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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6

밀랍 인형 (Wax Work) - 피터 러브시 : 별점 4점

밀랍인형 - 8점
피터 러브제이 지음/뉴라이프스타일

왕립 식물원이 있는 고급 주택가 큐 스트리트의 고급 사진 스튜디오에서 청산가리로 사진사 하워드 클로우머의 조수 퍼시벌이 살해당한다. 경찰은 조사 끝에 그가 사진사의 아내 미리엄을 협박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녀를 기소한다. 미리엄은 스스로, 협박당한 끝에 피해자가 즐겨 마시던 와인 카테터 안에 사진관에서 이용하던 청산가리를 주입하여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자술서를 제출하고 법원은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며칠 안 남은 어느날, 형사부장 크리브에게 이 사건에 대한 엄중 조사 명령이 하달된다. 사실은 독약을 꺼낼 수 있는 금고의 열쇠는 피해자 퍼시벌과 남편만이 가지고 있었고 미리엄은 이 열쇠를 손댈 수 없었다라는 의외의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기 때문이며 크리브는 사명감을 가지고 사력을 다해 사건 수사에 나선다.
결국 크리브는 과거에 비슷한 형태의 자살-독살 사건이 미리엄의 주변에 있었던 사실과 남편의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음을 밝혀내는데 성공하지만 남편이 종적을 감춰버리고 크리브는 법으로 엄중히 금지되어 있는 사형수 미리엄과의 면회를 통해 진상을 밝힐것을 결심한다....

아래 감상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형사"와 "가짜경감 듀"로 접해 보았던 영국작가 피터 러브시의 작품. 원래 작가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도 있지만 이 작품에 대한 다른 여러분들의 호평을 인터넷 상에서 익히 접해왔기 때문에 헌책방에서 눈에 띄었을때 주저없이 구입하였습니다.

고전 황금 시대인 19세기 후반의 영국이 무대인데 이 작가 작품의 시대는 3편의 장편 모두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손에 잡힐 듯한 시대 묘사를 선보이는 것이 정말 대단합니다. 현대가 무대인 "마지막 형사"야 그렇다 치더라고 20세기 초엽의 "가짜경감 듀"나 이 작품 모두 창문 밖 거리를 보고 쓴 듯한 현실감 넘치는 묘사가 압권이거든요.
특히나 이 19세기 후반의 영국이라는 무대는 "적당히 수사와 재판 등의 조직이 살아 있으면서도 무언가 2% 부족한 듯한"  고전 추리소설적인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대라 생각됩니다. (작가가 그것을 의도하고 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작품 속 탐정역의 크리브 형사 부장은 시리즈 캐릭터라고 하는데 다른 작품은 접해보지 않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상사에게 치여살며 만년 형사부장에 머물러 있는 궁상맞은 현실적인 모습과 함께 자존심도 있고 행동력, 추리력이 탁월한 능력있는 탐정의 모습도 잘 보여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홈즈를 의식하진 않았겠지만 익히 알려져 있듯 무능한 인물만 있었던 것이 아닌, 당시 경찰에도 인물이 있었다는 설정은 (출세는 못하지만)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보여지네요. 뭐 레스트레이드도 우직하고 성실하다는 점에서는 능력있는 인물이겠지만요.

하지만 이 크리브 형사 부장보다 이 작품을 빛내는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미리엄이라는 영국 스타일 "팜므파탈"이죠.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은 굳은 마음과 치밀함을 가지고 시종일관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주니까요. 비록 마지막 장면에서 결정적 실수를 범하며 무너지긴 하지만 주로 "몸"으로 승부하는 경향이 짙은 미국식 팜므파탈에 비교해서 상류계급의 귀부인이라는 사고방식, 엄숙하고도 단정하면서도 곧은 행동거지로 무장하고 약점과 눈물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치밀하고 독사같은 면모를 갖춘 독특한 악녀의 모습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뽐냅니다.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움 역시 갖추고 있고요.

이러한 매력적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도 역시 스토리텔러로서의 피터 러브시의 진가를 잘 보여줍니다. 크리브 형사부장이 서서히 사건을 파헤치며 드러나는 과거의 또 다른 자살 사건, 그리고 과거 사건과의 이해할 수 없는 연관성에서 비롯된 추론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승부! 결국 마지막에 "일사부재리 원칙"이라는 결정적 법 조항을 바탕으로 밝혀지는 진범의 정체와 반전은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독자를 서서히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서 나중에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준비하는 그 솜씨는 그야말로 대가의 솜씨에요. 제목 그대로 사형집행인과 타소 밀랍인형관의 이야기를 교차시켜서 보다 긴장감을 자아내며 당시 시대상을 느끼게 해 주는 연출 역시 발군이고요.

하지만 정통파에 가까운 추리소설답게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가장 큰 의문 "도대체 그 여자는 어떻게 자물쇠를 열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을 마지막 승부에서 크리브 형사부장이 이끌어내는 부분에서 약간 치밀함이 부족하여 (물론 이 사건에서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는 나름대로의 전제조건이 있어서 좀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너무 해답 자체가 급작스럽게 돌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그래도 중편정도의 부담없는 길이에 상당한 수준의 트릭과 지적 흥분, 재미를 가져다 주는 책입니다. 별점은 4점. 추리소설사에 길이 남을만한 매력적인 팜므파탈이 등장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PS : 그나저나 "마지막 형사"와 "가짜경감 듀"는 물론 엄청나게 재미있게 읽은 책이지만 좀 길었다고 느껴졌었는데 이 책은 깔끔하네요. 아무래도 이 정도 길이가 저한테는 딱 맞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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