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하는 운명카드 - |
30대 초반에 이미 십억 가까운 빚을 지고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루저 종민의 앞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모종의 게임을 제안하며, 게임의 승자가 되면 거액을 받을 수 있다고 유혹했다.
게임에 참가한 종민과 알 수 없는 다른 4명의 참가자들은 각각 잭 - 킹 - 조커 - 에이스 - 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한 장씩의 '운명카드'를 받아들었다. 게임에서 이기려면 운명카드에 적힌 운명을 거스르면 되는데, 잭 종민에게 주어진 운명은 "누군가를 살해할 운명!"
이 작품은 불특정한 사람들을 특정 장소에 모아놓고 벌어지는 일종의 "게임"을 다룬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의 작품입니다. 제가 접해본 이런 류의 작품만 해도 한 손으로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을 정도로 흔한 설정이기도 하죠. 이 장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큐브"에서부터 시작해 "극한추리 콜로세움", "인사이트 밀", "크림슨의 미궁", "페르마의 밀실", "24시간 7일", "쏘우 1", "다우트", "누가 울새를 죽였나", "라이어 게임" 등 수많은 작품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 장르물에서 핵심 요소는 얼마나 게임이 합리적이고 재미있게 구성되었는지 여부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현실적인 설득력을 갖추기 어려운 설정이니, 게임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너무 어려우면 안 된다는 조건도 충족해야 합니다. 독자도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난해한 수학 공식같은게 난무하면 일반인 입장에서는 재미를 느낄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합니다. 게임 자체는 간단하지만, 규칙이 공정하게 짜여 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습니다. 또한, 게임의 규칙을 설명할 때 중요해 보였던 것들 - 언제든 나갈 수 있음 / 상대방에 대해 묻지 말 것 / 운명 카드를 보여주거나 강제로 보지 말 것 -보다, 오히려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였던 - 식사 시간을 반드시 지킬 것 / 반드시 포커 게임에 참가할 것 / 돈을 어떻게 받아갈지 정할 것 -이 더 중요한 규칙이었다는 의외성도 돋보였고요.
게임의 규칙과 중간중간 탈락하거나 살해당하는 사람들이 정교하게 엮이는 전개도 훌륭하며, 서스펜스와 스릴도 굉장합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다 읽는 데 2시간도 걸리지 않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곳곳에 헛점도 많습니다. 에이스의 무리한, 합리성을 잃은 배팅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 킹은 본인이 조심만 했어도 "살해당한다"는 운명을 거스르기 가장 쉬운 존재였다는 점 등이 그렇죠.
무엇보다도 퀸이 다른 사람들을 살해해서 돈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정말 말이 안 됩니다. 20억이면 충분했을 텐데 100억이라니? 거기에 에이스가 종민의 운명카드를 우연히 보게 된 뒤 퀸이 그 정보를 입수했다는 전제가 너무 크게 작용하고 있을 뿐더러(숟가락을 이용한 공작이 대표적입니다), 누군가 한 명이 죽으면 다른 참가자들이 경계하는 것이 당연한데, 하루 만에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만 의미가 있었다는 점 등은 여러모로 어설펐습니다. 조커를 구태여 자살로 위장하려 했던 것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고요. 마지막 종민의 상황 역시 충분히 정당방위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전개를 위해 억지로 몰아간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게임의 구성이 나름 신경 써서 짜였음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와 이야기 전개에서는 그러한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면, 주인공 종민은 다른 사람들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릴 적 저지른 작은 실수에 집착하는 전형적인 루저로 묘사되는데, 아무리 봐도 주인공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반부에서 갑자기 의외의 행동력을 발휘하는 전개가 전혀 와닿지 않았습니다. 또한, 게임 참가자들이 과거에 뭔가 인연이 있었다는 듯한 분위기도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접해왔던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물 중에서도 재미 하나만 놓고 본다면 손에 꼽을 만한 작품입니다. 미스터리, 추리 요소가 적다는 단점은 있지만, 에이스의 광기 어린 행동과 종민의 심리 묘사 등이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높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현실적이지 못한 설정과 앞서 언급한 단점들 때문에 최고점을 주기는 어렵지만, 충분히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작가님의 건투를 빕니다.
덧: 좋은 추리소설 소개로 자주 방문하는 카구라님 블로그에서 리뷰를 보고 읽게 된 책인데, 카구라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소개가 없었다면 읽어보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앞으로도 좋은 리뷰 많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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