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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3

중국 초청 SF 단편들

중국 SF로부터의 초대장

자주 찾는 블로그 이웃 잠보니님 글을 통해 소식을 듣고 읽어보았습니다.중국 SF는 이전에 "삼체" 를 꽤 재미있게 읽어서 기대도 되었고요.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여섯 편의 단편 중 딱 한 편, "기아의 탑" 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가 수준 이하인 탓입니다. 설정은 그럴듯하지만 최소한의 설명도 없고, 이야기도 편의대로 흘러가기 때문이지요. 뭔가 있어보이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과는 딱히 괜찮다고 보기 어렵네요. 과거 모뎀 시절 유행했던 함량미달의 한국 SF 단편들이 떠오르는, 그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독특하다는 점은 주목할만 하지만 구태여 찾아 읽으실 내용은 아닙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기아의 탑" 

추락한 우주선의 생존자들이 먹을 것 하나 없는 수도원에 고립된 상황을 그립니다. 생존자들이 식인으로 치닫는다는 전개는 뻔하지만,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라는 약간의 수수께끼와 "진동으로 가득 찬" 행성이라는 SF적인 설정이 잘 결합되어 있는 덕분에 충분한 재미를 전해 줍니다.
수도원에서 생각을 증폭시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나름 철학적이면서도 신선한 설정과 이를 흉폭한 야성이 무위로 되돌린다는 결말도 괜찮았고요. 그게 뭐가 되었건 '최후의 말 한마디'는 들어 주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줍니다.

그런데 이전에 거주하던 수도사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설명해주지 않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생각을 증폭시켜 열반에 이르렀다는 설정일까요? 또 생존자들을 습격하는 괴물의 정체도 뭔가 복선처럼 풀어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테고요.

그래도 중국 SF의 저력을 확인하는데는 문제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고래자리를 본 사람" 

행위 예술가인 아버지는 딸의 숙제를 위해 '만들어 낸' 행성이 '진짜' 라고 주장했지만, 그 주장을 증명하지 못해서(혹은 증명하기 위해서) 모두의 지탄을 받는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딸 릴리안은 아버지와 떨어져 성장하여 우주 비행사가 된 후, 웜홀을 통과하여 고래자리 델타를 직접 보고 나서야 아버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과학이 기반이 된 행위 예술이 등장하고, 주인공 릴리안이 웜홀을 통과하는 우주 비행사라는 등 SF적인 설정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진의를 나중에서야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이니까요. 저 역시 딸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조금 뭉클하게 다가오긴 했지만, 별로 SF 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아버지가 어떻게 고래자리 델타성을 보았는지에 대해 설명되지 않는겁니다. 이래서야 본격 SF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지하철의 충격" 

사람으로 가득찬 출근길 지하철이 시공을 초월하여 달리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갖가지 기묘한 현상을 그리는 작품으로 초반 설정은 참신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을 타 본 적이 있는 사람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공포가 리얼하게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암벽등반가 샤오지가 열차 밖으로 나가 앞으로 이동하면서 목격하는 다른 차량의 상태, 현상에 대한 묘사부터 이야기는 그야말로 폭주합니다. 이 모든게 초자연적인 무언가에 의한 진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내용인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리 봐도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대사에서 특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무슨 호접몽도 아니고...

기묘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이며 이야기로 성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중국 고전 기담을 연상케 하는데, 고전 기담 쪽이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는 더 높습니다. 점수를 주기 어려운 망작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인류의 여신 G" 

선천적 결함을 지닌채 태어나 정상적 성생활, 출산이 불가능했던 G는 기도를 통해 전신 성감대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그녀는 상류층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나,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대중의 정점에 서는데...

일본 에로 만화에서 접했음직한 설정이 등장하여 인간의 해탈, 전도와 좌절, 한 단계 위로의 진화라는 일종의 종교 프로세스를 섹스에 빗대어 풀어내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딱히 신선하거나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SF로서는 함량 미달입니다. G의 변신은 기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정부터 G가 대중을 사로잡는 과정과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서 설득력이 전무한 탓입니다. 결국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말한 뒤 과격 종교집단에 쫓기는 신세가 된 그녀에게 일어난 결말 역시 잘 이해가 되지 않고요. 고자와 석녀가 함께 절정에 이르렀다?

애매하게 종교적인 내용을 넣지 말고, 불감증에 시달리던 인류에게 전신 성감대 미녀가 등장하여 인류를 자위만으로도 충분한, 한단계 더 높은 쾌락의 세계로 이끈다는 식으로 가는게 더 화끈하고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탈피" 

탈피를 거듭하는 혈인이지만 약물의 힘으로 탈피 충동을 억누르며 배우로 성공한 공은 투라는 다른 혈인에게 연기를 가르쳤다. 투도 배우로 성공했는데, 투는 배우로서의 삶이 아니라 탈피를 택하고 말았다. 공도 탈피에 대한 욕망은 크지만 탈피 후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알지 못해 주저하는데...

이종족 판타지로 9번의 탈피를 끝내고, 혈인으로서 죽어가느냐 아니면 자신의 본능을 숨기고 인간 세계에서 살아갈 것인지 선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딱히 재미는 없습니다. 늑대 인간이나 뱀파이어로서의 삶을 선택하느냐!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유사 딜레마들과 구분될만한 내용도 없고요.

'배우'라는, 일종의 가장된 삶의 대표격인 직업을 선택한 정도가 조금 신선했지만 그냥저냥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우주표 담배" 

우주정거장만한 담배를 만든다는 이야기로 스케일 하나 만큼은 높이 사 주고 싶습니다. 흡연 인구가 엄청난 중국에서 생각했음직한 내용이네요. 이 모든게 환상이고, 담배는 값싼 대용품 센티멘털 니코틴에 밀려났다는 결말도 뻔하지만 괜찮았고요. 전통적인 산업의 종말을 블랙 코미디 식으로 그린 느낌인데, 바로 얼마전의 미국 토이저러스 오프라인 매장 폐쇄 사태가 떠오르더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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