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졸업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
T대학생인 가가와 친구들 - 사토코, 나미카, 도도와 쇼코, 와코와 하나에 -은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쇼코가 원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정황상 자살로 보였으나 옆방 학생에 의해 외부에서의 침입이 의심되는 등 살해 의혹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들의 고교 은사 미나미사와와 함께 한 다도회에서 나미카마저 음독하여 죽고 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시리즈 캐릭터인 가가 형사 시리즈 제 1작. 1986년 발표된 작품으로 초기작입니다.
작품은 전형적인 고전 본격 퍼즐 미스터리물입니다. 아래의 수수께끼 두 개를 풀어나가는 이야기니까요.
- 완벽한 밀실에 가까운 쇼코의 원룸에 어떻게 침입하여 살해하고 빠져나갔는지?
- 설월화 게임 중 어떻게 나미카를 특정하여 독을 먹일 수 있었는지?
그러나 초기작이라 그런걸까요?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일단 트릭이 영 아닙니다. 특히 형상기억합금으로 문 자물쇠를 가공했다는 첫 번째 트릭은 정말 별로에요. 겨울날 닫힌 창문 밖에서 라이터 불로 지지는 정도로 변형이 가능할 정도로 형상기억합금의 변형력이 좋을리 없으니까요. 또 담배를 피워본 사람은 다들 알겠지만 라이터로 뭔가를 가열하는 행위는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발표 당시에는 첨단이었을 소재를 활용한 과학 트릭이기는 했지만, "탐정 갈릴레오"만큼의 설득력을 보여주지 못해서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트릭, 즉 설월화 게임에서 타깃을 나미카로 정하게 만든 트릭은 좀 낫습니다.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복잡하지만, 여러 그림들을 사용하여 설명해주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쉬웠고요. 다도에서 따왔다는 설월화 게임의 룰 자체가 친숙하지 않은 만큼, 이런 배려는 아주 고맙더군요. 트릭도 뻔할 수는 있지만 확실한 방법일 뿐더러, 이를 밝혀냄으로써 "공범"이자 "진범"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괜찮았습니다.
허나 트릭이 작품 내용과 따로 논다는건 문제입니다. 나미카가 쇼코의 자살 사건과 별개로 벌인 조사가 그녀의 검도 결승전 의혹과 관련되어 있어서 설월화 게임 사건이 일어났다는 동기는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나미카가 검도에 얼마나 진지했는지를 작중에서 효과적으로 보여주지 못한 탓에, 그녀가 설월화 게임으로 자신의 우승을 방해한 친구를 응징하려 했다는건 납득가는 설정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아무리 검도가 중요하다 해도, 자기가 이상한 약을 먹어서 시합에서 졌다고 해도 친구한테 비소를 먹일 생각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쇼코의 죽음에 대한 징벌보다 자신의 검도 시합을 망친 친구를 응징하기 위해 범인(으로 의심되는)에게 협력을 요청하여 게임을 벌인다는 건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와코와 하나에에게 테니스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조차 설명되지 않아서 이런 복수가 무슨 의미인지 알기도 힘들었고요.
또 도도가 나미카를 살해해서 얻는 게 무엇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쇼코의 죽음은 어쨌든 그녀의 자살 시도로 말미암은 것이고, 도도가 그것을 방조했다 치더라도 그건 큰 범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나미카를 죽인 것은 자살로 덮기에는 무리수도 많고, 범인이 너무 적은 인물들로 한정되기에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간다면 이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미카 방에서 비소가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경찰 수사가 진작 시작되었을 테고, 나미카가 마실 차에 뭔가를 넣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도도와 사토코뿐이었으니 진작에 꼬리를 잡혀을테니까요. 이런 리스크를 짊어지느니 차라리 형상기억합금을 이용해 다시 침입하여 원룸에서 자살로 위장하는 게 나았을 겁니다.
그리고 도도는 나미카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트릭을 만든 뒤 억지로 가져다 붙인 동기라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쇼코의 죽음은 친구들이 입을 모아 그녀가 자살할 리 없다고 말하는데, 마지막에 도도의 편지로 사실은 자살이었다고 밝히는건 반칙으로 보이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명성에 걸맞은 읽는 재미는 있었지만 트릭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이야기와 전혀 어우러지지 못한 작품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은 설월화 게임 트릭과 그것 때문에 범인이 밝혀지는 부분 정도 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도 초기에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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