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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0

올빼미의 울음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홍성영 : 별점 3.5점

올빼미의 울음 - 8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연히 엿본 여자에게 마음이 팔린 로버트는 그녀를 스토킹하다가 발각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 제니가 로버트를 사랑하게 되어 약혼자 그렉과 파혼했다. 앙심을 품은 그렉은 로버트를 습격했지만 행방불명되었고, 로버트는 그렉 살해 누명을 뒤집어 썼다. 이후 주변의 시선과 로버트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 제니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마는데....

서늘한 심리 묘사 측면으로는 장인의 반열에 오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장편입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처음 집어들었습니다. 제가 별로 좋아라 하지 않는 '버티고' 레이블이라 크게 기대도 하지 않았어요. '버티고'에서 출간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또다른 작품인 "심연"은 영 별로였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 작품, 최고입니다. 나름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주인공의 삶에 균열이 생기고, 그것이 점차 커져가 그와 그 주위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특히나 중반 이후, 제니의 약혼자 그렉이 사라진 상황에서 그를 죽인 살인자로 몰린 이후부터는 그야말로 압도적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에 무너져가는 제니와 로버트의 삶에 대한 묘사가 그만큼 대단하거든요. 무엇하나 잘못한 것이 없는데 서서히 궁지에 몰리는 전개는 보는 내내 굉장히 답답하고 짜증나지만,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의 몰입감을 선사해줍니다. 비유하자면 야구 응원팀이 매 회 실점하는 상황에서도 계속 무사 만루 찬스를 잡지만, 마지막 회까지 한 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느낌이랄까요? 무언가 해결될 것 같지만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수렁에 계속 빠지는 전개는 정말이지 똑같아요.

이 와중에 등장하는 주변인들에 대한 세세한 묘사 역시 수렁에 빠지는 과정에 실감을 더해 줍니다. 유일한 친구로 믿었던 직장 동료마저 함께 하기를 거부하고, 온 동네 사람들이 살인자라 욕하며, 심지어 경찰마저도 면전에서 대 놓고 비웃는 등의 묘사가 이어지는데 독자라서 정말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끔찍해요. 그렉이 로버트를 죽이려고 총을 들고 쳐들어온 날, 운 좋게 그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로버트를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그렉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는 이웃 콜비씨 에피소드는 그 중에서도 백미입니다. 흉기를 들고 쳐들어 온 낯선 남자를 제압했지만, 이웃이 나보다 이 남자를 더 신뢰하는 상황인 것인데 이 쯤 되면 모든 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밖에는 안 들것 같아요. 출구없는 감옥과 다를게 없으니까요.

그런데 주인공 로버트가 제대로 된 인물은 아니라는 단점은 좀 큽니다. 아주 평범한 인물이었다면 이 상황이 더 끔찍하게 다가왔겠지만, 그가 제니의 집 앞을 일부러 배회하고 스토킹한 것은 사실인 탓입니다. 제목처럼 올빼미가 밤에 울 듯, 그의 밤 산책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 되었거든요. 그가 밤 산책을 하지 않았다면, 뒤 이어질 엄청난 비극 - 세 명의 죽음 - 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점에서 면죄부를 주기 힘듭니다. 올빼미만 울지 않았더라면 훨씬 좋았을테지요...
제니의 자살 역시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탓도 있고, 그 외에도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몇몇 묘사들도 로버트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또 제니가 낯선 스토커와 곧바로 사랑에 빠진 이유, 로버트의 전처 니키가 그를 파멸시키지 못해 안달이 난 이유 등은 제대로 설명되지 못해 답답합니다. 캐릭터 설정이 그닥 탄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제니는 동생의 죽음으로 죽음과 항상 맞닿아 있었기에 '죽음'을 상징하는 로버트와 엮일 인연이었다...는 설명(물론 설득력은 없습니다)이라도 있지만 니키, 그렉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못해요. 니키가 왜 로버트를 이렇게까지 미워하는지 - 심지어 자기 돈까지 들여가면서 로버트를 파멸시키려 노력할 정도로 - 독자는 도무지 알 길이 없네요.
그렉은 실연으로 괴로워하는 성인에서 복수와 자기 합리화를 위해 몸부림치는 어린아이로 돌변해서 역시나 영 별로입니다. 제니가 자살한건 로버트 때문이 아니라, 실종된 그렉을 살해했다는 누명 때문이라는 것도 망각한 유아적인 태도에는 몹시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마지막에 술에 취한 그렉에게 니키가 살해당하는 결말은 끔찍하지만 시원해서 나쁘지 않았습니다. 니키가 벌인 그간의 행동은 죽어도 싸다 여겨지니까요. 그렉 역시 보석 기간에 살인을 저질렀으니 전기 의자 행은 피하기 어려울테고요. 이 정도면 9회말까지 시청한 관객을 위한 시원한 역전 홈런 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9회말까지 보는 동안 암에 걸려도 일곱번은 더 걸렸겠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큰 단점 때문에 조금 감점하지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장편 중에서 재미와 함께 서스펜스를 가져다 주는 보기 드문 수작입니다. 명성에 비하면 '재미' 측면에서는 부족했던 작가인데 이 작품은 제가 읽은 하이스미스 장편 중에서는 최고 수준이네요. 아직 읽지 않으신 범죄 문학 애호가 분들께 적극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덧붙이자면, 영화화가 바로 연상될 정도의 묘사가 출중한데 역시나 영화화가 되었더군요. 그것도 1987년, 2009년 두번이나요. 이 중에서도 1987년 작품은 거장 클로드 샤브롤이 감독하기도 했고, 가장 잘 만든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원작 영화 중 한 편이라고도 하니 한번 구해보고 싶군요.

2023/12/02

아내를 죽였습니까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김미정 : 별점 2점

아내를 죽였습니까 - 4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내용,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월터는 신경질적인 아내 클라라 때문에 진절머리를 내던 중 어떤 여자가 고속도로 휴게소 인근 숲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살인 사건 기사를 읽게 되었다. 월터는 남편 키멜이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기묘한 충동에 휩싸여 키멜의 가게를 찾아가기까지 했다.
클라라가 어머니 임종을 지키러 고속버스를 타고 떠난 날, 월터는 그가 상상했던 키멜의 행동대로 고속버스를 뒤쫓아 휴게소까지 달려갔다. 그러나 클라라를 찾지 못해 배회하다가 그냥 돌아왔는데, 클라라가 휴게소 근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사를 맡은 경찰 코비의 추적으로 월터와 키멜은 연결되었고, 키멜을 고문하는 등 코비의 집요한 수사는 월터와 키멜의 정신을 무너트렸고, 결국 둘은 치명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범죄 심리 스릴러 장편. 

작가의 세 번째 작품이라고 하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데뷰작인 "열차 안의 낯선 자들"과 비슷합니다. 비교적 평범했던 주인공이 아내 때문에 범죄에 대한 꿈을 꾸다가 절대악에 가까운 파트너와 엮인 탓에 파멸한다는 점에서요. 다만 월터는 꽤 헌신적인 남편으로 저지르지도 않은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다는 점, 그리고 심리 묘사도 더 탁월하다는 차이는 있습니다. 다른 묘사들도 빼어납니다. 특히 클라라 묘사가 놀랍습니다. 월터가 클라라를 진작에 죽일 생각을 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만드는 생생한 "결혼 지옥"을 잘 보여줍니다. 클라라가 죽은 뒤 월터와 키멜이 코비의 수사 탓에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과정의 묘사도 발군이고요. 여러모로 심리 묘사가 중심인, 순문학에 가까운 스릴러가 많은 '버티고 레이블'의 특징을 잘 드러냅니다.

하지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은 꽤 기발했던 설정만큼은 높이 평가할만 했으나, 이 작품은 그런 부분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시종일관 월터가 구렁텅이에 빠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낼 뿐이라 지루했어요.
등장 인물 설정도 별로입니다. 키멜은 코비한테 맥없이 얻어맞고 범죄 계획도 잘 짜내지 못하는 등 악당으로서의 강력함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찰 코비가 오히려 절대악에 가까운데, 악당처럼 보이지만 범죄자 체포라는 명분은 확실하고, 키멜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하긴 하나 키멜은 살인자가 맞으니 뭔가 좀 애매합니다. 악당도 아니고 안티 히어로도 아니고.... 보다 캐릭터를 선명하게 구체화하는게 나았을 것 같아요. 
그리고 코비가 키멜을 고문하고 월터를 압박해가면서 "사냥꾼"이라는걸 드러내는건 결국 월터가 죽어야 끝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는 점에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고 보입니다. 월터는 코비가 만든 출구없는 지옥에 빠진 셈이니까요.
물론 별로인 설정이라도 현실적이라는 장점은 있기는 합니다. 모두 빼어난 묘사가 뒷받침 된 덕입니다. 키멜은 목공예를 즐기는 서적상이라는 디테일이 아주 생생해서 손에 잡힐 듯 하며, 월터에 대해 살의를 품는 과정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코비도 용의자를 고문에 가깝게 구타하고, 폭언을 퍼붓는 경찰답지 않은 모습은 상당히 신선했고요. 하지만 이 정도로는 전반적인 아쉬움을 뒤집기는 부족했습니다.

깔끔하지 못한 결말도 아쉬웠어요. 클라라는 자살한 것인지 누군가에게 살해된 것인지?도 불분명하고, 마지막에 월터가 죽인 사람은 누구인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코비의 부하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넘어갈 장면은 아니었다 생각되네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읽는 독자마저도 진저리치게 만드는 묘사는 인상적이지만 그리 재미있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2013/07/08

리플리 1 : 재능있는 리플리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홍성영 : 별점 2.5점

리플리 1 : 재능있는 리플리 - 6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그책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가난에 시달리며, 자잘한 사기로 생계를 이어가던 톰 리플리에게 그린리프라는 부자가 다가왔다. 이탈리아 나폴리 옆 몬지벨로에서 시간을 보내던 자신의 아들 디키를 데려와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린리프의 돈으로 디키를 만나러 간 톰은 그와 친구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디키에게 기대어 살아갈 희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자 디키를 살해하게 되는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리플리"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범죄자가 누군가를 살해하고 그 사람으로 행세한다는 설정은 흔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톰 리플리의 내면 심리 묘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독특함이 돋보입니다. 덕분에 책을 펼치자마자 단숨에 읽을 정도로 흡입력도 대단합니다. 희대의 범죄자 톰 리플리라는 인물을 지켜보는 재미도 각별했고요.

하지만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르네 클레망 감독, 알랭 들롱 주연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와 비교해 본다면 아쉬움이 큽니다. 영화는 개인적으로도 All-Time Best로 꼽을 정도로 뛰어난 범죄 영화였지만, 소설은 정교한 범죄물로서의 완성도 면에서는 부족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그 반대의 경우가 많은데, 참 흥미로운 예외더군요.

예를 들어, 영화 속 톰(알랭 들롱)은 디키를 살해한 뒤 그의 서명을 위조하기 위해 정교한 장치를 활용하며 연습을 반복하고, 디키의 자살을 가장하기 위해 자기가 챙겨간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부어 넣는 식으로 증거를 만드는 치밀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면, 소설 속 톰 리플리는 살인을 충동적으로 저지르고, 뒷수습은 절반 이상 운에 맡기는 인물로 그려져 실망스러웠습니다. 마지막에 디키의 유언장을 위조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결말 역시 너무 쉽게 흘러간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고요.

또한 제목 그대로 '천부적인 살인자(Natural Born Killer)' 혹은 재능 있는 범죄자로서의 면모를 기대했지만, 후반부에 명품에 집착하는 모습에서는 오히려 된장남에 가까운 찌질함이 느껴져 아쉬웠습니다. 소유물을 통해 자기 존재를 상기하고, 그것을 즐긴다는 그의 심리 묘사만큼은 인상적이지만, 전반적으로는 영화 속 톰, 특히 압도적인 외모와 카리스마로 사악함을 뿜어내던 알랭 들롱의 모습이 훨씬 설득력 있었습니다. 프레디를 살해한 뒤 닭요리를 게걸스럽게 먹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강렬했었지요.

물론 톰이 미리 보낼 편지를 준비한다거나,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실종과 복귀를 준비하는 모습은 기대에 부응합니다. 추리적으로 꽤 볼만한 바꿔치기의 디테일, 그리고 톰과 디키 사이에 묘하게 흐르는 게이 코드도 흥미로웠고요. 하지만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적 측면에서 보자면, 기대만큼의 완성도를 갖춘 작품은 아닙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심리 묘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는 있지만, 소설보다는 제가 사랑하는 1960년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감상하시는걸 더 추천드립니다.

2005/04/20

낯선 승객 - 패트리셔 하이스미스 / 심상곤 : 별점 2점

낯선 승객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심상곤 옮김/해문출판사

촉망받는 건축가 거이는 문란하고 애정없는 아내 미리엄이 이혼조차 해 주지 않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같은 기차에서 만난 브루노에게서 "내가 당신 아내를 죽일테니 당신은 나의 아버지를 죽여달라"라는 완벽한 범죄 시나리오를 듣지만 무시해 버린다. 그러나 브루노가 정말로 미리엄을 살해한 후 아버지 살해를 집요하게 요구하고 협박까지 하게되자 거이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서 결국 범행을 저지른다.

두건의 범죄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보장된 완전범죄로 남게되나 브루노의 아버지가 고용한 사립탐정 제러드의 집요한 추적이 이어지면서 거이의 인생은 파국을 맞게 되는데....

 "태양은 가득히"의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데뷰작. 기차에서 사람 한명 잘못 만난 것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게 된다는 작품이죠.
서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는 2명이 우연히 만나 서로의 원수를 바꿔서 죽여준다는 설정은 프레데릭 브라운의 "교환살인"과도 거의 동일한 아이디어죠. 또 예전에 히치콕 감독 영화로 먼저 접하기도 해서 그동안은 손이 가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왠걸! 영화와 소설이 굉장히 딴판이라 무척 놀랐습니다. 중반부까지는 같은데 그 이후부터 달라지기 시작해서 결말은 아예 반대더군요. 영화에서 테니스 선수였던 주인공 거이는 건축사로 나오며 영화에서는 결국 교환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데 반해 소설에서는 브루노의 협박에 의해 심신 상실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르게 되니까요.
때문에 영화는 거이가 아내 살인범이 자기가 아니라 브루노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과정을, 소설은 범죄 이후 두명의 주인공이 심리적으로 붕괴하는 과정을 (주로 거이 중심이지만) 중반부 이후부터 굉장히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비교해서 보니 보다 색다른 재미가 있네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나 완성도, 재미 모두 영화쪽이 더 낫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소설은 두 사람이 우연히 과거에 서로 만나서 서로가 원하는 사람들을 각각 살해했다..라는 것을 사립탐정이 추리해내지만, 이후 검거 과정에서는 아무런 물증을 제시하지도, 찾아내지도 못하고 단지 마지막에 미행에 의한 도청으로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 식이라 별로 정교하게 느껴지지 않았거든요.그러나 영화에서는 거이가 발버둥치면서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브루노가 결국 아내를 살해했다는 것을 타당하게 밝혀내기 때문에 훨씬 세련되게 전개되었다 생각합니다.

물론 소설도 심리묘사 하나만은 치밀하면서도 극적이므로 충분히 읽으면서 즐길 수 있기는 합니다. 허나 앞서 말씀드린대로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며 해피 엔딩인 영화가 전개나 결말이 더욱 마음에 드네요. 거이라는 친구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지기에 더더욱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17/03/03

심연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홍성영 : 별점 2점

심연 - 4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오픈하우스

자기 자신을 속이는게 최고의 속임수지. 자신을 굳건히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 토스토옙스키. "악령"에서 표토르 스테파노비치 

빅터는 윌슨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세상은 나 덕분에 돌아간다는 음울하고 회한에 찬 윌슨의 얼굴 뒤에는 보잘 것 없고 멍청한 생각뿐이었다. 빅터는 그의 얼굴과 그 얼굴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저주했다. 아무 말도 없이 미소를 지으며 남은 온 힘을 다해 저주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여사의 범죄 소설입니다. 평범한 지역 유지 빅터가 순간적인 분노를 이기지 못해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을 디테일한 심리 묘사로 펼쳐나갑니다. 조금 고급진 범죄, 장르문학을 다루는 출판사 오픈하우스의 버티고 레이블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심연"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에는 주인공 빅터가 겉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살의를 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건의 살인이 모두 '물'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읽어보니 독자를 심연에 빠트리겠다는 뜻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읽는 내내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어요. 가장 큰 이유는 빅터와 멜라니, 두 주역의 심리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탓이 크고요.
빅터는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이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질책이나 거부감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딱히 너그럽고 관대해서 그런게 아닙니다. 아내가 바람을 피운 것 까지는 아니라고 애써 위안을 삼으며 작은 마을 공동체 내에서 평판을 유지하는데 골몰할 뿐이지요. 결국 순간적인 분노로 찰리 드 리슬, 캐머런을 차례로 살해하고 마지막에는 아내까지 죽이지만, 이 모든건 먼저 이혼을 했다면 해결되었을 문제입니다. 결혼 생활에 별다른 애정이 느껴지지도 않는데 왜 이혼을 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어요. 딸을 위해서 이혼을 하지 않는다던가, 이혼을 하면 지역 사회에서 매장을 당한다던가 등 설득력있는 이유가 등장했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작중에서도 이혼은 별로 어렵지 않고 양육권 역시 빅터가 보유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설명되기까지 하는데 말이지요. 파국이 닥치기 전에 그것을 해결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데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비슷한 상황에서 아내가 이혼을 해 주지 않아 살의를 품는 "낯선 승객" 쪽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아내 멜라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돈으로 여유롭게 살면서 남편이 바로 옆에 있어도 대놓고 바람을 피우는데, 뻔뻔함이 도를 지나칩니다. 솔직히 이래서야 남편한테 죽어도 싸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게다가 찰리 드 리슬이 죽은 후 남편이 죽은 것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심지어 남편 돈으로 탐정까지 고용한 정신머리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에 대한 디테일하게 묘사는 읽는 내내 짜증을 불러일으킵니다. 한마디로 발암유발 소설이랄까요.

재미도 별로입니다. 범죄물이기는 하지만 모든 범행은 우발적, 즉흥적이며 뒷수습은 운에 맡기는 부분이 많아서 짜임새가 낮기 때문입니다. 범행보다 심리 묘사를 디테일하게 그리는데 주력하고 있어서인데, 이러한 점에서는 "리플리"와 비슷합니다. 차이점이라면 빅터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는 정도고요. 빅터는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도 분명한 애정을 보이거든요. 걸인 칼라일을 출판사에 잡역부로 고용한 것처럼요. 또 주변 평판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그것을 위한 배려 역시 아끼지 않습니다. 책 뒤 소갯글 - 사이코패스의 일상과 그의 머릿속을 소름 끼칠 만큼 담담하게 그려낸 걸작 - 은 제가 봤을 때 잘못 쓰여진 것입니다. 사이코패스인지 아닌지가 재미나 완성도에 영향을 끼치는건 아니기도 하지만요.
혹시 작가의 의도는 평범한 중산층이 급작스럽게 살의를 품는 과정을 그려서 충격을 주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대로 살인 전에 충분히 상식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이혼)이 있었기에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그래도 캐머런의 사체가 발견된 이후 마지막 몇 페이지는 그런대로 서스펜스를 가져다 주기는 합니다. 문제는 이야기에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사람을 거북하게 만드는 묘사력은 발군으로 셜리 잭슨과 좋은 상대가 될 수 있을 정도지만, 불쾌하기만 할 뿐 그 외 다른 가치는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여사님의 순문학스러운 작품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구태여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2006/02/15

골프코스의 인어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민승남 : 별점 2점

골프 코스의 인어들 - 4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민음사

연달아 읽어버린 하이스미스 여사의 단편집 두 번째 권입니다. 원래는 이게 세 번째 단편집이고 먼저 읽었던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가 두 번째 단편집이라고합니다. 첫 번째 단편집을 착오로 구입 못해 순서가 좀 바뀌어 버렸네요. 뭐 단편집이니까 그건 별로 중요하진 않겠지만요. 

여튼, 전에 읽었던 단편집이 워낙 마음에 들었기에 나름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솔직히 실망스러웠어요. 이전 단편집에서 언급한 로얄드 달의 "당신을 닮은 사람" 같달까요? 한마디로 심심합니다. 의표를 찌르는 맛이나 독자의 감정을 살살 건드리는 맛은 거의 없고, 세밀한 심리묘사에 더욱 치중한 경향이 강한 탓이에요. 작품들 개개의 결말도 그다지 와 닿지 않았고요. 저는 단편소설에서는 여운을 남기던, 반전이 있던 어쨌거나 결말의 끝맺음이 작품에서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단편집에서는 대체로 애매모호하고 시시하게 처리하는 작품이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결말에서 이상할 정도로 해피엔딩이 많은게 특히나 불만스러워요.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하이스미스 여사 작품에서의 해피엔딩이라니 이건 정말 아니올시다죠. 배신감을 느꼈달까요? 

물론 특유의 불편한 인간 관계 설정과 심리묘사, 시대를 앞서가는 상상력과 기발한 발상을 토대로 한 전개는 여전합니다. 역자가 해설에서 카뮤의 "이방인"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충분히 그정도의 임팩트는 있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문장과 설정에서의 몽환적인 느낌은 확실히 거장의 풍모를 전해줍니다. 

그래도 확실히... 전작보다는 좀 읽는 맛은 확실히 덜 했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던 독특한, 기묘한 맛은 거의 없고 그냥저냥한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기대가 너무 큰 탓도 있긴 하겠만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다른 시리즈의 구입을 망설이게 되네요. 지금까지 5할의 확률이니 기대를 한번 더 걸어봐야 하겠지만요... 

역시나! 싶은 이 단편집의 베스트는 "난데없이 날아온 총알"과 "애완동물 공동묘지"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골프 코스의 인어들 

대통령의 생명을 구한 교수의 환상과 애증 이야기랄까요? 골프 코스의 인어들이라는 제목과 발상 자체는 기발하기 그지 없지만 그다지 끌리는 요소는 없었습니다. 

2. 단추

다운 증후군에 걸린 아들과 아들 때문에 변해가는 아내 탓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던 회계사 롤랜드는 어느날 밤 갑작스럽게 충동적인 살인을 저지르는데... 

일상 생활속에서의 평범한 사람의 심리가 급작스럽게 변해가는 과정과 그 결말을 디테일하게 그린 수작입니다. 역자가 "이방인"을 언급한 작품으로 그만큼 순문학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작품으로 보이네요.

하지만 나름 해피엔딩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감점 요소로 보입니다. 막판에 힘이 팍 풀려버리는 바람에 뫼르소 만큼의 고뇌를 롤랜드가 끝까지 보여주지는 못하거든요. 

3. 우연한 특종

별볼일 없는 지방신문 사진 기자 크레이그는 어느날 우연히 찍은 성폭행 피해자의 사진 한장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게 된다.

평범한 일반인이 우연으로 성공하게 되지만 그 뒤에 도사린 죄책감과 결국 성공이라는 열매때문에 모든 것을 무시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매스미디어의 속성을 비판한 작품으로 보이는데 독특한 전개와 발상에 비해서 왠지 묘사의 섬세함이 좀 떨어지는 작품이더군요. 결말도 시시하고요. 

4. 크리스의 마지막 파티

자신을 배우의 길로 이끈 크리스 웰스의 죽음을 앞두고 배우 사이먼은 취리히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는 과거의 일과 현재를 돌아보게 되는데...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사이먼에게 있어서 크리스의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그의 죽음으로 무엇이 변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추억과의 결별이 닥쳤을때의 심리묘사랄까요? 깊이 생각하자면 메시지를 많이 전해주기도 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알맹이 없는 공허한 작품이었습니다.

5. 크리스마스에 사라진 시계

자수성가한 샤를과 부호의 딸인 미셸은 서로 사랑하는 부부지만 미셸이 도와준 거리의 소년이 샤를의 물건을 훔쳐가면서 둘 사이에 서서히 금이 가게 되는데... 

부유한 부부와 거리의 소년에 대한 자세한 설정과 심리묘사는 모파상을 연상케 합니다. 출신성분이 다른 두사람의 디테일하게 묘사된 갭은 디킨즈 작품같은 느낌도 주고요. 

하지만... 기둥 스토리 자체와 결말이 시시한 편이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6. 난데없이 날아온 총알

미국 청년 앤드류는 멕시코의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한 소년이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신고하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그가 범인으로 몰려 악몽과 같은 하루를 보내게 된다. 

평범한 청년에게 닥친 악몽과도 같은 하루를 다루고 있는 드라마틱한 작품입니다. 작품 자체에 생기가 가득 넘치는 것이 이 단편집에서 단연 돋보이더군요. 뭐 이야기 자체는 뻔하긴 했습니다만.... 

7. 애완동물 공동묘지 

변호사 크리스토퍼는 키워왔던 애완동물을 박제로 만드는 아내 페니의 취미를 싫어했지만 그 취미가 기사화되자 과거에 억눌러 왔던 감정들이 북받쳐 복수심으로 발전한다.

제목 그대로 애완동물의 공동묘지와 같은 기묘한 취미와 더욱 기묘한 방법으로 복수(?)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기묘하게 다룬 여사다운 단편입니다. 제목만 보고는 스티븐 킹 작품을 연상하긴 했지만 역시나 전혀 분위기가 다르더군요. 덜 자극적이고 원색적이지만 왠지 더 우울하고 기묘한, 아주 독특한 작품이었습니다.

8. 어쩌면 다음 생에

고독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엘리너는 어느 날 부터 유령과 같은 "그"를 보게 된다. 그와 엘리너는 서로 생활을 공유하며 가까와지지만 "그"는 결코 착하지 않은 존재였다.

여사님이 이런 작품까지 쓰셨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전형적인 유령 공포 환상 괴담이자 심리학적으로도 눈여겨 볼 만한 곳이 많은 디테일한 작품이네요. 주인공 여성 엘리너의 애절한(?) 삶과 사고방식이 전혀 공감되지 않아 높은 점수를 줄 순 없었지만, 여러모로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 생각됩니다.

9. 나는 남들만큼 유능하지 못해

세일즈맨 랠프는 주말 별장 이웃인 에드와 그레이스 부부의 척척박사와 같은 작업들에 컴플렉스를 느끼며 불안해 하던 중 별장에 초대한 프랜시스라는 아가씨와의 하루를 보내게 되는데... 

일종의 현대인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한 남자에게 빗대어서 조금은 유머스럽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결국 주인공이 폭주하게 되지만 그나마 해피엔딩이라는 데 현대인으로서 안도감을 느낍니다.

10. 가장 잔인한 달

영어교사 오딜의 취미는 소설가들에게 개인적인 팬레터를 보내는 일로, 그녀는 친구와 영국 여행을 떠나며 작가 데니스 홀리우드를 만나기 위한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여사 특유의 몽환적이고도 섬세한 심리묘사가 발군인 작품으로 환상이 현실 앞에서 잔혹한 얼굴을 드러낼때의 심리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이상하게 마무리가 좀 대충대충이라서...

11. 몽상가

비서로 일하는 이저벨은 항상 낭만적인 데이트를 꿈꾸지만 첫 데이트에서 바람을 맞고 만다. 그 후 다시 한 남자에게서 데이트 신청을 받는데...

바로 위의 "가장 잔인한 달"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역시 환상과 현실의 갭을 다루고 있으며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심리묘사를 기반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거든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결말 부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잔인한 달"의 주인공은 나름 현실을 수긍하며 환상을 전개하는 데 반해 이 작품의 이저벨은 아예 환상속에서 살기로 결심해 버리니까 말이죠. 여사의 글 솜씨를 느끼게 해 주는 작품으로 두 작품 모두 남성인 저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긴 하지만, 비교해서 읽으면 읽는 재미가 더욱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2021/12/03

유리 감옥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김미정 : 별점 2점

유리 감옥 - 4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횡령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갖힌 카터는 징계를 받다가 엄지 손가락에 큰 부상을 입고 모르핀에 중독되고 말았다. 횡령 사건 주범으로 의심되는 가윌의 부정을 밝혀내는게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변호사 설리번은 가윌의 뒤를 캐는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설리번의 노력은 실패했고, 카터는 교도소에서 사귄 친구 맥스가 폭동 와중에 살해되는 사건 등을 겪으며 7년 만에 가석방되어 세상에 복귀했다. 그러나 석방 후, 아내 헤이즐이 설리번과 부정을 저질렀다는걸 알아챈 카터는 충동적으로 그를 살해하고 마는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이야기는 끔찍했던 감옥에서의 생활과 출소 이후의 현실로 완벽하게 나뉩니다. 핵심은 이 두 공간이 카터 기준으로는 개념적으로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요. 카터의 현실 속 주변 인물들은 모두 범죄자이며, 카터가 마음 편하게 머무를 곳이 없다는 점에서요. 카터의 말 그대로 이 세상은 거대한 감옥과 다를바 없는 셈이지요. 이런 상황을 빼어난 심리 묘사로 그려내고 있는데, 감옥 안에서 헤이즐과 설리번의 관계를 의심하는 부분, 그리고 출소 후 범행을 저지르고, 경찰에 쫓기는 과정에서의 카터의 심리를 그린 부분, 그리고 카터가 범행을 저지르고 가윌과 협상한 뒤, 경찰의 취조에 맞서는 장면이 특히 좋았습니다. 심리 서스펜스의 달인인 작가의 솜씨를 여실히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 외의 부분은 대체로 실망스럽습니다. 범행이 작위적이며 설득력이 낮은 탓입니다. 제대로 된 범죄물로 보기 어렵습니다. 카터가 설리번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것까지는 그럴싸합니다. 그러나 그 시점이 가윌이 설리번을 살해하기 위해 고용했던 청부업자 오브라이언이 습격한 직후였다는게 문제입니다. 상식적으로 누군가 자기를 목격했는데, 바로 살인을 저지른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게다가 오브라이언이 카터가 진범임을 밝히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카터와 오브라이언 모두 현장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브라이언 혼자 증언을 뒤집는다고 그게 사실이 되는건 아니니까요. 또 오브라이언도 범행 당시 설리번을 방문했었다는 이야기니, 오브라이언이 범인으로 몰릴 여지도 높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건 협박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이 정도면 괜찮았을텐데, 카터가 오브라이언마저 즉흥적으로 죽인 뒤 가윌을 협박하여 알리바이를 만든다는건 최악의 정점입니다. 카터는 가윌이 설리번을 죽이기 위해 오브라이언을 고용했고 실제로 사건 당일 오브라이언을 현장에서 목격했다고 협박하는데, 가윌은 잃을게 없습니다. 오브라이언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가윌이 고용했다는걸 증명할 방법도 없고요. 오브라이언을 가윌이 고용했다는 다른 증거가 있었다면, 진작에 경찰에 체포되었을 테지요. 

카터가 '오브라이언 때문에 골머리 썩일 사람은 가윌이지 제가 아닙니다.'라고 경찰에게 말한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경찰도 오브라이언이 카터가 진범이라는걸 알고 협박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가윌이 골머리 썩을 일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카터가 오브라이언을 죽인 뒤, 진짜 완벽한 천재 범죄자로 거듭난다는 "리플리"스러운 결말이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결과물은 억지만 남아 있는 느낌입니다.

또 읽기 힘들다는 문제도 큽니다. 감옥에 대한 여러가지 묘사는 지루하고 진부했으며, 캐릭터 설정과 묘사도 마찬가지인 탓입니다. 헤이즐이 자기도 힘들었다며 불륜을 정당화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그녀는 감옥 안에서 친구가 된 맥스와의 관계를 들먹이면서 정당화하는데, 맥스와 카터의 관계는 친한 직장 동료 사이와 비슷했습니다. 불륜과 비교할 이유는 없습니다. 카터의 마약 중독을 언급하며, 그 역시 잘못이 있다는 주장도 똑같습니다. 카터가 마약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정말 카터가 싫어졌다면, 이혼하면 됐습니다. 이혼하지 않는건, 감옥에 간 카터를 버리지 않았다는 세간의 평가와 함께 카터가 상속받은 10만달러가 넘는 돈을 놓치기 싫었을 뿐입니다. 결국 카터가 격분해서 설리번을 죽인건 다 헤이즐 때문입니다. 두 남자를 모두 움켜쥐려다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지옥에 빠져들게 만든거지요. 아들 때문에 이혼 생각을 못했다? 그 결과가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생긴 것이고요.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을까요? 반대로 카터가 이런 상황에 빠졌음에도 헤이즐을 어떻게든 품으려고 하는 노력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렇게 짜증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가 너무 많아서 쉽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리뷰를 쓰기도 힘든, 그런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짜증나는 인간 군상의 묘사가 목적이었다면, 그건 분명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재미나 가치는 딱히 찾기 어려웠던 작품이에요. 딱히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2006/02/12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민승남 : 별점 3점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 6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민음사

"낯선 승객"과 "리플리" 시리즈로 유명한 추리계의 거장 중 한명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여사의 단편집. (패트리샤라고 하지 않은 것도 좀 재미나네요)

순문학계열 출판물로 유명한 민음사에서 출간되어 의외라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이해가 됩니다. 추리쪽 성향이 덜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추리나 서늘한 맛을 기대했지만 의외로 순문학적인 작품들로 구성되었던 로얄드 달의 "당신을 닮은 사람"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로얄드 달의 단편집은 애초 생각과는 다르게, 정말로 순문학에 가까운 글들이 많았던 반면에 이 작품집은 기대한 만큼의 서늘함을 제공해 주는 작품이 많다는 차이가 큽니다. 대체로 "인간의 본성"을 극한으로 끌어내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는데 몇몇 작품은 읽으면서 감정이입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게 될 정도로 서늘하고 잔인한(?) 이야기들이더라고요. 
그 밖의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들도 단순하지만은 않고, 여사만의 독특한 기묘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도대체 다른 어떤 작가가 바구니짜기나 노인 입양같은 이야기로 이런 극한으로 치닫는 심리 묘사를 그려낼 수 있을까요?
일상 생활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소한 사건과 살인과 같은 큰 사건 모두 시종일관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짧은 길이의 작품 안에 담는 솜씨는 정말 기가 막힙니다. "지적인 암살자(?)" 리플리의 창조주답네요.
이야기들의 배경과 설정이 모두 다르며 다양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건 여사의 다채로운 생활 환경을 반영한 것 같은데, 이러한 세부 디테일들도 재미있었습니다.

범죄나 추리에 가까운 이야기는 많지 않아 추리쪽 장르로 구분하긴 어렵지만, 여사의 작품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책입니다.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단편집 3권도 빨리 구입해서 읽어보고 싶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개인적인 추천작은 "검은 천사가 지켜보다"와 "노인 입양"입니다.

작품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고양이가 물어온 것
한적한 시골에서의 한때를 보내던 허버트 부부와 손님들 앞에 키우던 고양이가 물어온 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우연찮게 발생한 사건에 휩쓸리게 되면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잘 그려낸 작품.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한 소품이지만 순간적인 분노와 폭발하는 심리묘사는 여사님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2.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뉴요커들 한 무리가 자신들의 친구지만 왠지 거리가 멀어지고 서먹해진 친구인 에드먼드에게 짖궂은 장난을 치는 음모를 꾸미는데,그 친구는 직장과 아내에 이어 목숨마저 잃게 된다...
한 집단의 이지메와 같은 행동을 통해, 무심코 저지른 행동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린 작품. 일종의 집단 광기를 일상생활속에 녹여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라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맨 뒤의 누군가가 죽은 다음에 찾아오는 일상에 대한 짤막한 묘사도 서늘합니다.

3. 바구니 짜기의 공포
광고 대행사에서 매채 담당자로 일하는 다이앤은 별장에서 한때를 보내던 중 우연히 자신에게 바구니 짜기의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서서히 광기로 빠져들게 되는데..
정말로 기묘한 작품입니다. 한 여성이 우연한 기회에 자신에게 바구니 짜기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것 때문에 서서히 자신의 통제권을 잃는다는 내용이거든요.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일 수 있는데, 소재가 너무 독특해서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결말은 의외로 현실적이라 조금 시시했어요.

4. 검은 천사가 지켜보다
시카고의 골동품업자 리 맨드빌은 자신의 어머니가 있는 양로원 비용때문에 고향집을 팔기 위해 몇년만에 고향에 찾아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이미 몇년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종의 사기극이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렸다는게 독특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흡사 피해자처럼 보이게 하는 전개도 기묘하면서도 색달랐고요. 여사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5. 네 삶을 경멸해
20살이 된 랠프는 록 밴드 생활을 하며 생활고를 겪어서 아버지에게 원조를 요청하지만 의절당한다.
우리나라에도 있을법한, 방탕한 자식과 아버지간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짤막한 드라마인데 아들 랠프의 심리묘사가 재미난 작품이었습니다. 결말도 인상적이었고요.

6. 에마 C 호의 꿈
남자들만 있는 요트 에마 C 호에 한 미녀가 표류하다 구조된 뒤, 에마 C 호의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헝클어지기 시작한다...
한 작지만 공고한 집단 안에 찾아온 불청객으로 관계의 붕괴가 일어나는 작품. 기묘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7. 노인 입양
매킨타이어 부부는 자식도 없던 차에 우연하게 순수한 선의로 포스터 부부라는 노인 부부를 입양하여 돌보게 되는데...
순수한 선의로 진행한 일이 점차 자신들도 통제하지 못하는, 극단으로 치닫는 서늘한 전개에 박수를 보냅니다! 무엇보다도 결말이 대단한 반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무척이나 참신하고 독특해서 인상적이네요.

8. 로마에서 생긴 일
고위 공무원의 아내인 이사벨라는 남편에 대한 반감과 무료함으로 자신을 쫓아다니는 스토커 우고에게 남편 유괴를 의뢰하는데...
이탈리아를 무대로 미모의 여성과 자작 유괴극이라는 설정이 왠지 "크리시"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인간 관계의 얄팍함을 다루고 있는데 묘사와 디테일은 좋았지만 결말이 시시한 편이라 좀 아쉽더군요.

9. 양손의 떡
잘나가는 뉴요커 해리는 결혼을 앞두고 두 미녀와의 양다리 관계를 즐기며 두명중 한명을 선택하기 위해 저울질 하던 중 즉흥적으로 두 여인을 모두 초대하게 되는데...
한 남성의 독특한 심리를 보여주는 작품. 전혀 이상하지가 않고 자연스러워 보이게끔 하는 묘사가 좋았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해봄직한 고민과 실수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러한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10. 연
폐렴으로 죽은 동생 엘지를 그리워하며 월터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거대한 연을 만들어 날리게 된다.
동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 지나쳤고 그 때문에 비극이 발생한다는 내용.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한 소년의 환타지가 어른들에 개입에 의해 비극으로 끝나는 짤막한 동화라 생각됩니다. 소년 시절 환타지는 거의 다 비극이기 마련이지요..

11. 검은집
팀은 마을 술집에서 자주듣는 마을의 흉가 "검은집"의 정체를 밝히려는 시도를 벌이지만...
환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대한 이야기. 책 뒤에 해설에서 여러 정신분석 이론을 가지고 추가로 설명해 주는데 해설 쪽이 더욱 재미있었습니다.

2004/11/07

식인 달팽이 - 정태원 엮음 : 별점 3점

추리소설 매니아이자 번역가로 잘 알려진 정태원 선생이 직접 엮은, 도서출판 동숭동에서 발간한 정체불명의 환상문학 단편 앤솔러지. 어느 앤솔로지를 번역한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꽤 괜찮은 작품들과 작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입은 꽤 오래전에 했는데 이제야 독파하게 되었네요.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 프레데릭 브라운 -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직
  2. 오거스트 덜레스 - 또 하나의 아이
  3. 로버트 블록 - 변심
  4. 레슬리 폴스 하트레이 - 주말의 손님
  5. 레이 브레드버리 - 장의사
  6. 헨리 슬레사 - 신의 은총
  7. 존 콜리어 - 특별 배달
  8.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 - 식인 달팽이
  9. 잭 요네 - 암코양이 미나
  10. 재럴드 커슈 - 바다로 가는 슬픈 길
  11. 브랫리 스트릭랜드 - 묘비명
  12. 찰즈 보몬트 - 자장가
  13. 리차드 마티슨 - 나의 꿈꾸는 여자

제법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로 이루어져 만족도가 상당했어요.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여, 개인적인 베스트 5는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직", "변심", "신의 은총", "바다로 가는 슬픈 길", "나의 꿈꾸는 여자"를 꼽고 싶네요. "식인 달팽이"는 스릴과 서스펜스 면에서는 괜찮긴 했지만 좀 뻔한 내용이었고 "장의사"는 공포와 기발함에서는 다른 작품에 뒤지지 않지만 결말이 약간 시시한 것 같아 아쉽게 뺐습니다. 작품별 간단 리뷰는 아래를 참고하시길.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직>
거장 프레데릭 브라운 작품입니다. 한 기묘한 피리 ("오보아"라고 하더군요)를 둘러싼 한 음악인의 집요함에 대한 묘사와 특히 "하메룬의 사나이"까지 인용한 반전이 무척 괜찮은 소품입니다.

<또 한명의 아이>
한 그림속에서 환상을 본 노인이 결국 그림속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인데 TV시리즈 같은 곳에서 보아왔던 소재라 그런지 신선함이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동화적인 분위기는 괜찮았어요.

<변심>
이런저런 앤솔로지에 가끔 소개되는 로버트 블록의 작품으로 한 청년과 시계수리공 노인, 그리고 노인의 병약한 딸을 둘러싼 이야기인데 마지막 결말이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공포소설로도 읽힐 수 있지만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인상적이에요. 상당한 수준의 작품입니다.

<주말의 손님>
유명 작가가 자신이 창조한 극중 인물에게 위협받는다는 내용으로 두번째 작품처럼 다른 작품들에서 이미 보아왔던 약간은 흔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그닥 참신한 느낌은 없었습니다.

<장의사>
역시나 거장인 레이 브레드버리의 단편입니다. 열등감에 시달리는 장의사와 그에게 놀아난 시체(?)들의 복수극으로 기괴하고 섬뜩하긴 한데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뭔가 조금 아쉬웠달까요. 클라이브 바커가 연상되기도 했는데 바커 스타일의 적나라한 고어 호러가 더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신의 은총>
꽤 유명한 작가 헨리 슬레사의 단편으로 한 신부와 경마 도박꾼의 약간 기묘한 관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승부에서 이긴다!"라는 이유로 성당에 계속 헌금하는 도박꾼과, 그것을 말리면서도 결국 세속적인 감정에 흔들리는 신부의 아이러니컬 하면서도 유머스러운 묘사가 상당히 마음에 든 작품입니다.

<특별배달>
영화 "마네킹"의 원안쯤 되는 작픔입니다. 마네킹에 연정을 느끼는 한 청년에 대한 집요한 묘사는 돋보이지만 그닥 재미도 없고 튀는 부분도 없는 작품이네요.

<식인 달팽이>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 여사의 작품이긴 하지만 스티븐 킹 작품이라고 해도 통할만큼 여사 작품치고는 굉장히 파격적인 작품입니다. 식인 달팽이와 한 과학자의 사투를 그리고 있는데 "괴물"과 미약한 투쟁을 벌이는 인간에 대한 묘사는 스티븐 킹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바로 그것이더군요. 거장의 작품답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재미도 상당하고요.

<암코양이 미나>
이 작품집 중에서 가장 처지는, 워스트 작품입니다. 뻔한 소재에 뻔한 결말.... 반전도 그닥 없고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로 보여집니다.

<바다로 가는 슬픈 길>
현대판 "죄와 벌". 삶에 지친 한 남자가 수금원의 독촉에 시달리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후 항상 꿈꿔왔던 바다로의 도피를 시도한다는 내용인데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을 다루는 묘사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문학적 수준도 상당한 편이고요. 왠지 다른 순문학 단편선에 실려야 할 작품이 잘못 온 것처럼 약간 쟝르가 맞지 않는 느낌도 주지만 완성도는 굉장히 뛰어난 작품입니다.

<묘비명>
남북전쟁 후 전쟁에서 살아돌아온 한 청년이 느끼는 한 묘비에 대한 의문과 공포를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 마무리 한 소품으로 그다지 언급할 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자장가>
한 어머니의 광기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소품입니다. 역시 다른 곳에서 많이 인용된 소재라 그런지 좀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나의 꿈꾸는 여자>
필립 K 딕과 쌍벽을 이룬다는 (하지만 들어본 적은 없는) 리차드 마티슨의 SF적인 단편입니다. 예지능력을 가진 여자를 이용한 협박자가 협박에 실패한 분노로 여자를 죽이는데 여자가 죽어가며 그 협박자가 죽게되는 상황을 예언한다는 내용으로 짧지만 인상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였습니다.

2019/08/02

죽여 마땅한 사람들 - 피터 스완슨 / 노진선 : 별점 2점

죽여 마땅한 사람들 - 6점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푸른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테드 스버슨은 아내 미란다가 건축업자 브래드와 불륜을 저지른다는 걸 알고 실의에 빠졌다. 그 때 우연히 만난 여성 릴리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둘은 죽어 마땅하다며 테드가 직접 행동에 나설걸 촉구했다. 릴리에게 빠져든 테드는 살인 계획을 세웠지만, 브래드가 선수를 쳐서 테드를 살해해 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뉴스로 접한 릴리는 그 둘을 직접 응징하려 하는데... 

이런 저런 곳에서 평이 상당히 좋았던 미국 스릴러입니다. 오쟁이를 진 남편이 살의를 품게 된 계기가 우연히 만난 여성 릴리의 설득 때문이라는 시작은 독특합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낯선 승객"이 살짝 떠오르더군요. 책 뒤 해설을 보니 영향을 받은 듯, 안 받은 듯 모호하게 쓰여져 있기는 한데 최소한 작가도 존재를 알고 있었던건 분명하네요. 첫 만남 당시 릴리가 읽고 있던 작품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 이니까요.

평이 좋은 이유는 일단 잘 알 수 있습니다. 재미만큼은 확실하거든요. 흡입력있는 신선한 전개도 아주 좋고요. 중반부까지 테드와 릴리의 시점을 각각 오가는데 테드의 시점은 릴리를 만난 다음부터의 현재이며, 릴리의 시점은 그녀가 첫 살인을 저지른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옵니다. 그리고 두 시점이 합쳐지는 순간, 테드는 살해당하고 이는 독자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줍니다. 그 뒤에도 릴리와 미란다 시점, 미란다가 살해된 뒤에는 경찰 킴볼 시점과의 교차 전개가 계속되는 것도 괜찮았어요. 독자에게 다양한 시각, 알지 못했던 정보를 제공하는 덕분입니다.
이 과정에서 테드에게 살의를 불러 일으키는 릴리에 대한 설정과 묘사도 인상적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죽이는데 주저함이 없는 싸이코패스"나를 찾아줘"의 에이미 스타일인데, 개인의 욕심이나 이기심보다는 제목 그대로 '죽여 마땅한' 사람들만 죽인다는 차이점이 명확합니다.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의 추진력, 결단력 역시 매력적이고요. 그녀를 실존하듯 그려낸 묘사도 일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부터 추리 소설을 - '낸시 드류' 시리즈를 포함해서 - 좋아했던 소녀로 그려져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녀와 대척점에 있는 '죽여 마땅한' 사람들인 미란다와 브래드 설정도 괜찮습니다. 단순히 불륜 관계가 아니라 테드를 살해한다는 전개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 킴볼 역시 잘 그려져 있습니다. 시를 쓰는게 취미일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고, 상당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우연히 쓴 음란한 시가 발목을 잡게 된다는 복선도 치밀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릴리가 대학 시절 사귀었던 에릭을 살해한 범행만큼은 돋보입니다. 에릭이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 견과류가 들어간 인도 요리를 먹인 뒤, 치료제를 숨겨 질식해 사망하게 만드는데 사고사로 보이게끔 다양한 조작을 하기 때문입니다. 견과류는 미리 갈아서 요리에 섞어두었고, 범행 전 에릭의 승부욕을 자극하여 펍에서 열리는 술 먹기 대회에 참여하게 만드는 등의 작전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술에 취한 에릭이 실수로 요리를 먹고, 치료제도 찾지 못해 죽었다고 경찰은 생각하게 되지요.
경찰 킴볼이 의외로 유능해서 릴리와 테드의 관계, 릴리의 거짓말과 여러가지 이상한 행동을 파헤치는 과정도 볼거리입니다. 정말 몇 안되는 단서를 통해 릴리를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경찰력에 상당한 신뢰를 갖게 만들 정도에요.

그러나 다른 범행은 그닥입니다. 릴리가 미란다와 브래드를 살해하는 핵심 범행부터가 그러합니다. 특히 브래드를 설득해서 미란다를 죽이게 만든다는 계획이 최악이죠. 브래드가 미란다에게 역으로 설득당해 릴리를 죽일 수도 있었으니까요.
미란다, 브래드를 살해한 뒤 먼 거리를 이동하여 사체를 유기하는 장면의 묘사도 나쁘지는 않지만 도로의 CCTV에 촬영되거나 도로 요금소에서 목격당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완벽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미국 도로 CCTV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과연 추적이 불가능했을지?에는 의구심이 남습니다.

릴리가 저질렀던 다른 사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 만났던 유아 성애자 챗을 숨겨진 우물에 떨어트려 죽인 뒤 챗의 모든 짐도 같은 장소에 버린 첫 범행부터 문제가 많습니다. 범행 자체의 설득력부터 부족한 탓입니다.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기는 했지만 챗이 우물에서 떨어져 즉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니까요. 지나치게 잘 풀린 느낌이에요. 차라리 뚜껑을 덮고 굶어죽도록 놔 두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또 당장은 살해하는데 성공했더라도 누군가 찾아 나섰다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도 문제에요.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라 아무도 찾지 않았다는 설정으로 대충 넘어갈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릴리가 충동적으로 킴볼을 칼로 찔러 체포되는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백주대낮에 현역 경찰에게 직접 흉기를 휘두르는건 빠져나가기 힘든 범죄니까요. 킴볼을 없애려면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범행을 저질러야 했습니다. 치밀해 보였던 릴리 캐릭터가 막판에 급작스럽게 붕괴되어 버리는데 그래서 얻은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범죄 천재로 보였지만 그냥 어설픈 정신병자에 불과했다는 결말에 불과합니다.

그 외의 범행들도 어설픕니다. 남편을 죽이고 재산을 가로채려던 미란다의 계획? 당연히 실패했을겁니다. 범행 당시 브래드의 인상착의가 목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릴리에 의해 살해되지 않았다면 킴볼 등 경찰의 수사에 의해 진상이 드러나는건 순식간이었을 거에요. 작 중에 등장하는 것 처럼 가짜 증언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넘어갔을지는 의문입니다.
테드가 충동적으로 릴리가 근무하는 대학 도시 윈슬로를 방문한 것, 릴리가 테드 사망 후 케네윅을 방문해서 숙박한 것 등의 자잘한 실수도 눈에 뜨입니다. 테드의 실수는 릴리를 곧바로 수사 선상에 올리게 만드니까요. 테드가 미란다보다 선수쳐서 범행을 저질렀다 해도 이래서야 완전 범죄가 성공했을 것 같지는 않네요. 테드와 릴리가 서로 끌렸다는 설정은 바람난 아내와 정부를 응징하겠다는 테드의 계획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아니 등장하니만 못했고요.

작위적인 설정도 많습니다. 테드의 아내 미란다가 에릭과 바람이 났던 대학 시절 친구 페이스이며, 우연히 만난 줄 알았던 릴리와 테드의 만남도 어느정도 계획된 것이라는게 밝혀지는 것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냥 우연히 만나서 정말로 범행에 대해 조언을 해 주게 되었다는 식으로 풀어나가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마지막에, 릴리가 시체를 유기했던 초원 지대가 재개발된다는 마무리도 작위적입니다. 이런 류의 개발 계획을 근처에 사는 사람이 몰랐다는게 말이 될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인물 설정 및 묘사, 그리고 전개는 뛰어나지만 범죄물로는 함량 미달이라 감점합니다. 공들여 쌓아올린 천재 여성 범죄자가 별볼일 없는 정신병자라는 결말도 실망스럽고요.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2/08/05

영국 추리작가 협회 (CWA) 선정, 사상 최고의 추리소설 100선 (The Top 100 Crime Novel)

영국 추리작가 협회 (The Crime Writers' Association: CWA)에서 1990년 발표했던 사상 최고의 추리소설 100선 (The Top 100 Crime Novels of All Time) 입니다. 2022년 현재 시점에서 국내 미 출간작은 회색으로 처리하였습니다. 국내 출간작은 모두 59편입니다. 대부분의 출간작이 상위 50위 이내 (43편) 집중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상위권에 유명 작품이 더 많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몇 년 전에 미국 추리작가 협회 (MWA) 선정 베스트 미스터리 100을 소개해 드렸던 적이 있는데, 비교해서 보면 더 재미있습니다. 특히 MWA에서는 1위로 꼽은 셜록 홈즈 시리즈 순위가 낮은게 가장 의외였어요. 세 편 선정된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중 "마지막으로 죽음이 온다"가 다른 유명 걸작들을 능가하는 작품인지는 살짝 의심스러웠고요. 미국 작품은 하드보일드 계열만 주로 선정한게 의도인지도 궁금합니다.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 중에서는 도로시 L 세이어스의 "학원제의 밤"이라던가, 에드먼드 크리스핀의 "사라진 완구점", 마저리 엘링엄의 작품 등이 눈에 뜨이는데, 언젠가는 국내에 출간되면 좋겠네요.

1위 "진리는 시간의 딸" 조세핀 테이

2위 "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3위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존 르 카레

4위 "학원제의 밤" 도로시 L 세이어스

5위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6위 "레베카" 다프네 뒤 모리에

7위 "안녕 내 사랑" 레이먼드 챈들러

8위 "월장석" 윌키 콜린스

9위 [[the ipcress file]] 렌 데이튼

10위 "몰타의 매" 대실 해밋

11위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조세핀 테이

12위 "실종 당시의 복장은" 힐러리 워

13위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14위 "로그 메일" 제프리 하우스홀드

15위 "기나긴 이별" 레이몬드 챈들러

16위 "살의" 프랜시스 아일즈

17위 "자칼의 날" 프레드릭 포사이스

18위 "나인 테일러스" 도로시 L 세이어스

19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20위 "39계단" 존 버컨

21위 "셜록 홈즈의 모험" 아서 코난 도일

22위 "살인은 광고된다" 도로시 L 세이어스

23위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애드거 앨런 포 24위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에릭 앰블러

25위 [[사라진 완구점]] 에드먼드 크리스핀

26위 [[Tiger in the smoke]] 마저리 엘링엄

27위 "가짜 경감 듀" 피터 러브시

28위 "흰 옷의 여인" 윌키 콜린스

29위 [[A Dark-Adapted Eye]] 바바라 바인

30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제임스 M. 케인

31위 "유리 열쇠" 더쉴 해밋

32위 "배스커빌 가의 개" 아서 코난 도일

33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존 르 카레

34위 "트렌트 마지막 사건" E.C 벤틀리

35위 [[From Russia with Love]] 이언 플레밍

36위 "경관 혐오" 에드 멕베인

37위 "제리코의 죽음" 콜린 덱스터

38위 "낯선 승객"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39위 "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40위 "세 개의 관" 존 딕슨 카

41위 "독 초콜릿 사건" 앤서니 버클리

42위 "성녀의 유골" 엘리스 피터스

43위 "죽음의 혼례" 엘리스 피터스

44위 "죽음의 키스" 아이라 레빈

45위 "재능있는 리플리"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46위 "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47위 "호수의 여인" 레이먼드 챈들러

48위 "무죄 추정" 스콧 터로우

49위 "내 눈에 비친 악마" 루스 렌들

50위 "벨벳의 악마" 존 딕슨 카

51위 "치명적 반전" 바바라 바인

52위 [[The Journeying Boy]] 마이클 이네스

53위 [[A Taste for Death]] P.D. 제임스

54위 "독수리는 날개치며 내렸다" 잭 히긴스

55위 [[My Brother Michael]] 메리 스튜어트

56위 [[Bertie and the Tin Man]] 피터 러브지

57위 [[Penny Blac]] 수전 무디

58위 [[Game, Set & Match]] 렌 데이튼

59위 [[The Danger]] 딕 프란시스

60위 [[Devices and Desires]] P.D. 제임스

61위 [[Under World]] 레지널드 힐

62위 [[Nine Coaches Waiting]] 메리 스튜어트

63위 [[A Running Duck]] 폴라 고슬링

64위 [[smallbone deceased>> 마이클 길버트

65위 [[The Rose of Tibet]] 라이오넬 데이비슨

66위 [[Innocent Blood]] P.D. 제임스

67위 <<맹독>> 도로시 L 세이어스

68위 [[Hamlet, Revenge!]] 마이클 이네스

69위 "시간의 도둑" 토니 힐러먼

70위 [[A Bullet in the Ballet]] Caryl Brahms & S. J. Simon

71위 [[Deadheads]] 레지널드 힐

72위 "제3의 사나이" 그레이엄 그린

73위 [[The Labyrinth Makers]] 앤서니 프라이스

74위 [[the quiller memorandum>>애덤 홀

75위 "내안의 야수" 마거릿 밀러

76위 [[The Shortest Way to Hade]] 새러 코드웰

77위 "질주" 데스몬드 배글리

78위 [[Twice Shy]] 딕 프란시스

79위 [[The Manchurian Candidate]] 리처드 콘돈

80위 [[the killings at drift>> 캐롤라인 그래험

81위 "야수는 죽어야 한다" 니콜라스 블레이크

82위 "고르키 파크" 마틴 크루즈 스미스

83위 "마지막으로 죽음이 온다" 애거서 크리스티

84위 "녹색은 위험"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85위 [[Tragedy at law]] 시릴 헤어

86위 "콜렉터" 존 파울즈

87위 "기데온과 방화마" J.J. 매릭

88위 "대통령의 유산 The Sun Chemist" 라이오넬 데이비슨

89위 "나바론 요새" 알리스테어 맥클린

90위 [[The Colour of Murder]] 줄리안 시몬즈

91위 [[Greenmantle]] 존 버컨

92위 "모래톱의 수수께끼" 어스킨 칠더스

93위 [[wobble to death>> 피터 러브지

94위 <<붉은 수확>> 더쉴 해밋

95위 [[The Key to Rebecca]] 켄 폴렛트

96위 [[Sadie When She Died]] 에드 멕베인

97위 [[The Murder of the Maharajah]] H.R.F. 키팅

98위 [[What Bloody Man Is That?]] 사이먼 브렛

99위 [[Shooting Script]] 게빈 라이얼

100위 "네 명의 의인" 에드거 월러스

2021/12/19

고전 추리·범죄소설 100선 - 마틴 에드워즈 / 성소희 : 별점 2.5점

고전 추리·범죄소설 100선 - 6점 마틴 에드워즈 지음, 성소희 옮김/시그마북스

영국 국립 도서관에서 발간한 고전 범죄소설 시리즈를 읽을 때 참고할 안내서입니다. 1901년에서 1950년 사이에 출간된 소설 중 범죄 소설에 초점을 맞춰 모두 102편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시기별, 장르별, 특징별로 상세하게 범주를 구분하고, 범주별로 왜 그 작품을 선정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덕분에 소개된 작품만 읽어도, 고전 추리, 범죄 소설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황금기를 지나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통 고전 본격물'을 일컫는, 이른바 '페어플레이 미스터리'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면 저자는 1차대전 이후 전쟁에 지친 대중이 현실 도피와 함께 흥미진진한 게임을 원했기 때문에 이 분야가 탄생했다고 설명합니다. 점점 소설 속 탐정과 지혜를 겨루는 작품이 많아졌으며, 그 결과 오락거리로 즐기는 가벼운 문학의 새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이른바 범죄 소설의 '황금기'가 바로 이 시기인겁니다. 복잡한 퍼즐, 이야기 속 단서 삽입, 독자를 현혹시키는 여러가지 장치들을 선보이기 위해 장편 형식이 유행하게 된 것도 필연이었고요. 

또 불가능 범죄 미스터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단편 형식이 가장 잘 맞는다는 주장도 기억에 남습니다. 독자가 불신을 유예하는 시간, 즉 사실주의에 입각한 비판을 멈춰놓는 시간이 짧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인데, 저 역시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리뷰를 쓸 때는 "생각해보니 억지스럽고 작위적이었다'고는 해도, 최소한 읽는 동안에는 그런 생각을 할 틈 없이 두뇌 게임만을 온전히 즐기려면 이야기가 길면 안 되겠지요.

이런 추리소설 통사적인 측면 말고도, 작품별 소개글도 수준이 높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진짜 흥미를 자아내는 선까지만 알려주는, 스포일러가 전혀 없는 내용 요약도 일품이며 소개된 작품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도 충실히 수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상화 버젼에 대한 정보가 아주 디테일해요. 영화는 물론, TV 시리즈까지 모두 소개하고 있으며, 심지어 에드먼드 크리스핀의 "움직이는 장난감 가게"에서, 통제 불능 상태의 로터리와 마주치는 두 번째 추격 장면은 히치콕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각색한 영화에 활용했다는 이야기까지 소개될 정도니까요. 

비슷하거나 영향을 받은 작품에 대한 소개 역시 그 방대함과 깊이가 남다른 수준이며 그 외 여러가지 토막 정보들도 충실합니다. 바로네스 오르치의 "미스 엘리엇 사건"은 1915년 어니스트 섀클턴 경이 남극 탐험을 떠날 때 챙겨갔던 책이었다, 크리스티아나 브랜드가 1979년, "독 초콜릿 사건" 재판본 서문을 쓰면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일곱 번째 방법을 발표했다, 우드소프의 1932년 데뷔작 "사립학교 살인사건"은 1934년 미국 사립학교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과 소름끼칠 정도로 닮아있었다는 등의 이야기들 처럼요. 1931년 발표되었던 에블린 엘더의 "흑백 살인"은 주인공 샘 호더가 그린 그림이, 프랜시스 비딩의 1935년 작 "노리치의 피해자들"에서는 용의자들 사진이 중요 단서로 사용되었다는 등의 추리 소설 관련된 아이디어가 이미 20세기 초엽에 정립되었다는 정보들도 재미있었습니다. 읽으면서 저자의 추리, 범죄 소설 분야에 대한 방대하면서 해박한 지식에는 감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추리 소설가들이 작품을 썼던 의도들도 볼만했던 정보입니다. A.E.W 메이슨이 "독화살의 집"을 쓸 때 목표로 했던 건, 미스터리가 모두 해결된 후 추가 설명해야 하는 내용을 가능한 없애겠다는 것처럼요. 페어플레이 추리 소설의 초창기 표본인 "밤중에"를 쓴 고렐 경의 목표는 모든 필수적인 정보를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하는 것이었다고 하며, 고렐 경의 이 작품에서 건물 평면도, 지도 등이 처음 수록되었다고 합니다. A.A. 밀튼은 추리 소설은 이해하기 쉬운 말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탐정이 독자보다 특별한 지식을 더 많이 알고 있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는데, 과연 곰돌이 푸를 쓴 작가답습니다. 

가장 마음에 든 건 마이클 이네스의 말이었습니다. 그는 "추리 소설은 어쨌거나 순전한 오락물이니 독자를 당황하게 할 뿐만 아니라 즐겁게 해 주겠다는 야망을 저버려서는 안된다"는데 정말이지 맞는 말입니다! 빅터 로렌조 화이트처치가 "다이애나 웅덩이의 범죄"를 쓸 때, 본인 스스로 왜 범죄가 일어났고 누가 범인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창작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자 뿐 아니라 작가조차도 의미를 모르는 단서들을 살펴보며 수사를 하고 글을 썼다는 건데, 발상이 참 독특했어요.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안내서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내에 따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국내 소개된 작품이 턱없이 부족한 탓입니다. 총 102편 중 국내 소개된 작품은 아래의 29편에 불과합니다. 절판된 책도 포함한 것으로, 실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은 그보다도 훨씬 적을 거에요. 이래서야 이 책을 읽는 의미가 많이 퇴색할 수 밖에 없지요.

  1. "배스커빌 가의 사냥개" - 아서 코난 도일
  2. "네 명의 의인" - 에드거 월리스
  3. "브라운 신부의 순진" - G.K. 체스터턴
  4. "오시리스의 눈" - R. 오스틴 프리먼
  5. "하숙인" - 마리 벨록 로운즈
  6.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 어니스트 브래머
  7. "트렌트 마지막 사건" - E.C. 벤틀리
  8. "통" -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9. "붉은 저택의 비밀" - A.A. 밀른
  10.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 - 애거사 크리스티
  11. "증인이 너무 많다" - 도로시 L. 세이어즈
  12. "독 초콜릿 사건" - 앤서니 버클리
  13. "목사관 살인사건" - 애거사 크리스티
  14. "세 개의 관" - 존 딕슨 카
  15.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 - 이든 필포츠
  16. "녹색은 위험"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17. "시행착오" - 앤서니 버클리
  18. "완벽한 살인사건" - 크리스토퍼 부시
  19. "ABC 살인사건" - 애거사 크리스티
  20. "막다른 사건 부서" - 로이 비커스
  21. "살의" - 프랜시스 아일즈
  22.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 조세핀 테이
  23. "데인 가의 저주" - 대실 해밋
  24. "재앙의 거리" - 엘러리 퀸
  25. "붉은 오른손" - 조엘 타운슬리 로저스
  26. "열차 안의 낯선 자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27. "수상한 라트비아인" - 조르주 심농
  28.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 H. 부스토스 도메크
  29. "야수는 죽어야 한다" - 니콜라스 블레이크

자유 추리문고에서 출간된 "포튠을 불러라"는 이 책에서 소개한 "포춘 씨, 부탁입니다"와는 다른 단편집으로 생각됩니다. 언급되고 있는 "작은 집"이라는 작품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 외 수록작은 다르거든요. 그래서 정식으로 소개된 걸로 치지는 않겠습니다. 게다가 저는 소개된 작품은 한 3~4권 빼고 전부 읽었기에, 별 의미없는 소개였던 셈입니다. 

추리 소설 역사에 대한 자료적 가치는 높지만, 이런 이유로 감점하여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0/06/02

덧없는 양들의 축연 - 요네자와 호노부 / 최고은 : 별점 2.4점

덧없는 양들의 축연 - 4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북홀릭(bookholic)

"인사이트 밀"로 잘 알려진 일본의 젊은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의 5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신작 단편집.
부유한 가문의 어두운 부분을 다루고 있다는 점과 모두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점으로 묶이는 "기묘한 맛" 류의 연작단편집입니다. 일상계 소품이었던 작가의 전작 "봄철 딸기 타르트 사건", "여름철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고, 클로즈드 써클 정통 본격 추리 스릴러였던 "인사이트 밀"과도 전혀 다른 장르로 작가의 도전 정신이 눈에 띕니다.

그러나... 도전은 좋았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전작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트릭' 덕분에 추리적으로는 볼 만 했었습니다. 이러한 트릭 창작력은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허나 이 작품은 추리적인 부분에서 많이 부족합니다. 트릭이 거의 등장하지 않을 뿐더러, 거의 모든 이야기의 동기가 애매하고 설득력이 없는 탓입니다. 물론 장르가 정통 추리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가의 명성에서 일말의 기대를 했었는데 많이 아쉽더군요. 아울러 "기묘한 맛"류의 작품치고는 반전이나 서늘함 역시 별로 뛰어나다 하기는 어렵다는 것도 문제고요.

그리고 작가의 단점이라 할 수 있는 설정과 전개는 여전히 별로입니다. 일상계 두 편은 아무래도 일상계이기에 비현실적인 설정이 덜했고, "인사이트 밀"은 설정보다는 트릭이 포인트라서 단점을 많이 상쇄시키지만 이 작품에서는 연작이라는 주제에 얽매여 작위적인 설정이 난무합니다. 그래서 단점이 더욱 두드러지는 느낌이에요. 하녀와 메이드, 그리고 광기에 가까운 집착은 너무 만화적인 설정이잖아요? 부유한 가문의 어두운 진실이라는 주제도 현실적이지 못한 낡아빠진 설정이고요.

작품별 상세 분석을 통한 별점은 2.4점입니다. 작가의 단점이 두드러지고 장점은 잘 보이지 않아 감점합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덧없는 양들의 만찬"인데 그나마도 별점은 3점에 불과하네요. 차라리 만화 원작이었다면 더 나았을 뻔 했습니다. 다음 작품은 작가가 스스로의 장점을 잘 살린 정통 본격 퍼즐 미스터리를 선보여주었으면 합니다.

덧붙이자면 출판사 홍보문구는

요네자와 호노부의 블랙 미스터리 연작 소설. 상류계급의 영애들만 가입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독서 모임이 있다. 남들에게 알릴 수 없는 은밀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바벨의 모임'. 명예, 애증, 꿈…. 이 '바벨의 모임'에 소속된 영애들과 그 집안을 둘러싼 차갑고 매혹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인데 이거 완전 과장광고예요! 뭔가 온다 리쿠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환상이고 뭐고 없는 내용이며 주요 소재인 것으로 보이는 "바벨의 모임"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작품도 딱 두 편 뿐이라 연관성을 지녔다고 말하기 힘들거든요. 게다가 "블랙 미스터리"가 뭔지도 잘 모르겠어요...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나 로열드 달이 "블랙 미스터리" 작가던가? 홍보 문구에 낚이는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씁쓸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집안에 변고가 생겨서"

후키코의 오빠로 부적절한 행실 탓에 집안에서 쫓겨났던 소타가 저택을 습격하다가 한 손을 잃는 큰 부상을 입고 사라졌다. 그 뒤 후키코의 고모와 할머니가 살해당한 채, 그것도 한손을 잃은 상태로 발견되는데...

탄잔 가문의 후계자이자 외동딸인 후키코의 하녀 유우히의 수기 형태로 전개되는 작품. 

일견 전형적인 고전 추리소설과 같은 전개죠? 하지만 급작스럽게 후키코의 지병(?)이라는 동기로 마무리되며 이야기는 안드로메다로 가 버립니다. 정말이지 동기가 이해하기 어렵고 너무나 뜬금없었어요. 몽유병이라는 설정 역시 작위적이었고요. 후키코가 비밀스럽게 읽는 책들을 유우히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나중에 동기와 연관된다는 부분 하나만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북관의 죄인"

무츠나 가문의 정부의 딸로 태어난 나(아마리)는 북관에 거주하는 무츠나 가문의 후계자 소타로의 하녀 겸 간수가 되었다. 절대 북관을 나갈 수 없는 소타로의 부탁으로 다양한 물건들을 구해주지만, 그 물건들의 사용처는 몰랐다. 하지만 소타로가 병으로 사망한 뒤, 남긴 그림을 통해 물건들의 사용처를 알게 된다.

작품들 중 가장 합리적인 동기, 즉 "돈"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작품 자체는 동기와 범죄보다는 소타로가 아마리에게 부탁한 여러 가지 물건들의 사용처를 더 궁금하게 만듭니다. 식초로 시작해서 압정, 실톱, 막자사발, 목재, 니스, 연을 날릴 때 쓰는 실, 마로 된 천, 납, 계란, 피, 라피즈라줄리 원석들 말이죠. 이 물건들이 앞부분에서 등장했던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앞과 뒤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전개가 아주 깔끔해서 마음에 드네요. 그림에 약간의 장치를 통해 서서히 색깔이 변해가도록 했다는 트릭이 사건의 진상, 즉 아마리의 범죄를 드러낸다는 내용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를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너무 번잡스러웠고,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한 것 자체가 그다지 설득력이 없고 작위적이어서 아쉬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장난스러운 장치 이외의 의미는 없던 트릭 역시 문제였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산장비문"

무역상 타츠노의 별장 비계관의 관리인 야시마는 조난당한 등산객 오치를 구해준 것을 계기로, 손님이 없어 활기 없는 비계관에 손님을 찾아오게 할 묘책을 생각해 내는데...

"바벨의 모임"과는 별 관계없는 별장 관리인이 등장합니다. 합리적인 내용과 이야기 전개가 깔끔했던 소품이에요. 

다만 마지막에 입막음의 수단으로 쓴다는 '만지면 손을 벨 것처럼 날카롭고 사람을 때려죽일 수도 있는 벽돌 같은 덩어리'라는 묘사는 지나치게 기교를 부린 느낌이라 별로였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금괴라고 하던가. 아니면 그냥 죽이던가...

그래도 합리적인 동기와 더불어 오치의 생사를 놓고 도우미 유키코와 두뇌싸움을 벌이는 등 흥미진진한 전개 등으로 평균적인 수준의 재미는 보장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타마노 이스즈의 명예"

오구리 가문의 외동딸 스미카의 유일한 친구는 하녀 이스즈.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후계자 지위에서 박탈당한 스미카는 집안에 유배되고 목숨까지 위협받게 된다.

할머니에게 지배되는 시골의 명문가라는 설정은 21세기에 들고 나오기에는 너무 낡은 게 아닐까요? 손자 타이하쿠의 죽음과 노마님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건의 연쇄 역시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고요. 또한 스미카의 추측과 추정으로만 진행되고, 이스즈의 심리 묘사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등 사건으로 성립하는 게 힘들어 보였습니다. 서늘한 느낌은 괜찮았는데 뭔가 좀 미완성인 느낌이 강한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덧없는 양들의 만찬"

졸부 오노데라 가문의 딸은 일기에서 "바벨의 모임"의 소멸에 대해 다룬다. 이유는 그녀가 "아밀스턴 양 요리"를 가문의 요리사 나츠에게 시켰기 때문이었다...

일기라는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작품으로, 스텐리 엘린의 걸작 단편 "특별요리", 윌리엄 아이리시의 긴박감 넘치는 소품 "색다른 토끼스튜 (손톱)" 등 명작 추리 소설 속 요리들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기 때문에 즐길거리가 많았습니다. '맛'보다 '머리'로 즐기는 것이라는 아밀스턴 양 요리에 대한 설명과 마지막 결말의 서늘한 느낌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1인칭의 일기 형태로 작품을 진행시킨 것은 불필요한 설정이라 생각되며, 전개도 지루한 편이라 마지막 반전의 맛이 부족한 것은 좀 아쉽네요. 그래도 "기묘한 맛"류의 작품으로는 일정 수준 이상이라 생각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2023/02/04

철벽의 알리바이로 완전범죄 성립!? '교환 살인'을 모티브로 한 미스터리

* 언제나처럼 honto의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국내 소개된 작품은 4편입니다. 저도 두 편 밖에는 읽어보지 않았는데 찾아봐야겠네요.

'교환 살인'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살해 대상을 교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살인이 저질러지고 있는 동안에 철벽의 알리바이를 준비해서 혐의에서 벗어나는 완전범죄를 만들기 위해서이지요. 

그러나 교환 살인이 트러블, 변심이나 배반 등으로 생각대로 잘 흘러가지 않고 그 와중에 드라마가 발생하는건 추리 소설에서 기본적인 테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런 교환 살인 미스터리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킹을 찾아라>> 노리즈키 린타로

4중의 교환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범인과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노리즈키 경시와 린타로 부자의 활약을 그린 미스터리. 범인 측 시점은 일종의 도서 미스터리로, 노리즈키 경시와 린타로 부자 시점은 본격 미스터리물로 즐길 수 있다. 또 교환 살인으로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에 대한 후더닛 요소도 더해져 있는, 헛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치밀한 플롯이 빛나는 본격 요소가 가득 담겨있는 작품.

<<교환살인에는 어울리지 않는 밤>> 히가시가와 도쿠야

사립탐정 파트, 탐정의 제자 파트, 형사 파트가 순서대로 그려지며 교환 살인물로는 드물게 도서 미스터리 스타일이 아닌 채로 진행된다. 제목에는 있지만 도대체 무엇이 교환 살인인지 궁금해하면서, 가벼운 분위기의 문장에 혹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저자의 속셈에 빠져들고 마는 본격 미스터리.

<<도망자>> 오리하라 이치

교환 살인을 저질렀지만 배신당해서 한 번 체포되었지만 탈주한 뒤 도망자 신세가 된 도모타케 지에코. 그녀와 그녀를 쫓는 형사와 남편, 그리고 인터뷰로 구성되어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도피 행각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노골적이며 의미심장한 표현들은 서술 트릭의 대가인 저자의 솜씨를 느끼게 해 준다. 실재로 있었던 사건이 모델인 미스터리 작품.

<<스트레이트 체이서>> 니시자와 야스히코 (국내 미출간)

린지는 바에서 취했을 때 3중 교환 살인 약속을 해 버렸다. 다음날 아침, 자신이 지목했던 살해 대상이었던 상사의 집에서 타살 사체가 밀실 상황에서 발견되는데..... 저자가 SF 설정의 본격 미스터리 작품들을 발표하던 시기의 작품. 수수께끼 아이템이 등장해서 이번에도 SF 설정이구나 싶은 점도 흥미로운 점. 꼭 주인공에 감정이입해서 읽어보시길.

<<낯선 승객>>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교환 살인이 주제인 작품들 중 선구자적인 존재인 이 작품은 히치콕 감독에 의한 영화도 유명하다. 우연히 같은 전철에서 만난 가이와 브루노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브루노가 가이에게 교환 살인을 제안한다는 내용으로 편집광적인 스토커의 무서움을 맛볼 수 있는 심리 서스펜스물.

정보는 모두 당신 손 안에! <<독자에의 도전장>>을 즐길 수 있는 미스터리 작품들

2014/10/31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 셜리 잭슨 / 성문영 : 별점 2점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 4점
셜리 잭슨 지음, 성문영 옮김/엘릭시르

블랙우드 일가는 6년 전, 윌리엄 삼촌과 콘스탄스, 매리캣 자매를 제외하고 일가족이 모두 독살당한 사건으로 마을에서 고립되었다. 당시 요리를 했던 콘스탄스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여전히 범인으로 의심받고 있었다. 매리캣은 사고 후 미쳐버린 윌리엄 삼촌, 광장공포증으로 집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콘스탄스와 함께 어렵지만 단란하게 살아가는데, 사촌 찰스가 방문한 다음부터 생활에 균열이 시작되는데...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열 한 번째 책. 고딕 호러의 대가라는 셜리 잭슨의 작품입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무섭다거나 섬뜩한게 아니라, 불편하다는 감정에 가깝습니다. 작가의 엄청나게 상세한 묘사들 때문입니다. 특히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집요한 광기로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이 작품 속 사건 사고의 원흉인 화자 매리캣의 성격 묘사는 정말 압권입니다. 초반에 열여덟 살이라는 나이를 밝혀주지만, 내용 내내 초등학생 이상의 연령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순수하고, 그만큼 완전히 미쳐버린 여자아이의 심리 묘사가 그야말로 극에 달해 있거든요. 이런 류의 캐릭터, 성격은 혐오감을 가질 정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굉장히 불편했는데, 개인적으로는 "파이 바닥의 달콤함"의 소악마 플라비아 들루스가 연상되었습니다.

또 시골 마을에서 고립된다는 설정은 "이끼"나 얼마 전 보았던 "그것이 알고 싶다"의 "사자개 저택의 비밀"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흔하디 흔하지만, 고립된 자매의 묘사에서 보이는 상세함과 깊이가 대단해서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과연 누가 얼마나 미친 것일까? 이러한 광기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고요. 마지막 화재 이후 벌어지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묘사도 인상적이라 궁금증을 더해줍니다.

그러나 고딕 "호러"라는 말이 어울리는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무서운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독살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도 초반에 이미 짐작할 수 있어서, 대단한 반전으로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미쳐버린 노인과, 범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언니를 제외하면 과연 누가 남겠습니까? 또 완벽하게 미쳐버린 매리캣 시점으로만 전개되어 광기나 범행의 이유 같은 게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도 답답했습니다. 그게 뭐든, 최소한 '태양이 너무 뜨거웠다' 식으로라도 뭔가 설명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개인적으로 "화형법정"이나 "어두운 거울 속에"와 같은 추리적인 재미 요소를 기대했었는데, 그러한 기대는 완벽하게 빗나갔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묘사는 압도적이지만 추리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미스터리 책장’이라는 레이블로 출간될 작품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담고 있는 건 작가가 경험했다는 고립에 대한 두려움과 광기 뿐이니까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편선들 같은, 약간 마음 불편한 순문학을 원하신다면 좋은 선택일 수 있지만, 정통파적인 추리 혹은 공포를 원하신다면 추천드리기 어렵습니다.

2015/01/02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 최세희 : 별점 3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6점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다산책방

아래 리뷰에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니 웹스터는 고등학생 시절 앨릭스, 콜린, 에이드리언과 친하게 지냈었다.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한 토니는 대학에서 여자친구 베로니카와 교제했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이상한 방향으로 꼬여갔고 결국 에이드리언이 그녀와 교제하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토니는 쿨한 척 엽서를 보낸 후 둘을 인생에서 지워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얼마 후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나, 60대가 된 토니에게 얼마간의 돈과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토니에게 남긴다는 베로니카 어머니의 유언장이 도착했다. 왜 그녀는 토니에게 그러한 것을 남겼을까? 토니는 수수께끼를 풀고 일기장을 되찾기 위해 베로니카와의 접촉을 시도하는데...

안녕하세요. 2015년 한 해가 시작되었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작품은 회사 동료의 추천으로 교보문고 e-book으로 읽었습니다. 이런저런 상을 수상한 유명 작품이더군요.

20대 학창 시절 중심의 에이드리언 자살로 끝나는 1부, 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뒤 베로니카가 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돌려주지 않을까를 파헤치는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화자인 토니의 1인칭 시점, 의식의 흐름, 과거의 기억과 현재가 뒤섞이며 진실이 밝혀지는 구조와 전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덕분에 분량은 장편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다 읽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네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기도 했고요.

정통 추리물은 아니지만 2부에서 토니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더듬어가는 과정이 흥미로워 추리 장르로 분류했는데, 마지막 반전은 확실한 충격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기묘한 맛' 류의 심리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웃음기는 쏙 빠졌다는 점에서 "로알드 달"보다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에 가까운 스타일이지요. 마침 무대도 영국이네요.

이러한 장르 문학으로서의 가치는 물론 묘사와 디테일 역시 대단한 수준입니다. 특히 제 대학 시절이 연상된 1960년대 학창 시절 토니와 친구들의 속물적이고 허세 가득한 묘사, 그리고 여러 가지 소품으로 상황과 캐릭터를 설명하는 솜씨가 좋았습니다. 손목 안쪽으로 돌려놓은 손목시계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베로니카가 토니에게 책임을 묻거나 원망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절친에게 애인을 빼앗긴 뒤 악담을 퍼부은 것이 그렇게나 잘못된 일일까요? 게다가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의 어머니와 관계를 맺고 자살하게 된 일은 토니와는 무관합니다.
토니의 편지가 없었더라도 가족은 만날 가능성이 높았고, 베로니카 몰래 어머니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한 충고가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토니에게 주의를 준 것도 사실이지요. 에이드리언이 충고를 따라 그녀를 만나 관계를 맺은 건 순전히 두 사람의 자유 의지였습니다.
즉, 토니가 책임을 느낄 하등의 이유는 없습니다. 참혹한 결과 때문에 베로니카가 원망을 품을 수야 있겠지만 그 대상은 토니가 아니라 어머니나 에이드리언이어야 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에이드리언의 일기 복사본 문장에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 뒤에 "편지만 보내지 않았어도"라고 쓰여 있었다면, 에이드리언 역시 별볼일 없는 인간이었다는 증거입니다. 본인 실수를 두고 남 탓을 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아울러 베로니카가 어머니가 토니에게 남긴 유산을 ‘피 묻은 돈’이라 비난할 이유도 없습니다. 에이드리언의 유산도 아니고, 어머니가 토니에게 남긴 것이잖아요?

아울러 어머니가 일기장을 토니에게 남긴 이유, 베로니카가 명확하게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고 단서를 하나씩 흘린 이유도 설명이 없어서 아쉬웠고, 토니가 문제의 편지를 보낸 사실을 전혀 다른 기억(쿨한 엽서)으로 치환하고 있었던건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잊어버린 것도 아니고 완전히 다르게 기억했다는건데 영 와 닿지 않았어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 사건이라면 분명히 기억했을 겁니다. 이 기억과 '역사'라는 개념이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회고에 가깝다"는 작중 표현처럼 핵심 테마지만, 지나치게 부정확한 측면만 강조한 모양새라서 마음에 들지 않네요. 영국 소설임에도 프랑스 문학처럼 장황하고 복잡한 심리 묘사도 과했던 감이 있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역사에 대한 접근이 실망스러워 조금 감점했지만 잘 쓴 소설임은 분명하고, 반전도 빼어납니다. 고급스러운 유럽 문학의 향취도 짙게 묻어 나오고요. 장르 문학 팬 중 고급 취향이신 분들께는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뭐, 비싸 보이는 포장을 뜯어보면 내용은 막장이라는 점에서, 이래저래 영화 "졸업"의 잔혹한 변주에 지나지 않아 보이기도 하지만요.

2013/10/30

킹을 찾아라 - 노리즈키 린타로 / 최고은 : 별점 2.5점

킹을 찾아라 - 6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이한 별명의 네 사람이 모여 교환살인을 모의하고 대상과 순번을 정했다. 방법은 트럼프 카드 뽑기. 첫 번째 범인 와타나베 기요시의 범행을 시작으로 아무 관련 없는,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는 명확한 살인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노리즈키 총경은 아들 린타로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데...

노리즈키 린타로 장편. 이 작가 장편은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이후 두 번째네요.

작품의 시작은 네 명의 사람이 모여 교환살인을 모의하는 장면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일종의 도서 추리물 느낌을 전해 줍니다. 이후 범인 중 한 명인 와타나베 기요시의 범행을 디테일하게 묘사함으로써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갖게 만들었고요. 이후는 일반적인 추리물 형식이긴 하지만요.

어쨌거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전작보다는 쉽게 읽힙니다. 그러나 추리적인 완성도는 별로입니다. 이유는 우연과 작위적인 전개에 더해, 내용에서 경찰 수사의 헛점이 여실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완벽해 보이는 교환살인이 발각되는 이유가 와타나베의 바보 같은 실수였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실수는 노리즈키 총경이나 주변 증인들의 말을 빌리면, '한 번만 만져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위조지폐'로 비롯된 것인데, 와타나베는 맨손으로 지폐를 만져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또 지갑에는 어떻게 넣었을까요? 이후 와타나베가 은행에서 도주하다가 차에 치어 죽는다는건 작위적인 전개의 극치입니다. 여기서 체포되었더라면 진상은 한 번에 밝혀졌을 테니까요. 교환살인 추리의 근거가 되는 카드 발견 역시 나라자키가 카드를 남겨두고 도주한 탓으로, 순전히 운에 불과했습니다.

또 카드 발견 이후, 노리즈키 린타로가 등장하여 교환살인에 대해 두 명이 아니라 세 명,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 얽혔다고 추리하는데 이건 딱히 대단한 추리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이었다면 네 명도 당연히 가능하겠죠. 추리라고 부르기도 어려워요.

이러한 점들로 인해 페이지가 중간을 넘어갈 때까지는 솔직히 별볼일 없었습니다. 작가의 이름값에서 기대되는 정통 추리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그러나 후반부, 경찰이 숨통을 조여오고 위조된 협박장을 받은 이후 범인들이 오히려 자수하여 혐의를 축소하려는 공작을 벌이는 부분부터는 괜찮습니다. 첫 장면부터 독자를 범행모의에 끌어들여 앞부분 전개를 지루하게 만들지만, 중요한 정보를 교묘하게 감춘 탓에 독자와의 두뇌게임이 제대로 벌어지는 덕분입니다. 노리즈키 린타로와 독자가 공정한 정보를 제공받는 것은 물론이고요.

덧붙이자면 진상에 대한 아이디어도 탁월합니다. 교환살인을 테마로 한 작품은 많았지만 여태 이런 발상의 작품은 본 적이 없네요. 남겨진 용의자가 "살인을 모의했지만 나는 저지르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니! 교환살인 모의가 중죄일 수는 있으나 범행 실행 이전이라면 그 형량은 상대적으로 낮을 것이라는 것을 이용한 건데, 교환살인의 가장 큰 맹점인 '첫 범행으로 이득을 본 뒷사람은 범행을 주저하게 되기 때문에 누가 먼저 범행을 저지르냐가 중요하다'를 한방에 해결해 준다는 측면에서도 아주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이 작품의 진상과는 살짝 어긋나지만, 누가 살인을 저지른 다음이라면 뒤에 남은 사람은 "사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반은 장난이었다"라고 자수하면서 범행을 불어도 되니 정말로 타당한 발상이죠.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 경우에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나라는 것인데, 순수하게 원한 관계였다면 아무 문제 없으리라 생각되네요. 단지 이 맹점만을 가지고 작품을 쓴 게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낯선 승객"이라면, 이 작품은 이 맹점을 가지고 두뇌게임을 벌인다는 점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요.)

허나 탁월한 발상과 빅재미의 후반부 역시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먼저 앞서 이야기한 대로 경찰 수사의 헛점 부분인데, 세키모토 마사히코에 대해 충실히 수사했다면, 그래서 그의 진짜 동기를 알아내었더라면 사건은 보다 빨리 해결되었을 겁니다. 이런 대형사건이 자수한 용의자의 자백에만 의지하여 수사가 진행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그리고 나라자키를 살해했다는 내용은 완전히 사족이었습니다. 나름 교묘한 작전으로 혼자서는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던 조시마에게 철퇴를 내리기 위한 작가적 의도로 보이긴 했지만, 좀 오버한 듯 싶더군요.

마지막으로 카드에 이름을 맞추었다는 발상과 그에 따른 진상은 꽤 그럴듯하고 재미도 있긴 하나 작위적이라는 점에서는 감점 요소이긴 합니다. 사실 카드가 킹이냐 조커냐는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설정과 전개는 진부하고 사건은 우연이 많이 개입되어 추리적으로 눈여겨볼 부분이 많지 않으나 마지막 부분의 아이디어는 돋보입니다. 후반부 아이디어를 보강하고, 정통파 추리소설보다는 범죄 스릴러로 전개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겁니다.

2010/06/19

쌍두의 악마 1,2 - 아리스가와아리스 / 김선영 : 별점 2.5점

 

쌍두의 악마 2 - 6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시공사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외딴섬 퍼즐' 사건 이후 정신적 충격으로 예술가들의 촌락 기사라 마을에 은둔해 버렸다.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에이토 대학 추리연구회 일동이 출동했다. 하지만 기사라 마을은 여러가지 이유로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 탓에, 추리연구회는 심야에 침투작전을 벌여 에가미 선배 홀로 겨우 침투에 성공했다. 아리스를 비롯한 나머지 연구회원들은 예술가 마을 바로 옆의 나쓰모리 촌락으로 후퇴한 뒤 선배와 마리아를 기다렸다.
그러나 기사라 마을의 화가 오노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고, 사건 해결을 위해 잠시 남기로 한 에가미 선배의 전화를 마지막으로 기사라 - 나쓰모리를 잇는 유일한 다리가 폭우로 유실되고 전기와 전화마저 끊겼다. 뒤이어 나쓰모리 마을에서도 카메라맨 아이하라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표 작가 중 하나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 작가의 두개의 시리즈 중 - 하나는 에이토 대학 추리 연구회 회원인 대학생 아리스가 화자로 등장하고 에이토 대학 추리 연구회의 대선배인 에가미 지로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학생 아리스"시리즈. 그리고 또 하나는 추리소설가 아리스가 화자이며 그의 친구이자 임상병리학자로 유명한 조교수 히무라 히데오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작가 아리스"시리즈 - 학생 아리스 시리즈로 그간 읽어왔던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긴, 800여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입니다.
시리즈 작품답게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전작 설정과 유사하면서도, 신본격 작가다운 고전적인 설정과 전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골 마을의 폐쇄적 공동체와 이 공동체가 천재지변으로 고립된다는 전형적인 클로즈드 써클 미스터리거든요. 그리고 연쇄 살인극이라는 것도 전작들과 유사하고요.

그동안 예닐곱편의 작품을 읽어온 것에 따르면,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공정한 단서 제공과 합리적인 추리라는 장점과 작위적인 설정이라는 단점을 함께 가지고 있는 작가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장점이라 생각했던 추리적인 부분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대표작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요.
첫번째 사건부터 문제에요. 향수를 뿌릴 수 있는 사람이 야기사와 뿐이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어차피 우산 안이라면 접혀져 있을때 향기가 나지 않아서 은폐가 가능했을테니까요.
향수를 뿌리는 것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동굴 안에서 살해할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문제에요. 작중에서 설명되듯 그냥 동굴 입구에서 살해해도 되잖아요. 입구가 2개라서 어디서 나올지를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약합니다. 향기에 의지해서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누군가를 미행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설령 가능하더라도 피해자에게 발각될 위험성이 너무 높아요. 그러느니 차라리 50% 확률로 입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계약에 따라 혐의를 벗겨주기 위한 작위적인 장치 설정도 무리수였습니다. 여자 힘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라는 것은 가정일 뿐, 현실적인 단서가 되기는 어려운 탓입니다. 이럴 바에야 확고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었어야 했습니다. 증거로 귀를 잘라낸다는 발상도 썩 와 닿지 않았고요. 차라리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렸으면 모든 것이 깔끔했을텐데, 이래서야 범행을 위한 범행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계약서"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귀"는 무가치하며 외려 범인에게는 불리한 증거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두번째 사건인 사진작가 아이하라 살인사건은 그래도 깔끔한 편이지만, 이 사건은 저도 범인을 짐작할 수 있었을 만큼 너무 간단하고 명쾌하다는게 문제입니다. 솔직히 추리적으로는 재미가 너무 부족했어요. 핵심 단서에 대한 정보 제공이 너무나 공정한 탓에, 용의자의 직업만 가지고도 범인을 특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로키의 팔레 이데알 이야기도 너무 많이 나와서 뭔가 사건에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트릭이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의 "낯선 승객"과 동일한 트릭이라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것도 아쉬웠던 점입니다. 그나마도 중간 과정을 너무 대충대충 넘기고 있기도 하고요.

동기면에서도 오노야 당연히 누구나 죽이고 싶어하는 인물이라 열외이지만 (종유동에 벽화따위나 그리는 놈은 죽어도 싸지) 야기사와의 살의는 살인 말고라도 여러가지 방법 - 돈이나 필름을 회수하거나 하는 방법 - 이 있었을테고 세번째 살인 역시 무로키가 체포된다면 불필요한 살인이기에 무의미해 보여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고립된 기사라 마을에서 한정된 인물들 대상으로 범인이 결국 밝혀졌을테고 말이죠.

아울러 작가의 전통적인 단점 역시나 그대로입니다. 고립된 상황을 만들기 위한 작중 설정부터가 억지스러워요. 특히나 몇몇 한정된 선택받은 사람들로만 구성된 외딴 마을의 예술가 공동체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설정이죠. 예술가들이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서 버틴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지나칠 정도로 "고립"에 집착하는 모습은 과히 좋아보이지는 않네요.

물론 기사라 마을 - 나쓰모리 마을 두개로 나뉘어져 전개되는 방식은 상당히 재미있고, 이렇게 두개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사건이 결국 하나로 엮인다는 결말도 굉장히 잘 만들어져 있기는 합니다. 사건도 모두 3건이나 등장해서 대장편다운 풍성함을 전해주고요.
또한 세번째 사건인 음악가 야기사와 살인사건은 주요 단서가 명쾌하고 설득력 넘치게 짜여진 잘 만들어진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트릭이라기 보다는 왜 X가 범인인가? 에 대한 설명이 핵심이지만 굉장히 합리적이고 깔끔하게 전개되고 있을 뿐더러, 고전적이며 본격 추리소설같은 느낌이 잘 전해지기 때문에 마음에 들었어요 . 구태여 변명하려면 변명할 수 있는 단서이기는 하지만...

결론내리자면 공정한 단서제공과 본격 추리소설다운 지적인 재미는 존재하나 하나의 장편으로서의 완성도는 그에 미치지는 못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벌려놓은 것에 비하면 알맹이는 빈약한 편이니까요. 엄청나게 긴 분량 역시 감점 요소였어요. 분량에 걸맞게 디테일하지도 못한데 차라리 조금 더 짧았더라면 훨씬 좋았을것 같습니다.개인적으로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조금은 더 나아 보이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현대 사회에 클로즈드 써클 미스터리물을 만들고자 노력한 작 가의 노고에는 경의를 표합니다만 왜 이 작품이 대표작으로 인정받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아무래도 작가가 트릭과 추리적인 발상에 비하면, 소설가로서의 글 쓰는 능력은 부족해 보입니다.

2009/02/19

녹색은 위험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크리스티나 브랜드) / 이진 : 별점 3점

녹색은 위험 - 6점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지음, 이진 옮김/시작

2차 대전 당시 런던 대공습의 와중에 마을 외곽의 한 야전병원의 수술대 위에서 우체부로 일하던 히긴스 노인이 사망한다. 이 사건으로 외과의사 문과 저베이스, 마취의 반스, 간호사 마리온과 간호 봉사대원 제인, 프레데리카, 에스더 7명의 작은 공동체에 파문이 일고 경시청에서 커크릴 경감이 파견되어 사건 수사를 시작한다. 이후 간호사 마리온이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고 커크릴 경감은 범인의 정체를 눈치채고 공습의 와중에서 범인을 잡아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대표작입니다. 국내 출간이 너무 늦은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죠. 뭐, 이 땅의 장르문학 홀대가 한두해 있었던 일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요. 어쨌건 동서 추리문고를 통해 "제제벨의 죽음" 밖에 소개되지 않았었지만 "제제벨의 죽음" 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녹색은 위험"이 더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있어서 기대가 무척 컸었기 때문에 이렇게 읽게 되니 정말 감개무량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작품 자체는 실망스러웠습니다. 기대가 너무 컸던게 아닌가 싶네요. 일단은 전개가 굉장히 고풍스러운 것이 약간 거슬리는 부분이었습니다. 반세기 이전 작품이긴 하지만 글쎄요... 크리스티 여사님 작품을 읽을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어요. 작풍인지는 모르겠지만 심리묘사와 개인적이고도 사변적인 대사가 지나칠정도로 장황하게 난무하는 점도 고풍스러운 느낌에 한몫 거들면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였고요. 이렇게 장황한 묘사와 대사는 그 사이사이에 중요 단서를 살짝 살짝 끼워넣기 위한 장치이긴 하지만 그래도 정도가 좀 심했습니다. 번역의 문제가 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매끄럽지도 않고 말이죠.
게다가 커크릴 경감 (콕크릴 경감) 은 이 작품에서는 정말이지 하는게 너무 없어요! 되려 애꿎은 희생자만 늘려버리고 추리보다는 자백에 의존하는 등 명탐정으로서의 역할 수행을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제벨의 죽음" 에서 접했던 명탐정과는 전혀 다른사람 같았어요.

동기도 지나치게 오버스러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혐의를 두기 위해서 다양한 동기를 등장인물들에게 가져다 붙이는건 고전 추리물로는 당연한 전개겠지만, 문제는 이 동기들이 거의 다 평이한 수준이라 "살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좀 어려워 보였던 탓입니다. 심지어는 남동생과 누나의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어거지(?)까지 가져다 붙이는 건 영 아니다 싶더군요.

하지만 실망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제가 10년도 더 전에 이 작품의 영화버젼을 이미 감상했던 탓이 가장 큽니다. 화쪽이 더 깔끔하고 간결하게 각본을 구성해서 더 몰입해서, 훨씬 재미있게 볼 수 있었거든요. 사건도 잘 축약하고 내용을 많이 쳐 냈지만 추리적인 맛은 충분히 잘 살려냈던 덕분입니다. 물론 영화에 비해서 훨씬 중첩되어 쌓여있는 복선들, 다양한 단서들, 용의자와 범인을 특정하게 만드는 시간의 굴레에 대한 설정, 특히 "가운" 에 대한 추리적인 발상은 무척 좋았고 곳곳에 숨어있는 영국적인 묘사와 유머들 역시 마음에 들긴 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거장의 대표작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죠. 영화와는 다른 책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심리묘사와 디테일은 확실히 잘 살아 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구하기 힘들어도 영화쪽이 더 나은건 분명합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낯선 승객" 역시 히치콕 감독의 영화버젼이 훨~씬 뛰어나듯이 가끔은 원작을 능가하는 영화도 존재하는 법이겠죠. 
아울러 이 작품의 가장 큰 트릭은 바로 "제목" 과 동일한데 역시나 영화를 통해 접했기에 신선함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주요 트릭과 범인을 이미 알고 있는 추리소설을 다시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지루한 일인지 다시금 느끼게 되었네요. 
영화는 "흑백영화"라서 색깔을 전혀 구분할 수 없었던 탓에 마지막 트릭 공개가 좀 황당했던 기억이 나기는 합니다만... 하여튼 별점은 3점입니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점수가 좀 더 높았을까요? 아직 크리스티아나 브랜드를 접하지 않으신 추리 애호가분들이 계시다면, "제제벨의 죽음" 을 먼저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한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이 고전 명작을 출간해 주신 출판사 관계자 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리지만 책 표지 디자인과 본문의 구성은 별로였습니다. 표지 디자인은 "병원이 무대인 소설에 제목은 "녹색은 위험" 이니 이렇게 가야겠다!" 라고 떠오른 첫 생각을 그대로 비쥬얼로 옮겨놓은 듯한, 녹색 바탕에 의사로 보이는 인물이 전면에 배치된 디자인인데 너무 뻔하고 안이하잖아요... 90년대 로빈 쿡 소설이 생각날 정도로 올드하기도 하고요. 가격도 착하고 책도 괜찮았지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신경써 주신다면 더욱 좋을 것 같네요.

2011/06/16

누명 - 애거서 크리스티 / 이가형 : 별점 2.5점

누명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해문출판사


부유한 자선사업가인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쟈코 아가일은 감옥에서 죽었다. 그리고 2년 뒤, 지질학자 아서 캘거리는 아가일 가문을 방문하여 살해 당시 쟈코의 알리바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당시 어머니를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가일 저택에 거주하던 가족들 뿐이었다. 내놓은 자식이었던 쟈코가 유죄판결을 받은 것을 당연시 여기던 가족들은 누가 진범이냐를 놓고 큰 충격과 의심, 공포에 빠지게 되는데...

지난 주부터 저만의 애거서 크리스티 섭렵이 이어지고 있네요. 이번에 읽은 작품은 "누명"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직접 선정한 자신의 작품 베스트 10에 들어가는 작품입니다. 사실 완독한 것은 며칠 전으로 리뷰 글을 다 써 놓았었는데, 편집 버튼 누른 뒤 알 수 없는 버그가 발생해서 다 날아갔네요. 망할 에버노트.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씁니다.,, 리뷰 내의 오류나 텐션이 떨어지는 것은 다 에버노트 탓입니다...

이 작품은 1958년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여사님 작가 인생의 비교적 후반기라 할 수 있죠. 그래서 작중에 폭스바겐 비틀과 스푸트니크가 언급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단순한 배경 뿐만이 아니라, 여사님의 유명 시리즈 탐정이 등장하지 않는 등 전체적으로 이색적인 부분이 많이 보입니다. 여러모로 원숙기를 넘어선 작가의 여유같은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여사님의 전공인 전통 본격 추리물보다는,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 스타일의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성향이 엿보이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미 해결된 것으로 보였던 과거의 사건을 다시 끄집어 낸 뒤, 가족 중 누가 살인범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의 증폭되는 오해와 증오 등 복잡한 심리 묘사가 주로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이러한 묘사를 뒷받침하는, 촘촘히 짜여진 가족 구성원들의 설정도 충분히 설득력있고요. 그래서 아주 재미있게,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심리 드라마는 아니며 여사님 명성에 걸맞게 추리적으로도 특출난 부분이 있습니다. 앞선 여러가지 복선들, 예를 들어 자코의 중년 여성 대상 사기 행각이나 비밀 결혼 같은 별것 아닌듯한 정보가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범인의 정체와 진상도 놀라운 점이 있고요.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팬들도 즐길거리가 많은 편이에요.

하지만 쟈코가 유죄 판결을 받고나서 사망할 때까지, 6개월 동안의 수감생활 중 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밝히지 않았는지가 설명되지 않은건 옥의 티입니다. 심리 묘사가 중요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에는 헤스터의 심리 묘사에만 너무 치우치는 것도 문제고요. 심리 묘사의 디테일도 부족할 뿐더러, 가족 구성원 개개의 심리 묘사는 진범의 심리를 건드릴 수 없기에 깊숙이 진행할 수 없다는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건을 게임처럼 생각해서 장난스럽게 접근하던 필립 듀란트의 비중이 큰 것은 작품을 지루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필립 듀란트가 밝혀낸 진상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관절 이 친구는 뭘 위해서 등장해서 기웃거리다 죽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네요. 뭔가 하긴 한 것 같은데 죽어서도 뭘 했는지 밝혀지지 않으니 정말로 안습한 캐릭터랄까요. 그 외에 탐정역의 아서 캘거리의 활약이 좀 뜬금없었고, 빅토리아 시대의 향취가 느껴지는 해피엔딩은 시대에 걸맞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긴장감넘치는 심리묘사가 계속 이어졌더라면 대단한 걸작이 되었을텐데 앞서 언급한 한계가 발목을 잡은 느낌이에요. 그래도 고전 황금기 이후 현대화된 정통 본격 추리물과 심리 스릴러의 가교 역할을 하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추천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사실 이 작품은 오래전 TV에서 영상화된 작품을 먼저 접했었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감상했던 기억이 나네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1인칭 심리 묘사를 다루면서도 그 중에 범인이 있는 작품이라면, 아무래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영상물이 더 어울리는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영화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인 것 같은데 도널드 서덜랜드의 캘거리 박사, 페이 더너웨이의 레이첼 아가일,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레오 아가일이라는 화려한 캐스팅이 인상적이라 다시 구해보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페이 더너웨이의 레이첼 아가일이라.... 이 아줌마 의외로 크리스티 영화에 많이 나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