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그마 -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
톰 제리코는 선배 앨런 튜링의 소개로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 해독 부서에 배치된 후, 독일군 기기 중 가장 어려운, 4중 회전자를 채택한 이니그마 "샤크"를 해독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건강을 해친 톰은 요양을 떠났지만, 고작 3주 후 샤크의 체계가 바뀌어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업무 복귀와 동시에 옛 연인 클레어의 행방을 뒤쫓다가, 그녀의 방에서 훔쳐낸 암호문을 발견하는데...
역시나 물만두님의 리뷰집을 읽고 흥미가 생겨 읽게 된 작품입니다. "그들의 조국"으로 데뷔한 로버트 해리스의 두 번째 작품으로, 45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입니다. 첫 작품은 가상 역사물이었지만, 이 작품은 2차대전 당시 영국 정보부 블레츨리 파크를 무대로 한 팩션입니다. 이전에 영화로 먼저 접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와는 달리 디테일이 확실해서 좋았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니그마와 블레츨리 파크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었는데, 소설은 이니그마에 대한 고증과 암호를 풀어내는 과정이 굉장히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거든요. 암호 해독에 관심이 있다면 자료 삼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설명해 줍니다. 실제 이니그마 해독 과정이 중심이라 독자가 암호 해독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완성도가 매우 뛰어납니다.
또한, 영화는 두 가지 이야기 축인 '이니그마 해독'과 '클레어 실종에 대한 미스터리' 중에서 클레어 실종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는데, 소설은 두 가지 이야기를 균형 있게 전개하는 것도 좋았어요. 거대 수송 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단서를 알아내야 하고, 그 단서가 되는 것이 수송 선단을 발견한 U보트의 통신 암호라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그로 인한 서스펜스 (명확한 시간 제한이 생기므로)를 영화보다 훨씬 설득력 있고 박진감 있게 서술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단점은 이야기가 너무 길고 늘어진다는 점입니다. 특히 주인공 톰 제리코의 불안한 심리 묘사와 옛 연인 클레어와의 관계에 지나치게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습니다. 클레어에 대한 비중이 커진 탓에, 진짜 여주인공인 헤스터의 존재가 묻혀버린 것도 문제입니다. 제리코가 클레어의 룸메이트 헤스터와 함께 클레어의 실종에 얽힌 진상과 중요한 단서를 포착하는 전개는, 영화에서 초반에 간결하게 처리한 것처럼 소설에서도 요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밀도 있는 상세한 묘사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앞부분은 장황한데 반해, 중반 이후 결말까지는 너무 빠르게 전개되는 느낌이 있어 강약 조절이 실패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확실하게 정리하며 마무리되기는 하지만, 마치 연재 종료를 갑작스럽게 통보받은 만화의 엔딩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또한, 폴란드인 푸코프스키가 가족을 위해 카틴 숲 학살 관련 암호문을 몰래 해독하려 했다는 동기는 이해할 수 있지만, 애초에 암호문 내용이 카틴 숲 사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에필로그에서 클레어가 스파이로서 해당 메시지를 중개했다고 설명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작품 내에서 해당 암호문은 해독조차 시도되지 않았다고 묘사되며, 가장 뛰어난 암호 해독 전문가인 제리코조차도 해독이 기적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어려운 암호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서 클레어가 사실 위그램이 심어놓은 블레츨리 파크 감시용 스파이였다는 설정은 불필요하게 느껴집니다. 나름 반전 요소일 수는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꼭 필요하지는 않으며 퍼그에게 의도를 가지고 암호를 전해주었다는 점도 현실성이 부족해 보입니다. 애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퍼그의 배후를 찾기 위한 작전이었다면, 주객이 전도된 셈입니다. 이 암호 때문에 퍼그가 독일 쪽에 붙으려 한 것이라면, 차라리 단순한 미행이나 감시를 붙이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U보트를 뒤쫓는 암호 해독 요원들의 시간 제한이 있는 작전과, 또 다른 음모가 복합적으로 펼쳐지는 서스펜스와 재미는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에, 알리스테어 맥클린 스타일 (짧고 임팩트 있게)로 쓰였다면 더욱 만족스러웠을 것 같아 아쉽습니다.
덧붙여, 영화와 소설 둘을 비교한다면 영화 쪽이 더 낫습니다. 일반 독자나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암호 해독 장면보다는, 클레어의 실종과 그 비밀을 파헤치는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보거든요. 결말 또한 영화 쪽이 깔끔하고요.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이 시종일관 을씨년스럽고 어두운 분위기의 원작보다는 개인적으로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톰 제리코가 마지막 퍼그와의 추격전 이후 요양할 때 읽었다는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 목록은 인상적이었습니다. "13인의 만찬", "명탐정 파커 파인", "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 "목사관 살인사건" 등, 작중 주인공이 읽는 책들이 제 취향과도 묘하게 어울려서 더욱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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