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샘터사 |
이 작품은 저명한 초상화가 피암보가 샤르부크 부인이라는 부유한 여성의 초상화를 그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피암보에게 한 의뢰의 핵심은 '자신을 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듣고' 자기를 그려달라는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의뢰. 그러나 거액의 보수와 더불어 예술적인 활력을 새로이 얻고자 했던 피암보는 승락하죠.
그리고 피암보는 그녀를 방문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이미지를 구체화하기 시작합니다. '결정학자'라 불리우는 예언자의 딸로 어렸을 때 쌍둥이 눈의 결정을 소유하게 된 뒤 예언능력을 보유하게 되고, 신통한 '무녀'로 알려져 큰 돈을 벌게되었지만 샤르부크라는 남자를 만나 결혼한 이후 그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와 함께 실제로 피암보 주위에는 창작을 방해하는 괴인물이 등장하고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연쇄살인극이 동시에 벌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줄거리만 대충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일종의 판타지, 환상소설입니다. 그러나 샤르부크 부인의 정체를 더듬어 가는 과정과 정체불명의 샤르부크씨, 그리고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게 만드는 괴사건의 진상 등 추리적인 요소도 어느정도 갖추고 있습니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감수성 넘치는 샤르부크 부인의 이야기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연상되기도 하고 샤르부크 부인의 이야기가 작품의 주 내용이라는 점에서 근대의 아라비안나이트같은 느낌도 드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작품이죠.
그런데 글을 정말이지 너무 잘써서 깜짝 놀랐습니다. 시적인 표현을 과하게 사용하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전개하는 솜씨가 대단하더군요. 또 작중의 환상적인 이야기가 실재 현실과 겹쳐지게 만드는 팩션적인 구성 - 예를 들어 실존 화가 앨버트 라이더와 그의 그림 <경마장>, 존 워터하우스의 <사이렌> 을 작품에 등장시키는 등 - 도 돋보이고요.
무엇보다도 내용 자체가 재미있어서 한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이 강합니다. 발상자체가 재미있잖아요? 얼굴을 보지 않고 초상화를 그리게 만드는 수수께끼의 여인!
샤르부크 부인의 캐릭터 역시 인상적입니다. 독특한 설정에서 오는 힘도 크지만 창조력을 갉아먹는 팜므파탈의 이미지는 다른 작품에서 보기 힘든 부분이거든요. 그만큼 야릇한 성적 느낌과 남자를 잡아먹는 요부로서의 존재감이 탁월합니다. 작중 '메두사'로 비유되는 것이 외려 이미지를 제한한다고 여겨질 정도로 말이죠.
그리고 종교적인 의미를 많이 담고 있는 것도 작품의 분위기를 고급스럽게 끌어올리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피암보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구체화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통해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과정으로 일종의 종교행위를 표방하고 있거든요. 그 외에도 일찌기 신에게 도전했다가 타락한 - 초상화를 실패한 - 타락천사 셴즈라는 인물이라던가 피암보가 겪는 '의미가 있는 우연의 일치' 도 의미가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등 죵교와 관련된 상징들이 작품안에 가득합니다. 마지막에 피암보가 초상화를 완성하는 곳이 교회라는 것은 이러한 상징의 화룡점정이고요.
그러나 피눈물을 흘리며 사람을 주게 만드는 고대 카르타고의 독약과 한없는 악한 스토커 샤르부크씨의 존재, 허무하면서도 너무 쉽게 간듯한 결말은 조금 아쉽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밝혀지는 샤르부크씨의 정체에 대한 반전과 결국 피암보가 신을 그려내는데 성공했다는 기적같은 결말은 환상과 현실을 잘 조화시키던 작품의 분위기를 단번에 허상으로 몰고가서 맥이 빠질 정도였어요. 9회말 2아웃까지 퍼펙트로 투구하다가 마지막 타자에게 홈런맞은 기분과 비슷하달까요? 차라리 샤르부크씨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피암보의 그림도 환상으로 남았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래도 정말 잘 쓴,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죠. 별점은 3.5점입니다. 독특한 장르문학에 빠져들고 싶은 분들께, 고급스러운 환상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