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열쇠 - 대실 해밋 지음, 김우열 옮김/황금가지 |
도시의 거물 폴 매드빅을 보좌하는 동생같은 존재 네드 보몬트는, 폴이 친분을 맺고 그의 딸과 결혼하기를 원하는 헨리 의원의 아들 테일러 헨리의 살해된 시체를 발견한다. 네드는 폴 죽음에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 잔챙이 버니 데스테인이 도주하자, 개인적인 금전 문제도 있어서 그를 쫓아 헨리의 모자를 이용한 조작으로 그를 궁지에 몰아 넣는다.
한편, 폴과 관련된 팀 아이번스의 주요 증인이 살해되고, 이 모든게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폴 매드빅을 음해하려는 적대 세력의 음모가 아닐가 생각하는데....
대실 해밋 전집 4권. 해밋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이런저런 리스트 들에서 순위권에 꼽히는 대표작이지요. 그동안 눈여겨 보고 있다가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하드보일드 범죄물로 주인공 네드 보몬트가 완벽한 안티 히어로라는게 특징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위 사람들을 최대한 이용한다는건 하드보일드 주인공스럽지만 그는 탐정도 아니고, 정의를 위해 싸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범죄에 연루된게 분명한 폴 매드빅을 위해 일할 뿐 아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온갖 더러운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악당에 더욱 가깝지요. 당연히 여자들에게도 잔인하고 냉정합니다.
또 뉴욕에서 이름모를 촌동네로 흘러들어온지 3개월만에 그 도시 최고의 실력자의 친동생 급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능력자입니다. 작 중에서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 중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갖추고 있거든요. 오히려 완력 면에서는 별다른 활약이 없다는게 독특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은 도시에서 두 개의 파벌이 경쟁하는 와중에 주인공이 나타나 분란을 일으킨다는 <<붉은 수확>> 류의 전개 속에서, 네드 보몬트는 충심을 다해 폴 매드빅을 돕고 진짜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네드의 폴 매드빅을 위한 충심은 변함이 없고, 배신을 하지 않기 위해 목숨까지 거는 의리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같은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아요. 이런 점에서 안티 히어로의 활약을 그린 하드 보일드 추리물이지만, 나름 정의로운 활극기도 합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고조 할아버지 쯤 되는 이야기랄까요.
하지만 이야기 전개는 작위적이고 평이합니다. 버니 데스테인을 엮기 위한 모자 작전 정도만 그럴싸할 뿐이에요. 다른 네드 보몬트의 행동은 모두 즉흥적인데도 불구하고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작위적이에요. 아버지가 헨리를 살해했다고 굳게 믿는 오팔 매드빅이 기자에게 털어놓으려 합니다. 그래서 네드는 그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신문사 편집장 매튜스의 집을 찾아가는데, 그 때 벌어지는 상황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침 그곳에는 오팔의 고백을 이용하려고 폴의 라이벌인 섀드 일당이 있었고, 또 섀드 일당과 남편의 기묘한 행동거지를 짜증내하던 매튜스의 아내 엘로이스도 함께 있었던 거죠. 그 상황에서 엘로이스의 유혹으로 네드가 넘어간 척을 하자 매튜스는 자살해 버리고 맙니다. 마침 이용하기 좋은 유언장을 남기고요. 그래서 네드는 폴에게 연락하여 신문에 오팔의 고백이 발표되지 않게 막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냥 봐도 너무 편의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느낌이지요?
폴의 자백을 지방 검사에게 증언한 뒤, 헨리 의원이 진범임을 증명하는 결말도 억지스럽습니다. 헨리 의원이 자백을 할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증거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폴이 뒤집어 쓰기로 결정한 이상, 이를 뒤집는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네드가 폴의 결백을 확신한다는건 아무런 증거도 되지 못하니까요. 아들 모자를 쓰고 돌아왔다? 아들 모자가 아버지 집에 있는게 증거가 될리 없죠. 지팡이 역시 원래 그의 물건이니 집에 있는게 당연하고요. 이 마지막 반전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설정과 전개에 전형적인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안티 히어로이기는 하지만 네드 보몬트의 심리 묘사와 행동은 다른 하드보일드 속 탐정들의 스테레오 타입에 가깝습니다. 지방검사마저도 두려워하는 폴에게도 서슴없이 직언을 날리며, 주먹질은 물론 총질도 두려워하지 않는 상남자거든요. 이는 그 누구도 네드를 우습게 보거나, 등쳐먹을 수 없으며 돈보다는 자존감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으로 다른 하드보일드 탐정들과 다를게 없죠.
네드와 정말로 우연하게 만난 제프가 섀드를 죽이는 등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악당들이 서로 싸움으로 붕괴하고 마는 전개도 전형적이라 구태의연하고 식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단점은 추리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범인이라고 폴이 고백하기는 하지만, 흉기로 사용한 지팡이는 이미 태워버렸다는 증언이 헨리 의원의 딸 재닛에 의해 곧바로 부정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헨리 의원이 진범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이고, 그렇게 되면 모든게 다 맞아 떨어지니까요. 실제로 진상도 그러했고요. 앞서 말씀드렸듯, 아무런 증거도 없어서 그다지 정교한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읽는 재미만큼은 확실하고, 문체도 수려하고 멋집니다. 하드보일드 작품다운 위트있는 명대사도 많고요. 병문안을 온 재닛에게 모진 소리를 한 뒤, 그녀가 떠나는걸 본 간호사가 그녀가 울음을 꾹 참으면서 가더라는 말을 듣고. 네드가 "내 수완이 약해지는 게 틀림없군. 예전 같으면 울렸을 텐데."라고 말하는 식인데, 완전 제 취향이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하드보일드 작품 중 최고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장점도 많고 좋은 작품임에도 분명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에게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덧붙이자면, 유리열쇠는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자면 "썩은 동아줄"을 의미하는 듯 싶네요. 재닛의 꿈 속에서 그녀와 네드가 뱀을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사용하지만, 유리라서 부서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문을 잠그지 못해 뱀 때에게 죽고 만다는 이야기지요. 이것이 그녀가 오빠 살인범으로 폴을 지목하여 음해하고, 소문을 퍼트린 행위를 뜻하는지, 아니면 진범이 아버지 헨리 의원이라는걸 알게 된 후 네드와 떠나기로 결심한 행동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꿈에서는 네드와 함께 죽고 마는데, 꿈과 같은 결과라면 같이 떠나는 행동이 가장 위험해 보입니다. 물론 네드는 상남자답게 같이 떠나기로 결심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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