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 형사 시리즈. 제목과 동일한 표제작을 포함하여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제목처럼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을 파악하여 범행을 증명하는 전개를 보이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단편집이라 그런지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에서처럼(주로 초기작) 억지스러운 동기나 인간관계가 등장하지 않고, 트릭과 추리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아울러 가가 "형사"에 어울리는, 그야말로 끈질긴 수사가 추리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참고삼아 해당 수사 내역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봅니다.
- 첫번째 사건: 화분을 구입한 날짜에 대한 수사
- 두번째 사건: 피해자가 입고 있던 옷에 대한 목격 증언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을 알아냄, 담배를 피우지 않는 피해자 옷에 진하게 밴 담배 냄새에 대한 탐문 조사
- 세번째 사건: 친칠라 고양이에 대한 증언, 피해자가 먹은 청어메밀 판매 장소 탐문을 통한 취식 시간 확인, 용의자의 단골 미용실에 대한 조사
- 네번째 사건: 나오코 집 근처 가게들을 대상으로 한 탐문 조사
- * 다섯번째 사건은 친구의 가정사에 대한 내밀한 추리 중심이라 경찰 수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 핵심 사건, 트릭 하나에 그치지 않고 나름 반전 요소들도 들어가 작품들의 복잡도와 재미를 더해줍니다. 두번째 사건에서 유타의 사체를 제한된 시간과 장소 안에서 들키지 않고 은닉하는 트릭, 네번째 사건에서 숨겨놓은 사체의 정체가 무엇인지?같은 요소가 대표적입니다.
가가 형사의 비중보다는 주인공, 화자 역할의 범인 비중이 더 크다는 점은 팬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은 됩니다만(가가라는 캐릭터에 매료된 팬이라면 당연히 불호겠죠) 이 정도면 아주 괜찮은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가 읽은 가가 형사 시리즈 중에서는 최고로 꼽습니다.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유게 발레단의 발레리나 하야카와 히로코의 자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발레단 사무국장 데라니시 미치요가 살해했다는게 진상이고요. 미치요의 거짓말은 히로코가 이사할 때 화분을 만졌다는 것입니다. 화분은 사고 당일에 구입한 것으로 이사할 때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미치요의 범행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화분은 히로코를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할 수 있었던 트릭의 도구이기도 하고요.
발레단과 발레 공연, 연습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뒷받침된 묘사나, 단순 협박 (안무가가 미치요의 남편 데라니시 도모야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난이도 높은 무대를 삭제하고 마지막 공연을 한 히로코의 자존심, 즉 히로코의 요구에 응해 15년 전 무대가 가짜였다는 것을 인정한 것을 감추기 위한 동기는 "잠자는 숲"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발레" 그 자체를 트릭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더 뛰어나고요.
아울러 표제작이면서도 이 단편집의 주제이기도 한 "범인의 거짓말"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거짓말을 감추려면 좀 더 큰 거짓말을 하게 되지요(가가)"라는 말이 대표적이에요.
그런데 가가가 거짓말을 유도한 방법은 유치하고, 단지 말실수 한 것뿐인데 뭐 그리 큰 꼬투리가 될까 싶기는 했습니다. 증거는 결국 아무것도 없고, 버티면 빠져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이렇게 하면 단편으로 성립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문제라고 지적하기는 어렵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발레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바탕이 된 적절한 트릭과 합리적인 동기가 어우러진 수작입니다.
"차가운 작열"
주부 다누마 미에코가 교살되고, 돌이 갓 지난 아들 유타가 실종된 사건의 진상은?
진상은 남편 요우지의 범행으로, 동기는 아내 미에코가 빠찡코를 하다가 차에 둔 아이를 찜쪄 죽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동기는 "너버스 브레이크다운"에서도 등장했던 것인데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피해자가 죽기 전에 입었던 빨간 티셔츠가 세탁기 안에 있던 겁니다. 요우지는 땀을 많이 흘려서였다고 말하지만, 빨간 티셔츠를 다른 빨래와 섞어서 빨아도 되는지? 와 같은 사소한 점에서 가가가 수상함을 느끼게 되는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 집안일에 관심이 없는데 유타의 옷차림을 기억하는 것 역시 괜찮은 착안점이었고요.
무엇보다도 다누마 요우지의 증언 중 차의 에어컨이 고장났다는 것을 앞의 거짓말과 엮고 — 차의 에어컨이 고장났는데 그것 때문에 땀을 많이 흘려 옷을 갈아입었다는 해명 — 그것이 진상에 이르는 전개 - 즉 에어컨이 고장나 아기가 차 안에서 열사했다 -에는 정말 탄복했습니다. 아이 사체의 부취를 막기 위해 수지로 밀봉했다는 곁다리 트릭도 돋보였고요.
하지만 티셔츠에 담배 냄새가 배었는데, 집에 재떨이도 없고 부부는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상함을 느꼈다고 하는데, 이 정보가 독자에게는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서 공정함을 느끼기 힘들었던건 조금 아쉽습니다. 이 점 때문에 약간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읽을 가치는 충분한 좋은 작품입니다.
"제2지망"
이혼녀 미치코가 교제하던 남자 모리 슈스케가 집에서 교살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의 진상은?
한마디로, 이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악입니다.
거짓말은 미치코가 댄스 교습을 마치고 샤워를 하지 않았다는 말로, 머리칼의 샴푸향을 가가가 눈치채서 그녀의 알리바이가 밝혀지게 되죠. 그런데 두 번째 사건과 마찬가지로 샴푸향에 대한 정보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고, 동기 설명도 부족하다는 단점이 너무 큽니다.
남자 목을 여자가 조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포장지 20미터 정도를 이용하여 창밖으로 체중을 걸고 뛰어내렸다는 트릭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별로였습니다. 어차피 밝혀져도 상관없는 것이었다면(범행 은닉은 미치코의 의도였고 리사는 아무 생각도 없었으니) 굳이 이런 수고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칼로 찌르거나 불을 지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모호한 동기, 불합리한 범행, 별볼일 없는 트릭 모두가 갖추어진 망작입니다.
"어그러진 계산"
사카가미 나오코의 남편은 얼마 전 역 앞에서 트럭에 치여 즉사했다. 그 와중에 불륜남 나카세 유키노부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가가와 만나는데...
나카세와 나오코의 과거, 그리고 범행 모의가 현재 시점에서의 수사와 서서히 교차되어 전개되며 결과적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만나 진상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추리적으로는 별로에요. 거짓말은 천장에서 흐르는 물에 대한 것이지만, 이건 가가가 사기친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래도 집에 숨겨놓은 사체가 유키노부의 것이었다는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가가의 수사를 바탕으로 한 추리 — 냉동고에 대한 증언 → 약국 탐문을 통한 보냉제 구입 확인 → 편의점 탐문을 통해 매일 얼음을 구입한 것을 확인하고, 시체가 냉동되어 있다! 는 구성 — 은 합리적이고 설득력도 높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외적인 매력이 더 괜찮았던 작품이에요.
"친구의 조언"
가가의 친구 하기와라가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냈다. 가가는 그의 아내 미네코가 드링크제에 약을 탔다는 것을 추리해내는데...
단편집 다른 수록작들과는 다르게 가가의 일방적인 추리와 주장이 펼쳐지는 작품으로 일종의 가가 추리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추리하는 내용 대부분이 타당하고 설득력이 높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하기와라가 출발 전 집에서 마신 음료를 따로 꺼낸 컵이라는 사소한 단서로 밝혀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아들 다이치가 그린 파란 물고기 그림을 바탕으로 동기와 범행을 추리해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고, 밀봉된 비타민제 안에 수면제를 넣는 트릭도 현실적이면서도 신선했습니다.
다만 미네코가 아트플라워 교실 강사 구즈하라 루미코와 레즈비언 관계였다는 설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습니다. 차라리 남자였다면 마지막 장면의 감정이 더 강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단점은 사소한 수준이고, 추리적으로 워낙 뛰어나서 별점은 3.5점. 이 단편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국내 출간된 가가 형사 시리즈는 현 시점에서 다 읽은 만큼 개인적으로 순위표를 작성해 봅니다.
-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 "악의"
- "신참자"
- "붉은 손가락"
- "내가 그를 죽였다"
-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 "졸업 : 설월화 살인 게임"
- "잠자는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