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왕국 - 프리드리히 글라우저 지음, 박원영 옮김/레드박스 |
<하기 리뷰에는 내용 일부,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은퇴가 머지 않은 노형사 슈투더에게 찾아온 갑작스러운 의뢰. 그것은 란트링겡 정신병원 원장 울리히가 사라진 날 환자 피에털렌이 탈출한 사건을 해결해 달라는 것.
독일산 추리소설. 독일산 추리소설은 정말 오랫만이네요. 유럽산 추리소설은 별로 취향이 아니었고, 넬레 노이하우스 작품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아 딱히 찾아 읽어볼 생각은 없었는데 국내 최고의 추리애호가 커뮤니티 "하우미스터리"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우선 이 자리를 빌어 이벤트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작품은 스위스 베른 주 경찰청 소속으로 정년퇴직을 앞 둔 노형사 슈투더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의 두번째로, 최근에 발표된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추리소설 황금기라 할 수 있는 1936~41년 사이에 발표된 작품이더군요. 제가 워낙 고전 황금기 걸작을 좋아하기에 읽기 전에는 굉장히 기대가 컸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고전 본격 황금기 시절 장편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정교한 플롯이나 트릭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간 심리에 기반한 일종의 수사물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북구 유럽 계열 작품이랄까요?
물론 이런 작품을 평가 절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에요. 일단 슈투더 형사가 사건에 뛰어들어 진행되는 모든 수사 과정은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증언을 듣고, 그 증언에 따라 무언가를 수사하고,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리고 무언가를 또 찾아내고... 하는 전통적이고 우직한 수사만 있을 뿐이죠.
사건을 해결하게 된 것도 순전히 우연에 불과합니다. 길겐 간호사의 집을 찾아간 것은 순전한 우연, 거기서 이르마 바젬과 피에털렌의 밀회를 목격한 것도 우연, 카플라운이 유츨러를 죽이려 하는 것을 목격한 것도 우연... 게다가 위험한 산길을 걷던 중 경비원 드라이어가 카플라운을 죽이고, 그 드라이어마저 체포 도중 차에 치어 죽는다는 마지막 결말은 무슨 개그물을 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어요.
또 슈투더가 라두너 박사와 그의 아내 앞에서 벌이는 추리쇼, 즉 마지막 상황과 카플라운의 증언 등을 통해 추리해 낸 결론은 진상이 아니며 라두너 박사가 말한 것이 진상이라는 것도 문제에요. 탐정은 수사관이자 정보제공자에 불과하며 진짜 탐정은 의뢰인이라는 발상 자체는 혁신적이지만 공정하지 않기에 정통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죠. 아울러 범인은 세속적인 동기, 즉 돈이 목적이었던 드라이어라는 진상도 문제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원장과 대립하며 환자에게 수상쩍은 치료를 하여 매일 밤 환자가 죽어나가게 만들고, 원장의 돈지갑까지 가지고 있으며 수족처럼 부리는 환자와 직원이 있는 악의 축 라두너 박사가 사실은 너무나 좋은 인물이었으며, 심지어는 탐정이었다!라니 비약이 너무 심하잖아요.
내용, 설정면에서의 오류도 눈에 뜨이는데 왜 라두너 박사가 슈투더를 불렀는지, 애초에 왜 경찰이 원장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는지 등이 그러합니다. 특히나 라두너 박사가 모든 진상을 꿰뚫었다는 점에서 슈투더를 부른 것은 불필요한 행동에 불과했어요. 그의 말대로 길겐 등 불필요한 희생만 초래했을 뿐이거든요.
물론 인상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정신병원이 주요 무대로 등장하는 작품답게 "광기의 왕국"으로 통칭하여 정신병에 대해 풀어놓는 부분은 좋았으며 그 중에서도 피에털렌 캐릭터 설정만큼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본인만의 논리로 범죄를 저질렀는데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어서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정말로 미쳐버렸다는 캐릭터인데 이렇게 주변인물로 소모되기 아깝더군요. 그 외의 정신병 관련 다양한 이론과 치료방법들의 디테일도 잘 살아있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인간 심리, 정신병에 대해서 고심한 작가의 노력은 느껴지지만 좋은 추리 소설, 아니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렵네요. 작중 슈투더 형사의 표현인 "아 도대체 언제 이 장광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대로 정신병 이야기를 비롯한 여러 묘사가 지나치게 길고 장황하게 묘사된 감도 크고요. 인간 심리 묘사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만 하겠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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