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SF 소설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SF 소설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6/05/31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5) 사람먹는 장르 문학

추리 소설을 비롯한 장르 문학에는 식인이 등장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소재 자체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한 번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독자에게 충격과 혐오감, 공포감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작품 속 식인은 모두 같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대략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흔한 형태입니다. 사람을 말 그대로 ‘먹이’나 ‘식량’으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사람이 평범한 먹잇감으로 취급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좀비물처럼 사람을 잡아먹는 크리처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클라이브 바커의 "한밤의 식육 열차", 그러니까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은 조금 다릅니다. 작품 속 빌런인 푸주한 마호가니가 깊은 밤 지하철 승객들을 도살해 인육으로 만드는 이유는 직접 먹기 위해서가 아니거든요. 미지의 절대자에게 대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먹이’가 아니라 ‘미식’의 영역으로 발전한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전에 소개드렸던 스탠리 엘린의 "특별요리"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계보를 잇는 타쿠미 츠카사의 "금단의 팬더"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인육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작품입니다. 소재만 놓고 보면 끔찍하지만, 장르 문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사람을 먹이로 삼는 경우 중에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다시 재료의 정체를 숨기고 먹느냐, 대놓고 먹느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체를 숨기는 대표작은 고전 SF "소일렌트 그린"입니다. 작품 속 “소일렌트 그린”은 인구 폭발과 환경 오염으로 식량이 사라져가는 미래 세계에 등장한 먹거리입니다. 공식적으로는 플랑크톤으로 만들었다고 소개되지만 그 정체는! 영화사에 길이 남은 명대사 “Soylent Green is people!”로 밝혀집니다.

반대로 살기 위해 대놓고 사람을 먹는 작품 중에서는 스티븐 킹의 "서바이버 타입"을 끝판왕으로 꼽고 싶습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생존자가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조금씩 먹어버린다는 엽기적인 이야기인데, 스티븐 킹답게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묘하게 설득력 있게 풀어냅니다.

두 번째는 범죄 목적으로 식인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은 증거 인멸을 위한 식인일 것입니다. 로드 던세이니의 "두 개의 양념병"은 한 남자가 거처를 떠나지 않은 채, 함께 살던 동거녀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든 사건을 다룹니다. 남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장작 패기라는 적절한 운동, 그리고 입맛을 돋우기 위한 ‘두 개의 양념병’뿐이었다는 내용이지요.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호러 "오메가의 성찬"은 여기서 한 술 더 뜹니다. 아예 전문적으로 시체를 ‘먹어서’ 폐기하는 괴인이 등장하니까요. 증거 인멸이라는 범죄 목적과 식인이라는 혐오 소재가 결합했을 때 얼마나 기괴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또 다른 범죄 목적은 복수입니다. “원수의 간을 씹어 먹는다”는 옛말처럼, 식인은 복수심의 극단적인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노리즈키 린타로의 "카니발리즘 소론"에 등장하는 식인이 바로 이런 목적에 가깝습니다. 다만 시각은 조금 독특합니다. 범인이 동거녀를 죽이고 먹은 이유가, 그녀를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라니까요. 혐오스럽지만, 그래서 더 잊히지 않는 발상입니다.

세 번째는 의학적 목적의 식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속설이 구전되어 왔고, 실제 사건도 존재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경성 죽첨정 단두여아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간질병의 특효약이 아이의 뇌수라는 속설을 믿은 범인이,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어린아이의 사체에서 뇌수를 긁어낸 사건이었지요.

비슷한 맥락에서 이우혁의 단편 "손가락"은 ‘문둥이가 아이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는 속설을 현대적으로, 그리고 비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마리 유키코의 "여자친구"도 넓게 보면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습니다. 낙태한 태아의 사체를 섭취함으로써 극한에 이른 스트레스를 달래려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치료라기보다는 병적인 해소에 가깝지만, 몸과 질병, 치유에 대한 왜곡된 믿음이 식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의학적 목적의 식인과 맞닿아 있습니다.

네 번째는 식인을 특별한 의미 없이, 캐릭터 형성을 위한 장치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식인만큼 ‘광기’를 즉각적으로 드러내기 좋은 소재도 드물기 때문이겠지요. 토머스 해리스가 창조해낸 한니발 렉터 박사가 가장 유명한 예입니다. 사실 한니발의 식인 행위는 이야기의 구조 자체를 크게 바꾸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한니발이 평범한 인간의 윤리와 감각을 초월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각인시킵니다. 저는 아직도 “내 오랜 친구를 먹으러 가야 하거든”이라는 한니발의 대사만큼 유머러스하면서도 잔혹하게, 동시에 절대자 같은 면모를 드러내는 문장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식인이 캐릭터의 기괴함과 매력을 동시에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장르 문학 속 식인은 여러 목적과 형태로 변주되어 왔습니다. 먹이, 미식, 생존, 증거 인멸, 복수, 의학적 속설, 캐릭터의 광기까지. 충격과 혐오감,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만큼 효과적인 소재도 드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많이 사용되어 이제는 더 새로운 설정이나 이야기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와카타케 나나미의 "광취"처럼, 제 분류로는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아이디어가 도입된 작품이 발표되는 걸 보면 여전히 놀랍습니다. 저도 언젠가 새로운 아이디어로 도전해 보고 싶은 주제이지만, 러시아의 ‘인육을 먹었다는 살인마 부부 사건’ 같은 뉴스를 접할 때마다 자신이 없어지네요. 과연 실화를 뛰어넘는 창작물을 만들 수 있을까요?

# 시리즈 전체 보기

2026/01/02

법의 체면 - 도진기 : 별점 2점

안녕하세요, 2026년 새해가 밝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새해 처음으로 리뷰를 올리는 작품은, 척박한 한국 본격 추리물 시장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도진기 작가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법의 체면"과 "완전범죄" 두 편은 좋습니다. 법을 잘 아는 작가가 법에 대한 딜레마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덕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도진기 작가만 쓸 수 있을 법한 작품이에요. "완전범죄"는 본격물을 방불케 하는 추리가 펼쳐지기도 하고요.
"애니"는 다소 독특한 설정의 SF인데, 이 역시 설정만큼은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당신의 천국"과 "행복한 남자" 두 편은 한마디로 망작이었고, 앞서의 세 편 역시 전개와 묘사 등 소설적인 완성도 측면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빼어난 설정과 아이디어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작가의 단점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점수를 줄 만한 흥미로운 지점은 분명 있는데, 아쉽게도 단점이 더 많습니다.

수록작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법의 체면

호연정 변호사에게 변상일이 찾아와 자신의 장물 취득 사건 3심 변호를 의뢰했다. 변상일의 유죄가 확실했지만, 시한부 인생이라는 변상일의 청에 못 이겨 호연정은 사건을 맡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상고는 기각되었다.

그러나 상고 기각 확정 후, 변상일이 강원도 홍천에서 일어났던 ‘청테이프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증거는 현장에서 발견된 변상일의 쪽지문이었다.

호연정 변호사 시리즈 단편입니다. 변상일의 조작으로 유죄가 확정된 장물 취득 사건이 일어난 날짜가 청테이프 살인사건 발생 일자와 같아서, 변상일이 진범이라는게 확실하지만 풀어줄 수 없는 딜레마를 다룹니다. ‘법의 체면’이라는 제목 그대로이지요. 법관들은 체면 때문에 이전 판결을 뒤집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딜레마는 굉장히 흥미롭고, 변상일이 과거 음주운전 사고로 딸과 아내를 잃었는데, 음주운전 가해자 장봉호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던 탓에 장봉호와 법에 복수하려고 결심했다는 서사도 설득력 있습니다.

하지만 초반 변상일의 범행 과정을 1인칭의 단순 강도 살인 사건처럼 묘사한건 반칙입니다. 독자는 변상일이 진범이 아니라고 오해하게 되니까요. 전개에 필요했던 부분도 아니니 빼야 합니다. 마지막 변상일의 자살도 좋은 마무리는 아니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을 잘 풀어냈지만,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아쉽습니다.

당신의 천국

국회의원 최명환에게 상담 차 장애가 있는 박성혜라는 젊은 여성이 찾아왔다. 그녀는 명환에게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용의 거의 대부분은 막장 드라마를 쓰다가 시민단체로 고발당하고 취조당한 끝에 자살 시도로 몸을 망쳤다는 박성혜의 1인칭 고백입니다.

그러나 장황한 고백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설득력도 낮고 시시합니다. 박성혜가 최명환에게 살의를 품은 이유도 별로 와 닿지 않고요. 무슨 논리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최명환을 살해하는 방법도 생수통에 독을 풀었다는 것인데, 한쪽 다리가 불편한 여자가 생수통에 어떻게 약을 풀었는지, 청산가리는 어디서 구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묘사도 문제입니다. 28살 여성의 한 서린 독백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건질 만한 점이라면 박성혜가 ‘신시아’라는 필명으로 썼다는 막장 드라마의 내용뿐인 막장 범죄물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완전범죄

석지연은 동거하던 직원 방미래 과실치사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사인은 의심할 바 없는 뇌출혈이었고, 방미래가 술에 취한 줄 알아 방치했다는 변명은 설득력 있어 보였다.

의사 출신 김 검사는 피해자가 거액의 질병 사망 보험에 가입했다는 점을 근거로 부작위에 의한 살인으로 기소하는데...

과실치사로밖에 보이지 않는 완전범죄가 등장하는 본격 추리물이자, 법정에서의 공방이 벌어지는 법정물 단편입니다.
작 중, 김 검사가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동기. 단지 직원 방미래에게 숙식을 제공할 뿐인 사장 석지연이 그녀를 살해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보내면 그만입니다.
  2. 범행 방법. 마침 그 시간에 뇌출혈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김 검사는 첫 번째는 거액의 보험으로, 두 번째는 평소 피해자에게 뇌출혈 전조 증상이 있다는 점을 눈치챈 범인이 보험 가입을 유도했고, 뇌출혈이 일어났을 때 방치했다는 답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방미래의 연인 류소이의 증언 등을 통해 법정에서 전조 증상은 2개월 전 부터 있었다는게 밝혀지고요.

이러한 본격 추리적인 재미에 더해 법적인 딜레마 부분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의사 출신인 김 검사는 방미래의 의료 기록을 보고 그녀가 뇌출혈을 일으켰을 때 거의 즉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는 석지연이 방미래를 방치했던건 방미래의 죽음과 인과관계가 없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녀를 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의미이지요. 

이렇게 본격물적인 요소와 법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드는 딜레마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나 황 판사가 의사인 아내를 통해 방미래의 사인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에 대한 극심한 혐오로 이를 숨긴 채 사형 선고를 내렸다는 결말은 작품을 완전히 망쳐버립니다. 아쉽기만 하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애니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던 동한은 금사원 박사의 연구에 피험자로 응모했다. 하룻밤에 한 사람의 한 평생에 대한 꿈을 꾸게 해 주는 ‘영생’ 실험이었다.

설정은 정말 멋집니다. 한 평생의 꿈을 꾸게 하면 결국 그것이 영생에 가깝다는 발상은 정말 혹할 만 하니까요. 친구 수민에게 사 주었던 전기 충격기로 뇌에 삽입된 칩을 제거한다는 결말도 작가의 작품치고는 보기 드물게 깔끔합니다.

하지만 연구로 만들어진 ‘꿈’에 자아가 생겨 본체를 지배하려 한다는 전개는 뻔합니다. 설명도 충분하지 않아 와 닿지 않고요. 애니와의 사투 역시 박진감은 넘치지만, 세 번에 걸쳐 반복되는 탓에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설정과 마무리가 군더더기 없이 정리되어 있다는 점은 마음에 듭니다. 다른 작품들도 이 정도로만 정리되었다면 훨씬 좋을텐데 말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행복한 남자

꽃뱀에게 당한 한 남자의 약 반년에 걸친 일기 형식을 빌린 독백으로 내용도 뻔하지만, 그나마의 설득력조차 낮습니다. 문체가 30대 남자의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구식이고, 과장되고 낡은 표현이 많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맞는 결말 역시 식상하며 전혀 현대적이지 못합니다.

낡은 설정을 낡게 풀어낸, 새로운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탓에 2025년에 읽을 이유가 없는 망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25/12/28

2025 블로그 리뷰 결산 (스물 두 번째!)

안녕하세요. 어제의 "어차피 곧 죽을텐데"로 올해 블로그 업로드는 마무리하고, 올해 결산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요새 이런저런 플랫폼에서 유행하는 리캡에 편승한건 아닙니다. 제 블로그 연말 결산은 이번이 스물 두 번째이니까요. 

간략한 블로그 통계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고 2025년 독서 결산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올 한 해 읽은 총 책 권수는 82권입니다.

  • 추리 / 호러: 48권
  • 기타: 14권
  • 역사서: 9권
  • 디자인/스터디 : 1권
  • 기타 장르문학: 5권
  • Food / 구루메: 5권

독서량이 작년(110권)에 비하면 30% 가까이 대폭 줄었는데, 영화나 애니메이션 감상이 늘은 탓입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아무래도 쉽게 볼 수 있는걸 선택하게 되네요. 추리 소설은 왠만한 작품으로는 신선함이나 재미를 찾기도 좀 어려웠고요. 그동안 너무 많이 읽었던 탓이지요.

그래도 1년에 100권은 읽어야 책 좀 읽는다고 할 수 있으니, 내년에는 좀 더 힘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카테고리별 베스트, 워스트입니다.


1. 추리 / 호러

베스트: 매미 돌아오다 - 사쿠라다 도모야 : 별점 3.5
- 곤충과 과학, 일상 추리를 결합한 독특함이 인상적이다.

올해 별점 3.5점을 줬던 작품은 이 작품 외에도 오가와 사토시의 "신의 퀴즈"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더 정통 본격 추리물에 가깝고, 수록 단편 중 "반딧불이 계획"은 별점 4.5점의 걸작이라서 올해 베스트로 꼽습니다. 

워스트: 신곡 - 가와무라 겐키 : 별점 1.5
- 범죄 스릴러로의 매력은 전무하다.

올해 별점 1.5점의 망작은 모두 여섯 편이지만, 그래도 다른 망작들은 추리물이기는 합니다. 이 작품은 애초에 추리물이 아니에요. '밀리의 서재'에서 '추리, 스릴러' 카테고리로 분류하지만 않았어도 워스트로 꼽지는 않았을텐데, 뒷통수를 맞은 듯한 배신감이 너무 컸네요.

2. 기타

베스트: 그거 사전 - 홍성윤 : 별점 3
- 가볍지만 의미도 있다.

읽은 책 중 절반에 가까운 여섯 권이 별점 3점을 받아서 한 권을 꼽기가 애매하지만, 재미와 정보 모두 좋았던 이 책을 꼽아 봅니다.

워스트: 세계문학단편선 39 윌키 콜린스 (꿈 속의 여인 외 9편) - 윌키 콜린스 : 별점 1.5
- 2025년에 읽기에는 낡고 지루했던, 재미와 가치 모두 압도적인 워스트. 

3. 역사서

베스트: 미친 항해 - 마이크 대쉬 : 별점 4.0
- 충격적인 실화를 방대한 자료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뛰어난 논픽션. 난파 관련 논픽션은 항상 기대 이상!

워스트: 별점 1점대가 없어서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4. 디자인 / 스터디

베스트: 일상 감각 연구소 - 찰스 스펜스 : 별점 3.0
- 일상 감각을 해킹하는 여러가지 팁이 가득.

이 분야는 올해 한 권만 읽어서 워스트는 없습니다.

5. 기타 장르문학

베스트: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별점 4.0
- 독특한 세계관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SF와 만나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워스트: 별점 1점대가 없어서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다 별점 2점이네요.

6. Food / 구루메

베스트: 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사이토 미나코 : 별점 3.5
- 상세하게 알 수 있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식생활.

워스트: 초콜릿어 사전 - Dolcerica 가가와 리카코 : 별점 1.5
- 방향성과 완성도 모두 기대 이해.

2025/10/19

기억 전달자 - 로이스 로리 원작 / P. 크레이그 러셀 그림 및 각색 : 별점 2점

로이스 로리의 유명 소설을 각색한 그래픽 노블입니다.

철저히 통제되어 가족, 직업, 감정, 심지어 생명까지 모두 관리되며 사랑과 고통, 색채와 음악 같은 감각은 사라진 된 디스토피아 세계를 시각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교육이나 가정 환경, 아이들의 방과 후 활동 등에서 보여주는 세세한 설정과 묘사들이 인상적이에요.  

‘기억전달자’라는 설정도 눈에 띕니다. 잊혀진 역사와 감정, 추억 등 모든걸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이 있다는 설정입니다. 보통 이런 인물은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는 배제되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오히려 존중받는다는게 독특했습니다. 선택된 후계자에게 기억을 넘겨주는 과정, 이전 후계자가 현 기억 전달자의 딸이었는데 자살을 택했다는 반전도 흥미롭고요.

작화도 좋습니다. 흑백에서 시작해, 기억 전달자가 된 조너스가 세상의 진실을 깨달으며 컬러로 전환되는 부분은 감정과 감각의 회복을 시각적으로 잘 드러냅니다. 만화로 각색해서 발표할만 했던 명장면이었어요.

하지만 이런 류의 디스토피아 SF 세계관은 이미 너무 많이 접한 나머지 그리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상세한 나름대로의 설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바닥의 고전인 "1984"를 비롯하여 영화 "브라질", "이퀄리브리엄"과 결국은 별다르지 않은 탓입니다. 조너스가 탈출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인 ‘임무해제’가 일종의 사형 제도라는 것도 초반부터 예상 가능해서 반전의 맛도 부족하고요.

결말도 불분명합니다. 조너스가 살아남았는지, 죽었는지, 고생 끝에 무엇을 얻었는지를 알 수 없어서 열린 결말이라기보다는 흐릿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화도 좋고 기억전달자 설정은 인상적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익숙한 이야기로 결말도 별로라 감점합니다.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25/09/14

대우주시대 - 네이선 로웰 / 이수현 : 별점 2점

행성 네리스에 거주하던 이슈마엘 왕은 어머니의 사고사 이후 쫓겨날 위기에 빠졌고, 어쩔 수 없이 '반의반' 몫 선원으로 우주 무역선 로이스 멕켄드릭 호에 탑승했다. 주방보조로 일하게 된 이슈마엘은 주방장 쿠키, 동료 핍을 비롯한 여러 선원들과 친해지며 자신을 발전시키며, 동료들과 함께 무역을 통해 한 몫 잡을 계획을 세워 진행시키는데...

네이선 로웰의 장편 SF 소설입니다. 특징이라면 우주선이 주요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전투나 액션, 모험은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었습니다. 단순한 모험담을 넘어 ‘무역’이라는 비즈니스적 요소를 도입한 덕분입니다. 특정 행성에서 싸게 구입한 물품을 다른 행성에서 비싸게 되파는 식의 간단한 구조이지만, 개인별 운송할 수 있는 무게 제한과 부족한 자금으로 단순 운송을 넘어서는 전략적 사고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가죽 세공이 뛰어난 행성에서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는 벨트를 사고, 벨트를 팔아 얻은 이익금으로 보석 세공이 특화된 행성에서 버클을 구입한 뒤 일부 남은 벨트에 결합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는 식으로요. 물건을 팔기 위해 행성마다 있는 '벼룩 시장'에 출점하는 등의 아이디어도 돋보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우주선 운영과 생활에 관한 세밀한 설정도 좋습니다. 일종의 인턴이라 할 수 있는 ‘반의반 몫’에서 시작해 한 사람 몫에 이르는 직급 체계, 4개의 직무군으로 구분되며 승급을 위해서는 시험을 치르고 자격을 취득해야 하는 정책, 선원들이 선박 운영으로 발생한 추가 이익을 규칙에 따라 분배하는 보수 체계, 남녀 구분이 없는 침실과 넓게 보장된 운동 시설 및 사우나 같은 선내 생활 등 생활 전반이 디테일하게 설계되어 있어 현실감을 더해 줍니다. 앞서 말했듯, 직급에 따라 철저히 관리되는 화물 무게 할당이라는 설정은 무역이라는 소재에 재미를 더해주고요. 이런 점에서는 상세한 설정이 뒷받침된 해양 무역 모험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가 부실하다는 단점은 큽니다. 주인공의 여정이 지나치게 순탄한 탓입니다. 행성 네리스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곧바로 로이스 멕켄드릭 호에 승선할 기회를 얻고, 첫 임무인 커피 맛 개선도 무난히 해내며, 친구 핍 덕분에 행성간 무역의 요령을 빠르게 익혀서 곧바로 큰 수익을 내는 식이거든요. 실패가 없어요. 주변 인물들 또한 무개성에 모두가 주인공을 돕는 선한 사람들로만 그려져 인간 관계에서의 갈등도 찾을 수 없고요. 우주 공간 항해에서의 위기 역시 전무합니다. 때문에 작 중에서 긴장감 있는 드라마는 찾기 어렵습니다. 전생 지식을 활용해 무쌍을 찍는 이세계 전생물조차 이 정도로 무탈하지는 않을 거에요. 

무엇보다 큰 문제는 국내 번역이 1권에서 멈췄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막 무역 협동조합을 만들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끊겨 버리니 독자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의 디테일과 무역 묘사의 신선함은 분명 장점이지만, 완결되지 못했다는 치명적 문제 탓에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25/08/30

아르테미스 - 앤디 위어 / 남명성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즈 바샤라는 월면 도시 아르테미스 빈민가에서 밀수까지 행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던 중, 거래상대 트론으로부터 거액을 줄테니 암석 수확기를 고장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트론이 알루미늄 공장을 손에 넣기 위함이었다. 거액에 넘어간 재즈는 여러가지 장비를 준비해 수확기 파괴에 나섰지만 들통나서 계획은 실패했다. 죽을 뻔한 위기도 넘기고 겨우 아르테미스로 돌아온 재즈는 트론이 살해당했고, 자신도 표적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조사에 나선 재즈는 ZAFO라는 이름의 혁신적 광섬유 생산을 노린 음모가 배후에 있다는걸 밝혀내는데...

"마션"으로 유명한 앤디 위어가 2017년에 발표한 장편 SF 소설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과학적인 이론에 기반을 둔 치밀한 설정입니다. 월면 도시 설정이야 새로울 것도 없지만, '아르테미스는 기압이 지구의 20%라 순수산소를 사용하고, 물은 61도에서 끓어서 커피가 맛이 없다, 경찰과 병원이 없고 보안부가 범죄자를 직접 처벌하며 심각한 범죄에는 추방을 적용한다, 법과 도덕 기준은 느슨하고, 낮은 중력 덕분에 관광객들이 색다른 경험을 위해 매춘을 찾는 경우도 있다. 산소는 알루미늄 제련 과정에서 남아돌아서 알루미늄 제련 공장은 이를 공급하는 대가로 전기료를 면제받는 계약을 맺고 있다, 화재는 가장 위험한 사고로 꼽히며, 모든 시설이 이를 피하기 위해 설계되어 있다...' 처럼 바탕이 되는 세세한 세계관 묘사는 실로 대단한 수준입니다.

이 설정들은 사건 전개에도 적극 활용됩니다. '고가의 소재 ZAFO는 중력이 낮은 곳에서만 만들 수 있다, 아르테미스의 통화인 슬러그는 규제를 받지 않고 추적도 불가능하다'는게 핵심이거든요. 즉, 마피아는 슬러그를 이용해 돈 세탁을 하려고 별로 이익도 나지 않는 알루미늄 공장을 월면에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트론은 ZAFO 생산을 위해 원료가 되는 유리, 규석을 만들 수 있는 이 공장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수확기 파괴를 지시한 것이지요. 수확기가 파괴되어 공장 가동이 멈추면, 공장과 아르테미스 간 산소와 전기를 교환하는 계약이 끝날테고, 그 때 자신이 몰래 확보한 산소를 공급해서 그 자리를 차지할 속셈이었습니다.
이렇게 트론이 마피아 소유인걸 알면서도 알루미늄 회사를 노린 이유를 재즈가 추적하여 진상을 밝히는 과정은 작가의 전작과 다르게 잘 짜여진 범죄 스릴러 느낌도 전해주는데, 설득력 높은 이유 덕분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용광로 폭발로 대량의 산소와 메탄이 반응해 클로로폼이 생성 및 아르테미스로 유입되어 주민들이 기절하는 위기도 과학적 설정을 이야기에 잘 녹여 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르테미스에는 차량이 없어 큰 사고는 없었고, 낮은 중력 덕분에 갑자기 쓰러져도 부상자가 적었다는 결과도 월면 도시 설정을 잘 활용한 것이고요. 

작가 특유의 모험물적인 분위기도 잘 살아 있습니다. 재즈가 수확기 파괴에 나섰다가 들통나서 실패한 뒤 길드로부터 도주해 다시 아르테미스에 잠입하는 과정, 범죄 조직의 추격을 피해 도주하면서도 진상을 알아내는 과정, 결국 도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공기를 순환시키려는 과정이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이 과정이 여러가지 과학적인 설정과 함께라는 점도 큰 장점이에요.  

하지만 이야기는 허술한 부분이 많습니다. 우선, 공장 용광로를 파괴한 후 트론의 딸 레네가 공장을 차지하게 만든다는 마지막 계획은 무리가 있어요. ZAFO가 그렇게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신소재라면, 전기를 공짜로 공급받지 않아도 공장을 유지하는게 당연히 유리하니까요. 마피아 조직이 선선히 공장을 넘겨주고 손을 뗄 이유가 없습니다. 거대한 폭발 후 공장이 멀쩡할 가능성도 낮고요.
용광로 옆의 대량의 산소와 메탄이 있다는걸 미리 알고도 무시하는 전개, 재즈가 아버지 작업장을 날려버린 일을 속죄하기 위해 돈을 벌었다는 결말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결말은 정말 영 아니었어요. 재즈가 평범한 밀수꾼이아니라 실은 아르테미스의 밀수품을 전부 관리하는 우두머리였다는 건데 어처구니가 없었거든요. 한 도시 밀수 조직의 우두머리가 돈 몇 푼 벌려고 아둥바둥한다는 앞 부분 설정은 대관절 뭔지 모르겠어요. 경쟁자를 어떻게 제거했는지도 설명이 없고요. 밀수품을 잘 관리하겠다는걸 약속하여 행정관과 거래해 추방을 면한다는 것 역시 현실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묘사와 모험적인 전개 덕분에 읽는 재미는 충분하지만, 완성도는 전작에 비해 떨어집니다. 심심할 때 가볍게 읽기에는 무난하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만큼은 아닙니다.

2025/06/28

우주전쟁 골리앗 (War of the Worlds : GOLIATH) (2012) - 조 피어슨 : 별점 1.5점

화성인의 침공 이후 15년이 지난 1914년, 지구방위군 A.R.E.S가 설립되고 에릭을 중심으로 한 부대는 화성인과 맞서 싸우게 되는데...

H.G. 웰즈의 고전 SF 소설 "우주전쟁"의 속편 격 설정을 바탕으로 한 SF 애니메이션입니다. 꽤 오래전 작품인데 우연찮게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장점이라면 1914년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복엽기(삼엽기), 비행선,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거대 삼족보행 이동 포대 등 과거 무기들과 상상력을 결합한 스팀펑크적 세계관을 그럴듯하게 그려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외의 다른 모든건 모두 단점입니다. 우선, 유일한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스팀펑크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전투 장면은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복엽기 공중 액션 외에는 세계관을 잘 살리지도 못했고요. 삼족보행 이동 포대는 제목에 언급될 정도의 강함을 전혀 보여주지 못합니다. 실상은 폭죽에 가깝거든요. 게다가 미사일과 빔 병기까지 장착되어 있는건 시대를 감안하면 영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거대함과 힘으로 승부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화성인과의 전투도 영 별볼일 없습니다. 별다른 작전 없이 물량과 화력 집중이 전부인 탓입니다. 주인공을 비롯한 일행의 활약도 진부하기 짝이 없고요. 밀리터리 영웅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전개도 너무 뻔하며, 아일랜드 독립이라던가 소소한 분대 전투가 삽입된건 괜한 혼란만 가져다 줍니다. 작화도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고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스팀펑크 무기 설정 외에는 볼거리가 부족하고, 작화와 서사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구태여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5/05/02

아리아드네의 목소리 - 이노우에 마기 / 이연승 : 별점 2점

아리아드네의 목소리 - 4점
이노우에 마기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론 사업 벤처기업 탈랄리아 직원 다카기 하루오는 어린 시절 형의 사고사를 방조했던 아픈 과거가 있다. 

다카기는 최첨단 조사용 드론 아리아드네의 3세대 모델인 SVR-3가 채택된 지하도시 WANOKUNI 개막식에 참석하는데, 마침 그날 지진이 일어났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사히 대피했지만, 붕괴와 침수가 계속되는 지하 5층에 단 한 명의 생존자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제는 이 생존자가 헬렌 켈러처럼 시각, 청각, 언어 모두에 장애가 있는 나카가와 히로미라는 점이었다. 물이 완전히 차오르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여섯 시간뿐으로, 다카기는 동료들과 함께 유일하게 지하에 접근할 수 있는 드론 아리아드네를 원격 조종해 생존자 수색과 구조에 나서는데....

일본 작가 이노우에 마기가 쓴 재난 구조 SF 소설입니다. 구조라는 테마에 첨단기술과 장애인이라는 소재를 결합한 매우 흥미로운 작품으로, 기존 재난소설과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탈출극 추천'이라는 리스트에서 소개하길래 읽어보게 되었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구조 과정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듬뿍 들어가 있다는 점입니다. '드론'을 활용하여 헬렌 켈러와 똑같이 시력, 청력 및 대화에 장애가 있는 장애인을 지하 도시에서 구해내야 한다는 설정 때문이지요. 그래서 '드론'은 '촉각'과 '후각' 만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해야 해서 아리아드네는 향수를 내뿜어 도착을 알리고, 점자 카드가 포함된 구호 물품을 투척하며, 장착된 하네스(유도용 와이어)를 잡게하여 경로를 안내합니다. 또 이러한 설정들은 단순한 SF 상상력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가능한 것처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구조 과정의 설득력을 더해줍니다.

작품의 배경인 지하도시 WANOKUNI의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에너지 보존과 탄소 배출 감소, 지진 대응 등 다양한 측면에서 지하 건설의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드론을 활용한 물류 시스템, 개인 맞춤형 서비스, 광덕트를 통한 자연광 유입 등 매력적인 기술들이 상세하게 소개되는 덕분입니다. 특히 통신망이 단절된 상황에서도 드론 조종이 가능했던 원리, 드론의 무선 충전 방식 등이 논리적으로 잘 설명되는게 좋았습니다. 구조 과정을 보다 현실적으로 만들어 주니까요. WANOKUNI가 정치적인 이유로 활성 단층 위에 건설되었다는 설정도 괜찮았고요. 

재난 구조 소설답게 구조 과정에서 벌어지는 위기 상황들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여진으로 인해 구조용 드론이 추락하고, 지하 4층 스파 구역에서 발생하는 누전, 폭주하는 지게차들 사이를 통과해야 하는 긴박한 순간들, 그리고 다카기가 폭로 유튜버의 드론에 맞아 아리아드네의 통제권을 놓치는 장면까지, 하나하나의 위기들이 정교하게 쌓여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갑니다.

아울러 추리소설로서의 매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히로미가 조명 스위치를 작동시키거나, 쥐떼를 감지하고, 돌진하는 지게차를 스스로 피하는 등, 의아한 행동들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정말 시각을 잃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고, 이 수수께끼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밝혀지는 진상 - 히로미가 사실은 도시에 추락했던 다른 장애인 미도리를 업고 있었고, 모든 기이한 행동들이 그것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반전 - 은 깊은 감동을 안겨주고요. 아울러 이 진상은 광덕트 붕괴와 발걸음이 갑자기 느려진 이유, 이유를 알 수 없는 배낭의 열기 등 여러 복선들과도 절묘하게 맞물려 있어서 정교함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재난 생존물로서 치명적인 약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구조 대상자인 히로미가 아니라 드론 조종자인 다카기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인물의 긴박감을 그리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다카기는 현장에서 직접 활동하는 것도 아니고, 원거리에서 드론을 조작하는 입장이라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래서야 일종의 1인칭 슈팅게임과 별다를게 없지요.

또한, 서사의 일부 전개는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예컨대, WANOKUNI 입주식 날 하필 지진이 발생한다는 설정은 이야기의 극적인 전개를 위해 의도적으로 끼워 맞춘 듯 합니다. 평소대로 일상생활을 하다가 지진이 발생했어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지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에도 납득이 가지 않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구조 활동 중에 온갖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다카기, 그리고 계속해서 민폐를 끼치는 니라사와의 모습은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특히 장애가 있는 동생을 계속 잃어버리는 니라사와의 행동은 짜증을 유발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장애인을 구조하는 독특한 설정과 드론 기술의 활용, 그리고 정교하게 짜인 반전은 매력적이지만, 긴박감을 살리지 못한 시점 선택과 작위적인 전개는 아쉽습니다.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1/26

극한 상황에서의 탈출극 소설 추천

가끔 소개해드리는 honto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이번에는 극한 상황에서의 탈출극 리스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티븐 킹의 "아주 비좁은 것"을 추천하고 싶네요.


지진이나 사고로 폐쇄된 공간에 갇힌 주인공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소설을 소개합니다. 밀실 미스터리는 물론, VR 공간이나 우주 공간을 무대로 한 SF 작품까지 다양하게 준비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의 탈출극을 직접 체험해 보세요. 스릴 넘치는 스토리 전개에 손에 땀을 쥐게 될 것입니다.

"방주" 유키 하루오

지진으로 지하 건축물에 갇힌 남녀 10명. 심지어 물이 차오르는 상황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한 명이 희생되면 나머지 전원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살인범을 찾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합니다. 탈출이냐 죽음이냐의 시간적 제약,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 전개, 아름답게 짜인 논리적 추리 등, 읽는 재미가 가득한 걸작 미스터리입니다.

"아리아드네의 목소리" 이노우에 마기

지하 복합 시설에 남겨진 여성은 시각과 청각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하루오는 최첨단 드론을 사용해 그녀를 구조하려 하지만, 연이어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닥쳐옵니다. 시간 제한이 있는 고난도 탈출 미션극이자, 인간 드라마와 반전이 가득한 미스터리 요소를 갖춘 만족도가 높은 소설입니다.

"앨리스 살인게임"코야 게이이치

앨리스라 불리는 VR 공간에 갇혀 데스 게임에 강제 참가하게 된 주인공 하루가 탈출, 즉 로그아웃을 목표로 하는 이야기. 밀실 상황에서의 서바이벌, SF, 미스터리, 판타지 등 다양한 요소를 균형 있게 담은 오락 작품으로, VR이라는 설정을 활용한 전개가 탁월합니다.

"천애의 요새" 오가와 잇스이 (국내 미발간)

사고가 발생한 우주 정거장을 배경으로, 지구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군상극 형식으로 그린 SF. 하지만 SF임에도 현실 세계의 이야기처럼 자연스럽게 읽힐 것입니다. 독특한 인간 묘사를 즐길 수 있으며, 우주 공간에서의 절망감과 긴장감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서바이벌 패닉 소설로 뛰어난 작품입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앤디 위어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홀로 깨어난 라일랜드 그레이스. 자신이 있는 장소가 우주선 내부라는 것을 추측하며 조금씩 기억을 되찾아가자, 지구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엄청난 미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화성에서의 서바이벌을 다룬 영화화된 저자의 걸작 "마션"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은 SF의 재미가 응축된 소설입니다.

2024/06/01

계간 미스터리 2024 봄호 - 김태현 외 : 별점 2점

계간 미스터리 2024.봄호 - 4점
김태현 외 지음/나비클럽

정말 오랫만에 읽어보는 계간 미스터리입니다. 이전 리뷰는 2011년이니 강산이 변해도 벌써 한 번 이상 변했네요. 싼마이틱하지만 강렬한 표지 일러스트에 호기심이 동해 읽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리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문예지 스타일이라는건 같은 미스터리 잡지"미스테리아"와 확실히 다른 점입니다. 심지어는 특집 기획 르포르타쥬 기사인 "인스타그램 주식 여신"마저도 소설 형식을 빌어 작성되어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죠. 인스타그램에서 주식 고수익을 인증하며 투자자를 끌어들인 뒤, 폰지 사기를 저지른 실화를 가명, 그리고 사건 핵심 관계자 시점의 묘사로 설명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수록 단편 6편 중 무려 5편이 한국 작가 작품이라는 것도 특징입니다. '한국 추리 문학의 본진'이라는 광고가 허언은 아닌 셈입니다.

수록 단편 중에서는 세 편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세 편에 대해 스포일러 가득 담아 짤막하게 감상을 남겨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신인상 수상작인 "사이버 니르바나 2092"입니다. 유명 연예인 강준기가 전뇌 합선으로 사망한 사건의 진상을 캐는 전직 경찰의 활약을 그린 SF 추리물이지요. 이미 죽은 강준기의 뇌를 회사, 매니저들이 이용해서 그동안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왔지만, 전뇌에 복수 접속하는 사고로 뇌가 타버렸다는 진상은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과연 좋은 추리물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강준기는 전뇌화 수술을 받지 않은 인본주의 인물이었다는 정도의 단서로는 진상을 추리해내는게 독자에게는 불가능한 탓입니다. 최신형 전뇌가 아니어서 과부하가 걸리면 타버린다는걸 독자는 알 도리가 없으니까요. 안티 부디스트 시위, 전뇌, 전뇌 연결, 신체 임플란트 등 "공각 기동대"로 대표되는 사이버 디스토피아 세계관도 지금 읽기에는 식상했어요. 저자의 욕심이 과했습니다.
"낭패불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는 악마가 인간을 타락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흔하디 흔한 설정인데 1973년 박정희 유신 당시 경찰서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니 굉장히 독특하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이 과정에서 빚어진, '경찰이 피라미 노동자를 간첩이라며 고문, 심문하는데 알고보니 그 노동자가 취조하던 형사의 6.25 때 헤어진 동생이었다!'라는 극한의 딜레마도 흥미로왔습니다. 형은 여기서 동생임을 밝히고 노동자를 구해줘야 할까요? 그러면 빨갱이 가족임이 드러나 출세길이 영영 막힐텐데? 아, 정말 쫄깃하더군요. 다만 노동자를 죽이고 말았다는 결론은 다소 식상했고, 악마가 끼어들 이야기였는지는 의문이기는 합니다. 뭔가 거래를 한 것도 아니고... 이런 억지스러운 악마의 등장보다는, 같은 역사 속 비극을 짤막하게 다루었지만 훨씬 깊은 울림을 주는 걸작인 김성종의 "어느 창녀의 죽음"같은 선례를 참고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아문센의 텐트에서"는 수록작 중 유일한 외국 단편입니다. 존 마틴 레이히의 작품이지요. 남극 탐험대가 미지의 괴생명체를 발견한 뒤 모두 죽고만다는 크리처 물입니다.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의 직속 선배라 할 수 있어요. 로버트 드럼골드와 대원들이 느끼는 공포가 생생하게 전달되는 덕분에 몰입감이 장난이 아닙니다. 미지의 괴생명체가 뭔지 제대로 묘사도 하지 않는데도 말이죠. 별점은 4점은 충분합니다. 수록작 중 단연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특집 기사  "인스타그램 주식 여신"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최근 흔히 보아왔던 범죄 이야기이기는 한데, '사기 감별사' 주제한이 범인 '여우비'의 사기를 간파한 방법은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화라서 설득력도 높고요. 
한국 미스터리를 키워드를 통해 분석한다는 신연재 "로컬리티와 미스터리"에서는 여러가지 주장 중 한국 소설의 공간 중 '시골'에 주목한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지역 주민의 텃세와 오지랖, 부조리한 규율이라는 시골적 배타성, 이른바 '부족주의'와 도시인의 충돌이 벌어지는 식으로 시골은 미스터리 무대로 흔히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는 도시인 기준이라는 주장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골 부족주의를 전형화하는 시선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셈이지요. 이를 극복한 작품으로 황세연의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를 소개하는 것도 이채로왔고요. 이 작품을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이런 시선이 추리 비평에 필요하겠구나 싶더군요. 저도 한참 공부가 부족하다는걸 여실히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단편 세 편은 추리물로 보기 어렵거나, 달리 언급할 부분이 없는 범작 수준에 그친다는건 아쉬웠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앞으로는 '계간 미스터리'라는 명칭에 걸맞는 정통 추리물이 더 많이 수록되면 좋겠습니다.

2024/04/20

권외편집자 - 츠즈키 쿄이치 / 김혜원 : 별점 3점

권외편집자 - 6점
츠즈키 쿄이치 지음, 김혜원 옮김/컴인

일본의 편집자이자 작가, 사진가인 저자가 자신이 출판계에서 쌓아온 경력을 털어놓는 에세이집.
지금도 발간되고 있는, 저도 아주 좋아하는 잡지인 'popeye'와 'Brutus'에서 시작하여, 독립후 사진까지 직접 맡아 취재하여 발표한 Tokyo Style, 일본의 기묘한 장소들과 같은 기사들과 기사를 토대로 발표한 책들, 지금은 e-mail magazine 작업을 진행한다는 저자의 출판 여정과 함께, 이러한 취재와 창작 과정에서 느꼈던 여러가지 감정들과 단상들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편집자'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기자, 작가, 사진가, 창작자로서의 작업이 훨씬 많은건 의외였습니다. 저자가 원하는 책을 만들지 않고는 못배기는 사람이라서 그렇기도 한데, 여튼 익히 알고있고 친숙한 편집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파란만장한 이야기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직접 기획해서 만든 기발한 책들 소개도 인상적이었어고요. 아무도 안 만들 것 같아서 만들었다는데, 일본, 미국의 기묘하고 재미있는 장소라던가 러브 호텔 사진집 등 소개만 보아도 재미있는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 중 가장 흥미로왔던 책은 성인 잡지 독자 투고 일러스트에 주목하여 출간한 기획이었습니다. '핀카라타이소 (ぴんから体操)'라는 작가는 그 중에서도 특출났던 덕분에, 출간 후에 유명해져서 전시회까지 정기적으로 열린다고해서 어떤 작품인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자마자 변태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승자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는 시선, 판매량과 관계없이 원하는 책을 내고야 마는 열정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책을 만들어도 먹고 살 수 있는 문화적 저변도 부럽고요. 물론 저자도 인세로 먹고 살지 못한다고 언급은 하지만, 이런 책을 여러 권 출간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요. (SF 전문 출판사 '불새'의 안타까운 최후가 겹쳐집니다)

백전노장다운 조언, 경험담도 새겨들을만한게 많습니다. 몇가지 소개해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내 돈 주고 구입하기'
무작정 인터넷으로 검색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머리와 주머니의 돈으로 판단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미술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이 직접 문을 두드리고 열어봐야 경험이 쌓인다. 그렇게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머지않아 주변 의견에 흔들리지 않게 되고 좋다고 느낀 자신의 감각을 확신할 수 있는 날이 온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게 자신을 다져가는 과정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 "현시연"의 마다라메의 말이 떠오릅니다.

속독이나 다독은 밥을 급하게 먹거나 과식하는 것과 같다. 편집자를 하고 싶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100번 읽은 책을 몇 권이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 추리소설 1,000권을 넘게 읽었다고 우쭐했던 저를 반성하게 만드는 명언입니다. 추리 소설 중에 100번 읽을만한 책이 무엇일지 한 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젊었을 때는 록만 들을거야라고 고집부리다가 어른이라면 재즈를 들어야지 하다가 마지막에는 고급 노래방에서 언니들과 흘러간 유행가를 부르는 승자 그룹보다, 죽을 때까지 핑크 플로이드를 들으며 만족하는 패자 그룹이 훨씬 존경스러워졌다.
: 성인잡지 독자 투고 일러스트를 모아 책으로 만드는 사람다운 견해였어요. '병신같지만 멋있어!' 느낌의 말이기도 하지요. 패자들을 위한 멋진 헌사라 생각됩니다.

프로란 대신 해주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예를 들면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걸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매일 그런 생각만 끝없이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을 대신해 철학자는 평생 동안 고민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책으로 낸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가를 지불하고 책을 읽는다. 이처럼 누군가를 대신해서 깊이 생각하는 사람, 먼 곳까지 가보는 사람, 맛을 연구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프로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일을 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
: 이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 무릎을 치게 만들었습니다. 직장인이 그 업무의 '프로'라서 월급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기도 하니까요.

이외에 실제 책을 여러 권 출간한 '프로'다운 말도 많습니다. "누군가를 인터뷰할 때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대략적인 스케치를 하는 정도가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준비는 결과를 가정하고 단정짓는 과정이 아니라 기초를 닦아두는 과정이다." 처럼요. 미술 대학을 부정하는 말도 기억에 남네요. 저 역시 아득히 오래 전이지만 미대 졸업생인데, 솔직히 대학에서 예술이나 디자인에 대해서 무언가 배웠다는 실감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냥 그런 작업을 하는 공간과 같은 분야에 관심있는 친구들을 모아놓은 오프라인 모임에 가깝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전부가 다 볼만하고 좋은건 아닙니다. 꼰대스러움이 글 곳곳에 묻어나는건 별로였어요. 대표적인게 '기획과 여정도 처음부터 모든걸 꼼꼼하게 계획하지 않는게 좋다. 예기치 못한 만남은 예상을 뛰어넘은 장소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모든걸 꼼꼼하게 계획해야 하는 취재, 업무가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는 MBTI가 J인 사람은 견디지 못할 상황이기도 하고요. 업무의 특성과 사람마다 개성이 모두 다른데, 자신에게 잘 맞았다고 남에게도 단정지어 이야기하는건 꼰대지요.
"그들의 삶은 세상에서는 패배자라 하고 부모에게는 근심거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건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았다."와 같은 글도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없다는 현실을 알려주는게 저널리스트의 역할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신선했던 취재들도 거듭되다보니 "수상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와 비슷해져서 식상해져 버리고 맙니다. 러브돌을 만드는 오리엔트 공업 이야기는 그냥 같은 취재더라고요.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아직도 현역으로 인터넷 메일 형태의 매거진을 정기 간행하는 등 꺾이지 않는 저자의 열정에는 박수를 보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3/24

라플라스의 마녀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1.5점

라플라스의 마녀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 및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물 영화 제작자 미즈키 요시로가 아카쿠마 온천에서 황화수소에 중독되어 사망했다. 나카오카 형사는 요시로의 아내 치사토의 범행을 의심했지만, 경찰 수사 협조를 요청받은 환경 분석 화학 전문가 아오에 교수는 고의로 중독 사건을 일으키는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도마테 온천에서 유사한 황화수소 중독사가 또 일어났고, 나카오카와 아오에는 피해자들이 영화 감독 아마카스 사이세이와 연관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아마카스도 수년 전 가족을 황화수소 중독으로 잃었던 과거가 있었다. 
뇌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아마카스의 아들 겐토를 쫓는 소녀 우하라 마도카와 만난 아오에 교수는 마도카와 그녀 주변인물들을 통해 결국 사건의 진상을 깨달았다. 이 모든건 뇌수술로 물리 현상을 예측할 수 있게 된 겐토의 복수극이었다....

"인간은 원자야. 하나하나는 범용하고 무자각으로 살아갈 뿐이라 해도 그것이 집합체가 되었을 때, 극적인 물리법칙을 실현해 내는 거라고.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어. 단 한 개도."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주년 기념작인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 밀리의 서재에 있길래 읽어보았습니다.
 
겐토와 마도카가 가진, 물리법칙으로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은 현상에 대한 물리적인 데이터를 구비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는 등으로 꽤 그럴싸하게 설명됩니다.
겐토가 저지른 범죄의 원인인 과거 아마카스가 가족을 살해했던 사건의 동기도 놀라왔습니다. 아마카스가 작성했던 블로그 글과는 사뭇 다른 가족 관계가 밝혀지는 등의 설명으로 반전이 효과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아마카스가 주장하는 천재 이론 -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아무런 진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다 - 과는 반대되는 주제의식 -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는 없다 - 도 와 닿았고요. 암요, 천재도 중요하지만 일반 대중들이 있어야 천재도 빛을 보는 법이지요.

그러나 장점은 이 정도 뿐이고 대체로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우선, 전개부터 예상 그대로라 굉장히 평이합니다. 황화수소에 의한 살인은 온천을 방문했던 청년이 일으켰다는건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그 정체도 읽다보면 아마카스 겐토라는걸 쉽게 눈치챌 수 있고요. 전문가 아오에 교수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 황화수소를 이용한 살인을 어떻게 저질렀는지도 대단한 수수께끼는 아닙니다. 마도카의 특수 능력이 초반에 밝혀지는 탓에, 그런 능력을 이용한 범죄라는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상상을 초월하는 일종의 '초능력'을 활용한 범죄라는 점에서 추리 소설로 보기 어렵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지 않게 전개도 깔끔하지 못합니다. 주인공이 많아서 시점이 자주 전환되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마도카 등 다른 인물들 시점으로의 전환은 필요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이럴 바에야 아오에 교수, 나카오카 형사를 중심으로 끌고가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나카오카 형사의 수사가 '위'에서의 지시로 마무리되지 못한다는 것도 억지스러웠고요.

뇌 수술 덕분에 미래를 예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초능력도 앞서 말씀드렸듯 설명은 잘 되어 있지만 신선함은 떨어집니다. 결국은 '머리가 좋아진 것'에 불과하거든요. 즉, 아래와 같이 '아마데우스 조'가 미사일 궤도를 흐트러트리는 것과 똑같아요.
물이 흐른다던가, 공기의 흐름을 이용한다던가 하는 식의 물리법칙 이용은 듀나의 SF 단편 "나비전쟁"에도 유사한 설정이 등장했었고요.
게다가 이 능력에 대한 것 모두는 온갖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는 하나 결국 과학이라기보다는 판타지입니다. 여기에 특수 능력자를 나라에서 관리한다 등의 설정에 '라플라스의 마녀'라는 코드네임(?)까지 더해지니 이거야 원, X-men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드네요.

등장인물들도 진부하고 평이합니다. 겐토는 특히 문제입니다. 그가 아버지 아마카스를 살해하려는 동기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 치사토를 유혹하여 범죄에 끌어들이고 마지막에 함께 죽여버리려고 하면서 정의, 복수를 당당하게 주장하는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심지어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말이죠!
아오에 역시 불가능하다는 말만 해서 전혀 교수답지 않았을 뿐더러, 아오에가 가족 붕괴를 앞두고 있다던가 하는 설정은 불필요했습니다. 
우하라 교수가 딸 마도카의 뇌수술을 하게 된 동기인 '토네이도' 사고도 굉장히 억지스러웠어요. 설령 이런 사고가 있었다한들, 딸에게 검증되지 않은 뇌수술을 한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겐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을 해야지....
 
이렇게 추리적으로도, SF적으로도, 전개와 완성도 측면에서 별로이며 문제 투성이라 점수를 줄 여지가 없습니다. 과학과 미스터리의 절묘한 융합이라는 광고 문구는 과대 포장에 가깝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뻔하고 유치한 마블 히어로물입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래도 영화는 좀 궁금하네요. 예고편을보니 아오에 교수를 주인공으로 해서 복잡했던 시점 분산을 깔끔하게 정리한 듯 보여서 책보다 좋아보이거든요. 평이하고 쉬운 전개는 영화에는 분명 장점일테고, 물리법칙을 이용하는 장면들 - 특히 클라이막스의 '다운버스트' - 은 화면에서는 꽤 그럴싸하게 보일테니, 최소한 소설 후속권보다는 기대가 됩니다.

2024/02/10

아이를 빌려드립니다 - 알렉스 쉬어러 / 이혜선 : 별점 2점

아이를 빌려드립니다 - 4점
알렉스 쉬어러 지음, 이혜선 옮김/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인간이 노화를 극복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아이가 거의 태어나지 않게 된 미래. 태린은 그를 도박에서 땄다는 디트 삼촌에 의해 아이 대여 사업에 이용되어 왔다. 아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시간당 대여 후 돈을 받는 사업이었다. 디트는 태린이 영원히 아이의 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불법인 '피피 수술'을 시킬 계획을 세웠다.
수술을 거부해왔던 태린은 수술 직전에 간신히 탈출했지만, 갈 곳이 없어 자살을 결심한 찰나 다행히 친부모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알렉스 쉬어러의 SF 소설. 인간이 과학과 의학의 도움으로 평균 수명을 200살 이상으로 늘리고, 외모 변화도 40이후 없는 세상이 되자 그 반동으로 아이가 태어나지 않게 되었다는, "칠드런 오브 맨"과도 유사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나름대로의 상상력으로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아이가 귀해서 아이를 잠깐이나마 빌려주는 사업, 심지어 아이들을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는 수술까지 성행한다는 핵심 설정은 재미있었고, 학교가 없어졌으며 산부인과 의사가 직업을 잃었으며 거리에 나온 갓난아기가 군중의 주목을 잡아 끈다는 등의 설정과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저출산 시대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모습이 살짝 겹쳐지네요.
태린 시점의 디테일한 심리 묘사로 이루어지는 전개도 긴장감을 전해줍니다. 디트 삼촌에게 혹사당하며 '오후의 아이'가 되어 이 집, 저 집을 오가며 아이 행세를 하고, 심지어 거금에 팔려 애완동물처럼 지내다가 피피 수술을 받기 직전까지 가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리고 끔찍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SF 소설로 보기에는 좀 부족합니다. 아이가 없어진 세상에 대한 설정을 과학적으로 풀어내지 못하는 탓입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과학과 의학이 발전했다면, 인공 수정으로 충분히 임신이 가능한데, 그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과학보다는 종교적인 사상이 근간이 된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감히 신의 영역을 건드려서 천벌을 받은 것이며, 노화 방지 시술을 받지 않은 태린의 부모는 임신과 출산이 가능했다는 설정이 이를 증명합니다. SF보다는 약간 이런 쪽(?) 계열 소설로 보이기도 하네요.
다른 설정들도 합리적이지 못한건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게 피피 수술입니다. 태린이 피피 수술을 받았다 한들, 태린이 법적으로 성인이 되면 디트 삼촌이 태린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단 몇 년을 더 벌기 위해 거액의 수술비를 낸다는건 이해하기 힘들어요. 차라리 수술비를 모아서 정착하는게 나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출구를 잃은 태린 앞에 유괴범인줄 알았던 남자가 나타나는데, 그는 태린의 친부라서 태린을 가족이 있는 집으로 데려와 행복을 찾게 만든다는 결말인데 황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사전에 복선이라던가, 관련된 정보 제공이 거의 없다시피해서 급작스럽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어요. 이 정도면 거의 "소드 마스터 야마토"급 결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개도 디트 삼촌의 사업과 관련된 태린의 심리 묘사는 반복적이라 지루한 등의 문제가 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신선하고 재미있는 부분도 있지만, 결말까지 잘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청소년 소설로 유명하던데, 성인들이 읽을만한 장르 소설은 아닙니다.

2023/10/15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운을 즐기자! '기묘한 맛'의 신구 단편 모음집



honto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천. 대부분 국내 소개된 작품들입니다. 원조이자 대표작인 "특별 요리"를 추천하지 않았는데, 국내 출간되지 않은 마지막 작품 대신 "특별 요리"를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3/10/05

Nervous Breakdown 너버스 브레이크다운 1~13 - 타가미 요시히사 : 별점 3점


90년대 초, 중반에  '타누마 사립탐정 사무소' 멤버들이 - 특히 브레인 역할인 안도와 액션 전담 미와 컴비 -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한다는 추리 만화. 지금은 없어진 월간지 "코믹 NORA"에 연재했었지요. "그레이" 등 성인 취향의 어둡고 비정한 SF, 범죄물로 유명한 타가미 요시히사의 작품입니다. 저는 "그레이" 때부터 좋아했던 작가라 이런저런 작품들 - 예를 들어 "화석의 기억" - 을 원서로 구해 읽었었는데, 이 작품은 "메탈헌터"와 함께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유이한 작품입니다. 소개 당시 한 권씩 구입해서 읽었고,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지요. 
예전에 스핀오프 "Night Adult Children" 리뷰를 올렸던 적은 있었는데, 추석 연휴를 맞아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전 13권을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등장인물들이 3등신과 8등신을 오가는 작화가 가장 큰 특징으로, 대부분의 경우 3등신인데  아래와 같이 특정 컷에서만 8등신으로 등장하는 식입니다. 


3등신 캐릭터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추리를 하고 시니컬하고 분위기있는 대사를 내뱉는게 묘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특별히 모든 등장인물들이 8등신으로만 등장하는 에피소드도 두 편 있습니다. - 안도가 주인공인 "고즈에로 가는 마지막 버스", 미와가 주인공인 "살인자에게 인사를" - 두 편 모두 의외의 재미를 가져다주는 좋은 작품으로, 전부 8등신으로 진지하게 그렸어도 좋았을 것 같아요.

등장인물들도 독특합니다. 안도는 포지션은 전형적인 명탐정이지만, 정의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거든요.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진범을 체포하는데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정해진 보수를 받은 만큼 일하고요. 사건 도중에 일어난 트러블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의뢰인에 대해서 "그 여자가 죽건 말건 난 상관없어"라고 말할 정도고, 아래처럼 지인의 죽음에도 눈 하나 깜빡않는, 인정머리 없는 남자입니다.



몸이 굉장히 약하고, 여자들이 쉽게 반하는 미남이라는 속성도 붙어 있는데 이런 캐릭터는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네요. 아래와 같이 멋진 말을 남기는 장면은 과연 여자들이 반할만하다 싶기도 하고요.

"미야한테 전할 말이 있는데...."

미와는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개그 캐릭터에 가깝지만, 그 초인적인 체력이 유용하게 활용될 때가 많다는 점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입니다. 아래와 같이 가끔은 멋지게 등장합니다. 그냥 개그컷에 가깝지만....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작가의 추리물에 대한 나름대로의 애정이 잘 녹아 있거든요. 목차부터가 고전 명작의 패러디들이 많을 정도로요. 
하지만 트릭이 사용된 본격물보다는 범죄 드라마, 스릴러에 가까운 에피소드들이 더 완성도가 높습니다.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전개도 좋고, 사건에 몰입하게 만드는 상황과 심리 묘사가 탁월한 덕분입니다. 작가도 이런 특성을 알아챘는지 뒤로 갈 수록 트릭보다는 드라마에 집중하며, 덕분에 더 볼 만해집니다.
이외에도 죽어가는 남편의 첫사랑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조사에 나선다는 "어느 조용한 죽음" 처럼 잔잔한 일상계로 인간 관계를 되새기게 만드는 에피소드들도 독특합니다. "고백의 십자가", "마지막 Chiristmas" 같은 일상계 러브 스토리까지 수록되어 있는 등 다루는 장르의 폭도 넓고요. "노리코의 죽음"같이 SF 등 다른 장르물과 혼합된 사랑 이야기(?), 미와가 맹활약하는 액션물들도 괜찮습니다. 

정통 본격물 맹점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 패러디들도 큰 재미를 가져다 줍니다. 과거 잔혹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던 곳에서 실종자가 한 명 나왔지만 안도가 "아직 기껏해야 실종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런 사건은 다음 피해자가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라고 말하는 장면처럼요. 아래의 밀실 살인에 대한 비판 역시 공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추리 만화로서 논리적이거나, 감탄할만한 트릭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많지 않다는건 다소 아쉽습니다. 만들기 쉬운 암호 트릭 - 10권 "산쥬노출"의 "미키가 노래하는 미버 (タレラヤ小さぃ子羊肉)"처럼요 - 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 오히려 트릭이 사용된 에피소드는 다소 억지스럽다는 점은 단점입니다. 예를 들어 "바이바이 엔젤"에서는 수조로 이루어진 밀실에서 수조를 치우는건 불가능하다고 등장인물들이 이야기하지만, 수조를 어떻게든 치웠다는게 진상이었습니다. 이런건 반칙을 넘어서는 억지죠. 

3등신 캐릭터가 등장하기 때문인지 개그도 많은데, 안도의 약한 체력과 미와의 야수같은 육체, 의뢰인이었다가 타누마 탐정 사무소에서 일하게 되는 미야가 재벌 이나바 테츠노스케의 손녀라는 등의 캐릭터 설정을 활용한게 많습니다. 문제는 다소 뻔하고 식상한 개그들이라는 겁니다. 반복적이기도 하고요. "15세" 딱지가 붙을 정도로 외설적인 개그도 많은데,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아서 안 나오느니만 못했습니다. 마지막 에피소드 "마지막은 참극"은 미와가 등장인물 모두를 죽이는 꿈을 꾼다는 내용인데,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았고요.
아울러 학산 문화사 초기 번역 소개작이라 그런지 여성의 노출 장면을 어거지로 덧칠하는 등의 문제도 크며, 3등신 캐릭터들의 얼굴 구분이 쉽지 않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3권의 "모두가 닮은 사람"이라는 에피소드에서 모두가 닮았다는걸 트릭으로 써먹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래도 다시 읽어도 여전한 재미를 가져다주는건 분명합니다. 수록작들 편차는 크지만 몇몇 작품들은 충분히 '걸작' 소리를 들을만 하다 싶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각 권별 수록작들 제목을 소개해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제가 아는 한 원제를 달아보기는 했는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1권 :
갑자기 사라져 버린 케이코
그래도 사랑스러운 여인이여
원과 면 : 점과 선
황색의 연구 : 주홍색 연구
 
2권
일요일은 죽는 날
걱정일세, 여탐정!
여름빛깔 카루이자와
타누마 소장 최후의 사건 : 트렌트 마지막 사건
얼어붙은 파도 : 얼어붙은 섬 또는 얼어붙은 송곳니
 
3권
도둑은 가득히 : 태양은 가득히
모두가 닮은 사람 : 당신을 닮은 사람
제로의 정점 : 제로의 초점
한여름 낮의 꿈 : 한여름 밤의 꿈
어느 조용한 죽음

4권
하얀 커튼 : 검은 커튼
입학 : 졸업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새빨간 거짓말
사라질 뻔한 탐정 : 사라진 남자 (?)
 
5권
새벽녘의 시선 : 새벽의 데드라인
그리고 소녀는 사라졌다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변호인측 괴인 : 검찰측 증인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내일도 무사하게 하소서

6권
오발탄
타누마 가의 일족 : 이누가미 일족
노리코를 위하여 : 요리코를 위해
분수령
마진테 부인은 죽었다

7권
귀여운 설녀
어느 비오는 오후 갑자기
Midnight Fool
매장 지도
50의 살인

8권
시체와 여행하는 남자 :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고백의 십자가 : 공허한 십자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남자들
토모여, 고이 잠들라 :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 (기타가타 겐조)

9권
바이바이 엔젤 : 바이바이, 엔젤
추억의 매장
모르그 가의 살인 : 모르그 가의 살인
레이디 하트브레이크
" " (무제)

10권
산쥬노출
마지막 Chiristmas
고즈에로 가는 마지막 버스 : 우드스톡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
불타는 사나이 (Man on Fire) : Man on Fire (크리시 시리즈)
치에는 어디에
사람은 어째서 살해당하는가 :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11권
악몽같은 여자 : 악마같은 여자 ("디아볼릭")
환상의 여인 : 환상의 여인
의뢰인으로부터 한마디 (과거 연재작 특별편) 시리즈
  • 귀여운 여인
  • 설녀가 보고 있었다, 또는 "고립된 산장"을 주제로
  • 울부짖는 여자

12권
보디가드
살인자에게 인사를
셀룰로이드 살인
어설픈 시체
움직이는 시체

13권
여자에게는 맞지 않는 직업 :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랑의 탐정들
가장 위험한 유행 : 가장 위험한 게임
도중의 집 : 중간 지점의 집
리틀 루즈 걸 : 리틀 드러머 걸
마지막은 참극


본편 외에도 "스페셜 리포트"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유명 추리 소설들을 패러디한 4컷 만화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당시에 만화책이 3,500원이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모든 물가가 3배 이상은 올랐을텐데, 만화책만은 거의 오르지 않았네요.

2023/07/08

마션 - 앤디 위어 / 박아람 : 별점 3점

마션 - 8점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지구로부터 225,000,000km 떨어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에서 조난을 당한 남성, 마크 와트니는 화성 탐사 계획에 참여한 식물학자로 1,000여 일 동안 아레스3 탐사선을 타고 무사히 화성에 도착한다. 예정된 탐사를 수행하던 엿새째, 예기치 못한 모래 폭풍에 휩쓸린 와트니와 일행들 사이에 교신이 끊겨버린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동료들은 두려움 속에 귀환하고, 모래 언덕에서 홀로 깨어난 그는 감자 몇 알과 함께 다음 탐사선이 올 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이보다 더 최악의 생존기가 있을까? 하지만 이 똑똑한 과학자는 화성에 지구 작물을 심고, 물을 만들었으며 산소와 이산화탄소로 경작을 해낸다. 한편 나사 영상 담당 직원은 마크 와트니의 시체가 보일 줄 알았던 영상 기록을 통해 깨끗이 치워진 막사 근처에서 마침내 그의 생존을 확인한다. (알라딘 책소개에서 인용)

화성에 고립된 우주비행사의 눈물나는 과학적인 생존기. 출간되어 이미 시장을 휩쓴지 오래지만, 이번에 유럽으로 향하는 장거리 비행용으로 좀 쉬우면서도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찾다가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전에 읽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인 <<프로젝트 헤일메리>>와 비교해 본다면, 정 반대, 대척점에 있습니다. 여기서는 화성에 고립된 단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전 지구가 힘을 합쳐 노력하는 반면,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단 한 명이 지구를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이니까요. 그러나 여러가지 측면에서 이 작품이 훨씬 낫습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페트로바선, 아스트로파지라던가 비교적 손쉽게 외계인과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하는 등의 비현실적인 설징이 바탕이 된 반면, 이 작품은 상식 선에서 수용 가능한 수준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온갖 방법으로 위기가 찾아오는 극적인 전개도 이 작품이 우위에 있고요. 무엇보다도 엄청 재미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라는 첫 문장부터 독자를 강하게 사로잡아요. 이어지는 화성에 홀로 남은 마크 와트니의 생존을 위한 분투도 엄청 흥미롭고요. <<로빈슨 크루소>> 등과 다름없는 순수한 모험물인데, 고전적인 생존 모험물과는 다르게 치밀한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차별화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론의 전문성이 높아서 거의 하드 SF에 가까울 정도인데, 이를 이렇게 재미나게 그려내는건 정말이지 대단한 능력이라 생각됩니다.
또 마크 와트니 시점과 NASA에서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 시점을 번갈아 가며 전개해 내는 것도 좋았습니다. 어느 한 쪽은 모르지만 다른 한 쪽은 알고 있는 위기 상황 - 예를 들어 NASA에서 관측한 모래 폭풍 - 을 통해 극적인 긴장감을 불어넣어 줄 뿐 아니라, 마크라는 단 한 명을 구하기 위한 전 지구적인 노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마지막 마크 구조 순간의 감동이 극대화 되기 때문입니다.
유머 넘치는 마크 위트니 캐릭터도 아주 좋습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조차 유머로 대처하는 강한 멘탈에는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어요. 암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죠. 갖추고 있는 여러가지 지식과 기술도 적절했습니다. 식물학자 겸 기계공학자로 '식물을 갖고 노는 전담 수리공'이라고 언급되는데, 덕분에 생존에 핵심이었던 화성 토양에서 감자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거든요. 각종 장비 수리 및 개조를 하는 모습, 심지어 '육분의'까지 자체 제작하여 화성에서 이동할 때 위치를 측정까지 하는걸 보면 단순한 공학자 수준은 아닌거 같아요. 하긴, NASA의 우주 비행사니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하지만 구조 이후의 후일담이 없다는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간단하게나마 마크 와트니의 구조 이후의 모습을 그려주었더라면 아주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발표 당시의 인기가 수긍이 가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덧붙이자면, 할게 없어서 동료 우주 비행사 짐을 뒤져 크리스티의 전자책을 읽어본다는 디테일이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무척 반가왔습니다. <<백주의 악마>> 속 범인을 아예, 터무니없이 잘못 짚기는 했습니다만.

2023/05/11

돈이 되는 중고책에 대한 단상

얼마전 "중고책으로 돈 버는 사람들"이라는 광고를 보고 글을 올렸던 적이 있습니다. 20년 넘게 중고책을 구입해왔던 경험으로, 돈이 되는 중고책이 무엇일지? 잠깐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되팔기 목적으로 중고책을 산 적은 없고, 단 한 번도 개인간 책 중고 거래를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오직 알라딘 등에 알라딘 매입가로 팔아 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알라딘에 판 가격보다 중고가가 높으면 살짝 짜증이 나더라고요. (<<꿈의 화석>>은 3,200원에 팔았는데, 중고 가격이 거의 3만원 대네요). 그래서 이런 정보를 좀 알아두는게 좋겠다 싶어 적어봅니다. 여러분께도 참고가 되면 좋겠습니다.

돈이 될 중고책은 당연히 사람들이 찾는 책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래에 해당하는 책들일 것 같습니다.
  1. 구하기 힘듬. 책이 절판되었고, 이북으로도 출간되지 않음. 당분간 출간 예정도 없음.
  2. 1에 해당하는 책 중에서, 높은 지명도를 갖는 책. 유명한 명작이거나, 유명 작가의 작품이거나 다른 곳에서 많이 언급되는 책.
  3. 2에 해당되는 책 중에서, 수집욕을 강하게 자극하는 책 (그림이 미려하다거나, 정말 희귀하다거나....).
  4. 1, 2, 3에 해당되는 책 중에서, 다른 책으로 대체 불가능한 책
  5. 시리즈라면 전권 (중요 포인트)
이런 항목들을 모두 아우르는 주제로 대표적인건 1980년대 ~ 2000년대까지의 만화입니다. 제가 가진 책 중에서 모두 해당되는걸 꼽자면 <<타임시커즈>>, <<환영박람회>> 입니다. 책 상태도 좋고, 모두 완결편까지 한 Set로 소장하고 있는터라 현재는 제법 값어치가 나갑니다. 단권이지만 <<외천루>>도 1 ~ 4조건을 모두 충족하기에 값이 꽤 비싸고요.




국내에서는 유명세에 비하면 많이 팔리지 않아서 초판 이후 절판된 작가들 - 예를 들어 모로호시 다이지로 - 작품 중 일부도 중고 가격이 만만치 않아요.
반면 이 시기 만화라도 당시 많이 팔려서 구하기 쉬운 탓에 1번 항목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책도 있습니다. <<어쩐지 좋은일이 생길것같은 저녁>>처럼요.

만화 외에도 위의 조건들을 충족시켜 고가를 형성하는 책들은 당연히 많습니다. 매니아 층이 탄탄한 장르 소설의 경우 꽤 높은 가격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재간되기 전 <<점성술 살인사건>>과 <<관 시리즈>>가 그러했었죠. SF도 비슷해서 재간 전 <<별의 계승자>>는 엄청났었습니다. 찾아보니 다아시 경 시리즈 <<마술사가 너무 많다>>도 3만원을 훌쩍 넘네요.
하지만 소설은 투자(?) 목적으로 구입하기는 꺼려집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작품은 많이 팔리기도 해서 공급도 많으며, 예상치못한 복간이나 전자책 출간이 이루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요새는 비파괴 북스캔 후 OCR을 돌려 개인이 전자책처럼 만들 수도 있는 시대이기도 하니, 장기적으로는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인문서의 경우는 아주 유명하다면 절판되는 경우가 적습니다. 재간도 자주 되며, 도서관에서도 구할 수 있고요. 특히 역사책은 4번 항목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추천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확실한 매니아층 - 소장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 이 있는 책이 괜찮아 보입니다. 밀리터리물, 요리, 자동차나 각종 취미 분야 (예를 들자면 건담) 등에서 독보적(?)인 책은 가격이 괜찮습니다. 제가 가진 책 중에서는 <청설모의 자동차카툰>>이 대표적입니다. 투자는 소설보다는 이 쪽이 나은 선택일 듯 합니다.


아울러 구입하려면 업자가 아닌 알라딘 직접 배송 중고 등 플랫폼 이나 당근 등의 개인 판매본을 노리는게 좋습니다. 업자는 책의 가치를 잘 알고 있으니, 비싼 책을 싸게 구입하는건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가격도 최소 3명 이상의 판매자가 책정한 가격을 기준으로 삼는게 좋습니다.
그리고 중고 구입 시에는 꼭 사전에 중고 플랫폼에서 검색해보세요 (팔 때도 마찬가지). 엄청난 고가라도 시장 가격과 다른 경우가 있거든요. 업자의 경우, 절판이라고 어마무시한 가격을 임의로 붙여놓고 '한 놈만 걸려라' 인 경우도 많으니까요. <<기동전사 건담 일년 전쟁사>>는 상, 하권 낱권보다 두 권 세트 가격이 두배 가까이 비싼데 이런 경우도 주의해야 합니다.

허나 이 이론이 절대적인건 아닙니다. 조건을 대충 충족한 것 같은데 생각보다 가격이 오르지 않는 책도 많아요.
그래서 너무 투자(?)에 연연하지 말고, 좋아하는 작품을 소장하는 개념으로 접근하시는게 속은 편할겁니다. 그러다보면 가격은 오를 수 있으니까요. 제가 좋아하지만 그동안 중고 시장에서는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김진태 만화들도 결국 가격이 엄청 올랐더라고요. 결론내리자면, 존버는 승리한다!
 
그런데 과연 <<대지옥전 진광대왕>>이 얼마나 할지, 살짝 궁금해집니다. 1, 4에 해당되기는 하는데....


2023/04/14

테스터 - 이희영 : 별점 2점

테스터 - 4점
이희영 지음/허블

<<아래 리뷰에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방새가 있는 동굴에 들어간 사람들이 모두 참혹하게 죽은 탓에 사람들은 동굴을 막을 수 밖에 없었다는 전설 속 오방새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되살아났다. 빛나는 깃털을 지닌 '레인보드 버드'를 복원하여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려는 계획 덕분이었다. 하지만 레인보드 버드는 끔찍한 전설의 원인이었던 치명적인 RB 바이러스와 함께 되살아났고, 복원 계획은 곧바로 폐기되었다. 그러나 계획을 진행했던 호텔 회장의 손자 강마오가 사고로 RB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태어나고 말았다.
회장은 전력을 다해 바이러스를 치료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오가 16살이 될 때까지 실패하던 와중에, 마오는 자기 말고 다른 바이러스 감염자 하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외부로의 출입, 그리고 사람과의 만남이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는 마오였지만 하라와 만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하라가 진짜 회장의 손자였고, 마오는 고아 출신으로 바이러스 치료를 위해 백신을 대신 투약받아왔던 '테스터' 일 뿐이었다.
다행히 백신은 성공하여 바이러스는 퇴치되었다. 하라는 마오를 꼭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오는 스스로의 의지로 죽음을 택한다.

한국 작가의 SF 소설. 딸이 다니는 학원 교재로 딸이 읽는걸 보고 읽어 보았습니다.
돈이면 다 되는 비인간적인,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동물들을 활용해서 표현한게 독특했습니다.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 멸종시켰다는 레인보드 버드를 관광상품으로 이용하려고 부활시켰지만 바이러스까지 함께 부활되어 위기에 봉착했다던가, 피부 이식을 위해서라며 만들어낸 인간 피부와 같은 성질의 피부를 가진 스킨 피기의 주 용도는 미용이라는 것처럼요. 동물을 이용한건 아니지만, 화성 이주자들을 모집하는 복권이 가난한 가족을 일종의 테스터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 거라는 음모론도 비슷한 느낌이고요.
핵심 줄거리도 이런 황금만능주의 사상과 이어져 있습니다. 레인보드 버드에 의해 되살아난 RB 바이러스에 감염된 손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대기업 회장이 어린 고아들을 바이러스에 감염시킨 뒤 치료용 테스터로 삼았다는 내용이거든요.

여기서 서술 트릭을 활용한 반전이 하나 등장하는데, 회장의 손자인줄 알았던 마오가 테스터였고, 하라가 진짜 손자였다는 겁니다.
반전에 대한 복선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마오가 마시면 정신을 잃는 시계꽃 차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오는 차를 마시고 정신을 잃는데, 메이드 로봇 보보가 마오의 지시였다며 바이러스에 대한 검색 결과를 알려주지요. 이는 마오에게 바이러스의 정체와 하라의 존재를 알려주려는 외부의 움직임이 개입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외에도 마오의 기억이 뭔가 희미하다던가, 하라의 존재에 대해 주변 인물들이 은근슬쩍 정보를 알려주는 등도 마찬가지 복선입니다. 한마디로 꽤 괜찮은 반전이었어요. 
마오의 이름이 테스트용 고아 다섯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지막 다섯번째 아이"였다는 것도 제법 기발했고요.

허나 반전에 대한 설득력은 영 별로입니다. 회장이 마오를 자기 손자라고 속인 이유부터 도무지 모르겠어요. 마오가 그냥 바이러스에 걸려서 아픈 아이였다고 하면 뭐가 문제일까요? 하라를 위해 만든 설정을 마오에게 대입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삶에 대한 의지를 키워주기 위해서? 그럴 리가 없잖아요.
반전이기는 하지만 주인공이 알고보니 무언가를 위해 길들여지고 만들어진 실험체였다!는 것도 SF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던, 지극히 뻔한 설정이라는 것도 단점입니다. 영화 <<아일랜드>>, <<네버 렛 미 고>>나 시미즈 레이코의 <<월광천녀>>처럼 알고보니 장기 제공용 복제 인간이었다는 설정과 흡사한 탓입니다.
또 마오에게 하라의 존재를 알려준건, 하라의 투쟁 때문이었다고 설명됩니다. 하지만 하라가 마오의 존재를 알게 된 것 역시 어느정도 할아버지의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과정의 설명이 너무 부족합니다. 이왕 숨길거면 끝까지 숨기던가, 말해줄거면 대놓고 사실대로 말해주는게 당연했을텐데 말이죠.
마지막에 마오가 자살을 선택하는 결말도 납득이 가지는 않았어요. 알비노는 하라가 책임지고 치료해준다고 했고, RB 바이러스도 다 나았는데 무엇 때문에 죽음을 택하는걸까요? 작중에서 마오는 잘못한게 하나도 없습니다. 혼자 살아남은 것도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이고요. 누군가에게 죄책감을 가지거나 미안해할 이유는 전무합니다. 일종의 PTSD 같은걸 걸려서 괴로와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설명도 없어요. 일종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바이러스 백신이 완성되기 전에 죽었어야 했고요.
마오만 컨트롤 할 수 있는 메이드 로봇 보보가 마오도 모르게 업데이트되는게 굉장히 중요한 단서처럼 묘사되는데, 알고보니 일종의 맥거핀이었다는 것도 실망스러웠습니다. 진솔 아저씨가 사람이 아닌 휴머노이드라서 가능했다는건데, 이야기의 핵심과는 무관한 주변부적인 설정일 뿐이었어요. "알고보니 로봇이었다!"도 흔해빠진 클리셰의 재활용에 불과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이런 암울한 분위기와 설정의 작품이 청소년용으로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는걸 알 수 있었던건 수확이었고, 반전이 드러날 때의 맛은 괜찮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설정과 줄거리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성인에게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2023/02/04

철벽의 알리바이로 완전범죄 성립!? '교환 살인'을 모티브로 한 미스터리

* 언제나처럼 honto의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국내 소개된 작품은 4편입니다. 저도 두 편 밖에는 읽어보지 않았는데 찾아봐야겠네요.

'교환 살인'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살해 대상을 교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살인이 저질러지고 있는 동안에 철벽의 알리바이를 준비해서 혐의에서 벗어나는 완전범죄를 만들기 위해서이지요. 

그러나 교환 살인이 트러블, 변심이나 배반 등으로 생각대로 잘 흘러가지 않고 그 와중에 드라마가 발생하는건 추리 소설에서 기본적인 테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런 교환 살인 미스터리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킹을 찾아라>> 노리즈키 린타로

4중의 교환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범인과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노리즈키 경시와 린타로 부자의 활약을 그린 미스터리. 범인 측 시점은 일종의 도서 미스터리로, 노리즈키 경시와 린타로 부자 시점은 본격 미스터리물로 즐길 수 있다. 또 교환 살인으로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에 대한 후더닛 요소도 더해져 있는, 헛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치밀한 플롯이 빛나는 본격 요소가 가득 담겨있는 작품.

<<교환살인에는 어울리지 않는 밤>> 히가시가와 도쿠야

사립탐정 파트, 탐정의 제자 파트, 형사 파트가 순서대로 그려지며 교환 살인물로는 드물게 도서 미스터리 스타일이 아닌 채로 진행된다. 제목에는 있지만 도대체 무엇이 교환 살인인지 궁금해하면서, 가벼운 분위기의 문장에 혹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저자의 속셈에 빠져들고 마는 본격 미스터리.

<<도망자>> 오리하라 이치

교환 살인을 저질렀지만 배신당해서 한 번 체포되었지만 탈주한 뒤 도망자 신세가 된 도모타케 지에코. 그녀와 그녀를 쫓는 형사와 남편, 그리고 인터뷰로 구성되어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도피 행각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노골적이며 의미심장한 표현들은 서술 트릭의 대가인 저자의 솜씨를 느끼게 해 준다. 실재로 있었던 사건이 모델인 미스터리 작품.

<<스트레이트 체이서>> 니시자와 야스히코 (국내 미출간)

린지는 바에서 취했을 때 3중 교환 살인 약속을 해 버렸다. 다음날 아침, 자신이 지목했던 살해 대상이었던 상사의 집에서 타살 사체가 밀실 상황에서 발견되는데..... 저자가 SF 설정의 본격 미스터리 작품들을 발표하던 시기의 작품. 수수께끼 아이템이 등장해서 이번에도 SF 설정이구나 싶은 점도 흥미로운 점. 꼭 주인공에 감정이입해서 읽어보시길.

<<낯선 승객>>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교환 살인이 주제인 작품들 중 선구자적인 존재인 이 작품은 히치콕 감독에 의한 영화도 유명하다. 우연히 같은 전철에서 만난 가이와 브루노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브루노가 가이에게 교환 살인을 제안한다는 내용으로 편집광적인 스토커의 무서움을 맛볼 수 있는 심리 서스펜스물.

정보는 모두 당신 손 안에! <<독자에의 도전장>>을 즐길 수 있는 미스터리 작품들

2023/01/08

정보는 모두 당신 손 안에! "독자에의 도전장"을 즐길 수 있는 미스터리 작품들

* 언제나처럼 honto의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국내 소개된 작품은 4편입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단편집도 재미있어 보이는데 꼭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독자에의 도전장"은 엘러리 퀸이 처음 시작했다고 알려진 미스터리 소설의 한 요소입니다. 사건 해결 부분 앞에 "지금까지의 이야기 중 범인을 지적하기 위한 증거는 모두 갖춰졌습니다. 범인을 맞춰보세요."라고 제시하는 형식이지요. 그만큼 작가가 공정하게 이야기를 썼다는 뜻이기도 하고,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다음 작품들과 함께 범인과 동기를 논리적으로 추리해 보시지요.

"돈돈 다리 떨어졌다" - 아야츠지 유키토 (국내 미출간)

대학교 추리 소설 연구회 활동 당시부터 범인 맞추기 중심의 작품을 써왔던 작가답게, 본 작품은 독자에게 전달된 단서를 바탕으로 수수께끼를 푸는 구성을 갖춘 단편집입니다. 수록작 5편 중 4편에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되어 있으며, 동서고금의 유명 미스터리 작가들이 등장하는 등 독특하고 의욕적인 작품입니다.

"월광 게임" - 아리스가와 아리스

부제가 "Y의 게임"이며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아리스가와 아리스'인 점 등에서 엘러리 퀸을 의식하고 쓴 데뷔작입니다. 클로즈드 서클, 연쇄 살인 사건, 다잉 메시지 Y, 그리고 "독자에의 도전장"까지 본격 미스터리의 전형적 요소들을 모두 갖춘 논리 중심의 정통 추리물입니다.

"점성술 살인사건" - 시마다 소지

작가의 데뷔작이자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여섯 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그 사체 일부를 절단한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40년간 미제로 남아 있다가, 미타라이 기요시에게 관련자의 수기가 도착하며 다시 사건이 펼쳐집니다. 특히 트릭의 신선함이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은 작품으로, 일본 본격 미스터리의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평가받습니다.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 - 츠지무라 미즈키

학교에 갇힌 고등학생들이 마주하는 '죽은 동급생의 이름을 기억해낼 수 없다'는 기묘한 상황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미스터리입니다. SF 판타지이자 청춘소설의 성격도 함께 지닌 이 작품은 제31회 메피스토상 수상작이자 작가의 데뷔작입니다. 작품 속에 작가 본인의 이름과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되어 있어 본격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애정이 잘 드러납니다.

"체육관의 살인" - 아오사키 유고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가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관 시리즈"의 제1작으로 제22회 아유카와 데츠야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밀실 상태의 체육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다루며, 탐정은 교내에 거주하는 애니메이션 덕후 학생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가졌습니다. 특히 해결 부분에서의 논리적인 전개는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면모를 보여줍니다.

도대체 무엇이 동기? 와이더닛을 만끽할 수 있는 걸작 미스터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