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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0

권외편집자 - 츠즈키 쿄이치 / 김혜원 : 별점 3점

권외편집자 - 6점
츠즈키 쿄이치 지음, 김혜원 옮김/컴인

일본의 편집자이자 작가, 사진가인 저자가 자신이 출판계에서 쌓아온 경력을 털어놓는 에세이집.
지금도 발간되고 있는, 저도 아주 좋아하는 잡지인 'popeye'와 'Brutus'에서 시작하여, 독립후 사진까지 직접 맡아 취재하여 발표한 Tokyo Style, 일본의 기묘한 장소들과 같은 기사들과 기사를 토대로 발표한 책들, 지금은 e-mail magazine 작업을 진행한다는 저자의 출판 여정과 함께, 이러한 취재와 창작 과정에서 느꼈던 여러가지 감정들과 단상들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편집자'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기자, 작가, 사진가, 창작자로서의 작업이 훨씬 많은건 의외였습니다. 저자가 원하는 책을 만들지 않고는 못배기는 사람이라서 그렇기도 한데, 여튼 익히 알고있고 친숙한 편집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파란만장한 이야기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직접 기획해서 만든 기발한 책들 소개도 인상적이었어고요. 아무도 안 만들 것 같아서 만들었다는데, 일본, 미국의 기묘하고 재미있는 장소라던가 러브 호텔 사진집 등 소개만 보아도 재미있는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 중 가장 흥미로왔던 책은 성인 잡지 독자 투고 일러스트에 주목하여 출간한 기획이었습니다. '핀카라타이소 (ぴんから体操)'라는 작가는 그 중에서도 특출났던 덕분에, 출간 후에 유명해져서 전시회까지 정기적으로 열린다고해서 어떤 작품인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자마자 변태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승자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는 시선, 판매량과 관계없이 원하는 책을 내고야 마는 열정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책을 만들어도 먹고 살 수 있는 문화적 저변도 부럽고요. 물론 저자도 인세로 먹고 살지 못한다고 언급은 하지만, 이런 책을 여러 권 출간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요. (SF 전문 출판사 '불새'의 안타까운 최후가 겹쳐집니다)

백전노장다운 조언, 경험담도 새겨들을만한게 많습니다. 몇가지 소개해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내 돈 주고 구입하기'
무작정 인터넷으로 검색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머리와 주머니의 돈으로 판단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미술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이 직접 문을 두드리고 열어봐야 경험이 쌓인다. 그렇게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머지않아 주변 의견에 흔들리지 않게 되고 좋다고 느낀 자신의 감각을 확신할 수 있는 날이 온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게 자신을 다져가는 과정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 "현시연"의 마다라메의 말이 떠오릅니다.

속독이나 다독은 밥을 급하게 먹거나 과식하는 것과 같다. 편집자를 하고 싶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100번 읽은 책을 몇 권이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 추리소설 1,000권을 넘게 읽었다고 우쭐했던 저를 반성하게 만드는 명언입니다. 추리 소설 중에 100번 읽을만한 책이 무엇일지 한 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젊었을 때는 록만 들을거야라고 고집부리다가 어른이라면 재즈를 들어야지 하다가 마지막에는 고급 노래방에서 언니들과 흘러간 유행가를 부르는 승자 그룹보다, 죽을 때까지 핑크 플로이드를 들으며 만족하는 패자 그룹이 훨씬 존경스러워졌다.
: 성인잡지 독자 투고 일러스트를 모아 책으로 만드는 사람다운 견해였어요. '병신같지만 멋있어!' 느낌의 말이기도 하지요. 패자들을 위한 멋진 헌사라 생각됩니다.

프로란 대신 해주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예를 들면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걸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매일 그런 생각만 끝없이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을 대신해 철학자는 평생 동안 고민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책으로 낸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가를 지불하고 책을 읽는다. 이처럼 누군가를 대신해서 깊이 생각하는 사람, 먼 곳까지 가보는 사람, 맛을 연구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프로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일을 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
: 이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 무릎을 치게 만들었습니다. 직장인이 그 업무의 '프로'라서 월급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기도 하니까요.

이외에 실제 책을 여러 권 출간한 '프로'다운 말도 많습니다. "누군가를 인터뷰할 때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대략적인 스케치를 하는 정도가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준비는 결과를 가정하고 단정짓는 과정이 아니라 기초를 닦아두는 과정이다." 처럼요. 미술 대학을 부정하는 말도 기억에 남네요. 저 역시 아득히 오래 전이지만 미대 졸업생인데, 솔직히 대학에서 예술이나 디자인에 대해서 무언가 배웠다는 실감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냥 그런 작업을 하는 공간과 같은 분야에 관심있는 친구들을 모아놓은 오프라인 모임에 가깝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전부가 다 볼만하고 좋은건 아닙니다. 꼰대스러움이 글 곳곳에 묻어나는건 별로였어요. 대표적인게 '기획과 여정도 처음부터 모든걸 꼼꼼하게 계획하지 않는게 좋다. 예기치 못한 만남은 예상을 뛰어넘은 장소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모든걸 꼼꼼하게 계획해야 하는 취재, 업무가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는 MBTI가 J인 사람은 견디지 못할 상황이기도 하고요. 업무의 특성과 사람마다 개성이 모두 다른데, 자신에게 잘 맞았다고 남에게도 단정지어 이야기하는건 꼰대지요.
"그들의 삶은 세상에서는 패배자라 하고 부모에게는 근심거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건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았다."와 같은 글도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없다는 현실을 알려주는게 저널리스트의 역할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신선했던 취재들도 거듭되다보니 "수상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와 비슷해져서 식상해져 버리고 맙니다. 러브돌을 만드는 오리엔트 공업 이야기는 그냥 같은 취재더라고요.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아직도 현역으로 인터넷 메일 형태의 매거진을 정기 간행하는 등 꺾이지 않는 저자의 열정에는 박수를 보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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