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맥주가 있었다 - 미카 리싸넨.유하 타흐바나이넨 지음, 이상원.장혜경 옮김/니케북스 |
유럽의 기나긴 역사에서 맥주가 중요한 대목을 장식했던 이야기들을 선별하여 소개하는 미시사, 음식사, 문화사 서적. 역사 속 맥주가 관련된 특정한 사건을 수 페이지 정도 소개한 뒤, 해당 사건과 관련된 현대의 맥주를 마지막에 소개하는 식으로 2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취지에 걸맞는 내용이 많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맥주 때문에 정말 역사의 흐름이 바뀌거나 한 이야기는 기대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역사의 어떤 한 장면에서 맥주가 멋지게 등장하거나 활용된 정도는 기대했는데, 절반 이상의 이야기가 그렇지 못합니다. 단순히 유럽의 특정 역사를 소개하면서 '그 때는 아마 맥주를 마셨을거다' 정도에 그치거든요. 추정 자체는 꽤 그럴싸 합니다. 문제는 사료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이죠.
조금 맥주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이야기들은 단지 등장인물들이 맥주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했거나, 맥주 회사가 관련되어 있는 정도에 그칩니다. 예를 들자면 난센의 북극 탐험은 단지 링그네스 양조장에서 탐험 비용을 후원했을 뿐이죠. 히틀러가 맥주집에서 바이에른 정부를 실각시키고 제국 정부를 수립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던 역사를 맥주와 관계가 있다고 하기도 좀 애매하고요. 옥스퍼드 대학 문인들이 펍에서 열리는 문학 클럽에 참석하다가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 등을 발표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장소가 펍일 뿐입니다. 딱히 맥주와 관련이 있지는 않아요.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 장관 역할을 멋지게 수행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이야기나 체코 대통령 하벨의 이야기는, 그 둘이 술집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다는게 전부고요.
그래도 맥주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들도 많고 시기적으로는 수도원에서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 현대까지, 장소로는 유럽 전역을 무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그 폭은 상당히 넓고 방대합니다. 때문에 재미있는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들이 적지는 않은 편이에요.
맥주가 중요한 이야기부터 살펴보자면, 30년 전쟁 당시, 목마른 스웨덴 왕 구스타브 아돌프가 농부로부터 맥주를 대접받은 후 커다란 루비가 박힌 금반지를 답례로 선사하고,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일화는 명백히 맥주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료로 증명되지는 않은 전설급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요. 그래도 이 전설 후에도 해당 지역에서는 계속 맥주를 만들어 왔으며, 지금의 크로스티츠 양조장은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양조 시설 중 한 곳으로 대표작인 '파인헤르베스 필스너'는 라벨에 구스타브 아돌프의 초상화를 담아 판매되고 있다고 합니다. 400년 이상 된 전설 속 맥주라니 마케팅으로는 더할 나위 없네요.
1836년, 유럽 대륙 첫 철도 운송 화물이 뉘른베르크 레데러 양조장에서 퓌르트로 보낸 맥주 두 통이었다는건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레데러는 현재도 독일 리데베르거 그룹의 계열사로 '레데러 프리미엄 필스'를 계속 출시하고 있답니다.
파스퇴르가 맥주 양조 분야에서 독일을 물리치기 위해 열정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맥주가 중심입니다. 영국 위트브레드 양조장과 협력하여 최적의 열처리 온도가 섭씨 50~55도라는걸 알아내는 등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맥주에 관한 연구>>라는 유럽 맥주 양조인의 경전과도 같은 책을 출간했다는 내용이니까요. 그런데 그의 맥주 실험의 가장 큰 수혜자는 프랑스가 아니라 코펜하겐의 칼스버그 양조장이라는게 재미있네요. 결국 칼스버그에서 파스퇴르의 꿈이었던 미생물없는 라거 맥주 효모 배양에 성공했다니 진짜 후계자인 셈입니다.
처음 알게 된 이야기도 제법 됩니다. 오줌싸게 소년 동상의 모델은 브라반트 공국의 수장인 어린 고드프리 3세로, 당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어린 나이로 출정했을 때 반란군을 향해 오줌을 싼 게 유래라는 설이 대표적입니다. 이 때, 유모가 맥주를 마시고 수유를 했거나 아니면 실제로 맥주를 마셔서 요의를 느꼈을 거라고 설명하는건 좀 억지스러웠지만, 나름 재미있었어요. 함께 알려주는 브라반트 공국의 중심지 브뤼셀의 전통있는 맥주 '램빅'도 아주 입맛을, 아니 흥미를 돋구고요.
스웨덴의 미식가 전쟁 영웅 요한 아우구스트 산델스 역시 이전에는 알지 못했었던 인물입니다. 1808년, 스웨덴과 러시아가 핀란드에서 벌였던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입니다. 다만 소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맥주 관련된 일화는 없습니다. 러시아 군 보급품을 털었을 때, 맥주도 함께 털었을거라고 추정하는게 전부죠. 그래도 지금 '산델스'라는 이름의 맥주가 산델스가 활약했던 핀란드 양조장 올비에서 양조되어 판매된다니 한 번 마셔보고 싶네요.
근현대사로 넘어오면서는 재미가 덜하지만, 1935년 투르 드 프랑스 경주에서 맥주 탓에 벌어진 순위 변경이라던가, 이탈리아 경제 성장기에 함께 발전한 페로니 맥주의 마케팅 전략, 아일랜드가 무섭게 성장하다가 리먼 사태 등으로 휘청일 당시, 카우언 총리의 기네스 맥주 사랑 등은 기억에 남네요. 특히 폴란드의 맥주 애호가 정당 이야기는 온갖 정당이 창궐하는 지금의 우리나라를 연상케 해서 제일 인상적이었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기획 의도대로 완벽하게 쓰여진 책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알게된 이야기들이 많기도 하고, 저자들의 글 솜씨도 유쾌하기 때문이죠. 맥주 한 잔 하면서 읽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책에서 소개하는 맥주 리스트를 인용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파는 맥주는 한 개 씩 구입해서 마셔볼 예정입니다.
1. 생 푀이엥 트리플 St-Feuillien Triple 벨기에
2. 칸티용 괴즈 100% 램빅 바이오 Cantillon Gueuze 100% Lambic Bio 브뤼셀 (벨기에)
3. 아인베커 우어 보크 둔켈 Einbecker Ur-Bock Dunkel 아인베크 (독일)
4. 린데만스 파로 Lindemans Faro 블렌제비트 (벨기에)
5. 우어 크로스티처 파인헤르베스 필스너 Ur-Krostitzer Feinherbes Pilsner 크로스티츠 (독일)
6. 발티카 No.6 포터 Baltika No.6 Porter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7. A. 르꼬끄 포터 A. Le Coq Porter 타르투 (에스토니아)
8. 올비 산델스 Olvi Sandels 이살미 (핀란드)
9. 레데러 프리미엄 필스 Lederer Premium Pils 뉘른베르크 (독일)
10. 위트브레드 베스트 비터 Whitbread Best Bitter 웨일스의 마고 (영국)
11. 칼스버그 Carlsberg 코펜하겐 (덴마크)
12. 링그네스 임페리얼 폴라리스 Ringnes Imperial Polaris 오슬로 (노르웨이)
13. 그랭 도르주 뀌베 1898 Grain d'Orge Cubee 1898 릴 (프랑스)
14. 레벤브로이 오리지널 Lowenbrau Original 뮌헨 (독일)
15. 베를리너 킨들 바이세 Berliner Kindl Weisse 베를린 (독일)
16. 크로넨버그 1664 Kronenbourg 1664 오베르네 (프랑스)
17. 그래비타스 Gravitas 브릴 (영국)
18. 스핏파이어 프리미엄 켄티시 에일 Spitfire Premium Kentish Ale 파버샴 (영국)
19. 페로니 나스트라즈로 Peroni Nastro Azzurro 로마 (이탈리아)
20. 크라코노시 스베틀리 레작 Krakonos Svetly Lezak 트루트노프 (체코)
21. 지비에츠 Zywiec 지비에츠 (폴란드)
22. 사라예브스코 피보 Sarajevsko Pivo 사라예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23. 기네스 드래프트 Guineness Draught 더블린 (아일랜드)
24. 하이네켄 Heineken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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