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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0

늑대인간 - 스티븐 킹 (스테판 킹) / 혜민 : 별점 2점

늑대인간 - 4점
스테판 킹/혜민

"악마의 분신 (Silver Bullet, 1985)"

장르물 리뷰의 달인이신 잠뿌리님의 영화 리뷰를 읽고 집에 있던 소설을 꺼내어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거든요.

일단 책 소개부터 하자면, 원제는 "Cycle of the Werewolf"입니다. 중편이라고 하기도 힘든, 약간 긴 단편 분량의 작품으로 늑대인간의 첫 출현 및 살육부터 딱 일년 간 벌어진 일을 다룹니다. 중, 후반부까지는 한달 단위로 매월 보름달 밤 벌어지는 늑대인간의 살육을 그리며, 후반부(4/4분기)에는 유일한 생존자이자 늑대인간의 정체를 알게 된 마티의 활약으로 늑대인간이 퇴치된다는 내용입니다.

잠뿌리님의 영화 리뷰와 마찬가지로, 마티가 늑대인간의 정체를 알게 된 후부터가 진짜 재미라 할 수 있습니다. 정체가 기상천외할 뿐 아니라, 마티가 편지를 보내면서 도발하는 과정도 흥미진진하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마티의 가족이 시체를 가지고 어떻게 경찰에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후일담도 궁금했습니다만.....

덧붙이자면 삽입된 일러스트의 수준이 높아서 책의 가치를 더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화작가 Bernie Wrightson의 작품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전체적인 묘사에서 스티븐 킹스러운 느낌이 별로 드러나지 않으며 내용적으로도 많은 축약이 느껴지는 점에서 아동용으로 기획 / 번역된 책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좀 어린 연령대의 스티븐 킹 초심자가 읽기에 적합한 작품으로 보이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2004/11/23

반 헬싱 - 스티브 소머즈 (2004) : 별점 3점



로마 교황청 소속의 특수 요원 "반 헬싱"은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여 싸움에 뛰어든 전사로 그의 새로운 임무는 트랜실배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을 해치우고 정통 왕위 계승자들을 보호하는 것.
하지만 이미 왕자는 늑대인간에게 습격당해 늑대인간이 되어 버린 상태이며 안나 공주의 목숨도 계속 위협받고 있었다. 늑대인간이 된 오빠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공주가 위험에 처하게 되고 반 헬싱의 활약으로 겨우겨우 탈출에 겨우 성공하지만 지하에서 우연히 프랑켄슈타인의 몬스터와 만나게 되고 드라큘라가 자신의 새끼들을 부화시키기 위해 몬스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결국 납치된 프랑켄슈타인의 몬스터를 구하고 드라큘라의 야망을 저지하기 위해 드라큘라 성의 비밀입구를 찾아내어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는데.... 

올 여름을 강타했던 블록버스터 화제작. 드라큘라 소설의 설정만 살짝 가져와서 헐리우드 식으로 각색하여 액션영화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에 보고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의외로 보고나니 흥행에 성공할 만 하더군요. 

일단 느낌은 그야말로 "블레이드+007"이라는 생각입니다. 주인공이 뱀파이어에서 늑대인간으로 설정이 바뀌었고, 007의 영국 첩보부가 로마 교황청으로 바뀌었을 뿐 두 영화에서 이미 친숙한 모든 요소들을 동원하여 영화를 끌어나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흥행에서 이미 검증된 요소들만 모아 놨달까요? 더군다나 원래 특수효과가 짬뽕된 과장된 액션을 잘 뽑아내는 감독의 영화답게 액션 장면은 과장되었지만 유쾌하고 흥미진진하게 연출되어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각종 고딕 호러의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초반에 잠깐 등장한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하이드를 비롯하여 프랑켄슈타인의 몬스터, 드라큘라와 그의 3미녀등의 캐릭터들은 설정도 확실하고 원작을 잘 구현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특히 프랑켄슈타인의 몬스터가 잘 표현되어 있더군요. 반 헬싱역의 휴 잭맨이나 수도사 칼 역의 데이빗 웬험, 공주역의 케이트 베킨세일, 그리고 드라큘라 역의 리처드 록스버그 모두 캐릭터에 딱 맞는 호연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의 최강 보스격인 드라큘라 백작과의 사투가 생각보다 무척 시시하다는 점과 몇몇 사소한 점의 의문을 제외한다면 킬링타임용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액션물로는 합격점을 충분히 줄 만 합니다. 그야말로 단순화끈 액션물로는 더말할나위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PS : 의문점이 몇개 생겼습니다. 중요하진 않지만..... 
  1. 늑대인간만이 드라큘라를 처치할 수 있다고 하는데 다른 늑대인간들은 맘대로 조종할 수 있는 드라큘라가 왜 반 헬싱만 조종할 수 없었을까요? 
  2. 마지막 사투에서 드라큘라는 그냥 밖으로 날아서 도망가 버리면 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새끼들을 전부 부르던지... 
  3. 그럼 반 헬싱이 원래 대천사 가브리엘이었다는 이야기인가요?
  4. 마지막에 그 드라큘라의 소굴에서 어떻게 빠져나왔을까요?

2016/12/16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 - 구이 료코 (쿠이 료코) / 김완 : 별점 3점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 : 쿠이 료코 작품집 - 8점
구이 료코 지음, 김완 옮김/㈜소미미디어

"용의 학교는 산 위에"만큼의 긴 제목을 지닌 쿠이 료코의 단편집으로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용의 학교는 산 위에"는 영 아니었지만, 그래도 팬심으로 구입했는데 다행히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발상도 기발하며, 모두 길이에 걸맞는 완결성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서랍 속 테라리움"과 비교하자면, 의외성은 덜하지만 완성도가 더 높은 편이에요. 쇼트쇼트와 일반 단편의 차이점처럼요.

작품별 편차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가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쿠이 료코 팬들께는 적극 추천드립니다.

"용의 소탑"

바다 나라와 산 나라의 전쟁을 가로막는 국경 지대 용의 새끼가 부화하여 둥지를 떠날 때까지,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머물렀다. 교류가 끊긴 양국은 기본적인 물자 보급에도 문제가 생겼고, 마침 산 나라에 포로로 잡혔던 청년 '사난'은 소금을 가져다 준다는 약조 후 풀려나는데...

전형적인 중세풍 세계관에 ''이 등장하는 식으로 약간의 판타지가 결합된 시대물로, 막강하면서도 기묘한 존재 탓으로 적대하던 사람들이 하나가 된다는(외계인이 쳐들어오면 힘을 합치듯이), 왕도스러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쿠이 료코스러운 변주가 딱 하나 들어간 덕분에 독특한 매력을 전해 줍니다. 바로 '교역'입니다. 전형적인 이야기에 딱 한 가지의 설정 추가로 독특함을 만들어 낸다는 점은 "던전밥"과 똑같네요. 결국 사난과 유르카가 하나가 된다는 해피엔딩도 마음에 들었고요.

등장하는 크리쳐는 '용'이라기보다는 그리폰 같았다는건 조금 이해가 안되지만,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인어금렵구"

누가 봐도 인어인 기묘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무대로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는 않아요. 인어가 멀리 떨어진 학교로 가고 싶어하고, 주인공은 그것을 도와준다. 그리고 그것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라는, 한여름날 짧은 만남 이후 추억과 여운을 남기고 각자의 길을 간다는 전개는 전형적인 "보이 미트 어 걸" 그대로고요. 이 와중에 약간의 성장기 느낌을 전해주는 것 역시 동일합니다.

그러나 "용의 소탑"이나 "던전밥"처럼 '인어'라는 설정이 추가되어 독특한 매력을 풍깁니다. 이 설정에 더해 비교적 짧은 분량 안에서 '서로 다르기에 마음을 전하기 힘들다'는 주제를 설득력 넘치게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실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깔끔하면서도 흑백톤 위주의 작화 역시 이야기에 꼭 맞아 떨어져서 마음에 들었고요.

한마디로 익숙한 주제에 약간의 변주를 더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작가의 능력이 최고치로 발휘된 작품. 별점은 4점입니다.

"나의 신"

중학교 입시를 앞둔 소녀가 갈 곳을 잃은 물고기 신을 어항에서 키운다는 이야기로 신은 별다른 능력이 없고, 소녀는 입시에서 떨어진다는 현실적이면서 일상적인 결말이 눈길을 끕니다.

하지만 이야기만 놓고 보면 딱히 대단할 것은 없는 소품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늑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늑대인간이 주인공인 드라마로 남녀 관계가 아니라 모자 관계 설정이 신선했습니다. 늑대인간이 실제 인간 세계에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상세한 설정들도 인상적이고요.

단, 지나치게 일상계스러운 내용으로 주인공 케이타의 약간은 철없는 행동이 사건, 드라마의 전부라는 것은 조금 시시했습니다. 그만큼 설득력은 높았지만, 이만큼의 상세한 설정을 만들었다면 더 극적인 이야기를 전개해도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무일푼 뱌쿠로쿠"

천재 화가 타카가와 뱌쿠로쿠가 무일푼이 된 후, 자신이 그렸던 사자, 호랑이, 용 등을 실체화시켜 큰돈을 벌고자 한다는 시대극 판타지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일본화를 모티브로 한 작화입니다. 붓을 주로 사용한 듯한데 정말로 빼어나고 시원시원한 구도도 돋보인 덕분입니다. 뱌쿠로쿠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위작의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나중에 아들이 그린 그림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한마디로 쿠이 료코라는 작가의 넓은 스펙트럼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 자식이 어여쁘다고 용은 운다"

왕자 준이 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용의 비늘을 얻으려 나섰다. 길 안내를 맡은건 마을 이방인 준이었다.
용을 잡으러 가는 험한 길에서 병사들은 계속 낙오되었고, 결국 부상당한 왕자만 남았을 때 준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왕이 자신의 아들을 죽였기에 그것을 복수하려 한다는 것...

뻔한 복수극으로 의외성도 없고, 이야기도 좀 막 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용의 알과 자식을 동일시하는 전개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처집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누타니 일족"

초능력 가문 이누타니 일족의 집에 소년 탐정 도다이치 코우스케가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실수로 일족의 초능력이 들통날 위기에 처해 그것을 숨기려 하나, 오히려 도다이치 코우스케는 연쇄 살인극으로 의심하며 겉잡을 수 없이 폭주하는데...

제목(원전은 "이누가미 일족"이지요)과 설정부터 여러 작품을 패러디하고 있는 작품으로 다양한 초능력을 지닌 가족들의 행동을 ‘살해당했다’고 오해해 진상을 추리하려는 탐정의 행동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나 싶을 정도로 기발하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오렌지로드"에서 초능력을 감추려는 카스가 패밀리의 노력이 겹쳐져 왠지 모를 향수가 느껴진 건 덤이고요.
강대한 힘을 과신하다가 화를 부른 상황에서, 가장 쓸모없을 줄 알았던 아리사의 ‘입고 있는 옷을 파자마로 바꾸는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반전도 돋보였습니다.

또 보통 소년 탐정이 사건에 뛰어드는 이유 — 자기와 관계도 없고 부탁한 사람도 없는데 왜 이렇게 애를 쓰지? — 에 대해 ‘자기 능력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힘을 써야 할 때 쓴다’라는 슈퍼 히어로스러운 마인드로 알려주는 점도 괜찮았어요. 하기사 명탐정이 슈퍼 히어로와 다를 건 별로 없지요.
‘힘을 써야 할 때는 최선을 다해서 쓴다, 그러나 힘을 과신하지 말라’는 주제 역시 여러모로 생각해볼 거리가 많아서 좋았습니다.

다양한 장르물에 대한 깊은 이해에 더해 유쾌한 분위기, 적절한 반전, 심오한 주제까지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명작입니다. 단점이라면 너무 짧다는 것과 결말이 약간 시시했다는 것 정도? 그래도 별점 4점은 충분합니다. 장르소설 애호가라면 이 작품만큼은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021/05/15

고독한 늑대의 피 - 유즈키 유코 / 이윤정 : 별점 2.5점

고독한 늑대의 피 - 6점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작가정신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88년, 구레하라 동부서 2과 폭력반계 오가미반에 신참 형사 히오카가 배속되었다. 그는 반장 오가미 슈고와 짝을 이루어 사금융 업체 구레하라 금융 경리 담당이었던 우에사와 지로 실종 사건 수사에 나섰다. 한편 시내에서 가코무라 구미와 적대적인 오다니구미 조직원들끼리 다투다가 오다니구미 조직원이 살해된 뒤, 대규모 항쟁으로 비화될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구레하라시를 장악하려는 가코무라 구미, 그리고 그들의 우방 조직 이라코카이의 음모였다.

오가미는 수사를 통해 우에사와는 가코무라 구미 조직원들에게 납치되었다는걸 알아냈다. 가코무라 구미 조직원들이 구레하라 금융에서 소액 대출 후 유흥비로 탕진한걸 들킬 위기에 처하자, 우에사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뒤 납치 살해했던 것이었다. 이게 사실로 증명된다면, 가코무라 구미의 두목과 주요 간부 모두를 체포하여 장기간 징역에 처할 수 있어서, 가코무라 구미는 와해되고 항쟁은 자연스럽게 끝나게 될 터였다. 

하지만 가코무라구미 상위 조직인 이라코구미가 오다니구미와의 항쟁에 불을 붙였고, 결국 감찰 때문에 자택 근신 중이던 오가미가 중재를 위해 나섰지만 살해되고 마는데....

1988년의 히로시마 근방 소도시 구레하라 시를 무대로 한 하드보일드 범죄 드라마로 야쿠자와 강력반 형사들이 뒤엉킨 거칠고 수컷 냄새나는 범죄와 인간 관계가 그려지는 작품입니다. 제목의 '늑대'가 가리키는건 형사반장 오가미 슈조입니다. 이름부터 오오가미(늑대)에서 따 왔으니까요. 

이렇게 한 마리 늑대와 같은 형사가 홀로 안팎의 적대 조직과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는 일본 하드보일드 작품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주쿠 상어"가 좋은 예겠지요. 그러나 오가미 반장은 항상 아들과 같은 부하 히오카와 함께 하며, 자신이 이끄는 오가미 반 부하들의 신뢰도 두텁고, 강력한 야쿠자 조직인 오다니구미와 다키이구미 두목급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고독한 늑대는 아니에요.

이야기에서도 야쿠자와의 관계, 친분이 핵심 동기 및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우에사와 실종 사건 수사가 특히 그러합니다. 오가미가 사건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기는 구레하라 시에서 야쿠자들간 항쟁이 일어나는걸 막기 위해서, 또 자신이 밀고 있는 오다니구미 부두목 이치노세 모리타카가 구레하라시를 장악하도록 하기 위함이니까요. 사건 수사도 야쿠자와의 연줄과 그들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를 기반으로 온갖 불법적인 수단을 총동원하여 진행됩니다. 가코무라 구미 조직원 요시다 시게루를 몰래 불러내어 포박한 뒤, 식칼로 뺨을 긋는 등 협박을 가하다가 당근(오다니구미로부터 확보한 500만엔)을 제시해서 우에사와가 납치된 뒤 살해되었다는 진술을 확보하는 장면처럼요. 그밖의 증언들도 대부분 증인들을 협박해서 이끌어내는건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불법에 가깝지만, 수사는 합리적이며 범죄 묘사도 그럴듯해서 범죄 수사물로도 손색 없습니다. 우에사와의 목을 베어 죽인 뒤, 어선을 빌려 무인도에 유기하는 과정, 사체를 찾아내는 과정, 이를 위한 심문 등 범행과 수사에 대한 묘사들 모두 손에 잡힐 듯 생생한 덕분입니다.

범죄 수사와 함께 펼쳐지는 야쿠자 조직 간 항쟁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뒷골목 사람들끼리 나누는 의리와 우정에 대한, 사뭇 마초스러우면서도 왠지모르게 낭만적인 이야기는 항상 기본은 해 주지요. 오래전, 80~90년대 유행했던 홍콩 느와르 분위기랄까요. 여기에 특정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세력 다툼과 전쟁, 음모는 군웅물스러운 재미도 느껴지고, 오가미가 자신의 연줄로 주도권을 잡아나가는 모습은 악을 더 큰 악, 안티 히어로가 응징하는 쾌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약점도 명확합니다. 야쿠자, 그리고 야쿠자와 결탁한 문제 형사를 미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담배가게 노파 가쓰, 술집 '시노' 주인 아키코의 입을 빌어 오가미가 불쌍한 사람을 돕는 히어로였다는걸 부각시키고는 있습니다만, 그가 야쿠자에게서 돈 상납을 받는, 야쿠자와 유착되어 있는 불량 형사라는건 명백한 사실인 탓입니다. 고독한 늑대가 아니라 하이에나 패거리 중 한마리에 불과한 거지요. 

그나마 상납받은 돈은 사건 수사에 썼다고 치더라도, 자기와 친한 조직이 구레하라시를 장악하도록 노력한다는건 도저히 용납이 안됩니다. 가코무라 구미는 우에하라 살인 사건 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와해될 예정이었지만, 이후 벌어진 이라코카이와 오다니구미간 다툼에서 오다니구미에게 유리하게 중재한다는건 정도가 지나쳤어요. 오가미가 목숨까지 걸 이유도 없었고요. 

이를 포장하려고 다키이와 이치노세를 인의를 아는, 야쿠자지만 남자답고 괜찮은 인물이라고 묘사한 것도 볼썽사나왔습니다. 그렇다고 야쿠자가 서민들 등골을 빼먹고 사는 인간 쓰레기라는게 바뀌는건 아니잖아요? 협객이니, 사나이니 하는 미사여구를 아무리 가져다 붙여봤자, 쓰레기는 쓰레기입니다. 차라리 쓰레기답게 오다니구미가 오가미를 죽이고, 이를 이라코카이에게 뒤집어 씌웠다게 진상이었다면 더 볼만한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후 수사 일지를 보면, 오가미가 죽은 뒤 대형 항쟁은 결국 일어났고, 이치노세가 구레하라시를 장악했다는걸 알 수 있으니까요. 애초에 오가미가 중재에 나섰던 항쟁도 알고보면 오다니구미가 일으킨 것이기도 하고요. 

아울러 오가미가 살해당했다는 전개도 아쉬웠습니다. 이렇게 쉽게 죽어버리면 그동안 온갖 수라장을 헤치고 나왔다는게 말이 안되잖아요? 오가미가 버틸 수 있었던건 주요 인물들의 비밀을 쥐고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왜 진작에 오가미를 죽이지 않았을까요?

설정, 묘사, 전개도 너무 뻔하며 작위적입니다. 오가미 반장에 대한 설정과 묘사부터 그러합니다. 조직과 잘 섞이지 못하는 형사라면 누구나 떠올릴법한 스테레오 타입 묘사에 그치며, 캐릭터를 형상화하는 쇼트피스 담배와 파나마 모자, 늑대가 새겨진 지포 라이터는 만화적이며 유치했기 때문입니다. 모든걸 잘 알고 있고, 통제까지 가능하지만 신참에게 속내를 잘 비추지 않는 고참 형사와 그의 수사 방식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시에 따르다가 어느새 감복하여 존경하게 되는 신참 형사 캐릭터 구도도 식상하고 뻔하기 그지 없습니다. 예컨데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와 똑같습니다. 다키이나 이치노세, 아키코 마담 등 다른 주요 등장인물들도 어딘가에서 본듯한, 만화적인 캐릭터들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애초에 오가미가 반장인 이상 신참과 파트너가 되어 현장을 발로 뛸 이유도 없습니다. 전형적인 캐릭터 구도를 만들기 위한 억지에 불과해요. 오가미가 히오카에게 히로시마 경찰 내부의 추문을 담은 노트와 거액의 돈을 남긴 것도 억지스러운건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일한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히오카보다는 믿고 신뢰할만한, 오래도록 함께 일한 믿음직한 부하들에게 넘기는게 당연하잖아요? 히오카의 이름이 죽은 아들 이름과 같아서, 진짜 아들처럼 여겼다는 설명이 추가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들로 여겼다면 이런 무거운 짐을 남기면 안될 것 같은데 말이지요. 히오카가 감찰의 끄나풀이었다는 약간의 반전, 그리고 나름의 유산을 남긴게 그 때문이었다는 암시도 별로 와 닿지 않았어요.

이렇게 단점도 많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던대로 재미만큼은 괜찮았습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나 무협지스러운 재미는 충분하니까요. 킬링 타임펄프 픽션으로는 나무랄데 없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더운 여름, 잠이 오지 않는 긴 밤을 보내기에 적당하리라 생각됩니다.

2018/02/03

중국 초청 SF 단편들

중국 SF로부터의 초대장

자주 찾는 블로그 이웃 잠보니님 글을 통해 소식을 듣고 읽어보았습니다.중국 SF는 이전에 "삼체" 를 꽤 재미있게 읽어서 기대도 되었고요.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여섯 편의 단편 중 딱 한 편, "기아의 탑" 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가 수준 이하인 탓입니다. 설정은 그럴듯하지만 최소한의 설명도 없고, 이야기도 편의대로 흘러가기 때문이지요. 뭔가 있어보이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과는 딱히 괜찮다고 보기 어렵네요. 과거 모뎀 시절 유행했던 함량미달의 한국 SF 단편들이 떠오르는, 그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독특하다는 점은 주목할만 하지만 구태여 찾아 읽으실 내용은 아닙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기아의 탑" 

추락한 우주선의 생존자들이 먹을 것 하나 없는 수도원에 고립된 상황을 그립니다. 생존자들이 식인으로 치닫는다는 전개는 뻔하지만,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라는 약간의 수수께끼와 "진동으로 가득 찬" 행성이라는 SF적인 설정이 잘 결합되어 있는 덕분에 충분한 재미를 전해 줍니다.
수도원에서 생각을 증폭시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나름 철학적이면서도 신선한 설정과 이를 흉폭한 야성이 무위로 되돌린다는 결말도 괜찮았고요. 그게 뭐가 되었건 '최후의 말 한마디'는 들어 주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줍니다.

그런데 이전에 거주하던 수도사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설명해주지 않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생각을 증폭시켜 열반에 이르렀다는 설정일까요? 또 생존자들을 습격하는 괴물의 정체도 뭔가 복선처럼 풀어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테고요.

그래도 중국 SF의 저력을 확인하는데는 문제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고래자리를 본 사람" 

행위 예술가인 아버지는 딸의 숙제를 위해 '만들어 낸' 행성이 '진짜' 라고 주장했지만, 그 주장을 증명하지 못해서(혹은 증명하기 위해서) 모두의 지탄을 받는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딸 릴리안은 아버지와 떨어져 성장하여 우주 비행사가 된 후, 웜홀을 통과하여 고래자리 델타를 직접 보고 나서야 아버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과학이 기반이 된 행위 예술이 등장하고, 주인공 릴리안이 웜홀을 통과하는 우주 비행사라는 등 SF적인 설정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진의를 나중에서야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이니까요. 저 역시 딸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조금 뭉클하게 다가오긴 했지만, 별로 SF 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아버지가 어떻게 고래자리 델타성을 보았는지에 대해 설명되지 않는겁니다. 이래서야 본격 SF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지하철의 충격" 

사람으로 가득찬 출근길 지하철이 시공을 초월하여 달리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갖가지 기묘한 현상을 그리는 작품으로 초반 설정은 참신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을 타 본 적이 있는 사람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공포가 리얼하게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암벽등반가 샤오지가 열차 밖으로 나가 앞으로 이동하면서 목격하는 다른 차량의 상태, 현상에 대한 묘사부터 이야기는 그야말로 폭주합니다. 이 모든게 초자연적인 무언가에 의한 진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내용인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리 봐도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대사에서 특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무슨 호접몽도 아니고...

기묘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이며 이야기로 성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중국 고전 기담을 연상케 하는데, 고전 기담 쪽이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는 더 높습니다. 점수를 주기 어려운 망작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인류의 여신 G" 

선천적 결함을 지닌채 태어나 정상적 성생활, 출산이 불가능했던 G는 기도를 통해 전신 성감대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그녀는 상류층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나,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대중의 정점에 서는데...

일본 에로 만화에서 접했음직한 설정이 등장하여 인간의 해탈, 전도와 좌절, 한 단계 위로의 진화라는 일종의 종교 프로세스를 섹스에 빗대어 풀어내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딱히 신선하거나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SF로서는 함량 미달입니다. G의 변신은 기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정부터 G가 대중을 사로잡는 과정과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서 설득력이 전무한 탓입니다. 결국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말한 뒤 과격 종교집단에 쫓기는 신세가 된 그녀에게 일어난 결말 역시 잘 이해가 되지 않고요. 고자와 석녀가 함께 절정에 이르렀다?

애매하게 종교적인 내용을 넣지 말고, 불감증에 시달리던 인류에게 전신 성감대 미녀가 등장하여 인류를 자위만으로도 충분한, 한단계 더 높은 쾌락의 세계로 이끈다는 식으로 가는게 더 화끈하고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탈피" 

탈피를 거듭하는 혈인이지만 약물의 힘으로 탈피 충동을 억누르며 배우로 성공한 공은 투라는 다른 혈인에게 연기를 가르쳤다. 투도 배우로 성공했는데, 투는 배우로서의 삶이 아니라 탈피를 택하고 말았다. 공도 탈피에 대한 욕망은 크지만 탈피 후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알지 못해 주저하는데...

이종족 판타지로 9번의 탈피를 끝내고, 혈인으로서 죽어가느냐 아니면 자신의 본능을 숨기고 인간 세계에서 살아갈 것인지 선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딱히 재미는 없습니다. 늑대 인간이나 뱀파이어로서의 삶을 선택하느냐!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유사 딜레마들과 구분될만한 내용도 없고요.

'배우'라는, 일종의 가장된 삶의 대표격인 직업을 선택한 정도가 조금 신선했지만 그냥저냥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우주표 담배" 

우주정거장만한 담배를 만든다는 이야기로 스케일 하나 만큼은 높이 사 주고 싶습니다. 흡연 인구가 엄청난 중국에서 생각했음직한 내용이네요. 이 모든게 환상이고, 담배는 값싼 대용품 센티멘털 니코틴에 밀려났다는 결말도 뻔하지만 괜찮았고요. 전통적인 산업의 종말을 블랙 코미디 식으로 그린 느낌인데, 바로 얼마전의 미국 토이저러스 오프라인 매장 폐쇄 사태가 떠오르더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09/03

리처드 매시슨 - 리처드 매시슨 / 최필원 : 별점 3점

리처드 매시슨 - 6점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현대문학

호러, 장르 문학의 거장인 리처드 매시슨의 걸작선. 이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단편집은 거의 모두 읽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라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작들 대부분이 좋은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무려 33편이나 되는 볼륨도 풍성하고요. SF, 호러, 범죄물,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엄청나게 넓습니다. 전부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별점 5점, 4.5점, 4점의 걸작과 수작도 포함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준으로 선정된 작품들인지는 궁금하네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 중 분명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빠져있기도 하거든요.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 

흉칙한 무언가가 부모님에 의해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여 갇혀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1년에 읽기에는 많이 뻔합니다. 괴물이 다음 번에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사람들을 덮친다는 여운을 남기지만, 명확한 결말이 더 낫지않나 생각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감" 

아멜리아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기묘한 인형을 샀다. 인형을 구속한다는 금줄이 풀리자, 인형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일종의 크리쳐물로 20cm밖에 안되는 나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묘사가 압권이에요.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멋집니다. 

하지만 결말과 담고 있는 주제가 제 기억과 사뭇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아멜리아가 처참하게 희생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인형을 처단한 뒤, 스스로 사냥꾼이 되어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는 결말이더라고요. 착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과 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독립한 자녀를 구속하는게 살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사적이면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발표 시점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생각되네요. 이런 메시지를 돌직구로, 매력적으로 한 가운데 꽂아넣는 작가의 솜씨도 대단하고요.

단, 결말에서 어머니를 죽일 결심을 한 아멜리아가 문의 빗장을 쉽게 연 건 좀 안일했습니다. 인형에게서 도망칠 때에는 여러번 실패했던 걸로 묘사되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회파' 크리쳐 호러라는 신경지를 장르 문학 초창기에 개척한 명작입니다.

"마녀 전쟁"

군에서 키우는 일곱 마녀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마법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마녀들이 각자 특기로 소환한 불과 물, 거대한 암석, 사자 등으로 적을 잔혹하게 몰살시키는 묘사가 내용의 전부입니다. 단지 이런 파괴적인 묘사를 쓰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외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파괴 묘사만큼은 확실히 볼 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판본보다 번역이 훨씬 좋은 덕분이지요. 약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도 드는데, 이런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깔끔한 집" 

소설가인 나는 아내 루시와 함께 굉장히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왔다. 하지만 얼마 뒤, 아내는 아파트 지하실에 거대한 엔진이 있고, 관리인은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관리인을 미행하여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친한 이웃 필, 마지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아파트가 이륙을 준비할 때 탈출에 성공하는데....

아파트가 로켓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리고 마지가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그녀가 말했던게 모두 사실이라는게 드러나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던 SF 단편입니다.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사실은 블록 전체가 우주선이라서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침략하는게 아니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보디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독특한 설정, 아이디어와 함께 전개에서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피의 아들" 

기묘한 아이 쥴스는 드라큘라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빠졌다. 쥴스는 학교도 그만두고 배회하다가 동물원에서 흡혈 박쥐를 훔쳐내는데...

꽁트에 가까운 짤막한 단편으로, 분량과 흡혈 박쥐가 진짜 드라큘라였다는 반전으로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반전은 뜬금없었고, 리처드 매시슨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찾아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이야기는 쥴스가 정신병자인지, 진짜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나는 잠에서 깬 뒤, 관에 갖혀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게 적들의 수작이라고 믿은 나는, 관을 탈출하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관 뚜껑을 부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가 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잘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7개월 전 죽었고, 거울로 본 '나'는 썩은 시체였다는 반전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환상특급" 등의 원작으로도 잘 어울릴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 전환되는, 그래서 거울 속 모습에 좀비가 보이는 식의 카메라 워크가 곁들여지면 아주 멋지지 않았을까요?

재미와 충격 외에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사소합니다. 얼마 전 읽었었던 좀비물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흔해빠지고 수준 이하였던 작품들 보다는 몇 배 뛰어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사막 카페"

밥과 진 부부는 여행 중 우연히 사막에 위치한 카페에 들렸다. 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외딴 마을에서 맞이한, 남편 밥의 실종과 그에 따른 위기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여행하던 외지인이 외딴 마을에서 겪는 위기를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았고요. 이전 스티븐 킹의 "밴드가 엄청 많더군" 리뷰에서 언급했던 적도 있는데, 보통은 외딴 마을의 기묘한 집단 광기를 그리곤 하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통 범죄물로, 궁지에 몰린 피해자 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순수한 공포,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희생자를 화장실에서 납치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범죄인데다가, 보안관 등장 후 별다른 위기없이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장르물이 주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제대로 달려주는 수작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위조지폐"

생계에 지쳐 일탈을 꿈꾸던 윌리엄 O. 쿡씨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 생각으로요. 그러나 쿡씨의 복제인간답게, 복제인간도 놀고 싶어해서 결국 복제인간이 급증하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 콩트입니다.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이기도 하고요. 설정은 재미있는데 기계가 폭발하고 복제인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결말은 시시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유령선" 

로스 선장과 메이슨, 미키는 외계 행성에 착륙했다. 우연히 목격한 인공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락한 우주선으로 밝혀진 인공물 속에서 발견한 건, 그들 세 명의 시체였다...

일행들이 자기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느끼는 공포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잘 그려진 SF 단편입니다. 

그러나 자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고 시체를 바라보는 자신은 유령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결말은,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설정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체의 춤" 

대학 신입생 페기는 나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적으로 금지된 루피 춤을 보러 갔다가 충격에 기절하고 마는데...

세기말 감성이 살아있는 독특한 SF. 예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그 때와 평가는 거의 동일합니다. 페기 시점으로 묘사된 광란의 루피 춤 공연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이 거부하고 싶은 방탕과 쾌락도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일종의 좀비인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의 발작을 '춤'이라고 이름 붙여 공연한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도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방탕함에 빠져버린다는 듯한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이 결말이 루피 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페기가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가 되었다던가, 같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호기심으로 좀비를 보러 갔다 왔다. 무서웠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몽둥이를 든 남자" 

타임스퀘어에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몽둥이를 든 원시인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이 총을 쏴서 겨우 원시인을 제압했다.

조금 무식하고 무례한 젊은 마초 양아치 1인칭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화자 설정도 진부했고, 결말도 뻔했습니다. 핵심은 원시인이 온 곳이 '미래'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미래에 문명이 퇴화할 거라는 설정의 이야기는 고전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 지적인 노인네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시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딱히 건질게 없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버튼, 버튼" 

영화까지 나왔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부부 사이도 서로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기묘한 설정에 더해 서늘하고 섬찟한 느낌과 반전이 있는, '기묘한 맛'류의 쇼트쇼트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박한 평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묘한 맛' 류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작품이네요. 왜 나쁜 평가를 했었을까요? 별점은 4.5점입니다.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극영화 데뷰작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 격렬한 카 체이스를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다면,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트럭에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 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트럭 운전사의 분노가 잘 이해되지는 않고, 마지막 트럭의 최후가 너무 뜬금없다는게 아쉽습니다. 확실한 급커브였다던가 등 속도를 반드시 줄여야 했다는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심판의 날" 

루크는 심부름을 왔다가 목이 잘린 과부 블랙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아들 짐은 시체를 본 뒤, 극심한 공포로 광란 상태였다. 루크의 아버지 샘은 현장 조사를 통해 과부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미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을 죽게 만든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가 죽었음) 아들을 증오했었다....

과부 블랙웰이 증오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들 짐이 자신이 없으면 미쳐버리도록 차근차근 준비한 뒤,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끔찍한 공포가 짧은 분량 안에 모두 포함되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작이에요. 블랙웰 부인이 목을 멘 칼이 어디 갔을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건 약간 아쉽지만, 단점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이 단편 하나를 읽은 것 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덧붙이자면, 엄청난 의지로 저지른 자살이라는 설정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걸작 심령 서스펜스 호러물인 "네번째 남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도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지요.

"죄수" 

1944년, 비밀 연구소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던 핵물리학자 필립 존슨은 폭발 사고 후 눈을 뜨자, 자신이 2시간 뒤 사형당할 1954년의 사형수 존 라일리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핵폭발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SF적인 발상을 담은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과연 필립 존슨이 자신이 사형수 존 라일리가 아니라는걸 2시간 안에 증명할 수 있을까?가 서스펜스의 핵심이고요.

그러나 필립 존슨의 노력은 신부를 한참 설득하다가 아내 전화번호를 주는 것 뿥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요. 덕분에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신부가 그의 아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애매했습니다. 진짜 필립 존슨의 아내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부가 귀찮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립 존슨이 모든걸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 별로였습니다. 곧 죽을 상황인데,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어야죠..

아이디어, 설정은 좋았지만 끌고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세상을 떠난 엄마 드레스에 푹 빠진 아이가 친구에게 몰래 엄마 방과 드레스를 보여주다가 폭주한다는 내용의, 미치광이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혼란스러운 심리극입니다.

그런데 익히 보아왔던 설정과 내용이라 진부합니다. 더 큰 문제는 여백이 많아서 완성된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고요. 엄마는 못생겼고 드레스도 피투성이에 총 구멍이 나 있었다는게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이가 친구를 죽였는지, 엄마 사인은 무엇인지, 아이는 지금 어디 갇혀서 어떻게 된건지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발"

더운 여름날, 조는 기묘한 손님을 맞아 이발을 해 주었다. 손님은 손톱이 계속 자란다는 등 혼잣말을 읆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손님이 죽은 사람이었다는건 에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설정이네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 흙이 떨어진게 아니라, 손은 뼈 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신선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윌슨은 출장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 창문을 통해, 괴물이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 있는걸 발견했다. 괴물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숨어버려서 윌슨 눈에만 보였다. 비행기 엔진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윌슨은 비행 중인 비행기 문을 여는데...

영화판 "환상특급"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공포심, 신경증을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괴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윌슨이 커튼을 열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자기를 노려보는 괴물을 처음 보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압권이에요.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총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등의 묘사에서는 시대를 느낄 수 있고요.

괴물에게 결국 총을 쏜 윌슨이 승객들에게 제압 당한 뒤 비행기 착륙 후 옮겨지는 결말은 다소 시시하지만, 아이디어와 묘사력이 발군이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례식" 

클루니스 장례식장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에게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찾아와서 최고급 장례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는 고인이 자신이라고 말했고, 장례식 날에는 하인인 곱추 이고르, 마녀, 늑대인간과 다른 흡혈귀들이 찾아 오는데...

드라큘라를 연상케하는 뱀파이어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스스로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블랙 코미디로, 마지막에 다른 괴물 손님이 찾아온다는 반전도 좋아서 '쇼트쇼트'로는 더할나위 없었던 작품입니다. 장례식에서의 소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도 좋았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코미디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어서 놀랐습니다. 거장은 뭘 써도 거장인 법이겠지요? 오래 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그 때도 좋은 평가를 했었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에서 세번째" 

우주 비행사가 세계 멸망을 앞두고, 다른 행성으로 처자식과 이웃 사람들까지 우주선에 몰래 태우고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이었다...

화자인 우주 비행사와 그 가족들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전 겪는 마음 속 불안과 혼란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있던 곳이 지구가 아니라 향한 곳이 지구라는 반전이 등장하는 짤막한 쇼트쇼트.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쇼트쇼트로서는 우수한 수작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최후의 날" 

최후의 날을 맞아 음주, 난교, 광기어린 파괴 행위 등을 즐기던 리처드는, 가족의 소중함을 께닫고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려 한다.

리처드가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깨닫는다는 드라마. 여동생 가족이 죽음을 택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찡하면서도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소설보다는 "환상특급"과 같이 영상물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 않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거리 전화" 

몸이 불편한 미스 킨에게 어느날 한 밤중, 폭풍우가 불어올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속삭임과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이어 상대방으로부터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전화 회사의 조사 결과 이 전화는 묘지에서 걸려온걸로 밝혀지는데...

정체 모를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요. 이런 설정의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미스 킨의 불안부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간호사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던가, 수화기를 내려 놓던가, 전화선을 뽑아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제가 댁으로 갈게요." 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로 알려주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묘지에서 걸려왔다는게 드러났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득력 낮은 진부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회계사 로버트 카터는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깊숙하게 베였다. 그리고 상처 속 전선과 기계 장치를 보고,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다. 충격에 거리를 배회하던 카터는 도시가 로봇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식들도 모두 기름이었다는 걸 알아 채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상적인 의미, 즉 이야기를 모두 해결해 버리는 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의미인 "기계 장치의 신"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게 독특하네요.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흔한 설정을 독보적인 로버트 카터의 심리 묘사로 차별화시킨 솜씨도 거장다왔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도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카터가 진짜 로봇인지, 아니면 죽은 뒤 환상을 보는 건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열린 결말은 좀 아쉬웠습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뒤따르고 반전도 있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물론 로버트 카터가 쓰러지면서 떠올리는 성경 구절 -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사람을 만들고..." - 은 그가 기계라는걸 연상케 합니다만, 명확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계라고 한다면, 그들을 만든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였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자신이 기계라고 믿는 주인공 이름이 '로버트'라는게 의미심장하네요. 우리나라로 변주한다면 '노보두 씨' 정도로 부르면 되겠지요?

"기록적인 사건" 

가방끈 짧은 쉰 아홉살의 대학교 건물 관리인 프레드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건물 청소 및 수리를 하면서 대학의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던 소품. 외계인들이 지구의 지식을 손에 쉽게 넣고자 프레드 머릿 속에 대학교 지식을 집어 넣은 뒤 그걸 한 방에 빼 먹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프레드를 일종의 외장 하드로 사용한 셈입니다. 좋은 쇼트쇼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안에서 죽다" 

돈과 베티 부부에게 '돈 타일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돈은 자기는 돈 마틴이라고 주장히먀 화를 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부부의 집에 침임했고, 돈을 제압한 침입자는 돈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와 배신에 대해 추궁하는데....

과거 저질렀던 범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온지 10년 만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서스펜스 범죄물. 돈이 침입자인 심슨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모든걸 알게 된 아내 베티가 경찰에 빈집털이가 들어와 싸우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하는 결말까지 깔끔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약한 편입니다. 악당 심슨이 침입한 뒤 하는게 없는 탓이에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벌이는게 전부거든요. 서스펜스를 끌어올릴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코넬 울리치가 썼더라면 훨씬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복자" 

1871년, 그랜트빌 잡화상 주인인 나는 남북전쟁 때 죽은 아들 루와 닮은 젊은 청년과 역마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는 그랜트빌 최고의 총잡이와 싸울 목적이었다. 라이커라는 청년은 그랜트빌의 총잡이 바스 셀커크를 깔끔하게 사살했지만, 습격해 온 셀커크의 부하들에게 난사당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느낌이 드는 현실적이면서도 허무한 서부극입니다. 라이커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서부극 총잡이들이 영웅이 아니라 허깨비라는걸 잘 보여주거든요. 어릴 때 부터 총잡이를 동경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빠른 속사와 사격술을 익혔지만, 정신적으로는 애와 다름없는 철부지로, 1대 1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여섯 명의 악당이 습격하자 울며 애원하다가 총에 맞아서 꼴사납게 죽기 때문이지요. 풍자적이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데이비드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출근길에 나선다...

데이비드가 출근을 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의 직업이 끔찍했던 탓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지켜보고, 사망자 수를 예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데이비드의 심리 묘사가 그닥이었고, 업무의 끔찍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입니다. 이 업무가 아무리 끔찍해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전개가 밋밋하고 반전도 그닥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분명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 보면 예전에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뱀파이어란건 없다" 

루마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 솔타에 사는 게리아 부인은 어느날 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을 물어 뜯겨 피를 빨린채 발견되었다. 게리아 박사는 다음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인을 지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게리아 박사는 후배 미카엘 바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크리쳐 호러물로 시작해서 깔끔한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작품입니다. 왜 범죄물이냐 하면, 뱀파이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리아 박사가 커피에 아편을 타서 아내를 재운 뒤, 목에서 피를 뽑아냈던 거지요. 이유는 그녀가 후배 바레스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고요. 마지막은 바레스가 뱀파이어인 것 처럼 꾸민 뒤,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을 거라며 마무리됩니다. 

기발한 소재와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의외의 반전, 내용은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비교적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 등 전형적인 미국식 쇼트쇼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입니다. 트릭도 조금 유치했지만, 뱀파이어 전설이 살아있는 루마니아라는 설정이라서 나름 설득력있고요. 너무 전형적이라서 작가 특유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깜짝 선물"

늙은 호킨스 씨는 집 앞을 지나는 어린 소년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들에게 "땅을 파면 깜짝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주문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에게는 주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깜짝 선물이 금괴라고 확신한 어니와 친구들은 그 곳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물이 뭔가 나쁜거라는 짐작은 되지요? 어니가 찾은건 일종의 관이었고, 그 안에서 호킨스 씨가 튀쳐 나온다는게 결말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약했으며 설득력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한 등 설명까지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니가 땅을 파게 만드는데 까지의 전개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켄은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 리처드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 헬렌은 차에 남겨둔 채였다. 사실 켄은 이 기회를 빌어 헬렌을 죽일 생각으로 살인청부업자에게는 돈을 지급했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는 죄책감, 양심 등으로 심하게 갈등하는데...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순간이 되자, 켄이 겪는 극심한 마음 속 갈등과 혼란이 핵심인 심리 스릴러. 심리 묘사가 아주 빼어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심리 묘사야 말로 작가의 특기 중 특기지요. 살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로, 특히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받는다'는 산타클로스와의 약속을 결말에서 제대로 써 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켄의 삶이 조금 더 비참해 졌다는 결말이니까요. 켄은 선물 (아내의 죽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강남길 씨가 아내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TV 단막극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켄과 리처드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차를 옮겨 놓겠다는 아내의 말에 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에서요. 하지만 강남길 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켄에게는 지옥이 열릴 거라는 결말은 천지차이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게 미국과 한국의 감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춤추는 손가락"

장거리 버스 여행 중 내 앞에 앉은 여성은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돌보미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화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가 장애인 여성이 내 자리를 빼앗았고,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옆자리 돌보미 여성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과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화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장애인 여성의 수화 수다로 돌보미 여성이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돌보미를 놓아주기 싫었던 장애인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물색해서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일종의 '남자 사냥' 으로 이어가는 전개가 자연스럽고 좋았던 작품.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를 유혹하던 여성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네요. 남자 사냥은 돌보미를 바꾸기 위함이었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남자를 잡아 먹기라도 했어야지요. 지금은 기승전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결이 너무 급작스럽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벙어리 소년" 

시골 마을에 살던 닐젠 부부가 화재로 죽고, 부부의 아들 팔은 보안관 해리와 코라 부부에게 위탁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말도 못했던 팔을 코라는 사랑으로 돌보고, 죽은 자기 아들 대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코라는 남편이 시도했던 닐젠 부부 지인에게의 연락을 훼방놓았다. 그래서 닐젠 부부가 죽은 뒤 한참 뒤에야 부부의 지인 베르너 교수가 팔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학교를 다녔던 팔은 그가 가졌던 독특한 텔레파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은 벙어리가 아니라 부모의 텔레파시 교육을 받았던 텔레파시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는 텔레파시 능력이 훼손될까봐 특정한 이미지, 단어로 설명되는, '말'을 익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단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발상은 꽤나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닐젠 부부의 사고, 코라가 팔을 양자로 들이고 학교에 보낸 것, 베르너 교수의 방문 등 여러가지 사건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탓이 큽니다. 닐젠 부부가 죽은 화재 사고의 원인도 결국 밝혀지지 않고요. 또 팔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건 엄연한 아동 학대입니다. 팔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 이유도 없어요. 실상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말 없이 생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게 전부인데, 이러느니 말로 하는게 더 낫잖아요?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듯 싶으니 결국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려면 글을 익혀야 하는건 당연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팔을 옭아맸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현실 학교 교육이 팔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묘사도 불필요했습니다. 

팔이 말을 하기 시작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사라졌다는 결말도 맥빠집니다. 어차피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운 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팔에게는 코라의 사랑이 더욱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을테고요.

차라리 '사랑은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멋진 설정을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팔이 능력의 편린을 유지한채 성인이 되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능력자가 된다는 식으로요. 지금은 설정,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파" 

교체를 앞둔 교회 오르간이 폭주해서 교회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작품.

늙고 낡아버려서,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데 딱히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맛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폭주는 상식적인 선에 그쳐서 크리쳐물로 보기도, 재난물로 보기도 어려운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9/03/30

맛의 천재 - 알렉산드로 마르초 마뇨 / 윤병언 : 별점 5점!

맛의 천재 - 10점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윤병언 옮김/책세상

이탈리아인이 자국의 유명 요리와 그 요리에 관련된 주변 역사까지 상세하게 소개해주고 있는 요리 관련 미시사 서적입니다. 딱딱할 내용을 재미나게 써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세집 운운하는 박찬일 셰프의 소갯글부터가 재미난데 이어지는 본문도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기묘한 유머가 가득합니다. 

요리 역사에 대한 사료적 가치도 엄청납니다. 피자만 해도, 피자의 역사만 오롯이 다룬 책도 읽어보았지만 오히려 이 책 쪽이 밀도가 더 높을 정도니까요.
원래, 19세기 초 까지만 해도 반죽에 먼저 치즈 등 식재료를 올리고 그 위에 토마토 소스를 뿌렸다는데 언제 이 순서가 뒤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르게리타 피자는 원래 있었지만 요리사 라파엘로 에스포지토가 재치(피자의 이름을 묻는 왕비에게 왕비의 이름이라고 대답한)를 발휘한 덕분에 역사에 길이 남았다는 등 시시콜콜하면서도 실제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디테일이 가득합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스파게티의 마르코 폴로에 의한 중국 유래설은 오류라고 합니다. 1929년 미국의 "마카로니 저널" 이라는 월간지에 실린 근거없는 기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사를 읽어보니 베네치아 뱃사람 이름이 스파게티였다는 등 황당하기 짝이 없어서 이 기사가 사실처럼 굳어진게 이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애초에 재료부터 다르니까요. 물론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수마트라 지방의 파스타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은 실제 중국에서 유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전해주기는 합니다. 당연히 마르코 폴로보다는 훨씬 전 시대에 말이죠.
또 스파게티가 주력 국수가 되고 마카로니는 샐러드 용으로 밀려난 계기는 1927년 크래프트 사의 파마산 치즈 가루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마케로니는 귀족들의 음식이었는데 안타까와요.

샐러드는 이탈리아 대표 요리의 하나랍니다. 로마에서부터 먹어왔다지요. 소개되는 로마식 샐러드 레시피를 보니 식초는 아끼되 기름은 아끼지 말고, 소금은 많이 후추는 적당히 쳐서 먹는다는데 완전 제 취향입니다.
프로슈토는 고대 로마에서도 먹었던 유서깊은 음식으로 포 강 유역의 에트루리아 문명터에서 발굴된 뒷다리가 없는 돼지의 뼈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고 합니다. 당시의 돼지 종류는 지금과 달랐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좋았어요. 또 놀랐던 건 당연히 생으로만 먹을 줄 알았는데 볶거나 익혀먹는 레시피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튀김까지 있는데 그 맛이 궁금해집니다. 

카르파초가 그 명성에 비하면 만들어진지 고작 50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에도 놀랐네요. 실존 인물로 의사가 건강 문제로 날고기를 권했던 후작 부인 니나 모체니고를 위해 만들어진 요리라는 역사도 흥미롭고요. 이름도 화가 카르파초의 이름에서 따온 직접적인 네이밍이라는데 역시나 처음 알았습니다. 요리 창조자인 베네치아 해리스바의 주세페가 아들 아리고와 요리 이름에 대해 고민하다가 앞 벽에 화가 비토레 카르파초의 전시회 포시터를 보고 옳다쿠나 싶어 이름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화가가 즐겨 쓴 붉은 색이 요리의 색상과 유사했기 때문이라는데 무릎을 칠 만 합니다.

후반부 누텔라 이야기에서는 다시금 책의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누텔라가 어떻게 생겨났고, 그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현재와 같은 세계 정복 (?) 이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를 그야말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경쟁 제품까지 소개하니 말 다했죠. 그나마 누텔라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소개했던 "오무라이스 잼잼"에서의 내용은 그냥 겉핥기에 불과하더라고요. 그 외에도 옥수수, 모짜렐라, 와인, 티라미수 등 친숙한 음식에 대한 방대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과감한 발상도 돋보입니다. 포크에 대해 소개하며 샤를마뉴 재위 당시 왕과 귀족들은 사냥한 동물들을 끊임없이 먹어야 했기 때문에 통풍이 직업병과 같았다는 반쯤은 우스개스러운 이야기도 좋은 예지만, 로마 시대에 늑대는 야수가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로마인들이 기본적으로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에 기반하며, 그들이 양을 먹지 않았기에 늑대는 경쟁자, 야수가 아니라 친구였다는거지요. 그러나 인간이 양을 먹기 시작하면서 늑대가 야수가 되었다는데, 무척이나 그럴듯합니다.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게 젖을 먹인게 늑대였던 것이 이 발상을 뒷받침합니다.
와인과 사과주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와인이 세계를 뒤덮은 이유를 기독교와 연결시켜 설명하거든요. 초기 기독교, 로마 교회는 포도주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는데 알프스 북쪽 드루이드 교도는 사과주를 마셨다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드루이드들 천국 명칭 '아발론'은 아발의 섬, 즉 사과의 섬이라는 뜻이라는 말과 함께요. 결국 로마 교회가 승리한 뒤 사과가 지옥을 상징하며 종교 행사에서 사과주가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이지요.
샐러드가 식사의 시작에서 식사 도중의 곁들임 음식으로 밀려나는 과정과, 다시 식사 시작 음식으로 복귀하는 과정이 실제 역사적 사실 - 식초가 들어간 음식을 거부하는 문화와 비타민 유행 - 과 결합해 보여주는 내용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디테일이 탁월한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의 연회 문화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다양한 책을 읽었지만 와인을 따르던 전문가 코피에레에 대한 묘사는 처음 봤네요. 온갖 좋은 점은 한 몸에 다 갖춘 듯한 사람이더라고요. 길게 늘어뜨린 옷에 주홍색 양말, 붉은색이 아닌 검은색 벨벳 신발을 신는다는 패션 센스마저 돋보입니다.
또 당시 요리들은 모두 단품이 아니라 코스였으며 당시 설탕을 많이 사용했던건 소금의 짠맛을 상쇄하기 위해서였다는 발상도 눈에 띕니다. 그리고 안 좋은 냄새를 없애기 위해 향료가 필요했다는 것도 사실과 멀었다는군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먹어야 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비싼 향료를 살 여유도 없었을 거라는게 이유인데 확실히 와 닿습니다.
캐비아는 원래 굉장히 싸구려 음식으로 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영국 병사들에게 보급품으로 캐비아 캔을 나누어 줄 정도였다는 것도 신기합니다. 참치 대뱃살, 킹크랩과 같은 과정을 밟은 셈이네요.

그 외에도 유명한 디자이너 브루노 무나리의 손길이 닿은 에스프레소 머신과 저도 사용해 본 적이 있는 모카 에스프레소 디자인 등 디자인 강국 이탈리아스러운 이야기들도 마음에 들었고 다빈치가 실제로 레스토랑을 경영했다는 이야기, 그곳에서의 일화도 기억에 남습니다. 음식의 양을 줄이고 플레이팅에 신경을 쓴 최첨단의 세련된 레스토랑이었는데 손님들 모두 격분해서 경영은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과연, 플레이팅 따위보다는 가성비가 최고인거죠.

이런 내용이 재미난 글과 함께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빼곡하게 실려 있습니다. 단점을 찾는게 힘들 정도로 재미있고 가치도 높은 책입니다. 2만원이라는 가격도 수긍할만 합니다. 제 별점은 5점! 요리, 특히 이탈리아 요리를 사랑하신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 이탈리아인들은 정말로 위대한 민족이에요. 요리와 예술 측면에서는요.

2011/12/02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 - 맥스 브룩스 / 장성주 : 별점 3점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 - 6점
맥스 브룩스 지음, 장성주 옮김/황금가지

가상의 존재인 좀비에 대해 상세한 설정을 부여한 뒤 좀비가 창궐하였을 때의 대처법을 설명하는 독특한 책.

따지고 보면 대체역사 소설과 비슷한 장르물이긴 하지만 "교본"이라는 형태로 구성하여 현실감을 높이고 독자로 하여금 디테일한 설정에 빠져들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말이지 아이디어의 승리에요. 어렸을 때 좋아했었던 일본 괴수, 애니메이션 대백과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터무니없는 설정을 진짜처럼 포장해서 풀어나가는 점 때문입니다.

실려 있는 내용도 꽤 상세합니다. 좀비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하여 무기와 전투 기술, 방어요령, 피난요령, 공격요령, 좀비 천지에서 살아남기에 이어 기록에 남은 좀비 공격 사례라는 가상 역사로 마무리하고 있는데, 모든 내용이 가짜라는걸 알아도 읽고 나면 뿌듯해질 정도로 그럴듯합니다. 거의 전 지구를 포괄하는 가상 역사도 흥미진진하고요.

또 그동안 좀비물의 상식을 깨는 이론도 돋보였습니다. 예를 들면 쇼핑몰이 좀비 방어에는 최악의 장소라든가, 버스는 탈출 수단으로는 젬병이라는 것 등입니다. 전통적인 좀비 영화나 만화의 설정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들인데, 워낙에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어서 감탄했습니다.

책을 읽고 나니 혹시 모르니 필수 상비품인 "배척 (빠루)"는 바로 구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셰티"도 한 자루 챙겨 놔야겠고요. "월아산"을 어떻게 구해 놓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창의 안정성과 일본도의 살상력 겸비)

하지만 내용 대부분을 글로 떼우고 있다는 점에서 최고점을 주기에는 부족합니다. 좀 더 치밀한 도판과 자료 사진으로 도감 형태를 갖추었어야 합니다. 이 정도로는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가이드로는 부족해요. 그 밖에 농사짓는 법이라든가 피난처를 짓는 방법도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되었어야 합니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슬쩍 짚고 넘어가는 수준이라서, 정작 위급한 상황에서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런 소재로 이만큼이나 진지하게 접근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하고, 취미와 실용 (?)을 만족시키는 보기 드문 작품으로 장르물 애호가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좀비물 팬이라면 놓치지 마시길.

이어지는 시리즈로 "북두신권 세상에서 살아남기"라든가 "연쇄살인극에서 살아남기" 등으로 시리즈가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연쇄살인극에서 살아남기"는 직접 써 봐야겠네요!

그런데, 좀비가 왜 이렇게 사랑받는 몬스터가 됐을까요? 제가 어릴 적에는 3대 몬스터 -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 에 끼지도 못하는, 미이라보다 못한 마이너 몬스터였는데 말이죠(대관절 프랑켄슈타인이 저기 왜 끼어 있는지는 미스터리지만). 80년대 이후 피로 전염되는 AIDS라는 병에 대한 경각심 때문일까요? 어쨌든 80년대 이후, 기존의 귀족적인 스타일에 더하여 핸섬한 게이 혹은 엄친아로 진화한 흡혈귀에 비한다면야 몬스터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뚝심 하나만큼은 높이 사고 싶긴 합니다

2011/09/03

연쇄살인범 파일 - 헤럴드 셰터 / 김진석 : 별점 3점

연쇄살인범 파일 - 6점
헤럴드 셰터 지음, 김진석 옮김/휴먼앤북스(Human&Books)

연쇄살인의 정의에서 시작해 수많은 연쇄살인범들의 사례는 물론 그들의 최후와 미결 사건들, 그리고 연쇄살인범과 관련된 다양한 서브컬처까지 담아낸,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연쇄살인 백과사전입니다.

과거 콜린 윌슨의 저서에서 접했던 내용을 가볍게 뛰어넘는 방대함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푸른수염 질 드레, 마리 드 브랭빌리에 등 역사적 인물에서 시작해 17~19세기를 거쳐 2000년대까지 거의 전 시대를 망라합니다. 슈퍼스타이자 원조 격인 잭 더 리퍼는 물론, 샘의 아들 버코위츠, 보스턴 교살자 드살보, 언덕의 교살자들 비안치와 부오노, 고속도로 살인자 보닌, 새크라멘토의 뱀파이어 데이비드 카펜터, 미친 짐승 안드레이 치카틸로, 캔디맨 딘 코얼, 밀워키의 식인종 제프리 다머, 달빛 광인 앨버트 피쉬, 살인 광대 존 웨인 게이시, 플레인필드의 시체도둑 에드 게인, 고릴라 살인자 넬슨, 소년 미치광이 제시 포메로이, 나이트 스토커 리처드 라미레즈, 붉은 거미 루시안 스타니악, 조디악 등 그 수를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연쇄살인범들이 소개됩니다.

또한, 서구에 집중된 다른 저서들과 달리, 타 문화권 범죄에 대한 정보가 상세하게 담긴 점도 마음에 듭니다. 20세기 최악의 연쇄살인범 유력 후보 중 하나인 콜롬비아의 루이스 알프레도 가라비토(1992년부터 7년 동안 140명 이상 살해), 아이들을 100명 죽이는 것이 목표였고 결국 달성했다는 파키스탄의 자베드 이크발, 안데스 산맥의 괴물 페드로 로페스(110명을 살해했다고 자백), 미해결 상태인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괴물 사건, 중국의 매춘부 살인자 리 원시엔(홍콩에 떠내려온 잔혹한 피해자의 사체로 서방 세계에 정체가 알려짐) 등의 정보는 다른 책에서는 접하기 힘들었거든요. 추후 증보판에는 "한국의 연쇄살인"에서 다룬 범죄자들이 추가되면 더욱 완벽해질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과학적, 역사적인 고찰도 포함되어 있는 점도 눈에 뜨입니다. 깊이가 아주 깊거나 디테일하지는 않지만, 중세의 늑대인간 전설을 사이코패스와 연관 지은 것은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사체의 상태를 고려하면, 당시 사람들이 짐승의 짓이라 여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죠. 또한, 거의 대부분의 연쇄살인범들이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유년 시절을 겪었거나 머리에 외상을 입었다는 설명(물론 이러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모두 연쇄살인범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 인물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프로파일링 관련 이야기 등도 흥미로웠습니다.

연쇄살인범들이 체포된 계기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경찰의 집요한 노력 외에도 범인의 실수나 순전한 우연이 작용한 경우가 많더군요. 대표적인 사례로, 릴링턴가의 괴물 존 레지널드 크리스티는 부엌 찬장에 시체 3구를 숨기고 벽지만 바른 뒤 이사를 갔다가 덜미를 잡혔다고 합니다. 또한, 영국의 ‘제프리 다머’라 불리는 데니스 닐슨은 토막 낸 사체를 화장실에 버리고 물을 내리다가 건물 파이프가 막혀 발각되었다고 하네요.

너무 많은 주제를 담아내려다 보니 편집이 다소 혼란스럽고, 목차와 색인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검색이 어렵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또한, 특정 인물이 여러 주제에 중복되어 등장하는 문제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쪽 방면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소장할 만한 자료라고 생각됩니다. 충실한 각종 자료와 괜찮은 도판 등 여러모로 볼거리도 많은 편입니다. 너무 끔찍한 내용이 많아 남에게 권하기는 힘든 책이지만, 순수하게 자료적 가치로만 평가하면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집에 이 책을 두면 근처의 원귀들이 모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드는군요...

2006/08/31

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 - 제프 린제이 / 최필원 : 별점 1점

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 - 2점
제프 린제이 지음, 최필원 옮김/비채

마이애미,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살인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 덱스터는 양부였던 헨리의 충고에 따라 사회악적인 존재만 골라서 처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본 직업인 경찰 혈흔 분석가로서의 이중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그러나 덱스터와 유사한 연쇄살인범이 나타나 마이애미는 광란 상태에 빠지고 덱스터는 살인범과의 교감을 느끼면서도 의붓 여동생인 데보라의 소망에 따라 자신의 직감과 본능에 따라 살인범을 추적한다...

모던 스릴러 소설가이자 기획자라는 모중석씨가 선정한 스릴러 소설들을 출간하는 "모중석 스릴러 클럽"의 4번째 작품입니다. 스릴러 소설은 별로 취향은 아니지만 평도 좋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그러나.. 읽어본 결과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대실망!" 입니다.
일단, 대체 이 소설의 어디가 스릴러라는 것인지 저는 당쵀 알 수 없더군요. 살인범과의 몇가지의 단서를 놓고 벌이는 스릴 넘치는 두뇌게임이나 쫓고쫓기는 추격? 이 작품에서는 그런건 전혀 없습니다. 살인범의 추적은 덱스터가 같은 연쇄살인범으로서 동질감을 느끼고 순전히 자신의 "본능"과 "직감"에 따를 뿐입니다. "단서" 이런건 전혀 없습니다. 단서랍시고 나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실제 수사에는 군더더기일 뿐이고요. 압권은 살인범이 덱스터를 자기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오히려 서서히 접근해 온다는 설정. 장난쳐 지금? 주인공은 하는게 하나도 없잖아!
혹 잔인한 장면의 나열만으로 스릴을 줄 수 있다고 작가가 착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구태의연하고 지루한 묘사였을 뿐입니다. 제임스 옐로이의 블랙 다알리아같은 숨이 콱콱 막히고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는 범죄소설 보고 연구나 좀 할 것이지... 작가가 본 건 헐리우드 영화들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의붓동생과의 관계나 직장 상사와의 관계 등 모든 다른 세부 설정들도 전형적인 헐리우드 영화를 아주 충실히 모방하고 있거든요. 아, 주인공 직업에 대한 설정이나 몇몇 장면들에서는 CSI도 좀 본 티를 내긴 하더군요.
그리고 덱스터의 심리묘사에 너무 많이 치중하고 있는 것도 실수로 보입니다. 작가의 필력이 그닥 캐릭터의 심리묘사를 돋보이게 할 정도로 화려하지도 않아서 설득력이 많이 떨어져서 소설만 불필요하게 길어질 뿐이었습니다. 이놈은 왜이리 잡생각이 많은지 원...

범죄자를 잔인하게 응징하는 이야기는 온갖 만화에서 써먹은 소재이니 별반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고 경찰과 범죄자의 이중생활 역시 뻔한 이야기고.... 잔인하면서도 완벽한 연쇄살인범을 "착한"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설정빼고는 건질게 별로 없는 알맹이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연쇄살인마가 경찰 업무를 수행한다는 이중생활을 드라마틱하게 그렸더라면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최소한 웃기기는 했을텐데.
요새 이래저래 안좋은 일이 생겨 좀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라 이 작품이 좀 집중포화를 맞은 듯도 하지만 두번다시 손에 잡게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뒷 커버에는 "리얼리티의 힘!" 이라는 카피가 나와있는데 이 소설의 어디가 리얼하다는 건지 대관절 알 수가 없네요. 보름달에 살인 충동을 이기지 못해 연쇄살인을 저지르는게 리얼하다니... 보름달이 뜰때 주인공이 늑대인간으로 변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인하는 것이 리얼하다고 표현한 건가?

PS : 원제가 "Darkly Dreaming Dexter" 니 줄이면 "3D"군요. 전혀 상관없지만 더들리 보이스가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PS2 (2006.10.11) : 블로그를 둘러보다 보니 영상화가 끝난 모양이군요. 의외로 TV Series인 듯 합니다. 뭐 워낙 영상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작품이다 보니 의외성은 없고 외려 보고싶어지네요.

2020/06/28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 - 강석기 : 별점 2점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 - 4점
강석기 지음/Mid(엠아이디)

과학 전문 컬럼니스트 강석기의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 에세이로 과학 동아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엮은 책입니다. 

그런데 일러스트는 사실 별 볼일 없습니다. 딱히 일러스트가 있어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요. 또 모두 50편의 수록된 컬럼 모두가 흥미롭거나, 재미를 자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재미있는 주제도 없지는 않습니다.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꼽아보자면, 우선은 사람들의 대인관계 범위, 즉 네트워크가 한정돼 있어 새로운 사람을 사귀게 되면 기존 네트워크에 올라와 있는 사람 가운데 누군가를 잘라내기 마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1990년대 영국 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로빈 던바 교수는 사람의 뇌 크기를 토대로 인류의 이상적인(구성원 각자가 서로 잘 아는) 집단의 규모가 150명 내외라고 주장했다는군요. 이를 '던바의 수'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던바의 수는 실질적인 인적 네트워크의 한계로 인식되고 있다고 합니다. 즉, 네트워크에 한계가 있으니, 누군가 선호 네트워크에 추가되면 누군가는 내려가야 하는 법인 셈이죠. 저는 150명까지는 안 될 것 같은데, 나중에 한 번 추려봐야겠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과학자들의 산책 습관과 이들의 엄청난 창조력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놀랍습니다. 학술지 실험심리학저널 2014년 7월호에는 걷기가 정말 창의력을 높여준다는 연구 결과가 실렸다고 하네요. 걷는 게 무조건 도움이 되는 건 아니며, 걷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의 편안한 걸음, 즉 산책 같은 걷기가 효과가 있다는데,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모른답니다. 여튼, 회사에서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는 잠깐 걷는게 상책인 듯 합니다.

선택 어업의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 물고기는 한 번에 알을 수만 개나 낳고, 이 가운데 살아남은 강한 녀석들이 짝짓기를 해(물론 체외수정이지만) 종을 이어갑니다. 자연계에서는 어리거나 병든 녀석들은 사망률이 높기 마련이고요. 그런데 선택 어업은 정 반대로 작고 어린 녀석들은 그물망을 빠져나가 살아남으며 커다란 물고기만 잡히게 됩니다. 어획량이 적다면 자연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겠지만, 지금처럼 어자원고갈에 이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총량을 규제하는 상황에서는 선택어업이 덩치 큰 물고기의 사망률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결국 몸집이 크게 자라고 늦게 성숙하는 유전자를 지닌 물고기들의 비율이 줄어들고 대신 조숙하고 몸집이 작은 경향의 물고기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큰일이에요.
이런 부자연 선택은 캐나다 큰뿔양의 뿔 크기에서도 증명됩니다. 사냥꾼 한 사람이 사냥할 수 있는 큰뿔양 마리수를 제한하자, 사냥꾼들은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큰 뿔을 지닌 큰뿔양만을 골라 사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과 20여 년 만에 뿔의 크기는 평균 25%나 줄어들었다네요. 원래 큰 뿔은 성선택으로 나타난 표현형으로, 뿔이 크고 화려할수록 수컷이 더 건강하고 활력이 넘친다는 증거이므로 암컷들이 선호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큰뿔양의 뿔은 더 커지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는데 사람들이 선택적인 사냥에 나서면서 불과 20년만에 성선택에 완전히 반대가 되는 방향의 진화를 이끌어낸 셈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선택어업' 대신 어획량과 크기를 규제하지 말고 어획량만 규제하는 '균형어업'으로 어업정책을 바꿔야 할 때라고 하는데, 그럴 듯 합니다. 앞으로는 "도시 어부"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자를 대고 기준에 못 미치는 물고기는 놓아주는 모습도 사라져야 할 것 같네요.

아울러 더운 여름, 주목할 수 밖에 없었던 내용이 있습니다. 완벽한 냉난방 시스템은 우리 몸의 대사율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한다는 내용이지요. 25도 내외에서 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우리 몸이 별도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너무 더우면 땀을 내 체온을 식혀야 하고 너무 추우면 몸을 덜덜 떨어, 즉 근육에서 영양분을 연소시켜 열을 내야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25도 내외의 온도가 유지되어 몸의 대사율이 떨어지면, 즉 에너지를 덜 쓰게 되면 섭취한 여분의 에너지는 지방으로 축적되고 이것이 현대 사회 비만이 만연하게 된 원인 중 하나라고 하네요. 그래서 연구자들은 겨울철 난방 온도를 좀 내려 몸이 지방을 태우는 '열생성'을 통해 체온을 유지하게 만들자고 주장한다는데, 잘 되면 좋겠습니다.

집단의 크기가 문화적 복합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실험도 재미있습니다. 그물 설계 실험을 거쳐 집단 내 구성원 숫자가 많으면 많을 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걸 증명한 실험입니다. 이를 통해 고립된 개인이나 소수 집단은 복잡한 문화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고 만들어낼 수도 없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피험자들이 두 과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실험 조건 역시 집단의 크기가 클수록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군요. 능력에 따른 노동의 분업을 통해 두 과제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ABE 문고에서 "마지막 인디언"이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결국 이 마지막 인디언이 모든 문화를 전달하는건 불가능했을거라는게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나는 전설이다"역시 마찬가지고요.

마지막으로 동아시아인들이 관계지향적이고 통합적 사고를 하는 이유가 벼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며, 개인주의이고 분석적 사고를 하는 서구인은 밀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가설도 재미있어요. 벼농사는 물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규모 관개시설이 필요하고 농사를 지을 때도 이웃 간에 물을 잘 나눠 써야 한며, 피를 뽑는 작업 등 밀농사에 비해 두 배 이상 손이 많이 가는 탓입니다. 그 결과 벼농사권에서는 상부상조하는 관습이 이어져왔고 나보다는 우리'를 앞에 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밀농사는 자연 강우에만 의존하고, 일이 고되기는 해도 나 혼자 힘으로 내가 먹을 걸 얻는 데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농사의 독립성이 컸고 그만큼 다른 사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이런 생활패턴이 수천 년 이어져오면서 동아시아인과 서구인의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생겼고, 동아시아인 가운데서도 특히 논농사가 압도적인 한국인과 일본인에서 전형적인 동아시아적 사고 패턴이 보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럴싸하지요?
그러나 요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앞으로는 어떻게 바뀔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 개인적으로는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상부상조하는 전통만큼은 앞으로도 유지되면 좋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 글은 소수이고, 전체적으로는 재미 측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제 관심사 밖의 이야기도 많았고요. 또 제목처럼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지만, 내용은 별다를게 없는 글들도 실망스러웠습니다.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 그냥 인간이 오래 전에 키웠기 때문이랍니다. 다른 내용은 없어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2/01/30

고쿠 1~6 - 테라사와 부이치 : 별점 2점

[고화질세트] 고쿠 (총6권/완결) - 4점
테라사와 부이치 지음/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걸작 "우주해적 코브라"로 스페이스 판타지의 신기원을 연 작가 테라사와 부이치의 또다른 대표작입니다. 작품이 발표되었을 1987년에는 비교적 먼 미래로 느껴졌을, 2014년을 무대로 한 근미래 SF 액션 스릴러로, 우리나라에는 e-book으로만 소개되었습니다. 설 연휴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은 경찰 출신의 사립탐정 후린지 고쿠입니다. 맨 몸에 쟈켓을 입고 목에 넥타이를 메는 다소 충격적인 패션 센스를 가진 남자지요.

고쿠는 첫 번째 사건에서 악당의 최면에 걸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왼쪽 눈을 찔러 실명하는데, 누군가 그 왼쪽 눈에 소형 컴퓨터 단말기가 장착된 '의안'을 설치해 줍니다. 그 의안은 전 세계의 모든 컴퓨터는 물론, 인공위성까지도 연결하여 제어할 수 있는 물건이었지요. 고쿠는 이른바 '신의 눈'이라고도 하는 이 의안을 최대한 이용하고, 그 누군가가 전해 준 또다른 장비 여의봉(?)을 무기로 악당들과 싸워나갑니다.

여러 면에서 작가의 출세작 "코브라"가 떠오릅니다. 미인들의 부탁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기본 전개부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한마리 외로운 늑대로 엄청난 마초인데다가 시니컬하면서도 독특한 유머 넘치는 대사를 내뱉는 고쿠 캐릭터가 완전히 똑같기 때문입니다. 갖추고 있는 피지컬만으로도 세계관 최강자인데다가, 강력한 무기 '싸이코 건' 까지 소유한 코브라와는 다르게 고쿠는 비교적 평범한 인간이라는 차이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차이도 전능하다고 칭해도 부족하지 않은 왼쪽 눈의 의안 덕분에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의안으로 왠만한 적들은 쉽게 무력하게 만드니까요.

그래도 단순한 자가복제 아류작은 아닙니다. '신의 눈'이라는 아이디어 덕이 큽니다. 모든 단말에 접속하여 조작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최소한 10년 이상 시대를 앞서간 것입니다. 인공 위성으로부터 현재의 GPS, 카 네비게이션과 동일한 정보를 전달받아 이를 추격에 활용하는 장면 등은 미래를 보고 온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인공 위성과 각종 단말을 조작하여, 악당 하크류 겐지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영상을 건물 전광판으로 표시하는 장면은 능력의 특징을 제대로 선보여준 명장면이었고요.

정보를 장악하는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탐정'이 주인공인 이야기에도 잘 어울렸어요. Private Eye가 Midnight Eye를 갖게 되니, 금상첨화인 셈이지요.

탐정물답게 놀라운 진상과 반전을 갖춘 이야기들도 꽤 됩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류는 의붓 아버지에 의해 사이보그로 개조되어 몸에 강력한 보호막을 두르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중화제를 투약하지 않으면 미치광이 살인마로 돌변하기 때문에, 여동생 요시코는 고쿠에게 류를 죽여달라고 의뢰했고요. 그런데 알고보니 류는 의붓아버지 젠조의 복제인간으로 창조된지 고작 30일에 불과했던 생명체였습니다. 젠조는 자기 몸에 보호막을 설치하기 위해 류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겁니다. 수정체를 만든 건 여동생인줄 알았던 요시코였고요. "차이나타운"이 떠오르는, 하드보일드스러운 막장 관계를 인공수정, 급속 성장, 기억 이식 등 미래 기술에 녹여낸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슈퍼 스타 시노즈카 레이라가 자기 노래를 표절했다며 죽이려고 하는 지하 록의 여왕 야마가미 리사와 동일 인물이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꽤나 놀라운 진상을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4권(일본 기준)으로 끝나버린 이유도 분명합니다. 뒷 부분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암흑의 선녀" 편에서 귀신 '천동녀'의 정체는 쿠키 일족의 정신을 넣은 인공두뇌로 구현된, 일종 에너지 덩어리였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우주해적 코브라"의 사라만다 설정과 똑같죠. 다카르 랠리에 참여한 오토바이 레이서 보니의 문신 속에 마이크로 필름의 정보가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도 "우주해적 코브라"와 유사했고요. 유령 유전자 실험에 자원하여 스스로 생명체의 모든 진화를 구현해 낼 수 있게 된 카산드라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실험 덕분에 생물 진화의 최종 단계로 변신할 수 있었고, 그건 바로 악마였다는건 재미있는 발상입니다만 이는 "코브라"에서 화성의 최종 병기 이야기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악마가 고작 금괴를 노린다던가, 그 최후가 녹아버린 뜨거운 금을 뒤집어 쓰는 것에 불과했다는 등 세부적인 이야기 완성도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요. 

후반부 에피소드들에서는 '신의 눈'의 능력도 잘 선보이지도 못합니다. 모든 장치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기본 설정만 답습할 뿐입니다. 이런 능력을 활용하여 악당에게 자신의 경고를 날린다던가, 공장에서 자기만을 위한 특별한 무기를 만든다던가 하는 초반부 에피소드들같은 새로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걸 통제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악당들과 육탄 액션을 펼친다는 설정도 별로였고요. 

또 한국어판 e-book은 에피소드별 제목이 제대로 부여되어 있지 않은 등 편집이 그닥이며, 마지막 권에 '지금 밝혀지는 고쿠의 비밀'이라는 저자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고 소개되는데 정작 수록되어 있지 않은 등 문제가 많아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부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던게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유튜브를 뒤지면 카와지리 요시아키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을 찾아볼 수 있는데, 비교적 수작인 초반부 에피소드를 영상화한 만큼 애니메이션만 찾아서 보시는게 낫습니다.

2017/02/01

밧줄 - 스테판 아우스 뎀 지펜 / 강명순 : 별점 2점

밧줄 - 4점
스테판 아우스 뎀 지펜 지음, 강명순 옮김/바다출판사

스물네 채의 농가와 밀밭, 그리고 목장으로 구성된 숲으로 둘러 쌓인 산속 마을에 살던 농부 베른하르트는 숲 속에서 빠져나와 놓여 있는 밧줄을 발견했다. 밧줄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해한 마을 사람 세 명이 숲으로 향했는데, 멧돼지의 공격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반드시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1명을 제외한 성인 남자 모두가 숲으로 향했다. 하루 뒤에 돌아올 것을 약속하며...

독일의 어른들을 위한 우화입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어떤 목표를 위해 전진하다가 하나씩 죽어나가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아이디어와 변주 덕분에 꽤 흥미로왔습니다. 특히 밧줄이라는 소재가 좋았어요. 마지막 순간에 또 다른 밧줄이 교차되는걸 발견하는 장면은 정말 최고였고요. 제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쓰러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야기를 독자에게 하려는지는 모호합니다.무의미한 것에 대한 갈망으로 벌이는 허무한 노력에 대한 이야기인지, 헛된 노력을 경주하다가 파멸해가는 인간 군상에 대한 이야기인지, 특정 상황에 닥친 사람들의 극한을 묘사한 군상극인지 잘 모를 정도로 전개가 멋대로인 탓입니다. 
이 중에서는 148페이지의 묘사를 볼 때 "무의미한 것에 대한 갈망으로 벌이는 허무한 노력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기는 합니다. '불확실한 것에 운명을 걸고 길을 떠난 것은 철없는 짓이었다. 멍청하고 위험한 게임에 목숨을 건 셈이었다. 타당한 근거도 없이 결과가 좋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서 규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게임에 뛰어든 것이다. 이제 그들은 이 게임에서 자신들이 졌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오만함이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그 책임은 오롯이 그들 자신에게 있었다. 어디선가 구원의 손길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은 그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 했다.' 라는 묘사인데, 말 그대로 이미 끝난 게임이고 남은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전진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고요. 그러나 '자존심' 이야 말로 정말로 빈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죠. "패배를 인정하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사나이다"라는 오래전 만화 "캄 브레이커"의 명대사가 떠오르네요.

그러나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무엇을 전하려 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입니다. 이미 패배한 것을 알았다면 허무한 노력, 자존심을 버리고 패배를 인정하라는 것일까요? 하지만 패배했다는걸 알아도 끝까지 가야하는게 사나이의 길일 수도 있잖아요?
 게다가 고작 그 이야기를 하는 것 치고는 곁가지가 지나칠 정도로 많아요. 예를 들자면 베른하르트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특별한 교훈이나 울림을 주지 않습니다. 또 다쳤던 울리가 회복한 후 어떻게 되었는지도 영 알 수 없어서 답답하고요. 마을에 유일하다시피한 멀쩡한 사내로 베른하르트의 아내 아그네스나 미하엘의 아내 안나 등 모두를 유혹하면서 남자판 여왕벌 사건이라도 일으키는 줄 알았는데, 아무런 이야기가 더 발생하지 않는 탓입니다. 이래서야 분량 낭비일 뿐이죠.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망친 후 떠나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로 딱히 필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밧줄이 무엇인지는 결국 밝혀지지 않는다는게 명확한 한계로 작용합니다. 우화라는 명분으로 가능했던 열린 결말이기는 한데, 핵심 주제와 깊은 관련이 있기에 무책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도 어렵고요. 또 밧줄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으니, 이들의 노력도 헛되다고 폄하할 수 없습니다. 밧줄 끝에 진짜 대단한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소재와 전개는 흥미로운데 여러모로 많이 부족했습니다. 12,000원이라는 가격도 감점 요소고요. 문고본 형태로 여백없이 잘 압축해서 만든다면 충분히 150여 페이지로 끊을 수 있을법한 중편 소설 치고는 가격이 너무 비쌉니다. 장정이나 책 디자인도 별로 인상적이지 못하고요. 오래전 범우 사루비아 문고 시절의 미덕이 그리워집니다.

덧붙이자면, 힘든 여정이지만 늑대만 다시 만나지 않는다면 남은 사람들의 복귀는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정확하게 몇명인지는 모르지만 스물네 채의 농가가 있다고 하니 최소 24명, 전날 다친 울리히를 빼면 23명입니다. 일종의 버팀목으로 남게 된 요한네스야 외지인 라우크와 1:1로 치환되니 23명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여기서 첫 날 이후 복귀를 시도한 베른하르트와 알프레드를 빼면 21명, 미하엘이 독사에 물려 죽고, 늑대 습격 시 1명이 물려 죽고, 라우문트가 라우크를 살해하고 먼저 도주하니 17명이 남습니다. 사냥에도 능숙한 진짜배기 사나이들이 17명이나 모인데다가 길을 잃은 것도 아니고, 밧줄만 따라가면 되니 복귀에 성공할 가능성은 높습니다. 장비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식량은 분명 숲에서 조달 가능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고요. 잘못된 리더(라우크)와 불순분자(라우문트)가 동시에 제거된 상황에서는 더더욱 가능성이 높겠지요. 모르는 길이 아니라 한번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기도 하고, 특별히 다치거나 아프지만 않았다면요. 뭐 이건 작품 주제하고 무관한 이야기이고 이렇게 되면 우화로서의 성격이 더욱 애매해지긴 합니다만.

2003/12/14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테리 100선

원 출처는 심농님의 홈페이지였으며 (현제 폐쇄), 내용은 국일미디어 간 "유령신사" 뒷부분에도 실려있습니다. 해설은 원본 작성하신 분과 제 의견이 섞여 있습니다. 이런 리스트는 사실 별 의미는 없지만 제목만 보는것도 꽤 재미있더라고요.

001 옥문도 1947 요코미조 세이시 /요코미조 세이시는 긴다이치 하지메(김전일)의 할아버지 긴다이치 코스케의 창조자입니다. 뛰어난 본격 작가죠.
002 허무에의 공물 나카이 히데오 / 이번에 동서에서 나오는 모양입니다.
003 점과 선 1957 ; 마츠모토 세이초 / 열차 시간표를 이용한 트릭
004 불연속 살인사건 1947 ; 사카구치 안고 /ㅎㅎ 바로 전에 읽었던 작품이죠. 동서에서 이번에 나왔습니다.
005 흑사관 살인사건 1934 ; 오구리 무시타로 / 동서에서 나오는 모양입니다.
006 도구라 마구라(환마술) 1935 ; 유메노 규사쿠 / 역시 이번 동서 리스트에.. (대체 언제 나올지는 의문입니다만)
007 혼진 살인사건 1945 ; 요코미조 세이시 /긴다이치 코스케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죠. 트릭은 수긍하기 힘들지만 역사적인 의미가 더 큰 듯 싶습니다.
008 검은 트렁크 1956 ; 아유가와 데츠야 / 동서에서 역시 이번에...
009 회귀천 정사 1980 ; 렌죠 미키히코 / 앗 모르는 작품 (*2011년 시공사에서 출간됨. 걸작입니다)
010 문신 살인사건 1948 ; 다카키 아키미츠 / 유명한 작품이죠. 어서 제대로 다시 소개가 됐으면 좋겠네요. (*동서에서 출간)
011 산고양이의 여름 1984 ; 후나토 요이치 / ?
012 대유괴 1997; 텐도 신 /텐도 신의 대유괴도 참 많이 들어본 작품입니다. (*출간되었습니다. 좋은 작품이에요)
013 이전동화 1923 ; 에도가와 람포 / 국내 소개 됐고 단편입니다. 데뷰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일종의 암호 트릭. 동서 "음울한 짐승"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1에도 수록)
014 음수 1928; 에도가와 람포 / 에도가와 람포의 초기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죠? 동서의 "음울한 짐승" 입니다.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2권에도 수록)
015 제로의 초점 1959 ; 마츠모토 세이초 /0의 초점으로 국내에 출간돼 있죠. 저도 하서판으로 갖고 있는데 전형적인 사회파 작품입니다.
016 11매의 트럼프 1976 ; 아와사카 츠마오
017 아 아이이치로(악애일랑)의 낭패 1978 ; 아와사 카츠마오 / 이 작품도 많이 상위권에 언급되는 작품입니다만.. (*시공사에서 출간, 좋은 작품입니다)
018 기아해협 1962 ; 미나카미 츠도무
019 고메스의 이름은 고메스 1962 ; 유키 쇼지 /역시, 낯이 익습니다. 흠. (*검은숲에서 출간) 
020 위험한 동화 1961 ; 츠치야 다카오 / 작가는 낯이 익은데..
021 점성술 살인사건 1981 ; 시마다 소지 / 나왔군요! 걸작~
022 복잡한 기계 장치 1978 ; 아와사카 츠마오
023 사건 1977 ; 오오카 쇼헤이
024 우리 1983 ; 기타가타 겐조
025 심리시험 1925 ; 에도가와 람포 /동서 "음울한 짐승"에 수록. 조금 낡은 트릭입니다만, 재미 있습니다.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1에도 수록)
026 상자 속의 실낙 1978 ; 다케모토 겐지
027 굶주린 늑대 1981 ; 시미즈 다츠오
028 대낮의 사각 (백주의 사각) 1959 ; 다카키 아키미츠 / 이 작품도 대표작 중 하나라고 알고 있습니다. 동서에서 나온다곤 하는 것 같은데요.. (*검은숲에서 출간)
029 황토의 분류 1965 ; 이쿠지마 지로
030 도망의 거리 1982 ; 기타가타 겐조
031 야수는 죽어야 한다 1958 ; 오야부 하루히코 / 고려원에서 문고판으로 나온 책입니다.
032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1955 ; 다카키 아키미쓰 / 아키미쓰의 작품이 세 개나;; 흠 보고 싶어요. (*검은숲에서 출간됨)
033 나메쿠지 쵸야 체포 소동 1968 ; 츠츠키 미치오.
034 끝없는 추적 1967 ; 이쿠지마 지로
035 고양이는 알고 있다 1957 ; 니키 에츠코 /역시 들어봤던 작품 (*시공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036 묵시록의 여름 (섬머 아포칼립스) 1981 ; 가사이 기요시
037 고도의 마인 1929 ; 에도가와 람포 /국내에 나와 있죠. 하서판으로 읽었는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038 검은 백조 1959 ; 아유가와 데츠야
039 타오르는 파도 1982 ; 모리 에이
040 변호 측 증인 1963 ; 고이즈미 기미코 / 검찰측 증인인가...^^ (*검은숲에서 출간, 무난했습니다)
041 그림자의 고발 1963 ; 츠치야 다카오 /오 제목이 정말 멋지군요.
042 악마의 공돌이 노래 1957 - 요코미조 세이시 /흠 정말 보고 싶었던 작품.
043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1982 ; 시마다 소지 /미타라이 탐정의 두 번째 사건. 너무 보고 싶어요. (*시공사에서 출간)
044 여덟 개의 묘가 있는 마을 1949 ; 요코미조 세이시 / 팔묘촌..
045 신사동맹 1980 ; 고바야시 노부히코
046 징기스칸의 비밀 1958 ; 다카키 아키미츠 /이 소설도 상당히 유명한 작품으로 역사 미스테리로 알고 있습니다.
047 갈라진 해협 1983 ; 시미즈 다츠오
048 리라 장 사건 1968 ; 아야가와 데츠야
049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1929 : 에도가와 람포
050 마른 풀의 뿌리 1961 ; 친신
051 밤의 오딧세이아 1981 ; 후나토 요이치
052 고층의 사각 1969 ; 모리무라 세이이치 /정말 엄청나게 끈질긴 작품입니다. 하서 수록.
053 모래그릇 1960 ; 마츠모토 세이초 /역시 하서. 당시로서는 기발한 흉기가 나오는 전형적인 사회파 작품
054 바이 바이 엔젤 1979 ; 가사이 기요시
055 한시치 체포록 1917 ; 오카모토 기도 / 와 정말 옛날 작품이네요. (*책세상에서 출간)
056 파노라마 섬 기담 1926 ; 에도가와 람포
057 한 개의 납 1959 ; 사노 요 /단편이 국내에 소개가 됐어요
058 사루마루 환상 여행 1980 ; 이자와 모토히코
059 고양이 혀에 못을 박아라 1961 ; 츠즈키 미치오
060 초대받지 않은 손님 1980 ; 사사자와 사호 /사사자와 사호도 많이 언급되는 작가.
061 짙은 갈색의 파스텔 1982 ; 오카지마 후다리
062 인생의 바보 1936 ; 기키 다카타로
063 배덕의 메스 1960 ; 구로이와 쥬고 /제목 참;;
064 증발 1972 ; 나츠키 시즈코 / W의 비극이 대표작아닌가요? 이 작품은 잘 모르겠는데 더 순위가 높네요.
065 나폴레옹 광 1979 ; 아토다 다카시 /단편입니다. 월간 미스터리에 수록된 작품. 단편집도 국내에 출시가 됐었는데요. 저는 참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서늘~합니다.
066 부호 형사 1978 ; 츠츠이 야스다카 / SF소설가로 더 유명한 작가인 듯 한데 이 작품도 보고 싶네요. (*검은숲에서 출간,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067 샤라쿠 살인사건 1983 ; 다카하시 가츠히코
068 잠 없는 밤 1982 ; 기타가타 겐조
069 나비부인 살인사건 1946 ; 요코미조 세이시 / 동서에서 나왔습니다. "혼진 살인사건"과 같이 수록 되어 있습니다.
070 죽음이 있는 풍경 1965 ; 아유가와 데츠야
071 살인귀 1931 ; 하마오 시로
072 불꽃에 그림을 1966 ; 친신
073 검은 화집 1960 ; 마츠모토 세이초
074 아쿠쥬로 체포기록 1939 ; 히사오 쥬란
075 W의 비극 1982 ; 나츠키 시즈코 / 좋은 작품입니다.
076 베를린 1888년 1967 ; 가이도 에이오
077 안녕 아프리카의 여왕 1979 ; 모리 에이
078 단쥬로 할복 사건 1959 ; 도이다 야스지
079 거대한 환영 1962 ; 도가와 마사코 / 국내 소개된 작품은 "레이디 킬러"
080 마리오네트의 덫 1977 ; 아카가와 지로 / 유명세에 비하면 작품은 사실 좀 별로라는 생각이...^^ (*국내 출간, 쓰레기였습니다)
081 완전범죄 1933 – 오구리 무시타로
082 내일 날씨로 해두게 1983 ; 오카지마 후다리
083 삼중노출 1964 - 츠즈키 미치오
084 살아나는 황금늑대 1964 ; 오야부 하루히코
085 어두운 낙조 1965 ; 유키 쇼지
086 인간의 증명 1975 ; 모리무라 세이이치 / 어머니.. 그때 그 밀짚모자...
087 유령 열차 1976 - 아카가와 지로 / 아마 데뷰작이죠? (*국내 출간,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088 뺑소니 1969 ; 사노 요
089 유괴작전 1962 - 츠즈키 미치오
090 비합법원 1969 ; 후나토 요이치
091 장미여자 1983 : 가사이 기요시
092 스탈린 암살 계획 1978 ; 히야마 요시아키
093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 1983 ; 기타가타 겐조
094 돌밑의 기록 1948 - 오시타 우타루
095 추락 1958 ; 다카가와 교
096 우리들의 시대 1978 ; 구리모토 가오루
097 호크씨의 타향의 모험 1983 ; 가노 이치로
098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 1984 ; 시마다 소지 /보고 싶어요;; (*국내 출간)
099 50만 년의 사각 1976 ; 도모노 로
100 살인에의 초대 1973 ; 텐도 신

2014/03/22

고르고 13 1~30 - 사이토 타카오 : 별점 2.5점

고르고 13 - 30 - 6점
사이토 타카오 지음/아선미디어

"고르고 13에 대해서"

전설의 만화지요. 관련 글을 읽고 포스팅합니다. 제가 읽은건 국내 출간된 전 30권 버젼입니다.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작품 내에서 선정한 베스트 에피소드 모음집이라고 소개되네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냉정하고 나쁜 놈인지는 몰랐는데 대단하더군요. 아이건, 여자건, 노인이건, 죽여야 한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입니다. 피해자가 불쌍한 경우 - 예를 들어 정말로 선한 사람이지만 악당에게 노려진 상황 - 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뢰를 고르고 13이 수락하면 그냥 죽는거에요. 암살자가 피해자에게 동조해서 악당들을 처단한다는 반전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치료해준 의사의 아버지까지 죽여버리니 말 다했죠.

보통 이런 류의 콘텐츠에서 봤었던, 숙적이 친구가 된다던가, 목숨을 노리던 여자가 사랑에 빠져 애인이 된다던가 하는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비슷했던 게 "스파르타커스"라는 동종 업계 경쟁자와 누가 최고인지 한판 승부를 겨루고, 그 승부가 돈 많은 부자들의 유흥거리였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죽어가는 스파르타커스의 의뢰를 받아들여 부자들을 처치한다는 것 정도? 아주 약간 스파르타커스와의 유대감이 느껴지는, 그나마 인간적인 에피소드였습니다.

게다가 세계 최고의 저격수라는 것은 알았지만, 먼치킨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의 인간 병기에다가 못 하는 게 없는 엘리트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군대를 상대로도 이길 뿐 아니라 거의 웬만한 것(예를 들자면 등산 등)은 해당 분야의 프로를 능가할 정도의 실력자로 묘사되거든요. 특정한 에피소드에서는 과장이 심해서 이게 개그 만화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실제로 개그적으로 패러디도 많이 되었죠.

이런 점에서는 "분노의 늑대" 오가미 잇토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암살 따위를 하지 않아도 먹고살기는 전혀 어렵지 않을 텐데, 왜 위험한 삶을 살아가는지 살짝 궁금해집니다.

아울러 추리적인 요소가 가미된 에피소드도 인상적이었는데, 고르고 13의 과거를 살짝 밝히며 일종의 순간이동 트릭이 등장하는 "세리자와 일가 살인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루미놀 검사 등 기본적인 현장 검증을 망각한 경찰의 실수가 눈에 거슬리지만, 내용 자체는 실제로도 있었던 사례인 만큼 제법 설득력 있었어요.

주인공 직업에 걸맞게 의뢰를 수행하기 위한 디테일이 잘 드러나는 에피소드들도 재미있습니다. "자칼의 날" 같은 이 바닥 고전이 떠오를 정도에요. 예를 들어 철통같은 보안으로 이동 중인 중국인 망명자를 암살하는 에피소드의 경우, 고르고 13이 레즈비언 킬러의 정체를 알아낸 뒤 레즈비언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남성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제압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그 외에도 널리 알려진 여러 가지 사실들 — 절대로 악수를 하지 않음, 누군가 자신의 뒤에 서면 응징함, 의뢰를 위한 방법 등 — 도 실제로 보니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장기 연재가 될 만한 작품이냐 하면 그건 잘 모르겠고, 소문만큼이나 국제 정세를 잘 다루었냐 하면 딱히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킬링타임용으로는 적절한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전설의 작품을 실제로 접한 기쁨도 크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0/04/27

만화제국의 몰락 - 니시무라 시게오 / 정재훈 : 별점 3점

만화 제국의 몰락 - 6점
니시무라 시게오 지음, 정재훈 옮김/스튜디오본프리

"안녕 내 청춘의 소년점프"라는 제목으로도 잘 알려진 전(前) 소년점프의 편집장 (3대째)이었던 니시무라 시게오씨의 자서전입니다. 수년전 번역 출간되었는데 우연찮게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점프 초창기 연재작가였던 작가 우메모토 사치오 장례식 이후 자서전을 쓸 것을 결심하는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소년 점프의 창간부터 저자가 편집장을 역임했던 80년대까지의 이야기가 주로 펼쳐지며 이후 600만부 시대를 지나 몰락까지의 간략한 후기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소년 점프 편집부의 모토라던가 원가 등 잡지의 운영방식에서부터 편집부의 소수정예 체계라던가 "전속" 및 "인기투표"로 대표되는 가혹한 작가관리, 작가 발굴을 위한 신인들의 기용 방법 등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여러 인간관계가 얽힌 편집부 분위기는 어땠는지를 그야말로 현장의 입장에서 상세하게 전해주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죠.

그 외로 모토미야 히로시라던가 나가이 고에서 시작해서 죠지 아키야마, 쿠루마다 마사미, 테라사와 부이치, 유데 다마고 등의 작가들에 대한 여러가지 일화들과 "사나이 골목대장", "파렴치 학원", "서킷의 늑대", "닥터 슬럼프" 등 당대의 히트작에 대한 이야기도 확실히 재미있었습니다. 특히나 저자가 모토미야 히로시를 데뷰시키고 첫 히트작 "사나이 골목대장"을 세상에 내 놓은 장본인이라 관련 이야기가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생각하고는 좀 다른게 제목의 "몰락"은 나오지 않고 사실 약간 언급되는 몰락의 과정 역시나 지금은 이런 저런 매체를 통해 많이 접한 내용들이라 크게 새로운 것도 없었습니다.
덧붙여 저자의 비겁하고 자기방어적이며 권위주위적인 모습이 많이 비추어지는 것은 좀 불편했어요. 예컨데 전속제도와 같은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책임을 모조리 전임 편집장에게 떠넘긴다던가, 막판에는 줄타기의 와중에 밀려난 듯한 모양새인데 그것을 자기가 더러워서 떠난 것 처럼 묘사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그러했는데 역시 사람사는 곳은 그게 어디던 똑같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확실히 만화 잡지를 만드는 현장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소개한다는 측면에서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만화 "바쿠만"을 좋아한다면 편집자 Side와 작가 Side를 비교해가면서 읽어도 재미있겠더군요. 취향을 굉장히 탈 책이긴 하지만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05/07/18

끝없는 추적 (追いつめる) - 이쿠시마 지로 / 이경재 : 별점 3점


이제는 대기업의 풍모마저 느껴지는, 고오베의 항구를 장악하고 있는 하마우찌 구미를 처단하기 위해 형사부장 시다 시로오는 경찰 본부장 구사야나기의 은밀한 지시를 받고 행동에 나섰다. 시다의 첫 타겟은 하마우찌 구미의 간부 아오다니였다. 
구와다 살해 혐의로 아오다니의 검거에 나섰지만, 검거 도중 시다는 동료 형사 노리마쓰를 쏘고 말았다. 검거마저 실패한 탓에 형사를 그만 둔 뒤, 가족까지 잃은 시다는 혼자서 하마우찌 구미에 대항하기 위해 나섰다. 
사다의 끈질긴 추적으로 아오다니 검거에 성공했고, 이어 구사야나기 본부장이 발족시킨 특수 대책반의 활동으로 아오다니를 통해 하마우찌 구미의 경영을 책임지던 오쿠다마저 체포함으로써, 하마우찌 구미는 결국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베스트셀러 작가 이쿠시마 지로의 작품입니다. 나오키 상까지 수상했었네요.
하드보일드 분위기를 풍기지만 하드보일드 추리물은 아닙니다. 캐릭터나 전개 방식이 니시무라 쥬꼬나 오사와 아리마사가 연상되는, 구태여 장르 구분을 하자면 "하드보일드 풍 모험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의 시다 시로오의 수사 방식은 "혐의자를 협박하거나 때린다 >> 혐의자가 진실을 말한다 >> 진실을 추적해서 다른 혐의자를 잡는다 >> 다시 혐의자를 협박하거나 때린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인간 관계 속에 진실이 숨어있는 하드보일드 추리물과는 다르게 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추리라는 것도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건 자체도 단순하고, 일개 개인과 거대 조직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별로 숨길 것도 없고요.
주인공이 복수심으로 혈혈단신 외로운 늑대로 싸워나간다는 점에서는 과거 사무라이 활극이 연상되며, 그래서 더욱 더 모험소설처럼 보이는 것 같네요.

이렇게 비록 추리적 요소는 거의 없지만 "재미"라는 기본 요소에 굉장히 충실하다는 것도 특징입니다. 거대 조직 하마우찌 구미의 치밀한 묘사를 비롯하여 협박과 공갈, 폭력 및 각종 상납 등 여러 범죄에 대한 디테일이 워낙 뛰어나서 진부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속에 독자를 빨아들이는 매력이 대단하거든요. 작가가 나가사키 출신이라는데, 항구 도시 묘사는 본인 체험에서 우러나온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이러한 재미에는 하드보일드에 걸맞게 외롭고 고독하면서도 터프하고 냉소적인 유머를 갖춘 쿨가이 시다 시로오의 매력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예를 들자면 산토리 위스키를 찾는 장면 같은 디테일에서 시다의 고집이 잘 드러나 보여 마음에 들었어요. 이야기속에 작게나마 나름 반전이 있는 것도 이채로왔고요.

한마디로 결론내리자면 추천작입니다. 현대의 일본식 하드보일드 액션 스릴러의 원조격, 할아버지 뻘로 한번쯤 읽어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허무하긴 하지만 여운을 남기는 엔딩이 인상적이었는데 뭔가 속편을 암시하는 듯 해서 조사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후 10여편의 시다 시로오 시리즈로 이어졌네요. 1972년에 영화화 되었는데 구하기는 어렵겠지만 영화도 궁금합니다.

2024/02/23

1030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점

1030 - 4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포틀랜드를 배회하던 잭 리처는 은행 통장에 입금된 1,030달러 - 부대에서 긴급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코드명 - 를 통해 옛 부대원 니글리를 만났다. 니글리는 리처에게 프란츠의 죽음을 알리며, 복수를 위해 옛 부대 재결성을 부탁했다. 그런데 남은 5명의 부대원 중 오도넬, 딕슨만 부름에 답했고 스완, 산체스, 오로스코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차례대로 프란츠처럼 사막에서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단서들을 모아나가던 리처 부대는 군수회사 뉴에이지의 보안부서 책임자 라메이슨이 범인이라는걸 알아냈다. 신무기 미사일 리틀 윙을 불량품으로 처리한 뒤, 폐기한 것으로 속이고 외국 테러리스트에 팔아넘기려던 라메이슨의 행각을 눈치챈 스완이 가까운 곳에 있던 옛 부대원들을 불러모아 공격을 대비했지만, 오히려 라메이슨에게 당하고 만 것이었다. 라메이슨이 경찰일 때 동료였던 보안관 커티스 모니가 스완 일행을 속인 뒤 뒤통수를 쳤기 때문이었다.
같은 방법으로 오도넬과 딕슨도 잡혔지만, 리처는 반격해서 라메이슨 일당을 철저하게 박살낸 뒤 미사일을 구입한 테러리스트도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울어 봐야 소용없소. 눈물 따위에 마음이 약해질 만한 사내는 다른 곳에 가서 찾으시오."
"네 삶의 마지막을 즐겨라. 와인 한 병을 사고 DVD를 빌려라. 하지만 박스로 사지는 마라. 네게 남은 시간은 이틀 정도니까. 그것도 길어 봐야."

잭 리처 시리즈 11번째 작품. 원재는 "Bad Luck & Trouble"입니다. "불운과 문제"라고 직역하기에는 폼이 없어서 바꾼 듯 한데, 바꾼 제목도 나쁘지 않네요.
기존 시리즈처럼 한 마리 외로운 늑대 잭 리처의 활약을 다루지 않습니다. 죽은 전우들을 위해 옛 전우들을 모아 복수를 진행한다는 복수극이거든요. 부대가 뭉쳤기에 복수극도 군사 작전에 가깝게 묘사됩니다. 전직 엘리트 군인들, 복수극, 군사 작전이라는 키워드만 놓고 보면 "크리시" 시리즈가 떠오르네요. "익스펜더블"과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이런 변주가 좋게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이 시리즈의 또다른 매력인 잭 리처의 추리력이 발휘될 여지가 거의 없는 탓입니다. 스완의 문진을 가지고 베런슨의 거짓말을 꿰뚫어 본다던가, 프란츠가 도움을 요청한게 아니었다는걸 깨닫는 장면처럼 소소한 추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프란츠가 남긴 문서가 '근무일' 기준이었다는 것도 꽤 괜찮았고요.
하지만 이외에는 추리는 커녕 리처의 무능함만 도드라질 뿐입니다. 특히 '왜 전 엘리트 헌병대원 4명이 허접한 녀석들에게 잡혀 죽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제대로 풀어내지 않는게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급 전문가들이라 웬만한 적들이 진압하는게 힘들다면 답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유일하게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산체스가 배신했거나, 누군가 믿었던 사람이 뒷통수를 쳤다는 이야기지요. 이렇게 '후더닛' 말고 '와이더닛'으로 접근했어야 했던 사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대신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일당들에게 당한게 아닐까 헛다리짚는건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6,500백만불을 카지노에서 따려면, 작중 설명되는대로 엄청난 조직과 돈이 필요했을겁니다. 쉽게 덮기도 힘들었을테고요. 상식선에서 불가능한 이야기를 조사까지 한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보안관 모니가 라메이슨의 옛 동료였고, 프란츠 일행은 모니에게 체포된 뒤 살해당했다는 반전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무려 4명의 전 엘리트 군인들이 보안관 1명에게 제압당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워요. 모니가 총을 들고 있었긴 했지만, 잭 리처 본인도 그간의 시리즈는 물론 이 작품 내에서도 권총에 맞서는 장면은 수도 없이 보여주었는데 말이지요. 반격 시 최소한 한 명이 죽더라도 남은 세 명은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리처와 니글리는 LA의 교통 체증으로 모니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고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커티스 모니가 오도넬과 딕슨을 먼저 제압한 뒤, 리처와 니글리를 태연히 기다렸다가 잡아간다는 생각없이 현장을 뜰 정도로 바보였다는 것도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악당들의 매력도 현저히 처집니다. 기본적인 능력부터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탓입니다. 라메이슨 일당이 아무리 전직 경찰로 10년 이상 경력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 흉기에 가까운 전투집단 군인들과 대등한 싸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본거지에서 맥없이 쓸려나가고 6,500만불까지 빼앗기는걸 보면 10년 동안 경력은 뭘로 쌓았나 싶고요. 리처와 니글리의 습격은 충분히 예상하고 대기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모니의 도움으로 뒷통수를 치는 것 외에는 너무 무력한지라 황당할 정도였습니다. 어느정도 실력자였어야 좋은 대결 구도가 성립했을텐데 이래서야 최소한의 긴장감조차 불러오기 힘듭니다. 악당들이 알아서 단서를 제공해주는 것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어요. 모니가 오로스코의 메모를 건네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라메이슨의 부하가 리처 일행을 라스베이거스에서 습격하지 않았다면 진상과 정체가 드러나는데 더 오래 걸렸을겁니다.
리처의 부대원들도 마찬가지에요. 별다른 매력도 없으며 결정적 순간에는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하는 것도 없습니다. 숫자의 귀재라는 딕슨의 특기는 리처와 동일하기도 하고요. 그나마 자금을 대는 니글리 정도만 약간의 활약을 보일 뿐입니다.

설명도 부족합니다. 라메이슨 일당이 이미 6,500만불을 받았는데 뉴웨이브라는 회사에 남아 근무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리틀 윙을 빼돌린게 들통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돈을 받은 이후인데 그게 문제가 될까요? 최소한 라메이슨 혼자만이라도 몸을 빼는게 당연했어요.
그리고 커티스 모니의 부하 브란트는 리처를 미행하고 있었습니다. 모니와 라메이슨 일당이 모두 살해당했다면, 브란트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았을거에요. 리틀윙 거래는 뉴웨이브 회사와는 관계가 없기에 ,잭 리처가 뉴웨이브를 공격해서 불을 지른 범죄 행위는 당연히 수사가 되었어야 했고요. 라메이슨 일당의 부하들 모두가 리틀 윙 거래에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그들 모두를 살해한 것 역시 엄연한 범죄입니다. 그런데도 브란트가 수사에 나서지 않는건 물론이고, 중반 이후 사라져서 등장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복수극도 시시했습니다. 헬기에 숨어있다가 라메이슨 일당을 밖으로 떨구는게 전부인 탓입니다. 이전에 리처가 라메이슨에게 "너는 곧 우리를 만나게 될 거다. 그럼 함께 헬리콥터를 타자. 네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번엔 한 가지 크게 달라질 게 있다. 내 친구들은 반항했을 것이다. 내 생각이지만. 하지만 년 절대 그러지 않을 거다. 뛰어내리게 해달라고 애걸복결할 거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눈물 콧물 있는 대로 짜낼거다. 내 그것만은 틀림없이 약속하마."말했기에 보다 처절한 복수를 기대했는데 실망스러웠어요. 예정된 위험한 테러보다 복수를 먼저 선택한 리처의 모습도 당연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졌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보다 살짝 높은 2점입니다. 스케일은 크지만 리처 시리즈의 매력은 느끼기 어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