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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3

심연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홍성영 : 별점 2점

심연 - 4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오픈하우스

자기 자신을 속이는게 최고의 속임수지. 자신을 굳건히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 토스토옙스키. <<악령>>에서 표토르 스테파노비치

빅터는 윌슨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세상은 나 덕분에 돌아간다는 음울하고 회한에 찬 윌슨의 얼굴 뒤에는 보잘 것 없고 멍청한 생각뿐이었다. 빅터는 그의 얼굴과 그 얼굴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저주했 다. 아무 말도 없이 미소를 지으며 남은 온 힘을 다해 저주했다
.

빅터는 연간 4만달러라는 유산 수익 덕분에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며, 소일거리로 팔리지 않는 책만 출판하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시골마을 리틀 웨슬리 지역 유지이다. 유일한 고민은 아내 멜라니가 잦은 바람을 피운다는 것. 빅터는 아내의 정부들을 최대한 정중하게 대하며 지역 사회에서 신뢰를 쌓아 나가지만 그 내면은 폭발 직전 상태에까지 내 몰린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여사의 범죄 소설. 평범한 지역 유지 빅터가 순간적인 분노를 이기지 못해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을 디테일한 심리 묘사로 펼쳐나가는 작품입니다. 조금 고급진 범죄, 장르문학을 다루는 출판사 오픈하우스의 버티고 레이블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심연>>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에는 주인공 빅터가 겉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살의를 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건의 살인이 모두 '물'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읽어보니 독자를 심연에 빠트리겠다는 뜻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만큼 읽는 내내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빅터와 멜라니, 두 주역의 심리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탓입니다. 빅터는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이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질책이나 거부감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딱히 너그럽고 관대해서 그런 것도 아니에요. 아내가 바람을 피운 것 까지는 아니라고 애써 위안하며 작은 마을 공동체 내에서 평판을 유지하는데 골몰할 뿐이죠. 순간적인 분노로 찰리 드 리슬, 캐머런을 차례로 살해하고 결국 아내까지 죽이지만 이 모든 것은 먼저 이혼을 했다면 해결되었을 문제입니다. 결혼 생활에 별다른 애정이 느껴지지도 않는데 왜 이혼을 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어요. 딸을 위해서 이혼을 하지 않는다던가, 이혼을 하면 지역 사회에서 매장을 당한다던가 등 설득력있는 이유가 등장했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작중에서도 이혼은 별로 어렵지 않고 양육권 역시 빅터가 보유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설명되기까지 하는데 말이죠. 파국이 닥치기 전에 그것을 해결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데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비슷한 상황에서 아내가 이혼을 해 주지 않아 살의를 품는 <<낯선 승객>> 쪽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아내 멜라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돈으로 여유롭게 살면서 남편이 바로 옆에 있어도 대놓고 바람을 피우는, 뻔뻔함이 도를 지나칩니다. 솔직히 이래서야 남편한테 죽어도 싸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게다가 찰리 드 리슬이 죽은 후 남편이 죽은 것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심지어 남편 돈으로 탐정까지 고용한 정신머리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에 대한 디테일하게 묘사는 읽는 내내 짜증을 불러일으킵니다. 한마디로 발암유발 소설이랄까요.

재미도 별로입니다. 범죄물이기는 하지만 모든 범행은 우발적, 즉흥적이며 뒷수습은 운에 맡기는 부분이 많아서 짜임새가 낮기 때문입니다. 범행보다 심리 묘사를 디테일하게 그리는데 주력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러한 점에서는 <<리플리>>와 비슷합니다. 차이점이라면 빅터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는 정도입니다. 빅터는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도 분명한 애정을 보이거든요. 걸인 칼라일을 출판사에 잡역부로 고용한 것 처럼 말이죠. 또 주변 평판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그것을 위한 배려 역시 아끼지 않습니다. 책 뒤 소갯글 - 사이코패스의 일상과 그의 머릿속을 소름 끼칠 만큼 담담하게 그려낸 걸작 - 은 제가 봤을 때 잘못 쓰여진 것입니다. 물론 사이코패스인지 아닌지가 재미나 완성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만.
혹시 작가의 의도는 평범한 중산층이 급작스럽게 살의를 품는 과정을 그려서 충격을 주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대로 살인 전에 충분히 상식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이혼)이 있었기에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그래도 캐머런의 사체가 발견된 이후 마지막 몇 페이지는 그런대로 서스펜스를 가져다 주기는 합니다만 이야기에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읽는 사람을 거북하게 만드는 묘사력은 발군입니다. 셜리 잭슨과 좋은 상대가 될 수 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불쾌하기만 할 뿐 그 외 다른 가치는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여사님의 순문학스러운 작품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구태여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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