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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2

철교 살인 사건 - 로날드 녹스 / 김예진 : 별점 2점

철교 살인 사건 - 4점
로날드 녹스 지음, 김예진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진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스턴 오트빌에서 골프로 친해진 4인방은 어느날 라운딩 중 시체를 발견했다. 피해자는 골프 클럽 멤버 중 하나인 브라더후드로, 파산한 뒤 도주하다가 기차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 같았다.
사체에 여러가지 수상한 점 - 모자가 시체 옆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점, 시계를 두 개나 들고 있었던 점, 소지하고 있던 이상한 메모 등 - 이 있었기 때문에, 4인방 중 전 군사정보부 소속 군인이었던 모던트 리브스는 고든과 함께 사건 수사에 뛰어들었다. 
메모의 기묘한 숫자가 암호라는건 알아냈지만, 열쇠가 될 책의 확보에는 어려움을 겪던 중, 또다른 골프동료 카마이클이 브라더후드와 대브넌트가 동일인물이라는 대담한 추리를 내 놓았고, 뒤이어 리브스의 방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까지 꿰뚫어보았다. 비밀 통로에 숨어 있던건 바로 대브넌트였다!

'녹스의 십계'로 유명한 추리 작가 로널드 녹스의 장편. 제목 그대로 철교에서 떨어진 사체에 대해서 등장인물들이 여러가지 추리를 펼치는 고전 본격물입니다. 리브스, 고든, 카미이클과 매리어트 4인방이 각자의 추리를 추리쇼처럼 선보이는데 상당히 논리적이며, 중간중간에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 등 볼거리도 많습니다. 몇 대 없는 기차를 가지고도 시간을 잘 이용해서 그럴듯한 트릭(?)을 만들어 낸 솜씨는 확실히 비범했어요. 단서들 역시 공정하게 제공되는 편이고요.

탐정인양 사건에 뛰어들어 이상한 단서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공유하고, 남겨진 메모가 암호라는걸 알아내는건 모던트 리브스인데, 브라더후드와 대브넌트가 동일인물이라던가, 리브스 방에 누군가 침입해서 암호문을 훔쳐간건 비밀 통로를 통해서였다는 등주요 추리를 내 놓는건 카마이클이라는 캐릭터 설정도 재미있었습니다거든요. 이 중에서도 리브스 방에 어떻게 침입했는지를 껌으로 알아내는 장면은 백미였습니다.
리브스도 데브넌트가 체포된 후, 렌들스미스 양의 꼬임(?)에 넘어가 그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추리를 펼친다던가, 4인방 중 한명인 목사 매리어트가 범인일거라는 대담한 추리를 선보이기는 합니다만, 두 가지 추리 모두 무리수가 많다는 점에서 카마이클의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추리와 함께 선보이는 영국식 유머도 재미납니다. <<사키>>같은 유머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어요. "두 번째 문단에서 특정 지역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작가는 결코 신뢰해서는 안 된다.", "자넨 아일랜드 인이 평범한 의문문에 '예'나 '아니오'로 대답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나?", "캐디들이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잘 알잖나. 그런 일을 하다 보면 도덕의식이 결핍되는 법이지." 등 영국 부르주아들의 고집과 편견(그리고 싸가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골프에 미친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신랄합니다. 클럽 멤버였던 브라더후드 장례식 순간에도 "오후 라운드를 돌아야 하니까 시간을 맞춰달라"고 요구한다던가, "땅을 공 치기 좋은 곳과 나쁜 곳으로밖에 평가하지 않는다"는 등으로요. 심지어 리브스는 매리어트가 범인이라고 주장하다가 큰 실수를 할 뻔 한 뒤, "미래의 나를 골프에 바치려고, 골프만 할 거야. 오로지 골프." 라고 말하기까지 하는데, 이 정도 되면 유머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확실히! 낡은 소설임은 분명합니다. 핵심 줄거리가 모호해서 소설적인 완성도도 낮고요. 전개 과정에서 작위적인 요소도 많습니다. 갓 조사를 시작한 아마츄어 리브스와 고든이 온갖 중요한 단서들을 발견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렌들스미스 양이 피해자 브라더후드의 숨겨진 부인이며, 데브넌트가 그녀를 흠모하고 있었다는 인물 설정도 지금 읽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낡아 빠졌어요.
 쓸데없는 이야기도 너무 많습니다. 앞서의 영국식 유머도 재미있다고 했지만, 너무 과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단서를 그러모아 공들인 추리를 펼친다기보다는 그냥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하나씩 툭 툭 던지는 느낌이에요. 별다른 근거없이 각자 그럴듯한 가정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추리들도 재미있다기 보다는, 그냥 기차 시간표가 있어서 내 놓는 아이디어에 불과해 보여요. 복잡하기만 할 뿐 작품에 잘 녹아들어 뭔가 재미를 가져다 주지는 못합니다.
데브넌트가 범인이라는 진상도 좀 어이가 없었어요. 일단 범행의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데브넌트는 암호로 된 협박문을 보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브라더후드가 파산한건 명백한 사실이라 그가 자살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여전히 유효하고요. 그래도 데브넌트는 동기도 확실했고 행적도 수상했던건 맞습니다. 그래서 그가 체포된 시점에서 이야기는 끝난거나 다름없어요. 매리어트 범인설과 같은 황당한 추리는 무의미한 사족이었습니다.
추리쇼 중심이라 드라마도 별 재미가 없습니다. 중간에 리브스와 고든이 함께하는 비밀통로 탐색, 이후 도주하는 데브넌트 추격, 마지막에 매리어트가 범인인지 알아내기 위해 리브스 방으로 유인한 뒤 이를 몰래 지켜보는 장면 정도에서만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알려지지 않았던 옛 고전을 알게 되었다는 기쁨은 크지만, 시대를 뛰어넘을만한 걸작은 아니었습니다. 잊혀진 작품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딱히 권해드리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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