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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2

추리소설 속 트릭의 비밀 - 에도가와 란포 / 박현석 : 별점 2.5점

추리소설 속 트릭의 비밀 - 6점
에도가와 란포 지음, 박현석 옮김/현인

일본의 추리 소설가 에도가와 란포의 전설적인 에세이입니다. 늦은 감은 있지만 드디어 출간되었네요. 오래 전 부터 존재를 알고 있던 책이기도 하고, 저 역시도 추리 소설(요리 중심이지만)에 관련된 에세이를 출간한 경험이 있기에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 읽었습니다.

책은 1956년에 출간되었으며, 주로 1950년대 "환영성" 등 이런저런 잡지들에 기고했던 에세이들을 모아 놓은 구성입니다. 1953년, 에도가와 란포가 영미 탐정소설에서 예전부터 사용되던 트릭을 800여개 수집하여 쓴 "유형별 트릭 집성"이라는 글이 유래이며, 이 글로부터 여러가지 에세이들이 파생되어 이런저런 잡지들에 수록되었다고 하네요.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서 ―이 책의 탄생과정
1. 기발한 착상
2. 뜻밖의 범인
3. 흉기로써의 얼음
4. 특이한 흉기
5. 밀실 트릭
6. 은닉 방법에 관한 트릭
7. 프로버빌리티의 범죄
8. 얼굴 없는 시체
9. 변신 소망
10. 이상한 범죄동기
11. 탐정소설에 나타난 범죄심리
12. 암호기법의 종류
13. 마술과 탐정소설
14. 메이지의 지문 소설
15. 원시 법의학서와 탐정소설
16. 스릴에 대해서

각 주제별로, 에도가와 란포가 직접 이런저런 소설의 예를 충실히 들어가며 설명해 줍니다. 책의 특성 상 당연히 핵심 트릭이 까발려지고요. 노리즈키 린타로"나쁜 놈들은 추리 작가가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고안한 트릭을 쏙 빼다가 미스터리 가이드북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녀석들이지. 이쯤 되면 기생충 수준이야."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그런 기생충같은 책인거지요.

그나마 다행인건 지금은 읽기 힘든, 오래전 잊혀진 작품들이거나 우리가 접하기 힘든 일본 고전들, 아니면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 많다는 것입니다. 에도가와 란포 자신의 작품 이야기도 많이 소개된다는 점에서는 약간의 면죄부를 줄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또 미스터리 가이드에서처럼 어떤 작품에서 어떤 트릭이 쓰였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좀 두루뭉실, 애매하게 소개하고 있거든요. 뭐 그래도 알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리고 거장이 쓴 책 답게, 단순히 트릭을 분류하여 정리하는 것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본인 스스로의 분석을 통해 깊이있는 식견을 보이는 글도 많아요. 마지막 16장인 "스릴에 대해서"가 좋은 예입니다. 스릴의 종류를 상세히 분류하여 이를 단계별로 설명하는 내용인데, 실로 이치에 맞고 설명도 적합하여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예로 드는 것도 아주 좋았고요.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글들도 제법 눈에 뜨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이 처음 발표된 시점에서 60여년 이상 지난 탓이 가장 큽니다. 대표적인 예는 "이상한 범죄 동기"에서 결코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없었던 "대통령의 미스터리"를 길게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 책이 발표되었을 당시에는 일본에는 거의 읽어본 사람이 없는 책이라 특별히 소개했던 모양인데, 지금 상황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암호 기법의 종류"도 마찬가지로, 지금 읽기에는 다른 비슷한 책에 비하면 내용이 굉장히 부실한 편이에요. 메이지 시대 지문을 증거로 삼는 소설이 처음 등장했다는 역사적 사실만 소개하는 "메이지의 지문 소설"도 시대에 걸맞지 않은 이야기였고요.

아울러 하나의 트릭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서술 트릭이 빠져 있는 등, 현대적인 작품 속 최신 트릭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시대적으로 어쩔 수 없었더라도, 출판사나 후대의 작가가 증보판을 출간하는 선택지는 없었을까요? 제가 가끔 읽는 'oo의 지구사' 시리즈에 주영하 씨가 한국의 상황에 대해 수록한 글처럼, 다른 작가가 부록 형식으로 뒤에 최신 트렌드를 덧붙이는건 얼마든지 가능했을텐데 말이지요.

그 외에도 책의 완성도, 모양새 역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고 도판도 부실합니다. 또 책 속에서 소개된 작품이 국내에 출간되었는지 여부, 그리고 출간되었다면 무슨 제목으로, 어디에서 출간되었는지를 따로 소개해 주는 정도의 노력은 필요했어요. 어차피 추리 소설의 애호가들만 구입할 이런 류의 책에서는 필수적인 정보인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나름의 가치는 분명하나 여러모로 지금 읽기에는 낡은 결과물입니다. 책의 완성도도 부족하고요. 추리 소설의 대단한 애호가가 아니라면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추리 소설 애호가시라면 즐길 거리가 제법 되는 만큼, 한 번 읽어보셔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누가 되었건, 누군가가 21세기에 걸맞게 내용을 수정하고 덧붙여 개정증보판 형식으로 재출간해 주면 더욱 좋겠습니다.

2015/01/06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 워싱턴 어빙 외 / 한동훈 : 별점 3점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 6점 워싱턴 어빙 지음, 한동훈 옮김/태동출판사

이 블로그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서는 아마도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고전 본격 황금기, 클래식 미스터리는 사족을 못 쓰는 애호가입니다. 이런저런 고전들은 많이 읽은 편인데 평균적으로 괜찮게 평가하고 있는 이유는 다 저의 취향 때문이죠.
 그러나 아주 오래전 읽었었던 예전에 읽었던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이 심하게 기대 이하라서 나름의 기준점을 최소한 19세기 말 이후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그 이전 작품들은 지금 읽기에는 심하게 낡았다고 여겼거든요. 이 책 역시 대부분 작품이 19세기 후반 발표된, 기준점 통과가 간당간당해서 그동안 읽지 않았었던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 완전 대박입니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놀라움이 가득했어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과 견줄만한, 국내에 많이 소개되지 않은 명탐정들 - 여성 탐정 러브데이 브룩, 오스트리아 최고의 형사이자 탐정인 요제프 뮬러, 의뢰인을 위해서는 그 어떤 일이라도 하는 변호사 랜돌프 메이슨, 과학 탐정 크레이그 케네디 교수 - 시리즈 단편들은 완성도를 떠나 존재만으로도 반가웠을 뿐더러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 "결산", "위험천만한 게임"이라는 "걸작"이라 칭해도 부족함없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4편이나 되는 작품이 수록된 볼륨도 마음에 들고요. 발표된 시기를 감안할 때 지금 읽기에는 낡아버리거나 시대착오적인 작품도 있고, 고전적 작법으로 쓰여져 지금 기준의 완성도를 충족시키기는 어려운 작품도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고전을 읽을 때 감수해야 할 필연적인 세금과도 같은 것이죠. 가이 포크스나 보르시치와 같은 고유명사를 잘못 번역한 옥의 티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번역도 무난한 편입니다.

그래서 수록 작품 평균해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고전 본격물 미스터리 애호가에게는 놓칠 수 없는 책인데 고전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기는 하네요. 그래도 최소한 걸작이라 말씀드린 저 세작품은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본서는 절판되었으나 e-book은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기도 하니까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울버트 웨버, 혹은 황금의 꿈" 

"슬리피 할로우" 등으로 유명한,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명이라는 워싱턴 어빙의 작품입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평범한 네덜란드 출신 배추농부 울버트 웨버가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한다는 내용인데, 떠벌이가 지껄이는 듯한 구전문학같은 묘사가 볼거리입니다. 울버트의 보물을 찾기 위한 헛된 노력이 해적들의 은밀한 행동과 결합되어 전개되는 독특한 전개, 블랙코미디 느낌도 많이 전해주는 유쾌함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울버트가 부동산 재벌이 된다는 난데없는 결말과 같은 두서없는 전개, 구전문학스러운 묘사 등은 너무 낡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약간 호러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장르 문학으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하기도 하고요. 최소한 "미스터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던 작품입니다. 부동산이 최고라는 교훈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차라리 시사풍자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길쭉한 궤짝"

에드거 엘런 포우의 단편. 친구가 애지중지 돌보는 궤짝 안에 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낡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나 흥미로왔어요. 

다만 선장의 말을 빌어서 마무리하지 말고, 마지막 침몰 직전 상황에서 진상이 드러나는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예를 들자면 관 뚜껑이 열리고 아내의 시체가 등장하는 "어셔가의 몰락" 식으로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걸작 단편입입니다. 무허가 3류 도박장에서 주인공이 도박으로 거금을 딴 뒤 술에 취하고 몽롱한 채로 도박장 방 하나를 빌려 잠을 자다가 침대 천장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주인공이 술에 취하는 과정의 생생한 묘사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도 침대 지붕이 내려오는 묘사가 정말 대단합니다. 읽다가 숨이 턱턱 막힐 정도에요. 잠이 오지 않아 세밀하게 관찰했던 벽에 걸린 그림 속 인물의 깃털 유무에서 모골송연한 범죄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과정도 매끄럽고요. 짧은 글이지만 정교하게 복선이 짜여져 있는 덕분이지요. 

한마디로, 이 작품을 읽은 것 하나 만으로도 이 작품집을 읽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근대 추리소설의 시조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거장의 작품다왔달까요. 별점은 5점입니다.

"꿈속의 여인"

조금 흔해빠진 괴담이랄까... 자신의 생일날 자신을 죽이기 위해 나타나는 여인에 대한 환상과 공포를 품고 살아가는 마부 아이작의 이야기입니다. 

별다른 극적 반전도 없고 여인의 정체도 알려주지 않는 등 불친절한 부분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앞선 작품은 걸작인데 이 작품은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거장이라고 항상 걸작만 쓰는건 아니겠지요. 

그래도 아이작의 과거 이야기는 분명 흥미로우며 꿈과 현실을 잇는 과정의 묘사만큼은 볼만했던 만큼 별점은 2.5점입니다.

"공주의 복수"

캐서린 루이자 퍼키스의 여성 탐정 러브데이 브룩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에 "문간의 검은 가방"이라는 단편이 소개되었던 시리즈이지요.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 셜록 홈즈 스타일입니다. 

루시에 쿠니에르라는 아가씨의 실종 사건을 그리는데 추리적으로는 별로였어요. 러브데이의 추리가 불완전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집사가 드루스 소령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지나친 억측입니다.
뭐 이 부분은 눈빛에서 살기를 느끼는 무림 고수와 같은 재주가 있었을지도 모르니 그렇다 쳐도, 사건 관계자들이 모인 상황에 난입하여 "모자 가게"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 정도의 비약입니다. 그녀를 빼돌린 드루스 부인과 그윈 부인이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며 모자를 쳐다보았다? 이게 모자 가게를 가리키는 것인지, 그냥 눈둘데가 없는 것인지도 불명확하고 그 모자 가게에서 산 모자인지도 확실치 않으니까요.

주로 관찰을 통해 추리하는 러브데이 브룩과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주위 남자들을 매료시키는 루시에 캐릭터, 셜록 홈즈의 라이벌치고는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쓰여진 점 등은 특이하지만 추리적으로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천국의 물가에서"

아주아주 약간 고딕 호러 분위기가 나기는 하는데 실상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러브스토리입니다. 주인공 케언공이 라마스 양에게 청혼할 때의 대사는 재미난데 그 외에는 별다른게 없는 고전 할리퀸 로맨스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목사 서재의 피웅덩이" 

오스트리아 최고의 형사이자 탐정인 요제프 뮬러 시리즈 단편입니다. 목사관 서재에 피웅덩이를 남긴채 목사가 사라진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로, 충격적이면서도 기발한 인간 소실 트릭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상은 트릭이고 뭐고 없이 서재에서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지나 지하실에 숨겼다는게 결론이라서 맥이 빠집니다. 이래서야 명탐정이 딱히 등장할 필요도 없죠. 자세한 현장 조사가 이루어졌더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거에요. 아무리 피가 응고하였더라도 아무런 흔적없이 시체를 옮기는 작업을 성공했을리는 없으니까요.

그 외에도 사건 해결의 핵심 단서가 순전한 우연 - 범인이 시체를 옮길 때 우연히 팽이가 떨어져 그것을 돌리게 된 것 - 이라 추리적인 면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지닌 양치기 캐릭터는 전혀 등장할 필요가 없었고요. 

셜록 홈즈처럼 현장을 아주 철저하게 조사한 뒤 단서를 찾아내어 사건을 해결하는 뮬러의 활약은 그럴듯했습니다만, 이러한 이유로 별점은 2점입니다. 홈즈 시대 추리소설의 단점만이 극대화된 작품이었어요.

"범죄구성 사실" 

엉클 애브너 시리즈로도 유명한 멜빈 데이비스 포스트의 변호사 랜돌프 메이슨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사교계의 총아인 사무엘 월콧이 사실은 리차드 워렌이라는 인물로, 월콧의 아내와 공모하여 그를 죽인 뒤 신분을 가로챈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월콧 (워렌)이 아내를 죽여 입을 막으려는 계획을 돕는다'는 나름 충격적인 설정으로 고객을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랜돌프 메이슨의 캐릭터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에요. 페리 메이슨의 선구자적인 캐릭터죠.

또 완벽하게 시체를 없앨 경우 범죄 사실 자체가 성립하지 않고, 사망 사실과 그 사망을 가능케 한 폭력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어서 무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 당시에 소설로 발표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던 이른바 "시신 없는 살인사건"이 떠오르네요. 요새는 이 법의 헛점이 많이 알려진 덕인지 이런저런 정황 증거를 통해 범죄 사실이 입증된다면 유죄를 선고하는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만.... 

시체를 없애는 과정의 디테일도 좋아요. 황산을 이용하여 시체를 녹여 없애는 방법인데 소설처럼 깔끔하게 모든 흔적을 단시간내에 없애는 것은 어려웠겠지만, 묘사가 잔혹하면서도 생생해서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부족함이 없지는 않으나,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면 좋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쌍벽의 탐정"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작가인 마크 트웨인의 작품으로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서사, 그리고 제법 그럴듯한 범죄 및 트릭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완성도는 좀 처집니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치 스틸맨이 어머니를 버리고 모욕한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그 와중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재능(냄새 맡기)을 어필하는 전반부와 호프 캐넌의 은광 부락에서 벌어진 폭사사고를 다룬 후반부로 나뉘는데, 두 이야기가 잘 결합되지도 않을 뿐더러 지루한 탓입니다. 

특히 전반부 이야기는 설득력도 낮고 이렇게 길게 설명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장황해요. 후반부도 문제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서 플린트 버크너에게 살의를 품은 노예와 같은 영국 소년 페트락 존스가 범행을 결심하는 과정, 거기에 아치 스틸맨이 그 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의 특수한 능력을 발휘하여 실종된 아기를 찾아내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플린트 폭사사건 이후 페트락의 친척 아저씨 셜록 홈즈가 등장하여 여러가지 단서를 이용하여 범인을 지목하고 아치 스틸맨과 추리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난잡하게 전개됩니다. 

마크 트웨인 작품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정교한 과학적 트릭 - 초가 타는 시간을 이용하여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알리바이를 만듬 - 이 등장하는 것은 인상적이지만 아치 스틸맨이 현장 조사를 통해 증거를 확보한 만큼 완전 범죄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아요.

물론 셜록 홈즈의 패러디물을 쓰기도 했던 작가의 작품답게 셜록 홈즈가 등장하여 여지없이 망가지는 장면은 재미있었고 그 외에도 셜록 홈즈 스타일에 대한 통렬한 패러디, 예를 들어 "탐정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탐정 곁에서 일을 꾸미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등은 인상적이고 재미있긴 했습니다. 미국적인 정취와 무식함 (집단 린치를 포함하여)을 한껏 느낄 수 있다는 부가적인 장점도 존재하고요.

그러나 단점이 더 부각되는 작품이라 별점은 2.5점입니다. 조금 더 짧게 줄였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작가의 욕심이 과했던게 아닌가 싶네요.

"블랙 핸드"

제목을 한글로 풀이하면 "흑수단". 제목 그대로의 범죄단체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크레이그 케네디 교수 시리즈 중 한편입니다. "과학 탐정"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라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자신이 직접 개발한 도청 장치를 이용하여 사건을 해결하죠.

셜록 홈즈 시리즈의 영향을 짙게 느껴지는데 1인칭 화자가 파트너로 등장하는 것에서부터 기묘한 사건의 의뢰, 독자가 그 사용법을 알 수 없는 장치의 등장,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홈즈 시리즈를 보는 듯 합니다. 그러나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은 별게 없습니다. 유괴 사건에서 아이를 은닉한 장소를 도청 장치를 통해 듣고 경찰에게 알려준다는 방법이 전부니 말이죠.

그런대로 잘 쓰여지기는 했지만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탁상시계"

"독화살의 집"이라는 멋진 본격 추리소설을 쓴 작가의 작품이라 기대가 컸는데 환상특급을 보는 듯한 내용이라 기대와 영 달랐습니다. 장르 구분을 하자면 판타지에 가까왔달까요. 시간을 불특정하게 14분간 멈추는 능력이 있는 탁상시계로 벌인 완전범죄 이야기로 시간이여 멈춰라! 류의 내용이라 추리적으로는 건질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시계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도 이루어지지 않고 반전도 없어서 여러모로 실망스러웠습니다. 

만년 2인자의 질투심이라는 동기는 충분히 설득력있기는 하고, 이런 류 아이디어의 원조인지도 궁금하긴 한데, 상술한 이유로 높은 점수를 주긴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결산"

퍼시벌 와일드의 단막극. 극작가로도 알려져 있지만 국내에 출간된 작품은 단편집 두 권밖에 없지요. 때문에 자료로서도 귀중한데 작품의 수준도 아주 높습니다. 딱 두명의 등장인물이 이발소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빚어지는 극도의 서스펜스가 놀라울 정도에요. 이발사 킬번이 과연 그의 딸을 농락하고 버린 손님 존의 멱을 딸 것인가?와 존이 시간제한이 있는, 전 재산이 걸린 경매에 참석할 수 있는가?라는 두가지 드라마를 긴장감넘치게 선보이면서도 킬번이 존을 12년 동안 뒤쫓고 지금의 찬스를 만들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는 솜씨도 탁월한 덕분입니다.

아울러 마지막 반전 - 존이 이야기한 경매시간과 이발소 시계가 얼마나 빨리 가는지에 대한 대사 - 까지 확실하고요. 이런 작품이 10여 페이지에 불과하다니 고개가 숙여질 뿐이네요. 별점은 5점입니다!

"위험천만한 게임"

프로 사냥꾼 레인스포드는 우연히 조난당하여 러시아 출신 부호 자로프 장군의 섬에 표류하였다. 자로프 장군은 사냥에 미친 인물로 극도의 긴장감을 위해 인간을 사냥하고 있었고 레인스포드도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생명을 건 게임에 참여하는데..... 

어딘가의 앤솔러지에서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던 걸작입니다. 인간 사냥이라는 아이디어, 그리고 실제 사냥 게임에 대한 설정 - 3일이라는 시간 제한 및 자로프 장군이 사거리 짧은 피스톨을 장비했다는 핸디캡 등 - 이 탁월할 뿐 아니라 두 명의 대결에 대한 묘사가 긴장감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반전도 기가 막혀요. 바다로 뛰어든 레인스포드의 목적은 탈출이 아니라 성까지의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인데 예상을 깨는 맛이 있었거든요. 별점은 5점입니다. 

한 남자가 협박 때문에 생명을 건 모험에 뛰어들어 성공한 뒤 협박자를 응징한다는 내용은 스티븐 킹의 단편 "벼랑 끝에 선 사나이"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새 출발"

잘 모르는 작가의 종말 이후를 그린 SF로 문명이 모두 사라진 뒤, 이전 문명의 기억을 지닌 자가 미개집단의 종교인과 충돌한다는 설정의 작품입니다. 

설정부터 많이 접해보았던 것으로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네요. 종교인이 믿는 신의 존재가 식기세척기였다는 반전은 있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하여 뛰어나다고 하기 어렵고요. 한마디로 전체적으로 진부했어요. 시대가 너무 흐른 탓이겠죠. 별점은 2.5점입니다.

2018/08/04

공정드래곤즈 1~3 - 쿠와바라 타쿠 : 별점 2점

[고화질] 공정 드래곤즈 03 - 4점
쿠와바라 타쿠 지음/대원씨아이(만화)

바야흐로 먹방의 시대입니다. 백종원 씨를 비롯, 여러 셰프들이 스타덤에 오른지 오래이며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맛있는 것을 먹는 온갖 예능들도 넘쳐나고 있고, 무엇보다도 맛있게 먹는 모습만으로 스타가 된 사람들마저 등장하고 있으니까요.

만화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물론 요리 만화는 등장한지 오래되긴 했습니다. 빵이나 카레, 중화요리, 초밥, 도시락, 와인, 술 등 요리사가 주인공이며 특정 요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만화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은 주로 주인공의 직업과 소재가 특이한 배틀물 - 고전 "맛의 달인"의 '완벽과 최고'의 대결처럼 - 에 머무른 작품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여러가지 다양한 장르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음식과 요리를 소소한 일상, 인간 드라마와 결합시키거나, 평범한 음식을 실존하는 평범한 식당에서 평범하게 먹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로 전개하는 '음식을 소재로 한 소소한 일상계'입니다. 앞서는 "심야 식당", 그리고 뒤에는 "고독한 미식가"가 대표적인 예이며, 이외에도 영상화 된 작품만 해도 "하나 씨의 간단 요리", "와카코와 술", "라멘 너무 좋아 코이즈미 씨", "음식의 군사" 등 수도 없을 정도로 그 인기는 현재진행형입니다.

두 번째로 현재 음식 만화에서 작지만 확실한 인기를 몰고 온 분야는, 판타지 세계관과 음식 소재를 결합한 '이세계 미식물'입니다. 쿠이 료코"던전 밥" 에서 처음 선보인 이 장르는 "던전밥"처럼 이세계의 몬스터를 재료로 친숙한 음식을 만든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하여, "이세계 주점 노부" 등 처럼 현대(그 중에서도 일본) 요리를 그러한 음식을 잘 모르는 이세계 주민에게 소개한다던가, 아예 현대 일본인이 이세계로 이동하여 자신의 요리 실력으로 현지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는 "맛없는 밥 엘프와 유목생활", "이세계에서 카페를 개점했습니다" 등으로 아이디어가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다른 '세계'가 아니라 현대 요리사가 전국시대로 타임 슬립한다는 "노부나가의 셰프" 와 같은 이야기도 유사 장르로 포함시킬 수 있을테고요.

서론이 좀 길었는데, 이 만화는 이러한 '이세계 미식물' 장르에 속한 작품입니다. 그 중에서도 원조 "던전 밥" 의 특징을 많이 따릅니다. 용을 사냥하는 용 사냥꾼들이 용을 재료로 이런저런 친숙한 음식들을 만든다는 점에서요. 이세계 전문직 종사자의 평범한 식단을 테마로 했다는 점에서는 '일상계 음식 만화'의 한 범주로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단순히 아류작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포룡선 퀸자자호를 타고 용을 사냥하는 사람들과 사냥 과정에 대한 디테일 - 용이라고 불리우긴 하지만 크툴루 신화 속 크리쳐가 연상되는 "용", 고전적인 비행선인데 용을 잡기 위한 다양한 장비(작살총, 봄랜스, 창과 이런저런 와이어, 후크들, 오토자이로)를 갖춘 퀸자자호, 포룡 과정에서 하늘에 떠 있는 퀸자자호 내부에서의 식사와 빨래와 같은 생활 묘사 등등등 - 이 펜터치 중심의 고전적이면서도 빼어난 작화로 그려져 있어서 큰 재미를 선사해 주는 덕분입니다.

그런데 1권은 용 사냥꾼이 용을 사냥하고 그 부산물을 조리해 먹는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2, 3 권부터는 세계관이 긴 호흡의 이야기로 확장되어 나가더군요. 단편으로 나누어져 있긴 하지만 2권은 용의 거래로 먹고 사는 마을 '퀀 시'에 기항한 퀸자자호가 마을에서 깨어나 폭주하는 용을 사냥하는 이야기에 승무원 지로의 짤막한 사랑 이야기가 곁들여지며, 3권은 사냥 중 지상으로 떨어진 타키타가 지상의 사냥꾼에게 구조된 후, 자신을 따르게 된 새끼 용을 무리에게 돌려보내 준다는, 한 권에 한 편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구성이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변화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이세계 미식물' 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 일상계 이세계 사냥 판타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이야기도 딱히 새롭거나 재미있지도 못합니다. 전형적인 설정의 전형적인 이야기였을 뿐입니다. 그나마 용잡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일상 생활이 어우러지는 2권은 조금 낫지만, 3권은 전형적인 나우시카류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고기에 푹 빠진 미카는 "던전밥"의 라이오스와 유사한 등, 퀸 자자호의 승무원들 모두 어디선가 본 듯한 뻔한 캐릭터라는 점이 더해져 식상해도 너무나 식상할 따름입니다.
용 고기가 무슨 색깔이며 구울 때는 어떻고, 날로 먹으면 어떤지 등 기본적인 특성조차 소개되지 않고 이런저런 요리를 선보인다던가, 뒤로 가면 갈 수록 특별한 요리에 대한 설명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전개를 보면 판타지 구루메 만화를 그려달라는 편집부의 요구를 따르는 척 하면서 자신만의 세계관을 그려나가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네요. 뭐 이런 류의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분명 많을테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3권까지는 그래도 어찌어찌 읽기는 했는데, 다음 권을 읽게 될 지는 잘 모르겠군요.

그러고보면 저와 같은 이세계 미식물 팬을 위해서 지브리에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를 활용하여 비슷한 컨텐츠를 내 놓으면 좋을 것 같네요. 나우시카 세계관에서 오무를 가지고 만드는 요리 등이 등장하면 참 재미있지 않을까요? 서둘러라 지브리!

2020/08/29

흑사의 섬 - 오노 후유미 / 추지나 : 별점 3점

흑사의 섬 - 6점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북홀릭(bookholic)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흥신소를 운영하는 시키부는 오랜 고객인 논픽션 작가 카츠라기의 행방을 쫓아 그녀의 고향인 '야차도'라는 섬을 찾았다. 그녀가 섬으로 향하는 배를 탄 것은 확인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섬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했으며, 마을에는 카츠라기의 원래 성인 하세가와라는 집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모두 마을 사람들의 방해라는걸 알아낸 시키부는 혼자만의 조사와 조력자인 마을 의사 야스다를 통해 시호가 참혹한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시호가 '마두야차'의 심판을 받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유는 그녀가 마을 영주인 진료 가문의 후계자 히데아키를 살해한 범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섬 특유의 종교와 풍습에 시호가 죽었다면 그녀와 동행한 나가사키 마리라는 여인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가사키 마리가 진료 가문의 마지막 남은 후계자라면 시호를 죽인 이유는 무엇인지? 마두야차와 진료 가문의 '슈고'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등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계속 더해지고, 결국 마지막 순간에 현재의 '슈고'인 진료 아사히에 의해 모든 진상이 빍혀지는데...

"시귀"와 이런저런 괴담 단편집으로 호러, 공포 소설 작가로 알고 있었던 오노 후유미본격 추리물입니다. 

외떨어지고 고립된 마을을 지배하는 가문과 그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을 토대로 풀어낸 본격 추리물은 일찌기 많이 접해 보았습니다. 일본 작품이라면 요코미조 세이시가 떠오르네요. "이누가미 일족" 등이 그러하니까요. 가문의 저주와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가문의 상속자들을 죽게 만드는 "바스커빌 가의 개"도 마찬가지고요. 그만큼 고전적인 설정인데, 지금도 도조 겐야 시리즈, 민속 탐정 야쿠모 등으로 계속 이어지는 인기 설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장기간에 걸친 전통 관습의 과정이 핵심 트릭(의도한 건 아니지만)의 하나라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됩니다. 전설을 직접적인 트릭으로 이용한게 아니라 일종의 심리 트릭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띄는 점이고요.

마을만의 신앙과 전설, 관습, 그리고 트릭을 조금 자세히 설명드리자면 우선 마을에서는 '마두야차'님을 신으로 모십니다. 마두야차는 죄 지은 자를 심판하며, 마을을 지배하는 진료 가문은 오래전 야차산에 사는 사람 잡아먹는 귀신을 응징한 행자의 후예입니다. 그런데 귀신인 '마두님'은 아직도 진료 가에 붙잡혀 있어서, 진료 가문에서는 대대로 후계자가 아닌 셋째 아들이나 딸에게 마두님이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지키는 역할인 '슈고'를 맡게 해 왔습니다. 슈고는 어렸을 때 정해지고, 한 번 슈고가 되면 그만둘 때 까지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게 관례입니다. 심지어 슈고로 있는 동안은 호적이 없어서 학교도 가지 않았습니다. 없는 사람인거에요. 그렇게 이십여년 정도 슈고를 맡다가 성인이 되면, 다음 대 슈고에게 자리를 넘긴 뒤 신관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 관습을 이용하여 전 대 슈고이자 현재 진료 신사의 신관인 모리에가 슈고였을 때인 19년 전 나가사키 마리의 어머니 히로코를 깜쪽같이 살해했습니다. 섬 사람들이 '낯선 사람'을 목격했는데, 모리에는 슈고였던 탓에 집에 갇혀 있어서 사람들이 그 존재를 잘 몰랐던 덕분이었지요. 모리에는 사건의 진상을 감추기 위해 히로코와 결혼할 예정이었던 시호의 아버지 노부오도 잔인하게 토막 살해했습니다.
이는 섬의 마두 신앙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섬 마을 사람들은 노부오의 잔혹한 시체를 보고 이를 마두야차의 심판으로 받아들이고 사건을 끝난 일로 치부하여 그냥 덮어버리고 말거든요. 단지 신사에 심판을 의미하는 화살촉 한 대만 놓아두면 끝이었던 거지요. 

그 뒤 현재에 이르러, 모리에는 진료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히데아키를 살해했습니다. 히데아키가 없으면 분가인 자신의 집이 종가를 잇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딸인 나가사키 마리가 종가를 잇게 될 수 있다는걸 알고난 뒤, 그녀마저 죽이고 완전범죄를 위해 19년 전 사건처럼 참혹하게 시체를 훼손했습니다. 섬 마을 사람들은 역시나 관례대로, 나가사키 마리가 히데아키를 죽여서 심판받았다 생각하고 대충 사건을 수습해 버렸고요.
이렇게 '슈고' 라는 관습을 활용해서 섬 사람이지만 낯선 사람이었다는 상황을 만든 트릭(우연이었지만), 그리고 마두 신앙을 활용하여 살인이라는 큰 범죄를 대충 수습하게 만든 일종의 심리 트릭을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동기가 확실해서 범인을 특정하기 쉬운데, 비교적 초반에 발견된 시체가 카츠라기 시호라는게 증명되어서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드는 전개도 좋습니다. 시호와 동행했지만 사라진 나가사키 마리가 진료 가문의 후예라는걸 알게된 후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진료 가문의 부를 노리는 종가의 범행이라면 카츠라기 시호를 죽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이와 함께 이런저런 용의자들도 부상하면서 흥미롭게 진행됩니다.

일종의 '바꿔치기' 트릭도 잘 사용되어서 추리적으로 큰 만족감을 전해줍니다. 진상은 카츠라기 시호와 나가사키 마리가 고등학생이 되어 섬을 나갈 때 서로의 신분을 바꾸었던 겁니다. 여관에서 '나가사키 마리'를 찾는 전화를 받고 나가 살해된 건 섬에서는 시호였던 여자 마리였고, 섬에서 마리였던 시키부의 지인 '카츠라기 시호'는 당연히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도주했고요. 그리고 이 때문에 폐가가 된 시호의 옛 집에서 채취한 지문은 시체와 일치했습니다.
바꿔치기는 현재의 슈고이자 해결자 역할을 맡고 있는 아사히의 추리와도 연결됩니다. 섬 사람들은 모두 시호와 마리를 알아봤다고 합니다. 둘 다 어린 시절을 섬에서 보냈으니까요. 그러나 범인은 시호와 마리를 구분할 수 없었고 그래서 시호를 죽였다고 생각했지요. 이에 아사히는 범인은 두 사람이 고등학생이 되어 섬을 떠난 뒤 태어났거나, 아니면 두 사람과 엇갈려 섬을 나갔다 돌아온 이로 한정된다고 추리합니다. 이런 섬 사람은 없으니, 범인은 당시 슈고였던 모리에일 수 밖에 없고요. 진료 가문의 정보를 이용하여 마리의 현재 신상을 캐 내어 후쿠오카에서 얼굴을 확인까지 했으니, 충분히 착각할 만 했습니다.

주인공인 시키부도 꽤 인상적입니다. 보통 폐쇄된 마을 공동체가 꺼리는 조사를 하는 주인공은 마을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공격당하는 탓에 어떻게든 도망다니면서 기회를 엿 봐 역전의 기회를 노리는 식의 이야기가 많았었죠. 그러나 시키부는 마을 사람들과 당당하게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돋보입니다. 여관 주인 오에가 자신의 짐을 손댄걸 알고, 일부러 수첩을 비닐 봉투에 넣은 뒤 현금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며 협박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분명 범인의 지문이 남아있을거라고 장담하면서요.
옛 하세가와 집에서 담배를 피다가, 가츠라기 시호가 버린 듯한 캐빈 꽁초를 줍는 장면처럼 탐정 역할도 충실하며, 범인은 이 섬 신앙을 잘 알고 있지만 섬 사람은 아닐 거라는 등 추리력도 쓸만합니요. 자신이 범행을 저지르면 마두님에게 심판받을 걸 두려워하는 섬 사람이 범행을 저지를리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인데 그럴싸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 한 몸은 충분히 지킬법한 능력과 기본 이상의 추리력은 갖춘 능력자입니다. 2000년대 이후 작품인 만큼 고전들처럼 마을 사람들도 섣불리 그를 건드릴 수는 없었겠지만,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라는 시키부의 캐릭터가 명확한 탓도 있을겁니다.

황량한 섬도 실제하는 듯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핵심 트릭으로 사용되는 마두야차 신앙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놀라운 수준입니다. 시키부가 이런 쪽에 관심이 많고 주술과 음양 오행에 박식한 나머지 섬에서 모시는 신인 '마두야차 (마두관음상에 뿔이 난 형태)'가 '해치'라는걸 깨닫는다는건 무리수로 보이기는 했지만, 덕분에 시키부 시점에서 이런저런 상세한 정보를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잘 전해줍니다. 한 마디로 기대보다 훨씬 좋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핵심 트릭인 섬과 마두야차 신앙, 그리소 슈고 등 진료 가문과 관련된 풍습 모두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작위적인 설정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물론 오노 후유미가 공들여 설정을 잘 쌓아올려 놓은 덕분에 읽다보면 실제로 있음직하다는 설득력은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는 중반까지고, 아쉽게도 어린 소녀인 슈고 아사히가 후리소데 차림으로 나타나 모리에를 직접 잔인하게 살해한다는 마지막 장면 탓에 심혈을 기울였던 설득력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이건 정말이지 만화에서나 쓰임직한 장면이었어요.
물론 마두, 해치의 심판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한 노력은 가상합니다. 진료 가문의 행자가 사람 잡아먹는 귀신을 응징하고 가둔게 아니라, 귀신이 진료 가문의 핏줄이라서 슈고는 그러한 핏줄을 타고난 후예를 가두어 놓는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막 나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사히가 슈고 입장에서 추리를 들려주는 정도로 충분했으니까요. 아니면 감히 해치를 사칭한 모리에에게 천벌을 내린건 슈고로서의 임무였다고 하던가요. 또 이렇게 마두를 사칭한 자에게 천벌을 내린 거라면, 대체 19년전 사건은 왜 가만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 일이라서?
슈고 전통의 진상 역시 그다지 의외성없고 만화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진료 가문에서 아사하기 살인귀의 핏줄을 타고 났다는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묘사도 없어서 그나마의 설득력도 존재하지 않고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부러진 용골"이라던가, "인어 공주", "앨리스 죽이기" 등 처럼 판타지 속 이야기로 풀어내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군요. "철가면" 이야기를 응용했더라면 괜찮지 않았을까요?
그 외 야스다가 나가사키 가문의 아들이었다는 등의 자잘한 설정은 나오지 않는게 좋았습니다. 너무 관련된 인물이 많이 엮여 작위적으로 느껴졌거든요. 용의자를 늘리려는 의도였다는건 알겠는데, 지나쳤어요.

그래도 오노 후유미가 본격 추리물 작가로도 충분한 실력을 갖췄다는건 여실히 보여준다는건 분명합니다. 남편 아야츠지 유키토도 긴장할만한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손에 땀을 쥐고 읽을만한 서스펜스와 치밀한 두뇌 게임 모두를 갖춘 만큼, 더운 여름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1/06/13

나이브스 아웃 (2019) - 라이언 존슨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 할런 트롬비가 85세 생일 파티 다음 날, 칼로 목이 베어진 채로 가정부에게 발견되었다. 누군가 유명 탐정 브누아 블랑에게 사건을 의뢰했기 때문에 블랑이 수사에 함께 했다. 하지만 모든건 할런의 간병 간호사 마르타의 실수 때문에 할런이 꾸민 것이었고, 마르타에게 전 재산을 상속한다는 할런의 유서가 공개되면서 사건은 마르타가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웰 메이드 추리 영화로 유명한 작품이지요. 넷플릭스로 감상하였습니다.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잘 만든 본격 추리물이거든요. 구조도 정교하고, 복선과 단서 제공도 공정한 덕분입니다.

마르타가 실수로 할런에게 모르핀을 주사한 뒤, 할런이 그 실수를 덮기 위해 자살하고 그녀는 범인으로 몰리지 않게끔 수를 쓴게 초반에 등장하는 탓에 도서 추리물로 보였습니다. 자살로 위장하기는 했지만, 실수와 단서가 드러나자 그걸 덮고자 하는 마르타의 필사적인 노력이 이어지니까요. 하지만 이 모든건 유산을 받지 못하게 될 위기에 처하자, 마르타를 살인범으로 몰려고 했던 할런의 손자 휴의 작전이었다는 결말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증거는 빈약하지만, 앞서의 이런저런 사소한 대사와 휴의 행동으로 정교하게 짜맞추고 있을 뿐더러, 휴의 작전이 실패하고 마는 결말까지 완벽했어요.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가 마르타의 '선한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도 아주 신선했던 발상이고요. 또 부족했던 증거는 휴의 자백으로 채워지는데, 이 장면에서 마르타가 거짓말을 하면 토한다는 특징을 활용하여 통쾌한 맛을 전해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휴가 칼을 뽑아 들지만, 가짜 칼이어서 마르타 카브레라가 살아남고 결국 재산을 모두 손에 넣는다는 완벽한 해피엔딩도 제 취향이었습니다.

본격 추리물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명탐정추리쇼도 확실히 선 보여 줍니다. 사실 명탐정은 현재극에서 제대로 그려내기 힘듭니다. 수사 기법이 발달한 탓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추리' 영역으로만 승부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의 브누아 블랑의 중반부까지는 실망스러웠습니다. 피아노 건반을 하나씩 치는 첫 등장부터, 온갖 현란한 대사를 떠벌이는 모습은 뻔한 과거 고전 시대 명탐정의 과장된 모습을 답습하는 느낌이었거든요. 추리라는걸 별로 보여주지도 않고요. 또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배우도 지적인 명탐정역에 별로 잘 어울려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추리쇼 장면에서 이런 실망감을 모두 날려보내 줍니다. 멋진 추리력을 잘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고, 샌님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힘과 행동력이 느껴지는 모습이 좋았던 덕분입니다. 기생충같은 가족들 앞에서 한 푼도 받지 못할거라고 시원하게 일갈하는 모습, 경찰에게 붙들린 휴 앞에서 유산은 모두 할런이 이룬 것이라고 비웃는 모습 등은 과거 명탐정들에게는 보기 힘든 멋진 퍼포먼스였어요.

이런 류의 영화에서 많이 보는, 유명 배우들로 이루어진 화려한 캐스팅도 볼거리더군요.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를 비롯하여 폰 트랩 대령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플로머 (아직 살아 계시다니!), 왕년의 호러 퀸 제이미 리 커티스, 마이애미 바이스 돈 존슨, 캡틴 아메리카 크리스 에반스 등이 관객을 즐겁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2시간이 훌쩍 넘는 긴 상영 시간은 너무 길었어요. 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아버지의 돈만 노리고, 그 돈에만 기대어 사는 트롬비 가족들의 모습은 뻔하고 진부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설명도 지나쳤습니다. 이런저런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여긴 듯 한데, 그런 장치까지 넣을 필요는 없었지요. 가족 수를 줄인다던가, 무능함과 불성실한 모습에 대한 설명을 줄였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또 휴가 나쁜 짓을 했다는 증거를 잡은 프랜이 그를 불러낸 뒤 무력하게 살해당한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협박으로 돈을 뜯어내려는게 아니라, 비난이 목적이었다면 더더욱 그러하지요. 범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 증거를 들이대는데 아무런 대책도 하지 않는다? 현대물이라면 휴대폰을 이용한 녹음이라던가, CCTV 등 다양한 대책이 가능했을텐데, 납득하기 어렵지요.

그래도 오랫만에 재미있는 추리 영화를 감상했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브누아 블랑이 등장하는 다음 작품도 보고 싶네요.

2023/10/05

Nervous Breakdown 너버스 브레이크다운 1~13 - 타가미 요시히사 : 별점 3점


90년대 초, 중반에  '타누마 사립탐정 사무소' 멤버들이 - 특히 브레인 역할인 안도와 액션 전담 미와 컴비 -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한다는 추리 만화. 지금은 없어진 월간지 "코믹 NORA"에 연재했었지요. "그레이" 등 성인 취향의 어둡고 비정한 SF, 범죄물로 유명한 타가미 요시히사의 작품입니다. 저는 "그레이" 때부터 좋아했던 작가라 이런저런 작품들 - 예를 들어 "화석의 기억" - 을 원서로 구해 읽었었는데, 이 작품은 "메탈헌터"와 함께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유이한 작품입니다. 소개 당시 한 권씩 구입해서 읽었고,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지요. 
예전에 스핀오프 "Night Adult Children" 리뷰를 올렸던 적은 있었는데, 추석 연휴를 맞아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전 13권을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등장인물들이 3등신과 8등신을 오가는 작화가 가장 큰 특징으로, 대부분의 경우 3등신인데  아래와 같이 특정 컷에서만 8등신으로 등장하는 식입니다. 


3등신 캐릭터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추리를 하고 시니컬하고 분위기있는 대사를 내뱉는게 묘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특별히 모든 등장인물들이 8등신으로만 등장하는 에피소드도 두 편 있습니다. - 안도가 주인공인 "고즈에로 가는 마지막 버스", 미와가 주인공인 "살인자에게 인사를" - 두 편 모두 의외의 재미를 가져다주는 좋은 작품으로, 전부 8등신으로 진지하게 그렸어도 좋았을 것 같아요.

등장인물들도 독특합니다. 안도는 포지션은 전형적인 명탐정이지만, 정의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거든요.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진범을 체포하는데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정해진 보수를 받은 만큼 일하고요. 사건 도중에 일어난 트러블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의뢰인에 대해서 "그 여자가 죽건 말건 난 상관없어"라고 말할 정도고, 아래처럼 지인의 죽음에도 눈 하나 깜빡않는, 인정머리 없는 남자입니다.



몸이 굉장히 약하고, 여자들이 쉽게 반하는 미남이라는 속성도 붙어 있는데 이런 캐릭터는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네요. 아래와 같이 멋진 말을 남기는 장면은 과연 여자들이 반할만하다 싶기도 하고요.

"미야한테 전할 말이 있는데...."

미와는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개그 캐릭터에 가깝지만, 그 초인적인 체력이 유용하게 활용될 때가 많다는 점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입니다. 아래와 같이 가끔은 멋지게 등장합니다. 그냥 개그컷에 가깝지만....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작가의 추리물에 대한 나름대로의 애정이 잘 녹아 있거든요. 목차부터가 고전 명작의 패러디들이 많을 정도로요. 
하지만 트릭이 사용된 본격물보다는 범죄 드라마, 스릴러에 가까운 에피소드들이 더 완성도가 높습니다.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전개도 좋고, 사건에 몰입하게 만드는 상황과 심리 묘사가 탁월한 덕분입니다. 작가도 이런 특성을 알아챘는지 뒤로 갈 수록 트릭보다는 드라마에 집중하며, 덕분에 더 볼 만해집니다.
이외에도 죽어가는 남편의 첫사랑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조사에 나선다는 "어느 조용한 죽음" 처럼 잔잔한 일상계로 인간 관계를 되새기게 만드는 에피소드들도 독특합니다. "고백의 십자가", "마지막 Chiristmas" 같은 일상계 러브 스토리까지 수록되어 있는 등 다루는 장르의 폭도 넓고요. "노리코의 죽음"같이 SF 등 다른 장르물과 혼합된 사랑 이야기(?), 미와가 맹활약하는 액션물들도 괜찮습니다. 

정통 본격물 맹점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 패러디들도 큰 재미를 가져다 줍니다. 과거 잔혹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던 곳에서 실종자가 한 명 나왔지만 안도가 "아직 기껏해야 실종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런 사건은 다음 피해자가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라고 말하는 장면처럼요. 아래의 밀실 살인에 대한 비판 역시 공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추리 만화로서 논리적이거나, 감탄할만한 트릭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많지 않다는건 다소 아쉽습니다. 만들기 쉬운 암호 트릭 - 10권 "산쥬노출"의 "미키가 노래하는 미버 (タレラヤ小さぃ子羊肉)"처럼요 - 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 오히려 트릭이 사용된 에피소드는 다소 억지스럽다는 점은 단점입니다. 예를 들어 "바이바이 엔젤"에서는 수조로 이루어진 밀실에서 수조를 치우는건 불가능하다고 등장인물들이 이야기하지만, 수조를 어떻게든 치웠다는게 진상이었습니다. 이런건 반칙을 넘어서는 억지죠. 

3등신 캐릭터가 등장하기 때문인지 개그도 많은데, 안도의 약한 체력과 미와의 야수같은 육체, 의뢰인이었다가 타누마 탐정 사무소에서 일하게 되는 미야가 재벌 이나바 테츠노스케의 손녀라는 등의 캐릭터 설정을 활용한게 많습니다. 문제는 다소 뻔하고 식상한 개그들이라는 겁니다. 반복적이기도 하고요. "15세" 딱지가 붙을 정도로 외설적인 개그도 많은데,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아서 안 나오느니만 못했습니다. 마지막 에피소드 "마지막은 참극"은 미와가 등장인물 모두를 죽이는 꿈을 꾼다는 내용인데,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았고요.
아울러 학산 문화사 초기 번역 소개작이라 그런지 여성의 노출 장면을 어거지로 덧칠하는 등의 문제도 크며, 3등신 캐릭터들의 얼굴 구분이 쉽지 않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3권의 "모두가 닮은 사람"이라는 에피소드에서 모두가 닮았다는걸 트릭으로 써먹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래도 다시 읽어도 여전한 재미를 가져다주는건 분명합니다. 수록작들 편차는 크지만 몇몇 작품들은 충분히 '걸작' 소리를 들을만 하다 싶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각 권별 수록작들 제목을 소개해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제가 아는 한 원제를 달아보기는 했는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1권 :
갑자기 사라져 버린 케이코
그래도 사랑스러운 여인이여
원과 면 : 점과 선
황색의 연구 : 주홍색 연구
 
2권
일요일은 죽는 날
걱정일세, 여탐정!
여름빛깔 카루이자와
타누마 소장 최후의 사건 : 트렌트 마지막 사건
얼어붙은 파도 : 얼어붙은 섬 또는 얼어붙은 송곳니
 
3권
도둑은 가득히 : 태양은 가득히
모두가 닮은 사람 : 당신을 닮은 사람
제로의 정점 : 제로의 초점
한여름 낮의 꿈 : 한여름 밤의 꿈
어느 조용한 죽음

4권
하얀 커튼 : 검은 커튼
입학 : 졸업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새빨간 거짓말
사라질 뻔한 탐정 : 사라진 남자 (?)
 
5권
새벽녘의 시선 : 새벽의 데드라인
그리고 소녀는 사라졌다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변호인측 괴인 : 검찰측 증인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내일도 무사하게 하소서

6권
오발탄
타누마 가의 일족 : 이누가미 일족
노리코를 위하여 : 요리코를 위해
분수령
마진테 부인은 죽었다

7권
귀여운 설녀
어느 비오는 오후 갑자기
Midnight Fool
매장 지도
50의 살인

8권
시체와 여행하는 남자 :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고백의 십자가 : 공허한 십자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남자들
토모여, 고이 잠들라 :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 (기타가타 겐조)

9권
바이바이 엔젤 : 바이바이, 엔젤
추억의 매장
모르그 가의 살인 : 모르그 가의 살인
레이디 하트브레이크
" " (무제)

10권
산쥬노출
마지막 Chiristmas
고즈에로 가는 마지막 버스 : 우드스톡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
불타는 사나이 (Man on Fire) : Man on Fire (크리시 시리즈)
치에는 어디에
사람은 어째서 살해당하는가 :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11권
악몽같은 여자 : 악마같은 여자 ("디아볼릭")
환상의 여인 : 환상의 여인
의뢰인으로부터 한마디 (과거 연재작 특별편) 시리즈
  • 귀여운 여인
  • 설녀가 보고 있었다, 또는 "고립된 산장"을 주제로
  • 울부짖는 여자

12권
보디가드
살인자에게 인사를
셀룰로이드 살인
어설픈 시체
움직이는 시체

13권
여자에게는 맞지 않는 직업 :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랑의 탐정들
가장 위험한 유행 : 가장 위험한 게임
도중의 집 : 중간 지점의 집
리틀 루즈 걸 : 리틀 드러머 걸
마지막은 참극


본편 외에도 "스페셜 리포트"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유명 추리 소설들을 패러디한 4컷 만화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당시에 만화책이 3,500원이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모든 물가가 3배 이상은 올랐을텐데, 만화책만은 거의 오르지 않았네요.

2013/09/09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 아놀드 베넷 외 : 별점 1.5점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 4점 아놀드 베넷 외 지음, 한국추리작가협회 엮음/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도서출판 한스미디어에서 야심차게 선보인 추리소설 앤솔러지. 유명 고전 작가들의 단편은 물론이고 초창기 추리 이론까지 풍성하게 실려있습니다.
1, 2권으로 출간되었는데 1권은 읽은 작품이 너무 많고 지나치게 고전 취향이라 2권부터 구입하게 되었네요. 2권 역시 다른 책에서 읽어본 작품이 제법 많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워낙에 목차가 괜찮고 또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고전 황금기 작품들을 주력으로 하고 있기에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러웠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번역입니다. 일본어 중역 느낌이 물씬 날 뿐더러 그 자체가 별로 매끄럽지 않아 읽기 힘들었어요. 악명 높은 동서 추리문고 최악의 번역도 이거보다는 좋게 느껴질 정도니 말 다했죠. 고전 황금기 걸작이 아닌 몇몇 현대 일본작가 작품이 섞여 있는 것도 기획 의도가 모호해 보여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기획의도만으로 3점은 충분하지만 번역은 용서가 안되네요. 좋은 기획의도가 번역 때문에 다 망가진 것 같아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한스미디어의 다른 작품들은 괜찮았었던 것 같은데 대관절 영문을 모르겠군요.

몇몇 작품은 걸작이지만 대부분 다른 책에서 훨씬 좋은 번역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사라진 기억" | 배리 퍼론

극작가 애닉스터가 완벽한 밀실살인 트릭을 생각했는데, 교통사고로 트릭을 잊어버린 탓에 술집에서 트릭을 알려주었던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내용.

교통사고로 딱 필요한 기억만 상실한다는 작위적인 설정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꽤 그럴듯한 전개, 그리고 마지막에 애닉스터가 상황을 깨닫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남자에게는 애닉스터만이 유일한 위험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서늘한 반전류의 교과서적인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

"살인!" | 이넉 아놀드 베넷

명백한 살인사건인데, 경찰이 수사 결과 몇몇 남겨진 단서를 통해 자살로 결론 내린다는 내용의 소품. 솔직히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심리 묘사에 대한 번역에 문제가 많았던 것 같은데 제대로 된 번역으로 다시 읽고 싶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피트 모란, 다이아몬드 헌터" | 퍼시벌 와일드

"탐정 피트 모란"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그때는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번역이 너무나 별로인 탓에 작품마저도 후지게 느껴지는 기묘한 체험을 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실망하신 분들께서는 "탐정 피트 모란"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번역 때문에 별점을 주기조차 어렵네요.

"골초는 빨리 죽는다" | 이자와 모토히코

"역설의 일본사" 말고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이런저런 상을 많이 수상했던 유명 작가의 단편.

두 명의 대화로만 전개되는 형식과 담배로 촉발된 살의라는 설정은 독특한데, 결말이 너무 심하게 별로였습니다. 반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좀 어이없는 결말이었거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먹이" | 토마스 테셔

이형 생물체가 등장하는 크리쳐 호러물. 스티븐 킹의 비슷했던 작품(한 소년의 아버지가 점액질 괴물이 된다는 이야기)와 비슷한데, 이 작품은 "애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비극적 결말이라는게 차이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라서 평하기는 어렵지만 공포도 아니고 심리묘사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결말에서 반전이 돋보이는 것도 아닌 그냥저냥한 소품이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콜 Y의 비극" | 노리즈키 린타로

제가 개인적으로 번역했던 작품이죠. 읽어보니 원작을 "직역"한 번역으로 읽기가 어렵더군요. 순수하게 작품만 놓고 평가하면 별점은 3점인 좋은 작품인데 안타깝네요. 솔직히 제 번역과도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녀들의 쇼핑" | 쓰쓰이 야스타카

다른 앤솔러지에서 접해본 적 있는 이색작.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부들이 강도단을 조직한다는 내용입니다. 작품 자체의 수준은 그냥저냥이지만, 작가 특유의 섬뜩한 풍자 하나만큼은 인상적입니다. 특히 마지막 대사가 백미! 순수하게 작품만 놓고 평가하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살의" | 다카기 아키미쓰

역시나 다른 앤솔러지에서 접했던 작품으로, 굉장한 걸작입니다. 이른바 "일사부재리" 원칙의 모순을 정면으로 다루는데, 마지막 반전까지 빼어난 단편의 모범 답안 같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그러고 보니 "살의"라는 말이 들어간 작품들 ("이런거"라던가 "이런거"라던가 "이런거"라던가....)은 하나같이 괜찮네요.

"아버지" | 토마스 H. 쿡

토마스 H. 쿡의 장편은 몇 권 읽어보았지만 단편은 처음입니다.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지만 장편 못지않은 묵직함이 잘 전해지는 묘사가 아주 좋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무대 뒤의 살인" | 에드워드 D. 호크

총 3편의 초단편 Short-Short로 이루어진 작품.

예전에 읽었던 "4페이지 미스터리"와 유사하나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3편의 이야기 모두 논리정연하면서도 예상을 뒤집는 정통 추리물이거든요.

첫번째 작품은 사진 필름 원판을 가지고 협박하는 협박자가 살해된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는 이런저런 논리 퍼즐에서 많이 보았던, 다섯 번째 남자마다 처형당하는 상황에서 살아남는 주인공의 이야기, 마지막 이야기는 이집트 전시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입니다.

첫번째 작품은 에스터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 돋보였어요. 특히나 1만 2500달러라는 애매한 비용과 30분이라는 시간 공백을 설명하는 게 제법이었거든요.
마지막 작품은 살인사건은 전혀 상관없는 동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는 반전이 인상적이었고요.

결론내리자면 단편의 제왕 에드워드 D. 호크의 명성에 걸맞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오번 가문의 비극" | 매슈 핍스 실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단편 미스터리 시리즈인 "프린스 자레스키" 시리즈!

그러나 별로 건질 게 없었습니다.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인 프린스 자레스키 설정은 너무나 만화 같았고 사건도 설득력이 너무 떨어지거든요. 아버지가 광인이 된 것을 왜 숨겨야 하는지도 불분명하고 사건 현장 윗층에서 과학교실을 열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조작을 하는 것도 와닿지 않았어요. 그냥 본인이 자살하는 것이 더 빠른 해결책이었을 텐데 말이죠.

한마디로 수준 이하의 작품.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한 것은 물론 번역까지 별로라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불도그 앤드류" | 아서 체니 트레인

터니게이트 - 애플보이 사이의 영토 분쟁에서 불도그 앤드류가 지나가던 터니게이트를 문 뒤 기소되어 법정에 선다는 법정극.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좀 무리지만 유머스러운 일상계 법정극으로는 충분히 읽을 만 했습니다. 재판장의 마지막 한마디를 통해 약간의 반전이 있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번역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마크 트웨인이 연상되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아내의 외출" | 자크 푸트렐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에 수록된 사고기계 시리즈 단편(이 책에 수록된 제목은 "녹색눈의 괴물"이죠). 당대 보기 드문 일상계로 가치 높은 수작입니다.

그러나 별점을 주기 민망할 정도로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서 도저히 읽을 맛이 나지 않네요.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로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A 분장실의 수수께끼" | 자크 푸트렐

역시나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에 수록된 것과 같은 사고기계 시리즈 단편. 여배우의 증발사건을 다룬 작품인데 장치적으로는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가 선보입니다.

그러나 트릭의 핵심이 "최면술"이라는 게 문젭니다. 당시 최면술이 마법처럼 받아들여진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물로 생각되는데 지금 읽기에는 너무 설득력이 떨어지니까요. 번역 역시 수준 이하였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알리바바의 주문" | 도로시 세이어즈

피터 윔지 경 단편.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던 "검은별"과 동일한 스타일의 모험극. 추리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는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오필리어 살해" | 오구리 무시타로

"흑사관 살인사건"의 오구리 무시타로가 쓴, 범죄학자이자 탐정 노리미즈 린타로가 등장하는 단편. 셰익스피어 스타일 연극 무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무대 장치를 이용한 기계장치 트릭에 더해 심리적 착각을 이용한 트릭이 등장하죠.

현실적이지 못한 트릭,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현학적인 전개와 묘사, 거기에 동기까지 애매하여 전체적인 완성도가 낮습니다. 정통추리물로 보기도 어려웠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그의 마음은 찢어졌어" | 크레이그 라이스

"스위트홈 살인사건"의 크레이그 라이스가 쓴 단편. 주인공인 술꾼 찌질이 변호사 말론은 시리즈 캐릭터라고 하네요.

의뢰인인 사형수 폴 파머 자살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폴 파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끊어지지 않았어"를 단서로 마지막에 추리쇼까지 펼쳐 보이며 사건을 해결하는 정통파 추리물입니다.

정통파답게 추리적으로는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습니다. 초반부 딕슨 의사와의 대화로 병원에서 탈옥한 죄수가 있다는 단서를 전해주는 등 독자에게 공정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도 좋았고요.

메들레인 스타가 그냥 폴 파머와 결혼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을 텐데 성공 확률이 낮은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옥의 티이긴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2/03/09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 조세핀 테이 / 권영주 : 별점 3점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 6점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검은숲

어느 봄날 오후 4시, 로버트 블레어는 이제 그만 퇴근할까 생각 중이었다.

40줄에 접어든 독신 변호사 로버트 블레어는 어느 날 퇴근 직전에 사건 의뢰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프랜차이즈 저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는 매리언 샤프였다. 의뢰 내용은 샤프 모녀가 유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유괴당했다고 주장하는 소녀 베티 케인의 디테일한 증언 때문이었는데...

아직까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인 18세기 엘리자베스 캐닝 유괴 사건을 현대물로 재창조한 독특한 픽션입니다(현대물이라고 해도 작품이 쓰여진 1948년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요.). 이런 저런 리스트에서 고전 걸작으로 선정되었던 유명한 작품으로, 장르와 성격은 다르지만 실제 사건을 주요 소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진리는 시간의 딸"과 비슷합니다.

이런 저런 리스트에 선정될만큼의 재미는 확실히 갖추고 있습니다. 추리물, 법정물로서의 가치는 낮을지라도, 중요한 증언(첫 진술의 허점, 베티의 유혹에 대한 증언, 파트타임 도우미의 위증)을 밝혀내는 수사 과정과 법정에서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은 충분한 재미와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거기에 더해 최근에 보기 드문 짜증나는(!) 영국인 심리 묘사와 캐릭터 설정, 재치 있으면서도 지적인 영국식 대사, 자존심 강한 영국 신사 스타일의 해피엔딩 등, 고전 영국 본격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즐길 거리가 한가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눈 색깔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독특한 (짙은 청색 눈: 성적으로 문란 (매리언 샤프), 연푸른색 눈: 말주변 좋은 거짓말쟁이 (핼럼 경위)) 설정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아, 이 얼마나 영국적인가요!

그러나 비록 억지스러운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팩션으로서의 가치가 높은 "진리는 시간의 딸"에 비하면, 이 작품의 추리적 완성도는 많이 부족합니다. 이유는 유괴 사건의 핵심인 베티 케인의 주장이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외관만 슬쩍 본 저택 내부의 배치나 가방에 대한 증언이 너무 상세하고 정확해서, 단순히 때려맞췄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원래 사건에서도 증언이 핵심 요소였고, 작중에서도 여러 가지 방법(베티 케인의 카메라 같은 기억력, 당시 영국 저택들의 유사한 구조, 가구, 장비 등)으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독자를 설득하기에는 많이 부족해요. 사건이 뉴스화된 이후에는 채드윅이나 그의 부인이 언제든 등장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물론 불륜이기에 드러낼 수 없었다는 설명도 가능하지만, 작중 설정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한마디로 그녀의 증언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였고, 초반 몇 발자국만 운이 좋았을 뿐 결국 추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게 과연 사건성이 있나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증인인 코펜하겐의 호텔 주인이 등장하는 장면 역시 극적이기는 하나, 결국 운과 우연이 겹친 결과일 뿐이라는 점에서 아쉬웠습니다. 이런 전개 때문에 추리적인 서사는 보잘것없고, 법정 드라마적인 요소만 살아 있는 묘한 구성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또한 영국식 관용어구의 사용이 지나쳐 "버터를 입에 물어도 녹지 않는다"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다소 과한 느낌이었습니다. 찾아보니 "순진한 척하면서도 뒤로는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풀어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번역자가 영국적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 한 의도였겠죠.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단점이 명확하지만, 실제 있었던 미해결 사건을 토대로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하여 창작한 픽션이라는 점과,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만큼은 뛰어납니다. 

저와 같은 고전 영국 본격 미스터리 팬들이나, 조셉린 테이, 프랜시스 아일즈, 앤서니 버클리 콕스의 작품을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2005/06/21

세계 미스터리 명작여행 악성인자 - 정태원, 최진섭 편역 : 별점 2점

지난주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입니다. 그동안 읽고 싶었던 단편집이라 주말동안 한 번에 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수록작들이 기존에 잘 알려져 있던 걸작들이 대부분으로, 제가 이미 읽었던 단편이 상당수더군요. 홈즈 단편과 브라운 신부 단편, 포와로 단편은 너무 안이한 선정이었습니다. 단편의 거장이긴 하지만 이런저런 앤솔로지에 포함된 작품들이 대부분인 헨리 슬레사 작품이 3편이나 포함되어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대충 선정한 느낌이고요. 이런 책에는 보다 마이너하고, 국내 독자가 접하기 힘든 작품들 위주로 선정되어야 했습니다. 메그레 경감의 단편과 더쉴 해미트의 컨티넨털 옵 단편만 이런 선정 기준에 부합하네요.

또 앤솔로지로서의 정체성 문제도 큽니다. 일단 작품 선정에 있어서 기준이 모호해요. 연도별 베스트나 작가 중심 선정도 아니고, 장르도 정통 추리물에서부터 서스펜스 스릴러, 꽁트, 마지막에는 SF 분위기의 단편까지 실려 있습니다. 기준이 물건 기왕 선정했다면, 연도별로 배치하는게 더욱 좋았을텐데 그것도 아니라 혼란스러웠어요.

전체적으로 초심자들이 즐기기 좋은 선정이기는 하나 너무 평범하고 무난하달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던 "세계 서스펜스 명작여행" 보다는 독자를 흥분시키는 맛이 없네요. 제가 이런저런 작품을 너무 많이 읽은 탓도 있겠지만...

베스트는 제가 안 읽었던 작품 중에서만 뽑아보겠습니다. 메그레 경감의 정통 추리물 "다섯명의 용의자"와 독 초콜릿 사건의 단편 버젼이라는 앤소니 버클리의 "무서운 초콜릿" 입니다. 더쉴 해미트의 "파리 종이"도 괜찮았어요.

작품별 간략한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돼지와 피아노 - 헨리 슬레사

폭력적인 남편에게 괴롭힘 당하며 사는 한 여인이 숙면을 취하는 유일한 방법이 등장하는 단편. 심리 드라마에 가까운 소품입니다.

2. 헬로 자스민 - 헨리 슬레사 

로봇 개발에 취미가 있는 해리는 아내 자스민을 죽이기 위해 자신이 만든 로봇 맥더프를 프로그래밍 하는데.... 

 단편의 거장 중 하나인 헨리 슬레사의 독특한 단편. 다른 앤솔로지에도 많이 실려있는 작품이죠. 반전의 묘미가 탁월합니다.

3. 세 여인의 공통분모 - 빌 프론지니 

30대의 금발 머리, 그리고 영업을 위해 자주 출장을 떠나는 세 여인이 차례로 살해당했고, 한 남자가 자수했는데 동기는? 

단편으로 더 유명한 작가인 빌 프론지니의 괜찮은 작품입니다. 역시 다른 앤솔로지에도 실려있는 작품이죠. 짧지만 강렬한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4. 한낮의 정사 - 브루노 피셔

앞집에 사는 노마가 살해당한 뒤, 불륜 관계에 있었던 TV 수리기사 래리 포레스트가 구속되었다. 그러나 브린 형사는 새로운 단서를 통해 진상을 밝혀내는데...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단편으로 짧은 길이 안에서 꼼꼼하면서도 공정한 전개, 그리고 화자가 남편이라는 독특함까지 잘 살아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놀라운 진상이 밝혀지는 후반부가 참 매력적이기도 하고요. 역시나 다른 앤솔로지에 수록된 작품이긴 하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5. 색다른 토끼 스튜 - 윌리엄 아이리쉬 

수많은 앤솔로지에 실려있는 걸작 단편. 지금은 낡아 보이지만 괜찮은 증거 인멸 트릭이 등장하는 고전입니다.

6. 미인과 초콜릿 - 로버트 블록 

아내 메어리를 죽이고 애인 프란시스와 새로운 생활을 꿈꾸는 존은 약제사로서의 자신의 직업을 이용해 직접 독을 넣은 초콜릿을 제조하여 아내에게 선물로 주는데... 

역시 다른 앤솔로지에서 본 작품입니다. 살인을 계획하는 과정을 주 내용으로 하되 반전을 통한 파국으로 끝나는 미국 추리 단편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이런 전개는 "헬로 자스민"하고도 똑같죠.

7. 살아있는 라디오 - 존 딕슨 카

중요한 연구를 진행 중이던 두 남녀가 허름한 아파트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에 괴로워하다가 유령이 나온다는 방에서 라디오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시체가 놓여 있었다... 

꽤 장황한 전개를 보여주지만 나름 명쾌한 해석과 결말이 있는 잘 짜여진 고전적인 추리 단편입니다. 특히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게 마음에 들었어요. 거장의 정통 본격 추리물다운 작품이었습니다.

8. 사랑의 도박 -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작가 데이비드의 비서로 일하는 펜은 데이비드의 아내 지니와 사랑에 빠졌다. 데이비드는 펜을 조롱하고 지니와의 사랑을 확고히 하기 위해 실종 사건을 연출하는데... 

스릴러라고 봐야 할까요? 마지막 한줄로 사건을 정리하는 솜씨가 놀랍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지막 한줄의 증언이 실제 수사단계에서 얼마나 확신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9. 초록색 벌레 - GK 체스터튼

브라운 신부 단편입니다. 굉장한 힘을 가진 인물이 조그만 흉기를 써서 광포한 살인을 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하지만 브라운 신부 특유의 화법으로 설명하는 작품으로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는 단편입니다.

10. 마음 돌리기 - 도널드 마틴

그래디 부인은 자신의 수표를 훔치려다 다리를 삔 토빈이라는 젊은이를 치료해 주며 그를 개심시키려 한다. 하지만 토빈은 부인의 보석을 가지고 달아나게 된다... 

추리물로서 보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마지막 반전이 괜찮은 소품입니다.

11, 파리종이 - 더쉴 해미트

건달과 사랑에 빠진 명문가 막내딸이 송금을 부탁하자 컨티넨털 옵이 수표를 가지고 출동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간데없고 송금 요청은 조작된 것이었는데... 

컨티넨털 옵 시리즈로 길이도 길고 내용도 풍성합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책이 단서가 되는 등 트릭과 전개도 꽤 잘 짜여진 편이고요. 특히나 하드보일드이면서도 사람이 많이 죽지 않고 추리적으로도 알차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12. 위험한 초보운전 - 프레드 S 토비

굉장히 짤막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짧은 길이 탓인지 사건의 동기가 미흡한 것은 아쉽네요.

13. 사라진 열쇠 - 애거서 크리스티

포와로 단편.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죠.

14. 다섯 명의 용의자 - 죠르즈 시므농

벨기에 국경 밖으로 나가는 열차에서 한 부자가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같은 객차안에 있었던 다양한 직업과 국적의 다섯 명 뿐이었다.

메그레 경감 시리즈로 이 단편집 최대의 수확입니다. 정통 추리물로 동기와 단서가 완벽하네요. 트릭 자체는 별게 없는 완전범죄 스타일의 작품은 아니지만 메그레 경감의 수사방식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15. 무서운 교배 - 죤 콜리어

예전에 호러 앤솔로지에서 본 기억이 나는 짤막한 호러단편입니다. 왜 이 단편선에 실려 있는지 의문이네요. 전혀 성격이 맞지 않거든요.

16. 무서운 초콜릿 - 앤소니 버클리

클럽 회원인 윌리엄 경에게 선물로 배달된 초콜릿을 같은 클럽 회원인 버레스포드가 아내에게 주려고 대신 받았는데, 초콜릿을 먹은 아내가 독으로 죽고 말았다.

역시 이 단편집에서 베스트 중 한편입니다. "독 초콜릿 사건"의 단편버젼이라고 하는데 정통 추리물로 동기와 전개가 나무랄데 없네요. 불특정 다수를 노린 듯한 트릭도 굉장히 우수하고 독창적입니다.

17. 약속의 그늘 - M.레버

모파상 단편같은 지독하게 잔인한 인생사를 다룬 소품. 그러나 15편 "무서운 교배"와 같이 왜 이 단편선에 실려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18. 빨간 머리와 지하실 - 코난 도일

"붉은 머리 클럽"입니다. 설명은 필요 없겠죠?

19. 매력적인 안드로이드 신부 - 헨리 스레사

SF취향의 소품으로 전 아시모프 작품인줄 알았습니다....별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설정만 독특한 작품으로 이 작품도 이 단편선 성격과는 잘 맞지 않는 선정인것 같네요.

2003/12/15

불연속 살인사건 -사카구치 안고 / 유정 : 별점 1.5점

불연속 살인사건 사카구치 안고 지음, 유정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아내와 나는 여름을 산간마을에 있는 친구 집에서 보내게 된다. 시인, 소설가, 극작가, 배우, 화가 등 20여 명과 같이 지내게 되는데, 돌연 인기작가가 살해되면서 이후 차례로 7, 8명이 연달아 칼에 찔리거나 교살, 독살, 익사체로 죽어나간다. 범행방법도 제각각, 동기도 알 수 없는 이 연쇄살인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불연속 살인사건인가.

일본 고전 미스테리 걸작을 뽑을때 빠지지 않는 사카구치 안고의 불연속 살인사건입니다. 평소 헌책방을 뒤져 절판된 추리소설을 구해 읽는것을 좋아하지만 워낙 유명한 일본 정통(?) 고전 추리소설인지라 동서 추리문고의 따끈따끈한 새책으로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위의 줄거리와 같이 무려(!) 20여명에 가까운 등장인물들이 나온다는 것이 특징으로 화자역인 야시로 슨페이나 탐정역의 교세이 박사 두명 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개성에 가려 별로 돋보이지 않을 정도에요. 홈즈나 왓슨의 비중이 죽어나가는 조연들보다 낮은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요?  이름들도 "야시로 슨페이""우타가와 가즈우마""모치즈키 다카히토" 등등 외우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라 앞부분의 등장인물 표를 계속 보게끔 만들더군요. (중반 이후부터는 번역과 교정 문제인 듯 이름이 잘못 표기된 부분이 꽤 눈에 띄더군요. 흐....)
또 여러 설정들이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식이라는 것도 큰 특징으로 한 시골마을에 왕처럼 사는 구 귀족 출신의 부자와 그의 자식들,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친구들, 미친 의사와 간호원까지.. 어떻게 보면 "김전일"에 많이 나옴직한 시골 명문가와 비뚤어진 인간관계의 원형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김전일에 비하면, 이야기는 너무나 장황하고 사건보다는 심리묘사와 각종 상황묘사, 그리고 인물간의 대사에 치중하고 있어서 추리소설의 느낌이 많이 약합니다. 너무 대사가 많은 나머지 가장 중요한 사건인 "살인사건"마저도 이런 저런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묻혀 어영부영 넘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니까요.
그러나 이건 약과일 뿐이고 더 큰 문제는 너무 많이 죽어서 결국 용의자가 좁혀진다는 것입니다. 저조차도 끝부분에서 트릭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범인이 누군가인가 하는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거든요. 실질적 동기를 가진 사람이 한명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 다했죠 머...^^ 
게다가 정통 고전파 명작 중 하나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정통파라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에요. 최소한 동요에 맞춰 사람이 죽어나간다던가, 이름 머릿글자 순으로 죽어나간다던가 하는 재미 정도는 더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결론내리자면 고전을 읽은 기쁨은 있지만 아쉬움도 큰 책입니다. 이 책은 분명 고전이고 발표 당시에는 뭔가 획기적이고 대단한 면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고 지루하기만 할 뿐이었어요.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는 하나 작가의 이름값에 기댄 측면이 커 보이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뒷부분에 수록된 진슌신의 "얼룩화필"도 별로 신선하지 못했기에 본전 생각이 더 나게 만듭니다.

2018/03/23

요괴 헌터 1 : 지편 - 모로호시 다이지로 / 서현아 : 별점 2.5점

요괴 헌터 1 : 지(地)편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 서현아 옮김/시공사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작가 생활 초기인 1974년부터 꾸준히 발표해 왔던, 고고학자 히에다 레이지로를 주인공으로 한 판타지 호러 단편 연작입니다. 요새 좀 복잡한 스토리, 설정을 갖춘 고전 만화에 꽂혀서 호시노 유키노부를 비롯한 몇몇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쭉 찾아보다가 이러한 저만의 유행에 편승하여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명성이야 전부터 익히 들어왔지만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는데, 나이가 드니 이런게 취향이 되는게 신기하네요.

읽어보니 과연, 명성이 허언은 아니더군요. 무려 40년 전 작품이지만 지금 읽어도 독특하다 느껴질 정도거든요. 발표 당시에는 독자들에게 대단한 충격을 전해주지 않았을까 싶네요.
러브크래프트 느낌의 코즈믹 호러 분위기를 한껏 풍겨주는 묘사들은 왜 이 작가가 우메즈 카즈오와 호러 만화계에서 같은 급으로 인정받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며, 이런 저런 설정들의 적절한 이종 교배를 통해 참신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대체로 앞서 말씀드린 코즈믹 호러, 크리처를 일본 전통 문화와 교배시키는 식인데 예를 들자면, 코스믹 호러와 크리처 세계관에 일본 고전 설화를 끼얹은 "검은 탐구자", 가쿠레 키리시탄 설정을 이용하여 역시나 코즈믹 호러 느낌의 새로운 성경과 종교적 기적을 그려낸 "생명의 나무", 코즈믹 호러 크리처와 일본 고사기에 기반한 역사를 섞어 '해룡을 맞이하는 해룡제' 라는 행사로 그려낸 "해룡제의 밤" 이 대표적입니다.
이 중에서도 "생명의 나무" 는 이렇게 짧게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였어요. 성서에 지극히 일본적인 설정을 잘 짜깁기한 대단한 작품이었거든요. 가쿠레 키리시탄이 성경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자신들만의 성경을 만들어 전승시켰다는 역사 속 실화를 토대로 하고 있는데, 아담 외에 쥬스헤루라는 인류의 선조가 있으며, 쥬스헤루는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어 낙원에서 추방당했다는 작품 속 창세기 설정부터 참신합니다. 죽지도 못하고 고통받는 쥬스헤루의 후손들 중에서 그들만의 "예수"가 태어나 모두를 구원한다는 결말도 무척 대담했고요. 이런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다는건 정말이지 놀라운 재능입니다.

하지만 단점과 한계 역시 명확합니다. 우선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조금 낫기는 하지만 설명의 부족은 여전한 편입니다. 설정은 좋지만 펼쳐놓은 설정을 수습하는데 급급한 이야기들이 제법 되거든요. 게다가 괜찮은 설정을 갖춘 작품들도 전체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선 "붉은 입술"은 단순한 크리처 호러물에 불과하고, 지극히 평범한 좀비물 클리셰 투성이인 "죽은 자가 돌아왔다"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그나마 특이한 점이라면 남편을 아이보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등장한다는 점인데, 오히려 이 설정을 강조하는게 더 독특하고 공포심을 자아내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내를 살해하고 묻은 자리에서 아내와 똑같은 풀이 돋아났다는 "사인초"는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은 내용이었고요. "우주해적 코브라" 에서 다이아몬드 이빨을 가진 인면초가 시체에서 피어난다는 "만드라고라" 에피소드가 떠오르더군요.
"개미지옥"은 여러개의 구멍이 있는 공간이 있고, 특정 구멍은 죽음과 영원한 고통을, 특정 구멍은 바라는 걸 이루어 준다는 설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원숭이 손" 이라는 유명 단편과 흡사한 결말이 뻔해서 아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가장 실망한건 주인공 히에다 레이지로의 무존재감입니다. 이 작자는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게 아니라 그냥 이야기에 휩쓸려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만 볼 뿐입니다. 그리고 복잡한 설정을 독자에게 설명, 전달해 주는게 전부에요. 한마디로 나레이터에 불과합니다. "죠죠" 시리즈의 스피드 웨곤보다도 활약이 못해서 존재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스트레이트 롱 헤어에 어딜가나 정장을 갖춰입는 독특한 비쥬얼만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걸작과 졸작, 장점과 단점이 혼재되어 있는 탓에 앞으로 계속 구입해야 할 지는 조금 망설여지는데, 혹 후속권을 읽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계속 읽어봐도 좋을지 고견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2019/02/03

Mystr 럭키팩 8 - 탐정 소설 : Mystr 컬렉션 - 안나 캐서린 그린 외 / 위즈덤커넥트 : 별점 2점

Mystr 럭키팩 8 - 탐정 소설 : Mystr 컬렉션 - 4점
안나 캐서린 그린 외/위즈덤커넥트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고전 단편을 소개하는 e-book 레이블 Mystr 컬렉션 시리즈에서 "럭키팩" 이라는 이름으로 내 놓은 합본집 중 한 권입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격 명탐정들이 등장하는 고전 본격물 여덟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대여하기에 읽게 되었네요. 고전 본격물은 영원한 제 favorite이니까요. 대부분 저작권이 만료된 저작권 free 판권물로 보이는데 딱 한 편을 제외하고는 국내에 첫 소개되는 작품들로 보입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 경찰 뮐러라던가, 영국의 사립 탐정 존 벨은 탐정도 처음 들어보는 인물들일 정도입니다. 희귀하다는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지요.

그러나 국내에 그동안 소개되지 않은 이유도 알겠습니다. 그냥 작품의 수준이 기대 이하입니다. 탐정들도 매력적이지 않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그냥 몰랐던 탐정, 몰랐던 시리즈를 알게 되었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가치를 느끼기 힘든 시리즈였습니다. 저렴한 가격 외에는 이 시리즈를 구해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황금 총알 

혼 국장에게 펠너 교수의 집사 요한 더멜이 찾아왔다. 교수가 닫힌 서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혼 국장은 조 뮐러 형사와 함께 교수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닫힌 문을 열고 살해된 교수의 시체를 발견했다. 방은 완벽한 밀실 상태였고, 흉기인 총알은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는 기묘한 상황에서 조 뮐러는 이 사건이 니에프 부인 자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데...

오스트리아 비밀 경찰국 소속의 자비심 많은 천재 형사 조 뮐러 시리즈 단편으로 밀실 살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지금 거의 잊혀진 시리즈가 된 이유는 명백합니다. 재미와 완성도 모두 평균 이하거든요. 핵심 트릭이라 할 수 있는 밀실 살인 트릭은 열쇠 구멍이 넓어서 빛이 새어나오고 안의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총알도 통과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이디어인데, 발상은 신선하지만 대단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야기에 잘 녹아든 것도 아니고, 독자에게 정보가 공정하게 제공되지도 않고요. 추리물이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입니다.

뮐러가 이전에 맡았던 니에프 부인 자살 사건과의 관련성이 드러나는 부분 역시 작위적이라 아쉽습니다. '우연히' 옷이 찢어진 밀러가 요한으로부터 '우연히' 옷을 빌려입는데, 그 옷은 '우연하게도' 예전에 펠너 교수가 요한에게 선물한 것 중 하나였고, 그 때 '우연히' 트리스탄이라는 거대한 사냥개가 친근함을 표시한 상황에서 그 개의 주인이 니에프라는걸 알게 된다는 식으로 우연이 한 번은 몰라도 두 번 이상은 너무 많으니까요. 차라리 뮐러의 니에프 부인 자살 사건 수사가 함께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니에프를 찾아갔다가 개가 친근하게 구는걸 알고, 그 옷의 주인이 사냥개와 친했다는걸 알게되었다는 전개가 훨씬 나았을겁니다.

불쌍한 범인 니에프가 자살할 시간을 벌어줄 정도로 자비심이 많다는 뮐러 캐릭터 역시 별로였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 

그라우만 부인은 경찰을 찾아와 자신의 조카 알버트가 친구 사이더스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누명을 썼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체포된 이유는 사이더스가 살해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며, 그의 권총이 흉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감옥으로 자신을 찾아온 뮐러에게 알버트는 사이더스가 오래전 큰 돈을 훔쳤던 전과가 있어서 자신이 돌보는 아가씨와의 약혼을 거절했으며, 사건이 일어난 밤 사이더스가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방문했다는 증거를 남기려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하지만 알버트가 후견인인 엘레노라는 오히려 알버트가 자신과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뮐러의 수사를 통해 사이더스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된, 친구에게 쓴 편지가 거짓으로 밝혀진 후 - 그에게 친구가 없었기 때문 - 이 모든 것은 사이더스의 정교한 자살 계획이라는 진상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조 뮐러 시리즈인데 전편보다도 추리적으로는 더욱 별볼일 없습니다. 현대 독자라면 사이더스가 자살 계획을 꾸몄다는걸 너무나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조 뮐러의 독백은 장황해서 지루하기 짝이 없어요. 게다가 자살자가 자기에게 총을 쏘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총을 멀리 던진다는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러나 정황 증거만으로 누군가를 유죄로 만드는 사법 체계의 모순, 그리고 전과자가 갱생할 수 없다고 믿는 일반론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고발하는 사회파 추리물로서의 가치는 높은 편입니다. 이런 부분은 오히려 시대를 많이 앞서간 느낌이에요. 사이더스가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고 했던 검찰청장 구스타프 슈미트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고, 알버트는 심장병으로 결국 몇 개월 뒤 죽는다는 씁쓸한 결말까지도 현대적이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기대했던 고전 본격 추리물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지만, 기대 외의 사회파 추리물적인 가치와 현대적인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서 이전 작품보다는 좀 더 높이 평가받을만 합니다. 그래도 평균 이하 작품이라는건 변함은 없지만요...

아이비 코티지 살인 사건

예술가 개빈 킹스코트가 그의 저택 아이비 코티지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킹스코트는 머리에 난 상처로 죽었다. 현장을 방문해서 나무를 몇 그루 훔치려 했던 정원사가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 상황에서 "나"는 사건을 수사한다는 지인 마틴 휴이트와 함께 현장을 찾는데...

셜록 홈즈와 그의 라이벌 시대인 고전 본격 단편물 황금기 탐정 중 비교적 알려진 편인 사립 탐정 마틴 휴이트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킹스코트가 묶었던 하숙집에서 그가 꾸몄던 나무 장식품들을 완벽하게 파괴하고 도망친 하숙인들 사건과 킹스코트 살인사건이 엮이는 전개가 꽤나 깔끔합니다. 하비 찰리트가 다이아몬드를 방에 숨긴 후, 킹스코트가 그 보석을 찾아내었다는 마틴 휴이트의 추리도 그럴싸하고요. 특히 도둑들이 킹스코트가 자고 있지 않을 때 만나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그들이 찾고 있는 건 서랍장 안에 들어갈 만한 작은 물건이었다는 설명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물론 옛 하숙집 주민 중 한 명이 찰리트라는게 밝혀진다면 사건이 쉽게 해결되었으리라는 점, 그리고 하비 찰리트의 급작스러운 등장과 사망은 완성도를 조금 떨어트리는 요소입니다. 그래도 별점은 2.5점은 충분한 무난한 작품이에요. 후대에도 잊혀지지 않은 시리즈와 작품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연쇄 보석 도난 사건

제임스 노리스 경이 마틴 휴이트를 자신의 렌튼 크로프트 저택으로 초대했다. 이유는 저택에서 벌어진 보석 절도 사건의 해결을 위함이었다. 11개월 전 부터 무려 3건의 연쇄 보석 도난 사건이 일어났는데 보석은 창문 외에는 모든 문이 잠긴 방 화장대에서 사라졌고, 남은 것은 불에 탄 성냥 하나 뿐이었다.
경은 방이 어두웠을 때 도둑이 성냥을 켜고 서둘러 화장대를 살핀 후 보석을 훔쳐 달아났을거라고 말했지만, 두 번째 사건에서는 같은 상황에서 훨씬 귀한 반지를 남겨둔 채 싸구려 브로치가 도난당했다는 모순이 있었다.
그리고 
고가의 브로치가 사라졌던 세 번째 사건에서는 주인이었던 경의 처제가 방을 비운 것은 5분도 되지 않고, 창문은 굳게 닫혀있었으며 문은 열려 있었지만 바로 옆이 경의 딸 방이라 누군가 움직였다면 소리가 들렸어야 했다. 오직 남아있는건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타버린 성냥 뿐이라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오래전 하서 추리문고 단편 모음집을 통해 읽었었던 걸작 "렌턴관 도난 사건"과 같은 작품입니다. 거의 밀실에 가까운, 사람은 드나들 수 없는 방에서 일어난 도난 사건을 해결하는 마틴 휴이트의 활약이 정말로 인상적인 단편입니다. 단서는 불에 탄 성냥개비 뿐이고요.
현장은 햇빛이 잘 드는 곳이라 불을 밝히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는게 드러난 후 성냥개비의 용도에 주목하여 추리하는 과정도 설득력 높고, 여기서 "앵무새"가 범죄에 사용되었다는 진상도 아주 그럴듯합니다.
독자에게 제공되는 정보 - 약간의 틈을 이용하여 방에 침입할 수 있는 건? 왜 한 번에 하나의 물건만 훔쳤는지? 왜 물건의 가치를 알 지 못했는지? 등등 - 도 상당히 공정한 편이라 이 정도면 홈즈 시대 고전 본격물 단편 중 최상급 수준의 작품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이미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으며, 이런 저런 추리 퀴즈에서 트릭이 소개되어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점인데 이는 시간이 오래 흐른 탓일 뿐 작품의 잘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틴 휴이트라는 탐정의 매력이 떨어지는게 이 작품이 지금은 많이 잊혀진 이유가 아닐까 싶기는 하군요. 이대로 잊혀지기는 아까운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둥근 방

존 벨은 친구인 변호사 에드콤비로 부터 웬트워스가의 유일한 상속인 아치볼드의 기묘한 죽음에 대한 진상 조사를 부탁받았다. 

아치볼드가 머물렀던 여관 주인 등의 증언으로 아치볼드의 방에서 유령이 나오며 그는 공포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드러났다. 존 벨은 수사를 통해 캐슬 여관에서 세 번이나 유사한 사건이 벌어졌다는걸 알아냈고, 직접 캐슬 여관에 투숙할 계획을 세웠다. 캐슬 여관 주인 가족은 유령이 나와서 세 명이나 죽었다고 강하게 경고했지만 그는 결국 투숙에 성공했고, 하룻밤을 무사히 버텼다.
다음날 원래 제분소였던 여관 건물을 조사하던 존은 여관 주인 바인드로스와 부딪힌 뒤,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두번째 밤을 보내다가 방이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런던의 유명 탐정 존 벨 시리즈입니다. 존 벨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는게 독특합니다. 대부분의 셜록 홈즈의 라이벌 시리즈물은 화자가 별도로 있었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읽다보니 탐정 스스로가 직접 위험에 뛰어들어 사건을 해결하는 전개라 1인칭으로 쓰여진게 이해는 되더군요. 무엇보다도 '회전하는 방'에 갖힌 묘사에는 아주 딱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약간은 고전 모험물 느낌도 났습니다. 스케일이 큰 기계 장치 트릭 역시 이런 느낌에 한 몫 단단히 하고 있고요.

하지만 제분소 건물, 회전하지 않지만 가동 가능한 물레방아 등의 조건이 무언가에 사용되었다는 내용은 좀 뻔했으며 회전 때문에 건강한 사람이 아무 상처없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부족했습니다. 사람이 죽을 정도의 고속 회전이라면 원심력으로 어딘가에 부딛혀서 상처가 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작품 속에서처럼 완전 범죄가 가능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또 무언가 조작이 있는 방에서 기묘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탐정이 직접 방에 뛰어들어 죽을 고비를 넘긴다는 내용은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등장하는 이야기라 식상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시대를 뛰어넘을 만한 가치는 없습니다.

말하는 시바신

존 벨은 로리에 박사로부터 시바신에 빠진 에드워드 더시거라는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더시거의 조카딸 헬렌은 그가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조카 재스퍼 베그웰과 결혼하려는 이유가 삼촌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이상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더시거가 벌이는 시바 신상 앞에서의 기괴한 의식을 목격한 로리에 박사는 그가 미쳤다는걸 확신한 나머지, 존 벨에게 무언가 음모가 있는게 아닌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강령술사로 변장하여 로리에 박사와 함께 더시거의 저택으로 향한 존 벨에게 베그웰은 더시거 삼촌이 미쳐서 헬렌을 죽이려 한다고 경고했고, 더시거 역시 존 벨에게 시바 신이 자신에게 끔찍한 일을 명령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새벽 헬렌은 몰래 존 벨을 만나 재스퍼를 만난 두세달 전 부터 삼촌이 이상해졌다며, 재스퍼가 재산을 노리고 이런 일을 벌인게 아니냐는 생각을 털어놓았다. 

타원형 회랑에서 소리가 전달되는 구조를 응용한 과학 트릭이 등장합니다. 특정 위치에서 나는 소리가 회랑 반대쪽 특정 위치에서만 들린다는 것으로, 저도 언젠가 기사에서 보고 트릭에 써 먹어야 겠다! 고 생각했었던 내용이라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수십년 전 작품에 사용된지는 꿈에도 몰랐는데,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나 봅니다.

하지만 과학적 트릭이 사용된 것 외의 작품의 완성도, 가치는 높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소리의 "촛점"이 맞아야만 들린다고 하더라도 더시거 혼자 환청을 들은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존 벨이 단 몇 시간의 조사만으로 우연이더라도 이 소리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전개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상황에 대한 설득력을 더욱 약화시키고요. 또 설령 환청을 들었다쳐도, 더시거 정도 되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광기에 곧바로 사로잡혔다는 것 역시 쉽게 납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마디로 과학적 트릭 외에는 건질게 없는 작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저라면 좀 더 이 설정을 잘 활용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소모된게 아까울 뿐입니다.

동굴 속 유령

바이올렛 스트레인지는 뮤지컬을 보다가 특별한 한 명의 남자를 보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 너무나 뚜렷한 우울함이 나타나 그 슬픔이 그녀의 가슴을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남자 로저 업존이 바이올렛에게 사건 하나를 의뢰했다. 도박 때문에 가정이 파탄날 위기에 몰려 이혼 절차를 진행하던 중, 아내가 침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사건이었다. 죽음의 원인으로는 심장 질환이 거론되었지만, 시체 손목이 멍들어 있던 탓에 로저 업존에게 이런저런 추문이 덧붙여져 그는 거의 사회적으로 매장된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그는 바이올렛에게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털어놓는다. 첫 번째는 아내가 죽은 날 아이의 양육권을 걸고 아내와 도박을 벌였다는 것, 두 번째는 그녀에게 패배한 후 도박을 벌이던 해안 지대 동굴에서 홀로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얼마 전 동굴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아내를 묶어 죽음에 이르게 한 후 시체를 옮겨 놓았다는 증거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여성 작가가 쓴 작품답게 복잡하고 여성스러운 심리 묘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정말이지 별로인 작품입니다.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로저 업존의 증언이 대부분이며 바이올렛은 단 하루, 저택을 방문한게 전부입니다. 현장 검증이나 별다른 수사는 이루어지지도 않아요.
바이올렛의 분장쇼 한 번으로 사건이 해결되는 결말도 어처구니 없지만 이 분장쇼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되지 않아서 추리물이라고 부르기 민망합니다.

아울러 충직한 아버지의 하인이 진범이었다는 진상도 그렇게 와 닿지 않습니다. 누가 범인이든 어차피 별로 중요한 상황도 아니고요. 솔직히 아버지 로저가 범인이었다 하더라도 이야기 전개와 결말에 별 차이가 있지 않았을겁니다. 곧 죽을 사람이니까요.

탐정이 추리를 하지 않고, 진범이 누군지 중요하지도 않은 작품이 좋은 추리소설일 수 없겠죠. 완벽하게 건질게 없는 워스트 중의 워스트로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눈먼 의사, 아내, 그리고 시계

하스브룩 씨는 5년 전 자신의 집 안에서 알 수 없는 사람에게 공격당해 총에 맞아 죽었다. 자기 전 집 안의 블라인드와 셔터는 철저하게 내려졌던 상태였다. 꾸준히 수사를 이어온 사립탐정 "나"는 당시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맹인 의사인 재브리스키가 하스브룩을 죽였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는걸 알아낸다. 그러나 그의 미모의 아내는 그가 망상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결국 재브리스키는 경찰에 출두하지만 동기가 없다는 그의 말과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풀려났고, 재브리스키는 스스로 총을 쏘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걸 경찰에 증명하기 위한 실험에 뛰어들지만 과녁인 시계를 품은 아내를 쏘고 말았다...

사립탐정인 "나"라는 화자에 의한 사건의 첫 수사 보고서와 바이올렛 스스로 "나"로 지칭하고 쓴 수사 보고서가 혼재되어 전개되는 구조가 독특합니다. 질투에 사로잡힌 재브리스키가 집을 잘못 알고 하스브룩 씨를 쏘아 죽였다는 진상도 괜찮고요. 이를 위해 재브리스키는 맹인이며 사건 당일 극도의 흥분에 사로잡혔다는 묘사를 통해 그가 집을 잘못 찾은 이유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과정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도 술에 취했을 때 아파트를 착각해서 다른 아파트 현관문에 먹히지도 않는 비밀번호를 여러번 눌렀던 적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더군요.

하지만 진상을 추리하는 과정에서 독자에게 제공되는 단서는 거의 없습니다. 재브리스키 부인에게 추근대던 남자가 현관문을 통해 도망쳤다는 정도? 그 외에 아무도 믿지 않는 재브리스키의 주장(권총은 길거리에 버렸는데 누가 주워간 것이다 등)이 사실이었다는건 너무 황당하고요. 또 바이올렛은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더군요. 이래서야 탐정 없이 재브리스키의 1인극으로 그의 자백으로 이야기를 끝맺어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을겁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좋은 설정, 재미있는 사건을 억지스러운 전개와 탐정 캐릭터의 개입으로 망쳐버린게 아쉽습니다.

2015/07/20

체육관의 살인 - 아오사키 유고 / 이연승 : 별점 2.5점

체육관의 살인 - 6점
아오사키 유고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제가오카 고등학교의 밀실과도 같은, 체육관의 암막이 쳐진 무대 뒤에서 방송부 부장 아사지마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탁구부 부원 유나는 존경하는 선배 사가와 부장이 유력한 용의자로 몰리자 누명을 벗기기 위해 학교 제 1의 천재 우라조메 덴마에게 사건 해결을 부탁했다.
10만엔을 받고 사가와의 누명을 벗겨준 우라주메는 추가요금 5만엔으로 사건을 해결해 줄 것을 약속했고, 사가와와 유나는 그것을 수락하는데...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이라는 별명으로 더욱 유명한 신진작가 아오사키 유고의 데뷰작. 아유카와 데쓰야 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죠. 작년에 출간되어 이런 저런 곳에서 평이 좋기에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전 황금기 본격물의 엄청난 팬이기도 하니까요.

일단 작가의 별명이 허명은 아니더군요. 저는 본격물이라면

  1. 근사한 트릭이 등장해야 함
  2.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공유되는, 일견 사소해보이는 단서들로 사건이 해결되어야 함
  3. 트릭과 사건의 해결은 탐정의 추리를 통해야 함

정도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정도로 상당히 그럴듯한 본격물 얼개를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탐정인 우라조메가 정말로 사소해보이는 단서들 - 화장실에 버려진 우산, 젖지 않은 포스터, 주머니에 넣었을 때 균형이 맞지 않는 유류품, 바로 재생되는 DVD 플레이어 등등등 - 로 추리하는 과정이 대단합니다. 논리적일 뿐 아니라 이치에 합당해서 무릎을 치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마지막에 관계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벌이는 추리쇼 역시 고전 본격물에 등장하는 그것이지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밀실 트릭도 현실적이고 그럴싸해서 재미를 더해 줍니다. 장벽이라고 생각했지만 원래는 운송수단이다! 라는 것인데 발상의 전환이 돋보였어요. 앞부분 프롤로그에서 일종의 서술 트릭과 같은 재미를 주는 것도 정말 기가 막혔고요.

그러나 단점도 명백합니다. 우선 사건의 현실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는게 큰 문제에요. 고등학교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입니다. 컨닝한게 들켰다고 사람을 죽인다는 동기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범인이 아사지마를 살해하고 증거를 회수했다 치더라도 아사지마가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전무합니다. 대표적으로 작중에서도 아사지마가 이전에 하리미야의 범행을 촬영한 것은 부원들이 모두 알고 있었잖아요?

게다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밀실 및 기타 증거는 계획적인게 아니라 대부분 우연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밀실이 된 것은 미호가 아사지마의 부탁으로 오른쪽 공간에 숨어있던 것이 시발점이었고(하필이면 가장 약한 미호에게 부탁한 것도 에러고), 연극부가 일찍 도구를 옮겨 오지 않았다면 성립되지 않는 밀실이니까요. 아울러 미호가 문에서 나와 문을 두드리고 달아나는 것을 사오토메가 목격했다는 마지막 증언도 맹점이에요. 만약 미호가 숨어있지 않았다면, 그 문으로 마사키가 나오는 것을 사오토메가 목격했을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완전범죄도 뭐도 아니죠. 이러한 점에서 정교하게 잘 짜여진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처음에 사가와가 미호를 알아채지 못한 것 역시 구태여 사건을 어렵게 만들 뿐입니다.

덧붙여 캐릭터의 매력도 많이 부족해요. 우라조메가 천재 오타쿠라는 것은 특이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수십년 전에 등장했던 재수없는, 잘난척하는 천재 명탐정과 다를게 하나도 없는 탓입니다. 예컨데 반 다인이나 엘러리 퀸이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읆는 것과, 우라조메가 만화 대사를 인용하는 것의 차이는 출처의 차이일 뿐 동일합니다. 이런 천재형의 잘난척 대마왕 명탐정은 정말 싫어하는데 2010년 이후 또 보게될줄은 몰랐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고전 본격물의 얼개에 만화적인 설정을 덧붙여 꽤나 그럴듯한 본격물을 창조해낸 역량과 아이디어는 대단합니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본격물이라고 보기에는 앞서 말했듯 단점도 많습니다. 그래도 고전 본격물의 팬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그야말로 "정통" 추리물이니까요. 데뷰작인 것도 감안해야 할 테고요. 후속작을 기대해 봐야 겠네요.

2016/01/21

뱀이 깨어나는 마을 - 샤롤 볼턴 / 김진석 : 별점 2.5점

뱀이 깨어나는 마을 - 6점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 시골 마을에 사는 수의사 클래라 앞에 무서운 독사를 비롯한 뱀 떼가 나타났다. 그녀는 전문가적 지식을 발휘해 뱀을 처리하면서, 뱀에 물려 죽었다는 마을 노인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고 독자적인 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돌보던 노부인 바이얼럿이 역시나 뱀에 물려 죽고, 그녀가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사를 통해 이 사건의 배후에 50여 년 전 마을에 있었던 기묘한 퇴마 의식과 마을 거주민들, 그중에서 위처 형제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귀여워 보이는 책 표지에 호기심이 생겨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내용은 아주 진지한 범죄 스릴러물이라 의외였습니다. 600여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흡입력도 상당한 편이고요. 한적한 시골 마을에 무시무시한 독사(살무사와 타이판)가 나타난다는 상황부터가 아주 흥미로왔기 때문입니다. 뱀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마을 유일의 뱀 전문가로 모종의 책임감을 느낀 클래라가 사건에 뛰어든 뒤 위처 형제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며 서서히 위기에 빠져드는 과정에 대한 묘사도 박진감 넘칩니다. 덕분에 마지막까지 손에서 떼기 힘든 재미를 선사해 줍니다.

영국 시골 마을을 무대로 공포스러운 괴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이 모든건 오래전에 있었던 끔찍한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과 설정은 정통파 영국 고전물을 떠오르게도 만듭니다. 시골 마을에 갑자기 무시무시한 독사가 포함된 뱀 떼가 나타나 사람들을 습격한다는 설정은 일종의 크리처 공포물 같기도 했고요.

또 주인공인 수의사 클래라가 상당히 매력적이네요. 여태 읽었던 수많은 추리 소설에 등장했던 까칠한 여주인공들과 비슷하지만 어린 시절 입은 얼굴의 상처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거든요. 누구나 얼굴을 돌릴 법한 끔찍한 흉터라는 설정인데, 덕분에 그녀가 까칠하게 자기를 방어하며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만의 세계에 칩거한다는 묘사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흉터를 극복하는 성장기스러운 묘사도 제법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추리적으로 돋보이는 점은 없지만 우연히 어울리게 된 노인들의 죽음에 대해 경찰이 그녀를 의심하게 되는 과정만큼은 좋았습니다. 그녀가 마을 노인들과 친해져 유언장을 조작한 뒤 살해했다고 의심 받는다는건데, 노인들 죽음에 독사가 관련되어 있고 그녀가 수의사로 뱀 전문가라는 설정까지 겹쳐져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클라이브의 정체가 솔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부분, 그리고 얼프레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내는 과정도 그럴듯했고요.

하지만 재미에도 불구하고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오순절 운동'에서 비롯된 뱀을 다루는 사이비 목사를 등장시켜 마을 사람 반수가 관계된 대소동에서 비극이 촉발되었다는 등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드려는 의도가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영국 시골 마을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기나 했을까요? 작중에서도 '전쟁 직후였다'라는 말로 어떻게든 설득력을 갖추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안쓰러울 따름이입니다. 문란한 에덜린과 위처 형제들 간의 관계, 그리고 범죄자 성향이 짙어 마을에서 추방당한 솔 위처 이야기 정도로 풀어내는 것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아니면 앞서 말한 클래라가 범인일 것이라는 가설이 훨씬 현실적이었던 만큼 그렇게 밀고 나가던가요.

억지스럽게 용의자를 등장시키는 전개도 별로입니다. 뱀 전문가 숀 노스가 타이판의 본고장 파푸아뉴기니를 갔다 온 것을 숨겼다, 정신병자 얼프레드는 성도착자에 화가 나면 폭주하여 아무도 말릴 수 없다는 등의 묘사들이 그러합니다.

설명되지 않는 것도 너무나 많습니다. 아치로 위장한 조앨 패인 목사가 도싯으로 돌아온 이유는? 클라이브에게 얹혀 살기 위해서라면, 그는 클라이브가 솔 위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런저런 이유로 어떻게든 알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마을에 뱀을 푼 이유는? 조앨 패인이 클라이브 회사의 계획인 마을에서의 원유 탐사를 위해 마을 사람들을 쫓아내려고 협력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얼프레드는 왜 병원에서 탈출시켰을까요? 조앨 패인 스스로도 뱀을 다룰 수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이러한 이유라면 뱀 떼면 충분했습니다. 독사를 푼 이유는 설명할 수 없어요. 독사가 등장하고 사람이 죽은 이상, 경찰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데 그래서 무슨 이득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 많은 뱀은 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요?
물론 독사의 등장과 뒤이은 살인은 클라이브의 지시와는 별개로 패인이 유산을 노리고 폭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찰 맷을 공격하고 클래라마저 죽이려 한 시점에서, 패인이 아치 흉내를 내면서 클라이브의 유산을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해져 버렸으니 계획은 실패입니다. 클라이브 살해를 클래라에게 뒤집어씌운다 해도 맷의 말에 따르면 바이얼릿의 죽음에 대해 클래라는 혐의를 거의 벗었고, 혹시나 패인의 지문이 채취된다면 진범이 누구인지 결국 밝혀졌을 테니까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클래라가 마지막에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과정의 개연성도 낮고 패인이 불탄 교회에서 얼프레드를 죽이려고 했던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자포자기였을까요?

그리고 수많은 등장인물들 중 클래라를 제외하고는 전부 평면적이고 진부하며 존재감이 낮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남자 주인공들부터가 그러합니다. 숀 노스와 맷의 2인 체제인데 어디서 봤던 느낌의 캐릭터들일 뿐더러 숀은 하는 게 거의 없다시피하고, 그나마 활약을 보이는 맷은 다른 여자친구가 있을 뿐더러 막판에는 짐짝이 되어버리니 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노인들은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어딘가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영 보기 불편했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지나치게 나간 부분 때문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재미는 있고 전통을 계승한 부분도 있는 만큼 추리 애호가분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덧 1 : 작가 서문과 후기, 역자 후기나 기타 자료가 전무하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최근 이런 책을 본 적이 없는데 신기했습니다.

덧 2 : 프레드릭 포사이스"아일랜드에는 뱀이 없다"와 비교해 읽어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2018/05/20

늑대를 요리하는 법 - M.F.K 피셔 / 김정민 : 별점 3.5점

늑대를 요리하는 법 - 8점
M.F.K 피셔 지음, 김정민 옮김/다른목소리

미국에서 태어난 M.F.K 피셔, 메리 프랜시스 케네디 피셔가 쓴 음식과 삶에 대한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1942년 발표된 고전으로 제목의 "늑대"는 위기 상황'을 의미하는 "문가에 늑대가 나타났다"라는 문구에서 따 왔습니다. "늑대를 요리하는 법"이라는 제목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을 의미하지요.

제목 그대로 미국 대공황기 등 여러 힘든 시기를 보낸 저자가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소개됩니다. 그 중에서도 물자, 재료가 부족할 경우 무엇을 어떻게 해 먹는지에 대한 방법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생선, 고기, 빵, 수프 등 생각할 수 있는 주요 재료별로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다양한 내용 중에서 우선은 눈물 겨울 정도의 절약 비법이 눈에 뜨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불 없이 요리하는 방법입니다. 건초 통을 감싸고 그 안에 음식을 넣은 뒤 통의 뚜껑을 덮는 방법인데, 발효(?) 열을 이용하는 것일까요? 또 당시 통화 기준이기는 해도 50 센트로 차리는 극빈 요리에 도둑질, 야생에서 얻은 식재료를 이용한 "나는 자연인이다" 스타일 요리, 심지어 음식 뿐만이 아니라 대체 커피라던가 술값 아끼는 비법으로 가짜 보드카 제조법까지 등장합니다. 가짜 보드카는 물 1쿼트, 글리세린이나 설탕 1 작은술, 레몬 1개의 껍질, 오렌지 1/2개의 껍질을 20분 동안 아주 약한 불에서 끓인 뒤 알코올 1쿼트를 더한 후 바로 뚜껑을 덮고 식힌 뒤 걸러서 만든다고 하는데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네요.
진짜 위기 상황, 즉 "등화관제" 상황에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가스가 전기보다 빨리 끊긴다는 등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반려 동물들을 위한 절약 방법도 관심 가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이라 생각되고요.

하지만 그냥 안 먹고, 아끼는 방법이 아니라 아무리 어려워도 먹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는 저자의 철학이 가득 담겨 있는, 궁상맞지만 매력적으로 보이는 요리 레시피도 많습니다. 단순한 미국 가정 레시피가 아니라 유럽, 심지어 간장과 누룽지 등 중국에서 비롯된 재료를 사용하는 요리를 가르쳐 주는 식이라 수준도 상당히 높은 편이에요. 그 중에서도 파리식 양파 수프,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큰 만족을 주며 언제나 위로가 되고 마음에 남는 소박한 수프라는 미네스트로네 레시피는 꼭 따라해 보고 싶더군요. 집이나 시장에서 가장 흔하고 싼 재료로 만드는 게 최고라니 더할 나위 없죠. 가끔 집에서 궁상을 떨며 혼술을 즐기는 이와마 소다츠가 떠오르는 메뉴들도 좋습니다. 이런 저런 선반에 채운 통조림들을 결합해서 먹는 레시피들 처럼요.

이러한 레시피, 조리법 외에도 커피 찌꺼기를 바늘 겨레 안에 넣으면 바늘이 녹슬지 않는다, 핸드로션 대신 버터 포장지를 손에 문지르고 나서 버리라는 등의 생활 꿀팁도 많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시대 착오적인 내용들, 그리고 말을 타다가 생긴 타박상은 말 바로 옆 축축한 잔디를 상처 부위에 고정한다는 말도 안되는 민간 요법이 대부분이긴 합니다만 당시 시대상을 느끼게 해 주어서 나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기 힘들 정도로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글의 흐름 속에서 저자의 여러가지 철학을 강하게 피력하는 장면들도 기억에 많이 남네요. 개인적으로는 어린이도 사람이기 때문에 맛, 질감, 자극 면에서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로운" 것을 얻기 위해 "생각하며" 먹게 해야 한다는 교육 이론이 와 닿았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항상 잘 먹는다" 는 중국 속담에서 시작하여 "우리 나라는 현명하지 못하다!" 고 일갈하는 장면은 "맛의 달인" 의 지로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이렇게 재미있고 한 번 읽어보면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 많아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흰 빵을 증오하는 저자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집에서 직접 빵을 구워 먹기 까지 해야 하는지 등 내용 모두를 동의하기는 어려우며,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더라도 많이 낡았고 번역 문제겠지만 문체가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는 문제들, 무엇보다도 요리와 레시피를 소개함에도 불구하고 도판이 하나도 없다는 큰 문제는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추천작입니다. 별점은 3.5점인데, 도판과 번역만 충실했더라도 별점 4점이 아깝지 않았을 거에요. 요리, 음식 들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시대가 많이 바뀌었으니 현대를 무대로 "좀비를 요리하는 법"과 같은 개정판이 나와 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덧붙여, 이 리뷰를 쓰기 위해 조금 찾아보았는데 이 책 발표 시점에서 저자 나이가 34살이라는 것에 크게 놀랐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의 잔소리 섞인, "옛날에는 이랬지" 스타일의 글들로 크리스티 여사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빅토리아 시대 할머니가 썼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요. 대체 젊었을 때 얼마나 고생을 한 건지 상상도 안 되는군요. 또 아래와 같은 평균 이상의 미모도 놀랍고요. 여러모로 관심을 가져볼 저자라 생각됩니다.

2020/04/10

로마 모자 미스터리 - 엘러리 퀸 / 이기원 : 별점 1.5점

로마 모자 미스터리 - 4점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월 24일 월요일 저녁 로마 극장. 인기리에 공연 중이던 연극 "건플레이"의 2막이 끝나갈 무렵, 좌측 LL32번 좌석에서 앉은 채로 독살된 시체가 발견되었다. 피해자의 이름은 몬테 필드로, 변호사이지만 수많은 악행으로 유명했다. 수사에 나선 퀸 경감과 아들 엘러리는 피해자의 모자가 사라진 사실에 주목하는데.....

기념비적인 엘러리 퀸데뷰작으로 이른바 '국명'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엘러리 퀸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요. 문체가 지나치게 딱딱하고 장황하며, 탐정인 엘러리 퀸의 과시욕과 허세가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너버스 브레이크 다운"의 저자 다카미 요시히사처럼 잘난 척 하는 탐정과 그런 분위기를 싫어하는거죠. 이 작품은 그래도 데뷰작인 덕분인지 그렇게까지 허세가 가득하지는 않습니다. 가끔 이런저런 고전 속 대사를 인용하는 정도라 충분히 참을만 하더군요.

하지만 의외로, 엘러리 퀸이라는 이름에서 기대했던 추리적인 요소가 완전 실망스러웠습니다. 변호사이자 비열한 악당인 피해자 몬테 필드의 시체 옆에는 그가 쓰고 왔을 모자가 발견되지 않았다는게 핵심 요소인데, 엘러리는 '범인이 몬테 필드의 모자를 자기 것 대신 쓰고 갔고, 범인의 모자는 극장 안에 남아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즉 연극 소품의 모자일테니, 연극 배우가 범인이다'라고 추리합니다. 그런데 모자를 겹쳐서 쓰거나, 자기 모자 안에 몬테 필드의 모자를 어떻게든 구겨 넣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모자를 구겨서 품 안에 넣을 수도 있었을 테고요. 몬테 필드가 쓰던 모자는 크고 화려하다는 묘사가 있는데, 이런 모자를 쓰면 눈에 더 잘 띄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그리고 꼭 배우인 스티븐 배리가 아니라 극장 지배인이나 극장 홍보 담당자 등이 범인일 가능성은 왜 배제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스티븐 배리만 사건 당일 극장 밖으로 나갈 때 양복을 입고 있었다는 설명이라던가, 초반에 꽤 중요하게 언급했던 머리 크기에 대한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자에의 도전'이 있기는 하지만, 책에 등장한 정보만으로 범인을 특정하기는 여러모로 무리입니다.

게다가 몬테 필드가 모자 안에 협박에 사용한 서류를 넣고 다녔다는 설정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몬테 필드는 협박 대상자와 같은 수의 모자를 구입한 뒤, 이를 비밀 장소에 숨겨 놓고 협박 대상자를 만날 때 마다 비밀 장소에서 모자를 꺼내어 쓰고 나갔다고 묘사됩니다. 그런데 이런 비밀 장소가 있었다면, 서류만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가지고 가면 되잖아요? 왜 비싼 모자를 다수 구입해 가면서 그 안에 서류를 숨겼을까요? 마지막으로, 묘사만 보면 당시 신사들이 모자없이 다니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나 본데, 그런 사회적 분위기도 잘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모자를 중심으로 추리가 이루어지는데, 이에 대한 추리와 설정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그 외의 여러 등장 인물의 묘사도 불필요한 부분이 많고 지루했고요. 어차피 극장 내 관계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황에서, 극장 외 다른 인물들로 분량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딱 한 가지, 독살에 사용된 테트라에틸납이라는 독약은 인상적이었어요. 당시 휘발유에 첨가되기 시작한 물질로, 작 중 전문가 존스 교수에 따르면 독살에 굉장히 최적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색투명하고 오로지 희미한 냄새만 나지만 독성은 강력할 뿐 아니라, 양조용 증류 장치만 있으면 휘발유를 가열하여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하니까요. 이렇게 완벽한 독약은 본 적이 없는데, 왜 다른 작품에 사용되지 않았을까요? 궁금해집니다. 참고로 테트라에틸납은 오래전에 첨가되던 물질로 지금은 모두 퇴출되었다니, 혹시라도 시도는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독특한 독약의 존재가 작품 수준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 소설 역사에 길이 남을 작가와 탐정의 데뷰작이라는 역사적 가치 때문에 0.5점을 더했을 뿐 그 외의 다른 가치는 찾아보기 어려운 망작입니다. 일반적으로 수준이 그닥 높지 않은 편인 국명 시리즈 중에서도 최악으로, 엘러리 퀸의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