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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1

의뢰인은 죽었다 - 와카타케 나나미 / 권영주 : 별점 3점

의뢰인은 죽었다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북폴리오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과 "네 탓이야" 로 친숙한 와카타케 나나미의 신작 단편집. "네 탓이야"의 주인공 프리터 하무라 아키라 주연의 단편 9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읽고난 감상으로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은 생각하고는 많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단편집은 제가 기대했었던 "추리물"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볼 때 이야기의 전개나 구조는 추리물적인 성격이 강하고, 대체로의 내용들도 범죄와 호러를 근간에 깔고 있는 등 광의의 의미로서 추리물이라고 부르기에는 전혀 문제는 없습니다. 그래도 범죄가 등장하고 그 범죄를 파헤쳐서 숨겨진 진상을 알아낸다던가, 교묘한 범인의 트릭을 간파해서 진범을 찾아낸다는 등 전통적인 추리의 영역을 벗어나 있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죠. 작가의 전작을 통해 이러한 추리적인 요소를 많이 기대했던 저에게는 정말 뜻밖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대하고 달랐다고는 해도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유는 당연히 작품들이 재미있었기 때문이죠.

먼저 전통적인 추리적인 면만 놓고 본다면 표제작이기도 한 "의뢰인은 죽었다"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갑자기 날아온 난소암을 알리는 통지서에 당황하던 여자가 우연찮게 알게된 하무라에게 관련된 내용을 물어본 뒤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어 하무라가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이야기로 통지서라는 존재 자체가 좀 작위적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동기"와 일련의 과정이 아주 합당하면서도 설득력있게 짜여져있는 좋은 작품으로 충분히 기대에 값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단편인 "시인의 죽음"에서부터 등장하는 하무라의 친구 아이바 미노리가 탐정역을 소화하는 이색작 "여탐정의 여름 휴가"도 제목 그대로 여름휴가를 보내는 호텔에서 벌어진 실종사건을 다룬 이야기로 설정부터 완전 고전 영국식 추리물 티가 팍팍나는, 단순하지만 "복선"과 "단서", 그리고 "트릭"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추리물로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던 것이, 이러한 추리물을 포함해서 이 단편집의 작품들은 일관되게 "자살"이라는 죽음을 주요 테마로 삼고 있다는 것과 이러한 자살 행위 뒤에 "인간의 악의"가 굉장히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들고 싶네요. 그것도 친족이 관련된 사소하지만 무서운 악의를 말이죠. 정도가 지나쳐서 작가가 친족에게 큰 스트레스를 받아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어쨌건, 이러한 악의가 사소한, 또는 일상속에 묻힌 사건 배후에 깔려있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살짝 소름이 돋는 내용들로 짜여져 있기에 굉장히 몰입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앞서 언급한, 친구 아이바 미노리의 약혼자였던 공무원이자 시인이었던 인물의 자살 사건 뒤에 감추어진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아버지의 속셈을 그린 "시인의 죽음"과 한 평범한 주부가 의뢰한 그녀 친구의 급작스러운 자살사건에 대한 이야기인 "내 조사에 봐주기는 없다"가 대표적으로 이 두 작품은 그야말로 일상계 악의 범죄소설이라 명명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사소한 악의가 타인에게 어떻게 작용되는지를 철저하게 표현하고 있거든요.

그 외에도 은인과 불륜관계에 빠진 아내를 데리고 귀향한 화가에 대한, 조금은 뻔한 내용이지만 충분히 설득력있는 일상계 호러물 "철창살의 여자"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작위적인 무대장치와 작중에 "수없이 많은 모델이 견디지 못해서 교체되었다" 라는 설정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사건의 진상을 모델들이 알 수 밖에 없으니까요) 충분히 공포를 안겨다 주는 작품이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의 경우는 실제 등장하는 그림이 비쥬얼로 보여지는 영상물로 작업된다면 정말 모골 송연한 전연령(?) 호러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드라마화라도 되면 좋겠는데....
작가 특유의 인칭과 시점을 오가는 묘사력이 잘 표현된 "아베마리아"도 좋은 작품이었고요.

아울러 주인공 하무라의 독특함. 그 어떠한 일이라도 방관자적이면서도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내 조사에 봐주기는 없다"같은 집요함도 재미의 핵심 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전작 "네 탓이야"와 비교한다면 단독 주연(?) 이면서 연륜이 쌓인 덕인지 훨씬 캐릭터가 확실해지고 매력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정말 실존할 것 같은 여탐정 캐릭터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단, 일종의 스토리라인을 설정한 듯 첫번째 작품인 "짙은 감색의 악마"와 마지막 작품 "편리한 지옥"이 서로 연결되며 이야기가 시작되고 마무리되는데 이 두 작품이 단편집과 너무나 이질적으로 느껴진 것 하나는 아쉽습니다. 평범한 일상속에서의 악의라는 테마를 일관되게 끌고나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일종의 "마인"과도 같은 악역의 생뚱맞은 등장으로 일상성과 평범함, 그리고 악의라는 중요 이야기축이 통째로 무너져 버려서 혼란스러워지더군요. 예를 들자면 그런대로 괜찮은 추리물이었던 "케이조쿠" 에서 "아사쿠라"라는 마인의 등장으로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느낌 그대로였어요. 그냥 하무라라는 캐릭터와 일상에서의 악의만 가지고도 충분히 이야기가 가능했는데 왜 이러한 악역이 등장해서 이야기에 개입했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충분히 이름값은 하는 작품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 작품은 하무라 아키라가 등장하는 첫 장편이라는데 특유의 일상성을 잘 살린 작품이면 좋겠습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2015/11/07

악의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3점

악의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가 히다카 구니히코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발견자 중 한 명인 노노구치 오사무는 히다카의 오랜 친구인 아동 소설가이자 전직은 교사였다. 마침 사건을 맡은 형사인 가가 교이치로의 교사 시절 동료이기도 했다. 노노구치는 자신의 직업을 살려 사건에 대한 견해를 일종의 수기로 작성했고, 가가는 이 수기를 빌려 읽으면서 진범이 누구인지를 추리해 내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입니다. 1996년 발표된 작품이네요.

범인 노노구치 오사무의 수기와 가가 형사의 기록이 교차 편집되는 전개 방식과, 진범과 알리바이 조작 트릭이 앞부분 1/3 지점에서 밝혀진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렇게 진범이 빨리 밝혀지는 전개는 작품을 완벽한 와이더닛 계열로 만들고요.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가 아니라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실제로 작품의 나머지 2/3는 온전히 노노구치의 동기와 숨겨진 진상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왜?"가 정말로 대박입니다. 충격도 충격이지만 노노구치가 교묘하게 수기와 증언을 조작해서 수사의 방향을 의도한 대로 흐르게 만드는 솜씨가 정말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제일 첫 부분의 고양이 죽이기에서부터 히다카의 캐릭터 형성이 자연스럽게 시작된다는게 좋은 예입니다.

또 노노구치가 고스트 라이터가 아니며 그의 증언이 모두 거짓이라는건 눈치채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히다카의 작품은 사실 자신이 쓴 것이다!라는 명예욕이 아니라, 오래전 중학생 때 있었던 여학생 성폭행 사건과 왕따 사건이 진짜 동기라는 결말은 상당히 놀라웠어요. 이 동기를 밝히는 데 가가가 수집하는 여러 가지 증언들이 토대가 되는 식으로 등장하는 장치와 단서들이 교묘하게 짜여져 있고요. 결정적 단서가 나이든 폭죽 장인의 증언이었다는 것 처럼요.
진범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교묘하게 숨기는 노노구치의 수기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작품 전체가 거대한 서술 트릭이라는 것도 비슷하네요. 여튼, 한 편의 추리물로의 완성도가 아주 높은 편입니다.

아울러 가가가 고등학교 교사를 2년 했는데 그만두게 된 계기가 왕따 사건이었으며, 그 왕따 사건이 본편 이야기와 슬쩍 엮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졸업"에서는 분명히 교사를 지망했었는데, 왜 갑자기 형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린 거죠. 개인적으로는 왕따로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을 억지로 등교시킨 가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기에 역시나 선생에는 맞지 않는 캐릭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나 단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일단 계획이 지나치게 노노구치의 시점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례로 히다카 하츠미의 사진을 경찰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렇지 않고 경찰이 멍청해서 노노구치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때의 대비책이 없거든요.

또 베껴 쓴 노트만 가지고 자신이 작품을 썼다고 주장하는건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오래 활동한 프로 작가가 아무런 증거나 데이터 없이 작품을 쓰지는 않았을 테고, 그만큼 많은 작품이라면 충분히 히다카가 썼다는 증거나 관련해서 증언할 인물은 여럿 있을 테니까요. 실제로도 히다카 리에가 그렇게 증언하기도 했죠. 아내라는 것 때문에 증언의 가치가 폄하된 감이 없잖아 있는데 이런 증언 몇 개만 모여도 노노구치의 급조한(?) 데이터 정도는 눌러버릴 힘은 충분했을겁니다.

마지막으로 노노구치의 수기에 오류가 많다는 것을 독자에게 공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은 점도 아쉬웠던 부분입니다. 물론 이 점은 이 작품이 후더닛 계열의 정통 본격물이 아닌 만큼 큰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요.

그 외로, 가장 큰 동기인 "악의"라는 것에 대한 설명이 좀 부족하긴 합니다. 노노구치의 속내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탓이 큰데 독자가 읽은 그의 속내, 즉 수기는 모두 거짓이라 딱히 와닿을 수가 없거든요. 오랜 시절 쌓아온 열등감과 거기에서 비롯된 악의라는 게 아주 설득력 없지는 않지만 본인이 아닌 남의 입으로 듣는 정보일 뿐이니까요. 또 아무리 "악의"가 쌓였다 해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요? 어차피 자신이 시한부 인생으로 얼마 살지 못하면 과거 사건이 밝혀질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니 이렇게 복잡한 계획을 짤 필요도 없었을 테고 말이죠.

물론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유는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니 딱히 단점은 아닙니다. 시티헌터 사에바 료의 아버지이자 유니온 데오페의 총수도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 어차피 이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했었죠 (아마도.... ).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 말해드린 노노구치의 계획에 지나치게 의존한 플롯에 약간 감점합니다만 여태까지 읽었던 가가 형사 시리즈, 아니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고 수준의 재미와 깊이가 있는 작품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모든 추리 애호가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런 걸 보면 어린 시절 나쁜 놈은 커서도 변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는군요.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힌 놈을 옛 동창이자 친구였기 때문에 다시 받아준 히다카의 말로를 보면 역시나, 확실히 사람은 가려서 사귀어야 할 것 같습니다.

2004/11/09

옥수수밭의 아이들 - 스티븐 킹 : 별점 2.5점

옥수수밭의 아이들 - 6점 스티븐 킹 지음/영웅

스티븐 킹은 작품성은 그닥 인정하지 않지만 재미랄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재주 하나는 탁월하다 여기는 작가입니다. 다른 책도 몇 권 구입했었는데 이번에 전집이 새로 출판되었더군요. 하지만 집에 이런 저런 스티븐 킹 단편집이 3권이나 있어서 이번에 새로 나온 정식 번역본은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 역시 번역 출판된 책이 아닌 예전에 해적 출판했던 스티븐 킹 단편집입니다. 그래도 정식 번역본의 목차를 조사해 보니 제가 가지고 있는 단편집 3권의 내용이 거의 그대로 들어 있어서 별로 구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헌책방 만세!

여튼, 간만에 꺼내 읽은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작가 서문 : 광기와 공포에 관하여"
  • "그들은 때때로 다시 돌아온다"
  • "부기맨"
  • "악의 다리미"
  • "가짜봄"
  • "예루살렘의 땅"
  • "벼랑 끝에 선 사나이"
  • "옥수수밭의 아이들"

정식 번역본이 아닌 티를 내듯이 번역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은 것이 조금 거슬리며, 특히 인명이나 지명이 일어 중역의 티를 팍팍 내 주고 있다는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뭐 새책 산것은 아니니 불평은 여기까지!)

전체적으로는 스티븐 킹의 전형적인 룰을 따르기보다는 드라마에 신경쓴 단편들이 실려 있습니다. 스티븐 킹 특유의 잔인한 묘사가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 점 역시 그러한 점을 뒷받침하고요. 덕분에 호러 소설 초심자가 읽기에 적당한 수준의 작품들입니다. "금연 주식회사" 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면 더욱 좋았겠지만요.
개인적인 베스트는 "악의 다리미"와 "벼랑끝에 선 사나이" 입니다. "악의 다리미"는 설정과 스티븐 킹의 전형을 잘 따르고 있는 점에서, "벼랑끝에 선 사나이"는 드라마에 굉장히 포커스를 맞춘 심리 단편이라는 점에서 추천할만 합니다. "옥수수밭의 아이들"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결국 등장해서 빼기는 했지만 좋아하는 작품이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그야말로 무난한 단편집입니다. 공포가 조금 약한 편이긴 한데 개인적으로 읽을만한 작품들이었습니다. 무난한 만큼 호러, 장르소설 입문자분들께 권해드립니다.

작품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돌아온다>
영화화된 작품이 30여편에 이르는 헐리우드가 사랑하는 작가 답게 90년대 초 영화로 만들어졌던 단편. 어린시절 형을 살해했던 건달들이 20여년이 지나서 자신이 부임한 고등학교에 한명씩 전학와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는 내용인데 이야기 자체는 굉장히 평이한 편입니다. 마지막에 "주술"을 써서 그 건달들을 퇴치하는 결말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고요. 그래도 스티븐 킹 입문으로 적당한 수준의 공포와 재미는 전해 줍니다.

<부기맨>
정신과 의사를 찾아온 한 남자의 독백으로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약간은 특이한 작품. 집 벽장에 숨어있다가 아이들을 전부 죽인 "부기맨"이라는 악령에 대한 공포를 토로하다가 마지막에 그 공포와 대면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TV시리즈 "환상특급" 류의 반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상으로 만들어지면 더욱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악의 다리미>
악마가 깃들게 된 세탁기계에 대한 내용인데 특이하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기계에 악마가 깃들게 된다는 상상력도 대단하지만 그 과정이 흥미진진합니다. 결국 다리미 기계가 정말 괴물이 된다는 마지막 결론이 약간 어처구니 없긴 하지만 스토리텔러로서의 스티븐 킹의 능력이 정말이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죠.

<가짜봄>
"딸기봄 (스트로베리 스프링)"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작품. "스트로베리 스프링"이라는 지방 특유의 날씨와 맞물리며 주인공에게 대학 학창 시절 벌어졌던 연쇄살인에 대한 기억을 불러 일으킨다는 이야기로 줄거리는 주로 회상 장면을 토대로 진행되는데 "괴물"이나 "악마"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스티븐 킹 작품 치고는 조금 특이했지만 마지막의 반전은 좀 약했습니다. 그냥저냥한 평작이에요.

<예루살렘의 땅>
악마주의 광신자들 교주의 피를 물려받은 가문의 후계자가 광신자들이 거주하던 잊혀진 도시 근처 저택에 살게되며 가문의 과거를 탐색해 간다는 내용. 악마와 광기를 다루는 묘사라던가 조용하게 보여주는 공포가 인상적입니다. 내용의 대부분이 친구에게 보내는 서신 형태로 되어있는 것도 재미있고 간단한 암호트릭이 등장하는 것도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단, 대표작으로 알려져있지만 그 정도 작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네요.

<벼랑 끝에 선 사나이">
공포보다는 심리묘사에 주력한 독특한 작품. 재벌의 아내와 불륜 관계에 빠진 주인공이 재벌의 덫에 걸려 무모한 내기를 하게되는 이야기인데 짧은 시간동안에 벌어지는 복잡한 상황과 심리묘사를 효과적으로 묘사해 내고 있습니다. 스티븐 킹 소설치고는 이례적이지만 "금연 주식회사"같은 시니컬한 맛이 있어서 마음에 들더군요. (물론 "금연 주식회사"같은 멋진 반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옥수수밭의 아이들>
표제작이죠. 꽤 괜찮은 단편입니다. 제가 싫어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여러 설정이 상당히 공포를 잘 이끌어내는 편이거든요. 특히 "옥수수밭"이라는 존재를 공포의 토대로 묘사한다던가 아이들만 살고 있는 도시라는 설정 등이 좋습니다. 마지막에 초자연적인 "옥수수밭 신"이 등장하지 않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말을 이끌어내었으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생각되지만, 뭐 작가 취향이니까요. 영화화도 되었는데 조사해봤더니 원작 소설의 "설정"만 빌려온 전혀 다른 스토리의 작품이더군요.

2021/01/23

주석 달린 셜록 홈즈 6 - 아서 코난 도일, 레슬리 S. 클링거 / 인트랜스 번역원 : 별점 2.5점

주석 달린 셜록 홈즈 6 - 6점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인트랜스 번역원 옮김, 아서 코난 도일 원작/현대문학

드뎌, 주석 달린 셜록 홈즈 마지막 권을 읽었습니다. 1권을 읽고 리뷰를 올렸던게 2009년 3월이니 11년 걸려서 다 읽은 셈이네요. 감개무량합니다. 물론 다른 판본으로 다 읽었던 작품들이기는 합니다. "바스커빌 씨네 사냥개"는 11년 전에 이미 리뷰도 올렸었지요. 그래도 이 판본은 '주석'과 화려하고 다양한 도판을 보는 재미가 크니, 그런 관점에서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작품 "바스커빌 씨네 사냥개"는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작품 탓은 아니에요. 셜록 홈즈 시리즈 중에서도 걸작이라고 하기 충분한, 뛰어난 작품이니까요. 기대했던 주석과 삽화도 풍성하고요. 특히 모티머 박사가 런던에서 외과대학 박물관을 둘러보았다는 대사에 달린, 외과대학 박물관에 대한 긴 주석이 인상적이었어요. 존 헌터의 개인 수집품을 영국 정부가 구입하여 만들어진 장소라는데, 존 헌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의 대니얼 버턴과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에 추가되어도 좋을 주석이라 생각됩니다.
그 외에도 이니셜이 L.L인 여자 로라 라이언스가 처음 언급되는 장면에 달려있는, 로라 라이언스가 1976년 2월 '플레이보이' 모델이었다는 주석은 이 책 주석의 방대함을 상징하는 주석이기도 하고요.
아래와 같은 홈즈가 머물렀을 움막과 비슷한 움막 구조도 등 삽화 외의 도판도 흥미로운 자료였어요.

그렇다면 뭐가 문제냐, 바로 번역입니다. 제목부터가 조금 미묘해요. '바스커빌 씨' 라니요? '바스커빌 가문'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 외 사소하고 자잘하지만 미려하지 못한 번역들이 눈에 많이 거슬렸습니다. 한가지만 예를 들자면, '우정에서 나온 필요성과 훌륭한 형사의 지배적인 성격 때문에 왓슨이 홈즈의 질문에 단순한 사실 진술로 대답하고 싶은 극도의 유혹에 굴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는 175번 주석의 긴 문장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대충 넘어간 설명도 너무 많습니다. 모티머와 헨리 바스커빌 경이 했다는 카드게임 에카르테에 대한 주석이 대표적입니다. 게임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었기 때문입니다. "32장으로 된 피케 카드를 사용하며, 각 수트의 7부터 킹까지에 에이스를 더해서 구성되어 있다. 각 카드의 가치는 휘스트와 비슷하나 킹은 휘스트에서의 잭이나 에이스, 10보다 랭킹이 더 높다..." 라고 설명되는데, 수트는 뭐고, 휘스트는 뭔지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이래서야 '주석'이 '주석'으로 제대로 된 역할을 한다고 보기 어렵지요.

다행히 "공포의 계곡" 번역은 훨씬 낫더군요. 최소한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은 별로 없었습니다. 전체 분량의 2/3를 차지하는 19세기 후반, '맥도너'가 '죽음의 계곡'에서 악당 조직을 붕괴시키기 위해 싸웠던 모험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었고요. 19세기 후반 탄광 지대를 장악한 악의 조직, 주요 등장인물들에 대한 설정, 묘사가 상세하며, 더글러스이자 버디 에드워즈이자 맥머도인 주인공의 활약도 생생하게 잘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펜실배니아 탄광 지대에서 실재로 광부들을 좌지우지했던 '몰리 머과이어스'와, 그들을 붕괴시키기 위해 몰리 머과이어스에 잠입해 활약한 핑커턴 탐정 사무서 탐정 제임스 맥팔런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각색한 덕이겠지요. 정황상 맥머도가 스코러즈를 붕괴시키기 위해 잠입한 탐정일 수 밖에 없는데, 이를 끝까지 숨겼다가 한 번에 터트리는 코난 도일 경의 솜씨도 돋보이고요. 핑커턴 탐정이 악당 조직을 괴멸시키기 위해 스스로 악당이 된다!는 이야기는 콘티넨털 옵과 같은 하드보일드 탐정 모험물의 원조로 보아도 무방할거 같아요.

하지만 문제는 '셜록 홈즈'라는 이름에서 기대해 봄직한 추리 측면에서 볼만한 내용이 없다는 점입니다. 모험 이야기는 물론,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앞부분 1/3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셜록 홈즈가 아령이 하나만 있는게 이상하다며 이를 통해 증거를 찾아내는, 추리적으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납득이 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어요. 바벨 플레이트 중 특정 무게가 한 개만 비어 있었다면 모를까, 아령이 한 개만 있어도 양쪽 근육을 단련하는데에는 큰 문제가 없잖아요? 2개를 한꺼번에 사용하는게 발표 당시의 상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해가 되는 추리는 아니었습니다. 주석에서도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더글러스가 자기를 죽이려 온 테드 볼드윈을 죽인 뒤, 시체에 옷을 입히고 자기가 죽은걸로 위장했다는 진상도 지금 읽기에는 많이 진부했어요. 그리고 계속되는 악의 조직으로 부터의 암살 기도를 막기 위해 연극을 벌인 거라는데, 이것도 말이 안됩니다. 테드 볼드윈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조직도 이상하다고 생각할게 뻔하니까요.

그리고 실화 바탕으로 설득력이 넘치던 맥도너의 과거 활약에 비해, 배후에 악의 조직이 있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죽음의 계곡을 지배하는 악의 조직 '스코러즈'의 모태인 프리맨 조직의 다른 지부는 모두 정상적인 단체라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코러즈가 와해된 뒤에는, 조직적으로 복수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몰리 머과이어스에 잠입하여 붕괴시켰던 핑커턴 탐정 사무소 탐정 제임스 맥팔런은 은퇴한 뒤 편안히 천수를 누렸다고 하지요. 맥도너의 모험 이야기를 드러내기 위해 코난 도일 경이 만들어낸 설정이겠지만, 여러모로 무리수였습니다. 차라리 테드 볼드윈의 개인적인 복수였다는게 더 설득력이 높았을 거에요.

아울러 이 시리즈에서 기대해 봄직했던 화려한 도판도 부족한 편입니다. 주석 외에는 다양한 출판물에 수록되었던 삽화들이 거의 대부분이에요. 영국과 미국 버젼의 문장, 단어 차이에 대한 언급이 주석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도 아쉬웠고요.

그래서 두 편 모두 종합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공포의 계곡"은 추리적으로는 조금 아쉽지만 작품 완성도와 재미에 대해서는 따로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별도로 '주석달린' 책을 구입할 만한 가치가 부족하기에 감점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부실한 번역들, 그리고 기대했던 부가적인 정보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탓입니다. 황금가지 등 일반 출판사의 제대로 된 번역본을 읽는게 훨씬 나은 선택이라 생각됩니다.

2003/06/21

악의 기원 - 엘러리 퀸 : 별점 3.5점

악의 기원 - 8점
엘러리 퀸 지음/시공사
어떤 작품을 읽더라도 기본 이상은 해 주는, 어느 정도 기대를 가지게 하는 작가들이 몇 명 있습니다. 저에게는 크리스티 여사님이나 반 다인, 딕슨 카 만큼이나 엘러리 퀸 역시 그러한 작가 중 한명이죠. 그러나 이 작품은 국명시리즈나 라이츠빌 시리즈하고는 다른 시기별로는 '헐리우드시기'라고 불리우는 후반기 장편으로 걸작이나 유명한 작품은 거의 초중기에 몰려있기 때문에 아무리 엘러리 퀸이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역시 명불허전이랄까요? 제목 '악의 기원'에 걸맞게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인용해가며 헐리우드의 거물 보석상 살인/협박사건을 차분히 해결해 나가는 엘러리의 모습은 전성기 못지 않은 흥분과 재미를 불러 일으키는 걸작이라 할 수 있겠네요.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트릭이 조금 억지스러운것 같기도 하고 범인역의 설정도 황당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읽는 동안은 눈을 떼기가 힘들 정도의 재미를 주는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엘러리 퀸의 팬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니 아직 읽지 않으신 팬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2021/12/11

불온한 잠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2점

불온한 잠 - 4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최신작입니다, 2019년 12월 발표되었습니다. 2020년 초에 하무라 드라마가 방영되었기 때문에 일부러 간행 일자를 맞춘 듯 합니다. 통상 2년 정도 기간을 두고 발표되었던 시리즈 이전 작들에 비하면, 중간 기간이 확연히 짧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시리즈 이전 작들에 비하면 확실히 별로였습니다. 사건들은 대부분 억지스러웠으며 추리적으로도 별볼일 없거든요. 전작에 비하면 많아진 극적 소재들 - 폭발, 유령 빌딩과 그라피티, 총격 사건, 산사태 등 - 도 대체로 비현실적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이라는 별명을 강조하기 위한 지나친 상황과 인물 설정들도 억지가 심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와카타케 나나미의 다른 작품들보다는 여러모로 부족했습니다. 미디어 믹스의 유혹, 편집부의 요청이 지나쳤던게 아니었나 싶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거품 속의 나날" 

자신이 곧 죽을거라는 옛 기치조지의 마담 사쓰키는 하무라 아키라를 자택으로 불렀다. 그녀가 돌보던 친구 딸 하루카가 곧 출소하는데, 자기에게 데려와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하루카는 마약에 취해 저지른 방화로 불륜남을 사망케해서 7년형을 받았었다. 하루카를 교도소에서 태우고 돌아오던 중, 수상한 2인조가 하루카를 납치하려다 실패했다. 경찰은 하루카가 죽게 만들었던 불륜남 다케이 소지로가 무언가 위험한걸 밀수했었고, 아직 그게 발견되지 않았다고 알려주는데...

하루카와 하무라 아키라, 악의 조직이 서로 쫓고 쫓기는 과정은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세계관 그대로입니다. 재미도 있고요. 특히 하루카가 수상한 조직에 쫓기다가 도망가서 '무언가'가 있음직한 장소로 향하는 과정, 하무라가 그녀를 뒤쫓다가 조직과 마주치는 등의 장면은 "몰타의 매"를 연상케 합니다. 비싼 값어치가 있는 보물을 여러 명이 노리고, 여자와 탐정이 한 팀인줄 알았는데 여자가 뒷통수를 친다는 설정이 똑같으니까요. 

물론 하루카는 전혀 미인도 아니고, 머리도 나쁘며 하무라 아키라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소시민인데다가, 악의 조직도 사람을 죽이기 보다는 '손을 믹서기에 실수로 넣어 버리는' 정도의 조직이라는 차이는 있습니다. 현대 일본에 하드보일드 세계관을 풀어놓으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요. '무언가'가 고작 거북이었다는 진상도 황당했지만, 현대 일본이 무대인 상황에서는 최선이었을 테고요. 악당들이 거액과 시간을 들여, 폭행을 가해가며 노려왔지만 정작 경찰은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을 그런 물건으로 딱 적당하다 싶었거든요. 멸종 위기종으로 약효가 좋다고는 해도, 수많은 관계자들 손을 갈아가면서 찾을 필요가 있나 싶기는 했습니다만.

하지만 이 작품이 진짜 하드보일드구나! 싶었던건, 악의 조직과의 문제가 일단락된 다음입니다. 사쓰키가 죽기 전, 하루카를 데려와 달라고 탐정을 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7년간 면회는 커녕, 영치금 한 번 넣어준 적이 없었고, 하루카는 사쓰키를 두려워했는데 말이죠. 정답은, 사쓰키는 하루카에게 복수를 하려고, 그녀가 도망가지 않고 자신에게 오도록 탐정에게 의뢰했던 겁니다. 이를 위해 앞서의 복선이 드러나는 장면은 서늘합니다. 사쓰키가 장갑을 끼고 있었던 이유가 대표적이에요. 사쓰키는 하루카 때문에 손가락을 믹서에 넣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 밖에도 친구가 하루카를 임신했던 탓에 좋았던 관계가 깨졌었고, 하루카의 불륜으로 사업도 큰 손해를 보았던 등도 복수의 이유였고요. 이렇게 애정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순수한 복수심이 대폭발하는 마지막 장면은 정통파 하드보일드 물임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어요.

그러나 멀쩡한 회사 대표였던 사쓰키 손을 갈아버렸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이 이렇게나 무식하고 무서운 무법천지란 말일까요? 하루카가 훨씬 젊고 힘도 좋을텐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죽음을 맞는 결말도 납득이 가지 않았고요. 또 물론 집을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드라마를 과하게 의식한게 분명해 보여서 좀 별로였습니다. 앞서의 소시민스러운 하드보일드 느낌을 망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 범죄물 팬이라면 누구나 좋아함직한 수작이라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새해의 미궁" 

하무라 아키라는 12월 31일, 하청 알선업자 사쿠라이를 통해서 철거 예정인 빌딩의 경비를 맡게 되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으로 유명한 빌딩이었다. 고생 끝에 경비를 마친 히무라에게 경비 사무소 사무원 사나에가 실종된 경비원 구도 쓰요시를 찾아 달라고 의뢰했다. 구도 쓰요시는 회사 몰래 유령 빌딩 견학회를 열었던 사실이 질책받고 도망가 버린 상태였다. 하무라는 구도와 악연이 있다는 예술가 사촌 라이카의 집에서 구도를 발견하는데...

라이카가 빌딩 개발업자 관계자와 함께 경비 중이던 구도를 협박해서 유령 빌딩에 침입했던 이유는, 독자들도 비교적 쉽게 추리할 수 있습니다. 라이카가 이구치라는 그라피티 아티스트에게 푹 빠저 있었다는 정보가 초반에 제시되는 덕분입니다. 해체 직전의 빌딩에 경비원을 둔 건 빌딩 안에 값나가는 무언가가 있다는걸 개발업자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고, 그 사실을 눈치했던 회사의 누군가가 이구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라이카를 현장에 불렀던 거라는 추리는 덕분에 쉽게 떠올릴 수 있었어요. 아마 그 누군가는 직품을 확인한 뒤 몰래 빼 낼 계획이었을테지요. 

그러나 진상은 조금 의외였습니다. 개발업자인 산도 개발의 오키타 부장이 이구치 그라피티가 있다고 사기쳐서 한 몫 챙기고 있었던 겁니다. 이구치 그림은 없었던 거에요! 이렇게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도 좋고, 덕분에 사건의 복잡도도 높아져서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개는 여러모로 억지스러웠어요. 일단, 앞서 말했던 '누군가'에 해당하는 오키타 부장의 부하 후치가미가 아라카와, 라이카에게 이구치 그라피티에 대한 정보를 흘린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뭘 위해서 그랬을까요? 그림을 빼돌릴려고? 작 중에서 설명되지만, 건물 속 그라비티를 훔쳐내는건 현실성 없는 이야기에요. 벽을 해체하는게 그리 쉬울리가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달리 돈을 만들 방법도 없고요. 후치가미가 속수무책으로 실종된걸 보면 딱히 협박이 목적이었던걸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리고 라이카는 이구치의 작품이 없다는 걸 알았을겁니다. 그런데도 시간을 들여 누드 사진을 찍은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녀도 사실은 이구치 작품이 뭔지 잘 몰랐다는걸 의미하는 걸까요? 설령 그렇다쳐도, 작품 전개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라이카가 사진가 아라카와에 의해 빌딩 안에서 살해당했다는게 가장 억지스러웠습니다. 경비원이었던 구도를 반 협박하다시피해서 들어오기는 했지만, 라이카와 아라카와가 빌딩에 잠입한건 그리 대단한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숨기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다? 아라카와는 이구치 그림이 없다는걸 알고, 오키타 부장 패거리에게 잡히면 죽을 거라고 추리했을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오키타 부장 패거리가 자기들 얼굴을 목격했던 경비원 구도를 살려둔 이유가 설명이 안되지요.

사소해 보였던 의뢰가 대기업이 엮인 대형 사기극과 이어지지만, 하무라가 받은 의뢰는 사기와는 별로 관계가 없었습니다. 살인 사건은 우발적인 범행이었고요. 사건 해결도 추리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우연에 가까왔다는 점에서, 하드보일드 물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에요. 그래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도망친 철도 안내서" 

하무라 아키라는 병원에 입원한 도야마의 지시로 '철도 미스터리 페어' 준비를 도맡게 되었다. 페어의 메인은 수집가 미노와로부터 빌린 "ABC"였다. 유명 작가 가미오카의 장서로 '94식'이라는 총기 난동 현장에 있었다고 알려진 책이었다. 그러나 페어 와중에 누군가가 하무라를 전기 충격기로 기절시킨 뒤 책을 훔쳐가 버렸다...

진상은 책이 가짜였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수집가 미노와는 손자를 시켜 책을 훔쳐냈던 거지요. 나중에 가짜와 바꿔치기 되었다고 할 속셈으로요.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는 실마리를 더듬어나가는 과정은 하드보일드물 스타일입니다. '철도 미스터리 투어'를 준비하면서 소개되는 열차 관련 미스터리 작품들의 목록들도 현란하고요.

그러나 그 밖에는 딱히 건질게 없던, 그닥인 작품이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아주 별로에요. 살인곰 서점에서 책을 훔처간 범인은 CCTV를 통해 누구인지 밝혀지고, 진상은 범인에게서 듣는게 전부니까요. 심지어 94식 사건의 관계자 구라나 마호코의 손자 구라노가 절도 미스터리 페어의 하이라이트인 경매회를 덥쳐서, 진상을 모든 이들에게 폭로하기까지 합니다!

무슨 회사 내부의 알력 어쩌구는 억지로 가져다 붙힌 설정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뿐, 하드보일드인지도 잘 모르겠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요약이 힘들 정도로 알맹이가 없었던 졸작입니다.

"불온한 잠" 

서점 단골 시나코씨가 11년 전, 자신 소유의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던 하라다 히로카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누군가를 찾아, 유품을 전해 달라고 의뢰했다. 예전 히로키의 이웃 이와오 하쓰에 할머니가 탐문 수사 중이었던 하무라를 습격해 목을 졸랐고, 그녀가 히로카를 증오해서 위협했던게 사망 원인으로 밝혀졌다. 

히로카의 과거를 계속 추적하던 하무라는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얹혀 사는걸 반복해 왔다는 걸 알아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있던 생활 습관이었다. 그녀 어머니 이치카는 돈을 갚지 못한 채무자 집에 히로카를 보내어, 그녀가 그 집의 모든걸 독차지하여 살게 해 왔었다...

표제작, 하라다 히로카의 과거를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정통 하드보일드스럽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단서를 수집하여 과거로 한 발 더 나아가고, 그러면서 숨겨져 있던 추악한 진실을 알게된다는 전개니까요. 간단해 보였던 의뢰가 범죄로 얽혀있고, 등장 인물들도 기묘하게 얽혀있는 내용도 마찬가지에요. 이거야말로 하드보일드다라는 느낌을 담뿍 전해줍니다. 

반면 수사 대상인 하라다 히로카에게 아무런 개인적 감정을 품지 않고, 의뢰 내용을 수행하기 위해서 몇 번이나 죽을 뻔 하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하무라 아키라의 모습은 상당히 독특했습니다. 복수와 같은 개인 감정 때문도 아니고, 수사 중 위험에 휘말려 살아남기 위해서도 아닌 정말로 열심히 일하는 탐정은 처음 봤거든요.

그런데 원래 의뢰는 '연고 없이 사망한 사람의 영혼을 달래주고 싶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고향까지 찾아갔지만, 사채 탓에 모든 사람들이 미워했다는 걸 알아냈다면 의뢰는 끝난 거에요. 히로카의 어머니 이치카가 '먼 모래'의 마담 아치요에게 돈 때문에 살해당했건, 히로카 옆집의 이와오가 사망한 히로카의 돈을 빼돌렸건, 그건 의뢰와는 무관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가 아치요와 이와오를 찾아갈 이유는 아니에요. 또 찾아가 봤자 이치카와 히로카의 돈이 둘에게로 흘러갔다는 증거가 없으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경찰 신고도 무용지물이었을테고요.

게다가 이렇게 하무라 아키라가 이야기를 끝낼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끝은 내기 위해 작가는 천재지변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토사 붕괴로 뉴타운이 휩쓸리고, 아치요와 이와오마저 실종되었다는 결말인데 작위적이고 허무하기로는 그야말로 끝판왕 격이에요. 차라리 하무라 아키라가 야치요에게 추리를 털어놓고, 원래 의뢰대로 유품을 전해주고 가는게 더 하드보일드스럽고 괜찮았을 겁니다.

하무라의 수사도 히로카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었다는게 밝혀지는 도입부는 괜찮았지만, 이후 기타노의 아내도 식칼로 하무라를 죽이려 했다던가, 히로카가 거쳐간 세 번의 거주지를 방문했고 기타노는 직접 만났음에도 마지막까지 '사채에 대해 증언을 얻지 못한다는 등 억지가 많더군요. 이치카, 히로카 모녀가 살던 오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사채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래서 모녀를 적대시 했었지요. 히로카의 정체 (사채업자)는 널리 알려져 있는게 당연했습니다. 최소한 불륜 상대로 오해받는 것 보다는 말이지요. 하루카가 시나코 씨 소유의 좁고 낡은, 거지같은 집에서 혼자 머무르다 죽음을 맞았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원칙대로였다면 채무자 이마이 집에 머물며 왕처럼 지냈어야죠. 돈도 많았을 텐데...

이렇게 독특함은 있지만, 단점들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05/06/09

바다의 어둠, 달의 그림자 - 시노하라 치에 : 별점 2.5점

바다의 어둠, 달의 그림자 17 - 6점
시노하라 치에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사이좋은 쌍동이 자매 코바야카와 루카와 루미는 같은 학교 육상부 소속으로 육상부 선배 토우마 카츠유키를 서로 짝사랑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배는 루카를 선택했고, 육상부 합숙에서 의문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루미는 자신에게 생긴 초능력으로 루카를 죽이려 했다.
루미는 선배의 도움과 조사로 초능력은 바이러스 때문에 생겼으며, 바이러스에 감염된 날은 선배의 고백으로 루카에게는 인생 최고로 기쁜 날, 루미에게는 최악의 날이 되었기 때문에 루카는 선한 마음을 유지한 채 초능력을 얻었고 루미는 사악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걸 알아냈다.
루미는 자신의 혈액으로 다른 사람을 감염시켜 조종하는 능력으로 가족과 학교 친구들, 마을 사람들을 감염시켜 루카를 궁지로 몰아갔지만, 루카의 혈액은 루미에게 감염된 사람들에게 혈청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이를 이용해 루카는 지배와 정복욕이 커져 가는 루미에게 맞서 싸우는데...


꽤 오래되긴 했지만 상당히 유명한 만화죠. 애니메이션까지 만들어진 히트작이기도 하고요. 한번 읽어 보고 싶었었는데 그동안 기회가 닿지 않다가 우연찮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기본 설정만 놓고 보면 뻔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초능력물로 착한(?) 여주인공이 나오는 약간 순정만화적인 분위기는 "붉은 이빨"과 유사합니다. 초능력자들이 초인 록크의 "에스퍼"들 처럼 자연 발생(?)한게 아니고, 어떤 핏줄이거나 돌연변이도 아니라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건 바벨 2세의 한 장면을 생각나게 하고요. 그리고 자매(쌍둥이)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비극도 많이 등장했던 설정입니다. "데카맨 블레이드"처럼요.

하지만 단지 뻔하고 단순한 초능력물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인기를 끌만한 요소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선과 악의 숙명적인 싸움이 "한 남자" 때문이라는, 굉장히 작으면서도 개인적인 이유라는게 독특하고 좋았습니다. 루카가 욕망을 이루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조종하고 잔인하게 살해하는 과정, 여기서 욕망이 서서히 발전해 나가는 전개도 굉장히 현실적이라 마음에 드네요. 
그리고 캐릭터의 성격이 확실해서 이야기의 중심이 잘 서있다는 장점도 큽니다. 주인공들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갈팡질팡 심리를 보이지않고 선역은 끝까지 확고한 선역, 악역 역시 끝까지 확실한 악역으로 남음으로 단순하지만 확실한 스토리 전개를 보여주거든요. 
두 쌍동이 자매의 순정만화같은 디테일한 심리묘사도 좋아서 몰입하여 읽도록 해 주고요.

그러나 의문의 사나이 존슨의 등장 이후에는 스케일도 엄청 커지고, 새로운 초능력자들이 나오면서 뻔한 초능력물의 궤도를 따라가버려 아쉽습니다. 무협지스러운 재미는 있지만, 보다 현실적이고 소박한(?) 한 마을과 가족을 서서히 침식해 가는 악의 세력 확장 부분이 색다른 매력을 전해주었는데 그런 맛은 사라지고 마니까요.

그래도 평범한 초능력 액션물을 넘어서는 재미는 전해 줍니다. "바벨2세"의 무한루핑 대결이나 "붉은 이빨"의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에 비추어본다면, 이 두 전설(?)같은 작품들보다 나은 점도 분명 있고요. 선과 악의 대결이 펼쳐지는 초능력물에 대한 모범답안 중 하나랄까요?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은 아니고 지금 읽기에는 낡은 느낌도 들지만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가 워낙 마이너하고 컬트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04/09/07

빅포 - 애거서 크리스티 / 유명우 : 별점 1.5점

빅포 - 4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해문출판사

이름 그대로 4명의 인물 - 조직의 보스이자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존재는 중국인 리창옌, 자금을 대는 거부 미국인 에이브 라일랜드, 천재 여류 과학자이면서도 사악한 무기를 개발하려고 하는 프랑스인 올리비에 부인, 조직의 킬러인 전직 연극배우 - 을 중심으로 구성된 빅 포 (Big Four)라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포와로의 활약을 그린 단편집.
이들은 자신들의 세계정복(?) 계획에 포와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리라 예상하여 포와로를 제거하려 하고 포와로는 헤이스팅스와 함께 힘을 모아 대결한다는 조금은 단순한 설정인데 각 단편들이 하나의 큰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연작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사건은 행방불명 되었었던 영국 정보부원 메이얼링의 살해사건입니다. 메이얼링이 포와로에게 빅포의 위험을 알리다가 포와로 방 침대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며 살해당한 증거는 시계의 문자판으로 만든 "4"라는 숫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정작 트릭은 범인이 "변장의 명수"였다.. 라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무한 것이라 뭐라 이야기할게 없네요.

두번째 사건은 훼일리라는 빅포의 존재를 알고있는 노인이 살해당한 사건으로 교묘하게 잘 짜여진 트릭이 등장합니다. 범인이 진작부터 살해를 목적으로 하인을 포섭하는 부분은 좀 억지스럽지만 영국의 여름 날씨와 푸줏간 주인을 연결하는 부분이 아주 괜찮았어요.

세번째 사건은 젊은 유망한 과학자 할리데이의 실종사건입니다. 빅포의 구성원 중 한명인 과학자 올리비에 부인의 정체가 폭로되는 부분으로 빅포의 하수인으로 포와로의 옛사랑 로사코프 백작부인이 등장하는 등 연작의 전체 구성에 있어서는 중요한 작품이나 추리적으로는 빵점에 가까웠습니다. 스파이 소설이나 모험 소설로 보는게 더 타당한 작품이었어요.

네번째 사건에서는 빅포의 나머지 멤버가 미국인 거부 에이브 라일랜드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헤이스팅스가 좌충우돌하는 내용이 거의 전부로 세번째 사건처럼 전체에 있어서는 중요한 내용이긴 하지만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는 것이 동일합니다. 한마디로 별로라는 이야기죠...

다섯번째 사건은 부유한 여행가 페인터의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빅포가 페인터의 회고록 출판을 막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페인터가 죽기 전 남긴 "노란 자스민"이라는 글귀를 토대로 범인을 알아낸다는, 어떻게보면 전형적인 포와로식 단편입니다. 이 책의 다른 사건들에 비해 추리적 가치가 비교적 높은 내용이라 그나마 마음에 든 편입니다.

여섯번째 사건은 러시아 체스 고수와 미국인 체스 고수의 시합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입니다. 이 책의 가장 뛰어난 단편으로 크리스티 여사의 단편에서 거의 보기 드문 과학적, 기계적 트릭이 등장하고 있으며 살인의 원인과 동기도 매끄럽게 처리하고 있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일곱번째 사건은 헤이스팅스의 부인을 납치, 헤이스팅스로 하여금 포와로를 배신하게 하려 하는 빅포의 음모가 그려집니다. 그냥 뻔한 모험소설로 포와로의 "액션"이 등장하긴 하지만 건질건 거의 없는 최악의 작품이었습니다. 크리스티 여사 작품 중에서도 최악으로는 1, 2위를 다투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어요.

여덟번째 사건에서는 빅포의 킬러인 연극배우의 정체를 밝히려는 포와로의 치밀한 노력이 빛나는 편입니다. 외모와 행동에서 유출한 데이터만 가지고 끈질기게 추적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모험소설적인 내용과 추리적인 부분과의 모범적인 공존 형태를 보여주고는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역시 마지막 부분이 많이 허무한 등 아쉬운 점이 더 많았습니다.

마지막 사건은 포와로의 죽음과 포와로의 쌍동이 형 아킬의 등장, 빅포의 회의장소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사투를 담고 있습니다. 쌍동이 형에 관한 반전은 괜찮았지만 빅포의 너무나 허무한 최후나 포와로와 헤이스팅스의 탈출이 "운이 좋아서" (물론 포와로의 준비는 있었지만) 가능했다는 등, 내용상의 헛점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결론내리자면 홈즈 시리즈의 분위기가 많이 느껴지는 모험물 스타일의 작품이었습니다. 거대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포와로의 활약을 그리고 싶었던 크리스티 여사의 의도는 확실히 전해지고요. 그러나.... 포와로라는 캐릭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라 생각되며 빅포라는 악의 조직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그려져서 설득력도 떨어지고 왠지 아동물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거의 "검은별" 수준입니다....)
괜찮은 아이디어나 트릭이 간간히 등장하고 여섯번째 사건 같은 경우는 상당한 수준으로 충분한 재미를 전해주긴 합니다만 괜찮은 아이디어들을 빅포라는 조직과 무리하게 연관 시키면서 무너져 버리는 부분이 많아 안타깝네요.
"부부탐정" 처럼 악당 조직은 중간 중간 별개의 이야기로 등장하고 아예 다른 내용으로 꾸며져 한권의 단편집으로 처리하였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여간.... 제가 읽은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 중 최악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9/08/04

조용한 무더위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3점

조용한 무더위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와카타케 나나미의 '유능하지만 불운한' 여성 사립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입니다. 하무라 아키라가 백곰 탐정사 탐정이자 미스테리 전문 서점 '살인곰 서점'의 거의 유일한 아르바이트 생으로 2014년 7월부터 12월까지 매월 벌어진 다양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 여섯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는 마흔을 넘긴 나이를 제외하고는 독신에다가 하루하루 근근히 먹고산다는건 여전하네요. 나이 탓에 어깨 근육통 등 건강에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탐정으로서 꽤 유능합니다.

읽기 전에는 아무래도 일상계에 가까울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현재 모습을 보면 딱히 대단한 사건에 휘말릴걸로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처럼 내용과 사건들이 상당히 묵직해서 의외였습니다. "파란 그늘"만 들치기라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범죄이며 그 외의 작품들에서는 강력 범죄들이 연달아 일어납니다. 작품별로 분류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조용한 무더위" : 살인 미수
  • "아타미 브라이튼 록" : 불법 약물 제조에 살인과 사체 은닉
  • "소에지마씨 가라사대" : 살인과 감금
  • "붉은 흉작" : 호적 도용과 살인 강도
  • "성야 플러스 1" : 살인 사건

이런 강력 범죄들이 왁자지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일어나고, 시니컬한 하무라 시점의 묘사가 더해져 독특한 재미를 안겨다 주는 이 시리즈의 매력 포인트도 잘 살아 있습니다. 진지한 주인공이 자신도 휩쓸린 대소동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는, 우디 알렌이 연상되는 블랙 코미디 스타일이지요. 역시나 시리즈의 매력인 평범한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악의'도 곳곳에서 드러나고요. 추리적으로도 잘 정리되어서 깔끔합니다.

무엇보다도 '미스테리 전문 서점'이라는 '살인곰 서점'이 주요 무대이며, '살인곰 서점'에서 매월 벌이는 '미스터리 투어'가 이야기의 핵심 소재 중 하나라는게 추리 소설 애호가로서 굉장히 반가왔습니다. 여러 추리 소설과 작가들이 중요하게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파란 그늘"에서 사건의 진상은 작 중 언급되는 "레베카"의 티 타임 비밀 레시피에 얽힌 진실이 드러난 덕분입니다. "아타미 브라이튼 록"에서 피해자가 영국 추리 소설을 읽었다는 수상한 증언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고요. "성야 플러스 1"은 개빈 라이얼의 "심야 플러스 1"이 핵심 소재 중 하나로 사용됩니다. 마지막에 부록처럼 붙어있는 살인곰 서점 점장 도야마의 입을 빌어 작 중 등장하는 작품들을 소개해주는 부분도 인상적이에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재미와 추리 모두 충분한 수준이며, 추리 애호가의 덕심(?)을 잘 건드리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추리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은 작품이에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란 그늘" 7월

단편집을 개시하는 첫 단편입니다. 더위에 대한 하무라의 푸념에서 대형 교통사고로, 그리고 '뱀녀'의 행방을 쫓다가 그녀가 택배 배달원과 손을 잡은 들치기범이라는게 밝혀진다는 전개가 빠르면서도 설득력 높게 진행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무라가 범인의 대략적인 인상 착의와 차림새, 범인이 이동한 방향이라는 몇 안되는 단서로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도 꽤 설득력 높고요. 평범한 인간의 '악의'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발 벗고 나서는 교통 사고 현장에서 죽어가는 피해자의 가방을 훔치는 범죄가 그러하지요. 모친의 애끓는 호소에도 가방을 버렸다고 하지만 정작 돌려달라고 한 레시피 노트를 연인에게 선물한 사실을 밝히지 않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 추리 모두 일정 수준 이상입니다. 이어지는 작품들에 기대를 갖게 만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이런 책을 쓴 입장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사건의 핵심인 쓰구미의 노트에 수록되었던 소설 "레베카"와 관련된 레시피가 진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책에는 상세하게 알려주지 않는 레시피 속 비밀 재료에 대한 이야기인데 어떤 맛일지 아주 궁금하네요. 서점 점장인 도야마가 기획한 7월 미스터리 페어의 주제가 "달콤한 미스터리 페어" 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추리 소설에 관련된 레시피 책들도 소개되는데 그 중 "Len Deighton's Action Cookbook"은 꼭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작가 렌 테이턴의 레시피인데 레몽 머랭 파이 레시피가 실려 있는 등 디저트 부분이 충실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스터리 티 파티 계획도 발군이에요. 미스터리에 등장하는 과자들을 죽 늘어놓고 티 파티를 열다니! 아, 이런 서점이 집 근처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한 무더위" 8월

전편에 이어 무더위가 이어집니다. 무더위가 일종의 흉기로 사용되기도 하고요. 자치회장은 어머니를 열사병에 걸리게 할 속셈이었거든요. 이 아이디어는 실제 뉴스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설득력도 강합니다. 계절 묘사도 발군입니다.

하지만 범행을 위해 자치회장이 무리하게 거리를 비운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남의 집 에어컨 소리를 귀담아 들을 이유는 없죠. 또 거리를 찾아오는 방문객이 있을 수도 있는 등 어차피 통제는 불가능하니까요. 하무라의 탐정일이 수월하게 풀린다는 것도 좀 과했습니다. 진상을 깨닫게 되는, 자치회장의 볼펜은 순전히 우연이었다는 점도 감점 요소죠. 이런 부분은 조금 더 정리하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타미 브라이튼 록" 9월

하무라 아키라가 이동하는 모든 이야기가 그렇지만 이 작품은 특히나 이동이 잦아서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강하게 풍깁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악의가 아니라 명확한 목적이 있는 범죄 모의라는 점, 그리고 과거의 수수께끼를 다양한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현재 시점에 밝혀낸다는 고전적, 왕도적 이야기라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조금 다른 분위기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를 깔끔하게 전개하는 솜씨는 대단합니다. "브라이튼 록"이라는 소설을 시타라 소가 읽은 시점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눈치채고, 이를 본인이 발로 뛰어 얻어낸 정보와 엮어 진상을 도출하는 하무라의 활약도 눈부실 정도에요. UFO에 미친 부동산업자, 바퀴벌레를 키우는 전 상사맨같은 독특한 등장인물들도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한 묘사와 맞물려 재미를 더해줍니다.

하지만 결말이 '그래서 어쨌는데?' 수준으로 마무리 되어서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수십년 전 사건으로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하무라가 자신이 애써 진상을 밝힐 필요도 없었다는 점에서는 이게 최선이었겠지만요. 그 외 추리적으로도 '자백'에 의존할 뿐이라 - 다른건 몰라도 시타로 소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백이 아니라면 알아낼 도리가 없었으니 - 조금 감점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소에지마씨 가라사대" 10월

하무라가 서점에서 전화와 인터넷만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니 현대적인 '안락의자 탐정물' 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작 중 미스터리 페어의 주제가 '학자 탐정' 으로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주는 것도 재미있어요. 이런저런 지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은 동일하니까요. 추리 애호가를 위한 정보도 한 가득입니다. '학자 미스터리 페어'라는 페어의 주제는 심심하지만 그만큼 소개되는 작품들이 친숙해서 마음에 들더군요. '싱킹 머신' 반 두젠 교수를 비롯한 다양한 학자, 박사들이 등장하거든요. 또 피해자가 리모델링 업자라는 걸 듣고 '딕 프랜시스의 주인공이 이런 일을 했었는데' 라고 생각하는건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지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너무 뻔해서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은퇴한 변호사가 리모델링 업자에게 판 저택이 동기일거라는게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하무라의 추리대로 저택에 사체가 묻혀 있었다는 결말도 뻔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변호사 조카가 호시노 구루미를 살해한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어설퍼요. 운 좋게 용의자가 소에지마씨로 특정되었을 뿐, 용의자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궁지에 몰린 소에지마씨가 무라키를 감금하여 인질극을 벌인다는 설정도 지나쳤습니다. 이런 류의 소동극이 작가의 장기이기는 한데, 자극이 자니치다 보면 무덤덤해지는 법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붉은 흉작" 11월

하드보일드 팬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드보일드 작가가 의뢰인인데다가 주요 소재가 "붉은 수확"과 비슷한 사건을 일으킨 다카노바바의 저주받은 땅이니까요. 심지어 고가 간타가 오기 노보루를 살해한 흉기도 '얼음 송곳'입니다!
삼천만엔이라는 거금을 가지고 있지만 드러내 쓰지도 못하고 홀로 약간의 사치만 부리면서, 죄책감에 몸부림치다가 죽어간 불쌍한 남자가 주인공이며, 그의 평생의 은인은 광인이 되어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간다는 설정도 하드보일드스러웠어요. 냉정한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작가 선생의 한 마디는 화룡 정점이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애매합니다. 가짜 츠노다 지로가 자주 다니던 지압원에서 의료 보험증 사본을 입수하여 '고가 간타'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 장소를 찾아가고, 그 곳에서 고가 간타가 저지른 살인 사건과 참고인이었던 츠다 지로를 확인하는 과정이 일사천리이기 때문입니다. 오기 노보루가 지녔지만 사라진 삼천만엔을 츠다 지로가 손에 넣었을 거라는 추리는 딱히 중요한 요소는 아니고요.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드보일드라는 의미 외의 가치는 조금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성야 플러스 1"

개빈 라이얼의 "심야 플러스 1"에서 따온 제목이죠. "심야 플러스 1"은 서스펜스 가득한 모험물인데 이 이야기 속 하무라에게 닥친 시련도 "심야 플러스 1" 못지 않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부탁을 들어주고 임무를 완수하는 하무라 아키라의 모습은 성녀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에요.
그런데 조금 의아했던건 일본인들은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걸 굉장히 두려워 한다는데, 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하무라에게 폐를 끼치는걸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무라가 만만해 보였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작 중 하무라가 부탁받은 심부름을 수행하기 위한 여정의 정도는 지나친 편입니다. 중간의 여정들은 딱히 재미있지도 않고요. 솔직히 중간 과정들은 불필요했습니다.
소노다 씨가 "심야 플러스 1"의 가짜 사인본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책 도둑들이 사인본을 노린다는 설정도 납득하기 어려워요. 하무라의 말대로 옥션에서 2백불 정도면 살 수 있는데 노상강도짓을 할 이유는 없지요.

추리적으로도 별 내용은 없습니다. 백골 사체는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로 어차피 본 편 정보로 추리가 가능한 사건은 아닙니다. 고이시바라 미야코 할머니와 사위의 칼부림 역시 억지스러운 요구에 불과할 뿐이고요. 오히려 사위가 딸을 살해한게 아닌가? 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더라면 말이 되었을텐데 말이죠. 책을 날치기한 2인조의 경우는 앞서 말씀드렸듯 사건 자체의 현실성이 약해서 추리의 여지도 부족합니다.

그래도 하무라의 불운을 잘 드러내고 있고, 중간중간 벌어지는 사건들이 많아서 왁자지껄한 블랙 코미디로 본다면 괜찮습니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고이시바라 미야코와 사위 사이에서 벌어진 칼부림입니다. 정말 급작스럽게 말려들었는데 미야코 할머니가 하무라의 가방을 잡고 놔주지 않는 등의 황당한 상황이 이어지거든요. 이를 슈톨렌이 해결한다는 결말도 재미있었고요. 그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다 극복하고 모두가 원하는 상황으로 매조지하는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행복해지는게 크리스마스의 핵심요소이긴 하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별 볼일 없지만 재미 만큼은 확실합니다.

2024/02/18

악의 사슬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5점

악의 사슬 - 4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겨울 네브래스카 주의 시골 마을에 흘러 들어간 잭 리처는 코피를 흘리는 여성을 도와준 뒤, 원흉인 그녀의 남편 세스 던컨을 박살냈다. 
던컨 가문은 돈과 유통 계약을 통해 마을을 지배하는 악질들로 리처에게 복수하려 했지만, 리처는 손쉽게 당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판매하는 물건을 사가는 조직의 도움으로 킬러들을 불러들였다. 

한편 리처는 25년 전, 마을 주민 도로시의 여덟 살 난 딸 마거릿의 실종 사건의 재조사에 나섰다. 사건의 범인이 던컨 가문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킬러들을 모두 해치운 리처는 던컨 가문의 인신 매매와 추악한 아동 성범죄 증거를 잡은 뒤, 마을 주민들과 함께 던컨 가문을 끝장내고 발걸음을 옮긴다.


잭 리처 시리즈 15번째 작품. 원제는 "Worth Dying For"입니다. 발걸음 닿는 대로 방문한 마을에서 우연히 사건에 휩쓸린 잭 리처가 악을 물리친다는 내용입니다. 떠돌이 총잡이가 시골 마을을 지배하는 악의 무리를 소탕한다는 전형적인 서부극 영웅담과 똑같지요.
흔한 소재이며 전개이지만, 이른바 '왕도물'답게 그만큼 효과는 뛰어납니다. 읽는 내내 몰입하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악당들을 박살내는 묘사가 상세한게 마음에 들었어요. 제가 읽었던 다른 시리즈 악당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그야말로 '씨를 말려버리고' 말거든요. 거처를 모두 불태운 뒤, 살려고 발버둥치는 던컨 가문 일족을 한 명씩 차례대로 제거하는 장면 묘사는 특히 큰 카타르시스를 안겨줍니다. 당해도 싼 놈들이라는 설명을 앞 부분에서 충분히 해 준 덕분이지요. 여기서 드러나는, 던컨 가문이 밀거래하는 물건이 마약이 아니라는 설정도 신선했습니다. 인신매매라는건 상상도 못했네요.
던컨 가문의 수하인 미식축구부 콘허스커스 출신 덩치들을 하나씩 재기 불능으로 파괴하는 격투 장면도 상세하며, 이를 통해 잭 리처(그리고 미국 육군)의 완력과 강함 역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완력 뿐 아니라 덩치 중 한명인 존을 제압하는 화려한 화술도 볼거리에요. 입만으로 어설픈 초보 깡패를 뭉개는 솜씨가 대단했습니다.

다른 시리즈 물보다도 '자동차'에 대한 묘사가 상세한 것도 눈길을 끕니다. 자동차가 각 캐릭터들을 상징하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연식은 좀 되지만 현대적인 옵션을 갖추었고, 운전하기도 편한 고급 캐딜락은 마을을 지배하는 오래된 가문의 악행을 잇는 젊고 철없는 후계자 세스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훔치기 쉬워 여러 명의 손을 탄다는 점도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파멸하는 세스의 모습 그대로고요. 이런 점도 '말'이 중요한 '서부극' 장르의 속성을 따른 듯해요. 밀밭이 펼쳐진 평원에서 자동차로 사람을 추격하고, 자동차로 직접적인 공격까지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신 매매 조직 먹이 사슬의 가장 밑바닥이자 공급책인 던컨 가문 바로 위의 로시 조직, 그 위의 사피르 조직, 최상위 마흐마이니 조직이 각각 킬러 두 명씩을 보내는데, 이들이 서로 죽이려 할 때 리처가 본의아니게 개입하여 사건을 복잡하게 만드는 - 리처가 먼저 마흐마이니 조직원을 한 명 죽이고 시체를 세스 던컨의 캐딜락 트렁크에 넣어 놓고, 나중에 남은 마흐마이니 조직원이 이를 발견한 뒤 던컨 가문을 족치다가 살해당하는 - 일련의 과정도 재미 요소입니다. 조직간의 알력 다툼을 이용해서 적을 약화시키는건(본의는 아니었지만) 고전 "피의 수확"을 떠오르게도 하고, 마흐마이니 조직원이 캐딜락을 훔친 뒤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은 잘 짜여진 코미디 범죄 영화를 보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아래와 같이 잭 리처가 "61시간"의 벙커에서 탈출하다 팔을 다쳤다는, 시리즈의 연속성을 떠오르게 해 주는 장치도 반가왔습니다.
"실제 태풍을 말하는 게 아니오. 난 어느 지하 공간에 있었는데 갑자기 불이 났소. 그곳엔 층계가 하나였고 환풍장치가 두 개였소.운이 좋았소. 불길이 환풍구들 쪽으로 몰렸거든. 난 층계에 있었기 때문에 불에 타죽지 않았소. 하지만 불길이 환풍 장치 속으로 확 빠져나가면서 주변 공기들을 빨아대는 서슬에 위에서 엄청난 바람이 불어 내려왔소. 나로선 마치 태풍을 뚫고 계단을 올라가는 것 같았소. 두 번이나 바닥으로 나가떨어졌지. 일어서서는 도저히 계단을 올라갈 수가 없었소. 그래서 두 팔로 몸뚱이를 끝며 기어 올라가야 했던거요."

그런데 인신 매매 이야기를 꼭 끌고 왔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밀밭만 있는 네브래스카 시골 마을의 유통을 장악한 지역 유지가 인신 매매 공급책이라는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항구 도시에서 컨테이너 하역을 장악하고 있다면 모를까요.
25년전 도로시 사건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경찰 수사가 부실했다는 결론인데, FBI까지 출동한 사건이 이렇게 허술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최소한 마을의 버려진 건물들은 모두 조사를 했어야 하는건 당연합니다. 사건 현장이었던 헛간이 그 때 그 상태 그대로, 심지어 증거인 도로시의 자전거까지 멀쩡히 남아있었다는 것 역시 말도 안됩니다. 이런 점들은 던컨 가문의 악행을 부각시키기 위한 무리수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골 마을을 지배하는 악덕 가문이라는 설정도 솔직히 21세기에 먹히기는 힘듭니다. 서부 개척 시대처럼 외부와의 연락을 통제할 수 있다면 모를까,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발전한지 오래니까요.

그리고 후반부에 리처가 세스 던컨과 미식 축구 덩치들에게 사로잡히는건 좋은 방향은 아니었어요. 세스 던컨은 제가 보아왔던 시리즈 중 가장 허접한 소인배 악당이기 때문입니다. 리처가 손가락 하나로 뭉개버릴 대상이지, 리처에게 위기를 가져다주는 존재일 수는 없어요. 이후 리처가 결정적 순간에 던컨 가문 외 5번째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추리하여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과는 정 반대되는 설정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사람이 '단순히 방심한다'는건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던컨 일당이 사로잡은 리처를 바로 죽이거나 묶어놓지도 않은 이유도 설명이 부족하고요.

그래도 서부극을 좋아한다면 즐길 수 있는, 킬링 타임에는 적합한 활극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마동석 주연으로 한국화해서 영화를 만든다면 아주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2024/07/12

교도관의 눈 - 요코야마 히데오 / 허하나 : 별점 2.5점

교도관의 눈 - 6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허하나 옮김/폭스코너

요코야마 히데오의 단편집.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목만 봤을 때는 교도관이 주인공인 범죄 추리물이라 생각했습니다. "종신검시관"처럼요.
그러나 교도관이 등장하는 작품은 한 편 뿐이며, 추리물보다는 일상계 범죄물이나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살인이라는 강력 범죄가 많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등장인물의 심리가 사건보다 더 중요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요코야마 히데오 작품답게 기본적인 완성도와 재미는 갖추고 있습니다.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교도관의 눈"
야마테초에서 주부 구타니 에미코를 살해하고 시신을 없앤 혐의로 불륜남 야마노이 가즈마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정황 증거 뿐 물증을 찾지 못해 석방되었다. 그 순간 에미코의 남편 구타니 이치로가 가즈마를 살해하려고 덮쳤지만, 반대로 그가 죽고 말았다. 검찰청은 가즈마를 정당방위로 불기소 처분할 수 밖에 없었다.
교도관 곤도는 가즈마가 수상하다는걸 느끼고 조사에 나섰고, 현경 기관지 편집자 에쓰코는 곤도를 만나러왔다가 우연찮게 사건에 휘말리는데...

사람을 죽인 범인은 이글대다가도 씻겨 사라지지만, 곤도가 본 야마노이 가즈마는 날이 갈수록 이글거렸습니다. 이를 통해 곤도는 가즈마가 아무도 안 죽였지만, 유치장을 나가서 사람을 죽일 생각이었던걸로 추리했습니다. 에미코는 공범으로, 에미코는 살해된게 아니라 스스로 몸을 감췄고요. 그리고 가즈마는 에미코를 폭행하던 남편 이치로를 정당방위로 위장하여 살해했던 겁니다. 가즈마가 날이면 날마다 체력 단련에 열중했던 것도 이 추리를 뒷받침해 줍니다.
비록 이치로가 '식칼'을 들고 덤빌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던건 - 그리고 그랬다해도 죽일 수 있었으리라 보장할 수 없었던건 - 단점이지만, 추리는 꽤 기발했습니다. 이를 은퇴를 앞둔 교도관이 꿰뚫어 보았다는 설정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앞서의 단점으로 이치로를 죽이는데 실패했더라도, 최소한 에미코는 사라질 수 있었으므로 나름 성공한 계획인건 분명하고요.
결국 진상은 드러나지 않고 여운을 남기는, 그리고 이를 젊은 여성인 에미코 시선으로 해석하여 설명해주는 결말도 좋았습니다.

다만 캐릭터 묘사는 다소 아쉽습니다. 젊은 편집자 에미코와 붙임성없는 나이든 꼰대 곤도 묘사는 전형적이라 식상했기 때문입니다. 에미코에 대한 이런저런 설정도 불필요하다 싶었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만족스럽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자서전"
팔리지 않는 방송작가 다다노는 운 좋게 '효도전기'의 회장 효도 고자부로의 자서전 대필을 맡게 되었다. 무려 300만엔짜리 일이었다. 그런데 효도는 자신이 젊었을 때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다다노는 효도가 불륜 관계였던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했다 여기고 효도를 협박하는데...

알고보니 어머니를 살해한건 아버지였다는 결말입니다.
그런데 효도가 다다노를 챙겨줄까?라고 생각하고 과거의 단편을 살짝 알려준 이유가 불분명합니다. 자신 탓에 연인이 죽고 자식이 불행에 빠졌다면, 자식에게는 나중에 금전적 보상을 해 주면 됩니다. 이렇게 사람을 가지고 놀 이유는 없어요.
'원망의 말은 합격, 협박은 불합격'이라는 기준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다다노가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진실이라 여기고 협박(?)하려 했던건 상식적입니다. 공소시효는 지났지만, 효도는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이니까요. 복수를 하지 않으면 뭐라도 얻어내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협박했다고 아웃이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말버릇"
가정법원 가사조정위원으로 일하는 세키네 유키에는 이번 이혼 조정 신청 당사자인 기쿠타 요시미가 과거 고등학교 시절, 딸 나쓰코의 등교 거부 원인이었던 동급생이었다는걸 알아챘다. 유키에는 과거 우연히 마주쳤을 때의 요시미의 경멸하던 눈빛, 그리고 나쓰코가 소중히 모았던 저금통이 사라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요시미를 까칠하게 대했다. 그러나 유키에의 말버릇으로 그녀가 누군지 알아챈 요시미에게서 충격적인 진상을 듣게 되었다...

'악의'가 내포된 드라마적 요소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특히 여성 내면 심리와 일상 속에서의 복잡한 관계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가쿠다 미쓰요나 고이케 마리코의 작품이 떠오르지만, 요코야마 히데오 특유의 명확한 반전이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요시미와 이혼 조정 중인 남편 기쿠타는 고등학교 때부터 커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쓰코가 기쿠타를 유혹해서 잠자리를 가졌었고, 그 탓에 임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임신한 나쓰코는 모든 돈을 긁어모아 중절 수술을 했고, 그 뒤 등교를 거부했었던 것이지요.
예상치 못한 반전이지만, 앞서 단서를 모두 제공해주고 있어서 잘 짜여진 느낌을 전해줍니다. 이혼 조정 과정에 대한 묘사도 흥미로왔고요. 질투와 분노가 뒤섞여 있는 심리 묘사도 돋보입니다.

그러나 요시미가 이미 다른 남자와 불륜 관계인 듯 보이는데 이렇게 당당한건 이해하기 어렵고, 내용 상 나쓰코의 시점에서의 묘사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 최고로 꼽을 수 있습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오전 다섯 시의 침입자"
정보관리과 경부 다치하라가 관리하던 S현 경찰 홈페이지가 해킹당했다. 다치하라는 서둘러 페이지를 내리고 복구한 뒤, 방문했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 입막음을 하러 나섰다. 해고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자리 보존을 위해 사건을 없던 것으로 덮으려했지만, 경찰관의 본분과 자신이 지켜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깨닫는다는 작품. 해킹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상세히 다루지 않아 범죄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해커가 올려놓았던 프랑스어 문장을 통해 범인을 알아내는 부분은 추리물 요소를 갖추고 있지만, 한국인 독자가 알아채기에는 어려운 단서여서 애매합니다.
결국 이 작품은 범죄 수사 과정보다는 주인공의 내면 변화와 성찰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조용한 집"
현민신보의 기자 출신 편집자 다카나시는 오보를 사과하기 위해 사진작가 스가이를 찾아갔다. 그러나 만나지 못해 연락처만 남겼는데, 그날 저녁에 스가이는 전화를 걸어와 정정 기사를 내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열흘 뒤, 스가이의 사체가 발견되었고 다카나시도 주요 참고인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다카나시는 그날 자신에게 전화를 건게 스가이가 맞는지 생각해 보는데...

편집부에서 벌어지는 다카나시의 좌충우돌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신문사 내의 긴장감 넘치는 상황은 흥미롭습니다. 여러모로 잔혹한 신문의 세계가 인상적이었어요.
추리물로도 트릭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좋았습니다. 문제는 트릭이 많이 허술해 보인다는 겁니다. 스가이의 불륜 상대 남편이 그를 살해한 뒤, 집을 찾아온 다카나시가 남겼던 명함으로 스가이인척 전화를 걸어 알리바이를 만들었다는 것인데, 열흘 전 사건이라면 사망시간을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확실한 알리바이라고 하기는 무리입니다. 경찰이 범인을 특정하기도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요.

그래도 복선과 단서의 배치는 나쁘지 않고, 완성도도 준수한 편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비서과의 남자"
지사의 신임을 받는 비서과장 구라우치는 지사의 신뢰가 갑자기 떨어진걸 느꼈다. 새롭게 발탁된 젊은 피 가쓰라기의 수작이라 생각했다. 구라우치는 자신에게 돈을 빌리러 온 뒤 자살했던 무카이의 아내를 만나, 무카이의 동생이 무카이와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부풀려 투서를 했다는걸 알아냈다.

질투로 인해 비롯된 일상 속 악의와 인간의 내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의 "말버릇"과 비슷합니다. 차이라면 중년 남성이 주인공이며, 현재를 인정하며 긍정적인 결말로 마무리된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런 결말이 훨씬 좋네요.
구라우치에 대한 투서를 올린게 하스네였다는 진상도 괜찮았습니다. 질투와 악의를 그려내는데 이만한 진상도 또 없을 듯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건의 핵심인 무카이와 구라우치의 관계입니다. 구라우치 입장으로는 무카이는 잠깐의 대화밖에는 없는 사이입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20만엔'을 빌려주겠다고 한 것은 분명 선행입니다. 무카이 죽음의 원인이 될 수 없고, 이를 다른 사람이 비하할 수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때문에 지사가 '사람을 잘못봤다'며 구라우치를 내치려 한다는 설정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투서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이런 점에서 약간 부족함이 느껴져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05/01/03

황새 - 장 크로스토프 그랑제 / 이재형 : 별점 2.5점

황새 1 - 4점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재형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랜덤하우스중앙)

루이 앙티오슈는 공부에 지친 육신을 환기시키고자 양부모가 소개시켜준 막스 뵘이라는 조류학자의 "황새 추적" 아르바이트에 응한다. 막스 뵘이 고리를 끼운 황새들이 둥지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황새떼를 추적하여 밝혀내는 것이 목적, 이후 막스 뵘의 급작스럽게 사망 이후 죽음에 대한 의혹이 깊어지나 루이는 아르바이트를 계속한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중간에 만난 집시 조류학자와 이스라엘 청년의 의문의 죽음 (심장이 사라지고 난도질 당한 시체)을 접하고 막스 뵘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산,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거대 의료 봉사 조직에 대한 의문이 생긴 뒤 루이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황새들의 기착지인 중앙아프리카에 도착한 루이는 막스 뵘이 황새 다리에 끼운 고리를 통해 중앙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다이아몬드를 밀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새로운 심장이 없어진 변사체를 발견한 뒤 진정한 조직의 실체와 흑막을 알게 된다...

프랑스작가의 스릴러물. 방대한 조사와 기발한 아이디어가 잘 결합된 깔끔한 전개의 작품입니다. 특히 황새떼의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을 분석하여 "1. 황새가 운반할 수 있다 2.돈이 된다 3. 그 나라의 특산품이다"라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물건으로 "다이아몬드"를 설정한 아이디어가 신선합니다. 이 아이디어 하나만으로도 작품의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죠.
묘사도 괜찮아서 불가리아의 집시들과 이스라엘, 중앙 아프리카는 아주 실감나서 작가의 엄청난 사전 조사를 가늠케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묘사는 정말 대단했고요. 뭐라 표현하기도 어렵네요.

하지만 심장이 사라진 시체들과 진정한 조직의 흑막을 연결시키는 부분이 너무 작위적인 것은 단점입니다. 대상자들이 우연찮게 황새떼를 쫓는 루이와 접촉하게 되는 설정은 우연치고는 너무 심하거든요. 또 진정한 흑막으로 묘사되는 인물은 그야말로 "악의 화신"같은 인물로 그려지는데 묘사가 허황되고 만화적이라 앞부분의 치밀하고 교묘한 설정을 다 말아먹습니다. 요새 일본 만화도 이 정도로 유치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악의 정체가 얼마전에 읽은 "철의 장미"와 똑같다는 것도 저에게는 조금 아쉬웠고요.
거기에 더해 보스와의 최종 결전에서의 황당함은 그야말로 어이 상실이었어요. 앞부분에 잠깐 등장했던 인물의 혜성과도 같은 등장으로 해결되는데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질구레한 묘사와 설명 없이 그냥 루이가 끝내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텐데, 이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아니고 당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이외에도 흥행을 의식한 듯한 불필요한 요소들 -이스라엘 여성 사라와의 로맨스나 아프리카에서 동행한 티나라는 여성과의 정사 장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잔인한 묘사들 등- 이 많은 것도 불만스러웠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작가의 "미숙함"이 티가 나서 완성도가 떨어지지만 전체적인 설정과 짜임새가 제법 잘 살아있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기는 합니다. 우직하게 한길로 밀어 붙이는 원숙함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데뷰작이라니 뭐 이 정도면 합격점을 줄 만 하겠죠. 워낙 설정이 좋았고 묘사력도 수준급인만큼 후속작을 기대해 봅니다.

2015/11/20

내가 그를 죽였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내가 그를 죽였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예 시인 간바야시 미와코와 유명 작가 호타카 마코토의 결혼식에서 호타카가 독살당했다. 호타카에게 버림받은 동물병원 조수 나미오카 준코도 음독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동반 자살을 위해 호타카가 먹는 비염약에 독을 섞은 것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 결과, 그녀가 호타카의 비염약을 바꿔치기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와코는 약을 바꿔치기할 수 있었던 용의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려 하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로,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에 이어 범인을 명시하지 않는다는 실험적인 시도를 한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일단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보다는 추리적으로 훨씬 낫습니다. 특히 ‘필케이스에 전혀 다른 인물의 지문이 찍혀 있었다’는게 스루가 나오유키의 범행을 증명한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탁월합니다. 필케이스에 독약을 넣고 그것 자체를 바꿔치기한 것이라면, 당연히 호타카와 접점이 없는 다카히로는 용의자에서 제외됩니다. 남은 두 명인 스루가와 유키자사 중에서 스루가가 '호타카 전처의 짐을 맡았다'고 말했으니 범인은 스루가라는 결론이 도출되고요. 이 정도면 독자에게 충분히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본격 추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물론 미와코가 다카히로에게 케이스를 넘겨주었을 가능성도 있고, 유키자사 가오리가 호타카와 관계가 있었을 때 케이스를 확보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경찰에서 수사를 보강할 필요는 있겠지만, 독자는 넘어가도 무방할 듯 합니다.).

그 외에도 나미오카 준코가 사망한 장소를 밝혀나가는 디테일—상품 전단지에 쓴 유서, 머리에 묻은 잔디, 샌들에 묻은 흙, 짝이 맞지 않는 휴대폰 충전기 등—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실험적인 시도 때문인지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제법 많습니다. 우선 캡슐의 개수에 대한 지루한 공방이 그렇습니다. 자살 시체가 놓인 상황에서 과연 캡슐이 몇 개였는지를 세고 있을 정신이 있을까요? 스루가는 시간이 좀 있었으니까 혹시 몰라도, 방에 잠깐 숨어 있던 유키자사 가오리의 눈에 캡슐 개수가 들어왔다는건 영 설득력이 없습니다. 저만 해도 매일 먹는 알약이 지금 몇 개 남았는지 모르니까요. 게다가 그녀가 ‘여섯 개 있었다’라고 증언해봤자, 그 증언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건 핵심 증거(필케이스)에서 독자의 시선을 빼앗기 위한 억지 설정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워요.

또한 준코가 캡슐을 구한 시점이 금요일 오후였기 때문에 약통에 독을 집어넣을 틈이 없었다는 주장은, 뒷 부분에서 다카히로 혼자 1층에 있을 때 그녀가 필케이스에 독약을 넣었다는게 밝혀지면서 모순이 발생합니다. 누군가 집에 있을 때도 독약을 넣는 게 가능했다면, 밤에도 넣는 것이 가능했을 테니까요. 왜 이런 부분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에 더해 마지막 추리 쇼는 작위적이라는 단점의 절정입니다. 가가가 수집한 증거라면, 이런 비공식적이고 비효율적인 방식 대신 스루가를 바로 연행해 취조하는 게 더 합리적이니까요. 캡슐에 집착하면서 용의자들을 몰아붙이는 장면은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이런 연출이 있어야 소설로서 성립되니 트집 잡긴 애매하지만, 가가의 말처럼 애거서 크리스티의 세계에 가까운 소설같은 이야기라는건 분명합니다.

용의자인 스루가 나오유키, 유키자사 가오리, 간바야시 다카히로의 시점이 번갈아 전개되는 구성도 흥미로우나 이들 중 한 명이 범인이기에 전개 역시 객관적이지 않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최근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대부분이 이런 방식인데, 개인적으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네요. 범인 시점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야기를 가공한다는 점에서는 "악의"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악의"는 애초에 수기 형식을 빌린 서술 트릭물에 가까운 작품이니 비교 자체가 어렵지요.

또 호타카를 누구나 죽이고 싶을 정도로 인간적으로 문제가 많다고 묘사하여 용의자들의 동기를 그리고 있는데, 지나치게 주관적인 심리 묘사 탓에 오히려 감정선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에요. 특히 스루가의 속내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용의자들이 모두 자기 변호에만 급급하다 보니 오히려 간바야시 다카히로가 가장 수상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스루가는 흠모하던 여인이 죽었고, 유키자사는 낙태를 한 바 있어 ‘죽음’과 연결되지만, 간바야시는 여동생에 대한 그릇된 애정을 제외하면 호타카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동기 면에서는 가장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설령 동기가 있다 해도 여동생의 결혼식을 망칠 인물 같지는 않습니다. 동기를 드러내려면 본인의 시선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표현했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키자사가 아이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설정을 다른 인물의 시선을 통해 묘사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와 재미 모두 전작보다는 낫지만, 다양한 단점이 뚜렷한 범작이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는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와 마찬가지로 정답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추리소설로서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작품을 마무리한 점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좋은 점수를 주긴 어렵습니다.

2019/10/20

11문자 살인 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1.5점

11문자 살인사건 (개정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성 추리 소설가 '나'의 연인 가와즈가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에 얽혀있는 여러가지 의문을 풀기 위해 '나'는 친구인 편집자 후유코의 도움을 얻어 조사에 나선 뒤, 이 죽음에는 과거 요트 여행 사고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지만, 친구 후유코마저 죽고 말았다.... 

일본 추리 문학계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가 1987년에 발표한 초기작입니다. 발표로부터 따지면 무려 30년 이상 된, 나름 고전이지요.

보통 초기작은 모든 아이디어와 역량을 쏟아부은 역작이거나, 아니면 습작 수준을 갓 벗어난 어설픈 작품이거나 둘 중 하나인데, 이 작품은 아쉽게도 후자에 가깝습니다. 한마디로 어설프니까요. 범인도 어설프고, 이를 막으려는 일족의 행동도 어설프고, 주인공도 어설프고, 전개도 어설프고 작위적입니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설프고 헛점이 많아서 궁금증이 끊이지가 않을 정도에요

'나'가 무언가 이상하다는걸 깨닫는 장면부터 그러합니다. 왜 연인인 가와즈 마사유키는 '나'에게 진상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까요?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로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데 말이지요.
가와즈의 유품 원고와 자료를 받은 뒤 이 자료가 뒤져진걸 알고 사건의 진상을 캐 나간다는 계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료를 훔쳐낸 일당은 왜 제대로 정리해서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않았던걸까요?
또 일당이 속속 살해당하는 와중에 야마모리 사장과 일당은 범인이 누군지 눈치챈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았을까요? 일당이 당하는 복수의 계기가 밝혀지기를 원치 않아서? 그러기에는 증거가 너무 부족합니다. 증거라고는 후유코가 찾아낸 다케모토 술병 속 메모가 전부, 그나마도 다케모토가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무인도에 도착했다는 말 뿐이지요. 이 정도로 경찰이 진상을 알아내고 야마모리 일당을 추궁하는건 불가능합니다. 유일한 증거인 가와즈의 원고는 이미 일당이 처분해 버리기도 했고요.

물론 일당이 경찰의 손을 빌리지 않고 그들 스스로 후유코를 없애고 진상을 영원히 숨기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만한 재력도 있고, 사람도 충분했지요. 하지만 이를 위해 '나'를 요트 여행에 초대하고, 그녀가 후유코와 동행하게 만든다는 계획은 말이 안됩니다. 후유코가 의심하지 않고 함정 한 가운데에 뛰어들게 만드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나' 역시도 사건 진상을 쫓는 중이니 당연히 위험 인물이잖아요? '나'를 끌어들이지 않고 후유코를 사고로 위장하여 죽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거에요. 아니면 후유코가 습격하게끔 만들고 오히려 역습하여 정당방위로 죽일 수도 있었을테고요. 이야기 중에서도 일당은 사카가미가 살해될 때 이미 일당 중 한 명이 숨어있었다는 내용이 등장하니 충분히 가능했을겁니다.

반전이랍시고 등장하는 범인의 정체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인이 후유코라는 단서는 전무하다시피 한데 이게 어떻게 반전이 되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야말로 뜬금없기 그지없습니다.
동기도 설득력이 부족해요. '현실의 사건은 흑백이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고, 선과 악의 경계가 애매하지만 소설은 완성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가와즈의 말로 복잡한 동기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지나치게 멋을 부렸을 뿐 실제로는 선과 악의 경계는 명확합니다. 목숨을 건 구조의 댓가로 여성의 몸을 요구한 다케모토는 소악당, 다케모토를 죽여서 이 사실을 덮으려던 일당들은 대악당입니다. 그냥 다 악당이에요. 특히나 일당이 죽어나갈 때 일족 이외의 인물부터 죽여서 입을 막으려던 야마모리 사장이야 말로 악당 두목급이고요. 여자의 몸을 구조 댓가로 요구하는 뻔뻔스러운 놈의 복수를 하겠다고 관계자들을 죽여나간 후유코도 악당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서야 대관절 뭘 이야기하려고 한 건지 헛갈리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전개가 어설프다면, 최소한 히가시노 게이고다운 트릭이나 추리적인 전개라도 뒷받침되어야 했을텐데 아쉽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유일한 트릭은 후유코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시계를 조작했다는 것 뿐이니까요. 게다가 대단한 트릭도 아니며 작 중에서의 비중도 낮습니다. 주인공이 진상을 알게 된 건 시각장애 소녀 유미의 증언 덕분이기도 하고요.
또 야마모리 사장 일당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건 결국 그 식솔과 고용인들이라는 점에서 알리바이 트릭이 필요한지도 의문이 듭니다. 야마모리 사장을 의심하면서 이 사람들 증언은 곧이 곧대로 믿는다는게 가능할까요?

"11 문자 살인 사건"이라는 제목도 기대를 완전히 저버립니다. 뭔가 그럴듯한 암호 트릭이라도 등장할 줄 알았더니만 그냥 후유코가 보낸 협박 편지의 글자 갯수에 불과한 탓입니다. 이 정도면 거의 제목 사기입니다.
등장하는 경찰의 역할도 설득력을 저해시키는 요소입니다. 과거 어떤 요트 여행의 생존자들이 차례로 살해당한다면, 생존자들을 조사하여 동기와 범인을 밝혀내는게 당연하잖아요? 일개 추리 소설가가 발품을 팔아서 알아낸 사실을 경찰이 모른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가와즈 사건까지는 그렇다치더라도 카메라맨 미유키가 살해된 사건부터는 연관성을 알아내고 수사를 펼쳤어야 합니다. 아니면 사카가미 사건에서는 최소한 관련성을 알아낼 수 있었겠죠. 이런 점을 본다면 '나'가 입을 다물었다 치더라도 야마모리 사장 일당이 빠져나가기는 어려웠을거에요. 무려 3~4명이 죽어나간 살인극을 경찰이 진상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덮어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하긴, 이 작품 속 경찰을 본다면 충분히 그럴만 하기도 싶긴 하지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도 초기에는 많이 어설펐다는걸 증명해 주는 수준 이하의 졸작입니다. 작가의 광팬이 아니라면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작품마저 재출간되다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름 값이 정말 대단하다 싶네요.

2010/08/13

소문 - 고이케 마리코 / 오근영 : 별점 2점

소문 - 4점
고이케 마리코 지음, 오근영 옮김/북스캔(대교북스캔)

"아내의 여자친구"로 접해보았던 일본 여성작가 고이케 마리코의 단편집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싹트는 악의와 살의를 주제로 한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편인 "팽이멈추기"는 너무나 활동적인 남편을 증오하고 조용한 삶을 찾고자 하는 아내의 살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억지가 너무 심하네요. 남편의 행동이 살의를 불러 일으킬만한 것이었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테니 논외로 치더라도, 남편을 이렇게나 증오한다면 이혼을 생각하거나 최소 별거를 염두에 두는게 상식적입니다. 중간 과정 없이 곧바로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미국 단편에서 많이 봄직한 ‘돈만 쓸 줄 아는, 성적인 매력도 사라진 아내에게 걸려있는 거액의 생명보험’ 이라는 동기라도 있었더라면 모르겠지만요. 

그나마 마지막 반전이 괜찮기는 했지만 기본 내용이 별로라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두 번째 작품 "재앙을 부르는 개"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은 같습니다. 유기견을 주워와서 키우게 된 이후, 다른 가족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불행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개를 버릴 결심을 한다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부터가 정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작품에서 설명되듯 정신병원에 가 봐야 하는 수준이니까요.

게다가 주인공의 불륜, 거기서 촉발된 한 여인의 자살 시체 발견 이후 이어지는 반전은 우연과 억지가 어이를 상실한 수준입니다. 주인공이 남자이기 때문에 작가 특유의 섬세한 여성의 심리 묘사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감점 요소고요. 

자살 시체 발견 시의 묘사는 섬찟했던 만큼, 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짤막한 도시 괴담 정도로 풀어나가는게 더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세 번째 작품 "쓰르라미 동산의 여주인"은 정통 범죄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주인공이 3류 탤런트인데다가 대부호의 첩과 엮여있는 만큼, 일상계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어렵지요. 그런데 이 작품이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나았습니다. 일상 속에서의 살의를 억지로 끄집어내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살의가 싹트는 상황이 더 설득력이 있는건 당연합니다. 그리고 범행을 저지른 뒤에 밝혀지는 진상과 반전도 서늘한 맛을 전해주고요.

‘남자를 잡아먹는 요부’ 이미지가 색다르게 구체화된 작품으로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번 울린다"의 현대화된 도시 버전 작품으로 보이기도 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 작품이자 표제작인 "소문"은 소문으로 인해 직업을 읽게 된 간병인 다마오가 자신을 흠모하는 대학생 게이타에 의해 비뚤어진 방향으로 폭주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수록작 중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싹트는 섬찟한 살의’라는 테마가 가장 설득력있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동기와 과정 모두가 설득력이 있는 덕분입니다. 주인공이 다마요에서 게이타로 옮겨가는 전개도 효과적으로 사용되었고요. 노처녀나 중년 독신 여인이 사소한 이유로 폭주한다는 소설은 "유니스의 비밀" 등 많이 있긴 한데 이 작품은 외로운 일본 현대 사회의 일면을 느끼게 하는 여러 묘사와 함께 게이타라는 청년의 이상한 애정이 동기가 된다는 점이 독특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결론적으로 책의 평균 별점은 2.25점.. 2점 입니다. 앞선 두 작품이 별로였으며, 기대했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싹트는 섬찟한 살의'라는 테마가 대체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지 못한 탓입니다.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 역시 크게 돋보이지 않았고요. 일상 속 악의라는 테마를 추리 소설로 구현하는건 아무래도 와카타케 나나미 쪽이 더 나아보이네요. 와카타케 나나미의 신작이나 찾아서 읽어봐야겠습니다.

2024/03/01

원티드 맨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점

원티드 맨 - 4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네브래스카 시골 마을 펌프장에서 한 남자가 살해당했다. 2인조 범인들은 마을 술집에서 일하는 카렌을 납치하고, 그녀의 차를 타고 도주했다. 하지만 2인조라는게 들통났기 때문에, 인원수를 속이고자 히치하이커 한 명을 태웠다. 그 히치하이커는 잭 리처였다. 맥퀸과 킹에게 수상함을 느낀 잭 리처는 어떻게든 카렌을 구하려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둘이 카렌과 함께 떠나는걸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사건을 수사하는 FBI 수사관 줄리아 소렌슨을 만난 잭 리처는 그녀의 차를 타고 뒤를 쫓다가 불에 탄 카렌의 차와 변사체를 발견했다. 줄리아에게 수사를 중지하라는 기묘한 상관의 압박이 들어오는 와중에, 카렌의 딸마저 유괴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FBI에 이끌려 그들의 은신처로 향한 잭 리처는 그곳에서 살아있는 카렌과 만났다. 카렌의 정체는 테러 조직 '와디아'에 잠입한 FBI 수사관 맥퀸을 지원하기 위한 또다른 FBI요원이었다. 그녀를 덥치려던 킹을 죽이고 불태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 탓에 맥퀸의 정체가 드러났고, 최소 8시간 이상은 걸릴 SWAT 팀을 기다리지 못한 리처, 줄리아, 카렌은 맥퀸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잭 리처 시리즈 16번째 작품. 작품은 14번째 작품인 "악의 사슬"에서 이어집니다. 15번째 작품인 "하드웨이"는 리처가 아직 군대에서 복무 중일 때의 이야기를 그렸기 때문이지요.

한 때 유행했던 잠입 수사관이 등장하며, FBI 수사관 시점에서 수사가 이루어지는 범죄 수사극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히치하이킹으로 얻어탄 차의 3인조가 수상하다는걸 깨닫는 초반부터 잭 리처의 관찰력과 추리력이 잘 드러납니다. 그들이 똑같이 맞춰입은 셔츠는 자세히 보니 기업체 유니폼이 아니었고, 킹이 떠벌인 말과 다른 여러가지 오류들 - 3시간 동안 쉬지않고 달려왔지만 연료는 별로 줄지 않았다, 아무도 기름을 넣을 때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 이 대화 중에 속속 드러나며, 심지어 킹은 멤버인 카렌의 커피 취향마저 모르는 등 수상한 단서들이 계속 제시되거든요. 리처가 드러난 단서를 조합하여 내 놓는 추리들도 모두 합리적입니다.
범인들이 남긴 정보를 가지고 소렌슨에게 내 놓는 여러가지 추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론적으로 범인들은 이 지역 출신이 아니며,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벌어졌다는 추리로 이어지며 이는 모두 사실로 밝혀집니다. 카렌의 딸을 왜 유괴했을까?라는 의문을 풀어나가는 '와이더닛' 방식 추리를 펼치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1030" 리뷰에서 문제로 지적했었던 부분인데 말이죠. 참고로 납치한 이유는 카렌에게 딸을 데려다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카렌을 '은신처'로 옮길 때 그녀가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리처의 특기인 수학도 잘 활용됩니다. "지나쳤던 삼거리와 사거리의 비율은 2대 3이었다. 서로 간의 거리는 평균 13킬로미터였다. 땅딸보의 차에 남아 있는 기름으로는 대략 1시간을 달릴 수 있다. 따라서 그 1시간을 달린 뒤에도 리처가 킹과 맥퀸의 도주로를 그대로 쫓아가고 있을 확률은 약 650분의 1이었다."처럼 범인들을 제대로 쫓아갈 수 있는 확률을 순식간에 계산하는 식으로요.

'와디아' 조직이 일종의 뒷세계 은행으로, 핵 폐기물 본위제(?)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아이디어는 참신했고, 조직의 근거지인 구 미사일 격납고 설정과 묘사도 탄탄합니다. "메탈기어"스러운 잠입 액션물 분위기도 잘 살리고 있고요. 이 과정에서 잭 리처가 맨손보다는 콜트 자동소총, 글록 19와 17등 총을 더 많이 활용하는 것도 이채로왔습니다. 이는 "사라진 내일"과 유사한데, 아무래도 대형 테러 조직이 상대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악의 사슬"바로 다음 작품이라 코뼈가 부러진 채로 이동하는, 그리고 코뼈가 부러진게 굉장히 강조되는 묘사도 반가왔습니다. 시리즈 팬이라면 이런 디테일들은 즐거울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단순 강도 살인 사건에서 스테일이 커지면서 이야기가 산으로 갑니다. 핵 폐기물을 보유한 테러 조직이 미국 캔사스 시골 농장지대에서 암약한다는건 비현실적에요. 최초 피해자가 CIA 지부장급 요원인데, 알고보니 CIA에 잠입한 와디아의 고정간첩이었다던가, 알고보니 카렌이 캔자스시티 지부에서는 알지 못하는 FBI 본부 출신 잠입 요원이었다는 등의 설정도 억지스러웠고요.

설명도 많이 부족합니다. 펌프장에서 맥퀸과 킹이 자기들 차를 타고 오지 않은 이유 등 세세한 디테일들은 설명되지 않거든요. 펌프장에서 피해자가 맥퀸을 공격했던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맥퀸의 정체(잠입 수사 요원)을 알아챘다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맥퀸을 죽일 이유는 없었거든요. 본부로 돌아가 죽이는게 맞지요. 우리편이 훨씬 많으니...
맥퀸의 수사가 이렇게 이어져야 했을 까닭 역시 모르겠습니다. 맥퀸의 GPS 정보만 보아도 테러범들의 본거지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왜 진작에 타격해서 섬멸하지 않은걸까요? 맥퀸이 사로잡힐 때까지 기다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우리 쪽 '좋은 사람' 들이 죽어나가는 전개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착한 시골 마을 보안관인 굿맨의 죽음이야 그렇다쳐도, 줄리아 소렌슨이 저격총에 맞아 사망한다는건 황당했어요. 리처의 분노에 불을 붙여 홀로 테러리스트들을 섬멸한다는 이야기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은데, 이런 설정 없이도 리처라면 충분히 혼자서 쳐들어가 악을 물리치고 맥퀸을 구해냈을 겁니다. 지나친 흥미 본위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와디아 조직이 줄리아를 저격해서 죽였다면, 당연히 경계 태세를 강화했어야 했는데 이를 대충 퉁치고 넘어가는 전개도 어설퍼 보였고요.
마지막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카렌이 등장하여 리처를 구해준다는 것도 작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에 가까운 2점입니다. '히치하이킹을 했는데, 차 주인이 알고보니 살인범'이라는 설정을 살린 수사물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2023/12/08

hansang의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15선

전에 올렸던 일본 헌책방의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을 보고 저도 꼽아봤습니다. 이른바 hansang의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15선! 제가 읽고 리뷰를 올린 58권 중 별점이 높은 작품들입니다. 순위는 무순이고요.

1년 전에 비슷한 글을 올렸었는데, 결과는 동일합니다. 고작 6권 더 읽었을 뿐이니 당연합니다. 평이 좋았던 "백조와 박쥐"가 새롭게 순위권에 올라갈까 기대했는데 역부족이었네요.
선정된 작품을 보니, 예나 지금이나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본격 추리물'을 훨씬 더 좋아한다는걸 바로 알 수 있군요. 단편집이 많은 것도 눈에 뜨입니다. 단편들은 보통 본격 추리 성향을 많이 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빼어난 수록작 한 두편이 전체 별균 평점을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 중 딱 한 권을 고른다면, "악의"를 꼽겠습니다.

2014/07/29

풍장의 교실 - 야마다 에이미 / 박유하 : 별점 2.5점

풍장의 교실 - 6점
야마다 에이미 지음, 박유하 옮김/민음사

표제작을 포함하여 3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작품집. 이유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오래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던 차에 읽게 되었습니다. 

일본 여류 작가의 작품이구나!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는 작품들로 고이케 마리코나 가쿠타 미쓰요의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일상 생활 속 악의와 살의를 상세한 심리묘사로 그린 소품들이라는 점에서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작품들이 일종의 "성장기"라는 차이점은 있지만요.
그래서 두 작가 작품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범죄물적인 재미는 고이케 마리코보다 못하고, 일상 속 서늘한 심리묘사는 가쿠타 미쓰요보다 못한 느낌이 듭니다. 딱 세 편만 실렸다는 점에서 풍성함도 부족하고요.

그래도 "풍장의 교실"만큼은 확실한 수작일 뿐더러, "제시의 등뼈"를 제외한 두 편의 이야기는 나름 극적 반전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는 있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 일본 여류작가의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풍장의 교실"

잦은 이사를 통해 어떻게 주변에 녹아드는지를 깨우친 어린 소녀가 왕따를 당하는 상황에 놓이지만, 극복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주인공 소녀 모토미야 안의 1인칭 심리묘사가 엄청나게 상세하고 집요해서 읽으면서 내내 감정 이입하게 만드는 솜씨가 발군입니다. 특히 왕따를 당하는 과정의 몰입감은 장난이 아닙니다. "악의"라는 것을 이렇게나 구체화시켜 묘사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할 뿐이에요. 안이 왕따를 설명하며 그냥 가려운 느낌, 누군가가 긁으면 정말로 가려워져서 또 긁고, 더는 참을 수 없어져 일제히 손톱을 세운 뒤 긁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겨 이유도 모른 채 손가락을 움직인다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또 단순한 왕따 이야기가 아니라 극적 반전을 갖추었다는 매력도 겸비하고 있습니다.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가족들의 대화를 듣고 모든 것을 이겨낸 뒤 오히려 "경멸"을 무기로 반격한다는 결말이거든요. 더욱이 왕따의 원인이 된 특정 선생님의 애정을 오히려 이용하여, 자신의 매력을 더욱 어필한다는 점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안의 편인 듯 보이지만 딱히 행동을 보여주지는 않는 "악코"라는 학생의 존재는 불필요하지 않았나 싶고, 이런저런 곁가지 이야기로 길어진 감은 없잖아 있으나 충분한 수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나비의 전족"

어렸을 때부터 항상 함께 했지만 그녀의 배경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소녀가 친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남자를 만나고, 육체 관계를 가진 뒤 벌어지는 파국과 그 이후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풍장의 교실"과 마찬가지로 1인칭 시점으로 그려지는 작품으로, 심리묘사는 역시나 대단합니다. 하지만 너무 완벽한 친구 에리코를 차버리기 위해(?) 남자와의 관계를 선택한다는 전개는 크게 와닿지는 않아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히토미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죠.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가치 없게 내버렸는지를...

마지막에 "친구"가 아니라 정말로 "이성"으로 좋아했을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괜찮았지만, 설명이 조금 부족했습니다. 이래저래 조금 애매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제시의 등뼈"

좋아하는 남자의 아이 제시를 돌봐주게 된 코코의 이야기.

애정 없는 부모 아래에서 어리광을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제시, 그리고 아이 없이 남자와의 애정만으로 살아가는 코코의 대립과 성장, 관계 회복이 그려지는데,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제시라는 아이의 등뼈가 증오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마지막 부분이 살짝 감동을 주긴 했지만, 워낙에 예상했던 그대로의 결말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05/09/27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 2 - 정태원 편역 : 별점 3점

에드가상 수상작품집 2 - 6점
정태원 엮음/명지사

아주 예전에 사긴 했지만 분실한 듯 해서 외근차 광화문에 나갔다가 우연찮게 들린 교보문고에서 발견, 구입한 책입니다. 예전에는 만원 이하였던 것 같은데 이번에 다시 사니 만 오천원이나 되더라구요? 아까와라....  다시 읽다보니 기억나는 작품이 너무 많아 더 돈이 아까왔습니다...

그러나 책 자체만 놓고보면, 역시나 충실합니다. 다만 트릭보다 드라마와 극적 구조에 더 비중과 가치를 두는 경향이 서서히 보이는, 고전 황금시대와 현대를 잇는 가교역활을 하는 작품들이 많더군요. 저같은 고전 퍼즐 트릭 본격 추리물 팬에게는 약간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이만한 수준의 단편을 한권에 모아놓은 앤솔러지는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간략한 수록작 소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중 개인적인 베스트로는 거장 로열드 달의 "여주인", 간단하지만 이채로운 에드워드 D 호크의 "직사각형의 방", 단편의 교과서적인 작품인 셜리 잭슨의 "악의 가능성", 역사추리물에 가까운 유머러스한 단편인 워너 로우의 "세계를 속인 남자"의 네 편을 꼽습니다. 모두 별점 4점입니다.



윌리암 오파렐의 "그쪽은 어둠"
오해로 비롯된 비극을 다룬 소품. 그닥 특이한 점은 없지만 서늘한 느낌이 드는 도회적인 분위기가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

로얄드 달의 "여주인"
아토다 다카시의 "나폴레옹 광"이 연상되는, 로얄드 달 특유의 기묘한 맛이 잘 살아있는 작품. 이런저런 앤솔러지에 많이 수록되어 있는 걸작. 별점은 4점입니다.

존 더람의 "호랑이"
일종의 청소년 범죄극이라 할 수 있는데, 60년대 당시 미국 문화를 잘 대변하고 있는 점 외에는 별로더군요. 추리물로 보기도 좀 어렵고요. 에드가상을 어떻게 수상했는지 알 수가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에이브람 데이비슨의 "라호아 병영 사건"
과거 라호아 병영에서 있었던 사건을 추억하는 한 노인의 회고담. 좋은 소재에 내용도 흥미진진하나 반전이 예상 가능한 것이라 막판에 힘이 좀 달린다는 단점이 있긴 합니다. 그래도 단편으로서의 미덕은 잘 살아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데이빗 엘리의 "요트 클럽"
스텐리 엘린 분위기도 좀 나는 서늘한 반전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다른 앤솔러지에도 수록되어 있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서늘한 반전을 위한 앞부분의 묘사가 좀 지루한 편입니다. 보다 짧게 줄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패트릭 퀜틴의 "운없는 남자"
그야말로 "미국적"인 느낌이 가득한, 아내를 죽이고 새 출발을 꿈꾸지만 계속해서 실패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반전도 제법 괜찮습니다.
약간 뻔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유머러스한 맛과 전개는 확실히 고전 시대와 다른 분위기를 전해 줍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로렌스 트리트의 "살인의 H"
정통 경찰 수사 - 형사물로 사건과 전개는 흥미진진한데 사건이 밝혀지는 것이 순전히 우연에만 의지하고 있다는 치명적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캐릭터는 마음에 들었는데 트릭면에서 아쉬움을 주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셜리 잭슨의 "악의 가능성"
좋은 작품입니다.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묘사에 인간의 잔인한 내면을 투영한 캐릭터가 압권으로 이 작품집 최고의 작품 중 하나라 생각되네요. 시골마을이 배경인 잔잔한 소품으로 짧지만 인상적인, 단편의 특성을 잘 살린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리스 데이브스의 "선택된 것"
일종의 범죄물인데 도저히 무슨 이야기인지... 한 남자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따라가는 과정같은 것은 루스 렌들의 "내눈에 비친 악마"와 비슷한데 내용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편입니다. 시점변화가 많은 독특한 스타일때문이긴 합니다만 제 취향은 아니더군요. 별점은 2점입니다.

에드워드 D 호크의 "직사각형의 방"
불가능 미스테리의 대가 에드워드 D 호크의 불가능 미스테리가 아닌 심리물로 레오폴드 경감 시리즈입니다. 좀 썰렁하긴 하지만 인상적인 반전이 돋보이는 수작이죠. 단편의 대가다운 호흡 조절을 엿볼 수 있는, 짧지만 인상적인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워너 로우의 "세계를 속인 남자"
가상 역사물이라고 해야 할까요? 고갱과 서머셋 모옴 등 실제 인물들이 등장하여 좌충우돌하는 유머스러움이 잘 살아 있는 유쾌한 작품으로 마지막 반전까지 숨쉴틈 없는 재미를 가져다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니 고갱 작품이 다시 보고 싶어지더군요. 별점은 4점입니다.

조 고어즈의 "잘 있거라 고향아"
드라마로 특이한 맛은 없습니다. 범죄물이긴 한데 에드가상을 탈 만한 이유를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M.F 브라운의 "리가 숲의 짐승은 더 난폭하다"
"몽환적"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정신사나운 이야기로 심리 묘사와 두서없는 내용이 정신이 하나도 없는 어수선한 작품. 60년대 히피문화의 하나인 "마약"에 의한 의식 흐름을 다룬 작품들과 유사한 스타일로 핵심 뼈대 자체는 날이 잘 서 있긴 합니다만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16/09/03

크리피 - 마에카와 유타카 / 이선희 : 별점 2점

크리피 - 4점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창해

외딴 주택가에 거주하며 가끔 TV에 출연하던 범죄심리학 교수 다카쿠라는 제자 린코와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인 고교 동창생 노가미가 연락해서 8년 전 일어났던 미제 사건인 혼다 일가 실종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노가미는 다카쿠라의 집까지 직접 찾아올 정도로 열의를 보였지만, 실종된 후 다카쿠라 옆집 노모녀 화재 현장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뒤 다카쿠라의 옆집 니시노 일가의 수상쩍은 가족 관계가 점차 불거졌고, 결국 니시노의 폭주가 일어나는데...

격조했습니다. 인륜지대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중대사인 "이사"를 하느라 지난 한 주간 정말 정신없이 보냈네요.

어딘가의 멋드러진 소개글을 보고 읽게 된 작품입니다. 작가 마에카와 유타카의 출세작이지요. "검은 집"처럼 평범함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싸이코패스의 가공할 범죄를 그리고 있습니다. 약간의 미스터리가 가미되어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초~중반부는 인상적입니다. 다카쿠라가 거주하는 주택 단지 구성이 8년 전 히노 시에서 일어난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 현장과 유사하다는게 드러나고, 옆집 남자 니시노와 가족이 뭔가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다가 갑자기 그 집 딸이 "그 사람은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고, 그 뒤 급작스럽게 옆집 남자가 돌변하여 폭주하는 과정까지는 정말 대단합니다. 너무나 평범해 보였던 니시노가 식칼을 집어들고 광기를 보이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백미입니다.

알고 봤더니 옆집 남자 니시노가 모든 연쇄 살인의 범인인 "위장 살인마"이며, 그의 정체는 사건을 추적하다가 실종된 후 결국 사체로 발견된 형사 노가미의 형 야지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전개도 괜찮았어요.

하지만 좋았던 중반부를 지나 노가미가 유서처럼 남긴 편지를 통해 야지마의 범행이 일목요연하게 밝혀진 후부터는 힘이 빠져버립니다. 370페이지라는 분량에서 240~50페이지 정도가 되면 진상이 밝혀지는데, 이후는 완전히 사족입니다. 너무 일찍 답을 정해놓고 이야기가 흘러가버리니 재미가 있을 리 없지요. 이렇게 쉽게 밝혀질 것을 뭐 이리 질질 끌었나 싶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수사도 어설펐고요.

게다가 마지막 반전 — 야지마가 죽인 줄 알았던 노가미는 사실 전처 소노코가 죽였다, 야지마는 뒷처리를 도와준 것일 뿐이다, 편지 역시 소노코가 쓴 것이다 — 는 그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정의감을 불태운 줄 알았던 노가미가 형 야지마 못지않은 쓰레기일 뿐이었다는건 독자를 우롱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진상을 밝히는 다카쿠라의 추리도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는 문제도 크고요. 소노코의 양녀 유가 사실은 실종된 여고생 미오였고, 야지마는 이미 소노코에 의해 살해된 뒤였다는 나름의 해피엔딩(?)을 그리기 위한 억지 전개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도 야지마가 구태여 오와다 옆집에 살면서 정보를 캐내 스토커 짓을 한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뭔가 있는 것으로 보였던 주인공 다카쿠라와 여대생 린코의 플라토닉한 사랑 이야기는 야지마와의 최종 대결에서 오와다가 죽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온 것 이외의 가치가 없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린코는 비중에 비하면 하는 것이 너무 없거든요. 비중을 볼 때 다카쿠라의 불륜 상대가 아니라면 최소한 범죄 심리학 전문가로서 뭔가 보여줬어야 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위장 살인마"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한 가족에 침입하여 가장 행세를 하며 가족들을 한 명씩 차례로 죽이는 악의 천재 야지마의 능력이 전혀 부각되지 않는 점입니다. 작품의 설득력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야지마가 어떻게 가족들을 지배했는지를 보다 자세하게 서술했어야 합니다. 작중 묘사된 정도로는 설득력이 너무 약해요. 다카쿠라가 잠깐 설명한 대로 공포와 협박, 좁은 공간의 3가지가 갖춰져 마인드 콘트롤이 용이했다 하더라도, 외부 활동을 했음이 분명한 아들과 딸이 잠자코 오랜 기간 그의 말을 따랐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이지가 않는 탓입니다. 비슷하게 싸이코패스의 치밀한 범죄가 그려지는 작품들 — 앞서 말씀드린 "검은 집"을 비롯해서 — 은 동기는 물론 범행 과정에 있어서도 범행의 현실성을 높게 그리고 있는데 말이지요. 확연히 비교되는 단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역대급 초반부를 지녔지만 중반부부터 힘이 빠지기 시작해서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좋은 리뷰로 존경해 마지않는 정윤성님의 리뷰에 100% 동의하는 바입니다.

조금 조사해보니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으로 영화가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불필요한 요소 (린코, 반전 등)를 다 쳐내고 범죄 심리학자 다카쿠라와 형사 노가미 (그리고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다니모토)가 악의 천재 야지마와 대결하는 구도를 보다 선명하게 그려낸다면, 즉 선–악 구도를 명확하게 각색한다면 소설보다는 훨씬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