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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0

열린 어둠 - 렌조 미키히코 / 양윤옥 : 별점 2.5점

열린 어둠 - 6점
렌조 미키히코 저자, 양윤옥 역자/모모

"회귀천 정사"로 유명한 렌조 미키히코의 단편집. 원제는 "夜よ鼠たちのために (밤이여, 쥐들을 위해)".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983년에 출간된 나름 고전(?)으로 일본에서도 꽤 오래 절판 상태였었는데,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2014년 판에서 '복각(재출간) 희망! 환상의 명작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한 덕분에 2014년에 복간된 이력이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아래와 같이 극찬하는 인터뷰와 글을 남겼을 정도로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 미스터리의 재미 중 가장 큰 것은 무엇인가 하면, 역시 마지막의 반전, 결말의 의외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편에서 그걸 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단편집은 모든 작품이 놀라운 반전 구조를 그립니다. 생각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전개를 실현한 작품들입니다. 마치 네거티브 필름이 포지티브로 바뀌는 것처럼, 결말에서 흑백이 뒤바뀝니다. 모든 작품에서 완전히 속아버릴 수 밖에 없어요. 전후 미스터리 단편집 중에서, 저는 이 책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표제작입니다. 미스터리라는 성격상, 스토리를 말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되므로 삼가겠습니다만, 제가 만약 단편을 쓴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an・an」 1990년 11월 23일호, 아야츠지 유키토 「나의, 한 권. 멋진 반전의 구조. 전후 최고의 미스터리 단편집」에서)
  • 아야츠지: 렌조 작품은, 일반적으로는 나오키상 수상작인 연애소설 『연문』이 유명합니다만, 충격적이었던 것은 역시 먼저, 『회귀천 정사』, 『은밀한 상복』 등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지금은 고분사 문고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밤이여, 쥐들을 위해』입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실업지일본사에서 신서판으로 나왔고, 신초문고와 하루키 문고로 차례로 옮겨졌는데, 현재는 절판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서술 트릭 계열 단편집의 최고봉인데......아깝네요. (「작가의 독서도 제150회: 아야츠지 유키토」에서)

읽어보니 이 정도 극찬을 받을만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호평은 이해가 됩니다. 서정성과 트릭이 잘 결합되어 있던 작가 최전성기 시절("회귀천 정사" 시절)답게, 추리적으로 굉장히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트릭이 사용된 정통 본격 추리물에서 유괴극, 복수극, 서술 트릭 반전극, 느와르 등 수록작의 장르도 다양합니다. 과하게 느껴졌던 작가의 묘사도 다른 후기작에 비하면 절제되어 있어서 부담이 덜하고요.
모든 수록작이 다 괜찮은건 아니지만, 더운 여름, 한 번 읽어볼만하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가득하다는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개의 얼굴"
화가 마사키 유스케는 아내 게이코가 신주쿠 호텔에서 살해당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택 침실에서 유스케가 살해해 뒷마당에 파묻었다. 호텔 사건의 여자가 게이코라면, 유스케가 집에서 죽인 여자는 누구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유스케는 죽인 여자의 얼굴을 그날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유스케는 호텔 사건에는 알리바이가 있었기 때문에, 호텔에서 발견된 여자를 게이코로 만들어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진상은 유스케의 범행을 목격한 동생 신지가 자신을 협박하던 꽃뱀 여자를 함께 처치해 버렸던 겁니다. 마침 몸매가 비슷해서 속일 수 있었지요. 이 때 집 안에 전화가 두 대 있는 것을 이용해서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입니다. 전화가 걸려와 안부를 물으면 당연히 외부에서 전화를 했을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같은 집 안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유스케가 살해한 아내의 사체가 이동한 이유도 잘 설명되고 있으며, 사건에 대한 유스케의 심리묘사도 독자의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입니다. 서스펜스가 제법이었어요.
하지만 단편이라서 설명이 부족하며, 작위적으로 전개한 부분은 눈에 거슬립니다. 우선 신지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건 너무 뻔했습니다. 신지를 협박하던 꽃뱀 여자가 유스케 집까지 찾아와 지문을 남긴건 억지스러웠고요, 마지막 신지의 장난도 이유를 알기 어럽습니다.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7인 1역"과 유사하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과거에서 온 목소리"
'나'는 금수저 출신으로 형사일을 견디다 못해 2년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뒤, 그만 둔 이유에 대해 강 선배에게 편지를 썼다.
1년 전, 전일항공 부사장 야마후지 다케히코의 외아들 가즈히코 유괴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부인을 전화기에 붙잡아 놓은 상태에서, 담을 뛰어넘어 아이를 유괴했다. 경찰은 몸값을 확보하고 도주하던 범인을 미행하다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몸값을 받은 범인은 아이를 무사히 풀어주었고, 이후 공개 수사로 전환한 경찰에게 정체가 드러난 범인 오카다는 자동차 사고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유괴범에게 동정심을 느낀 '나'는 당시 일부러 범인이 도주하도록 수사를 방해했다. 유괴범 중 한 명이 강 선배라는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건 범인이 '내일'이 금요일인지 토요일인지 정하지 못했던 상황을 통해, 범인이 두 명이며 둘 사이 커뮤니케이션이 원할하지 않다는걸 추리해 내는건 아주 좋았습니다. 두 명 중 한 명이 아이를 유괴당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부잣집 아들을 유괴해 몸값을 받아내려 했다는 발상도 재미있었어요. 실행범은 자기 아이를 유괴한 범인의 요구사항을 자기가 유괴한 사건 피해자에게 그대로 전달만하면 된다는 아이디어인데,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강 선배가 오카다를 살해했을거라는 결말도 합리적입니다. 오카다가 체포되면 진상이 드러날 수 있으니, 경찰이 체포하기 전 정보를 흘려 유인한 뒤 살해했다는건 말이 되니까요.

그러나 유괴가 이렇게 겹쳐서 강 선배가 피해자이자 범인이 된다는건 다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나'가 강 선배의 눈에서 이십 년 전 범인 눈빛을 떠올린 덕에 진상을 깨달았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나'가 집 안에 있는 신이치가 사실은 유괴당한 가즈히코라는걸 눈치챈건 앞선 복선으로 설명되지만, 독자는 눈치채기 힘들다는 점에서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유괴 피해자가 몸값 마련을 위해 유괴범이 된다는 아이디어는 아주 좋았던만큼, 이를 확장한 장편으로 묵직하게 썼다면 "킹의 몸값"과는 또 다른 딜레마를 안겨다주는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것 같은데 아쉽네요. 그래도 아이디어만으로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

"화석의 열쇠"
하반신 마비 소녀 지즈가 목이 졸려 죽을 뻔 했다. 피해자 집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창문은 모두 안에서 잠겨 있었고, 출입구는 현관문밖에 없는데 열쇠는 관리인 사와가 보관하고 있었다.

지즈가 엄마를 집에 들이기 위해 자물쇠 바꾸는 청년을 속여 헌 자물쇠를 달게 했고, 엄마와 아빠 모두 지즈가 부담되어 살해하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한 정보 제공은 공정합니다. 지즈가 자물쇠 바꾸는 청년에게 상황에 맞지 않는 초콜릿 부탁을 한 것, 관리인 사와가 엄청나게 청소를 열심히 한다는 등 상황에 대한 공유는 확실하니까요. '열쇠 화석'이라는 말도 단서로서는 좋았습니다. 사와가 이 모든걸 깨닫는 전개는 일상계스러워서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 둘이 동시에 딸을 살해할 생각을 한다는건 와 닿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면 자기가 빠져나갈 생각을 할까요? 신파적인 결말도 별로였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기묘한 의뢰"
흥신소에서 일하는 나에게 쓰치야 마사하루라는 의뢰인이 찾아왔다. 아내 동향 조사 의뢰를 위해서였다. 아내 사야코는 하릴없이 이곳 저곳에서 시간만 보냈다. 알고보니 그녀는 나의 미행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고, 나에게 오히려 남편 쓰치야의 행적 조사를 부탁했다. 알고보니 나를 이용해서 몰래 불륜 행각을 저지르기 위함이었다. 이 역시 쓰치야에게 들켜버렸고, 쓰치야는 자기 행적 조사를 거짓으로 전달하라고 했다. 전달하기 위한 쓰치야의 행적은 애인 유리의 맨션 주소와 연락처로 받으려 했는데, 그 뒤 유리가 살해되었다...

쓰치야는 유리의 다른 애인으로, '나'와 유리의 관계를 알고 유리를 살해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조사를 맡긴건 유리와 나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내기 위해서였고요.

나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그리고 냉소적인 심리묘사가 대부분으로 추리적으로 딱히 눈에 뜨이는 부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묘사로 '나'의 별로인 모습만 드러나 작품에 몰입하기 힘들다는게 문제입니다. 쓰치야 부부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모습은 무능력했고, 유리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자신이 쓰치야에게 농락당한 것에 불과하다는걸 알아 버렸지만, 그냥 그대로 끝나버리는 결말은 이게 뭔가 싶더군요.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어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이여, 쥐들을 위해"
어린 시절 불우했던 나는 교정을 받아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를 잃은 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복수를 결심했다. 
병원 원장 요코즈미 다다오는 '나'의 협박 전화를 받고 서둘러 집을 나선 뒤 살해당했다. 경찰은 백만엔이라는 돈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나'의 원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추정했다. 이후 원장 사위이자 내과 부장 이시즈의 사체도 발견되었다.

'나'인 쓰무라의 아내는 불치병 뇌종양이었고, 병원의 과실로 죽은게 아닙니다. 그런데 왜 백만엔이라는 돈을 건네려고 했을까요? 이 수수께끼는 흥미롭습니다. 알고보니 이하라의 아내 후미요에 대한 오진을 숨기려고 원장과 내과 부장이 그녀가 백혈병에 걸리게 만들었다는게 진상입니다. 생각도 하지 못했네요. 쓰무라와 이하라의 정체가 독자가 알고 있던 것과 정 반대라는게 드러나는 반전도 좋았습니다. 잘 짜여진 서술 트릭물로, 독자를 완벽하게 속이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단 둘의 흉터는 너무 노골적으로 속이겠다!는 의도가 보여 좀 별로였고, 어린 시절 쥐를 죽였던 원한으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하라는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 밖에 없었으니 억지스럽더라도 죽일 수 밖에 없는 동기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고충은 이해가 되지만, 억지는 억지에요. 그래도 심리 묘사가 탁월한 덕분에 생각보다는 잘 설명되는 편이라 다행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중생활"
마키코는 열 여섯살 많은 슈헤이에게 젊음을 바쳤지만, 자신을 버리려하는 슈헤이에게 증오를 느꼈다.

정부인줄 알았던 마키코가 진짜 아내이고, 반대로 나이많은 시즈코가 정부이자 불륜녀라는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이 반전을 결말 부분까지 잘 숨기면서 전개한다는 점에서는 서술 트릭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마키코가 남편 슈헤이와 불륜녀 시즈코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살해당한 것처럼 자살한다는 반전, 그리고 이를 위해 데쓰오와 시즈코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방법도 잘 짜여져 있어서 범죄물로도 우수한 수준이고요.

그런데 마키코가 정부 데쓰오를 범행에 끌어들인건 억지스럽습니다. 불륜을 저지르다가 살해당한 모양새이니, 마지막 순간치고는 영 폼이 나지 않으니까요. 데쓰오 없이도 현장 상황 - 슈헤이가 받아온 수면제가 들어있는, 슈헤이가 즐겨 마시던 와인 - 과 스토브 지문으로 슈헤이에게 누명을 씌우는건 가능했을것 같거든요. 시즈코마저 옭아매기 위해 데쓰오를 이용했다고보면 말은 돼지만, 이 역시 나이든 시즈코와 데쓰오가 불륜 관계라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작위적입니다. 조건이 갖춰진 뒤에야 실행 가능한 계획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었다면 좀 더 설득력있는 인간 관계를 쌓아올리는게 가능했다는 측면에서, 조금 긴 호흡으로 풀어나가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대역"
인기 배우 하세쿠라 슌은 아내 료코와의 이혼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자신과 꼭 닮은 남자 다카쓰 신야를 찾아냈다. 그러나 료코가 슌의 불륜을 알고 있었으며, 이혼할 생각도 없다는걸 알게된 뒤 료코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다카쓰 신야를 이용한 알리바이를 만들어서였다. 오사카에서 다카쓰를 자신인 척 연기시킨 뒤, 자신은 변장하고 도쿄로 가서 살해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료코는 없었고, 오사카로 돌아간 뒤 자신의 방에 죽어있는 기누에를 발견했다. 이 모든건 료코와 다카쓰의 음모였었다.


하세쿠라 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완전 범죄물로는 볼만합니다.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 하세큐라 슌의 대타가 다카쓰 신야가 아니라, 료코와 기누에 입장에서는 그 반대였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이야기의 현실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애초에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 주위에 같은 여자들이 엮이게 된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는 했는데, 말이 되는 이야기로 만드는 데에는 실패한 셈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베이 시티에서 죽다"
동거녀와 믿었던 아우에게 배신당한 조직원이 출소 후, 둘이 함께 도망친 항구 도시로 찾아가 모두 죽여버린다는 느와르.. 묘사도 멋있고 배신의 진상 - 없던 죄를 뒤집어 쓴게 아니라 원래 내가 지은 죄였다는 - 도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딱히 흥미롭지는 않았습니다. 추리적인 맛은 거의 없고, 내용도 신선함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그냥 서정적인 '사나이' 이야기를 한 편 쓰고 싶어 쓴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열린 어둠"
불량 학생들만 다니는 사립 세이에이 고등학교 음악교사인 미즈키 마사는 '마더'라는 별명으로 학생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어느날 퇴학당한 폭주족 블랙호크스 멤버 중 한 명인 노리코가 긴급한 도움 요청을 해 왔다. 리더 다카기가 살해당했다고 했다. 노리코와 함께 현장에 온 마사는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노리코가 유력한 용의자라는걸 알고 한 시간만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카기의 죽음이 학교 체육 교사 아카자와 다케시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아카자와는 동성애자였다.

불량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학생과 얼마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열혈 신입 교사가 해결한다는 내용으로 7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청춘 미스터리'의 영향이 가득 느껴집니다. 동성애로 인한 삼각관계가 원인이라는 점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신선한 편이고요. 요새 이런 설정이 유행이라는데, 나도 한 번 써볼까!라는 생각으로 쓴 듯한데 의외로 괜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카기가 폐소 공포증이라는게 핵심 단서인데 - 아카자와 선생의 차는 비가 오는데도 창문이 열려있었다 -, 이는 여러가지 단서로 독자에게도 공유됩니다. 노리코가 아침에 다카기의 방에서 쫓겨난 건 창문을 닫으려고 해서, 다카기가 초고층 맨션에서 뛰쳐나온건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어서, 다카기가 폭주족이 된 건 차를 타기 싫어서였다는 식으로요. 
미즈키 마사가 학생들 앞에서 추리쇼를 펼쳐 진상을 밝히는 전개도 정통 본격 추리물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다카기가 스즈타에게 아카자와 살인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고 현장을 조작했기에, 스즈타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려고 다카기를 살해하고 노리코에게 혐의를 씌웠다는 동기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후더닛 물로는 괜찮았지만, 와이더닛 측면에서는 좋다고 하기 어렵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24/04/27

7인 1역 - 렌조 미키히코 / 양윤옥 : 별점 2점

7인 1역 - 4점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모모

<<아래 리뷰에는 트릭과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명 모델 미오리 레이코가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청산가리 중독이었다. 경찰은 그녀에게 농락당해 모든걸 잃은 의사 사사하라가 범인이라 생각했다. 사건 현장, 그리고 청산가리 봉투에 그의 지문이 있었고 그가 사망 추정일에 레이코를 방문한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드 섬유회사의 사장 사와모리 에이지로가 레이코를 죽였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서 사사하라는 풀려났다.
그런데 사와모리 말고도 레이코가 평상시 원수라면서 이를 갈고 협박해오던 7명 모두가 똑같은 방법으로 레이코를 살해했다는게 밝혀지는데...
.

걸작 "회귀천 정사"로 유명한 렌조 미키히코의 장편. 1984년 첫 출간된 작품이라고 합니다.
렌조 미키히코는 정통 본격물보다는 "회귀천 정사"같은 서정적인 문체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렌조 미키히코하면 떠오르는 작품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과 전개를 보여줍니다. 미오리 레이코 시점에서 상대방이 자신을 살해하도록 유도하는 범죄물이자 도서 추리물로 시작해서, 7명 모두가 똑같은 방법으로 레이코를 살해했다는게 드러나는 시점부터는 하우더닛 본격 추리물이 되는 작품이거든요.
 
가장 인상적인건 트릭입니다. 트릭을 잘 사용하는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꽤 현실적인 트릭을 멋드러지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 트릭을 조금 설명해 드리자면, 레이코의 과거 직장 동료 이시가미 요시코는 레이코가 성형 수술을 했다는걸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돈을 뜯어내고 있었습니다. 레이코는 요시코를 꼬드겨 자기처럼 성형 수술을 시켜준 뒤, 그녀를 독살했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자택 침대 위에 놓아 두고, 7명의 원수들을 한 명씩 불러 거실에서 한바탕 연기 - 나에게 농락당한 의사 사사하라가 나를 죽이려고 독약을 가져왔지만 실패했다. 독약은 저 술잔에 들어있다라며 술잔을 바꿔치도록 유도 - 를 펼친 뒤, 술을 마신척 하고 침실로 뛰어들어가 곧바로 몸을 숨겼습니다. 뒤쫓아 침실로 온 손님들은 레이코와 똑같은 시체를 발견하고는, 자기가 술잔을 바꿔치기해서 레이코가 죽었다고 여기고 도망쳤고요. 이렇게 해서 7명이 한 명을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하는 범죄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 트릭을 성공시키려면 마지막에 레이코가 진짜로 독을 먹고 죽은 뒤, 그 시체를 숨길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게 사사하라였다는 진상도 괜찮았습니다. 청산가리를 준비할 수도 있었고, 세간에는 레이코 때문에 신세를 제대로 망친걸로 알려져있으니 독을 레이코 집에 가져온 동기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어서 사람들을 속이기에는 더할나위 없었던 덕분이지요.

단서도 적절히 제공됩니다. 사사하라가 경찰에 체포된 후, 레이코의 집을 방문할 날짜를 대충 얼버무리는게 대표적입니다. 무려 7명을 대상으로 벌인 계획이라 이틀에 걸쳐 진행했던 탓에, 날짜를 특정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날짜를 대충 둘러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5일의 알리바이만큼은 억지로라도 만들어서 확실하게 제공하고 있는걸 통해, 7명 모두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는걸 드러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레이코의 입으로 완벽한 알리바이 계획이 설명되었기에, 이를 이용하여 15일 이후 범행이 일어났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본인들은 15일의 알리바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금붕어 1마리가 죽은 수조를 보고 수사를 펼쳐서 원래는 7마리를 샀다는걸 알아내는 등의 경찰 수사 과정도 합리적으로 그려집니다. 결국 경찰은 이러한 꼼꼼한 수사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사건 진상에 도달하고요. 이렇게 경찰이 나름 활약을 펼친다는건 여러모로 눈여겨볼만 했습니다. 특히 레이코, 하마노, 사사하라의 시점으로 작품이 전개되고 있는데 경찰까지 신경써서 분량을 안배해 준 정성(?)이 신기하더라고요. 사실 경찰은 헛다리를 짚는 수준으로 그쳐도 내용 전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거든요. 오히려 사와모리의 완벽한 자백 유서를 확인한 뒤에 개인적으로 수사를 진행한다는게 더 설득력이 없지요. 이건 작가가 '일본 경찰은 우수하다!'라는걸 어떻게든 드러내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캐릭터와 상황, 심리를 묘사하는 방법과 문체가 굉장히 옛스러워서 확실히 40여년 전 작품이라는 티가 물씬 납니다. 게다가 핵심 인물인 미오리 레이코에 대한 캐릭터 설정이 영 별로입니다. 그녀가 7명에게 원한을 품은 이유도 도무지 알 수가 없고요. 7명 모두 그녀에게 아픔을 주었을 수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 정당한 거래 관계였습니다. 오히려 그녀가 얻은게 훨씬 더 많아 보여요. 모두가 선망하는 대 스타가 되어 큰 돈을 만지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멋대로 그들이 자기 인생을 망쳤다며 건수를 잡아 협박한다? 솔직히 죽어도 싼 여자라 생각됩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혼자만의 피해의식에 가까운 복수에 동참해서 스스로 그들을 모두 죽일 결심을 하는 사사하라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에게 아무리 푹 빠져다 한들, 이건 상식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보다 현대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같은 작가가 썼더라면 아마 걸작으로 널리 알려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결과물은 조금 부족합니다. 최소한 '동기'만큼이라도 설득력있게 만들어 주었어야 했습니다.

2024/02/25

사라진 내일 - 리 차일드 / 박슬라 : 별점 2점

사라진 내일 - 4점
리 차일드 지음, 박슬라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펜타곤에서 일한다는 수잔이 뉴욕 지하철에서 자살했다. 잭 리처는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었는데, 뉴욕 경찰을 비롯한 온갖 정부 관계자들, 그리고 미지의 인물들이 잭 리처를 찾아와 수잔에게 무언가 받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다. 잭 리처는 수잔은 협박을 받아 자살했다고 추리하고, 그녀가 받은 협박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존 샌섬 하원의원이 80년대 초반, 델타포스 시절 아프가니스탄에서 빈 라덴과 손을 잡았던 과거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잭 리처는 그 때 찍었던 사진에 문제가 있었을거라 추리했다. 사진 원본이 파기되었기 때문이었다.......

"1030"에서 이어지는 잭 리처 시리즈 13번째 작품. 원제는 "Gone Tomorrow" 입니다. "1030"에서 딕슨의 초대(?)때문은 아니겠지만, 뉴욕을 방문한 잭 리처가 잠입한 알 카에다 조직원들을 박살내는 이야기지요.

잭 리처가 수잔을 폭탄 테러범으로 착각하고 접근하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수잔의 자살 이유가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들과 연결되는 전개는 흥미롭습니다. 자살자 수잔 마크의 유품에 있어야할게 없다면,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던 잭 리처가 그걸 갖고 있을거다!라고 생각해서 관계자들이 잭 리처에게 몰려든다는 것도 설득력있고요.
수잔 마크가 빼돌릴려고 했던 정보가 오사마 빈 라덴의 치부를 건드리는 사진이었다는 일종의 반전도 그럴듯했습니다. 상원의원, 그리고 추후 대권까지 노리는 샘손 하원의원의 정치 생명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정보로 여겨졌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오사마 빈 라덴에게 위협적인 정보여서 알 카에다가 이를 철저히 없애려 한다는건 확실한 반전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잭 리처 시리즈답게 액션도 화끈합니다. 특이한건 상세한 무장 묘사입니다. 기관단총이 주 무장이라는건 제가 읽어왔던 그간의 잭 리처 시리즈에서는 보기 힘든 설정이었지요. 헤클러 앤드 코흐 MP5SD라는 총인데 좋은 총이라는 찬사와 함께 실전 활약도 멋지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어떤 총인지 궁금해서 공식 사이트에서 모델을 한 번 찾아보았는데, 리처의 묘사 그대로더군요.
"개머리도 개머리판도 없다. 단순한 손잡이와 방아쇠, 서른 발들이 휘어진 탄창을 곶는 공간, 그리고 이중소음장치 덕분에 한층 두꺼워진 15센티미터 길이의 총신 뿐이다."

'나이프'가 결정적 활약을 한다는 것도 그간 잭 리처 시리즈에서는 보지 못했었던 설정이었습니다. 검은색 기계식 손잡이로 12cm 길이의 양날 칼날이 자동으로 펼쳐지는 '벤치메이드 3300' 모델인데, 찾아보니 역시나 멋지더군요. 어머니 호스를 끝장낼 때의 작중 활약도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이런 점들은 확실히 1인 대 테러 작전을 그리고 있는 작품다왔습니다. 잭 리처의 엄청난 폭력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아프가니스탄 테러범의 잔혹성에 대한 묘사도 과하기는 했지만 괜찮았고요.

테러리스트 일당을 찾기 위해 포시즌 호텔과 그 주변 - 3번로, 59번가...- 을 샅샅이 훝는 등의 상세한 뉴욕 묘사도 돋보입니다. 뉴욕을 가게 된다면 포시즌 호텔은 한 번 둘러보고 싶어질 정도로요. 지도를 보니 위치가 아주 좋네요. 최저가 150만원에 달하는 숙박비가 문제겠지만....
수잔이 버린 USB 메모리가 어디 있을지?에 대한 추리도 괜찮았습니다. 휴대전화를 갖고 있을 사람 소지품에 휴대전화가 없다면, 그건 어딘가에 버렸고 그렇다면 그걸 버릴 때 USB도 같이 버렸을 거라는건 지극히 합리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설정에 너무나 명확한 약점이 있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우선, 오사마 빈 라덴의 치부를 드러내는 사진은 수잔 마크가 펜타곤 서버에서 파기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건 원본을 복사한 USB 뿐이에요. 그렇다면 모든게 끝났어야 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 사진을 영구히 없애고 싶어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쓸데없이 복사본을 만들고, 또 그걸 확보하려고 이 고생을 하는걸까요? 지시가 원본의 파기 뿐이었다면, 수잔이 복사했다는걸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지요. 오사마 빈 라덴의 라이벌 조직이 수잔 마크를 협박했어야 말이 됩니다. 
21세기에 사진 한 장이 그렇게 큰 위협이 된다는 것도 와 닿지 않아요. 합성이나 조작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알 카에다가 펜타곤 시스템을 해킹할 수 있었던 시스템 엔지니어 수잔을 딱 맞게 포착해서 협박했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녀의 능력과 기술, 약점을 알 카에다는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더해 교통 체증으로 늦은 수잔에게 그녀의 아들 피터를 산체로 해부하는(?) 동영상을 보냈다는게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피터에게 고문을 가할 수는 있지만 그를 죽이는건 말이 안됩니다. 수잔 마크로부터 USB를 넘겨받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잭 리처는 그녀들이 미쳐있었다, 그리고 수잔에게 미행을 붙여 놓았다고 설명하지만, 이 정도로 납득하기는 어려웠습니다. 20명이 넘는 조직원을 뉴욕에 잠입시켜가며 수행한 작전을 이렇게 감정적으로 진행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결말부에서 무려 10명이 넘는 테러리스트들이 잭 리처 한 명에게 간단하게 쓸려나가는 것도 허무했고, 호스 모녀가 잭 리처와 일기토를 벌이는 설정은 그야말로 황당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편 전부를 쓰러트린 키 190cm가 넘는 거인 상대로 총이 있는데 칼만으로 싸운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호스 모녀는 리처가 등에 벤치메이드 3300을 테이프로 붙여놓은걸 놓쳤다가 낭패에 빠졌지만,설령 리처가 맨손이었다 하더라도 해서는 안될 짓이었어요. 실제로 리처는 마지막에는 칼이 아니라 의자로 상대방의 칼을 떨어트리게 만들었지요.
잭 리처가 테러리스트 일당을 처단하기 위해 출동할 때, 이 모든걸 알고 있던 경찰(테레사 리)과 샘손 의원 측 사람들이 총기 제공 외 다른 협조를 하지 않는 것(테레사 리와 정사를 나누는 것 외에는) 역시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 포시즌 호텔과 그 주변 등 묘사가 상세한데 이왕이면 지도도 함께 수록해 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누가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싶어 잠깐 찾아봤는데 없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도입부, 중반부까지는 무척 흥미로왔는데 후반부는 지나치게 흥행(?)을 의식한듯하여 아쉽습니다.

2022/12/10

도대체 무엇이 동기? 와이더닛을 만끽할 수 있는 걸작 미스터리들

* 언제나처럼 honto의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국내 소개된 작품은 3편인데, 다 좋은 작품들입니다. '와이더닛'에 촛점이 맞춰졌다기 보다는, 서정적이면서도 깊이있는 문학적인 묘사에 촛점이 맞춰진게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요.


'와이더닛', 즉 'Why done it'은 미스터리의 세계에서는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밝히는게 핵심인 미스터리 작품을 의미합니다. 불가능 범죄 상황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서, 미스터리 작품의 장점을 모아 놓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와이더닛 걸작을 소개해 드립니다.

"토오미 사건, 사토 마코토는 왜 목을 절단했을까?" 요미사카 유지 : 국내 미출간
80개가 넘는 살인을 저지른 연쇄 살인범 킬러 사토 마코토의 이야기를 작가 요미사카 유지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쓴 미스터리. 다른 범행은 모두 완벽하게 저질렀는데 토우미 사건에서만 예외적으로 목을 자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심플한 와이더닛이면서도 저자 특유의 비틀림이 더해진 작품.

"동기" 요코야마 히데오
"64" 등 장편 소설이 영화화되고 있는 요코야마 히데오는 단편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이 단편집에는 4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각자만의 '왜?"를 능숙한 인물과 심리 묘사로 그려내고 있다. 저자의 세계관이 가득 담긴 주옥과 같은 4편의 단편들을 즐겨 보시길.

"칼과 우산" 이부키 아몬 : 국내 미출간
에도 막부 말기에서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격동의 교토를 무대로, 실존인물이었던 에토 신페이와 가공의 무사를 탐정역으로 하여 전개하는 연작 역사 미스터리. 사형 집행 당일 왜 죄수가 살해되었는지를 쫓는 "감옥사의 살인", 도서 추리물이자 우수한 와이더닛물인 "벛꽃" 등의 걸작이 수록되어 있다. 시대 배경을 살린 두 주인공의 관계 변화에도 주목하면 좋을 단편집.

"외침과 기도" 시자키 유우
주인공이 방문한 이국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과 수수께끼를 밝혀나가는 5편의 단편이 이어지는 연작집. 걸작인 "사막을 달리는 뱃길"을 시작으로, 이국의 풍경과 문화를 서정적이면서도 환상적인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수록작 모두 동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매력적인 수수께끼로 가득 찬 좋은 와이더닛물이기도 하다.

"회귀천 정사" 렌조 미키히코
다이쇼에서 쇼와 시대를 무대로, '꽃'을 모티브로 한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작 모두 선명한 와이더닛물로 렌죠 미키히코의 요염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에 대한 평가도 높은, 미스터리의 틀에만 담기에는 아까운 불후의 명작.

2022/04/30

조선의 뒷골목 풍경 - 강명관 : 별점 3점

조선의 뒷골목 풍경 - 6점
강명관 지음/푸른역사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이라는 미시사 서적으로 접했던 강명관 교수의 초기작입니다. 2003년 첫 발표되었으니 거의 20여년 전 책이네요. 제목처럼 조선 시대, 정사 등으로는 언급되기 힘들었던 여러가지 생활사를 다양한 사료를 통해 설명해 줍니다.

첫 번째 주제인 "수만 백성 살린 이름없는 명의들|민중의" 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어떻게 병을 치료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줍니다. 조선 시대의 공식적인 의료 기관과 의사들은 왕과 권력자들을 위해서 존재했는데, 일반 백성들은 '민중의'를 믿고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네요. 방법도 침술과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약재를 처방하는 수준에 그쳤다니, 참 민중들은 살기 힘들었던 시대였을 겁니다.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된다|군도와 땡추"는 '군도', 즉 무리를 지은 도둑 집단과 이 군도 무리의 핵심 세력이었다는 '땡추'에 대해 자세히 알려줍니다. 보원 스님 등 여러 분의 증언에 기반하고 있는데, '땡추'는 '당취'에서 나온 말로 조선 초 강력한 배불 정책 이후 금강산으로 들어가버린 종파가 그 유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배불 정책을 반대하니 당연히 반체제 집단이었고, 민중 교화 뿐 아니라 민중 구제까지 겸해서 산적과 결탁하게 되었다는군요. 1908년, 화적 집단이 체포되었고, 그 중 스님 송학이 동료들을 팔아넘겼다는 기사가 황성 신문에 실렸으며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관련된 기록이 있다니,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투전 노름에 날새는 줄 몰랐다|도박"은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었습니다. 우선은 제목 그대로 조선 시대 도박에 대한 상세히 소개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 도박계의 패권을 차지한 것은 '투전'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던 '돌려대기'는 40장 투전목을 써서 다섯 명이 5장씩 나누어 가진 뒤 각기 3장을 모아서 10, 20, 30을 만들고 나머지 2장의 숫자에 따라 승부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답니다. 남은 2장은 여러가지 족보가 있는데 이는 현재 화투 도박 족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네요. 

물론 이런 내용은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에서 더욱 상세하게 소개해주었기에 새롭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도박과 관련된 다른 일화 소개입니다. 18세기 조선 투전계 최고의 타자 (打子 투전고수)가 효종 딸 경숙옹주의 손자이자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던 원경하의 아들로, 그리고 본인 역시 이조판서에 우의정까지 올랐던 원인손이었다는 이야기처럼요. 당시 양반 사회 최상부층까지 투전이 침투했었다는걸 극명하게 드려내주는 일화라 생각됩니다. 

투전 이야기 짤막하게 뒤에 언급된 조선 후기 도박 성행의 이유와 그와 관련된 '언막이', '보막이' 등의 이야기는 정말 머리를 세게 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조선 후기 도박 성행의 이유 중 핵심으로 개인의 재능과 노력과 사회적 성취가 정비례하지 않았던 불확실성에서 유래되었다고 봅니다. 즉, 사람들이 큰 성공을 하려면 정상적인 방법보다는 극한의 위험을 짊어지고 '한탕'을 노릴 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지요. 공한지에 둑을 쌓아 논을 만든다는 '언막이', '보막이', 광산을 찾는다는 금점, 은점도 이런 사회적 불확실성으로 조선 후기 널리 유행했다고 하고요. 조선 후기로부터는 거의 200여년, 이 책이 발표된지도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이런 상황이 2020년대 현재 시점에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는게 정말 놀랍지 않나요? 젊은이들이 '노오력'에 대한 정당한 성취를 얻지 못해서 좌절하고, 심지어 주식과 코인, 부동산에 '투자' 하지만 이는 '언막이'나 '보막이' 처럼 위험부담이 크고 심지어 사기와 불법으로 점철되어 있는게 많아서 더 큰 좌절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요. 정말 세상이 변한게 없다는걸 이렇게 뼈저리게 느끼게 만든 글은 최근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셨다 하면 취하고, 취했다 하면 술주정|금주령과 술집"에서는 연암 박지원이 알려주는 조선 시대 음주 문화(?)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열하일기"에서 중국의 청결하고 화려했던 술집과 조선 술집을 비교하며, 조선 술집은 운치도 없을 뿐더러 술 마시는 양은 너무 커서 큰 사발에 철철 따라서 들이 붓는 식으로 마셔서, 마셨다 하면 취하고 취했다 하면 싸움질이라며 한탄했거든요. 그런데 이게 뭐 한탄할 일이랍니까? 술은 취하기 위해서 마셔야죠! 조선 사나이, 남자일세! 그 외에도 술집은 목로술집, 내외술집, 사말막걸리집, 모주집, 색주가로 구분되며 술집은 쳇바퀴로 등롱을 달아 술집임을 표시했다는 등의 디테일, 영조가 금주령을 강하게 시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서울의 게토, 도살면허 독점한 치외법권 지대|반촌"과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뒤흔든 무뢰배들|검계와 왈자", "조선 후기 유행 주도한 오렌지족|별감", "은요강에 소변 보고 최음제 춘화 가득하니|탕자"는 전체적으로 조선 시대 풍류를 즐기던 일종의 협객? 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반촌은 성균관 잡역을 세습적으로 맡아보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이곳 남자들은 사치스러운 복색, 호협한 기질과 폭력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검계와 왈자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다만 가진 신분의 차이만 있을 뿐, 일종의 폭력 집단(?) 속 남자들이라는건 똑같으니까요. 거지들이 모인 개방과 나름 문무를 겸비한 인재들이 모인 명문정파도 결국 폭력으로 모든걸 해결한다는 무협지 속 세계인 셈이지요. 별감은 화려함, 그리고 풍류를 추구하는 이른바 유흥의 최전선에 있으며 '오락'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이들 폭력 집단과 연결되는데 영화 배우들을 장악했었던 홍콩 흑사회 조직이 떠오릅니다. 탕자는 이들과 어울리며 돈을 물쓰듯 쓰던 사람들이니 역시 한 배를 탄 인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소개들과 함께 조선 후기의 풍류와 오락, 그리고 당대 패션 리더 별감이 입었던 화려한 옷차림이 무엇인지 등 흥미로운 정보들이 가득 제공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과거 시험이나 어우동의 이야기를 다룬 부분은 다른 책에서 많이 접했던 이야기라 별로 새롭지 않았으며, 사료가 조선 후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나마도 특정 인물 증언에 지나치게 의지한다던가, "이춘풍 전"과 같은 소설 등 그 근거가 다소 희박하다는 점 등이 그러합니다. 도판도 이야기를 뒷받침해주는 용도보다는 일종의 일러스트(?) 개념으로 들어간 그림들이 많아서 실망스러웠고요.

하지만 단점은 크지 않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풍속과 문화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었다 생각되네요. 앞서 말씀드렸듯, 현재와 다르지 않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성케하고 미래를 고민케 만드는 부분도 있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1/12/12

기동전사 건담 일년전쟁사 -상 : 별점 2.5점

기동전사 건담 일년전쟁사 -상 - 6점
이미지프레임 편집부 엮음/길찾기

기동전사 건담의 시작을 알린 1년 전쟁을 실재 있었다고 가정하고 진지하게 접근한 책입니다. 전사라면 전사겠지만, 기본적으로는 2차 창작물인 셈입니다. 예전에도 살짝 관심은 있었는데, "섬광의 하사웨이"를 보고 내친김에 찾아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이미 절판 상태라 상, 하권 중 상권만 구할 수 있었기에, 상권만 읽어보고 리뷰를 남깁니다.

특징이라면 1년 전쟁에 관련된 설정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전쟁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상세한 전투 관련 분석이 돋보입니다. 전쟁 발발 정의 지구권과 콜로니 배치에서 시작되어, 전투의 추이라는 제목으로 일주일 전쟁, 루움 전투, 공국군 지구 침공 작전, 오데사 작전 설명으로 이어지는 첫 챕터부터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연방군과 지온군 함대 구성 및 이동 방향, 전투의 향방 등을 여러 전쟁사 책들과 비슷한 도판들을 이용하여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 전투에 대한 해석 뿐 아니라 콜로니와 미노프스키 물리학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같은 기본 설정에 대한 상세 설명은 물론 지온 공국 성립의 역사, 전쟁 시작 후 오데사 작전 까지의 이야기 및 모빌 슈츠와 각종 병기들, 지구 연방군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MS는 물론이고 전함과 육전용 장비들, 항공기 소개도 충실하고요. 이 중에서는 아울러 스페이스노이드의 주장, 지온 공국이 전쟁에 돌입하기까지의 공국과 연방군 정세 등 1년 전쟁 당시의 사회 환경과 이데올로기, 정세에 대한 분석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예컨데 2차 대전을 다룬 책이라고 친다면, 독일이 히틀러 집권 후 재무장을 하여 폴란드를 침공하고, 결국 프랑스까지 점령하는 과정을 지휘관들과 주요 전선에서 펼쳐진 작전들, 그리고 주요 전술과 주력 병기와 함께 소개하는 것은 물론 나치즘과 히틀러의 집권 과정, 영국과 프랑스 등 주변 주요 강대국의 정세를 이벤트별로 원인과 결과를 잘 알 수 있게 설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잘 알려진 설정이 대부분이라 새로운건 별로 없습니다. 이 책 출간 이후, 1년 전쟁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했던 "디 오리진"이 출간된 탓도 컸고요. 그래도 진지한 역사서처럼 쓰여진 결과물을 보니 색다른 느낌도 들고,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되어 나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 발표되었던 기획임을 짐작케하는, 시대착오적인 부분은 눈에 거슬렸습니다. 대표적인게 디오라마로 이루어진 화보였습니다. 디오라마 자체가 나쁜건 아니지만 촬영과 편집 모두 책의 컨셉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었거든요. 밀리터리 풍의 화보도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고요. 이왕 이렇게 책을 만들 거였다면, 장난감같은 프라모델 사진이 아니라 더 진짜같은 사진과 그림이 필요했습니다. 책의 내용도 오래전 발표된 책 답게 이른바 '정사'에 포함된 내용만 담겨 있어서 MS IGLOO라던가, The Origin같이 후대 추가된 설정과 이야기가 없다는 것도 불만스럽습니다. 그 탓에 볼륨도 가격에 비하면 영 시원치 않은 편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내용은 그대로 두고 도판과 편집만 현대적으로 재구성하여 재간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아틀라스 전차, 항공전사와 "2차대전 독일의 비밀무기"를 합치는 식으로요. 지금의 결과물은 재미는 있지만 딱히 하 권을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2021/09/10

공기의 바닥 - 데즈카 오사무 : 별점 2점


데즈카 오사무가 1960년대 후반 ~ 1970년대 초반에 발표했던 성인풍 단편 극화 모음집입니다. "동경 표류 일기"를 읽고, 동시대 감성을 데즈카 오사무는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해서 찾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무려 열 네 편이나 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인간 드라마, 범죄극, 멜로물, 기묘한 맛, SF,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장르 스펙트럼을 보여줍니다. 성인물답게 정사 장면도 많고, 근친 상간에 수간!까지 등장한다는게 이채로왔고요. "블랙잭"으로 재기에 성공하기까지, 침체기에 놓였던 데즈카의 다양한 시도들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딱히 재미있지는 않더군요. 지금 읽기에는 진부한 설정과 내용이 많았고, 결말도 대체로 예상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예상 못했던 결말의 경우는, 그 결말이 딱히 좋다고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완성도도 문제가 많습니다. 일부 작품의 경우는 기본적인 전개 구상도 없이 생각나는대로 그린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대표적인 예가 "카멜레온"입니다. 능력있는 직장인 카자마가 주인공인 기업 드라마로 시작해서, 카자마가 산업 스파이라는게 밝혀지면서부터 범죄물이 됩니다. 그러다가 카자마가 자신을 유혹했던 여자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이 훔쳐낸 정보로 만들어낸 약의 실험 대상이 된 뒤에는 일종의 SF로 돌변합니다. 뇌 사용이 극대화되고 대신 끊임없는 식탐에 시달린다는 설정으로요. 그리고 카자마를 유혹한 여자는 카자마가 학생 운동을 할 때 밀고로 죽고만 친구의 동생으로 모든건 복수를 위해서였다는 복수극으로 바뀝니다. 결말은 카자마가 말도 없이 화염병을 던져서 여자와 그 아버지가 타고 온 헬기를 파괴한다는, 다소 허무한 마무리였고요. 식탐으로 기형이 되어버렸지만, 분명 머리가 좋아졌을 카자마인데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게 이상했고, 솔직히 뭘 이야기하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수의 끝은 공멸이라는 걸까요? 설령 그렇다손 쳐도, 이 모든걸 설득력있게 풀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분량이었습니다. 분량을 늘렸더라면 그래도 볼 만 했을텐데 말이지요.

엄청난 인종 차별 주의자 오하라가 베트남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고, 부하였던 흑인 죠의 심장을 이식받은 딜레마를 그린 "죠를 방문한 남자", 홈리스 거지로 분장하는 취미가 있는 사장이 한 눈에 반한 거리의 여자와 사장 신분으로 결혼하지만, 그녀는 홈리스 거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밤의 소리", 계곡에 갖혀 사는 가족의 비밀이 드러나는 "우리 계곡은 사람들이 모른다" 정도는 볼만했지만, 이들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오히려 "밤의 소리"는 결말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청년 사장 가보리가 취미인 거지로 변장했을 때 만나 사랑에 빠진 여인을 자기 회사에 입사시켜 결혼까지 하지만, 그녀가 사랑했던건 홈리스 거지였다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아요. 그러나 여자가 가보리를 총으로 쏜 시점에서, 그녀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는 약점은 치명적입니다.

한마디로 극화 전환기에 표류하던 데즈카 오사무의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들이라 생각됩니다. 좋아하던 모험물, SF에 인간 드라마, 사회 고발 등을 자극적인 성관계와 폭력으로 녹여내고 있지만, 잘하고 좋아하던 것에 비하면 확실히 완성도는 떨어진다는 점에서 말이죠.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5/22

밤과 낮 사이 1 - 마이클 코넬리 외 / 이지연 : 별점 2.5점

밤과 낮 사이 1 - 6점
마이클 코넬리 외 지음, 이지연 옮김/자음과모음(이룸)

영미권 장르소설 비평가와 편집자들이 선택한 최고의 단편 컬렉션이라는 책입니다. 장르 문학 단편을 좋아하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볼륨은 풍성합니다. 무려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에 열 여섯 편이나 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본격 추리물, 범죄물, 스릴러, 액션물에 섬찟한 느낌을 전해주는 '기묘한 맛' 계열 등 수록 장르도 다양한 덕분입니다. 조이스 캐롤 오츠, 마이클 코넬리와 같은 유명 작가들 작품이 수록된 것도 반가웠고요.

하지만 워낙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서 작품별 편차가 큽니다. 첫 수록작인 "그들 욕망의 도구"처럼 좋은 작품도 있지만, 뻔한 설정과 전개를 보여준다던가, 심리 묘사에 치중할 뿐, 이야기 자체는 모호한 등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작품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앤솔러지인데 선정 기준을 잘 모르겠다는 것도 조금 아쉬웠어요. 누가,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선정하여 출간한 것일까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대략 2.5점입니다. 1권과 거의 동일한 분량과 볼륨을 자랑하는 2권도 있는데, 읽어볼지 말지는 조금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들 욕망의 도구" 

'나'는 죽기 전, 짐 오빠를 만나 그가 로니 언니를 이용했던 70년 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로 결심했다. 1931년, 아버지 가출 후 어려워진 가족을 위해 짐 오빠가 로니 언니에게 몸을 팔게 했었던 사건이었다...

끔찍했던 과거에 대한 회상에서 시작해서, 몸을 팔았던건 로니 언니가 아니라 짐 오빠 자신이었다는 충격적 반전까지 완벽했던 단편입니다. 탁월환 회상과 심리 묘사는 독자를 반전으로 이끄는 선입견을 잘 쌓아 올려주고요. 

아빠 실종에 관련된 설정은 지금 읽기에는 뻔하고, 짐 오빠의 고백 후 결말까지가 조금 늘어지는 감은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은 사소합니다. 단편의 맛을 잘 살린 걸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밤과 낮 사이" 

표제작. 주인공이 겨우 열기구에 매달려 있고, 두 명이 열기구에서 떨어져 죽거나 불구가 되는 첫 장면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주인공들이 뜬금없이 열기구에 매달리게 된 배경이 흥미로울 뿐 아니라, 결국 열기구 속 아이를 잃게 된 아버지이자 살인 강도인 브래들리가 주인공에게 복수심을 품고 습격해서 죽이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과정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하지만 브래들리가 탈옥해서 주인공을 습격한 뒤의 이야기는 모두 작위적이라는건 단접입니다. “전적이 있는 은행 강도로 풀려난 지 고작 이삼 일 만에 기구를 탈취해서 도와주려던 착한 이웃을 죽게 만든 놈인데, 그래 그놈을 튀게 놔뒀다고요?”라는 주인공 말 처럼 쉽게 이루어진 브래들리의 탈옥, 브래들리가 탈옥 후 주인공 집을 바로 찾아와 주인공을 납치한 것, 마지막 죽기 일보 직전에 사라진 열기구를 발견하는 것 등 모두가 말이지요. 주인공이 브래들리가 3만달러라는 돈을 숨겨놓았을 코인 락커 열쇠를 강탈한 뒤 죽게 만든다는 것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였고요.

또 주인공의 뉴요커 스타일 심리 묘사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가득차 있는 작품이라면, 주인공은 보다 현실적으로 묘사하는게 나았을것 같습니다. 아니면 주인공이 3만 달러를 거의 손에 넣었지만, 로키 산맥 끝자락까지 몰고 왔던 머스탱이 고장나서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게 될 거라는, 쇼트쇼트스러운 결말로 마무리하던가요.

그래도 도입부만큼은 역대급이며 스릴과 서스펜스 측면에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환상특급"같은 TV 시리즈로 만들었어도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책 제본가의 도제" 

베네치아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미국인 졸리 매독스는 부유한 괴짜 노인 샌본과 친해진다. 그는 졸리와 여자 친구 루치아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데....

굉장히 뻔했던 작품입니다. 제목과 책 제본에 대한 장인 정신 가득한 묘사, 희귀 서적 수집가와 책 제본가가 루치아의 피부 문신을 열광적으로 바라보는 묘사 등에서 결말이 쉽게 예상된 탓입니다. 마지막에 졸리가 받은 선물이 인피로 제본된 책이라는것 역시도 뻔했고요. 

샌본과 제본가 주치니가 인피 제본 책을 졸리에게 선물할 이유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졸리가 책 제본에 매력을 느껴 제자가 될 것을 결심할 거라는걸 알려줄만한 단서는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편의적인 전개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별다른 재미도 느끼기 힘들어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차라리 졸리는 사실상 이용가치가 없고 루치아의 인피만 중요한 상황인 것 처럼 끌고 가서 결국 졸리가 체포되도록 만드는 결말이었더라면 더 나았을겁니다. 졸리의 여자친구 사체 (머리?)를 여행가방에 몰래 넣어 두는 식으로요.

"스킨헤드 센트럴" 

짐 부부는 아들을 잃은 뒤 시골 마을로 이사왔다. 그곳에서 스킨헤드 머리를 한 데일에게 집안 일을 시킨 뒤, 짐 아내의 패물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뒤, 데일의 동생 제이슨이 패물을 돌려주는데...

가정 폭력에 따른 범죄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뭘 말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더군요. 이야기가 명쾌하지 못해요. 동생 제이슨을 폭행한건 형 데일인지? 그렇다면 형 데일을 폭행해서 사과하게 만든건 그 아버지인지? 짐 부부 집에 데일이 불을 지르려고 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이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또 형제의 아버지가 폭력 성향을 간직한채 10여년을 살아왔다고 해도, 데일이 저지른 범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애초에 데일은 절도를 저질렀고, 이는 맞아도 싼 짓이었으니까요. 때문에 아이를 매질했다고 짐이 이야기하는건, 그 아버지 말대로 오지랖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에 집에 불을 지른 데일을 육군 훈련소에 보내는 결말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당연히 경찰을 불렀어야 했습니다. 방화는 굉장한 중범죄니까요. 이미 성인이 된 데일은 그에 대한 책임을 졌어야 합니다. 비교적 길게 설명되는 짐 부부 아들이 죽은 비참한 사고도 이야기를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데일 가족 이야기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요. 데일을 자기 아들처럼 여겼다? 이 역시 오지랖이죠.

좀 있어보이는 드라마를 쓰려고 했지만, 알맹이는 그닥인 모래성같은 이야기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심술생크스 여사 유감" 

늙은 노파가 온갖 사람들에게 심술궂은 편지를 보내는 취미가 있다는 설정은 고전 영국 추리 소설에 등장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고전 속에서 이런 편지는 은근한 협박이나 스캔들 폭로였던 반면, 이 작품 속 생크스 여사의 편지는 훨씬 적나라하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전이 은근한 심리 서스펜스라면, 이 작품은 현대물답게 스플래터 하드고어물인 셈입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들 상황 묘사와 엮어서, 독자에게 이 노파는 죽어도 싸다는걸 확실히 알려주거든요. 살인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교사 시절 학생의 게이 성향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던 행위가 대표적입니다. 정말 치가 떨릴 지경이었어요. 진작에 살해당하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니 말 다했지요. 마지막에 생크스 여사가 살해되지만, 동기를 가진 인물이 너무 많아서 범인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끔찍한 범행'과 '처단' 자체의 자극적 쾌감에 비해 이야기가 평이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재미를 주는 작품이란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첫 남편" 

잘 나가던 변호사 리오나드가 아내의 첫 남편 사진을 발견한 뒤, 자격지심과 질투로 오해를 만들고, 결국 첫 남편 야드만을 죽인다는 범죄극입니다. 비교적 분량이 긴데, 리오나드가 붕괴해가는 심리 묘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탓입니다.

긴 만큼 디테일한 묘사는 좋지만, 전개는 평이합니다. 리오나드가 야드만을 죽인다는 결말은 뻔했고요. 아내 발레리도 죽였을 거라는 암시가 살짝 등장하기는 하는데, 제대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야드만을 죽인 뒤, 그의 렌트카를 타고 돌아와야 하는 상황에서 차안에 있던 야드만의 애견에 의해 습격을 당해 죽거나 범행이 드러난다는 결말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지금도 개 때문에 범행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우연히 지나가던 차량이 있었다는 작위적인 전개에 기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길이만큼 좋은 작품은 아니었어요

"운이 좋아" 

텔레파시 능력자 수키 스택하우스와 마녀 아멜리아 브로드웨이에게 보험 사업을 하는 그레그가 사건을 의뢰했다. 누군가 그의 사무실에 침입해서 서류철을 뒤졌는데, 누구인지 알아내 달라는 의뢰였다.

텔레파시 능력자, 마녀, 뱀파이어, 마술사 등이 나오는 판타지 범죄물로 그레그의 경쟁 업자 중 한명이 그레그의 비정상적인 행운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서류철을 뒤졌다는게 진상인데, 이를 수키 스택하우스가 더듬어 밝혀내는 과정은 꽤 재미있습니다. 이런저런 소동으로 뒤섞인 상황에 대한 정리도 깔끔하고 유쾌하게 묘사하며, 판타지적인 설정과 능력들을 조사 과정과 이야기에 잘 써먹고 있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만화스러운 설정만큼이나 만화스러운 전개는 아쉽습니다. 디테일을 챙기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게 많아요. 그레그가 주변 행운을 빨아들여서 사업이 잘 되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이거야말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기 충분한 설정인데, 어떻게 동작하는지 설명도 없이 그냥 끝나버리고 말거든요.

그래도 재미만큼은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아버지날"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단편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벌어졌던, 더운 날씨에 차 안에 방치되어 사망한 아이 사건이 그려집니다.

아이에게 장애가 있었고, 그 때문에 부모가 의도적으로 아이를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게 진상인데, 아내와 남편을 분리시킨 뒤 심문하여 이를 이끌어내는 과정 묘사가 빼어납니다. 아내가 먼저 자백했다며 자백을 유도하는 장면은 그 중 백미이고요. 또 그냥 심증이 아니라 '이미 그만 둔 보모를 재 고용하는 광고를 내지 않은 점' 에 착안하여, 어차피 아이가 죽을걸 예상했다는 추리를 이끌어내는 것도 좋았습니다.

조금 아쉬웠던 점이라면, 부모 시점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게 얼마나 힘든지가 전혀 설명되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아무래도 범인의 동기가 치열하게 드러나지 않는 탓에, 드라마의 깊이가 부족했어요. 전개와 결말도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 있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경찰 수사물로는 기본은 하는, 좋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과연 저명한 해리 보슈 시리즈다웠달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개 산책 시키기" 

토론토에 사는 부유한 미시 로라 프랜시스는 개 산책 중에 단역 배우 레이를 만난 뒤 불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레이와 함께 하기 위해 남편 로이드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정부에게 남편 살인 청부를 맡기지만, 남편이 선수쳐서 정부는 죽고, 선수친 남편도 정부가 의뢰했던 살인 청부업자에게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딘가에서 많이 보아왔던 -헨리 슬레셔였던가요? - 뻔하디 뻔한 내용이라 한숨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포르노를 연상케 하는 로라와 레이가 벌이는 질퍽한 정사 장면 묘사는 그나마의 수준을 더 낮고 저렴하게 보이게 만들고요. 이럴 바에야 뻔해서 짝퉁스러운 반전을 끼워넣지 말고, 포르노에 가까운 싸구려 펄프 픽션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그럼 지금보다는 조금 더 볼 만한 부분이 있었을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모자족인" 

부유한 의료기기 사업가 제더버그 마틴이 살해당했다. 스무살이나 어린 젊은 아내 나네트는 정체불명의 거한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데....

언니의 전 남자 친구인 카일 헤이에스 형사 밑에서 일하게 된 감식관 테스 캐시디가 주인공인 작품. 

단서, 증거, 동기 모두 애매하고 설명은 부족하지만, 본격 추리물입니다. 테스 캐시디가 몇 가지 단서와 정보를 가지고 귀납법 추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서는 두가지입니다. 고인이 생전에 불을 두려워했으며, 친아들이 반대하는데도 나네트가 화장을 고집한 이유가 첫 번째, 흉기인 도끼에 찍힌 커다란 엄지손가락 지문이 두 번째입니다. 테스는 도끼에 찍힌 엄지손가락 지문은 고인의 엄지발가락 지문이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화장을 서두른 것으로 추리합니다.

이 엄지발가락 지문에 대한 추리를 우연히 테스가 알게 된 '모자족인' - 아이가 바뀌는걸 방지하기 위해 엄마의 손가락 지문과 어린아이의 엄지발가락 지문을 찍는것 - 과 연결시키는 전개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현대 법의학으로 발가락과 손가락 구분이 불가능했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설령 구분이 불가능했다 치더라도, 동기가 있는건 나네트와 아들 스티븐 뿐이니 어떤 식으로든 범행은 드러났을테고요. 이런 점에서 현대물보다는 근대물에 더 적합했으리라 생각되네요. 아울러 테스와 상관과의 관계도 전개에는 불필요한 요소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뱁스" 

라스베이거스를 무대로 한 뒷골목 싸구려 범죄극. 주인공이 스트리퍼 뱁스와 함께 마약 전달책을 찾아가 마약을 강탈해오는게 전부입니다. 온갖 비속어가 난무하지만 특기할 만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주인공이 때때로 '십자가'를 본다던가, 대학교를 나왔다던가 하는 기묘한 설정이 덧붙여져 있는데, 작품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않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잠" 

묘지 관리인 그레이브 디거는 과거 마크 틴들이라는 과거 용병이었다. 실수로 포로가 되었었지만, 상관 월터 잭슨의 희생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묘지에 월터의 시신이 매장되게 되는데, 얼빠진 아르바이트생들이 시신을 모욕하자 그는 용병 마크 틴들로 돌아간다....

그레이브 디거가 용병으로 돌아온다는, 영화로 따지면 캐릭터 탄생을 알리는 도입부 격입니다. 그나마 마지막 각성은 조각내버렸다는 한 마디로 끝이고요. "존 윅"에 빗대어 보면, 자동차와 개의 복수는 하지도 않고, 다시 킬러로 각성해서 집에 쳐들어온 마피아 조직원을 죽이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끝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완성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즐거운 응원단" 

고등학교 응원단에 미모의 호랑이 코치가 부임했다. 그녀는 단원들에게 맹훈련을 시켰는데, 단원 중 3명은 그녀가 스터드 하사와 불륜을 저지르는걸 목격했다. 코치는 그녀들을 꼬드겨 친해지지만, 3명 중 한 명인 베스의 도발로 결국 트러블이 일어나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코치가 불륜을 저지른 뒤 아이들을 입막음 시키려고 억지로 친한척을 한건 알겠어요. 아이들 중 한 명인 베스가 계속 입을 놀리자 그녀를 견제한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코치라는 사람이 아이들을 데리고 불륜남 친구들과 마약 파티를 벌인다? 한국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륜남 스터드의 친구 프라인이 베스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결말도 뭔가 싶어요. 죽인 것도 아니고, 설령 이 자리에서는 죽였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게 뻔하잖아요? 볼짱 다 본 막장 인생 이야기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설명되지 않고 답없는 전개와 결말을 그려냈는지 알 수가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교차로" 

3인조 은행 강도인 잭 일당은 서부 텍사스 일대를 떠돌다가, 교차로에 있는 작고 낡은 주유소 겸 잡화점에 들르게 된다. 그곳에서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더브와 로이간에 다툼이 벌어지고, 둘은 충동적으로 가게 주인인 노부부를 살해한다. 둘은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두목 잭의 분노가 두려워, 잭에게도 총격을 가하는데....

서부 텍사스의 황량한 묘사, 그리고 작은 가게에서 벌어지는 총격전 묘사가 볼 만했던 범죄 액션극. 가게를 찾은 꼬마가 가지고 있던 총으로 잭이 기사회생하고, 꼬마가 잭의 새로운 동료가 된다는 결말은 독특했습니다. 주어진 암시와 내용을 보면 잭은 악마이고, 나이가 들어 쓸모없어진 인간 부하들을 때때로 교체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별다른 내용은 없지만 액션 장면만으로도 별점 2점은 충분합니다.

"악마의 땅" 

소몰이꾼 출신으로 서던퍼시픽 철도탐정으로 일했지만 해고당한 형제는, 핑커튼 탐정사 취직을 위해 바바리 해안으로 향했다. 구스타프 형은 사람을 관찰해서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내는, 셜록 홈즈같은 취미가 있었다. 하숙집 주인 메그가 둘에게 수상쩍은 일자리를 제안했다. 구스타프는 동생에게 일행인걸 들키지 말자고 말했고, 찾아간 술집에서 갑작스럽게 구스타프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출판사에 보낸 원고에 대해 기묘한 독촉을 하는 편지에서 시작해서, 편지를 쓴 사람이 형 구스타프와 겪었던 사건으로 끝나는 작품.

사람이 술집에서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는 본격물로 셜록 홈즈만큼 똑똑하다는 구스타프 형이 아니라, 힘쓰는 쪽인 동생이 추리를 하는 탐정과 이야기를 하는 화자 역할인 왓슨, 그리고 액션 담당인 브라운 신부의 동료 프랑보우 역할까지 수행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셜록 홈즈의 경구를 떠올리며 추리하는 과정은 홈즈 팬에게는 큰 즐거움이었고, 설득력도 높습니다. 술집에서 급작스럽게 피아노를 친 이유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서이며, 좌, 우로 빠져나갈 수 없다면 위나 아래로 사라졌을 거라고 추리하는 식입니다. 결국 동생은 바닥에 문이 있다는걸 알아내고 형을 구해내게 되지요. 

또 소몰이꾼 1인칭 시점의 말투로 전개하는 묘사, 특히나 중간중간 삽입된 소몰이꾼 감성 유머가 아주 유쾌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근대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약간 무식한 막노동꾼 탐정이 등장하는 본격물이라는 점에서 "탐정 피트 모란"이 살짝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바닥의 문은 셜록 홈즈 운운하지 않아도 관찰만 한다면 알아낼 수 있었을 거라 생각되고, 메그의 술집에서 벌어진 다툼같은 불필요한 요소는 감점 요소이지만, 장점이 명확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시리즈로 보이는데 다음에는 구스타프 형이 활약하는 이야기도 읽어보고 싶네요.

"킴 노박 효과" 

제목은 주인공이 벌이는 사기의 명칭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가 애착을 가진 존재를 등장시켜 사랑에 빠지게 한 뒤 돈을 울궈내는 사기지요. "현기증"에서의 킴 노박 역할에서 따 와 붙인 이름이라고 하네요.

주인공의 킴 노박 효과 사기 생각이 이어지다가, 주인공이 정조역전세계처럼 나이든 과부들에게 킴 노박 효과를 일으키며 돈을 빼 먹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결말은 독특했습니다. 이게 바로 남녀평등이겠죠. 질퍽하면서도 상세하게 묘사된 범죄와 심리 묘사도 볼거리였습니다. 엘모어 레오나드의 작품들이 떠오를 정도였어요.

하지만 '주교님'에게 사로잡힌 주인공이 빠져나온 뒤, 남창 역할을 하게 되는 결말은 설명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완벽한 범죄자였던 주인공을 몰락시키려면, 정교한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쉽게 약점을 잡혀버려서 인생이 막장에 몰려 버린다면, 앞서 대단해 보였던 사기와 범죄 행각에 대한 장황한 묘사도 힘을 잃을 수 밖에 없고 결국 이 작품은 시간 낭비에 불과해버리고 마니까요.

주인공과 성형외과 의사, 킴 노박 효과를 일으켰던 배우, 피해자 등의 시점을 오가는 전개는 괜히 복잡하게 보일 뿐, 이야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또 킴 노박 효과도 의문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이 옛날 사랑했던 애인이나 전처, 혹은 영화배우와 비슷한 외모의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게 과연 사기일까요? '그 사람이다!'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다른 사람이라는건 당하는 사람도 알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거짓말로 돈을 울궈내는건 사기일 수는 있지만, 이 정도면 추억에 대한 댓가로 보는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이들고 부자인 남자가 젊은 여자를 만나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은 단편에 어울리지는 않았어요. 훨씬 길고 정교한 작품으로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2021/01/24

추리 소설 1,000편 리뷰 분석

추리 소설 1,000번째 리뷰 등록!

염원했던 추리소설 리뷰 1,000편 올리기를 달성했습니다. 1,000편의 리뷰를 작성하면서, 책 한 권을 출간하는 소기의 성과도 있었지요. 1,000편 업로드 기념 및 개인적인 자료 정리 차, 여태 읽었던 추리소설 리뷰 1,000편에 대한 간략한 데이터를 정리하여 공개합니다.

리뷰 갯수 1,000 

당연하겠지요?

책 권수 1,049권 

"브라운 신부"나 "크리시" 리뷰와 같이 여러 시리즈를 한 편 리뷰에서 정리한 경우도 있고, "그것" 처럼 작품 한 편이 여러권으로 이루어져 있어도 리뷰 한 편으로 소개한 경우가 많아서 권수는 더 많습니다.

책 종수 1,008종 

권 수가 많은 이유에 더해, 중복하여 작성한 리뷰도 있어서 이를 빼면 최종적으로 리뷰한 책은 총 1,008종입니다.

국가별 

일본 454, 영미 394, 한국 63, 프랑스 29, 독일 13, 그외 55

예상대로 일본 작품 비중이 거의 절반 가까이이며, 영미 작품까지 포함하면 전체의 85%가까이 되는 압도적인 비중입니다. 국내 출간되는 작품들과 제 취향을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장르별 

본격물 성향 작품 리뷰가 357, 스릴러는 229, 경찰/수사 127, 일상계가 80, 호러 73, 하드보일드 69, 역사 추리 55, 모험물 54 순입니다. 본격물을 좋아하는 제 취향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장르 불문하고 단편집은 137편의 리뷰를 작성하였고요. 

참고로 본격물이면서 수사물인 작품이거나, 본격물이면서 일상계인 작품 등 키워드는 중복하여 체크된 결과입니다.

별점별 

경성탐정록 두 편은 제외한 총 1,006 종의 책 별점 분포는 아래와 같습니다. 

5점 : 4, 4.5점 : 7, 4점 : 71, 3.5점 : 48, 3점 : 271, 2.5점 : 259, 2.4점 : 1, 2.3점 : 1, 2점 : 227, 1.5점 : 88, 1점 : 26, 0.5점 : 1, 0점 : 1, 없음 : 1

평균 이상 별점인 2.5점 이상 작품이 660종으로 전체의 2/3를 차지합니다. 꽤 괜찮은 작품들을 읽어왔었다는 의미지요. 나름 뿌듯하네요. 별점 5점을 받은 작품, Hall of Fame만 별도로 소개해 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9마일은 너무 멀다"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 

"도끼" 

"특별요리" 

* 특별요리는 2003년도 동서 버젼이었고, 2015년에 다시 읽었던 엘릭시르 버젼은 별점 4점이었습니다.

참고로 책 별점과는 별개로, 단편집 단편별 중 별점 5점을 받았던 단편은 아래와 같습니다. 

"살의" (in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 "결산", 위험천만한 게임" (in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우체국에서 생긴 사건" (in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사기꾼의 카드" (in "클로버의 악당들")

"새", "성모상" (in "대프니 듀 모리에") 

"국화의 먼지" (in "저녁싸리 정사")

"죽음" (in "악몽을 파는 가게 1") 

이 역시, 저의 고전 본격물 취향을 잘 드러내 주네요.

작가별 

1. 작가별 리뷰한 작품 갯수 순위

1. 히가시노 게이고 : 48
2. 애거서 크리스티 : 33
3. 요네자와 호노부 : 21
4. 스티븐 킹 : 18
5. 마쓰모토 세이초 / 엘러리 퀸 : 16
7. 존 딕슨 카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 : 13
8. 요코미조 세이시 : 12
9. 와카타케 나나미 : 11
10. 아리스가와 아리스 / 에드 멕베인 : 10 
12. 미쓰다 신조 / 아서 코난 도일 / 조르주 심농 / 시마다 소지 : 9
16. 다카기 아키미쓰 / 미야베 미유키 : 8
18. 에도가와 란포 / 노리즈키 린타로 / 도진기 : 7
수많은 작가가 있지만, 공통 18위 까지만 선정합니다. 일본, 영미 작가가 많은건 국가별 순위와 동일합니다. 프랑스 작가 조르주 심농이 12위에, 한국작가 도진기가 18위에 위치하고 있을 뿐이네요.

2. 작가별 평균 별점 순위 (5권 이상 작품을 읽은 경우)

1. 콜린 덱스터 : 6권 리뷰, 평균 별점 3.6666...
2. 로스 맥도널드 : 5권 리뷰, 평균 별점 3.6
3. 기리노 나쓰오 : 5권 리뷰, 평균 별점 3.4 
3. 모리스 르블랑 : 5권 리뷰, 평균 별점 3.4
5. 존 딕슨 카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 : 13권 리뷰, 평균 별점 3.269...
6. 미쓰다 신조 : 9권 리뷰, 평균 별점 3.055....
7. 딕 프랜시스 : 5권 리뷰, 평균 별점 3
8. 다카기 아키미쓰 : 8권 리뷰, 평균 별점 2.875
8. 미야베 미유키 : 8권 리뷰, 평균 별점 2.875
10. 마쓰모토 세이초 : 16권 리뷰, 평균 별점 2.84375
11. 와카타케 나나미 : 11권 리뷰, 평균 별점 2.8181...
12. 우타노 쇼고 : 5권 리뷰, 평균 별점 2.8
13. 요코야마 히데오 : 6권 리뷰, 평균 별점 2.75
14. 코넬 울리치 : 5권 리뷰, 평균 별점 2.7
15. 아서 코난 도일 : 9권 리뷰, 평균 별점 2.6666667
15. 조르주 심농 : 9권 리뷰, 평균 별점 2.6666667
15. 기시 유스케 : 6권 리뷰, 평균 별점 2.6666667
18. 엘러리 퀸 : 16권 리뷰, 평균 별점 2.65625
19. 미치오 슈스케 : 6권 리뷰, 평균 별점 2.583333
20 애거서 크리스티 : 33권 리뷰, 평균 별점 2.5757576
21. 에도가와 란포 : 7권 리뷰, 평균 별점 2.5714286
22. 요코미조 세이시 : 12권 리뷰, 평균 별점 2.541...
23. 미카미 엔 : 6권 리뷰, 평균 별점 2.5
비슷한 주제로 13년 전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순위가 대폭 바뀌었네요. 최소 2권 이상의 작품을 읽은 작가는 114명, 어느정도 평균을 낼 수 있는 수치인 5권 이상 읽고 리뷰를 남긴 작가는 33명입니다. 이 중 평균 2.5 이상 별점을 유지한 작가는 콜린 덱스터 외 24명입니다. 프로야구로 따지면, 1군 소속 선수의 72% 정도가 평균 이상이었던 셈이니 굉장히 훌륭한 성적이지요. 25명에 들지 못한 8명 중에서도 요네자와 호노부, 시마다 소지, 스티븐 킹, 아리스가와 아리스 등은 평균 2.4점대로 아쉽게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니 더욱 그러합니다. 명성이 있는 작가는 확실히 이름값을 한다는 증거죠. 가장 많은 작품을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평균 별점은 2.32점인데,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유명한 대표작, 걸작만 추려서 읽은 경우는 별점이 높을테고 많이 읽을 수록 평균 별점은 불리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크리스티 여사님 평균 별점이 비교적 낮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위권을 살펴보면, 5권 이상 읽은 작가 중 꼴찌는 6권 평균 별점이 2.083점인 니시무라 교타로, 전체 꼴찌는 읽은 작품 4권 별점 평균이 1.1점에 불과한 제임스 패터슨이었습니다. 니시무라 교타로는 모르겠지만, 두 번 다시 제임스 패터슨 작품을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탐정별 (5권 이상 읽은 작품만 뽑아봅니다)

1. 탐정별 리뷰한 작품 갯수 순위

1. 에르큘 푸아로 : 15권 리뷰
2. 엘러리 퀸 : 13권 리뷰
3. 셜록 홈즈 : 12권 리뷰
4. 긴다이치 코스케 : 11권 리뷰
5. 가가 (학생 ~ 형사) : 10권 리뷰
6. 87분서 : 9권 리뷰
7. 메그레 경감 : 7권 리뷰
8. 고전부 / 기디온 펠 박사 / 노리즈키 린타로 / 모스 경감 / 히무라 히데오 : 6권 리뷰
13. 미스 마플 / 미타라이 기요시 / 시오리코 / 토츠카와 경부 (+가메이 형사) : 5권 리뷰
2. 탐정별 평균 별점 순위
1. 모스 경감 : 3.66666
2. 셜록 홈즈 : 2.958333...
3. 기디온 펠 박사 : 2.9166...
4. 엘러리 퀸 : 2.6923...
5. 긴다이치 코스케 : 2.6363...
6. 시오리코 : 2.6
7. 고전부 : 2.58333
8. 메그레 경감 : 2.5714...
9. 가가 (학생 ~ 형사) : 2.55
10. 에르큘 푸아로 / 미스 마플 / 미타라이 기요시 : 2.5
13. 87분서 : 2.4444...
14. 히무라 히데오 : 2.41666...
15. 노리즈키 린타로 : 2.25
16. 토츠카와 경부 (+가메이 형사) : 2.2
입니다. 원탑 모스 경감 밑으로 셜록 홈즈, 기디온 펠 박사까지는 평균 이상의 빼어난 별점을 자랑합니다. 확실히 탐정은 영미권 탐정이 더 제 취향이라는걸 알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간략하게 추리소설 1,000편의 리뷰에 대한 요약 정리를 마칩니다.

2020/10/08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 에릭 앰블러 / 최용준 : 별점 2.5점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 6점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영국인 추리 소설 작가 레티머는 터키 이스탄불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디미트리오스라는 범죄자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래티머는 디미트리오스에게 강한 흥미가 생긴 나머지 디미트리오스의 행적을 좇아 유럽을 횡단해 가며 이런저런 조사를 벌이는데...

에릭 앰블러가 발표했던 스파이 소설의 고전입니다. 이쪽 바닥에서는 일찌기 걸작으로 인정받은 작품이지요. MWA 선정 베스트 미스터리 100 순위도 17위라는 고순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파이 소설로 알려진 바와 다르게, 범죄자를 쫓는 탐정 수사물로 보는게 맞습니다. 물론 래티머는 제대로 된 탐정은 아니고, 수사도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받아 추억담같은 이야기를 듣고 수집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옛 동화나 민요를 수집하는 민속학자 활동에 가깝지요. 차이점이라면 디미트리오스는 정말로 사악한 범죄자이며, 이야기되는 추억담은 모두 범죄라는 정도고요.

읽으면서 아직도 걸작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흔해빠진 스파이 소설이나 느와르, 하드보일드 물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고급스러움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빼어난 묘사들과 생생한 캐릭터들 덕분입니다. 유유부단하며 체면을 중시하는 속물이자 샌님인 주인공 래티머부터 눈부실정도로 생생해요.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맹이는 없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모습은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전해 줄 정도입니다. 탐정 수사, 모험물 주인공이 이렇게 평범하고 소심하기도 힘든데, 거의 백여년전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해 내고 있는게 놀랍네요.

조역들도 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죄물, 특히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에서 자주 등장했던 쌍욕을 하는 범죄자, 보자마자 사람을 죽이는 킬러, 여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마초와 폭력배들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악한 범죄자 디미트리오스조차도 나름 신사적이며, 그를 등쳐 먹으려는 시시한 사기꾼 악당 피터슨조차 철학사를 옆에 끼고 사는 인물로 그려지는 등, 후대의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와는 캐릭터가 사뭇 달라요. 요즘 작품이라면 당연시되는 불필요한 정사 장면 묘사나 고어, 포르노에 가까운 혐오스러운 폭력 묘사 역시 찾아보기 힘들고요.

실제 등장은 마지막 몇 페이지에 그치는 디미트리오스의 존재감도 발군입니다. 그야말로 '씬 스틸러' 로 돈과 권력을 탐하는 순수한 악당이지만, 기묘한 조직력과 행동력, 관찰력이 잘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가난뱅이 악당 시절, 이웃이었던 프레베자를 범죄에 끌어들이며 한 말이 기억에 남네요. "내가 당신을 고른 건, 비록 당신이 무르고 감상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약삭빠르고 쉽게 흥분하지 않기 때문이야. 내가 그날 당신 방에 갔을 때, 나는 당신이 커튼에 돈을 숨겨 놓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당신 같은 사람들은 늘 커튼에 돈을 숨겨 놓거든. 낡은 수법이지. 하지만 당신은 초조한 눈으로 핸드백을 계속 주시했고, 그래서 나는 당신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어." 라는데,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프레베자는 자기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 말에 넘어가 버리고 말지요.

디미트리오스의 여러 악행을 1920~30년대 유럽에서 일어났던 실제 역사에 잘 녹여낸 전개도 그럴듯합니다. 예를 들자면, 디미트리오스는 1922년 터키와 그리스 전쟁으로 벌어진 스미르나 대학살 당시, 피난민들 움직임을 이용하여 그리스로 도주했고, 1924년에 터키 지도자 케말 퍄사 암살 음모에 가담했었으며, 1926년에 유고슬라비아가 오트란토 해협에 설치한 기뢰 위치가 기록된 지도를 빼돌려 프랑스에 팔아먹으려고 했다는 식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약간 팩션 느낌도 전해 주고요.
래티머가 당시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이스탄불에서 스미르나, 아테네, 소피아, 제네바를 거쳐 파리로 향하는 여정도 마찬가지로 볼 만 합니다. 그런데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4,162Km에 달하는 거리더라고요.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렇게 긴 수사 여행을 떠나는 래티머도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긴 하네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 도드라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수사는 별 볼일 없고 - 영국인 작가가 밝혀낼 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에 그칩니다. - 디미트리오스의 악행과 범죄는 모두 관계자 증언만 있는 탓입니다. 증거라고는 전무합니다.

그나마 딱 한 가지, 이전 디미트리오스를 협박했던 피서르가 살해된 후 디미트리오스로 위장된 경위를 설명하는 피터슨의 추리 정도만 볼만 했습니다. 여러명이 함께 요트 여행을 간 뒤, 다른 승객이 내릴 때 피서르에게만 따로 이스탄불로 함께 가자고 유혹했다는 추리지요. 그리고 이스탄불에서 피서르를 살해하고 자기 옷을 입혀 바다에 버린 후, 자신은 피서르의 이름으로 투숙한 뒤 떠난 겁니다.
다만 피서르가 자신이 협박하던 디미트리오스와 선뜻 단 둘이 항해를 떠났다는건 설명하기 어렵고, 역시나 증거라곤 하나도 없다는 문제는 큽니다.

또 래티머가 확인했던 사체가 사실은 디미트리오스가 아니라 피서르였다 한 들, 이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프랑스 경찰이 뭘 할 수 있지도 못해서 딱히 디미트리오스에게 위협이 될 사건도 아닙니다. 피터슨이 협박하자 디미트리오스는 살인으로 입을 막으려 하는데,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보였거든요. 

그리고 피터슨이 디미트리오스에게서 백만 프랑을 울궈낸 뒤, 당연한 보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에요. 온갖 범죄를 저질러 왔던 악당인데, 협박범을 그냥 놔 둘리 없잖아요? 래티머도 위험한건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협박은 엄연한 범죄인데 래티머가 공범으로 함께 자리하는 전개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웠어요.

피터슨과 래티머를 궁지에 모는 데 성공한 디미트리오스가 래티머를 제압하지 못해 최후를 맞는 결말도 많이 시시했습니다. 래티머는 바닥 양탄자에 미끄러진 탓에 디미트리오스가 쏜 총알을 피할 수 있었고, 이어진 격투로 총을 빼앗는데 성공하는데, 이렇게 운과 우연에 의해 살아남는게 소시민 래티머에게 어울리기는 하지만 조금 더 정교한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고급스러움을 얻기 위해 도입한 장황하면서 옛스러운 묘사, 그리고 느릿느릿한 전개와 말투는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고급스러움의 반대급부로 지루함이 생겨난 셈이지요. 예를 들어 제목은 래티머가 디미트리오스를 처음 만났을 때 떠오른, '인간은 악마의 가면처럼 얼굴을 사용한다. 얼굴은 자기감정을 보충해 주는 감정을 타인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다.' 라는 상념에서 비롯된겁니다. 얼굴이 가면같다니! 멋지긴해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발표 당시에는 걸작이었을테고, 지금 읽어도 멋진 작품이기는 하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추리적인 요소와 재미 측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감점합니다. '추리' 보다는 '순문학'에 가까운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열린책들'에서 '세계문학' 으로 출간한게 이해가 됩니다.

덧 1 : 해설이 아주 좋습니다. 서점에서 뒷부분 해설만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덧 2 : 원래 "디미트리오스의 관"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해설에 따르면 원래는 "가면"이 맞다고 하는군요. 미국 출간 당시 제목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도 관 보다는 가면 쪽이 작품에 더 적절합니다.

2020/09/01

익명의 전화 - 야쿠마루 가쿠 / 최재호 : 별점 1.5점

익명의 전화 - 4점
야쿠마루 가쿠 지음, 최재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 전, 담당도 아니었던 아라이 사건을 수사하다가 누명을 쓰고 경찰에서 쫓겨난 아사쿠라는 그 뒤 가족과도 등을 돌렸다. 그러나 딸 아즈사가 유괴당한 뒤, 유괴범을 홀로 잡으려다가 유괴범들의 목적이 3년 전 사건의 진실이라는걸 알게 되는데...

흥미를 자아내는 설정, 몰입감을 주는 전개로 다수의 인기 작품을 발표한 작가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도 도입부만큼은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야기의 설득력이 낮은 탓입니다.
3년 전, 마약에 취해 사고를 일으켜 유치원생을 포함한 7명을 사망케 한 아라이 사건의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라이 사건을 몰래 수사하다가 경찰 조직에 의해 인생을 망친 경찰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고요. 그렇다면 당연히 그 경찰을 만나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다시 떳떳해지자고 설득하는게 순서일겁니다. 그런데 대뜸 유괴부터 한다? 대체 어디서 나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유괴범들이 나오미와 아사쿠라가 몸값을 들고 뺑뺑이 돌게 만들 이유도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몸값은 아라이 사건의 진상이라고 요구하면 되니까요. 경찰인 치하루가 유괴범 중 한 명이었으니, 뺑뺑이를 통해 경찰 신고 여부를 파악할 필요도 없어요. 오히려 이 과정에서 아사쿠라가 유괴범으로 몰리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생겨서 조사만 불편해지고,1억이라는 돈을 낭비하기만 했을 뿐입니다. 심지어 1억은 마약상에게 준거라 동정의 여지도 없고요. 

뺑뺑이 과정도 복잡하게 서술하여 치밀해 보이지만 나오미가 범인이 준, 거는게 불가능한 핸드폰을 가지고 범인에게 휘둘리는 장면에서 메모를 적어 역무원이나 건물 경비원에게 줄 생각은 왜 못했는지 등의 단점만 눈에 띕니다. 유괴극이니 반드시 몸값 전달하는 장면이 등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등장한 장면이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아사쿠라가 이미 남과 같은 자신에게 처음 전화가 걸려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내 나오미가 경찰에 신고하려는걸 막는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건 마찬가지에요.

이후 아사쿠라가 아라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은 더 가관입니다. 현직 경찰 시절에 몇일에 걸쳐 조사해도 밝혀내지 못했던 진상을, 경찰에 쫓기는 수배자 신세로 하룻밤만에 알아낸다? 설득력이 없습니다. 사기꾼 범죄자 키시타니의 도움이 있기는 하지만, 현역 경찰 신분에서 발휘할 수 있는 수사력과는 비교하기 어렵지요.
조사 방법도 스스로를 미끼로 내걸어 경찰의 움직임을 떠 본다던가, 급작스럽게 카라키를 불러낸 뒤 먼 곳에서 쌍안경 관찰로 의중을 파악한다던가, 일부러 아라이의 공범이었던 이와키가 속한 조직에게 잡혀간다는 식으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계획과는 무관한 즉흥적인 발상 투성이입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도 맞으면서 버티는 '몸빵' 밖에는 없고요.

진상을 알아낸 것도 아라이의 공범인 전직 경찰 이와키를 찾아내 이야기를 듣는게 전부인데, 역시 어처구니 없습니다. 사고는 도주하던 아라이가 경찰의 총에 맞아 일어났으며, 아라이는 유력 정치인 니시자와를 협박하던 범인이었기 때문이라는게 겁니다. 니시자와는 매춘부 아케미와 마약을 하다가 아케미가 죽게되자 아는 경찰을 통해 사건을 무마시키켰는데, 이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던 거지요. 그래서 니시자와와 연결되었던 경찰이 무리해서 협박범을 잡으려다가 사고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니시자와의 관계 여부를 떠나서 일곱 명이나 죽은, 그것도 희생자 중에 어린 유치원생이 포함된 사건을 덮는다는게 21세기에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총소리를 들은 증인이 분명히 있었고, 당시 수사를 하던 아사쿠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였는데 말이죠. 게다가 생존한 유치원 버스 운전사 미카미의 입을 막기 위해 그를 살해했다? 이 정도면 거의 국가에서 움직여 조작한 수준입니다. 주택가에서 차량 추격 중 총질을 한다는 헐리우드 영화스러운 발상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또 이 진상은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어색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사건 은폐에 앞장서던 카라키가 나오미에게 위증을 강요하는 대화는 다 녹음되었고, 카라키가 아사쿠라를 협박하는 영상까지 찍혀 완벽하게 외통수에 몰리게 되기는 하지만 , 7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은 사고를 덮었는데 고작 이 정도 사건을 덮지 못한다는건 설득력이 약한 탓입니다. 아사쿠라가 이와키로부터 확보한 증거도 빈약하기 짝이 없으니까요. 최소한 니시자와와 아케미가 함께 마약을 하고 정사를 나누던 비디오 테이프는 확보했어야 했습니다. 지문이 묻은 마약 봉투와 영수증 따위는 증거가 될 수 없어요. 봉투와 영수증의 지문이야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잖아요? 솔직히 증거로서의 효력은 없습니다.
설령 증거가 된다고 한 들, 니시자와가 마약을 했다는 증거이지 그가 아케미 사건, 그리고 아라이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사건 은폐에 앞장섰던 장인 마사타카가 아사쿠라의 호소에 개심해서 자수한다는 끝맺음은 최악 중 최악이고요.

그 외에도, 유괴 수사를 벌이는 와중에 유괴 아동의 어머니인 나오미가 태연하게 외출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돌아다니는 전개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괴와 상관없는 제3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조력자로 등장하는 토다의 존재도 불필요했습니다. 나오미가 아사쿠라의 진심을 알게되는 계기가 된 증언을 한 게 전부니까요. 이는 치하루가 해도 되는 역할입니다. 토다의 과거도 뻔하디 뻔하고요. 단순한 분량 늘리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재미와 설득력, 현실성 등 뭐 하나 갖추지 못하고 흔해빠진 설정들로만 이루어진 졸작입니다. 찾아서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0/08/28

사고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유혜자 : 별점 3점

사고 - 6점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유혜자 옮김/아래아

섬유회사에 다니는 나이 마흔다섯 살의 신체 건강하고 외무 준수한 알프레도 트랍스는 그의 애차 스투데베커의 급작스러운 고장으로 한 시골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트랍스를 저녁 식사와 함께 하는 그들의 게임에 초대하고, 트랍스는 초대를 받아들였다. 게임은 전직 판사, 검사, 변호사에 사형 집행인이었던 집주인과 손님들이 벌이는 모의 법정 놀이로, 그 날은 트랍스가 피고가 되어 그의 유죄를 증명하게 되는데....

독일 작가 프레드리히 뒤렌마트의 짤막한 단편입니다. 평범한 영업맨으로 보였던 트랍스가 상사였던 기각스를 해치우기 위한 범행을 계획하고 실천한 살인범이라는게 드러난다는 내용으로 일종의 완전 범죄물이지요. 

트랍스는 직장 상사 기각스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서 기각스가 심장이 약하다는 걸 알게되고요. 그 뒤 회사 내에서 기각스와 잘 소통하는 직원에게 불륜을 털어놓아 기각스가 그 사실을 알게끔 만들었고, 그 탓에 기각스는 심장 이상으로 죽고 맙니다. 

문제는 어느정도 고의였다 하더라도 트랍스의 행위만으로는 범행을 증명하기는 애매하다는 점입니다. 진지한 법정에서라면 트랍스가 유죄 판결을 받는건 불가능했을거에요. 그런데 이를 '모의 법정 놀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돌파하고 있습니다. 모의 법정 놀이는 트랍스가 방문한 시골 마을에서, 은퇴한 옛 법조인들이 함께 하는 저녁 만찬에서 벌어지는 놀이인데, 판사와 검사, 변호사와 사형 집행인까지 조합은 완벽하지만 놀이인 탓에 분위기는 시종 일관 난장판입니다. 참석자들이 나오는 음식과 술을 과다 섭취한 탓도 있고요. 이렇게 반쯤은 미쳐 날뛰는 광란의 도가니탕이라 트랍스마저도 스스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할 정도로 휩쓸려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스스로 범행을 저지른 살인자임을 자각하게 되지요. 

이렇게 왁자지껄 떠들썩한 모의 법정 놀이는 그야말로 현대적이면서도 참신한 아이디어였습니다. 1956년 출간된 작품이니 무려 반세기도 더 지난 고전인데도 말이지요. 작중에 나오는대로 소크라테스, 예수, 잔다르크, 드레퓌스의 모의 법정 놀의 결과도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이러한 현대적인 설정과는 반대로 혼외 정사, 불륜을 전혀 범죄라 인지하지 못하는 트랍스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시대를 느끼게 해 주고요.

하지만 마지막 결말은 좀 뜬금없었습니다. 트랍스는 자신이 완벽한 범죄를 저지른 전능한 범죄자로 인식되어 유죄, 그리고 사형 판결을 받아 굉장히 기뻤던 나머지, 법정 놀이를 완벽하게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하지만 오히려 남은 전직 법조인들에게는 짜증나는 결과였다는 결말인데, 납득이 가지는 않았어요. 사람은 모두 죄를 짓기 마련이고, 인생사는 결국 희극이라는걸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였을까요? 짐작하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충분히 좋은 작품입니다. 모의 법정 놀이라는 아이디어도 기발하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굉장히 짤막하고 읽기도 편한 만큼,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작가의 이름값(?)도 있는만큼, 읽고 난 뒤의 만족감은 두 배 이상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2020/03/28

마츠모토 세이쵸 드라마 스페셜 : 지방지를 사는 여자 - 작가 스기모토 류지의 추리 : 별점 1.5점

松本清張ドラマスペシャル 地方紙を買う女~作家・杉本隆治の推理!!

마츠모토 세이쵸의 단편을 TV 특집극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1, 2부 구성으로 합쳐서 약 100분 분량 정도 됩니다. 마츠모토 세이쵸도 좋아하고, 원작도 좋아했지만 존재를 몰랐다가 인터넷을 통해 우연히 알게되어 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주연이 "후루하타 닌자부로" 타무라 마사카즈인데다가, 범인, 악역, 비운의 히로인, 팜므 파탈 등으로 100분 내내 팔색조 매력을 뽐내는 상대역은 오랫만에 본 히로스에 료코라 더욱 반가왔습니다.

원작과 동일한 도입부는 상당히 흥미진진합니다. 도쿄에 사는 여성이 추리 소설가 스기모토 류지의 지방지 연재 소설을 마음에 들어해서 구독을 신청하자 이 사실을 작가는 기뻐하지만, 한창 재미있을 무렵 구독을 끊는 행동에 모순을 느낀 작가가 그 이유를 찾아 나선다는 부분인데, 지금 보아도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였어요.

하지만 이후 드라마만의 독자적인 설정과 전개는 모두 지루합니다. 정확하게는 류지와 조수 후지코의 간단한 탐문으로 요시코가 범인이라는걸 눈치챈 다음부터요. 위기를 느낀 요시코가 귀여운 척, 교태를 부리며 류지를 유혹하는 둘의 밀땅이 지나치게 길며, 이 과정에서 아무런 긴장감도 느낄 수 없는 탓이 큽니다. 요시코가 류지를 죽여서 입을 막는건, 그녀와 류지의 관계를 온갖 주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서 불가능하니까요. 심지어 류지는 수사 내용 공유를 위해 찾아온 경찰 2명 앞에서, 요시코가 함께 여행가자며 보낸 편지를 읽고 '나를 죽일 생각이야'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요시코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정황 증거 뿐으로, 경찰도 진작에 포기하고 자살로 처리한 사건일 정도인데 왜 요시코가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 범인인을 밝히고 자수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청산가리를 들켜서라는 이유는, 들키는 상황이 작위적이라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그리고 작품이 쓰여진 시기에는 분명 '지방지'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었을테고, 이를 손에 넣기 위해 직접 지방지 구독을 신청한다는 설정은 충분히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시대에 지방 뉴스를 보기 위해 핑계를 대 가며 지방지를 도쿄로 정기 구독 한다는 발상은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이잖아요? 정기 구독 신청도 온라인으로 하면 될 테고요. 저만 해도 이 드라마에 나오는 '신문' 을 실제로 손에 잡아 본게 최근 몇 년 동안 드뭅니다. 1950년 대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온건 너무 안일한 발상이었습니다.
안일하고 편의적인 발상은 그 밖에도 차고 넘칩니다. 류지의 조수 후지코는, 원작에서는 정사를 가장하기 위한 역할 정도에 불과하나 드라마에서는 비중을 엄청 키웠죠. 그러나 안 좋은 클리셰는 몽땅 모아놓은 - 덤벙대고, 시끄럽고, 참견쟁이에다가 오버도 지나친 등 - 짜증나는 캐릭터이며, 등장하는 이유 자체를 잘 모를 정도로 하는 일도 없습니다. 요시코의 남편인 장관 비서 하야오 등 다른 캐릭터들도 마찬가지. 특히 하야오가 압력을 넣어 류지가 사건 수사에서 손을 떼게 만드려는 장면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이게 경찰인지 야쿠자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나마 타무라 마사카즈의 추리소설 작가 연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히로스에 료코도 류지를 유혹하는 장면까지는 그럴싸했고요. 위 사진처럼 두 배우의 합은 잘 맞는 편입니다. 배우들 이름값에 걸맞게 연출과 촬영도 괜찮고 음악도 효과적으로 사용된 편입니다.

하지만 좋은 점은 이게 전부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타무라 마사카즈에 대한 개인적 호감, 히로스에 요소를 다시 만난 반가움 외에는 시간 낭비에 불과했습니다. 불필요한 요소를 싹 들어내고 원작이 발표되었던, 지방지가 나름의 가치가 있었던 시기를 무대로 한 시간 남짓한 분량으로 줄였더라면 훨씬 나았을 겁니다. "1년 반만 기다려"도 그렇고, 왜 좋은 원작을 멋대로 손대고 늘려서 영상화하는지,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네요.

2019/09/22

진실의 10미터 앞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3점

진실의 10미터 앞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프리랜서 기자인 다치아라이 마치가 등장하는 단편들을 수록한 요네자와 호노부의 단편집입니다. 

다치아라이 마치는 '고전부'나 '소시민' 등 다른 시리즈 캐릭터에 비하면 지명도가 낮은 편입니다. 등장 작품이 "안녕 요정", "왕과 서커스" 두 편 뿐이며 그나마도 "안녕 요정"에서는 주인공이라고 하기 힘든 탓입니다.

작품 특징이라면 웃음기를 쫙 빼고 서술되고 있으며 살인이나 자살과 같은 강력 사건들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 모두요. 대부분 비극이거나 씁쓸한 뒷 맛을 남긴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이야기에 '기자' 라는 직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조금씩 다른 해석으로 실려있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이야기 속 다치아라이의 취재는 대다수 독자를 위해 진실을 규정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극소수의 독자를 위해 눈에 보이는 진실이 아닌 그 이면을 들춰내어 밝혀내고,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입게된다는 내용이거든요.

이를 화자인 '나'가 다치아라이 마치인 "진실의 10미터 앞"에서 시작해서 '나'가 범인인 "정의로운 사나이", 다른 기자가 화자인 "고이가사네 정사", 3인칭 전지적 관찰자 시점인 "이름을 새기는 죽음", 그리고 취재에 동행한 제 3자가 화자인 "나이프를 잃은 추억 속에"와 사건의 주요 관계자가 화자인 "줄타기 성공 사례"와 같이 다양한 시점 변화를 통해 강조하는 솜씨도 인상적입니다.
이러한 묵직한 내용과 현란한 기교는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 스스로 고교생 일상계에서 벗어나 진지한 주제를 다루고 싶었던 욕심에서 비롯된게 아닐까 싶네요.

작가의 이름값에 걸맞게 추리적으로도 꽤 괜찮습니다. 사소한 단서에서 진실을 끌어내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상당히 설득력이 높은 덕분입니다. 실제로 있음직한, 생활감 넘치는 단서와 전개는 작가의 특기인 일상계 추리물을 연상케 하고요. 전화 통화 내용만 가지고 자신이 찾는 인물의 소재를 밝혀내는 과정을 그린 "진실의 10미터 앞", 자살을 각오한 고교생 연인의 노트에 쓰여진 '살려줘'라는 글귀, 그리고 함께 죽지 않은 기묘한 현장에서 다른 사건과의 관련성을 눈치챈다는 "고이가사네 정사", 한 노인의 고독사 이면에 있는 진상을 그린 "이름을 새기는 죽음"이 특히 괜찮았습니다.

조금 억지스러운 이야기도 없지는 않고, 기자 의식을 무리하게 집어넣은게 아닌가 싶은 이야기도 있기는 합니다. 일본 전국을 누비지만 기묘할 정도로 여정 미스터리 느낌이 나지 않는것도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약간 아쉽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전체적으로 완성도 높은 수작 단편집이라 생각되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팬이시라면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나처럼 작품별로 상세하게 소개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진실의 10미터 앞"

나 다치아라이 마치는 사진기자 후지사와 요시나리와 함께 야나마시로 향했다. 도산한 벤처 기업 퓨처스테어 홍보 담당인 하야사카 마리가 실종되었는데, 그녀의 행방을 찾을만한 단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단서는 그녀가 여동생과 통화한 통화 기록 뿐으로, 다치아라이는 통화 기록을 토대로 야마나시의 명물 호토를 파는 가게 중 한 곳을 특정하여 그녀를 발견하는데 성공한다.

통화 기록 속에 숨겨진 몇 가지 단서를 통해 하야사카 마리의 행적을 밝혀내는 추리가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타이어 문제로 움직일 수 없다'에서 눈이 내린 지역을, '우동 같은 음식'으로 야마나시 명물 '호토'를, 술에 취했다는 말을 통해 호토와 술을 함께 밤 늦게까지 파는 가게를 찾고 '말도 잘하는 멋진 남자'에서 마지막 목격자인 외국인 가게 종업원을 찾아내는 이야기로 모두 이치에 합당하고 설득력이 높습니다. 추리만으로도 별점 3점은 충분한 좋은 작품이지요.

하지만 숨은 그림 찾기같은 추리 외의 이야기 자체로는 별다른 내용은 없습니다. 하야사카 마리는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고, 관련된 기사도 쓰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작품들과 같은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에는 좀 부족해서 아쉽습니다.

"정의로운 사나이"

막 투신 자살 사고가 일어난 지하철 플랫폼에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초래하는 짜증나는 여기자를 발견하는데... 

20여페이지 남짓한 소품인데 플랫폼 끝이 아니라 중간 지점에서 투신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 아닐까 생각한 다치아라이의 재치는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민폐를 끼치는 인물에 대한 불쾌감'이라는 동기도 현대 사회에서는 충분히 있음직 하고요.

그러나 그 외의 내용은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범인이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다치아라이를 관찰한다던가, 다치아라이의 행동을 민폐로 여기고 불쾌해한다던가 하는 설정과 전개 모두요. 기자 의식을 다룬 부분도 짤막하게 등장하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중요한 내용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사건을 만나 기쁘다는게 진심인지 아닌지는 결국 밝혀지지도 않고요. 한마디로 가벼운 소품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고이가사네 정사"

미에 현에서 고교생 2 명, 구와오카 다카노부와 가미조 마리의 동반 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주간 심층"의 기자 쓰루는 현지 취재를 나서서 코디네이터 다치아라이와 함께 행동하게 되었다. 유언장에 남겨져 있던 '살려줘'라는 글귀와 고교 선생님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다치아라이는 이 사건이 의원 폭탄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고 이 정보를 쓰루와 공유하는데...

가족을 통해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여고생과 그녀를 돕지못해 좌절한 남고생이 함께 자살한다는 정사 사건 속 또다른 진상을 밝혀낸다는 이야기입니다. 함께 죽기를 원했던 둘이었는데, 왜 마리만 칼에 찔려 죽고 다카노부는 물에 빠져 교각에 걸린 사체로 발견되었는지?와 유언장에 남겨진 글귀, 그리고 현장에 남겨져 있던 와인 속 맹독인 '황린'을 통해 진상에 이르는 과정이 합리적이면서도 깔끔합니다. 그나마 믿을만하다 생각했던 '선생'이 사실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 쓰레기로 둘의 죽음을 자신의 범행 은닉에 이용했다는 진상과 결말은 굉장히 씁쓸하면서도 잔혹하고요.

다치아라이가 주변인처럼 그려지며 그녀가 취재하는 의원 폭탄 사건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왜 시모타키 선생이 의원들에게 발화 폭탄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요. 그래도 추리와 이야기 전개 모두 빼어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이름을 새기는 죽음"

중학생 히노하라 교스케는 이웃집 노인 다가미 료조가 고독사한걸 최초로 발견했다. 얼마 뒤 프리랜서 기자 다치아라이 마치가 그를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고, 교스케는 그녀의 취재에 동행하는데...

다가미 료조가 지역 신문에 투고한 글과 다른 사람의 투고글, 그리고 다가미 료조의 집에 남겨져 있던 엽서 필적을 통해 피해자의 아들 다가미 우노스케가 아버지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진상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다가미 료조가 '직함'에 연연하여 '이름을 새기겠다'는 사명감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정이 돋보입니다. 기묘하지만 아주 그럴싸하거든요. 실제로 직함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많은게 사실이기도 하니까요. 이를 노인 고독사와 연결하여 전개한 솜씨도 아주 일품이에요. 

아울러 다가미 우노스케가 쓰레기지만 그의 입을 빌어 다가미 료조 역시 나쁜 사람이라고 다치아라이가 결론내리는 마지막 장면은 그녀의 기자로서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멋졌어요. 진실도 좋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와 닿기도 했으니까요. 덕분에 교스케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한 발자욱 더 나아갈 수 있었을테지요.

실제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 속 사건과 독특한 아이디어가 잘 결합한 좋은 작품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 최고 작품으로 꼽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나이프를 잃은 추억 속에"

'나'는 오래전 여동생의 친구였던 다치아라이 마치를 만나기 위해 시골 소도시 하마쿠라를 찾았다. 그리고 다치아라이가 취재하는 유아 살인사건 취재에 동행하며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는데...

"안녕 요정"의 핵심 인물이었던 유고슬라비아 유학생 마야의 오빠가 등장합니다.
그는 다치아라이가 취재하는 마쓰야마 가린 살인 사건 취재에 동행하여, 그 과정에서 다치아라이와 같은 기자에 대한 실망감과 환멸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여주는 '눈' 역할이 아니라 사실을 가공하여 미력하나마 피해자를 구해주려고 노력하는 다치아라이의 진면목을 취재 동행을 통해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건보다는 다치아라이가 어떤 기자인지를 알려주는게 목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는 범인으로 지목된 마쓰야마 가린의 삼촌 마쓰야마 요시카즈의 수기가 일종의 암호라는 암호 트릭물인데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극 중 다치아라이의 말대로 추후 요시카즈가 사실을 고백하고 경찰이 수사에 집중한다면 밝혀낼 수 있는 수준의 사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다치아라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추리물로는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줄타기 성공 사례"

나가노 현 남부를 덮친 수해 현장에서 일흔이 넘은 도나미 부부가 극적으로 구출된다. 부부는 사흘 동안 콘플레이크를 먹으며 버틸 수 있었다. 현장 근처에서 가업을 이어 가게를 운영하는 오바에게 다치아라이가 찾아와 도나미 부부에 대해 물어보는데...

한 여름에 콘플레이크를 무엇에 타서 먹었는지? 가 수수께끼로 등장하는데 이게 왜 수수께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콘플레이크는 꼭 우유에 타 먹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식품이잖아요? 게다가 그게 문제가 된다는 상황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노부부가 전기, 가스가 모두 끊긴 집에 고립된 상황에서 매몰된 이웃집에서 가동되는 냉장고를 사용한게 죄가 될까요? 그 집 음식을 전부 가져다 먹어도 괜찮았을텐데 말이지요. 이런 점을 굉장한 민폐로 여기고 미안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오열하는 노부부의 모습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바는 '행방불명된 사람의 집에 들어가 목숨을 연명한 부부는 비난받을거다' 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야기가 성립된다고 생각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줄 수는 없네요. 추리적으로도 별다른 내용이 없고요. 이 단편집의 워스트 단편으로 꼽겠습니다.

2018/10/19

흑백의 여로 - 나쓰키 시즈코 / 추지나 : 별점 2점

흑백의 여로 - 4점
나쓰키 시즈코 지음, 추지나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에서 일하는 여대생 리카코는 삶의 의미나 재미를 찾지 못한 탓에, 유부남 애인 도모나가의 부탁으로 함께 자살 여행을 떠났다. 아타미의 아가미 깊은 산 속에서 수면제를 다량 복용했지만, 리카코는 구토 증상으로 수면 상태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옆에 누웠던 도모나가가 칼에 찔려 죽었다는 걸 알고 놀란 그녀는 도쿄로 돌아와 도모나가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밝혀내려 하는데...

오랫만에 추리 소설을 집어 들었네요. "일본의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다소 과한 별명의 소유자인 일본의 여성 추리작가 나쓰키 시즈코가 1975년에 발표한 장편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저자의 장편은 두 편인데 나름 복잡한 트릭이 등장하는 "W의 비극"이 평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짝퉁인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는 완벽한 졸작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두 작품 중간 정도 수준이네요.

특징이라면 사회적인 문제, 이슈가 전면에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누구나 쉽게 위조할 수 있는 호적, 호모섹슈얼과 바이섹슈얼, 트렌스젠더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일본 사회파 스릴러, 추리물의 얼개를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청춘 남녀가 등장해서 미궁에 빠진 살인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일본 전역의 여행을 통해 전개되며, 이 와중에 제법 기발한 트릭과 진상이 선보이는 내용은 사회파 작가 중에서도 당시 일본을 평정했던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초기작 영향이 아주 짙게 느껴졌고요. 하여튼, 예상 외의 장르라 놀랐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점, 단점도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들과 비슷합니다. 장점부터 설명드리면, 첫 번째는 쉽게 읽힌다는 점입니다. 도모나가 죽음의 진상을 쫓는 리카코와 실종된 매형 이와타의 행방을 쫓는 다키이가 우연히 만나 함께 사건을 파헤쳐나가는 과정 속에서 잇달아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등 독자의 흥미를 끄는 솜씨가 아주 제법이에요. 펄프 픽션이기는 하지만 읽는 재미만큼은 충분합니다.

두 번째 장점은 나름의 트릭과 더불어 이어지는 반전과 진상이 괜찮다는 점입니다. 도모나가는 자살할 생각이 없었고, 성전환을 한 아내 유키코의 비밀을 알고 협박하던 이와타를 아내가 살해하자 그 시체를 은닉하기 위해 동반 자살을 가장했다는게 진상인데, "성전환 수술"이라는 1975년이라는 시대를 놓고 보면 꽤나 앞서간 소재를 활용한 반전이 돋보여요. 이를 앞 부분에서부터 계속해서 복선을 던져주며 중간중간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흘려서 설득력도 높습니다. 리카코가 남장을 한다던가, 남장을 하면서 기묘한 매력을 느낀다는 묘사는 지나쳤고 복선이 과한 탓에 어느 정도 되면 진상은 눈치챌 수 있기는 하지만요. 참고로 덧붙이자면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 중 1974년 발표된 "흑마술의 여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하는 반전으로, 성전환까지는 아니지만 질 형성술에 대한 내용이 유사한데 아무래도 조금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 번째 장점은 정사를 하러 떠난 아타미로의 여정, 아오야마에서 오모테산도 등 도쿄 시내와 가사이, 이와타의 뒤를 쫓아 헤메는 후쿠오카, 리카코와 도모나가의 고향인 시즈오카 방문 등 다양한 지방을 방문한 묘사들입니다. 디테일도 좋고 생동감이 넘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직접 방문한 느낌이 팍팍 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행이 막 시작되었을 여정 미스터리 느낌인데 이런저런 흥행 요소를 모두 가져다가 인기작을 만드려는 작가의 의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장점으로는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독특한 시각이 빛나는 묘사들을 들 수 있습니다. 죽은 도모나가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는 은빛 예거 르쿨루트, 집으로 돌아온 리카코가 찾은 담배는 오래된 하이라이트, 다키이의 차는 회색 코로나, 다키이가 주문한 술은 미즈와리라는 식의 디테일들이 발군입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묘사는 숨어 살게 된 리카코의 이사 선물이자 집들이 기념으로 다키이가 사온 선물입니다. 인스턴트 커피, 각설탕, 하얀 머그잔 두 개인데 정말 센스가 대단해요. 또 월경곤란증 치료약으로 경구피임약으로도 알려져 있는 필이 주요 단서로 쓰인 점은 확실히 여성 작가라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었고요. 중간에 지하철에 우연히 본 여성을 보고 스스로 남장을 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여성이기에 할 수 있는, 그런 묘사였다 생각되네요. 남과 여, 누명을 쓴 리카코와 진범 등 정 반대 상황을 은유하여 붙인 제목도 멋집니다. 아마도 모리무라 세이이치였다면 굉장히 직접적인 제목이었을테지요.

그러나 흥행을 노리고 이런저런 요소를 모두 모아놓기는 했지만, 모든게 구태의연하다는 단점도 명확합니다. 질퍽한 정사 장면에서 시작되는 첫번째 문단부터 흥행을 노린 티가 물씬 나고요. 또 아무리 이인증이라는 병을 조금 앓고 있더라도 꽃다운 스물한살 여대생이 불장난 같은 불륜 상대, 그것도 열 일곱섯 살이나 많은 연상의 남자와 동반 자살을 쉽게 결심한다는 설정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럴거면 보다 깊은 관계였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불거지는 '정사'라는 소재는 구태의연의 극치라 할 수 있지요.

정사 이후의 과정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뻔하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리카코와 다키이가 서로 만나게 되는 상황부터가 그러합니다. 리카코가 도모나가의 집을 찾아가는거야 그럴 수 있다 쳐도, 다키이가 도모나가의 집을 찾아가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에 불과하니까요. 게다가 매형 이와타가 실종되고 사흘만에 범인의 집을 찾아내고, 나흘간 잠복하다가 리카코를 만나게 되는 식인데 이 정도면 경찰이 도대체 왜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훨씬 유능하잖아요?
이어지는 전개도 작위적이고 우연에 기반한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가사이가 죽기 전 마키노 의사의 이름을 남긴게 가장 억지에요. 그냥 "유키노는 남자였다" 라고 이야기하는게 당연합니다. 의사의 입을 통해 성전환의 과정을 설득력있게 표현하려 한 작가의 의도는 알겠지만, 도가 지나쳐 이야기가 산으로 간 느낌입니다.
그 외에도 호적 위조를 통한 신분 세탁이 반복되고, 유키노의 무모한 범행이 성공리에 거듭되는 전개도 별다른 고민이 느껴지지 않아 별로였어요.

이렇게 장점, 단점이 명확한 작품으로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들과 가장 큰 차이점인 해피 엔딩이라는 결말은 나쁘지 않으며 쉽게 읽히기는 하는 만큼, 이 작품으로 사회파에 입문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다키이가 요 몇 주 동안 쓴 돈이 도대체 얼마나 될지 궁금해서 대충 큰 비용만 따져 보았습니다.

  • 후쿠오카 비행기 2명 왕복
  • 리카코가 묵는 싱글룸 2박에 다키이가 묵는 스테이션 1박 호텔비
  • 꽤나 장거리 (합쳐서 시외 편도 한시간?) 왕복 택시비
  • 기차로 한시간 반 정도 걸리는 시즈오카행 신칸센 왕복 비용
  • 시즈오카에서 편도 삼십분 정도 택시 비용
  • 마지막 추격에서 삿포로행 비행기 편도 두 장
  • 치토세 공항에서 오카다마 공항까지 택시비
  • 메반베쓰행 비행기 편도 두 장

이를 한국 기준으로 후쿠오카는 부산, 시즈오카는 광주, 삿포로는 제주로 대체해보면 전부 백오십만원 정도 쓴 듯 합니다. 여기에 리카코의 임시 거처까지 마련해 주었고요. 1급 건축사 면허 소유자로 설계부서 내 1팀 주임이라고 하는데, 돈벌이가 꽤 괜찮은가 봅니다.

2018/06/02

주간문춘선정 동서미스터리 100 개정판

하우미스터리에 올라온 주간문춘선정 동서미스터리 100! 저도 예전에 소개했던 1986년 리스트의 신규 개정판입니다.

온라인 사이트에는 50개씩만 실려있는 듯 한데 리뷰를 남긴 작품 (링크), 리뷰는 없지만 읽은 작품 (붉은색)을 체크해 보았습니다. 일본 작품들 중에서는 국내 출간된 39편 중 도저히 읽을 엄두가 나지 않은 "도구라 마구라". "흑사관 살인사건"과 얼마전 출간된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그리고 "모방범"과 "죽음의 샘"의 5편을 읽지 않았네요. 해외 작품은 국내 출간 44편 중 "밀레니엄 1", "본 컬렉터", "흥분"의 3편을 빼고는 다 읽어 보았고요. 와 대단하다! 8편만 더 읽으면 일단은 완전정복이니만큼 당분간은 이 리스트부터 정복해봐야 겠습니다. 딕 프랜시스의 "흥분"은 왜 읽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 2013.02.18 수정 "죽음의 샘" 완독
  • 2013.02.24 수정 "흥분" 완독
  • 2013.03.02 수정 "본컬렉터" 완독
  • 2013.03.08 수정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완독
  • 2017.10.16 수정 "하늘을 나는 말" 완독
  • 2018.3.30 수정 "레이디 조커" 1권 완독
  • 2021.1.3 수정 "비숍 살인사건" 완독
  • 2021.5.7 수정 "통" 재독
  • 2023.2.12 수정 "황제의 코담뱃갑" 재독
  • 2024.11.15 수정 "11장의 트럼프" 완독
  • 2025.04.19 수정 "요이 금병매(금병매 살인사건) 완독
  • 2026.02.26 수정 "십각관의 살인" 추가

아울러 이런 류의 리스트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하락하긴 했지만 이 리스트는 고전 걸작이 많기에 꽤 괜찮다 생각됩니다. 전부 재미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대부분은 자신있게 권해드릴만 하니 아직 읽지 않으신 작품이 있다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일본" 

1위 옥문도, 요코미조 세이시 

2위 허무에의 공물, 나카이 히데오 

3위 점성술 살인 사건, 시마다 소지 

4위 도구라 마구라, 유메노 규사쿠 

5위 화차, 미야베 미유키 

6위 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7위 대 유괴, 덴도 신 

8위 십각관의 살인, 아야쓰지 유키토 

9위 망량의 상자, 교고쿠 나쓰히코 

10위 혼진 살인 사건, 요코미조 세이시 

11위 검은 트렁크, 아유카와 데쓰야 (국내 미출간) 

12위 회귀천 정사, 렌조 미키히코 

13위 용의자 X의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 

14위 흑사관 살인 사건, 오구리 무시타로 

15위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16위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아와사카 쓰마오 

17위 하늘을 나는 말, 기타무라 카오루 

18위 백야행, 히가시노 게이고 

19위 불연속 살인 사건, 사카구치 안고 

20위 시계관의 살인, 아야쓰지 유키토 

21위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시마다 소지 

22위 쌍두의 악마, 아리스가와 아리스 

23위 우부메의 여름, 교고쿠 나쓰히코 

24위 이전 동화, 에도가와 란포 

25위 모래 그릇, 마쓰모토 세이초 

26위 내가 죽인 소녀, 하라 료 

27위 외딴 섬 악마, 에도가와 란포 

28위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다카기 아키미쓰 

29위 레이디 조커, 다카무라 카오루 

30위 요이 금병매, 야마다 후타로

31위 기아 해협, 미나가미 쓰토무 (국내 미출간) 

32위 문신 살인 사건, 다카기 아키미쓰 

33위 리라장 사건, 아유카와 데쓰야 

34위 혼란 계략, 아와사카 쓰마오 (국내 미출간) 

35위 음수, 에도가와 란포 

36위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37위 제로의 초점, 마쓰모토 세이초

38위 11장의 트럼프, 아와사카 쓰마오 (국내 미출간) 

39위 이누가미 일족, 요코미조 세이시 

40위 상자 속의 실락, 다케모토 겐지 (국내 미출간) 

41위 모방범, 미야베 미유키 

42위 한시치 체포록, 오카모토 기도 

43위 아웃, 기리노 나쓰오 

44위 죽음의 샘, 미나가와 히로코

45위 독 원숭이, 오사와 아리마사

46위 산 고양이의 여름, 후나도 요이치 (국내 미출간) 

47위 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48위 태양 흑점, 야마다 후타로 (국내 미출간) 

49위 무당거미의 이치, 교고쿠 나쓰히코 

50위 불야성, 하세 세이슈

"해외" 

1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2위 Y의 비극, 엘러리 퀸 

3위 셜록 홈스의 모험, 아서 코난 도일 

4위 환상의 여인, 윌리엄 아이리시 

5위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6위 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7위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8위 브라운 신부의 동심, G. K. 체스터튼 

9위 양들의 침묵, 토머스 해리스 

10위 화형 법정, 존 딕슨 카

11위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12위 밀레니엄 1, 스티그 라르손 

13위 죽음의 키스, 아이라 레빈 

14위 X의 비극, 엘러리 퀸 

15위 소름, 로스 맥도널드 

16위 세 개의 관, 존 딕슨 카 

17위 재칼의 날, 프레드릭 포사이드 

18위 주교 살인 사건, S. S. 반 다인 

18위 독수리 내리다, 잭 히긴스 

20위 독 초콜릿 살인 사건, 앤서니 버클리 콕스 

21위 800만 가지의 죽는 방법, 로렌스 블록 

22위. 본 컬렉터, 제프리 디버 

23위 그리스 관 미스터리, 엘러리 퀸 

24위 제제벨의 죽음, 크리스티아나 M. 브랜드 

25위 심야 플러스 원, 개빈 라이얼 

26위 별의 계승자, 제임스 P. 호건 

27위 화이트 재즈, 제임스 엘로이 (국내 미출간) 

28위 노란 방의 비밀, 가스통 루르 

29위 무죄 추정, 스콧 터로 

30위 웃는 경관, 셰발과 발뢰 

31위 시행 착오, 앤서니 버클리 콕스 

32위 쉐도우 81, 루시엔 네이험 (국내 미출간) 

33위 통, F. W. 크로포츠 

34위 모르그가의 살인, 에드거 앨런 포 

35위 흥분, 딕 프랜시스 

36위 몰타의 매, 대실 해밋 

37위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존 딕슨 카 

39위 붉은 수확, 대실 해밋 

39위 시간의 딸, 조세핀 테이 

40위 경찰 서장, 스튜어트 우즈 (국내 미출간) 

41위 신데렐라의 함정, 세바스티앙 자프리조 

42위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엘러리 퀸 

43위 크리스마스의 프로스트 경부, R. D. 윙필드 (국내 미출간) 

44위 유다의 창, 존 딕슨 카

45위 나인 테일러스, 도로시. L. 세이어스 

46위 채찍을 쥔 오른손, 딕 프랜시스 

47위. 버스커빌 가의 개, 아서 코난 도일

48위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 이든 필포츠 

49위 점핑 제니, 앤서니 버클리 (국내 미출간) 

50위 보이지 않는 그린, 존 토머스 슬라덱 (국내 미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