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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5

침대특급살인사건 - 니시무라 교타로 / 윤정규 : 별점 2.5점

침대특급살인사건 - 6점
西村京太郞 지음/추리문학사

총기사고로 면직된 전직 경찰 다나베가 사립탐정 업무를 시작한 뒤 어느 날, 한 부인이 자신의 임신한 딸을 에스코트해 줄 것을 의뢰했다. 그는 부인의 딸 유미꼬와 같이 오사카에서 사세베까지의 여행을 떠났지만 그가 의뢰를 완수한 직후, 공갈범 전과가 있는 기구찌 이사오가 살해당했고 피해자의 책상 서랍에서 다나베가 에스코트 의뢰를 수락한 뒤 작성했던 영수증이 발견되었다. 경찰은 영수증을 확보한 뒤 전직 경찰관 다나베가 기구찌를 협박한 증거로 삼아 다나베를 검거했다.
 다나베는 사건 당일 사세베까지의 여행했다는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 후미꼬와 유미꼬 모녀에게 증언을 요구했지만 모녀는 다나베를 모르는 사람으로, 오히려 유미꼬를 귀찮게 쫓아 다니던 파렴치한으로 몰아갔다. 다나베에게 걸린 혐의는 점점 깊어지던 와중에, 과거 다나베의 상사였던 도쿄 경찰청 수사 1과의 토츠가와 경부가 옛 부하를 구해주기 위해 사건에 뛰어드는데... 

여정 미스터리의 달인이라는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입니다. 기차 시간표 트릭이라는 전통적 소재를 등장시킨 대표작을 작가별로 따져본다면 마츠모토 세이쵸에게는 "점과 선"이, 모리무라 세이이치에게는 "신간센 살인사건"이 있고 니시무라 교타로에게는 이 작품이 있는 것이겠죠. 예전에 읽었었지만 책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분명 예전 처음 읽었을 때에는 괜찮았었는데 지금 다시 읽으니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눈에 많이 띄거든요. 물론 장점도 존재합니다. 저자가 기차 시간표를 늘어놓고 알리바이를 구상하는 장면이 상상될 정도로 소설의 가장 중요한 트릭인 기차 시간표 트릭은 아주 괜찮고, 모녀에 의해 다나베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궁지에 몰리게 되는 상황은 꽤 치밀해서 설득력이 높거든요.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을 연상케 하는 재미도 느껴졌고요.
토츠카와 경부가 직접 발로 뛰면서 수사하여 오로지 사건 해결에만 집중하는 전개도 마음에 든 점입니다. 약간 사회파스러운 분위기로 불필요한 묘사가 거의 없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굉장한 악녀들인 두 모녀의 설정은 정말이지 최고입니다. 과거의 불우한 경험때문에 돈에 대한 엄청난 집착과 인간성이 상실되었다는 점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가 떠오르는데, 훨씬 앞선 시기에 손에 잡힐 듯 그려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그러나 단점도 너무 명확합니다. 우선 어수룩한 사립탐정을 범인으로 몰기 위해 치밀한 공작을 하는 모녀가 그 사립탐정이 전직 경찰관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려워요. 이 때문에 그가 예전에 근무했던 도쿄 경찰이 사건에 뛰어들며, 이후 범행 사실이 쉽게 발각되는 이유가 되어 버리거든요. 작전의 핵심은 마나베를 옭아매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치밀한 사전 조사와 준비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전직을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기구찌 이사오와 모녀와의 관계도 조금만 조사하면 쉽게 드러나는 동기가 있고, 결국 밝혀진 동기와 과거 때문에 다른 살인 사건들마저 발각된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허술합니다.

또 관련자들을 전부 죽이다보니 이래저래 너무 많이 죽이게 되는데, 모녀가 살인을 통해 어느 정도 이상의 재력을 손에 넣었다면 청부 살인쪽을 고려하는게 당연합니다. 복잡한 알리바이 트릭을 써가며 몸으로 직접 해결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워요. 누군가를 시킨다면 그 누군가의 입을 막아야 할 필요가 생길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지만요. 

덧붙이자면 기차 시간표 트릭 자체는 괜찮긴 한데 결국 기차를 경찰관들이 "한번만" 타 보고 바로 진상을 꿰뚫는다는 점에서는 좀 허무하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소설에 나오는 27분 밖에 없는 시간의 갭이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오기에 별로 여유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는 것도 약점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번역도 깔끔하고 어느정도 재미도 있지만 저자가 알리바이 트릭을 먼저 개발(?)하고 그 이후에 플롯을 가져다 붙인 듯한 어색함도 느껴지는, 범작 수준에 머무른 작품입니다. 허나 이런 정통 기차 시간표 트릭의 교과서적인 작품임에는 분명한 만큼 이쪽 장르물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2022/12/04

"시간표 트릭"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확립한, 만족도 높은 철도 미스터리 걸작들.

* 언제나처럼 honto의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입니다. 그런데 소개작 중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기차 시간표 트릭이 사용된건 아니니, 제목은 조금 잘못된 셈입니다. 기차가 주요 무대이자 소재인 작품들이라고 하는게 맞았을거에요. 아니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빼고, 니시무라 교타로 작품을 넣는게 맞지 않았을까 싶네요.

'움직이는 밀실'이라고 하는 점이 소재로서도 다루기 쉽기 때문일까요? 열차는 미스터리의 무대로 자주 등장합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초 단위의 정확한 운행을 이용한 '시간표 트릭' 이라는 독자적인 미스터리 문화도 탄생했지요. 차내에 숨어있는 범인, 시간표가 만들어내는 알리바이...... 여행의 과정보다는 수수께끼 풀이에 비중을 두고 있는 철도 미스터리, 그 걸작들을 소개해 드립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크리스티의 수많은 대표작 중에서도 여러 번 영상화된 덕분에 특히 유명한 작품. 터키에서 프랑스행 오리엔트 특급을 탄 명탐정 푸아로가 열차 안 밀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조우한다는 이야기. 푸아로는 용의자들의 철벽 알리바이를 대화라는 무기로 무너뜨린다. 수수께끼 풀이의 순도가 높은 미스터리 작품.

"점과 선" 마츠모토 세이초 

일본 미스터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 시간표를 사용한 '알리바이 트릭', 그리고 현실적인 배경과 사회성을 가진 사건을 그린 '사회파 미스터리'의 융합은 이후 미스터리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60년 이상 전에 쓰여진, 고전 중 고전인 철도 미스터리.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다카기 아키미쓰 

인형을 이용한 연쇄 예고 살인에 명탐정 가미즈 교스케가 도전하는 다카기 아키미츠의 대표작 중 하나. 첫 사건은 단두대에서 인형의 목이 잘린 후, 두 번째 사건은 열차에 인형이 치인 뒤 똑같이 실행된다. 제목인 '인형이 왜 살해되는지?'가 작품의 핵심이며, '독자에 대한 도전장'까지 포함되어 있는, 범인 찾기의 흥취를 즐길 수 있는 걸작.

"검은 백조" 아유카와 데쓰야 : 국내 미출간 

철도 미스터리뿐만 아니라, 수많은 알리바이 트릭을 이용한 작품을 발표한 작가가 창조한 '오니츠라 경부' 시리즈 중 하나. 살인 사건 수사선상에 떠오른 용의자를 오느츠라 경부가 꾸준한 수사를 통해 조금씩 몰아붙인다. 맹점을 찌르는 시간표 트릭에 논리적인 추리가 합쳐진 추천작.

"신칸센 살인사건" 모리무라 세이이치 

"인간의 증명", "고층의 사각" 등으로 알려진 모리무라 세이이치가 발표한 첫 번째 철도 미스터리. 신칸센 열차내에서 발견된 시체는 엑스포 이권을 두고 다투고 있던 연예 프로덕션 실력자였다. 용의자는 후속 차량에 승차하고 있어 범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연예계의 어두운 부분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작품.

2024/06/15

살인의 쌍곡선 - 니시무라 교타로 / 이연승 : 별점 2.5점

살인의 쌍곡선 - 6점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야카와 혼자서 운영하는 도호쿠의 외딴 호텔 '관설장'에 회사원인 예비 부부 교코와 가쓰로, 역시 회사원인 야베, 마사지 업소에서 일하는 아야코, 범죄를 연구하는 대학원생 이가라시, 택시 운전사 다지마가 초대되었다. 누군가 설상차를 망가트리고 전화선을 끊어서 고립된 상태에서, 야베를 시작으로 한 명씩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범행 현장에는 복수가 이루어졌다는 메시지와 함께 원에 사선을 그은 기묘한 부호가 그려진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하야카와, 교코, 아야코만 살아남은 상태에서 운 좋게 전화가 연결되어 경찰과 취재 기자들이 곧바로 찾아왔지만, 관설장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트릭으로 유명한, '여정 미스터리'의 거장 니시무라 교타로의 초기 장편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작가의 작품은 명성에 걸맞는 여정 미스터리, 기차 시간표 트릭이 활용되었었던 반면, 이 작품은 비교적 정통 고전 본격 추리물에 가깝습니다. 특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많이 의식하고 있다는게 눈에 뜨이네요. 고립된 공간에서 한 명씩 차례대로 살해당한다는 점, 그 때마다 볼링핀이 사라지고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는 설정은 거의 똑같거든요.

하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오마쥬했다는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와 같은 질낮은 졸작은 아닙니다.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많은 덕분입니다. 특히 '고립된 호텔에서 범인은 투숙객들을 전부 죽이고 어떻게 도망쳤는지?'에 대한 트릭이 일품이었습니다. 설명드리자면, 범인 하야카와 형제는 쌍둥이였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호텔 지배인으로 변장하고 투숙객들을 살해했지요. 그리고 호텔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외부에 흘려 경찰과 기자들이 출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한 명은 기자로, 처음에는 경찰과 다른 기자들과 함께 호텔로 달려왔지만 호텔 앞에서 은근슬쩍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호텔에 남아있던 범인이 기자인 척 했던 겁니다. 지금 읽어도 그럴싸한 괜찮은 트릭이었어요.

앞서 작가가 '쌍둥이를 활용한 트릭을 사용했다'고 직접 밝히고, 본문에서도 쌍둥이 고시바 형제가 강도 행각을 벌이지만 경찰이 체포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호텔 연쇄 살인 사건과 겹쳐 진행시켜 트릭을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만드는 전개도 괜찮았습니다. 작가가 활용한 쌍둥이 트릭 이야기는 하야카와 형제 탈출 트릭이 아니라 고시바 형제 사건에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고시바 형제의 강도 행각과 형제를 뒤쫓는 경찰과의 밀땅도 재미있었고요. 
참고로, 이 트릭은 도진기 작가의 "악마의 증명"에 사용되었던 트릭과 같습니다. 당시 모 드라마와 표절 시비가 있었던 듯 한데, 애초에 특별히 오리지널임을 내세울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것이네요....

여기에 더해, 아야코가 범인임을 의심하게 만든 초대장 필적과 유서 - 초대장은 이가라시가 필적 감정을 한다며 모두에게 쓰게했고, 유서는 첫 날 일종의 내기 결과에 따른 자필 문장이었을 뿐 -를 확보한 방법, 다지마가 스키를 부쉈다고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 등도 괜찮았습니다. 아야코 범인설을 보도하여 하야카와가 기자를 사직하게 만든 결말-진짜 기자가 아닌 가짜였으니-까지 안배한건 보통 솜씨가 아니에요.

하지만 추리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작가의 묘사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호텔에 갇혀 살해당하는 피해자들의 심리가 그려지지 않아서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교코는 약혼자가 눈 앞에서 살해당하기까지 했는데 말이지요. 각 등장인물들의 매력도 제대로 그려져있지 못합니다. 깔끔하고 담백한건 좋지만, 이 작품은 너무 과했습니다.
범인 하야카와 형제가 이런 거창한 범행을 벌인 동기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만원 전철에서 쓰러진 어머니를 방관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을 살해했다는게 말이 안되는건 아니지만, 무려 6명(정확하게는 7명이지만요)을 살해할 정도의 동기인지는 설명해 주었어야 합니다. "상복의 랑데뷰"처럼요. "상복의 랑데뷰"는 짤막하게나마 연인에 대한 깊은 사랑을 알려주고, 그 뒤 이어지는 복수극 과정에서도 1인칭 심리 묘사를 삽입하여 복수와 범행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었지요. 이 작품도 그런 묘사가 반드시 나와 주었어야 했습니다.

고시바 형제가 벌인 강도 행각도 소소한 부분들은 억지스러웠습니다. 괜히 얼굴을 드러내고 범행을 저지를 필요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얼굴을 드러내서 형제 중 한 명이 범인이라는게 밝혀졌으니까요. 쌍둥이라서 당장 체포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체포는 시간문제에 불과했습니다.
고시바 형제도 복수 대상이어서 강도짓을 제안하고 체포되게 만든다는 전개도 억지스러웠으며, 고시바 형제 사건에 휘말린 어린 소녀의 죽음으로 하야카와의 가면을 벗기는 마무리도 작위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없지만, 완성도는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도 작가의 다른 졸작들에 비하면 눈이 부실 정도의 좋은 작품입니다. 명성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분량도 짧은 편이니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13/11/18

종착역 살인사건 - 니시무라 교타로 / 이연승 : 별점 2.5점

종착역 살인사건 - 6점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레드박스

도호쿠 아오모리 출신의 미야모토는 7년 만에 고교 동창생들과 함께 귀향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편지와 함께 기차표를 보냈다. 7명의 멤버는 모두 우에노 역에 모이기로 약속했는데, 공무원이 된 야스다만이 오지 않아 6명의 멤버만 고향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 직후 야스다는 역 화장실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1주간 출장을 다녀오는 바람에 격조했네요. 간만에 리뷰를 올립니다. "귀동냥"에 이어 국내 최고의 추리문학 커뮤니티 "하우미스터리"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되어 운 좋게 읽게 된 작품입니다. 리뷰 전에 자리를 빌어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줄거리 소개대로 7년 만에 모인 고교 동창생들이 하나씩 살해당한다는 연쇄살인물로, 그간 서너 편의 작품으로 접했던 니시무라 교타로의 도쓰가와 (토츠가와) 경부 - 가메이 형사 시리즈입니다. 작가의 수많은 작품 중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죠. 그나저나 "일본 미스터리계의 거인 니시무라 교타로가 드디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라고 홍보하던데, 제가 읽었던 국내 소개된 몇몇 작품들은 모두 정식 계약된 번역본이 아니었나 보네요.

어쨌거나 작품의 장점으로는 흡입력이 상당하다는 겁니다. 여섯 명이나 살해당하는 거창한 사건이 그야말로 숨 쉴 틈 없이 벌어지는 덕분입니다. 재미 하나만큼은 제가 읽었던 작가 작품 중에서 최고로 치고 싶네요. 트릭도 상당히 풍성합니다. 특히 작가의 주특기인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트릭이 상당히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심리를 이용한 원격 살인 트릭과 밀실 살인 트릭도 등장할 정도로요.

아울러 "여정 미스터리"의 거장다운 풍모를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좀 의외였습니다.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 중 한 곳이 도호쿠 지방의 아오모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그러나 아오모리에 대한 묘사나 설명을 등장시키는 대신에, 도호쿠 출신으로 도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심리묘사를 역이용하여 향수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넓은 범위의 여정 미스터리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외지인이 느끼는 우에노 역에 대한 심도 깊은 묘사가 대표적인 예겠죠. 귀향에 대한 애잔함을 살인사건과 교차하여 보여주는 묘사도 괜찮았고 말이죠.

그러나 단점 역시 명확합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비슷하게 범행 동기에 대한 설득력이 낮다는 점입니다. 범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당위성이 너무나 부족해요. 7년 동안 참고 지내다가 편지 한 통으로 촉발된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의 살의니까요. 살의를 불러일으켰다는 편지 내용도 솔직히 별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편지 한 통 받았다고 여섯 명이나 살해하다니, 이건 사이코패스의 정도를 넘어선 중증 정신병자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입니다.

또 우연과 작위적인 전개도 두드러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가메이의 동창인 고교 교사 모리시타에 관련된 에피소드로, 그가 나쁜 마음으로 건드린 옛 제자 마쓰키 노리코를 다시 찾아나선 발단부터 이해가 되지 않는데, 거기에 더해 노리코가 현재 마치다의 연인으로 알리바이 공작을 완성하기 위해 모리시타를 이용하여 가메이를 속여 기차 시간을 착각하게 만든다는건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토츠가와 - 가메이가 그때 그 트릭을 눈치채고 실험을 한다는 타이밍과, 그 실험을 가메이가 진행한 것은 순전히 우연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나마도 일반인인 도쓰가와 경부의 아내가 눈치챌 정도로 허술한 시간표 트릭이라서, 경찰이 속아 넘어간 것부터가 운이 좋았던 것 뿐이었고요.

뭐 작위적인 전개야 이런 류의 트릭이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어쩔 수 없는 점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결국 트릭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어떤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네요... 애써 어렵게, 연인까지 동원해가며 알리바이를 만들지만, 이어지는 범행은 '내가 범인이다'라는 것을 알리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야스다를 살해하고 가와시마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자살한 것처럼 위장했을 때 살인을 일단 중지했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하시구치 마유미의 자살로 위장한 살인까지만 벌이던가요. 결국 트릭을 풀 필요도 없이 마지막 미야모토 살해에서 마치다는 범인으로 확정되어 버리는데, 이럴 거면 뭐하러 어렵게 트릭 따위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다 같이 탄 기차에 불이라도 지르고 도망가던가.

때문에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단점이 명확해서 감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중반부의 긴장감만 잘 살렸더라면 걸작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중반 이후 범인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한 것이 여러모로 아쉽네요.

그래도 니시무라 교타로라는 작가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아직 읽지 못하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3/08/21

침대특급 하야부사 1/60초의 벽 - 시마다 소지 / 이연승 : 별점 2.5점

침대특급 하야부사 1/60초의 벽 - 6점
시마다 소지 지음, 이연승 옮김/해문출판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즈코라는 여성이 얼굴 가죽이 벗겨진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수사에 의해, 살해 추정 시각 이후에, 지즈코는 도쿄에서 출발하는 침대특급 하야부사에서 목격되고 사진까지 찍혔다는게 드러났다. 사건을 담당하는 요시키 형사는 일본을 종단하며 사건의 해결과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노력하며, 이 과정에서 지즈코의 불우한 가정환경에 대해 알아내는데...

그간 격조했네요. 이번 회사에 입사한 이후 가장 긴 여름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이 작품은 미타라이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시리즈 캐릭터 요시키 형사 시리즈입니다. 딱히 취향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작가인데, 제목을 볼 때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물로 생각되어 휴가 중 읽을거리로 선택한 작품입니다. 이 장르, 아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읽어보니 단순한 알리바이 트릭물은 아니더군요. 9시 37분에 나고야에 도착하는 하야부사가 겨우 6분의 차이로 마지막 상경 신칸센을 도쿄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게다가 승객의 대다수가 슬슬 잠자리에 드는 시각에 잡을 수 있는 유일한 1인 침대 객실까지 달린 블루트레인이라는 것을 이용한 전형적인 알리바이 트릭으로 시작하지만, 알리바이를 계획한 지즈코가 되려 살해당하면서 사건이 복잡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마다 소지의 야심(?)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하더군요. 마츠모토 세이초, 모리무라 세이이치, 니시무라 교타로 같은 선배들과는 다른, 뻔한 기차 시간표 알리바이 트릭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겠어!

그러나 야심은 컸으나 문제도 역시 큽니다. 먼저 지즈코의 동기는 딱히 와닿지 않아요. 어머니와 두 자매를 모두 농락한 소메야는 죽어도 싼 놈이기는 하나, 이렇게 복잡한 트릭까지 써가며 살인을 계획하느니 공론화시켜서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는 게 일반적인 방향이겠죠.

게다가 이후 소메야의 행동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즈코의 얼굴 피부를 벗긴 이유입니다. 시체의 정체를 숨기는 것도 아니고, 그 행위로 바뀐 건 하나도 없는데 왜 이런 번거로운 작업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덕분에 쌍둥이설 같은 곁가지 추리만 난무하며 작품만 쓸데없이 길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그리고 소메야가 정말로 천재적인 직관력으로 지즈코의 알리바이 트릭을 한 번에 간파했다면, 그래서 준코를 이용하여 지즈코의 행적을 남길 의도였다면, 본인의 알리바이를 확실하게 한 다음에 지즈코의 시체를 철저하게 은닉하는 게 훨씬 나은 방법이었을 겁니다. 여행 중 실종, 사망한 것으로 처리될 가능성도 높잖아요?

마지막의 진상과 약간의 반전은 그야말로 작위적인 추리쇼에 불과해서 더욱 실망스러웠습니다. 이러한 쇼를 벌인 이유가 철저하게 집을 수색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였고 말이죠.

그래도 장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일단 철도 시간표를 철저하게 연구한 알리바이 트릭은 교과서적으로 잘 짜여진 트릭입니다. 이후의 작위적인 전개도 순수한 재미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았고요.

일본을 거의 종단하다시피하면서 사건을 추적하는 요시키의 모습에서, 니시무라 교타로의 아사미 미츠히코로 대표되는 "여정 미스터리" 느낌이 많이 나는 것도 괜찮았어요. 도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여정 미스터리가 되는 과정이 신기한데, 잘 그려낸 것 같습니다.

각 지역의 형사들과 연계하여 단서를 얻어가며 수사하는 장면에서의 고전적인 형사물 분위기 역시 좋았고요.

덧붙이자면, 비인간적으로 여겨지는 미타라이보다는 출중한 외모 외에는 평범한 형사로 보이는 요시키 형사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때문에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작위적인 부분은 아쉬우나 읽는 재미는 충분했어요. 더운 여름 읽을거리로서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생각됩니다.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알리바이 추리물 팬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1/03/12

명탐정의 규칙 - 히가시노 게이고 / 이혁재 : 별점 3점

명탐정의 규칙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재인

히가시노 게이고가 1996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이른바 '본격', '정통'이라고 하는 작품들의 작위적인 설정을 비웃는 형식이죠. 덕분에 패러디 개그물 느낌도 납니다. "33분 탐정"이 연상되기도 했고요.

그러나 이 장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제대로 갖고 놀았달까요? 진부하고 뻔하기까지 한 밀실, 고립된 산장, 다잉 메시지, 시간표 트릭, 기발한 흉기와 같은 요소를 비롯하여 범인의 의외성이나 토막 살인, 동요 살인과 같은 플롯까지 주인공인 오가와라 반죠 경감과 명탐정 덴카이치의 입을 빌어 철저하게 조롱합니다. 조롱하는 이유도 모두 이치에 합당하고요. 그래서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어요. 

아울러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조롱은 물론, 추리 독자들을 향한 날선 비판 – 아무도 시간표나 저택 구조도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정해진 단서들로 추리하지 않으며 단지 감으로 범인을 때려 맞출 뿐이라는 이야기 – 역시 수긍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가 스스로도 이 작품 이후부터 전형을 깬 작품들을 발표했다고 하니, 본인 스스로에 대한 반성도 묻어났던 것 같네요.

이러한 조롱과 비판을 제대로 된 추리물 형식으로 녹여냈을 뿐 아니라, 몇몇 이야기에서는 상당한 아이디어와 트릭이 펼쳐진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덕분에 단순한 패러디 개그물에 그치지 않고 독특한 추리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다잉 메시지의 뜻이라든가, 토막 살인과 목 없는 시체 사건의 진상, 보이지 않는 흉기의 정체 같은 것은 재미도 있지만 하나의 트릭으로도 충분한 수준이었어요. 오가와라 반죠와 덴카이치 탐정이라는 캐릭터로 정통 본격물의 구조를 비트는 서술 트릭들도 괜찮았고요. 이렇게 추리적 트릭에 대한 비판과 정통 추리물을 조합했다는 점에서는 만화 "Nervous Breakdown"이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비판의 정도는 좀 다르지만.

에피소드별로 편차가 좀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추리소설이라는 장르 자체를 즐길거리로 만드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추리소설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어서 추천하기는 약간 애매하네요. 일반적인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의 팬들에게도 마찬가지. 작풍이 너무 다르거든요. 열린 마음의 추리소설 애호가분들에게 추천합니다.

2007/07/10

알라딘 추리독자 인터뷰 따라하기~!

원문은 여기에

읽다보니 재미있어서 저도 짤막하게 몇자 적어봅니다. 아.. 이 따라쟁이 정신이란 정말이지....^^

Q.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추리소설 읽는 즐거움은?

A. 단순히 독서로 끝나지 않는 지적인 사고활동이 곁들여지는 것이 매력이죠. 그래서 저는 정통파 고전 트릭물을 선호하는 편이고요. 작가와의 두뇌싸움이 제대로 펼쳐지는 흥미진진함 때문에 손에서 떼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Q. '내 인생의 추리소설' 5권을 꼽는다면?
A. 5편만 뽑기에는 너무나 어렵지만 "내 인생" 이라는 말이 들어가기 때문에 저에게 영향을 준 작품 위주로 뽑아 보았습니다.
1)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존 딕슨 카 지음
그야말로 황금시대 정통 추리물 최고 걸작 중 하나로 밀실 트릭의 대가 딕슨 카의 역량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독자와의 공정한 두뇌싸움을 초반부터 정직하게 보여주는 정통 고전 퍼즐 미스테리의 진수를 느낄 수 있습니다.

2) <셜록홈즈 전집>,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지금 읽으면 너무 낡은 듯한 느낌도 들지만 시대가 지나도 영원한 명탐정의 상징으로 남은 셜록 홈즈 시리즈는 제 인생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작품이죠. 코난 도일 경에게는 아직도 고마움과 무한한 존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3) <10개의 인디언 인형>,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제가 처음으로 접한 추리와 호러의 만남! 동요와 함께 전해져 오는 오싹한 느낌과 더불어 완전범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크리스티 여사의 필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처음 읽고는 며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무서웠던 경험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4) <점과 선>, 마츠모토 세이쵸 지음
원래 뜨문뜨문 접했던 일본 추리소설이었지만 지나친 성적 묘사 등으로 그다지 흥미를 가지지 않았었던 저에게 일본 추리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작품이죠. 이른바 "기차 시간표 트릭"의 선구자적인 걸작이며 사회파로서의 특징 역시 확연하게 보여주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금자탑입니다. 이 책 덕분에 이후 본격적인 일본 추리소설 탐독을 시작했기에 "제 인생"의 추리소설에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5) <8번 종이 울릴때>, 모리스 르블랑 지음
홈즈가 등장했으니 라이벌 뤼뺑 역시 빠질 수 없겠죠? 최근까지도 많이 인용되는 멋진 트릭이 가득 담겨 있는 정통 추리 단편집이면서도 뤼뺑의 매력이 전편에 걸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뤼뺑 시리즈 최고 걸작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지만 제 인생에 있어서는 최고의 뤼뺑 작품으로 기억되는 재미난 작품이죠.

Q. '올해 여름, 필독을 권하는 추리소설'이 있다면?
A. 좀 호러 성향이 강한, 오싹한 작품 위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검은집>, 기시 유스케 지음
올해 영화로도 개봉해서 잘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작품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는 범죄와 공포를 다루고 있기에 사회파적 호러물이라 할 수 있는데 전편에 걸쳐 전해져 오는 오싹함과 서늘함이 일품으로 여름철에 딱 어울리는 책이죠.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소설만으로도 충분히 무섭고 재미납니다.

2) <인생을 훔친 여자 (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신용불량과 개인 채무, 파산을 소재로 하여 사회파적인 기법의 추리소설로 잘 표현한 수작으로 일상생활과 맞닿아 있는 점에서 본다면 보험악용을 소재로 한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이라는 작품과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 "쩐의 전쟁"을 일부 연상케도 하고요. 정통파적인 부분은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범죄의 특성 상 추리 매니아가 몰입할 요소가 많은 만큼 추천하고 싶습니다.

3) <고도의 마인>, 에도가와 란포 지음
일본 추리 소설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의 대표작으로 변격물이라 불리우는 란포 특유의 느낌이 잘 살아 있는 작품입니다. 역시 여름철에 읽기에 참 적합하다 할 수 있는, 호러와 추리를 잘 버무린 작품으로 시대를 한참 앞서나갔던 란포의 상상력이 잘 드러나 있지요. 개인적으로는 영화 "닥터 모로의 DNA"가 약간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4) <살인자들의 섬>, 데니스 루헤인 지음
현실과 망상을 오가는 독특한 전개와 정신병원을 무대로 한 서늘한 느낌, 거기에 독자를 빨아들이는 재미와 몰입도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현대 미국 추리 소설의 힘을 잘 보여주는 걸작입니다. 중간에 등장하는 암호 트릭 등으로 정통파적인 재미도 빠지지 않으니 아직 읽지 않으신 추리 매니아가 있다면 꼭 한번 읽어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5) <소름> , 로스 맥도널드 저
하드보일드 삼두마차의 한명인 로스 맥도널드의 최고 걸작입니다. 하드보일드 특유의 강한 드라마로 시종일관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면서도 놀라운 마지막 3페이지의 반전으로 충격과 더불어 한 인간의 잔인성과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죠. 흔해빠진 반전물에 비해 정통 드라마의 요소를 충실히 갖추고 있기에 더욱 작품성이 빛난다 할 수 있습니다. 이후 많은 작품들에 영향을 준 작품이기도 하죠. 미국의 널리고 널린 헐리우드 스타일 스릴러에 식상한 분들에게 꼭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Q. 내 인생의 '첫' 추리소설은?

A.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홈즈 단편들이 최초죠. 아마 "계림문고"라는 곳에서 시리즈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각 단편을 얇은 책 한권으로 만든 구성이었습니다. 아마 저와 같은 나이 또래의 추리 애호가들은 거의 다 비슷하시리라 생각되네요. 요사이 비슷한 판본과 형태로 다시 재간되고 있는 것을 서점에서 보았는데 어린아이들이 많이 접해서 저와 같이 추리소설의 재미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Q. 재출간을바라거나,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길 바라는 추리소설/작가가 있다면?
A. 재출간이 되기를 바라는 작품이야 너무 많지만 개인적으로 구하고 있었던 자유추리문고가 복간되었으면 합니다. 벨린저의 "이와 손톱"과 에반 헌터의 "주정꾼 탐정"은 정말 너무 읽고 싶은 작품이거든요. 이외에도 다카키 아키미쓰의 "파계재판"과 사노 요의 "완전범죄 연구" 역시 평소 구하던 책입니다. 그리고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길 바라는 소설이나 작가는 너무나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국내 작가들에 대한 지원과 관심이 더욱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때문에...."경성탐정록"의 출간을 원하시는 출판사를 찾습니다!^^

2008/10/09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 별점 3점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 6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시작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중,단편집입니다. 이 시리즈의 탐정은 범죄 심리학 조교수 히무라 히데오로 작가 아리스 시리즈라 불리우는 이유는 작품의 왓슨 역이 저자 이름과 같은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원서로 읽고 리뷰를 남긴 “러시아 홍차의 비밀” 도 같은 시리즈의 한권이죠. 뭐 제가 좋아라 하는 일본 본격 추리 단편집이니 당연한 마음으로 사서 읽었습니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 대표작은 “국명 시리즈”로 알고 있는데 좀 엉뚱한 시리즈가 먼저 번역되어 소개된 것이 좀 의아하긴 했습니다만.

감상평은 뭐랄까, 좀 애매하네요. “국명 시리즈” 이기도 한 “러시아 홍차의 비밀” 보다 재미와 수준이 떨어지기도 하고요. 전체적인 책 자체의 평균은 비슷하지만 “러시아 홍차의 비밀” 은 수록작품의 편차가 커서 좋은 작품은 굉장히 좋은 반면, 이 책에 실린 작품의 수준은 엇비슷하지만 고만고만한 수준의 작품들이 모여 있어서 딱히 끌리는 작품은 없거든요. 또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특징이기도 한 정교한 트릭에 매몰되어 이야기 전개가 매끄럽지 않은 부분도 눈에 많이 거슬렸고요. 이런 단점까지 존경한다는 엘러리 퀸을 닮을 필요는 없었을텐데... 어쨌건 별점은 3점입니다. 신본격 대표작가의 정통 추리 단편집을 국내에서 접하기는 쉽지 않기에 가산점을 더했습니다.^^

총 4편의 중단편이 실려있는데 작품별로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부재의 증명
일종의 알리바이 트릭 + 순간이동 트릭 등이 결합된 정통 퍼즐 미스터리물입니다. 아주 약간의 시간차를 이용한 결정적 단서 포착 부분은 좋았으며 동기와 범행 방식, 범인의 행동도 설득력이 넘쳐서 완성도가 높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에서의 베스트 작품이었습니다.

지하실의 처형
형사가 수배중인 테러리스트 들에게 사로잡힌채 그들의 처형 의식의 목격자가 된다는 기본 설정은 독특했지만 애당초 범인이 둘중 하나라는 근본적 한계 때문에 꽉 짜여진 긴장감을 느끼기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히무라의 추리 역시 경찰의 수사 결과를 토대로 이루어지기에 그다지 대단하거나 놀라운 진상이 밝혀지는 것도 아니고요. 차라리 논리 퍼즐 형태의 미스터리로 가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어쨌건 정통 추리의 맛을 느끼기 어려웠고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기도 어렵기에 이 단편집에서의 워스트 작품으로 꼽겠습니다.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
2건의 다이잉 메시지가 중요하게 사용되는 퍼즐 미스터리입니다. 그런데 2건 중 첫번째 메시지는 너무나 특정한 정보를 나타내는 것이며, 중간의 히무로의 착안이 명확하기에 해당 정보를 알고 있다면 크게 수수께끼로 남을 것 같지 않아 그다지 정교한 트릭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어가는 사람이 그런 정교한 도안을 그릴 수 있었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기기도 하고요. 두번째 메시지는 피해자의 행동이 그럴싸 하다는 점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하고 피해자의 의도와 다른, 하지만 정확한 결론이 도출된다는 점은 신선한 발상이 엿보였습니다. 첫번째 메시지의 작위성만 없었다면 괜찮았을텐데 아쉽네요.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이 책에서 가장 긴, 중편분량의 정통 추리물로 고전적인 시간표를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을 다루고 있습니다. 긴 분량에 걸맞게 트릭 자체는 공들여 잘 만들어진 트릭으로 추리적으로는 만족할 만 한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야기 전개에 있습니다. 범인이 범행을 하는 동기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동기가 되는 첫 사건의 동기는 전혀 설명되지 않으며, 애당초 첫번째 범행에서의 증거가 너무나 결정적이기에 두번째 사건이자 주 사건의 알리바이 트릭을 파헤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보여지거든요. 한 사건의 범인임이 명백하고 증거도 확실한데 왜 다른 사건에 시간과 공을 들이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토끼”라는 상징이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작품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어서 나중에는 짜증마저 일었고요. 추리적 완성도가 높은, 잘 짜여진 작품이지만 이야기 전개에 실패한 작품으로 보이기에 아쉬움이 큽니다.

2023/08/12

철교 살인 사건 - 로날드 녹스 / 김예진 : 별점 2점

철교 살인 사건 - 4점
로날드 녹스 지음, 김예진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진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스턴 오트빌에서 골프로 친해진 4인방은 어느날 라운딩 중 시체를 발견했다. 피해자는 골프 클럽 멤버 중 하나인 브라더후드로, 파산한 뒤 도주하다가 기차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 같았다.
사체에 여러가지 수상한 점 - 모자가 시체 옆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점, 시계를 두 개나 들고 있었던 점, 소지하고 있던 이상한 메모 등 - 이 있었기 때문에, 4인방 중 전 군사정보부 소속 군인이었던 모던트 리브스는 고든과 함께 사건 수사에 뛰어들었다. 
메모의 기묘한 숫자가 암호라는건 알아냈지만, 열쇠가 될 책의 확보에는 어려움을 겪던 중, 또다른 골프동료 카마이클이 브라더후드와 대브넌트가 동일인물이라는 대담한 추리를 내 놓았고, 뒤이어 리브스의 방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까지 꿰뚫어보았다. 비밀 통로에 숨어 있던건 바로 대브넌트였다!

'녹스의 십계'로 유명한 추리 작가 로널드 녹스의 장편. 제목 그대로 철교에서 떨어진 사체에 대해서 등장인물들이 여러가지 추리를 펼치는 고전 본격물입니다. 리브스, 고든, 카미이클과 매리어트 4인방이 각자의 추리를 추리쇼처럼 선보이는데 상당히 논리적이며, 중간중간에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 등 볼거리도 많습니다. 몇 대 없는 기차를 가지고도 시간을 잘 이용해서 그럴듯한 트릭(?)을 만들어 낸 솜씨는 확실히 비범했어요. 단서들 역시 공정하게 제공되는 편이고요.

탐정인양 사건에 뛰어들어 이상한 단서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공유하고, 남겨진 메모가 암호라는걸 알아내는건 모던트 리브스인데, 브라더후드와 대브넌트가 동일인물이라던가, 리브스 방에 누군가 침입해서 암호문을 훔쳐간건 비밀 통로를 통해서였다는 등주요 추리를 내 놓는건 카마이클이라는 캐릭터 설정도 재미있었습니다거든요. 이 중에서도 리브스 방에 어떻게 침입했는지를 껌으로 알아내는 장면은 백미였습니다.
리브스도 데브넌트가 체포된 후, 렌들스미스 양의 꼬임(?)에 넘어가 그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추리를 펼친다던가, 4인방 중 한명인 목사 매리어트가 범인일거라는 대담한 추리를 선보이기는 합니다만, 두 가지 추리 모두 무리수가 많다는 점에서 카마이클의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추리와 함께 선보이는 영국식 유머도 재미납니다. <<사키>>같은 유머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어요. "두 번째 문단에서 특정 지역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작가는 결코 신뢰해서는 안 된다.", "자넨 아일랜드 인이 평범한 의문문에 '예'나 '아니오'로 대답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나?", "캐디들이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잘 알잖나. 그런 일을 하다 보면 도덕의식이 결핍되는 법이지." 등 영국 부르주아들의 고집과 편견(그리고 싸가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골프에 미친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신랄합니다. 클럽 멤버였던 브라더후드 장례식 순간에도 "오후 라운드를 돌아야 하니까 시간을 맞춰달라"고 요구한다던가, "땅을 공 치기 좋은 곳과 나쁜 곳으로밖에 평가하지 않는다"는 등으로요. 심지어 리브스는 매리어트가 범인이라고 주장하다가 큰 실수를 할 뻔 한 뒤, "미래의 나를 골프에 바치려고, 골프만 할 거야. 오로지 골프." 라고 말하기까지 하는데, 이 정도 되면 유머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확실히! 낡은 소설임은 분명합니다. 핵심 줄거리가 모호해서 소설적인 완성도도 낮고요. 전개 과정에서 작위적인 요소도 많습니다. 갓 조사를 시작한 아마츄어 리브스와 고든이 온갖 중요한 단서들을 발견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렌들스미스 양이 피해자 브라더후드의 숨겨진 부인이며, 데브넌트가 그녀를 흠모하고 있었다는 인물 설정도 지금 읽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낡아 빠졌어요.
 쓸데없는 이야기도 너무 많습니다. 앞서의 영국식 유머도 재미있다고 했지만, 너무 과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단서를 그러모아 공들인 추리를 펼친다기보다는 그냥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하나씩 툭 툭 던지는 느낌이에요. 별다른 근거없이 각자 그럴듯한 가정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추리들도 재미있다기 보다는, 그냥 기차 시간표가 있어서 내 놓는 아이디어에 불과해 보여요. 복잡하기만 할 뿐 작품에 잘 녹아들어 뭔가 재미를 가져다 주지는 못합니다.
데브넌트가 범인이라는 진상도 좀 어이가 없었어요. 일단 범행의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데브넌트는 암호로 된 협박문을 보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브라더후드가 파산한건 명백한 사실이라 그가 자살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여전히 유효하고요. 그래도 데브넌트는 동기도 확실했고 행적도 수상했던건 맞습니다. 그래서 그가 체포된 시점에서 이야기는 끝난거나 다름없어요. 매리어트 범인설과 같은 황당한 추리는 무의미한 사족이었습니다.
추리쇼 중심이라 드라마도 별 재미가 없습니다. 중간에 리브스와 고든이 함께하는 비밀통로 탐색, 이후 도주하는 데브넌트 추격, 마지막에 매리어트가 범인인지 알아내기 위해 리브스 방으로 유인한 뒤 이를 몰래 지켜보는 장면 정도에서만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알려지지 않았던 옛 고전을 알게 되었다는 기쁨은 크지만, 시대를 뛰어넘을만한 걸작은 아니었습니다. 잊혀진 작품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딱히 권해드리지는 않습니다.

2014/03/05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 시마다 소지 / 한희선 : 별점 2.5점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 6점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엮음/시공사

아사쿠사의 건어물 가게에서 소비세 12엔을 내려 하지 않던 노인이 가게 주인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말았다. 범인이 명확해서 사건은 쉽게 종결될 수 있었지만, 노인의 범행 동기에 석연치 않은 점을 느낀 요시키 형사는 수사 끝에 사건이 30여 년 전 있었던 기이한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는데...

시마다 소지의 요시키 형사 시리즈.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사회파 추리소설과 같은 사회 고발 의식이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범인인 나메카와 — 여태영이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용된 조선인으로 본인과 가족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걸 드러내는게 작품의 핵심이라는 점이에서요. 여태영의 인생은 일본 때문에 그야말로 기구하다는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꼬일 대로 꼬여서 불행의 극을 달리기에 굉장히 처절한 느낌을 전해줄 뿐 아니라, 작중에서 "전쟁 탓이라고 해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이런 도리에 어긋난 일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일본은 진정한 일등 국가가 못 될 것이다"라고 일갈하기까지 합니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가 심각한 상황인데, 일본인이 사죄해야 한다는 글을 보니 작품 완성도와는 별개로 무척 반갑더군요.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감정이입이 용이하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또 "누명"이란 무리한 질서 유지 혹은 치안 유지의 결과로 경찰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지 않기 위한, 이른바 '일본인의 행복을 위해 행해지는 정의라는 명목의 불합리한 폭력'이며, 데이코쿠 은행 사건, 시마다 사건, 마루쇼 사건, 무레 사건의 범인들은 모두 누명을 썼다고 확신한다고 작중 인물인 하타노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점, 일종의 파시즘적인 광기를 비판하는 점 역시 마찬가지로 사회파적 사회 고발로 볼 수 있습니다. 단체로 광기를 벌이지 않으면 일본인은 타인을 죽이는 전쟁을 거국적으로 행할 기력을 일으킬 수 없는 인종이라고 단정짓는데 상당히 그럴듯했어요.

그리고 요시키 형사 시리즈가 다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준다는 게 특이했는데, 홋카이도나 센다이는 물론이고 도쿄를 상세히 설명해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감성으로 접할 수 있으니까요. 첫 사건이 벌어지는 아사쿠사라던가 요시와라, 구레시타 노인의 산책길인 세이로카 병원 – 쓰쿠타오하시 다리 근처에 대한 묘사 등이 대표적입니다. 아사쿠사만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한 번 가 보고 싶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여행도 갔다 온 지 참 오래되었군요.

아울러 거의 50여 페이지에 걸쳐 에도시대 요시와라 유흥 문화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도 현학적인 측면에서 나쁘지 않았습니다. 요시키 형사가 피해자의 과거 근무처였던 요시와라를 탐문하며 요시와라와 에도시대 유곽 문화에 대해 설명을 듣는 식인데,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이었거든요. "에도 일본"에서 읽었던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상세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사회파, 여정 미스터리, 현학적 요소 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작가의 명성에서 기대했던 신본격 추리소설로의 가치는 기대 이하라 아쉽습니다. 무려 500페이지나 되는 대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사건만 놓고 보면 스케일 크고 전개도 꽤 흥미롭긴 합니다. 열차 안에서 피에로가 화장실에 틀어박혀 권총 자살을 하였는데 그 직후 시체가 사라졌다, 투신 자살로 머리가 잘린 시체가 벌떡 일어나 걸어 나왔다, 달리던 열차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가 기차가 탈선했다는 등의 상상하기 어려운 불가능 범죄가 연이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가능 상황에 여름벌레의 날갯소리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고, 빨간 색으로 눈이 빛나는 거인이 보였다는 등의 기이함도 더해져 있고요.

하지만 밝혀진 진상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피에로 사건만 해도 여태영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라는게 동기라는고 설명되데, 여태영은 그냥 도망쳤어도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여태명과 아라마사의 시체가 함께 발견되면 서로 싸우다 죽은 것으로 사건이 종결되었을 테니까요. 아니면 여태명의 시체만 중간에 숨기고 그냥 삿쇼선을 타고 도주하면 되잖아요? 어릿광대가 여태영이라는 게 밝혀지는 것도 아니고... 여튼 들인 노력에 비하면 얻은 게 별로 없습니다. 실제로 아라마사 사건의 경우 여태영은 용의선상에조차 오르지 않았으니 완벽한 뻘짓이었어요.

게다가 열차의 탈선은 순전히 우연이었고 거인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작중에서 "기발한 발상이 하늘을 움직인 결과"라고 설명될 정도로 우연에 기인한 현상으로, 불필요한 장치였습니다. 이야기의 복잡성을 더하기 위해 억지로 집어넣은 느낌이에요. 어차피 독자가 여태영 – 여태명 형제의 존재를 알게 되면 투신 자살한 시체와 트릭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고요.

그 외에도 기차 시간표가 등장하지만 핵심 요소는 아니고, 오히려 공정한 추리를 방해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지도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탓에 핵심 트릭이 뒤늦게 밝혀지는데, 그 동네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법한 트릭이라서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은 게 외려 더 이상했습니다. 참고로, 조금 이채로웠던 것은 우시코시 형사가 요시키와 만나기 위한 편지에서 기차 시간표를 보고 어떤 기차 몇 호를 타라고 지정하는 문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뼛속까지 기차 시간표 형사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좀 웃겼어요.

마지막에 진상이 밝혀지니 나메카와(여태영)가 처음에 살인 사건을 저지르는 상황에 대한 설득력이 없어진다는 것도 그닥입니다. 소비세 때문에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하거나, 과거 사건의 복수 때문으로 밝혀지거나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아라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라면 어차피 공소시효가 지난 것일 뿐 아니라 당시 상황은 충분히 정상 참작을 받을 만한 것인데... 왜 치매에 걸린 것처럼 위장해서 입을 다물었는지가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초절정 미소녀였던 사쿠라이가 30년이 지난 뒤 폭삭 삭아버린 것에 대해서 설명이 없는 것도 조금 의아한 점이었고요.

그리고 일본 연호로 연도를 표시한 것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국내 독자를 위해 모두 현대의 서력을 병기하여 주는 배려가 필요했습니다. 조금은 어색한 문체, 예를 들자면 "신호에 멈추어 섰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빨강이었다. 바람에 봄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벚꽃 냄새와 비슷했다. 따뜻하지만 희미한 광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은 학생처럼 보이는 옆에 선 젊은이의 어깨 밑에 가려질 정도로 키가 작았다"와 같은 묘사는 신호에 멈춘 것과 벚꽃 냄새, 노인의 체구를 두서없이 나열한 느낌이고요. 보다 깔끔하게 "신호가 빨강이라 멈추어 섰다. 따뜻하지만 희미한 광기가 느껴지는 봄 냄새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라는 식으로 정리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뭐 제가 문체를 지적할 수준의 전문성이 있는건 아닙니다만.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사회고발적인 성격은 높이 평가할 만하고 특히 강제 징용 조선인에 대한 부분은 만점을 주고 싶습니다. 시마다 소지의 또 다른 면을 접한 것도 반가왔고요. 그러나 추리적인 요소가 500페이지나 되는 대장편치고는 알맹이가 없어서 감점합니다.

그래도 일본인 작가가 반성의 의미로 쓴 "강제 징용된 조선인"에 대한 텍스트로는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시마다 소지라는 작가에 대해 다시 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0/03/05

유다의 창 - 존 딕슨 카 / 임경아 : 별점 4점

유다의 창 - 8점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로크미디어

부유한 청년 제임스 앤스웰은 예비 장인 에이버리 흄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흄이 권한 술을 먹고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정신이 든 그의 앞에 화살에 찔린 시체가 된 에이버리 흄이 놓여 있었고, 방은 방문과 창문이 모두 닫혀진 완벽한 밀실 상태였다.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 그를 구하기 위해 헨리 메리베일경이 변호를 맡아 법정에서의 사투가 시작되는데...

드디어 나왔다! 오랜 시간 기다린 존 딕슨 카의 대표작이 드디어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되었네요. 소식을 듣자마자 구입했습니다. 작품도 하루만에 읽어버릴 정도로, 그야말로 기다린 보람이 느껴지는 멋진 작품이었고요.

일단 밀실 트릭의 대가다운 솜씨가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두터운 문에 빗장이 질러지고 창문마저도 빗장쳐진, 틈 하나 없는 완벽한 밀실(검찰측 말대로 "봉인된 방"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죠)에서의 살인이라는 설정도 흥미롭고, 트릭도 추리 소설사에 길이남을 명트릭이 아닐까 싶을정도로 잘 짜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트릭을 풀어내기 위한 여러가지 단서들도 굉장히 합리적이고요.

또 의외로 법정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게 대박입니다. 사건이 재판 과정을 통해서 증인들의 증언과 단서로 재구성되어 전개됨에 따라, 고전 추리물의 최대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완벽한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다른 추리소설에서는 독자가 머리속으로, 또는 손으로 그려야 하는 사건 시간표 같은 것도 전부 표로 제공해 주니 이보다 더 친절할 수는 없겠지요. 아울러 작가의 시리즈 탐정 캐릭터이기도 한 헨리 메리베일경의 왕실 고문 변호사로서의 활약을 보는 것도 즐거웠어요.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트릭이 영미권 독자들에게 친숙한 것이라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건의 동기가 취약하다는 것, 그리고 헨리 메리베일경이 극중에서 언급하듯 "범인이 누구인지 너무 뻔하다"는건 고전 본격 추리물로는 확실한 약점입니다. 헨리 경이 독자가 모르는 정보를 쥐고 있다는 설정도 약간 아쉬웠고요.
그래도 전개과정에서 나름 합리성을 보장하고 있기에 크게 흠 잡기는 어렵습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고전 황금기 시대 본격 추리물 및 법정 미스터리 걸작입니다. 동서 추리문고 스타일의 낡은 일어 중역본이 아닌 깔끔한 번역으로 소개된 것도 반갑고요. 추리 애호가라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제가 읽은 존 딕슨 카 작품 목록 및 개인적인 순위를 예전 "세개의 관" 리뷰에 언급했는데 업데이트해 봅니다. 확인해 보니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하나만 아직 안 읽었는데, 일단 읽은 것 까지만 정리할께요.^^

"완독한 존 딕슨 카 작품 목록 : 순서는 무순"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 / 연속 살인사건 / 모자 수집광 사건 / 해골성 / 벨벳의 악마 / 화형법정 / 흑사장 살인사건 / 세개의 관 / 구부러진 경첩 / 감미로운 초대 (밤에 걷다) /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이 중 딱 세 작품만 꼽으라면 저의 영원한 베스트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정통 추리와 고딕 호러의 완벽한 결합체인 "해골성", 그리고 바로 이 작품인 "유다의 창" 을 꼽겠습니다.

2019/08/11

브루투스의 심장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1.5점

브루투스의 심장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 한정 일본 추리 소설의 제왕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추리 소설로, 1989년에 처음으로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입니다. 범행이 먼저 등장하는 일종의 도서 추리 소설입니다.

작가 생활 초창기에 이런저런 시도를 하던 시기에 쓰여진 작품이라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풍과는 사뭇 다른게 특징입니다. 흡사 70년대를 풍미했던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같았어요. 기차 시간표는 아니지만 상당히 정교한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한다는 점과 재벌 가문의 문란한 생활, 출세를 위해 살인도 서슴치 않는 야심가, 등장인물마다 엮여 있는 콩가루같고 불우한 가정사 등 모든 설정이 흡사한 탓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에서 거의 보기 힘든 적나라한 성행위 묘사도 마찬가지고요. 잘은 모르겠지만, 인기를 얻기 전 무명 작가 시절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전 시대의 인기작을 분석하고 따라해서 어떻게든 인기를 얻어보려 했던 결과물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답다 싶은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악녀 야스코 캐릭터도 매력적이지만, 꽤나 공들인 정교한 트릭이 돋보입니다. 최초에 등장한, 3명이 실행하는 사체 이동 계획부터 꽤 흥미롭습니다. 오사카, 나고야, 도쿄까지의 거리와 시간을 잘 계산한 괜찮은 트릭이었어요. 나오키의 말대로 2명이라면 모를까, 3명이 실행하는 계획은 경찰도 쉽게 예상하기 힘들었을테고요.
두 번째 범행인 만년필을 이용한 살인도 그럴듯합니다. 만년필 잉크를 넣는 곳에 청산가리 결정을 넣어 놓고 잉크를 넣으면 청산가스가 발생하여 사망한다는 트릭인데, 청색 잉크만 산성을 띄고 있어서 청산가스가 발생한다는 등의 과학적인 설명이 뒷받침되어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거든요. 이공계 출신 작가다운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마지막에 다쿠야가 야스코를 살해한 방법도 기발하기는 뒤지지 않습니다. 미리 야스코의 방에 잠입해서 찻주전자 주둥이 안쪽에 청산가리를 발라 놓은 후, 저녁에 당당하게 방문해서 차를 직접 끓여마시게끔 유도하여 살해하는 계획으로 완벽하게 성공하니까요. 야스코도 이미 2명이나 살해된 상황이라 다쿠야를 조심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탄 차에 독이 들어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지요.

그러나 초기작인 탓인지 모두 헛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의 사체 이동 계획은 나오키가 나고야에서 오사카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신칸센을 탔어야 했고, 다쿠야 역시 이용한 차량을 처리할 때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다쿠야는 이 때문에 덜미를 잡히죠.
두 번째 청산가스 살인도 경찰이 현장 조사할 때 가스가 남아 있어서 들통난다는 점에서는 완벽하다고 보기 어려우며, 마지막 트릭 역시 다쿠야가 직접 야스코의 집을 방문했어야 한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운 좋게 들키지 않았을 뿐이니까요. 

물론 사람이 만든 계획에 헛점이 있는건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를 작중에서 형사들이 치밀한 수사를 통해 밝혀내는 것도 볼거리로 이런게 도서 추리 소설의 묘미이기도 하고요. 정작 문제는 이야기 자체입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3명의 사체 이동 계획부터 애매합니다. 애초에 나오키가 고로의 약점을 잡아 청부 살인까지 시킬 수 있었다면, 그냥 고로를 시키면 됩니다. 알리바이고 뭐고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비밀을 아는 사람은 한 명이라도 적은게 낫잖아요? 이야기를 보면 고로와 나오키의 연결 고리는 그 누구도, 심지어 고로에게 청혼을 받은 나오키의 비서 유미에마저 모르니 완벽한 청부 살인이 되었을겁니다.

또 하시모토와 다쿠야를 끌어들이는 이유도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나오키가 트럼프 카드 마술이 특기라는 설정도 고로의 존재 때문에 말이 안됩니다. 그냥 뽑으면 되죠. 최악인 살인이 걸린다면 고로를 시키면 되니까요. 다른 살인을 뽑은 관련자에게 빚을 지게 만들 수도 있고요. 이런걸 대단한 단서인 것 처럼 흘릴 이유는 없습니다.

진범 고로가 야스코 대신 나오키를 살해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살의를 품을 만큼 원한이 깊었다는 설명도 없을 뿐더러, 그랬다면 진작에 살인을 저질렀다면 모를까 왜 이 때 저질렀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사체 이동 계획에 대한 종이가 차에 없었더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고요. '시체가 야스코가 아니라 나오키였다'는 충격적인 설정을 제대로 설명할만한 합리적인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나오키를 죽인건 살인까지 시켜서 살의가 폭발했다고 치죠. 그러면 시체 이동 계획에 참여한 하시모토와 다쿠야까지 죽이려 한 이유는 뭘까요? 자신의 존재가 노출되었는지 먼저 간을 보는게 순서였을텐데 말이죠. 시체가 발견되어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된 마당에, 연이어 범행을 저지른다는건 아무리 봐도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수사 와중에 직접 나서서 야스코를 죽이고 마지막에 고로까지 살해하려한 다쿠야의 정신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대로 모리무라 세이이치 류의 설정이 너무 과한 것도 문제입니다. 주인공인 다쿠야가 온갖 어려움을 혼자 힘으로 이겨낸 자수성가형 엘리트이자 야심가라는건 흔해빠지긴 했어도 봐줄만은 합니다.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의 근거로는 타당하고요. 그러나 니시나 나오키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후계자가 되었으며, 아버지 도시키를 증오한다는 설정은 불필요했습니다. 3인 살인 계획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로봇이 사고를 일으킨 것으로 위장한다는 설정도 말이 안됩니다. 실제로 사고를 일으켰다는 로봇 '나오미'는 바로 폐기되고, MM 중공은 그 뒤로도 잘 나가고 있으니 무의미한 복수였어요. 차라리 로봇을 이용해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걸 널리 알리는게 더 효과적이었을겁니다.
니시나 가문의 딸 호시코의 방자한 행동이라던가, 니시나 도시키의 문란한 사생활 역시 콩가루 재벌집 설정을 드러내는 역할 뿐입니다. 특히 니시나 도시키와 야스코의 관계는 충분히 재미있게 가져갈 수 있는 소재였는데 이래저래 이상하게 소모된 느낌이에요. 

마지막의 열린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다쿠야가 고로의 존재를 눈치챈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쿠야는 고로를 살해할 이유는 없었어요. 경찰에 고로가 나오키를 죽였다고 알리면 그만이죠. 다쿠야가 시체 운반을 맡았던 이유는 예비 처남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고 하면 문제 없었을겁니다. 설령 3인 살인 계획의 증거인 연판장이 남아있었더라도, 이미 2 명은 확실하게 살해한 고로보다는 다쿠야 쪽 주장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죠. 오히려 야스코 살인까지 고로가 뒤집어 썼을 거에요. 어차피 누가 죽였는지 증명할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마지막에 다쿠야가 만든 브루투스가 오작동하여 다쿠야를 죽인다는 결말은 솔직히 납득이 잘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로봇 자체가 이야기의 핵심 소재도 아닌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등장해서 이야기를 끝맺는건 이상하다 싶었어요. 인간보다 로봇이 우수하다고 주장했던 다쿠야의 죽음으로는 어울린다 싶기도 한데, 그동안 뛰어난 엘리트의 모습을 보여왔으니 마지막 로봇을 이용한 범행도 멋지게 성공하는게 더 설득력은 높지 않았을까요?
그 외에도 세세한 문제점들이 많아서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앞서 말씀드렸던대로 재벌 가문과 야심가, 알리바이 트릭이라는 3위 일체는 이미 모리무라 세이이치가 질릴 정도로 써 먹기도 했고요. 거장이 되기 위해 겪었던 시행착오를 보여주는 그런 작품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3/07/13

점과 선 - 마쓰모토 세이초 / 김경남 : 별점 4.5점

점과 선 - 10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모비딕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카사카의 요정 '고유키'에서 일하던 두 명의 종업원은 단골손님인 기계 공구상 야스다 다쓰오를 바래다주기 위해 도쿄역 13번 플랫폼에 섰다. 그곳에서는 15번 플랫폼이 보였다. 둘은 동료 종업원인 오토키가 낯선 남자와 함께 하카타행 침대 특급 '아사카제'에 오르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남자는 최근 부정부패 사건으로 이름이 오르내리던 OO성의 과장대리, 사야마 겐이치였다.

6일 뒤, 오토키와 사야마 겐이치의 시신이 후쿠오카 가시이 해안에서 발견되었다. 두 사람은 청산가리가 든 주스를 마시고 동반 자살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후쿠오카 경찰서의 베테랑 형사 도리카이 준타로는 사야마가 가지고 있던 열차 식당의 영수증이 1인분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의문을 품었다. 동반 자살을 하러 가는 남자가 정말 여성을 두고 혼자 식사를 할 수 있었을까...

마쓰모토 세이초의 첫 장편이자, 발표 당시 대히트를 기록하며 사회파 추리소설의 시대를 연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저도 약 20여 년 전 해적판 번역본으로 처음 접했었는데, 이번에 모비딕과 북스피어가 함께한 ‘세이초 월드 시리즈’의 일환으로 정식 출간되어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미하라 형사가 야스다의 알리바이를 깨뜨리기 위한 집요한 수사 과정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그렇게 복잡하거나 거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구성을 뛰어난 트릭과 현실감 넘치는 수사 전개로 탁월하게 끌고 가는 점에서, 고전 명작다운 품격이 느껴졌습니다.

특히 도쿄에서 거의 존재할 수 없는, '4분의 공백'을 이용하여 사야마와 오토키를 목격하도록 만드는 공작은 "패러디"가 나올 정도로 유명하면서도 멋진 트릭이고, 규슈와 홋카이도를 오가는 알리바이 공작의 큰 스케일, 그리고 그것을 차근차근 파헤쳐가는 수사 과정 모두 지금 다시 읽어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들만큼 흥미진진했습니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상도 압도적입니다. 단순한 정사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을 각각 살해한 후 마치 함께 동반 자살한 것처럼 꾸몄다는 진상은 그야말로 ‘두 개의 점을 잘못된 선으로 연결한 것’이라는 제목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상식이라는 맹점을 찌르는 이 반전 트릭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 깊었습니다.

또한 이전 번역본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사회파적인 요소들과 사건 이후의 씁쓸한 여운도 정식판에서는 더욱 두드러지더군요. 관청의 비리로 시작된 사건이라는 점, 결국 자살한 야스다는 잊혀지고, 비리에 연루되었던 부장은 오히려 더 잘나가게 되었다는 후일담은 무척 씁쓸하면서도 묵직하게 남았습니다. 200여 페이지라는 부담 없는 분량, 알리바이 트릭을 이해하기 위한 표와 도식들, 적절하게 삽입된 일러스트도 독서의 재미를 더해주고요.

물론 약간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야스다의 동기, 그리고 실제 흑막이라 할 수 있는 야스다 료코의 캐릭터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점은 사건 외적인 묘사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지나치게 사건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소설보다는 르포르타주를 읽는 듯한 느낌도 들고요. 병약했던 탓에 기차 시간표를 탐독하다가, 어느새 그것을 활용한 알리바이 조작의 달인이 된 야스다 료코라는 캐릭터가 좀 더 부각되었더라면 훨씬 풍성한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변함없는 흥분을 안겨주는 훌륭한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명작은 역시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별점은 4.5점입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3/12/14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테리 100선

원 출처는 심농님의 홈페이지였으며 (현제 폐쇄), 내용은 국일미디어 간 "유령신사" 뒷부분에도 실려있습니다. 해설은 원본 작성하신 분과 제 의견이 섞여 있습니다. 이런 리스트는 사실 별 의미는 없지만 제목만 보는것도 꽤 재미있더라고요.

001 옥문도 1947 요코미조 세이시 /요코미조 세이시는 긴다이치 하지메(김전일)의 할아버지 긴다이치 코스케의 창조자입니다. 뛰어난 본격 작가죠.
002 허무에의 공물 나카이 히데오 / 이번에 동서에서 나오는 모양입니다.
003 점과 선 1957 ; 마츠모토 세이초 / 열차 시간표를 이용한 트릭
004 불연속 살인사건 1947 ; 사카구치 안고 /ㅎㅎ 바로 전에 읽었던 작품이죠. 동서에서 이번에 나왔습니다.
005 흑사관 살인사건 1934 ; 오구리 무시타로 / 동서에서 나오는 모양입니다.
006 도구라 마구라(환마술) 1935 ; 유메노 규사쿠 / 역시 이번 동서 리스트에.. (대체 언제 나올지는 의문입니다만)
007 혼진 살인사건 1945 ; 요코미조 세이시 /긴다이치 코스케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죠. 트릭은 수긍하기 힘들지만 역사적인 의미가 더 큰 듯 싶습니다.
008 검은 트렁크 1956 ; 아유가와 데츠야 / 동서에서 역시 이번에...
009 회귀천 정사 1980 ; 렌죠 미키히코 / 앗 모르는 작품 (*2011년 시공사에서 출간됨. 걸작입니다)
010 문신 살인사건 1948 ; 다카키 아키미츠 / 유명한 작품이죠. 어서 제대로 다시 소개가 됐으면 좋겠네요. (*동서에서 출간)
011 산고양이의 여름 1984 ; 후나토 요이치 / ?
012 대유괴 1997; 텐도 신 /텐도 신의 대유괴도 참 많이 들어본 작품입니다. (*출간되었습니다. 좋은 작품이에요)
013 이전동화 1923 ; 에도가와 람포 / 국내 소개 됐고 단편입니다. 데뷰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일종의 암호 트릭. 동서 "음울한 짐승"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1에도 수록)
014 음수 1928; 에도가와 람포 / 에도가와 람포의 초기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죠? 동서의 "음울한 짐승" 입니다.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2권에도 수록)
015 제로의 초점 1959 ; 마츠모토 세이초 /0의 초점으로 국내에 출간돼 있죠. 저도 하서판으로 갖고 있는데 전형적인 사회파 작품입니다.
016 11매의 트럼프 1976 ; 아와사카 츠마오
017 아 아이이치로(악애일랑)의 낭패 1978 ; 아와사 카츠마오 / 이 작품도 많이 상위권에 언급되는 작품입니다만.. (*시공사에서 출간, 좋은 작품입니다)
018 기아해협 1962 ; 미나카미 츠도무
019 고메스의 이름은 고메스 1962 ; 유키 쇼지 /역시, 낯이 익습니다. 흠. (*검은숲에서 출간) 
020 위험한 동화 1961 ; 츠치야 다카오 / 작가는 낯이 익은데..
021 점성술 살인사건 1981 ; 시마다 소지 / 나왔군요! 걸작~
022 복잡한 기계 장치 1978 ; 아와사카 츠마오
023 사건 1977 ; 오오카 쇼헤이
024 우리 1983 ; 기타가타 겐조
025 심리시험 1925 ; 에도가와 람포 /동서 "음울한 짐승"에 수록. 조금 낡은 트릭입니다만, 재미 있습니다.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1에도 수록)
026 상자 속의 실낙 1978 ; 다케모토 겐지
027 굶주린 늑대 1981 ; 시미즈 다츠오
028 대낮의 사각 (백주의 사각) 1959 ; 다카키 아키미츠 / 이 작품도 대표작 중 하나라고 알고 있습니다. 동서에서 나온다곤 하는 것 같은데요.. (*검은숲에서 출간)
029 황토의 분류 1965 ; 이쿠지마 지로
030 도망의 거리 1982 ; 기타가타 겐조
031 야수는 죽어야 한다 1958 ; 오야부 하루히코 / 고려원에서 문고판으로 나온 책입니다.
032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1955 ; 다카키 아키미쓰 / 아키미쓰의 작품이 세 개나;; 흠 보고 싶어요. (*검은숲에서 출간됨)
033 나메쿠지 쵸야 체포 소동 1968 ; 츠츠키 미치오.
034 끝없는 추적 1967 ; 이쿠지마 지로
035 고양이는 알고 있다 1957 ; 니키 에츠코 /역시 들어봤던 작품 (*시공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036 묵시록의 여름 (섬머 아포칼립스) 1981 ; 가사이 기요시
037 고도의 마인 1929 ; 에도가와 람포 /국내에 나와 있죠. 하서판으로 읽었는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038 검은 백조 1959 ; 아유가와 데츠야
039 타오르는 파도 1982 ; 모리 에이
040 변호 측 증인 1963 ; 고이즈미 기미코 / 검찰측 증인인가...^^ (*검은숲에서 출간, 무난했습니다)
041 그림자의 고발 1963 ; 츠치야 다카오 /오 제목이 정말 멋지군요.
042 악마의 공돌이 노래 1957 - 요코미조 세이시 /흠 정말 보고 싶었던 작품.
043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1982 ; 시마다 소지 /미타라이 탐정의 두 번째 사건. 너무 보고 싶어요. (*시공사에서 출간)
044 여덟 개의 묘가 있는 마을 1949 ; 요코미조 세이시 / 팔묘촌..
045 신사동맹 1980 ; 고바야시 노부히코
046 징기스칸의 비밀 1958 ; 다카키 아키미츠 /이 소설도 상당히 유명한 작품으로 역사 미스테리로 알고 있습니다.
047 갈라진 해협 1983 ; 시미즈 다츠오
048 리라 장 사건 1968 ; 아야가와 데츠야
049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1929 : 에도가와 람포
050 마른 풀의 뿌리 1961 ; 친신
051 밤의 오딧세이아 1981 ; 후나토 요이치
052 고층의 사각 1969 ; 모리무라 세이이치 /정말 엄청나게 끈질긴 작품입니다. 하서 수록.
053 모래그릇 1960 ; 마츠모토 세이초 /역시 하서. 당시로서는 기발한 흉기가 나오는 전형적인 사회파 작품
054 바이 바이 엔젤 1979 ; 가사이 기요시
055 한시치 체포록 1917 ; 오카모토 기도 / 와 정말 옛날 작품이네요. (*책세상에서 출간)
056 파노라마 섬 기담 1926 ; 에도가와 람포
057 한 개의 납 1959 ; 사노 요 /단편이 국내에 소개가 됐어요
058 사루마루 환상 여행 1980 ; 이자와 모토히코
059 고양이 혀에 못을 박아라 1961 ; 츠즈키 미치오
060 초대받지 않은 손님 1980 ; 사사자와 사호 /사사자와 사호도 많이 언급되는 작가.
061 짙은 갈색의 파스텔 1982 ; 오카지마 후다리
062 인생의 바보 1936 ; 기키 다카타로
063 배덕의 메스 1960 ; 구로이와 쥬고 /제목 참;;
064 증발 1972 ; 나츠키 시즈코 / W의 비극이 대표작아닌가요? 이 작품은 잘 모르겠는데 더 순위가 높네요.
065 나폴레옹 광 1979 ; 아토다 다카시 /단편입니다. 월간 미스터리에 수록된 작품. 단편집도 국내에 출시가 됐었는데요. 저는 참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서늘~합니다.
066 부호 형사 1978 ; 츠츠이 야스다카 / SF소설가로 더 유명한 작가인 듯 한데 이 작품도 보고 싶네요. (*검은숲에서 출간,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067 샤라쿠 살인사건 1983 ; 다카하시 가츠히코
068 잠 없는 밤 1982 ; 기타가타 겐조
069 나비부인 살인사건 1946 ; 요코미조 세이시 / 동서에서 나왔습니다. "혼진 살인사건"과 같이 수록 되어 있습니다.
070 죽음이 있는 풍경 1965 ; 아유가와 데츠야
071 살인귀 1931 ; 하마오 시로
072 불꽃에 그림을 1966 ; 친신
073 검은 화집 1960 ; 마츠모토 세이초
074 아쿠쥬로 체포기록 1939 ; 히사오 쥬란
075 W의 비극 1982 ; 나츠키 시즈코 / 좋은 작품입니다.
076 베를린 1888년 1967 ; 가이도 에이오
077 안녕 아프리카의 여왕 1979 ; 모리 에이
078 단쥬로 할복 사건 1959 ; 도이다 야스지
079 거대한 환영 1962 ; 도가와 마사코 / 국내 소개된 작품은 "레이디 킬러"
080 마리오네트의 덫 1977 ; 아카가와 지로 / 유명세에 비하면 작품은 사실 좀 별로라는 생각이...^^ (*국내 출간, 쓰레기였습니다)
081 완전범죄 1933 – 오구리 무시타로
082 내일 날씨로 해두게 1983 ; 오카지마 후다리
083 삼중노출 1964 - 츠즈키 미치오
084 살아나는 황금늑대 1964 ; 오야부 하루히코
085 어두운 낙조 1965 ; 유키 쇼지
086 인간의 증명 1975 ; 모리무라 세이이치 / 어머니.. 그때 그 밀짚모자...
087 유령 열차 1976 - 아카가와 지로 / 아마 데뷰작이죠? (*국내 출간,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088 뺑소니 1969 ; 사노 요
089 유괴작전 1962 - 츠즈키 미치오
090 비합법원 1969 ; 후나토 요이치
091 장미여자 1983 : 가사이 기요시
092 스탈린 암살 계획 1978 ; 히야마 요시아키
093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 1983 ; 기타가타 겐조
094 돌밑의 기록 1948 - 오시타 우타루
095 추락 1958 ; 다카가와 교
096 우리들의 시대 1978 ; 구리모토 가오루
097 호크씨의 타향의 모험 1983 ; 가노 이치로
098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 1984 ; 시마다 소지 /보고 싶어요;; (*국내 출간)
099 50만 년의 사각 1976 ; 도모노 로
100 살인에의 초대 1973 ; 텐도 신

2008/04/18

너를 노린다 - 마쓰모토 세이쵸 / 문호 : 별점 3점

너를 노린다 - 6점
마츠모토 세이조 지음, 문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쇼와 전기 제작소 과장 다쓰오는 어음 사기에 말려들어 자살한 직장 상사의 복수를 위해 회사에 휴가를 내고 어음사기단 조사에 착수했다. 몇 안되는 단서 중 최초 어음 사기단과 차장을 연결해 준 야마스기 상사, 그 중에서 연락책 역할을 담당하는 듯한 우에자키 에쓰코라는 여성에게 주목한 다쓰오는 몇번의 미행 끝에 우익의 신예 거물 후네자카가 사건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친구인 신문사 기자 다무라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사건에 깊숙히 개입한 둘, 그리고 회사의 부탁으로 나름의 사건 조사를 진행하던 세누마 변호사와 그의 부하 다루마가 납치-살해되는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결국 놀라운 진실을 마주하는데...

사회파의 시작이자 거두 마츠모토 세이쵸의 장편 소설입니다. 원제는 "눈의 벽"입니다. 번역 제목이 굉장히 난데없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어쨌건, 나름 대표작 취급을 받고 있기도 하고, 정통 사회파 추리물에는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라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세이쵸 같이 다작 작가는 초기작이 후기작보다 훨씬 뛰어난데 이 작품의 경우는 실질적인 장편 데뷰작이라서 더욱 기대가 컸습니다.

일단 일반적인 사회파 작품들과는 다르게 경찰(또는 경찰 출신 인물)이 아닌 일반 직장인이 주인공이라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그러나 덕분에 "수사"에 많은 내용을 할애하고 있는 사회파 작품들에 비한다면 아무래도 "수사" 부분에서의 정교함이 떨어지는 느낌이 많이 든다는건 단점입니다. 또한 다쓰오가 초반부터 단 한번의 미행으로 사건의 배후 인물을 눈치챈다는 설정, 여러가지 단서가 우연에 기반하고 있는 전개는 솔직히 너무 쉽게 간 느낌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다쓰오의 시점에서 프로와 아마츄어를 언급하며 일반인의 한계를 자주 묘사하는 것은, 작가 스스로도 상당히 답답해 하며 작품을 써 나간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역시 거장다운 부분도 존재합니다. 일종의 시체 조작 트릭, 그리고 몇가지 사소한 단서에서 진정한 범인의 정체를 드러내는 부분이 그러한데, 복선도 확실하고 잘 짜여져 있었습니다. 뭐 거의 반세기 이전의 작품이기에 법의학적인 면으로 본다면 좀 말이 안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시대를 감안해야겠죠. 아울러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반전 역시 꽤 인상적이에요. 정교한 복선 덕에 합리적이면서도 상당한 놀라움을 가져다 주거든요. 도쿄역에서 시작하여 나가노현의 촌까지 확장되는 방대한 작중 무대를 역시나 사회파다운 꼼꼼한 자료조사를 통해 상세하게 묘사한 것 역시 치밀하고 좋았고요. 이 방대한 무대 덕분에 기차 시간표와 지명을 계속 언급함으로써 작가의 전작인 "점과 선" 같은 기차 시간표 알리바이 트릭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 저는 제대로 한대 먹긴 했습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본다면 기대에 값하는 아주 흡족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분량이 꽤 되는 장편이지만 전체적으로 꽉 짜여진 느낌을 별로 전해주지 못하는 것은 분명 작가의 데뷰작에 가까운 작품이라 하더라도 많이 아쉬운 부분이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점 과 선"과 "제로의 촛점"이나 "모래 그릇" 과 같은 초기작 보다는 약간 처지고, "나비성" 이나 "적색등" 과 같은 후기작보다는 나은 중간정도의 작품으로 생각되네요.

물론 당시의 사회상을 잘 반영하여 짜여져 있는 만큼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합니다. 평작이긴 한데 몰입시키는 맛은 뛰어났달까요? 뭐 이런 것이 거장의 실력이겠죠. 저의 별점으로는 3점 되겠습니다.

2007/03/22

죽은 사람은 스키를 타지 않는다 - 패트리샤 모이즈 / 진용우: 별점 3점

죽은 사람은 스키를 타지 않는다
패트리샤 모이스 지음, 진용우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런던 경시청의 주임 경감 헨리 티베트는 아내 에미와 함께 이탈리아의 산타 키아라로 스키 휴가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 여행의 이면에는 산타 키아라가 중심이 된 국제적 마약 조직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한 밀명이 있었다. 

그는 정체를 숨긴채 스키를 타기 위해 찾아온 여러 국적의 스키어들과 친분을 나누며 스키를 즐겼지만, 마약 밀매의 중심인물로 의심되는 프리츠 하우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뒤 이탈리아 경찰 스페치 경감과 함께 사건 수사에 뛰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프리츠 하우저가 살해된 당시 가능성이 있던 용의자들은 모두 제각기 동기가 있던 상태여서 수사는 답보상태에 빠졌다. 그래도 어느 정도 범인을 확신한 헨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쥐고 있던 리프트 관리인 마리오 영감이 무언가를 고백하기로 했지만, 마리오 영감마저 프리츠 하우저와 동일한 모습으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헨리는 이 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고민하게 되는데..

패트리샤 모이즈의 처녀작 장편으로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실 초반은 굉장히 지루합니다. 본격적인 사건인 프리츠 하우저 살인 사건이 벌어질 때 까지의 100페이지에 이르는 길고 긴 스키어들과 스키장의 묘사가 참기 힘들 정도로 따분한 탓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정말이지 정신없이 읽게 되더군요. 사건이 벌어진 뒤의 이야기가 워낙에 흡입력이 넘치고, 정통파에 기반을 둔 본격 트릭물이라서 저같은 본격 애호가에게는 딱 들어맞는 작품인 덕분입니다.

요새 기준으로 본다면 소박하게 느껴지는, 단(!) 두건의 살인 사건만 등장하지만 두 사건 모두 상세한 시간표까지 등장시키는 식으로 공정하고 정교하게 잘 짜여진 트릭들이 돋보입니다. 특히 마지막에 헨리 티베트가 결정적 힌트를 얻는 장면은 공평하게 정보가 제공된다는 점에서 "독자에의 도전" 같은 분위기가 느껴질 정도였고요. 덧붙이자면 현대 추리소설에서 많이 간과되는 부분인, 제가 좋아하는 "동기" 부분까지 모든 용의자에게 고르게 혐의가 갈 수 있도록 상세하게 설정하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첫 번째 사건에 비해 두 번째 사건은 다소 억지스럽습니다. 예를 들면 "발자국" 문제는 차라리 눈이 오는 걸 기대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고, 활강은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도박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두 사건 모두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구현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범인이 될 수 있는 인물"을 만드는데에는 실패했기 때문에 완전 범죄로 보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고요.
그리고 영어, 이탈리어어, 독일어가 각각 쓰이는 상황은 보다 더 재미있게 구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성탐정록 첫 번째 이야기 같은 트릭이 나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덧붙이자면 작품의 재미와는 별개로 여류 작가 특유의 귀족적 취향과 로맨스적인 설정이 좀 과도한 것은 옥의 티였습니다. 애거서 여사님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2차대전 이후 비교적 현대로 넘어온 시대의 소설 치고는 너무 낭만적이랄까요? 특히 맨 마지막의 남작의 액션씬(?) 은 정말 아니올시다 였습닌다. 재미를 해칠 정도는 아니지만 거슬렸어요.

그래도 최소한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만족할만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걸작"이라고 칭하기에는 좀 부족하더라도 말이죠. 헨리 티베트 경감도 시리즈 캐릭터인 모양인데 후속작도 보고 싶어지게 만들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눈 쌓인 산장+스키장과 거기 묵는 악인을 중심으로 모인 많은 사람들" 이라는 주제가 이 작품에서 제일 처음 등장했는지는 좀 궁금하네요. 본격물이 등장하기 딱 좋은 무대잖아요. 최소한 김전일의 "타로 산장" 에피소드가 이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리프트가 굉장히 적절하게 쓰인 점만 보더라도 말이죠. 솔직히 이 소설처럼 관광명소가 된 스키장이라면 모를까 김전일의 타로 산장같은 펜션이 리프트 같은 거대 시설을 유지한다는 것은 너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이유를 이제서야 좀 알겠네요. 야마기 세이마루 씨가 이 작품을 읽고 "나도 써먹어야겠다!" 라고 두 손을 불끈 쥐는 모습이 눈 앞에 선합니다.

2009/06/29

히다다까야마(飛馬單高山)에서 사라진 여인 - 니시무라 교타로 : 별점 3점

히다다까야마에서 시라이시 유까라는 스케치를 잘하던 여관 투숙객이 급작스럽게 동경으로 떠난 10일 뒤 근처 북알프스에서 한 여인의 교살 사체가 발견되고, 몇가지 단서를 토대로 시라이시 유끼와의 관계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다. 시라이시 유까의 거주지인 동경의 수사1과 토츠가와 경부가 사건 수사에 협력하게 되지만 그녀가 가명을 썼다는 것이 밝혀진 뒤, 시라이시 유까가 그린 것으로 보이는 스케치가 현장에 남겨지는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토츠가와 경부와 부하 가메이 형사 등은 사건해결에는 시라이시 유까를 자칭한 여성의 진짜 정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양한 수사활동을 통해 그녀의 정체가 고노데라 유미코라는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되지만 그녀의 행적은 알 수가 없는데....


"침대특급살인사건"을 비롯, 국내에 소개된 몇권의 책으로 접했던 일본의 추리작가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작품들은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이 전면에 내세워지는 작품이었던 반면, 이 작품은 흡사 우치다 야스오를 연상케 하는 "여정 미스터리"더군요.

추리적으로 대단한 트릭이 선보이는 트릭물은 아니며, 여러명의 경찰과 형사들이 각각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와중에 발굴해내는 몇가지 안되는 단서들에서 뽑아낼 수 있는 이야기를 잘 가공한 치밀한 수사물이라고 하는게 맞겠죠.
제목의 히다다까야마의 여러 명소들은 물론, 이즈 온천 등 일본의 명승지가 대거 등장하여 "여정 미스터리"로의 컨셉도 제대로 수행하고 있어서 이색적이라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작중 등장하는 히다다까야마 그림엽서를 놓고 이야기를 구상하는 작가의 모습이 떠올라 흐뭇하기도 하고요. 도쿄에서 전철로 한 4시간 정도 걸리는 마을인 것 같은데 다음번에 갈 기회가 생기면 좋겠네요.
아울러 시리즈 캐릭터 동경 경시청 수사1과의 토츠가와 - 가메이 컴비의 등장도 반가운 점이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든 시리즈물이니까요. 토츠가와 경부의 상상의 나래를 펴는, 비약하는 추리법도 여전하고 말이죠. 명탐정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사건의 전모를 먼저 추리한 뒤, 그에 적합한 단서를 다양한 방법으로 치밀하게 수집하는 수사법도 현실에 어울리기도 하고 설득력이 넘쳐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쉽게 쓴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지나치게 우연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거든요. 예를 들면 고노데라 유미코가 "가명"을 쓴 이유는 사실상 우연에 기인한 것이라 그녀가 본명을 썼을 경우에는 사건이 보다 빨리 해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 정체불명의 여성 사체 주변에서 우연하게! 목탄 조각이 발견된 것에 주목하여 시라이시 유까와의 관계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는 점 등입니다.
또한 설명이 부족하고 전개에 필요한 부분으로만 이야기가 비약하고 있는 것도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죠. 스케치를 한 다른 여인에 대한 존재가 쉽게 밝혀지지 않은 이유라던가 스케치를 바꿔친 목적을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는 것 등이 특히 그렇습니다. 스케치가 중요한 요소로 불거지지 않았다면 토츠가와 경부가 사실상 "시라이시 유까"를 자칭한 여성의 정체를 알아내기 어려웠을 텐데 왜 범인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더군요. 그리고 경찰의 수사선상에서 진범인 시라이시의 진짜 정체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너무나 거창한 위조사업을 벌였잖아요) 도 설명이 미흡한 부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정 미스터리의 단점이기도 한, "이색적인 풍광" 말고는 "히다다까야마"라는 배경 설정의 존재가치가 전무하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죠. 한마디로 "설악산 흔들바위 살인사건" 정도 되는 사건인데 정작 흔들바위는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내용이니까요.

때문에 쉽게쉽게 재미있게 읽히는 맛도 넘치고 "히다다까야마"에 대한 관광 가이드 역할도 충실한 좋은 작품이기는 한데 완벽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그냥저냥한 수준의 평작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정식으로 번역된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우연하게 구한 txt 파일로 읽은 것이라 좀 기분이 꽁기꽁기합니다. 아무리 뒤져도 국내에 정식 출간된 것 같지는 않지만, 책은 빌려서도 읽지 않고 무조건 사서 읽는것이 원칙이었고 개인적으로도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터라 마음이 불편하네요. 번역도 제대로 마무리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은 파일인데, 앞으로 정식 출간되면 꼭 사볼 것을 다짐해 봅니다.

2026/09/11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 - 아오사키 유고 외 : 별점 2.5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데뷰 35주년을 기념하여, 젊은 작가 일곱 명이 '아리스가와 세계관'으로 발표한 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세계관이지만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가 가장 많습니다. 또 다른 대표 시리즈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명탐정 에가미 지로 등장 작품은 한 편 밖에 없고요. 행각승 지장 스님 시리즈도 한 편 있을 정도인데 말이지요.

하여튼, 꽤 신선한 기획인데 작품들 수준도 괜찮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젊은 작가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덕분입니다. 대부분 아리스가와 월드를 충실히 구현한, 전통적인 신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 점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끈, 밧줄, 로프" 아오사키 유고

야스미 노도카가 모아이 도자기 상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살해당한채 발견되었다. 동기는 희귀 게임 카드이며 범인은 새시를 통해 시체를 밖으로 운반한 뒤, 바다로 시체를 내던진 것으로 보였다. 여러 현장 상황을 통해 범인은 자동 잠금장치가 설치된 아파트 주민 29명 중 한 명이며, 그 중에서도 당일 오전, 로프같은걸 버린 세 명 중 한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피해자가 죽기 전 로프 같은 것으로 묶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각자 버린 건 다용도 마끈, 안전용 수평 구명줄, 반사 소재 텐트 로프였다. 

히무라 히데오가 '필드 워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전형적인 신본격 단편입니다.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아오사키 유고답게 추리적인 부분은 완벽에 가깝습니다. 

히무라는 피해자가 둔기에 맞았을 때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가 깨어있을 때 침입했고 흉기로 위협했다고 추리합니다. 그리고 뭔가에 묶인 피해자를 나르는 범인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 사체를 유기하기 직전에 묶은 끈을 회수했다고 추리하고요. 사체 유기가 실패했다는걸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기 때문에, 끈을 푸는 데에는 위협에 사용했던 칼을 사용했습니다. 다음날 범인은 토막난 끈을 버려야 했으며, 이는 쓰레기 버릴 때 종이 팩을 사용했다고 지적받았던 시나다의 행동과 이어집니다. 즉, 시나다가 범인입니다. 시나다는 매일 종이 팩 쥬스를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 그게 재활용이라는걸 모르지 않았다는 것도 증거이고요.

사건과 범인이 로프를 그날 버린 이유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핵심 단서인 '로프'를 가지고 기둥서방 시나다의 유력한 동기였던 '동아줄'로 이어지는 일종의 언어유희적인 전개도 괜찮습니다.

다만 설정 자체가 조금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현대 법의학, 법과학으로 범인을 충분히 밝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수수께끼 풀이용 단편으로는 충분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정통파 추리 소설에 대한 작가의 고민도 흥미롭습니다. 아래의 말을 빌어서, 추리 소설가의 필사적인 창작은 결국 AI도 만들 수 있는, 독창적인 요소가 없는 결과물일거라는게 요지인데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 '정보를 수집하고 검토해 논리적으로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가 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그 해법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 "수수께끼 풀이 자체는 누가 설명해도 마찬가지인, 개성없는 장면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애초에 누구나 풀 수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면 본격 미스터리로 성립할 수 없다는 딜레마도 있어. 결국 탐정 캐릭터들도 '모범 답안'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 걸지도 몰라."

물론 이 논리는 미스터리는 과학이 아니라 유사 과학이라는 히무라의 입을 빌어 작가 본인 스스로 타개하고 있기는 합니다. 탐정들은 미스터리의 신의 말을 전하는 선교사인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 놓는 과학자와 다른 집단이라면서요. 그래도 AI도 만들 수 있다는 결과물이라는게 변하지는 않지만요...

"클로즈드 클로즈" 이치오 미치

아리스와 히무라는 여고에서 일어났던 교복 도난 사건 해결을 부탁받았다. 교복을 도난당한 다즈하라 시게오는 같은 3학년 부원인 고미야 리오와 반목이 있었다. 그러나 고미야는 이미 수개월 전 전학을 간 상황이었다. 

다즈하라가 고미야에게 교복을 빌려줬는데, 다른 친구에게 빌린 거울이 들어 있어서 도난 소동으로 발전했다는게 진상입니다. 그런데 추리적으로 딱히 눈여겨 볼 부분은 없습니다. 히무라가 이렇게 추리해 낸 과정이 제대로 선보이지 않는 탓입니다.

또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팬에게서 만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아리스와 히무라가 여고에서 가짜 신분(?)으로 활동하는 일상계 추리물이라는 설정은 독특하지만, 둘의 대화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모두 여성 작가가 쓴 듯한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더 건조하게 묘사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수록작 중 최악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히무라 히데오에게 바치는 괴담" 오리가미 교야

도쿄에서 열린 이벤트에 참석했던 아리스와 히무라는 그날 밤 찾은 바에서 서점 직원 쓰지와 합석하게 되었다. 쓰지는 둘에게 자신이 겪었던 괴담을 들려주었고, 히무라는 자신만의 추리로 괴담의 진상을 풀어냈다.

쓰지가 네 편의 괴담을,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한 바 손님이 한 편의 괴담을 들려주어 총 다섯 편의 괴담이 선보입니다. 쓰지가 겪거나 들었던 괴담은 모두 추리를 통해 진상이 밝혀지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 후배 하숙집에서 심야에 전자기기가 오작동하는 사건이 자꾸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날은 한밤중에 탄내까지 났다.
    진상: 개조한 불법 무선기로 통신하는 장거리 트럭이 원인이었다. 심야에 발생한건 장거리 트럭은 고속도로 통행 요금이 할인되는 심야에 운행하기 때문이며, 탄내는 오작동한 전열기구 때문이었다.
  • 쓰지는 대학 시절에 동창과 숲에서 고개를 돌리며 짐승 울음 소리를 내었던 인형 탈을 보았다.
    진상: 몸은 땅 속에 묻힌 사람에게 인형 탈을 씌워 숲속에 방치해 둔 것이었다. 짐승 울음 소리는 재갈이 물려있던 탓이며, 비성수기 휴양지 산속이라는 현장이 근거이다.
  • 등산을 좋아하는 쓰지의 친구는 안개로 뒤덮인 산길에서 똑같이 생긴 오두막을 등산로에서 연이어 발견했다.
    진상: 그냥 오두막이 두 채 있었다.
  • 쓰지는 방학 때 고향 친구 가가와, 가가와의 선배 유모토와 함께 폐업한 유원지에서 담력 시험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유모토가 미러 하우스 안으로 들어간 뒤 사라져버렸고, 그를 찾으러 들어간 쓰지는 미러 하우스 속 거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형체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그 뒤 가가와와 유모토와는 연락이 끊겼다.
    진상: 고객을 놀라게 만드는데 사용했던 매직 미러를 이용하여 유모토가 쓰지를 놀라게 만든 장난이었다. 

첫 번째 괴담은 재미있고, 네 번째 괴담도 추리만큼은 그런대로 합리적이지만 다른건 별로입니다. 그리고 모두 진상을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도 크고요. 

이보다는 바 손님인 이토가 이야기한 진짜 괴담이 더 괜찮았습니다. 이토는 교통사고 현장에 놓여있던 시들어진 조화를 버리고 새로 꽃을 사서 갖다 둔 뒤, 원망하는 표정의 여자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선의로 행한 일인데 왜 귀신은 원망을 가졌을까요? 아리스의 추리는 '꽃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즉, 원래 놓여있던 시든 꽃이 귀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놓아둔 꽃이었다는 것이지요. 이 역시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는 있지만 의표를 찌르는 맛도 좋고, 아리스가 추리를 펼친다는 의외성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 저는 잘 모르는 '심령 탐정'이라는 아리스가와 월드 속 다른 주인공이 언급되는 등, 헌정물로는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블랙 미러" 시라이 도모유키

'나'는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때 친구였던 가가미 에이지로부터 오랫만에 연락을 받고 만났다. 그 뒤, 경찰을 만나 에이지와 그의 형 고이치가 연루된 살인사건에 대해 들었다. 상황은 에이지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나'와의 만남을 진행한 것으로 보였지만, 알리바이 트릭은 완벽해서 깨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추리소설가를 꿈꾸던 '나'와, 경찰을 돕던 건방진 교수 히무라가 힘을 합쳐 알리바이를 깨는데 성공한다.

복잡한 시간표로 구성된, 전형적인 시간표 알리바이 트릭물입니다. 쌍둥이인 에이지와 고이치가 어느 시점에 교체하여 서로의 알리바이를 만든게 진상입니다. 핵심은 고이치가 엄지손가락을 절단한 뒤, 그걸 가지고 에이지가 고이치의 비밀금고를 열었던 것이고요. 이는 고이치가 범행을 저지른 뒤, 생수병 뚜껑을 따지 못해 머그컵으로 물을 마셨던 상황 등으로 추리됩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는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70년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CCTV가 여러 곳에 가득한데 자신의 노출을 이렇게까지 숨기면서 짜여진 시간표 동선대로 이동한다는건 말오 안되니까요. 히무라가 사건에 뛰어든 이유가 역에서 뛰어나가던 에이지와 부딪혔기 때문이었다는 우연도 작위적이고요.

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메타적인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현재 가장 뜨거운 작가 중 하나인 시라이 도모유키의 작품치고는 영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의 수수께끼" 유키 하루오

추리 소설가인 '나'는 신작 구상을 위해 담당 편집자 미토베 씨와 함께 취재차 온천 휴양지를 찾았다. 그런데 그곳 식당에서 만난 점원 후쿠나가 아이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촌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둘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후쿠나가의 사촌 아버지인 외삼촌 거처를 찾았고, 그곳에서 미토베 씨는 사촌의 행동을 추리해 내는데...

작품을 다 읽었지만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촌의 기묘한 언행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유명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지만, 무대와 설정은 아리스가와 월드가 아니라는게 특징입니다. 

추리는 사촌이 후쿠나가에게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서재에 있던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은 커버와 띠지만이며, 내용물은 다른 책으로 바뀌어져 있었기 때문이고요. 사촌은 별채에 침입하여 아버지의 만년필을 훔쳤습니다. 그러나 눈이 오는 바람에 별채에서 탈출하지 못했고, 별채는 난방이 안되어서 너무 추웠던 탓에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난로에 태웠던 겁니다. 후쿠나가의 외삼촌은 모든 장서를 서재와 별채, 두 곳에 비치하였기 때문에 다음날 외삼촌이 돌아오기 전 사촌은 서재의 책을 별채로 옮기고, 때우지 않았던 띠지와 표지를 서재에 있던 다른 책에 씌워 위장했고요. 책은 새로 주문했지만 도착까지는 시간이 걸려서 당장 후쿠나가에게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안티인 척을 했던 거지요.

위의 추리를 위한 모든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되는 좋은 추리물입니다.  유명 작품은 물론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의 TV 방영까지를 작품 설정에 녹였다는 점에서 '헌정'이라는 취지에도 딱 들어 맞고요.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를 표방한 사촌의 주장은 헌정이라는 취지와 정 반대이기는 하지만, 이런게 또 기획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제가 읽었던 유키 하루오의 작품은 비현실적인 설정이 문제였는데, 소규모 일상계로 설정을 좁혀 놓으니 훨씬 낫네요.  

"행각승 지장 스님의 낭패" 아쓰카와 다쓰미

20년 전, 행각승 지장 스님의 이야기를 '에이프릴'에서 들은 멤버였던 '나'와 도코가와는 오랫 만에 한 잔 하기 위해 '풀스 메이트'라는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20년 전과 똑같이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각승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20년 전과는 다르게, 손님들의 공격과 의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풋내기였다.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은 그렇게 인기가 많은 작품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이 작품을 헌정물로 새롭게 써 낸게 좀 신기하네요. 일종의 '도라에몽 세계관'인 히무리 히데오 시리즈와는 다르게, 지장 스님이 활약한 20년 후인 현재를 무대로 협박범 구로사와가 살해당했는데, 사체는 피해자가 수집했던 나비 표본 수십 개로 둘러 쌓여 있었던 사건에 대한 추리가 펼쳐집니다.

나비의 이름이 범인을 특정하는데, 나비 표본 하나만 꺼내어져 있으면 범인이라는게 바로 드러나서 어쩔 수 없이 표본을 전부 꺼냈다는게 진상입니다. 범인은 나비 표본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르는 아사기 유즈루였고요.

이 뒤에 등장인물의 이름, 수를 가지고 딴지를 거는 손님에게 진짜 지장 스님이 나타나 보강하는 추리를 펼치며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여러모로 추리 퀴즈에 가까우며,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다는 점에서 원전과 비슷한 점이 많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시체의 실루엣은 말한다" 이마무라 마사히로

에이토 대학 추리 소설 연구회 멤버 5명은 고향 나고야로 취업 활동을 갔다 온 오다가 가져온 수수께끼 풀이에 나섰다. 오다가 만난 동향인 고바야시가 친구가 남긴 암호를 해독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나왔습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 이 시리즈 단편은 읽은 적이 없는데, 젊은 작가가 일종의 일상계로 풀어낸게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형식만 신선한게 아니라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고바야시의 친구 바토 씨가 남긴 낙서와 다이잉 메시지를 풀어내는 과정이 추리 소설 연구회 5명의 대화를 통해 펼쳐지는데, 정말로 모든 있을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추리와 의견들을 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드러나는 진상은 꽤 합리적으로 느껴져요. 대화로 일종의 추리 대결을 펼쳐나간다는 점에서는 작가의 전작 "시인장의 살인" 속 학생 식당 메뉴 맞추기 게임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시와 바토가 헤어졌고, 이 사건은 바토가 고바야시가 계속 어울려 줄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벌인 일종의 게임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은 있습니다. 결국 진상은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 탓이에요. 다이잉 메시지도 AOK로 읽히는데 이건 All-OK라는 추리 역시 근거없는 공허한 주장일 뿐이지요.

논리적으로 즐길거리는 많은데 다소 맥이 빠진다는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에가미 선배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 등 팬이라면 소소히 즐길거리가 있지만, 그리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07/11/26

문호춘추 - 이시이 히사이치 : 별점 2.5점

"이웃집 야마다군"으로 유명한 4컷 만화의 전설 이시이 히사이치의 작품. 

일본 문단의 원로인 "히로오카" 선생을 주인공으로 하여 문필가의 세계를 개그스럽게 그리고 있으며, 그외의 부가 캐릭터로 담당 편집인 야스다와 가정부, 후배 작가인 중견 추리작가 다부치 코스케 등이 등장하여 작품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대표작은 아니지만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에 소개했던 "Comical Mystery Tour"는 추리 매니아들이 아니라면 즐길 거리가 좀 적은 편인데, 이 작품은 이른바 "팔리지 않는 원로" 히로오카 선생의 독특함이 정말 재치있게 그려져서 추천하고 싶네요. 추리 작가인 다부치 코스케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추리팬으로서는 더욱 즐거운 에피소드였고요. 
추리 에피소드를 한가지 소개해 드리자면, 다부치가 새로운 알리바이 트릭을 고안합니다. 한 지방 역에서 교묘하게 얽힌 기차 시간표를 이용해 기차를 갈아타는 트릭인데 사실 여부 확인을 위해 해당 역에 문의를 하죠. 그러자 역장은 "가능하긴 한데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라고 답합니다. 이유는 그 역이 워낙 노인들밖에 없어서 1분만에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전력 질주한다면 "너무 눈에 뜨인다" 라고 이야기하죠^^ 매니아적이긴 하지만 재미있죠?

모든 에피소드가 재미있는건 아니고, 취향을 탈 고그도 많아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만, 그래도 제가 읽은 이시이 히사이치 작품 중에서는 최고였습니다. 국내에도 4컷 만화가 요새 많이 나오는데 이런 연령대 높은 작품도 내어 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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