리적으로도 눈여겨볼 부분이 있고, 기대했던 개그와 패러디 센스도 괜찮으며,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무거운 내용의 SF까지 즐길 수 있는 흔치 않은 단편집입니다.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가격이 조금 세지만 그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추리나 장르문학 애호가 분들께 강력 추천드립니다.

간략한 수록작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 1화 - 리사이클

와니누마 아리오와 친구들이 외천루 쓰레기장에서 에로 만화잡지 묶음을 구했지만, 구한 책은 상태가 제각각이었다. 

에로 만화잡지 쓰레기 더미의 진상은 무엇인지? 라는 내용의 일상계 추리물로, 도입부로 적절한 소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 2화 - 우주형사 vs. 디텍트

우주형사와 비밀결사 데몬나이츠의 전투 현장에서 르포라이터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경찰은 그녀가 전투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가던 우주탐정 디텍트가 계획된 살인이라는 걸 밝혀낸다. 

독특하고 기발한 설정에 정통 본격 추리가 잘 결합된 수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제 3화 - 죄책감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도록 로봇을 만들었는데 죄책감 회로가 동작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SF입니다. 워낙 짧아 평가할 부분이 많지도 않고, 그리 신선한 내용은 아니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제 4화 - 나태관의 살인

외천루 밀실에서 시체로 발견된 귀차니스트 샐러리맨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는 슬랩스틱 개그 밀실 추리물입니다. 열혈 여형사 사쿠라바 사에코의 다양한 추리와 그것을 몸으로 도와주는 선배 야마가미의 활약이 재미의 포인트이지요. 피해자가 귀차니스트라는 점을 살린 아이디어도 돋보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 5화 - 페어리 살인사건
인공생명학의 권위자 키쿠치 도게 박사가 주차장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그가 쓴 다이잉 메시지로 누가 범인인지 추리하는 개그 추리물입니다. 개그에 더 많이 치중한 느낌이지만, 메시지를 해독해 깔끔하게 마무리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제 6화 - 용의자 M의 변신
공장 습격으로 6대의 로봇을 파손한 모로하 켄의 이야기입니다. 페어리가 무엇인지, 인간형 로봇이 무엇인지와 그것이 사람을 어떻게 타락시키는지를 짤막하게 다룹니다. 추리적으로 눈여겨볼 부분은 없고 전체 연작에서 설정을 설명해 주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제 7화 - 와니누마 일족

제 8화 - 키리에

최종화 - 아리오

외천루 와니누마의 집에서 로봇공학의 권위자 세리자와 박사가 시체로 발견되는데...

와니누마 남매에 얽힌 비밀과 키쿠치 박사, 세리자와 박사 살인사건의 동기가 밝혀지며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연작.

아리오의 누나 키리에가 "페어리"에서 파생된 인공생명체였고, 누나가 아니라 세리자와에게 강제로 범해져 아리오를 낳은 어머니였다는 진상이 밝혀집니다. 

인공생명체가 수태를 한다는 설정은 신선하지 않지만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전개하는 솜씨가 일품입니다. 무엇보다도 살인사건이 벌어지지만 기본적으로는 개그가 바탕이 되었던 6화까지의 내용에서, 갑자기 심각한 정통 SF 추리 스릴러를 기대 이상의 완성도로 펼치는 점에서 놀랐습니다. 이시구로 마사카즈라는 작가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수작 에피소드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0/11/27

골든 슬럼버 - 이사카 고타로 / 김소영 : 별점 2.5점

골든 슬럼버 - 6점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웅진지식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택배 기사로 일하다가 아이돌 린카를 구해줘 유명세를 탔던 아오야기 마사하루는 오랫만에 대학 친구 모리타를 만났다. 그러나 모리타가 준 음료수를 먹고 잠들어 버린 뒤, 모리타는 도망치라며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총리 암살과 관련된 거대한 음모의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다는 말이었다. 반은 억지로 도주를 택한 아오야기는 경찰에 쫓기며, 총리 암살범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썼다는걸 알게 되는데....

이사카 고타로가 쓴 서스펜스 스릴러로 작가의 대표작입니다. 2009년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1위 등 차지했으며, 여러 상을 수상했던 이력이 있지요.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영화화되기도 했었고요. 그동안 두께 탓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지만, "남은 날은 전부 휴가"가 재미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일반인이 거대 조직에 의해 누명을 쓰고 도주하는, 이른바 "도망자" 장르물에 속하는데 전형적인 이쪽 장르 작품들과는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스케일입니다. 무려 일본 총리를 암살했다는 누명이니 아내를 살해했다는건 비교할 수도 없지요. 누명을 씌우려는 조작도 증거를 조작하는 수준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매스컴을 활용하는 수준입니다. 작 중에서는 '이미지' 구축이라고 언급되는, 아오야기가 범죄 성향이 있었다는걸 조작해서 드러내는 이 매스컴 활용 과정이 특히 재미난데 우선 아오야기에게 치한 누명을 씌운 뒤 도주하게 만드는 걸로 시작합니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 증언이 이어지고요. 그리고 아오야기가 저지르지도 않았던 패밀리 레스토랑 난동을 조작하고, 음험해 보이는 사진을 골라 매스컴에 공개하는 등으로 범죄자 이미지를 덧 씌웁니다. 이는 과거 영웅 이미지에 대한 반동으로 더 큰 충격을 불러 일으키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만듭니다.
총리 암살 누명을 씌우기 위한 공작도 여성에게 호감을 가진 척 연기를 시켜 RC 헬리콥터를 구입하게 만드는 등 디테일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과정에 대한 세밀한 묘사 덕분에 설득력도 높고요.

두 번째 차이점은 진범을 잡거나, 흑막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흑막은 경찰보다도 위에 있는 거대 조직임이 암시될 뿐입니다. 결말도 아오야기가 겨우 도주하고, 성형 수술을 해서 모습을 감추는게 전부에요. 허무하고 시시하지만, 오히려 현실적인 결말이기는 합니다. 경찰까지 좌지우지하는 세력 앞에서 누명을 쓰고 도주하는 평범한 일반인이 할 수 있는건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차이점만 있는건 아닙니다.이 쪽 장르물의 재미 요소, 장점은 빠짐없이 갖추고 있습니다.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도주하는 과정 묘사부터 빼어납니다. 단지 도망만 다니는게 아니라, 아오야기가 겪었던 경험들, 아오야기가 맺었던 여러가지 관계가 도주를 돕는걸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요하게 등장하는건 대학 시절 친구, 연인과의 경험과 추억입니다. 친구 모리타에게 배웠던 '밭다리 후리기'를 작중 내내 잘 활용하며, 대학 시절 알았던 버려진 차를 도주에 활용하고 있거든요. 과거 아르바이트 했던 도도로키 연화의 도움을 받아 불꽃놀이를 터트려 도주에 성공한다는 클라이막스도 마찬가지고요. 아오야기가 택배 기사로 일했던 시절 익혔던 정보를 이용한 도주극도 꽤나 실감나게 그려집니다.
인간관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택배 회사 선배 '록' 이와사키 에이치로, 예전에 도와주었던 아이돌 린카 및 옛 연인 하루코 등이 적절하게 등장해서, 적절한 도움을 주거든요. 

여러가지 디테일들도 돋보입니다. 하루코가 아오야기는 범인이 아님을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아오야기는 밥풀을 남기는 나쁜 버릇이 있었는데, 아오야기가 범행 전 먹었다는 돈가스 집 주인이 TV에 나와서 "밥풀 하나 안 남기고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니까!" 라고 말하는걸 보는 장면이지요.
그 외에도 비틀즈의 'Help'를 부르는 노숙자를 도와준 뒤, 그 노숙자가 나중에 아오야기에게 도움을 주는 등 디테일은 아주 좋았습니다. 

대학 시절 추억과 여러가지 경험들, 아오야기의 인간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사건에 휘말려 도주하는 과정과 엮어 교차시키는 구성도 일품입니다. 등장인물과 시점을 달리하는 복잡한 교차 전개에 능한 작가 특징이 잘 살아있거든요. 제목처럼 '골든 슬럼버'라는 곡을 돌아갈 수 없는 청춘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하는 묘사들도 인상적이었어요.

결국 성형 수술로 도주에 성공한 아오야기에게 하루코가 딸을 통해 "참 잘했어요" 라는 최고급 칭찬을 남기는 장면, 부모님에게 비난같은 안부 편지를 보내는 장면도 마음에 드네요. 승리는 하지 못했어도 최소한 살아남기는 했으니까요. 맞아요. 죽어 천국보다는 살아 지옥이 낫습니다. 일단 살고 봐야죠. 나중에는 신분 세탁에 성공해 르포라이터가 되는 듯 하니 다행입니다. 두 장면 모두 앞서 설명된 복선이 적절하게 사용되는 등 디테일도 여전했고요.

그러나 뒤로 가면 갈 수록 지루해진다는 단점은 어쩔 수가 없군요. 앞서 말씀드렸듯 스케일이 큰 탓에 아오야기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오야기가 이 모든게 누명이며 조작되었다는걸 증명할 증거도 없고요. 그냥 도주만 이어나갈 뿐입니다.

도주 역시 초, 중반부까지 아오야기 혼자 이어나갈 때와 비교하면, 연쇄 살인마 미우라가 도와주기 시작하면서부터 영 이상해집니다. 우선 연쇄 살인마가 아오야기를 도와줄 이유가 도무지 설명되지 않아요. 단지 경찰, 공권력이 싫었다 치더라도, 도쿄로 이송되던 아오야기를 차로 들이받아 탈출시킬 정도로 도와줄 이유는 없잖아요? 본인도 생명과 체포당할 각오를 해야 벌일 수 있는 행동인데 말이지요. 미우라를 통해 자기 모습으로 성형 수술한 가짜가 있다는걸 알게 되고, 그 의사에게 성형 수술을 받게 된다는 결말도 편의적이고 작위적이었어요. 한 마디로 위기에 처할 때 마다 '미우라' 카드를 내미는 식인데, 정도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다른 도주 과정도 뒤로 가면 갈 수록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대학 부지 어딘가에 있는 버려진 차의 존재가 대표적이지요. 거의 10여년 버려졌던 차가 배터리 교체만으로 움직일 거라는건 솔직히 말이 안됩니다. 이럴 거라면 택배 기사 시절 자동차 정비를 어느정도 배워서, 그 기술로 차를 움직이게 만들었다고 하는게 더 나았을거에요. 

경찰도 딱히 하는게 없어서 도주 과정의 긴박감이 잘 살아나지 못합니다. 시민의 편이 아니라 흑막의 편임을 강조하는 무자비한 체포 과정 묘사만 두드러질 뿐이에요. 아오야기가 미우라 도움으로 대포폰을 확보하고, 폐차로 이동하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경찰이 추적하지 못한다는 것도 좀 어이가 없었고요. 앞서 뭔가 두뇌파인 듯 등장했던 경찰 과장 사사키가 실상 하는게 없는 탓도 큽니다. 시큐리티 포드를 이용한 정보 수집도 거창한 소개에 비하면 정작 하는건 별로 없고요.

그리고 아오야기가 보이는 행동들도 많이 답답했습니다. 미우라가 말한대로 자기 모습으로 성형 수술한 가짜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건 말이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해결책으로 생각한게 방송을 통해 직접 이야기를 하는 정도라는건 순진함이 도가 지나쳐요. 물론, 앞서 이야기했듯 흑막이 너무 거대해서 일개 개인이 할 수 있는건 별로 없긴 합니다만, 그의 말을 누가 믿어줄걸로 생각한다는게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더라고요. 무슨 말을 해 봤자 '이미지'를 덧씌워 가공하는건 일도 아닐 뿐더러, 무엇보다도 아오야기에게는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경찰이 말한대로, 범인이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뻔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론내지라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도주극, 스릴러로서 기본 재미는 보장하는 작품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아서 감점합니다, 제가 읽은 작품들 중에서도 작가의 최고작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네요. 그래도 엔터테인먼트로는 아주 우수한 만큼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