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민음사 |
"낯선 승객"과 "리플리" 시리즈로 유명한 추리계의 거장 중 한명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여사의 단편집. (패트리샤라고 하지 않은 것도 좀 재미나네요)
순문학계열 출판물로 유명한 민음사에서 출간되어 의외라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확실히 추리쪽 성향은 덜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더군요. 추리나 서늘한 맛을 기대했지만 의외로 순문학적인 작품들로 구성되어있던 로얄드 달의 "당신을 닮은 사람"과 꽤 유사한 성격이에요.
하지만 로얄드 달의 단편집은 애초 생각과는 다르게, 정말로 순문학에 가까운 글들이 많았던 반면에 이 작품집은 기대한 만큼의 서늘함을 제공해 주는 작품이 많다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대체로 "인간의 본성"을 극한으로 끌어내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는데 몇몇 작품은 읽으면서 감정이입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게 될 정도로 서늘하고 잔인한(?) 이야기들이거든요.
그밖의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들도 단순하지만은 않고 여사만의 독특한 기묘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또 이야기들의 배경이나 설정이 모두 다르며 다양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여사의 다채로운 생활 환경을 반영한 것 같기도 한데 이러한 세부 디테일을 읽어나가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가져다 줍니다.
일상 생활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소한 사건에서부터 어느정도 큰 사건 (살인 등)을 다루면서도 시종일관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이렇게 짧은 길이의 작품 안에 담는 솜씨는 정말 "지적인 암살자(?)" 리플리의 창조주 다운 풍모라 생각됩니다. 도대체 다른 어떤 작가가 바구니짜기나 노인 입양같은 이야기로 이런 극한으로 치닫는 심리 묘사를 그려낼 수 있을까요?
범죄나 추리에 가까운 이야기는 많지 않아 추리쪽 장르로 구분하긴 어렵지만 여사의 작품세계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추리계열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다는 것도 마음에 드네요.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단편집 3권도 빨리 구입해서 읽어보고 싶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개인적인 추천작은 "검은 천사가 지켜보다"와 "노인 입양"입니다.
작품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고양이가 물어온 것
한적한 시골에서의 한때를 보내던 허버트 부부와 손님들 앞에 키우던 고양이가 물어온 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우연찮게 발생한 사건에 휩쓸리며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잘 그려낸 작품.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한 소품이지만 순간적인 분노와 폭발하는 심리묘사는 여사님답다는 생각이 드네요.
2.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뉴요커들 한 무리가 자신들의 친구지만 왠지 거리가 멀어지고 서먹해진 친구인 에드먼드에게 짖궂은 장난을 치는 음모를 꾸미는데,그 친구는 직장과 아내에 이어 목숨마저 잃게 된다...
한 집단의 이지메와 같은 행동을 통해 무심코 저지른 행동이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린 작품.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라는 속담이 생각나는데 일종의 집단 광기를 일상생활속에 녹여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맨 뒤의 누군가가 죽은 다음에 찾아오는 일상에 대한 짤막한 묘사도 서늘합니다.
3. 바구니 짜기의 공포
광고 대행사에서 매채 담당자로 일하는 다이앤은 별장에서 한때를 보내던 중 우연히 자신에게 바구니 짜기의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서서히 광기로 빠져들게 되는데..
정말로 기묘한 작품입니다. 한 여성이 우연한 기회에 자신에게 바구니짜기의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것 때문에 서서히 자신의 통제권을 잃는다는 내용인데 전개 자체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소재가 너무 독특해서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결말은 의외로 현실적이라 조금 시시하기도 하네요.
4. 검은 천사가 지켜보다
시카고의 골동품업자 리 맨드빌은 자신의 어머니가 있는 양로원 비용때문에 고향집을 팔기 위해 몇년만에 고향에 찾아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이미 몇년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종의 사기극이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 독특한 시각으로 그리고 있고,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흡사 피해자처럼 보이게 하는 전개가 아주 기묘하면서도 색달랐습니다. 여사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5. 네 삶을 경멸해
20살이 된 랠프는 록 밴드 생활을 하며 생활고를 겪어서 아버지에게 원조를 요청하지만 의절당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있을법한 방탕한 자식과 아버지간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짤막한 드라마인데 아들 랠프의 심리묘사가 재미난 작품이었습니다. 결말도 인상적이었고요.
6. 에마 C 호의 꿈
남자들만 있는 요트 에마 C 호에 한 미녀가 표류하다 구조되며 에마 C 호의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헝클어지기 시작한다...
한 작지만 공고한 집단 안에 찾아온 불청객으로 관계의 붕괴가 일어나는 작품으로 기묘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7. 노인 입양
매킨타이어 부부는 자식도 없던 차에 우연하게 순수한 선의로 포스터 부부라는 노인 부부를 입양하여 돌보게 되는데...
순수한 선의로 진행한 일이 점차 자신들도 통제하지 못하는, 극단으로 치닫는 서늘한 전개에 박수를 보냅니다! 무엇보다도 결말이 대단한 반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무척이나 참신하고 독특해서 인상적이네요.
8. 로마에서 생긴 일
고위 공무원의 아내인 이사벨라는 남편에 대한 반감과 무료함으로 자신을 쫓아다니는 스토커 우고에게 남편 유괴를 의뢰하는데...
이탈리아를 무대로 미모의 여성과 자작 유괴극이라는 설정이 왠지 "크리시"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인간 관계의 얄팍함을 다루고 있는데 묘사와 디테일은 좋았지만 결말이 시시한 편이라 좀 아쉽더군요.
9. 양손의 떡
잘나가는 뉴요커 해리는 결혼을 앞두고 두 미녀와의 양다리 관계를 즐기며 두명중 한명을 선택하기 위해 저울질 하던 중 즉흥적으로 두 여인을 모두 초대하게 되는데...
한 남성의 독특한 심리를 보여주는 작품. 전혀 이상하지가 않고 자연스러워 보이게끔 하는 묘사가 좋았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해봄직한 고민과 실수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러한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10. 연
폐렴으로 죽은 동생 엘지를 그리워하며 월터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거대한 연을 만들어 날리게 된다.동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 지나쳤고 그 때문에 비극이 발생했다는 내용.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한 소년의 환타지가 어른들에 개입에 의해 비극으로 끝나는 짤막한 동화라 생각됩니다. 어쨌건 소년 시절의 환타지는 거의 다 비극이기 마련이니까....
11. 검은집
팀은 마을 술집에서 자주듣는 마을의 흉가 "검은집"의 정체를 밝히려는 시도를 벌이지만...
환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대한 이야기. 책 뒤에 해설에서 여러 정신분석 이론을 가지고 추가로 설명해 주는데 해설 쪽이 더욱 재미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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