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의 사각 1 -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
대낮의 사각 2 -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으로 무려 800여페이지가 넘는 초거대작.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 가미즈 교스케, 기리시마 사부로, 햐쿠타니 센이치로가 등장하는 정통파 본격 추리소설이 아니라 쓰루오카 시치로라는 천재적인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한 범죄 소설로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터리 100선에도 선정된 (28위)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 <도착의 사각>이 떠오르는 제목이라 당연히 본격물이라 생각했는데 의외였어요.
범죄 소설의 재미요소라면 무엇보다도 얼마나 범죄가 치밀하게 그려지는가? 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이 작품은 그런 점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음 편취 사기가 주로 등장하는데 설득력이 아주 높거든요. 키 포인트 두가지, 어떻게 어음을 손에 넣는지와 그것을 어떻게 현금화 하는지에 대해 재미있으면서도 기발하게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등장하는 여러 사기 사건 중 어음을 발행하는 피해자가 홀딱 넘어가도록 연극을 연출하듯 모든 상황과 장소를 조작하는, 일본 조선 주식회사로 위장한 회사 건물 안에서 벌인 신요 기선 어음 편취 사건, 그리고 실존하는 공사관을 무대로 대사의 비서와 직접 짜고 벌인 파세도나 공사관 사기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외의 사건들도 치밀함은 마찬가지인데 실제 범죄자와 직접 인터뷰를 한 뒤 쓰여졌다고 하니 그 생생함과 설득력이 남다를 수 밖에 없겠죠. 항상 사기는 당하는 쪽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치밀하면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아울러 주인공이 도쿄대 법대 출신이라는 설정을 대기업 임원과의 술자리 대화를 통해 자금을 편취하는 사기라던가, 경찰 취조를 빠져나가는 부분 등에서 효과적으로 써먹는 것도 괜찮았습니다.
또 범죄 소설은 주인공 범죄자의 캐릭터도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로 "뤼팽"은 고전 본격물에 가까워 뺀다 쳐도 "팡토마스"에서 시작하여 리처드 스타크의 "악당 파커"라던가, 퍼트리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와 같은 유명한 악당 캐릭터는 지금까지도 그 생명력이 이어지고 있죠. 이 작품 역시 등장인물들 묘사가 아주 그럴듯한데, 그 중에서도 자신의 모든 행동을 분단위로 기록한다는 천재 스미다 고이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비록 초반부에 퇴장하지만 천재이자 광인으로 그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기 때문인데 시간을 지배한 남자 류비세프의 흑화버젼이랄까요. 참고로, 실존했던 전후 도쿄대 출신 수재들이 벌인 "히카리 클럽" 사건 주역에게서 모티브를 얻어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입을 빈 전쟁 직후, 이른바 전중 혹은 전후파라 불리우는 세대의 시각도 돋보였습니다. 메이지 세대라 불리우는 전쟁을 일으킨 세대에 대해 맹목적인 분노와 적개심 가득한데 1920년대 생인 작가 본인의 시각이겠죠. 허나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도 성공은 하고 싶고, 위기에 몰리면 피해자 코스프레에 몰두하는 비겁한 인물들일 뿐입니다. 시대의 대악당을 꿈꾸지만 결국 소인배라는 것이 이채롭네요.
이렇게 소재 및 전개, 캐릭터까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재미를 갖춘 작품이기는 하나 아쉬운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일단 이야기의 흐름이 하나의 거대 장편이라기 보다는 옴니버스 범죄물처럼 토막나 있어서 하나의 호흡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것이 그러합니다. 이럴거라면 여러편으로 시리즈를 쪼개던가, 아니면 큰 줄기의 이야기를 구태여 넣지 않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주인공 쓰루오카의 캐릭터가 스미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본인 스스로 악인을 자처하는데 인간적인 모습이 계속 엿보이게 만드니 죽도 밥도 안된 느낌이에요. 차라리 <야수는 죽어야 한다>의 다테 구니히코처럼 막 나가는 것이 이 작품에는 더 좋았을 겁니다. 그나마 마무리 직전까지는 그런대로 능력있는 악당 필인데 마지막의 급작스러운 몰락으로 캐릭터 훼손도 심합니다. 쓰루오카를 집요하게 추적하던 후쿠나가 검사에 의해 체포된 뒤, 파세도나 공사관 사건에서 고용했던 하수인 곤잘로의 증언으로 한순간에 끝장난다는 결말인데 고작 이정도밖에 안되나? 싶거든요. 좀 더 치밀한 안배, 효과적인 도주가 덧붙여져야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여성들에 대한 묘사가 별로라는 것도 단점입니다. "여자는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도구는 많을 수록 좋다"라는 스미다의 신조가 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탓인데 다카코의 자살은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그야말로 개죽음이었을 뿐 쓰루오카가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는,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니까요. 일종의 성녀 이미지를 작품에 집어넣어 쓰루오카의 악을 비교하여 더욱 추악하게 묘사하려는 의도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진부한 캐릭터에 진부한 묘사로 분량만 아까웠어요.
그리고 이건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만화 <쿠로사기> 등에서 이미 접해본 것들과 비슷해서 신선함이 떨어지기는 하더군요. 작품이 발표된 시기에 읽어보았다면 굉장히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을텐데 지금 읽기에는 낡기도 했고요.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쓸데없는 묘사는 덜어내고 패배를 모르는 냉혹한 악당 쓰루오카의 범죄 행각에 촛점을 맞추었더라면 별점 4점 이상은 너끈했겠지만 이러한 단점들로 인해 감점합니다. 그래도 천재적인 범죄에 전율하게 만드는 거장의 솜씨는 놀라운 고전 명작임에는 분명한 만큼, 추리소설 애호가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덧 : 현재까지 국내 출간된 다카기 아키미쓰 작품 8편은 전부 다 읽어보았는데 개인적인 순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야망의 덫> - <실험부부> - <파계재판> - <문신 살인사건> - <대낮의 사각 (본편)> - <유괴> -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 <제로의 밀월>
작품별 별점 평점이 2.037.., 3점이네요. "타율왕"에 올려도 부족함이 없겠습니다.
참고로, 야망의 덫과 실험부부는 제 추리소설 리뷰 초창기에 읽고 감상을 남긴 것이라 지금 읽으면 점수가 좀 처질 수도 있는 점 양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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