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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8

수상한 사람들 - 히가시노 게이고 / 윤성원 : 별점 3점

수상한 사람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으로 어딘가에서 누군가 강추하기에 (전혀 기억이 나지 않네요...)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전에도 몇번 밝혔듯이 별로 좋아하는 작가는 아닙니다. 그래도 "탐정 갈릴레오"와 같은 단편집과 기타 앤솔러지에서 접한 단편들이 괜찮았었기에 실패해도 데미지가 적을 것 같아 구입한 것이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역시나 일정 수준 이상은 된다 보여집니다.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이 책에 실린 총 7편의 단편들 대부분이 전부 "추리"라는 쟝르에 충실하기 때문이죠. 그것도 퍼즐 트릭 중심의 본격물이 많아 추리 애호가로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아무래도 단편이기 때문인지 작가의 그간 싫어했던 가장 큰 단점인 "러브라인"이 부각되는 작품이 몇개 없다는 것도 좋았고요. 독특했던 점이라면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결혼 보고" 이외의 모든 이야기가 1인칭이라는 것으로,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주인공과 세계관으로 연결된 작품이라 생각하고 읽어도 꽤 재미있었습니다. (전혀 다른 설정인 두번째 작품 "판정 콜을 다시 한번!"만 빼고요^^) 이게 설마 작가의 의도는 아니겠지만요.^^

하지만 추리물과는 거리가 먼 드라마인 "판정 콜을 다시 한번!"과 말랑말랑한 인간관계가 주요 사건보다도 강하게 부각되는 "달콤해야 하는데" 두편이 좀 이질적이라 아쉽네요. 나머지 다섯편으로는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만 요 두편때문에 전체 별점은 3점입니다.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에 대한 기존의 제 편견을 어느정도 깨 준 작품집임에는 분명합니다. 한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을 듯 싶네요.

자고 있던 여자
나는 입사동기 가타오카의 권유로 집 빌려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낯선 여자가 내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와 잔 남자를 찾아내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 우기며 집에 눌러 앉는데...
잭 레몬 주연의 코미디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경쾌한 도시파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는 황당한 사건에서 결말에 이르는 구조가 깔끔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디어가 참 좋은데 이렇게 영화 같은 곳에서 설정을 따 와서 추리소설을 창작해도 재미있겠더군요.
어차피 톨루엔의 행방 추적을 한다면 간단하게 꼬리가 밟혔을 것이라는 점은 약점이지만 일상계니 너무 딱딱하게 따질 필요는 없겠죠. 별점은 3.5점입니다.

판정 콜을 다시 한번!
나는 노보루의 꼬임으로 노부인의 돈을 강탈하는 계획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뒤 쫓기는 신세가 된다.
결단코 추리물은 아니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는 평이한 드라마로 일종의 성장기랄까.. 싶은 작품인데 야구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더군요. 상식적으로는 해당 판정에 대한 설명은 판정콜 이후 바로 선수에게 해 주는게 정상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설득력도 거의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죽으면 일도 못해
하야시다 계장이 휴게실에서 문을 걸어잠근채 시체로 발견된다. 나는 직속 부하라 어쩔 수 없이 사건에 관련되게 되는데...
두가지 트릭이 상호 연계되어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밀실 트릭"은 다른 작품에서도 많이 등장해 왔던 트릭이긴 합지만 작품과 잘 어울리게 구성되어 마무리되는 전개가 매끈합니다. 경찰 수사로 결국 진상이 밝혀진다는 현실성 높은 결말도 의외로 놀라웠고요.^^
단, 어차피 범행이 밝혀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인 관계로 완벽한 트릭물로 보기는 어렵다는 약점은 있습니다. 그래도 현실에 기반한 재미있게 읽었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달콤해야 하는데
나는 상처하고 하나뿐인 딸마저 잃은 뒤에 나오미와 결혼하여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이 여행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
일상계랄까... 과거 "사고"의 진상을 기억에 의지해 밝혀낸다는 작품입니다.
본격물로 보기에는 정보제공이 공정하지 못해 실망스럽고 이후의 전개도 억지스러워서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어차피 제가 싫어하는 러브라인이 주인 작품이기도 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등대에서
나는 소꼽친구 유스케와의 관계에서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 홀로 여행을 계획한다. 이 사실을 알은 유스케 역시 동일한 코스를 역순으로 밟아나가는 여행을 떠난다고 선언한다.
의외의 전개가 연속되는 단편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친구간의 다툼 정도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말 생각외였어요.
기발한 발상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싶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의표를 찌르는 이런 단편을 써보고 싶네요.

결혼 보고
오래전 소식끊긴 친구 노리코에게서 온 결혼을 알리는 편지. 편지를 받은 도모미는 편지안에 동봉된 사진 속 주인공이 노리코가 아닌 것을 알고 놀라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리코의 고향으로 떠난다.
황당한 시츄에이션이죠? 일반인들은 정말 상상하기 힘든 당황스러운 설정을 토대로 흥미진진하게 전개하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우리나라 버젼이라면 "친구가 결혼한다고 해서 갔더니 신부가 내가 알던 그 아가씨가 아니더라" 정도 되겠네요. 물론 이것도 살인을 부르는 설정이긴 하겠죠.^^
하지만 설정에 비해 동기나 시체의 처리 등 범죄에 관련된 내용이 현실적이지 못한 등 아이디어가 매끄럽게 전개된 맛은 약하기에 별점은 3.5점만 주겠습니다.

코스타리카의 비는 차갑다
나는 5년에 걸친 해외근무의 마지막 해를 맞아 아내 유키코와 함께 코스타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행지에서 2인조 강도에게 습격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국의 풍광 묘사, 주인공들의 배경 묘사가 더 중심인 듯한 이상한 작품. 왜 무대가 코스타리카일까요? 트릭도 구태여 외국이 아니라도 상관없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작가가 코스타리카에 관광갔다가 와서 쓴 글이 아닌가... 하는 의심만 생기네요.
내용에 비하면 쓰잘데 없이 길고 완성도도 그닥이라 별점은 2점입니다.

2020/12/18

빨간 리본 - 헨닝 망켈 / 홍재웅 : 별점 2점

빨간 리본 - 4점
헨닝 망켈 지음, 홍재웅 옮김/곰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웨덴의 외딴 마을 헤세발렌에서 열 아홉 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피해자들은 어린 소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을에 오래 살았던 노인들이었다.
이 뉴스를 접한 비르기타 로슬린 판사는 병가 중에 충동적으로 헤세발렌으로 향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기록들을 통해 피해자 중에 어머니의 양부모가 있다는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비르기타는 미국 네바다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었으며, 경찰이 중요한 정보라고 이야기해 준 빨간 리본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아냈고 간단한 조사로 수상한 중국인 손님이 찍힌 비디오 테이프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정보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라르스 에리크 발프리드손이라는 인물이 범인이라고 자백했던 탓이었다.
그 뒤 휴가를 얻어 친구 카린과 함께 중국으로 향했던 비르기타는 수상한 중국인 손님에 대한 탐문 조사를 벌이다가 당한 강도 사건을 통해 중국 공산당 실력자인 훙취와 알게 되었다. 그러나 훙취는 부정부패를 저질러 왔던 동생 야뤼에게 살해당했고,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가 비르기타에게 전해지는데...

스웨덴 작가 헨닝 망켈 (헤닝 만켈)이 쓴, 5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대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그런데 작가가 창조한 유명 탐정인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는 아닙니다. 비르기타 로슬린이라는 헬싱보리에서 근무하는 여성 판사가 주인공인 작품이지요.

2006년 1월, 한 마을에 사는 친족들이 하룻밤 사이에 무려 열 아홉 명이나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되는 도입부는 흥미롭습니다. 왜 이런 잔혹한 살인을 저질렀는지, 동기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비르기타 로슬린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서류를 통해 피해자들이 '안드렌' 집안 사람들이라는게 이유일 거라고 추리합니다. 100년도 더 전에 미국으로 이주했던 네바다의 안드렌 일가도 얼마 전 처참하게 살해된걸 알아내고요. 

여기까지 진행된 뒤, 갑작스럽게 1863년의 중국인 '싼'이 겪는 역정이 그려지는데, 흥미롭기는 뒤지지 않습니다. 속아서 미국으로 끌려간 뒤, 네바다에서 철로를 놓는 노역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동생 두 명을 잃고, 중국으로 귀향한 뒤 선교사들 때문에 결혼할 여자와 뱃속 아이마저 잃어 복수귀가 된다는, 파란만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엄청난 내용이거든요. "황비홍" 1편에서 '금산에 갈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한 뒤 노예로 팔아먹는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그리고 비르기타가 빨간 리본의 출처, 에덴 호델 주인의 증언과 피해자 유품인 JA의 일기를 통해 사건 배후에 중국인이 있다는걸 알게 되면서 두 가지 이야기는 하나로 합쳐지게 됩니다. 중국인 '싼'의 후예인 냉혈한 야뤼가 철천지 원수인 안드렌 가문에게 복수를 집행했다는게 진상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합친건 아무리 무리수였습니다. 거의 150년 전, 증조 할아버지를 힘들게 했던 철로 노역 감독관 후손들을 죽인다는 동기부터가 전혀 와 닿지 않았으니까요. 어떻게든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싼이 겪은 처절한 고생을 펼쳐놓기는 했지만, 이런 식이면 원수가 아닌 사람이 없을거에요
 물론 복수심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 일가를 모두 몰살시키는건 억지입니다. 미국 노예의 4~5대 쯤 되는 후손이 복수를 위해 노예선 선장이었던 백인 후손들을 몰살시킨다면, 미국에는 남아날 사람이 별로 없을거잖아요? 

게다가 진범이라고 할 수 있는 야뤼가 등장한 뒤부터는 이야기는 아예 다른 길로 향합니다. 중국 특권층이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을 빈부격차로 분노한 농민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프리카'로 농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이 장황하게 펼쳐지는 탓입니다.
계획에 대한 설명은 그럴듯합니다. 마오 시대부터 이어진 여러가지 정책들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곁들여져 설득력이 높거든요. 관련된 자료 조사가 철저했던 듯 싶네요. 아프리카 짐바브웨 출장에 대한 이야기도 생생함이 잘 살아 있습니다. 아이를 업은채 50Kg이나 되는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아낙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아내의 황당무계한 권력욕으로 유명해진 무가베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장면을 통해 설명되는 짐바브웨와 무가베 대통령에 대한 설명도 충실했습니다. 또 이 계획이 식민지 주의의 재현이라며 반대하는 훙취와 야뤼의 대결도 볼만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본편 살인 사건과는 무관하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거였다면 다른 작품에서, 다른 주제로 소개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별 상관도 없는 중국 이야기로 1/3 분량을 할애한 뒤, 누나인 훙취까지 제거한 야뤼가 비르기타를 죽이기 위해 직접 나서고, 훙취의 아들에게 암살당한다는 결말은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작 중에서 야뤼는 전용 비행기까지 있는 거부이자 중국 공산당의 실력자로 등장합니다. 그런 인물이 직접 외국에서 살인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발상부터가 현실적이지가 않습니다. 사건을 사주했다는 증거도 없을 외국인 여판사를 중국도 아니고 외국에서 직접 죽인다? 말이 될 리가 없지요.
몰래 커피에 유리 가루를 섞는다는 살해 방법도 불확실합니다. 많이 어설퍼 보였어요. 이보다는 초반부에 벌어진 헤셰발렌 사건을 직접 저질렀다는게 차라리 말이 될겁니다. 그 사건 피해자들은 납득은 잘 돼지는 않아도 가문의 원수라는 이유가 있기는 하니까요. 

전개도 우연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에덴 호텔에서 리우신이 야뤼의 사무실 주소를 적은 팜플렛을 두고 간 것, 마침 중국 베이징 여행을 간 비르기타가 그 건물을 탐문하다가 강도를 당한 것, 그래서 훙취와 만나게 된 것 모두가 우연입니다. 비르기타가 중국 여행만 가지 않았어도 야뤼가 런던에 나타나 죽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덧붙여, 주인공인 비르기타 판사의 행동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녀는 지나치게 경찰을 불신합니다. 그녀가 중국인이 배후에 있음을 알렸음에도 경찰이 무시한건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범행을 자백하고 흉기까지 공개한 용의자가 등장했으니까요. 오히려 사건 담당 경찰 비바 순드베리는 사건 현장에 있던 중요 물건이었던 일기장을 훔친 그녀를 용서해주고 일기장을 빌려주는 등 도움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왜 비르기타는 경찰을 불신할까요? 판사가 경찰을 이렇게까지 불신해도 되는걸까요?

그리고 비르기타가 야뤼의 살의를 눈치채고 런던으로 도주하는 과정은 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녀가 알 수 없는 중국인에게 위협받고 있다는 추상적인 이야기로 경찰이 움직일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에덴 호텔 주인 스튜레 헤르만손이 수상한 중국인 투숙 후 살해된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호텔 투숙객 장부가 없었졌고, CCTV라는 증거도 있고요. 스튜레 헤르만손이 전날 저녁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도 경찰 조사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수상한 중국인의 다음 목표가 비르기타라는 것도 합리적인 추리일테고요. 이런 상황에서 왜 경찰에게 연락하지 않고, 홀로 정체도 확실치 않은 중국인 여자 말만 믿고 런던으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그 외에도, 비르기타가 소싯적 마오 사상에 경도된 극좌였다는 설정도 불필요했고 야뤼가 이렇게 많은 증거를 남기면서 스튜레 헤르만손을 살해할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빨간 리본은 뭘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고요. 살해 현장에 리본을 남길 이유는 나오지 않거든요. 구태여 해석해 보자면, 서구권이 노략질하고 약탈했던 중국이 복수자로서 돌아왔다는 상징적 의미이겠지만, 추리물 기준으로는 있어서는 안 될 단서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제법 빠른 시점에서 중국의 위협을 드러낸 식견은 높이 평가할 만 하고, 방대한 자료 조사가 뒷받침된 드라마도 제법이었고요. 본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디테일들 중에서도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추리물로는 함량 미달이라서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구태여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1/05/05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1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1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C.M.B도 40권을 넘어섰네요. 이번 권에는 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수록된 이야기 모두가 설득력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C.M.B의 또다른 매력인 현학적인 정보 제공 측면에서도 건질게 많지 않고요. 그래서 좋은 점수는 주기 힘드네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운영위원" 

신라와 타츠키가 학교 운영위원을 맡은 날, 원예부원들은 이사장이 지시했던 화단과 백엽상 철거에 반대하며 철거업자와 대치했고, 화장실 변기가 막혔고, 학교 입구가 진흙 발자욱으로 지저분해졌고, 요코아리가 식사용 빵을 도둑맞는 등 학교 안에서 여러가지 사고와 문제가 잇달아 일어났다. 원예부가 화단 철거를 막은 이유였던, 원예부 아이돌 소녀가 맡긴 씨앗의 정체는 신라가 밝혀낸다. 그러나 검역 문제로 결국 철거가 수포로 돌아가자, 철거업자는 항의하는데...

신라는 철거업자 중 한 명이 학교에 있는 고가의 그림을 훔치기 위해 잠입해 있었다고 추리합니다. 진흙발로 학교로 들어와 변기를 일부러 막았던 거지요. 사용금지 팻말이 붙은 화장실 안에 숨어 있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요코아리의 빵은 먹으려고 훔쳤고요. 이렇게 별 거 아닌 걸로 보였던 디테일이 모여서,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는 꽤 볼만합니다.

그러나 원예부 소동은 예상할 수 없었기에, 이를 도둑과 엮는건 무리입니다. 애초에 무언가를 훔치려면, 소동이 일어난 날이 아니라 다른 날을 선택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오스트리아에서 허가받지 않고 들여왔다는 씨앗의 검역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라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어요. 

이렇게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봉인의 기담" 

메이지 시대 화족 부나가와 가문의 별장은 과거 2명이 죽고, 1명이 실종된 탓에 봉인되어 유령이 나온다는 전설 때문에 '봉인장'이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현재에 이르러 철거를 앞둔 봉인장은 기록을 위한 건설회사 조사가 시작되었고, 신라도 부나가와 당주의 부탁으로 조사에 참여했다. 

지하에서 죄인을 가두어두는 시설을 발견한 조사팀은 비싼 장비를 이 안에 넣고 휴식을 취했지만, 잠든 과장을 제외한 조사팀원은 차례로 습격받은 뒤 장비마저 도난당하는데...

봉인장 지하의 '치도리 격자'라는 독특한 감옥 구조를 이용해서 탈출구를 만드는 설정은 재미있었습니다. CMB 특유의 현학적인 재미를 잘 살리고 있어요.

그러나 다른 내용은 별로였습니다. 동기에 큰 문제가 있는 탓입니다. 특히 이렇게 용의자가 제한적인 상황에서까지 도둑질을 할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과장은 잠들어 있었고, 장비를 잃어버리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편의점에 심부름을 갔던 직원은 영수증이라는 증거가 명확하고요. 이 둘을 제외하면 용의자는 세 명에 불과해요. 이 정도라면 당장은 빠져나갈 수 있더라도 장치를 회수하거나,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는 쉽게 드러났을겁니다. 

신라의 추리도 빈약합니다. 범인만이 얻어맞고 기절한 쿠로마츠라는 직원이 어디있는지 알 수 있었다는 증거가 대표적이에요.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었잖아요? 때문에 격자에서 지문을 채취한다던가 하는 보강은 필요했습니다. 

전개도 문제가 많습니다. 초반에는 과거 봉인장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들지만, 이 역시 치도리 격자 구조를 이용해서 일으켰던 거라고 짤막하게 언급될 뿐입니다. 이래서야 '봉인장' 어쩌구 하면서 거창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하마구리 가 사람들" 

경찰서에서 나오던 신라와 타츠키에게 하마구리 가 사람들이 자신들 아버지에 관련된 사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도내에 맨션 여러 채를 가지고 있는 부자 아버지 하마구리 기치사부로가 이웃집에 사는 수수께끼의 여자 마야에게 홀려 요가 강습료라는 명목으로 거액의 현금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경찰은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방관했지만 하마구리 기치사부로가 사라졌고, 타츠키와 하마구리 가 사람들은 미행을 통해 마야가 다치가와류라는 기묘한 불교 분파 수행자라는걸 알게 되었다. 그 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는 유서를 남긴 채 하마구리 기치사부로가 시체로 발견되자, 유족은 경찰에게 책임을 물었고 경찰은 어쩔 수 없이 기치사부로의 죽음을 사고사로 처리하는데....

신라가 추리한 사건의 진상은, 이 사건은 하마구리 가 사람들의 조작이라는 겁니다. 기치사부로가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죽게 된게 이유였어요. 상속 확정까지는 기치사부로의 계좌가 동결처리되어 돈을 빼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치사부로의 돈으로만 먹고 살던 기생충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사망 확인을 최대한 늦추면서, 서둘러 계좌 속 돈을 현금화한겁니다. 거액을 인출한걸 설명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여자에게 속아 돈을 건넸다는 이야기를 만든거지요.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핏빗(?)을 스마트폰에 동기화시키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치사부로가 매일 1만보 걷기 등을 실천하던 사람이라, 어느 시점에서 움직이지 않았는지가 동기화를 통해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잠깐 떼어 놓을 수야 있겠지만, 이전 이력과 비교하면 이상 여부를 쉽게 알 수 있을테니, 확실한 증거는 아니더라도 참고 이상으로는 충분히 쓰일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웨어러블 장치가 일상회된 현재라면 말이지요.

하지만 하마구리 가 사람들의 조작은 거창하기만 할 뿐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수상한 옆집 여자 마야에게 현금을 주더라, 정도로 끝내는게 합리적이었어요. 돈을 건네 주다가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건 별로 이상하지 않잖아요? 사이비 종교를 엮어서 구원 어쩌구 하는 이유를 들먹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외려 다치가와 류는 살아있는 채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신라에게 의심을 사고 말았을 뿐입니다. 경찰도 아니고, 경찰 관계자도 아닌 평범한 고등학생 신라와 타츠키에게까지 사건을 이야기할 이유도 딱히 없었고요. 

설명도 부족합니다. 기차사부로의 사체를 어디에 보관했는지부터가 애매해요. 부검에서 사망 추정시간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경찰에 신고하며 소동을 일으키려면 적어도 1주일 이상은 걸렸을 거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설득력만 높여 주었더라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조금 아쉽습니다.

"돌과 사진" 

마추피추 유적에서 스페인 여성 관광객 알마가 낙석에 맞아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뒤 잉카의 저주라는 소문이 퍼졌다. 피해자가 잉카를 정복했던 스페인인이었고, 낙석은 다른 돌로 가로막혀 떨어질 수 없었던 위치에 놓여 있었던 탓이었다.

살인의 동기가 인스타그램일 수 있다는 전개는 꽤 시의적절했습니다. 피해자가 친구들 사진 아이디어를 도용해 사진을 올리고, 그걸로 인기를 얻었다는 내용이거든요. 물론 결정적인 동기는 따로 있기는 합니다만....

문제는 인스타그램 관련 내용 외의 모든 것입니다. 돌이 떨어진 진상부터가 허무하고 유치했어요. 가로막고 있던 돌을 피해서 굴린 뒤 피해자에게 떨어트린게 전부거든요. 밑에 굴리기 쉽게 태피스트리를 깔았다는데, 이건 트릭도 뭐도 아닙니다. 증거인 유리 구슬 파편도 너무 쉽게 드러나고요. 상식적으로도 자연스럽게 낙석이 일어난 것으로 위장하는게 당연합니다. 이렇게 억지로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할 이유는 전혀 없어요. 다른 친구 두 명이 범인 엘자가 위로 올라가 돌을 떨어트린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4/08/11

Q.E.D iff 증명종료 25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점

Q.E.D Iff 증명종료 25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두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권은 지난 권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수준 이하였습니다. 두 편 평균 별점은 겨우 2점이나 될까.... 퐁당퐁당도 이제는 힘에 부치나봅니다. 다음 권에서는 과연 만회가 가능할까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전 참고하세요.

"제 4의 게이트"
양자컴퓨터를 개발하려는 미국 스타트업 10S의 CEO 리오는 회사에 스파이가 있다고 생각해서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여러가지 대책을 세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터는 도난당했고, 그녀마저 습격당해 입원하고 말았다.

리오가 카메라를 조작해 진짜 스파이에게 다른 스파이가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발상은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범인을 밝혀나가는 추리 과정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단순히 10명 임직원의 투표 결과를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이 투표는 '스파이라면 반드시 이렇게 했을거다!'라는걸 전제로 하고 있는데, 증거로 삼기에는 터무니없이 빈약합니다. 애초에 리오의 안경에 카메라가 부착되어 있었기에 추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낼 이유도 없고요. 양자 컴퓨터에 대한 설명도 재미는 있지만 이를 양자 게이트 운운하며 본편 사건과 엮는건 무리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간단한 답"
205X년, 부유층 대상 양로원 세컨드 파라다이스에서 입주자가 사망했다. 변호사 미즈하라 가나는 양로원으로부터 보험 회사와의 교섭을 요청받았다. 지인 토마와 현장 조사에 나선 가나는 입주자가 살해당했을거라는 증거를 잡았다.
결국 밝혀진 범인은 '세계 균형 협회' 엔지니어 토도 아키라였다. 피해자들은 모두 26년 전 과격한 노인 배척 사상을 TV에서 떠들던 인물들이었고, 토도는 이들의 영향으로 할머니를 잃었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든, 차별과 박해를 행한 자들이 본인들 발언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시스템을 활용하여 복수에 나섰다...

이전에도 등장했었던 평행 우주, 요새 말로는 멀티버스 세계관 작품. 
이 세계관에서는 여러가지 첨단 기술이 중요한 소재로 사용된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번에는 '사회제도 재구축' 시스템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대단한 기술로 보이지는 않아요. 단지 차별적인 발언을 했던 사람들을 모두 기록한 데이터 베이스에 불과하거든요. 
그래도 이 데이터 베이스에 차별적 발언을 한 사람들을 모두 기록한 뒤, 그들이 그 차별 대상자가 되는 상황을 활용한다는 아이디어는 괜찮았습니다. 노인 혐오 발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한 번 보여주고 싶을 정도에요. 추리적으로도 범행 현장이 이상하다는걸 알아채고,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수상한 장소를 알아내는 등의 과정은 볼만했고요.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사회제도 재구축 시스템은 '노인 혐오'만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겁니다. 남성이나 여성 혐오 발언을 한 사람이 그 반대 성별이 된다던가, 인종 차별을 한 사람이 해당 인종이 되는건 불가능하니까요. 추리적으로도 범인은 사진을 통해 손쉽게 드러나고요. 그래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3/11/05

미소 짓는 사람 - 누쿠이 도쿠로 / 김은모 : 별점 2.5점

미소 짓는 사람 - 6점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일류 대학을 졸업한 뒤, 대형 은행에 근무하는 엘리트 회사원 니토 도시미는 자상하고 냉철하며 업무 능력도 뛰어나서 젊은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런 니토가 아내와 딸을 살해했다. 단지 '책을 놓을 공간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니토는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냉혹한 면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한편 니토의 옛 회사 동료, 학창 시절 동급생 등이 수상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알라딘 책 소개 인용)

"통곡"의 작가 누쿠이 도쿠로의 최근작. 목적이 아무리 사소해도 그것을 이루는 가장 짧은 방법이 살인이라면 주저 없이 실행하는 소시오패스를 등장시키고, 그가 이렇게 성장하게 된 이유를 파헤치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작품입니다.

몰입감 하나만큼은 최고입니다.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손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요. 단순한 가족 살인사건이 직장 동료, 과거 대학 시절 친구, 어린 시절 이웃에게 벌어졌던 사건으로 확장되어 나가면서 어둠의 근원을 찾는 과정이 아주 흥미진진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르포르타주 형식답게 작가가 인터뷰를 진행하며 수집한 증언 및 자신의 의견이 섞여 전개된다는 점도 독특했는데 작품과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으로의 완성도는 평가하기 애매하네요. 이유는 결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탓입니다. "니토를 여러 증언을 통해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라는 필터를 거친 허상일 뿐이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해한 척 하며 살고 있다. 이해하지 못하면 바로 불안해지니까. 그 눈속임을 드러내는 것이 니토이다." 라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그것을 했는지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편리한 스토리를 원한다는 결말인데, 솔직히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결말이라면, 최소한 사람들이 원하는 편리한 스토리로 끝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소설은 밝혀진 게 없이 끝나버리니 이게 뭔가 싶더군요. 상당한 분량으로 소시오패스의 근원을 우직하게 탐구해 나가다가, 결론은 전혀 관계없는 사회적이고 철학적인 것이라니 너무 뜬금 없기도 했고요.

르포르타주 작가에게 이러한 깨달음을 주는 니토의 옛 동창 쇼코의 행동 역시 그 이유와 방법 모두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초등학교 시절 계부를 살해했건 말건 어차피 공소시효는 지난 일입니다. 그런데 사건에 대해 거짓으로 증언하는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요? 번거롭기만 할 따름입니다. 구태여 대역을 사용하여 거짓 상황극을 만든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트라우마의 존재를 대역을 통해 알린 뒤,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폭로하는 번거로운 행동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작가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작위적인 장치에 불과했습니다. 아울러 니토 캐릭터 형성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르는' 이 초등학교 시절 동창생 쇼코의 일화도 "백야행"과 비슷한, 현실감 없는 소설 느낌의 뻔한 내용이었고 말이죠.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와도 궤를 달리하는 니토 캐릭터도 아쉽습니다. 엘리트 은행원이 알고 보니 소시오패스였다는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캐릭터를 현실적으로 구현하지는 못했으니까요. 예를 들어 후배의 불만을 해결해 준 것은 자신에게 별반 도움이 되지 않고 순수히 남을 위한 행동인데 전혀 소시오패스답지 않았습니다. 살인이라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벌이면서까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서재, 1년 빠른 진급, 게임기라는 동기는 소설에서도 이야기되듯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동기들이기에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그가 명석한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해요. 살인의 리스크를 짊어지면서까지 벌일 가치가 있는 일이었나? 라는 질문의 답은 결국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가 소시오패스다"라는 것으로는 부족하죠.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뜬금없는 열린 결말은 분명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생각되며 개인적으로는 비현실적인 캐릭터 묘사도 감점 요인이었습니다. 그래도 내용은 서늘하고 읽는 재미도 뛰어난 만큼 독특한 무언가를 찾으시는 분들께서는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2020/07/03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 - 황세연 : 별점 1.5점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 - 4점
황세연 지음/마카롱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8년, 충남 청양군 장평면 중천리라는 촌 마을에 살고 있던 젊은 미망인 소팔희는 마을 주민 신한국을 도둑으로 오인해 살해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신한국의 시체를 이장의 차에 치어 죽은걸로 위장하고, 마을 주민들은 '범죄없는 마을'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사건 은닉을 결정했다.
그날 신한국의 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사체가 발견되었고, 마침 마을의 자살 명소로 유명한 구멍 바위에서도 자살자 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이 출동했지만 폭우로 인해 일단 철수하여 마을에는 조은비 기자와 최순석 형사만이 남아 조사를 이어가는데....

한국 작가 황세연의 장편으로 작년 (2019년)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 장편 소설 부분 최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사건의 핵심 수수께끼는 신한국의 죽음, 그리고 사체에 심한 폭행과 감전, 교통 사고 등 다양한 흉행의 흔적이 남은 이유가 무엇인지? 입니다. 진상은 곧바로 마을 주민들의 '시체 떠넘기기'에 의한 걸로 밝혀지고요.

시체를 옮긴 뒤 살인 누명을 씌운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있어왔습니다. 18세기 후반 "성진사전"은 시체를 성진사 문 앞에 가져다 둔 뒤, 성진사에게 살인 누명을 씌워 돈을 갈취한다는 이야기라고 하니까요. 술취한 사람 옆에 시체를 두고 누명을 씌우는 일은 뉴스 등에서도 곧잘 보아왔던 이야기지요.
그러나 작품 속 신한국 시체 떠넘기기는 누명을 씌우려는 목적은 덜하다는 점에서 조금 다릅니다. 누명 보다는 '나만 아니면 돼'에 가깝습니다. 시체 돌리기의 발단인 우태우 이장이 소팔희 축사로 사체를 옮기려 한 행위처럼요.
그 이후의 시체 떠넘기기는 거의 다 우연에 의한 것이라 의도적이지도 않습니다. 박광규의 실수로 양식연 양식장에 시체가 빠지고, 양식연의 실수로 왕주영의 차 앞에 시체가 떨어져 왕주영이 자기가 차로 치었다고 착각한게 진상이거든요. 그나마 왕주영이 우태우 이장 차에 치인걸로 위장하는 것 정도만 전통적인 시체 떠넘기기에 가깝습니다만, 이 역시 누명을 씌우기보다는 '나만 아니면 돼' 쪽이지요.

그러나 '나만 아니면 돼'와 우연과 실수로 점철된 시체 떠넘기기의 과정은 가면 갈 수록 지루해 집니다. 양식장에서 전기를 흘리지 않았다면? 왕주영이 운전을 하지 않았다면?과 같은 부수적인 우연까지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지요. 작위적인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이건 너무 심했어요.

그나마 하룻밤 새 벌어진 시체 돌려막기 행각은 나름 속도감 넘치며 우스꽝스러워 읽는 재미는 나쁘지 않아요. 헐리우드 코믹 범죄극을 보는 느낌도 들었고요. 그러나 사채업자 사병채 일당이 신한국에게 빌린 돈을 받으러 쳐들어 온 뒤부터는 영 별로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범죄(?) 행각을 알고 협박하며, 역시나 채무자였던 소팔희를 끌고 가서 팔아넘기려는 행각은 앞선 유쾌하고 순박한 분위기와 거리가 너무 멀거든요. 

결말도 억지스럽습니다. 사채업자들이 콜라 뚜껑 하나만으로 선뜻 몇 억에 해당하는 채무를 탕감해주는 장면도 이해가 되지 않고, 최순석이 현금 3억원에 가까운 강남 아파트를 자기와 별 관계없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선뜻 내 놓는 이유 역시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아가 된 아픈 기억에 대한 진상을 깨우쳤다 한 들, 그건 마을 사람들과는 아무 관계없는 일이니 딱히 선행을 베풀 이유는 없습니다. 한국의 컨텐츠들을 사로잡고 있는 불행한 과거와 부모와의 사랑을 그린, 길이 늘리기 목적의 신파극에 불과해서 고독한 안티 히어로이자 독고다이 악당인 최순석 캐릭터하고도 어울리지 않아요.

사채업자들이 마을에서 담근 독버섯주를 먹고 환각을 일으켜 사고로 죽는다는 결말도 너무 뻔했습니다. 중반에 조은비 기자와 최순석이 독버섯주를 먹고 환각에 빠졌을 때 이미 드러난 설정이기도 하고요. 뭔가 복선을 활용한 듯한 부분은 이렇게 뻔한게 대부분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신한국의 복권과 콜라, 독버섯 주가 대표적이에요.

발견된 단서가 모두 증거가 되어서 범인과 이어지는 전개도 뻔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박광규의 라이터가 좋은 예에요. 또 마을 사람들이 쓸데없이 법의학이나 과학 수사에 나름 지식이 있는 듯한 묘사가 많아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도 좋은 방향은 아니었어요. 범죄 없는 마을에 상금을 준다던가, IMF 때 콜라가 강남 아파트를 경품으로 내 걸었다는 무리수 넘치는 설정들도 그러하고요.

하긴, 등장인물들 모두가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으니 이런걸로 문제 삼는 것도 좀 웃기네요. 등장 인물들 이름부터 문제니까요. 조은비 기자와 최순석은 무난하다 해도, 젊은 미방인 소팔희는 소를 판 돈을 세다가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에서 따온 이름, 양식장을 하는 호수집 주인 이름은 양식연입니다. 피해자 신한국과 범죄 없는 마을 타이틀을 위해 시체를 은닉하려는 이장 우태우, 마을 사람 왕주영은 90년대 정당과 정치인에서 따온 이름이고요. 이런 류의 작명은 다른 조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를 클라이막스로 몰고가는 악덕 사채업자의 이름은 사병채니까요. 소씨, 우씨, 왕씨에 사씨 같은 흔치 않은 성에다가 이름마저 이러니 반쯤은 장난같아서 집중이 잘 안되더군요. 점점 심각해지는 작품 분위기와도 영 어울리지 않았던건 물론입니다.

물론 건질게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몇 안되는 단서들을 발견하면서 진상에 접근해가는 조은비 기자와 최순석 컴비의 활약도 꽤 볼거리이고요. 욕이 난무하지 않는 묘사도 마음에 들고, 개성넘치는 캐릭터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누구에게나 반말을 해서 '양순이(서양여자)'라는 별명을 가진 소녀 황은조가 아주 괜찮았습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냐고 하면 그렇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추리적으로나, 이야기 재미면으로나 딱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거든요.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에 도대체 어떤 작품들이 출품되었던건지 좀 궁금해지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솔직히 이런 시골마을이면, 왜 마을 사람들이 달랑 3명 밖에 안되는 사채업자들을 합심해서 사고로 죽일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로 보이는데 말이죠. '범죄 없는 마을'도 물 건너간 상황인데, 앞 뒤 가릴 이유가 있을까요?

2017/10/09

허구추리 - 시로다이라 쿄 / 박춘상 : 별점 2점

허구추리 - 4점
시로다이라 쿄 지음, 박춘상 옮김/디앤씨북스(D&CBooks)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루머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고 알려진 아이돌 나나세 카린의 유령이 마쿠라자카 시에 나타났다. 큰 가슴에 미니 드레스, 리본을 달고 손에는 큰 철골을 든 모습이라서 사람들은 그녀를 "강철 인간 나나세"라고 불렀다. 유령은 사람들을 습격하다가 결국 경찰마저 살해해 버렸고, 사건에 관련된 교통과 순경 사키는 우연히 만난 소녀 이와나가 코토코, 그리고 전 애인 쿠로와 함께 강철 인간을 없애기 위한 승부에 나섰다... 

일본작가 시로다이라 쿄의 장편 소설입니다. 추리 만화 "스파이럴" 등의 원작으로 알려진 작가이지요. 본 작도 만화적인 설정이 가득찬 라이트 노벨이기는 한데,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진짜 진상이 아니라 정말로 있어보이는 가설을 연달아 내 놓는다는,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이런저런 가설, 추리가 선보이는 작품은 그 중에서 "진상"을 찾아내는게 보통 이야기의 핵심인데, 이 작품은 "허구(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든) 추리"를 진짜라고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게 목적이거든요. 이 아이디어 덕분에 '12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같은 이유로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애호가 모임인 "하우미스터리"에서도 추천하는 분들이 제법 계셨을 테고요. 저도 "하우미스터리"에서 관련 정보를 접하고 관심을 가지던 차에, 기나긴 추석 연휴의 대미를 장식하고자 집어들었습니다.

일단 라이트 노벨답게 쑥쑥 읽힙니다. 만화 원작을 많이 쓴 작가답게 캐릭터와 장면을 시각적으로 떠오르게 만드는 묘사, 재치넘치는 대사도 괜찮아요. 주인공인 일안일족 아가씨 이와나가 코토코도 마음에 듭니다. 귀한 집 아가씨이지만 상스러운 말도 서슴없이 내뱉고, 남자친구 사쿠라가와 쿠로에게 집착하는 모습이 개성적이면서도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새 말로 '갭모에'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독특한 아이디어를 제외하면 추리적으로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우선 "허구 추리", 즉 이와나가가 '강철 인간 나나세 종합 사이트'에 올리는 네 가지의 추리 모두 조금만 뒤집어보면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바로 반박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될 정도로요.
그리고 네 번째 추리를 설득력있게 포장하기 위해 앞의 세 가지 추리를 내 놓는다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테라다 형사가 혼자서 수사에 나섰다", "나나세 카린의 아버지가 악의를 가지고 수기를 남겼다.", "나나세 하츠미가 매스컴에 수기를 흘렸다."라는건 구태여 이렇게 가설까지 만들어가며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니까요. 네 번째 추리의 핵심이 이 세가지 요소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첫 번째 테라다 형사 이야기를 제외하면 결국 나나세 카린은 "궁지에 몰리고", "죽고 싶었다."라고 밖에는 설명되지 않기에 외려 드러내면 안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냥 네 번째 가설로 정면 승부를 하면 될텐데, 구태여 앞에 장황한 설명을 덧붙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또 네 번째 "허구 추리"의 핵심인, 나나세 카린이 실제로 살아있다는 시체 바뀌치기 트릭은 조금 그럴듯하게 포장해 놓았지만 솔직히 현대 경찰을 우습게 본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건 정말이지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만화적인 설정도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특히 인어 고기와 쿠단의 고기를 함께 먹은 사쿠라가와 쿠로에 대한 설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쿠단의 "미래 결정 능력"에 불사의 능력이 결합되어 죽지 않고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좋지만, 사건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 탓입니다. 단지 강철 인간과 호각으로 맞붙기 위한, 액션용 소품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입니다. 능력이 있다고만 묘사되지 딱히 어떻게 발휘되는지 묘사가 없으니 독자는 알 도리가 없지요. 그냥 이와나가가 올린 글로 사건이 해결되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 점은 쿠로의 사촌 누나이자 동일한 힘을 가졌으며, 강철 인간 나나세를 만들어낸 최대의 적 릿카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럴 바에야 이와나가는 귀신과 소통할 수 있으며 쿠로는 일종의 호위 무사라는 정도로 끝내는게 깔끔했을 겁니다. 아니면 "미래 결정 능력"을 좀 더 시각화하던가요("그래 결심했어!"와 함께 두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다던가...).

이렇게 독특함 외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조금 연령대가 낮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구태여 구해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화로도 발표되었는데 만화가 훨씬 괜찮을 것 같네요.

2020/01/19

유령 열차 - 아카가와 지로 / 한성례 : 별점 2.5점

유령 열차 - 6점 아카가와 지로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펄프 픽션의 제왕 아카가와 지로의 단편집입니다.

아카가와 지로의 작품은 제법 많이 접해 왔습니다. 리뷰를 올린 작품은 "마리오네트의 덫",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추리 시리즈인 "공포서클", 그리고 단편집 "네이비 블루 스토리"와 몇몇 앤솔러지 뿐이지만, 삼색털 고양이 홈즈 시리즈는 서울 문화사를 통해 국내에 출간된 작품들은 다 읽었으며, 그 외에도 SF라고 할 수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딸" 등을 읽었으니까요.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이 수준 이하였습니다. 도저히 유명 작가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오네트의 덫"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제 리뷰에도 썼듯이 3류 소설의 교과서같은 책이었지요. 그래서 작가의 그 어떤 다른 작품도 읽지 않으리라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약 8년여, 설 연휴 때 읽을만한 가벼운 작품을 찾다가 이 작품이 얻어걸렸네요. 작가의 마지막 작품을 읽은지도 오래 되어 나쁜 기억이 희미해지기도 했지만, 그나마 단편들은 읽을만 했던 기억 때문이지요. 예전에 읽었던 "일본 서스펜스 걸작선"이라는 괜찮은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곳에 따라 비"에 대한 좋은 기억이 남아있기도 했고요. 이 작품의 주인공인 우노 경부와 대학생 유키코 컴비가 꽤나 유쾌해서 다른 시리즈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었는데, 바로 이 단편집이 이 컴비가 활약하는 데뷰작이자 작가의 데뷰 단편집이기도 했거든요.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터리 100선에도 당당히 실려 있기도 하고요. "마리오네트의 덫"의 순위가 더 높은걸 보면 영 신뢰가 안 가는 리스트이기는 하지만요.

하여튼, 기대 반 우려 반이었는데 다행히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수록작 대부분이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는데, 상황들이 기발한 덕이 큽니다. 범행 동기 등 세세한 부분의 설득력도 높은 편이며, 트릭도 반전도 제법이에요.
무엇보다도 두 커플의 캐릭터가 아주 좋습니다. 부인과 사별한 중년 경감 우노와 젊은 여대생 유코 커플을 조합했다는 점도 이색적인데, 지금 보아도 촌스럽지 않게 톡톡튀고 발랄한 유코의 묘사가 괜찮습니다. 상당히 개방된 연애관과 성의식은 시대를 앞서간 감이 있네요.

그러나 수준 이하의 졸작도 수록되어 있는 등 작품의 편차가 크다는건 아쉽습니다. 여러모로 단점도 많이 띄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는 않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유령 열차"

8명의 승객이 운행하는 기차에서 사라진 깜쪽같이 사라졌다는 불가능 범죄를 그린 단편입니다. 아내와 사별한 독신 경감 우노 교이치와 여대생 유키코 컴비의 기념할만한, 그리고 아카가와 지로에게도 기념할만한 데뷰작이죠.

그러나 사건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위증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 입장에서도 그리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니에요. 달랑 세 명의 마을 주민(이와유다니 역 역장, 기차 기관사, 차장)이 승객들이 분명히 탔다고 증언했을 뿐이라서 이 세 명이 입을 맞춘다면 탑승, 혹은 운행 과정에서의 승객 소실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실제로도 8명의 사람들이 승객으로 위장하여 탑승한 뒤, 기차 뒤에 매달아 놓았던 대차를 타고 탈출한게 진상이고요.

8명의 승객이 여관에서 독버섯을 먹고 죽었으며, 쇠락해가는 마을 관광이 치명상을 입을까 두려워 한 마을 유지들이 합심하여 시체를 숨긴 뒤 공작을 벌였다는 동기는 나름 그럴듯합니다. 식사 문제를 우노와 유코의 입으로 드러내는 등 약간의 복선도 존재하고요.

그러나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여덟 명이나 되는 손님이 사고사로 죽은걸, 기차를 탔다가 중간에 어디론가 사라진걸로 무마한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차라리 시체를 태운 뒤 기차 사고같은걸 일으키는게 현실적이잖아요. 아니면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입을 맞춘 뒤, 등산을 갔다는 등으로 둘러대던가요.
또 승객 소실은 번거로운 연극 없이, 그냥 세 명(아니, 여관 주인인 고지마까지 네 명)만 함께 증언해도 성립했을텐데 무려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을 대역으로 동원한 것도 이상합니다. 아울러 수수께끼의 영역에서 이와무라 미와를 살해하고, 유코마저 납치하는 실제 범죄가 우노 경감앞에서 벌어진 뒤에는 범인들이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는 점에서 결말은 많이 아쉽습니다.

기념할만한 데뷰작이지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유괴범의 배신"

닛타가 '봉투에 들어 있지도 않고, 접혀 있지도 않은' 협박장을 들고 있었던 이유에 대한 추리는 괜찮습니다. 배달온걸 본게 아니라, 자기가 만든 협박장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보고 있었다는 추리인데 상당히 그럴듯해요. 유괴 사건은 조작이며, 닛타가 자신의 과거를 협박하던 니시오를 죽이려는게 목적이었다는 진상은 바로 이 추리에서 출발하는데, 추리와 동기와 진상이 잘 어우러집니다.

또 협박장이 들어있던 우편함 속 신문 투입 날짜를 통해 협박장이 집 안에서 넣어진걸 알아챈다던가, 이 협박장의 '딸'이 마사코가 아니라 니시오의 딸 마치코였고, 니시오가 닛타로부터 책을 읽지도 않으면서 자주 빌려가는 이유는 책 속에 넣어둔 현금을 회수하기 위해서라는 세세한 추리들도 괜찮았어요.

그러나 닛타가 과거 살인을 저질렀던 과거로부터 면죄부를 얻기 위해 마사코마저 살해했다는 전개는 너무 극단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훗날 막장 3류 드라마의 제왕이 된 아카가와 지로의 편린이 여기서도 엿보이네요.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는 낮은 편이라 별점은 2점입니다.

"얼어붙은 태양"

한 여름 태양이 작열하는 휴양지에서 얼어죽은 이로누마의 시체가 묘한 대비를 이루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트릭이랄건 없습니다. 범인의 의외성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어요. 이로누마를 냉동고로 유인해 가두어 죽게 만든건 다케나카 부인의 어린 세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냉동고를 대충 관리하여 책임을 지는게 두려웠던 관리인 노인이 사체 유기를 도운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상황과 범인의 의외성 외에는 건질만한 내용이 없다는 겁니다. 협박의 대상이 다케나카 부인이 아니라 오다 여사였다는 의외의 진상은 이야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해요. 또 관계자들과 며칠간 휴양지에서 만났을 뿐인 우노 경감과 유코가 어째서 그들을 도와 이로누마 죽음의 진상을 감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다케나카 부인이 선의의 피해자이고, 오다 여사 역시 마찬가지라고 해도 경감이 할 일은 아니잖아요? 아이들도 조금만 크면 자신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알게 될 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유코와 우노 경감 컴비의 알콩달콩 시츄에이션은 즐거웠습니다. 거사(?)를 치루려 할 때마다 방해받는 상황 묘사도 아주 코믹해서 즐거웠고요. 추리적으로는 별로라도 두 컴비의 팬이라면 즐길거리가 없지는 않은,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역시, 이 시리즈는 유쾌하고 해피 엔딩이어야 제 맛인거 같아요. 별점은 2점입니다.

"비옷을 입은 시체"

앞서 총평에서 언급했었던, 다른 앤솔러지에서 재미있게 읽었다는 단편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그런데 "비옷을 입은 시체"라는 제목은 영 별로네요. 이전에 읽었던 "곳에 따라 비"라는 제목이 더 근사했어요.

여튼,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습니다. 피해자들이 비가 오지 않는데도 비옷 등을 차려입었기 때문에 동일범에 의한 연쇄 살인이라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모두 개별적인 범행이었다는 기본 아이디어가 좋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들이 비옷을 입은 이유도 설득력있고요.

젊고 싱그러운, 그리고 현재와 하나도 다를게 없는 대학 축제가 배경인데, 휴대전화가 없어서 집으로 전화를 할 수 밖에 없는 고전적인 설정이 등장하는 것도 이채로왔던 점입니다. 공공장소에서의 키스를 경범죄라고 생각한다는 것도 옛 시절의 모습이고요. 이런게 고전의 맛이 아닌가 싶어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좋은 단편입니다.

"선인촌 마을 축제"

유코의 졸업 축하 여행을 떠난 둘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나오키 형사의 초대로 그의 고향이라는 선인촌 마을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름 그대로 너무나 착한 사람들만 사는 마을이지만, 촌장의 부인이 우노를 유혹하고 수상한 남자가 자기 형이 이 마을에서 수상한 죽음을 맞았다고 말한 뒤 이리에 물려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추리 소설은 아니고, 모험 소설에 가까운 작품인데, 지금 읽기에는 너무 뻔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오지와 같은 시골 마을, 그곳을 우연히 연락도 없이 방문한 손님들, 너무나 착해서 손님들이 원하는걸 다 들어주는 주민들, 손님들과 함께 보낸다는 1년에 한 번 열리는 마을 축제.... 이 정도 단서가 주어지면, 손님들을 제물로 1년에 한 번 마을 주민들이 미쳐 날뛰는 광란의 축제가 벌어진다는건 보나마나지요. 공포 영화의 서브 장르인 포크 호러(Folk Horror)와 똑같으니까요. 집단적인 종교의식이나 미신때문에 외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영화들이요.

둘이 위기에서 탈출하는 과정도 운과 우연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마을 사람들에게 복수를 꿈꾸던 처녀가 도와줘서 탈출하는거야 떡밥이 있었다 쳐도, 마지막 순간에 방송국 헬기 사다리를 잡고 도주에 성공한다는건 너무 작위적이었어요.

경찰인 나오키 형사도 마을 출신으로 공범이었다는 점은 독특했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없는 망작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차라리 수록되지 않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2003/07/27

시귀 1~3 - 오노 후유미 / 임희선 : 별점 2.5점

외부와는 단절되어있는 첩첩산중의 마을인 소토바에 스나코 일가가 이사온 뒤 수상한 전염병이 퍼져서 마을은 서서히 죽음의 마을로 변해갔다. 죽은 사람들의 일부는 되살아 나서 사람의 피를 섭취하며 죽음을 전염시키는 이른바 '시귀'가 되어버렸고, 마을의 양대 리더인 사찰 주지 세이신과 외과의사 도시오는 죽음의 배경을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12국기 시리즈의 오노 호유미가 쓴 장편 호러 소설입니다. 

서양의 흡혈귀 이야기를 동양풍으로 약간 각색한것에 불과한 설정이지만 외부와 단절된 소토바라는 마을을 배경으로하는 죽음에 대처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굉장히 탁월합니다. 시귀들만의 마을을 세우려는 스나코의 야심과 마을사람들과의 한판 승부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고요. 또한 3권에 이르는 방대한 장편답게 등장인물도 상당하고(거의 전 마을 사람들이 한번정도는 등장하는듯...) 곁가지 이야기도 많지만 그에 따른 여러 이야기들을 하나의 줄기로 묶는 솜씨가 놀라울 정도네요. 인물들의 캐릭터도 확실한 편이라서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하지만 결말 부분에서 힘에 부치는 티가 나더군요. 그래서인지 너무 쉽게 한번에 끝내버린 느낌이에요. 시귀들이 너무 무력하게 무너지는것도 조금은 불만이며 서양의 '드라큘라' 설정에서 결국 한발자욱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1,2권의 재미를 3권에서 제대로 끝맺지 못했달까요. 그러나 더운 여름에 한번쯤 읽어볼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만큼의 흡입력과 재미는 보장된 작품이니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07/14

나의 히가시노 게이고 베스트 (2022년 7월)

지난 주말에 리뷰를 올렸던 "사명과 영혼의 경계"는 제가 올렸던 53번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리뷰였습니다. 53편이나 읽었으면 베스트 10편도 충분히 뽑을 수 있을 것 같아 한 번 정리해보았습니다.

의외로 별점 4점 이상의 작품은 없고 별점 3점을 준 작품만 15편이 있습니다. 평균 수준이라 할 수 있는 별점 2.5점으로 범위를 넓히면 모두 30편이고요. 타율은 준수하지만 장타력은 별로 없는 타자같은 느낌이네요. "머니볼" 이론으로는 그닥 영양가없는 타자인 셈입니다. 좋아하는 작가고, 많은 작품을 읽었지만 이제 다른 작가를 타선에 좀 끼워 넣어야 할 때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여튼, 별점 3점을 주었던 15편의 작품을 개인적인 순서대로 배열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악의"
  2. "용의자 X의 헌신"
  3. "수상한 사람들"
  4. "기도의 막이 내릴 때"
  5. "예지몽"
  6. "백야행"
  7. "신참자"
  8. "방과 후"
  9. "오사카 소년 탐정단"
  10.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11. "공허한 십자가"
  12. "녹나무의 파수꾼"
  13. "사명과 영혼의 경계"
  14. "명탐정의 규칙"
  15. "명탐정의 저주"
앞으로 어떻게 순위가 바뀔 지는 모르겠지만, 2022년 7월 기준입니다~

2022/04/01

사장을 죽이고 싶나 - 원샨 / 정세경 : 별점 2점

사장을 죽이고 싶나 - 4점
원샨 지음, 정세경 옮김/아작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에서 무명 연극 배우로 살아가던 위바이통에게 중국의 유명 금융 엘리트 투자자 양안옌이 찾아왔다. 그는 위바이통 부모에게 은혜를 입었다며 바이통에게 스카웃 제의를 하였다. 6개월 안에 금융 엘리트로 만들어주겠다는 장담과 함께였다. 위바이통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호기심에 못 이겨 중국 강캉시로 향했다. 

강캉시에서 양안옌과 만나기로 한 곳은 그의 회사인 바나 금융 사무실이 있는 88층짜리 신축 바나 센터 건물로 개장하기 직전이었다. 악천후 탓에 꼭대기층 사무실에 조금 늦게 도착한 위바이통은 양안옌 사장이 여러 명의 사람들과 언쟁 끝에 격투를 벌이는 걸 목격했다. 바이통은 싸움을 말리려 했지만, 누군가 꺼낸 칼에 사장이 찔려 죽는걸 막을 수는 없었다. 현장에 있던 무리들은 사장이 강도 살해 당했다고 위장하려 했지만, 도망치려던 그들 앞에 류창융 등 금융계 거물 4명이 나타났다. 사장의 죽음을 숨기고 그들을 응대했지만, 곧이어 정전이 일어났고 비상 계단은 철문으로 잠겨있어서 일행은 88층 바나 은행 사무실 공간에 갇혀버렸다. 

그리고 숨겨놓았던 사장의 시체와 천뤄치가 깜쪽같이 사라진 다음날, 천뤄치, 리슈얼의 시체가 차례로 발견되는데...

제목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집어 들게 된 중국 추리 소설로 급성장하는 중인 중국 금융업과 부동산업을 소재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88층 건물에 여러 명의 사람이 함께 갇힌 상황에서 벌어지는 본격적인 밀실 추리물이라는 점은 독특했습니다. 현대물에서는 보기 드문 설정이었는데, 악천후로 인해 개장 직전 건물에 정전이 되었고 그 탓에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꽤 그럴듯하게 상황을 연출한게 괜찮아요. 초반에 위바이통이 처음에 양안옌이 자신을 찾아왔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도 좋습니다. 위바이통의 출연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연극을 보러 왔었고, 또 다른 연극에서는 혼자 보기 적합하지 않고 오로지 위바이통을 찾기 쉬운 좌석을 골랐기 때문이었는데, 나름 추리력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생각되네요.

몇 가지 설정도 볼만합니다. 첫 번째는 양안옌이 연극 배우 위바이통을 스카웃하려던 까닭입니다. 처음에는 911 테러 때 양안옌이 위바이통의 친부모 대신 심부름을 한 덕분에 살아남아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위바이통이 중국 유학 시절 흠모했던 연극배우 리슈얼이 금융 엘리트 중 한 명이라는걸 알게 되고, 양안옌 살해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수상한 행동이 하나 둘 씩 드러나며 진상이 밝혀집니다. 양안엔은 '연기력' 때문에 배우들을 고용해서 금융 엘리트인척 시켰던 겁니다. 배우들은 모두 회사 AI 시스템의 지원을 받아 적절한 연기로 고객과 소통했고요. AI가 금융 엘리트의 거의 모든 실무를 대신하게 되면서, 사람 상대의 커뮤니케이션은 필요하니 저렴하게 배우를 고용했다는 건데 꽤 그럴싸 한 설정입니다. 

두 번째는 양안옌이 입체 영상 기술과 놀이공원용 차량 기술을 빼앗으려고 했는데, 이게 류창융 회장의 주택 건물 개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로 정답은 좁고, 가사 도우미가 필요한 현재의 다세대 주택 환경 개선을 위해서입니다. 창문에서 입체 영상을 만들어서 뿌리고, 엘리베이터는 놀이 공원용 차량 기술을 도입해 고층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주면, 주민들이 고층에서 넓고 쾌적하게 산다고 착각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지요. 비상 계단 벽에 숨겨진 문은 가사 도우미들이 단체로 거주하는 공간으로 만들 셈이었고요. 이 역시 상당히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생각됩니다. 이런 설정을 풀어가면서 부동산에 목숨을 건 모습, AI 때문에 직업을 잃는 사람들 등 중국, 아니 우리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을 잘 그려낸 것도 인상적이에요.

그러나 이런 흥미로운 설정이 사건과 이어지지는 못합니다. 추리 소설로는 아예 함량 미달이고요. 일단 사건의 범인 쩡자웨이가 양안옌 사장을 살해한 동기부터가 불분명합니다. 그냥 충동적인 범죄로 그려지거든요. 하지만 여러 사람이 있는데서 몰래 칼을 꺼내 찌르다니, 상황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천뤄치와 리슈얼 살해는 사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저지른 범행으로 이 역시 직접적인 동기가 없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덕분에 양안옌 - 천뤄치 - 리슈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범행 순환 구조가 완성되기는 했지만, 이는 등장인물들 시점에나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독자들은 위바이통 시점의 묘사를 통해 리슈얼이 불쌍한 피해자라는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등장인물들 생각대로, 양안옌 사장이 죽지 않았고 천뤄치가 배신자였으며 리슈얼이 사장의 스파이였다면, 천뤄치를 죽이고 시체를 공개할 이유도 없어요. 중요한 투자처 손님들을 초대한 마당에 사건을 키울 필요가 있었을리 만무하니까요.

밀실 트릭도 알고나니 너무나 한심합니다. '비밀 통로'를 사용한 것에 불과한 탓입니다. 비상 계단 벽에 아래 층으로 가는 입구가 숨겨져 있었을 뿐이니까요. 때문에 '밀실이 등장하는 추리물'이지, '밀실 트릭'이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차라리 창문에서 입체 영상을 뿌려서 88층으로 느끼게 했지만 사실은 3층이었다는 설정을 이용해서, 창문을 몰래 열고 지상으로 이동했다는 식으로 풀어가는게 훨씬 나았을겁니다. 사실 트릭에 쓸 생각도 없었다면 구태여 필요했던 설정도 아니었어요. 물론 이 역시 정전 상태에서 창문으로 어떻게 88층 영상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지 설명이 부족해서 좋은 트릭이라고 하기는 어려웠겠지만요. 

아울러 양안옌 사장이 사실은 위바이통을 죽이려고 했다는 일종의 반전과 에필로그도 별로였어요. 위바이통이 911 테러 희생자의 자식으로 거짓 인터뷰를 한 것 정도로 그를 죽이려 했다? 설득력이 전혀 없습니다. 위바이통이 양안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설령 살의를 품었다 한들, 구태여 중국까지 불러들여 자기 건물에서 죽인다는건 말도 안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금융 엘리트에 대한 설정은 기발했지만, 전체적으로 별로라 구태여 권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3/12/08

hansang의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15선

전에 올렸던 일본 헌책방의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을 보고 저도 꼽아봤습니다. 이른바 hansang의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15선! 제가 읽고 리뷰를 올린 58권 중 별점이 높은 작품들입니다. 순위는 무순이고요.

1년 전에 비슷한 글을 올렸었는데, 결과는 동일합니다. 고작 6권 더 읽었을 뿐이니 당연합니다. 평이 좋았던 "백조와 박쥐"가 새롭게 순위권에 올라갈까 기대했는데 역부족이었네요.
선정된 작품을 보니, 예나 지금이나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본격 추리물'을 훨씬 더 좋아한다는걸 바로 알 수 있군요. 단편집이 많은 것도 눈에 뜨입니다. 단편들은 보통 본격 추리 성향을 많이 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빼어난 수록작 한 두편이 전체 별균 평점을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 중 딱 한 권을 고른다면, "악의"를 꼽겠습니다.

2024/04/20

권외편집자 - 츠즈키 쿄이치 / 김혜원 : 별점 3점

권외편집자 - 6점
츠즈키 쿄이치 지음, 김혜원 옮김/컴인

일본의 편집자이자 작가, 사진가인 저자가 자신이 출판계에서 쌓아온 경력을 털어놓는 에세이집.
지금도 발간되고 있는, 저도 아주 좋아하는 잡지인 'popeye'와 'Brutus'에서 시작하여, 독립후 사진까지 직접 맡아 취재하여 발표한 Tokyo Style, 일본의 기묘한 장소들과 같은 기사들과 기사를 토대로 발표한 책들, 지금은 e-mail magazine 작업을 진행한다는 저자의 출판 여정과 함께, 이러한 취재와 창작 과정에서 느꼈던 여러가지 감정들과 단상들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편집자'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기자, 작가, 사진가, 창작자로서의 작업이 훨씬 많은건 의외였습니다. 저자가 원하는 책을 만들지 않고는 못배기는 사람이라서 그렇기도 한데, 여튼 익히 알고있고 친숙한 편집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파란만장한 이야기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직접 기획해서 만든 기발한 책들 소개도 인상적이었어고요. 아무도 안 만들 것 같아서 만들었다는데, 일본, 미국의 기묘하고 재미있는 장소라던가 러브 호텔 사진집 등 소개만 보아도 재미있는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 중 가장 흥미로왔던 책은 성인 잡지 독자 투고 일러스트에 주목하여 출간한 기획이었습니다. '핀카라타이소 (ぴんから体操)'라는 작가는 그 중에서도 특출났던 덕분에, 출간 후에 유명해져서 전시회까지 정기적으로 열린다고해서 어떤 작품인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자마자 변태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승자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는 시선, 판매량과 관계없이 원하는 책을 내고야 마는 열정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책을 만들어도 먹고 살 수 있는 문화적 저변도 부럽고요. 물론 저자도 인세로 먹고 살지 못한다고 언급은 하지만, 이런 책을 여러 권 출간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요. (SF 전문 출판사 '불새'의 안타까운 최후가 겹쳐집니다)

백전노장다운 조언, 경험담도 새겨들을만한게 많습니다. 몇가지 소개해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내 돈 주고 구입하기'
무작정 인터넷으로 검색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머리와 주머니의 돈으로 판단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미술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이 직접 문을 두드리고 열어봐야 경험이 쌓인다. 그렇게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머지않아 주변 의견에 흔들리지 않게 되고 좋다고 느낀 자신의 감각을 확신할 수 있는 날이 온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게 자신을 다져가는 과정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 "현시연"의 마다라메의 말이 떠오릅니다.

속독이나 다독은 밥을 급하게 먹거나 과식하는 것과 같다. 편집자를 하고 싶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100번 읽은 책을 몇 권이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 추리소설 1,000권을 넘게 읽었다고 우쭐했던 저를 반성하게 만드는 명언입니다. 추리 소설 중에 100번 읽을만한 책이 무엇일지 한 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젊었을 때는 록만 들을거야라고 고집부리다가 어른이라면 재즈를 들어야지 하다가 마지막에는 고급 노래방에서 언니들과 흘러간 유행가를 부르는 승자 그룹보다, 죽을 때까지 핑크 플로이드를 들으며 만족하는 패자 그룹이 훨씬 존경스러워졌다.
: 성인잡지 독자 투고 일러스트를 모아 책으로 만드는 사람다운 견해였어요. '병신같지만 멋있어!' 느낌의 말이기도 하지요. 패자들을 위한 멋진 헌사라 생각됩니다.

프로란 대신 해주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예를 들면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걸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매일 그런 생각만 끝없이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을 대신해 철학자는 평생 동안 고민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책으로 낸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가를 지불하고 책을 읽는다. 이처럼 누군가를 대신해서 깊이 생각하는 사람, 먼 곳까지 가보는 사람, 맛을 연구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프로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일을 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
: 이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 무릎을 치게 만들었습니다. 직장인이 그 업무의 '프로'라서 월급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기도 하니까요.

이외에 실제 책을 여러 권 출간한 '프로'다운 말도 많습니다. "누군가를 인터뷰할 때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대략적인 스케치를 하는 정도가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준비는 결과를 가정하고 단정짓는 과정이 아니라 기초를 닦아두는 과정이다." 처럼요. 미술 대학을 부정하는 말도 기억에 남네요. 저 역시 아득히 오래 전이지만 미대 졸업생인데, 솔직히 대학에서 예술이나 디자인에 대해서 무언가 배웠다는 실감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냥 그런 작업을 하는 공간과 같은 분야에 관심있는 친구들을 모아놓은 오프라인 모임에 가깝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전부가 다 볼만하고 좋은건 아닙니다. 꼰대스러움이 글 곳곳에 묻어나는건 별로였어요. 대표적인게 '기획과 여정도 처음부터 모든걸 꼼꼼하게 계획하지 않는게 좋다. 예기치 못한 만남은 예상을 뛰어넘은 장소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모든걸 꼼꼼하게 계획해야 하는 취재, 업무가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는 MBTI가 J인 사람은 견디지 못할 상황이기도 하고요. 업무의 특성과 사람마다 개성이 모두 다른데, 자신에게 잘 맞았다고 남에게도 단정지어 이야기하는건 꼰대지요.
"그들의 삶은 세상에서는 패배자라 하고 부모에게는 근심거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건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았다."와 같은 글도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없다는 현실을 알려주는게 저널리스트의 역할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신선했던 취재들도 거듭되다보니 "수상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와 비슷해져서 식상해져 버리고 맙니다. 러브돌을 만드는 오리엔트 공업 이야기는 그냥 같은 취재더라고요.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아직도 현역으로 인터넷 메일 형태의 매거진을 정기 간행하는 등 꺾이지 않는 저자의 열정에는 박수를 보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9/08/04

조용한 무더위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3점

조용한 무더위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와카타케 나나미의 '유능하지만 불운한' 여성 사립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입니다. 하무라 아키라가 백곰 탐정사 탐정이자 미스테리 전문 서점 '살인곰 서점'의 거의 유일한 아르바이트 생으로 2014년 7월부터 12월까지 매월 벌어진 다양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 여섯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는 마흔을 넘긴 나이를 제외하고는 독신에다가 하루하루 근근히 먹고산다는건 여전하네요. 나이 탓에 어깨 근육통 등 건강에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탐정으로서 꽤 유능합니다.

읽기 전에는 아무래도 일상계에 가까울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현재 모습을 보면 딱히 대단한 사건에 휘말릴걸로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처럼 내용과 사건들이 상당히 묵직해서 의외였습니다. "파란 그늘"만 들치기라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범죄이며 그 외의 작품들에서는 강력 범죄들이 연달아 일어납니다. 작품별로 분류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조용한 무더위" : 살인 미수
  • "아타미 브라이튼 록" : 불법 약물 제조에 살인과 사체 은닉
  • "소에지마씨 가라사대" : 살인과 감금
  • "붉은 흉작" : 호적 도용과 살인 강도
  • "성야 플러스 1" : 살인 사건

이런 강력 범죄들이 왁자지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일어나고, 시니컬한 하무라 시점의 묘사가 더해져 독특한 재미를 안겨다 주는 이 시리즈의 매력 포인트도 잘 살아 있습니다. 진지한 주인공이 자신도 휩쓸린 대소동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는, 우디 알렌이 연상되는 블랙 코미디 스타일이지요. 역시나 시리즈의 매력인 평범한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악의'도 곳곳에서 드러나고요. 추리적으로도 잘 정리되어서 깔끔합니다.

무엇보다도 '미스테리 전문 서점'이라는 '살인곰 서점'이 주요 무대이며, '살인곰 서점'에서 매월 벌이는 '미스터리 투어'가 이야기의 핵심 소재 중 하나라는게 추리 소설 애호가로서 굉장히 반가왔습니다. 여러 추리 소설과 작가들이 중요하게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파란 그늘"에서 사건의 진상은 작 중 언급되는 "레베카"의 티 타임 비밀 레시피에 얽힌 진실이 드러난 덕분입니다. "아타미 브라이튼 록"에서 피해자가 영국 추리 소설을 읽었다는 수상한 증언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고요. "성야 플러스 1"은 개빈 라이얼의 "심야 플러스 1"이 핵심 소재 중 하나로 사용됩니다. 마지막에 부록처럼 붙어있는 살인곰 서점 점장 도야마의 입을 빌어 작 중 등장하는 작품들을 소개해주는 부분도 인상적이에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재미와 추리 모두 충분한 수준이며, 추리 애호가의 덕심(?)을 잘 건드리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추리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은 작품이에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란 그늘" 7월

단편집을 개시하는 첫 단편입니다. 더위에 대한 하무라의 푸념에서 대형 교통사고로, 그리고 '뱀녀'의 행방을 쫓다가 그녀가 택배 배달원과 손을 잡은 들치기범이라는게 밝혀진다는 전개가 빠르면서도 설득력 높게 진행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무라가 범인의 대략적인 인상 착의와 차림새, 범인이 이동한 방향이라는 몇 안되는 단서로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도 꽤 설득력 높고요. 평범한 인간의 '악의'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발 벗고 나서는 교통 사고 현장에서 죽어가는 피해자의 가방을 훔치는 범죄가 그러하지요. 모친의 애끓는 호소에도 가방을 버렸다고 하지만 정작 돌려달라고 한 레시피 노트를 연인에게 선물한 사실을 밝히지 않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 추리 모두 일정 수준 이상입니다. 이어지는 작품들에 기대를 갖게 만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이런 책을 쓴 입장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사건의 핵심인 쓰구미의 노트에 수록되었던 소설 "레베카"와 관련된 레시피가 진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책에는 상세하게 알려주지 않는 레시피 속 비밀 재료에 대한 이야기인데 어떤 맛일지 아주 궁금하네요. 서점 점장인 도야마가 기획한 7월 미스터리 페어의 주제가 "달콤한 미스터리 페어" 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추리 소설에 관련된 레시피 책들도 소개되는데 그 중 "Len Deighton's Action Cookbook"은 꼭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작가 렌 테이턴의 레시피인데 레몽 머랭 파이 레시피가 실려 있는 등 디저트 부분이 충실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스터리 티 파티 계획도 발군이에요. 미스터리에 등장하는 과자들을 죽 늘어놓고 티 파티를 열다니! 아, 이런 서점이 집 근처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한 무더위" 8월

전편에 이어 무더위가 이어집니다. 무더위가 일종의 흉기로 사용되기도 하고요. 자치회장은 어머니를 열사병에 걸리게 할 속셈이었거든요. 이 아이디어는 실제 뉴스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설득력도 강합니다. 계절 묘사도 발군입니다.

하지만 범행을 위해 자치회장이 무리하게 거리를 비운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남의 집 에어컨 소리를 귀담아 들을 이유는 없죠. 또 거리를 찾아오는 방문객이 있을 수도 있는 등 어차피 통제는 불가능하니까요. 하무라의 탐정일이 수월하게 풀린다는 것도 좀 과했습니다. 진상을 깨닫게 되는, 자치회장의 볼펜은 순전히 우연이었다는 점도 감점 요소죠. 이런 부분은 조금 더 정리하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타미 브라이튼 록" 9월

하무라 아키라가 이동하는 모든 이야기가 그렇지만 이 작품은 특히나 이동이 잦아서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강하게 풍깁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악의가 아니라 명확한 목적이 있는 범죄 모의라는 점, 그리고 과거의 수수께끼를 다양한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현재 시점에 밝혀낸다는 고전적, 왕도적 이야기라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조금 다른 분위기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를 깔끔하게 전개하는 솜씨는 대단합니다. "브라이튼 록"이라는 소설을 시타라 소가 읽은 시점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눈치채고, 이를 본인이 발로 뛰어 얻어낸 정보와 엮어 진상을 도출하는 하무라의 활약도 눈부실 정도에요. UFO에 미친 부동산업자, 바퀴벌레를 키우는 전 상사맨같은 독특한 등장인물들도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한 묘사와 맞물려 재미를 더해줍니다.

하지만 결말이 '그래서 어쨌는데?' 수준으로 마무리 되어서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수십년 전 사건으로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하무라가 자신이 애써 진상을 밝힐 필요도 없었다는 점에서는 이게 최선이었겠지만요. 그 외 추리적으로도 '자백'에 의존할 뿐이라 - 다른건 몰라도 시타로 소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백이 아니라면 알아낼 도리가 없었으니 - 조금 감점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소에지마씨 가라사대" 10월

하무라가 서점에서 전화와 인터넷만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니 현대적인 '안락의자 탐정물' 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작 중 미스터리 페어의 주제가 '학자 탐정' 으로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주는 것도 재미있어요. 이런저런 지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은 동일하니까요. 추리 애호가를 위한 정보도 한 가득입니다. '학자 미스터리 페어'라는 페어의 주제는 심심하지만 그만큼 소개되는 작품들이 친숙해서 마음에 들더군요. '싱킹 머신' 반 두젠 교수를 비롯한 다양한 학자, 박사들이 등장하거든요. 또 피해자가 리모델링 업자라는 걸 듣고 '딕 프랜시스의 주인공이 이런 일을 했었는데' 라고 생각하는건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지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너무 뻔해서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은퇴한 변호사가 리모델링 업자에게 판 저택이 동기일거라는게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하무라의 추리대로 저택에 사체가 묻혀 있었다는 결말도 뻔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변호사 조카가 호시노 구루미를 살해한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어설퍼요. 운 좋게 용의자가 소에지마씨로 특정되었을 뿐, 용의자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궁지에 몰린 소에지마씨가 무라키를 감금하여 인질극을 벌인다는 설정도 지나쳤습니다. 이런 류의 소동극이 작가의 장기이기는 한데, 자극이 자니치다 보면 무덤덤해지는 법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붉은 흉작" 11월

하드보일드 팬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드보일드 작가가 의뢰인인데다가 주요 소재가 "붉은 수확"과 비슷한 사건을 일으킨 다카노바바의 저주받은 땅이니까요. 심지어 고가 간타가 오기 노보루를 살해한 흉기도 '얼음 송곳'입니다!
삼천만엔이라는 거금을 가지고 있지만 드러내 쓰지도 못하고 홀로 약간의 사치만 부리면서, 죄책감에 몸부림치다가 죽어간 불쌍한 남자가 주인공이며, 그의 평생의 은인은 광인이 되어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간다는 설정도 하드보일드스러웠어요. 냉정한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작가 선생의 한 마디는 화룡 정점이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애매합니다. 가짜 츠노다 지로가 자주 다니던 지압원에서 의료 보험증 사본을 입수하여 '고가 간타'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 장소를 찾아가고, 그 곳에서 고가 간타가 저지른 살인 사건과 참고인이었던 츠다 지로를 확인하는 과정이 일사천리이기 때문입니다. 오기 노보루가 지녔지만 사라진 삼천만엔을 츠다 지로가 손에 넣었을 거라는 추리는 딱히 중요한 요소는 아니고요.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드보일드라는 의미 외의 가치는 조금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성야 플러스 1"

개빈 라이얼의 "심야 플러스 1"에서 따온 제목이죠. "심야 플러스 1"은 서스펜스 가득한 모험물인데 이 이야기 속 하무라에게 닥친 시련도 "심야 플러스 1" 못지 않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부탁을 들어주고 임무를 완수하는 하무라 아키라의 모습은 성녀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에요.
그런데 조금 의아했던건 일본인들은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걸 굉장히 두려워 한다는데, 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하무라에게 폐를 끼치는걸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무라가 만만해 보였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작 중 하무라가 부탁받은 심부름을 수행하기 위한 여정의 정도는 지나친 편입니다. 중간의 여정들은 딱히 재미있지도 않고요. 솔직히 중간 과정들은 불필요했습니다.
소노다 씨가 "심야 플러스 1"의 가짜 사인본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책 도둑들이 사인본을 노린다는 설정도 납득하기 어려워요. 하무라의 말대로 옥션에서 2백불 정도면 살 수 있는데 노상강도짓을 할 이유는 없지요.

추리적으로도 별 내용은 없습니다. 백골 사체는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로 어차피 본 편 정보로 추리가 가능한 사건은 아닙니다. 고이시바라 미야코 할머니와 사위의 칼부림 역시 억지스러운 요구에 불과할 뿐이고요. 오히려 사위가 딸을 살해한게 아닌가? 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더라면 말이 되었을텐데 말이죠. 책을 날치기한 2인조의 경우는 앞서 말씀드렸듯 사건 자체의 현실성이 약해서 추리의 여지도 부족합니다.

그래도 하무라의 불운을 잘 드러내고 있고, 중간중간 벌어지는 사건들이 많아서 왁자지껄한 블랙 코미디로 본다면 괜찮습니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고이시바라 미야코와 사위 사이에서 벌어진 칼부림입니다. 정말 급작스럽게 말려들었는데 미야코 할머니가 하무라의 가방을 잡고 놔주지 않는 등의 황당한 상황이 이어지거든요. 이를 슈톨렌이 해결한다는 결말도 재미있었고요. 그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다 극복하고 모두가 원하는 상황으로 매조지하는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행복해지는게 크리스마스의 핵심요소이긴 하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별 볼일 없지만 재미 만큼은 확실합니다.

2006/06/26

극한추리 콜로세움 (極限推理コロシアム) - 스포일러 있습니다!

극한추리 콜로세움(極限推理コロシアム)

프리터 코마가타, 경찰 카가, 프로그래머 데부치, 백수 이다, 번역가 타키모토, OL 요시와라, 그리고 시노자키라는 일곱명의 사람들이 어느날 이상한 저택에 갖히게 된다. 이 저택은 "여름저택"이라고 불리우는 공간으로 영문을 모르던 그들앞에 그들을 이 저택에 가둔듯한 인물에게서 수수께끼의 메시지가 전송된다. 그들이 이제 차례로 죽어갈 것이며 그 범인을 밝혀내면 천만엔의 상금과 함께 저택에서 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 문제는 그들 사이의 범인만이 아니라 또 다른 공간인 "겨울저택"에서의 범인까지 밝혀내야 한다는 것. 그날밤 OL 요시와라가 살해되어 연쇄살인이 시작되고 매일 아침 한번씩 있는 겨울저택과의 통신과 유일한 힌트로 주어진 "동상"이라는 단어를 놓고 코마가타는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데...

일본의 추리소설상 중의 하나인 메피스토상을 수상한 소설이 원작인 TV 미니시리즈입니다.

기본 설정은 영화 "큐브"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전혀 접점이 없는 불특정 다수의 인물들이 특정 공간에 갖힌채로 빠져나가기 위한 노력을 벌인다는 설정이거든요.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큐브와는 달리 이 특정 공간은 일종의 "게임"을 위한 공간이고 그 게임을 클리어 했을 때는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점이겠죠. 이 게임이 바로 추리 게임인 것이고요.

추리적으로 본다면 7명의 사람들밖에 없는 폐쇄된 공간에서의 밀실 트릭과 "힌트"로서 주어진 단어를 해독하기 위한 암호해독 트릭의 두가지 트릭이 메인 트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해결을 위한 정보는 시청자에게 비교적 공정하게 전달됩니다.

하지만 밀실 트릭의 경우는 맨 처음 겨울저택과의 통신을 통해 두개의 저택이 동일한 평면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살인자의 침입 경로를 알아낸 시노자키의 증언을 통해서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두개의 저택이 다른 곳에 위치한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건물에 다른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너무 뻔했어요. 더군다나 신발자국 등을 대조하는 부분은 사족인데다가 과잉 친절이라 보이고요.
암호 트릭은 일단 일본어를 잘 모르면 풀 수 없는 트릭인데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양쪽에 공평한 암호라 생각되지는 않는다는 문제가 도드라집니다. 일단 두 저택의 힌트를 모두 알아야 풀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좋았고 "동상"이라는 힌트에서 양쪽 저택에 있는 것이 "아르마딜로"와 "바다코끼리"라는 것도 재미난 설정이었어요. 그런데 겨울저택의 힌트는 "가장 젊은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이고 이것이 "키바"라는 젊은이라는 것인데, 이 두가지 정보만으로 범인을 특정한다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키바", 즉 "어금니"의 갯수로 범인의 수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여름저택"의 동상은 아르마딜로가 아니라 어금니가 없는 그 어떤 동물이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한쪽에만 일방적으로 해당되는 암호가 과연 신빙성을 가질 수는 없을 것 같고요. 아르마딜로라는 특이한 동물의 동상이라는 것에 집중하게 해서 본질적인 의미를 흐리게 하려는 작가의 생각은 충분히 알겠지만, 이런 점에서 썩 잘 된 트릭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흔치않은 정통파 추리물로 기대하고 보기 시작했지만 생각보다는 빈약하고 얄팍한 부분이 많아서 실망스러웠습니다. 게다가 원래 설정이나 이야기전개가 너무 말도 안돼서 황당한데 결말 부분, 즉 살아남은 모두의 기억을 지운다는 등 하는 이야기는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실망스러웠고요.
나름대로 긴장감과 지적 흥분을 가져다 주는 부분은 있고 "겨울저택"과의 정보 공유가 오갈때의 두뇌싸움 등 볼만한 요소는 제법 있기 때문에 킬링타임용으로 잠깐 즐기는 수준이 딱 맞다고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7/03/19

벙어리 목격자 - 애거서 크리스티 / 원은주 : 별점 3점

벙어리 목격자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어리석은 낙천주의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 쉽게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는 게 보통이었다. - 에밀리 아룬델이 누군가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할 때의 묘사

살인의 특징은 살인자의 기질을 암시해 주기 때문에 범죄의 실마리를 잡는 데 있어 필수야. - 포와로.

마켓 베이싱의 리틀 그린 하우스에 거주하는 부유한 노부인 에밀리 아룬델은 조카들과 함께 한 부활절 연휴 때 계단에서 떨어져 다쳤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고, 애견 밥이 가지고 놀던 공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하다는걸 눈치챈 에밀리 아룬델은 포와로에게 편지를 보냈고, 무려 두 달 이 지나서야 이를 받은 포와로는 마켓 베이싱으로 향했지만 에밀리 아룬델은 이미 한 달 전에 사망했다...

몸 속 필수 영양소 중 하나인 고전 본격물 성분이 많이 부족해져서 집어든 여사님 장편입니다. 제게는 탄수화물급 영양소거든요. 바로 전 읽었던 "도서관의 살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제대로 된 고전 본격물을 선택했습니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후더닛물이더군요. "도서관의 살인"과 마찬가지로요.

포와로가 사건에 뛰어들게 되는 이유인 노부인의 의뢰 편지가 그녀가 사후 발송되었다는 도입부부터 무척 흥미롭습니다. 뒤이어 다양한 등장인물의 증언들로 진상에 접근해 가는 과정 역시 고전 본격물다운 공정함을 자랑하고요. 무엇보다도 고전 본격물의 핵심인 동기 부여와 이에 따라 용의자들이 속출하는 전개가 대단합니다. 주요 관계인인 찰스와 테레사 남매, 벨라와 타니오스 부부 모두 유산 상속에 혈안이 된 것으로 묘사되어, 누구 한 명 용의선상에서 빠지지 않는 덕분입니다. 심지어 찰스와 테레사의 어머니는 남편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은 사람이라는 설정까지 갖췄으며, 그 외 등장인물 모두 수상한건 마찬가지에요. 이미 유산을 상속받은 로슨 양이 심령술에 빠진 이상한 노처녀로 그려지는 식으로요. "도서관의 살인"에서 가장 부족했던게 바로 이겁니다. 이런게 본격물이죠!

하지만 이러한 점은 본격물이 갖춰야 할 기본 요소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탁월한건 증언과 인물 묘사가 결합되어 독자를 교묘하게 함정에 빠트리는 전개입니다. 놀랍게도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증언은 모두 진실이에요. 하지만 말을 한 사람이 워낙 수상한 탓에 독자들 모두 "이 사람 말은 못 믿겠는데?"라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뒤이은 증언들도 부정하게 되어 결국 진상에 이르지 못하게 되지요.
찰스 아룬델이 한 말이 대표적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에밀리 아룬델을 만났을 때, 그녀가 수정한 유언장을 보여주었다는 증언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모두 찰스가 돈 때문에 심한 짓도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식으로든 에밀리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유언장을 미리 보았다는 증언은 자신이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리라는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에밀리를 죽일 동기가 없다고 위장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게다가 여동생 테레사와의 다툼은 증언의 신빙성을 더욱 떨어트리고요.
이야기 전체가 이런 구성이라서 저는 함정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런게 본격물이죠!

세세한 디테일로 범인을 드러내는 점도 본격물스럽습니다. 타니오스 부인이 테레사를 따라, 하지만 보다 저렴하게 옷을 구해 입었다는 묘사와 에밀리 아룬델의 가족들에 대한 설명, 주치의 그레이너 박사가 후각을 상실했다는건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설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뭐 하나 허투르게 활용되지 않아요. 로슨양이 거울로 본 브로치는 이니셜이 반전되어 있을 것이며 그것은 아나벨라 타니오스의 약자다, 브로치는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싸져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테레사 패션을 따라하는 벨라가 서슴없이 구입했다. 벨라는 화학 교수의 딸로 인을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레이너 박사는 인 중독의 뚜렷한 징후인 입에서 나는 마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는 식으로 모두 추리에 이용되니까요. 심지어 아무 의미 없어보였던 로슨 양의 강령회 관련 증언까지도요. 그녀는 에밀리 양이 강령회 때 빛나는 심령체에 의한 "후광을 둘렀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모두가 정신나간 소리라고 치부했지만, 포와로는 그것이 '인관성 호흡'이라는 것을 간파하거든요. 이런게 본격물이죠!

트릭도 괜찮습니다. 간이 나빴던 피해자에게 인을 투여하여 간견병과 별 차이 없는 예후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건데, 굉장히 현실적이었어요. 로널드슨 의사의 자연사 확진 판정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기는 하나 에밀리가 평소 유사 증상을 오래 앓고 있던 환자라 충분히 걸어볼만 한 도박이었으니까요. 피해자가 자주 먹던 캡슐 중 하나에 투입하여 일종의 시한 장치를 만든 것도 그럴듯했고요.

또 이번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완역판이라 주장하는 판본으로 읽었는데, 확실히 번역도 한층 높은 완성도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포와로의 프랑스 어를 섞는 말버릇도 맛깔나게 잘 살려 놓았으며, 헤이스팅스와의 재담도 재미있게 그려져 있거든요. 헤이스팅스가 이렇게나 유머러스하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등장인물들을 모두 수상쩍게 그리는 묘사가 과해서 읽는 내내 짜증이 난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이게 왜 문제냐 하면, 실제 범인은 아니지만 제발 죽어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포와로의 추리가 진상에 도달하여 진범을 밝혀내기는 하는데,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심약한 타니오스 부인이 시체를 재검시하자는 포와로의 주장에 겁을 먹고 자살을 하지만, 실제 재검시를 했어도 사인을 밝히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설령 실제 사인이 밝혀졌다고 해도 타니오스 부인이 그랬다는 증거도 없고요. 로슨양이 거울을 통해서 목격한, 타니오스 부인이 계단에 장치를 설치했다는 증언도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을거에요. 마침 범인이 딱 좋게 자살했을 뿐, 제대로 범인을 옭아매었다고 보기는 여러모로 어렵습니다. 뭐 이런 점도 본격물이기도 합니다만.

하여튼,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장, 단점 모두 고전 본격물스러운 작품입니다. 저와 같이 고전 본격물 성분(?)이 부족해 지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책 뒤 소개글처럼 "훌륭한 평균작품보다도 잘못 쓴 크리스티 작품이 더 낫다" 이니까요. 이 작품은 잘 못 쓰지도 않았고요.

2010/08/14

스몰 플레인스의 성녀 - 낸시 피커드 / 한정은 : 별점 2.5점

스몰 플레인스의 성녀 - 6점
낸시 피커드 지음, 한정은 옮김/영림카디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 있습니다!

1987년 1월 23일, 미국 캔자스 주의 작은 시골 마을 스몰 플레인스에서 보안관 네이슨과 그의 아들 렉스, 패트릭이 얼어죽은 10대 소녀의 사체를 발견했다. 네이슨은 절친이자 의사인 쿠엔틴 레이놀즈에게 사체를 가져갔지만, 쿠엔틴은 신원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사체를 훼손했다.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한 판사 톰의 아들 미치 뉴퀴스트가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리자, 오히려 그는 부모에 의해 쫓기듯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되었다.

결국 마을 공동묘지에 묻힌 신원불명의 여자 사체는 어느새 소원을 성취시켜주는 ‘기적의 동정녀’로 추앙받았는데,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04년. 미치가 마을로 돌아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기 위해 행동을 개시한다....

애거서상과 매커비티상을 동시에 수상한 여성 추리작가 낸시 피커드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에드가상만 아깝게 놓쳤다고 하네요. 이러한 상을 탄 작품은 보통 기본은 해 주기에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유명한 상을 수상한 작품답게 작품 자체의 흡입력은 대단해서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번에 읽게 만드는 힘은 있습니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제프 뉴퀴스트의 정체와 같은 반전도 꽤 효과적이었고요. 미국 정통 장편 추리소설의 큰 뿌리 중 하나인, '소도시의 인간관계에서 촉발되는 사건'이라는 테마를 잘 살렸다는 것도 매력적입니다. 물론 이 작품은 협소한 인간 관계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는 탓에, 반칙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많았다는 문제가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건의 동기와 전개에서의 합리성이 부족한 탓입니다.
우선 사건의 원인이 되는 17년 전 사건에서는 판사의 아내 나딘이 새러를 눈보라치는 밖으로 내보내어 죽게 만든 것부터 문제입니다. 죽인 다음에 파 묻던가, 자신들 방공호?속에 감추던가 했으면 후환이 없었을 겁니다. 괜히 밖으로 내쫓아서 보안관 네이슨이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래서 사건이 커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지요. 네이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시체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하려 했는지도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고요. 

의도하지 않게 알아서 긴 친구들의 행동 역시 합리적이지 못한건 마찬가집니다.게다가 아무리 연고없는 처녀라고 해도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 아가씨가 사라졌는데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네요.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유야무야 넘길 일은 아니었을겁니다. 한마디로 운이 좋아서 사건이 미궁에 빠진 것이라서 추리적으로 잘 짜여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판사의 변태 성욕에 대한 묘사가 막판까지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도 반칙이고요.

그 이후, 17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의 전개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어차피 미치가 돌아와서 사건을 들쑤시게 되면 진상은 밝혀졌을 겁니다. 미치가 본 증거가 너무나 확실하고, 그 상황에서 의사 쿠엔틴이 사건을 계속 은폐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니까요.
판사 톰이 의사와 보안관을 다 쏴버렸다면 모를까, 관계자가 모두 생존해 있고 유력한 증인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당당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아왔다는 것 역시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죽은 새러가 '성녀'로 추앙받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이라던가 갑작스러운 토네이도의 습격같은 작품과 무관한 부분이 너무나 많으며, 뜬금없는 판사의 폭주에 의한 마무리와 할리퀸 로맨스같은 결말도 너무 황당하고 오버스러웠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과거의 범죄와 현재의 살인 사건이 있기는 하지만, 추리보다는 시골 마을의 사람 사는 이야기 느낌이 더 강합니다. 추리 소설이라기보다는 범죄 스릴러가 가미된 드라마에 가까와요. 때문에 추리 소설 애호가분께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05/09/17

폭스 이블 - 미네트 월터스 / 권성환 : 별점 3.5점

폭스 이블 - 8점
미네트 월터스 지음, 권성환 옮김/영림카디널

영국의 한적한, 하지만 부유한 사람들의 별장지로 알려진 시골마을 센스테드. 이곳의 유지인 로키어-폭스 가문의 장원에서 에일사 부인이 얇은 잠옷만 걸친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연사로 판단했지만, 마을 주민 사이에서는 에일사의 남편이자 장원의 주인 제임스 대령이 살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제임스 대령의 집에는 괴전화가 계속 걸려오기 시작했고, 대령은 손녀 낸시를 찾았다. 그런데 낸시는 대령의 딸이 아버지를 모르고 낳은 딸이었던 탓에, 대령이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서 몰래 입양시켰던 과거가 있었다. 그래서 낸시는 유산 상속을 거부했다. 그러나 협박이 계속되어 낸시는 결국 대령을 돕기로 결심하고, 크리스마스에 장원을 방문했다.
대령의 변호사 마크와 낸시는 힘을 합쳐 대령을 도왔고, 에일사의 죽음에 관련된 배후의 진상을 조사했지만 수수께끼의 남자 폭스 이블이 행동을 개시하는데....

앞선 미네트 월터스의 장편 2편을 읽고 주저없이 구입해서 읽게 된 작가의 3번째 장편입니다. 데뷰작 "냉동 창고"가 존 크리지 상을, 두번째 작품 "여류 조각가"가 에드가 상을, 이 작품이 골드 대거상을 수상했으니 정말 상복 많은 작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여담이지만 그동안 이 상들을 수상한 작품들은 기대를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항상 어느 정도의 재미와 수준은 갖추고 있었지요. 수상작들은 어떤 작품을 선택해도 후회는 없으리라 판단됩니다.

하여튼, 이 작품은 전작 중에서 "냉동 창고"와 같이 시골 장원을 주 무대로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 타입의 동네 사람들과의 갈등관계를 그리고 있는 점, 콩가루 집안의 내력을 묘사하는 점도 전작들과 비슷합니다. 이런 하드보일드스러운 복잡한 갈등관계의 묘사가 작가의 특기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과의 차이도 큽니다. 대표적인건 남성 주인공을 중심으로 글을 풀어나가고 있는 점입니다. 제임스 대령의 변호사 마크와 수수께끼의 악한 폭스 이블을 축으로 극이 전개되거든요. 특히나 폭스 이블이라는 인물의 묘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울러 여성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낸시는 "강한 여성"을 표방하던 그간의 작품들과 비슷한 캐릭터라 조금 단조로운 느낌은 들었습니다만, 특유의 치밀한 심리 묘사로 전작들과 다른 차별점을 가지면서 잘 그려냈다고 생각됩니다.
또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잔인하고 똑똑한 폭스 이블의 정체를  서서히 드러내는 전개도 괜찮았습니다. 전행에 맞춰 여러 단서를 하나씩 던져주면서 독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덕분입니다. 마지막의 깜짝쇼처럼 진상이 밝혀지며 반전이 연속되는 부분은 갑작스럽게 등장해서 좀 난데없기는 합니다만, 나름 괜찮은 해결 방법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기사와 인터뷰, 편지 등이 상당히 중요하고 적절하게 사용되는데, 이런 부분을 표현하는 책의 편집도 좋습니다. 기사들 중에서 "얼음 창고" 주인공 중 한명이었던 여기자 앤 카트렐이 잠깐 언급되는 것은 팬으로서 반가운 부분이었고요. 마지막으로 "우리편"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번역으로 읽으니 재미가 더 컸습니다. 솔직히 앞선 두 작품보다 조금 지루하고 단조로운 면이 있고 사건의 "충격"적인 면에서도 전작들에 미치지 못하지만 앞선 두 작품은 형편없는 번역 때문에 미네트 월터스라는 작가의 진가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거든요. 흥미와 재미가 반감되는 것은 물론이고요. 좋은 번역과 좋은 출판 기획이 얼마나 작품에 중요한 요소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책이었습니다. 가격도 적당한 편이고 재미도 있으니 읽지 않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23/05/05

수상한 레스토랑 세컨즈 - 브라이언 리 오말리 : 별점 2.5점

수상한 레스토랑 세컨즈 - 6점
브라이언 리 오말리 지음/미메시스

인기 레스토랑 '세컨즈'의 셰프 케이티는 젊고 야망넘치는 여성으로 '러크나우'에 오픈할 자신의 레스토랑 개업 준비에 골몰하면서 많은 갈등을 만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 잘못된 선택'을 되돌릴 수 있게 만드는 마법의 버섯을 발견한 케이티는 실수를 할 때마다 버섯을 먹어가며 실수를 지워나갔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세상은 이상한 비현실 세계로 바뀌고 말았다. 케이티는 버섯을 처음에 알려준 세컨즈의 터주 '리스'에게 모든걸 돌려 놓으라고 따지지만, 알고보니 이미 리스는 '러크나우'의 터주 마녀에게 힘을 빼앗겨 버린 상태였다. 러크나우에서 케이티가 마녀가 담긴 항아리를 세컨즈에 가져다 놓았던 탓이었다. 케이티는 러크나우의 마녀를 설득해서 모든걸 처음 세계로 돌려 놓는데 성공한다.


미국 만화인데 일본 풍의 모에한 캐릭터가 등장인물이라서 신기한 마음에 구입한 작품입니다. 정가 25,000원은 제법 쎄지만, 300페이지가 넘는 풀컬러 양장본이라는 특성상 더 싸게 내 놓을 수는 없었겠지요.
 
물불안가리고 즉흥적인 케이티 성격에 따라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박진감넘치는 전개, 화끈한 묘사와 모에 캐릭터의 결합이 상당한 화학 작용을 불러 일으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모에한 캐릭터들이 미국 막장 드라마같은 치정극을 벌이는 - 이미 결혼한 세계관에서 수석 셰프와 불륜을 저지르는 등 - 장면같은 독특한 부분도 재미 요소였어요. 작화와 컬러도 마음에 들며 양장본인 책의 만듦새도 아주 좋았습니다.

하지만 딱히 신선하지는 않았습니다. 집에 나의 눈에만 보이는 무언가 살고 있다? 흔하디 흔한 일본의 지박령 설정을 그대로 차용한 것입니다. 실수를 지워주는 버섯은 알고보니 또다른 세계의 나로 깨어나게 만들 뿐이었다? 널리고 널린 멀티버스, 다차원 세계관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고요. 케이티만 터주 리스를 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데, 레스토랑 스탭 헤이즐은 리스를 볼 수 없어도 느낄 수는 있고 그려낼 수 있다는 아래와 같은 설정 역시 익히 많이 보아왔던 것입니다. 
이런 류의 만화를 많이 접해보지 못했을 서구권 독자들에게는 모를까, 저에게는 그리 새롭지 않았어요.

무엇보다도 한, 두 페이지의 설득 만으로 러크나우의 마녀가 케이티를 용서하고 모든게 처음으로 돌아가는 결말은 영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02/12

황제의 코담뱃갑 - 존 딕슨 카 / 전형기 : 별점 5점

황제의 코담뱃갑 - 10점
존 딕슨 카 지음, 전형기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브는 이혼 후 거주하던 프랑스 휴양지 바로 옆 집에 사는 로스 경의 아들 토비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한 전남편 네드 애트우드가 한 밤중에 몰래 침실로 숨어든 날, 둘은 로스 경이 살해당한 직후를 목격했다. 토비를 비롯한 이웃 가족의 오해를 살까 두려웠던 이브는 이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겼다. 그러나 애트우드가 빠져나가다가 계단에서 굴렀을 때 흘렸던 코피와 로스 경이 살해될 때 만지고 있었던 코담배 케이스 파편이 잠옷에 묻어 있었던 등의 증거와 이브를 미워하는 하녀 이베트의 증언 탓에 유력한 용의자로 몰렸다. 결국 이브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모든 사실을 고백했지만, 정작 애트우드는 뇌진탕 탓에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선건 영국인 정신분석 전문의 킨로스 박사였다.

존 딕슨 카의 대표작 중 하나. 구입해서 읽은지는 오래되었지만, 얼마전 <<마녀의 은신처>>도 읽은 참에 국내 출간작 전권 리뷰를 올리고자 재차 읽게 되었습니다. - 참고로, 엘릭시르의 새 출간본은 아니고 동서문화사 판본입니다. - 역시나, 다시 읽어도 걸작이더군요. 이웃집에서 일어난 수상한 사건을 목격했다가 위기에 빠진다는건 <<이창>> 등 여러 작품에서 사용된 소재이기는 한데, 이 작품은 1942년이라는 발표 시점을 보아도 원조격인데다가 목격자가 오히려 범인으로 몰린다는 독특한 전개부터 굉장한 긴박감을 자아냅니다. 전남편과 벌인 다소 우발적인 사고, 주인을 미워하는 하녀의 돌발 행동 등이 겹쳐져 이브가 범인으로 몰리는 과정도 꽤 설득력 넘치고요. 사건 직후 피묻은 잠옷을 입고 집으로 들어왔다는건 누가 봐도 수상한 일이니까요.

킨로스 박사의 말 하나하나 모두가 논리적이며, 그의 지극히 논리적인 추론이 바탕이 된 이야기 전개가 많다는 점도 추리 애호가로서 반가왔습니다. 토비가 그날 밤 일을 고백한 이브를 추궁할 때 킨로스 박사가 그를 몰아붙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토비는 그녀가 애트우드와 침실에 있었으니 자신을 배신했다면서, 또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게 아니냐고 추궁하는데 킨로스 박사는 이 두 사건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며 토비의 입을 닥치게 만들지요. 이브를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고롱 서장을 설득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브에게는 동기가 없거든요. 고롱 서장은 로스 경이 이브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살해당했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로스 경은 그날 이미 토비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토비는 그 때문에 이브에게 전화까지 걸었습니다. 즉, 그게 무슨 비밀이건 약혼자가 이미 알고난 다음이기에 로스 경을 죽일 이유는 사라져 버리고 만 셈입니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범인을 밝혀내는 마지막 추리쇼입니다. 박사는 사람들에게 범인인줄 알았던 갈색 장갑의 정체를 먼저 알려줍니다. 그건 토비였어요. 그는 정부인 프뤼 양이 이브와의 결혼을 훼방놓는걸 막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아버지 소장품 중 하나인 드 랑발 부인 목걸이를 훔쳐서 프뤼 양에게 주려고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는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킨로스 박사는 이브가 이야기했던 사건 당일 서재에서 일어난 일 중 이브가 목격하기 전 상황은 모두 애트우드가 해 준 말에 지나지 않았으며, 암시에 빠지기 쉬운 성격이었던 이브는 이를 자기가 목격했던걸로 착각했던 거라고 설명해줍니다. 애트우드는 이미 로스 경을 살해하고 이브의 침실에 침입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로스 경이 살아있는 척 꾸민 뒤, 그 상황을 드러내는걸 가장 싫어할 이브를 통해 증언될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었던거에요. 재니스 로스 양의 말 그대로 "여자에게 나쁜 소문이 나서는 안 된다고 입을 다물게 하고, 스스로는 조금도 꺼릴 것이 없는 목격자가 실은 범인이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킨로스 박사는 먼 곳에서 본 물건을 '코담배 케이스'라고 말했다는 실수를 통해 애트우드가 범인이라는걸 알아냅니다. 코담배 케이스는 그냥 보면 회중시계와 똑같이 생겨서 첫 눈에 알아보는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마지막에 말한 뒤, 예심판사 사무실 문을 열어 범인 애트우드를 선보이는 장면 - 애트우드는 뇌진탕에서 회복한 뒤 토비가 범인이라고 지목하기 위해 억지로 찾아왔던 것 - 은 역대 추리쇼 등장 작품 중에서도 첫 손을 꼽을만한 마무리였습니다.

정확한 내용을 몰랐던, 사건 당일 로스 경이 산책을 갔다 온 이후 왜 기분이 나빴는지, 동물원에서 누군가를 왜 만났었는지가 애트우드의 동기와 이어지는 전개도 깔끔했습니다. 이를 로스 경이 형무소 관련 업무를 진행하며 만났던 재소자 얼굴을 기억했다는 과거 이야기와 절묘하게 연결시키는 덕분입니다. 로스 경은 애트우드가 전과자이자 탈주범이라는걸 알고 있어서, 자기 아들과 이브의 결혼을 방해하려는 애트우드를 쫓아내려고 경고했다가 살해당했던 것이지요. 그 외의 여러가지 추리적인 장치들과 복선들 - 사건 현장에 떨어져있던 드 랑발 부인 목걸이에 혈흔이 묻어있었던 이유, 오르골 태엽이 풀려있었던 이유, 하녀 이베트가 이브를 옭아매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 등 - 에 대한 설명도 확실합니다. 목걸이에 혈흔이 묻어있던던 건 목걸이를 훔쳐내려다 아버지가 죽은걸 알고 허둥대던 토비가 묻혔던거지요. 오르골 태엽은 그 와중에 동작해서 풀렸고요. 이베트가 이브를 잡아넣으려고 노력했던건 그녀가 프뤼 양의 친언니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수수께끼가 완벽하게 정리되기에 마지막까지 읽으면 굉장히 후련한 기분마저 느낄 수 있어요. 아울러 추리적으로는 일종의 독자에의 도전이 삽입되어 있다는 것도 특기할 만 합니다. 킨로스 박사가 이브에게 그날 밤 일어났던 일을 듣고 범인을 알아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도 그 장면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보았고, 그 장면만 알면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있다는걸 선언한 셈입니다. 실제로도 그러했고요.

다만 지금 읽기 다소 낡은 설정은 있습니다. 이브가 초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사건을 방관해 버렸던건, 약혼자 가족이 이웃집에 살고 있어서, 침실에 숨어든 전 남편을 어쩌지 못한 탓 - 들켜서 오해를 살까봐 - 이라는게 대표적입니다. 애트우드와 토비가 버젓이 바람을 피우면서 이브에게 정숙을 강요하는 행태도 그러하고요. 너무 뻔뻔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어요. 참고로, 에드보다 오히려 토비가 더 극혐이었습니다. 순진한 척을 다 하다니 알고보면 뒤에서는 다른 여자에게 돈을 요구받을 정도로 놀아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면서 자기 합리화만 하면서 이브를 차버리는 장면은 정말 기도 안 차더군요. 이브가 남자 복이 너무 없고, 남자들 유혹(?)에 너무 쉽게 빠지다는 것도 낡은 설정이고요. 또 시계처럼 생긴게 알고보니 "코담배갑"이었다는게 핵심인데, 이걸 비교적 노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는 것도 낡아보였습니다. 최근 작품이라면 이렇게까지 드러내지는 않았을거에요. 하긴, 이 작품은 아래와같이 책 표지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알려주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걸작이라는걸 부인하기 힘든 멋진 작품입니다. 이브와 킨로스 박사가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해피엔딩까지 완벽합니다. 제 별점은 5점입니다. 오컬트 분위기 전무한, 일종의 영웅담에 가까운 정통 추리물이니만큼 딕슨 카 입문자라면 이 작품부터 시작하는게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that woman opposite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는데 유튜브에 Full Movie가 올라와 있네요. 애트우드의 암시로 이브가 착각하는 장면을 어떻게 찍었을지 궁금해서 잠깐 봤더니만, 걍 말로 퉁치고 끝나서 실망했습니다. 오래전 작품이기는 하지만 연극과 다를게 없는 평면적인 구성에 그쳤더라고요. 게다가 마지막에 애트우드가 이브를 없애려고 찾아오는 장면을 삽입해서 더 영웅담처럼 각색했던데, 좋은 선택은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