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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2

맨 온 파이어 (2026) - 카일 킬렌 : 별점 2점

전직 특수요원 존 크리시는 멕시코에서 벌어진 참혹한 작전 실패로 동료들을 모두 잃은 뒤 제대했고, 그 충격으로 심각한 PTSD에 시달리고 있었다. 삶의 의지를 잃고 자살까지 기도했던 그의 재기를 위해, 옛 동료 레이번은 브라질에서 운영 중인 자신의 보안 사업에 크리시를 합류시켰다.

하지만 크리시가 브라질에 도착한 직후, 대규모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레이번의 가족을 포함해 300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레이번의 딸 포만이 우연히 외출 중이었던 덕분에 살아남았다. 문제는 포가 테러범의 얼굴을 목격했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범인들은 증인을 없애기 위해 포를 노렸고, 그녀를 향한 공격이 잇따라 일어났다.

크리시는 포를 지키고 레이번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거부했고, 홀로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며 포를 위협하는 자들과 정면으로 맞서는데...

A. J. 퀸넬의 소설 '크리시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시리즈입니다. 원작 1편, 2편을 참조했다고 하네요. 넷플릭스로 감상하였습니다.

우선 주인공 크리시의 비주얼은 꽤 마음에 듭니다. 소설 속 크리시를 영상으로 옮기면 딱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거칠고 무거우며, 어딘가 망가진 듯한 분위기가 잘 살아 있습니다. 단순히 멋있는 전직 요원이 아니라 오래된 상처와 피로를 몸에 달고 사는 인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외형만 놓고 보면 영화 버젼의 덴젤 워싱턴보다는 더 설득력이 느껴집니다. 

또 하나의 장점은 크리시를 단순한 힘 캐릭터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 속 크리시는 상황을 읽고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지능적인 인물에 가깝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카세트테이프에 약간의 물질을 묻힌 뒤, 그것을 생화학 공격으로 오인하게 만들어 습격의 기회를 만드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설득력도 높으며, 이런 식의 해결 방식은 다른 콘텐츠에서 흔히 보지 못했던 것이라 아주 신선했어요.

하지만 이 장점은 단점과 연결됩니다. 크리시가 지능적인 인물로 활약하는 것은 좋지만, 그 대신 기대했던 액션은 많이 아쉬운 탓입니다. "퍼니셔"같은 원맨아미식 활약을 기대했는데 영 만족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의 액션도 크리시가 PTSD를 심하게 겪고 있다는 설정 때문에 중요한 순간마다 무너지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줘서 답답합니다.

크리시가 상처 입은 인물이라는 설정 자체가 나쁜건 아니에요. 문제는 이 설정이 액션 장르의 재미를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는 겁니다. 복수극이라면 분노가 터져나오며 악당들을 쓸어버리는 통쾌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끝까지 그런 맛은 부족합니다.

이야기도 많이 진부합니다. 브라질 대통령이 흑막이라는 전개는 초반부터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전의 맛은 많이 약합니다. 그렇다고 중간 과정이 치밀하지도 못하고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궁지에 몰렸는데, '태픈이라면 자기가 죽었을 때 진상이 폭로되도록 안배했을거다. 그러니까 태픈만 죽이면 된다!'는 급전개는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에요. 이런 이야기라면 태픈이 바이크 운전자이자 적의 편이라는걸 알아챈 뒤 바로 결말로 달리는 식으로 짧게 압축했어야 합니다. 전체 분량 중 절반 이상은 덜어내도 이야기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거에요.

긴장감을 만들기 위한 장면들도 작위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포가 숨어 있던 빈민촌에서 악당의 하수인이 도주하다가 우연히 포를 마주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연에 기대어 위기를 만드는 장면이 반복되니 긴장감이 생기기보다는 짜증이 먼저 납니다. 더구나 이런 장면들은 대부분 포의 답답한 행동을 부각하는 쪽으로 이어집니다. 보호받아야 할 인물인데도 호감이 쌓이기보다 사건을 더 꼬이게 만드는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크리시의 외형과 몇몇 아이디어는 괜찮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입니다. 특히 원작이나 기존 영화판에서 기대했던 처절한 복수극, 압도적인 응징, 크리시 특유의 무서운 존재감을 생각하면 실망이 더 큽니다. 크리시라는 이름을 가져왔지만, 정작 보고 나면 전혀 다른 작품을 본 느낌입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그럭저럭이지만, 크리시 팬에게는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2022/04/24

퍼펙트 맨 - A.J. 킨넬 : 별점 1점

 

퍼펙트 맨 - 2점
A.J.킨넬/다모아

스코틀랜드의 도시 로커빌 상공을 날던 팬암 103 여객기가 폭발하여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테러범이 장치한 폭탄 때문이었다. 이 사고로 아내 나디아와 네 살 딸을 잃은 크리시는 같은 사고로 아내를 잃은 미국의 억만장자 상원의원 그레인저의 도움으로 복수에 나섰다. 그러나 테러를 저질렀던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의 아흐메드 지브릴도 크리시와 그레인저의 존재를 알아챘다. 지브릴은 그들을 없애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고, 이 과정에서 크리시는 새롭게 사랑하게 된 여인마저 잃고 마는데...

크리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예전에 읽었었는데 우연찮게 중고 도서로 다시 구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다보니, 최근의 이세계 전생물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크리시가 현재 사회와는 이질적인, 다른 세계에서 돌아온 절대무적 전투 기계로 악을 응징하는 세계관 속 정의(?)를 집행한다는 점에서요. 혼자가 아니라 다양한 동료들의 도움을 얻어서 목적을 달성한다는건 일종의 파티를 이루어 퀘스트를 달성하는 전형적인 RPG 전개이기도 하지요. 온갖 미녀들과 엮여서 하렘을 이룬다는 설정도 이세계 전생물에서 흔히 보아오던 것이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런 전형적인 전개조차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합니다. 시리즈 인기가 이해가 안될 정도로 말이지요. 도가 지나친 크리시의 전지전능함은 이 시리즈의 핵심 요소이니 그렇다 쳐도, 전개와는 관련없는 흥미 본위의 설정과 억지가 가득한 탓입니다. 대표적인게 크리시가 급작스럽게 파트너가 필요하다면서 후계자 마이켈을 키워내고, 마이켈을 양자로 삼기 위해 배우 레오니와 위장 결혼한다는 설정입니다. 이 둘은 크리시의 복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이야기 전개에서 필요한 부분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분량을 늘리기 위한 설정 추가에 불과해요. 마이켈을 인간 흉기로 만드는 과정이라도 상세하게 묘사되었더라면 조금 나았겠지만, 이 역시 '훈련으로 성장했다' 정도의 설명에 그치고요. 구르카병 람바하두르 라이의 저격병 실습은 비교적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지만, 그냥 '참을성 기르기'에 불과해서 그리 와 닿지 않았어요. 또 그게 어떤 수업이던간에, 17살 고아가 고작 1년여 배웠다고 인간 흉기 크리시와 동급의 능력자가 된다는건 말이 안되지요. 하기사 애초에 크리시가 마이켈을 후계자로 점찍은 이유조차 불분명하니, 뭐 이런 설명이 부족한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레오니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 역시 부실하기 짝이 없었으며, 여자는 모두 남자를 위한 들러리처럼 보이는 마초적인 설정도 보기 껄끄러웠고요.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모두 들어내고, 크리시가 그레인저와 힘을 합쳐 지브릴을 없애려는 과정과 지브릴의 저항만 그려내는게 훨씬 깔끔하고 읽기 좋았을겁니다. 기 - 승 - 전 -결 구조로만 보아도 기 (여객기 폭파) - 승 (복수를 다짐한 크리시와 그레인저의 의기투합) - 전 (지브릴의 저항) - 결 (크리시의 복수 성공) 으로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니까요. 게다가 잡다한 크리시의 주변 설정 묘사가 많은 탓에, 지브릴을 저격하는 마지막 작전은 허무할 정도로 짧게 마무리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냥 돈을 들여서 지브릴의 근거지에 잠입한 뒤, 저격 후 도주한다는게 전부거든요. 크리시가 한 일이라곤 잠입 및 은신처, 무기를 수급하는 사람에게 의뢰했을 뿐입니다. "자칼의 날" 처럼 철두철미한 작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레인저 상원의원 납치 계획을 저지하는 크리시 동료들의 활약이 훨씬 볼만했었습니다. 그나마도 쉽게 끝날 작전이 마이켈의 부상으로 어려움에 빠진다는건 도대체 앞서 마이켈을 키운 이유가 무엇인지?를 되묻게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장면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실망스러웠던 전형적인 펄프 픽션입니다. 국내에 다시 출간될 일도 없겠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전에 왜 좋은 평가를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네요.

2005/05/19

크리시 시리즈 (1,2,4,5) - A.J 퀸넬 / 이종인 : 평균 별점 2.5점

크리시 1 - 6점
A. J. 퀸넬 지음, 이종인 옮김/시공사
크리시 2 - 6점
A. J. 퀸넬 지음, 이종인 옮김/시공사
크리시 4 - 6점
A. J. 퀸넬 지음, 이종인 옮김/시공사
크리시 5 - 6점
A. J. 퀸넬 지음, 이종인 옮김/시공사

얼마전 개봉되었던 덴젤 워싱턴 주연작 "Man On Fire"의 원작소설 시리즈입니다. 17세에 해병대를 입대하였지만 상관 폭행죄로 2년 뒤 불명예제대한 후 베트남전에서 시작해서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를 망라하는 전대륙의 전장을 용병으로 누빈 전쟁의 프로 크리시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지요. 총 시리즈 5권 중 3권은 없어서 1,2,4,5권만 차례로 읽었는데, 1권은 영화화된 "불타는 사나이", 2권은 "죽음을 부르는 사나이", 4권은 "저주받은 욕망", 5권은 "지옥에서 온 사나이" 라는 제목입니다.
1권은 보디가드로 일하던 크리시가 보호하던 소녀가 유괴당해 죽자 그녀를 유괴한 마피아를 단신으로 일망타진한다는 이야기, 2권은 1권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와 딸이 비행기 테러로 죽자 테러리스트의 두목을 자신이 키운 양아들 수제자와 함께 처단하는 이야기, 4권은 아프리카 코뿔소 밀렵조직과 홍콩 트라이어드 최대 방파를 일거에 박살내는 이야기, 5권은 크메르루주의 한 단체와 그 두목을 작살내는 이야기입니다.

작품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소규모의 전쟁에 퍼니셔를 연상케하는 슈퍼 히어로(?)가 활약한다는 내용이에요. 미국판 무협지라고나 할까요? 약간 바꿔 설정한다면 "주인공 구리시(求理屍)는 과거 소림사의 제자로 입문했지만 쫓겨난 뒤 여러 작은 방파를 돌며 무공을 익혀 스스로 일가를 이룬 고수로 속한 방파의 명에 따라 중원에 피바람을 불러온 고수. 하지만 무림에서 떠난 뒤 권태감과 상실감에 시달리며 음주로 나날을 보내던 중 한 표국의 딸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후, 그 꾸냥과 서로 애틋한 감정을 나누며 서서히 재기하게되나 꾸냥이 녹림의 무리에게 납치당해 능욕 후 죽음을 당하고 그도 사경을 헤메는 중상을 입게 된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그는 복수를 결심하고 한 사찰에서 은거하며 상처를 치료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 무림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던 녹림방에 단신으로 도전하여 그들을 전멸시키는데..... "(이상 1편 줄거리)인 셈입니다. 시리즈 모두가 이런 식이고요. 전쟁의 프로 크리시의 적은 무조건 죽음, 적이 속한 단체는 박살!이고 크리시의 친구들은 의리와 우정으로 움직이는 프로들로 구성된 용병집단. 여자들은 크리시의 매력에 빠지거나 적이거나 아니면 돌봐줘야 하는 인물들로만 묘사되는, 그야말로 강한 남자들만이 살아 숨쉬는 마쵸이즘으로 가득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영화화 된 것도 당연하다 생각될 정도에요. 그야말로 상투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내용이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비현실적인 부분을 덮어 줄 수 있을만큼 용병이라는 설정에 기반한 여러 무기나 전투에 대한 묘사가 디테일하면서도 현실적이라는건 큰 장점입니다. 작가가 실제 군경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에요. 또한 작전을 위한 여러 방면에서의 무기 조달, 공격 방법, 군자금(?)입수 및 처리 등에 대한 묘사 역시 굉장합니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핵심이 되는 복수를 위한 "작전"들에 대한 부분은 정말 손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더군요. 말없는 전투기계 원맨아미 크리시를 비롯해 그의 여러 동료들에 대한 자세한 설정도 마음에 들어서 다른 가족들은 다 죽어도 이 친구들만은 살아남기를 독자 입장에서 바랠 정도였습니다. 모든 책 마지막 부분에 군사평론가 양욱씨의 "무기도감"이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이것도 몇페이지 안되지만 꽤 볼만했고요. 

허나 마쵸이즘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는 지나친 폭력성과 성적인 묘사는 부담스러웠어요. 1편은 보호하던 소녀가 강간당해 죽고 2편에서는 아내와 딸, 새로 얻은 아내가 죽고 4편에서는 수제자로 키운 양아들이 죽고 애인이 강간당하는 등 복수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잔인한 죽음과 성적 폭력이 난무하거든요. 특히 1편의 소녀와 4편의 중국 여성은 정말 불쌍하다 생각될 정도로 리얼한 묘사를 보여줘서 더욱 그러합니다(영화판에서는 소녀의 죽음을 원작과는 다르게 했더군요. 전형적 헐리우드 스타일로 바꿔 놓았더라고요.).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늘어나는 성적 묘사는 지하철에서 펼쳐놓고 읽기에는 창피할 정도로 장황합니다. 제일 황당한 묘사는 "비단으로 만든 굴(?)"이라는 부분입니다...

그래도 최소한 "재미" 측면에서는 합격점을 줄 수 있는 시리즈입니다. 구태여 평하자면 1편과 4편은 추리적으로 약간의 연결고리를 가진 요소들과 복선이 존재해서 보다 복잡한 구성의 재미를 가져다 주고 2편과 5편은 "전투"와 "작전"측면이 더 재미있는 작품이었어요. 킬링타임용으로는 꽤 괜찮은 선택이라 생각되기에 별점은 평균해서 2.5점입니다. 하지만... 여성분들에게는 절대로 비추천이니 참고하세요.

2006/06/07

유성검 - 용대운 : 별점 1.5점

천하제일살수인 조무상은 병약하며 불치병을 앓고 있는 동생을 완치시키기 위해 위험성이 높은 고액의 청부살인을 업으로 삼아 왔다. 그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무림 제일인인 만승무적극 소대진의 암살을 청부받아 성공하게 되는데 그 일로 구중천과 소대진의 일가에게 그와 동료들은 거의 모두 생명을 잃고 조무상만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된다. 특히 병약한 동생 조유향까지 잔인하게 살해된 것에 분개한 조무상은 유일한 친구 임표의 처가가 있는 해남도라는 오지에서 몸을 치료하고 절세의 무공을 얻어 복수를 시작하게 된다...

드디어 읽게 된 "유성검" 입니다. 일찌기 "크리시" 시리즈에서 모티브를 따 와서 쓰여진 무협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었고 그때부터 쭉 읽고 싶었는데 최근 저만의 무협지 읽기 바람에 편승해 독파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크리시 시리즈 (1편) 하고 비교한다면 어린 소녀가 잔인하게 살해된 것에 대한 전문 살수(?)의 복수극이라는 기본 모티브는 똑같고 내용면에서는 주인공이 몸을 치료하기 위해 외딴 오지에 숨어서 그곳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의 묘사가 거의 동일하더군요. 원작이 기본적으로 "재미"는 주는 만큼 여기까지의 과정은 무협지로 번안되었다 하더라도 상당히 흥미진진했습니다. 크리시 시리즈 처럼 "작전 (여기서는 암살)"에 대한 치밀함이 굉장히 돋보였고요.
하지만 주인공이 강호에 다시 출두한 다음부터의 이야기가 좀 애매합니다. 실제 복수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에 대한 처절한 복수극까지는 괜찮은데 이후에 별 상관없는 구중천이라는 곳으로 잠입하여 활동하는 이야기는 실제 복수와는 거의 무관할 뿐더러 마지막에 갑자기 원군이 몰려오는 등 현실성 없는 설정이 난무해서 많이 실망스러웠습니다. 크리시가 마피아를 제거하기 위해 마피아에 잠입하여 중간보스 자리에까지 올라간다는 이야기가 말이나 됩니까?  무엇보다도 크리시는 복수에 대한 명분이 있고 소녀의 죽음에 대한 복선이 있지만 이 작품에서의 조무상은 누군가에게 일가족이 난도질당해도 뭐라 할 말 없는 전문 살수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에 이후의 복수극도 설득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고요. 차라리 치밀한 암살극을 더 디테일하게 꾸며 밀고 나가는 것이 재미나 작품성 측면에서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게다가 용대운 특유의 수많은 고수의 등장과 무의미한 비무에 대한 묘사가 너무 많아서 읽기가 짜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후반부에 억지로 등장하는 일종의 비무대회는 정말 좌절 수준이었었어요... 마지막의 어설픈 해피엔딩 역시 도대체 이해 불가였고요.

한마디로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편입니다. 그냥 원전 그대로 스토리를 이어가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점은 전에 읽은 "탈명검"과도 같습니다. 제가 간략하게 구상했던 이야기가 더 충실하게 원작을 구현할 수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솔직히 이 작품에서 건질만한 부분은 소대진의 암살을 계획해서 실행하는 과정까지일 뿐 뒷부분, 꼭 집어 이야기한다면 구중천 잠입 이후의 이야기는 완전히 사족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0/08/30

독원숭이 - 오사와 아리마사 / 이성 : 별점 2점

독원숭이 - 4점
오사와 아리마사/이성

대만 특수부대 '수귀자' 출신 킬러 독원숭이는 자기 애인을 죽게 만든 암흑가 보스 예웨이를 죽이기 위해 일본으로 잠입한다. 수귀자 출신 대만경찰 곽영민도 그를 쫓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고, 우연찮게 곽영민과 엮이게 된 사메지마는 곽영민에게 진한 동지애를 느끼며 독원숭이 추적에 동참한다.

<신주쿠 상어>를 읽고 탄력받아서 연달아 읽어버린 시리즈 두번째 작품입니다. 예전에 구해놓고 까먹고 있던 절판본으로 읽었죠. 사실은 오래전에 만화책으로 한번 읽은 기억도 나긴 합니다만...
그런데 솔직히 영 실망스럽네요. 이 작품은 정말 추리고 뭐고 없는 단순한 액션물로 "크리시첫번째 작품을 크리시가 아닌, 크리시를 쫓는 경찰 구도로 변주한 것에 지나지 않는 탓입니다.

대만 출신 폭력배에 대한 이야기는 "불야성"에서 엄청나게 자세하게 다룬 내용이라 새롭지도 않았고(아울러 <불야성> 쪽은 제대로 작품에 설정을 녹여냈었죠), 크리시처럼 복수의 과정이 디테일하지도 않습니다. 원래부터 강했던 킬러 '독원숭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무기와 기술을 이용하여 약해빠진 야쿠자를 도륙할 뿐이니까요. 액션 이외의 흥미를 느낄 여지는 그야말로 전무합니다. 
사메지마의 수사 역시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이라고는 '머리를 골절시킨 둔기의 정체' 와 독원숭이의 파트너를 찾기위한 실력 행사 정도밖에는 없습니다.

화끈한 마초 액션물로는 괜찮은 수준이고, 책장을 넘기는 재미는 있지만 이러한 문제들로 인하여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 작품을 추리 소설로 분류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05/08/12

동서(東西)미스터리 베스트 100

일본 추리작가협회가 1,315인의 앙케이트로 뽑은 동서 미스터리 베스트 100입니다. 요새 통 책 읽을 시간이 없어 이런 글로 땜빵하게 되네요.
일본편과 해외편, 즉 동-서 리스트가 따로 있는데 해외편만 옮겨 보았습니다. 국내 출간된 작품은 파란색으로 표시했는데, 대충 봐도 2/3은 번역되어 나온 듯 하군요. 최근에 동서 추리 문고가 복간된 탓에 고전이 많이 소개된 탓이 크지만 어쨌건 반가운 일입니다. 절판된 책도 포함시켰기 때문에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책도 있기는 하지만요.

하여튼 이 리스트에 실린 작품들은 제가 읽어본 바로는 대체로 수긍할 만한 걸작들이 대부분이라 읽지 못한 작품이 있다면 차분히 손 대 보아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너무 고전이라 지금 읽기에 낡고 지루한 작품도 있지만 다 나름의 맛이 있는 것이니까요. 국내 출간작은 볼드체, 읽은건 적색 볼드체입니다. 제 블로그에 리뷰가 있는 작품들은 링크를 걸어 두었고요. 내용이 궁금하시면 링크를 통해 참고하셔도 좋겠습니다.
원문에 가시면 일본 편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출처는 역시 "Mystery Best"입니다. 원문은 여기서 확인하세요.

그나저나... 1위가 "Y의 비극" 이네요. 2위는 "환상의 여인" 이고.... 약간 의외이긴 합니다. 하지만 제일 의외는 역시 5위의 "독수리는 날개치며 내리다". 제가 보기에는 "추리" 소설은 아니라는 생각인데 말이죠. 일본인들의 독일군 선호 취향이 반영된건가.

[해외편]

1. Y의 비극 - 엘러리 퀸
2. 환상의 여인 - 윌리엄 아이리쉬
3. 기나긴 이별 - 레이몬드 챈들러
4.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아가사 크리스티
5. 독수리는 날개치며 내리다 - 잭 히긴스

6. 심야플러스1 - 개빈 라이얼
7. 통 - 크로프트
8.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9. 승정(비숍)살인사건 - 반 다인
10. 셜록 홈즈의 모험 - 코난 도일

11. 여왕폐하 율리시즈 호 - 알리스테어 맥클린
12. 쟈칼의 날 - 프레드릭 포사이스

13. 안녕 내사랑 - 레이몬드 챈들러
14. 화형법정 - 딕슨 카

15. 섀도우 81 - 루시안 네하임
16. 노란방의 비밀 - 가스통 르루
17. 죽음의 키스 - 아이라 레빈

18. 빨간머리 레드메인즈 - 이든 필포츠
19. 흥분 - 딕 프란시스

19. 말타의 매 - 더쉴 해미트
21. 높은 바위 - 데스몬드 배글리
22. 그린 살인사건 - 반 다인
23. 지푸라기 여자 - 카트리느 아를레
24. 소름 - 로스 맥도널드
25. 브라운신부의 동심 - 체스터튼
26. 세 개의 관 - 딕슨 카

27. X의 비극 - 엘러리 퀸
28. 첫가을 - 로버트 B 파커 ("약속의 땅"이라는 작품이 출간되어 있는데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29. 피의 수확 - 더쉴 해미트
30. 웃는 경관 - 바르 & 슈발

31.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 엘러리 퀸
32. 암살자 - 로버트 러들럼 (많은 작품이 소개된 작가인데 역시 이 작품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33.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 - 죤 르 카레
34.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 아가사 크리스티

35. 유다의 창 - 카터 딕슨
36. 모르그가의 살인 - 에드거 알란 포우
37. 당신을 닮은 사람 - 로얄드 달
38. はなれわざ Tour de Force - 크리스티나 브랜드
39. 사라진 소녀 - 콜린 덱스터
40. 황금벌레 - 에드거 알란 포우
41. 813 - 모리스 르블랑

41. 사라진 남자 - B.프리맨틀
43. 빅 슬립 - 레이몬드 챈들러
44. 진리는 시간의 딸 - 죠세핀 테이

45. 바스커빌가의 개 - 코난 도일
46. 독 쵸콜릿 사건 - 안토니 버클리

46. 상복의 랑데뷰 - 코넬 울리치
48. 오른손 - 딕 프란시스
49. 스위트 홈 살인사건 - 크레이그 라이스
49. 도버 4 / 절단 - 죠이스 포터
51. 월장석 - 윌키 콜린스
52. 백만달러를 돌려줘! (한푼도 더도말고 덜도말고) - 제프리 아처
53. 재앙의 거리 - 엘러리 퀸

54. 위철리 가의 여인 - 로스 맥도널드
54. 그리스 관의 비밀 - 엘러리 퀸

56.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번 울린다 - 제임스 M 케인

56. 탈출항로 - 잭 히긴스 (어떤 작품인지 역시 잘 몰라서....)
58. 야수는 죽어야 한다 - 니콜라스 블레이크
59. 더욱더 위험한 게임 (가장 위대한 게임) - 개빈 라이얼
60. 죽어가는 자를 위한 기도 - 잭 히긴스
61. 흑거미클럽 - 아이작 아시모프
61. 시행착오 - 안토니 버클리 콕스

63. 휴먼 파이터 - 그레이엄 그린
64. 호그 연속살인 - 윌리엄 디 안드레아
64. 경관혐오 - 에드 멕베인

64. 도둑맞은 편지 - 에드거 알란 포우
67. 신데렐라의 함정 - 세바스티앙 자프리조

68. 레베카 - 다프네 뒤 모리에
68.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 딕슨 카
70. 악마의 선택 - 프레드릭 포사이스
71. 타이타닉호를 인양하라 - 클라이브 커슬러
71. 디미트리오스의 관 - 에릭 앰블러

73. 大穴 Odds Against  - 딕 프란시스
74. 마천루의 몸값 - 리쳐드 제섭
74. 어둠 속의 목소리 - 이든 필포츠
74. 트렌트 최후의 사건 - E.C 벤틀리
77. 복수법정 - 헨리 덴커

78. 이별을 알리러 온 남자 - 브라이언 프리맨틀
79. 보이지 않는 그린 - 죤 슬라텍
80. 나바론의 요새 - 알리스테어 맥클린
81. A-10 탈환팀 출동하라 - S.L 톰슨
82. 주정뱅이 탐정가를 가다 - 커트 캐년
83. 사나이의 목 - 죠르쥬 시므농
84. 어센덴 - 서머셋 모옴

85. 바늘구멍 - 켄 폴레트
86. 9마일은 너무 멀다 - 해리 케멜먼

86. 빨강집의 수수께끼 - A.A 밀른

88. 유리열쇠 - 더쉴 해미트
89. 리리안과 악당들 - 토니 켄릭
90. 네덜란드 구두의 비밀 - 엘러리 퀸
90. 제제벨의 죽음 - 크리스티나 브랜드
92. 이와 손톱 - 빌 S 벨린져
93. 불타는 사나이 (크리시 1) - A.J 퀸넬
94. 피의 줄 - A.J 퀸넬 (크리시 시리즈가 아닐까요?)
94. 도중의 집 - 엘러리 퀸
94. 즐거운 장례식 - 에드먼드 크리스핀
97. 크로이든발 12시 30분 - F.W 크로포츠
97. 오뎃사 파일 - 프레드릭 포사이스
99. 제 1의 대죄 - 로렌스 샌더스

99. 酔いどれの誇り - 제임스 크램리

** 2006. 11.29 추가 : 읽은 것은 볼드체
** 2008. 04.21 추가 : 한 4편 정도 더 읽었네요.
** 2011.11.20 추가 : 이제 국내에 출간된 건 거의 다 읽은 것 같습니다.
** 2020.02.01 추가
** 2026.04.11 추가

2022/07/02

미스터리를 읽은 남자 - 윌리엄 브리튼 / 배지은 : 별점 3점

미스터리를 읽은 남자 - 6점
윌리엄 브리튼 지음, 배지은 옮김/현대문학
인기 탐정이 등장하는 시리즈를 답습하는 작품은 많습니다. 탐정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셜록 홈즈의 경우는 작가 사후에도 다른 작가들에 의한 시리즈가 계속되었고, 에놀라 홈즈와 같은 가족이 등장하는 스핀 오프에 각종 패러디와 파스티슈 물까지 합치면 그 수는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저 역시 <<경성 탐정록>>이라는 파스티슈 물로 숟가락을 얹었었지요.
문제는 누구나 다 아는 탐정이 등장하기에 별다른 변주를 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셜록 홈즈가 21세기에 환생을 하든, 이세계로 전생을 하든간에 그는 셜록 홈즈이니까요.

하지만 이 단편 시리즈는 이런 문제점을 획기적으로 해결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그 탐정이 등장하는 시리즈 작품을 읽은 누군가가, 자기가 흠모하는 탐정을 따라해서 사건을 해결하기 때문에 시대와 탐정역에 얼마든지 변주가 가능하거든요. 등장하는 탐정들 모두가 고전 정통 본격물 탐정들이라서, 모든 이야기들이 고전 정통 본격물에 어울리는 추리물이라는 것 역시 마음에 든 점이었고요. 작가 취향이 저와 비슷한게 확실해 보입니다.

물론 몇몇 작품들은 원래 탐정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합니다만, 고전 정통 본격물 애호가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좋은 시리즈라는건 분명합니다. 뒤이은 수록된, 저자의 다른 시리즈인 스트랭 씨 시리즈 역시 고전 정통 본격물로서 나쁘지 않은 수준을 보여주기에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덕분에 오랫동안 겪고 있었던 고전 정통 본격물 금단 현상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듯 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11편이나 되는 "~를 읽은 남자" 리뷰를 쓰다보니 힘이 빠져서, 스트렝 씨 시리즈는 제일 괜찮았던 한 편만 소개드립니다.

<<존 딕슨 카를 읽은 남자>>
에드거는 존 딕슨 카 소설에 나오는 것같은 밀실을 만들어 삼촌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핵심은 벽난로였다. 삼촌을 살해하고, 깨끗하게 청소한 벽난로 굴뚝으로 빠져나온 뒤 난로에 불을 붙여 밀실로 만들 셈이었다...

아주 오래 전 읽었었던 작품. 존 딕슨 카하면 떠오를 '밀실'을 소재로 만든 작가의 처녀작입니다.
범인이 범행 계획을 앞 부분에 상세하게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도서 추리물' 형식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본격 추리물은 아닙니다. 오히려 블랙 코미디에 가깝지요. 그래도 재미만큼은 나무랄데 없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엘러리 퀸을 읽은 남자>>
엘러리 퀸의 광팬 아서 민디가 머무는 양로원에서 위책 노인이 애지중지하던 10달러 금화가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일한 용의자 데니슨이 그들 앞에서 옷을 벗기까지 했지만, 금화는 찾을 수 없었다...

엘러리 퀸 광팬이 <<퀸 수사국>> 속 <<마약 부서 검은 장부>>라는 작품을 인용해가며 추리를 펼친다는건 시리즈 설정에 딱 맞아 떨어지는데, 사실 아서 민디는 별로 엘러리 퀸같지는 않았습니다. <<검은 장부>>에서의 트릭과도 아무 관련이 없고요.
오히려 원전보다 추리적인 부분은 훨씬 낫습니다. 아서 민디는 데니슨의 뺨 상처가 벌어진 이유, 계단을 끔찍히 싫어하면서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긴 이유를 추리하여 진상을 밝혀내는데, 설득력 높은 완벽한 추리였기 때문입니다.

정통파 본격 추리 단편의 교과서같은 작품으로, 제 별점은 5점입니다. Hall of Fame!

<<읽지 않은 남자>>
몬티는 친구 포드에게 벽돌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암실용 방을 새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포드는 몬티의 아내 헬렌이 죽은 교통사고를 일으켰지만, 몬티는 그건 사고였다며 포드를 달랬다. 두 남자는 곧바로 벽을 쌓기 시작했고, 몬티는 포드에게 그가 좋아하는 위스키 코노서스 초이스 반 병을 건넸다...

포드는 헬렌이 갑자기 도로 한 복판으로 뛰어나와 사고가 났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몬티는 집 앞 우편함에 포드 차 페인트가 묻었다는 것, 그리고 현장 근처에서 버려진 위스키 병을 찾아낸 뒤, 포드가 차에서 술을 마시다가 헬렌을 덮쳤다고 추리합니다. 그래서 복수를 위해 포드를 불러 벽을 쌓는 척 하고 암실 안에 가둬 버리고 말지요.

그런데 차 안에서 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고 당시 포드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판단한 수사 결과는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분명 사고를 일으킨게 분명한 포드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몬티를 당당하게 찾아온 경위, 그리고 제 발로 갇힌 방을 만드는데 참여한 것에 대한 설득력도 부족했고요. 몬티는 포드가 에드거 앨런 포의 <<아몬티야도 술통>>을 읽지 않아서 이 함정에 빠졌다고 말하지만, 이건 책을 읽고 안 읽고의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애초에 위험한 상황에 제 발로 들어간게 문제거든요.

읽지 않은 남자라는 변주는 좋은 발상이었는데, 결과물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렉스 스타우트를 읽은 여자>>
카니발에서 "뚱뚱녀" 역할을 맡은 거트루드는 연기를 위해 렉스 스타우트 작품을 탐독하다가 빠져들게 되었다. 쇼 단원 중 거트루드가 딸같이 아끼던 뱀 조련사 릴리가 살해된채 발견되자, 거트루드는 직접 사건을 해결하려 나서는데...

렉스 스타우트의 네로 울프와 뚱뚱하다는 점, 그리고 아치와 같은 조수(?)가 있다는 연결 고리는 가지고 있지만, 내용 자체는 렉스 스타우트, 그리고 네로 울프와 별 관계는 없습니다. 평범한 추리물이에요.
그러나 정통파 본격물로 보기에는 애매했습니다. 핵심 단서인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었던, 반쪽짜리 메달에 적힌 BY-BY라는 글귀에 대한 단서 제공이 전무한 탓입니다. '비실이'라는 별명을 들으면 불같이 화낸다는 설정도 너무 후반부에서나 드러나서, 전개 면에서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었고요. 그냥저냥한 작품으로제 별점은 2점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를 읽은 소년>>
시골 마을 라킨스코너에 벨기에 교환학생인 열 살짜리 천재 자크 뒤몽드가 찾아왔다. 자크는 마을 경찰 맥스 코리와 친구가 되는데, 어느날 라킨스코너에 수 명의 대학생들이 찾아와 기묘한 장난을 벌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생들이 노린건 희귀 우표였는데, 이걸 사다가 혹시 발각될까봐 다른 기묘한 사건을 벌였다게 진상입니다.
그런데 진상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도무지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마을을 들 쑤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여러 명이 서로 모르는 사람인 척, 차례대로 원하는 우표가 나올 때 까지 우표를 그냥 사면 아무 문제 없이 끝났을테니까요. 독자가 뭔가 희귀 우표 관련된 사건이라고 쉽게 짐작 할 수 있다는 점도 감점 요소였습니다.
아울러 탐정역인 자크가 벨기에인으로 대화하다가 프랑스어를 섞으며, 심지어 10살 짜리가 있지도 않은 콧수염을 만지는 시늉을 한다는 식으로 포와로를 따라한다는 묘사는 심하게 억지스러웠습니다. 학생들이 노리던 우표는 인쇄 오류로 '콧수염'이 생긴 것 처럼 인쇄되었다는 것도 이러한 억지 포와로 따라하기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고요. 추리도 별 볼일 없었습니다. 시리즈 최악의 작품으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아서 코난 도일을 읽은 남자>>
테리 왓슨에게 대학 후배 대니얼 블래싱검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전혀 알지 못하던 사이인데다가, 뚱딴지같은 내용이어서 이유를 알기 위해 왓슨은 편지 속에서 언급된 다른 인물에게 전화를 건 뒤, 워싱턴으로 호출되었다. 알고보니 블래싱검은 타국 대사관에서 암약하는 스파이로, 중요한 목록이 담긴 상자의 비밀 번호를 편지 속에 숨겨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왜 테리 왓슨에게 편지를 보냈는지는 모른채 시간은 흘러만 가는데...

왓슨에게 보내진 엉뚱한 편지에 암호가 감추어져 있다는 설정은 흥미로왔습니다. 세개의 이어진 영어 알파벳이라는 암호도 단순해서 좋았고요. 무엇보다도 이 암호 때문에 테리 왓슨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결말이 아주 유쾌했어요. 암호는 "LMN"으로 이는 셜록 홈즈의 유명한 대사 - '엘레멘터리 왓슨 - 그건 기본이야 왓슨' - 를 떠올리면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LMN 테리 왓슨" 이 되니까요.
말장난이기는 해도,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었어야만 풀 수 있는 암호라는 점에서 시리즈 취지에도 잘 부합하기에,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체스터턴을 읽은 남자>>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애독자 케니 신부는 추찹한 사진을 밀매하다가 자살했다는 교구민 팀 해링턴의 장례 미사 문제로 주임 시부 고거티 신부와 언쟁을 벌였다. 그 뒤 고거티 신부는 팀 해링턴이 자살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내 보라며 케니 신부에게 하룻 동안의 유예를 주었다. 그리고 케니 신부는 사건 담당인 깐깐한 언셀 형사와 함께 방문한 사건 현장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는데....

브라운 신부 스타일의 탐정물이라기 보다는, 브라운 신부가 가치 있는 작품이라는걸 증명하는 작품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특히 팀 해링턴이 자살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드러나는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차에 반사되는 햇살을 보고, 추잡한 사진을 슬라이드로 보려면 '커튼'을 쳤어야 했는데 현장이 그렇지 않은걸 눈치채는게 아주 자연스러웠거든요. 깐깐한 언셀 형사가 설득당한게 일리가 있다고 생각될 만큼 좋은 추리였습니다. 사진 배달부의 실수가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동기도 짧은 분량에 잘 드러나있고요.
여러가지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대사를 장황하게 펼치며 쉬운 말도 한번 더 꼬아서 말하는 브라운 신부와는 전혀 다른 신세대(?) 신부지만, 애정하는 브라운 신부를 위해 발벗고 나서는 케니 신부 캐릭터도 마음에 드네요.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그 작품에 푹 빠졌다는 건 "~를 읽은 남자" 시리즈에 속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재미도 있고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좋은 단편 추리물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대실 해밋을 읽은 남자>>
정년 퇴직 후 도서관에서 책 정리하는 잡무를 하게 된 프리처드는 어느날 도서관장 디컨 씨의 부름을 받았다. 추리소설 애호가 패러것이 도서관 이사회 회장 앤드루 킹과 건 내기 때문이었다. 패러것이 도서관 어딘가에 감추어 둔 책을 찾으면 그가 추리소설 초판본 컬렉션을 도서관에 기증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추리소설 매니아 프리처드가 앤드루 킹을 도와 패러것이 준 간단한 단서로 한 시간 안에 책을 찾기 위해 애쓰게 되는데....

아르바이트하는 추리소설 매니아가 자신의 취미를 이용해서 도서관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낸다는, 추리소설 애호가들에게는 꿈 같은 이야기. 추리 소설 매니아 프리처드 씨에게도 행운이 닥치는 결말까지도 아주 환상적이네요.

이야기의 핵심인 보물찾기 게임도 꽤 그럴듯하고, 합리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국인 독자는 풀이 과정에 동참하기 어렵다는겁니다. "3.14"가 적힌 봉투 안에 "더블 더즌", 그리고 "몰타의 매"라고 적힌 카드가 한 장씩 들어있는게 힌트였는데, "3.14" -> 파이는 "Pie"로 바꿀 수 있고, "더블 더즌"은 24, "몰타의 매"는 "매"가 소문자라서 말 그대로의 새를 의미하므로 "검은 새"가 되고, 이게 "파이 안에서 구워지는 스물 네 마리 검은 새"라는 동요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한국 독자에게는 쉽지 않은, 거의 불가능한 추리인 탓입니다.

그래도 재미도 있고, 추리적으로도 깔끔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조르주 심농을 읽은 남자>>
친구 해럴드와 함께 고가의 화물을 나르는 바니는 조르주 심몽의 메그레 시리즈를 탐독해왔다. 그들은 대저택에서 '라이트풋' 래리 쇼필드라는 고용인 앞에서 싣고 온 화물을 내려놓았다. 그는 별명 그대로 알록달록 화려한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러나 바니는 메그레 경감의 활약을 떠올리며, 래리 쇼필드가 가짜라고 확신하는데...

메그레 경감은 사실 대단한 추리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아닙니다. 좀 우직하고, 인간 내면을 성찰하는 부분이 많은 편이죠. 그러나 성실하고 꼼꼼한데다가 관찰력이 뛰어난데, 이 작품 속 바니 역시 관찰을 통해 래리 쇼필드가 가짜라는걸 알아내게 됩니다. 그는 래리 쇼필드가 절대로 다리를 꼬지 않고, 발바닥을 계속 땅에 대고 있는걸 눈치채거든요. 부츠를 갈아신었는데, 새것이라는게 들통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단지 부츠가 새 것이라는게 그가 가짜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래리 쇼필드가 자기 입으로 흙길을 걸어 왔다고 말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부츠는 얼마든지 갈아 신을 수 있잖아요?
바니가 오지랖을 떨어서 쇼필드의 정체를 폭로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설령 눈치를 챘더라도, 현장을 벗어나 경찰에 신고하는게 당연했습니다. 현장에서 총을 든 상대방을 위협해가며 추리쇼를 펼칠게 아니라요.

이렇게 단점이 더 눈에 많이 뜨이며, 메그레 경감의 특징을 잘 살린 것도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존 크리시를 읽은 소녀>>
에밀 프랫은 오랫만에 겨우 집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담당하고 있는 도킨스 사건 때문이었다. 영국인 도킨스는 미국으로 여행을 왔었는데,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도박으로 땄던 3천 달러 정도를 노린 범행이었다. 그는 죽기 전 경찰에게 "올드 피싱.."과 비슷한 말을 남겼다. 에밀 프랫의 딸 메릴리는 최근에 읽고 있는 존 크리시의 기디온 경정 시리즈에 나온 영국 코크니 말투가 해결의 실마리라는걸 아빠에게 알려준다....

기디온 경정의 활약보다는, 작품에 등장했던 영국 런던 토박이 코크니들의 은어가 단서가 된다는건 독특했습니다.
그러나 다이잉 메시지라는 억지스러운 설정에 더해 죽어가면서 은어를 써서 단서를 남길 이유가 설명되고 있지 않은 등, 이야기의 설득력이 낮다는건 아쉬웠어요. 당연히 한국인 독자로서는 추리하기도 힘든 내용이었고요. 그냥저냥한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를 읽은 남자들>>
역사 교사 폴 해스킬, 전화선 보수 기술자 재스퍼 지머먼, 대장장이 가브리엘 둔, 은행장 시드니 워윅과 메리 팅커 술집 주인 핀들레이의 다섯 명은 모두 아이작 아시모프 박사의 팬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메리 팅커 술집에 모여 "흑거미 클럽" 처럼 수수께끼 풀이 놀이를 하곤 했었다. 그러나 진짜 작은 마을 홀컴밀스에서는 별다른 사건이 없어서 놀이 속 수수께끼는 공상에 불과했다. 그런 그들에게 기자 에드거 바시가 진짜 수수께끼를 가져왔다. 마을 최대의 백화점 '밸류 투데이'의 사장인 마케팅 귀재 데이비 로터스가 천 달러가 들어있는 금고를 전시장에 공개하고, 금고를 열면 누구나 돈을 가져갈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비밀번호가 무엇인지에 대한 수수께끼였다. 아시모프 팬들은 각자 자신만의 추리를 들려주는데...

아이작 아시모프의 '흑거미 클럽'에 대한 일종의 파스티슈 작품. 참석자들이 각자 내 놓는 추리들이 눈길을 끕니다. 감히 '흑거미 클럽'을 운운할 수 없는, 여러모로 부족한 추리들이었지만 각자의 직업과 전문 분야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잘 와 닿기는 했습니다. 마지막에 집사 헨리의 포지션인 술집 주인 핀들레이가 정답을 맞추고 천 달러를 얻는 결말도 좋았어요.
무엇보다도 밸류 투데이는 데이비 로터스의 철자를 가지고 만든 애너그램으로, 이를 이용하면 금고 번호를 알아낼 수 있다는 진상에 대한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한다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런게 바로 정통 본격 고전 추리물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한국인 독자에게는 쉽게 추리할 수 없는 내용이기는 했지만요.

여러모로 아시모프의 원전인 걸작을 잘 이해하고 쓴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 2부 스트랭 씨 이야기 -
<<스트랭 씨 여행가다>>

스트랭 씨는 단체 버스 투어로 캐나다 여행을 떠났다. 그의 옆 자리에 앉게 된 건 제리 수녀였다. 그리고 여행 도중 제리는 가판대에서 나무로 된 십자가를 구입했는데, 그 십자가가 사라져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스트랭 씨는 귀국 직전 십자가 사건과 퀘벡에서 일어났던 은행강도 사건의 연관성을 추리해 내고, 버스에서 추리쇼를 벌이게 되는데...


작가의 또 다른 시리즈인 고교 과학 교사 스트랭 씨 시리즈의 수록작 중 마지막 작품이자 가장 마음에 든 작품입니다. 십자가를 '길포일' 이라는 여행객으로 변장한 은행강도 르클레어가 훔쳤던 이유는, 십자가를 포장했던 신문지 때문이었다는 추리가 특히 좋았습니다. 신문에 르클레어 사진이 실려 있었다는 이유는 십자가를 훔칠 충분한 이유가 되니까요. 비록 프랑스어이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고요. '알맹이보다 포장지가 중요하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은 왠지 "브라운 신부"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해서, "~를 읽은 남자" 시리즈로 썼어도 좋았을 것 같네요.
은행강도가 도주를 위해 미국인 단체 여행객으로 변장한다는 아이디어도 국경에서 어떻게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설득력있게 들렸습니다.

이렇듯 추리물로서 상당한 수작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이 시리즈가 더 이어지지 못했고, 국내 소개도 이 단편집에 수록된 4편만으로 끝난게 못내 아쉽기만 할 따름입니다.

2024/09/08

언어의 역사 - 데이비드 크리스털 / 서순승 : 별점 3점

언어의 역사 - 6점
데이비드 크리스털 지음, 서순승 옮김/소소의책

영국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이 쓴 인문학 서적. 언어가 무엇인지, 언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언어가 왜 필요한지, 언어를 어떻게 학습하게 되는지, 언어가 어떻게 전파되는지, 왜 세계에 많은 언어가 존재하는지, 언어는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변하는지, 표준어와 방언은 무엇인지, 문법은 무엇인지, 언어의 스타일이 왜 필요한지 등에 대해 항목별로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한마디로, '언어에 대해 궁금한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몇 가지 인상적인걸 소개해드리자면, 우선은 아이들이 언어를 쉽게 배우는 까닭은 우선 리듬과 억양부터 배우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한 20여년 전 유행했던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라는 책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 책에서도 무조건 들으면 귀가 뚫린다고 했는데, 같은 이치인것 같아요. 단어의 뜻이나 문법을 모르더라도 그냥 들으면서 그 나라 말의 리듬과 억양부터 깨우치면 된다는 의미일테니까요. 물론 저는 영어의 리듬과 억양을 깨우치지는 못했습니다만....
표준 영어 문법이 생겨난 이유는, 상류층이 하층민이나 평민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개발한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내용도 기억에 남습니다. 새로운 악센트도 마찬가지고요. 또 악센트나 방언을 진화의 '적자생존'과 연결하는 발상은 신선했습니다. 낯선 악센트는 우리 소속이 아닌 '적'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라나요. 이를 이튼, 해로 등의 학교에 갓 입학한 지역 악센트 아이가 놀림당하는걸 예로  든 것도 영국 학자답더군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경상도에 전학간 전라도 사투리 소년 상황과 비슷하겠지요? 아, 상상만해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마지막 부분의 응용 언어학자 같은 연관 학문에 대한 소개도 좋았습니다. 언어학이 언어를 연구만 하는게 아니라 언어를 어떻게 더 쉽게, 잘 배울 수 있도록 하는지, 언어 학습을 어떻게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는지 등은 충분히 실용적으로 써 먹을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제가 관심있는 범죄 분야에서도 응용 언어학이 한 분야인 '법 언어학' 전문가들이 활약하여 증거인 문서 자료를 누가 말했고 누가 썼는지를 밝혀낸다니, 언어학의 쓰임은 정말 방대한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예를 통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 주는 글 솜씨도 좋습니다. 문법은 지겹게 외워야 하는게 아니고, 단어들의 의미를 통하게 하는 방법이라며 'BAND'라는 단어의 사용 예를 알려주는 식으로요. 이 중 속어를 설명하면서 런던 이스트엔드의 코크니들 말을 예로 든 부분은 "미스터리를 읽은 남자"의 "존 크리시를 읽은 소녀"와 내용과 거의 똑같기도 했고요. 이 작품을 예로 들어주었어도 좋았을 것 같네요.

그런데 '한글'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고, 대부분 영어로 된 예제만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영국 학자의 책이니 영어 예제만 포함된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안내할 수 있는 설명이 포함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소의 지루한 부분과, 각 부문별로 지엽적 접근이 이루어지는 구성을 통사적으로 보완하면 좋겠다 싶고요.
그래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재미까지 놓치지 않은 좋은 책인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1/04/09

장르문학과 표절에 대한 단상

오랜만이네요. 요즘 너무 바빠서 도저히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 블로그 활동이 뜸했습니다. 그래도 스마트폰을 구입한 덕분에 틈틈이 웹서핑은 꾸준히 하고 있는데, 자주 방문하는 추리문학 커뮤니티 하우미스터리에서 한 한국 작가의 소설이 논란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논란의 이유는 고전 명작인 "시행착오"와 줄거리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국 작가들의 표절 의혹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저도 두어 작품을 직접 읽은 적이 있었죠. 장르문학이 특히 표절이나 차용이 쉬운 분야이긴 합니다. 아무래도 문학성보다는 플롯, 캐릭터, 설정 등이 중요한 장르이기 때문이겠죠. (물론 문학성을 갖춘 걸작들도 많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무협소설의 기본 플롯은 대체로 비슷하며, 추리소설도 평범한 일상 속 이야기라도 멋진 트릭 하나만으로 역사에 남는 명작이 될 수 있습니다. 개성 있는 캐릭터나 독창적인 설정 하나만으로도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 많고요. 그래서인지 걸작에서 설정과 캐릭터를 차용해 현지화한 번안소설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거장 김내성 선생님도 "진주탑"을 비롯한 여러 번안소설을 집필하셨고, 저 역시 비슷한 작품을 구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창작물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플롯이나 캐릭터, 핵심 설정을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는 단순한 차용이 아니라, 표절로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대표적인 사례로, "크리시" 1부의 초반 설정을 차용한 무협소설 "유성검",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기본 설정을 그대로 활용한 "탈명검", 그리고 "불새의 미로" 같은 작품들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원작의 설정을 가져와 나름대로 변주했더라도 결국 "원작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이는 창작자로서 변명의 여지가 적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논란이 된 작품은 어떨까요? 솔직히 아직 읽어보지는 않아서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기본 설정과 줄거리가 "시행착오"와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기본 설정이 비슷하더라도 작가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색깔을 입혀 전혀 다른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 역시 이 작품이 그런 사례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작품의 핵심적인 요소가 이 정도로 유사하다면, 아무리 전개 방식이나 트릭이 독창적이라 하더라도 표절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직 읽어보지도 않은 작품을 두고 평가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만큼 강한 선입견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줄거리 소개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제 판단이 섣부른 것이길 바라며, 다시 한번 "시행착오"를 꼼꼼하게 읽은 뒤, 논란이 된 작품도 직접 읽어보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야겠습니다.

2024/02/23

1030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점

1030 - 4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포틀랜드를 배회하던 잭 리처는 은행 통장에 입금된 1,030달러 - 부대에서 긴급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코드명 - 를 통해 옛 부대원 니글리를 만났다. 니글리는 리처에게 프란츠의 죽음을 알리며, 복수를 위해 옛 부대 재결성을 부탁했다. 그런데 남은 5명의 부대원 중 오도넬, 딕슨만 부름에 답했고 스완, 산체스, 오로스코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차례대로 프란츠처럼 사막에서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단서들을 모아나가던 리처 부대는 군수회사 뉴에이지의 보안부서 책임자 라메이슨이 범인이라는걸 알아냈다. 신무기 미사일 리틀 윙을 불량품으로 처리한 뒤, 폐기한 것으로 속이고 외국 테러리스트에 팔아넘기려던 라메이슨의 행각을 눈치챈 스완이 가까운 곳에 있던 옛 부대원들을 불러모아 공격을 대비했지만, 오히려 라메이슨에게 당하고 만 것이었다. 라메이슨이 경찰일 때 동료였던 보안관 커티스 모니가 스완 일행을 속인 뒤 뒤통수를 쳤기 때문이었다.
같은 방법으로 오도넬과 딕슨도 잡혔지만, 리처는 반격해서 라메이슨 일당을 철저하게 박살낸 뒤 미사일을 구입한 테러리스트도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울어 봐야 소용없소. 눈물 따위에 마음이 약해질 만한 사내는 다른 곳에 가서 찾으시오."
"네 삶의 마지막을 즐겨라. 와인 한 병을 사고 DVD를 빌려라. 하지만 박스로 사지는 마라. 네게 남은 시간은 이틀 정도니까. 그것도 길어 봐야."

잭 리처 시리즈 11번째 작품. 원재는 "Bad Luck & Trouble"입니다. "불운과 문제"라고 직역하기에는 폼이 없어서 바꾼 듯 한데, 바꾼 제목도 나쁘지 않네요.
기존 시리즈처럼 한 마리 외로운 늑대 잭 리처의 활약을 다루지 않습니다. 죽은 전우들을 위해 옛 전우들을 모아 복수를 진행한다는 복수극이거든요. 부대가 뭉쳤기에 복수극도 군사 작전에 가깝게 묘사됩니다. 전직 엘리트 군인들, 복수극, 군사 작전이라는 키워드만 놓고 보면 "크리시" 시리즈가 떠오르네요. "익스펜더블"과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이런 변주가 좋게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이 시리즈의 또다른 매력인 잭 리처의 추리력이 발휘될 여지가 거의 없는 탓입니다. 스완의 문진을 가지고 베런슨의 거짓말을 꿰뚫어 본다던가, 프란츠가 도움을 요청한게 아니었다는걸 깨닫는 장면처럼 소소한 추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프란츠가 남긴 문서가 '근무일' 기준이었다는 것도 꽤 괜찮았고요.
하지만 이외에는 추리는 커녕 리처의 무능함만 도드라질 뿐입니다. 특히 '왜 전 엘리트 헌병대원 4명이 허접한 녀석들에게 잡혀 죽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제대로 풀어내지 않는게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급 전문가들이라 웬만한 적들이 진압하는게 힘들다면 답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유일하게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산체스가 배신했거나, 누군가 믿었던 사람이 뒷통수를 쳤다는 이야기지요. 이렇게 '후더닛' 말고 '와이더닛'으로 접근했어야 했던 사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대신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일당들에게 당한게 아닐까 헛다리짚는건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6,500백만불을 카지노에서 따려면, 작중 설명되는대로 엄청난 조직과 돈이 필요했을겁니다. 쉽게 덮기도 힘들었을테고요. 상식선에서 불가능한 이야기를 조사까지 한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보안관 모니가 라메이슨의 옛 동료였고, 프란츠 일행은 모니에게 체포된 뒤 살해당했다는 반전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무려 4명의 전 엘리트 군인들이 보안관 1명에게 제압당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워요. 모니가 총을 들고 있었긴 했지만, 잭 리처 본인도 그간의 시리즈는 물론 이 작품 내에서도 권총에 맞서는 장면은 수도 없이 보여주었는데 말이지요. 반격 시 최소한 한 명이 죽더라도 남은 세 명은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리처와 니글리는 LA의 교통 체증으로 모니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고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커티스 모니가 오도넬과 딕슨을 먼저 제압한 뒤, 리처와 니글리를 태연히 기다렸다가 잡아간다는 생각없이 현장을 뜰 정도로 바보였다는 것도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악당들의 매력도 현저히 처집니다. 기본적인 능력부터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탓입니다. 라메이슨 일당이 아무리 전직 경찰로 10년 이상 경력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 흉기에 가까운 전투집단 군인들과 대등한 싸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본거지에서 맥없이 쓸려나가고 6,500만불까지 빼앗기는걸 보면 10년 동안 경력은 뭘로 쌓았나 싶고요. 리처와 니글리의 습격은 충분히 예상하고 대기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모니의 도움으로 뒷통수를 치는 것 외에는 너무 무력한지라 황당할 정도였습니다. 어느정도 실력자였어야 좋은 대결 구도가 성립했을텐데 이래서야 최소한의 긴장감조차 불러오기 힘듭니다. 악당들이 알아서 단서를 제공해주는 것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어요. 모니가 오로스코의 메모를 건네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라메이슨의 부하가 리처 일행을 라스베이거스에서 습격하지 않았다면 진상과 정체가 드러나는데 더 오래 걸렸을겁니다.
리처의 부대원들도 마찬가지에요. 별다른 매력도 없으며 결정적 순간에는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하는 것도 없습니다. 숫자의 귀재라는 딕슨의 특기는 리처와 동일하기도 하고요. 그나마 자금을 대는 니글리 정도만 약간의 활약을 보일 뿐입니다.

설명도 부족합니다. 라메이슨 일당이 이미 6,500만불을 받았는데 뉴웨이브라는 회사에 남아 근무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리틀 윙을 빼돌린게 들통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돈을 받은 이후인데 그게 문제가 될까요? 최소한 라메이슨 혼자만이라도 몸을 빼는게 당연했어요.
그리고 커티스 모니의 부하 브란트는 리처를 미행하고 있었습니다. 모니와 라메이슨 일당이 모두 살해당했다면, 브란트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았을거에요. 리틀윙 거래는 뉴웨이브 회사와는 관계가 없기에 ,잭 리처가 뉴웨이브를 공격해서 불을 지른 범죄 행위는 당연히 수사가 되었어야 했고요. 라메이슨 일당의 부하들 모두가 리틀 윙 거래에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그들 모두를 살해한 것 역시 엄연한 범죄입니다. 그런데도 브란트가 수사에 나서지 않는건 물론이고, 중반 이후 사라져서 등장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복수극도 시시했습니다. 헬기에 숨어있다가 라메이슨 일당을 밖으로 떨구는게 전부인 탓입니다. 이전에 리처가 라메이슨에게 "너는 곧 우리를 만나게 될 거다. 그럼 함께 헬리콥터를 타자. 네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번엔 한 가지 크게 달라질 게 있다. 내 친구들은 반항했을 것이다. 내 생각이지만. 하지만 년 절대 그러지 않을 거다. 뛰어내리게 해달라고 애걸복결할 거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눈물 콧물 있는 대로 짜낼거다. 내 그것만은 틀림없이 약속하마."말했기에 보다 처절한 복수를 기대했는데 실망스러웠어요. 예정된 위험한 테러보다 복수를 먼저 선택한 리처의 모습도 당연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졌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보다 살짝 높은 2점입니다. 스케일은 크지만 리처 시리즈의 매력은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2025/11/21

다크 플레이스 - 길리언 플린 / 유수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5년 전, 오빠 벤이 저질렀던 가족 몰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리비 데이는 '킬 클럽' 라일의 요청으로 사건 재조사에 나섰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벤이 유죄 판결을 받는 결정적 증언을 했던 리비는 조사를 통해 오빠가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나를 찾아줘"로 확 뜬 길리언 플린의 또 다른 범죄 스릴러입니다. 568페이지라는 어마무시한 분량으로 제목은 주인공 리비의 어둡고 질척한 과거 추억을 의미하며, 리비가 이런 '다크 플레이스'의 진실을 파헤치는 내용이지요. 

길리언 플린 특유의 치밀한 묘사가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데이 가족에게 닥쳤던 경제적 몰락, 심리적 붕괴, 특히 패티와 벤의 절망적인 내면 묘사는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생생합니다. 읽다 보면 나 역시 빠져나올 수 없는 진흙탕에 함께 잠기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입니다. 
주인공 리비가 어린 시절 증언으로 벤을 교도소에 보냈는데, 25년이 지나 성금이 다 떨어진 탓에 오빠가 무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돈으로 조사에 나서는 딜레마도 리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생생하게 다가오고요.

전개도 여러 복선을 통해 정교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진범 중 한 명인 캘빈 딜이 '킬 클럽' 모임 초반에 언급되고, 리비의 도벽이 디온드라의 DNA를 입수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식으로요. 특히 벤을 흠모하던 크리시의 거짓 고발로 인해 패티가 아들 벤을 아동 성추행범으로 오해하게 되는 부분이 탁월합니다. 디온드라가 임신해서 벤은 중고 아기 옷을 잔뜩 사고 아이 이름을 정하기 위해 여러 이름을 노트에 써 두었는데, 이걸 본 패티가 심증을 굳히게 되거든요.
또 현재 시점인 리비의 시선과, 1985년 사건 당일을 시간대별로 따라가는 패티(엄마)와 벤의 시점을 교차해 보여주는 구성도 좋습니다. 현재 시점의 리비의 조사와 실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순서대로 이어지며 결국 진실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정통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고, 특별한 트릭이 있지는 않지만 결정적 장면 하나는 인상적입니다. 당시 살해된 미셸이 짝사랑하던 남학생 '토드 델헌트'의 이름을 크리스탈이 언급하면서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게 되는데, 이미 살해된 가족만 아는 이야기를 만난 적도 없는 크리스탈이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리비는 미셸이 딱 9일 동안만 썼던 1985년 일기장에만 그 이름을 적었고, 크리스탈이 일기장을 읽었다고 추리합니다. 일기장은 범인밖에는 가져갈 사람이 없으니, 디온드라가 범인이라는 의미이고요. 이는 꽤 타당하고 설득력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지나치게 깁니다. 정신적으로 온전한 인물도 별로 없는데, 그들의 심리 묘사가 많아서 읽는 내내 피로감을 느꼈고요. 그 중에서도 리비의 아버지 러너 데이와 벤의 여자친구 디온드라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은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할 정도로 거북했습니다. 읽으면서 여러차례 그만 두게 만들 정도로요. 

후반부로 갈수록 우연이 너무 과도하게 겹치는 점도 아쉽습니다. 사건 당일, 패티가 생명보험금으로 빚을 갚기 위해 캘빈 딜에게 자신의 살인을 의뢰한 날, 공교롭게도 디온드라가 집에 들어와 미셸을 죽이고, 이를 본 데비가 엄마를 찾아 나섰다가 캘빈의 모습을 본 탓에 살해당했다는 전개는 너무 작위적입니다.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부족한 부분도 거슬립니다.  벤이 디온드라의 가명을 문신으로 새긴 이유, 일가족 몰살이라는 대형 사고 이후 실종된 디온드라가 사건과 엮여 함께 수사되지 않은 이유처럼요. 그 작은 시골 동네에서 벤과 디온드라가 사귄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트레이마저 조사를 받았는데 말이지요.

디온드라가 미셸을 살해한 동기도 석연치 않습니다. 아무리 분노가 폭발했다고 하더라도, 10살 아이를 죽인다는건 영 납득하기 힘듭니다. 어차피 도망갈 생각이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아울러 이 때 디온드라가 미셸을 살해하는걸 방조한 벤 역시 지은 죄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25년 동안의 수감 생활은 했어도 쌉니다.

결정적으로 절정부에서 리비가 크리스탈에게 공격받는 장면과 탈출극은 정말 억지스럽습니다. 크리스탈이 ‘토드 델헌트’라는 이름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리비를 죽이려 한다는 설정도 납득이 잘 가지 않았고요. 리비가 의심을 품기는 했지만, 그게 디온드라가 범인이라는걸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라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미셸의 침대 시트에서 디온드라의 DNA가 검출되었다는 점 역시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벤과 디온드라가 사귀었고, 디온드라가 벤의 아이까지 가졌는데 그녀의 DNA가 집 안에 남아 있는게 뭐가 그리 이상할까요? 미셸의 시신에서 디온드라의 DNA가 검출되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그것도 아니라서 핵심 증거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25년간 디온드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벤이 진범이 그녀라고 밝힐 까닭도 없을테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 특유의 문체와 분위기, 구성은 뛰어나고 완성도도 높지만 과한 작위성과 무리한 전개 탓에 설득력이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길리언 플린 특유의 어두운 심리 묘사를 즐기고 싶은 독자라면 도전해볼 만하겠지만, 일반적인 추리 소설 독자에게는 추천드리기 어렵습니다. 영화화 되었지만 망했다는데, 이해가 됩니다.

2021/01/24

추리 소설 1,000편 리뷰 분석

추리 소설 1,000번째 리뷰 등록!

염원했던 추리소설 리뷰 1,000편 올리기를 달성했습니다. 1,000편의 리뷰를 작성하면서, 책 한 권을 출간하는 소기의 성과도 있었지요. 1,000편 업로드 기념 및 개인적인 자료 정리 차, 여태 읽었던 추리소설 리뷰 1,000편에 대한 간략한 데이터를 정리하여 공개합니다.

리뷰 갯수 1,000 

당연하겠지요?

책 권수 1,049권 

"브라운 신부""크리시" 리뷰와 같이 여러 시리즈를 한 편 리뷰에서 정리한 경우도 있고, "그것" 처럼 작품 한 편이 여러권으로 이루어져 있어도 리뷰 한 편으로 소개한 경우가 많아서 권수는 더 많습니다.

책 종수 1,008종 

권 수가 많은 이유에 더해, 중복하여 작성한 리뷰도 있어서 이를 빼면 최종적으로 리뷰한 책은 총 1,008종입니다.

국가별 

일본 454, 영미 394, 한국 63, 프랑스 29, 독일 13, 그외 55

예상대로 일본 작품 비중이 거의 절반 가까이이며, 영미 작품까지 포함하면 전체의 85%가까이 되는 압도적인 비중입니다. 국내 출간되는 작품들과 제 취향을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장르별 

본격물 성향 작품 리뷰가 357, 스릴러는 229, 경찰/수사 127, 일상계가 80, 호러 73, 하드보일드 69, 역사 추리 55, 모험물 54 순입니다. 본격물을 좋아하는 제 취향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장르 불문하고 단편집은 137편의 리뷰를 작성하였고요. 

참고로 본격물이면서 수사물인 작품이거나, 본격물이면서 일상계인 작품 등 키워드는 중복하여 체크된 결과입니다.

별점별 

경성탐정록 두 편은 제외한 총 1,006 종의 책 별점 분포는 아래와 같습니다. 

5점 : 4, 4.5점 : 7, 4점 : 71, 3.5점 : 48, 3점 : 271, 2.5점 : 259, 2.4점 : 1, 2.3점 : 1, 2점 : 227, 1.5점 : 88, 1점 : 26, 0.5점 : 1, 0점 : 1, 없음 : 1

평균 이상 별점인 2.5점 이상 작품이 660종으로 전체의 2/3를 차지합니다. 꽤 괜찮은 작품들을 읽어왔었다는 의미지요. 나름 뿌듯하네요. 별점 5점을 받은 작품, Hall of Fame만 별도로 소개해 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9마일은 너무 멀다"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 

"도끼" 

"특별요리" 

* 특별요리는 2003년도 동서 버젼이었고, 2015년에 다시 읽었던 엘릭시르 버젼은 별점 4점이었습니다.

참고로 책 별점과는 별개로, 단편집 단편별 중 별점 5점을 받았던 단편은 아래와 같습니다. 

"살의" (in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결산"위험천만한 게임" (in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우체국에서 생긴 사건" (in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사기꾼의 카드" (in "클로버의 악당들")

"새", "성모상" (in "대프니 듀 모리에") 

"국화의 먼지" (in "저녁싸리 정사")

"죽음" (in "악몽을 파는 가게 1") 

이 역시, 저의 고전 본격물 취향을 잘 드러내 주네요.

작가별 

1. 작가별 리뷰한 작품 갯수 순위

1. 히가시노 게이고 : 48
2. 애거서 크리스티 : 33
3. 요네자와 호노부 : 21
4. 스티븐 킹 : 18
5. 마쓰모토 세이초 / 엘러리 퀸 : 16
7. 존 딕슨 카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 : 13
8. 요코미조 세이시 : 12
9. 와카타케 나나미 : 11
10. 아리스가와 아리스 / 에드 멕베인 : 10 
12. 미쓰다 신조 / 아서 코난 도일 / 조르주 심농 / 시마다 소지 : 9
16. 다카기 아키미쓰 / 미야베 미유키 : 8
18. 에도가와 란포 / 노리즈키 린타로 / 도진기 : 7
수많은 작가가 있지만, 공통 18위 까지만 선정합니다. 일본, 영미 작가가 많은건 국가별 순위와 동일합니다. 프랑스 작가 조르주 심농이 12위에, 한국작가 도진기가 18위에 위치하고 있을 뿐이네요.

2. 작가별 평균 별점 순위 (5권 이상 작품을 읽은 경우)

1. 콜린 덱스터 : 6권 리뷰, 평균 별점 3.6666...
2. 로스 맥도널드 : 5권 리뷰, 평균 별점 3.6
3. 기리노 나쓰오 : 5권 리뷰, 평균 별점 3.4 
3. 모리스 르블랑 : 5권 리뷰, 평균 별점 3.4
5. 존 딕슨 카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 : 13권 리뷰, 평균 별점 3.269...
6. 미쓰다 신조 : 9권 리뷰, 평균 별점 3.055....
7. 딕 프랜시스 : 5권 리뷰, 평균 별점 3
8. 다카기 아키미쓰 : 8권 리뷰, 평균 별점 2.875
8. 미야베 미유키 : 8권 리뷰, 평균 별점 2.875
10. 마쓰모토 세이초 : 16권 리뷰, 평균 별점 2.84375
11. 와카타케 나나미 : 11권 리뷰, 평균 별점 2.8181...
12. 우타노 쇼고 : 5권 리뷰, 평균 별점 2.8
13. 요코야마 히데오 : 6권 리뷰, 평균 별점 2.75
14. 코넬 울리치 : 5권 리뷰, 평균 별점 2.7
15. 아서 코난 도일 : 9권 리뷰, 평균 별점 2.6666667
15. 조르주 심농 : 9권 리뷰, 평균 별점 2.6666667
15. 기시 유스케 : 6권 리뷰, 평균 별점 2.6666667
18. 엘러리 퀸 : 16권 리뷰, 평균 별점 2.65625
19. 미치오 슈스케 : 6권 리뷰, 평균 별점 2.583333
20 애거서 크리스티 : 33권 리뷰, 평균 별점 2.5757576
21. 에도가와 란포 : 7권 리뷰, 평균 별점 2.5714286
22. 요코미조 세이시 : 12권 리뷰, 평균 별점 2.541...
23. 미카미 엔 : 6권 리뷰, 평균 별점 2.5
비슷한 주제로 13년 전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순위가 대폭 바뀌었네요. 최소 2권 이상의 작품을 읽은 작가는 114명, 어느정도 평균을 낼 수 있는 수치인 5권 이상 읽고 리뷰를 남긴 작가는 33명입니다. 이 중 평균 2.5 이상 별점을 유지한 작가는 콜린 덱스터 외 24명입니다. 프로야구로 따지면, 1군 소속 선수의 72% 정도가 평균 이상이었던 셈이니 굉장히 훌륭한 성적이지요. 25명에 들지 못한 8명 중에서도 요네자와 호노부, 시마다 소지, 스티븐 킹, 아리스가와 아리스 등은 평균 2.4점대로 아쉽게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니 더욱 그러합니다. 명성이 있는 작가는 확실히 이름값을 한다는 증거죠. 가장 많은 작품을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평균 별점은 2.32점인데,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유명한 대표작, 걸작만 추려서 읽은 경우는 별점이 높을테고 많이 읽을 수록 평균 별점은 불리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크리스티 여사님 평균 별점이 비교적 낮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위권을 살펴보면, 5권 이상 읽은 작가 중 꼴찌는 6권 평균 별점이 2.083점인 니시무라 교타로, 전체 꼴찌는 읽은 작품 4권 별점 평균이 1.1점에 불과한 제임스 패터슨이었습니다. 니시무라 교타로는 모르겠지만, 두 번 다시 제임스 패터슨 작품을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탐정별 (5권 이상 읽은 작품만 뽑아봅니다)

1. 탐정별 리뷰한 작품 갯수 순위

1. 에르큘 푸아로 : 15권 리뷰
2. 엘러리 퀸 : 13권 리뷰
3. 셜록 홈즈 : 12권 리뷰
4. 긴다이치 코스케 : 11권 리뷰
5. 가가 (학생 ~ 형사) : 10권 리뷰
6. 87분서 : 9권 리뷰
7. 메그레 경감 : 7권 리뷰
8. 고전부 / 기디온 펠 박사 / 노리즈키 린타로 / 모스 경감 / 히무라 히데오 : 6권 리뷰
13. 미스 마플 / 미타라이 기요시 / 시오리코 / 토츠카와 경부 (+가메이 형사) : 5권 리뷰
2. 탐정별 평균 별점 순위
1. 모스 경감 : 3.66666
2. 셜록 홈즈 : 2.958333...
3. 기디온 펠 박사 : 2.9166...
4. 엘러리 퀸 : 2.6923...
5. 긴다이치 코스케 : 2.6363...
6. 시오리코 : 2.6
7. 고전부 : 2.58333
8. 메그레 경감 : 2.5714...
9. 가가 (학생 ~ 형사) : 2.55
10. 에르큘 푸아로 / 미스 마플 / 미타라이 기요시 : 2.5
13. 87분서 : 2.4444...
14. 히무라 히데오 : 2.41666...
15. 노리즈키 린타로 : 2.25
16. 토츠카와 경부 (+가메이 형사) : 2.2
입니다. 원탑 모스 경감 밑으로 셜록 홈즈, 기디온 펠 박사까지는 평균 이상의 빼어난 별점을 자랑합니다. 확실히 탐정은 영미권 탐정이 더 제 취향이라는걸 알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간략하게 추리소설 1,000편의 리뷰에 대한 요약 정리를 마칩니다.

2006/02/12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민승남 : 별점 3점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 6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민음사

"낯선 승객"과 "리플리" 시리즈로 유명한 추리계의 거장 중 한명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여사의 단편집. (패트리샤라고 하지 않은 것도 좀 재미나네요)

순문학계열 출판물로 유명한 민음사에서 출간되어 의외라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이해가 됩니다. 추리쪽 성향이 덜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추리나 서늘한 맛을 기대했지만 의외로 순문학적인 작품들로 구성되었던 로얄드 달의 "당신을 닮은 사람"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로얄드 달의 단편집은 애초 생각과는 다르게, 정말로 순문학에 가까운 글들이 많았던 반면에 이 작품집은 기대한 만큼의 서늘함을 제공해 주는 작품이 많다는 차이가 큽니다. 대체로 "인간의 본성"을 극한으로 끌어내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는데 몇몇 작품은 읽으면서 감정이입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게 될 정도로 서늘하고 잔인한(?) 이야기들이더라고요. 
그 밖의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들도 단순하지만은 않고, 여사만의 독특한 기묘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도대체 다른 어떤 작가가 바구니짜기나 노인 입양같은 이야기로 이런 극한으로 치닫는 심리 묘사를 그려낼 수 있을까요?
일상 생활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소한 사건과 살인과 같은 큰 사건 모두 시종일관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짧은 길이의 작품 안에 담는 솜씨는 정말 기가 막힙니다. "지적인 암살자(?)" 리플리의 창조주답네요.
이야기들의 배경과 설정이 모두 다르며 다양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건 여사의 다채로운 생활 환경을 반영한 것 같은데, 이러한 세부 디테일들도 재미있었습니다.

범죄나 추리에 가까운 이야기는 많지 않아 추리쪽 장르로 구분하긴 어렵지만, 여사의 작품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책입니다.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단편집 3권도 빨리 구입해서 읽어보고 싶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개인적인 추천작은 "검은 천사가 지켜보다"와 "노인 입양"입니다.

작품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고양이가 물어온 것
한적한 시골에서의 한때를 보내던 허버트 부부와 손님들 앞에 키우던 고양이가 물어온 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우연찮게 발생한 사건에 휩쓸리게 되면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잘 그려낸 작품.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한 소품이지만 순간적인 분노와 폭발하는 심리묘사는 여사님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2.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뉴요커들 한 무리가 자신들의 친구지만 왠지 거리가 멀어지고 서먹해진 친구인 에드먼드에게 짖궂은 장난을 치는 음모를 꾸미는데,그 친구는 직장과 아내에 이어 목숨마저 잃게 된다...
한 집단의 이지메와 같은 행동을 통해, 무심코 저지른 행동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린 작품. 일종의 집단 광기를 일상생활속에 녹여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라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맨 뒤의 누군가가 죽은 다음에 찾아오는 일상에 대한 짤막한 묘사도 서늘합니다.

3. 바구니 짜기의 공포
광고 대행사에서 매채 담당자로 일하는 다이앤은 별장에서 한때를 보내던 중 우연히 자신에게 바구니 짜기의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서서히 광기로 빠져들게 되는데..
정말로 기묘한 작품입니다. 한 여성이 우연한 기회에 자신에게 바구니 짜기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것 때문에 서서히 자신의 통제권을 잃는다는 내용이거든요.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일 수 있는데, 소재가 너무 독특해서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결말은 의외로 현실적이라 조금 시시했어요.

4. 검은 천사가 지켜보다
시카고의 골동품업자 리 맨드빌은 자신의 어머니가 있는 양로원 비용때문에 고향집을 팔기 위해 몇년만에 고향에 찾아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이미 몇년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종의 사기극이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렸다는게 독특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흡사 피해자처럼 보이게 하는 전개도 기묘하면서도 색달랐고요. 여사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5. 네 삶을 경멸해
20살이 된 랠프는 록 밴드 생활을 하며 생활고를 겪어서 아버지에게 원조를 요청하지만 의절당한다.
우리나라에도 있을법한, 방탕한 자식과 아버지간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짤막한 드라마인데 아들 랠프의 심리묘사가 재미난 작품이었습니다. 결말도 인상적이었고요.

6. 에마 C 호의 꿈
남자들만 있는 요트 에마 C 호에 한 미녀가 표류하다 구조된 뒤, 에마 C 호의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헝클어지기 시작한다...
한 작지만 공고한 집단 안에 찾아온 불청객으로 관계의 붕괴가 일어나는 작품. 기묘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7. 노인 입양
매킨타이어 부부는 자식도 없던 차에 우연하게 순수한 선의로 포스터 부부라는 노인 부부를 입양하여 돌보게 되는데...
순수한 선의로 진행한 일이 점차 자신들도 통제하지 못하는, 극단으로 치닫는 서늘한 전개에 박수를 보냅니다! 무엇보다도 결말이 대단한 반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무척이나 참신하고 독특해서 인상적이네요.

8. 로마에서 생긴 일
고위 공무원의 아내인 이사벨라는 남편에 대한 반감과 무료함으로 자신을 쫓아다니는 스토커 우고에게 남편 유괴를 의뢰하는데...
이탈리아를 무대로 미모의 여성과 자작 유괴극이라는 설정이 왠지 "크리시"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인간 관계의 얄팍함을 다루고 있는데 묘사와 디테일은 좋았지만 결말이 시시한 편이라 좀 아쉽더군요.

9. 양손의 떡
잘나가는 뉴요커 해리는 결혼을 앞두고 두 미녀와의 양다리 관계를 즐기며 두명중 한명을 선택하기 위해 저울질 하던 중 즉흥적으로 두 여인을 모두 초대하게 되는데...
한 남성의 독특한 심리를 보여주는 작품. 전혀 이상하지가 않고 자연스러워 보이게끔 하는 묘사가 좋았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해봄직한 고민과 실수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러한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10. 연
폐렴으로 죽은 동생 엘지를 그리워하며 월터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거대한 연을 만들어 날리게 된다.
동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 지나쳤고 그 때문에 비극이 발생한다는 내용.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한 소년의 환타지가 어른들에 개입에 의해 비극으로 끝나는 짤막한 동화라 생각됩니다. 소년 시절 환타지는 거의 다 비극이기 마련이지요..

11. 검은집
팀은 마을 술집에서 자주듣는 마을의 흉가 "검은집"의 정체를 밝히려는 시도를 벌이지만...
환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대한 이야기. 책 뒤에 해설에서 여러 정신분석 이론을 가지고 추가로 설명해 주는데 해설 쪽이 더욱 재미있었습니다.

2023/10/05

Nervous Breakdown 너버스 브레이크다운 1~13 - 타가미 요시히사 : 별점 3점


90년대 초, 중반에  '타누마 사립탐정 사무소' 멤버들이 - 특히 브레인 역할인 안도와 액션 전담 미와 컴비 -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한다는 추리 만화. 지금은 없어진 월간지 "코믹 NORA"에 연재했었지요. "그레이" 등 성인 취향의 어둡고 비정한 SF, 범죄물로 유명한 타가미 요시히사의 작품입니다. 저는 "그레이" 때부터 좋아했던 작가라 이런저런 작품들 - 예를 들어 "화석의 기억" - 을 원서로 구해 읽었었는데, 이 작품은 "메탈헌터"와 함께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유이한 작품입니다. 소개 당시 한 권씩 구입해서 읽었고,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지요. 
예전에 스핀오프 "Night Adult Children" 리뷰를 올렸던 적은 있었는데, 추석 연휴를 맞아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전 13권을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등장인물들이 3등신과 8등신을 오가는 작화가 가장 큰 특징으로, 대부분의 경우 3등신인데  아래와 같이 특정 컷에서만 8등신으로 등장하는 식입니다. 


3등신 캐릭터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추리를 하고 시니컬하고 분위기있는 대사를 내뱉는게 묘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특별히 모든 등장인물들이 8등신으로만 등장하는 에피소드도 두 편 있습니다. - 안도가 주인공인 "고즈에로 가는 마지막 버스", 미와가 주인공인 "살인자에게 인사를" - 두 편 모두 의외의 재미를 가져다주는 좋은 작품으로, 전부 8등신으로 진지하게 그렸어도 좋았을 것 같아요.

등장인물들도 독특합니다. 안도는 포지션은 전형적인 명탐정이지만, 정의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거든요.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진범을 체포하는데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정해진 보수를 받은 만큼 일하고요. 사건 도중에 일어난 트러블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의뢰인에 대해서 "그 여자가 죽건 말건 난 상관없어"라고 말할 정도고, 아래처럼 지인의 죽음에도 눈 하나 깜빡않는, 인정머리 없는 남자입니다.



몸이 굉장히 약하고, 여자들이 쉽게 반하는 미남이라는 속성도 붙어 있는데 이런 캐릭터는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네요. 아래와 같이 멋진 말을 남기는 장면은 과연 여자들이 반할만하다 싶기도 하고요.

"미야한테 전할 말이 있는데...."

미와는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개그 캐릭터에 가깝지만, 그 초인적인 체력이 유용하게 활용될 때가 많다는 점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입니다. 아래와 같이 가끔은 멋지게 등장합니다. 그냥 개그컷에 가깝지만....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작가의 추리물에 대한 나름대로의 애정이 잘 녹아 있거든요. 목차부터가 고전 명작의 패러디들이 많을 정도로요. 
하지만 트릭이 사용된 본격물보다는 범죄 드라마, 스릴러에 가까운 에피소드들이 더 완성도가 높습니다.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전개도 좋고, 사건에 몰입하게 만드는 상황과 심리 묘사가 탁월한 덕분입니다. 작가도 이런 특성을 알아챘는지 뒤로 갈 수록 트릭보다는 드라마에 집중하며, 덕분에 더 볼 만해집니다.
이외에도 죽어가는 남편의 첫사랑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조사에 나선다는 "어느 조용한 죽음" 처럼 잔잔한 일상계로 인간 관계를 되새기게 만드는 에피소드들도 독특합니다. "고백의 십자가", "마지막 Chiristmas" 같은 일상계 러브 스토리까지 수록되어 있는 등 다루는 장르의 폭도 넓고요. "노리코의 죽음"같이 SF 등 다른 장르물과 혼합된 사랑 이야기(?), 미와가 맹활약하는 액션물들도 괜찮습니다. 

정통 본격물 맹점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 패러디들도 큰 재미를 가져다 줍니다. 과거 잔혹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던 곳에서 실종자가 한 명 나왔지만 안도가 "아직 기껏해야 실종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런 사건은 다음 피해자가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라고 말하는 장면처럼요. 아래의 밀실 살인에 대한 비판 역시 공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추리 만화로서 논리적이거나, 감탄할만한 트릭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많지 않다는건 다소 아쉽습니다. 만들기 쉬운 암호 트릭 - 10권 "산쥬노출"의 "미키가 노래하는 미버 (タレラヤ小さぃ子羊肉)"처럼요 - 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 오히려 트릭이 사용된 에피소드는 다소 억지스럽다는 점은 단점입니다. 예를 들어 "바이바이 엔젤"에서는 수조로 이루어진 밀실에서 수조를 치우는건 불가능하다고 등장인물들이 이야기하지만, 수조를 어떻게든 치웠다는게 진상이었습니다. 이런건 반칙을 넘어서는 억지죠. 

3등신 캐릭터가 등장하기 때문인지 개그도 많은데, 안도의 약한 체력과 미와의 야수같은 육체, 의뢰인이었다가 타누마 탐정 사무소에서 일하게 되는 미야가 재벌 이나바 테츠노스케의 손녀라는 등의 캐릭터 설정을 활용한게 많습니다. 문제는 다소 뻔하고 식상한 개그들이라는 겁니다. 반복적이기도 하고요. "15세" 딱지가 붙을 정도로 외설적인 개그도 많은데,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아서 안 나오느니만 못했습니다. 마지막 에피소드 "마지막은 참극"은 미와가 등장인물 모두를 죽이는 꿈을 꾼다는 내용인데,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았고요.
아울러 학산 문화사 초기 번역 소개작이라 그런지 여성의 노출 장면을 어거지로 덧칠하는 등의 문제도 크며, 3등신 캐릭터들의 얼굴 구분이 쉽지 않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3권의 "모두가 닮은 사람"이라는 에피소드에서 모두가 닮았다는걸 트릭으로 써먹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래도 다시 읽어도 여전한 재미를 가져다주는건 분명합니다. 수록작들 편차는 크지만 몇몇 작품들은 충분히 '걸작' 소리를 들을만 하다 싶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각 권별 수록작들 제목을 소개해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제가 아는 한 원제를 달아보기는 했는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1권 :
갑자기 사라져 버린 케이코
그래도 사랑스러운 여인이여
원과 면 : 점과 선
황색의 연구 : 주홍색 연구
 
2권
일요일은 죽는 날
걱정일세, 여탐정!
여름빛깔 카루이자와
타누마 소장 최후의 사건 : 트렌트 마지막 사건
얼어붙은 파도 : 얼어붙은 섬 또는 얼어붙은 송곳니
 
3권
도둑은 가득히 : 태양은 가득히
모두가 닮은 사람 : 당신을 닮은 사람
제로의 정점 : 제로의 초점
한여름 낮의 꿈 : 한여름 밤의 꿈
어느 조용한 죽음

4권
하얀 커튼 : 검은 커튼
입학 : 졸업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새빨간 거짓말
사라질 뻔한 탐정 : 사라진 남자 (?)
 
5권
새벽녘의 시선 : 새벽의 데드라인
그리고 소녀는 사라졌다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변호인측 괴인 : 검찰측 증인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내일도 무사하게 하소서

6권
오발탄
타누마 가의 일족 : 이누가미 일족
노리코를 위하여 : 요리코를 위해
분수령
마진테 부인은 죽었다

7권
귀여운 설녀
어느 비오는 오후 갑자기
Midnight Fool
매장 지도
50의 살인

8권
시체와 여행하는 남자 :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고백의 십자가 : 공허한 십자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남자들
토모여, 고이 잠들라 :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 (기타가타 겐조)

9권
바이바이 엔젤 : 바이바이, 엔젤
추억의 매장
모르그 가의 살인 : 모르그 가의 살인
레이디 하트브레이크
" " (무제)

10권
산쥬노출
마지막 Chiristmas
고즈에로 가는 마지막 버스 : 우드스톡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
불타는 사나이 (Man on Fire) : Man on Fire (크리시 시리즈)
치에는 어디에
사람은 어째서 살해당하는가 :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11권
악몽같은 여자 : 악마같은 여자 ("디아볼릭")
환상의 여인 : 환상의 여인
의뢰인으로부터 한마디 (과거 연재작 특별편) 시리즈
  • 귀여운 여인
  • 설녀가 보고 있었다, 또는 "고립된 산장"을 주제로
  • 울부짖는 여자

12권
보디가드
살인자에게 인사를
셀룰로이드 살인
어설픈 시체
움직이는 시체

13권
여자에게는 맞지 않는 직업 :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랑의 탐정들
가장 위험한 유행 : 가장 위험한 게임
도중의 집 : 중간 지점의 집
리틀 루즈 걸 : 리틀 드러머 걸
마지막은 참극


본편 외에도 "스페셜 리포트"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유명 추리 소설들을 패러디한 4컷 만화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당시에 만화책이 3,500원이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모든 물가가 3배 이상은 올랐을텐데, 만화책만은 거의 오르지 않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