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과 영혼의 경계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송태욱 옮김/현대문학 |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키는 아빠 겐스케가 대동맥류 수술을 받다가 죽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의사가 될 결심을 했다. 데이도 대학 의대를 졸업한 그녀는 아빠를 수술했던 니시조노 교수 팀에 소속되었고, 이후 엄마 유리에와 니시조노 교수가 재혼한다는 사실과 아빠가 경찰이었을 당시 추격하다가 교통 사고로 사망한 소년이 니시조노 교수의 아들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빠 죽음에 더 큰 의심을 품게 되었다.
한편 데이도 대학 병원의 간호사 노조미와 교제하고 있는 전자 기술자 나오이 조지는 노조미로부터 병원에서 아리마 자동차의 사장 시마바라 소이치로가 곧 수술을 받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모종의 계획을 시작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의학 드라마이자 범죄 스릴러물. 의학 드라마는 유키와 니시조노 교수 사이의 이야기에서 주로 등장합니다.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게, '종합병원'같은 의학 빙자 연애물같은건 아니에요. 유키가 겐스케가 죽은게 정말 의료 사고였는지, 아니면 니시조노 교수가 유키의 엄마 유리에와 불륜 관계라서 아빠를 실수로 위장해 죽인건지, 아니면 아들의 복수였는지에 대해 추적하면서 독자를 고민에 빠트리기 때문이지요. 동기가 많은 탓에 진상도 굉장히 궁금하더라고요. 이렇게 여러가지 동기를 쌓아나가는 솜씨는 확실히 잘 나가는 작가다왔습니다.
의학 드라마로서의 가치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야기 핵심이 의사로서의 '사명'인 탓입니다. '사명'은 유키의 아빠 겐스케의 입을 빌어 "인간은 그 사람이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데, 전개를 통해 니시조노 교수는 그의 사명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항상 최선을 다했다는게 밝혀지게 됩니다. 어차피 겐스케 죽음의 진상은 유키가 절대로 알아낼 수 없었을 터라, 이런 식으로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전개와 결말 모두 독자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끔 잘 그려지고 있어요.
이를 의학 드라마라면 반드시 클라이막스에서 보여줄 '위험한 수술의 성공' 이라는 전형적인 공식을 이용하고 있는데 아주 흥미진진했습니다. 조지의 테러로 수술의 성공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온갖 노력을 짜내어 시마바라의 수술을 이어가는 과정은 왠만한 모험 소설 못지 않은 긴장감과 스릴을 가져다 주는 덕분입니다. 이만큼의 노력을 기울이는 의사가 사람을 일부러 죽일리 없다는 설득력도 갖추면서요.
그리고 시마바라가 수술받을 때를 노려 병원을 정전시키는 조지의 계획이 펼쳐지는 부분이 범죄 스릴러물 부분인데, 여기서는 탁월한 장르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실력이 눈부시게 빛납니다. 조지의 계획이 아주 그럴듯 했던 덕이지요. 처음에는 단순히 심폐 소생기 전원만 건드리는 수준으로 보였지만, 나중에 조지가 일으켰던, 혹은 행했던 소소한 사건들 모두 - 대표적인 예는 처음에 기묘한 협박장을 보냈던 이유입니다. 자신의 계획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가 목적이었지요. - 타당한 이유가 있었으며, 계획 역시 굉장히 스케일 크고 잘 짜여진 것이었다는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나나오 형사가 협박범의 진짜 목적은 시마바라 소이치로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벌여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전개되는 추리적인 부분들도 볼만했습니다. 나나오 형사는 범인의 동기를 밝혀내기 위해 아리마 자동차의 과거 과실을 조사했고, 단순히 과실 피해자가 아니라 과실로 인해 수술 골든타임을 놓쳤던 다른 피해자의 애인이었던 조지가 드러나게 되거든요. 과실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서 처음에는 용의 선상에 오르지도 않았었는데, 간접적으로 피해를 보았다는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유키가 조지의 얼굴을 살짝 보고 기억하고 있었다가 이를 나나오 형사가 가지고 있던 사진을 우연찮게 보고 떠올린다는 작위적인 요소는 조금 거슬리기는 했습니다만, 이 정도는 봐 줄만 하지요.
정체가 드러난 이후에도 조지가 본인 이름으로 숙박했던 호텔을 경찰이 덮쳤음에도 현장에 없었다는 식의 두뇌 게임도 볼만 했습니다. 경찰에게 정체가 발각날 것을 대비해서 미리 본명으로 추가 예약을 해 놓았을 뿐, 조지의 은신처는 따로 있었다는 공격을, 범인이 호텔 예약 시 특별한 '층'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통해 그 호텔은 저층에서는 데이도 대학 병원이 보이지 않으니 이건 위장이다! 라고 나나오 형사가 받아치는 식인데 재미있었어요.
조지가 전자 기술 전문가로서 만들어내는 여러가지 장치들도 설득력있게 묘사되고 있고요.
그러나 조지의 계획도 생각해보면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조지가 노조미를 유혹해서 사귀게 된 것은 언젠가 데이도 대학 병원에서 시마바라 소이치로가 수술을 받을거라는 막연한 기대에서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는 것 처럼요. 그리고 노조미가 수술실에 들여보내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할 속셈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간호사를 유혹하려면 시간이 없잖아요. 또 수술 중 정전을 일으키는 테러를 일으킬 수 있었다면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쓰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폭탄 등을 설치할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했을텐데 말이죠. 시간이 필요한 계획을 세우다 보니, 결국 노조미가 감정에 호소하자 복수를 포기하고 말았으니까요. 여러모로 구멍이 많은 계획이었어요.
의학 드라마 부분에서 니시조노 교수가 유키의 엄마 유리에와 재혼을 앞두고 있다던가, 니시조노 교수 아들 사건과 같은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유키와 니시조노 교수간 갈등이 약해질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이런 설정에 대한 분량도 필요 이상으로 길다고 느껴졌고요. 마지막에 조지와 노조미의 감동적인 엔딩도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범죄 스릴러 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명성에 값하며, 의학 드라마로서도 평균 이상의 재미를 가져다 준다 생각됩니다.
이시하라 사토미 주연의 드라마도 한 번 보고 싶네요. 생각보다 스케일이 큰데 어떻게 구현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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