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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4

기도의 막이 내릴 때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3점

기도의 막이 내릴 때 (저자 사인 인쇄본)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도쿄의 한 아파트에서 교살된 사체가, 아파트 근처 노숙자 오두막에서는 불에 탄 남자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아파트 교살 피해자 오시타니 미치코가 도쿄에서 만났던 중학교 동창인 연극 연출가 아사이 히로미가 경찰 수사 선상에 올랐고, 아파트에서 발견된 달력 속 '니혼바시 12개 다리' 메모 때문에 가가 형사도 사건에 빠져들었다. 가가 형사 어머니 유리코의 유품 속에 동일한 메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독서에 더욱 빠져들게 된 요즈음입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아무래도 쉽게 읽을 수 있고, 고민거리를 머리에서 지울 수 있는 추리 소설을 많이 읽게 되네요.

이번에 읽은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가가 형사 시리즈 열 번째 작품입니다. 최종편이라고 소개되고 있네요. 가가 형사 시리즈인지는 모르고 대여해서 읽었는데, 마지막 작품이라니 왠지 모르게 감개무량합니다. 어쩌다보니 딱 한 편 빼고는 전부 읽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말씀드렸듯, 회사 도서관 사서분께서 가가 형사 시리즈의 팬이신지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유독 이 시리즈만 거의 전 권이 갖추어져 있었던 덕분이지요.

하여튼, 이야기는 가가의 어머니인 유리코 씨가 사망하고 10여년 뒤, 두 구의 살해된 시체가 발견되며 시작됩니다. 주요 관계자인 고시카와 무쓰오 달력에 기입된 메모가 가가의 어머니 유리코 씨 유품 속 메모 내용과 일치한 탓에, 유리코 씨와 교체하던 와타베라는 인물이 사건의 주요 인물로 떠오르지요. 이야기 중반부까지 고시카와 무쓰오는 와타베 슌이치이며, 과거에는 히로미의 중학교 교사 나에무라일 것이라는 방향으로 끌고갑니다.
그러나 이를 뒤집고, 와타베 슌이치는 아사이 히로미의 부친 다다오라는걸 밝히는 가가의 추리는 그럴듯합니다. 히로미의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 들었던 이야기가 단서가 된다는 점도 돋보여요. 별 것 아닌 이야기들로 묘사되지만, 여기서 "왜 아사이 다다오의 투신 자살이 고향에서 전혀 회자되지 않았는지?"라는 수수께끼가 "아사이 다다오는 죽기 전 이미 야반도주를 해서 고향에서는 잊혀진 상태였다"로 이어지는 추리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오시타니 미치코가 아시이 히로미를 30년 만에 만났을 때, 히로미가 미치코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말해주는 장면도 이 추리의 근거가 되고요.
아사이 히로미는 유명인으로 과거가 모두 공개되어 있을텐데, 그 사실을 미치코가 몰랐다는건 조금 납득은 안 됩니다만, 아무튼 아사이 다다오는 당시 죽지 않았고, 숨어서 살다가 이번에 죽었다고 추리한 뒤, 아사이 히로미의 모발을 입수하여 DNA 분석을 통해 그 추리를 입증해 냅니다. 신용 불량, 빚 등으로 자신을 지우고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는 이야기는 미야베 미유키의 걸작 "화차" 외에도 흔하기에 새로운 발상은 아니지만, 이 추리에 이르는 과정은 공정하고 합리적입니다.

아사이 히로미가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는걸 밝혀나가는 경찰의 우직한 수사도 인상적입니다. 12개의 다리에 관련된 행사 사진을 관계자를 통해 모두 수집한 뒤, 수천장의 사진 속 등장인물을 분석하여 사건 관계자를 찾아내고, 와타베 슌이치가 가가의 주소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유일한 자료인 잡지 인터뷰 기사와 관련된 관계자를 찾아다니고, 꾸준한 관계자 조사를 통해 고시카와 무쓰오, 즉 와타베 슌이치의 과거 행적을 추적하는 등의 수사가 펼쳐지는데 작중 가가의 아버지 말 그대로 "헛걸음을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수사의 결과가 달라진다"는걸 잘 보여줍니다.

무려 3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조사인 덕분에 시간, 그리고 도쿄와 시가현, 센다이를 오가는 지역의 스케일도 광대합니다. 시가현은 피해자 오시타니 미치코의 거주지이자 30년 전, 중학교 시절 히로미와 담임 교사였던 나에무라가 살았지요. 센다이는 가가의 모친이 죽기 전 까지 살던 곳으로, 와타베 슌이치와 만난 곳이고요. 중요한 증인인 미야모토 야스오가 살고 있기도 합니다. 도쿄는 사건이 일어난 곳이자, 핵심 수수께끼 중 하나인 '니혼바시 12다리'가 있는 장소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강원도 속초, 서울, 경상도 통영 쯤 되는 거리랄까요? 형사들이 수사를 위해 이 세 곳을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는 와중에 등장하는 기차 경로라던가, 주요 도시의 묘사에서는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들더군요. 특별한 지역 명물이 등장하는건 아니지만요. 원자력 발전소 하청 근무자들의 비참한 삶을 드러내는건 약간 사회파스럽기도 했고요.

그러나 이러한 추리와 수사에 비해, 사건의 동기는 석연치 않아요. 우선 오시타니 미치코가 30년 동안 한 번도 못 봤던 아사이 히로미의 모친과 부친의 얼굴을 바로 알아보았다는건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히로미와 미치코가 좀 친하기는 했어도 이건 무리죠. 설령 알아보았다 하더라도, 이 사실이 그녀의 살해까지 이어지는 것도 납득하기는 어려워요. 무려 30년 전의 사건이라 공소시효도 지났을 뿐 아니라, 말만 잘 하면 충분히 설득하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사건 해결의 결정적 역할을 한 가가의 어머니 유리코 씨 유품 속 메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친 우연이라는 점은 둘째치고서라도, 왜 그 메모를 유리코 씨가 가지고 있었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또 메모를 통해 와타베 슌이치라는 인물이 드러나지 않았어도 결과에 큰 차이는 없었을 겁니다. 당연히 진행했을 히로미의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 증언은 들었을테고, 그렇다면 아사이 다다오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건 충분히 추리할 수 있었으니까요.
12개 다리에 관련된 사진, 그리고 와타베 슌이치가 가가의 주소를 손에 넣은 방법을 알아내기 위한 수사를 통해 아사이 히로미가 사건과 강하게 연류되어 있다는걸 드러내는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운에 의지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필요는 없었어요.

물론 가가 형사가 니혼바시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어머니 유품 속 메모에 기록된 니혼바시 12개 다리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였으며, 가가가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거라는걸 알리기 위해서는 와타베 슌이치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 요소는 가가 형사 시리즈 전체를 위한 부분이고, 이 작품만을 위해서는 불필요했다는 점에서 조금은 아쉬움이 남네요.

그래도 시리즈의 대단원을 장식하기에는 충분한,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시리즈가 끝난다는게, 아쉽기만 할 뿐 입니다.

2015/11/09

붉은 손가락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붉은 손가락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년 가장 아키오는 어느날, 아내 야에코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고 서둘러 귀가했다. 그리고 정원에서 어린 소녀의 시체를 발견했다. 범인은 중학생인 아들 나오미였다. 다급히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아키오는 시체를 버렸지만 곧바로 들통났다. 거듭되는 수사에 큰 압박을 느낀 아키오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범인으로 내세우는 폐륜을 저지르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 최근 가가 형사 시리즈를 주로 읽는 이유는 도서관 탓입니다. 회사 근처에 생겨 자주 이용하게 된 도서관이 소설류는 책장 하나에 불과할 정도로 자료는 빈약한데, 가가 형사 시리즈만 이상하게도 전권이 있더라고요. 사서분 취향이겠죠. 덕분에 몰아서 읽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시리즈 중에서 비교적 최신작으로 2007년도 고노미스 9위를 차지 했었습니다. 300페이지가 안 되는 분량으로 장편보다는 중편에 가깝습니다. 원래 단편으로 발표된 작품을 개작했다고 하는군요.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일본 현대 사회 문제점을 대변하는 마츠우라 집안에 대한 묘사입니다. 고부간의 갈등과 가사, 가정 교육 모두를 아내에게 맡기고 바람까지 피우는 무신경한 아버지, 시가에 애정을 전혀 보이지 않는 어머니, 왕따를 당한 뒤 극도의 이기적 성향을 보이는 아들, 거기에 치매에 걸린 할머니까지! 겉보기에만 정상일 뿐 썩을 대로 썩은, 더 이상 가정이라고 부를 수 없는 가정 묘사가 정말이지 아주 빼어나요.
아울러 콩가루 집안 묘사는 극도의 개인화를, 치매 노인을 모시고 사는 문제는 노령화를, 그리고 어머니의 치매를 이용하여 아들의 범행을 덮으려 하나 정작 어머니는 치매가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세대 간 단절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반전은 정말 대단합니다. 몇 년간 함께 산 가족이 어머니의 치매 여부도 모르다니!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덕분에 막장 패륜 범죄 드라마가 더 그럴싸한 얼개와 완성도를 갖추게 되었네요.

이렇듯 현대 일본 사회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발하고 있는 병폐가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선이라는 점에서 더 무섭더군요.

그리고 아들 나오미 캐릭터가 상상 초월의 비호감이라 읽는 내내 짜증남과 동시에 소년범에 대해서는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확신이 또다시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놈이 커서 제대로 된 인간이 될 것 같지도 않거든요. 끽해야 여든살 아버지를 살해한 쉰살 (실제로는 49) 히키코모리처럼 살게 될 테니 차라리 감방 속에서 사회생활이라도 익히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도 이놈이 마지막에 가가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나와 체포되는 장면은 아주 좋았습니다. 멱살이 아니라 쌍욕을 하면서 작살을 내 버렸어야 하는 건데 말이지요.

여튼, 이렇게 장점이 많은데 단점도 명확합니다. 추리적으로 별로라는 겁니다. 그간의 가가 형사 시리즈는 트릭 측면에서, 아니면 와이더닛 계열로 추리적인 완성도는 비교적 높은 편이었는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최초 범행을 근처 주택 거주자로 특정하고 용의자를 짚어낸 가가의 추리는 볼 만하고, 범인이 먼저 밝혀진 뒤 여러 가지 범인의 계획을 독자에게 먼저 알려주는 식으로 도서 추리물 형식을 띤 건 나쁘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했던 반전도 대단하고요.

그러나 피해자가 확인한 e-mail을 추적했다면 진범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니 마츠우라의 계획은 그냥 약간의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전혀 드라마가 될 수 없죠. 또 어머니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결정적 증거인 "붉은 손가락" 역시 별 의미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본인 스스로 아들이 계속 자신을 범인으로 몰면 진상을 고백할 심산이었으니까요.

어머니가 치매가 아니었다는 것을 가가가 알게 된 것이 "눈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등, 극적 반전과 관련해서는 독자에게 제공하는 정보가 거의 없다는 것도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너무 무거워서 읽기 편한 작품도 아니고 추리적으로 별로라 감점합니다만 사회파 미스터리로 기본은 해 주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이렇게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긴 하니까요. 제 경우에는 외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셨다가 얼마 전 돌아가셨기에 더더욱 남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요양원에 모시긴 했지만 그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뭔가 해결책이 나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딸은 정말 잘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해 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가가 형사에 대한 묘사도 꽤나 상세하게 등장합니다. 가가의 아버지를 지극히 생각하는 사촌동생 마츠미야가 등장해서 가가와 컴비를 이루어 수사를 펼치고, 가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등 꽤나 굵직한 개인사가 펼쳐지죠.

그런데 가가의 아버지가 가가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는 말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어머니는 찾아올 사람이 찾지 못해 홀로 죽어갔지만, 찾아올 사람이 있는데도 오지 말라고 하는 건 그것 때문에 자식이 먹을 욕을 생각하지 않은 자기 욕심에 불과합니다. 아버지의 유언 대신이라면 저도 따르기야 하겠지만 이런 억지 외로움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습니다. 게다가 아들은 안 되는데 마츠미야는 된다? 무슨 기준인건지 모르겠네요.

2015/12/04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3점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제목과 동일한 표제작을 포함하여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제목처럼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을 파악하여 범행을 증명하는 전개를 보이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단편집이라 그런지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에서처럼(주로 초기작) 억지스러운 동기나 인간관계가 등장하지 않고, 트릭과 추리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아울러 가가 "형사"에 어울리는, 그야말로 끈질긴 수사가 추리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참고삼아 해당 수사 내역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봅니다.

  • 첫번째 사건: 화분을 구입한 날짜에 대한 수사
  • 두번째 사건: 피해자가 입고 있던 옷에 대한 목격 증언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을 알아냄, 담배를 피우지 않는 피해자 옷에 진하게 밴 담배 냄새에 대한 탐문 조사
  • 세번째 사건: 친칠라 고양이에 대한 증언, 피해자가 먹은 청어메밀 판매 장소 탐문을 통한 취식 시간 확인, 용의자의 단골 미용실에 대한 조사
  • 네번째 사건: 나오코 집 근처 가게들을 대상으로 한 탐문 조사
  • * 다섯번째 사건은 친구의 가정사에 대한 내밀한 추리 중심이라 경찰 수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 핵심 사건, 트릭 하나에 그치지 않고 나름 반전 요소들도 들어가 작품들의 복잡도와 재미를 더해줍니다. 두번째 사건에서 유타의 사체를 제한된 시간과 장소 안에서 들키지 않고 은닉하는 트릭, 네번째 사건에서 숨겨놓은 사체의 정체가 무엇인지?같은 요소가 대표적입니다.

가가 형사의 비중보다는 주인공, 화자 역할의 범인 비중이 더 크다는 점은 팬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은 됩니다만(가가라는 캐릭터에 매료된 팬이라면 당연히 불호겠죠) 이 정도면 아주 괜찮은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가 읽은 가가 형사 시리즈 중에서는 최고로 꼽습니다.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유게 발레단의 발레리나 하야카와 히로코의 자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발레단 사무국장 데라니시 미치요가 살해했다는게 진상이고요. 미치요의 거짓말은 히로코가 이사할 때 화분을 만졌다는 것입니다. 화분은 사고 당일에 구입한 것으로 이사할 때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미치요의 범행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화분은 히로코를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할 수 있었던 트릭의 도구이기도 하고요.

발레단과 발레 공연, 연습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뒷받침된 묘사나, 단순 협박 (안무가가 미치요의 남편 데라니시 도모야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난이도 높은 무대를 삭제하고 마지막 공연을 한 히로코의 자존심, 즉 히로코의 요구에 응해 15년 전 무대가 가짜였다는 것을 인정한 것을 감추기 위한 동기는 "잠자는 숲"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발레" 그 자체를 트릭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더 뛰어나고요.

아울러 표제작이면서도 이 단편집의 주제이기도 한 "범인의 거짓말"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거짓말을 감추려면 좀 더 큰 거짓말을 하게 되지요(가가)"라는 말이 대표적이에요.

그런데 가가가 거짓말을 유도한 방법은 유치하고, 단지 말실수 한 것뿐인데 뭐 그리 큰 꼬투리가 될까 싶기는 했습니다. 증거는 결국 아무것도 없고, 버티면 빠져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이렇게 하면 단편으로 성립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문제라고 지적하기는 어렵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발레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바탕이 된 적절한 트릭과 합리적인 동기가 어우러진 수작입니다.

"차가운 작열"

주부 다누마 미에코가 교살되고, 돌이 갓 지난 아들 유타가 실종된 사건의 진상은?

진상은 남편 요우지의 범행으로, 동기는 아내 미에코가 빠찡코를 하다가 차에 둔 아이를 찜쪄 죽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동기는 "너버스 브레이크다운"에서도 등장했던 것인데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피해자가 죽기 전에 입었던 빨간 티셔츠가 세탁기 안에 있던 겁니다. 요우지는 땀을 많이 흘려서였다고 말하지만, 빨간 티셔츠를 다른 빨래와 섞어서 빨아도 되는지? 와 같은 사소한 점에서 가가가 수상함을 느끼게 되는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 집안일에 관심이 없는데 유타의 옷차림을 기억하는 것 역시 괜찮은 착안점이었고요.

무엇보다도 다누마 요우지의 증언 중 차의 에어컨이 고장났다는 것을 앞의 거짓말과 엮고 — 차의 에어컨이 고장났는데 그것 때문에 땀을 많이 흘려 옷을 갈아입었다는 해명 — 그것이 진상에 이르는 전개 -  즉 에어컨이 고장나 아기가 차 안에서 열사했다 -에는 정말 탄복했습니다. 아이 사체의 부취를 막기 위해 수지로 밀봉했다는 곁다리 트릭도 돋보였고요.

하지만 티셔츠에 담배 냄새가 배었는데, 집에 재떨이도 없고 부부는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상함을 느꼈다고 하는데, 이 정보가 독자에게는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서 공정함을 느끼기 힘들었던건 조금 아쉽습니다. 이 점 때문에 약간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읽을 가치는 충분한 좋은 작품입니다.

"제2지망"

이혼녀 미치코가 교제하던 남자 모리 슈스케가 집에서 교살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의 진상은?

한마디로, 이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악입니다.

거짓말은 미치코가 댄스 교습을 마치고 샤워를 하지 않았다는 말로, 머리칼의 샴푸향을 가가가 눈치채서 그녀의 알리바이가 밝혀지게 되죠. 그런데 두 번째 사건과 마찬가지로 샴푸향에 대한 정보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고, 동기 설명도 부족하다는 단점이 너무 큽니다.

남자 목을 여자가 조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포장지 20미터 정도를 이용하여 창밖으로 체중을 걸고 뛰어내렸다는 트릭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별로였습니다. 어차피 밝혀져도 상관없는 것이었다면(범행 은닉은 미치코의 의도였고 리사는 아무 생각도 없었으니) 굳이 이런 수고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칼로 찌르거나 불을 지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모호한 동기, 불합리한 범행, 별볼일 없는 트릭 모두가 갖추어진 망작입니다.

"어그러진 계산"

사카가미 나오코의 남편은 얼마 전 역 앞에서 트럭에 치여 즉사했다. 그 와중에 불륜남 나카세 유키노부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가가와 만나는데...

나카세와 나오코의 과거, 그리고 범행 모의가 현재 시점에서의 수사와 서서히 교차되어 전개되며 결과적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만나 진상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추리적으로는 별로에요. 거짓말은 천장에서 흐르는 물에 대한 것이지만, 이건 가가가 사기친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래도 집에 숨겨놓은 사체가 유키노부의 것이었다는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가가의 수사를 바탕으로 한 추리 — 냉동고에 대한 증언 → 약국 탐문을 통한 보냉제 구입 확인 → 편의점 탐문을 통해 매일 얼음을 구입한 것을 확인하고, 시체가 냉동되어 있다! 는 구성 — 은 합리적이고 설득력도 높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외적인 매력이 더 괜찮았던 작품이에요.

"친구의 조언"

가가의 친구 하기와라가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냈다. 가가는 그의 아내 미네코가 드링크제에 약을 탔다는 것을 추리해내는데...

단편집 다른 수록작들과는 다르게 가가의 일방적인 추리와 주장이 펼쳐지는 작품으로 일종의 가가 추리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추리하는 내용 대부분이 타당하고 설득력이 높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하기와라가 출발 전 집에서 마신 음료를 따로 꺼낸 컵이라는 사소한 단서로 밝혀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아들 다이치가 그린 파란 물고기 그림을 바탕으로 동기와 범행을 추리해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고, 밀봉된 비타민제 안에 수면제를 넣는 트릭도 현실적이면서도 신선했습니다.

다만 미네코가 아트플라워 교실 강사 구즈하라 루미코와 레즈비언 관계였다는 설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습니다. 차라리 남자였다면 마지막 장면의 감정이 더 강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단점은 사소한 수준이고, 추리적으로 워낙 뛰어나서 별점은 3.5점. 이 단편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국내 출간된 가가 형사 시리즈는 현 시점에서 다 읽은 만큼 개인적으로 순위표를 작성해 봅니다.

  1.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2. "악의"
  3. "신참자"
  4. "붉은 손가락"
  5. "내가 그를 죽였다"
  6.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7. "졸업 : 설월화 살인 게임"
  8. "잠자는 숲"

2012/01/03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노코는 애인 준이치에게 결별을 통보받았다. 그녀의 하나 뿐인 친구 가요코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 뒤, 소노코는 자살로 추정되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오빠이자 경찰인 야스마사는 사건 현장에서 타살의 증거를 발견했다. 야스마사는 스스로 범인을 찾아내어 단죄할 것을 결심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 높은 지명도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작가는 아니라서 큰 관심이 없었던 작품인데, (취향 존중!) 물만두 홍윤 님의 유작 리뷰집에 실린 리뷰를 보고 흥미가 생겨 읽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물만두 님의 리뷰대로 정통 본격 추리물이더군요.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완성도도 높았고요. 특히 탐정 역할을 하는 야스마사가 발견한 단서와 거기서 비롯되는 의문들을 독자와 공정하게 공유하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수사 단계별로 와인과 와인병, 복사 키, 태워버린 종이의 정체, 소노코가 죽기 전 얼굴을 가리고 외출한 곳, 빌린 비디오데크의 의미 등 다양한 단서가 제시된 후 설명을 덧붙이며 결론으로 이어지는 구성인데, 독자에게 "이것이 단서다"라고 제시하면서 함께 추리하고 수사하도록 유도하는 느낌이 확실하게 전해졌습니다.

피해자의 오빠 야스마사가 가가 형사와 경쟁하며 범인을 쫓는 구도로 이루어진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 펼쳐지는 두뇌 싸움도 상당한 볼거리였습니다. 두 사람이 각각 자신만의 단서를 갖고 있어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도 흥미로웠고요. 독자는 야스마사의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수사가 막힐 때마다 가가 형사가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전해주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거든요. 이러한 구조 덕분에 앞서 이야기한 단계별 진행 방식과 맞물려, 마치 게임을 플레이하는 듯한 독특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준이치의 알리바이 트릭 같은 곁가지 트릭도 잘 짜여 있었고, 마지막 결말에서 이어지는 반전도 어차피 둘 중 한 사람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구도 속에서 의외의 재미를 주는 등, 흥미로운 요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인 '진범이 누구인지 끝까지 독자에게 밝히지 않는다'는 아이디어는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흥미로운 설정이기는 했지만, 과연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열린 결말을 유도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작가의 머릿속에는 정리된 답이 있을 텐데 명확한 해답 없이 끝내버리는 것은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확실한 단서를 제시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다양한 변수가 있을 수 있는 만큼,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은 다소 무책임하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결정적인 단서로 제시된 '약봉투의 뜯어진 모양'이 오른손잡이라면 준이치, 왼손잡이라면 가요코라는 설정도 쉽게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범인을 특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설정을 근거로 마지막에 펼쳐지는 야스마사의 처형 쇼 역시 억지스러웠어요. 단순히 가가 형사의 공정한 수사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너무 극적인 연출을 위해 설정을 밀어붙인 인상이 강했습니다.

더불어, 가요코라면 몰라도 준이치의 범행 동기가 약하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여자친구의 과거가 밝혀진다고 해도 준이치가 잃을 것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던 탓입니다. 소노코를 떠나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순정파도 아닌 듯한 캐릭터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인 부분은 만족스러웠고,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말랑말랑한 로맨스 요소가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불확실한 결말도 흥미로운 아이디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고요. 그러나 본격 추리물이라면 최소한 독자에게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기에 조금 감점합니다. 그래도 장점은 분명한 만큼,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물만두 님의 리뷰를 더 찾아봐야겠네요.

2015/11/07

악의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3점

악의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가 히다카 구니히코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발견자 중 한 명인 노노구치 오사무는 히다카의 오랜 친구인 아동 소설가이자 전직은 교사였다. 마침 사건을 맡은 형사인 가가 교이치로의 교사 시절 동료이기도 했다. 노노구치는 자신의 직업을 살려 사건에 대한 견해를 일종의 수기로 작성했고, 가가는 이 수기를 빌려 읽으면서 진범이 누구인지를 추리해 내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입니다. 1996년 발표된 작품이네요.

범인 노노구치 오사무의 수기와 가가 형사의 기록이 교차 편집되는 전개 방식과, 진범과 알리바이 조작 트릭이 앞부분 1/3 지점에서 밝혀진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렇게 진범이 빨리 밝혀지는 전개는 작품을 완벽한 와이더닛 계열로 만들고요.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가 아니라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실제로 작품의 나머지 2/3는 온전히 노노구치의 동기와 숨겨진 진상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왜?"가 정말로 대박입니다. 충격도 충격이지만 노노구치가 교묘하게 수기와 증언을 조작해서 수사의 방향을 의도한 대로 흐르게 만드는 솜씨가 정말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제일 첫 부분의 고양이 죽이기에서부터 히다카의 캐릭터 형성이 자연스럽게 시작된다는게 좋은 예입니다.

또 노노구치가 고스트 라이터가 아니며 그의 증언이 모두 거짓이라는건 눈치채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히다카의 작품은 사실 자신이 쓴 것이다!라는 명예욕이 아니라, 오래전 중학생 때 있었던 여학생 성폭행 사건과 왕따 사건이 진짜 동기라는 결말은 상당히 놀라웠어요. 이 동기를 밝히는 데 가가가 수집하는 여러 가지 증언들이 토대가 되는 식으로 등장하는 장치와 단서들이 교묘하게 짜여져 있고요. 결정적 단서가 나이든 폭죽 장인의 증언이었다는 것 처럼요.
진범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교묘하게 숨기는 노노구치의 수기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작품 전체가 거대한 서술 트릭이라는 것도 비슷하네요. 여튼, 한 편의 추리물로의 완성도가 아주 높은 편입니다.

아울러 가가가 고등학교 교사를 2년 했는데 그만두게 된 계기가 왕따 사건이었으며, 그 왕따 사건이 본편 이야기와 슬쩍 엮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졸업"에서는 분명히 교사를 지망했었는데, 왜 갑자기 형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린 거죠. 개인적으로는 왕따로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을 억지로 등교시킨 가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기에 역시나 선생에는 맞지 않는 캐릭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나 단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일단 계획이 지나치게 노노구치의 시점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례로 히다카 하츠미의 사진을 경찰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렇지 않고 경찰이 멍청해서 노노구치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때의 대비책이 없거든요.

또 베껴 쓴 노트만 가지고 자신이 작품을 썼다고 주장하는건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오래 활동한 프로 작가가 아무런 증거나 데이터 없이 작품을 쓰지는 않았을 테고, 그만큼 많은 작품이라면 충분히 히다카가 썼다는 증거나 관련해서 증언할 인물은 여럿 있을 테니까요. 실제로도 히다카 리에가 그렇게 증언하기도 했죠. 아내라는 것 때문에 증언의 가치가 폄하된 감이 없잖아 있는데 이런 증언 몇 개만 모여도 노노구치의 급조한(?) 데이터 정도는 눌러버릴 힘은 충분했을겁니다.

마지막으로 노노구치의 수기에 오류가 많다는 것을 독자에게 공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은 점도 아쉬웠던 부분입니다. 물론 이 점은 이 작품이 후더닛 계열의 정통 본격물이 아닌 만큼 큰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요.

그 외로, 가장 큰 동기인 "악의"라는 것에 대한 설명이 좀 부족하긴 합니다. 노노구치의 속내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탓이 큰데 독자가 읽은 그의 속내, 즉 수기는 모두 거짓이라 딱히 와닿을 수가 없거든요. 오랜 시절 쌓아온 열등감과 거기에서 비롯된 악의라는 게 아주 설득력 없지는 않지만 본인이 아닌 남의 입으로 듣는 정보일 뿐이니까요. 또 아무리 "악의"가 쌓였다 해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요? 어차피 자신이 시한부 인생으로 얼마 살지 못하면 과거 사건이 밝혀질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니 이렇게 복잡한 계획을 짤 필요도 없었을 테고 말이죠.

물론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유는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니 딱히 단점은 아닙니다. 시티헌터 사에바 료의 아버지이자 유니온 데오페의 총수도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 어차피 이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했었죠 (아마도.... ).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 말해드린 노노구치의 계획에 지나치게 의존한 플롯에 약간 감점합니다만 여태까지 읽었던 가가 형사 시리즈, 아니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고 수준의 재미와 깊이가 있는 작품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모든 추리 애호가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런 걸 보면 어린 시절 나쁜 놈은 커서도 변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는군요.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힌 놈을 옛 동창이자 친구였기 때문에 다시 받아준 히다카의 말로를 보면 역시나, 확실히 사람은 가려서 사귀어야 할 것 같습니다.

2012/10/19

신참자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3점

신참자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가가 형사가 주인공인 단편집. 모든 단편들이 중년 이혼녀 살인사건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각각 작게나마 연관되어 있는 - 가가 형사가 수사 도중 선물하고 다니는 선물이 두 번째 단편에 등장하는 닌교야키나 다섯 번째 가게의 케이크라던가, 일곱 번째 단편에서 피해자 전남편과 술을 먹는 가게가 두 번째 단편의 주 무대라던가 하는 식이죠 - 연작 단편집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모순된 증언을 밝힐 수 있다면 아무리 기묘해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점에서(예를 들자면 케이크 가게와 피해자 아들을 연결시키는 진상 같은 부분) 홈즈의 귀납 추리법이 떠오르는데, 고전 추리물 애호가로서 정말이지 무척 반가왔습니다. 이러한 추리법이 다양한 지역 주민들의 모순된 증언 이면의 진실을 파헤친다던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단순한 진실을 밝혀낸다는 일상계 작품에 사용되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실제로 있음직한 소소한 사건을 셜록 홈즈가 풀어가는 느낌이랄까요? 한마디로, 추리적으로는 충분한 재미를 가져다 줍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꼬여있던 인간관계가 해결된다던가, 감정의 응어리가 풀린다는 치유계스러움, 피해자 아들 고우키의 성장물 스러움도 지니고 있다는 점도 독특합니다. 고우키가 어머니의 진심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에서는 잔잔한 감동도 전해주고요.

덧붙이자면, 실존하는 지역인 니혼바시 고덴마쵸의 여러 가게들을 무대로 펼쳐진다는 점도 꽤 인상적이었어요. 약간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듭니다. 저도 지역 특산물이라는 닌교야키나 아몬드 푸딩 위에 패션프루트 젤리를 얹은 젤리는 한번 사 먹어보고 싶어지더군요.

그러나 몇몇 이야기는 비약이 심하고 정보를 공정하게 전달해주지 않으며, 중반부까지의 이야기, 즉 지역 주민들의 거짓 증언을 밝혀내는 이야기들은 많이 작위적이라는 단점은 있습니다(아무리 고집이 세고 입이 무거워도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앞에서 태연하게 거짓 증언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또 피해자의 자금 관계를 조금만 철저하게 조사했더라면 보다 쉽게 진상을 밝혀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수사가 발품, 탐문으로만 진행된 것도 납득하기는 어려웠고요.

그래도 결론은 수작입니다. 재미와 함께 추리적인 요소도 잘 갖추고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가가 형사 시리즈는 묵직한 정통 추리물 + 복수극 느낌인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뿐이었는데, 아주 상반된 분위기라 의외였지만 저는 이쪽 분위기가 훨씬 마음에 드네요.

수록작 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센베이집 딸"

용의자의 옷차림에 대한 증언과 가가 형사의 관찰(거리를 지나다니는 직장인들의 옷차림)을 바탕으로 비약이 심하지만 논리적인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이 고전 추리 스타일이라 마음에 든 작품입니다. 그러나 살인사건이라는 강력 사건 수사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라는 점에서는 설득력이 별로 없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요릿집 수련생"

피해자의 집에 있던 닌교야키에 얽힌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 사건과는 하나도 관계가 없다는 점과 추리적인 요소가 부족하다는 점에서는 아쉽지만, 실제 있음직한 일상계스러운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사기그릇 가게 며느리"

피해자의 집에서 발견된 주방 가위를 사기그릇 가게 고부갈등과 연결시킨 작품. 식사용 가위라는 말을 주방 가위로 오해했을 것이라는 진상을 시어머니의 여행과 연결시킨 전개가 깔끔합니다. 이 정도면 완벽한 일상계가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케이크 가게 점원"

피해자가 자주 들린 케이크 가게 - 피해자가 갑자기 연고도 없는 고덴마쵸로 이사 온 이유 - 피해자의 아들이 동거하는 연인의 집이라는 연결고리를 풀어내는 이야기. 철모르는 피해자 아들 고우키의 인간적인 성장이 돋보입니다. 피해자가 이사 오게 된 계기가 순전히 우연이었다는 점에서 정교함이 떨어지나, 은행이 많다는 묘사를 통해 공정하게 독자에게 정보를 전해준 것이 아주 괜찮았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번역가 친구"

시체를 발견한 피해자 친구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이야기가 중심으로, 추리물이라기보다는 치유계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의 사기그릇 가게에서의 증언이 주요 소재로 쓰인다는 점에서 연작물 특성을 많이 보이는 것도 특징이고요. 드라마는 잔잔하니 좋은데, 추리적으로 별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없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청소회사 사장"

피해자의 전남편이 등장하여 가족 간의 응어리를 풀어낸다는 작품으로, 역시나 치유계입니다. 반지에 대한 묘사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추리물로 보기는 좀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민예품점 손님"

유일하게 한 편으로 완결되지 않는 작품으로, 마지막 이야기를 위한 복선 및 정보 제공 성격이 강한 작품입니다. 별점을 단독으로 주기는 좀 애매하네요.

"니혼바시의 형사"

범인을 밝혀내는 대단원 격인 작품으로 전편인 "민예품점 손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깔끔한 마무리는 좋은데, 진상과 동기가 너무 평범해서 앞부분의 수사가 왜 필요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서 조금 맥이 빠집니다. 그래도 흉기를 찾아내는 부분이 현실적이면서도 정교해서 괜찮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09/22

희망의 끈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1.5점

희망의 끈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진상,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케이크 카페 사장 하나즈카 야요이가 살해당했다. 도난당한 물품은 없었고, 인품이 좋은걸로 유명했던 탓에 원한 관계로 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하나즈카 야요이가 사망 1개월 전, 개인 트레이닝과 피부 관리실에 등록했다는게 밝혀져 '이성 관계'가 동기일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녀와 관계가 있어 보이는 남성은 사망 얼마 전 만났던 전 남편 와타누키와 가게 단골 시오미 뿐. 그러나 전 남편 와타누키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기에 마쓰미야는 시오미에 주목했고, 가가의 동의를 얻어 본격적인 수사를 벌였다. 시오미는 아내와 사별한 뒤 중학생 딸 모나와 거리가 멀어진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편 사건 수사와 동시에, 마쓰미야는 죽은 줄 알았던 친부가 아직 살아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배다른 누나 요시하라 아야코의 연락 덕분이었다. 암으로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친부를 만나러 갈 것인지? 마쓰미야의 결심을 도운 건 하나즈카 야요이 사건의 진상이었다. 십 수년 전, 불임 클리닉의 실수로 야요이의 수정란을 시오미 부부가 이식받아 낳은 딸이 모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야요이는 딸을 만나기 전 전 남편과 상의했는데 이를 오해했던 와타누키와 사실혼 관계인 동거녀 다유코가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었다. 마쓰미야는 가족이라는 끈은 어떻게든 이어져있다는걸 통감하고 친부를 만나러 간다....


"소중한 사람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는 연결되어 있다. 끈이 아무리 길어져도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 죽을 때까지 끈을 놓지 않겠다."

읽기 전에는 몰랐는데. 가가 형사가 등장하더군요. 그러나 가가 형사 시리즈는 아닙니다. 가가 형사의 비중은 낮으며, 마쓰미야가 주인공인 스핀 오프입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 기대해 봄직한 추리적인 요소도 거의 없습니다. 트릭이라던가, 범행을 숨기려는 어떠한 노력도 없는 우발적인 범행인데다가, 유력한 용의자가 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경찰 수사가 오래 걸릴 일도 없었습니다. 와타누키와 야요이가 사건 직전에 만났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와타누키의 현재 동거녀 다유코인게 당연합니다. 혹시라도 둘이 재결합에 대해 쿵짝을 맞추는 중이었다면 버림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작중에서처럼 경찰이 와타누키에게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다며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고, 시오미에게 수사를 집중한다는건 있을리 없습니다.

이렇게 수사 과정 자체가 설득력이 떨어지는 탓에 이야기도 사건과 수사보다는 야요이가 와타누키를 만났던 건 시오미의 딸 모나가 자기 딸이라는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동기에 집중하여 드라마를 풀어나갑니다. 
하지만 수정란이 바뀌는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전개도 그다지 흥미롭지 못했습니다. 다유코가 범행을 자백했음에도 모나의 정체를 캐는 마쓰미야의 행동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오히려 가정의 비밀과 프라이버시를 건드리는 잔인한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사건과 함께 펼쳐지는 마쓰미야의 친부 요시하라 마사쓰구 이야기는 최악이었어요. 어떤 사연이 있었던 간에, 그가 결혼한 상태에서 불륜을 저지르다가 마쓰미야와 그의 어머니 가쓰코를 버리고 원래 가정으로 돌아간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죽기 전에야 '사정이 있었다, 가족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며 다가온다는건 어처구니가 없더라고요. 이 따위 끈이라면 잘라내는게 상책입니다. 아니면 돈으로 보상받던가요. 이런 인간을 가족이라며 대우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사쓰구 불륜의 원인이 아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었는데 상대방이 여자였다는 것도 불필요한 사족에 불과합니다. 왜 덧붙여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그런다고 불륜이 용서되는건 아니니까요.
이런 쓸모없는 마쓰미야 친부 이야기보다는 모나에 대한 이야기를 더 깊고 자세히 풀어내는게 좋았을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고로 죽은 언니, 오빠 대신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을 지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친딸이 아니라는건 다른데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발한 부분이 있었거든요. 모나가 느낄 부담감과 딜레마도 설득력이 충분했고요. 좋은 설정을 썩힌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수사가 펼쳐지기는 하지만 추리물로 보기에는 많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5/11/17

잠자는 숲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1.5점

잠자는 숲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카야나기 발레단 사무실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는 화가 가자마 도시유키였다. 몰래 침입한 가자마를 발레단원 하루코가 살해한 것으로, 정당방위로 보였다. 그러나 가자마가 발레단에 침입한 이유를 알지 못해 고민하던 경찰들을 농락하듯, 발레 마스터 가지타도 연습 중 살해당했다. 두 개의 사건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가가는 발레리나 미오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도 사건의 진상에 점점 접근해 나가는데...

"졸업"에서의 연인 사토코와 헤어진 뒤 경찰이 된 가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가 형사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추리’라는 요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건의 발단이 되는 가자마의 죽음은 별다른 트릭이나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고사에 가까운 탓입니다. 물론 맨 마지막에 범인은 하루코가 아니었다는 진상이 밝혀지긴 합니다만, 독자가 주어진 정보로 진상을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맥락상 하루코가 죽였다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기도 하고요.

두 번째 사건인 가지타 살인 사건에는 트릭이 사용되었지만, 가지타가 살해당한 방법이 뭔가에 찔렸기 때문이고 윗 옷 안에 모종의 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다는건 현장 검증 만으로 초기에 밝혀집니다. 때문에 특별히 대단한 트릭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범인인 야스코가 이런 장치 트릭까지 사용해가며 범행을 저지를 이유가 없다는 단점도 큽니다. 경찰 수사가 집중되는 와중에 공연 연습 중 살해한다는 무모한 짓 덕분에 용의자는 발레단 사람으로 좁혀지고, 다른 사람을 시켜 자켓에 물을 묻히는 알리바이 공작을 통해 빠져나가려 한 시도는 작중 언급되듯 공범, 혹은 우연으로 해석될 수 있는 유치한 공작에 불과해서 결국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니까요. 한마디로 "쓸모 없고 무모하고 현실성 없는 바보 같은 짓거리"였습니다.
그리고 가지타가 자기 등을 뭔가가 찌르는데도 자리에 앉아 공연 감독을 계속했으리라는 확신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도 의문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벌떡 일어나서 등에 뭐가 있나 확인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이럴 거였다면 차라리 의자에 주사기를 붙여 놓는 식으로 흉기가 드러나도 상관없도록 만드는 게 나았을 겁니다. 흔해빠진 주사기는 구입 경로를 파악하기 어렵고, 공연 연습 중 수시로 단원들이 지나다녔기 때문에 용의자를 만들기도 더 쉬웠을 테니까요.

4년 전 배신의 복수라는 동기도 빈약합니다. 자신을 치정 사건의 당사자로 몰았다는 것인데, 4년 전 사실이 밝혀졌다는 이유로 급작스러운 살의를 품었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어차피 다 끝난 일인데, 뭐가 그리 큰 문제였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히가시노 게이고 초기작에서 자주 보이는 조금 억지스러운 전개도 아쉬웠습니다. 특히 미오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정작 미오가 범인이라는건 독자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독자를 교묘하게 속이는 고도의 서술 트릭물과는 거리가 멀고, 대놓고 사기 치는 것에 불과해요.

덧붙여 단점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가가와 발레리나 미오의 달착지근한 연애 감정이 가득하고, 가가 교이치로가 사랑에 죽는 쾌남 형사로 묘사되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후속작들에서 보여주는 묵직한 매력은 눈을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래서야 주인공 말고는 '가가 형사' 시리즈라고 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상, 즉 4년 전 야스코와 아키코가 얽힌 치정 사건이 두 사건의 동기임을 밝히는 부분은 추리라고 부를만 합니다. 그중에서도 치정 사건을 일으킨 발레리나는 사실 아키코였다는 것이, 그녀의 연인이었던 화가 아오키가 남긴 그림을 통해 밝혀지는 부분만큼은 인상적이었어요. 4년 전 당시 야스코는 아직 필사의 다이어트 이전이라 그림의 모델일 리 없다는 것이 단서인데,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가 제공되는 등 추리 소설의 미덕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미오의 빈혈에 대한 추리 역시 일상 미스터리스러운 느낌을 전해 주는 부분으로 나쁘지 않았고, 벽에 부딪힌 가가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도 괜찮았습니다. "졸업"에서도 그랬지만, 가가의 아버지를 궁극의 탐정 역할로 설정하려는 계획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네요. 마치 "맥가이버"의 할아버지처럼 말이죠. 세 번째 작품부터는 왜 이런 설정이 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또 발레단에 대한 자료 조사가 충실한 점도 좋았습니다. 발레단의 분위기와 연습, 공연 등이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작품의 설득력을 높여 주었고, 발레단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과 독침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을 연결시킨 설정도 약간 억지스럽지만 괜찮았어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엘러리 퀸의 작품"을 언급하는 장면도 눈에 띄었습니다. 저 역시 엘러리 퀸 작품의 트릭이 그렇게나 잘 먹혔을 것 같지 않다는 데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별로이고, 점수를 줄 만한 부분도 적습니다. "졸업"에 비하면 트릭마저도 별 볼일 없으니까요. 확실히 초기작이라는 티가 팍팍 나는, 가가 형사 시리즈의 팬이라도 딱히 구해 읽어볼 필요없는 망작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8/04/15

기린의 날개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5점

기린의 날개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혼바시 다리에서 건축 부품 제조 회사 간부인 아오야기가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력 용의자 야시마 후유키는 도주 중 교통 사고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고, 경찰은 아오야기가 근무하던 공장의 산재 은폐가 동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가가는 사건의 진짜 동기가 따로 있다고 확신하고 수사를 계속하는데...

"살인 사건이란 게 암세포와 같아서 일단 생겼다 하면 그 고통이 주위로 번진단 말이지. 범인이 잡히든 수사가 종결되든, 그 고통에 의한 침식을 막기가 어려워" - 가가

히가시노 게이고가가 형사 시리즈 장편입니다. 니혼바시 다리 중간에서 살해당한채 발견된 중년 남성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읽기 편하다는 겁니다. 500여 페이지에 가까운 장편임에도 쉽게 읽힙니다. 스토리텔러,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할 수 있지요. 독자의 흥미를 계속 잡아 끄는 전개가 흡입력의 비결이고요.

  • 피해자 아오야기가 왜 사건 현장을 방문했는지?
  • 아오야기가 칠복신 신사 순례를 한 이유는?
  • 아오야기가 신사 순례 때 종이학을 접어 바친 이유는?
  • 종이학은 왜 노란색부터 접어서 바쳤는지?
와 같이 수수께끼 하나를 풀면 뒤이어 다른 수수께끼가 등장하기 때문에 계속 읽어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전개는 오래 전 일간지 연재물을 연상케도 하는데, 그보다는 훨씬 잘 짜여진 이야기로 작가의 치밀한 구상과 계산이 돋보입니다. 

아울러 이런 아오야기 관련 수수께끼에 더해 유력 용의자 야시마에 얽힌 수수께끼도 마찬가지입니다.

  • 야시마와 아오야기의 관계는? 
  • 야시마는 어떻게 아오야기를 만났는지? 
  • 흉기인 버터플라이 나이프의 입수 경로는? 

같이 단계별 구성을 취하고 있어 흥미를 더합니다. 

산재 은폐, 오래전 발생한 안전 사고의 은폐, 의도하지는 않은 아오야기 살인 사건 은폐라는 세 종류의 은폐가 핵심이 되는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비밀은 없고, 진실은 밝혀진다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는 히가시노 게이고스러운 결말도 마음에 들고요. 역시나 흥행을 아는 작가다왔습니다.
사건과 함께 나름대로 성장해 나가는 가가의 모습도 볼 만 합니다. 아버지의 평소 이야기와는 다르게 죽을 때 마지막 메시지를 마음에 받아들여야 하는게 살아있는 사람의 의무라는 말은 아주 묵직하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와는 다른, 전통적인 일본 미스터리 스타일이 엿보인다는 점도 독특합니다. 우선은 여정 미스터리 느낌이 물씬 난다는 점을 들고 싶네요. 도쿄를 무대로 한 작품임에도 "신참자" 의 무대와 같은 니혼바시 주변, 이른바 칠복신 신사 순례길을 바탕으로 한 탐문 수사가 길게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도쿄 사는 사람들에게야 별 거 아니겠지만 다른 지방, 타국의 독자에게는 이국적인 느낌이 충만한 묘사들이라 절로 눈이 가더군요. 가가의 추천 요리집과 요리도 몇 개 등장하는데 그 중 메밀 국수는 저도 꼭 한 번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70년대를 주름잡았던 사회파 미스터리 느낌도 강합니다. 산재 은폐와 이를 피해자 아오야기에게 뒤집어 씌우는 회사의 행태, 그리고 이 때문에 살해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가족에게 억울한 비난이 쏟아지게 만드는 잘못된 매스컴의 행태 묘사 때문입니다. 산재 은폐건은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 겉핥기 식으로 짚고 넘어가는 점은 좀 아쉬웠습니다만, 이를 깊숙히 파고들면 가볍고 경쾌하게 읽을 수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의 작품이 나오기는 힘들었을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이렇게 읽는 재미도 있고, 잘 짜여져 있을 뿐 아니라 볼거리도 풍성한 작품이기는 한데 추리적으로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보다 약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수사만으로 거의 모든게 해결되어서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는 탓입니다.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경찰 소설, 수사 소설이라고 부르는게 어울릴 정도에요. 용의자 야시마가 도주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이유부터 경찰 포위망에 걸렸기 때문이고, 이후의 이야기도 추리보다는 수사 결과에 따라 진행될 뿐이거든요. 피해자와 하야마의 접점이 공장이라는걸 알아낸 경찰이 탐문 수사를 갔을 때 동료가 몰래 고발해서 산재 은폐건이 부각되고, 아오야기와 하야마의 범행 당일 행적을 뒤쫓다가 결국 그 날 아오야기가 만난건 하야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는걸 알게 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가가와 마츠야마가 칠복신 신사 순례라는 피해자 행적 파악에 성공하지만 이 역시 추리라기 보다는 우직하게 발로 걸어서 얻어낸 결과물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사 과정도 재미가 없는건 아닙니다. 가가와 동행하는 마쓰미야의 "헛걸음을 얼마냐 하느냐에 따라 수사 결과가 달라진다"는 대사가 와 닿을 정도로 발로 뛰는 꼼꼼한 수사의 디테일도 대단하고요. 하야마의 동거인 가오리와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하아먀가 서점에서 시간을 보냈으리라 추리하여, 결국 하야마가 피해자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걸 밝혀내는 과정은 독자에게도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짜릿하고 멋졌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은 진상입니다. 일단 범행 당일 피해자와 함께 있던 범인이 들통나지 않은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합니다. 카페에서 무려 2시간 정도나 함께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는 등 노출되어 있었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상황이니까요. 여기에 지나가던 하야마가 '우연히' 피해자가 죽어가는걸 보고 가방과 지갑을 들고 도주했다? 그러다가 교통 사고가 나서 의식 불명이 되어 죽었다? 이건 우주의 운이 다 모이기 전에는 불가능할 거에요.
피해자의 유품인 디카에 종이학 사진이 남아있지 않았단 것도 의문이며, 핸드폰 기록만 확인하고 접속했던 블로그 URL을 확인하지 않은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종이학 사진과 '기린의 날개' 블로그를 피해자의 행적과 함께 이으면 알 수 없던 피해자 행동의 의미가 드러나 사건 수사의 또다른 핵심 축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이를 짚어내지 못한 건 단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작가의 편의적 전개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이는 칠복신 순례의 핵심이 '순산 기원' 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하야마의 동거인 가오리의 임신과 연계하여 풀어나가는 전개도 한 몫 단단히 하고 있고요.
피해자가 니혼바시 다리 기린 상까지 구태여 찾아가 죽은 것도 굉장히 작위적입니다. 이럴 힘이 남아 있었다면 도움을 요청하는게 상식적이잖아요? "기린상" 을 사건과 연결시키려는 억지가 너무 지나쳤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 단계 성장하는 가가 형사의 모습은 마음에 들고 이런저런 볼거리는 많지만 추리 소설로서는 평범한 수준입니다. 그래도 재미는 확실한 만큼 시리즈 팬이시라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5/02/22

모즈가 울부짖는 밤 - 오사카 고 / 김은모 : 별점 2.5점

모즈가 울부짖는 밤 - 6점
오사카 고 지음, 김은모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킬러 '모즈'는 타겟 가케히를 죽이려다 가케히가 들고 있던 폭탄이 폭발하는 사고에 휘말렸다. 사고에 휘말려 죽은 피해 여성은 경시청 공안부 형사 구라키의 아내 다마에였다. 담당자였지만 가족이라 사건에서 배제된 구라키는 얻어낸 열흘간의 휴가를 이용해 사건 수사에 나섰다.

한편, 신가이 가즈히코는 호메이 흥업 조직원들에게 살해당했지만, 기억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호메이 흥업이 계속 그의 목숨을 노리는 와중에, 신가이는 자신의 과거를 찾기 위해 분투하여 결국 기억을 되찾았다. 그는 가즈히코가 아니라 동생 히로미이자 킬러 '모즈'였다. 

구라키, 모즈, 그리고 형사 오스기 등의 수사와 추적으로 폭탄 테러는 공안부장 무로이 때문이었다는게 드러났다. 무로이와 구라키의 아내 다마에는 불륜 관계였고, 방일하는 사르도니아 대통령을 테러하기 위해 가케히는 무로이를 협박해서 정보와 폭탄을 손에 넣으려 했었다. 무로이는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이 협박에 흥했지만, 다마에가 폭탄을 이용해 가케히를 죽이려다 폭발에 말려든게 진상이었다...

오사카 고의 '모즈' 시리즈 첫 번째 작품입니다. 1986년에 출간된 작품이지요.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가가와 데루유키 주연으로 드라마도 제작된 인기작입니다. 우리나라에도 10여년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일본 본격 미스터리 100선'에 선정되어 있어서 이전부터 관심이 가던 차에, 늦었지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기억을 잃은 킬러 신가이 가즈히코와 아내를 잃은 공안 형사 구라키 나오타케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절벽에서 추락해 기억을 상실한 채 발견된 신가이는 아주 사소한 단서들을 토대로 과거를 찾아 나섭니다. 폭탄 테러로 아내를 잃은 구라키 형사는 독단적으로 수사를 진행하며 사건의 실체를 쫓고요.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굉장히 빠른 전개로 강한 흡입력을 보여줍니다. 지루함 없이 여러 사건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와중에 폭력과 액션도 넘쳐나서 오락적인 요소도 풍부하거든요. 사람도 여럿 죽어나가고요.

복잡한 이야기들이 얽히지만, 모두 '복수'가 중심이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구라키 형사는 폭탄 테러로 죽은 아내 다마에의 복수를 위해, 신가이(히로미)는 형 가즈히코의 복수를 위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칩니다. 흑막이자 원흉인 공안부장 무로이조차 사르도니아 대통령을 죽이려 했던 이유는 딸과 사위의 복수를 위해서였고요. 이렇게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이 각자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며 이야기가 전개되는건 신선했습니다. 

반전들도 인상적입니다. 첫 번째 반전은 기억을 잃은 신가이 가즈히코가 사실은 쌍둥이 동생 히로미였다는 것입니다. 히로미는 남성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트라우마로 인해 여장을 하고 킬러로 살아왔다는데,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은 꽤 설득력 있습니다. 그가 신가이로 오인되는 과정도 합리적인 편이고요.

두 번째 반전은 구라키 형사의 아내 다마에가 사실 폭탄 테러의 범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마에는 공안부장 무로이와 오랜 기간 불륜 관계였고, 이를 가케히에게 들켜 협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로이가 폭탄을 가케히에게 주기로 했었습니다. 무로이는 사르도니아 대통령 에체베리아에게 개인적인 원한도 있어서 가능했지요. 그러나 다마에가 폭탄을 이용하여 협박자였던 가케히를 죽이려다 결국 자신까지 말려들게 되었던 겁니다.

그 외에도 구로키와 다마에 사이에 태어났던 딸이 사실은 무로이의 자식이었고, 무로이의 부하 와카마쓰가 호메이 흥업과 손을 잡은 악당이었다는게 밝혀지는 장면도 꽤 놀라운, 반전이라면 반전입니다. 이렇게 많은 반전들 모두가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 점입니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이야기 구조가 지나치게 복잡합니다. 구라키 형사의 수사와 신가이(히로미)의 추적, 그리고 흑막인 무로이 부장의 존재까지는 납득할 만하지만, 여기에 더해 무로이의 부하 와카마쓰 경시가 독단적으로 극우 폭력단 호메이 흥업을 조종했다던가, 감찰부의 쓰키 경시정이 부하 미키를 이용해 내부 감찰을 벌였다는 등의 이야기는 과한 느낌을 줍니다. 이들의 비중있는 등장은 오히려 서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특히 미키는 정말 불필요해서, 왜 등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구로키에게 갖게되는 연심도 불필요한 요소였던건 마찬가지고요. 

또한, 이야기 전개도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호메이 흥업이 애초에 신가이를 살해하려 한 이유부터 명확하지 않습니다. 무로이 부장 측이 불륜과 테러의 증거 사진이 신가이에게 있을 것이라고 단정한 것도 불합리하고요. 피해자인 가케히가 설령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신가이에게 넘겼을리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가이(히로미)를 두 번이나 생포하여 사진의 위치를 추궁한다?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애초에 불륜 사진 확보 없이 가케히에게 사진과 폭탄을 전해준 것도 말이 안되지요. 외국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라는 거대한 범죄가 벌어졌을 때, 그에 대한 증거가 되는 사진을 회수하지 못하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건 당연하니까요. 

구로키와 신가이 이야기가 교차될 때, 신가이 시점은 신가이가 살아난 다음부터 시작되지만 구로키 시점은 폭탄 테러 직후라서 시계열이 일치하지 않는데, 왜 이런 방식을 취했는지도 의문입니다.

결말도 아쉬운 점 중 하나입니다. 대단한 증거없이 무로이 부장의 자백으로 마무리되는건 허무하며, 길고 늘어지는 감도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대단원에 이르는건 비현실적이었어요. 하긴, 형이 살해당한 그 장소에서 쌍둥이 동생이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고 발견된다는 기본 설정부터 비현실적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도 많지만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강렬한 반전, 그리고 복수를 주제로 한 독창적인 이야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인기를 끌만한 요소는 많아요. 무엇보다도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킬링 타임용 작품을 찾는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본격 미스터리 100에 선정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만...

2013/03/17

매스커레이드 호텔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매스커레이드 호텔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도쿄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피해자는 30세 전후의 회사원, 43세의 주부, 53세의 고등학교 교사였고, 사건 현장에는 수수께끼의 숫자가 남겨져 있었다.

45.761871, 143.803944
45.648055, 149.850829
45.678738, 157.788585

경찰은 이 숫자를 해독해내는 데 성공했다. 숫자는 다음 범행장소를 예고하는 메시지였다. 메시지에 의해 다음 범행장소로 예고된 곳은 최고급 호텔 코르테시아도쿄 호텔이었다.

경찰은 네 번째 살인을 막기 위해 호텔에 수사관들을 대거 급파하고 벨보이, 하우스키퍼, 투숙객 등으로 위장한 형사들이 잠복근무에 돌입했다. 닛타 형사도 호텔의 간판 부서인 프런트 직원으로 위장해 잠입 수사를 시작했다. 진짜 호텔리어처럼 보이기 위해 베테랑 호텔리어인 야마기시 나오미의 지도를 받으며, 둘은 사건 해결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교적 최신 장편. 기둥 줄거리는 연쇄살인사건이라는 강력 사건이지만, 가운 절도, 장님인 척하는 할머니, 스토커에게 쫓기고 있다는 미인, 끊임없이 어이없는 클레임을 거는 손님이라는 일상계 사건이 연달아 벌어진다는 구성이 독특합니다.

또한 이 일상계 사건들이 모두 나름대로의 트릭이 존재하고, 이 트릭들에서 힌트를 얻어 범행의 진상에 접근해 나가는 전개는 가가 형사 시리즈 "신참자"를 연상케 합니다. 단편 연작물 느낌을 주면서도 기둥 줄거리와 잘 엮어나가는건 판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상계물에 비하면, 본편 이야기인 연쇄살인사건 이야기는 많이 별로입니다. 일단 상관없는 살인들을 연쇄살인사건으로 위장하여 진상을 흐리게 만든다는 설정부터가 "ABC 살인사건" 등 다양한 작품에서 이미 사용되었기에 뭔가 다른 아이디어가 필요했을 텐데, 그런 게 전혀 없다는 문제가 너무 큽니다. "호그 연속살인" 정도의 임팩트는 줬어야 했을 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암호도 억지스럽습니다. 연쇄살인처럼 보이게 하려면 "살인범 X" 같은 이니셜로도 충분했을 테고, 모방 범죄가 우려된다면 특별한 폰트와 사이즈 정도만 써도 충분했을 텐데 괜히 어렵게 꼬아놓기만 했으니까요. 호텔을 콕 집어 범행 장소로 지정할 이유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경찰의 주목을 끌어서 유리한 점이 뭐가 있을까요?

그 외에도 각 사건별로도 어설픈 점이 많아요. 예를 들면 오카베의 알리바이는 억지스럽습니다. 그때 옛 애인이 전화를 했으리라는 보장도 없을 뿐 아니라, 경찰에서 통화 내역을 조사했더라면 금방 진상을 알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혼자만 PC를 사용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요.

진상도 어딘가에서 본 듯한 내용이며 - "낯선 승객"이 생각나네요 -, 범인의 동기 역시 설득력이 떨어져서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물론 닛타와 야마기시 나오미의 밀당도 재미나고 소소한 일상계 트릭들은 충분히 즐길 만했습니다. 호텔이라는 장소에서 일하는 여러 전문가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고요.  제 별점은 2.5 점입니다. 차라리 호텔을 무대로 한 일상계 추리물이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무리하게 장편을 만든 느낌이에요.

2020/04/28

여태까지 나만의 가가 쿄이치로 형사 시리즈 순위

몰랐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시리즈 주인공인 가가 쿄이치로 형사 시리즈를 얼마전 읽었던 "기도의 막이 내릴 때"로 전부 완독했더군요.

기념삼아, 저만의 가가 쿄이치로 형사 시리즈 순위를 공개합니다.

공동 1위 : 별점 3점

공동 5위 : 별점 2.5점

8위 : 별점 2점 

9위 : 별점 1.5점

시리즈 9편 중 무려 7편이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보이는, 좋은 시리즈라는걸 잘 알 수 있습니다. 고전 스타일의 본격 퍼즐 미스터리는 물론 사회파서술 트릭, 심지어는 진범이 누구인지 독자에게 알려주지 않는 실험적인 작품까지 작품의 폭이 넓다는 것도 큰 장점이에요. 당연히 경찰 수사 소설로도 우수하고요. 이 시리즈만 읽어도 추리 소설의 큰 흐름을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완결되었다니 아쉽기도 한데, 언젠가 후속작이 나오기를 기원해 봅니다.

2025/09/19

가공범 - 히가시노 게이고 / 김은모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도 부부 자택에 화재가 일어난 후, 도의원인 남편 도도 야스유키의 사체는 거실 소파에서 전소된 채, 전 여배우인 아내 도도 에리코 사체는 욕실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다.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자살한 걸로 보였지만, 수사를 통해 위장된 자살임이 금세 드러났다. 경찰은 원한 관계를 축으로 탐문 수사를 진행해 나갔고, 고다이, 야마오 컴비는 진술을 통해 도도 야스유키의 태블릿이 사라졌다는걸 알아냈다. 그 직후, 범인이라는 인물이 협박 편지를 보내어 태블릿 속 정보를 거래하자고 제안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장편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갈릴레오 유가와'나 '가가 형사'가 아닌, 새롭게 시작된 고다이 쓰토무 형사 시리즈이지요.

가장 큰 장점이라면 치밀한 수사 과정 묘사입니다. 주변 진술을 통해 태블릿의 존재를 확인하고, 태블릿 전원이 켜진 위치 데이터와 수상쩍은 언행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유력 용의자로 포착하고, 과거 조사를 통해 야마오 경부보가 도도 부부와 고등학교 때 부터 알고 있었다는걸 알아내고, 현금 인출책의 결정적 증언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체포하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철저하게 발로 뛰는 수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터넷 정보 검색 따위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범인에 대한 결정적 단서 역시 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선보입니다. 도도 에리코는 귀한 손님에게만 티파니 찻잔을 낸다는데, 사건 현장 식기 세척기에서 그 찻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티파니 찻잔은 식기세척기에 넣으면 안 되는 물건입니다. 야마오는 사건 당일 차를 마시지 않았다고 말했고요. 그렇다면 범인은 최소한 야마오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티파니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귀한 손님, 또는 손님(범인)이 떠난 뒤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누군가가 찻잔을 현장에서 치웠던 것이지요. 

결국 수사를 통해 도도 야스유키가 살해당한 아내를 집에 있던 도구로 자살로 위장한 뒤,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른 뒤 자살했다는게 밝혀집니다. 자기 딸이라고 생각한 미사키가 범인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이러한 진상 외에도, 수사 중간중간에 나오는 여러 증언을 통한 의문들 - 예를 들어, 도도 야스유키는 체력이 좋았는데 어떻게 범인에게 간단히 살해당했는지 - 까지 모두 수사로 밝혀지는 등, 수사의 디테일은 최고 수준입니다.

수사 과정에서의 고다이의 예리한 관찰력도 빛납니다. 범인은 도도 저택에서 에리코를 목매달 끈을 조달했는데 왜 그런 준비를 사전에 하지 않았을까? 전기밥솥도 마찬가지, 왜 예약을 해제하지 않았을까? 즉 범인은 간단히 간파당할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우발적이면서도 어설픈 위장 공작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관찰을 통해 제시하거든요.

그리고 야스유키의 유지를 이어받고 자신의 결의도 합쳐 미사키를 숨겨주기 위한 야마오 경부보의 범죄 계획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그는 일부러 단서를 흘려 체포되었던 겁니다. 제목 그대로 '가공범'인 셈이지요. 하지만 야마오는 몇 달 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며, 그 시점이면 증거도 많이 사라져 진범을 체포하지 못한 채, 사건은 미제로 끝날 가능성이 높을 걸로 예상했습니다.

이는 거의 성공할 뻔 했지만, 고다이의 끈질긴 수사로 진범이 드러나게 됩니다. 고다이는 도도 에리코의 과거를 뒤져 고교 졸업 직후 숙모 집에 머물던 시기 임신했다는 정황을 잡고, 숨겨진 딸이 있으며 그녀가 도도 집을 드나들던 미사키였다는걸 밝혀냅니다. 도도 에리코의 임신을 밝혀내는건 수사 팀의 인해전술이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수사물이라는걸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하고요.

야마오가 이런 계획을 진행한 동기인 40여년 전인 1985년 고등학생 시절의 야마오, 도도 부부가 엮인 연애와 욕망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팜므 파탈을 넘어서는 매력의 소유자 에리코의 존재감이 압권이었어요. 이런 설정에서는 일반적인, 학생과 관계를 가진 교사 도도 야스유키는 알고보니 굉장한 인격자에 선한 인물이라는 반전 설정도 신선했고요.
세 명의 관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짝사랑'에 대한 작가의 생각 - "경솔하게 사랑을 주고받으니까 잃게 되는 거에요. 짝사랑이라면 상처 입는 일도, 상처 주는 일도 없잖아요." - 도 와 닿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미사키의 범행 동기는 ‘버림받음’과 ‘비교에서 비롯된 분노’로 제시되는데, 이미 친모가 에리코라는걸 안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자기 딸이 비행을 저질러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살인으로 폭발하기까지의 중간 과정이 너무 부족합니다. 단순 폭행도 아니고 살인인데 말이지요.

가공범 설정도 지금 보기에는 다소 뻔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범행을 떠안는 모습은 "용의자 X의 헌신"과 별다를게 없으니까요. 너무 빠르게 야마오의 속셈이 드러나는 것도 문제고요.

핵심 동기인 도도 에리코의 출산과 아이 유기도 배경 설명이 빈약합니다. 아이는 야마오의 아이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구태여 낳을 필요부터가 없었습니다. 묘사된 둘의 관계로 보면요. 힘들게 낳는 선택을 했다면, 왜 곧바로 버렸는지도 알 수 없어요. 이 부분은 낙태가 금기시 되었던 시대적 배경이나 에리코의 개인사 같은게 추가적으로 보강되었어야 납득이 되었을 겁니다. 

진범이 밝혀진 뒤 사회적 파장이나 여론의 반응이 거의 다뤄지지 않아 결말의 현실감이 약하고, 나가마의 죽음은 결국 자살이었다는 점에서 불필요해 보인 등도 문제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고다이 형사도 작가의 다른 시리즈 주인공들과 비교하면 존재감이 옅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성실함, 눈썰미 외에는 캐릭터적 매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래도 치밀한 수사와 ‘가공범’이라는 아이디어가 만들어내는 긴장은 꽤 만족스럽습니다. 경찰 수사물로는 우수한 수준이에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경찰 수사물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읽고나니 제일 불쌍한건 도도 야스유키네요. 자기 딸이라고 착각한 남의 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으니...

2015/11/20

내가 그를 죽였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내가 그를 죽였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예 시인 간바야시 미와코와 유명 작가 호타카 마코토의 결혼식에서 호타카가 독살당했다. 호타카에게 버림받은 동물병원 조수 나미오카 준코도 음독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동반 자살을 위해 호타카가 먹는 비염약에 독을 섞은 것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 결과, 그녀가 호타카의 비염약을 바꿔치기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와코는 약을 바꿔치기할 수 있었던 용의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려 하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로,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에 이어 범인을 명시하지 않는다는 실험적인 시도를 한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일단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보다는 추리적으로 훨씬 낫습니다. 특히 ‘필케이스에 전혀 다른 인물의 지문이 찍혀 있었다’는게 스루가 나오유키의 범행을 증명한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탁월합니다. 필케이스에 독약을 넣고 그것 자체를 바꿔치기한 것이라면, 당연히 호타카와 접점이 없는 다카히로는 용의자에서 제외됩니다. 남은 두 명인 스루가와 유키자사 중에서 스루가가 '호타카 전처의 짐을 맡았다'고 말했으니 범인은 스루가라는 결론이 도출되고요. 이 정도면 독자에게 충분히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본격 추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물론 미와코가 다카히로에게 케이스를 넘겨주었을 가능성도 있고, 유키자사 가오리가 호타카와 관계가 있었을 때 케이스를 확보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경찰에서 수사를 보강할 필요는 있겠지만, 독자는 넘어가도 무방할 듯 합니다.).

그 외에도 나미오카 준코가 사망한 장소를 밝혀나가는 디테일—상품 전단지에 쓴 유서, 머리에 묻은 잔디, 샌들에 묻은 흙, 짝이 맞지 않는 휴대폰 충전기 등—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실험적인 시도 때문인지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제법 많습니다. 우선 캡슐의 개수에 대한 지루한 공방이 그렇습니다. 자살 시체가 놓인 상황에서 과연 캡슐이 몇 개였는지를 세고 있을 정신이 있을까요? 스루가는 시간이 좀 있었으니까 혹시 몰라도, 방에 잠깐 숨어 있던 유키자사 가오리의 눈에 캡슐 개수가 들어왔다는건 영 설득력이 없습니다. 저만 해도 매일 먹는 알약이 지금 몇 개 남았는지 모르니까요. 게다가 그녀가 ‘여섯 개 있었다’라고 증언해봤자, 그 증언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건 핵심 증거(필케이스)에서 독자의 시선을 빼앗기 위한 억지 설정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워요.

또한 준코가 캡슐을 구한 시점이 금요일 오후였기 때문에 약통에 독을 집어넣을 틈이 없었다는 주장은, 뒷 부분에서 다카히로 혼자 1층에 있을 때 그녀가 필케이스에 독약을 넣었다는게 밝혀지면서 모순이 발생합니다. 누군가 집에 있을 때도 독약을 넣는 게 가능했다면, 밤에도 넣는 것이 가능했을 테니까요. 왜 이런 부분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에 더해 마지막 추리 쇼는 작위적이라는 단점의 절정입니다. 가가가 수집한 증거라면, 이런 비공식적이고 비효율적인 방식 대신 스루가를 바로 연행해 취조하는 게 더 합리적이니까요. 캡슐에 집착하면서 용의자들을 몰아붙이는 장면은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이런 연출이 있어야 소설로서 성립되니 트집 잡긴 애매하지만, 가가의 말처럼 애거서 크리스티의 세계에 가까운 소설같은 이야기라는건 분명합니다.

용의자인 스루가 나오유키, 유키자사 가오리, 간바야시 다카히로의 시점이 번갈아 전개되는 구성도 흥미로우나 이들 중 한 명이 범인이기에 전개 역시 객관적이지 않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최근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대부분이 이런 방식인데, 개인적으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네요. 범인 시점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야기를 가공한다는 점에서는 "악의"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악의"는 애초에 수기 형식을 빌린 서술 트릭물에 가까운 작품이니 비교 자체가 어렵지요.

또 호타카를 누구나 죽이고 싶을 정도로 인간적으로 문제가 많다고 묘사하여 용의자들의 동기를 그리고 있는데, 지나치게 주관적인 심리 묘사 탓에 오히려 감정선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에요. 특히 스루가의 속내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용의자들이 모두 자기 변호에만 급급하다 보니 오히려 간바야시 다카히로가 가장 수상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스루가는 흠모하던 여인이 죽었고, 유키자사는 낙태를 한 바 있어 ‘죽음’과 연결되지만, 간바야시는 여동생에 대한 그릇된 애정을 제외하면 호타카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동기 면에서는 가장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설령 동기가 있다 해도 여동생의 결혼식을 망칠 인물 같지는 않습니다. 동기를 드러내려면 본인의 시선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표현했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키자사가 아이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설정을 다른 인물의 시선을 통해 묘사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와 재미 모두 전작보다는 낫지만, 다양한 단점이 뚜렷한 범작이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는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와 마찬가지로 정답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추리소설로서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작품을 마무리한 점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좋은 점수를 주긴 어렵습니다.

2015/11/03

졸업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졸업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T대학생인 가가와 친구들 - 사토코, 나미카, 도도와 쇼코, 와코와 하나에 -은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쇼코가 원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정황상 자살로 보였으나 옆방 학생에 의해 외부에서의 침입이 의심되는 등 살해 의혹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들의 고교 은사 미나미사와와 함께 한 다도회에서 나미카마저 음독하여 죽고 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시리즈 캐릭터인 가가 형사 시리즈 제 1작. 1986년 발표된 작품으로 초기작입니다.

작품은 전형적인 고전 본격 퍼즐 미스터리물입니다. 아래의 수수께끼 두 개를 풀어나가는 이야기니까요.

  1. 완벽한 밀실에 가까운 쇼코의 원룸에 어떻게 침입하여 살해하고 빠져나갔는지?
  2. 설월화 게임 중 어떻게 나미카를 특정하여 독을 먹일 수 있었는지?

그러나 초기작이라 그런걸까요?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일단 트릭이 영 아닙니다. 특히 형상기억합금으로 문 자물쇠를 가공했다는 첫 번째 트릭은 정말 별로에요. 겨울날 닫힌 창문 밖에서 라이터 불로 지지는 정도로 변형이 가능할 정도로 형상기억합금의 변형력이 좋을리 없으니까요. 또 담배를 피워본 사람은 다들 알겠지만 라이터로 뭔가를 가열하는 행위는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발표 당시에는 첨단이었을 소재를 활용한 과학 트릭이기는 했지만, "탐정 갈릴레오"만큼의 설득력을 보여주지 못해서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트릭, 즉 설월화 게임에서 타깃을 나미카로 정하게 만든 트릭은 좀 낫습니다.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복잡하지만, 여러 그림들을 사용하여 설명해주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쉬웠고요. 다도에서 따왔다는 설월화 게임의 룰 자체가 친숙하지 않은 만큼, 이런 배려는 아주 고맙더군요. 트릭도 뻔할 수는 있지만 확실한 방법일 뿐더러, 이를 밝혀냄으로써 "공범"이자 "진범"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괜찮았습니다.

허나 트릭이 작품 내용과 따로 논다는건 문제입니다. 나미카가 쇼코의 자살 사건과 별개로 벌인 조사가 그녀의 검도 결승전 의혹과 관련되어 있어서 설월화 게임 사건이 일어났다는 동기는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나미카가 검도에 얼마나 진지했는지를 작중에서 효과적으로 보여주지 못한 탓에, 그녀가 설월화 게임으로 자신의 우승을 방해한 친구를 응징하려 했다는건 납득가는 설정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아무리 검도가 중요하다 해도, 자기가 이상한 약을 먹어서 시합에서 졌다고 해도 친구한테 비소를 먹일 생각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쇼코의 죽음에 대한 징벌보다 자신의 검도 시합을 망친 친구를 응징하기 위해 범인(으로 의심되는)에게 협력을 요청하여 게임을 벌인다는 건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와코와 하나에에게 테니스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조차 설명되지 않아서 이런 복수가 무슨 의미인지 알기도 힘들었고요.

또 도도가 나미카를 살해해서 얻는 게 무엇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쇼코의 죽음은 어쨌든 그녀의 자살 시도로 말미암은 것이고, 도도가 그것을 방조했다 치더라도 그건 큰 범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나미카를 죽인 것은 자살로 덮기에는 무리수도 많고, 범인이 너무 적은 인물들로 한정되기에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간다면 이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미카 방에서 비소가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경찰 수사가 진작 시작되었을 테고, 나미카가 마실 차에 뭔가를 넣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도도와 사토코뿐이었으니 진작에 꼬리를 잡혀을테니까요. 이런 리스크를 짊어지느니 차라리 형상기억합금을 이용해 다시 침입하여 원룸에서 자살로 위장하는 게 나았을 겁니다.
그리고 도도는 나미카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트릭을 만든 뒤 억지로 가져다 붙인 동기라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쇼코의 죽음은 친구들이 입을 모아 그녀가 자살할 리 없다고 말하는데, 마지막에 도도의 편지로 사실은 자살이었다고 밝히는건 반칙으로 보이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명성에 걸맞은 읽는 재미는 있었지만 트릭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이야기와 전혀 어우러지지 못한 작품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은 설월화 게임 트릭과 그것 때문에 범인이 밝혀지는 부분 정도 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도 초기에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2021/01/24

추리 소설 1,000편 리뷰 분석

추리 소설 1,000번째 리뷰 등록!

염원했던 추리소설 리뷰 1,000편 올리기를 달성했습니다. 1,000편의 리뷰를 작성하면서, 책 한 권을 출간하는 소기의 성과도 있었지요. 1,000편 업로드 기념 및 개인적인 자료 정리 차, 여태 읽었던 추리소설 리뷰 1,000편에 대한 간략한 데이터를 정리하여 공개합니다.

리뷰 갯수 1,000 

당연하겠지요?

책 권수 1,049권 

"브라운 신부""크리시" 리뷰와 같이 여러 시리즈를 한 편 리뷰에서 정리한 경우도 있고, "그것" 처럼 작품 한 편이 여러권으로 이루어져 있어도 리뷰 한 편으로 소개한 경우가 많아서 권수는 더 많습니다.

책 종수 1,008종 

권 수가 많은 이유에 더해, 중복하여 작성한 리뷰도 있어서 이를 빼면 최종적으로 리뷰한 책은 총 1,008종입니다.

국가별 

일본 454, 영미 394, 한국 63, 프랑스 29, 독일 13, 그외 55

예상대로 일본 작품 비중이 거의 절반 가까이이며, 영미 작품까지 포함하면 전체의 85%가까이 되는 압도적인 비중입니다. 국내 출간되는 작품들과 제 취향을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장르별 

본격물 성향 작품 리뷰가 357, 스릴러는 229, 경찰/수사 127, 일상계가 80, 호러 73, 하드보일드 69, 역사 추리 55, 모험물 54 순입니다. 본격물을 좋아하는 제 취향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장르 불문하고 단편집은 137편의 리뷰를 작성하였고요. 

참고로 본격물이면서 수사물인 작품이거나, 본격물이면서 일상계인 작품 등 키워드는 중복하여 체크된 결과입니다.

별점별 

경성탐정록 두 편은 제외한 총 1,006 종의 책 별점 분포는 아래와 같습니다. 

5점 : 4, 4.5점 : 7, 4점 : 71, 3.5점 : 48, 3점 : 271, 2.5점 : 259, 2.4점 : 1, 2.3점 : 1, 2점 : 227, 1.5점 : 88, 1점 : 26, 0.5점 : 1, 0점 : 1, 없음 : 1

평균 이상 별점인 2.5점 이상 작품이 660종으로 전체의 2/3를 차지합니다. 꽤 괜찮은 작품들을 읽어왔었다는 의미지요. 나름 뿌듯하네요. 별점 5점을 받은 작품, Hall of Fame만 별도로 소개해 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9마일은 너무 멀다"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 

"도끼" 

"특별요리" 

* 특별요리는 2003년도 동서 버젼이었고, 2015년에 다시 읽었던 엘릭시르 버젼은 별점 4점이었습니다.

참고로 책 별점과는 별개로, 단편집 단편별 중 별점 5점을 받았던 단편은 아래와 같습니다. 

"살의" (in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결산"위험천만한 게임" (in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우체국에서 생긴 사건" (in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사기꾼의 카드" (in "클로버의 악당들")

"새", "성모상" (in "대프니 듀 모리에") 

"국화의 먼지" (in "저녁싸리 정사")

"죽음" (in "악몽을 파는 가게 1") 

이 역시, 저의 고전 본격물 취향을 잘 드러내 주네요.

작가별 

1. 작가별 리뷰한 작품 갯수 순위

1. 히가시노 게이고 : 48
2. 애거서 크리스티 : 33
3. 요네자와 호노부 : 21
4. 스티븐 킹 : 18
5. 마쓰모토 세이초 / 엘러리 퀸 : 16
7. 존 딕슨 카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 : 13
8. 요코미조 세이시 : 12
9. 와카타케 나나미 : 11
10. 아리스가와 아리스 / 에드 멕베인 : 10 
12. 미쓰다 신조 / 아서 코난 도일 / 조르주 심농 / 시마다 소지 : 9
16. 다카기 아키미쓰 / 미야베 미유키 : 8
18. 에도가와 란포 / 노리즈키 린타로 / 도진기 : 7
수많은 작가가 있지만, 공통 18위 까지만 선정합니다. 일본, 영미 작가가 많은건 국가별 순위와 동일합니다. 프랑스 작가 조르주 심농이 12위에, 한국작가 도진기가 18위에 위치하고 있을 뿐이네요.

2. 작가별 평균 별점 순위 (5권 이상 작품을 읽은 경우)

1. 콜린 덱스터 : 6권 리뷰, 평균 별점 3.6666...
2. 로스 맥도널드 : 5권 리뷰, 평균 별점 3.6
3. 기리노 나쓰오 : 5권 리뷰, 평균 별점 3.4 
3. 모리스 르블랑 : 5권 리뷰, 평균 별점 3.4
5. 존 딕슨 카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 : 13권 리뷰, 평균 별점 3.269...
6. 미쓰다 신조 : 9권 리뷰, 평균 별점 3.055....
7. 딕 프랜시스 : 5권 리뷰, 평균 별점 3
8. 다카기 아키미쓰 : 8권 리뷰, 평균 별점 2.875
8. 미야베 미유키 : 8권 리뷰, 평균 별점 2.875
10. 마쓰모토 세이초 : 16권 리뷰, 평균 별점 2.84375
11. 와카타케 나나미 : 11권 리뷰, 평균 별점 2.8181...
12. 우타노 쇼고 : 5권 리뷰, 평균 별점 2.8
13. 요코야마 히데오 : 6권 리뷰, 평균 별점 2.75
14. 코넬 울리치 : 5권 리뷰, 평균 별점 2.7
15. 아서 코난 도일 : 9권 리뷰, 평균 별점 2.6666667
15. 조르주 심농 : 9권 리뷰, 평균 별점 2.6666667
15. 기시 유스케 : 6권 리뷰, 평균 별점 2.6666667
18. 엘러리 퀸 : 16권 리뷰, 평균 별점 2.65625
19. 미치오 슈스케 : 6권 리뷰, 평균 별점 2.583333
20 애거서 크리스티 : 33권 리뷰, 평균 별점 2.5757576
21. 에도가와 란포 : 7권 리뷰, 평균 별점 2.5714286
22. 요코미조 세이시 : 12권 리뷰, 평균 별점 2.541...
23. 미카미 엔 : 6권 리뷰, 평균 별점 2.5
비슷한 주제로 13년 전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순위가 대폭 바뀌었네요. 최소 2권 이상의 작품을 읽은 작가는 114명, 어느정도 평균을 낼 수 있는 수치인 5권 이상 읽고 리뷰를 남긴 작가는 33명입니다. 이 중 평균 2.5 이상 별점을 유지한 작가는 콜린 덱스터 외 24명입니다. 프로야구로 따지면, 1군 소속 선수의 72% 정도가 평균 이상이었던 셈이니 굉장히 훌륭한 성적이지요. 25명에 들지 못한 8명 중에서도 요네자와 호노부, 시마다 소지, 스티븐 킹, 아리스가와 아리스 등은 평균 2.4점대로 아쉽게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니 더욱 그러합니다. 명성이 있는 작가는 확실히 이름값을 한다는 증거죠. 가장 많은 작품을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평균 별점은 2.32점인데,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유명한 대표작, 걸작만 추려서 읽은 경우는 별점이 높을테고 많이 읽을 수록 평균 별점은 불리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크리스티 여사님 평균 별점이 비교적 낮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위권을 살펴보면, 5권 이상 읽은 작가 중 꼴찌는 6권 평균 별점이 2.083점인 니시무라 교타로, 전체 꼴찌는 읽은 작품 4권 별점 평균이 1.1점에 불과한 제임스 패터슨이었습니다. 니시무라 교타로는 모르겠지만, 두 번 다시 제임스 패터슨 작품을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탐정별 (5권 이상 읽은 작품만 뽑아봅니다)

1. 탐정별 리뷰한 작품 갯수 순위

1. 에르큘 푸아로 : 15권 리뷰
2. 엘러리 퀸 : 13권 리뷰
3. 셜록 홈즈 : 12권 리뷰
4. 긴다이치 코스케 : 11권 리뷰
5. 가가 (학생 ~ 형사) : 10권 리뷰
6. 87분서 : 9권 리뷰
7. 메그레 경감 : 7권 리뷰
8. 고전부 / 기디온 펠 박사 / 노리즈키 린타로 / 모스 경감 / 히무라 히데오 : 6권 리뷰
13. 미스 마플 / 미타라이 기요시 / 시오리코 / 토츠카와 경부 (+가메이 형사) : 5권 리뷰
2. 탐정별 평균 별점 순위
1. 모스 경감 : 3.66666
2. 셜록 홈즈 : 2.958333...
3. 기디온 펠 박사 : 2.9166...
4. 엘러리 퀸 : 2.6923...
5. 긴다이치 코스케 : 2.6363...
6. 시오리코 : 2.6
7. 고전부 : 2.58333
8. 메그레 경감 : 2.5714...
9. 가가 (학생 ~ 형사) : 2.55
10. 에르큘 푸아로 / 미스 마플 / 미타라이 기요시 : 2.5
13. 87분서 : 2.4444...
14. 히무라 히데오 : 2.41666...
15. 노리즈키 린타로 : 2.25
16. 토츠카와 경부 (+가메이 형사) : 2.2
입니다. 원탑 모스 경감 밑으로 셜록 홈즈, 기디온 펠 박사까지는 평균 이상의 빼어난 별점을 자랑합니다. 확실히 탐정은 영미권 탐정이 더 제 취향이라는걸 알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간략하게 추리소설 1,000편의 리뷰에 대한 요약 정리를 마칩니다.

2018/05/19

회랑정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임경화 : 별점 1.5점

회랑정 살인사건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임경화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업가 이치가하라가 죽은 뒤, 유언장 공개에 참석하기 위해 이치가하라가 소유한 여관 "회랑정"에 일족이 모였다. 그런데 이치가하라의 친구 아내로 이 장소에 참석한 70대 할머니 혼마 기쿠요의 정체는, 반년 전 회랑정에서 일어난 화재 사고로 연인을 잃고 자살했다고 알려진 기리유 에리코의 변장이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그녀는 복수를 위해 이치가하라의 유언장 공개 시 반년 전 사건의 진상이 담겨있는 기리유 에리코의 유언장을 공개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 밤 유언장이 사라졌고, 이치가하라의 조카딸 유카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국내 한정 일본 추리 소설의 제왕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 얼론 작품으로 1991년에 첫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입니다. 

일본 고전 추리물의 형태를 많이 따라가고 있다는 특징이 눈에 뜨입니다. 초기작이라도 '가가 형사 시리즈' 류와는 다른, "십자 저택의 피에로""가면 산장 살인 사건" 과 유사한 류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십자 저택의 피에로", "가면 산장 살인 사건" 은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추리적으로는 꽤 볼만한 점이 있었지만,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못힙니다. 이유는 독자를 속이려는 의도가 지나치다 못해 완전히 잘못되어 있는 탓입니다. 우선 초반 기리유 에리코는, 화상에서 죽지 않고 깨어난 후 연인 지로의 사체를 확인하고 오열합니다. 그 이후 지속적으로 연인의 떠올리며 복수를 위해 회랑정에 다시 찾아왔다는걸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요. 독자들도 탐정역인 기리유와 함께 진범을 찾기 위해 이치가하라 일족 구성원들의 다양한 동기를 고민하고, 몇 안되는 단서를 조합하여 머리를 싸맵니다. 중반 이후 지로가 이치가하라의 친아들임이 밝혀지면서 부터는 범행 동기가 유산임이 명확해져서 이치가하라 일족은 더욱 의심스러워 집니다. 친아들이 있다면 다른 형제, 친척은 유산을 상속받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앞 부분에서 기리유가 확인한 지로는 그녀의 연인이 아니었고, 그녀의 연인으로 알았던 지로가 사실은 진짜 지로를 죽이고 그녀까지 죽이려 했으며, 그 정체는 변호사의 조수 아지사와 히로미라는 것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 때문에 이 모든게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자신이 지로라고 속이고 대신 유산을 상속 받으려는 아지사와 히로미의 음모라는 것인데, 도대체 장황하게 앞 부분에서 복수 운운하며 여러가지 단서와 동기를 던져 놓고 고민한 게 만든 건 뭐였나 싶네요. 게다가 기리유가 자신이 알던 지로가 아지사와 히로미라는 걸 이미 오래전, 이치가하라의 장례식 때 알아챘다고 하는 장면은 정말 넋을 잃게 만듭니다. 흑막이 누구인지 아는데 복수 운운하며 200페이작 넘는 분량 동안 탐정 행위를 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독자를 속이려고 하는 의도가 지나치다 못해 억지스러워서 짜증스러울 정도입니다. 상식적으로 아지사와 히로미의 정체에 대해 안 시점에서 진범이 누군지 뭐가 중요할까요? 구태여 회랑정에 일족이 모였을 때를 기다릴 필요도 없어요. 변장해서 찾아간 후 복수를 하는 게 당연하죠.

이렇게 이야기를 그려내려면 최소한 앞 부분에서 기리유가 지로의 사체를 확인할 때 굉장히 많이 타서 신원 확인이 어렵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관 지배인 고바야시 마호가 유카를 살해한 것이 기리유의 추리에 의해 밝혀진 후, 그에 따라 왜 아무런 동기가 없는(즉, 유산 상속과는 무관한) 그녀가 왜 이전에 지로와 기리유를 동반 자살을 위장해 살해하려 했는지? 에 대해 누군가의 사주가 있었다고 설명한 뒤, 아지사와 히로미가 마지막 순간에 등장했다면 적당히 이야기는 성립됩니다. 여기에 더해 두 명의 화자를 두어(가장 상식인인 나오유키가 적합했을 듯 싶습니다) 탐정 역을 번갈아 하게 했더라면 더욱 좋았을테고요.

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을 제껴두어도 전개에 있어 동기와 용의자 구성도 정교한 편이 못됩니다. 이치가하라의 유산이 거액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범행 동기가 일족 모두에게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소스케는 국회 의원 출마를 예정 중이라 돈이 필요하다, 요코 남편의 회사가 어려워 돈이 필요하다 등은 모두 추정일 뿐 사실로 밝혀지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오히려 일족 모두 그다지 돈에 궁핍하지 않다는 묘사만 있을 뿐입니다. 또 일족은 지로가 이치가하라의 친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에 대해서 깊게 파고들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도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 까지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입니다.

물론 속도감 있고 흡입력 있는 전개는 괜찮아요. 최소한 저 마지막 황당 장면 전 까지는 아주 흥미롭게 읽은 건 사실이거든요. 경찰이 기리유의 모발을 찾아낸 후 그녀가 점차 궁지에 몰리는 과정의 서스펜스도 좋고요. 추리적으로도 고바야시 마호가 유카를 살해한 범인이며, 과거 사건에서 공범임을 알아내는 장면도 그런대로 쓸만한 편이에요. (개인적으로는 그냥 '숨어 있으려고' 그 방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왜 전혀 고민하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러나 이 정도 장점으로 단점을 덮기는 무리입니다. 탐정이 누가 범인인지를 이미 아는 상황에서 공범자를 알아내기 위해 벌이는, 무의미한 사기극에 불과하니까요. 제 별점은 1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시더라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5/12/02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 김홍민 : 별점 2.5점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 4점
김홍민 지음/어크로스

필명인 마포 김사장으로 유명한 출판사 북스피어 사장 김홍민 씨가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한 글과 본인 블로그에 올린 글을 모아 출간한 책입니다. 

저는 마포 김사장 뉴스레터는 물론, 블로그도 RSS로 구독하고 있는 독자입니다. 때문에 그간의 재기발랄한 글들을 책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되어서 아주 기뻤습니다. 다 재미있지만 그 중에서도 제약적인 예산 하에서 지혜를 짜내 자신이 출간한 책을 홍보하려는 노력과 제목이기도 한 그의 철학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가 더해진 좌충우돌 에피소드들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1부가 그러한 이야기 중심인데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와 손톱"의 봉인 페이지에 대한 이야기
  2. 뒷날개를 활용한 등장인물 소개 (이건 정말 필요한 책에는 아주 최고일 듯 싶어요)
  3. 과학 소설 전문 출판사 '불새' 관련 기가 막히는 이야기: 공무원이었던 어느 남자가 로버트 하인라인의 "은하를 넘어서"를 읽고 출판사를 차린 뒤 과학소설을 내놓는다. 일곱 권의 책을 내고 문을 닫는다. 많은 이의 성원으로 재고를 처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수익으로 불새 대표가 뭘 했느냐. 이런 빌어먹을, 다시 책을 펴내기 시작했다. (이 부분만큼은 원 글의 감동을 살리고자 거의 그대로 인용합니다)

또 작가, 출판인을 꿈꾸고 있는지라 여러모로 참고가 되는, 실전에 기반한 에피소드들인 2장의 이야기들도 좋았습니다. 다짜고짜 투고는 옳지 않다(출판사 절차를 따를 것), 공모전에 대한 팁 — 장면 전환에 전화를 이용하지 말라, 진부한 비유는 피하라, 평범한 보통 명사는 제목에 쓰지 말라, 불필요한 묘사로 시작하지 마라, 뻔한 기관 국정원 등을 주요 소재로 삼지 마라, 영화처럼 서술하지 마라(주인공의 시선과 행동만을 쫓아 전개했을 때의 문제), 짧은 장을 반복해서 만들지 마라 등 -, 그리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왜 4의 배수인지와 판권 페이지 관련 이야기 등은 재미도 있고 유익했으니까요.

허나 몇 가지 의견에는 동의하기 힘들긴 했어요. 미야베 미유키"에도물" 출간 논란이 대표적이죠. 일단, 북스피어가 키워놓은 시장을 날로 먹으려고 한 비채는 엄연히 상도의를 어긴 것이며, 도덕적인 면에서 비난받아야 함은 마땅하다는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선인세는 엄연히 작가에게 돌아가는 돈입니다. 작가 입장에서 보면 경쟁으로 내 작품값, 내 몸값이 올라가고, 출판사에서 그만큼 많이 팔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건 지극히 타당하면서도 고마운 일이에요. 즉, 좋은 작품을 썼고, 그것이 좋은 가격을 인정받고, 높은 판매를 보장받았다. 이게 전부입니다. 선인세 경쟁으로 한국 출판사가 글로벌 호구가 되었다! 라고 주장하는 건 말이 안됩니다. 마포 김사장 말대로 적정 금액이 암묵적으로 있다면 그건 담합이죠. 왜 유통사가 콘텐츠 창작자의 창작물 가격을 마음대로 정한답니까? 선인세가 높아서 독자가 피해를 본다는 게 명백하게 증명되지 않는다면(멀쩡한 책의 분책이나 동일 판형, 페이지 단행본 대비 가격 상승, 사재기를 통한 판매 부수 조작 등) 유통사들 간의 분쟁일 뿐, 독자와 작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뒤가 켕기는 건 출판사지 독자가 아니에요.
통일된 디자인과 판형으로 시리즈를 모으지 못한다는 문제는 있지만 에드 멕베인의 87분서 시리즈도 "아이스" 한 권만 피니스 아프리카에 말고 검은숲에서 출간되었고, 가가 형사 시리즈"신참자"만 출판사가 다른 등 이 바닥에 워낙 비일비재한 일이라 문제도 아닙니다. "경성 탐정록"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음에도 1, 2부 판형부터가 다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리고 한국 추리소설에 대해 언급하며, 한국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왜 필요한가? 이미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는데? 라는 생각을 드러낸 것도 섭섭했습니다. 한국 작가의 추리소설은 투자 대비 성공하기 어렵다는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라면 최소한의 애정은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꾸준히 각종 공모전을 개최하는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 황금가지와 너무 비교되는 마인드에요. 이래서야 그냥 장사꾼이지요. 미야베 미유키 작품만 영원히 팔 건가요?

이렇듯 마음에 안 들거나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앞부분, 1, 2부의 이야기는 괜찮았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본인, 그리고 출판사를 지지하는 팬층이 두텁다는 것은 알겠고, 그렇게 두터운 팬층을 만든 마포 김사장의 노력에는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도 북스피어의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덧붙이자면, 비록 이전에 제안했다가 거절당하기는 했지만(거절의 이유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네요) "경성 탐정록" 장편을 여기서 내 주면 참 좋겠다 싶긴 하네요. 마포 김사장의 재기발랄한 마케팅이라면 뭔가 될지도?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뭐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2006/12/26

제 1회 독자 미스터리 대상 - 만화부분

제 1회 독자 미스터리 대상 시작.

decca님이 추진하시는 국내 최초 독자선정 미스터리 대상 투표인데 만화부분이 빠져 개인적으로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알라딘을 통해 올 한해 나온 추리 만화만 대~충 정리해 보았습니다. 

제목을 불문하고 본격이나 정통 스릴러에 가까운 작품만 골라서. 시리즈는 재판이나 재간된 것이 아닌 신간만 기준으로 작성하였습니다.

가가 탐정 사무소 9~10 : 칸자키 스미

검은 사기 6 ~ 9 : 쿠로마루 / 나츠하라 타케시

곤충감식관 파브르 1~5 : 키타하라 마사키 / 아키야마 히데키

데스노트 7 ~ 12 : 오바 츠쿠미 / 오바타 다케시

도박 묵시록 카이지 31 ~ 33 : 후쿠모토 노부유키

라이어 게임 1 ~ 2 : 카이타니 시노부

명탐정 코난 52~55 : 아오야마 고쇼

명탐정 키요시로 사건노트 1~4 : 하야미네 카오루 / 에누에 케이

미궁 시리즈 32 ~ 33 : 카미야 유

미녀형사 아시미 15 ~ 16 : 곤도 마사유키

범죄 교섭인 5 : 키 타카시

사신탐정과 우울온천 / 사신 탐정과 유령학원 1 : 사이토우 미사키

소년탐정 김전일 2부 1 ~ 3 : 아마기 세이마루 / 사토 후미야

원 아웃 15 ~ 17 : 카이타니 시노부

월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 사사키 노리코

절대미각 식탐정 5 ~ 6 : 테라사와 다이스케

탐정학원 Q 20 ~ 22 : 아마기 세이마루 / 사토 후미야

CMB 박물관 사건 목록 1 ~ 2 : 카토우 모토히로

Q.E.D 23 ~ 25 : 카토우 모토히로

더 있긴 하겠지만 대충 대충의 기억과 조사로는 여기까지. 읽은 것은 반 이상이지만 새 시리즈는 거의 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탄력과 관성에 의해 보게되는 코난이나 김전일, QED 같은 시리즈는 선뜻 베스트라 내세우기가 좀 어렵네요.

그래도 단 한권을 꼽아야 한다면 구관이 명관, 명탐정 코난 53권과 QED 24권을 꼽겠습니다. 코난은 첫번째 에피소드는 그냥 저냥이었지만 두번째의 암호트릭이 꽤 괜찮았거든요. QED 24권은 QED만의 자그마한 에피소드인 크리스마스 에피소드가 마음에 들어서요. 

시리즈를 하나 꼽아보라면, 역시 몇년 전 부터 계속된 시리즈라 올해의 베스트로 꼽기에는 난감하지만 독특한 소재와 심리게임이 발군인 "원 아웃 을 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