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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31

2015 내 블로그 리뷰 총결산

2014 내 블로그 리뷰 총결산

12차, 열두 번째 블로그 결산 보고입니다.

2015년 읽은 책 중 리뷰를 남긴 책은 추리 / 호러 장르문학 52 (48)권, 기타 장르문학 10 (11)권, 역사서 12 (19)권, 디자인 및 스터디 도서 5 (5)권,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7 (10)권, 기타 도서 21 (17)권으로 모두 107 (110)권입니다. (괄호는 작년)

작년에 워낙 많이 읽기는 했지만 올해도 나쁘지는 않군요.

참고로, 하기 베스트 - 워스트는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 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15년 베스트 추리소설 : 

"대프니 듀 모리에"

단평 : 일상 속 기이한 사건과 우연들을 다룬 고전 걸작들. 단편이란 이런 것이다.

올해 추리, 호러 장르물 중 별점 4점 이상 작품은 세 편입니다. "소름", "특별요리", 그리고 이 작품이죠.

2015년 워스트 추리소설 :

"데인가의 저주"

단평 : 오래되기만 했을 뿐, 작가 명성을 파먹고 사는 좀비.

2015년에는 별점 2점 이하의 작품이 무려 16편입니다. 그중 최악은 별점 1.5점짜리 일곱 편 중 이 작품을 워스트로 꼽겠습니다. 지루한 망작이었습니다.

2015년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펠루시다"

단평 : 이에 비하면 현대의 양판소는 삼국지 레벨일 듯.

2015년 베스트 역사 도서 :

"부르주아의 유쾌한 사생활"

단평 : 재미와 소장 가치 모두 최고! 이런 책은 사야죠.

2015년 베스트 디자인 / 스터디 도서 :

"안자이 미즈마루"

단평 : 안자이 미즈마루의 팬에게는 보석과도 같은 책

2015년 워스트 디자인 / 스터디 도서 :

"젊은 목수들 : 일본의 새로운 가구 제작 스튜디오를 찾아서"

단평 :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책인가?

2015년 베스트 기타 도서 :

"클로디아의 비밀"

단평 : 재미와 교훈 모두를 잡은 최고 수준의 아동 문학

2015년 워스트 기타 도서 :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단평 : 제목과는 정 반대로 작은 책방의 미래에 대해 좌절감만 안겨준다.

결산평 :

총 독서 권수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100권을 넘겼으니 이 정도면 취미인으로 할만큼 한 해라 생각되네요. 올해 드디어 블로그 방문자도 100만명을 돌파했고요. 줌 닷컴에 인수된 후 뾰족한 서비스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불만인데, 그래도 쌓인 정이 깊으니 어쩌겠습니까. 별 탈 없이 오래오래 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아울러 제 미미한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여러분들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고 성취하시는 한 해가 되셨으면 합니다. 제 블로그를 들러주실 정도라면 남들이 관심 가지지 않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정말로 세심한 분임이 분명할 테니 내년에는 더욱 잘 되실 거예요. 사랑합니다~!

2015/12/29

부르주아의 유쾌한 사생활 - 이지은 : 별점 4점

부르주아의 유쾌한 사생활 - 8점
이지은 지음/지안

이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의 후속작입니다. 제목 그대로 귀족 이후 시대라 할 수 있는 1800년대 후반 ~ 1900년대 초반에 걸친 부르주아 계급의 문화와 유행을 다루고 있는 문화 – "미시사" 서적이지요.

구도시에서 도시 계획에 의거, 근대도시 파리로 진화하는 ‘현대 도시의 발명 - 모던 라이프’에서 시작하여 총 10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제를 대표하는 당대의 그림으로 시작해서 자세한 자료, 도판과 함께 설명해 주는 구성은 전작과 동일합니다.

차이점이라면 전작은 유명 그림과 그림 속 소품 설명에서 출발하는데, 이번에는 주제가 훨씬 광범위하다는 점입니다. 단순 소품이나 골동품이 아니라 ‘문화’와 ‘시대’ 그 자체 – 파리의 도시 계획에 근거한 정비 사업, 기차 시대의 도래, 백화점의 탄생 등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역동적인 변화 – 에 대해 소개해 주기 때문입니다. 왕과 귀족 중심의 예술과 문화가 일반인까지 확대된 시점을 다루며, 그들이 ‘유행’을 만들고 ‘시대’를 중세와 근대에서 점차 현대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요.

물론 저자의 주특기 분야인 디테일한 소품들 소개도 빠지지 않습니다. 도시 계획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거주 문화와 함께 당대 유행했던 가구들을 소개하고, 백화점을 설명하면서 당시 백화점 팜플렛 등을 통해 당시 생활 풍습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식으로요. ‘자포니즘’ 항목이 대표적인데 대관절 어떤 경위로 일본 물품이 유행했으며 당대 문화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를 여러 가지 그림, 소품 등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공작새의 방’ 설명이 개중 백미에요. 유명 수집가 레이 랜드의 의뢰로 당대의 유명 화가 휘슬러가 직접 인테리어를 한 방으로, 둘 사이가 틀어진 뒤 지금은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원형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 후일담까지 모두 재미있었어요. 도판만 보아도 아주 근사하던데 꼭 한번 실물을 보고 싶어집니다.

또 우리에게도 친숙한 그림들이 대거 등장하여 설명을 돕는 것도 아주 좋았습니다. 르느와르의 "보트 파티에서의 오찬"이라든가 "라 그르누이에르"가 기차 시대의 개막과 엮여 소개되는 식으로요. 주말 휴양지에서의 여흥은 기차가 개통되어 파리 외곽이 유원지로 개발된 시대상과 맞물린다는 것인데, 이러한 내용을 이만큼 잘 알려주는 도판이 따로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었거든요. 교과서에 도입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당시 여성들에 대해 서술하면서 마네, 드가, 로트렉의 작품을 통해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만든 ‘인상파 여자를 그리다’ 항목도 마찬가지입니다. 작품들이 친숙해서 설명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느낌일 뿐더러, 당대의 섹스 심벌이라 불렸던 메리 로랑의 일대기나 "나나"의 모델 발테스 드 라 비뉴 등의 일화는 너무 재미있어서 말 그대로 지하철 정거장을 지나칠 정도였어요.

그 외 식당 문화 소개 부분에서는 어떻게 현대 프랑스 요리가 탄생했는지, 당시 어떤 요리가 서비스되었는지, 식문화는 어땠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으며, 백화점, 만국박람회는 그야말로 소개 정도에 그치지만 소재가 흥미로워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울러 백화점 여직원들의 가혹한 근무환경, 만국박람회의 한국관 같이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가 섞여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요.

책의 편집도 아주아주 마음에 듭니다. 근거가 되는 참고 도판이 글의 설명과 분리되지 않고 어떻게든 한 장에 구성되어 있거든요. 덕분에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도 됩니다.

프랑스 중심으로만 서술된 근대 역사라는 한계는 분명 존재할 테고, 마지막 항목인 ‘19세기의 종언 카몽도’는 드라마로서는 재미있지만, 책의 주제와는 동떨어진 내용이기는 합니다. 일부 내용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요.
그래도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 뛰어난 책임에는 분명해요. 미시사 서적이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는 걸까요? 별점은 4점입니다. 이런 책을 소장해야지, 안 그러면 무슨 책을 소장하겠습니까.

2015/12/26

클로디아의 비밀 - E.L 코닉스버그 / 햇살과 나무꾼 : 별점 5점!

클로디아의 비밀 - 10점
E. L. 코닉스버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비룡소

"비밀은 안전하면서도 한 사람을 완벽하게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로트와일러 부인의 말.

가족 안에서 자신이 대접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가출을 결심한 클로디아가 벌이는 1주일간의 모험 이야기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동화책 추천 목록"에서 보고 찜해 두었던 책으로, 모처럼 시간이 나서 읽게 되었는데 아주 즐겁고 재미있었습니다. 누가 읽어도 추천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선, 단순한 가출 이야기를 "모험물"로 끌어올린 설정과 전개의 힘이 참으로 탁월합니다. 특히나 가출해서 숨어지내는 곳이 미술관이라는 설정이 대박이에요. 미술관에서 보내는 일주일간, 빠듯한 예산 안에서 뭘 먹고 어디서 씻고 어떻게 숨어 지내는지에 대한 디테일이 아주 설득력 있고 재미나게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또 이 설정 덕에 천사 조각상이 정말 미켈란젤로가 만든 것인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조각상 바닥의 음각된 표식을 발견한 뒤, 한 번의 좌절을 거쳐 로트와일러 부인과의 승부를 펼치는 마지막까지 아주 흥미진진하거든요. 아동 문학으로서 꼭 필요한 "성장기"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고요. 클로디아가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러 학습에 참여하는 교훈적인 장면도 괜찮았습니다.

아동 모험물로서 주인공들의 매력도 확실합니다. 똑똑해서 계획성이 뛰어나며 행동력도 있는 클로디아와, 구두쇠지만 재치 있고 긍정적인 성격에 나름 승부사적인 기질이 있는 둘째 동생 제이미 콤비가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약 200페이지 정도의 적절한 분량이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죠. 한 시간 정도면 다 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예전에 읽었던 작품이더군요. 어떻게 된 게 기억나는건 목욕하던 분수대에서 동전 줍던 이야기나, 사서함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것 뿐이고, 정작 중요한 미켈란젤로 이야기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서 좀 의아했습니다. 저도 제이미 같은 구두쇠과였기에 그랬던 걸까요?

여하튼 별점은 5점!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아동 문학'으로는 최고 수준입니다. 제 딸이 어서 커서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좋겠습니다. 

덧붙여, 당연한 이야기지만 1973년, 1995년 두 번이나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1995년 영화에는 왕년의 명배우 로렌 바콜이 등장하시네요. 영화로도 보고 싶어집니다.

월간순정 노자키 군 1~6 - 츠바키 이즈미 : 별점 3점

월간순정 노자키 군 6 - 6점
츠바키 이즈미 글.그림/학산문화사(만화)

추석 때 본가에 인사드리러 갔다가 형이 강추해서 덥석 빌려온 만화입니다. 읽은지 한 분기가 지났는데, 이제서야 리뷰를 올리네요. 

4컷에 가까운 짤막한 개그가 이어지는 개그 만화입니다. 캐릭터 의존 개그와 오해·착각에 기인한 개그로 나뉘는데, 캐릭터 개그는 이런 류의 만화에서는 정석이라 할 수 있어서 특별히 이야기할 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190cm의 장신에 과묵하지만 실상은 월간 연재 순정만화가인 노자키군, 여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미남이지만 실상은 애니메이션 오타쿠에 수줍음 많은 미코시바 등, 비현실적이며 개그 만화답게 과장되게 연출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눈살 찌푸려질 정도로 억지스러운 설정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특히 노자키와 주변 친구들은 뻔하지만, 상식적인 편집자를 주요 인물로 등장시킨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조합 자체는 "아즈망가 대왕" 시절 이래로 하나도 변하지 않은, 대책 없는 어른과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어른 컴비이기는 한데 선생님이 아니라는 점이 포인트에요.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인 만화에서 어른 역할로 선생님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은 거의 처음 본 것 같기도 합니다.

평작 수준인 캐릭터 개그에 비해, 오해와 착각에서 비롯된 개그는 정말 대박입니다. 사쿠라와 노자키의 첫 만남에서 노자키가 사쿠라를 자신의 팬으로 오해하는 장면을 시작으로, 로렐라이가 유즈키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와자키를 활용한 개그라든가, 동료 만화가 미요코와 노자키의 대화를 듣고 오해하는 미요코의 대학 친구들 같은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6권까지 정말 재미있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항상 이야기하지만 "만화가가 주인공인 만화"는 정말 재미있네요. 제 평생 이 설정이 실패한 적은 없어요. "바쿠만"이나 "아오이 호노오"가 대박 나기 전부터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2015/12/25

미스터리 모텔 - 데이비드 매콜리 / 조동섭 : 별점 3점

미스터리 모텔 - 6점
데이비드 매콜리 지음, 조동섭 옮김/마루벌

북아메리카에서 홍보 우편물 발송 요금이 갑자기 내려 사람들이 홍보 우편물 홍수에 매몰되었고, 이후 공해 물질이 급작스럽게 지상을 덮쳐 지구상에서 가장 컸던 문명이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4022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애독자인 하워드 카슨은 우연히 고대국가 유사(USA)의 1985년 모텔을 원형 그대로 발견하는데...

상기 줄거리처럼 하워드 카슨의 발굴 과정과 발견한 유물에 대한 이야기를 정교한 펜화와 함께 소개하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입니다. 2000여 년 후 현재의 물건을 미래인들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재치 있는 유머와 풍자가 돋보입니다.

모텔 건물과 그곳에서 발견된 모든 물건이 '장례' 의식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예를 들자면 서랍장과 그 위에 놓인 TV는 신과 연락하는 대제단, 욕실의 욕조는 도자기 석관, 얼음통에 적힌 ICE는 장례 후 내장을 담았던 ‘내장 동봉’의 약자 ICE (Internal component enclosure)라고 하는 식이에요. 그냥 봐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변기를 성스러운 항아리, 변기 뚜껑을 성스러운 목걸이라고 해석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뒷받침하는 데이비드 매콜리의 섬세한 그림 역시 높은 가치를 지닙니다. 펜으로만 그려냈는데 디테일이 확실히 살아있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더군요. 아래와 같이 말이지요.

또 하워드 카슨이라는 이름부터 하워드 카터를 연상케 하며, 이후 미스터리 모텔 발굴에 관여했던 주요 관계자 (하워드 카슨과 해리엇 버튼 등)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는 후일담 등으로 투탕카멘 무덤 발굴에 대한 패러디 느낌도 전해줍니다. 짤막하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딱 한 가지 문제라면 어린이용 그림책을 연상케 하는 큰 판형입니다. 섬세한 펜화 때문에 판형을 줄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리라 짐작되지만, 여러모로 좀 아쉽더군요.

그래도 별점은 3점입니다. 그림만 보더라도 충분히 즐거운 책입니다. 어른용 그림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참고로, 장르를 특정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SF로 봐야겠죠?

2015/12/22

시노부 선생님, 안녕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시노부 선생님, 안녕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얼마 전 읽고 리뷰를 남겼던 "오사카 소년 탐정단"의 후속 단편집입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편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파견 교육을 떠난 시노부 선생이 여전히 여러 가지 사건에 얽히는데, 전작의 장점이었던 시끌벅적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는 여전합니다.

그런데 확실히 전작보다는 별로네요. 추리적으로 부실한 탓이 큽니다. 시노부 선생과 제자들이 사건에 얽히는 것 역시 전편보다 훨씬 작위적이며 억지스러웠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조금 얌전해진 느낌을 주는 것도 단점입니다. 악동 콤비 하라다와 뎃페이부터가 나이를 먹은 탓인지 전작만 못하거든요. 마음에 들었던 신도 형사의 연적 혼마도 별로 등장하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저같이 전작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읽을 수밖에 없겠지만, 전작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완결편으로 더 이상의 후속작은 없다는데 잘한 선택이라 생각됩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시노부 선생님은 공부 중"

니시마루 상점의 구두쇠 회장 니시마루 센베가 상점가 대항 소프트볼 시합에서 용병으로 뛴 시노부 선생을 마음에 들어 해서 초대한 날, 판매부장 요네오카 자살 사건과 맞닥뜨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구두쇠 중의 상구두쇠지만 정 또한 넘치는 니시마루 회장이 인상적이었던 소품입니다. 유명한 오사카 상인을 그대로 묘사한 느낌입니다. 사무실에 PC가 보급되던 시점, PC를 배울 것을 강요하는 사장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꼈다는 동기도 괜찮았고요. 제가 디자인과 출신인데 작업에 PC가 도입되기 직전 학번 선배님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몹시 혼란스럽습니다. 요네오카가 죽은 게 자살 시도 때문인지, 아니면 사고사인지 불분명한 탓입니다. 부자연스러운 파일의 존재와 니시마루 센베가 현장을 정리하고 자살로 위장하려 한 것을 보면 사고사 같은데, 뒤에서 또 자살 시도를 하다가 떨어졌다고 하니 뭐가 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시노부 선생님은 폭주족"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학원을 다니는 시노부 선생이 연수 중 사고를 일으킨 이쿠오의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조사에 나선다는 이야기입니다.

시노부 선생의 아침 연수를 방해하기 위한 집 앞 개똥이 단서가 된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사소한 것의 중요성이야말로 추리소설의 왕도지요!

그런데 이번 이야기 역시 내용이 영 이해가 되지 않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피해자 와카모토의 계획부터가 그러합니다. 공범자 고바야시를 죽이기 위해 이쿠오의 어머니를 이용하려 했다? 한 명만 죽여도 되는데 두 명이나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차를 들이받는 것으로 사람을 죽이려 했다는 것도 이해 불가에요. 뺑소니가 그렇게 쉬운 범죄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집 앞에 개똥이 있다고 연수를 포기한다는 것 역시 말이 안됩니다. 시노부 선생이 끝까지 연수에 참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운전에 서투르지만 용감하기는 한 시노부 선생의 질주는 코믹했지만,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줄 부분이 없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도대체 이 짧은 리뷰에 물음표만 몇 개인가요?

"시노부 선생님의 상경"

친구 결혼식으로 도쿄에 상경한 시노부 선생이 옛 제자 가족에게 닥친 유괴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으로, 오사카를 무대로 한 시리즈치고는 이례적으로 도쿄 디즈니랜드가 주 무대입니다. 

대형 사건 같지만 의외로 이혼 위기에 처한 부모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자녀들의 작전이라는 소재는 괜찮았습니다. 이야기의 주제,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적절한 수준의 소품입니다. 오랜만에 혼마가 등장하여 식지 않은 사랑을 과시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 중에서 최고였습니다.

"시노부 선생님은 입원 중"

맹장염으로 입원한 시노부 선생의 같은 방 환자인 후지노 할머니 남편이 당한 강도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시노부 선생의 옛 제자 하타나카가 주운 위조지폐가 사건과 연결되는 전개는 괜찮았습니다. 진상을 깨닫게 되는 장면, 즉 혼마가 후지노 할머니에게 받은 돈을 꺼내 보는 장면도 꽤 효과적이었고요.

그러나 너무 작위적입니다. 위조지폐범의 어설픔도 도가 지나친 느낌이에요. 설령 소설이기에 이 정도 문제는 눈 감아 준다 하더라도 딱 한 가지, 후지노 할머니가 너무나 밉살스러워서 어떻게든 벌을 받았으면 했는데 태연하게 넘어가는 건 좀, 아니 많이 불쾌했습니다. 거의 범죄에 가까운 행동(점유물 이탈 및 은닉)을 저지른 것에 대해 꾸중이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혼마는 무슨 죄라고 거금을 날린답니까? 이건 고소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할머니만 응징했어도 0.5점은 더 줬을 텐데 아쉽네요.

"시노부 선생님의 이사"

교육을 마치고 학교로 복귀하게 된 시노부 선생이 이삿짐을 꾸리는데, 옆집 가족이 연루된 살인 사건 수사차 나온 신도 형사와 함께 사건에 엮이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추리적으로는 아주 별볼일 없습니다. 애초에 경찰의 부실 수사로 사건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탓입니다. 마쓰오카 할머니에 대한 탐문 조사만으로도 안자이 요시코 가족과 그녀와의 관계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을 테고, 마쓰오카 – 요시코 – 치즈루의 관계만 알아낸다면 이 사건이 정당방위를 위장한 살인 사건이라는 걸 파악하기는 어려운 게 아니니까요. 한마디로 범인에 대한 기본적인 수사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세상에 인정이 살아 있다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은 거의 없군요. 별점은 2점입니다.

"시노부 선생님의 부활"

시노부 선생은 다시 초등학교로 복귀했는데, 새로 담임을 맡게 된 분부쿠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은 직전 담임인 야마시타 선생에 대한 그리움이 강했다. 야마시타 선생이 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뜀틀에서 시부야가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 모두 시부야를 싫어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세리자와 쓰토무는 이지메에 가깝게 아이를 괴롭히는데...

야마시타 선생의 과거 사진을 시노부 선생이 '우연히' 찾아본 것이 사건 해결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작위적인 이야기 전개의 극치입니다. 사고 직전 시부야 준이치가 목격한 아주머니의 노란 가방이라는 단서가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은 것도 문제고요. 이래서야 제대로 된 추리물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시부야와 반 아이들이 하나가 되는 마지막 장면도 완전 별로였습니다. 청춘 학창 드라마스러운 결말인데 갑작스럽고 뜬금없어서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았거든요. 시노부 선생이라면 세리자와에게 꿀밤이라도 먹여서 정신 차리게 만드는 게 더 어울렸을거에요.

신도 형사의 프로포즈에 대한 시노부 선생의 '1년만 기다려 달라'는 답변은 여운을 남기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는 그닥이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이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데 끝내야 할 때 잘 끝낸 듯 합니다. 후속작이 없다는게 별로 아쉽지 않네요.

2015/12/20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3점

수십 년 전, 80년대 초반 고민 상담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빈집이 된 지 오래인 나미야 잡화점에 3인조 빈집털이들이 숨어들었다. 그런데 잡화점에 고민 상담을 위한 편지가 들어왔다. 상담에 응하게 된 3인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현재의 나미야 잡화점이 1980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일상계 판타지 연작 단편집입니다. 모두 5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베스트셀러로 알고 있는데, 읽어보니 역시나 재미있더군요. 3인조 어설픈 빈집털이범들이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해 숨어든 잡화점에서 고민 상담글을 받은 뒤, 그 공간이 30여 년 전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첫 번째 이야기부터 눈길을 사로잡아 마지막 이야기까지 정말 숨 돌릴 틈 없이 읽어버렸습니다.

사실 특정 공간이 시공을 초월해 연결된다는 아이디어는 그동안 많이 있어 왔습니다. 편지만 시간을 넘어 전달된다는 설정도 영화 "시월애"와 똑같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5편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과 시대 배경이 거의 모두 다르지만, 나미야 잡화점 고민 상담과 아동 복지시설 "환광원"을 중심으로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진다는 독특한 구성으로 차별화됩니다.

상담이 중심인 작품답게 상담 과정의 디테일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특히 상담이 일종의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건 나쁘지 않았어요. 의뢰인이 상담 결과에 따르던, 따르지 않던 모두 나름의 행복을 찾는다는 점도 와 닿았습니다. 상담은 참고일 뿐, 답은 결국 자신이 찾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니까요.

아울러 80년대 배경의 이야기가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잔올스타즈의 음악 등 세부 묘사는 아련하면서도 추억을 불러일으켰거든요.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3인조 얼치기 범죄자들이 1장, 2장, 5장에 걸쳐 주요 상담자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얄팍한 상담글들이라 감동이나 깊이를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상담이 성공하는 것도 애초에 미래를 알고 있기에 가능했을 뿐이고요 — 일본은 모스크바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는다, 가쓰로는 사고로 죽지만 명곡을 남긴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80년대에 시작되어 90년대 초에 끝난다 등 —. 이래서야 제대로 된 상담이라고 보기 어렵지요.

이에 반해 4장에서의 나미야 할아버지의 직접 상담은 따뜻한 애정과 진지한 고민이 묻어나 확실히 비교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4장의 이야기만큼은 별점 5점을 줘도 될 만큼 마음에 들었어요. 상담에 따르지 않고 부모를 떠난 고스케가 나미야 잡화점 부활의 날에 동네를 방문한 뒤 우연히 부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게 되고, 그 뒤 감사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는 울컥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이야기를 비틀즈와 영화 "Let It Be"와 엮어 풀어내는 솜씨 또한 너무나 탁월했습니다. 70~80년대 감성에 더해진 감정을 건드리는 디테일한 묘사는 흡사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상케 하더군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새롭지만은 않은 설정을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변주하고 새롭게 풀어낸 솜씨는 탁월하며, 읽는 재미만큼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잘 팔리는 작품은 역시 이유가 있네요. 가슴 따뜻해질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이야기별 간략한 요약 및 연결고리는 아래에 설명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하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제1장 답장은 우유 상자에

얼치기 빈집털이 3인조는 잠시 숨어지내기 위해 찾아든 빈집 "나미야 잡화점"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달토끼"라는 닉네임의 의뢰인의 상담글을 받은 뒤, 나미야 잡화점이 뒤틀린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상담에 응하게 됩니다.

의뢰인의 고민은 암에 걸린 연인을 간호할 것인가, 아니면 둘의 꿈이었던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노력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어차피 일본이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것(보이콧)을 알기에 연인 옆에 있기를 강조하는 3인조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의뢰인 달토끼는 꿈을 위해 노력하고 결과를 받아들인 뒤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는 결말 이어집니다. 

이야기의 시작으로는 충분히 흥미로웠습니다. 무엇보다 3인조의 답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결심을 굳히고, 결국 모든 것을 잃었지만(올림픽 선수 선발 탈락과 연인의 죽음), 오히려 스스로 더욱 값진 것을 얻었기에 감사한다는 달토끼의 말이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제2장 한밤중에 하모니카를

3인조가 아닌 가수 지망생 가쓰로(생선 가게 예술가) 시점의 이야기. 그의 고민은 가수가 되고 싶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있는 겁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명제에 어울리는 이야기랄까요. 뭔가 세상에 남겼다면 그 자체가 의미있는 삶이었다는, 약간은 고전적 사고방식이 담긴 이야기였습니다. 본인이 뭔가를 남긴다는 자각이 있었을 것 같지 않고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이 더 클 것 같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긴 했습니다만, 뭐 이런 삶도 있는 것이겠죠.

참고로 작품 전체의 관계도로 보자면, 1장의 3인조가 환광원 출신인데 2장의 가쓰로가 작곡한 노래가 환광원 출신 유명 가수 세리가 부른 노래의 오리지널이고, 가쓰로는 환광원 화재 당시 숨을 거둡니다. 이러한 사실을 3인조는 환광원 출신이라 잘 알고 있었기에 음악을 듣기 전에는 현실적이고 신랄하게 답변하지만(배부른 소리 하지 마라!), 듣고 난 후에는 전력으로 상담에 응하지요.

제3장 시빅 자동차에서 아침까지

나미야 할아버지와 아들 다카유키의 이야기로 나미야 할아버지는 자신이 상담한 미혼모의 사고사를 접하고 낙담합니다. 그러나 죽기 직전 나미야 잡화점이 시공을 초월해서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상담한 사람들에게 감사 편지를 받는데, 그 중 미혼모가 낳은 아이의 편지를 통해 안식을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나미야 할아버지의 인격이 묻어나는 좋은 이야기. 잔잔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야기 중 가장 시공 이동을 잘 활용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품 관계도로는 여기서 나미야 할아버지가 백지 편지에 대한 상담글을 쓰는데 이 백지 편지는 5장에서 3인조가 시험삼아 넣은 편지입니다. 미혼모가 낳은 아이는 환광원 출신으로 2장에 등장하는 유명가수 세리의 친구이자 현재는 그녀의 매니저고요.

제4장 묵도는 비틀스로

비틀즈 매니아 폴 레논 고스케가 야반도주하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는 이야기.

앞서 말씀드렸듯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입니다. 오사카 만박이 열리고 비틀즈가 해체한 1970년대를 무대로 하여 비틀즈 매니아인 주인공 고스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요.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배경 묘사도 좋지만 고스케(폴 레논)의 고민에 대한 나미야 할아버지의 답글이 정말로 심금을 울립니다. 저 역시 아이 하나를 키우는 가장이기에 더욱 와 닿았던 것 같아요. '온 가족이 같은 배에 타고 있기만 하면 언젠가 함께 올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다. 아무리 현실이 답답하더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멋진 날이 되리라.' 맞아요.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는 법. 가족은 아무리 힘들더라도 한 배에 타고 계속 항해해 나가야죠.

관계도로 보자면, 고스케가 위탁된 보육시설은 당연히 환광원이며, 환광원 화재 사건때 5장의 주인공 하루미를 만나게 됩니다.

제5장 하늘 위에서 기도를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작품으로 환광원 출신의 하루미가 성공하는 내용입니다. 그녀는 3인조의 예언으로 큰 돈을 벌게 되지요.

그런데 3인조의 성장, 백지에 대한 나미야 할아버지의 답변 - 백지이기에 모든 것은 너 마음먹기에 달렸다 - 은 너무 뻔해서 좀 지루합니다.

그래도 하루미와 3인조가 결국 엮이고, 3인조가 나미야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는 대단원까지 깔끔하게 이어지는건 괜찮더군요.

관계도로는 하루미는 1장의 상담자 시즈코의 이웃사촌이자 3인조 강도행각의 피해자입니다. 또 환광원의 설립자와 나미야 할아버지가 과거의 연인이었다는 연결고리가 밝혀지며, 3장에서 쓴 나미야 할아버지의 백지 편지 답변을 3인조가 받게 됩니다.

2015/12/18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 가쿠다 미츠요 / 염혜은 : 별점 2.5점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 6점
가쿠타 미츠요 지음, 염혜은 옮김, 모가미 사치코 그림/디자인하우스

소소한 일상 속 디테일한 묘사가 마음에 들었던 단편집 "죽이러 갑니다"의 작가 가쿠타 미츠요의 에세이집입니다. 작가의 일상 속, 추억 속 요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로 작가가 어렸을 때에는 편식이 너무 심해서 못 먹는 게 많았지만, 서른 살 즈음 편식을 고치기로 결심한 후 이것저것 먹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맛에 눈뜨게 되었다는 내용이 많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못 먹다가 나이 들어서 먹게 된 음식은 누구나 있겠지만, 이 작가는 그 정도가 정말 너무 심하더라고요. 거의 대부분의 야채, 생선을 안 먹은 듯 하니까요.

요리 에세이라서 간단한 레시피들도 몇 개 등장하는데, 이 중 제가 해보고 싶은 것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사랑스러운 햇양파" – 얇게 썬 햇양파에 가다랑어포를 얹어 간장을 뿌린 간단한 안주. 저자의 친구가 만들어 준 술안주.
  2. "화이트 아스파라거스가 가져온 혁명" – 판세타(이탈리아식 베이컨)를 볶고 가볍게 데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를 파스타 냄비에 넣은 다음 파스타와 생크림을 더해서 만드는 간단한 레시피.
  3. "세계 감자 여행" – 리투아니아의 감자 팬케이크. 얇게 채 썬 감자를 어떻게 했는지 잘 간추려서 둥글게 만들어 구웠는데, 그냥 먹어도 좋고 사워크림이나 이크라를 얹어 먹어도 잘 어울림.
  4. "연근 철학" – 조금 두껍게 연근을 썬 뒤 양면에 가볍게 녹말을 묻히고 올리브 오일을 넉넉히 두른 후 천천히 튀기듯 볶는 요리. 연근이 투명해지면서 양면이 모두 약간씩 갈색으로 그을렸을 때 맛있는 소금을 뿌려 먹는다.

본인이 접한 정보와 이야기를 엮는 솜씨도 좋습니다. "죽순을 삶을 때 잡냄새를 동백나무 잎으로 없앨 수 있는데 근처에 동백나무가 없고, 있어도 남의 잎을 슬쩍할 수가 없어서 삶아놓은 죽순을 사련다."라는 이야기가 대표적이겠죠.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어떤 이야기는 공감하면서, 어떤 이야기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읽는 그런 책입니다. 한편 한편이 짤막한 덕에 쓱쓱 읽기도 쉬워 주말을 보내기에 아주 좋더군요. 요리 관련 에세이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5/12/16

책과 집 - 데이미언 톰슨 / 정주연 : 별점 2점

책과 집 - 4점
데이미언 톰슨 지음, 정주연 옮김/오브제(다산북스)

제 취미는 독서입니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가지고 있는 책도 제법 되고요. 이사를 계획 중인데 서재를 꾸미는데 관심이 많아서 읽어보게 된 책입니다.

책을 보관하는 방법에 대해서 제목 그대로 집 전반에 걸쳐 알려줍니다. 서재와 책꽂이 수준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부엌, 계단, 침실 등 집안 내 전 공간을 아우르며, 이를 책 수집가들이 자택에서 잘 구현한 사례들을 충실하게 소개해주거든요. 사진의 비중이 높아서 다 읽는데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허나 한국 실정에는 전혀 맞지 않더군요. 미국의 널찍하고 천장높은 집, 벽난로와 굴뚝 흔적이 남아있는 오래된 주택, 주인이 마음대로 내부를 시공할 수 있는 경우에 어울리는 사례들이 대부분인 탓입니다. 소개된 가구들의 가격도 만만치 않아 보이고요. 왠만한 부자가 아니라면 이 책에 나오는 것 처럼 서재를 꾸미는 건 무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현실적이지 않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이 책의 가치라면 그냥 짧은 시간이나마 눈이 좀 호강한 것 뿐입니다.

2015/12/15

금단의 팬더 - 타쿠미 츠카사 / 신유희 : 별점 2점

금단의 팬더 - 4점
타쿠미 츠카사 지음, 신유희 옮김/끌림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리사 코타는 아내 아야카의 친구 미사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미사의 결혼 상대가 '퀴진 드 듀'의 주인이기도 한 나카지마의 손자 기노시타 다카시였던 덕분에, 코타는 피로연에서 지고의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뒤, 기노시타 가문 회사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마츠노 쇼지가 살해당했고, 사장(다카시의 아버지) 요시아키도 실종되고 말았다. 경찰은 나카지마의 유산에 관련된 사건으로 생각했지만, 현경의 아오야마는 밀수와 관계가 있을 거라는 혼자만의 결론을 내리고 독자적인 수사에 착수하는데...

2008년 고노미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공모 대상 수상작입니다. 

그런데 고노미스 대상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추리적으로 별볼일 없어서 실망스럽네요. 같은 대상 수상작이었던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은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전개도 엉망입니다. 아오야마가 자신의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하는건 성당에 침입하여 조사하는게 전부입니다. 수사 과정도 짜증나는 심문과 사정 청취가 전부일 뿐 특별한 게 없고요. 딱 하나, 아야카의 옥션 등록 이야기를 복선처럼 활용한 것 하나만큼은 괜찮긴 했는데, 이 역시 너무 자주 등장해서 속이 다 들여다보였어요.

진상 역시 너무 뻔합니다. "워싱턴 조약에 위배되는 불법적인 재료를 조리한 미미극식회라는 모임이 있다", "그 어떤 재료를 가지고도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 내는 천재 요리사 이시구니", "나카지마 가문의 주변 인물들이 한 명씩 실종된다. 그것도 성별 나이 순으로..." 이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 다른 진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진상이 너무 뻔해서 독자는 모두 다 알지만 주인공들만 모르는, 기묘한 상황이 되는건 좀 웃기기까지 했습니다. 여태까지 제가 알고 있던 추리소설의 정의를 근본부터 흔들었으니까요. 독자를 어떻게 속여 넘길까를 궁리하는 게 아니라 독자에게는 전부 알려주면서 등장인물만 모르게 하다니! 완벽하게 주객전도된 느낌입니다.

아울러 음식, 맛에 대한 묘사를 빼면 다른 묘사는 진부하고 별볼일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특히나 탐정역인 현경의 아오야마 캐릭터는 정붙이기 힘든, 자기 멋대로에다가 예의는 찾아볼 수도 없는 재수 없는 인간으로 묘사되어 영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보다 압도적으로 표현되었어야 할 뱅상 신부와 갓 나카지마 역시 그냥 말 많은 악당으로만 보이고요. 미식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나카지마에 비해 그냥 "젊어지기 위해" 인육을 먹으려 한다는 뱅상 신부의 동기도 전혀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직업 의식에 충실한 이시구니만 제법 그럴 듯했는데, 여러모로 포스는 부족했어요.

그래도 '미식 미스터리'라는 별칭에 걸맞게 음식과 맛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발군이기는 합니다. 코타가 결혼식에서 처음으로 퀴진 드 듀의 셰프 이시구니의 코스 요리를 맛볼 때의 묘사, 그리고 코타의 가게 "비스트로 코타"에 갓 나카지마와 이시구니가 방문했을 때 묘사 이렇게 두 번이 개중에서도 백미입니다. 정말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탁월합니다.
심지어 바로 앞서 말씀드렸던, 인육으로 만드는 실제 요리에 대한 자세한 묘사마저도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한 마디로 "특별 요리"를 코스테인 시점이 아니라 스비로스 시점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이러한 시도는 비교적 참신했습니다. 묘사 역시 여태까지 제가 보아왔던 다른 동일 설정의 작품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고요.

또 요리를 시험해 본 이시구니의 결론 - 인육은 냄새가 강하다. 숙성시키면 그 냄새가 더 심해진다. 가능한 한 신선하고 어린 고기를 사용하는 게 제일이다. 특히 남자 고기는 냄새가 나고 딱딱하다. 여자 고기 쪽이 질이 좋고 냄새도 적고 부드럽다. - 덕분에 기노시타 요시아키 - 나카지마 유리 - 기노시타 미사 - 시바야마 아야카로 이루어지는 유괴의 연계가 설득력을 갖추게 된다는 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 물론 인육이 아니라 모든 고기에 다 해당되는 이야기이긴 하죠? '애저찜'이라는 요리도 있으니)
요리사 코타가 요리사로서의 호기심과 인육이라는 재료의 매력에 굴복하여 페이스트 (혹은 퐁)에 스푼을 꽂는다는 마지막 묘사도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어떻게 보면 요리사이기에 쓸 수 있었던 결말이었다 생각되네요.

마지막으로 주 무대가 고베인데 주요 등장인물 몇 명이 제대로 된 사투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듭니다. "오사카 소년 탐정단" 리뷰에서 사투리를 사용한 번역이 없어서 아쉽다고 적었었는데 역시나, 사투리로 번역하는 게 훨씬 좋군요. 누가 토박이이고, 누가 좀 재수 없는지 등 캐릭터마저도 살아나니까요. 고베에 대한 상세한 풍경 묘사는 약간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들게 해주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뻔한 설정을 실제 요리사인 작가가 자신의 전문 분야를 살려 차별화한 점 하나만큼은 점수를 주지만, 추리적으로는 너무나 기대 이하라 감점합니다.

덧붙이자면, 제목은 영 이해가 안 되는군요. '팬더'가 대나무를 먹게 된 것은 타의에 의해서가 강하고 원래 육식을 좋아하는 동물이었다라는 이야기를 가지고 금기되는 음식을 먹는 행위를 설명하려 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팬더가 팬더를 먹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은 순전한 작가의 창작일 뿐이니까요.

2015/12/13

나는 예술가로 살기로 했다 - 에릭 메이젤 / 안종설 : 별점 2점

나는 예술가로 살기로 했다 - 4점
에릭 메이젤 지음, 안종설 옮김/심플라이프

'창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고민 해결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가진 책입니다. 창작하는 데 문제가 생긴 여러 사람들 - 전업 작가나 화가도 있고 전업을 꿈꾸는 직장인도 있는데 - 이 저자에게 요청했던 고민 상담 내용과 저자가 해 준 코칭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별다른 정보 없이 창작하며 산다는 것에 대해 알려준다기에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코칭 내용이 정말 별거 없어서 실망했습니다. 창작 비법이나 발상력에 대한 비결도 없고요. 아침에 아주 잠깐이라도 창작하는 데 할애해라, 실현 가능하고 최대한 단순하게 목표를 정해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표를 작성해라, 현재 생긴 문제에서 네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만 적어보아라, 정확하게 문제점이 무엇인지 적어보아라 등, 그냥 집에서 부모님이 해 줄 법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창작하다가 벽에 부딪히게 된다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읽어볼 만 하기는 합니다. 짤막하다는 것도 장점이고요. 그러나 창작에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은 아닙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무언가 창작하려면 일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기에 별점을 조금 더 얹습니다.

2015/12/11

불멸의 탐정, 셜록 홈즈 - 김재성 : 별점 3점

불멸의 탐정, 셜록 홈즈 - 6점
김재성 지음/살림

치과의사이자 추리 소설가, 아동 문학가인 김재성 씨가 쓴 셜록 홈즈 가이드북. 살림 지식 총서의 489번째 책입니다.

살림 지식 총서는 특정 주제를 설명하는 목적에는 충실하지만, 100페이지를 조금 넘는 제한된 분량 탓에 살짝 건드리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독자가 호기심을 느끼면 다른 전문 도서를 찾아보게 만드는, 일종의 진입문 역할이라서 별다른 불만은 없습니다. 가격을 생각하면 분량도 적절하고요. 그래도 자주 구입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정말 괜찮습니다. 짧은 분량임에도 셜록 홈즈에 대해 아주 잘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셜록 홈즈의 기원과 주요 캐릭터들, 주요 장단편 이야기와 저자 코난 도일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물론이고, 셜록 홈즈에 관련된 패스티쉬와 라이벌 탐정까지 소개하는 풍성한 구성을 자랑합니다. 셜록 홈즈에 대해 알기를 원하는 초심자들을 위한 최고의 안내서라 생각됩니다.

저와 같은 기존 셜록 홈즈 애독자들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고, 인용된 작품도 거의 다 읽어본 것이라 새로운 정보는 없다는 점은 단점입니다. 또한 조금 더 체계적으로 목차를 분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고요. 그러나 분량과 가격을 고려하면 비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5/12/10

심야식당 : 부엌 이야기 - 아베 야로 / 강동욱 : 별점 2.5점

심야식당 : 부엌 이야기 - 4점 아베 야로 지음, 강동욱 옮김/미우(대원씨아이)

만화 "심야식당"에 등장했던 음식 중 스무 가지에 대해 호리이 켄이치로가 쓴 에세이와 원작에 등장한 일러스트, 그리고 마지막에 관련된 레시피가 짤막하게 소개되는 구성의 에세이집입니다. 만화의 인기를 등에 업은 기획물로 추측되는데, 비슷한 기획물인 "심야식당 단츄"와 비교하자면, 음식에 대한 전문성은 훨씬 떨어지는 대신 에세이 비중과 그에 대한 재미는 더 높습니다. 다양한 경험과 박학한 지식을 쉽고 재미나게 풀어쓰는 글 솜씨가 빼어난 덕분입니다. 가다랑어포 이야기에 재미나면서도 그럴 법 하구나 싶은 실제 만담 - 가다랑어포 국물이 아니라 그것을 깎아낸 조각이 더 귀중하다 생각한 사람의 이야기 - 을 인용하고, 일본에 달걀 프라이가 언제 도입되었는지에 대해 기원을 탐구하고, 나폴리탄의 축 퍼진 면발 일색이었던 일본 사회에 영화감독 이타미 주조에 의해서 '알덴테' 스파게티가 널리 퍼진 사연을 알려주고, 어육 소시지의 사회적 시선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식으로요.

"음식" 이야기 외에도 저자 자신의 경험이 바탕이 된 에세이도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죽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학창 시절 육상부 장대 높이뛰기 선수로 뛸 때 장대는 대나무 가게에서 산 3m짜리 대나무였다! 라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네요.

또 저자가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소타츠와 참 비슷하구나 싶은 것도 재미 요소예요. 음식에 대한 확고한 생각과 도전 정신이 비슷하거든요. 제일 좋은 김을 한 번 먹어보자고 1만 5천 엔을 주고 다섯 종류의 김을 사와서 먹어본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참고로, 제일 비싼 김(1만 5백 엔짜리)은 누가 먹어도 가장 맛있었다니, 음식은 비싼 게 다 맛있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재료는 비싼 게 제 값을 하는구나 싶습니다.

그 외에도 레시피도 "심야식당" 그대로가 아니라 나름 어레인지된 독특한 것들이 몇 개 실려 있으며, "심야식당"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추천 요리와 레시피가 수록된 것도 마음에 드네요. 특히 추천 요리는 기획물 의도에 충실하면서도 충분히 집에서 해 먹음직한 것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대표적인건 다바타 토모코(엔카 가수 치도리 미유키 역 – 고양이 맘마편)가 추천하는 "타코라이스"입니다.

다만 단점이라면 기획물임에도 정작 "심야식당" 본편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점입니다. 분량에 비하면 가격도 조금 센 편이고요. 그래도 짤막하니 부담도 없고, 내용도 요리를 좋아한다면 한 번 읽어봐도 괜찮은 에세이임은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5/12/09

오사카 소년 탐정단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사카 오지 초등학교 교사인 25세의 여자 선생 시노부가 주인공인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연작 단편집입니다.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의외로 즐겁게 읽었습니다. 오사카라는 지역에서 연상되는 시끌벅적하면서도 요란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거든요. 몰랐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출생지가 오사카더군요. 그래서 현장감이 더 뛰어났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선명한 캐릭터 역시 볼거리입니다. 초등학교 선생으로 열혈 왈가닥에 뛰어난 추리력을 갖춘 시노부 선생이 생동감 있으면서도 싱그럽고, 그녀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연적 관계인 말단 형사 신도와 엘리트 회사원 혼마, 그리고 시노부 선생의 악동 제자들 모두 아주 유쾌하면서도 즐겁게 묘사된 덕분입니다.

참고로 시노부 선생과 신도 형사, 혼마의 관계는 "명탐정 코난"에서 사토 형사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시라토리와 다카키의 다툼, 그리고 나중에 시라토리와 커플이 되는 고바야시 선생을 합쳐놓은 느낌입니다. 아아... 저같은 사토–다카키 커플 팬에게는 완전 취향 직격이었어요.

이렇게 캐릭터가 돋보이면 추리적으로는 시원찮은 작품들이 많은데, 이 책은 추리소설 애호가를 만족시킬 만큼 적절한 트릭과 논리가 이야기와 잘 맞물려 있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시노부 선생과 학생들의 활약도 상식 선에서 딱 적당한 수준으로 그려지고요. 다소 작위적인 부분도 없진 않지만 재미 면에서는 충분히 납득할 만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오사카가 무대인데도 그런 지방색을 번역에서 잘 살리지 못한 점입니다. 내용 중에 혼마가 도쿄 말을 써서 재수 없다는 식의 묘사가 등장하는 등 말투가 꽤 중요한 요소였을 것 같은데, 최소한 사투리로 번역하는 노력 정도는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또한 이야기나 분위기를 볼 때 배경이 90년대 초반 같은데(게임을 CD로 실행하는 등) 지금 시점보다는 60년대, 아니면 최소한 80년대 배경으로 설정하는 편이 훨씬 더 잘 어울렸을 것 같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그만큼 아날로그하고 복고풍의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워낙 뛰어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평소의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과는 사뭇 다르지만 정말 여러모로 재능이 많은 작가라는 걸 다시금 느꼈어요.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 모두에게 추천드립니다. 마지막 이야기에서 미도리 선생이 파견 유학을 떠난 뒤 2년 후에 돌아오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후속편도 꼭 읽어보고 싶네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가득하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시노부 선생님의 추리"

시노부 선생의 제자 도모히로의 아버지 후미오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시노부 선생이 사건에 얽히는 과정이 아주 자연스러워서 설득력이 높아요. 아버지가 살해당한 제자가 걱정되지 않는 담임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도모히로를 믿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시노부 선생을 그린 결말 역시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잘 어울렸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전개가 합리적이라 마음에 드네요. 특히나 제자가 쓴 작문과 우연히 마주친 다코야키 장수의 말 - "그런 되지도 않는 소리 마쇼. 저렇게 좁은 데다 어떻게 차를 넣으라고. 집어 넣을 수야 있겠지만 운전석에서 나올 수가 없을 텐데."- 에서 도모히로가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걸 간파한다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딱 맞는 추리가 돋보였습니다. 후미오가 경트럭을 빌린 뒤 유키에를 죽이려 했다는 진상도 반전 매력이 있었으며 다코야키를 트릭의 주요 요소로 활용하는 것도 오사카스러워서 좋았고요.

허나 죽었다 하더라도 후미오의 빚이 없어지지야 않을 텐데 이 모자의 앞길은 지옥뿐이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그래서 썩 개운치는 않네요. 딱 맞는 순간에 딱 맞는 재료(작문, 노리오가 들고 있던 후미오의 수첩, 다코야키 행상)가 연결되는 구조는 좀 작위적이었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한 수작입니다. 작품의 시작을 알리기에는 충분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시노부 선생님과 집 없는 아이"

시노부 선생님의 제자 하라다와 뎃페이가 게임 CD를 도난당한 것과 옛 제자 가지노 마치코의 아버지가 용의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사건에 자연스럽게 엮이는 과정은 첫 번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괜찮았습니다.

허나 기절했다고 자기가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도 모른 채 자백을 할까요? 마치코와 시노부의 대화를 통해 설명하려 하긴 하나 많이 약했어요.

또 아라카와 도시오의 자살 동기가 선명하지 않은 것도 별로이며, 살해로 위장하려 한 치에코의 공작도 딱히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시노부 선생님의 맞선"

시노부가 맞선을 보는 것에서부터 사건이 시작됩니다. 신도의 질투가 폭발하고, 신도를 도와주려는(혹은 놀려먹으려는) 하라다와 뎃페이 등 악동들의 활약이 어우러지는데, 이런 부분은 과거 우리네 유머 소설, 그중에서도 오영민의 "007 선생" 같은 작품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추리물로는 수록작 중 가장 처지네요. 진상에 다다르게 되는 핵심 단서인 모토야마 사장이 했다는 말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꼭 비가 오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말이니까요. 특이하다는 오하라 유리코의 담배 "플레이어"를 가지고 한 연극도 지나치게 작위적일 뿐더러, 경찰이 이렇게 수사해도 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혼마가 너무나도 착한 사람이라 하청업자 도무라를 지켜준다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살인 사건인데 누구를 지켜준단 말입니까.

이중 횡령이라는 동기 하나만큼은 신선하고 그럴듯했으나, 이러한 단점들 때문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시노부 선생님의 크리스마스"

친구들과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앞두고 시체로 발견된 다카노 치카코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

사건 직후 근처에서 목격된 UFO와 사건을 엮는 발상이 재치 있더군요. 그리고 시노부 선생이 친구들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을 보고 "치카코가 정말 좋아한 것은 마쓰모토였다!"라는 것을 알아내는 장면도 괜찮았어요.

허나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연적이 되어버린 혼마, 신도의 티격태격과 악동들의 활약입니다. 전편에 이어 깨알 같은 재미를 전해 주거든요.

문제라면 첫 번째는 풍선을 이용한 흉기 은닉이 작품에서처럼 과연 그렇게 잘 되었을지 의문이라는 점입니다. 뭐 이건 운과 우연에 의지하여 어떻게 넘어간다 치더라도 두 번째 문제, 즉 손목에 주저흔이 없는 이유가 결국 설명되지 않는 건 조금 아쉽네요. 작중 경찰이 자살보다 타살 쪽으로 생각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한데 너무 대충 넘긴 것 같아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노부 선생님의 은혜"

여공 기요코 살인 사건과 뎃페이 윗층에 사는 나나의 엄마 아사쿠라 마치코가 이불을 털다가 추락한 사건이 엮이는 내용으로, 현실적인 트릭 — 이불을 아래층에서 당겨서 떨어지게 만들었다는 트릭 — 이 감탄사를 자아냅니다.

그러나 범인 요코다의 행동은 억지스럽습니다. 자신이 용의자도 아닌 상황에서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를 이유는 없죠. 경찰이 기요코의 사진을 가지고 미도리야마 하이츠에서 탐문 수사를 시도했다는 묘사 정도는 등장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 습격은 정말이지 무리수였고요. 나름 요코다가 소심하다는 식으로 설득하려 하지만 와닿지는 않더군요.

그래도 괜찮은 트릭에 더해 악동들과 선생님의 인연이 정리되는 졸업식 이야기는 꽤나 짙은 여운을 남기며, 지극히 경찰스러운 신도의 프로포즈도 인상적이었어요.

해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 추리적으로 부족할 수는 있지만 읽는 재미 하나로 다른 단점들 전부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유쾌한 작품이었습니다. 영상화되어도 아주 좋을 것 같네요.

2015/12/08

또다시 붉은 악몽 - 노리즈키 린타로 / 민경욱 : 별점 1.5점

또다시 붉은 악몽 - 4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포레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리즈키 린타로 시리즈 장편입니다. "요리코를 위해"에서 니시무라 유지의 죽음을 방조한 후, 탐정이라는 업무에 대한 깊은 고민에 휩싸이게 된 노리즈키 린타로가 아이돌 스타 하타나카 유리나와 나를 도와주면서 스스로도 다시 일어선다는 내용이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제가 읽은 노리즈키 시리즈 중 최악입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추리물로서의 완성도가 별볼일 없는데다가, 엘러리 퀸의 작품으로 철학을 하는 가당찮은 전개까지 보여주는 탓에 점수를 줄래야 줄 수가 없네요. 추리 소설로서의 본질을 잊고, 퀸에 미친 작가가 어설프게 신성화 작업을 한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후기에서 작가 스스로가 1992년 작품 집필 당시에는 퀸에 미쳐 있었다, 일종의 인격 장애였다라고까지 이야기할 정도니 오죽하겠습니까.

신성화 작업이 중심이라 이야기도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노리즈키가 요리코 사건으로 슬럼프에 빠졌다는 설정부터 공감하기 힘들어요. "요리코를 위해"에서 노리즈키가 니시무라의 자살을 도왔고(방조했고), 설령 그것이 니시무라 우미에의 안배였다 하더라도 니시무라 유지는 죽어도 싼 놈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자살을 도운건 자비로운 행동이었습니다. 어차피 우미에가 흑막이라는 이야기는 철저히 사족이었고요.
또 나카야마가 제수씨와 불륜을 저질러 아이까지 낳게 만든 것 역시 엄청난 잘못으로 죽어도 싼 범죄라 생각되는데, 왜 나카야마와 미치오가 피해자인 것처럼 그려지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유리나가 살인자의 딸이라는 원죄의식을 벗어버린다 하더라도, 엄마의 불륜으로 인한 부적절한 태생이며 그 불륜으로 두 명이나 죽었다는 또 다른 원죄는 벗어날 길이 없잖아요?
이러한 문제점 투성이인 본편 이야기보다는 차라리 모리야마 감독이 유리나를 주연으로 만드려는 영화의 원작인 요시모토 바나나의 "투 오브 어스"에 대한 소개가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추리적으로도 정말 별로입니다. 가짜 칼로 찔렀는데, 그걸 진짜 칼로 찔렀다고 착각했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요. 감촉으로 충분히 알 수 있을 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쓰러진 다음에 피해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후 모리야마 감독의 부인이자 유리나의 친어머니 나카야마 미치오가 사건에 급작스럽게 개입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작위적일 뿐 아니라,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 미야마에가 계획에 실패한 오스기를 만남 → 모리야마 부인이 가짜 칼을 빼앗아 오스기를 찌르고 사라짐 → 멀쩡히 일어난 오스기를 미야마에가 다시 칼로 찔러 살해 — 모두 운과 우연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서 정교함을 느끼기도 어렵습니다.

그나마 오스기 슌이치가 입었던 흰색 터틀넥의 등 쪽에 피가 묻은 이유, 오스기의 계획을 간파한 뒤 방송국 의무실 담당자가 연루되어 있으리라고 추리하는 장면 정도만 괜찮았을 뿐입니다. 여기서 미야마에로 끈이 이어지기도 하고요. 흰색 터틀넥 트릭의 경우, 상의 앞을 잠그는 건 별로 수상할 것 같지 않다는 문제가 있긴 합니다만 이 망작에서 이 정도면 그나마 건질 만한 부분이에요.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1점을 줘도 될 정도지만, 중간에 나오는 80년대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는 일본 연예계와 아이돌에 대해 설명해주는 부분, 그리고 아주 약간 건질 만한 추리적 장치 때문에 0.5점을 더 얹습니다. 노리즈키 린타로 시리즈 팬이시라도 피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후기에서 '미스터리는 작가의 말 그대로 보다 건전하고 순수하고 명랑하며 철저히 오락이어야 한다'라고 반성의 글을 남겼던데,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렸으니 다행입니다.

알라딘 독자 선정 2015 올해의 장르소설 Top 10

알라딘에서 올해의 장르소설을 뽑는 투표 이벤트를 시작했네요.

이벤트는 여기서

특이한 점은 모든 회원 대상이 아니라 장르 소설을 실제로 구매하였거나 리뷰를 작성한 회원들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한다는 점입니다. 구매 권수와 리뷰 작성 건수에 따라 최대 30표까지 차등 지급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좋아 보이네요. 정말 장르소설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대상으로 한 투표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리뷰 작성이 많아서 최대인 30표를 받았는데 거의 대부분을 "소름""특별요리"에 투표했습니다. 후보작 100권 중 읽은 게 14권뿐인데, 그중 이 두 작품만 모두 별점 4점으로 압도적으로 좋았기 때문이죠. 참고로 다른 12권은 별점 2.5점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허나 투표 현황을 보니 두 작품 모두 20위권 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군요. 추이는 지켜봐야겠지만, 이래서는 좋은 순위는 힘들겠어요. 참 좋은 작품들인데, 역시나 시대를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그래도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 있으시다면 꼭 한번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좋은 작품이니까요.

2015/12/06

알라딘, 2015 정산

알라딘. 2015 당신의 책

아직 한 해가 다 가려면 제법 남았지만 체크해 봅니다. 알라딘 이용자라면 재미삼아 한 번 해 보시길.

사안은 월륜을 향해 날아간다 - 후지타 카즈히로 : 별점 3.5점

후지타 카즈히로의 한 권짜리 단편입니다. 자주 찾아뵙는 각시수련님 블로그에서 "단편 만화 중 재미있는 만화 스레"라는 글을 통해 눈여겨보았다가 읽게 되었네요. 

보는 사람 모두를 죽게 만드는 올빼미 "미네르바"를 잡기 위해 분투하는 미군 2명과 일본인 사냥꾼 우헤이, 무녀 린 4인조의 활약이 펼쳐집니다. 4인조의 핵은 사람의 살기에 반응하여 모든 공격을 무위로 만드는 미네르바에 대항해 "살기 없는" 총알을 쏘는 우헤이지만, 손자처럼 우헤이를 도와주는 "사냥개" 역할의 마이크, 복잡한 과거를 살려 전투기 조종으로 마지막 일기토를 돕는 케빈, 순간이지만 미네르바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무녀 린의 활약도 좋습니다. 헌터 중심의 원거리 딜러들로만 구성된 파티라는 점도 특이했고요.

이야기 구성은 전형적인 "후지타 카즈히로" 스타일입니다. 강대한 적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의 뜨거운 활약이라는 점에서요. 그런데 미네르바의 막강함 묘사가 인상적입니다. 사악함과 강력함 모두 후지타 카즈히로 작품 속 악역 중 최고 수준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냥 "새"라는 점, 아무 생각 없이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는 설정이라 더욱 무서웠습니다. 그야말로 "사악한 미물"인 셈이죠.
이에 대항하는 고독한 카리스마 미노년 우헤이 역시 뒤지지 않는 멋진 매력을 선보입니다. 마지막에 우헤이가 가면을 벗는 장면에서의 간지는 정말이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멋졌어요.

그런데 딱 한 가지, 미네르바 관련 설정 하나가 약간 옥에 티처럼 느껴졌습니다. "미네르바를 본 모든 사람이 죽는다"인지, "미네르바가 본 모든 사람이 죽는다"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케빈이 쌍안경으로 미네르바를 확인하는 장면을 보면 전자 같지는 않고, 후자라고 보기에도 무적에 가까운 설정이 되어버리며 다른 사람들이 죽지 않는 점과도 맞지 않습니다. 또 우헤이가 장님이라는 설정도 의미가 없어지게 되고요.

이러한 설정상의 구멍이 있긴 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뜨거운 전개, 깔끔한 결말까지 완벽하게 어우러진 작품입니다. 해피엔딩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후지타 카즈히로의 팬은 물론이고, 그를 잘 모르는 분이라도 충분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15/12/04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3점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제목과 동일한 표제작을 포함하여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제목처럼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을 파악하여 범행을 증명하는 전개를 보이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단편집이라 그런지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에서처럼(주로 초기작) 억지스러운 동기나 인간관계가 등장하지 않고, 트릭과 추리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아울러 가가 "형사"에 어울리는, 그야말로 끈질긴 수사가 추리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참고삼아 해당 수사 내역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봅니다.

  • 첫번째 사건: 화분을 구입한 날짜에 대한 수사
  • 두번째 사건: 피해자가 입고 있던 옷에 대한 목격 증언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을 알아냄, 담배를 피우지 않는 피해자 옷에 진하게 밴 담배 냄새에 대한 탐문 조사
  • 세번째 사건: 친칠라 고양이에 대한 증언, 피해자가 먹은 청어메밀 판매 장소 탐문을 통한 취식 시간 확인, 용의자의 단골 미용실에 대한 조사
  • 네번째 사건: 나오코 집 근처 가게들을 대상으로 한 탐문 조사
  • * 다섯번째 사건은 친구의 가정사에 대한 내밀한 추리 중심이라 경찰 수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 핵심 사건, 트릭 하나에 그치지 않고 나름 반전 요소들도 들어가 작품들의 복잡도와 재미를 더해줍니다. 두번째 사건에서 유타의 사체를 제한된 시간과 장소 안에서 들키지 않고 은닉하는 트릭, 네번째 사건에서 숨겨놓은 사체의 정체가 무엇인지?같은 요소가 대표적입니다.

가가 형사의 비중보다는 주인공, 화자 역할의 범인 비중이 더 크다는 점은 팬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은 됩니다만(가가라는 캐릭터에 매료된 팬이라면 당연히 불호겠죠) 이 정도면 아주 괜찮은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가 읽은 가가 형사 시리즈 중에서는 최고로 꼽습니다.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유게 발레단의 발레리나 하야카와 히로코의 자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발레단 사무국장 데라니시 미치요가 살해했다는게 진상이고요. 미치요의 거짓말은 히로코가 이사할 때 화분을 만졌다는 것입니다. 화분은 사고 당일에 구입한 것으로 이사할 때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미치요의 범행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화분은 히로코를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할 수 있었던 트릭의 도구이기도 하고요.

발레단과 발레 공연, 연습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뒷받침된 묘사나, 단순 협박 (안무가가 미치요의 남편 데라니시 도모야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난이도 높은 무대를 삭제하고 마지막 공연을 한 히로코의 자존심, 즉 히로코의 요구에 응해 15년 전 무대가 가짜였다는 것을 인정한 것을 감추기 위한 동기는 "잠자는 숲"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발레" 그 자체를 트릭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더 뛰어나고요.

아울러 표제작이면서도 이 단편집의 주제이기도 한 "범인의 거짓말"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거짓말을 감추려면 좀 더 큰 거짓말을 하게 되지요(가가)"라는 말이 대표적이에요.

그런데 가가가 거짓말을 유도한 방법은 유치하고, 단지 말실수 한 것뿐인데 뭐 그리 큰 꼬투리가 될까 싶기는 했습니다. 증거는 결국 아무것도 없고, 버티면 빠져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이렇게 하면 단편으로 성립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문제라고 지적하기는 어렵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발레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바탕이 된 적절한 트릭과 합리적인 동기가 어우러진 수작입니다.

"차가운 작열"

주부 다누마 미에코가 교살되고, 돌이 갓 지난 아들 유타가 실종된 사건의 진상은?

진상은 남편 요우지의 범행으로, 동기는 아내 미에코가 빠찡코를 하다가 차에 둔 아이를 찜쪄 죽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동기는 "너버스 브레이크다운"에서도 등장했던 것인데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피해자가 죽기 전에 입었던 빨간 티셔츠가 세탁기 안에 있던 겁니다. 요우지는 땀을 많이 흘려서였다고 말하지만, 빨간 티셔츠를 다른 빨래와 섞어서 빨아도 되는지? 와 같은 사소한 점에서 가가가 수상함을 느끼게 되는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 집안일에 관심이 없는데 유타의 옷차림을 기억하는 것 역시 괜찮은 착안점이었고요.

무엇보다도 다누마 요우지의 증언 중 차의 에어컨이 고장났다는 것을 앞의 거짓말과 엮고 — 차의 에어컨이 고장났는데 그것 때문에 땀을 많이 흘려 옷을 갈아입었다는 해명 — 그것이 진상에 이르는 전개 -  즉 에어컨이 고장나 아기가 차 안에서 열사했다 -에는 정말 탄복했습니다. 아이 사체의 부취를 막기 위해 수지로 밀봉했다는 곁다리 트릭도 돋보였고요.

하지만 티셔츠에 담배 냄새가 배었는데, 집에 재떨이도 없고 부부는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상함을 느꼈다고 하는데, 이 정보가 독자에게는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서 공정함을 느끼기 힘들었던건 조금 아쉽습니다. 이 점 때문에 약간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읽을 가치는 충분한 좋은 작품입니다.

"제2지망"

이혼녀 미치코가 교제하던 남자 모리 슈스케가 집에서 교살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의 진상은?

한마디로, 이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악입니다.

거짓말은 미치코가 댄스 교습을 마치고 샤워를 하지 않았다는 말로, 머리칼의 샴푸향을 가가가 눈치채서 그녀의 알리바이가 밝혀지게 되죠. 그런데 두 번째 사건과 마찬가지로 샴푸향에 대한 정보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고, 동기 설명도 부족하다는 단점이 너무 큽니다.

남자 목을 여자가 조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포장지 20미터 정도를 이용하여 창밖으로 체중을 걸고 뛰어내렸다는 트릭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별로였습니다. 어차피 밝혀져도 상관없는 것이었다면(범행 은닉은 미치코의 의도였고 리사는 아무 생각도 없었으니) 굳이 이런 수고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칼로 찌르거나 불을 지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모호한 동기, 불합리한 범행, 별볼일 없는 트릭 모두가 갖추어진 망작입니다.

"어그러진 계산"

사카가미 나오코의 남편은 얼마 전 역 앞에서 트럭에 치여 즉사했다. 그 와중에 불륜남 나카세 유키노부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가가와 만나는데...

나카세와 나오코의 과거, 그리고 범행 모의가 현재 시점에서의 수사와 서서히 교차되어 전개되며 결과적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만나 진상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추리적으로는 별로에요. 거짓말은 천장에서 흐르는 물에 대한 것이지만, 이건 가가가 사기친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래도 집에 숨겨놓은 사체가 유키노부의 것이었다는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가가의 수사를 바탕으로 한 추리 — 냉동고에 대한 증언 → 약국 탐문을 통한 보냉제 구입 확인 → 편의점 탐문을 통해 매일 얼음을 구입한 것을 확인하고, 시체가 냉동되어 있다! 는 구성 — 은 합리적이고 설득력도 높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외적인 매력이 더 괜찮았던 작품이에요.

"친구의 조언"

가가의 친구 하기와라가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냈다. 가가는 그의 아내 미네코가 드링크제에 약을 탔다는 것을 추리해내는데...

단편집 다른 수록작들과는 다르게 가가의 일방적인 추리와 주장이 펼쳐지는 작품으로 일종의 가가 추리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추리하는 내용 대부분이 타당하고 설득력이 높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하기와라가 출발 전 집에서 마신 음료를 따로 꺼낸 컵이라는 사소한 단서로 밝혀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아들 다이치가 그린 파란 물고기 그림을 바탕으로 동기와 범행을 추리해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고, 밀봉된 비타민제 안에 수면제를 넣는 트릭도 현실적이면서도 신선했습니다.

다만 미네코가 아트플라워 교실 강사 구즈하라 루미코와 레즈비언 관계였다는 설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습니다. 차라리 남자였다면 마지막 장면의 감정이 더 강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단점은 사소한 수준이고, 추리적으로 워낙 뛰어나서 별점은 3.5점. 이 단편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국내 출간된 가가 형사 시리즈는 현 시점에서 다 읽은 만큼 개인적으로 순위표를 작성해 봅니다.

  1.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2. "악의"
  3. "신참자"
  4. "붉은 손가락"
  5. "내가 그를 죽였다"
  6.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7. "졸업 : 설월화 살인 게임"
  8. "잠자는 숲"

2015/12/02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 김홍민 : 별점 2.5점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 4점
김홍민 지음/어크로스

필명인 마포 김사장으로 유명한 출판사 북스피어 사장 김홍민 씨가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한 글과 본인 블로그에 올린 글을 모아 출간한 책입니다. 

저는 마포 김사장 뉴스레터는 물론, 블로그도 RSS로 구독하고 있는 독자입니다. 때문에 그간의 재기발랄한 글들을 책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되어서 아주 기뻤습니다. 다 재미있지만 그 중에서도 제약적인 예산 하에서 지혜를 짜내 자신이 출간한 책을 홍보하려는 노력과 제목이기도 한 그의 철학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가 더해진 좌충우돌 에피소드들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1부가 그러한 이야기 중심인데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와 손톱"의 봉인 페이지에 대한 이야기
  2. 뒷날개를 활용한 등장인물 소개 (이건 정말 필요한 책에는 아주 최고일 듯 싶어요)
  3. 과학 소설 전문 출판사 '불새' 관련 기가 막히는 이야기: 공무원이었던 어느 남자가 로버트 하인라인의 "은하를 넘어서"를 읽고 출판사를 차린 뒤 과학소설을 내놓는다. 일곱 권의 책을 내고 문을 닫는다. 많은 이의 성원으로 재고를 처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수익으로 불새 대표가 뭘 했느냐. 이런 빌어먹을, 다시 책을 펴내기 시작했다. (이 부분만큼은 원 글의 감동을 살리고자 거의 그대로 인용합니다)

또 작가, 출판인을 꿈꾸고 있는지라 여러모로 참고가 되는, 실전에 기반한 에피소드들인 2장의 이야기들도 좋았습니다. 다짜고짜 투고는 옳지 않다(출판사 절차를 따를 것), 공모전에 대한 팁 — 장면 전환에 전화를 이용하지 말라, 진부한 비유는 피하라, 평범한 보통 명사는 제목에 쓰지 말라, 불필요한 묘사로 시작하지 마라, 뻔한 기관 국정원 등을 주요 소재로 삼지 마라, 영화처럼 서술하지 마라(주인공의 시선과 행동만을 쫓아 전개했을 때의 문제), 짧은 장을 반복해서 만들지 마라 등 -, 그리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왜 4의 배수인지와 판권 페이지 관련 이야기 등은 재미도 있고 유익했으니까요.

허나 몇 가지 의견에는 동의하기 힘들긴 했어요. 미야베 미유키"에도물" 출간 논란이 대표적이죠. 일단, 북스피어가 키워놓은 시장을 날로 먹으려고 한 비채는 엄연히 상도의를 어긴 것이며, 도덕적인 면에서 비난받아야 함은 마땅하다는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선인세는 엄연히 작가에게 돌아가는 돈입니다. 작가 입장에서 보면 경쟁으로 내 작품값, 내 몸값이 올라가고, 출판사에서 그만큼 많이 팔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건 지극히 타당하면서도 고마운 일이에요. 즉, 좋은 작품을 썼고, 그것이 좋은 가격을 인정받고, 높은 판매를 보장받았다. 이게 전부입니다. 선인세 경쟁으로 한국 출판사가 글로벌 호구가 되었다! 라고 주장하는 건 말이 안됩니다. 마포 김사장 말대로 적정 금액이 암묵적으로 있다면 그건 담합이죠. 왜 유통사가 콘텐츠 창작자의 창작물 가격을 마음대로 정한답니까? 선인세가 높아서 독자가 피해를 본다는 게 명백하게 증명되지 않는다면(멀쩡한 책의 분책이나 동일 판형, 페이지 단행본 대비 가격 상승, 사재기를 통한 판매 부수 조작 등) 유통사들 간의 분쟁일 뿐, 독자와 작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뒤가 켕기는 건 출판사지 독자가 아니에요.
통일된 디자인과 판형으로 시리즈를 모으지 못한다는 문제는 있지만 에드 멕베인의 87분서 시리즈도 "아이스" 한 권만 피니스 아프리카에 말고 검은숲에서 출간되었고, 가가 형사 시리즈"신참자"만 출판사가 다른 등 이 바닥에 워낙 비일비재한 일이라 문제도 아닙니다. "경성 탐정록"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음에도 1, 2부 판형부터가 다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리고 한국 추리소설에 대해 언급하며, 한국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왜 필요한가? 이미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는데? 라는 생각을 드러낸 것도 섭섭했습니다. 한국 작가의 추리소설은 투자 대비 성공하기 어렵다는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라면 최소한의 애정은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꾸준히 각종 공모전을 개최하는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 황금가지와 너무 비교되는 마인드에요. 이래서야 그냥 장사꾼이지요. 미야베 미유키 작품만 영원히 팔 건가요?

이렇듯 마음에 안 들거나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앞부분, 1, 2부의 이야기는 괜찮았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본인, 그리고 출판사를 지지하는 팬층이 두텁다는 것은 알겠고, 그렇게 두터운 팬층을 만든 마포 김사장의 노력에는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도 북스피어의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덧붙이자면, 비록 이전에 제안했다가 거절당하기는 했지만(거절의 이유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네요) "경성 탐정록" 장편을 여기서 내 주면 참 좋겠다 싶긴 하네요. 마포 김사장의 재기발랄한 마케팅이라면 뭔가 될지도?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뭐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2015/12/01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 백창화, 김병록 : 별점 1.5점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 4점
백창화.김병록 지음/남해의봄날

제 오랜 꿈 중 하나가 카리스마 헌책방 주인입니다. 뜨내기 손님이 들어와 책값 좀 깎아보겠다고 하면 "당신한테 내 책은 안 팔아!"라고 호방하게 외칠 수 있는 주인이요. 이 책은 이러한 저의 꿈과 맞물려 있는 듯 하여 호기심에 읽게 되었습니다. 

책은 충북 괴산에 귀촌한 후, 이른바 "가정식 서점"을 표방한 "숲속 작은 책방"을 연 부부가 쓴 자신들의 이야기에 더하여, 비슷하게 동네 서점을 표방한 책방들에 대한 조사와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통영에 있는 것으로 유명한 작은 출판사 남해의 봄날에서 출간되었더군요.

그런데... 아쉽게도 딱히 도움이 되거나 인상적인 내용은 없었으며, 오히려 제 꿈이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것만 느껴져 읽는 동안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별다른 아이디어(후술하겠지만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없이 동네 서점이 중요하다, 이런 서점과 책방 하나쯤 동네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올시다였거든요.
저는 1년에 약 백여 권의 책을 읽는, 취미가 "독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만, 동네에 책방이 없다고 아쉽거나 제 삶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물론 있으면 좋겠죠. 하지만 여기 나오는 것처럼 특정 주제에 집착하거나 카페처럼 만든 그런 곳이라면 오히려 제 취향과는 맞지 않을 듯 합니다. 저는 그냥 "책" 자체가 좋고 "책"만 많으면 됩니다. 이런 동네 서점보다는 조금 멀어도 교보문고, 혹은 동네 도서관이 훨씬 낫습니다.
설령 동네 서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 책에서 주장하듯 무슨 대단한 동네 문화 허브일 수도 없습니다. 가당치도 않지요. 

또 책 속에 등장하는 꿈같은 동네 서점, 즉 지역 주민들이 사랑하고 도와주는 서점은 한국이라는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전세난으로 2년마다 이사 다니고, 학원과 직장에 치이는 인생에 무슨 동네 서점이랍니까. 그리고 이런 논리라면 옛 추억이 어린 동네 떡볶이집이나 오래된 어머니들 사랑방 역할의 미용실도 망하면 안 되겠지요.

그나마 등장하는 동네 서점들도 책만 팔아서 먹고살 수 있는, 서점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어 보여서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특정 주제에 집중해서 골수 단골을 확보하는 전략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만, 동네 장사가 아니라 멀리 있는 손님이 일부러 발품 팔아 찾아올 정도라면 그 자체가 이미 "동네 서점"의 정의에서 벗어난 일종의 맛집 같은 관광 상품에 더 가까워진 것이니, 저자들의 주장과 완전히 배치되는 셈 아닐까 싶습니다. 소개된 서점들 중 다수가 홍대, 연남동 등에 터를 잡은 것도 결국 동네 서점이 아니라 관광지 핫 플레이스를 꿈꾼다는 증거라고 생각되네요.

게다가 책이나 정보는 인터넷으로 훨씬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발전하는데 만들고자 하는 서점은 수십 년 전 스타일이라면 곤란하죠. 인터넷 서점은 기본적으로 정가의 10% 할인은 물론, 마일리지에 카드사 할인까지 더하면 거의 20% 할인된 가격에 책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이벤트는 덤이고요. 과연 경쟁이 될까요? 

이러한 답답함 외에도, 뒷부분의 귀촌 후 서점을 만들어 가는 과정 이야기는 책의 주제와 거의 상관없는, 일종의 DIY 및 인테리어 이야기라 실망스러웠고 전체적인 완성도와 디자인도 감점 요소입니다. 성격에 맞게 동네 서점 같은 편안하고 얌전한 디자인이 좋았을 텐데, 너무 튀고 산만한 느낌이었어요. 실려 있는 사진들도 그닥이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동네 책방들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보게 만들기는 했지만, 내용은 전문성이 부족하고 이야기도 왔다 갔다 해서 건질 건 없습니다. 동네 서점에는 미래가 없다는 기존 생각만 더 확고해졌다는 것 정도가 수확이랄까. 이 정도의 내용치고는 책값도 비싼 편이라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그나저나, 소개된 서점 중 이 잔인한 자영업 사막화 국가에서 2년 뒤까지 얼마나 많은 서점이 살아남아 있을지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

덧 1 : 저자들 책방에 들어오면 꼭 책을 사야 한다는 일종의 강매 행위는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둘러보고 살 만한 게 없으면 그냥 나오는 거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랍니까. 정착하여 삶을 꾸리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인 것을 날로 먹으려는 외지인들에게도 분명 문제가 있겠지만, 여기는 소매업을 하는 엄연한 가게잖아요? 관광지 비슷한 곳에 무언가 가게를 열면 당연히 받는 질문들인데, 서점만 예외가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서점, 책을 판다는 것에 선민 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덧 2 : "동네 서점"이 살아남기 위한 몇 가지 방안을 생각해보라고 할 때, 제가 떠올릴 수 있는 방법들과 이 책에 소개된 동네 서점을 해당 방법별로 분류한 것입니다. 역시나, 크게 별다를 건 없습니다.

1. 특이한 주제에 집중한다.

: 홍대 앞 땡스 북스 (디자인), 서울 마포 짐프리와 서대문구의 일단 멈춤 (여행), 연남동 책방 피노키오 (외국 동화), 일산 알모 (동화)

수요층이 확실한 디자인, 여행, 그리고 어른들을 위한 예쁜 책과 외국 동화들, 아동용 도서로 구분되는데 뻔하디 뻔한 발상이죠.

2. 카페와 결합한다

: 상암동 북바이북 (술 마시는 책방) 외

북카페야 흔하디흔하고 요즘은 그 유행마저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소개된 곳 중 유일하게!) "책맥"이라는 맥주 마시는 책방은 좀 신선했습니다. 허나 주객, 아니 주책이 전도된 게 아닌가 싶은데, 매출에서 맥주와 책의 비율이 궁금하네요.

3. 관광지와 결합한다

: 제주에 있는 책방들과 저자들의 "숲속 작은 책방"

역시나... 특별할 게 없어요.

4. 책은 물론 다양한 인문학적 교류가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 부산 인디고 서원 외

서점이라는 공간에 대한 상식선 끝자락에 위치한 것이죠. 뻔할 뿐더러 이 정도면 동네 작은 책방의 범위를 넘어서는 듯 합니다.

5. 유명인이 참여한다

: 책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홍대 여신이라는 요조가 책방을 냈다죠?

6. 독립 출판물에 집중한다

: 서울 마포 유어마인드, 서촌 더북소사이어티

1번과 유사하지만 성격이 조금 다르므로 별개로 치겠습니다. 이거 하나만큼은 제가 생각하지 못한 신선한 것으로, 일본으로 따지면 동인지 전문 판매숍쯤 되어 보이네요. 독립 출판물만 판매해서는 매출이 나오지 않을 텐데, 수익 모델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조금 궁금합니다.

2015/11/30

화과자의 안 - 사카키 쓰카사 / 김난주 : 별점 3점

화과자의 안 - 6점 사카키 쓰카사 지음, 김난주 옮김/블루엘리펀트

모두 5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가벼운 일상계 단편집입니다. '키 150cm, 체중 57kg'의 주인공 우메모토 교코가 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 백화점 지하에 있는 화과자점 "미쓰야"에서 일하게 된 뒤 만나는 소소한 사건들을 다룹니다.

잘 모르는 작가의 작품으로 충동적으로 읽게 되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꽤 괜찮았습니다. 쉽게 읽히는 재미는 물론 추리적으로도 제법이며 잘 몰랐던 화과자에 대한 현학적인 매력도 넘친 덕분입니다.

캐릭터들의 매력과 배분도 아주 적절합니다. 사건 해결은 괴인 츠바키 점장이 맡고, 이야기는 우메모토 교코가 빠른 눈치와 추진력으로 템포 있게 유지시키며, 화과자에 대한 지식은 게이 성향이 있는 화과자 장인 지망 베테랑 아르바이트생 다치바나가 덧붙여 주는 식으로 황금 분할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연산 - 파워 - DB의 3위 일체네요.

허나 화과자에 대해 알고 있어야만 추리를 따라갈 수 있기에 평범한 일반인, 그것도 한국인 독자가 추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일상계이지만 전문가적 지식이 발휘되는 작품이라는 측면에서는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나 "명탐정 홈즈걸"과 같은 스타일이지요.
물론 현학적인 재미로 보상해 주는 만큼 단점이라고만 보기 어렵습니다. 저 역시 아주 좋아하는 장르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갤러리 페이크"가 될 테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전문가 일상계 추리물의 교과서 같은 작품으로 추리소설에 입문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네요. 이야기도 소소하니 따뜻하고 즐거우며 맛있기까지 하니 더 바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각 단편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화과자의 안"

회사원 아가씨가 생과자 "오토시부미" 1개에 "투구" 9개를 사간 이유에 대한 추리가 펼쳐지는 작품.

츠바키 점장은 오토시부미를 특정 인물 1명 앞에 내어 놓을 필요가 있었으며, 그 이유는 "오토시부미"의 사전적 의미 — '공공연하게 말할 수 없는 내용을 쓴 무기명의 문서' — 에 따라 그 과자를 받는 사람은 뭔가 부정이 있다!라고 다도에 박식한 상관에게 넌지시 고하기 위함이라고 추리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회사원 아가씨가 과자를 사러 왔을 때에는 사건이 해결된 것을 알아차리고 '액막이용 과자'인 "물의 달"을 바로 내어주었지요.

화과자에 대해 잘 모르면 추리에 동참할 수 없다는 단점은 있지만 시리즈의 시작으로 캐릭터들의 소개와 더불어 이 작품이 화과자에 대한 일상계 추리물이구나! 라는 것은 충분히 알려줍니다. 현학적인 재미도 넘쳤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1년에 한 번 하는 데이트"

견우와 직녀가 만난 뒤의 칠석 과자 "까치"를 사러 온 여대생은 대만에 있는 남자친구와 원거리 연애 중으로 비행기를 타야 했고, 단골인 스기야마 할머니가 사 가는 과자는 사실 불단에 올릴 목적이었다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와 동일한 문제가 여전합니다. 일반인이 추리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그나마 여대생의 원거리 연애 에피소드는 독자도 추리할 만한 여지가 있긴 했습니다만, 스기야마 할머니 이야기는 정말 무리예요. 특히 할머니의 독특한 복장이 사실은 화과자의 "상제" 색 조합과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일반인의 영역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전문가적 지식을 토대로 한 일상계 추리물의 교과서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캐릭터들이 나름 성장하기도 하고, 츠바키 점장의 개인사도 살짝 엿보이는 등 읽는 재미도 충분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는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싸리와 모란"

야쿠자가 와서 시비를 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치바나의 사부가 가게의 전문성을 시험하느라 이런저런 전문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는 이야기.

요약된 줄거리 그대로 추리의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그냥 화과자에 대한 정보 전달이 주인 탓에 일상계 추리물이라기보다는 "갤러리 페이크"에 더 가까워요.

허나 워낙 재미있는 내용들이라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아주 재미있었어요. 화투에 멧돼지와 싸리가 반드시 같이 그려져 있는 이유가 멧돼지 = 보탄(모란) → 모란떡은 오하기 → 하기는 싸리, 그래서 같이 그린다라는 언어유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인데, 다른 작품에서 접하기 힘들 뿐 아니라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를 야쿠자스러운 말투와 엮어 재미나게 풀어내는 솜씨가 탁월해서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신 캐릭터인 다치바나의 사부도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작품과 잘 어울렸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스위트 홈"

백화점 내 양과자집 "황금사과"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가쓰라자와가 팔다 남은 케이크를 "오빠"에게 가져가는 이유는?

"오빠에게 가져간다"는건 착각이었고 케이크를 "오빠", 즉 나이가 많은, 전날 팔다 남은 케이크라고 이야기했다는 내용인데 실제 자료 조사가 토대가 된 듯한 일종의 언어유희가 돋보였습니다. 화과자에 대해 몰라도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도 큰 장점이지요.
곁들여 주류 코너에서 일하는 구스다 씨가 떨이 도시락을 사재기한 이유가 함께 밝혀지는 구성도 참 좋았습니다.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아울러 양과자와 화과자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양과자와는 다르게 화과자는 이 나라에서 나는 재료를 사용해 이 나라의 기후와 습도에 맞게 만들어 관혼상제를 채색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는 것인데 정말 공감됐습니다. 한천은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는 일종의 화과자 부심(?)도 귀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쓰지우라의 향방"

미쓰야에서 판매한 새해맞이 과자 "쓰지우라" 안에서 이상한 암호문이 나와 그것을 해독한다는 내용으로 암호 해독이 중심인 작품입니다.

종이는 누군가 바꿔치기한 것에 불과하고, 암호문은 일본어로만 풀어낼 수 있는 것이라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화과자가 중요하게 사용되지도 않아서 시리즈와 연계성도 조금 떨어지고요.

점장이 기다리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2화에 언급된) 설명되어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는 하지만, 점장의 연인이었던 과자틀 장인 "형풍"이 죽기 전 남긴 과자틀 반쪽을 안짱이 골동품 벼룩시장에서 건진다는건 우연이라도 너무 심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도 별로고 작위적이라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여러모로 마무리가 약한 느낌입니다.

2015/11/28

토스카나의 우아한 식탁 - 미야모토 미치코, 나가사와 마코토 / 고세현 : 별점 2점

토스카나의 우아한 식탁 - 4점
미야모토 미치코 지음, 고세현 옮김, 나가사와 마코토 그림/라임북

일본의 작가 미야모토 미치코가 남편 나가사와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보냈던 몇 개월의 일상을 기록한 에세이집입니다.

그런데 제목을 "토스카나의 우아한 식탁"이 아니라 "부르조아의 우아한 식탁"으로 바꾸었어야 합니다. 1990년대 초반, 거품경제가 무너지고 난 직후에 이런 생활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사람들은 아닌데다가 돈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며, 전원 생활을 위해 잠깐 머무는 곳이 백작가의 빌라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곳곳에 드러나는 저자의 부자 친구들 — 귀족 딸인 친구 줄리아나, 뉴욕 시절 친구로 화상으로 거부가 된 토마조와 네루 커플 등 — 에 대한 일화들 때문입니다. 친구 토마가 광대한 산과 땅을 산 뒤 그곳의 풍경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한다는 것 처럼요. 그냥 대자연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손을 댈 만큼 댔다는 스케일부터가 남달라 어리둥절할 정도예요.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설탕을 먹지 않는 등의 까탈스러운 식습관도 그렇고요.
하기사 저자의 여행 비결은 시간과 몸이 여유롭게,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다는건데 이거야말로 큰돈이 드는 여행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물론 아주 건질 게 없는 건 아닙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건 함께 실려 있는 저자의 남편 나가사와 마코토의 그림들입니다. 스케치와 간단한 수채화인데 그야말로 최고더라고요. 저도 이런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또 등장하는 음식들에 대한 묘사 역시 기가 막힙니다. 소개된 것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1.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먹는 자가제 피자 — 그중에서도 도우에 루꼴라만 얹고 올리브유만 더한 단순한 것
  2. 간단하지만 풍성한 샐러드 — 올리브유, 레몬, 발사믹 식초, 소금, 후추 등을 입맛대로 뿌려 먹음
  3. 그롤라 커피 — 원두를 갈아 만든 에스프레소 커피를 주둥이가 여섯 개 나 있는 토기처럼 생긴 물건에 붓고, 커피에 설탕과 그라파를 넣어서 오래 휘저은 후 성냥불을 붙여 그라파의 알코올 성분을 태운 뒤 주둥이에 각자 입을 대고 먹는다
  4. 간단한 파스타들, 그중에서도 친구 네루가 저자를 위해 만든 페스토 소스 — 잘게 썬 바질과 마늘, 파르미자노 레자노 가루와 최고급 올리브유와 소금을 한데 섞는다. 생크림은 저자의 바람으로 넣지 않고 대신 버터를 넣어 만든다 — 로 만든 트로피에테(뇨키의 일종)

아, 정말이지 한 번 먹어보고 싶은 것들이에요! 저자 말대로의 토스카나 요리의 3대 특징 — 복잡하게는 하지 않는다 / 너무 열중하지 않는다 / 별로 미묘하지 않게 한다 — 에 기반한, 신선한 재료에 기대어 대충 만든다는 요리법도 와 닿고요.
아울러 귀족이 사는 곳이라 그렇지 별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은 제목 그대로 전원 생활이기는 해서 거부감이 좀 덜하긴 했습니다. 특히 백작가의 사위 필리포의 삶은 부르조아보다는 아라카와 히로무의 "백성 귀족"이 떠올랐습니다.

허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으며, 특히 부르조아 사상에 기반한 내용들은 영 거북하기만 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토스카나에서 우아한 생활을 즐기려면 부자여야 한다는 씁쓸한 결론만 남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5/11/24

가면 산장 살인 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가면 산장 살인 사건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카유키는 사고로 죽은 약혼녀 도모미의 가족과 함께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그녀 가족의 산장으로 향했다. 도모미의 부모, 오빠와 친지 등 모두 여덟 명이 산장에 모인 당일, 두 명의 은행 강도가 침입해서 그들 모두를 감금했다. 은행 강도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던 중, 도모미의 사촌 동생 유키에가 칼에 찔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꽤 인기 있는 작품인데 읽는게 늦었네요. 부유한 가족, 그리고 그들과 엮인 인물들이 모인 폐쇄된 산장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설정의 흥미진진한 본격 추리물입니다. 

두 개의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 사건, 즉 도모미의 죽음은 마지막에서야 진상이 설명될 뿐더러 범인은 관계자 증언밖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어서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이 사건은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설정일 뿐이지요. 허나 두 번째 사건인 유키에 살인 사건은 고전 본격물의 원칙에 충실합니다. 일종의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진 기묘한 범죄, 용의자는 공간 내 모두라는 상황 덕분입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유키에를 살해하는건 인질인 아쓰코 외의 모든 사람들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 전의 상황, 즉 레이코가 몰래 적은 SOS를 지우고 타이머를 망가뜨린 사람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 뒤 그 사람이 범인일 것이다!라는 식으로 연결되는 추리의 흐름이 설득력 높기 때문입니다. 타이머 관련 트릭 - 범인이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시간만 바꿔 놓은 뒤,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망가졌다고 하는 순간에 부순 것 - 도 간단하지만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고요.

허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탓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노부히코의 마지막 증언 - 레이코가 일기 페이지를 입에 넣었으며 그 페이지에 진상이 적혀 있을 것이다 - 부터가 그러합니다. 칼에 찔렸는데 죽어가면서도 일기장의 특정 페이지를 찢어서 입에 넣는다? 인간의 정신력이 아무리 놀랍다 하더라도 이건 무리지요. 그리고 일기에 뭐라고 적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필케이스 약통의 약이 정상적인 것으로 밝혀진 이상 큰 증거가 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노부히코가 감금된 상태에서 유키에를 죽여야 하는 타당성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누군가를 살해한다? 탈출 후 유키에를 따로 손보는 게 상식적입니다. 최소한 풀려난 뒤 죽이고, 범인들에게 뒤집어 씌우는게 훨씬 나았겠지요. 진범을 밝히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는 후지의 협박 역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목격한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범인을 밝혀냈다고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노부히코가 자살한 시점에서는 협박할 건덕지가 사라져 버렸으니 다 죽이는 게 당연합니다.

하긴, 이 모든 게 거대한 연극이니 작위적이라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겠지요. 그보다는 다카유키를 옭아매기 위해 이런 추리쇼를 펼친 이유를 모르겠다는게 더 큰 문제입니다. 단지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타당치 않습니다. 도모미의 행동을 유키에가 보고 들었다는데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했을까요? 다른 추리 소설에서는 복수를 하고도 남을 증거인데 말이지요. 기껏 그걸 보강하려고 거대한 연극을 꾸민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범행 증명이 목적이었다면 이런 성공 가능성도 떨어지는 연극을 벌이는 것 보다는, 산장에서 다카유키를 제압하고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는 게 비용과 시간, 그리고 기분 등 모든 측면에서 나았을 겁니다.
마지막에 노부히코를 다카유키가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즉 연극이 실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다카유키 역시 그 순간에 노부히코를 죽인다 해도 빠져나가는건 거의 불가능했을 텐데, 마지막에 이르러 이런 발악을 하는게 납득이 되지도 않았고요. 약혼녀를 죽일 때에도 남이 슬쩍 보고 다른 약임을 눈치챌 수 있는 약으로 바꿔칠 정도로 무신경한 놈이니 이런 대책 없는 행동도 당연하다고 본 걸까요?

아울러 상황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어서 긴장감을 떨어트린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일 뿐더러 설정이 완전 말도 안 됩니다. 은행 강도 같은 케케묵은 설정이 통할 리 없어요. 핸드폰 세대에게는 도저히 먹힐 수 없는 설정이기도 하고요. 읽으면서 후지가 죽은 줄 알았던 레이코고, 그녀가 사람들을 동원해 도모미 사건의 진범을 밝히려고 하는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야기였다면 좀 더 괜찮지 않았을까 싶네요.

최근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인데, 화자라 할 수 있는 다카유키가 도모미 살해를 꾸몄다는 것 역시 반칙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과 스토리를 보면 영상물, 혹은 만화가 더 어울립니다. 유일한 가치라면 모든 잠재적 범죄자들은 최후의 그 순간, 즉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속영장이 청구될 때까지는 무조건 무죄를 주장하며 헛짓거리하지 말고 버티라는 교훈 하나만큼은 제대로 전달해 준다는 것? 그 외의 무언가는 딱히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덧붙이자면, 범인이 사랑하는 이를 잃은 뒤 도주 중인 흉악범을 가장하고 범행을 저지른다는 유사 설정의 작품인 소년탐정 김전일의 "비련호 살인사건"과 비교해 본다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다 죽이겠다!("비련호 살인사건") 와 누군지는 알지만 확실치 않으니 확인해 보자!("가면산장 살인사건")의 차이인데 저는 "비련호 살인사건" 쪽에 점수를 더 주고 싶네요. 

그나저나, 최근 읽은 작품 중에서는 가장 리뷰하기가 힘들었는데 이유를 모르겠군요. 리뷰는 별거 없지만 거의 2주에 걸쳐 썼습니다. 리뷰 완성도도 낮고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지만 이게 한계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2015/11/23

야경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2.5점

야경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 6편의 단편이 수록된 요네자와 호노부스탠드얼론 단편집.

요네자와 호노부는 널리 알려진 "빙과"같은 일상계 단편의 강자인데, 여기 수록된 작품들은 일상계라고 보기 어려운 묵직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대체로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고요.

그래도 일상계스러운 분위기가 살짝 묻어나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추리적으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석류"라는 용서하기 어려운 쓰레기 망작이 하나 섞여 있기는 하지만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무난하기에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이네요. "만원"이 워낙 잘 빠진 작품이라 멱살잡고 평점을 올려놓은 감도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요네자와 호노부 팬 분들께 추천드릴 만합니다. 이런저런 상을 탄 이유는 확실히 있는 듯싶군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야경"

신입 경찰 가와토 히로시의 순직 사고의 진상은? 모든 것은 가와토의 의도로, 목적은 그가 실수로 발포한 총알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가와토는 불륜을 가장하여 다바라를 자극한 뒤 발포하여 살해하고, 자기가 이전에 쐈던 총알을 현장에 버리는데 성공했지만 다바라의 믿을 수 없는 생명력 탓에 목숨을 잃게 된 것이었다...

가와토 죽음의 진상을 파출소장 야나오카 경사의 시점으로 풀어나갑니다. 무려 두 명이나 사망한 무거운 내용이지만 분위기는 묘하게 일상계에 가깝습니다. 캐릭터가 선명하고 '실제 있을 법하다'라는 인상을 강하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문제아 가와토보다는 경찰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자행한 야나오카 경사가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놈, 정말 나쁜 놈이더라고요.

딱 한 가지, 가와토는 정말로 경찰에 맞지 않는 소심한 민폐덩어리였다는 결말이 약간 찜찜하나 그 외 전개는 깔끔한 수작입니다. 역시나 일상계 전문가 요네자와 호노부답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가와토가 실수로 발포했다는 것에 지나친 우연이 겹쳐 있었다는 점에서 감점하지만, 읽을 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사인숙"

사라진 연인 사와코를 찾아 머나먼 시골 온천여관으로 향한 "나". 그곳은 자살의 명소로 알려진 곳으로, 누군가 흘린 유서를 발견한 사와코가 어떤 손님이 죽으려 하는지 찾아달라고 부탁하는데...

유서에 쓰인 글귀 중 "오늘로 이 년", "오늘 죽었다고 증언해 주시면 여한이 없겠습니다"를 통해 자살의 목적은 보험이지만 보험을 위해서는 이름과 날짜라는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다는걸 알아낸 뒤, 나머지 부분은 물에 흘려보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좋습니다. 사와코의 힘겨움을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 때문에 사건에 몰두하는 "나"의 심리 묘사 역시 설득력이 넘치고요. 마지막에 자살을 목적으로 한 사람이 사실은 두 명이었다는 반전도 의외성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유카타 색깔이라는 단서는 많이 부족했으며, 사와코가 그렇게까지 자살을 막고 싶었다면 입구 쪽에 CCTV를 설치하면 되는 문제인데 이게 왜 사건이 되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걸 보면 사와코도 결국 죽음을 홍보에 이용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러한 사와코의 기만 때문에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석류"

딸 유코가 아버지 나루미를 남자로 느낀다는 야설 수준의 이야기. 둘이서 석류를 먹었느니 어쨌느니 하는, 두 번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찝찝하고 기분 더러운 내용입니다. 유코가 쓰끼꼬를 매질한 반전 정도는 기억에 남으나 도저히 점수를 줄 수 없는 쓰레기입니다. 별점은 없습니다.

"만등"

이케다 상사의 이타미와 OGO의 모리시타는 개발도상국 방글라데시의 가스전 개발을 위해 이를 거부하던 마을 장로 알람을 살해했다. 그러나 모리시타는 죄책감에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향했고, 불안해진 이타미는 그를 쫓아 입을 막으려 하는데...

모리시타가 콜레라에 걸렸으며 전 일본이 그를 쫓는다는 아이디어가 아주 좋았어요. 이타미와 모리시타가 연결되어 있다는건 아무도 모르지만 공항 검역에서 이미 이상 없는 것으로 밝혀진 이타미가 콜레라에 걸렸다면, 원인은 모리시타와의 만남이라는 인과관계가 형성되니까요. 그리고 모리시타의 과거 행적을 쫓으면 잡점이 드러날 테니 이타미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 외에도 무자비한 자원 개발을 반대하는 알람의 사고방식 등의 디테일도 볼 만했습니다.

딱 한 가지, 급작스러운 모리시타의 심경 변화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단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큰 흠은 아닙니다. 독특한 아이디어의 현대판 개미지옥 이야기로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문지기"

오다와라에서 세 시간, 이즈 반도의 아마기 산맥을 넘어가는 즈난정을 향하는 가쓰라다니 고갯길에서 벌어진 네 건의 연쇄 교통사고 - 파칭코 프로 다카다, 사학과 학생 오쓰카, 기둥서방 다자와와 동거녀, 공무원 마에노가 죽은 사고 - 의 진상은 무엇인지?

전개도 흥미롭고, 할머니의 수다가 결국 진상에 이르게 만드는 여러 가지 복선들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범행, 즉 살인일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되고, 흑막은 모든 것을 보았다는 휴게소 할머니일 것이라는 점 역시 너무 뻔해서 긴장감은 다소 떨어집니다. 또 진상 - 모든 사건의 원인이 된 다카다의 죽음은 할머니 딸이 죽인 것이며, 흉기는 길가의 석불 행신으로 목이 당시 떨어져 나갔는데 그것에 주목한 사람들을 차례로 죽였다는 것 - 의 설득력이 낮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석불 사에노카미 목이 떨어진 정도가 무슨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도 몇 년 전 사건인데 말이죠. 물론 할머니의 노파심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납득하기는 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만원"

학창 시절 흠모했던 하숙집 여주인 다에코가 살인사건 피의자가 되자 변호사인 주인공 후지이가 그녀를 위해 재판에 나서는데...

가보인 족자에 피가 튄 것을 사건에 고의성이 없다는 유력한 정황 증거로 사용하지만(그렇게 귀중한 물건을 피해자를 만나는 자리에 내놓을 리가 없다) 사실 족자에 피가 튀도록 한 것 자체가 의도였다는 진상이 놀라웠던 작품입니다. 해당 물건이 중요 증거로 검찰에 압수되도록 하여, 다른 재산은 모두 차압당했지만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한 겁니다. 남편 우카와 시게하루가 병사한 뒤 상고를 포기한 것은 보험금으로 빚을 갚을 수 있어서 족자를 빼앗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고요.

이렇게 법 자체를 변호사도 모르게 범인이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점이 정말 돋보였습니다. 다에코가 주인공과 법률 관련 이야기를 들으며 법에 대해 지식을 빨아들였다 정도의 묘사만 있었어도 아주 완벽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런데 딱 한 가지, 상고를 포기한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네요. 죽어서 빚을 갚을 수 있다면 보다 빨리 출소하는 것도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됩니다. 뭔가 타이밍 문제가 있었나 싶습니다.

그래도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법의 맹점을 다룬 단편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살의" 급이에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15/11/22

오무라이스 잼잼 6 - 조경규 : 별점 2.5점

오무라이스 잼잼 6 - 6점
조경규 글.그림/씨네21북스

조경규 씨의 웹툰. 얼마 전 "박스셋트 유감"이라는 글을 올리긴 했지만, 만화 자체만 놓고 보면 국내 음식 관련 만화 중 손꼽을 만한 작품입니다. 발간된 걸 알고 주저 없이 구입했습니다.

이미 5권 분량, 100화가 넘는 이야기가 출간된 만큼 내용과 분위기 면에서 새로운 점은 많지 않습니다. 이전 리뷰에서 언급했던 장단점은 거의 그대로에요. 하지만 6권만의 특징을 조금 언급하자면, 우선 이전 권에서 보였던 장단점이 많이 희석되었다는 점 입니다. 우선 장점이라고 했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묘함’이 이번에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에피소드가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는, 가족과 무엇을 함께 먹었다는 식의 일상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쁘진 않았지만, 5권에서 이런 기묘함이 강하게 느껴졌던 터라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겠지요.

반대로 가장 큰 단점으로 여겼던 가족 이야기가 그렇게 거슬리지 않았던 건 다행이에요. 부록이나 보너스가 예전처럼 가족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은 덕입니다. 아내에 대한 보너스 만화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허용 범위라 생각합니다. 물론 여전히 재미는 없었습니다.

또 이전 권에 비해 훨씬 두꺼워졌는데 - 4, 5권이 488쪽인데 6권은 568쪽 -, 24화 구성이라는건 같지만 보너스 만화가 꽤 길게 실려있는 등 부록과 보너스가 강화된 덕분입니다. 부록과 보너스 이야기들—아보카도 키우기, 풍선껌 불기, 결혼식 주례 에피소드, 클래지콰이와의 인연 등—과 몇 개 안 되지만 음식 관련 레시피 소개—절편 떡볶이, 집에서 만드는 파라타, 부위별 수육 도감, 스모어 만들기 등—이 단순 사진이 아닌 만화 형식으로 그려져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사진과 글 중심의 탐방기와 인터뷰도 상대적으로는 줄어든 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기묘한 재미는 줄어들었지만, 이전 권에 비하면 공짜로 볼 수 있는 웹툰 대비 소장 가치는 소폭 상승했습니다. 가격도 천 원 올랐으나 내용에 비하면 적정한 가격이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내용이 웹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것이니 구입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야 겠지만요.

덧붙이자면, 초판 부록으로 들어 있는 빵 그림은 대체 왜 들어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것은 조금 구겨져서 오기도 했고요. 혹시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요?

2015/11/21

W의 비극 - 나쓰키 시즈코 / 추지나 : 별점 2.5점

W의 비극 - 6점
나쓰키 시즈코 지음, 추지나 옮김/손안의책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학 재벌 와츠지 가문의 딸 마코의 가정교사인 이치조 하루미는 마코의 박사학위 논문을 도와주기 위해 일족이 휴가를 보내는 후지 5대호, 야마나카 호반의 별장을 찾았다. 그러나 그날 밤, 비명 소리와 함께 와츠지 요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마코는 할아버지에게 강간당하기 전, 저항하다가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말았다고 고백했다. 일족은 추문을 덮고 마코를 지키기 위해 외부에서 강도가 잠입했다고 진상을 조작하려 하는데...

나쓰키 시즈코의 대표작입니다. 오래전 절판본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었는데, 고맙게도 재간되었더군요. 몇 년 전 일이긴 하지만 다시 읽게 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좀 의외였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일까요? 예전에는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 정도는 아니더군요.

물론 아래의 "민법 제 891조 2항"에 기초한 설정과 진상은 여전히 괜찮습니다.

* 민법 제 891조 아래에 해당하는 자는 상속인이 될 수 없다.
2. 피상속인이 살해당했음을 알고 이를 고발하지 않거나 고소하지 않은 자. 단, 그자에게 시비를 변별할 능력이 없을 때나 살인범이 배우자 또는 직계 혈족이었을 때에는 예외로 한다.

유산 상속이 진짜 동기라는 사실을 숨기고 별장에 모인 일족과 관계자들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는 것, 그리고 이 진상을 독자에게 교묘하게 숨기고 경찰과의 두뇌 싸움을 그린 도서 추리물로 착각하게 만드는 전개도 훌륭합니다.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에 후지 5대호 지방 중 아사히가오카 야마나카코촌을 무대로 여정 미스터리 분위기를 선보인 것도 좋고요.

하지만 민법 제 891조 2항의 존재가 300여 페이지의 분량 중 약 200페이지, 즉 2/3 지점에서 드러나는게 문제입니다. 그 이후 이야기는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흘러가며, 급격히 힘을 잃거든요. 이어지는 다쿠오의 조사로 '배우자 또는 직계 혈족은 예외'라는 점까지 밝혀지면서, 이 조항에 해당하지 않는 인물이 단 두 명만 남게 되어버리게 되어 더 뻔한 전개로 흐르고요.

게다가 마지막에 범인인 와츠지 미치히코와 이치조 하루미가 1:1로 담판을 짓는 장면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오래된 서스펜스 드라마의 하이라이트같은 작위적인 전개의 끝판왕이었어요. 악당이 아무런 실익도 없이 진상을 고백하며 여주인공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녀를 흠모하는 백마 탄 기사가 나타나 구해준다는건 지금은 멸종해버린 설정이라 생각되는데 말이지요. 이전까지 별다른 암시가 없던 하루미와 쇼헤이에게 갑작스레 연애 감정을 부여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쇼헤이는 어떻게 하루미가 어디 있는지 알았을까요? 그것도 경찰보다 먼저요?

상황도 납득하기 힘듭니다. 와츠지 미치히코는 요시에만 잘 회유해서 입을 다물게 한 뒤, 마코의 단독 범행으로 계속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진범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물증은 전혀 없고, 진상을 아는 사람도 요시에와 마코뿐이니까요. 버티기만 했다면 그의 승리는 거의 확실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루미를 납치해 살해하려 하다니, 어처구니없습니다.

요시에가 쇼헤이를 유혹하려는 시도 역시 전혀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하루미)가 엿듣고 있다는 전제에서나 성립하는 작전이기 때문입니다. 마코의 뒤에 있는 인물이 미치히코나 요시에밖에 없다는 점에서 독자의 시선을 요시에 쪽으로 강제로 돌리려는 장치라는 건 알겠지만, 좀 더 설득력 있는 방법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핵심 설정만큼은 지금 읽어도 충분히 가치 있는 멋진 아이디어지만, 전개가 뻔하고 마무리도 작위적이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예전의 호평에는 절판본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다는 개인적 감상이 많이 작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예전에 읽었던 모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일족이 모인 파티에서 유이한 두 외부인 중 한 명이 살해당하자, 일족은 다른 한 명을 범인으로 만들려 한다는 서늘한 작품이었지요. 이 작품처럼 제가 와츠지 일족의 일원으로 현장에 있었다면, 이치조 하루미를 범인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와츠지 요헤가 여자를 밝힌다는 소문을 듣고 유혹하려 했다가, 요헤의 모욕적인 거절에 격분해 살해했다. 하지만 요헤의 반격에 함께 죽게 됐다는 시나리오, 제법 그럴듯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