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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성모 - 아키요시 리카코 / 이연승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착실하고 성실한 고등학생 마코토는 어린 아이들을 괴롭히는 악동들을 없애는 충동을 제어할 수 없는 범죄자로 두 명의 아이들을 살해하고 유기했다. 뛰어난 머리로 검도 호구 가방을 쓰는 등의 작전으로 알리바이도 만들었지만, 경찰도 무능하지 않은 탓에 수사망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한편, 어린 딸 가오루 때문에 연쇄 아동 살해범을 강하게 의식하던 호나미는 근처에 사는 다테시나가 수상하다는걸 알아차리고 경찰에 신고하는데...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게 된 장편 범죄물로 이야기는 크게 범인인 마코토의 시점, 어린 딸 가오루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엄마 호나미의 시점, 그리고 사건을 수사하는 사카쿠치-다니자키 형사의 시점으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마코토는 검도부 소속이자 방과 후 검도 선생님으로, 호구와 장비를 넣는 큰 가방을 범행에 이용해서 아이를 가방에 넣어 옮긴 뒤 살해했습니다. 형사들은 가방에 아이들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마코토에게 혐의를 두기 시작하고요.
한편 호나미는 과거 성폭행범으로 실형을 살았던 다테나시를 의심해 신고했지만 다테나시의 알리바이가 확실해 풀려나자, 다테나시의 열쇠를 몰래 복제해 그의 집에 잠입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오루의 사진과 성폭행 관련 증거들을 발견하자 그를 범인이라 확신한 뒤 결국 그를 죽이고 맙니다.

뒤이어 결말이자 반전이 등장하는데 마코토는 여자였고, 가오루는 마코토의 딸이었다는 겁니다. 또한 호나미는 마코토의 엄마였고요. 즉, 호나미가 ‘딸’을 지키기 위해 했던 행동은 가오루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코토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호나미는 마코토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죄를 다테나시에게 뒤집어씌운 뒤 그를 죽인거지요.
마코토가 여자였다는 점, 가오루의 친엄마라는 점, 그리고 마코토의 엄마가 호나미라는 설정은 서술 트릭으로 사용되어 반전을 극대화합니다.

이처럼 서술 트릭과 반전은 그럴듯한 편인데, 좋은 작품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마코토가 과거 다테나시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했고, 그로 인해 가오루를 낳으며 남성 공포증과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어린아이들을 살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탓이 큽니다. 아이들이 가오루를 괴롭히고 못되게 굴었다는 이유로 살해하는 것은 정도를 한참 벗어난 일입니다. 범행 수법 또한 지나치게 잔혹해 읽는 내내 불쾌감을 줍니다. 사카구치 형사가 사체의 상태를 보고 ‘상냥하다’고 표현하는 부분 역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범행 묘사만으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서술 트릭의 걸작이라 하더라도 "살육에 이르는 병"을 추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나마 "살육에 이르는 병"은 서술 트릭 자체를 굉장히 잘 쓴, 선구자적 작품이라는 의미라도 있지만 이 작품의 서술 트릭은 독자를 속이겠다는 의도에만 치중한 듯한 인상이 강해 별로입니다. 독자가 진상을 눈치챌 수 있는 단서가 지나치게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봐도 남자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 마코토의 초반부 묘사처럼요.

또한 경찰 수사가 다테나시를 범인으로 단정한 채 종결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다테나시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호나미가 반복적으로 그를 의심하며 신고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더구나 마코토 역시 수상한 정황이 존재합니다. 마지막에 마코토가 호나미의 진심을 알고 죄책감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해지는 묘사가 나오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경찰이 이 두 개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수사한다면 진상을 밝혀낼 지도 모르는데요. 성모랍시고 모성애로 포장하는 것 보다는, "살육에 이르는 병"이나 "통곡"같이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 마코토는 단죄받는다는 결말이 더 깔끔했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보다는 서술 트릭을 활용한 다른 유명 작품들을 읽는 편이 더 나은 선택입니다.

2026/01/31

아사토호 - 니이나 사토시 / 김진아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나쓰히의 쌍둥이 동생 아오바가 나쓰히와 아키토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나쓰히의 지도 교수 후지에다가 실종되었고, 교수를 찾던 친구 아즈사도 자살했다. 다른 실종 사건이 여럿 있었으며, 이 모든 사건은 '아사토호'라는 책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낸 나쓰히는 다시 재회한 아키토와 함께 '아사토호'의 정체에 대해 찾아 나섰다. 이 모든건 사람을 하나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천과 관련이 있었다...

신예 작가 니이나 사토시의 장편 소설입니다. 미스터리 호러 장르물이지요.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펼쳐져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린 시절, 나쓰히와 아키토 앞에서 아오바가 신비한 천에 의해 사라진 뒤, 둘 말고는 아무도 아오바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 대학생이 된 나쓰히의 지도교수 후지에다의 실종과 교수를 찾던 아즈사의 기묘한 자살, 이 모든 것과 얽힌 책 '아사토호'에 관련된 수수께끼가 이어지는데 손을 떼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나쓰히와 아키토가 여러 자료를 토대로 아사토호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은 한 편의 추리 소설을 방불케합니다. 아사토호를 발견했다고 주장한 마쓰무라의 자서전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마쓰무라의 산장 위치를 추적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아키토는 기록의 증기 기관차에 탔던 시간과 버스를 탄 거리를 토대로 대략의 위치를 특정해내는 데 성공하고, 그 장소에서 결국 기요하라 병원까지 이어지는 단서들을 수집해 내어 진상에 도달하게 되니까요.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아사토호'에 대한 상세한 설정들도 굉장히 설득력 높습니다. 저자가 실제로 문학사 전공인 덕분이겠지요. 정말로 이런 책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연구자가 연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실감납니다.

추리적으로는 그 외에도 괜찮은 부분이 제법 많아요. 아키토가 영매사로서 선보이는 짤막한 에피소드처럼요. 일종의 콜드 리딩, 사전 답사와 의뢰인의 현황—신혼부부가 굳이 교외에 있는 단독 주택을 산 이유는?—을 토대로 추리를 통해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하지요.

호러 장르물로서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아즈사가 남긴 논문이 유서처럼 이어지는 장면이라던가, 후지에다 교수의 아내 미나미의 등장, 그리고 나쓰히가 사라지고 아오바가 나타난 시점에서 '아사토호'라는 책이 고전 걸작으로 널리 퍼졌고 결말까지 달라진 - 원래는 온나니노미야가 추녀였다는 한심한 결말이었는데, 아오바처럼 얼굴에 큰 상처가 있었다는 결말로 - 세계관으로 전환되는 부분 등은 꽤 섬찟했습니다.

모든 건 앞뒤가 딱 맞게 말이 되는 패턴이고, 이런 패턴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에는 반드시 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쓰히의 생각이 이 모든 것의 원인인 '천'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였기 때문이라는 진상도 잘 풀어냈습니다. 단순 괴기현상으로 풀어낸 게 아니라,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고 말이 되는 설정을 집어넣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 해요. 나쓰히는 아오바와 아키토의 환상 속 존재였다는 진상과 이에 따른 시점 변화도 적절했고요.

하지만 단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천이, 천을 함께 본 사람들이 원하고 빠져드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데, 이야기의 결말을 잘 설명하지는 못하거든요.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아키토가 일으킨 사고로 크게 다쳐 흉터가 생긴 아오바가 상처 없는 나쓰히로 거듭난 건 해피엔딩입니다. 그런데 굳이 아오바에 대해 나쓰히와 아키토가 이상한 기억을 공유하고, 새롭게 추적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아즈사가 원한 건 연구자로서의 성공이었는데, 천이 심어준 건 좌절감이었고, 그녀는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성립한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말이 되는 건 원했던 후지에다 교수를 차지한 미나미 이야기뿐입니다.

천을 본 사람들이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일종의 다중 우주 세계관이라서 하나의 우주에 천을 본 사람들이 여럿 얽힌다는 것도 이상했어요. 하나의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들이 개입하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니까요. '천'이 만든 이야기에서 '천'의 진상을 밝히는 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도요. 기껏 꿈 속에 데리고 왔는데, 이게 꿈이라는걸 밝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탓입니다.

마지막으로 천의 정체가 밝혀진 뒤의 분량은 많이 길고 애매했습니다. 아오바가 천과 일체화되어 죽음을 선택하려 한다는 장면이 특히 길었어요. 감정 과잉이라 여겨지기도 했고요. 이런 부분을 조금 더 정리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를 들자면, "메두사"처럼 환상은 환상처럼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보실 만한 작품으로 추천드립니다.

2025/12/28

2025 블로그 리뷰 결산 (스물 두 번째!)

안녕하세요. 어제의 "어차피 곧 죽을텐데"로 올해 블로그 업로드는 마무리하고, 올해 결산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요새 이런저런 플랫폼에서 유행하는 리캡에 편승한건 아닙니다. 제 블로그 연말 결산은 이번이 스물 두 번째이니까요. 

간략한 블로그 통계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고 2025년 독서 결산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올 한 해 읽은 총 책 권수는 82권입니다.

  • 추리 / 호러: 48권
  • 기타: 14권
  • 역사서: 9권
  • 디자인/스터디 : 1권
  • 기타 장르문학: 5권
  • Food / 구루메: 5권

독서량이 작년(110권)에 비하면 30% 가까이 대폭 줄었는데, 영화나 애니메이션 감상이 늘은 탓입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아무래도 쉽게 볼 수 있는걸 선택하게 되네요. 추리 소설은 왠만한 작품으로는 신선함이나 재미를 찾기도 좀 어려웠고요. 그동안 너무 많이 읽었던 탓이지요.

그래도 1년에 100권은 읽어야 책 좀 읽는다고 할 수 있으니, 내년에는 좀 더 힘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카테고리별 베스트, 워스트입니다.


1. 추리 / 호러

베스트: 매미 돌아오다 - 사쿠라다 도모야 : 별점 3.5
- 곤충과 과학, 일상 추리를 결합한 독특함이 인상적이다.

올해 별점 3.5점을 줬던 작품은 이 작품 외에도 오가와 사토시의 "신의 퀴즈"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더 정통 본격 추리물에 가깝고, 수록 단편 중 "반딧불이 계획"은 별점 4.5점의 걸작이라서 올해 베스트로 꼽습니다. 

워스트: 신곡 - 가와무라 겐키 : 별점 1.5
- 범죄 스릴러로의 매력은 전무하다.

올해 별점 1.5점의 망작은 모두 여섯 편이지만, 그래도 다른 망작들은 추리물이기는 합니다. 이 작품은 애초에 추리물이 아니에요. '밀리의 서재'에서 '추리, 스릴러' 카테고리로 분류하지만 않았어도 워스트로 꼽지는 않았을텐데, 뒷통수를 맞은 듯한 배신감이 너무 컸네요.

2. 기타

베스트: 그거 사전 - 홍성윤 : 별점 3
- 가볍지만 의미도 있다.

읽은 책 중 절반에 가까운 여섯 권이 별점 3점을 받아서 한 권을 꼽기가 애매하지만, 재미와 정보 모두 좋았던 이 책을 꼽아 봅니다.

워스트: 세계문학단편선 39 윌키 콜린스 (꿈 속의 여인 외 9편) - 윌키 콜린스 : 별점 1.5
- 2025년에 읽기에는 낡고 지루했던, 재미와 가치 모두 압도적인 워스트. 

3. 역사서

베스트: 미친 항해 - 마이크 대쉬 : 별점 4.0
- 충격적인 실화를 방대한 자료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뛰어난 논픽션. 난파 관련 논픽션은 항상 기대 이상!

워스트: 별점 1점대가 없어서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4. 디자인 / 스터디

베스트: 일상 감각 연구소 - 찰스 스펜스 : 별점 3.0
- 일상 감각을 해킹하는 여러가지 팁이 가득.

이 분야는 올해 한 권만 읽어서 워스트는 없습니다.

5. 기타 장르문학

베스트: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별점 4.0
- 독특한 세계관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SF와 만나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워스트: 별점 1점대가 없어서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다 별점 2점이네요.

6. Food / 구루메

베스트: 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사이토 미나코 : 별점 3.5
- 상세하게 알 수 있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식생활.

워스트: 초콜릿어 사전 - Dolcerica 가가와 리카코 : 별점 1.5
- 방향성과 완성도 모두 기대 이해.

2025/12/20

세계문학단편선 39 윌키 콜린스 (꿈 속의 여인 외 9편) - 윌키 콜린스 / 박산호 : 별점 1.5점

근대 미스터리, 추리 소설의 초창기 거장 중 한 명인 윌키 콜린스의 단편집입니다. 저자의 단편은 이전에 몇 편 읽어보았는데, 재미있던 기억이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럽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감성 그대로의, 낡고 지루한 내용이 가득한 탓입니다. 이야기는 모두 예상대로이며 신선함이나 새로움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거장의 편린이 엿보이는 작품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쌍둥이 자매"는 첫 눈에 반한 여성 제인과 결혼하게 된 스트릿필드가 결혼식 날, 자신이 반했던 여자는 제인이 아니라 그녀의 쌍둥이 동생 클라라는걸 깨닫는다는 상황 설정이 기가 막힙니다.

"페루지노 포츠 씨의 인생길"은 영국 신사임을 자처하는 속물 포츠 씨가 거구의 이탈리아 여성에게 속박당하는 수난의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합니다. 이른바 영국식 유머 소설 느낌인데, 포츠 씨 일기라는 형태의 1인칭 시점으로 화끈하고 깨는 맛을 더해주는게 좋습니다. 이런 작품도 잘 쓰는 작가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아주 기묘한 침대"는 10여년 전에 읽었던 단편인데 여전히 재미있었어요. 침대가 서서히 내려오는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고요.

제미나이로 그려본 아주 기묘한 침대가 놓여진 방

하지만 예전보다는 장황함이 지나치게 느껴졌는데, 빅토리아 시대 원전에 충실한 번역 탓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덕분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언급하며 방을 꼼꼼히 살핀게 '나'가 생명을 구한 이유가 되었다는걸 알게 되었지만, 예전만큼 '걸작'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기는 합니다.

"죽은 자의 손"에서의, 경마 시즌이라 빈 방이 없던 탓에 여관 주인의 '말없고 조용한 동숙인'이라는 말에 속아 시체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 아서 홀리데이의 상황만큼은 기발합니다. 시체를 바라보다가 시체가 움직인걸 알아챈 순간의 묘사 - 이제 거길 보자 침대 옆으로 축 늘어진 길고 흰 손이 보였다. 그 손은 시체의 머리 쪽과 발치를 가린 두 장의 커튼이 만나는 곳에 꼼짝도 않고 늘어져 있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커튼은 모든 것을 감춘 채 길고 흰 손만 보여 주었다. - 도 일품이고요.

하지만 이외 작품들은 모두 지루하며, 눈여겨 볼 부분도 거의 없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고 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은 볼거리이기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입니다. "얼어붙은 땅"에서 연적과 표류하게 된 리처드처럼요. 그는 목숨걸고 연적 프랭크를 옛 연인에게 데려다 주고 죽고 맙니다. 순애보도 아니고, 그에게는 일종의 '임무'였기 때문이라는데, 참 낡아빠진 발상이지요.

좋았다고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도 일부 상황 설정이 재미있을 뿐, 낡고 고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의 손"이 대표적이에요. 시체와 함께 있는 두려운 상황을 한껏 고조시켜 가다가, 죽은게 아니라 살아있었는 사람이었고 그는 아서 홀리데이의 의붓형일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결말입니다. 이런 식의 작위적인 전개가 대부분의 작품에 가득하다는 문제도 크고요.

기대했던 범죄, 추리 계열 작품도 없다시피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5/09/06

로드워크 - 스티븐 킹 / 공보경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0세인 블루 리본 세탁 공장 관리자 조지 바튼 도스는 부인과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고속도로 확장 공사 때문에 조지는 물론, 이웃들과 공장이 이전해야 할 상황에 놓이자, 조지는 모든 걸 내려 놓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회사에서도 쫓겨나고 아내마저 떠난 조지는 철거일에 더티 해리의 매그넘과 강력한 라이플, 그리고 다이너마이트의 60배의 파괴력을 지녔다는 폭탄으로 무장하고 경찰과 대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스티븐 킹이 필명 리처드 버크먼으로 발표했던 작품입니다. 특징이라면 호러나 초자연적 요소가 전혀 없는 심리 드라마에 가깝다는 겁니다. 평범한 40대 가장이 점차 정신을 놓고 폭주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집요하게 그려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스티븐 킹 특유의 치밀한 묘사는 돋보입니다. 특히 조지가 분노의 이유도 모르면서 도로 때문에 극으로 치닫는 과정의 상황과 심리 묘사, 그러면서 내뱉는 대사들은 압권이에요. TV 구입과 시청이 한 남자의 좌절과 상실감을 이렇게까지 그리는 소재로 활용된다는건 놀랍습니다.

조지가 공사 장비를 화염병으로 불태우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결국 집을 폭파시키는 장면은 충분히 화끈합니다. 특히 끝내 자폭하고 마는건 기묘한 쾌감을 선사합니다. 닳고 닳은 기성세대가 앞장서서 공권력과 제도를 파괴한다는게 아이러니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대가 된 1973~74년 겨울은 베트남 전 실패와 석유 파동으로 미국에서 침체와 절망이 확산되어가던 시대였는데, 이 시대에 읽었더라면 아마 더 와 닿지 않았을까 싶네요. 

당시 시대를 잘 드러내는 여러 소재들도 볼거리입니다. 식당 주크박스에서 엘튼 존의 "Goodbye Yellow Brick Road"가 흘러나오고, 뉴스에서 워터게이트 사건 이야기가 나오고, 마지막에 집과 함께 자폭하는 장면에서 롤링 스톤스의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가 흘러나오는 등의 장면들처럼요(심지어 최후에 듣는 가사는 '그래도 노력한다면 가끔은 당신한테 필요한 걸 갖게 될 거에요.').

그러나 걸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점이 훨씬 더 두드러지거든요. 고속도로 확장 공사라는 사소한 사건 때문에 멀쩡한 가장이 모든 걸 버리고 폭주한다는걸 충분히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도 못하는 탓이 가장 큽니다. 묘사는 좋지만 별로 와 닿지는 않았어요. 특정 사건을 계기로 한 남자가 미쳐간다는 설정, 사회와 단절된 남자가 분노와 허무 속에서 파괴로 치닫는 서사는 장르 전반에 걸쳐 너무 이미 너무 흔한데, 이 작품만의 독창성도 거의 느껴지지 않고요.
조지가 폭주 과정에서 만나는 21세 히치하이커 올리비아, 암흑가 거간꾼 매글리오리 등과 가까워지는 전개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미쳐가는 중년 남자에게 마약에 찌든 젊은 여성이 호감을 느낀다? 지나치게 편의주의적인 발상이에요. 

마지막으로, 소설 속에서 40세를 그저 청춘이 끝나고 저물어가는 나이로만 묘사한 것도 100세 시대인 2025년에는 적절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솔직히 40세밖에 안 된 주제에 인생 다 산 것처럼 올리비아에게 이제 인생은 달릴 수 없는 공회전 상태이다 운운하는건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이런 말을 하려면 최소한 60세는 되어야 하는게 현실이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이름에서 기대되는 호러나 스릴러 요소는 별로 없는데다가, 설정과 전개가 뻔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25/06/08

미로장의 참극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긴다이치 고스케는 사업가 시노자키 신고의 초대로 후지산 앞에 위치한 저택 ‘명랑장(미로장)’을 방문했다. 이 저택은 본래 구 백작 후루다테 다쓴도의 소유였으나, 시노자키가 이를 구입해 수리한 후 호텔로 개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과거 20년 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도주했던 외팔이 남자 오가타 시즈마가 이 명랑장 주변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자, 시노자키는 긴다이치에게 조사를 의뢰하고자 그를 초대한 것이었다. 마침 호텔 개업을 앞두고 후루다테 가문과 관련된 인물들—후루다테 다쓴도, 그의 외삼촌 덴보, 아내 가나코의 여동생 야나기마치 요시에—도 모두 명랑장에 모였다. 시노자키 자신도 후루다테 가문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다쓴도의 아내였던 시즈코와 불륜 관계를 맺다가 결국 결혼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후루다테 다쓴도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경찰이 출동해 수사를 개시했지만, 뚜렷한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다가 다음 날에는 덴보마저 살해당했고, 하녀 다마코는 실종되었음이 밝혀졌다. 덴보가 죽은 방은 비밀 통로가 전혀 없는 완벽한 밀실로 확인되며,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졌다.

긴다이치와 경찰은 명랑장의 구조를 조사하던 중, 비밀 통로와 연결된 지하 동굴에서 다마코의 참혹한 시신을 발견했고, 바로 그 직후에 시노자키의 전처 소생 딸 유코가 중상을 입은 채 비밀 통로 출구 근처에서 구조되었다. 그녀는 기절하기 직전 “아빠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날 밤, 긴다이치는 다하라 경부보와 이가와 형사 앞에서 덴보의 방을 밀실로 만든 방법을 직접 시연했고, 지하 동굴 속 오가타 시즈마의 묘소로 경찰을 안내했다. 그리고 명랑장에 나타난 외팔이의 정체는 마부 조지였다는걸 밝혔다. 조지는 명랑장의 관리인 이토메와 함께, 다쓴도를 괴롭히기 위해 외팔이 행세를 했던 것이었다. 긴다이치는 이후 연이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냈다. 진상은 다음과 같았다.

시즈코는 관계를 이어가던 다쓴도와 함께 남편 시노자키를 살해하려고 했다. 목적은 유산이었다. 다쓴도는 외팔이로 변장해서 시노차키를 살해할 계획이었는데, 범행 예행 연습을 요시에에게 우연히 목격당했다. 둘은 격투를 벌였는데, 외팔이로 변장한 탓에 다쓴도는 요시에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요시에는 현장을 급히 떠나 알리바이를 만든 뒤, 나중에 도르레를 이용하여 마차 위로 사체를 옮겼다. 그래서 복잡한 형태의 현장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덴보는 다쓴도와 시즈코의 불륜을 입증할 수 있는 사진을 가지고 시즈코를 협박했는데, 시즈코는 이를 빼앗기 위해 덴보를 살해했다. 그 현장을 마침 목격한 다마코 역시 시즈코에 의해 희생당했다는게 진상이었다.

마지막에, 외팔이로 위장해 남편 시노자키를 제거하려던 시즈코의 계획은 요시에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리고 둘은 함께 무너지는 비밀 통로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요코미조 세이시가 1975년에 발표한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의 중후반부 작품입니다.‘명랑장(미로장)’이라는 기묘한 저택을 무대로 복잡한 가족사와 잇따른 살인 사건을 그려낸 본격 추리소설이지요.

장점이라면 사건들이 흥미롭고 풍성하다는 점입니다. 명랑장이라는 독특한 공간에 연쇄 살인이 어우러지는 구성은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특히 덴보가 살해된 밀실 트릭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작품 속에 흩어진 단서들이 수수께끼 해결에 필요한 정보로 작용하는 점 역시 공정한 추리의 전형이라 할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작품 속 핵심 수수께끼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죽은 다쓴도는 왜 외팔이인척 했는가?
  2. 범인은 다쓴도를 왜 번거롭게(둔기로 타격한 뒤 교살하여 마차 위에 올려놓는 식으로) 살해했는가?
  3. 덴보를 살해하고 밀실을 어떻게 만들었나?

여기서 1번 수수께끼의 답은, 다쓴도가 외팔이인척 다른 범행을 저지르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군가 다쓴도가 외팔이로 보이게끔 조작하지 않았다는건, 그의 복장과 가져온 짐으로 증명되었고요. 2번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역시 도르래와 모래 주머니, 그리고 범인 요시에의 조금 어긋나있는 알리바이 증언으로 증명됩니다.
3번 트릭을 풀어내기 위한 단서로는 이전에는 다른 곳에 놓여 있던 칠기 접시의 존재, 그리고 시즈코의 프랑스 자수가 지속적으로 언급됩니다. 범인은 접시에 바늘을 꽂은 뒤, 실을 회전창 너머로 넘기고 이 실에 열쇠를 매달아 접시 위로 내려보냈던 겁니다. 바늘은 밖에서 잡아당겨서 회수했고요.

그 외의 수수께끼들에 대한 추리 모두가 논리적으로 제시됩니다. 명랑장에 나타났던 외팔이의 정체가 조지였다는 추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토메가 조지를 외팔이로 변장시켰던건데, 선대 주인 가즌도가 죽은 이유가 다쓴도의 비열한 소문 때문이었으니 이토메가 원한을 품은건 당연합니다. 

긴다이치와 경찰이 탐험해 나가는 명랑장의 미로에 대한 묘사는 모험물을 보는 듯한 느낌도 전해 주어서 좋았습니다. 약간 "팔묘촌" 느낌도 나더군요.

그러나 좋은 본격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주요 범행이 일어난 이유가 우연이라서 범행에서 정교함을 느끼기 어려운 탓입니다. 다쓴도가 살해된 것은 요시에에게 살인 모의 장면이 들켰기 때문이었고, 다마코 역시 시즈코가 덴보를 살해한 직후 우연히 방을 찾은 바람에 희생당했으니까요. 이런 전개는 극적이긴 하나, 치밀한 계획 범죄의 인상은 줄 수 없었습니다. 

범행 동기의 설득력도 낮습니다. 시즈코가 신고와 결혼한 뒤에도 다쓴도와 관계를 이어갔다는 핵심 동기에 대한 단서가 전혀 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쓴도는 돈도, 외모도 특별히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지도 않고요. 재산, 외모 모두 시노자키가 압도적인데 시즈코는 왜 다쓴도와 관계를 이어나가며 남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걸까요?
이런 동기 부분의 설득력이 약한건 비슷한 설정인 - 위장 결혼 후 재산을 노리고 배우자를 살해하는 - 걸작 "나일 강의 죽음"도 그렇다 치죠. 하지만 다쓴도가 살해당한 뒤, 범행을 이어나간 시즈코의 동기는 아예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우선, 협박자인 덴보를 구태여 살해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불륜의 대상자인 다쓴도가 이미 죽은 상황에서는, 시노자키에게 고백하고 불륜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게 빠른 방법이었으니까요. 어차피 시노자키도 원죄 - 시즈코와 강제로 결혼한 - 가 있으니 괜찮았을거에요. 설령 협박에 대한 앙심을 품고 살인을 저질렀다 치더라도, 덴보의 방을 밀실로 만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알리바이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 시간만 걸리는 무의미한 행동이었으니까요. 이건 독자를 위해 억지로 끼워넣은 단순한 장치 이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시즈코가 신고를 살해하려 했던 계획은, 외팔이 범인의 존재를 조작해 빠져나가려는 원래의 설정과 연결되지만 이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명랑장에는 명탐정 긴다이치와 경찰들이 상주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이 범행이 성공할 가능성은 애초에 희박했습니다. 게다가 원래의 외팔이가 누구인지 시즈코는 모르는 상황입니다. 누군지 모르는 진짜가 있는데, 그 진짜를 위장해서 경찰이 우글거리는 상황에서 범행을 저지른다? 시즈코의 범행 시도는 설득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쓴도와 시즈코의 관계를 알아챈 시노자키가 1,000만엔을 주고 관계를 끊고자 했다는 핵심 동기가 맨 마지막 에필로그에나 등장한건 반칙같이 느껴지네요.

후더닛 물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명랑장에 모인 사람 중 비중이 있는건 주인인 시노자키와 시즈코 부부, 다쓴도, 덴보, 요시에와 시노자키의 딸 요코, 비서 오쿠무라, 종업원 이토메, 조지 정도가 전부입니다. 살해당한 사람을 빼고,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는 요코와 오쿠무라, 동기가 없을 조지를 빼면 시노자키와 시즈코, 이토메만 남습니다. 시노자키가 시즈코와 다쓴도의 불륜을 알고 살해하려고 했다는건 있을 수 없고 - 본인도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까 - , 설령 그랬다쳐도 덴보를 살해할 이유는 없으니 시노자키는 범인일리 없습니다. 이토메가 범인이라면, 그녀 역시 덴보는 죽일 이유도 없지만 지난 수십년간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구태여 지금 범행을 벌일리 없고요. 그러니 유력한 범인은 시즈코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침 알리바이도 없으니까요. 

아울러 요코미조 세이시 특유의 기괴하고 뒤틀린 가족 관계도 뻔하고 식상했습니다. 명랑장이라는 무대 설정 역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어서 현실감이 떨어졌고요. 그리고 이토메와 조지가 현재 주인인 시노자키에게 품고 있는 과다한 충정의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본격 추리 소설의 구조는 갖추고 있지만 주요 동기와 설정의 설득력 부족, 과도한 우연의 연속, 뻔한 인물 구성 등이 완성도를 낮춥니다.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5/31

옥토버리스트 - 제프리 디버 / 최필원 : 별점 2점

옥토버리스트 - 4점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비채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브리엘라는 딸 세라를 유괴당했다. 유괴범 조셉은 가브리엘라의 사장인 찰스 프레스콧이 가지고 있던 '옥토버리스트'와 돈 50만 달러를 요구했다. 가브리엘라는 우연히 만나 친해진 펀드회사 대표 대니얼의 도움으로 리스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조셉과 협상에 나서는데...

제프리 디버는 링컨 라임 시리즈로 잘 알려진 작가지만 이 작품은 링컨 라임 시리즈가 아닙니다. 어딘가의 리스트에서 걸작이라고 추천했던 기억이 나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무슨 리스트인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36장에서 시작해 1장으로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영화 "메멘토"에서 처음 접했던 방식인데, 소설로는 처음 접해보았습니다. 이 역순 전개는 단순한 실험을 넘어서,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는 중요한 구조적 장치로 작용하며, 덕분에 등장인물과 사건에 대한 선입견이 하나씩 깨지는 묘한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랭크가 칼로 사람을 찔러 죽였는데 실제로는 게임 속 상황이었고, 교회 집사라 선한 인물일 거라 생각했던 노란 셔츠의 딕슨이 사실은 킬러였으며, 엘레나가 차에 치인 줄 알았던 장면도 알고 보니 연기였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일종의 반전 요소들은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강도가 더욱 커져 긴장감을 높입니다. 대니얼이 킬러였다는 첫 번째 반전을 시작으로, 가브리엘라는 대니얼을 잡기 위해 함정 수사를 벌이던 형사였다는 두 번째 반전, 그리고 가브리엘라 역시 다른 조직과 연계된 킬러로 애초에 대니얼 일당을 제거하는게 본래 목적이었다는 마지막 반전으로 이어지거든요.

결말에서는 대니얼 일당은 가브리엘라의 계획대로 조셉에게 살해당하고, 경찰이 가브리엘라의 행방을 놓쳤던건 그녀가 소지품을 쓰레기차에 버렸기 때문이었다는 등 모든 떡밥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기도 합니다. 이런 떡밥에는 '옥토버리스트'는 대니얼을 유인하기 위해 대충 만들어낸 맥거핀으로 명칭조차 "옥토버 페스트"에서 따왔다던가, 대니얼이 의미심장하게 언급했던 ‘프리스턴 솔루션’은 알고 보니 요트 커버 색깔에 불과했다는 등도 있고요.
책 맨 마지막에 수록된 목차의 진짜 제목들이 이런 정리를 도와주는데, 예를 들어 챕터 35의 제목은 ‘대니얼의 무덤’입니다. 대니얼은 이 챕터에서 죽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역순 전개가 반전을 위한 장치로만 활용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야기의 설득력을 희생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케플러와 수나리 형사는 이미 가브리엘라가 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작품 중반까지 이에 대한 단서나 암시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내용을 전부 이해한 뒤 돌이켜보면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요 반전들이 충분한 복선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한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가브리엘라가 형사이자 킬러였다는 설정, 대니얼의 정체 등이 대표적인데요. 모두 과거 사건이나 대화 장면을 갑자기 삽입해 설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반전은 많지만 정교하게 설계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 가브리엘라가 킬러였다는 반전은 반드시 필요했는지 의문이에요. 깜짝 놀라게 만드는 반전에 집착한 나머지, 전체적인 설득력이 떨어져 버린 셈입니다.

또한 프랭크처럼 중요한 인물처럼 보였지만 결국 큰 역할 없이 사라지는 인물들이 많았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로 보이기는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이야기의 밀도를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독특한 형식과 실험 정신은 분명히 흥미롭지만, 반전 위주의 전개가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전체적인 설득력이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굳이 찾아 읽을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4/26

엘리펀트 헤드 - 시라이 도모유키 / 구수영 : 별점2점

엘리펀트 헤드 - 4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가조 의과대학 부속 병원 정신과 의사 기사야마는 배우인 아내 기키, 대학생이자 가수인 큰 딸 마후유, 고등학생 둘째 딸 아야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가족의 행복이 쉽게 깨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마술사였던 아버지의 학대로 인한 아픈 기억 탓이었다. 그래서 기사야마는 가족의 행복을 망치려는 원흉을 사전에 제거해 왔고, 최근에는 딸을 취재 목적으로 스토킹하던 방송인 이즈미를 살해했다. 그러나 마후유가 애인 하루를 가족에게 소개시켜 주는 날, 하루가 기사야마에게 돈을 받고 관계를 가졌다는걸 폭로해서 가족은 붕괴되고 말았다. 자포자기한 기사야마는 마약상 에덴으로부터 건네받은 '시스마'를 주사했다. 그런데 시스마가 이상한 효과를 일으켜 시간을 역행한 기사야마는, 하루를 습격해서 입을 막고 가족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 시간 역행이 아니라 시간 분기였다. 결국 두 개의 시스마를 사용해 사태를 해결한 행운아, 한 번 실패해서 시간 역행 효과만 확인한 복원자와 공격받아 입원한 산송장, 모두 실패한 도망자라는 다중 시간축이 생겨났다. 기사야마들은 어느 시간 축에서라도 사람이 죽으면(기사야마가 살해하면), 모든 시간 축 사람이 죽는다는걸 알아내고 나름대로 규칙을 세워 살인을 막으려 했지만, 마후유와 기키, 아야카가 차례대로 끔찍하게 살해되고 마는데....

신예 작가 중 '추리' 장르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시라이 도모유키의 최신작.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을 여러 시점에서 추리하는 구성이 특징인데, 이번에는 각기 다른 시간축(멀티버스)에 존재하는 동일 인물이 사건을 파헤친다는 점이 새롭습니다. 이처럼 다중 시간축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 그리고 시간축이 달라도 죽음의 순간은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설정에서 일종의 ‘특수 설정 미스터리’이기도 합니다.

탐정역을 소화하는 기사야마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점도 큰 특징입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방해물로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죽이고 파괴하는 소시오패스거든요. 아내의 스토커를 잡아다가 능욕하고, 딸 스토커는 살해하는 초반부 단계를 지나 후반부로 갈 수록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는데 그 수준이 정말 어마무시합니다. 

그러나 참신함, 독특함은 설정에 국한될 뿐, 정작 추리의 완성도는 아쉬움이 큽니다. 여러 명의 기사야마가 가족의 죽음을 놓고 펼치는 대부분의 추리는 결국 ‘추리를 위한 추리’에 불과해 억지스럽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아야카가 폭발한 이유가 알약에 숨겨진 소형 폭탄 때문이라는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사람이 산산조각이 나고, 신체 조각이 날아갈 정도라면 알약 크기 폭탄으로는 어림도 없으니까요. 다중 시간축에 있던 복수의 가족들이 동시에 죽었는데, 죽은 상태가 서로 극과 극이라 사망한 원인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저절로 폭발했다는 추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추리 자체는 그럴싸한데, 상황이 너무 말도 안돼요. 추운 차를 운전하다가 동사하고, 두꺼운 탈을 쓰고 공연하다가 열사병에 걸려 죽는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여러 명이 추리를 펼쳐봤자 다 억지스럽고 말이 안된다면, 이건 그냥 분량 낭비일 뿐입니다. 이런 류의 대표 걸작 "독 초콜릿 사건"처럼, 모든 추리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진상 또한 억지스럽습니다. 기사야마들은 가족들이 죽는 순간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어서, 범인 기사야마는 피해자가 죽는 순간에는 손을 대지 않는 '시한 장치 트릭' 더하기 '원격 조종 트릭'을 사용했는데, 상황을 극단적으로 정교하게 맞춰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마후유는 '행운아'가 죽였습니다. '행운아'는 마후유가 하루와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는걸 알게된 뒤, '산송장'의 손을 빌어 하루를 죽게 만듭니다. '산송장'의 시간축에서 하루가 죽자, '행운아'의 시간축 하루도 죽는데 마침 운전 중이라 교통사고가 일어나게 되고요. 사고로 차밖으로 튕겨나간 마후유는 공교롭게 지나가던 차량에 머리가 으깨져 죽습니다. 즉, 이 모든건 말 그대로 ‘기적의 타이밍’에 의존하고 있을 뿐입니다. 안전벨트를 하고 있던 마후유가 왜 튕겨나갔는지도 모르겠네요.

아야카 폭사에 대한 진상은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도망자' 기사야마가 그녀를 성폭행해 임신시킨 뒤 태아를 불법으로 적출해 폭사시키고, 임신을 유지하던 '두더지' 시간대의 아야카의 뱃 속 아기가 폭발하자 다른 시간축의 아야카들 모두 폭사했다는건데, 이건 추리의 수준을 떠나 인간적으로 거부감이 듭니다. 이렇게 반인륜적인 이야기를 트릭으로 포장한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합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동기가 불분명하다는 단점도 추리물로는 치명적입니다. 행운아는 마후유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행운아의 시간축에서는 마후유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소시오패스라서, 자신에게도 문제가 생길까봐 두려워서 죽였다? 정신병자의 과대망상이 동기인 작품이 추리물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또 이게 동기라면, 행운아가 마후유를 살해했다는걸 숨길 이유는 없어요. 약속대로 다른 시간 축의 기사야마들이 가족을 죽이면, 손 안대고 위험요소를 모두 제거할 수 있으니까요. 

설정도 편의적이고 작위적입니다. 죽음만 동일하게 적용될 뿐, 상처 등은 시간축에서 공유되지 않는다는게 대표적이에요. 상식적으로는 상처도 동기화되어야지요. 산송장이 중상을 입었을 때, 다른 시간축의 기사야마들도 모두 동일한 상처를 입고 쓰러졌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더지가 도망자를 죽이려고 배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에필로그도 납득하기 어려워요. 도망자를 죽이려면 그냥 자살하면 됩니다. 시간축에 있는 모든 기사야마가 동일한 운명을 맞을테니까요. 또 에필로그에서처럼 한 시간축에서 터진 폭탄이 다른 모든 시간축에 영향을 미친다면, 앞서의 현란하고 복잡했던 시한 장치 및 원격 조종 트릭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네요. 그냥 하루와 마후유가 탔던 차에 폭탄을 설치하면 되잖아요?

기사야마에 대한 묘사도 이상해요. 기사야마들은 시간축만 다를 뿐 모두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시간축마다 별개의 인격을 가진듯 보이는건 잘못되었습니다. 심지어 아야카 폭사 때 두더지는 도망자의 부탁을 받아 아야카의 아이를 살려주기까지 하는데, 이건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

시스마를 잔뜩 맞은 탓에 시간축을 오가는 절대자가 된 우라시마도 사건 진상을 추리하기 위한 탐정역이 필요해서, 기사야마를 뛰어넘는 절대자가 필요해서 등장시킨 듯 한데, 인물 설정이나 등장 과정, 묘사 모두가 과장되고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점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시스마를 맞은 복원자가 첫 번째 시스마 이전 시점으로 돌아가 시간축을 한 번 더 분기시켜 ‘두더지’가 생겨났다는 설정은 참신했습니다. 이즈미 사키와 페페코 등 단순한 희생양으로 보였던 인물들을 활용하여 독자에게 시간 이동을 착각하게 만든 디테일도 눈에 띄었고요. 여러 시간축의 기사야마들이 추리를 펼칠 때, 사이렌 소리와 기키와의 과거사 등을 근거로 산송장이 사실은 아파서 누워있는 척 했다는 추리도 괜찮았습니다.

그래도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참신한 설정과 캐릭터 구도는 흥미로웠지만,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비윤리적인 트릭과 없다시피한 동기, 개연성 부족의 삼박자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전에 보았던 한 추천 리스트에서 언급했듯, 재미는 있지만 최악이에요. 모든 분들께 권해드리기는 좀 어렵습니다.

2025/04/12

공허의 상자와 제로의 마리아 1 - 미카게 에이지 / 제이노블 : 별점 2점

공허의 상자와 제로의 마리아 1권 - 4점
EIJI MIKAGE/테츠오/제이노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호시노 카즈키)는 엄청난 미모를 갖춘 전학생 오토나시 아야를 보자마자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런 나에게 다가온 아야는 '오늘 모기 카스미의 팬티 색깔은 하늘색이야'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종례를 앞두고, 아야는 반 친구들에게 자기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어디서 나온지도 모를 '마리아'라는 이름을 써 주었고, 아야는 그런 나를 붙잡고 자신이 끝없이 3월 2일을 반복하고 있다는걸 알려주는데...

라이트 노벨로, 원제는 『空ろの箱と零のマリア』입니다. 일본에서는 2009년 전격문고를 통해 발매되었으며, 국내에는 대원씨아이에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총 7권으로 완간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는데 최근 e-book으로 재출간되었더군요. 라이트 노벨은 평소 전혀 읽지 않지만, '걸작 시간 미스터리'물로 선정된 적이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시간 미스터리'답게, 의도하지 않게 특정 시간을 반복한다는 타임 루프물입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로 대표되는 설정이지요. 소설로도 "일곱 번 죽은 남자" 등에서 활용되었고요. 다른 작품들처럼 무한 시간 반복을 없애려면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만의 특징도 분명합니다. 우선, 시간을 반복하는건 화자이자 주인공 호시노가 아닙니다. 호시노는 이 사실을 전학생 오토나시 아야에 의해서 나중에야 깨닫게 되거든요. 

그리고 작 중 '거절하는 교실'의 시간 반복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 소원을 빈 '상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찾아야 한다는게 조건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일종의 '후더닛' 류의 추리물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이를 밝히는 추리도 합리적이에요. 상자의 주인인 모기 카스미는 시간을 수없이 반복한 탓에, 자기 자신을 꾸밀 이유가 없어져서 화장품을 가지고 다니지만 화장을 하지 않았다는걸 통해 알아채거든요. 호시노 카즈키의 친구 하루아키가 상자의 주인 제로였다는 걸 알아채는 추리도 괜찮았습니다. 모기 카스미가 상자에 갇힌 뒤, 다시 시간 반복이 일어났는데 모기를 아이가 대체했다는 상황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루아키는 '모기가 굉장히 예뻐졌다'는 식으로 이걸 알아챈 말을 했기 때문에 정체가 발각되고 말지요. 독자에게 주는 단서로도 공정한 수준입니다.

무엇보다도 모기가 상자의 주인이 되어 빈 소원이 지극히 청춘 연애물스러운 동기였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모기는 카즈키를 좋아해서, 고백이 거절당한 뒤 고백한 날을 반복했습니다. 수만번의 반복 끝에 카즈키가 고백을 받아주는건 물론, 카즈키가 되려 고백을 하게끔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매 번 새로운 날이 또 시작되었고 카즈키는 고백했다는걸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거지요. 사춘기 소녀라면 할 법한 귀여운 생각이었는데, 그 단순한 소망을 상자가 뒤틀린 형태로 이루어주었다는게 매우 흥미로왔습니다. 소원을 이루어 주지만 그걸 치명적인 방식으로 왜곡한다는건 고전 걸작 "원숭이 손"을 비롯해서, "펫샵 오브 호러즈" 등에서 자주 보아온 장치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본작에서는 소망 자체가 귀여운 만큼, 반전의 잔혹성이 더 크게 다가왔어요.

하지만 유치한 인물 설정과 대사, 그리고 라이트 노벨 특유의 감정 과잉 묘사는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대사로 모든걸 표현하려고 해서, 소설보다는 만화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설정 면에서도 몇몇 부분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예를 들어, 모기가 상자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시간이 반복될수록 상자에서 거절당한(모기가 죽인) 친구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기만 남게 되니까요. 즉, 대단한 추리 없이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오토나시 아야는 이미 이전에 상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내어 모기와 대결한 적이 있었다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다시 시간이 반복되자 이를 잊어버렸다는건, 설정 붕괴처럼 느껴집니다. 카즈키에 대해서는 기억이 남아있었으니까요. 물론 상자의 주인 제로나 상자의 능력이 개입하여  아야의 기억을 조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상자의 주인은 결국 반복 속에서 당연히 드러날 터라 구태여 조작을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또, 모기가 죽어서 상자에 갇힌 상황에서도 시간의 반복이 깨지지 않았다는 설정 역시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 조금 답답했고요.

물론 이런 설정 부분에 대한 설명은 제가 읽은 1권 외, 전 7권에 이르는 나머지 분량에서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더 읽을 의욕이 생기지 않는군요. 재미가 없는건 아니고, 설정도 매력적인 부분이 있지만, 캐릭터성과 연출 방식이 라이트 노벨 특유의 유치함에 갇혀 있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앞으로는 무슨무슨 리스트에서 추천하는 작품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읽는건 지양해야 겠습니다.

2025/04/11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권영주 : 별점 4점

거짓과 정전 - 8점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SF 대상을 수상했던 떠오르는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인 "거짓과 정전" 외에도 "마술사", "시간의 문", "한 줄기 빛", "무지카 문다나", "마지막 불량배" 등 현실과 환상, 과학과 감성이 절묘하게 섞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SF적 설정과 기발한 아이디어와 만나 매우 신선한 재미를 준다는 점입니다. 시간 여행을 마술 무대와 연결한 "마술사"부터 그러합니다. 마술에 대해 현실적이며 설득력있게 묘사하다가, 시간을 넘나드는 마술을 '타임머신'과 결합시켜 의외의 결말로 이끄는 솜씨가 정말 탁월합니다.

유행이 사라진 세상에서 유행의 의미를 되짚는 "마지막 불량배", 과거로 정보를 보내 세계를 조정하는 냉전 시대의 첩보극 "거짓과 정전"도 모두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품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불량배"는 유행과 취향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어,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소비에 대해 많은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예전처럼 하나의 앨범도 신중하게 고민하고 구입한 뒤, 그 앨범을 반복해 들으며 취향을 만들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그런 고민없이 모든걸 쉽게 소비하는 세상이 되어 '취향'이라는게 사라지는 세상이 되었다는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거든요. 지금의 취향은 내가 아니라 인터넷이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SF 외에도, 일상 속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들도 돋보입니다. "한 줄기 빛"은 아버지가 남긴 경주마의 계보를 따라가며 자아를 발견하는 성장물인데, “서러브레드가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이유는 생명의 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라는 문장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깁니다.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안도현 시인의 시 -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무지카 문다나"에서는 음악이 화폐인 섬을 배경으로,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감성적으로 풀어냅니다. 다이가의 아버지는 훌륭한 음악(다이가)을 듣기 위해 자신의 최고 걸작을 남겼지만, 다이가를 들은 뒤에는 음악을 포기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이가는, 스스로 '다이가'를 듣기 위해 포기했던 음악을 다시 시작할걸 결심하고요. 음악을 포기한 다이가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면 음악을 다시 시작하리라 여겼던 아버지의 배려(?), 그리고 미워했던 아버지의 속셈을 알면서도 속는 다이가의 모습이 짠합니다. 이처럼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밀도 높게 다루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도 뛰어납니다. "마술사"에서 시간여행은 실제로 일어났는지, "한 줄기 빛"에서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졌는지, 템페스트, 레티시아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등을 따라가면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추리적인 요소도 흥미롭습니다. "시간의 문"에서 오펜하임이 1932년 7월 31일, 나치당에 투표했을지?를 물어보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전날밤 오펜하임은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는 켄타우루스 자리를 보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독일 본토로 돌아가 투표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건 교묘한 전개 능력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결합되어 의외의 결론으로 향하는 "거짓과 정전" 처럼요. 작품은 엥겔스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바로 다음에 80년대 CIA 모스크바 지국 정보원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결국 두 이야기가 결합되며 마무리되는데 기발하고 교묘하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수록된 모든 작품이 동일한 수준은 아닙니다. "시간의 문"은 우화에 가까운 작품으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개나 반전이 평이해 다소 뻔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또한 SF적 설정으로 보자면, "거짓과 정전"을 제외하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거나 단지 상징적인 장치로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의 문"에서의 기억 조작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우화적 도구에 가까우며, 인물의 존재가 사라지는 설정도 설득력 있는 논리로 뒷받침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몇 명쾌하지 않은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술사"에서 정말 타임머신을 만들었는지, 시간여행의 모순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거짓과 정전"의 '정전의 수호자'들이 역사 수정을 방지한다는 진상도 방법적으로는 잘 모르겠고, 설정도 과거 "타임캅"류의 타임 패러독스 방지물과 별다르지 않아서 시시했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SF적인 상상력과 서정적 감성이 잘 결합된 작품들입니다. 일부 아쉬운 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몰입감 있고, 인상적인 독서 경험을 선사합니다. 아직 읽어보시지 않은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2/07

붉은 박물관 - 오야마 세이이치로 / 한수진 : 별점 2점

붉은 박물관 - 4점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사 1과의 데라다 사토시 경사는 수사 중 실수를 저질러 경시청 부속 범죄 자료관(붉은 박물관)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은 경시청 관내에서 일어난 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일정 기간 경과 후 관할 경찰서에서 받아와 보관하고, 그것을 조사 연구 및 수사관 교육에 활용하여 향후 수사에 도움이 되게끔 하는 곳이었다.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수집된 미해결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고, 데라다에게 직접 수사를 맡겨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오야마 세이이치로의 정통 본격 추리 단편집. '붉은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가 안락의자 탐정으로, 기존 수사 기록과 데라다를 시켜 모은 정보로 미해결 사건을 추리해 낸다는 내용입니다.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드라마가 발표되었을 정도로 인기작이었던 모양입니다.

오래 전 미해결 사건에 대한 정보가 모이는 부서에서 사건을 추리한다는 설정은 로이 비커즈의 "미궁과 사건부"와 똑같습니다. 딕슨 카의 "기묘한 사건, 사고 전담반"과도 비슷하고요.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장르 성격도 동일합니다. 수록작들 모두 어느 정도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탐정이 독자들과 똑같이 단서를 제공받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인 덕분입니다. 덕분에 독자도 탐정과 동일한 조건 하에서 추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급해드린 고전 명작 수준은 아닙니다. 대부분 작품 속 트릭이나 범행 동기가 별로 현실적이지 않고, 억지스러운게 많은 탓이 큽니다. 트릭도 5편 중 한 편("죽음에 이르는 질문")을 제외하고는 'A인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보니 아니었다.'같은 사람 바꿔치기일 뿐이고요. 사건을 풀어나가는 전개 방식도 작위적이거나 우연에 기반한게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캐릭터들도 영 별로입니다. 탐정역인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일본 컨텐츠에 나오는 쿨 뷰티 안경녀의 전형으로, 생생함을 느끼기 힘든 인물이었습니다. 열혈도 아니고, 사명감도 딱히 없어 보이는 미지근한 초식남 데라다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을 다시 불러온 의욕은 좋았지만, 완성도는 고전 걸작들에 미치지 못합니다.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빵의 몸값

1998년 2월 일어났던 나카지마 제빵 사장 살해 사건이 벌어졌다. 사장은 빵에 바늘을 집어넣은 범인에게 1억엔을 건네주려다 살해당했다. 밖에서 숨어있던 경찰들은, 현장인 저택 내부 방공호의 존재를 몰라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 

현장인 폐허로 들어갔던건 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수사를 위해 차 안에 숨어있던 경찰 도리이였습니다. 그는 출발할 때 차고에서 가발과 안경, 마스크를 착용하여 사장으로 변장했고, 차 안에서는 1인 2역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사장으로 폐가에 들어간 뒤, 변장을 풀고 수사관인척 나타났고요.
사장이 다른 사람을 살해할 때의 알리바이를 만드는게 목적이었습니다. 사장과 도리이는 뺑소니 사고를 일으켜 사람을 사망케 했는데, 함께 있던 야스다가 자수하려고 해서 죽이려고 했던거지요. 하지만 사장은 야스다에게 반격당해서 죽어버렸고, 이 사실을 들은 도리이는 사장인 척 연기에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장과 도리이 경부가 바뀌었다는 트릭은 나쁘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 - 협박범에게 돈을 건네주기 위해 이동하던 - 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고요. 그러나 그 외에는 대부분 억지스럽습니다. 경찰이 뺑소니 사망 사고를 일으킨걸 숨기려다 범행을 저질렀다는 동기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게다가 공범자 중 한 명을 죽이기 위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무려 1억엔의 돈이 걸린 협박 사건을 꾸며냈다? 알리바이는 경찰인 도리이 경부가 거짓말로라도 증명해주면 됩니다. 이런 거대한 사건을 꾸며낼 이유가 없어요. 그야말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허무맹랑한 설정 놀음일 뿐입니다.

트릭도 운에 너무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저택 안에 방공호가 없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야스다가 자살같은 사고사를 당하지 않았더라면요? 여러모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아보이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수 일기

데라다 사토시는 1993년 9월 하치오지시 살인 사건 범인 다카미 교이치의 일기를 읽었다. '헤어졌던 애인 마이코가 살해당했다. 나는 몇 가지 단서를 토대로 범인이 오쿠무라 교수라고 추리했고, 교수와 담판을 짓던 끝에 그를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일기장은 도둑맞았었는데 도둑이 경찰에 신고했고, 다카미는 출동한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가 차에 치어 죽었다.
히이로 사에코는 일기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챈 뒤, 데라다 사토시에게 재수사를 명령했다. 데라다는 명령대로 마이코의 부모님 집으로 찾아가, 오쿠무라 교수 살해 당시 알리바이를 물었다...

히이로 사에코가 일기에서 포착했던 '이상한 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꽤 치밀한 범행 계획을 세웠음에도 흉기를 가져가지 않고 현장의 페이퍼 나이프를 쓴건 확실히 이상했어요. 에어컨을 껐다는 묘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체가 일기 내용대로 범행 뒤 무더위 속에 방치되었던게 아니라, 시원한 실내에 놓여 있었다면 사망 시각은 훨씬 이전이 될 테지요. 

결론적으로, 오쿠무라 교수는 일기보다 이전에 살해당했습니다. 오쿠무라가 일기를 조작하여 경찰에 보내면서까지 진범을 자처했던건, 진범이 마이코였기 때문이고요. 이틀의 시차를 둔 건, 마이코의 알리바이(이미 사망했음)를 확실하게 만들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진상을 추리해내는 과정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보다야 낙후되었다 하더라도, 90년대 과학 수사가 무려 이틀 이상의 사망 시각 차이를 밝혀내지 못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운에 의지하고 있는 부분도 너무 많습니다. 마이코 자살 사체가 발견되기 전, 다카미가 마이코의 집을 방문했다는걸 아무도 몰랐고, 하숙집에서 가짜 도둑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들키지 않았고, 오쿠무라 집의 에어컨 조작을 들키지 않은 것 등은 모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에어컨 조작의 경우, 전기 사용량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죽음이 공범자를 갈라놓을 때까지

데라다 사토시는 눈 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피해자 도모베 요시오가 사망하기 직전에, 25년 전 교환 살인을 저질렀다는 고백을 들었다. 조사해보니 실제로 25년 전,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확실하여 해결되지 못했던 사건들이 있었다...

교환 살인을 소재로 한 작품은 흔한데("낯선 승객"), 데라다 사토시에게 죄를 고백한 도모베 요시오는 가짜였고, 도모베 마사요시 살인 사건의 진짜 청부인도 도모베 요시오가 아니라 아내 마키코였다는 바꿔치기 트릭이 합쳐져 신선한 재미를 선사해주는 작품입니다. 마키코는 가짜 도모베 요시오인 사이토 아키히코와 초등학교 동창으로 범행을 모의했습니다. 마키코는 2년 전 도모베 요시오를 살해한 뒤, 사이토 아키히코를 대역으로 삼아 살아왔습니다.
데라다가 들은건 도모베 요시오가 아니라 사이토 아키히코의 고백이었기 때문에, 25년 전 사건 조사를 할 때 혼돈을 일으켰던 것이고요.

진상을 드러내는 추리 과정도 매끄럽고, 단서 제공도 가짜 도모베 요시오의 면허 취득 기간을 감안하면 믿을 수 없는 운전 실력, 폐업 후 지방으로 내려간 상황, 근육질인 마키코의 체형(그래서 25년 전 여성 한 명을 살해하기 용이했다) 등 과할 정도로 제공됩니다. 

때마침 데라다 앞에서 교통 사고가 일어나고, 마침 피해자가 경찰에게 지은 죄를 고백한다는  상황은 작위적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정통 본격 추리물로는 충분한 완성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길

사진작가 에미리는 21년 전 부모와 이모를 잃었다. 세 명은 청산가리로 독살당했고, 집과 사체는 범인이 지른 불로 전소해버렸다. 이모의 연인이라는 남자 소행으로 보였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못했다. 사건에 대한 글을 잡지에서 읽은 히이로 사에코는 데라다에게 에미리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지시했다. 

에미리의 친모 도모코는 친모가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동생 아키코가 불륜을 저질러 에미리가 태어났지요. 그런데 둘 사이에 또 애가 생기자 복수심에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입니다. 에미리를 임신했을 때와 겹쳤던 아키코의 유학 및 실종 기간, 아키코의 애인 이야기는 도모코의 말 뿐이었다는 것, 도모코는 연장 보육 제도 이용도 고려했다는 등의 단서 및 이를 통한 추리도 깔끔합니다. 사건의 동기도 끔찍하지만 충분히 설득력있고요. 수록작 중에서는 범행 동기와 과정만큼은 가장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증거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해결했다기 보다는, 그나마 말이 되는 추리를 추가했을 뿐이지요. 그래서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추리 퀴즈에 가까와 보이기도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질문

26년 전 발견되었던 피살체와 똑같은 상태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26년 전 사건의 피해자와 연령이 같았고, 사망 추정 시각 및 사체 유기 현장도 똑같았으며 심지어 흉기마저 일치했다. 이번에도 피해자 스웨터 소매에 피해자가 아닌 사람의 피가 묻어 있었다. 수사 1과는 동일범의 소행이라 여겨 자료관에서 26년 전 자료를 가져갔다. 이런저런 이유로 수사관이 범인일 수 있다는 감사팀의 지시를 받아 데라다는 홀로 사건 수사에 나섰다...

범인은 기자 후지노 준코였습니다. 그녀는 26년 전,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후쿠다 도미오를 살해했습니다. 후쿠다 도미오 소매에 묻은 피는 아버지의 피였습니다. 준코를 학대하던 아버지는 후쿠다를 끌어들였다가 살인 사건에 휘말려 입을 다물게 되었고요.
그리고 26년 후,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친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소매의 피는 DNA 조사를 할 테고, 이를 통해 가족 관계가 드러날걸 노렸던 겁니다. 

이를 드러내는 '26년 전 피가 묻었던 소매와 지금 피가 묻은 소매의 위치가 다르다'는 단서도 좋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어느 쪽 소매에 피가 묻었는지 전혀 공개되지 않아서, 범인은 이를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팀 생각대로 수사팀 관계자가 범인이었다면, 26년 전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을테니 위치를 틀렸을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범인은? 피에 대한 경찰 조사 결과를 입수할 수 있는건 보도 관계자일테고, 관련되어 질문을 하는 관계자가 범인일거라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의 과정은 영 별로입니다. 비약이 심한 탓입니다. 보도 관계자가 범인일 수는 있지만 다른 가능성도 널려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DNA 분석 요원일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기자회견을 맡는 수사관이 아닌 경찰 직원이라던가... 기자 회견장에서 후지노 준코가 DNA 조사를 물어본 것도 작위적이었습니다.

추리 과정보다 더 큰 문제도 있습니다. 동기와 범행의 설득력이 낮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DNA가 범행 당시 핏자욱밖에 남아있지 않다면,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자수하고 그 증거로 혈흔이 아버지 것이라는걸 증명하는게 훨씬 간단한 해결책입니다. 억지로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를 이유는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인 '정통 본격 추리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망작입니다.

2025/01/26

극한 상황에서의 탈출극 소설 추천

가끔 소개해드리는 honto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이번에는 극한 상황에서의 탈출극 리스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티븐 킹의 "아주 비좁은 것"을 추천하고 싶네요.


지진이나 사고로 폐쇄된 공간에 갇힌 주인공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소설을 소개합니다. 밀실 미스터리는 물론, VR 공간이나 우주 공간을 무대로 한 SF 작품까지 다양하게 준비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의 탈출극을 직접 체험해 보세요. 스릴 넘치는 스토리 전개에 손에 땀을 쥐게 될 것입니다.

"방주" 유키 하루오

지진으로 지하 건축물에 갇힌 남녀 10명. 심지어 물이 차오르는 상황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한 명이 희생되면 나머지 전원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살인범을 찾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합니다. 탈출이냐 죽음이냐의 시간적 제약,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 전개, 아름답게 짜인 논리적 추리 등, 읽는 재미가 가득한 걸작 미스터리입니다.

"아리아드네의 목소리" 이노우에 마기

지하 복합 시설에 남겨진 여성은 시각과 청각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하루오는 최첨단 드론을 사용해 그녀를 구조하려 하지만, 연이어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닥쳐옵니다. 시간 제한이 있는 고난도 탈출 미션극이자, 인간 드라마와 반전이 가득한 미스터리 요소를 갖춘 만족도가 높은 소설입니다.

"앨리스 살인게임"코야 게이이치

앨리스라 불리는 VR 공간에 갇혀 데스 게임에 강제 참가하게 된 주인공 하루가 탈출, 즉 로그아웃을 목표로 하는 이야기. 밀실 상황에서의 서바이벌, SF, 미스터리, 판타지 등 다양한 요소를 균형 있게 담은 오락 작품으로, VR이라는 설정을 활용한 전개가 탁월합니다.

"천애의 요새" 오가와 잇스이 (국내 미발간)

사고가 발생한 우주 정거장을 배경으로, 지구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군상극 형식으로 그린 SF. 하지만 SF임에도 현실 세계의 이야기처럼 자연스럽게 읽힐 것입니다. 독특한 인간 묘사를 즐길 수 있으며, 우주 공간에서의 절망감과 긴장감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서바이벌 패닉 소설로 뛰어난 작품입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앤디 위어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홀로 깨어난 라일랜드 그레이스. 자신이 있는 장소가 우주선 내부라는 것을 추측하며 조금씩 기억을 되찾아가자, 지구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엄청난 미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화성에서의 서바이벌을 다룬 영화화된 저자의 걸작 "마션"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은 SF의 재미가 응축된 소설입니다.

2025/01/24

가을비 이야기 - 기시 유스케 / 이선희 : 별점 1.5점

가을비 이야기 - 4점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비채

'현대 호러의 일인자 기시 유스케, 작품 하나하나에 들이는 공이 커서 과작(寡作)으로 유명한 그가 오랜만에 신작 《가을비 이야기》를 들고 찾아왔다. 비가 내리는 가을의 스산한 날씨를 배경으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이 작품은 인간의 무기력과 절망감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며 공포를 극대화한 기담집이다.
호러에 미스터리 기법을 절묘하게 접목시킨 작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1990년대 이후 일본 호러소설계를 이끌고 있는 일인자 자리에 오른 기시 유스케가, 이번에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괴로워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찾아온 것이다. 일상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네 가지 공포담은 인간 근원의 감정을 건드리며 읽는 이로 하여금 좌절과 절망감, 그리고 무력감을 느끼게 하면서 진정한 공포를 선사한다.'
는 책 소갯글을 보고 집어든 작품.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 소갯글에서는 공포, 호러 소설로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를 느낄 만한 요소나 의외성이 전무한 탓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작가 명성만 놓고 보면 "엠브리오 기담" 정도의 결과물일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의 소재, 내용들도 "백조의 노래" 외에는 특별히 눈에 뜨이지 않았습니다. 완성도도 그닥이라 좋은 점수는 못 주겠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기시 유스케의 단편들 - "도깨비불의 집", "미스터리 클락" - 은 대체로 실망스러웠는데, 이 책도 역시나군요. 앞으로 기시 유스케 단편은 읽지 말아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귀의 논"

아오타는 자기가 전생에 저지른 죄 때문에 사랑을 갈구하지만, 얻지는 못하는 아귀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미하루는 그 말을 들은 뒤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미하루와 아오타가 나누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미하루가 고백을 끝낸 아오타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걸 좀 더 극적으로 표현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무섭지도 않고 의외의 반전도 없는 짤막한 소품에 불과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푸가"

작가 아오야마는 자다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로 이동하는 경험을 반복했다. 병원 의사는 마쓰나가에게 '푸가(해리성 전주)'라는 말을 꺼냈다. 자살 명소 수해로 이동하는 등,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오야마는 영능력자에게 부탁해 침실에 강력한 결계를 쳤다. 그러나 결계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는 침실에서 대량의 물을 남기고 사라졌다. 편집자 마쓰나미는 얼마 후, 아오야마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다. 침실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침대 안으로 이동했던 것이었다...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가 떠오르는 작품. 에메의 작품에서는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약의 부작용으로 벽에 갇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자면서 순간 이동을 하던 주인공이 결계 탓에 방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침대 속에 갇혀 죽게 됩니다. 특별한 이유로 이동을 못해서 중간에 갇힌다는 점에서 비슷하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면서도 짧았던 에메의 작품이 저는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이 작품은 아오야마 시점의 순간 이동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너무 길거든요. 읽다보면 비슷한 내용이라 지루해집니다.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의 공포심을 잘 표현하지 못한 탓입니다. 거미를 테마로 한 결계 등의 이야기도 지나치게 장황하며, 거미 꿈은 정말이지 나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나오더라도 이렇게 길게 쓸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반면 순간 이동에 대한 설명은 제목의 '푸가' 뿐인데 극히 부족하고요. 분량 조절에 실패한 느낌이에요.

게다가 반전 소재로 사용된 물침대는 너무 생뚱맞았어요. 물침대가 그리 흔하게 사용되는 침구는 아니니까요. 순간 이동이라는 설정을 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억지 발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보다는 함께 자던 동거인 아키 몸 속으로 들어가버렸다는게 더 호러블하지 않았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백조의 노래"

인기없는 소설가 오니시 레이분은 대부호 사가로부터 미쓰코 존스라는 무명 가수의 전기를 써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녀는 인간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창법으로 부른 레코드를 남겼다.

탐정 로스의 보고를 통해, 미쓰코 존스의 창법은 사막에서 노래하다가 콕시디오이데스 이미티스라는 풍토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게 밝혀졌다. 이 병이 성대를 찢어 얇게 만들고, 분할 진동하게 만든 것이었다.

환상이 깨진 사가에게 로스는 자신도 이 병에 걸렸다고 보고했고, 레이분은 의뢰를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오디오와 음악에 대한 전문가적인 설명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콘덴서 스피커는 놀라운 기술이지만 저음이 나지 않는 단점이 있다거나, 스테레오 녹음은 3D 영화 같아서 진기함을 자랑하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등 여러가지 내용은 무척 흥미로왔습니다. 소개된 노래들 - 메리 캠프가 무른 마농 레스코의 '홀로 외로이 버려져', 미쓰코 존스가 부른 라크메 중 '종의 노래' -도 실제로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고요. (아래와 같습니다)

전설적인 가수의 창법의 비결이 불치의 풍토병이라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마구'를 던지는 투수의 비법이 제어할 수 없는 손가락 떨림이었다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마구"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궁극의 비법을 손에 넣었지만, 짧은 영광만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앞서의 오디오, 음악에 대한 상세 설명에 비하면, 풍토병에 대한 설명과 설정은 그리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반전을 위한 억지 설정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쿠리 상"

2003년 11월 28일, 대형 사고를 쳐서 자살을 결심한 열두 살 다쿠야에게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친구 하루토가 함께 죽자며 어둠 버전의 고쿠리상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 주술은 소원을 빈 네 명 중 세 명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주지만, 한 명의 생명을 앗아간다고 했다. 다쿠야와 하루토는 친구 가에데와 신이치를 끌어들여 고쿠리상을 불러내는 데 성공했고, 숨을 거둔 하루토 외 세 명은 고쿠리상의 조언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11월 22일, 성공한 변호사가 된 다쿠야 앞에 주간지 기자 노구치가 나타나 18년 전 하루토의 돌연사, 가에데의 집 전소와 가족의 죽음 및 다쿠야가 저질렀던 사건을 언급하고 돈을 요구했다. 충동적으로 노구치를 살해하고 다급해진 다쿠야는 다시 한 번 고쿠리상을 부르기로 결심하고 가에데와 신이치 등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 아오모리현 도와다시의 쓰타나나누마로 가라는 답을 받은 다쿠야는 그곳으로 향하는데...

결말에서 밝혀진 사실은 이 주술이 소원을 빈 사람들에게 안락사를 선사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쿠야는 쓰타나나누마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동한 뒤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작품은 명확한 주술의 조건과 이를 불러낸 존재에 의한 저주와 공포가 필수입니다. 고전 걸작인 스즈키 코지의 "링"처럼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 어둠 버전의 고쿠리상은 조건, 목적은 물론 주술을 일으키는 존재에 대한 설명과 주술 결과 모두 애매하게 묘사되어 혼란스럽고, 전혀 무섭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안락사를 선사하는 주술이었다면, 18년 전에는 왜 그렇게 하지 않은걸까요? 

마지막 순간에 이미 사망한 하루토와의 대화도 무슨 맥락으로 등장하는지 모르겠고, 쓰타나나누마의 경치를 지나치게 강조한 점도 뭐지 싶어요. 아오모리 현에서 돈이라도 받았나... 별점은 1.5점입니다. 무섭지도 않고,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으니 점수를 줄래야 줄 수가 없네요.

2024/12/29

2024 블로그 리뷰 결산

안녕하세요. 어제의 "사카나와 일본"을 끝으로 올해 블로그 업로드는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스물 한 번째 블로그 리뷰 결산을 진행하겠습니다. 2024년 동안 읽은 총 책 권수는 110권입니다. 카테고리별 독서 권수 및 카테고리별 베스트, 워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괄호는 작년):
  • 추리 / 호러: 76권 (61)
  • 기타: 14권 (15)
  • 역사서: 10권 (7)
  • 기타 장르문학: 5권 (4)
  • Food / 구루메: 5권 (3)

1. 추리 / 호러

베스트: 스파이와 배신자 - 벤 매킨타이어 : 별점 4.0
- 현실이 픽션을 능가한다는 증거.

워스트: 유리병 속 지옥 - 유메노 큐사쿠 : 별점 1.0
- 완독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던 망작.

2. 기타

베스트: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 정재승 : 별점 3.5
- 일상 속 과학을 알게 해주는 즐거운 입문서.

워스트: 선량한 차별주의자 - 김지혜 : 별점 1.5
- 비논리적이고 편협한 주장들.

3. 역사서

베스트: 사악한 소년 - 케이트 서머스케일 / 김희주 : 별점 4.0
- 19세기 살인 사건을 치밀하게 재구성한, 흥미진진한 논픽션.

워스트: 당신이 몰랐던 결투의 세계사 - 하마모토 다카시 외 / 노경아 : 별점 1.5
- 소재는 흥미롭지만 깊이 없는 서술로 일관.

4. 디자인 / 스터디

베스트: 눈의 황홀 - 마쓰다 유키마사 / 송태욱 : 별점 4.0
- 독특한 시각과 감각이 돋보임.

워스트: 별점 2.5이 최하점이라 특별한 워스트는 없습니다.

5. 기타 장르문학

베스트: 로봇 소년, 학교에 가다 - 톰 앵글버거, 폴 델린저 / 김영란 : 별점 3.0
- 유쾌한 스토리와 따뜻한 메시지가 느껴지는 청소년 소설.

워스트: 트레몬의 모험 - 로버트 바 / 남원우 : 별점 1.0
- 빈약한 플롯, 단조로운 전개에 최악의 현지화 각색이 더해진 환장의 콜라보. 

6. Food / 구루메

베스트: 딜리셔스 - 롭 던, 모니카 산체스 / 김수진 : 별점 4.0
- 과학적으로 분석한 음식들의 놀라운 이야기들.

워스트: 일본 현지 아이스크림 대백과 - 아이스맨 후쿠토메 / 김정원 : 별점 1.5
- 단순한 정보 나열에 불과.

2024/10/09

삼대 기서의 다음은 이거다! 추리 소설의 틀을 넘는 실험적 미스터리

오랫만의 미스터리 추천 소개입니다. 가끔 소개해드리는 honto 북트리에서 발견한 추천이지요.
이른바 '일본 삼대 기서'는 유명하기는 한데, 솔직히 큰 재미를 느끼기는 힘든 작품들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오래 전 동서 버젼의 "흑사관 살인 사건"을 읽어보려고 시도했다고 중간에 포기한 기억이 있습니다.그래도 뭔가 새로운 시도를 했기 때문에 '삼대 기서'라고 불리웠을텐데, 지금 읽기에는 그렇게 새롭게 느껴지지 못하는게 문제일 뿐이지요.
아래 소개 작품 중 두 편은 읽어보았는데, 새롭다는 느낌은 잘 받지 못했습니다. 평도 그럭저럭이고요. 언제나처럼 이런 리스트는 참고만 하는게 좋겠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미스터리 소설. 그중에는 "도구라 마구라", "흑사관 살인 사건", "허무에의 공물"처럼 '일본 삼대 기서'로 불리는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기존의 추리 소설이나 탐정 소설의 형식을 뒤엎고, 메타픽션적 요소를 포함한 실험적인 기법으로 쓰인 안티-미스터리 같은 소설이다. 이번에는 그러한 독특한 미스터리 소설을 소개한다.

1. "불타버린 지도" - 아베 코보
- 반년 전 실종한 남편의 수색을 의뢰받은 탐정이, 수색을 하면 할수록 실종자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며, 결국 자신도 도심 속을 헤매게 된다는 기묘한 추리 소설. 도시는 타인만 존재하는 사막으로 묘사되며, 소외된 인간의 압도적인 고독감이 그려진다. 아베 코보 특유의 부조리와 탐정 소설 형식이 절묘하게 융합된 걸작.

2."신기하게도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살인 사건" - 하시모토 오사무 (국내 미출간)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를 읽고 탐정을 찾는 노파. 손녀를 통해 그녀를 찾아온건 탐정과는 거리가 먼 도쿄대 졸업의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주인공은 기토우 가문 옛 당주의 13번째 제사 중 벌어진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어딘가 비현실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간다. 메타 요소가 빛나는 포스트모던 미스터리.

3. "로트레크 저택 살인 사건" - 쓰쓰이 야스타카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쓰쓰이 야스타카가 추리 소설을 쓴다면? 이 작품이 그 답변. 교외의 서양식 저택 '로트레크'에서 여름 휴가를 즐기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참극을 맞이한다.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 교묘한 트릭이 숨어 있어, 독자들이 사건을 추리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다.

4. "누구나 할 수 있는 살인/관 속의 쾌락" - 야마다 후타로 베스트 컬렉션 (국내 미출간)
"인간장"이라는 목조 아파트에 이사 온 남자는 방 안쪽에 숨겨진 검은색 노트북을 발견한다. 그 안에는 과거의 입주자들이 경험한 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으며, "인간장"의 기묘한 인간 군상을 알게 된다. 단편 소설집처럼 보이지만 교묘한 장치로 독자를 놀라게 하는 야마다 후타로의 필력이 돋보인다.

5. "우부메의 여름" - 쿄고쿠 나쓰히코 
'쿄고쿠도' 시리즈의 출발점이자 쿄고쿠 나쓰히코의 데뷔작. 기묘한 소문이 돌고 있는 구온지 산부인과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친구 추젠지 아키히코(쿄고쿠도)에게 전한 세키구치 타미츠. 그들은 구온지 가문을 둘러싼 소문의 진상을 밝히려다가 예기치 못한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요괴, 유령, 철학 등 방대한 지식과 독특한 등장인물이 펼치는 탁월한 괴기 미스터리.

2024/08/18

던전밥 1~14 - 구이 료코 / 김완 : 별점 4.5점

[세트] 던전밥 1~14 세트 - 전14권 (완결) - 10점
구이 료코 지음, 김완 옮김/㈜소미미디어

라이오스 파티는 "황금성" 던전을 탐험하다가 레드 드래곤을 만났다. 라이오스의 동생 파린의 마법으로 일행은 던전 탈출에 성공했지만, 파린은 드래곤에게 먹혀버렸다. 라이오스, 마르실, 칠책은 파린을 구하기 위해 곧바로 던전으로 다시 향했다. 던전은 죽더라도 영혼이 사체와 연결되어 소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일푼이라 던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물을 식량으로 삼기로 했다. 덕분에 10년 이상 던전에서 마물식을 연구한 드워프 센시가 일행으로 합류했고, 우여곡절 끝에 레드 드래곤을 해치우고 파린을 소생시켰다.
하지만 던전의 주인 '광란의 마법사'에 의해 파린은 마물이 되어버렸다. 소생시킬 때 마물 레드 드래곤의 사체를 쓴 탓이었다. 파린을 완전히 되찾으려면 '광란의 마법사'를 쓰러트리고 던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걸 깨달은 라이오스 일행은 목숨을 건 사투를 통해 '광란의 마법사'를 쓰러트렸다. 그러나 사람의 욕망을 먹기 위해 이 모든걸 조종하는 악마 '날개달린 사자'가 남아있었고, 마르실이 새로운 던전의 주인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현대인이 이세계로 날아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지식이나 신에게 받은 치트로 무쌍을 찍는다는 이세계물이 넘쳐나는 요즈음, 정말로 보기 드문 정통파(?) 본격 판타지 만화입니다. 1권을 읽고 리뷰를 올린지도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드디어 완결되었네요. 동생을 구하기 위함이라는 명확한 목적도 있고, 단순히 등장하는 마물을 사냥해가며 레벨을 올리고 스킬을 익히는게 아니라 파티원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과 머리를 써야 해결할 수 있는 퀘스트들이 이어지고, 퀘스트를 통해 동료와 능력을 얻어 결국 절대악을 쓰러트리고 세계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긴 호흡의 장대한 전개를 선보입니다. 결국 세상의 종말이 닥치지만, 라이오스와 날개달린 사자의 마지막 승부로 평화가 찾아오고 라이오스가 새로운 왕국의 왕이 된다는 결말도 나무랄데 없어요.

마물 요리라는 소재도 큰 재미 요소입니다. 현재의 식재료들과 거의 같거나 흡사한 마물 재료로 만드는 요리들이 잘 표현되어 있을 뿐더러, 맨드레이크를 캘 때 소리를 지르게 만드는게 나쁜 독소(?)를 빼내어 맛이 더 좋아진다는 등의 세세한 설정도 볼거리입니다. 또 이 설정은 단순한 재미 요소로 끝나지 않습니다. 파티의 리더 라이오스가 그리 뛰어난 전사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건, 그가 마물 요리를 즐길만큼 마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냥 이세계에 현대 요리를 선보이는 정도에 그치는 다른 이세계 구루메 만화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설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나가는 작가의 개그 센스도 돋보입니다. 라이오스가 얼빠지거나 황당한 말을 하면 그걸 상식인(?) 마르실이나 칠첵이 받아치는 만담식 개그가 많은데,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게 그야말로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이를 드러내는 캐릭터들도 매력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톨맨(인간)과 드워프 전사, 하프 엘프 마법사, 하프풋 열쇠공 (도둑?) 이라는 인종과 직업 설정은 정통 판타지그대로이지만, 성격과 개성이 확실해서 넘치는 생동감을 보여주는 덕분입니다. 이를 잘 그려낸 섬세한 작화도 발군이고요.

물론 앞서 '광란의 마법사' 시슬을 날개달린 사자가 어쩌지 못하는 묘사는 뒤의 상황을 봤을 때 납득하기 어렵고(광란의 사자야 말로 진짜 악마였으니), 라이오스가 책에 서둘러 휘갈겨 쓴 문구로 날개달린 사자를 해치운다는 결말은 다소 뻔하고 작위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라이오스 파티 외 인물들 배분이 들쭉날쭉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엘프 부대 '카나리아'의 부대장과 함께 행동하며 중재자 역할을 하는 카블루야 그렇다쳐도, 나마리는 오크족보다도 '광란의 마법사'나 '날개달린 사자'를 막기 위해 하는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과거 및 현재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세한게 좋은 예입니다. 반면 슈로는 부하들을 이끌고 파린과의 싸움에서 활약하지만, 동방에서의 그의 지위라던가 부하들의 정체 등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냥 '동방에서 왔다'로 퉁치기에는 설명이 부족했어요. 물론 가이드북이나 후기 만화 등을 통해 약간의 정보를 더 얻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단점은 사소하다 못해 없는 수준입니다. 별점은 4.5점! 이세계 전생물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판타지 장르계에 정통 RPG 판타지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걸 보여준 걸작입니다. 아직 읽어보시지 않으셨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2024/07/26

여름맞이, 최고의 호러 컨텐츠 소개 : BRUTUS 2023년 9월 호러 특집

주제 한 가지를 정해 집중 탐구하는 일본 잡지 BRUTUS의 2023년 9월 주제가 '호러' 였었습니다. 여러 기사가 실려 있는데, 메인을 장식한 기사가 호러 순위였고요. 14명의 호러 매니아가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괴담, 소설, 만화, 게임, 유튜브에 심지어 폐가까지 호러 컨텐츠 전 분야에 걸쳐 모두 444펀을 선정한 뒤, 1.0점부터 5.0점까지 41단계로 판정하여 순위를 매겼습니다. 이 중 최고점인 별점 5점을 받은 작품들을 소개해 드립니다.

그런데 영화 몇 편 빼고는 거의 모르겠네요. 만화의 경우는 굉장히 마이너한 단편 작품만 언급하고 있기도 하고요. '호러 매니아라면 이 정도는 알아야지!'라는 과시욕이 느껴져서 솔직히 별로였습니다. 그냥 참고만 하는게 좋겠습니다.

영화 :
  • 노로이(ノロイノロイ) - 시라이시 코지 / 2005년
  • 다크 앤드 더 위키드 (The Dark and the Wicked) - 브라이언 베르티노 / 2020년
  • 먼고 호수 (lake mungo) - 죠엘 앤더슨 / 2008년
  • 링 - 나카다 히데오 / 1998년
  • 새 - 알프레드 히치콕 / 1963년
  • 텍사스 전기톱 학살 - 토브 후퍼 / 1974년

소설 :
  • 잔예 - 오노 후유미 / 2012년 : 작가인 주인공이 도쿄 교외 맨션에서 일어난 이상 현상을 쫓는 페이크 다큐 형식의 소설.

만화 :
  • "저주의 초상화 (呪いの肖像画)" - 아오키 토모코 青木智子/ 1996년 : 『학교에 전해지는 무서운 소문 3』 수록작. 미술부 선배를 짝사랑하는 소녀가 사고로 죽고, 그 영혼이 자신이 그린 초상화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그림에 다가간 후배의 몸에 초상화가 감겨 소녀가 빙의한다.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일념으로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소녀가 진정한 괴물로 변해가는 모습이 너무 무섭다.
  • 'get lost' - 이노우에 유미いのうえゆみ / 1988년 : 『마이코믹스 호러 오컬트 공모대전 HELP 5』 수록작.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의 충격적인 작품. 아이와 떨어질 수 없는 아버지와 딸의 코믹한 교감이 그려지는 도입부에서부터 상상할 수 없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구하기 어렵지만, 아버지의 망상이 불러일으키는 최악의 기적을 목격해 보길 바란다.
  • "TVO" 오챠즈케노리 (御茶漬海苔) / 1989년 : 심야에 갑자기 시작되는 「공포의 TVO」. 거기에 비춰지는 것은 인간의 어둠. 인간의 날카로워진 어둠이 깊고 담담하게 그려진 사이코 호러의 걸작. 작가의 초기 작품은 그 표현이 특히 뛰어나서 화면이 고요한데도 소름이 돋는다. 읽으면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이다'라는 촌철살인의 문구가 빛을 발한다. (*1권은 무료로 읽을 수 있네요. 그렇게 무서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괴담 :
  • '가엾은 웃음' - 梨 / 2022년. 책 : 괴담 중심으로 활약하는 신세대 괴담 작가 梨의 첫 번째 단독 저서. 자신이 그동안 인터넷에서 수집한 괴담을 바탕으로 쓴 '독자 참여형' 호러큐멘터리로, 작품 속에는 출처로 연결되는 QR 코드가 있는 등 독자를 현실적인 공포 체험에 참여시킨다. "괴담에서 가장 귀를 막고 싶은 주제인 '사람의 악의'를 현대 독자들이 가장 체감하기 쉬운 형태로 소설화했다. 발명이라고 해도 좋다. 책 자체에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 「1㎜의 여인」 / DVD 『사쿠라금조의 TV에서 말할 수 없는 무서운 이야기』 수록 : 무단결근한 친구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 위해 사쿠라 씨는 그의 집으로 향한다. 그가 가리키는 다다미의 뒷면을 들여다보니 벽과 벽 사이의 불과 1, 2mm 틈새에 여자가 있었다. 사쿠라 씨는 탄탄한 괴담의 명수. 이야기꾼이기에 가능한 이상한 세계 이야기. 이것은 영상화 불가능.
  • 이나가와 준지 「살아있는 인형」 / YouTube에서 시청 가능 (youtub e.com/watch?v=7Bmlfx8iEQo). 18:09경 : 어느 날 밤, 이나가와 씨는 택시 안에서 소녀 같은 인물을 본다. 나중에 좌장으로 임명된 인형극에서 사용할 인형이 소녀와 똑같았다. 관련자들은 연이어 불행을 겪게 된다 ....... 지금도 계속되는 전설의 열여덟 번째.

게임 :
  • 'MADiSON' Steam, Xbox, PS4 PS5 외 / 2022년 / BLOODIOUS GAMES : 16세 소년을 조종해 저택에서 계속되는 사악한 의식을 끝내기 위해 탐험하는 서바이벌 호러.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만큼 공포도 일품이다. 어두운 복도를 카메라 스트로브를 비추며 걷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에 용기가 필요하다. 그야말로 5무의 최강의 공포 작품.

다큐멘터리 :
  • '어둠의 동영상' 감독: 코다마 와다마 감독/토/일/2012년~/프롬노트 : 심령과 오컬트에서 그로테스크한 묘사까지, 온갖 금기에 과감히 도전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축축하고 습한 습도 높은 공포의 영상.

귀신의 집 :
  • '다이바 괴기학교 나고야교' 메이커스피아/아이치현 나고야/평일 휴무/도쿄 다이바 : '다이바 괴기학교'의 계열점. 학교의 참극에서 비롯된 전개는 본교와 같지만, 이쪽이 더 넓고, 더 오래 공포를 즐길 수 있다. 또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무섭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개의 연속으로 공간, 이야기, 연출에 있어 가장 무서운 귀신의 집.

유튜브 :
  • "페이크 다큐멘터리 'Q' 제작: 미나구치 다이치, 테라 우치 야스타로 외 / 일 / 2022년 : 봉인된 프로그램 녹화 데이터 등 단편 공포 다큐멘터리 영상을 올리는 채널. "영상에 허구성이 전혀 없다는 점이 무서운 점입니다. 사색에 잠기게 하는 장치도 곳곳에 숨겨져 있어 보면 볼수록 매력과 공포가 더해집니다."

2024/06/29

직장 내 살인사건 - 헤너 코테 & 크리스티안 룬처 / 박종대 : 별점 2점

직장 내 살인사건 - 4점
헤너 코테 & 크리스티안 룬처 지음, 박종대 옮김, 표창원 해제/지식트리(조선북스)

일의 조건이나 일자리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의 대표격은, 취업을 위해 자기 윗 순위 대기자(?)를 살해한다는 내용의 걸작 "도끼"일 겁니다. 작품도 흥미롭게 읽었지만, 읽으면서 이런 류의 실화가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제목만 보면 이런 실화를 다룬게 분명해 보이는 논픽션이 있더라고요. 독일의 범죄 관련 다큐멘터리 작가가 쓴 책으로, 출간된지는 꽤 되었지만 그간 눈에 뜨이지 않아서 모르고 지나쳤네요. 주말을 맞아 읽어 보았습니다.

많은 사건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볼프가 푀펠에게 법정에서 총격을 받아 살해당했던 1927년 사건은 말 그대로 '직장 내 살인사건'입니다. 볼프는 같은 회사 동료 푀펠에게 가졌던 질투심과 자신의 자리 보존을 위해 푀펠의 해고와 이익 배당금 지급 방해, 그리고 인격 모독에 앞장섰다가 살해당했습니다. 읽어보니 죽어도 싸다 싶을 정도로 못되게 굴었더라고요. 범인 푀펠이 오히려 꽤나 선처를 받았다는 이후 판결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1909년 호프리히터 독살 사건은 "도끼"를 연상케 합니다. 호프리히터는 출세길이라 할 수 있는 참모 본부에 들어가기 위해 엘리트 장교들에게 독약을 보냈고, 그 중 한 명인 마더 대위가 독약을 먹고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독약을 '정력제'라고 속이고 보낸 범행 과정, 호프리히터가 범인임을 밝혀내는 수사 과정 모두 한 편의 범죄 소설을 읽는 듯한 흥미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한스가 유명한 철학자 슐리크를 살해한 사건도 "도끼"와 동기는 비슷합니다. 한스는 학계의 유명인사이자 실력자 슐리크의 눈 밖에 나서 먹고 살 길이 막혀서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역시, 비슷한 실화가 많긴 많네요.

이렇게 직장 내 문제 때문에, 혹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에 더해, 또 다른 대표적인 사례로 '직장을 찾는 구직자'를 대상으로 금품을 노리고 저지른 범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1883년, 직업 소개를 미끼로 다수의 여성들을 살해한 생크와 그 일당들의 범행, 그리고 1891년 거의 동일한 방식이었던 프란츠 슈나이더와 그의 아내가 저질렀던 범행처럼요. 그러나 이 범행들은 '직장 내 살인'으로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직장'은 피해자들을 유혹한 무기일 뿐이고, 결과적으로는 금품을 노린 살인 강도에 불과한 탓입니다. 
1964년의 음식점 부부 살인 사건, 1905년의 루스 중령 살인 사건도 '직장 내' 살인 사건이라기 보다는 단순 강도 사건입니다. 같은 공간에서 피해자와 범인이 주종 관계였지만, 이들의 관계 때문에 범행이 일어난건 아니니까요. 1896년의 베르너, 그로세가 레비 변호사를 살해한 사건 역시 그 옛날에 미성년자들이 상당히 체계적인 계획하에 저지른 범죄라는 점은 놀랍지만, 단순 살인 강도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외에도 '직장 내 살인'과는 별 관계없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직장을 잃은 가장이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한 2006년의 후베르트 사건을 '직장 내 살인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사회적 타살일 수는 있겠지만, 이를 직장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유명 소설 "비아말라"의 소재라는 클라인슈로트 살인 사건도, 잔혹한 가정 폭력을 저지르던 아버지를 나머지 가족들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직장 내 살인 사건이라고 볼 수 없고요. 동성애 관계에 빠졌다가 파트너를 살해한 베르노 사건, 2002년, 퇴학으로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사회보호 대상자로 전락하게 된 슈타인호이저가 학교로 쳐들어가 17명을 사살한 사건도 그러합니다.
이런 사건들보다는 서두에 짧게 언급되고 지나가는, 학대받던 하녀들이 주인 모녀를 잔혹하게 살해했다는1933년 파팽 자매 사건이 더 흥미를 자아냈습니다. 유니스 파치먼이 주인 가족을 살해한다는 소설인 "활자 잔혹극 (유니스의 비밀)"의 원전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직장 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이야기 비중이 적다는건 분명 기대와는 어긋나며, 시대도 1차대전 이전 제국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게 많고 지역도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만 한정된다는건 단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4/06/01

계간 미스터리 2024 봄호 - 김태현 외 : 별점 2점

계간 미스터리 2024.봄호 - 4점
김태현 외 지음/나비클럽

정말 오랫만에 읽어보는 계간 미스터리입니다. 이전 리뷰는 2011년이니 강산이 변해도 벌써 한 번 이상 변했네요. 싼마이틱하지만 강렬한 표지 일러스트에 호기심이 동해 읽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리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문예지 스타일이라는건 같은 미스터리 잡지"미스테리아"와 확실히 다른 점입니다. 심지어는 특집 기획 르포르타쥬 기사인 "인스타그램 주식 여신"마저도 소설 형식을 빌어 작성되어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죠. 인스타그램에서 주식 고수익을 인증하며 투자자를 끌어들인 뒤, 폰지 사기를 저지른 실화를 가명, 그리고 사건 핵심 관계자 시점의 묘사로 설명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수록 단편 6편 중 무려 5편이 한국 작가 작품이라는 것도 특징입니다. '한국 추리 문학의 본진'이라는 광고가 허언은 아닌 셈입니다.

수록 단편 중에서는 세 편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세 편에 대해 스포일러 가득 담아 짤막하게 감상을 남겨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신인상 수상작인 "사이버 니르바나 2092"입니다. 유명 연예인 강준기가 전뇌 합선으로 사망한 사건의 진상을 캐는 전직 경찰의 활약을 그린 SF 추리물이지요. 이미 죽은 강준기의 뇌를 회사, 매니저들이 이용해서 그동안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왔지만, 전뇌에 복수 접속하는 사고로 뇌가 타버렸다는 진상은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과연 좋은 추리물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강준기는 전뇌화 수술을 받지 않은 인본주의 인물이었다는 정도의 단서로는 진상을 추리해내는게 독자에게는 불가능한 탓입니다. 최신형 전뇌가 아니어서 과부하가 걸리면 타버린다는걸 독자는 알 도리가 없으니까요. 안티 부디스트 시위, 전뇌, 전뇌 연결, 신체 임플란트 등 "공각 기동대"로 대표되는 사이버 디스토피아 세계관도 지금 읽기에는 식상했어요. 저자의 욕심이 과했습니다.
"낭패불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는 악마가 인간을 타락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흔하디 흔한 설정인데 1973년 박정희 유신 당시 경찰서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니 굉장히 독특하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이 과정에서 빚어진, '경찰이 피라미 노동자를 간첩이라며 고문, 심문하는데 알고보니 그 노동자가 취조하던 형사의 6.25 때 헤어진 동생이었다!'라는 극한의 딜레마도 흥미로왔습니다. 형은 여기서 동생임을 밝히고 노동자를 구해줘야 할까요? 그러면 빨갱이 가족임이 드러나 출세길이 영영 막힐텐데? 아, 정말 쫄깃하더군요. 다만 노동자를 죽이고 말았다는 결론은 다소 식상했고, 악마가 끼어들 이야기였는지는 의문이기는 합니다. 뭔가 거래를 한 것도 아니고... 이런 억지스러운 악마의 등장보다는, 같은 역사 속 비극을 짤막하게 다루었지만 훨씬 깊은 울림을 주는 걸작인 김성종의 "어느 창녀의 죽음"같은 선례를 참고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아문센의 텐트에서"는 수록작 중 유일한 외국 단편입니다. 존 마틴 레이히의 작품이지요. 남극 탐험대가 미지의 괴생명체를 발견한 뒤 모두 죽고만다는 크리처 물입니다.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의 직속 선배라 할 수 있어요. 로버트 드럼골드와 대원들이 느끼는 공포가 생생하게 전달되는 덕분에 몰입감이 장난이 아닙니다. 미지의 괴생명체가 뭔지 제대로 묘사도 하지 않는데도 말이죠. 별점은 4점은 충분합니다. 수록작 중 단연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특집 기사  "인스타그램 주식 여신"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최근 흔히 보아왔던 범죄 이야기이기는 한데, '사기 감별사' 주제한이 범인 '여우비'의 사기를 간파한 방법은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화라서 설득력도 높고요. 
한국 미스터리를 키워드를 통해 분석한다는 신연재 "로컬리티와 미스터리"에서는 여러가지 주장 중 한국 소설의 공간 중 '시골'에 주목한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지역 주민의 텃세와 오지랖, 부조리한 규율이라는 시골적 배타성, 이른바 '부족주의'와 도시인의 충돌이 벌어지는 식으로 시골은 미스터리 무대로 흔히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는 도시인 기준이라는 주장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골 부족주의를 전형화하는 시선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셈이지요. 이를 극복한 작품으로 황세연의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를 소개하는 것도 이채로왔고요. 이 작품을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이런 시선이 추리 비평에 필요하겠구나 싶더군요. 저도 한참 공부가 부족하다는걸 여실히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단편 세 편은 추리물로 보기 어렵거나, 달리 언급할 부분이 없는 범작 수준에 그친다는건 아쉬웠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앞으로는 '계간 미스터리'라는 명칭에 걸맞는 정통 추리물이 더 많이 수록되면 좋겠습니다.

2024/05/25

내가 읽었던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분석

제 멋대로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라고 이름 붙힌 장르가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장소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힘(또는 조직)에 의해 모인 뒤 보상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설정의 작품을 뜻합니다. 특별한 게임에서 이기거나, 특별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정해진 보상을 받을 수 있는데 이 게임, 혹은 찾아내야 하는 특별한 조건이 재미의 핵심입니다. 아래의 조건들을 충족시키면, 누가 뭐래도 잘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지요.
  1. 게임, 혹은 특별한 조건은 참가자들 모두에게 합리적이고 공평한가?
  2. 게임, 혹은 특별한 조건은 독자도 쉽게 이해해서 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는가?
  3. 게임, 혹은 특별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걸작은 "도박묵시록 카이지"의 첫 에피소드인 '한정 가위바위보'입니다. "오징어 게임"은 2번과 3번은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지만 1번 측면에서는 다소 아쉽지요. 운과 체력이 중요한 게임이 많으니까요.
이 기준으로 제가 읽었던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소설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영화와 만화도 많지만 그런 작품들은 워낙에 유명하니.... 작품별 상세 리뷰는 링크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 미야베 미유키
  • 누가 모이는가? 죄를 지은 여섯 명의 사람들
  • 보상과 조건은? 보상은 생존,유일한 생존자만 가능.

"거울 속 외딴 성" - 츠지무라 미즈키
  • 누가 모이는가? 왕따를 당하는 일곱 명의 아이들
  • 보상과 조건은? 보상은 어떤 소원이라도 이루어 줌, 조건은 정해진 시간 내에 소원의 방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찾아낼 것.

"앨리스 살인게임" - 가코야 게이이치
  • 누가 모이는가? 가상 공간 '앨리스'에 갇힌 사람들.
  • 보상과 조건은? 보상은 생존, 조건은 다른 생존자들을 죽일 것.

"인사이트 밀" - 요네자와 호노부
  • 누가 모이는가? 일주일간 진행되는 실험 아르바이트에 지원한 12명.
  • 보상과 조건은? 보상은 돈. 살아남으면 복잡한 조건에 따라 돈을 수령하게 됨.

"살해하는 운명카드" - 윤현승
  • 누가 모이는가? 게임의 승자가 되면 거액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참가한 5명.
  • 보상과 조건은? 보상은 돈. 각자 받은 운명 카드의 운명을 거스르면 승리.

"24시간 7일" - 짐 브라운 : 별점 2점
  • 누가 모이는가? 미국 방송사 리얼리티 쇼 참가자 12명.
  • 보상과 조건은? 보상은 생존, 조건은 시청자들 투표를 통해 살아남을 것.

"크림슨의 미궁" - 기시 유스케
  • 누가 모이는가? 아르바이트에 응모한 10명의 플레이어
  • 보상과 조건은? 보상은 상금 500만엔. 조건은 유일한 생존자가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