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숲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
주의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카야나기 발레단 사무실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피해자는 화가 가자마 도시유키로 그가 몰래 침입한 것을 발레단원 하루코가 살해한 것. 정당방위로 생각되지만 가자마가 발레단에 침입한 이유를 알지못해 고민하던 경찰들을 농락하듯 발레단 연습에서 발레 마스터 가지타가 살해당하게 된다.
두개의 사건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가가는 발레리나 미오에게 마음을 뺐기면서도 사건의 진상에 점점 접근해 나가는데....
<졸업>에서의 연인 사토코와 헤어진 뒤, 경찰이 된 가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가 형사 시리즈 두번째 작품.
가장 큰 특징이라면 추리소설이기는 하지만 "추리"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선 사건의 발단이 되는 가자마의 죽음은 별다른 트릭,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 사고사에 가깝죠. 추리의 여지는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물론 맨 마지막에 범인은 하루코가 아니었다는 진상이 밝혀지기는 합니다. 그러나 독자가 주어진 정보로 진상을 밝히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추리 소설의 영역은 아니에요. 맥락상 하루코가 죽였다라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기도 하고요.
두번째 사건인 가지타 살인사건은 트릭이 개입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가지타가 살해당한 방법이 뭔가에 찔렸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윗옷 안에 모종의 장치를 부착했기 때문이라는건 현장 검증만으로 초기에 밝혀지는 것으로 특별히 대단한 트릭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범인인 야스코가 이렇게 장치 트릭까지 사용해가며 범행을 저지를 이유가 없다는 단점 역시 커요. 경찰 수사가 집중되는 와중에 공연 연습 중 살해한다는 미친 짓거리 덕분에 발레단 사람으로 용의자는 특정될 뿐더러, 다른 사람을 시켜 자켓에 물을 묻히는 알리바이 공작을 통해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시도는 작중 언급되듯 공범, 혹은 우연으로 비롯될 수 있는 유치한 공작에 불과해서 결국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거든요. 한마디로 말해서, "쓸모 없고 무모하고 현실성없는 바보같은 짓거리"였다는 것입니다. 이래서야 추리적으로 점수를 주기가 영 어렵죠. 그리고 가지타가 자기 등을 뭔가가 찌르는데도 자리에 앉아 공연을 감독했으리라는 확신은 어디서 비롯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상식적이라면 벌떡 일어나 등에 뭐가 있나 확인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이럴거였다면 차라리 의자에 주사기를 붙여놓는 식으로 흉기가 드러나도 상관없도록 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흔해빠진 주사기야말로 구입 경로를 파악하기 어려웠을테고 공연연습 중 수시로 단원들이 지나다녔으니 용의자를 만들기가 더 쉬웠을테니까요.
하기사 4년전 배신의 복수라는 동기부터가 많이 빈약하다는 것도 문제에요. 자신을 치정사건의 당사자로 몰았다는 것인데 4년전 사실이 밝혀진 것으로 급작스러운 살의를 품었다? 어차피 다 끝난 일인데 뭐가 그리도 큰 문제였을까요?
마지막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에서 많이 보이는, 조금 억지스러운 전개도 별로더군요. 특히나 미오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정작 미오가 범인이다!라는 것은 독자 기만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독자를 교묘하게 속이는 고도의 서술 트릭물과는 백만광년쯤 떨어진, 대놓고 사기치는 뻔뻔한 행동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덧붙여 단점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가가와 발레리나 미오의 달착지근한 연애 감정이 가득하고 가가 교이치로가 사랑에 죽는 쾌남 형사로 묘사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아니올시다였습니다. 후속작들에서 보여주는 묵직한 매력은 눈을 씻고 찾아보기 어렵거든요. 이래서야 "가가 형사" 시리즈로 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그래도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상, 즉 4년전 야스코와 아키코가 얽힌 치정사건이 두 사건의 동기임을 밝히는 부분은 추리라 부를 수 있기는 합니다. 그 중에서도 치정사건을 일으킨 발레리나는 사실 아키코였다는 것이 그녀의 연인이었던 화가 아오키가 남긴 그림을 통해 밝혀지는 부분이 그러해요. 4년 전 야스코는 아직 필사의 다이어트 이전이라 그림의 모델은 그녀일리가 없다! 는 것인데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가 제공되는 등 추리 소설의 미덕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미오의 빈혈에 대한 추리 역시 일상계스러운 느낌을 전해 주는 것이 나쁘지 않았고, 벽에 부딪힌 가가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 역시 괜찮았습니다. <졸업>에서도 그랬지만 가가의 아버지를 궁극의 탐정역으로 만드려는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맥가이버>의 할아버지처럼 말이죠. 세번째 작품부터는 왜 이런 설정이 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또 발레단에 대한 자료 조사가 충실한 것도 마음에 듭니다. 발레단의 분위기와 연습, 공연 등이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작품의 설득력을 높여주거든요. 발레단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공연과 독침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을 연관시킨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었고요. 조금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적당한 수준이었어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엘러리 퀸의
허나 전체적으로 별로이며 점수를 줄만한 부분도 적습니다. <졸업>에 비하면 트릭마저도 별볼일 없으니까요. 확실히 초기작이라는 티가 팍팍 나는, 가가 형사 시리즈의 팬이라도 딱히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는 망작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1.5점. 제가 읽었던 가가 시리즈 중에서는 최악의 작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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