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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7

공주의 죽음 - 리전더 / 최해별 : 별점 2.5점

 

공주의 죽음 - 6점
리전더 지음, 최해별 옮김/프라하

오랫만에 읽어보는 미시사문화사 서적. 이야기는 서기 6세기, 유목민족인 선비족 탁발씨가 건립했던 북위 왕조에서 일어났던 한 건의 형사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북위 난릉장공주와 그의 부마 유휘와 관련된 사건입니다.

유휘는 남방에서 도망 온 장군 유창의 손자에요. 유창은 남조의 황족이었는데 궁정 내부의 권력 다툼에 연루되어 어쩔 수 없이 북쪽으로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휘하의 군대, 많은 인력과 재물을 가져왔던 덕에 북위 조정의 봉작을 받았고요. 손자 유휘가 공주와 혼인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지요. 난릉장공주와 유휘는 대략 서기 500년 전후, 즉 선무제 즉위 초기에 혼인을 하였는데 유씨의 투기로 둘의 관계가 멀어지자 당시 섭정을 하고 있었던 영태후 유휘의 작위를 빼앗기로 결정하고 이혼을 명령했습니다. 두 사람이 더 이상 부부로 살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이때는 그들이 결혼한 지 대략 10여 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러나 일 년 후 아마도 공주의 청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한 환관과 당시 두 사람의 상황을 조사하고 보고했던 황족의 대신이 함께 영태후에게 공주와 유휘의 재결합을 건의하였습니다. 영태후는 공주의 본성이 바뀌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의 관계가 개선의 여지가 없음을 걱정하여 동의하지 않았지만, 환관과 대신이 여러 차례 건의하자 이를 거절할 수 없어 태후는 결국 그들의 재결합을 허락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친히 공주가 출궁하는 것을 배웅하며 앞으로 조심해서 행동하라고 그녀를 타일렀지요.
그리고 대략 519년을 전후하여 공주는 임신을 했습니다. 문제는 유휘는 평민인 장지수의 여동생 장비와 진경화의 여동생 진혜맹 등과 간통을 했다는 거지요. 공주는 끝내 참지 못하고 유휘와 다시 충돌했습니다. <<위서>> 기록에 따르면 이 때 분노에 찬 유휘가 공주를 밀어 침대 밑으로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주는 다시 유휘에게 배를 차인 탓에 유산했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요. 곧바로 장씨, 진씨 남매 네 명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지만, 유휘는 도망쳤습니다. 조정은 모반대역죄에 상당하는 현상 액수를 내걸고 유휘를 잡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조정은 유휘와 용비, 혜맹 및 그들의 오빠들을 심판하고 처리해야 하는 문제로 한 차례 심각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황권을 옹호하고 공주를 보호하는 황족 세력 (영태후)에 대항하여 한인 및 한화된 관료 집단이 가부장적 가족 윤리를 내세워 맞섰던 것이죠. 이 책은 이 사건을 통해 중국의 가부장적 가족 윤리의 역사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황족 세력의 주장은 공주 뱃 속 아이도 황족이니, 황족을 죽인 유휘는 모반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관료 집단의 리더인 상서삼공랑중 최찬은 이는 아직 태어나지 않는 자기 자식을 죽인 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어요. 당시 북위의 법률도 "조부모, 부모가 분노하여 병기나 칼로 자손을 죽이면 5년 형, 구타하여 죽이면 4년 형에 처한다" 고 되어있었거든요. 설령 공주의 신분이 아무리 존귀하여 일반 여성과 비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녀가 유휘에게 시집 온 이상, 그녀가 임신한 태아는 유휘의 혈육이라는 점도 강조했고요. 왜냐하면 당시 중국 예법에 따르면 여성은 일단 결혼을 하면 '가족정체성'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법률 역시 기혼 여성은 친정보다는 시댁을 '가족'으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고요. 유휘가 공주를 구타하여 유산에 이르게 한 이 사건에서도 공주는 이미 친정에서 시댁으로 가족정체성이 전환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친정사람의 죄로 연좌될 필요도 없고 친정 사람들도 그녀의 죄로 처벌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즉, 공주 뱃속의 태아는 황실의 구성원이 아니며 유휘의 혈육이며 유휘가 범한 죄 역시 대역죄가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하늘이요, 남편은 처의 하늘"로 한 사람의 머리 위에 두 개의 하늘을 둘 수 없다면, 여성이 결혼하는 것은 곧 "하늘을 바꾸는 것", 즉 그녀가 지존으로 여겨야 하는 대상이 아버지에게서 남편으로 바뀌는 건 고대 예서의 뜻이라고 하네요.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전에 있었던, '출가외인' 사상하고도 일치하지요.

이 책은 이렇게 난릉 공주 사건에서 시작하여, 한과 당 사이 법률의 유가화(또는 유가 윤리의 법제화라 부를 수도 있겠다)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를 상세하게 안내해 줍니다. 단지 난릉 공주의 죽음과 같이 부부간 폭행 치사 뿐 아니라 간통죄에 대한 처벌, 사건 범인을 숨겨주는 문제, 죄인의 가족을 모두 처벌하는 '연좌'에 있어 법률 적용이 남, 녀 어떻게 달랐는지와 그 달라짐의 역사를 이러저런 사료를 바탕으로 하나씩 소개해 주고 있거든요. 심지어 구타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 확인에 대해서 당시 어떤 식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는지까지 알려줄 정도입니다.
어떻게 소개되는지 예를 하나 들자면, 난릉 공주 사건 외에도 이 당시가 얼마나 심한 부계화 사회였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동위의 대신 두원의 글이 있습니다. 두원은 "남편은 처의 하늘이고 아버지는 자녀의 하늘이다. 일단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이면 모자 두 사람의 하늘이 동시에 무너지는 것이다. 어머니가 이미 나의 하늘을 무너뜨렸다면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어머니로 여길 수 없으며, 반드시 그녀를 고발해야 한다. 반대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했을 경우 '부존처비'와 '부존모비'에 근거해 자식된 이는 자기의 하늘을 고발할 수 없고, 이로써 자식이 아버지의 죄를 숨기는 것은 정상을 참작할 만하다." 고 했다네요요. 근거로는 의례, 상복의 원칙을 들고 있고요.
하지만 아무리 '부계화'되었다 하더라도 단지 시집만 간다고 해서 시댁 사람이 되는건 아니라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예를 들어 동한 말기, 한 여성이 혼인 후 남편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남편이 병역을 회피하여 도주했다고 연좌되어 잡혀왔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법상 동뢰와 묘견 등의 예를 아직 행하지 않았기에, 아직 남편 집안 사람이 아니라 하여 죄를 묻지 아니했다고 하네요. 부계 사회였음에도 가통한 혀성에 대해서는 딱히 심하게 처벌하지 않았다는 것도 조금 의외였고요.

이러한 한인과 한화된 관료 집단의 유교적인 논리에 영태후가 맞설 수 있었던 이유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선비족은 "계책을 세울 때는 부인을 따르며 오직 전장에서만 스스로 결정한다”는 유품을 지니고 있을 정도로 여성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남쪽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그 활동력은 엄청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측천같은 다른 여성 통치자의 독특한 개혁과 영향력에 대해서도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난릉 공주 사건 외 다른 이야기들이 조금 두서없이 소개되는 감은 없잖아 있고,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설명되지 않는 글들의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발단이 된 사건도 재미있었을 뿐더러, 역사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남북조 시기의 사회와 문화, 법률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좋은 독서였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유휘는 붙잡혀 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집행 전에 사면령이 내려져 목숨을 건졌습니다. 심지어 영태후가 권력을 잃고 효명제가 정권을 잡자, 다시 봉작을 받기까지 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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