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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2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9) 축배와 흉기 사이

추리소설에서 와인은 익숙한 소재입니다. 독살에 사용되기도 하고, 중요한 대화가 오가는 식탁에 오르기도 하지요. 하지만 와인 병 자체가 흉기가 되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영화에서는 술병을 휘두르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추리소설에서는 오히려 드문 소재입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와인병은 사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와인의 역사는 기원전 수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당시에는 암포라 같은 토기나 참나무통이 와인을 담는 용기였습니다. 두꺼운 유리병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7세기 이후이고, 지금과 비슷한 형태가 자리 잡은 것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이르러서였습니다.와인병의 모양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보르도 와인은 어깨가 각진 병을, 부르고뉴 와인은 둥근 어깨를 가진 병을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병의 실루엣만 보고도 어느 지역 와인인지 짐작할 정도이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병은 와인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두껍고 단단한 유리로 제작됩니다. 자연스럽게 무게도 제법 나가고, 목 부분을 잡으면 손에 쥐기도 편합니다. 축하와 만찬을 위한 물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둔기로 사용하기에도 적합한 형태인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추리소설에서도 와인병은 종종 인상적인 흉기로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앤서니 호로위츠의 "숨겨진 건 죽음"입니다. 

유명 이혼 전문 변호사 리처드 프라이스가 자신의 집에서 와인병에 맞아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현장에는 초록색 페인트로 적힌 ‘182’라는 숫자가 남아 있고, 탐정 호손과 작가 호로위츠는 그 숫자의 의미를 쫓으며 수사를 시작합니다. 여러 용의자가 저마다 충분한 살해 동기를 가지고 있어 마지막까지 범인을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정통 본격 추리소설입니다.

작품 속에서 흉기로 사용된건 1982년산 샤토 라피트 로트실드 병입니다. 보르도 1등급 와인의 대표격으로, 흔히 프랑스 보르도 '5대 샤토' 가운데 하나로 불리우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브랜드 중 하나이지요. 그 중에서도 1982년은 최고의 빈티지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아무리 와인병이 흉기로 적합했다 하더라도, 흉기로 쓰기는 구하기도 힘들고 너무 비싼 와인이지요. 이 보다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와인이 흉기로 등장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피쳐"입니다. 

이 작품은 사진가를 꿈꿨지만 월가의 변호사가 된 벤 브래드포드의 이야기입니다.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그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연인 게리를 살해하고, 그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되지요.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고, 프랑스에서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인기작입니다. 유난히 와인이 자주 등장한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벤의 인생이 중요한 전환점을 맞을 때마다 와인이 함께하거든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클라우디 베이 소비뇽블랑입니다. 

클라우디 베이는 뉴질랜드 말버러 지역을 대표하는 화이트와인으로, 지금도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벤은 아내의 불륜을 이 와인 때문에 눈치챕니다. 와인을 잘 모르던 베스가 어느 날 갑자기 클라우디 베이를 사 왔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가게에서는 이 와인을 취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웃인 게리가 즐겨 마시던 와인이었고, 베스 역시 그에게서 선물받은 것이었습니다. 벤은 게리를 찾아가 같은 와인을 함께 마시다 말다툼 끝에 결국 클라우디 베이 병을 휘둘러 그를 살해합니다. 와인 한 병이 불륜의 단서가 되고, 결국 살인의 흉기로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뒷이야기도 있습니다. 클라우디 베이 와이너리의 설립자는 더글라스 케네디와 친구였다고 합니다. 작가는 친구의 와인을 작품 속에서 최고의 소비뇽블랑이라고 극찬했지만, 그 와인을 살인의 흉기로 사용해 버렸기 때문에 설립자는 처음에는 못마땅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설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클라우디 베이 역시 함께 유명해졌고, 와이너리도 고액에 매각할 수 있었으니 지금은 무척 고마와하지 않을까 싶네요.

와인병은 원래 축배를 위한 물건입니다. 하지만 추리소설에서는 때로 사건의 단서가 되고, 때로는 살인의 흉기가 되기도 합니다. 같은 와인병이라도 작품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을 맡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평범한 식탁 위의 와인 한 병도 작가의 손을 거치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클라우디 베이를 보게 된다면, 저는 아마 먼저 이 소설부터 떠올릴 것 같습니다.

2026/06/07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6) 맥주가 맛있는 순간

맥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음료 중 하나입니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닿습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보리의 기원지로 알려져 있고, 이 지역에 살던 수메르인들은 보리와 밀로 만든 빵을 주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물에 젖은 빵이 발효된 것을 먹어 본 것이 맥주의 시작이었다고 하지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 문학으로 꼽히는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맥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맥주는 중요한 음료였습니다. 음식을 대표하는 상형문자가 ‘맥주’와 ‘빵’이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피라미드를 맥주와 마늘 덕분에 만들 수 있었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뜨거운 사막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시원한 맥주와 강장제 역할을 하는 마늘이 필요했다는 것이지요. 물론 고대 이집트에 냉장고가 있었을 리는 없지만, 더위 속에서 마시는 맥주가 각별하다는 사실만큼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듯합니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린 뒤 마시는 맥주 한 잔은 누구도 쉽게 거부하기 힘드니까요.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닷쿠 & 다카치 시리즈 중 한 편인 "맥주 별장의 모험"에서 주인공 닷쿠 일행은 바로 그런 유혹에 빠집니다. 그들은 불의의 사고로 무더위 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별장에 몰래 들어갑니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대량의 맥주를 발견하지요. 당연히 일행은 유혹을 참지 못합니다. 긴급 피난이라는 그럴듯한 자기 합리화를 내세우며 맥주를 들이켜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은 몸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더위로 땀을 많이 흘려 체내 수분이 부족한 상태에서 알코올의 이뇨 작용까지 더해지면 탈수 증상이 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젊은 닷쿠 일행에게는 별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유를 되찾은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텅 빈 별장 1층에 싱글 침대 하나만 놓여 있는 기묘한 상황에 대해 저마다 추리를 꺼내 놓기까지 합니다.

같은 작가의 단편 "맥주집의 문제"도 비슷합니다. 닷쿠 일행이 빈집에 산더미처럼 쌓인 맥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마시며 그 이유를 추리하는 이야기거든요. 만화 단행본 표지에서도 닷쿠 일행은 맥주를 들고 있는데, 이쯤 되면 참 맥주를 좋아하는 일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

작품 속 닷쿠 일행이 마신 것은 냉장고 속 캔맥주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캔맥주보다 병맥주 쪽이 조금 더 시원한 인상을 줍니다. 병 표면에 맺힌 물방울, 병뚜껑이 열릴 때 나는 소리, 잔에 따를 때 올라오는 거품이 캔맥주보다 조금 더 선명한 장면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가 즐겼던 맥주도 Remmers 병맥주였습니다. "독사"에서 그 상표명이 직접 언급되지요.

병맥주 하면 역시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힌 병을 꺼내, “퐁” 소리와 함께 뚜껑을 열고, 살짝 얼음이 낀 잔에 거품이 올라오도록 따르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데 아마노 세츠코의 "얼음꽃"에는 바로 이 습관을 이용한 살인 트릭이 등장합니다. 세노 쿄코는 냉장고 속 맥주를 냉동실에 얼려 둔 잔에 따라 마시는 남편의 습관을 이용해 남편을 원격으로 독살하고, 자살로 위장하는 데 성공합니다. 미리 잔에 청산가리를 발라 두었던 겁니다.

다만 이 방법은 보기에는 시원해 보여도, 과학적으로는 맥주의 맛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맥주에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적정 온도가 있는데, 얼린 잔은 그 온도를 지나치게 낮춰 버리는 탓입니다. 또 잔 표면에 맺히는 물방울 때문에 맥주를 따를 때 거품이 제대로 생기지 않을 수도 있고요. 가장 시원해 보이는 방식이 반드시 가장 맛있는 방식은 아닌 셈입니다.

그렇다고 더위 속에서 마시는 차가운 맥주만 맛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테미스의 검"에 등장하는 사코미즈처럼, 25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한 뒤 맥주를 마신다면 어떨까요. 그 맥주가 맛없을 리 없습니다. 그는 탄산이 주는 청량감을 두고 “마치 목에도 미각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고 느끼며, 맥주를 “액체 모양을 띤 황금”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 마음이 너무나도 잘 와닿습니다.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영화 "쇼생크 탈출"의 지붕 공사 장면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앤디는 간수의 세금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가로 동료들에게 맥주를 요구합니다. 그 덕분에 죄수들은 햇볕이 내리쬐는 지붕 위에 앉아, 차갑게 식힌 Stroh’s Bohemian 맥주를 한 병씩 나누어 마시지요. 특별히 고급 맥주는 아니지만, 그들은 그 순간만큼은 교도소 안에서 잠시 자유를 맛봅니다. 죄수가 아니라 하루 일을 마친 평범한 노동자처럼요.

물론 차갑지 않아도 특별한 분위기가 함께한다면 맥주는 충분히 맛있을 수 있습니다. M. C. 비턴의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에 등장하는 해미시 순경은 일부러 맥주를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 마시곤 합니다. 미국 영화 속 탐정들이 책상 서랍에서 술병을 꺼내 드는 장면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맥주를 마시면 자신도 옛 하드보일드 탐정과 닮아진 듯한 짜릿함을 느낀다고 하지요. 이쯤 되면 맛보다 분위기가 더 중요한 셈입니다.

스티븐 킹의 "여름 천둥"은 핵전쟁 이후, 살아남은 모든 것이 오염과 후유증으로 죽어 가는 세상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로빈슨은 버려진 개 간달프와 함께 살아가고, 근처 고급 주택가에 홀로 남은 팀린과 가끔 만납니다. 그러나 결국 방사능 후유증이 심해져 죽음을 앞두게 된 팀린은 자살할 준비를 마친 뒤 로빈슨을 부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미지근한 Budweiser를 나누어 마십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맥주의 제왕”이라면서요. 차갑지도 않고, 세상이 끝나 가는 자리에서 마시는 맥주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 장면의 Budweiser는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맛보다는 마지막으로 나누는 시간, 그리고 맥주라는 너무나 평범한 물건이 만들어 내는 쓸쓸한 분위기 때문입니다. 만약 간달프가 "사냥개 탐정"의 류몬 다쿠의 파트너 조처럼 Budweiser를 좋아하는 개였다면, 그 자리가 더 빛났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사실 이 자리는 Budweiser보다 벨기에 맥주 Duvel이 더 어울렸을겁니다. 시원해야 제맛인 라거 계열의 Budweiser와 달리, 에일 계열 맥주는 어느 정도 온도가 올라왔을 때 본연의 맛이 살아나는데 그 중에서도 Duvel이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향과 맛을 즐기기 좋은 맥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Budweiser도 겨우 구했던 로빈슨과 팀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만요.

이처럼 맥주의 맛은 온도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위, 갈증, 자유, 고독, 동경, 마지막 순간의 체념 같은 것들이 맥주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어떤 맥주는 차가워서 맛있고, 어떤 맥주는 오래 기다린 끝에 마셔서 맛있습니다. 또 어떤 맥주는 맛 자체보다 그 순간의 분위기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마시는 순간입니다. 뜨거운 날의 갈증이든, 하루 끝의 여유든, 이야기 속 인물이 느낀 자유든, 맥주는 그런 장면 속에서 가장 빛나는 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맥주를 맛있게 따르는 방법인 ‘세 번 따르기’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네로 울프도 좋아하는 Remmers 병맥주를 전용 금도금 병따개로 딴 뒤, 정확하게 거품을 맞춰 따라 마시곤 했다고 하니, 미식가에게 검증된 방법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맥주에 잘 어울리는 잔까지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세 번 따르기

1.
맥주병을 높이 들고 처음에는 천천히, 이어서 조금 세게 따라 거품을 만든다.

2.
거품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맥주와 거품의 비율이 1:1 정도가 되면, 병을 잔 가장자리로 가져가 천천히 따른다. 이때 거품이 잔보다 1cm 정도 높게 올라올 때까지 따른다.

3.
거품이 잔보다 1.5~2cm 정도 높아질 때까지 맥주를 조심스럽게 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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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8

미명의 집 : 건축탐정 사쿠라이 교스케의 사건부 - 시노다 마유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건축 대학원생 사쿠라이 교스케와 아오, 미하루 일행은 할아버지 아스마 와타루가 지은 이즈의 별장 “여명장”에 대한 아스마 리오의 조사 의뢰로 여명장을 찾았다. 여명장은 스페인풍 별장이지만 집 중심의 파티오가 주변 방과 바로 이어지지 않고, 심지어 창문조차 없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건물이었다.
알고보니 와타루는 1년 전 그 집에서 머리를 다쳐 죽었는데 경찰은 사고사로 처리했으며, 얼마 뒤 아들(리오의 부친) 아스마 나다오도 같은 집에서 칼에 찔렸지만 자살 미수라고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교스케 일행은 와타루가 여명장 어딘가에 거대한 블루 사파이어를 숨겼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던 중 부동산업자 사메가이 하루오가 여명장 파티오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고, 사건 해결을 위해 아스마 가 사람들을 여명장에 불러모았지만 교스케마저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다치고 말았다.

아오는 자신의 절대 기억을 통해 여명장에서 고야의 판화에 남겨진 흔적을 보고, 와타루가 죽기 직전 와인으로 “NADA”에 원 하나를 더해 “NADA-O”, 즉 “나다오”라는 이름을 남겼음을 알아냈다. 즉, 와타루를 죽인 범인은 나다오였다. 레키가 나다오에게 스페인어 “NADA”, 곧 “허무”라는 뜻이 담긴 이름을 준 게 동기였다. 나다오는 평생 아버지에게 존재를 부정당했다고 생각해 왔었다.
나다오는 자신이 모든 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며 자살하려 했지만, 사메가이는 리오의 여동생 산고가 죽였다는게 진상이었고 
교스케는 뒤이은 추리쇼를 통해 아스마 와타루의 인생을 재구성하고, 사파이어의 위치를 밝혔다. 특이한 파티오의 구조와 레키가 남긴 글이 열쇠였다. 마지막으로 레키가 남긴 “NADA-O”는 단순히 아들을 저주하는 말이 아니라 “허무, 혹은 그 반대”라는 뜻으로, 자신의 삶이 완전히 허무만은 아니었음을 전하려 한 흔적이었음을 알려주었다.

시노다 마유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건축 탐정 사쿠라이 교스케' 시리즈 1작으로 원서로 감상하였습니다. 분량도 길고, 전문 용어도 많아서 완독까지 오래 걸렸네요. 

철거 위기에 놓인 이즈의 별장 "여명장"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처음에는 오래된 별장의 보존 문제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스마 와타루의 죽음, 아스마 나다오의 자살 미수, 사메가이 하루오의 죽음, 그리고 행방이 묘연한 블루 사파이어까지 여러 갈래의 수수께끼가 한꺼번에 얽혀 있습니다. 분량은 적지 않지만 이렇게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덕분에 읽는 내내 호기심을 유지시켜 줍니다.

무대가 되는 "여명장"이 사건의 핵심이라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건축 탐정' 시리즈답게요. 스페인풍으로 만들어진 이 별장은 중앙의 파티오가 방과의 연결이 단절되어 있고, 동선도 어딘가 비정상적인 기묘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교스케는 여명장의 배치와 채광, 파티오의 위치, 벽의 막힌 구조 같은 기묘한 요소들을 건축 전문가의 시선으로 분석하여 아스마 와타루의 일생을 재구성하는 추리에 활용합니다.
영국에 유학을 갔던 와타루가 굳이 스페인으로 건너가 마술馬術을 배웠다는 점, 스페인풍 별장에 유난할 정도의 애착을 보였다는 점, 새벽과 바다를 피하면서도 그 공간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집 안에 남겨진 미술적·건축적 흔적들을 합치고 미학 및 역사적인 지식까지 동원한 교스케의 추리는, 와타루는 안달루시아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귀족 여성 루나와의 기억을 평생 함께 했으며 여명장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그 기억을 일본 땅에 재현한 장소였다는 겁니다. 이러한 추리의 과정은 건축학에 미학, 역사까지 결합되어 있어서 설득력이 높습니다. 당연히 여명장에 대한 묘사도 치밀하고요.

고야의 판화 "전쟁의 참화" 69번(아래 그림)이 사건의 핵심 단서로 사용되는 미술적인 장치도 좋습니다.

그림 속 'NADA'라는 말이 단순한 문구나 다이잉 메시지가 아니라, 동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다오는 자신의 이름이 스페인어로 "허무"를 뜻하는 "NADA"에서 왔다고 여기며, 아버지가 평생 자신을 부정했다고 생각해서 와타루에 대해 증오와 살의를 품게 되었다는데 현학적이면서도 작품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마지막에 'NADA'에 'O'가 더해져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결말도 마찬가지로입니다. 여러모로 작가가 건축 뿐 아니라 미술, 그리고 언어의 상징성을 세심하게 설계했다는 인상을 전해주거든요. 마무리로도 최고였다 생각되고요.

다만 추리소설로서 보면 아쉬움도 큽니다. 가장 먼저 걸리는 것은 인물 설정입니다. 주인공 사쿠라이 교스케는 물론이고, 동반자 아오와 친구 미하루까지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만화적인 분위기를 띱니다. 교스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외모를 지녔으면서 유난히 아침잠이 많고, 아오는 순간 기억력에 가까운 특수한 능력을 갖춘 인물로 그려지는 식인데, 깊이있는 전문가적 분석이 중요한 작품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현상학 탐정 야부키 가케루 정도 수준이 적당했어요. 

추리도 그렇게 치밀하지는 않습니다. 고야 화집의 다이잉 메시지로 나다오의 동기가 드러나면, 아스마 와타루 사건의 범인은 사실상 나다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그를 누가 도왔느냐로 좁혀지는데, 리오가 아니라면 당시 슈젠지에 나다오와 함께 있던 산고 뿐입니다. 나다오 자살 미수 사건에 이르면 이 점은 더 분명해집니다. 나다오의 공범(?)으로 비밀을 함께 했던 사람이 범인일 테니까요. 운전을 할 수 있고, 리오로 오인될 만한 외모를 가진 인물 역시 산고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수수께끼에 비해 추리는 다소 빈약합니다.
또한 나다오가 범인이라는건 추리라기 보다는 남겨진 다이잉 메시지와 나다오의 자백(?)으로 밝혀지기 때문에 추리적인 여지도 많지 않습니다. 애초에 다이잉 메시지가 쓰여진 화집을 폐기하지 않은 이유도 불분명하고요.

산고가 블루 사파이어에 집착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동기도 가족 안에서의 소외감 등으로 잘 설명하고 있기는 한데, 사메가이가 죽게 되는 과정은 우연과 억지에 많이 기대고 있다는 문제는 큽니다. 와타루가 리오에게 남긴 말 조각상 가운데 유서 같은 쪽지가 들어 있던 걸 산고가 훔쳤던 것, 그것을 깨트려 내용물을 발견했던 것, 쪽지를 가지고 여명장에 갔다가 사메가이를 만난 것 모두 우연이라는건 너무 작위적입니다. 설득력이 부족해요.

블루 사파이어가 숨겨진 곳이 파티오 안의 샹들리에였다는 마지막 장면도 극적이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억지스럽습니다. 한줄기 빛이 들어와 사파이어를 비추는 장면은 만화같은 아이디어였고요. 그리고 여기 숨겼다면 산고의 상세한 조사 때 발견되지 않았을 까닭이 없고, 발견하지 못했어도 원래 계획대로 여명장을 철거했다면 발견할 수 있었을테니 대단한 추리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건축과 미술을 사건 해결의 핵심에 놓은 발상, "NADA"와 "O"를 둘러싼 상징, 그리고 아스마 와타루의 삶을 복원하는 마지막 추리는 볼 만했지만, 기대보다는 못했어요.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읽었다는 보람 외에는 특별히 건질게 없습니다. 문고본 기준 47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구태여 번역까지 해 가면서 읽을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3/13

봉래동의 연구 - 다나카 히로후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봉래동의 연구"

사립 덴키 학원 뒤 상세의 숲에는 ‘봉래동’이라는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을 지나면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배고픔도 없는 낙원 ‘봉래향’으로 이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봉래를 찾으러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고, 동굴에는 용이 산다는 무시무시한 소문도 있었다. 
신입생 모로보시 히카루는 왕따 학생 미쓰메 토오루가 누군가로부터 봉래향의 존재를 들은 뒤 실종되자,  그를 구하기 위해 이런 정보에 정통한 민속학 연구회에 가입하여 회원들과 함께 상세의 숲으로 향했다. 수색은 실패로 끝났지만, 동급생 호시노가 봉래동의 정체를 알아내어 실종된 학생들 구출에 성공한다.

"대남무아미동의 연구"

모로보시 히카루는 학교 축제인 '히루메야마'제에서 연구회 대표로 뽑혀 오코노미야키 조리에 나섰지만 절망적인 요리 실력으로 처참히 실패했다. 팔지 못하고 남은 600장의 오코노미야키를 버리려던 히카루는 상세의 숲에 살고 있던 괴수를 만나게 되었다...

"검은 동굴의 연구"

민속학 연구회는 합숙을 위해 동북 지방의 작은 마을 기가시라 마을로 향했다. 숙소에서 모신다는 일종의 신인 '오시라사마'를 볼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낙뢰가 포함된 폭풍우로 발이 묶인 상황에서 숙소 여관의 여종업원과 주인 아들, 여주인이 연쇄적으로 살해당했다. 연구회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옛날 어떤 고귀한 인물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검은 동굴’로 도망쳤다. 그리고 사건의 원흉인, 하자쿠라 기미코가 불러낸 악의 근원 스토쿠 상황과 마주쳤다...

일본 작가 다나카 히로후미(田中啓文)의 ‘학원 전기(伝奇) 미스터리 소설’인 “사립 덴키 학원 민속학 연구회(私立伝奇学園高等学校民俗学研究会)”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덴키 학원의 정식 명칭은 사립 덴나카 기하치 학원 고등학교입니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개성이 강한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이며, 학교 행사와 규칙 역시 상당히 기묘합니다. 게다가 학교 옆에는 ‘상세의 숲’이라 불리는 거대한 밀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교장의 개인 소유지로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덴키 학원 민속학 연구회에 신입생 모로보시 히카루가 가입하면서 시작됩니다. 히카루는 개성 넘치는 연구회 멤버들과 함께 다양한 사건에 휘말리고요.
이 사건들이 ‘전기(伝奇) 미스터리’라는 명칭에 걸맞게 전설과 신화, 민속과 초자연적 존재들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첫 번째 이야기이자 표제작인 “봉래동의 연구”입니다.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다는 낙원 ‘봉래향’과 이어진 동굴이라는 전설이 등장하고, 민속학 연구회 멤버들은 이 전설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그 중 하나가 봉래동에 산다는 ‘용’은 ‘출세소라’라는 겁니다. 조개인 법라패(호라카이)가 수천 년을 살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데, 용이 빠져나간 구멍이 동굴이 되었는 해석이지요.
이후 히카루가 발견한 동굴은 도자기처럼 매끈한 재질이었고, 근처에서는 괴물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처음에는 실제 괴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히카루의 동급생 호시노가 밝혀낸 진상은 의외의 것이었습니다. 그 동굴은 사실 거대한 조개 껍데기였으며, 실제로 출세소라의 껍데기였습니다! 괴물의 울음소리 역시 소라 껍데기를 불 때 나는 소리와 같은 원리였습니다. 거대한 껍데기 내부를 통과하는 바람이 울림을 만들어냈고, 그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괴물의 포효처럼 들렸던 거지요.
진상은 작품 속에 제시된 여러 단서와도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 히카루가 발견한 작살은 고둥류인 이모가이가 쏘아내는 치설과 같은 것이고, 사무라이가 뱀의 몸이 되었다는 전설도 치설에 의한 피부 손상이었다는 식으로요.

이처럼 전설과 신화를 해석하는 과정이 실제 괴물의 존재와 이어지는 구조는 꽤 흥미롭습니다. 앞서 제시된 단서들이 결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추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하고요. 이 작품만큼은 이런 '전기 미스터리'의 마스터라 할 수 있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최고작과도 견줄만합니다.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해요.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작품들은 영 별로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인 “대남무아미동의 연구”는 상세의 숲에 오래전에 멸종된 거대 나무늘보가 살아 있었다는게 진상입니다.
문제는 괴물이 극 초반부터 등장해 버리는 탓에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이나 추리의 재미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왕 나무늘보를 뜻하는 일본어 ‘오오나마케모노’를 일본 신화의 신 ‘오오나무치’와 연결하고, 나아가 아마테라스가 대왕 나무늘보를 길렀을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해석도 근거가 발음의 유사성뿐이라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고요. 그나마도 일본 독자라면 어느 정도 흥미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한국 독자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검은 동굴의 연구”는 더욱 실망스럽습니다. 이야기 전반이 비슷한 발음에서 비롯된 말장난 위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하자쿠라 기미코가 불러낸 ‘스토쿠 상황’은 ‘스토쿠인’이라는 원호로 추존되었는데, ‘스토쿠인’과 ‘스타킹’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스타킹이 흉기로 사용되었다는 식입니다. 이후 호시노가 설명하는 여러 진상 역시 비슷한 방식이라 설득력이 부족해요. 스토쿠 상황에 대한 역사적 설명도 그 자체는 흥미롭지만,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요.

만화적인 설정과 분위기도 감점 요소입니다. 배경이 되는 덴키 학원부터 시작해서 고무술 ‘코마’의 후계자이자 엄청난 대식가인 모로보시 히카루, 천재이지만 흥분하면 반말을 하는 호시노, 미신 때문에 머리를 절대 자르지 않는 연구회 부장 이즈미야, 역사광이자 스모 도장의 후계자로 촌마게 머리를 하고 다니는 부부장 시라카베, 미모의 여장남자 이누즈카 등 주요 인물들의 설정 모두 만화적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언행 역시 현실적인 느낌보다는 과하게 코믹해서 만화적이기는 마찬가지고요.
여러모로 전반적인 분위기도 가볍기 그지 없는 탓에, 전설과 고전, 역사 이야기를 풍부하게 끌어다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인상은 본격 미스터리보다는 라이트 노벨에 가까운 장르물이라는 느낌을 전해 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봉래동의 연구”만큼은 괜찮지만, 뒤의 두 편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데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만화적인 정서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될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만약 번역되어도 “봉래동의 연구” 한 편만 읽어 보아도 충분합니다.

2025/12/06

희생양 - 대프니 듀 모리에 / 이상원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인으로 프랑스 역사 교수인 존은 프랑스 여행 중 자신과 똑같이 생긴 프랑스 시골 귀족 장 드게와 만났다. 장은 다음 날 존의 옷과 짐, 차를 가지고 몰래 떠나면서, 존이 자신(장)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만들었다.

마지못해 장 역할을 하기 시작한 존은 장의 가족과 영지 마을에 가득한 갈등과 증오에 치이다가, 장의 아내 프랑수아즈의 비참한 죽음 이후 각성하여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정상 궤도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지만, 장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하는데...

"레베카"의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가 1957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입니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남자가 우연히 만난 뒤 벌어진 한 남자의 일주일간 대역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흥미로워서 쭉쭉 읽힙니다. 일주일간의 대역극 이야기가 생각보다 단단하게 짜여 있는 덕분입니다. 주인공 존이 보내야 하는 장 드게의 삶이 가족 간의 냉랭한 분위기와 갈등, 복잡하게 얽힌 과거사 등으로 다양한 드라마를 품고 있기도 하고요.

존이 장인 척하며 과거사와 갈등의 원인을 하나씩 밝혀가는 과정이 특히 볼 만합니다. 차례대로 단서가 제공되면서 결국 진실이 드러난다는 점에서는 추리 소설을 방불케 합니다. 이 중 장 드게가 2차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누나 블랑슈의 약혼자였던 모리스 듀발을 부역자로 몰아 직접 총살했다는 진실이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질투 때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고요.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이념 충돌이 불러왔던 비극도 떠올리게 했습니다.

존이 감정적으로 가족과 얽히며, 프랑수아즈의 죽음을 계기로 가족을 각자의 자리로 되돌려 놓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존이 이 가족을 위해 계획한 '역할 분배' — 동생 폴 부부에게는 공장 경영에서 손을 떼고 해외 연수와 영업 기회를 주고, 공장은 원래 모리스의 연인이었던 블랑슈에게 맡겨 혁신을 이끌게 하고, 어머니는 모르핀을 끊고 다시 가문의 중심이 되도록 만들며, 마을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직업을 주는 등 — 는 급작스럽지만, 앞부분에서부터 가족 각자의 사연과 불만을 충실히 쌓아온 덕분에 충분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원인을 명확히 밝히고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추리 소설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이야기 전개의 또 하나 재미 요소는, 존이 어떻게든 장 드게인 척하려 애쓰는 장면들입니다. 대표적인 게 사냥 장면입니다. 총을 쏴 본 적 없는 존이 사냥을 주도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부러 손에 화상을 입어 빠져나가지만, 키우던 사냥개가 말을 듣지 않거나 말실수를 하면서 점차 수렁에 빠지는 과정이 아주 실감납니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전형적이지만, 장 드게의 딸 마리노엘만큼은 독특한 매력을 뽐냅니다. 아직 어린 천사 같은 소녀인데, 그녀가 악의 없이 행한 행동들이 상황을 수렁에 빠트리기 때문입니다. 고의는 아니지만 장 드게의 선물을 가족 앞에서 풀어보게끔 유도하여 가족 간 불화를 키우고, 건강하다는 걸 과시하려다가 프랑수아즈가 아끼던 도자기를 깨서 히스테리를 유발하고, 폴과 르네 부부에게 아이가 없다는 걸 지적해서 화를 돋우며, 고행을 자처해 실종된 바람에 홀로 남게 된 프랑수아즈가 사고를 당하고 마는 식입니다. 이런 류의 캐릭터는 지금은 흔하지만, 1957년이라는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굉장히 선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단점도 큽니다. 우선 지금 읽기에는 설득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전혀 다른 배경의 두 남자가 얼굴이 똑같고, 그중 한 명이 다른 사람의 삶을 일주일간 대신 살아가는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설정부터 말이 안 됩니다. 대가족이 사는 저택과 작은 시골 마을 영지에서 일주일을 보냈는데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무리가 있지요. 가족 간의 갈등과 거리감이 크다는 설정으로 어느 정도 합리화하려 하지만,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보다 더 큰 단점은 결말이 굉장히 싱겁다는 겁니다. 프랑수아즈의 죽음으로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된 장 드게가 돌아오자, 존이 아무런 저항 없이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끝입니다! 이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삶의 변화를 만들어 냈는데도 불구하고요. 살의를 품기는 했지만, 결국 존이 마지막에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사라지는 모습은 여러모로 허무하고 시시했습니다. 특히 장 드게는 영 호감을 가질 수 없는 인간 말종 쓰레기에 가까워서 제대로 처단되었으면 했는데, 그런 인물이 돈과 존 덕분에 정상 궤도에 오른 가족을 모두 손에 넣는다는 결말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작품이라면 보다 치밀한 심리극이나 범죄극으로 마무리했어야 했습니다. 가족과 사랑에 빠진 존이 장을 어떻게든 죽이고 시신을 잘 숨겼지만, 모종의 이유로 다가올 미래에 시신이 드러나게 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프랑수아즈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틀에 떨어진 로켓을 주우려다 추락사했다는 진상은 너무 평범했습니다. 마리노엘의 악의 없던 장난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었다거나, 장 드게가 선물한 로켓에 뭔가 장치가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그런 반전은 없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짙게 깔린 종교적 색채도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500여 페이지의 분량을 쉽게 읽게 만드는 몰입감은 뛰어나지만, 이야기 전체를 지탱해야 할 중심 설정이 설득력이 부족하고 결말이 시시한 탓에 아쉬움이 더 큽니다. 기대했던 범죄극이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묵직한 심리극과 가족 드라마를 선호하시는 분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하겠습니다만, 범죄극이나 추리물 애호가 분들께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2025/04/19

금병매 살인사건 - 야마다 후타로 / 권일영 : 별점 1.5점

금병매 살인사건 - 4점
야마다 후타로 지음, 권일영 옮김/스토리텔러

원제는 "妖異金瓶梅 (요이 금병매)". 중국 고전 "금병매" 속 인물들과 설정으로 본격 추리극을 만든 15편의 독특한 단편들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주로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을 질투하여 없애는 반금련의 계획이 그려지며, 탐정역은 서문경의 난봉꾼 친구인 응백작이 맡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리스트(대표적으로 이거)를 통해 언급되던 작품이지요. 국내에 출간되었다는걸 몰랐었는데, 얼마 전 알고 읽게 되었습니다. 

특징이라면 본격 추리물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역사 소설 느낌도 난다는 점입니다. "금병매" 세계관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덕분이지요.

그러나 추리물로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수록작 거의 대부분의 동기가 "반금련의 질투"이며, 핵심 트릭 대부분도 "반금련의 변장"으로 의외성과 설득력도 거의 없는 탓입니다.  이런 설정으로 이야기가 반복되기 때문에 뒤로 가면 갈수록 지루해지고요. 

게다가 마지막 몇 작품은 아예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반금련이 서문경을 너무 사랑한 탓에 사건을 일으켰고, 반춘매와 응백작, 심지어 무송까지 금련 주변 인물들도 모두 금련을 사랑했다는 결말은 황당하고요. "메이지 단두대"에서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는데, 차라리 이게 추리 소설에는 더 어울렸습니다. '사랑' 때문이라는건, 호색한 서문경이 주인공인 "금병매"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주제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대부분이 별로였고, 지루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금병매"와 "수호지"를 바탕으로 쓴 팬픽 정도에 불과한 느낌입니다. 다만 딱 한 작품, "인어등롱"만큼은 빼어납니다. 작품에 반복되는 반금련의 질투로 인한 살인과 억지 변장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현실적이고 "금병매" 세계관과도 잘 어울리는 덕분입니다. 궁금하시다면 이 작품 한 편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는 "저택의 사육제" 정도 말고는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딱히 "금병매"의 애독자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이런 작품까지 꼼꼼하게 번역, 소개해 준 출판사와 번역가의 노고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이 작품보다는 "메이지 단두대" 쪽이 훨씬 낫습니다. "메이지 단두대"가 제대로 소개되는게 더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붉은 신발"

서문경의 부인 둘이 다리가 잘려 죽었다. 범인은 또 다른 부인 손설화로 의심되었다. 몽유병 증세가 있던 설화가 과형이라는 다리를 잘라 집행하는 사형 집행 과정을 본 뒤, 원한이 있었던 두 부인을 살해했다고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문경의 친구인 난봉꾼 응백작은 여성 다리에 대해 성적 집착을 가지고 있는 하인 내왕야가 범인이라고 추리했다. 죽은 부인들의 다리를 가져다 놓고 옮긴 과정이 설화의 짓으로 보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응백작은 장례식 날, 송 부인과 봉 부인의 발이 바뀐걸 보고 이 모든걸 꾸민 진범은 반금련이라는걸 알아챘다.  

반금련이 자신을 얕잡아 보는걸 절대 용서하지 않는 독부라는걸 잘 알려주는 에피소드입니다. 동기 때문입니다. 반금련은 송 부인의 발이 자기 발보다 작다는걸 공개적으로 과시해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송 부인의 발을 봉 부인 발과 바꿔친 후, 장례식에서 송 부인 발이 자기보다 크다는 말을 남기려고 다리를 옮겼던 겁니다.

그러나 범행이 자극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반금련 혼자 다리를 잘라 옮기는게 가능했으리라 보이지도 않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미녀와 미소년"

서문경이 총애하는 두 명의 미소년 화동과 금동은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금동이 반금련과 정을 통하자, 화동은 이를 서문경에게 고해 바쳤다. 서문경은 반금련에게 탁랍형을, 금동에게는 궁형(거세형)을 내렸다. 형을 받은 금동은 동굴에 갇혀 화동을 원망했는데, 어느날 동굴 앞에서 화동이, 집 안에서는 금동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서문경이었습니다. 발자국이 하나 밖에 없는건, 서문경이 사체를 업고 날랐기 때문이고요. 사체를 업고 옮길 수 있는건 서문경 밖에 없다는걸 밝혀내는 응백작의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전족을 한 여자들에게는 무리였으니까요.

하지만 반금련이 두 남자에게 질투하여 모두를 죽이려고 짜낸 계책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금동이 거세된 뒤에는 죽일 이유가 없어졌으니까요. 또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반금련이 화동으로 변장했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였습니다. 서문경이 이를 몰라보았다는건 말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반금련이 질투로 살인을 저지르고, 반금련이 먼저 상대방을 유혹하며, 반금련의 변장은 천하무적이라는 설정은 이후 모든 단편에서 반복되는데,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염마천녀"

양산박 도적 소탕 실패에 책임을 지게 된 사돈 양 제독 탓에, 딸과 사위 진경제는 서문경의 집으로 도피했고 서문경도 함께 근신하는 신세에 놓였다. 서문경은 이 와중에 사위 진경제의 몸종 주향란을 새로이 일곱번째 첩으로 들였다. 그러나 진경제와 주향란은 이미 정을 통하던 사이였다. 반금련은 잔경제를 유혹했지만 들통난 뒤, 진경제는 서문경의 저택 우리에 갖혔다. 그리고 도성의 일이 정리된 날, 누군가 주향란의 혀를 물어 뜯었는데...

주향란의 혀를 물어 뜯은건 누구일까?라는 후더닛 물인데, 특별한건 없습니다. 당연히 반금련이니까요. 정액을 발라 남자 냄새를 풍겼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이 등장하지만, 변장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남자마다 유혹하고 다니는 반금련을 그냥 놔두는 서문경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저택의 사육제"

지현의 색기 넘치는 부인이 서문경 저택을 방문했다. 맛있는 요리를 먹기 위해서였다. 반금련은 그녀를 덮칠 계획을 서문경에게 알려주었다. 연회에서 술게임을 해서 취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에 너무 취한 임부인은 2층 창문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임부인이 떨어져 죽은건 반금련의 계획이었고, 그녀의 시체를 지현의 부하들에게 고기 구이로 속여서 먹였다는 내용입니다. 솔직히 엄청나게 뻔하지요. 하지만 여러 음식 및 작가 특유의 광기어린 분위기의 묘사는 좋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란꽃 살인"

유명 화가 소용면이 서문경의 처첩 초상화를 그려주는 날, 새로운 일곱번째 첩 양염방이 벌에 쏘였다. 반금련이 건네 준 모란 꽃 때문이었다. 그 뒤 자기 때문에 자살한 소자허의 원혼이 보인다며 난동을 부리던 염방은 반금련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소용면이 함께 한 술자리에서 양염방이 독살당하는데...

스스로 벌에 쏘인 반금련이 양염방인 척 연기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일부러 벌에 쏘인 상처가 가라앉을 때까지 숨어 있으려고 머리카락이 잘린 척 했다는건 괜찮았어요.

그러나 변장 트릭이 너무 허황됩니다. 소용면만 있던 것도 아니고, 서문경과 응백작 및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변장한 반금련을 수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봤다는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거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돈에 환장한 사내"

인색하기로 유명한 서문경의 생약가게 부지배인 한도국이 어느 날, 아내의 전남편 송철곤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송철곤은 납을 은으로 만드는 비법을 완성했다고 주장했고, 철곤에게 속은 서문경은 가마를 만들고 거액의 은도 투자했다. 그런데 가마에서 풀무질을 하던 중, 서문경은 한도국의 아내이자 유명한 추녀 요금에게 급작스럽게 음심을 품게 되었다. 그 뒤 한도국에게 요금을 아내로 달라고 제안했는데, 요금은 철곤 도사의 블꽃쇼 도중 화살에 맞아 죽고 도사도 가마 안에서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었다...

상당히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송철곤 도사의 연금술 사기,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 맞이, 철곤 도사의 불꽃쇼와 새부인 요금 살해 사건, 철곤 도사 살해 사건, 한도국 살해 사건이 차례로 벌어지는 탓입니다. 

철곤 도사의 연금술 비법은 당연히 사기인데, 나름 기발한 점이 있습니다. 가마 앞에서 음탕한 행동을 하면 은이 납으로 변한다고 말한 뒤, 풀무질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약을 탄 술을 먹여 음란한 짓을 하도록 유도했던 것이거든요. 이게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 맞이로 이어지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전별금'이라는, 한도국이 송철곤을 죽인 이유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극히 수전노스러운 동기로, 제가 여태 보아왔던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본 적 없던 동기였던 덕분입니다.

그러나 핵심 트릭은 어처구니없네요. 삶은 달걀을 억지로 밀어넣어 목을 막아 죽였다는 방법도 황당하지만, 대충 만들어 자동으로 발사되게 만든 화살이 형편좋게 요금의 등에 맞았다는 것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에요. 도사를 살인범으로 모는 것도 과연 잘 되었을지 의문이고요. 한도국이 돌아온 뒤, 반금련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죽는 결말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도주해야 했던 사람이 구태여 반금련을 만나 사지로 걸어들어갈 이유는 없으니까요. 요금 이야기를 빼고 사기에만 집중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여인의 향기"

서문경과 반금련에게 원한을 품은 호걸 무송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문경 가족은 저택에 숨어있기로 했다. 심심했던 반금련은 향기로 여자 맞추는 게임을 제안했는데, 게임 도중에 무송이 쳐들어왔다. 서문경은 기생 이계저와 함께 관 속에 숨은 뒤 험한 꼴을 당한다... 

모든건 응백작과 반금련이 힘을 합처 꾸며낸 연극이었습니다. 소란 틈에 응백작은 돈을 훔치고, 반금련은 기생 이계저를 쫓아내기 위해서요. 거대한 무송은 응백작 어깨 위에 반금련이 올라타 연출했지요.

살인이 아니라 일종의 장난으로 경쟁자 이계저를 쫓아냈다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보다는 조금 낫더군요. 무송이 엮이는 설정도 흥미로왔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 속 미녀"

여섯째 부인 이병아가 죽은 뒤, 서문경은 애틋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한 편, 반금련은 금동의 여동생 춘연을 몸종으로 들인 뒤, 금동이 죽은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는데....

춘연에게 옻독을 옮겨, 춘연을 덮치려 한 서문경이 혼비백산하게 만든다는 반금련의 계획이 등장합니다. 이병아 초상화에 장난을 쳐서, 이병아에 대한 마음을 없애려는 목적으로요. 

죽은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동기는 독특했는데, 방법이 잔혹하고 유치해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자신이 죽인 남자의 여동생마저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요. 별점은 1점입니다.


"아름다운 눈동자"

새로 들인 여섯째 부인 유여화는 눈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유여화가 반금련과 서문경이 사랑을 나누는걸 엿보다 시력을 잃는다는 내용인데, 거울을 이용한 트릭이라는게 너무 뻔했습니다. 노골적으로 거울을 강조하고 있는 전개 탓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유여화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하더라도, 이미 서문경은 흥미를 잃었다는데 그런 여자를 해할 필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 질투심이라면, 왜 자기보다 먼저 처첩이 된 이전 부인들은 죽이지 않고 가만 두는지 납득이 되지 않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낙인 찍힌 미녀들"

새 부인 빙금보가 진주를 훔쳤다는게 밝혀져 쫓겨났다. 대식국에서 온 조오라 공주는 등에 십자가 낙인이 찍혀, 기독교를 포교하고 다니는 신하 알 무타츠와 함께 돌풍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두 개의 사건과 트릭이 등장합니다. 빙금보가 깜깜한 곳에서 진주를 훔친 방법은,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는게 전부라 시시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불에 달군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공주 등에 낙인을 찍은 트릭은 새로왔습니다. 화상이 아니라 얼음을 이용해 만든 동상이었다는게 진상이에요. 이를 풀어내기 위해 공주가 흠뻑 젖었다는 상황도 잘 설명되고 있고요. 대식국 출신 승려가 기독교를 포교한다는 독특한 설정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편을 섞은 술을 마셨다 하더라도, 동상을 입을 정도로 얼음 위에 오래 정자세로 누워있는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마지막에 급작스러운 돌풍이 승려와 공주를 데리고 갔고, 반금련의 몸에 십자가 상처를 남겼다는 결말도 억지스럽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검은 젖가슴"

반금련은 서문경이 눈을 가린 채 시력을 잃은 유여화의 몸을 탐닉하는걸 목격했다. 그 뒤, 반금련은 유여화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서문경이 새 첩 갈취병에게 푹 빠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자기의 눈을 멀게한게 반금련이라는걸 알아챈 유여화는 복수에 나섰지만, 오히려 죽은건 갈취병이었다. 왜 갈취병이 반금련이 방에서 자고 있었고, 왜 그녀의 시체가 유여화 방에 나타났을까?

유여화가 실명했다는걸 이용해서 위치를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트릭인데 솔직히 너무 뻔했어요. 손가락 촉감에 자신있다는 서문경을 비웃듯, 반금련이 갈취병인 척 했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도 뻔한건 마찬가지였고요. 이젠 지겹기까지 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얼어붙은 환희불"

서문경이 자기 탓에 죽은 사람들의 귀신을 본다고 앓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반금련은 서문경과 함께 퇴마를 위해 태산에서 수행 중인 수도승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송이 이끄는 양산박 무리와 마주쳤다. 무송은 서문경과 반금련을 쫓아온 것이었다. 반금련의 활약으로 둘은 목숨을 건지지만, 여자로 변장한 낭자 연청의 화살에 죽을뻔한 서문경은 그 뒤부터 여자를 두려워하게 되는데...

죽음 앞에서 당당한 반금련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반금련은 모야차가 인정할 기개를 보여 목숨을 건지거든요. 이 부분은 수호지 설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수호지는 억지로 끼워넣은 느낌이 강합니다. 게다가 결말은 황당하기 그지 없네요. 여자에 흥미를 잃은 서문경과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낭자 연청을 가장하여 죽게 만들었다? 이젠 정말이지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네요. 별점은 1점.


"여인 대마왕"

서문경의 장례식, 반금련은 불륜을 저지르던 첩 향초운과 상대남 유포를 잡아 죽이자고 제안했다. 이 기회에 유산을 노리는 버러지들을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불륜남녀와 함께 서문경 사체가 목이 베인채 발견되는데...

불륜남녀와 서문경 사체의 목을 자른 이유가 기발했습니다. 반금련이 자기 혼자 서문경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꾸민 짓이었거든요. 처음 무덤으로 향한 서문경의 상여 속 사체는 서문경 머리와 유포의 몸이 붙어 있었습니다. 반금련은 무덤에서 나중에 서문경의 머리만 빼 온 뒤, 특별한 장례도 없이 매장된 유포의 몸으로 위장한 무덤에 합쳤고요. 

반금련이 서문경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극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중국 전통과도 잘 맞아 떨어지는 등, 이 작품만 놓고 보면 평작은 됩니다. 다만, 반금련의 서문경에 대한 '사랑'이 당쵀 납득이 되지 않는게 문제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연화왕생"

무송이 나타나 모야차와 함께 반금련의 몸종 춘매를 협박했다. 수비부 책임자 주수와 결혼한다는 반금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히려 반금련은 이 기회를 이용해 무송의 복수를 끊어버릴 계책을 짜냈다.

반금련의 죽음, 그리고 무송이 결국 반금련에게 반하고 만다는 최악의 설정이 등장합니다. 뭐라 더 할 말이 없네요. 별점은 없습니다.


"살아있는 반금련"

방춘매는 주수비의 아내가 된 후, 주수비가 청하현 모든 남자를 양산박 토벌 작전에 징집하도록 만들었다. 모든건 반금련을 음탕하다 조롱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춘매의 계획대로 남자가 없는 귀부인들은 음탕한 축제에 빠져들었다. 결국 주수비가 토벌 작전에서 죽은 뒤, 거란군은 남자가 없는 청하현을 덮쳤다. 그러나 응백작은 얼음에 재워둔 반금련의 시체로 무송 일행을 꿰어내어 청하현을 구했다.

줄거리만 보아도 황당하기 그지 없지요? 춘매가 금련에게 이렇게까지 충성을 바치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귀부인들이 남자가 없다고 삽시간에 음탕한 축제에 빠져든다는 설정도 어이가 없습니다. 게다가 얼음에 재워둔 반금련의 사체를 보고 아직 그녀가 살아있다 여긴 무송과 양산박 일행이 거란군을 물리친다는 마지막 장면은 제가 뭘 읽고 있는지도 모르게 만드네요. 역시나 별점은 없습니다. 아니, 별점을 준다면 마이너스에요.


"인어등롱"

앞서의 "낙인찍힌 미녀들"을 일부 수정한 이야기. 진주를 훔치는 트릭은 동일한데, 범인만 갈취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의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진주를 훔친 사건에 집중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잔혹한 서문경이 갈취병 뱃속의 진주를 낚시로 꺼내려다 그만 낚시바늘이 취병의 위에 박히는데, 반금련은 갈취병에게 염주를 먹게 하여 그 무게로 바늘을 빼게 만드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또 이 모든 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부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금련이 갈취병의 아름다운 치아를 부수기 위해 꾸민 계획이라는 반전도 돋보였습니다. 새로운 처첩을 이 정도 계책으로 쫓아내고,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정도가 확실히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새로 들어온 처첩이 계속 죽어나간다는건 말도 안되잖아요?

제 기준으로는 수록작 중 가장 빼어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4/13

약사의 혼잣말 Season 2 (2025) - 나가무라 노리히로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기에 이어 방영된 후속 시즌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시에 대한 암살 음모, 마오마오의 출생의 비밀 등 보다 긴 호흡의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1기에 비해, 이번 시즌은 상대적으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1기에서는 꽤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추리물적인’ 요소가 이번 시즌에서는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래가 그나마 이번 시즌에서 마오마오가 추리력을 발휘해 해결한 주요 사건들입니다.

  • 외국 사절단 방문 이후 비취궁에 수상한 향유가 퍼졌고, 마오마오는 그것이 임산부에게 해로운 향유임을 밝혀냈습니다. 이에 진시는 누가 해당 물건을 들여왔는지 조사를 명했고, 조사 결과 범인은 리화비 시녀장이었습니다. 그녀는 사촌 리화비가 황제의 후궁이 된 것에 질투심을 느껴 그런 일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 가오슝은 집 밖에 나간 적이 없는 자매 중 한 명이 임신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마오마오에게 부탁합니다. 마오마오는 거울을 이용해 한 사람이 두 사람인 것처럼 위장했다고 추리합니다. 둘이 놓던 자수 역시 거꾸로 보면 다른 그림으로 보이는 착시를 이용했던 것이고요.
  • 진시가 과거 외국 사신이 목격했다는 ‘빛무리 속에서 춤추는 키 큰 미인’의 전설을 재현해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마오마오는 진시를 여장시킨 뒤, 야광 성분이 있는 나방을 날려 춤을 추게 하여 그 장면을 연출합니다.
  • 마오마오는 황제가 ‘황제의 조건’이라 불리는 사당 통과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적록색맹만이 올바른 길을 통과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던걸 알아챈 덕분이었지요. 참고로, 왕모의 혈족은 적록색맹의 유전 여부를 가려 자기들 핏줄을 유지하려고 했었던 겁니다...
  • 황태후는 선대 황제의 시신이 사후에도 썩지 않았던 이유를 밝혀달라고 요청합니다. 마오마오는 선제가 남긴 그림을 통해, 웅황을 부숴 만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 독성이 체내에 축적되어 방부 효과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 마오마오는 수수께끼의 노년 궁녀가 주최한 괴담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괴담 13개를 이야기한 뒤 촛불을 끄자 모두가 죽을 뻔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궁녀는 생전에 선제에게 농락당했던 소녀 중 한 명이었고, 이미 사망한 인물이었습니다. 괴담회에 참석한 모두를 죽음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며, 장소 역시 밀폐된 공간이었기에 질식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마오마오의 활약으로 모두 위기를 모면합니다.
  • 괴담회에서는 ‘금지된 산’에서 죽은 모녀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마오마오는 모녀가 그 산에서 독버섯을 채집해 먹고 사망했음을 추리합니다. 해당 산은 원래 독초가 많아 금지된 곳이었고, 밤에 빛나는 독버섯이 도깨비불처럼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모친이 죽기 전 남긴 말인 “저 산에는 맛있는 버섯이 있다”는 말은, 마을 사람들을 함께 죽음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였습니다...

시즌 1은 진시 암살 음모처럼 전체를 관통하는 큰 사건까지 마오마오가 추리했던 반면, 시즌 2에서는 마오마오가 요청을 받아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그녀 스스로 의문을 품고 탐색해 나가는 정통 추리물의 형식은 많이 약해졌어요. 게다가 일부 사건은 명확한 결말 없이 마무리되기도 하고요. 여러모로 추리물로서의 완성도는 1기에 비해 아쉬운 수준입니다.

진시의 정체가 밝혀지는 중요한 전개 역시, 이미 초반부터 충분한 암시가 주어졌기 때문에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총명한 마오마오가 왜 이를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는지가 더 의문스러웠습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그녀가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어 모른 척했다는 해석은 가능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려졌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완성도는 나쁘지 않습니다. 개별 에피소드들이 모두 단절된,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보이지만, 궁에서 소설이 유행하고 글공부를 원하는 궁녀들이 늘어나면서 학교가 생기고, 그 학교에서 건국신화 속 왕모 전설을 가르치는 장면이 다시 사당 통과 시험과 연결되는 식으로 전체적인 구성은 치밀하게 엮여 있습니다. 선대 황제의 성적 취향이나, 제국과 황실 가문의 역사 같은 설정도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이야기를 풍부하게 해 주고요. 진시와 마오마오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과 감정선도 볼만했습니다. 특히, 11화 마지막에 폭포 뒤 동굴에 갇힌 뒤 보이는 모습은 시즌 2의 핵심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물의 색채는 옅어졌지만, 에피소드 간의 연결성과 캐릭터 간의 관계는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다음 시즌이 기대되네요.

2025/04/11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권영주 : 별점 4점

거짓과 정전 - 8점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SF 대상을 수상했던 떠오르는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인 "거짓과 정전" 외에도 "마술사", "시간의 문", "한 줄기 빛", "무지카 문다나", "마지막 불량배" 등 현실과 환상, 과학과 감성이 절묘하게 섞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SF적 설정과 기발한 아이디어와 만나 매우 신선한 재미를 준다는 점입니다. 시간 여행을 마술 무대와 연결한 "마술사"부터 그러합니다. 마술에 대해 현실적이며 설득력있게 묘사하다가, 시간을 넘나드는 마술을 '타임머신'과 결합시켜 의외의 결말로 이끄는 솜씨가 정말 탁월합니다.

유행이 사라진 세상에서 유행의 의미를 되짚는 "마지막 불량배", 과거로 정보를 보내 세계를 조정하는 냉전 시대의 첩보극 "거짓과 정전"도 모두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품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불량배"는 유행과 취향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어,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소비에 대해 많은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예전처럼 하나의 앨범도 신중하게 고민하고 구입한 뒤, 그 앨범을 반복해 들으며 취향을 만들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그런 고민없이 모든걸 쉽게 소비하는 세상이 되어 '취향'이라는게 사라지는 세상이 되었다는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거든요. 지금의 취향은 내가 아니라 인터넷이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SF 외에도, 일상 속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들도 돋보입니다. "한 줄기 빛"은 아버지가 남긴 경주마의 계보를 따라가며 자아를 발견하는 성장물인데, “서러브레드가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이유는 생명의 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라는 문장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깁니다.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안도현 시인의 시 -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무지카 문다나"에서는 음악이 화폐인 섬을 배경으로,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감성적으로 풀어냅니다. 다이가의 아버지는 훌륭한 음악(다이가)을 듣기 위해 자신의 최고 걸작을 남겼지만, 다이가를 들은 뒤에는 음악을 포기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이가는, 스스로 '다이가'를 듣기 위해 포기했던 음악을 다시 시작할걸 결심하고요. 음악을 포기한 다이가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면 음악을 다시 시작하리라 여겼던 아버지의 배려(?), 그리고 미워했던 아버지의 속셈을 알면서도 속는 다이가의 모습이 짠합니다. 이처럼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밀도 높게 다루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도 뛰어납니다. "마술사"에서 시간여행은 실제로 일어났는지, "한 줄기 빛"에서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졌는지, 템페스트, 레티시아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등을 따라가면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추리적인 요소도 흥미롭습니다. "시간의 문"에서 오펜하임이 1932년 7월 31일, 나치당에 투표했을지?를 물어보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전날밤 오펜하임은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는 켄타우루스 자리를 보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독일 본토로 돌아가 투표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건 교묘한 전개 능력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결합되어 의외의 결론으로 향하는 "거짓과 정전" 처럼요. 작품은 엥겔스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바로 다음에 80년대 CIA 모스크바 지국 정보원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결국 두 이야기가 결합되며 마무리되는데 기발하고 교묘하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수록된 모든 작품이 동일한 수준은 아닙니다. "시간의 문"은 우화에 가까운 작품으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개나 반전이 평이해 다소 뻔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또한 SF적 설정으로 보자면, "거짓과 정전"을 제외하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거나 단지 상징적인 장치로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의 문"에서의 기억 조작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우화적 도구에 가까우며, 인물의 존재가 사라지는 설정도 설득력 있는 논리로 뒷받침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몇 명쾌하지 않은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술사"에서 정말 타임머신을 만들었는지, 시간여행의 모순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거짓과 정전"의 '정전의 수호자'들이 역사 수정을 방지한다는 진상도 방법적으로는 잘 모르겠고, 설정도 과거 "타임캅"류의 타임 패러독스 방지물과 별다르지 않아서 시시했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SF적인 상상력과 서정적 감성이 잘 결합된 작품들입니다. 일부 아쉬운 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몰입감 있고, 인상적인 독서 경험을 선사합니다. 아직 읽어보시지 않은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3/22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 엘리스 피터스 / 최인석 : 별점 2점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 4점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북하우스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캐드펠 수사는 수도원의 영예를 위해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가져오려는 로버트 부수도원장의 웨일즈행 여정에 동참했다. 유골이 있다는 웨일즈 귀더린에 도착한 일행은 유골 이전을 반대하는 마을 지주 리샤르트와 갈등을 빚었다. 그래서 논의를 다음날 이어가기로 했는데, 리샤르트는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력한 용의자는 외지인 엥겔라드였다. 엥겔라드는 평소 리샤르트의 딸과 결혼 문제로 다툼을 벌였으며, 범행에 사용된 흉기도 그의 화살이었다...

영국 작가 앨리스 피터스(Ellis Peters)의 캐드펠 수사(Brother Cadfael)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이 시리즈는 20여 년 전 번역 출간되었던 바 있는데, 이번에 북하우스에서 완역본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이전 번역 출간본 제목은 "성녀의 유골"이었지요. 시리즈 중 대표작입니다. 미국 추리 작가 협회(MWA)영국 추리 작가 협회(CWA)에서 각각 선정한 all time best 100에 포함되었을 정도로요.

시리즈 특징인 12세기 영국의 풍경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한 묘사는 여전히 뛰어납니다.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달리 웨일즈 귀더린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데, 영국 본토와는 다른 웨일즈 특유의 분위기가 마을과 그곳 사람들의 세세한 묘사를 통해 손에 잡힐 듯 그려집니다.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로버트 부수도원장과 마을 지주 리샤르트의 갈등도 흥미로웠습니다. 세속적 욕망으로 변질된 종교가 아무리 권위를 갖추었다 해도, 순수한 신앙과 믿음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잘 보여주거든요.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그리고 수도사가 주인공인 작품의 시대적 분위기와도 잘 어우러졌고요.

추리적인 부분에서도 몇몇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리샤르트의 사체 검시를 통해 사건 현장의 조작 여부를 밝혀내는 캐드펠의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나름 과학 수사인데, 12세기라는걸 감안해도 별로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멋진 추리였습니다. 또한, 쇼네드가 범인 콜룸바누스 수사를 추궁하다가 실수로 그를 죽게 만든 뒤, 그를 성녀의 유골과 함께 ‘빛의 세계’로 보낸 것처럼 꾸미는 마지막 장면이 아주 기발했습니다. 수사가 사라진걸 기적으로 포장하는, 시대에 걸맞는 완전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신념을 세속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려 한 수도원에 대한 통렬한 복수로도 해석될 수 있고요. 2년 뒤 모두가 행복해졌다는 에필로그도 만족스러웠어요.

그러나 all time best 100에 포함될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뛰어난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탓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용의자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리샤르트를 살해할 동기를 가진 사람은 마을 사람들 중에는 없습니다. 다툼이 있었다는 외지인 엥겔라드가 범인일 경우, 그가 현장에 자기 화살을 그대로 남겨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요. 현장을 조작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는 용의자는 성녀의 유골을 슈루즈베리 수도원으로 옮기려 했던 캐드펠 일행뿐입니다. 리샤르트만 없다면 유골을 쉽게 옮길 수 있으니, 이는 확실한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사건 당시 캐드펠과 함께 있었던 수도사들은 범인일 수 없습니다. 결국 기도하러 나갔던 제롬 수사나 콜룸바누스 수사 중 한 명이 범인입니다. 당연히 야망 넘치는 콜룸바누스 수사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고요. 

이 정도로 용의자가 좁혀지면, 사실 둘 중 누가 범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지요. 문제는 둘 중 누가 범인인지 밝히기 어렵다는 겁니다. 콜룸바누스 수사에게 처방했던 양귀비액이 줄어든 것(그가 제롬 수사에게 먹여 잠들게 만들었기 때문)은 증거가 될 수 없어요. 결국 쇼네드가 성녀로 변장한 뒤, 콜룸바누스를 자극하여 자백을 유도하는 식으로 이야기는 흘러갑니다. 이렇게 논리적 증거 없이 심리적 압박만으로 범인을 밝혀내는건, 이 작품을 정통 추리소설로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중세 영국의 역사적 분위기와 종교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담아낸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다소 아쉬워 감점합니다. 역사 미스터리보다는 팩션 드라마에 더 가까운 작품이에요. 정통 추리물을 선호하는 저로서는 앞으로 이 시리즈를 더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2025/01/31

사라지는 아들 - 안도 요시아키 / 오정화 : 별점 2점

사라지는 아들 - 4점
안도 요시아키 지음, 오정화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가미 호수 가족 여행 중 아들 케이스케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말했다. 아들과 최면 치료를 받으러 간 가즈오는, 케이스케가 33년 전 사가미 호수에서 살해당했던 '오이카와'라는걸 알게 되었다. 

알 수 없는 힘으로 33년 전, 사건 직전으로 돌아간 가즈오는 오이카와 사건이 일어나는걸 막았다. 그러나 다시 현재로 돌아온 뒤, 아들 케이스케가 태어나지도 않은 현실에 좌절했다. 오이카와가 죽지 않으면, 케이스케는 태어나지 못할 운명이었다...

타임 슬립, 즉 시간 여행과 환생이라는 소재를 결합하여, 한 가족 관계의 수수께끼와 33년 전 사건의 진상을 풀어나가는 작품. 주인공 가즈오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33년 전의 사건을 풀어나가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장점이라면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세 번에 걸친 시간 여행을 통해 사쿠마가 아니라 센다가 진범이라는 진상이 드러나고, 후미요의 증언에 의해 센다가 처벌받은 뒤 통해 가족이 다시 회복되는 결말까지 잘 짜여져 있습니다. 

가즈오의 두 가지 딜레마도 흥미를 더해줍니다. 첫 번째는 아들 케이스케는 오이카와의 환생이고, 가즈오는 범인 사쿠마의 환생이라고 믿게 된 상태에서 '전생의 내가 죽인 사람이 환상한 뒤, 내가 환생한 그 사람의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이카와가 살해당하지만 그를 살리면 아들 케이스케가 태어나지 못하는데 그를 살릴 것인가?'라는 것이다. 두 번째 딜레마는 타임 패러독스로도 꽤 그럴듯한 부분이었어요.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를 바꾸고 현재로 돌아오면, 역사와 기억이 다시 쓰여져서 기억이 사라지고 만다는 설정도 괜찮았습니다.

또한, 33년 전 당대의 배경을 생생하게 재현한 점도 눈에 띕니다. 견직물 공장의 공정은 물론, 하치오지 특산물인 넥타이 직물을 둘러 싸고 벌어졌던, 미국과 일본의 섬유 협상 탓에 어려움에 처한 공장들 분위기가 생생합니다.
소니 트리니트론 텔레비젼, 아이돌 야마구치 모모에, 세이코의 로드매틱 시계 등 소품들도 잘 그려지고 있는데, 특히 자동차들에 대한 언급이 상세합니다. 사쿠마는 히노 자동차의 콘테사, 오이카와는 닛산 스카이라인(원래 GT-R을 가지고 있었다), 센다는 토요타 크라운을 탄다는 식으로요. 그런데 차종과 인물을 잘 배치한 것 같아서 재미있었어요. 약삭빠르고 치고 빠지는데 능한 사쿠마는 소형차이자 레이싱카로도 진화했던 콘테사가, 흑막이자 거물 센다에게는 중후한 토요타 크라운이 잘 어울리니까요. 오이카와가 연인 후미요의 빚을 갚기 위해 차를 GT-R에서 스카이라인으로 바꿨다는건 돈의 흐름을 알려주는 중요한 설정이기도 하지만, 차종만큼은 고집한 점에서 뭔가 남자의 자존심같은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오이카와는 정말 한 우물만 파는 우직한 남자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가즈오가 33년 전에는 통용되지 않는 지폐를 가지고 있고,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술과 상표로 만들어진 유니클로 점퍼와 나이키 신발로 오이카와에게 추궁을 받으며, 스마트 폰을 들켜 카메라로 얼버무리는 등 미래에서 와서 겪는 고초도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설정이 정교하지 못한건 단점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초반에 가즈오가 오이카와를 살해했다는 꿈 때문에, 가즈오는 사쿠마의 환생인 것처럼 끌고 가지만 알고보니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가즈오는 사쿠마는 물론, 오이카와 살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게 진상이지요. 이는 앞서의 딜레마 - 나는 살인범의 환생이고, 아들은 내가 죽인 피해자의 환생 - 로 흥미를 주기 위해, 억지스럽게 설정을 집어 넣은 느낌입니다. 가즈오가 이런 꿈을 꾼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으며 대충 수습하는 전개 역시 영 별로였어요.

추리적으로도 별로입니다. 사쿠마가 진범이 아니고 센다가 악인이었다는건 꽤 이른 시간에 눈치챌 수 있을 뿐더러, 사쿠마와 센다의 관계, 센다의 범행 및 동기가 충분히 설득력 있게 묘사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우선 센다가 사가미 호수에서 오이카와를 살해한건 완전 범죄를 노렸을 텐데, 그 자리에 후미요가 있었던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둘이서만 만났어야 했습니다.

또 센다가 오이카와를 살해할 정도로 후미요를 가지고 싶었다면, 범행 후 그녀와 결혼하거나 살림을 합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흥미와 재미를 위해서라면 후미요와 센다가 합친 미래가 훨씬 나았을 겁니다. 가즈오에게 센다가 '삼촌'이 아니라 '아버지'로 인식되어 있다면 극적인 효과가 배가되었을 테니까요.
같은 이유로 오이카와가 친부라는걸 가즈오가 진작에 눈치챘다면, 앞서 두 번째 딜레마가 더 강하게 와 닿았을겁니다. 이런 부분의 전개는 여러모로 아쉽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흔해빠진 시간 여행물이지만, 흥미로운 소재들을 잘 엮어서 소소한 재미를 주기는 합니다. 그러나 핵심 설정 곳곳이 설명이 부족하고 오류가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2024/11/15

11장의 트럼프 - 아와사카 쓰마오 : 별점 3.5점

11枚のとらんぷ - 6점
아와사카 쓰마오/東京創元社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주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즈타 시마코가 살해당했다. 그녀가 소속된 마지키 클럽의 마술 공연 중이었다. 시신 주변에는 부서진 여러 가지 물건들이 널려 있었는데, 이는 클럽 회원인 카가와 슌페이가 쓴 "11장의 트럼프"라는 마술 트릭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품들이었다.

사건 직후 마지키 클럽의 회원들은 도쿄에서 열리는 세계 마술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프랑스 마술사 프랑수아 란슬롯의 카드 마술을 보게 된다. 이를 본 카가와 슌페이는 미즈타 시마코 살인 사건의 진상을 깨닫게 되고, 회원들 앞에서 범인이 클럽 회원 중 한 명인 마츠오 쇼이치로임을 밝힌다. 이후 마츠오는 사건을 저지른 이유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건 시마코의 조상인 마술사 호큐사이의 유품때문이었다.

"아아이이치로 시리즈""복잡한 기계장치" 등으로 유명한 아와사카 쓰마오의 또다른 대표작 장편입니다. 여러 리스트(이거라던가, 이거 등)에 높은 순위로 랭크되어 있는 작품이지요. 명성만 보면 왜 국내에 번역 출간되지 않았는지 의아합니다. 항상 읽고 싶었었는데, 이번 기회에 도전하여 완독하게 되었습니다. 원서라 그런지 완독하는데 거의 1주일이 넘어 걸렸네요.

이 작품의 제일 큰 장점은 마술과 트릭의 절묘한 결합입니다.

특히 마츠오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조작하기 위해 활용한 트릭이 대표적이에요.
마츠오가 공민관 무대에서 펼쳤던 카드 마술은 관객이 고른 카드를 정확히 맞추는 마술이었는데, 마지키 클럽 회원들은 공연 당시 조명을 조작하던 시마코가 카드를 확인한 뒤 특정 위치에 조명을 비추어 맞추도록 한 트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마코가 그때까지 살아있다고 착각하게 되었지요. 사실은 이미 살해된 후였는데도요. 마츠오가 카드를 맞출 수 있었던건 시마코의 도움이 아니라, 관객의 핸드백 금속 장식을 사용했던겁니다("타짜"의 지포라이터같은거지요). 또 이건 카가와가 프랑수아 란슬롯의 카드 마술을 보고 깨닫게 되는 핵심 요소로,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란슬롯의 책을 열심히 읽었던 추종자 마츠오가 란슬롯의 말대로 관객이 카드를 정말 자기 의지로 선택하게끔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츠오의 공연 직후 이어진 오타니 난잔이 벌인 '주머니 속의 미녀' 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원래는 시마코가 미치코의 대역을 맡는 마술이었으나, 마츠오가 1인 2역을 소화하면서 시마코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착각을 관객들에게 심어줬던 거지요.

소설 속에 등장하는 "11장의 트럼프"라는 소설도 흥미롭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다양한 마술 트릭들이 소개되어 독자들에게 재미를 선사할 뿐 아니라, 중요한 단서로 활용되기도 하거든요. 특히, 카가와는 시마코가 살해된 현장에서 가스 밸브가 열린 것을 범인이 알아채지 못한 점에 착안하여 범인이 후각을 상실한 사람일 거라 추리합니다. 그리고 누가 후각이 없는지는 "11장의 트럼프"를 통해서 밝혀내게 됩니다.

사건의 동기도 독창적입니다. 시마코가 물려받은 일본 초기 마술사 호큐사이의 마술 비법이 동기라는 설정은 이야기의 설득력을 높여줍니다. "복잡한 기계 장치"의 '가라쿠리'에 대한 설명과 비슷하게 일본 초기 마술의 역사를 흥미롭게 풀어낸 덕분입니다.

또한, 마지키 클럽의 마술 공연에서 벌어지는 소동도 유쾌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특히 '주머니 속의 미녀' 마술에서 미치코가 탈출해 공연장으로 들어가려다, 입장권이 없어서 접수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은 아주 기발했어요. "아아이이치로" 시리즈가 떠오르더군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단점으로는 여러 가지 설정과 캐릭터들의 반응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살인이라는 중대한 범죄가 벌어졌음에도 주요 인물들이 사건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는 이질적이었어요. 피해자가 함께 활동하던 동료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과 주변 인물들이 비교적 가볍게 대응하는 듯한 모습은 영 공감이 가지 않더라고요.
심지어 클럽 회원인 게이코와 다른 인물들이 범인인 마츠오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범행 동기였던 호큐사이의 마술 비법을 함께 이용하려는 속셈이 엿보이는 결말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범인이 현장을 "11장의 트럼프" 속 물건들로 꾸미는 설정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호큐사이의 마술에 대해 누군가 알고 있다면 자신의 범행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세간의 이목을 끌고자 했다는 의도가 앞뒤가 맞지 않는 탓입니다. 호큐사이의 마술을 아는 사람이 사건을 접했다 하더라도, '시마코는 호큐사이의 마술 때문에 살해당했다!'고 주장할리가 없잖아요. 더군다나, "11장의 트럼프"라는 소설은 거의 판매되지 않아 대중의 관심을 끌기도 어렵고요. 사건을 일부러 극적으로 연출하려 했다면, 시체의 목을 자르는 등 보다 직설적인 방법이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사건 현장에서 ‘가스 밸브가 열린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단서 역시 비약이 심합니다. 이를 근거로 범인이 후각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추리였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마술과 본격 추리 소설을 잘 결합하고 있으며, 독자에게 모든 단서를 공정하게 제공하며 추리의 재미를 충실히 전달해 줍니다. 마술 트릭과 사건의 연결이 돋보이는 장면들이 많으며, 초반의 유쾌한 분위기도 좋고요. 살인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독특한 설정으로 독자의 흥미를 끌며, 마술 트릭을 활용한 본격 추리 소설로서 한 번쯤 읽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마술이 등장하는 본격 추리물 중(이 작품이나 이 작품, 이 시리즈...)에서는 가히 최고를 다툰다 할 수 있으니까요.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024/06/01

계간 미스터리 2024 봄호 - 김태현 외 : 별점 2점

계간 미스터리 2024.봄호 - 4점
김태현 외 지음/나비클럽

정말 오랫만에 읽어보는 계간 미스터리입니다. 이전 리뷰는 2011년이니 강산이 변해도 벌써 한 번 이상 변했네요. 싼마이틱하지만 강렬한 표지 일러스트에 호기심이 동해 읽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리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문예지 스타일이라는건 같은 미스터리 잡지"미스테리아"와 확실히 다른 점입니다. 심지어는 특집 기획 르포르타쥬 기사인 "인스타그램 주식 여신"마저도 소설 형식을 빌어 작성되어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죠. 인스타그램에서 주식 고수익을 인증하며 투자자를 끌어들인 뒤, 폰지 사기를 저지른 실화를 가명, 그리고 사건 핵심 관계자 시점의 묘사로 설명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수록 단편 6편 중 무려 5편이 한국 작가 작품이라는 것도 특징입니다. '한국 추리 문학의 본진'이라는 광고가 허언은 아닌 셈입니다.

수록 단편 중에서는 세 편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세 편에 대해 스포일러 가득 담아 짤막하게 감상을 남겨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신인상 수상작인 "사이버 니르바나 2092"입니다. 유명 연예인 강준기가 전뇌 합선으로 사망한 사건의 진상을 캐는 전직 경찰의 활약을 그린 SF 추리물이지요. 이미 죽은 강준기의 뇌를 회사, 매니저들이 이용해서 그동안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왔지만, 전뇌에 복수 접속하는 사고로 뇌가 타버렸다는 진상은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과연 좋은 추리물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강준기는 전뇌화 수술을 받지 않은 인본주의 인물이었다는 정도의 단서로는 진상을 추리해내는게 독자에게는 불가능한 탓입니다. 최신형 전뇌가 아니어서 과부하가 걸리면 타버린다는걸 독자는 알 도리가 없으니까요. 안티 부디스트 시위, 전뇌, 전뇌 연결, 신체 임플란트 등 "공각 기동대"로 대표되는 사이버 디스토피아 세계관도 지금 읽기에는 식상했어요. 저자의 욕심이 과했습니다.
"낭패불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는 악마가 인간을 타락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흔하디 흔한 설정인데 1973년 박정희 유신 당시 경찰서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니 굉장히 독특하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이 과정에서 빚어진, '경찰이 피라미 노동자를 간첩이라며 고문, 심문하는데 알고보니 그 노동자가 취조하던 형사의 6.25 때 헤어진 동생이었다!'라는 극한의 딜레마도 흥미로왔습니다. 형은 여기서 동생임을 밝히고 노동자를 구해줘야 할까요? 그러면 빨갱이 가족임이 드러나 출세길이 영영 막힐텐데? 아, 정말 쫄깃하더군요. 다만 노동자를 죽이고 말았다는 결론은 다소 식상했고, 악마가 끼어들 이야기였는지는 의문이기는 합니다. 뭔가 거래를 한 것도 아니고... 이런 억지스러운 악마의 등장보다는, 같은 역사 속 비극을 짤막하게 다루었지만 훨씬 깊은 울림을 주는 걸작인 김성종의 "어느 창녀의 죽음"같은 선례를 참고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아문센의 텐트에서"는 수록작 중 유일한 외국 단편입니다. 존 마틴 레이히의 작품이지요. 남극 탐험대가 미지의 괴생명체를 발견한 뒤 모두 죽고만다는 크리처 물입니다.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의 직속 선배라 할 수 있어요. 로버트 드럼골드와 대원들이 느끼는 공포가 생생하게 전달되는 덕분에 몰입감이 장난이 아닙니다. 미지의 괴생명체가 뭔지 제대로 묘사도 하지 않는데도 말이죠. 별점은 4점은 충분합니다. 수록작 중 단연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특집 기사  "인스타그램 주식 여신"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최근 흔히 보아왔던 범죄 이야기이기는 한데, '사기 감별사' 주제한이 범인 '여우비'의 사기를 간파한 방법은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화라서 설득력도 높고요. 
한국 미스터리를 키워드를 통해 분석한다는 신연재 "로컬리티와 미스터리"에서는 여러가지 주장 중 한국 소설의 공간 중 '시골'에 주목한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지역 주민의 텃세와 오지랖, 부조리한 규율이라는 시골적 배타성, 이른바 '부족주의'와 도시인의 충돌이 벌어지는 식으로 시골은 미스터리 무대로 흔히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는 도시인 기준이라는 주장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골 부족주의를 전형화하는 시선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셈이지요. 이를 극복한 작품으로 황세연의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를 소개하는 것도 이채로왔고요. 이 작품을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이런 시선이 추리 비평에 필요하겠구나 싶더군요. 저도 한참 공부가 부족하다는걸 여실히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단편 세 편은 추리물로 보기 어렵거나, 달리 언급할 부분이 없는 범작 수준에 그친다는건 아쉬웠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앞으로는 '계간 미스터리'라는 명칭에 걸맞는 정통 추리물이 더 많이 수록되면 좋겠습니다.

2024/02/21

천재탐정 미타라이: 살인사건의 진실 (2016) - 이즈미 세이지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잡지 편집자인 오가와가 미타라이를 찾아와 미해결 수수께끼 사건 해결을 요청했다. 미타라이는 고고섬에 변사체가 연달아 떠내려온 사건에 흥미를 갖고, 조사와 추리로 사체는 후쿠야마에서 해류를 타고 내려왔다는걸 알아냈다.
후쿠야마로 향한 미타라이는 다른 외국인 변사체와 함께, 류진 폭포 부근에서 눈과 입이 꿰메어진 부부와 그들의 죽은 아기가 발견된 사건과 마주쳤다. 그리고 사건에는 후쿠야마 굴지의 기업인 사이쿄 화학 공업과, 과거 '세이로'라고 불리우던 전국시대 병기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밝혀내는데....


작가가 허락하지 않아서 영상화가 늦어졌다는, 시마다 소지미타라이 시리즈 첫 번째 영화. 티빙에서 감상했습니다. 지난 연초에 감상했는데 리뷰가 늦었네요.

여러 사건이 등장해서 추리적으로 풍성하다는게 장점입니다. 아래 순서로 사건이 일어납니다.
  1. 고고 섬으로 6구의 변사체가 떠내려온다. 한편 후쿠야마 바다에서는 '수룡'을 목격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2. 류진 폭포 부근에서 눈과 입이 꿰메어진 이비 부부와 그들의 죽은 아기가 발견되었다.
  3. 후쿠야마에서 외국인 여성 변사체가 발견되었고, 경찰은 사체를 옮기려던 외국인 무리를 검거했다.
  4. 역사 연구가 타키자와가 전국시대 병기 '세이로'의 존재를 알아냈다.
  5. 타키자와가 수상한 외국인과 부딪혔는데, 그는 이상한 알약을 떨어트렸다. 그 뒤 타키자와를 외국인 무리가 습격하려다 그녀의 저항으로 되려 추락사했다.
여기서 '외국인'들이 관련되어 있는 고고 섬 변사체, 후쿠야마 여성 변사체, 타키자와 습격 사건은 한 묶음입니다. 위험 약물을 제조 판매하던 외국인 무리가 관련자들 사체를 바다에 버렸고, 타키자와가 비밀을 눈치챘다 여기고 죽이려 했던 겁니다. 

이 사건들을 빼면 핵심 사건은 이비 부부 사건과 수룡의 정체, 두 가지로 중반 이후에는 두 사건, 그 중에서도 정통 추리물이라 할 수 있는 이비 부부 사건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이 사건은 아기 보모 타츠미가 실수로 아이가 추락사한걸 감추려고 유괴극을 꾸몄으며, 복수를 위해 이비 씨 가족을 감시하던 마키타 사장이 이를 눈치채고 부부마저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는게 진상인데 여러가지 단서, 복선을 나름 공정하게 보여주면서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마키타 사장이 협박 편지를 남긴게 아니라서, 이비 씨에게 편지 내용을 읽어보라고 시켰고(내용 파악을 위해), 몸값 약속 시간도 선뜻 바꾸어 주었다는 등의 추리도 합리적이었어요.
'세이로'가 수룡이며, 이는 알고보니 잠수함이었다는건 역사 추리물 형태인데, 역사 속 기록과 연결하여 팩션처럼 전개하는게 재미있었습니다. 전국시대 병기가 흑선에 대항할 비밀무기로 기능한다는건 말도 안되지만, 잠수해서 흑선의 '외륜'만 노린다면 혹시?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설득력도 있었고요.

영화 만듦새도 좋습니다. 특히 촬영이 아주 인상적이에요. 요새 영화에서 보는 선명한 조명이 아니라, 자연광을 쓴 듯 자연스럽고 다소 낮은 채도의 약간 오래 전 영화같은 화면을 보여주는데 굉장히 좋았어요. 작위적일 수 밖에 없는 추리물이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화면이 그래도 생생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촬영 덕분에 후쿠야마, 세토 내해 일대를 배경으로 삼는, 일종의 '여정 미스터리'로서의 가치도 높습니다.
주연 타마키 코지의 미타라이 연기는 본격물 탐정으로서의 모습에 충실해서 나쁘지 않았어요. 전형적이지만 이런 작품 속 탐정들이 뭐 대부분 그러하니까요. 만약 미타라이가 실제로 있다면 이렇게 생겼을 것 같다!는 이미지는 잘 전해줍니다.
하지만 추리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이비 부부 사건은 마키타 사정의 동기, 그리고 경찰 수사 부분에서 아쉽거든요. 단순 복수로 이런 엽기적인 범행을 벌인다? 설득력이 낮습니다. 아기가 이미 죽었다면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앙값음이 되었을텐데 말이지요. 외국인 수하들을 시켜 진작에 복수할 수도 있었는데 이런 기묘한 범행을 구태여 저지른 이유도 설명되지 못합니다. 이비 씨 가족을 꾸준히 감시해왔다는 설정, 성공한 사업자가 자기 공장에서 불법 의약품을 제조한 이유도 작품 내에서 조금 설명해주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리고 경찰은 이비 씨가 과거 과격한 환경 단체 시위를 했고, 그 시위 탓에 사이쿄 화학공업 관계자가 자살했다는걸 알아냈습니다. 그렇다면 자살자의 가족을 찾아 나섰다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을거에요. 영화에서처럼 '하나 뿐인 아들의 행방은 지금 알 수 없다'며 대충 흘려보낸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잠수함 세이로를 마키타 사장이 타고 도주하던 화물선에 충돌시켜 멈추는 장면은 뭔가 했습니다. 이유도 알 수 없고, 당황스럽기만 했거든요. 이렇게까지 해서 화물선을 멈춰야할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미타라이 시리즈 팬이라면 즐길만한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2시간 남짓한 상영시간동안 저는 충분히 즐거웠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12/31

2023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이글루스 사망으로 구글 이사 후 첫 결산이자, 스무번째 블로그 리뷰 총 결산입니다. 인생 첫 블로그였던 블로그인에서 시작해 꾸준히 달려왔네요.
 
올해 읽은 책 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괄호는 작년)
추리 / 호러 장르문학 61 (71)권, 기타 장르문학 4 (5)권, 역사서 7(5)권, 디자인 or 스터디 4 (4),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3 (4)권, 기타 도서 15 (13)권
이렇게 모두 94 (102) 권입니다. 100권을 넘기지 못했고, 작년과 비교해도 약 10% 정도 줄었네요. 만화 관련 포스팅을 39건이나 올렸을 정도로 만화를 많이 읽있고, 영화와 애니메이션도 많이 본 탓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남는 시간은 머리를 비우며 가볍게 보내고 싶어지는데 반성해야 겠습니다.

그럼 언제나처럼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를 소개해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아울러 5권 이하로 읽은 분야는 특별한 걸작이나 망작이 없다면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023년 베스트 추리소설 :
"황제의 코담뱃갑"
존 딕슨 카의 고전. 구관이 명관. 별점 5점.

2023년 워스트 추리소설 :
"전래 미스터리"
완성품으로 보기 어려운 별점 1점짜리 망작.

2023년 베스트 기타 장르문학 :
"마션"
재미와 지식 전달 모두 훌륭.

2023년 베스트 역사 도서 :
"신의 기록"
all time으로 쳐도 베스트 중 한 권일 수준.

2023년 워스트 역사 도서 :
"산척, 조선의 사냥꾼"
정작 사냥꾼 이야기는 별로 없음.

2023년 베스트 디자인 or Study :
"딕 브루너"
별점 5점! 
그 외의 디자인 관련 도서 3권도 모두 별점 3점 이상.

2023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식민지의 식탁"
소설들로 알아보는 일제 강점기 식문화

2023년 베스트 기타 도서 :
"해변의 카프카"
무라카미 하루키는 역시.

2023년 워스트 기타 도서 :
없음.

2023년 베스트 Movie :
"서울의 봄"
두말할 나위없는 올해의 베스트.
참고로, 애니메이션 베스트는 "천국대마경".
 
2023년 워스트 Movie :
"명탐정 코난 비색의 탄환"
아동용은 이 정도 수준이라도 괜찮나?

2023년 베스트 Comic :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 헌터 / 아웃핏"
미국 카툰의 힘.

2023년 워스트 Comic :
"체셔 크로싱"
돈 받고 팔 수준이 아니었음.

이 글을 마지막으로 2023년을 마무리합니다. 24년 갑진년에 다시 뵙겠습니다.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분들 모두 새해에는 원하시는 일 다들 이루시기를 바라겠습니다. 

2023/11/18

명작 추리 소설 5선 : 이 서술 트릭이 굉장해!

소설에 대해 안내하고 소개해주는 일본 사이트 '소설마루' 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가볍게 소개해 드립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핵심 트릭이 노출되어 있으니, 읽으시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3/08/05

하얀 마물의 탑 - 미쓰다 신조 / 민경욱 : 별점 2.5점

하얀 마물의 탑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모토로이 하야타는 2차대전에 해군으로 참전했던 탓에 등대지기가 되었다. 해군 시절 등대의 중요함을 느꼈던 탓이었다. 양성학교를 거쳐 첫 부임한 곳은 간토의 다이코자키 등대였다. 그곳에서 자살하려는 소녀를 구해주는 등의 경험을 겪고 2년 후, 도호쿠 지방에 있는 고가사키 등대로 전근이 결정되었다.
어선으로 고가사키 등대에 접근하던 하야타는 등대에서 이상한 햐얀 형체를 목격했고, 이 때문에 어부가 직접 상륙을 거부해서 등대 아래 아지키 마을에서 육로로 이동해야 했다. 
하야타는 이동을 위해 안내인 모스케를 고용했지만, 모스케가 사라져버려서 홀로 출발했다. 그리고 하야타는 숲길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쫓는걸 알아채고 서두르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해까지 진 상태에서 발견한 민가는 기묘하게 생겼고 무척 낡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집은 마을 사람들이 '하얀집'이라고 부르며 피해가라고 했던, 시라가미를 모시는 무녀의 집이었다. 가면을 쓴 무녀와 손녀가 살고 있었는데 하야타는 친절한 손녀 하쿠호의 도움으로 하룻밤을 보낸 뒤, 그녀에게서 받은 부적 덕분에 무사히 등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등대에는 아무도 없었고, 밤이 되어서야 등대장 이사카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하야타를 찾으러 숲에 갔다왔다고 한 이사카는 하야타가 겪었던 일을 듣고,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주었다. 다이코자키에서 자살하려는 소녀를 구해주었었고, 고가사키 상륙 전에 하얀 형체를 목격했었고, 숲 길로 이동하다가 무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었다는 등 하야타와 거의 똑같은 이야기였다.
등대장의 회고는 마을 신주의 딸 미치코와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하듯 홋카이도로 전근을 갔는데, 딸은 신주가 부리는 시라몬코에게 납치되어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하야타는 자신의 경험담을 합리적으로 해석한 뒤, 이사카의 아내 미치코는 마을 신사 신주의 딸이 아니라 하얀집의 딸 시라쓰유였다는걸 추리해 내는데....


"불가해한 일을 겪을 때는 합리적인 해석이 중요하다."

미쓰다 신조의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신간 코너에 있길래 시리즈인줄 모르고 별 생각없이 집어들었는데, 읽다보니 시리즈더라고요. 다행히 첫 번째 작품은 읽지 않았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지장은 없었습니다.

작품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사관장>>과 비교적 흡사합니다. 시골 마을에서 대대로 전승되는 무속 신앙과 그들이 부리는 신(?)에 관련된 기묘한 능력, 그것에 얽히게 된 민간인이라는 핵심 소재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이 무녀와 연을 맺는 전개와 사람들이 겪는 기현성이 '하얀색'이라는 것도 유사하고요.
하지만 주인공 모토로이 하야타의 존재가 결정적 차이를 만듭니다. 그는 모든 현상을 '합리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래서 온갖 기현상에 대한 나름의 추리를 펼칩니다. 이게 꽤 그럴싸해서 재미있었어요.
 
우선 '세기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유명한 아일린모어섬 등대 사건부터 자신만의 해석을 내 놓습니다. 등대장인 마셜이 미쳤다는 것이지요. 실제로는 폭풍우가 오지 않았지만 일지에 폭풍우가 덮쳤다고 적혀있던건 마셜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고, 부하 중 듀커가 '화를 냈다'는건 마셜이 미쳤기 때문에, 그리고 듀커가 '여전히 조용했고' 맥아더가 '기도했다'는건 마셜이 듀커를 죽여서 맥아더가 기도했다고요. 실종의 진상은 마셜이 비옷과 장화를 신고 듀커의 시체를 버렸는데, 그걸 안 맥아더가 비옷과 장화를 신고 뛰어나와 말리다가 둘 다 물에 빠져 죽은 것이라 추리합니다.
홀로 숲 길을 해메던 하야타를 추격했던 하얀 괴물체에 대한 추리도 합리적이었습니다. 길 안내를 부탁했던 모스케였다는 겁니다. 슬쩍 수풀 사이로 본 거대한 하얀 형체는 모스케가 짐을 나르며 짐 위에 덮어놓았던 흰 천이고요. 하야타가 마을 여관의 딸 기리에와 사이가 좋은걸 봤기 때문에, 질투심으로 저지른 일종의 장난(?)이라는 동기까지도 잘 설명해줍니다. 밤에 돌을 던지고, 다음날 등대로 향할 때 숲 속에서 하야타를 포위했던건 원숭이들이었을거라는 추리도 괜찮았고요.
자료 조사도 충실해서 등대의 역사 등 온갖 정보들도 가득한데, 그 중에서도 오사카 케이키치 등대 소설을 읽는 묘사는 반가왔습니다. <<등대귀신>>은 <<등대귀>>라는 제목으로 읽었었던 적이 있지요. 다른 작품들도 언급되는데 어떤 작품일지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전개는 다소 지루한 편입니다. 모토로이 하야타가 고가사키 등대로 향해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게 거의 1/3 지점일 정도거든요. 하야타의 과거라던가, 신념에 대한 묘사, 그리고 등대의 역사 등 관련 자료가 너무 많이 등장하는 탓입니다. 작품과는 별 상관이 없는데 말이지요.
또 합리적으로 모든걸 설명하려고 했으면 그렇게 모든걸 설명해 주었어야 했는데,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너무 많습니다. 이사카 부부는 유령(?)이었다는 결말은 어처구니를 상실케하며, 이사카 부부와 다른 등대지기 하마치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애초에 이사카가 고가사키로의 전근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인지 등은 아예 설명이 되지 않아요.
그 외에도, 하얀 집과 마을과의 관계처럼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았어요. 한 때는 그 집에서 출산을 했다고 하는데, 불길하게 여기는 집에서 왜 출산은 했을까요? 출산을 앞 둔 임산부가 가기에는 너무 험한 산길로 보이는데 말이지요. 좋은 일은 마을 신사에, 나쁜 일은 하얀집에 기원한다는 설정도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좋고 나쁨의 구분 자체가 애매하잖아요. 예를 들어, 먼 곳에 있는 가족에게 선물을 보내기 위해 시라몬코를 이용하면 안되는 걸까요?
등대에서 보이던 하얀 형체가 하얀 집의 딸 하쿠호 (이전에는 시라쓰유)의 하야타 (이전에는 이사카)를 향한 연심이라는 해석도 별로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이 맞다면 하얀 형체는 이사카와 하야타에게만 보였어야 했습니다. 시라쓰유, 하쿠호의 연심은 그들이 자살하려 할 때 구해주었던 젊은 등대지기에게 향해 있었으니까요. 즉, 마을 어선 선장이 '하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 들, 그걸 목격했다고 등대 상륙을 거부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얀 사람'이 귀신을 볼 수 있는 모두에게 보인다면, 그걸 '연심'이라고 하기도 힘들테고요. 무언가에 대한 집착이 구체화된다는 해석이었다면 말은 되었겠지만 그런 설명은 없습니다.
이런 경험에 진절머리가 난 하야타가 등대지기를 그만둔다는 결말도 영 아니었어요. 물론 하야타가 하쿠호의 사랑을 받아줄 리는 없지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도 없이 유령이 되어버린 이사카 부부를 봤으니까요. 하지만 작중 묘사를 보면 하얀 집의 무녀는 시라몬코를 부려 일본 각지를 조사하고, 심지어 아이를 납치할 수 있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등대지기를 그만 둔 걸로 하쿠호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쿠호에게 누군가 다른 남자가 희생양이 되기 전에는 말이지요. 하쿠호에게 희생양으로 모스케라도 던져주는게 바람직했습니다.

이렇게 설명이 부족하고 결말이 대충이라는 점에서는 완성된 소설보다는 괴담에 가까왔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리즈 1편인 <<검은 얼굴의 여우>>는 추리물이라고 하는데, 1편이나 읽어봐야겠습니다.

2023/06/08

걸작 밀실 미스터리 : 불가능 범죄 베스트 10


짧게 번역해 보았습니다. 오역이 많은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영국의 추리 소설가 톰 미드(국내에 소개된 적은 없네요)가 밀실 미스터리의 장대한 역사와 밝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먼저 "밀실 미스터리"라는 용어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요? 밀실 미스터리를 다른 장르와 차별화하는 요소는 '불가능'이라는 요소입니다. 사실 저는 이 용어를 '불가능한 범죄'와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범죄(보통 살인)가 저질러지는 이야기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종종 초자연적인 사건과 불길한 분위기로 으스스하고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그러나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기발한 추리와 합리적인 설명에 의해 눈부신 스타일로 풀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장르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 거리의 살인>>은 최초의 밀실 미스터리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미스터리라기보다는 공포, 호러 소설에 가깝고 실제로 탐정이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몇 년 동안 장르의 틀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초기 작품으로는 윌키 콜린스의 단편 소설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가 있습니다 (물론 콜린스는 최초의 제대로 된 '탐정 소설'인 <<월장석>>을 쓴 작가로 인정받고 있기도 합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얼룩 띠>>도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밀실 미스터리는 본격적으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장윌의 <<빅 보우 미스터리>>와 가스통 르루의 <<노란 방의 비밀>>은 상승 궤도에 있던 장르의 초기 하이라이트를 장식했습니다.

탐정 소설의 황금기에는 밀실 미스터리의 인기가 붐을 이루었습니다. 밀실 미스터리는 퍼즐이 핵심인 '공정한 페어플레이 미스터리'에서 특히 도전적인 하위 장르이기도 합니다. 아가사 크리스티, 도로시 L. 세이어스, 엘러리 퀸과 같은 위대한 작가들은 독자가 가상의 범죄를 스스로 해결하는 데 필요한 모든 단서를 제공함으로써, 독자와 공정하게 경쟁하는 것을 중요시했는데 이는 밀실 미스터리의 주요 요소이자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장르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존 딕슨 카가 문학계에 충격을 주며 등장한건 1930년대 초, 황금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카는 최고의 밀실 미스터리의 대가이자 저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입니다. 그는 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걸작을 연이어 썼으며, 그의 경력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를 놀라운 감각으로 풀어내는는 능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30년대와 40년대 대부분을 영국에서 살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영국 범죄소설 커뮤니티에서 환영을 받았으며, 권위 있는 영국 탐정 협회에 입회한 단 두 명의 미국인 중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밀실 미스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인기가 하락했지만 (이후 수십 년 동안에도 여전히 훌륭한 작품이 많이 출판되었지만), 다시 운이 트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Jonathan Creek, Monk, Death in Paradise와 같은 TV 쇼는 새로운 세대에게 불가능한 문제의 즐거움을 소개했습니다. 다니엘 스태샤워와 빌 프론지니 같은 작가들이 기억에 남는 상상력 넘치는 작품을 계속 발표하면서 책으로도 계속 인기를 얻고 있고요. 하지만 이 장르를 처음 접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시작을 돕기 위해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밀실 미스터리 10편의 목록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 목록은 지난 세기 동안 정말 눈부신 작품을 만들어낸 장르의 최고를 대표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작가당 한 권의 소설만 선정하였고 (그 자체로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었죠), 매일 새로운 작품을 발견하여 빠르게 늘어나는 책장에 추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긴장감을 위해 역순으로 제 상위 10권을 소개합니다:

WHISTLE UP THE DEVIL : 데릭 스미스 (1953) (국내미출간)
데릭 스미스에게 특별한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도 저처럼 자신이 존경하는 거장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밀실 미스터리를 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1953년에 처음 출간된 WHISTLE UP THE DEVIL은 두 건의 불가능한 살인 사건으로 이 장르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모든 것은 비 오는 어느 날 밤, 로저 퀘린이라는 남자가 살해되면서 시작되지요.
슬프게도 이 소설은 스미스의 생애에서 출판 된 유일한 소설이었습니다. 스미스가 워싱턴 포스트에서 걸작으로 칭송받은 WHISTLE UP THE DEVIL로 찬사를 받기 시작한지는 고작 10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BLOODHOUNDS : 피터 러브시 (1996)
피터 러브시는 고전적인 스타일의 퍼즐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작가로, 그의 피터 다이아몬드 시리즈는 고전 본격물의 공정함과 경찰 수사를 완벽하게 조화시켰습니다. BLOODHOUNDS는 미스터리 소설 애호가 그룹이 실제 밀실 미스터리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다룬 대표적인 소설입니다. 따라서 존 딕슨 카의 이름이 자주 언급됩니다. 잠겨 있고 뚫을 수 없는 운하 바지선에서의 살인 사건이라는 매우 특이한 문제도 등장합니다. 이 장르가 처음이고, 잘 알지 못한다면 이 작품부터 시작해도 좋습니다.

INVISIBLE GREEN : 존 슬래덱 (1977)
존 슬래덱은 공상 과학 소설계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뛰어난 불가능한 범죄 소설인 Black Aura와 INVISIBLE GREEN은 오랫동안 외면당해 왔어요. 특히 INVISIBLE GREEN은 작가의 다재다능한 상상력, 생동감 넘치는 묘사, 예리한 논리를 보여줍니다. 고전 본격물의 황금기가 끝난 지 한참 지난 1970년대에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작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 탐정 태커이 핀은 에드먼드 크리스핀의 저비스 펜과 같은 수준의 황금기 밀실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슬래덱이 공상 과학 소설을 위해 그를 버리기 전까지 핀은 단 두 편의 소설과 단편 소설에만 등장했을 뿐인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가 또 무엇을 성취할 수 있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NINE TIMES NINE : H.H. 홈즈 (앤서니 부셰) (1940)
앤서니 부셰는 미스터리 장르의 진정한 학자였으며, 실제로는 미스터리를 거의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Bouchercon' 덕분에 그의 명성은 계속 높아져 갔습니다. 하지만 그가 쓴 몇 편의 미스터리는 놀라울 정도로 훌륭합니다. NINE TIMES NINE에는 빛의 아이들이라는 사악한 종교가 등장합니다. 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빛의 아이들을 이끄는, 수수께끼 같은 두건을 쓴 지도자에게 저주를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매우 모호한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노란 가운을 입은 의문의 남자가 범죄 현장에서 목격된 후 사라지고요. 우르술라 수녀는 이 복잡한 사건의 여러 얽힌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MR. SPLITFOOT : 헬렌 맥클로이 (1969)
밀실 미스터리에 관한 한, 헬렌 맥클로이의 <<어두운 거울 속에>>는 비평적 논의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며, 당연히 그럴 만합니다. 심리학자 바질 윌링 박사가 등장하는 이 시리즈는 도플갱어의 출현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다룬 멋진 작품입니다. 매우 불길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와 잊혀지지 않는 결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에 포함하기로 한 맥클로이 작품은 바질 윌링 시리즈의 후기 작품입니다. 말 그대로 밀실 미스터리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거울 속에>>와 마찬가지로 MR. SPLITFOOT 역시 특유의 분위기를 놓치지도 않고요. 예를 들어, 제목은 다름 아닌 사탄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 소설은 밤을 보낸 사람은 아침에 시체로 발견된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유령의 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모두의 예상대로, 전설을 시험해 보려는 자원자가 곧바로 등장합니다....

<<혼진 살인사건>> : 요코미조 세이시 (1946)
요코미조 세이시는 일본에서 셜록 홈즈에 버금가는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를 만들어낸 전설적인 작가입니다. 혼진 살인 사건은 킨다이치가 요코미조의 소설에 출연한 77편의 작품 중 첫 번째 작품으로, 결혼식 날 밤 잔인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된 한 쌍의 신혼 부부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 : 클레이튼 로슨 (1938)
마술과 문학을 결합하는걸 전문으로 하는 작가의 놀라운 데뷔작입니다. 그는 마술사이자 존 딕슨 카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카처럼 클레이튼 로슨도 해리 후디니와 같은 과거의 전설적인 마술사들을 존경했습니다. 로슨의 탐정인 위대한 멀리니에는 분명히 후디니의 요소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멀리니 이야기는 가장 순수한 '미스디렉션'을 보여줍니다.

THE CRIMSON FOG : 폴 할터 (1988)
폴 할터는 종종 존 딕슨 카의 후계자로 설명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독특한 문제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긴장감과 불안감을 조성하는 데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소설을 강력히 추천하지만, 마술 쇼 중 무대에서 벌어지는 불가능한 살인을 다룬 THE CRIMSON FOG는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이상적인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담하니까요! 또 잭 더 리퍼가 직접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합니다.

RIM OF THE PIT : 해크 탤벗 (1944)
서프라이즈! 또 다른 마술사, 해크 탤벗은 프로 마술사 헤닝 넬름스가 두 편의 환상적인 밀실 미스터리인 The Hangman’s Handyman과 RIM OF THE PIT을 출간할 때 사용한 가명이었습니다. 두 작품 모두 모험가이자 탐정인 로건 킨케이드가 등장하며,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풍부하게 선보입니다. 
RIM OF THE PIT에서는 초현실적이고 악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눈 덮인 시골을 배회하는 섬뜩한 유령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물론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제벨의 죽음>>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1948)
크리스티아나 브랜드는 정말 뛰어난 미스터리 작가였습니다. 더 많은 작품을 쓰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야전 병원으로 사용되었던 영국의 시골집을 배경으로 한 그녀의 책 <<녹색은 위험>>은 그녀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읽힌 작품입니다. 정말 위대한 황금기 미스터리지요. 
하지만 밀실 미스터리와 불가능한 범죄로는 <<제제벨의 죽음>>이 최고입니다. 시리즈 탐정 코크릴 경감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특히나 독특하고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노쇠하고 악연이 깊은 여배우가 무대에서 살해당한 미스터리한 상황을 말이지요. 퍼즐에 대한 해답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작품입니다!

<<세 개의 관>> : 존 딕슨 카 (1935)
각 작가가 하나의 작품만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존 딕슨 카는 "걸작"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책을 너무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그의 작품을 낭송하는 것만으로도 목록을 쉽게 채울 수 있지요. <<세 개의 관>>은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며, 무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소설입니다. 처음 읽은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네요. 기디온 펠 박사가 눈이 내리는 런던의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살인범과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기디온 펠 미스터리를 썼지만 카터 딕슨이라는 필명으로 다른 시리즈도 썼는데, 이 시리즈에는 친구들에게 H.M.으로 알려진, 거구의 탐정 헨리 메리벨 경이 등장합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찾아볼 가치가 있습니다. 기디온 펠 이야기와 H.M. 작품들 중 일부는 불가능에 대한 힌트가 없는 단순한 후더닛이지만, 모두 눈부실 만큼 훌륭합니다! 존 딕슨 카와 그의 놀라운 작품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면 더글러스 그린의 전기 he Man Who Explained Miracles를 강력 추천합니다.

밀실 단편 소설
밀실 미스터리는 장편 소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과 같은 출판물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작품을 계속해서 출판하고 기념하는 등 밀실 미스터리는 단편 소설 형식으로도 활발히 발표되고 있습니다. 저도 여러 편의 밀실 미스터리 단편 소설을 직접 썼기 때문에 (“The Indian Rope Trick”. “The Footless Phantom”은 모두 EQMM에 실렸어요),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몇 페이지 안에 공정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에드워드 D. 호크와 같은 작가를 깊이 존경합니다. 특별한 순서는 없지만, 여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늙은 떡갈나무의 수수께끼>> 에드워드 D. 호크 (1978)
제가 단편 작품 섹션을 포함시킨 주된 이유는 호크 때문입니다. 그는 카에 필적할 만한 상상력을 가졌지만, 거의 전적으로 단편 소설을 전문으로 하여 평생 동안 1,000편에 가까운 작품을 썼습니다. 그의 작품 중 단 한 편을 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시리즈는 작은 마을의 의사가 탐정으로 변신한 샘 호손이 등장하는 시리즈일 것입니다. 호손의 모든 이야기 중에서도 <<늙은 떡갈나무의 수수께끼>>는 독창성과 문학적 성취로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 아가사 크리스티 (1937)
황금기 미스터리 관련 글에서 아가사 크리스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밀실 추리 소설을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포와로 시리즈 작품인 <<에르큘 포와로의 크리스마스>>와 <<메소포타미아의 살인>>에는 교묘하게 고안된, 불가능 문제들이 등장합니다. 그녀의 대표작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밀실 미스터리에 포함되는지 여부에 대한 논쟁도 있고요. 저는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걸작인건 분명합니다. 이 작품 대신 벨기에의 작은 회색 뇌세포가 꿈에서 예언된 밀실 살인 사건에 휘말리는 단편 소설 <<꿈>>을 선택했습니다.

<<붉은 밀실>> 아유카와 테츠야 (1954)
일본에서 밀실 미스터리와 본격 미스터리의 신조를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그리고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녹색 문은 위험>> 노리즈키 린타로 (1991)
완벽한 퍼즐 미스터리이자 신본격 장르의 주옥같은 작품.

<<The Name on the Window>> : 에드먼드 크리스핀 (1953)
크리스핀은 뛰어난 재치를 지닌 작가이자 저처럼 카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그의 시리즈 탐정인 저비스 펜과 이 깔끔한 밀실 문제를 통해, 크리스핀은 자신이 거장의 제자임을 증명했습니다.

<<The House in Goblin Wood>> : 카터 딕슨(존 딕슨 카) (1947)
헨리 메리 베일 경은 이 진정으로 감각적인 작품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실종에 맞서 그의 재치를 발휘합니다.

<<The Border-Line Case>> : 마저리 앨링엄 (1936)
앨링엄은 크리스티와 마찬가지로 밀실이나 불가능한 범죄 이야기를 전문으로 하지 않은 또 다른 '범죄의 여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The Border-Line Case은 이 장르의 훌륭하고 완벽하게 구성된 예입니다.

<<From Another World>> : 클레이튼 로슨 (1948)
강령회가 예상치 못한 기괴한 결과를 낳는 단편 걸작.

<<13호 독방의 문제>> : 자크 푸트렐 (1905)
장르의 초석을 다진 작품. 반드시 읽어야만 합니다.

<<개의 신탁>> : G.K. 체스터턴 (1926)
체스터턴브라운 신부는 홈즈, 포와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대한 탐정입니다. 체스터턴 자신이 존 딕슨 카의 기드온 펠의 모델이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죠!

<<The X Street Murders>> : 조셉 커밍스 (1957)
조셉 커밍스는 슬프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작가로, 시리즈 캐릭터 브룩스 U. 배너 상원의원은 헨리 메리베일 경의 후계자라 할 수 있습니다.

<<The House of Haunts>> 엘러리 퀸 (1935)
엘러리 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스터리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사실 그는 두 명입니다. 사촌 프레드릭 다네이와 맨프레드 리가 만든 가명이었죠).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밀실 미스터리를 많이 쓰지 않았지만, 그들이 쓴 밀실 미스터리는 모두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차이나 오렌지의 비밀>>과 <<the Door between>>모두 밀실 문제를 다룬 훌륭한 소설이지만, 두 작품 모두 불가능성이 다른 더 눈부시고 기발한 플롯 요소에 가려져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하우더닛보다는 후더닛으로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존 딕슨 카를 읽은 남자>> 윌리엄 브리튼 (1966)
이 책도 꼭 포함시켜야 했어요.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죠! 마지막에 유쾌한 반전이 있는 멋진 블랙 코미디 작품입니다.

밀실 미스터리의 미래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다행히도 밀실 미스터리 장르가 다시금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 작가들의 새로운 작품이 매일 출간되고 있고, 이 장르에서 부당하게 외면받았던 고전이 재발간되는 것을 보면 정말 기쁩니다. 최근 신작으로는 Gigi Pandian의 Under Lock과 Skeleton Key, 짐 노이의 <<붉은 죽음 살인 사건>> (에드거 앨런 포의 "붉은 죽음의 가면"을 매혹적으로 재해석한 작품!), 제임스 스콧 번사이드의 <<배링턴 힐스 뱀파이어 사건>> 등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또한 마틴 에드워즈의 뛰어난 레이첼 새버네이크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블랙스톤 펠>>은 밀실 요소가 특징인 것으로 알고 있고, 로버트 소로굿의 아늑한 미스터리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말로우에 죽음이 찾아왔다>>도 기대가 됩니다. 앞으로도 밀실 미스터리와 불가능한 범죄가 계속 번성하기를 바랍니다.

2023/05/25

에도가와 란포상 베스트 10 :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를 부르는 미스터리로의 초대장 - 柳町正蔵

일본의 주간지 MONO에서 연재되는 柳町正蔵의 미스터리 관련 칼럼인 '미스터리 캐스킷 (ミステリー・キャスケット)' 지난 과월호를 읽다보니 재미있는 주제가 있어 번역해 보았습니다. 
언제나처럼 엉망인 번역이지만, 모쪼록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매년 여름 더위가 조금 누그러지는 9월 중순, 「에도가와 란포상」수상작이 서점에 진열된다 (올해는 제반 사정으로 9월 말이었다). 내 생일 가까운 날짜인 탓에, 발표와 동시에 일찌감치 수상작을 사서 읽는건 매년 개인적인 행사로 삼고 있다. 만약 그 해 작품이 별로라면 그 해 전체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이벤트이기도 하다. 
올해로 제66회를 헤아리는 이 상은 1954년 에도가와 란포가 창설했으며, 3회부터 신작 장편소설을 모집해서 최종 후보 4, 5편 중 베테랑 작가 5명이 선정한 최고 작품에 상을 수여한다는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일반 모집 형태라 이미 작가로서 데뷔한 사람도 응모할 수 있으므로, 특정 해에는 고급스러운 작품이 많이 응모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신인 추리작가의 등용문적 성격이 강하다. 주요 수상작가로는 니시무라 쿄타로, 모리무라 세이이치, 쿠리모토 카오루, 히가시노 게이고, 이케이도 준 등 당대의 빅네임이 줄을 잇는다. 야마무라 미사나츠키 시즈코는 몇 번이나 최종 심사에서 떨어졌고, 나카이 히데오의 대표작 「허무에의 제물」도 수상을 놓쳤을 정도이다. 지금은 예전만큼 주목도가 높지는 않지만 수상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건 분명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미스터리계 최고의 어워드 중 하나이다.
그럼 여기서 2020년까지의 수상작 총 71편 중 (1957년~2020년. 수상작 없음이 4회. 2편 수상이 11회)  완전히 개인적인 「란포상 수상작 베스트 10」을 선정해본다.

「란포상 수상작 베스트 10」
  • 제10위 「고양이는 알고 있다니키 에츠코 (제3회/1957년). 쇼와 30년 당시, 추리 소설 팬을 10배로 불렸다는 일본의 크리스티의 라이트 미스터리.
  • 제9위 「천사의 나이프야쿠마루 가쿠 (제51회/2005년). 예선부터 최종 심사까지 거의 일사천리로 수상한, 소년법 본연의 자세를 묻는 사회파 문제작.
  • 제8위 「어둠 속에 풍기는 거짓말」시모무라 아츠시 (제60회 / 2014년). 시력을 잃은 남자가 친형 출생의 비밀을 쫓는 서스펜스. 10년에 한 번 있는 걸작이라는 평판.
  • 제7위「암갈색 파스텔」오카지마 후타리 (제28회/1982년). 2인조 작가의 경마 미스터리. 아마추어 여성 탐정 콤비의 활약이 신선!
  • 제6위 「샤라쿠 살인 사건」타카하시 카쓰히코 (제29회/1983년). 수수께끼에 싸인 전설의 우키요에 화가 샤라쿠의 정체를 밝히는 와중에, 학계에 소용돌이치는 권력과 욕망을 그리다.
  • 제5위 「거대한 환영」 도가와 마사코(제8회/1962년). 남자 엄금의 아파트에서 전개되는 인간군상. 란포상 사상 최고 걸작으로 불리는 스릴러.
  • 제4위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고미네 하지메 (19회/1973년).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작가를 지향하는 계기가 된, 어두우면서도 경쾌한 청춘 추리물의 금자탑.
  • 제3위 「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4회/1995년). 일본인 감성의 하드보일드. 주인공 바텐더가 만드는 핫도그가 맛있을 것 같다.
  • 제2위「13계단」타카노 카즈아키 (제44회 / 2001년).  가석방중인 청년과 고독한 교도관이 사형수의 누명 벗기기에 도전하다. 긴박한 타임 리미트가 존재.
  • 제1위「사루마루 환시행」이자와 모토히코 (제26회/1980년) 현대의 대학생이 젊은 날의 오리구치 노부오와 함께 펼쳐나가는 SF+역사+암호가 뒤섞인 전기 미스테리.
'사루마루 환시행'은 그 시마다 쇼지의 명작 '점성술 살인사건'을 이긴 수상이라는 훈장도 받았다.
일본 추리 작가 협회의 사이트에는 심사위원의 선정평이 실려 있어, 선택된 포인트를 잘 알 수 있다 (단 스포 주의). 선정평이 매서운 것은 매번 있는 일로, 특히 낙선작에는 "추리소설로 통하지 않는다.", "설명이 너무 서툴다." "응모자는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 것 같다." 등 재기불능이 될 것 같은 신랄한 코멘트가 많다. 수상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은 물론이고 심사위원과의 궁합도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