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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4

Q.E.D Iff 증명종료 30 - 카토 모토히로

"Q.E.D."의 시즌 2라고 할 수 있는 "iff"의 마지막 권입니다. 

이전 권에서 토마가 가나에게 고백하길래 이번 권을 마지막으로 시리즈가 끝날 줄 알았는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Q.E.D. UNIV"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진다고 합니다. 최근의 폼은 작가의 최전성기가 지났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시리즈가 계속된다는 것은 반갑네요.

이번 권에도 언제나처럼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편은 비교적 가벼운 입시 부정 사건이고, 한 편은 살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두 편 모두 기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자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레스티지"

하버드에 합격한 가나는 브라이언 교수와 학장으로부터 입시 부정 관련 사건 조사를 의뢰받았다. 자동차 부품 회사 사장 넬리 게레로가 기부 입학을 위해 천만 달러 수표를 보냈는데, 아들 야엘이 불합격하고 자살했다며 학교를 고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학교는 수표를 받지 못했다.

넬리가 마약 카르텔로부터 생명을 위협받자, 입시 컨설턴트 시퍼가 천만 달러 수표를 학교로 보내지 않고 자신이 챙기려고 했던 것이 수표 분실 사건의 진상입니다. 그녀는 야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학교에 수표를 돌려주었지만 들통나 버리고 말았지요. 그러나 진짜 진상은 넬리가 야엘을 마약 카르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죽은 것으로 위장시켰던 것입니다.

진상은 나쁘지 않지만 과정은 영 별로입니다. 야엘의 위장 자살과 시퍼가 학교에 들키지 않고 숨어들어 수표를 반납한 일은 경찰과 학교 측 조사가 미흡한 탓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습격한 마약 카르텔을 가나가 공격해서 물리친다는 것은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시리즈 특유의 정보 제공도 기부 입학에 대해 약간 알려주고 끝날 뿐입니다. 제목의 "프레스티지"도 명예와 환상을 의미하는데,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문이 닫힐 때"

암호화폐 투자 실패로 모든 것을 잃은 간호사 허버트는 투자 회사 사장 체스터 피멜 살해 혐의로 검거되었다. 그러나 현장에는 체스터의 혈액만 낭자할 뿐, 시신은 없었다. 시신 없는 상태로 기소된 허버트의 재판이 시작되는데...

허버트가 체스터의 혈액을 어떻게 확보했는지 풀어내는 추리는 좋습니다. 안티에이징 클리닉에서 허버트와 체스터가 만났다는 것이 단서가 되거든요. 젊은 시절에 채혈했던 피를 주입하는 요법을 위해 확보했다는 것인데, 실제 미국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꽤 높습니다. 체스터 살인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한 체스터의 작전이었다는 진상도 괜찮고요.

교살한 체스터의 사체를 숨긴 방법도 앞서 나온 복선과 이어집니다. 마약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키트에 대한 복선으로, 체스터의 사체를 마약 중독 사망자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개에 헛점이 너무 많습니다. 체스터의 변호사가 노력해서 허버트를 재판정에 세웠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허버트가 유죄 판결을 받는다고 체스터의 부재로 인한 암호화폐 폭락이 멈추지도 않을 테니까요.

아무리 길거리 마약 중독자의 시신이라도, 살해당한 시신을 마약 키트로만 검사하여 매장한다는 것도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최소한 근처에 유명 투자자의 시신없는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근처 시신들은 철저하게 조사하는게 당연합니다.

허버트가 변호사를 살해하려 한 척 해서 체스터 사건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는 발상도 납득이 되지 않아요. 두 사건은 관계가 없으니까요. 변호사를 살해하려고 했다고 해서, 체스터를 죽이지 않았다는건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는 발상은 있지만,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멍이 많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키스 씬은 마음에 듭니다. 무려 80권의 연재 끝에 결국 성사된 데다가, 토마가 얼마나 괜찮은 녀석인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려진 덕분입니다.

2026/01/31

아사토호 - 니이나 사토시 / 김진아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나쓰히의 쌍둥이 동생 아오바가 나쓰히와 아키토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나쓰히의 지도 교수 후지에다가 실종되었고, 교수를 찾던 친구 아즈사도 자살했다. 다른 실종 사건이 여럿 있었으며, 이 모든 사건은 '아사토호'라는 책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낸 나쓰히는 다시 재회한 아키토와 함께 '아사토호'의 정체에 대해 찾아 나섰다. 이 모든건 사람을 하나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천과 관련이 있었다...

신예 작가 니이나 사토시의 장편 소설입니다. 미스터리 호러 장르물이지요.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펼쳐져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린 시절, 나쓰히와 아키토 앞에서 아오바가 신비한 천에 의해 사라진 뒤, 둘 말고는 아무도 아오바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 대학생이 된 나쓰히의 지도교수 후지에다의 실종과 교수를 찾던 아즈사의 기묘한 자살, 이 모든 것과 얽힌 책 '아사토호'에 관련된 수수께끼가 이어지는데 손을 떼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나쓰히와 아키토가 여러 자료를 토대로 아사토호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은 한 편의 추리 소설을 방불케합니다. 아사토호를 발견했다고 주장한 마쓰무라의 자서전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마쓰무라의 산장 위치를 추적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아키토는 기록의 증기 기관차에 탔던 시간과 버스를 탄 거리를 토대로 대략의 위치를 특정해내는 데 성공하고, 그 장소에서 결국 기요하라 병원까지 이어지는 단서들을 수집해 내어 진상에 도달하게 되니까요.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아사토호'에 대한 상세한 설정들도 굉장히 설득력 높습니다. 저자가 실제로 문학사 전공인 덕분이겠지요. 정말로 이런 책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연구자가 연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실감납니다.

추리적으로는 그 외에도 괜찮은 부분이 제법 많아요. 아키토가 영매사로서 선보이는 짤막한 에피소드처럼요. 일종의 콜드 리딩, 사전 답사와 의뢰인의 현황—신혼부부가 굳이 교외에 있는 단독 주택을 산 이유는?—을 토대로 추리를 통해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하지요.

호러 장르물로서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아즈사가 남긴 논문이 유서처럼 이어지는 장면이라던가, 후지에다 교수의 아내 미나미의 등장, 그리고 나쓰히가 사라지고 아오바가 나타난 시점에서 '아사토호'라는 책이 고전 걸작으로 널리 퍼졌고 결말까지 달라진 - 원래는 온나니노미야가 추녀였다는 한심한 결말이었는데, 아오바처럼 얼굴에 큰 상처가 있었다는 결말로 - 세계관으로 전환되는 부분 등은 꽤 섬찟했습니다.

모든 건 앞뒤가 딱 맞게 말이 되는 패턴이고, 이런 패턴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에는 반드시 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쓰히의 생각이 이 모든 것의 원인인 '천'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였기 때문이라는 진상도 잘 풀어냈습니다. 단순 괴기현상으로 풀어낸 게 아니라,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고 말이 되는 설정을 집어넣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 해요. 나쓰히는 아오바와 아키토의 환상 속 존재였다는 진상과 이에 따른 시점 변화도 적절했고요.

하지만 단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천이, 천을 함께 본 사람들이 원하고 빠져드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데, 이야기의 결말을 잘 설명하지는 못하거든요.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아키토가 일으킨 사고로 크게 다쳐 흉터가 생긴 아오바가 상처 없는 나쓰히로 거듭난 건 해피엔딩입니다. 그런데 굳이 아오바에 대해 나쓰히와 아키토가 이상한 기억을 공유하고, 새롭게 추적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아즈사가 원한 건 연구자로서의 성공이었는데, 천이 심어준 건 좌절감이었고, 그녀는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성립한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말이 되는 건 원했던 후지에다 교수를 차지한 미나미 이야기뿐입니다.

천을 본 사람들이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일종의 다중 우주 세계관이라서 하나의 우주에 천을 본 사람들이 여럿 얽힌다는 것도 이상했어요. 하나의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들이 개입하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니까요. '천'이 만든 이야기에서 '천'의 진상을 밝히는 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도요. 기껏 꿈 속에 데리고 왔는데, 이게 꿈이라는걸 밝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탓입니다.

마지막으로 천의 정체가 밝혀진 뒤의 분량은 많이 길고 애매했습니다. 아오바가 천과 일체화되어 죽음을 선택하려 한다는 장면이 특히 길었어요. 감정 과잉이라 여겨지기도 했고요. 이런 부분을 조금 더 정리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를 들자면, "메두사"처럼 환상은 환상처럼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보실 만한 작품으로 추천드립니다.

2025/04/11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권영주 : 별점 4점

거짓과 정전 - 8점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SF 대상을 수상했던 떠오르는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인 "거짓과 정전" 외에도 "마술사", "시간의 문", "한 줄기 빛", "무지카 문다나", "마지막 불량배" 등 현실과 환상, 과학과 감성이 절묘하게 섞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SF적 설정과 기발한 아이디어와 만나 매우 신선한 재미를 준다는 점입니다. 시간 여행을 마술 무대와 연결한 "마술사"부터 그러합니다. 마술에 대해 현실적이며 설득력있게 묘사하다가, 시간을 넘나드는 마술을 '타임머신'과 결합시켜 의외의 결말로 이끄는 솜씨가 정말 탁월합니다.

유행이 사라진 세상에서 유행의 의미를 되짚는 "마지막 불량배", 과거로 정보를 보내 세계를 조정하는 냉전 시대의 첩보극 "거짓과 정전"도 모두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품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불량배"는 유행과 취향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어,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소비에 대해 많은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예전처럼 하나의 앨범도 신중하게 고민하고 구입한 뒤, 그 앨범을 반복해 들으며 취향을 만들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그런 고민없이 모든걸 쉽게 소비하는 세상이 되어 '취향'이라는게 사라지는 세상이 되었다는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거든요. 지금의 취향은 내가 아니라 인터넷이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SF 외에도, 일상 속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들도 돋보입니다. "한 줄기 빛"은 아버지가 남긴 경주마의 계보를 따라가며 자아를 발견하는 성장물인데, “서러브레드가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이유는 생명의 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라는 문장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깁니다.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안도현 시인의 시 -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무지카 문다나"에서는 음악이 화폐인 섬을 배경으로,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감성적으로 풀어냅니다. 다이가의 아버지는 훌륭한 음악(다이가)을 듣기 위해 자신의 최고 걸작을 남겼지만, 다이가를 들은 뒤에는 음악을 포기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이가는, 스스로 '다이가'를 듣기 위해 포기했던 음악을 다시 시작할걸 결심하고요. 음악을 포기한 다이가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면 음악을 다시 시작하리라 여겼던 아버지의 배려(?), 그리고 미워했던 아버지의 속셈을 알면서도 속는 다이가의 모습이 짠합니다. 이처럼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밀도 높게 다루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도 뛰어납니다. "마술사"에서 시간여행은 실제로 일어났는지, "한 줄기 빛"에서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졌는지, 템페스트, 레티시아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등을 따라가면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추리적인 요소도 흥미롭습니다. "시간의 문"에서 오펜하임이 1932년 7월 31일, 나치당에 투표했을지?를 물어보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전날밤 오펜하임은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는 켄타우루스 자리를 보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독일 본토로 돌아가 투표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건 교묘한 전개 능력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결합되어 의외의 결론으로 향하는 "거짓과 정전" 처럼요. 작품은 엥겔스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바로 다음에 80년대 CIA 모스크바 지국 정보원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결국 두 이야기가 결합되며 마무리되는데 기발하고 교묘하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수록된 모든 작품이 동일한 수준은 아닙니다. "시간의 문"은 우화에 가까운 작품으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개나 반전이 평이해 다소 뻔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또한 SF적 설정으로 보자면, "거짓과 정전"을 제외하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거나 단지 상징적인 장치로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의 문"에서의 기억 조작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우화적 도구에 가까우며, 인물의 존재가 사라지는 설정도 설득력 있는 논리로 뒷받침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몇 명쾌하지 않은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술사"에서 정말 타임머신을 만들었는지, 시간여행의 모순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거짓과 정전"의 '정전의 수호자'들이 역사 수정을 방지한다는 진상도 방법적으로는 잘 모르겠고, 설정도 과거 "타임캅"류의 타임 패러독스 방지물과 별다르지 않아서 시시했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SF적인 상상력과 서정적 감성이 잘 결합된 작품들입니다. 일부 아쉬운 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몰입감 있고, 인상적인 독서 경험을 선사합니다. 아직 읽어보시지 않은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1/31

사라지는 아들 - 안도 요시아키 / 오정화 : 별점 2점

사라지는 아들 - 4점
안도 요시아키 지음, 오정화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가미 호수 가족 여행 중 아들 케이스케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말했다. 아들과 최면 치료를 받으러 간 가즈오는, 케이스케가 33년 전 사가미 호수에서 살해당했던 '오이카와'라는걸 알게 되었다. 

알 수 없는 힘으로 33년 전, 사건 직전으로 돌아간 가즈오는 오이카와 사건이 일어나는걸 막았다. 그러나 다시 현재로 돌아온 뒤, 아들 케이스케가 태어나지도 않은 현실에 좌절했다. 오이카와가 죽지 않으면, 케이스케는 태어나지 못할 운명이었다...

타임 슬립, 즉 시간 여행과 환생이라는 소재를 결합하여, 한 가족 관계의 수수께끼와 33년 전 사건의 진상을 풀어나가는 작품. 주인공 가즈오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33년 전의 사건을 풀어나가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장점이라면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세 번에 걸친 시간 여행을 통해 사쿠마가 아니라 센다가 진범이라는 진상이 드러나고, 후미요의 증언에 의해 센다가 처벌받은 뒤 통해 가족이 다시 회복되는 결말까지 잘 짜여져 있습니다. 

가즈오의 두 가지 딜레마도 흥미를 더해줍니다. 첫 번째는 아들 케이스케는 오이카와의 환생이고, 가즈오는 범인 사쿠마의 환생이라고 믿게 된 상태에서 '전생의 내가 죽인 사람이 환상한 뒤, 내가 환생한 그 사람의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이카와가 살해당하지만 그를 살리면 아들 케이스케가 태어나지 못하는데 그를 살릴 것인가?'라는 것이다. 두 번째 딜레마는 타임 패러독스로도 꽤 그럴듯한 부분이었어요.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를 바꾸고 현재로 돌아오면, 역사와 기억이 다시 쓰여져서 기억이 사라지고 만다는 설정도 괜찮았습니다.

또한, 33년 전 당대의 배경을 생생하게 재현한 점도 눈에 띕니다. 견직물 공장의 공정은 물론, 하치오지 특산물인 넥타이 직물을 둘러 싸고 벌어졌던, 미국과 일본의 섬유 협상 탓에 어려움에 처한 공장들 분위기가 생생합니다.
소니 트리니트론 텔레비젼, 아이돌 야마구치 모모에, 세이코의 로드매틱 시계 등 소품들도 잘 그려지고 있는데, 특히 자동차들에 대한 언급이 상세합니다. 사쿠마는 히노 자동차의 콘테사, 오이카와는 닛산 스카이라인(원래 GT-R을 가지고 있었다), 센다는 토요타 크라운을 탄다는 식으로요. 그런데 차종과 인물을 잘 배치한 것 같아서 재미있었어요. 약삭빠르고 치고 빠지는데 능한 사쿠마는 소형차이자 레이싱카로도 진화했던 콘테사가, 흑막이자 거물 센다에게는 중후한 토요타 크라운이 잘 어울리니까요. 오이카와가 연인 후미요의 빚을 갚기 위해 차를 GT-R에서 스카이라인으로 바꿨다는건 돈의 흐름을 알려주는 중요한 설정이기도 하지만, 차종만큼은 고집한 점에서 뭔가 남자의 자존심같은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오이카와는 정말 한 우물만 파는 우직한 남자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가즈오가 33년 전에는 통용되지 않는 지폐를 가지고 있고,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술과 상표로 만들어진 유니클로 점퍼와 나이키 신발로 오이카와에게 추궁을 받으며, 스마트 폰을 들켜 카메라로 얼버무리는 등 미래에서 와서 겪는 고초도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설정이 정교하지 못한건 단점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초반에 가즈오가 오이카와를 살해했다는 꿈 때문에, 가즈오는 사쿠마의 환생인 것처럼 끌고 가지만 알고보니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가즈오는 사쿠마는 물론, 오이카와 살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게 진상이지요. 이는 앞서의 딜레마 - 나는 살인범의 환생이고, 아들은 내가 죽인 피해자의 환생 - 로 흥미를 주기 위해, 억지스럽게 설정을 집어 넣은 느낌입니다. 가즈오가 이런 꿈을 꾼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으며 대충 수습하는 전개 역시 영 별로였어요.

추리적으로도 별로입니다. 사쿠마가 진범이 아니고 센다가 악인이었다는건 꽤 이른 시간에 눈치챌 수 있을 뿐더러, 사쿠마와 센다의 관계, 센다의 범행 및 동기가 충분히 설득력 있게 묘사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우선 센다가 사가미 호수에서 오이카와를 살해한건 완전 범죄를 노렸을 텐데, 그 자리에 후미요가 있었던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둘이서만 만났어야 했습니다.

또 센다가 오이카와를 살해할 정도로 후미요를 가지고 싶었다면, 범행 후 그녀와 결혼하거나 살림을 합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흥미와 재미를 위해서라면 후미요와 센다가 합친 미래가 훨씬 나았을 겁니다. 가즈오에게 센다가 '삼촌'이 아니라 '아버지'로 인식되어 있다면 극적인 효과가 배가되었을 테니까요.
같은 이유로 오이카와가 친부라는걸 가즈오가 진작에 눈치챘다면, 앞서 두 번째 딜레마가 더 강하게 와 닿았을겁니다. 이런 부분의 전개는 여러모로 아쉽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흔해빠진 시간 여행물이지만, 흥미로운 소재들을 잘 엮어서 소소한 재미를 주기는 합니다. 그러나 핵심 설정 곳곳이 설명이 부족하고 오류가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2025/01/24

가을비 이야기 - 기시 유스케 / 이선희 : 별점 1.5점

가을비 이야기 - 4점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비채

'현대 호러의 일인자 기시 유스케, 작품 하나하나에 들이는 공이 커서 과작(寡作)으로 유명한 그가 오랜만에 신작 《가을비 이야기》를 들고 찾아왔다. 비가 내리는 가을의 스산한 날씨를 배경으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이 작품은 인간의 무기력과 절망감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며 공포를 극대화한 기담집이다.
호러에 미스터리 기법을 절묘하게 접목시킨 작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1990년대 이후 일본 호러소설계를 이끌고 있는 일인자 자리에 오른 기시 유스케가, 이번에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괴로워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찾아온 것이다. 일상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네 가지 공포담은 인간 근원의 감정을 건드리며 읽는 이로 하여금 좌절과 절망감, 그리고 무력감을 느끼게 하면서 진정한 공포를 선사한다.'
는 책 소갯글을 보고 집어든 작품.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 소갯글에서는 공포, 호러 소설로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를 느낄 만한 요소나 의외성이 전무한 탓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작가 명성만 놓고 보면 "엠브리오 기담" 정도의 결과물일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의 소재, 내용들도 "백조의 노래" 외에는 특별히 눈에 뜨이지 않았습니다. 완성도도 그닥이라 좋은 점수는 못 주겠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기시 유스케의 단편들 - "도깨비불의 집", "미스터리 클락" - 은 대체로 실망스러웠는데, 이 책도 역시나군요. 앞으로 기시 유스케 단편은 읽지 말아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귀의 논"

아오타는 자기가 전생에 저지른 죄 때문에 사랑을 갈구하지만, 얻지는 못하는 아귀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미하루는 그 말을 들은 뒤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미하루와 아오타가 나누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미하루가 고백을 끝낸 아오타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걸 좀 더 극적으로 표현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무섭지도 않고 의외의 반전도 없는 짤막한 소품에 불과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푸가"

작가 아오야마는 자다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로 이동하는 경험을 반복했다. 병원 의사는 마쓰나가에게 '푸가(해리성 전주)'라는 말을 꺼냈다. 자살 명소 수해로 이동하는 등,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오야마는 영능력자에게 부탁해 침실에 강력한 결계를 쳤다. 그러나 결계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는 침실에서 대량의 물을 남기고 사라졌다. 편집자 마쓰나미는 얼마 후, 아오야마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다. 침실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침대 안으로 이동했던 것이었다...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가 떠오르는 작품. 에메의 작품에서는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약의 부작용으로 벽에 갇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자면서 순간 이동을 하던 주인공이 결계 탓에 방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침대 속에 갇혀 죽게 됩니다. 특별한 이유로 이동을 못해서 중간에 갇힌다는 점에서 비슷하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면서도 짧았던 에메의 작품이 저는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이 작품은 아오야마 시점의 순간 이동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너무 길거든요. 읽다보면 비슷한 내용이라 지루해집니다.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의 공포심을 잘 표현하지 못한 탓입니다. 거미를 테마로 한 결계 등의 이야기도 지나치게 장황하며, 거미 꿈은 정말이지 나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나오더라도 이렇게 길게 쓸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반면 순간 이동에 대한 설명은 제목의 '푸가' 뿐인데 극히 부족하고요. 분량 조절에 실패한 느낌이에요.

게다가 반전 소재로 사용된 물침대는 너무 생뚱맞았어요. 물침대가 그리 흔하게 사용되는 침구는 아니니까요. 순간 이동이라는 설정을 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억지 발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보다는 함께 자던 동거인 아키 몸 속으로 들어가버렸다는게 더 호러블하지 않았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백조의 노래"

인기없는 소설가 오니시 레이분은 대부호 사가로부터 미쓰코 존스라는 무명 가수의 전기를 써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녀는 인간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창법으로 부른 레코드를 남겼다.

탐정 로스의 보고를 통해, 미쓰코 존스의 창법은 사막에서 노래하다가 콕시디오이데스 이미티스라는 풍토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게 밝혀졌다. 이 병이 성대를 찢어 얇게 만들고, 분할 진동하게 만든 것이었다.

환상이 깨진 사가에게 로스는 자신도 이 병에 걸렸다고 보고했고, 레이분은 의뢰를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오디오와 음악에 대한 전문가적인 설명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콘덴서 스피커는 놀라운 기술이지만 저음이 나지 않는 단점이 있다거나, 스테레오 녹음은 3D 영화 같아서 진기함을 자랑하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등 여러가지 내용은 무척 흥미로왔습니다. 소개된 노래들 - 메리 캠프가 무른 마농 레스코의 '홀로 외로이 버려져', 미쓰코 존스가 부른 라크메 중 '종의 노래' -도 실제로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고요. (아래와 같습니다)

전설적인 가수의 창법의 비결이 불치의 풍토병이라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마구'를 던지는 투수의 비법이 제어할 수 없는 손가락 떨림이었다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마구"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궁극의 비법을 손에 넣었지만, 짧은 영광만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앞서의 오디오, 음악에 대한 상세 설명에 비하면, 풍토병에 대한 설명과 설정은 그리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반전을 위한 억지 설정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쿠리 상"

2003년 11월 28일, 대형 사고를 쳐서 자살을 결심한 열두 살 다쿠야에게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친구 하루토가 함께 죽자며 어둠 버전의 고쿠리상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 주술은 소원을 빈 네 명 중 세 명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주지만, 한 명의 생명을 앗아간다고 했다. 다쿠야와 하루토는 친구 가에데와 신이치를 끌어들여 고쿠리상을 불러내는 데 성공했고, 숨을 거둔 하루토 외 세 명은 고쿠리상의 조언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11월 22일, 성공한 변호사가 된 다쿠야 앞에 주간지 기자 노구치가 나타나 18년 전 하루토의 돌연사, 가에데의 집 전소와 가족의 죽음 및 다쿠야가 저질렀던 사건을 언급하고 돈을 요구했다. 충동적으로 노구치를 살해하고 다급해진 다쿠야는 다시 한 번 고쿠리상을 부르기로 결심하고 가에데와 신이치 등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 아오모리현 도와다시의 쓰타나나누마로 가라는 답을 받은 다쿠야는 그곳으로 향하는데...

결말에서 밝혀진 사실은 이 주술이 소원을 빈 사람들에게 안락사를 선사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쿠야는 쓰타나나누마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동한 뒤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작품은 명확한 주술의 조건과 이를 불러낸 존재에 의한 저주와 공포가 필수입니다. 고전 걸작인 스즈키 코지의 "링"처럼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 어둠 버전의 고쿠리상은 조건, 목적은 물론 주술을 일으키는 존재에 대한 설명과 주술 결과 모두 애매하게 묘사되어 혼란스럽고, 전혀 무섭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안락사를 선사하는 주술이었다면, 18년 전에는 왜 그렇게 하지 않은걸까요? 

마지막 순간에 이미 사망한 하루토와의 대화도 무슨 맥락으로 등장하는지 모르겠고, 쓰타나나누마의 경치를 지나치게 강조한 점도 뭐지 싶어요. 아오모리 현에서 돈이라도 받았나... 별점은 1.5점입니다. 무섭지도 않고,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으니 점수를 줄래야 줄 수가 없네요.

2024/09/20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 마사키 도시카 / 이정민 : 별점 2.5점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 6점
마사키 도시카 지음, 이정민 옮김/모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5년 전,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다이키는 새벽에 경찰을 피해 도주하다가 차에 치어 사망했다. 탈주한 연쇄 살인범 하야시 류이치로 오인되었기 때문인데, 착실한 우등생이었던 다이키가 왜 부모 몰래 새벽에 집을 나갔었는지, 왜 경찰을 피해 도주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이키의 가족이 사건 후 붕괴해버린 15년 뒤, 고미네 아카리가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인 불륜남 모모이 다쓰히코는 사건 발생 직후 실종되었다. 모모이의 어머니는 며느리 이누코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손자를 유괴하려고 시도했다.
한편 고미네 아카리 살인사건 수사본부에 소속된 신입 형사 가쿠토는 괴짜로 유명한 고참 형사 미쓰야 슈헤이와 한 팀이 되어 사건 수사에 나섰다. 미쓰야 슈헤이는 고미네 사건이 15년 전 다이키의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걸 직감했고, 끈질긴 수사를 통해 고미네 사건의 진범이 다이키의 모친 이즈미라는걸 밝혀내어 체포하였다. 이즈미는 이누코를 다이키의 며느리로, 이누코의 아이 린타를 다이키의 환생이라 여겨 다쓰히코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리고 모모이 이누코는 15년 전 다이키와 만남을 가졌고, 어머니의 재혼 상대이자 자신을 겁탈하려 했던 료를 죽여달라고 다이키에게 부탁했었다고 고백했다.

잘 모르는 일본 작가의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의 책장"에서 "결말이 충격적인 미스터리 작품"으로 소개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재미는 있더군요. 일단 사건이 흥미로우니까요. "다이키가 왜 도망갔는지?"를 비중있게 드러내지 않다가, 모모이 사건을 통해 이를 서서히 드러내는게 좋았습니다. 다이키가 도망갔던 이유도 그럴싸합니다. 다이키는 그날 료(로 착각한 이누코가 모친의 지인)를 살해하고 사체를 숨겼기 때문입니다. 그런 큰 범행을 저질렀으니, 경찰의 검문에 도망갈 수 밖에 없었겠지요. 이는 다이키가 버렸던 아버지 영업용 차량의 복제 열쇠, 2년 뒤 발견된 백골 사체 등으로 약간이나마 단서가 제공되기도 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으로 인한 다이키 가족의 붕괴도 서늘함을 전해줍니다. 여성 작가답게 두 명의 어머니 - 다이키의 모친 이즈미, 다쓰히코의 모친 지에 - 의 심리 묘사가 발군이라 더욱 와 닿았습니다. 아들을 잃고 미쳐가는 과정이 섬뜩할 정도로 상세하게 그려지거든요. 사건을 이용하려 하고,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비난하는 여러 주변 인물들도 잘 묘사되고 있고요.

하지만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고미네 아카리 사건 진상은 추리가 개입될 여지가 전무한 탓입니다. 진범인 이즈미가 이누코의 아들 린타를 데리고 사라졌기 때문에 밝혀졌을 뿐이니까요. 경찰 수사만으로는 진범을 이렇게 빨리 찾아내는건 불가능했을겁니다. 이즈미가 린타를 데리고 사라질 이유도 딱히 없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급하게 마무리 짓기 위한 목적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이키가 이누코를 노리던 료(로 잘못 안 사람)를 살해한건 동기의 설득력이 낮습니다.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모범생이 살인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여서 범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솔직히 말도 안됩니다. 차라리 이누코와 깊은 사이였기 때문에 복수의 심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게 나았을겁니다. 물론 그랬다면 이누코가 과거를 그렇게 쉽게 잊어버린채 다쓰히코같은 쓰레기와 결혼해서 맹하고 얼빠진 채로 생활한다는 현재와 잘 이어지지 않았겠지만, 최소한 더 말은 됐겠지요.
이즈미가 다이키의 환생을 믿고, 이누코를 며느리로 여기며 반 쯤은 환상과 착각 속에서 살아가다가 다쓰히코와 불륜녀를 살해했다는 동기도 설득력이 낮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추리할만한 그 어떤 단서도 제공되지 않고요.

불필요한 묘사와 설정도 너무 많습니다. 구사나기의 약혼자이자 결혼 사기범 사토 고타가 다이키가 료로 착각해 살해한 피해자였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다이키가 사망 후에도 료가 살아있어서, 료는 이누코의 어머니가 죽였다고 이누코와 독자를 착각하게 만드는 장치에 불과합니다. 이야기를 복잡하게 꼬아놓으려는 의도만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미쓰야 슈헤이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살해당했던 과거가 있어서 마음의 병이 생겼다, 순간 기억의 소유자다 등의 설정도 과했습니다. 캐릭터 만들기의 일환인데, 이야기에 잘 녹아들지 못했습니다.
묘사에서 화자를 너무 많이 바꾸는 것도 별로였어요. 이야기와 아무 상관없는 다이키의 누나 사라의 심리 묘사처럼 아예 불필요한 내용도 많았고요.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만큼 결말이 충격적이었냐?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긴, 거기 소개된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기는 하네요. 낚인 제가 잘못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도 많지만 재미는 있었던 만큼, 후속작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2024/09/13

피가 흐르는 곳에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5점

피가 흐르는 곳에 - 6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스티브 킹의 중편집. 세 편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빌 호지스 3부작' 시리즈 후속편이 수록되어 있다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를 제외한 두 편은 순문학에 가깝습니다. 순문학 성향이 두드러지는 스티븐 킹의 말년 작품답네요. 말년 작품이라도 왕년의 화끈함, 끔찍한,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보여준 작품들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런 느낌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고, 완성도도 높습니다. 다만 '호러의 제왕'이라는 이름값에 걸맞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해리건 씨의 전화기"
초등학생 크레이그는 똑똑했던 덕분에 마을 굴지의 대부호 헤리건 씨에게 책을 읽어 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뒤, 때마다 헤리건 씨에게 복권을 선물받았다. 마침 선물받은 복권이 당첨된 어느 해,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에게 아이폰을 사 주었다. 해리건 씨는 평소 이런 제품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금새 아이폰에 푹 빠졌다. 그리고 헤리건 씨가 노환으로 사망한 뒤,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 관에 아이폰을 몰래 넣어 두었다.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크레이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케니 얀코에 대해 헤리건 씨의 전화기에 넋두리를 늘어놓은 날, 케니 얀코가 자살했다는걸 알게 되는데...

스마트폰이 처음 도입되었던, 아이폰이 첫 출시되었던 시대에서 시작되는 작품. 
핵심은 해리건 씨입니다. 나이는 많지만 똑똑하고, 자신의 눈 밖에 난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지만 자기 사람에게는 굉장히 따뜻한 괴팍한 노인을 생생하게 잘 그리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 대한 헤리건 씨의 탁월한 식견 등은 그를 단순한 노인 이상으로 구체화합니다. 여러모로 "재벌집 막내아들"이 떠올랐습니다. 주인공은 크레이그(진도준)이지만, 해리건 씨(진양철 회장)에게 눈길이 더 간다는 점과, 현재 시각으로 과거 - 여기서는 스마트폰 도입 - 의 경제 효과를 예측하고 있다는 점이 비슷합니다. 실제로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이런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큰 돈을 벌었겠지지요. 스티븐 킹이 과연 애플과 아마존 주식을 샀을지 궁금하네요.
조숙하고 똑똑한 크레이그, 그리고 크레이그의 아버지라던가 케니 얀코, 하긴슨 선생님 등 주변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크레이그가 초등학생에서 시작하여 대학 졸업 후 직장인이 될 때까지 겪는 성장기로도 볼 만 했고요.

그러나 특별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습니다. 크레이그와 해리건 씨의 우정(?)과 크레이그의 성장기를 제외하고는 무덤 속 해리건 씨에게 전화를 거는게 거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건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설명되지 않아요. 이래서야 단순한 저주나 주술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으니까요. 매개체가 밀짚인형이나 생닭같은게 아니라 아이폰이라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작가 후기를 보면 '관에 휴대폰이 들어갔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작품이라는데, 그 아이디어를 잘 살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크레이그가 옛 은사를 위한 복수를 마치고 전화기를 버리는 결말도 시시했습니다. 옛날 스티븐 킹이라면 좀 더 화끈하게 달려주었을텐데 말이지요. 스티븐 킹도 나이가 들면서 문학적이면서도 은근하고, 다소 애매한 결말을 즐기는데 이 작품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글솜씨 하나는 정말 대단하다, 일가를 이루었다 싶은 생각은 듭니다. 다만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척의 일생"
3막 : 고마왔어요, 척!
자연재해로 미국은 서서히 멸망해가고 있었다. 마틴을 비롯한 주민들 눈 앞에는 찰스 크란츠의 은퇴를 알리는 광고만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최후가 다가왔다....

2막 : 길거리 공연
길거리 드럼 연주가 제러드 프랑크의 연주에 맞춰 시작된 척의 춤은 구경꾼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제니스도 합류하여 대단한 공연을 마쳤고, 척은 호텔로 가면서 왜 춤을 추기 시작했는지를 떠올렸다.

1막 :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척의 할아버지는 다락방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본 그대로 할머니 할아버지가 세상을 뜬 다음에, 척은 잠겨진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자신이 병원에 누워 있는 환영을 보았다. 하지만 척은 그를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열심히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3막이자 맨 첫 번째 이야기에서 마틴과 주민들이 사는 곳은 척의 인생입니다. 불치병에 걸린 척이 죽어 가자, 그가 은퇴한다는(죽는다는) 광고가 계속 표시되었고 숨을 거두자 세계가 멸망하게 된 겁니다. 척의 안에 담겨있는 '무수히 많은 것들'은 바로 이 세계였다고 해도 되겠지요. 사실 뻔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워낙 글을 잘 써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3막에서 서서히 세계가 멸망해가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지만, 일상 속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한 때를 묘사한 2막이 가장 좋았어요. 후기를 보면 크리스토퍼 워켄의 팻 보이 슬림 뮤직비디오를 보고 영감을 얻은 듯 한데, 저는 "패리스 뷸러의 해방"의 거리 퍼레이드 장면이 떠오르더군요.
 

그러나 척이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해 주는 2막, 그리고 척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1막은 문학적인 성취와는 별도로 사족에 가깝습니다. 3막만으로도 이야기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1막은 킹 스스로가 후기에서 1년 뒤에 덧붙였다고 하니 사족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이럴 바에야 3막의 이야기에 가필하여 짧지만 반전이 있는 이야기로 만드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독특한 디스토피아 세계관과 마틴의 눈 앞에 척의 광고만 떠오르는 묘사는 나름 공포스러웠는데, 이를 잘 살리지 못한 느낌이거든요. 설명도 많이 부족했고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잘 살리고, 척 내면 세계라는걸 짧지만 강렬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쓰는게 좋았을 것 같네요.
현재의 결과물은 장르 문학보다는 순문학에 가까와서 평가하기 어려운데,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피가 흐르는 곳에"
파인더스 키퍼스의 탐정 홀리 기브니는 뉴스를 보다가 캐스터 채트 온도스키가 테러를 저지른 범인이라는걸 알아챘다. 홀리는 전직 경찰 벨 씨와 벨 씨 손자의 협조로 온도스키가 모습을 바꿔가며 저질렀던 오래전부터의 사건들 증거를 확보했다. 온도스키를 만나 살해할 계획을 세운 홀리는 파인더스 키퍼스 사무실에서 대결을 준비했지만, 제롬과 바버라의 등장으로 계획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미스터 메르세데스" 시리즈 후속작 중편. 빌 호지스 사후 파인더스 키퍼스를 운영하게 된 홀리 기브니가 주인공입니다. 제롬과 바버라 등 전작의 주요 등장인물도 건재합니다.
수록작 중 유일한 범죄 호러 스릴러물로 체트 온도스키의 정체를 파헤치는 과정은 흥미진진한 수사물로 손색이 없으며, 그가 마음대로 모습을 바꿔가며 오랫동안 살아온 '괴물'이라는 설정은 일종의 크리쳐 호러물을 연상케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언급되는, 사람의 얼굴은 몇 가지 타입밖에 없다는 이론도 재미있었습니다. 홀리의 조력자 벨 씨가 탁월한 그림 실력을 갖춘 전직 경찰 몽타주 작성 전문가였고, 그의 손자는 음악 전문가로 성문 분석이 가능하다는 설정도 좋았고요. 온도스키가 과거부터 모습을 바꿔가며 암약했다라는 걸 과학적으로 드러내는 좋은 장치였어요. 호러와 과학 수사가 절묘하게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습도 바꿀 수 있고, 빠른 속도를 지닌 온도스키가 고작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진 정도로 죽어 버렸다는 결말은 맥빠집니다. 홀리가 이를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고는해도, 이러한 괴물 상대로는 약해보였기 때문입니다.제롬과 바버라가 사건에 휩쓸리는 전개도 좀 억지스러웠고요. 그래서 읽는 재미는 좋지만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영문학과 교수 드류는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장편 소설을 완성하고자 아버지의 오두막 집에 틀어박혔다. 집필 중 심한 감기에 걸린 상태에서 폭풍이 몰아쳐 오두막집에 고립된 드류는, 자신이 구해준 쥐가 소설 완성을 가지고 거래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쥐는 소설 완성과 동시에 드류의 멘토 앨이 죽을거라고 말했고, 드류는 거래에 응했다...

소설을 완성하는데 작가들이 문장과 단어 하나 가지고 얼마나 머리를 싸매는지를 재미있으면서도 실감나게 풀어낸 작품. 드류가 태풍으로 오두막집에 고립되었는데, 아프기까지 해서 위기에 처하는 상황도 그럴듯 했습니다.

그러나 환상인지 모를 쥐(악마)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거래를 한다는 건 다소 뻔했습니다. 특히 그 거래가 일종의 사기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요. 이런 류 작품들은 보통 비슷한 설정을 가지고 있는 탓입니다. 제 졸작 "계약은 충실하게"도 같은 이야기였지요.
앨이 죽은 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지, 그래도 소설 완성의 기쁨이 더 큰 것인지 잘 모를 다소 애매한 결말도 아쉬웠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최근 킹의 스타일이긴 하지만, 악마와의 거래가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좀 더 화끈한 맛이나 반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8/17

계간 미스터리 2024.여름호 - 별점 2점

계간 미스터리 2024.여름호 - 4점
최희주 외 지음/나비클럽

구독 중인 서비스 '밀리의 서재'에 올라와 있기에 봄 호에 이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수록 단편들이 대체로 호러 성향을 띄는게 특징입니다. 더운 여름에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뻔한 설정과 전개를 답습하고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합니다. 좀 더 신선한 발상과 반전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면 훨씬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딥페이크 업체 추적기
실제 있던 사건을 재구성한 논픽션입니다. 텔레그램을 통해 사진, 동영상 딥페이크 제작을 요청하면 건당 돈을 받고 결과물을 보내주며, 심지어는 업체의 API를 연결하여 직접 생성할 수도 있는 현실을 취재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취재를 통해 딥 페이크 범죄가 널리 확산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규제가 이를 따르지 못하는 상황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범죄는 여성들 피해가 많은데, 저도 딸 아이의 아빠로서 좀 더 강한 처벌이 시행되면 좋겠네요.
이렇게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취재라는 점에 더해, 이전 호보다 더 논픽션에 가깝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탁묘
작가 효진은 고등학교 동창 애희와 동네에서 오랫만에 재회한 뒤, 가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느날, 손을 다친 애희가 찾아와 자기와 남편 지욱에게 닥친 이야기를 해 주는데...

이번 호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 수상작. 두 여자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공포물인데, 수상이 당연하다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의 빼어난 흡입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되살아난 지욱이 효진에 대한 집착만 남아 그녀를 덮치는 결말도 강렬했고요.
 
그러나 애희가 살해한 지욱을 윗층 할머니가 되살려냈다는건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고양이를 되살린 것, 고양이를 죽게 만든 택시 운전 기사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등의 다른 설정들도 마찬가지에요. 기묘한 집안 물건들 정도로 이런 능력이 가능하다고 하는건 무리입니다. 주술이건, 부적이건, 조금이라도 설명을 덧붙여 주는게 좋았을겁니다.
또 효진이 지욱과 불륜관계라는 뻔한 설정도 별로입니다. 게다가 효진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이를 제대로 밝히지 않은건 반칙이에요. 특히 애희가 남편 불륜 상대와의 문자를 봤다고 했을 때, 놀라기는 커녕 제 3자처럼 "화양연화" 운운한건 말도 안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수상자 인터뷰에서 밝혔던 창작 동기 - 층간소음 으로 괴로워하던 사람이 복수심으로 윗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를 훔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를 잘 살린 것 같지는 않네요.

메리
의대 진학을 앞둔 '나'는 아르바이트로 삼촌의 스마트 축산 건축업을 돕기 위해 한 시골 마을로 향했다가, 마을 사람들의 성적 노리개인 정신지체자 '메리'의 아기가 죽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아기의 죽음을 알게 된 메리는 처절한 복수에 나서는데...

외딴 마을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의 결과로 빚어지는 복수극.
그러나 핵심인 '메리'의 복수심에 대한 빌드업보다는 '나'의 개인 심리 묘사에 치중한 탓에 복수극으로서의 맛은 다소 부족합니다. 도축 현장과 가축 축사 등이 어우러진 배경 묘사는 그럴듯하지만 지나치고요. 복수극이라면 그에 걸맞게 화끈하게 달려주는게 낫습니다. 괜한 문학적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어요.
메리의 복수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과 유사성이 짙다는 문제도 큽니다. 복수 장면도 독극물을 먹은 잔치 참석자들이 복통으로 몸부림치는걸 난도질로 끝장낸 상황인데, '나'가 창고에서 걸어나와 문을 나서는 중에 이 모든게 이루어진다는건 이상합니다. 최소한 사전에 독극물을 먹였다는 설명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환상통
두 손이 잘려나간 환자가 자신의 손이 자기 목을 조르는 환상에 시달렸다. 그 상황에서 20여년 전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딸아이 이름을 불렀다. 딸은 백화점 붕괴사고로 환자 눈 앞에서 죽고 말았었다. 

환상통과 거울 치료 등 의학적인 부분에서의 디테일은 볼만했던 작품.
하지만 죽어가는 딸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건 많이 뻔했고 이야기 전개에서 의외성도 별로 없습니다. 무섭지도 않고요. 이게 무슨 장르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 호러는 아닌데, 그렇다고 심리 스릴러도 아니고... 여튼 장르물로의 기대에는 전혀 값하지 못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저수지
제주도의 물 빠진 저수지에서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 한 구는 박서현의 남편 시신이었다. 남편은 같은 마을 동우 엄마와 불륜 관계였고, 박서현도 요가 수강생 은우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추리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 사건이 등장하고, 의외의 진상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하지만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고 하기는 힘든게, '추리'의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경찰 수사에 의해 모든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든건 조현병 환자인 박서현의 망상이었다는게 진상입니다. 남편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고, 박서현도 은우와 불륜을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망상 때문에 은우와 남편을 살해했던 것이지요.
반전은 괜찮았지만 어딘가에서 본 듯한 내용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장화 홍련(영화)"와도 별로 다르지 않지요. 상황을 오해하고 있다가 블랙박스와 사진 등을 통해 현실이 드러나는건 영상물에 어울리지, 소설에는 잘 어울리는 작법이라 할 수도 없고요. 소설이라면 독자도 속일만한 디테일한 묘사가 많았어야 했습니다. 
또 이야기와는 별 관계없는 제주 무당(심방) 관련 설정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는 이야기의 본질만 흐립니다. 흥미롭기는 한데 작품에 잘 녹아들지는 못해요. 박서현이 귀신에 홀려 범행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흘러가는 결말도 억지스러웠고요. 제주 무당 관련하여 작가가 '내가 이렇게까지 자료조사를 했다!'는걸 과시하고 싶었던게 아닌가 하는 의심만 드는 탓에, 차라리 이 설정을 뺐더라면 더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고스트 하이커
휴직 중인 경찰 수연은 동료 태현을 쫓아 찾아온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길을 잃었다. 태현은 아내 살해 용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라진 상태였다.

수연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영원히 떠도는 - 제목 그대로 '고스트 하이커'가 되어 '부랑'을 하는 - 내용의 작품. 
솔직히 장르가 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건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진상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수연이 결혼한 태현에게 집착한 나머지, 태현의 아내는 자살했고 태현은 부랑자가 되었다던가, 수연이 베로나 실종 사건에서 알랭이 수상하다는걸 리즈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던가 하는건 모두 수연의 생각일 뿐입니다.
 
이런 애매한 사건들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 보다는 중간에 수연이 죽었다는걸 명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복선을 삽입한 뒤, 수연이 유령이라는걸 드러내는 전개가 더 좋았을거에요. 정교한 맛도 살리면서 말이지요. 여러모로 부족하고 애매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한국 미스터리를 읽는 네 가지 키워드 2 : 욕망과 갈등의 논리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에 대해 해석하여 설명해주는 연재물. 이번에는 '사연'과 '한'이라는 한국 미스터리만의 특별한 주제에 대해 "아홉 꼬리의 전설"과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라는 두 편의 작품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저 두 작품에 대한 해설과 비평에 가까와서 별로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저 두 작품이 한국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작품도 아니니까요. 보다 보편 타당한 고전을 예로 들었어야 했어요. 그리고 이런 류의 비평과 해석이라면, 연대순으로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을 당시 주요 사회 현상과 연결하여 통사적으로 설명하는게 더 와 닿았을것 같네요.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이외 비평, 인터뷰, 추리 퀴즈 등은 점수를 주기 애매해서 생략합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내용들도 아닙니다.

2024/08/10

열린 어둠 - 렌조 미키히코 / 양윤옥 : 별점 2.5점

열린 어둠 - 6점
렌조 미키히코 저자, 양윤옥 역자/모모

"회귀천 정사"로 유명한 렌조 미키히코의 단편집. 원제는 "夜よ鼠たちのために (밤이여, 쥐들을 위해)".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983년에 출간된 나름 고전(?)으로 일본에서도 꽤 오래 절판 상태였었는데,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2014년 판에서 '복각(재출간) 희망! 환상의 명작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한 덕분에 2014년에 복간된 이력이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아래와 같이 극찬하는 인터뷰와 글을 남겼을 정도로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 미스터리의 재미 중 가장 큰 것은 무엇인가 하면, 역시 마지막의 반전, 결말의 의외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편에서 그걸 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단편집은 모든 작품이 놀라운 반전 구조를 그립니다. 생각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전개를 실현한 작품들입니다. 마치 네거티브 필름이 포지티브로 바뀌는 것처럼, 결말에서 흑백이 뒤바뀝니다. 모든 작품에서 완전히 속아버릴 수 밖에 없어요. 전후 미스터리 단편집 중에서, 저는 이 책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표제작입니다. 미스터리라는 성격상, 스토리를 말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되므로 삼가겠습니다만, 제가 만약 단편을 쓴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an・an」 1990년 11월 23일호, 아야츠지 유키토 「나의, 한 권. 멋진 반전의 구조. 전후 최고의 미스터리 단편집」에서)
  • 아야츠지: 렌조 작품은, 일반적으로는 나오키상 수상작인 연애소설 『연문』이 유명합니다만, 충격적이었던 것은 역시 먼저, 『회귀천 정사』, 『은밀한 상복』 등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지금은 고분사 문고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밤이여, 쥐들을 위해』입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실업지일본사에서 신서판으로 나왔고, 신초문고와 하루키 문고로 차례로 옮겨졌는데, 현재는 절판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서술 트릭 계열 단편집의 최고봉인데......아깝네요. (「작가의 독서도 제150회: 아야츠지 유키토」에서)

읽어보니 이 정도 극찬을 받을만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호평은 이해가 됩니다. 서정성과 트릭이 잘 결합되어 있던 작가 최전성기 시절("회귀천 정사" 시절)답게, 추리적으로 굉장히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트릭이 사용된 정통 본격 추리물에서 유괴극, 복수극, 서술 트릭 반전극, 느와르 등 수록작의 장르도 다양합니다. 과하게 느껴졌던 작가의 묘사도 다른 후기작에 비하면 절제되어 있어서 부담이 덜하고요.
모든 수록작이 다 괜찮은건 아니지만, 더운 여름, 한 번 읽어볼만하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가득하다는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개의 얼굴"
화가 마사키 유스케는 아내 게이코가 신주쿠 호텔에서 살해당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택 침실에서 유스케가 살해해 뒷마당에 파묻었다. 호텔 사건의 여자가 게이코라면, 유스케가 집에서 죽인 여자는 누구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유스케는 죽인 여자의 얼굴을 그날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유스케는 호텔 사건에는 알리바이가 있었기 때문에, 호텔에서 발견된 여자를 게이코로 만들어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진상은 유스케의 범행을 목격한 동생 신지가 자신을 협박하던 꽃뱀 여자를 함께 처치해 버렸던 겁니다. 마침 몸매가 비슷해서 속일 수 있었지요. 이 때 집 안에 전화가 두 대 있는 것을 이용해서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입니다. 전화가 걸려와 안부를 물으면 당연히 외부에서 전화를 했을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같은 집 안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유스케가 살해한 아내의 사체가 이동한 이유도 잘 설명되고 있으며, 사건에 대한 유스케의 심리묘사도 독자의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입니다. 서스펜스가 제법이었어요.
하지만 단편이라서 설명이 부족하며, 작위적으로 전개한 부분은 눈에 거슬립니다. 우선 신지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건 너무 뻔했습니다. 신지를 협박하던 꽃뱀 여자가 유스케 집까지 찾아와 지문을 남긴건 억지스러웠고요, 마지막 신지의 장난도 이유를 알기 어럽습니다.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7인 1역"과 유사하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과거에서 온 목소리"
'나'는 금수저 출신으로 형사일을 견디다 못해 2년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뒤, 그만 둔 이유에 대해 강 선배에게 편지를 썼다.
1년 전, 전일항공 부사장 야마후지 다케히코의 외아들 가즈히코 유괴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부인을 전화기에 붙잡아 놓은 상태에서, 담을 뛰어넘어 아이를 유괴했다. 경찰은 몸값을 확보하고 도주하던 범인을 미행하다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몸값을 받은 범인은 아이를 무사히 풀어주었고, 이후 공개 수사로 전환한 경찰에게 정체가 드러난 범인 오카다는 자동차 사고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유괴범에게 동정심을 느낀 '나'는 당시 일부러 범인이 도주하도록 수사를 방해했다. 유괴범 중 한 명이 강 선배라는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건 범인이 '내일'이 금요일인지 토요일인지 정하지 못했던 상황을 통해, 범인이 두 명이며 둘 사이 커뮤니케이션이 원할하지 않다는걸 추리해 내는건 아주 좋았습니다. 두 명 중 한 명이 아이를 유괴당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부잣집 아들을 유괴해 몸값을 받아내려 했다는 발상도 재미있었어요. 실행범은 자기 아이를 유괴한 범인의 요구사항을 자기가 유괴한 사건 피해자에게 그대로 전달만하면 된다는 아이디어인데,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강 선배가 오카다를 살해했을거라는 결말도 합리적입니다. 오카다가 체포되면 진상이 드러날 수 있으니, 경찰이 체포하기 전 정보를 흘려 유인한 뒤 살해했다는건 말이 되니까요.

그러나 유괴가 이렇게 겹쳐서 강 선배가 피해자이자 범인이 된다는건 다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나'가 강 선배의 눈에서 이십 년 전 범인 눈빛을 떠올린 덕에 진상을 깨달았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나'가 집 안에 있는 신이치가 사실은 유괴당한 가즈히코라는걸 눈치챈건 앞선 복선으로 설명되지만, 독자는 눈치채기 힘들다는 점에서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유괴 피해자가 몸값 마련을 위해 유괴범이 된다는 아이디어는 아주 좋았던만큼, 이를 확장한 장편으로 묵직하게 썼다면 "킹의 몸값"과는 또 다른 딜레마를 안겨다주는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것 같은데 아쉽네요. 그래도 아이디어만으로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

"화석의 열쇠"
하반신 마비 소녀 지즈가 목이 졸려 죽을 뻔 했다. 피해자 집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창문은 모두 안에서 잠겨 있었고, 출입구는 현관문밖에 없는데 열쇠는 관리인 사와가 보관하고 있었다.

지즈가 엄마를 집에 들이기 위해 자물쇠 바꾸는 청년을 속여 헌 자물쇠를 달게 했고, 엄마와 아빠 모두 지즈가 부담되어 살해하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한 정보 제공은 공정합니다. 지즈가 자물쇠 바꾸는 청년에게 상황에 맞지 않는 초콜릿 부탁을 한 것, 관리인 사와가 엄청나게 청소를 열심히 한다는 등 상황에 대한 공유는 확실하니까요. '열쇠 화석'이라는 말도 단서로서는 좋았습니다. 사와가 이 모든걸 깨닫는 전개는 일상계스러워서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 둘이 동시에 딸을 살해할 생각을 한다는건 와 닿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면 자기가 빠져나갈 생각을 할까요? 신파적인 결말도 별로였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기묘한 의뢰"
신소에서 일하는 나에게 쓰치야 마사하루라는 의뢰인이 찾아왔다. 아내 동향 조사 의뢰를 위해서였다. 아내 사야코는 하릴없이 이곳 저곳에서 시간만 보냈다. 알고보니 그녀는 나의 미행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고, 나에게 오히려 남편 쓰치야의 행적 조사를 부탁했다. 알고보니 나를 이용해서 몰래 불륜 행각을 저지르기 위함이었다. 이 역시 쓰치야에게 들켜버렸고, 쓰치야는 자기 행적 조사를 거짓으로 전달하라고 했다. 전달하기 위한 쓰치야의 행적은 애인 유리의 맨션 주소와 연락처로 받으려 했는데, 그 뒤 유리가 살해되었다...

쓰치야는 유리의 다른 애인으로, '나'와 유리의 관계를 알고 유리를 살해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조사를 맡긴건 유리와 나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내기 위해서였고요.

나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그리고 냉소적인 심리묘사가 대부분으로 추리적으로 딱히 눈에 뜨이는 부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묘사로 '나'의 별로인 모습만 드러나 작품에 몰입하기 힘들다는게 문제입니다. 쓰치야 부부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모습은 무능력했고, 유리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자신이 쓰치야에게 농락당한 것에 불과하다는걸 알아 버렸지만, 그냥 그대로 끝나버리는 결말은 이게 뭔가 싶더군요.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어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이여, 쥐들을 위해"
어린 시절 불우했던 나는 교정을 받아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를 잃은 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복수를 결심했다. 
병원 원장 요코즈미 다다오는 '나'의 협박 전화를 받고 서둘러 집을 나선 뒤 살해당했다. 경찰은 백만엔이라는 돈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나'의 원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추정했다. 이후 원장 사위이자 내과 부장 이시즈의 사체도 발견되었다.

'나'인 쓰무라의 아내는 불치병 뇌종양이었고, 병원의 과실로 죽은게 아닙니다. 그런데 왜 백만엔이라는 돈을 건네려고 했을까요? 이 수수께끼는 흥미롭습니다. 알고보니 이하라의 아내 후미요에 대한 오진을 숨기려고 원장과 내과 부장이 그녀가 백혈병에 걸리게 만들었다는게 진상입니다. 생각도 하지 못했네요. 쓰무라와 이하라의 정체가 독자가 알고 있던 것과 정 반대라는게 드러나는 반전도 좋았습니다. 잘 짜여진 서술 트릭물로, 독자를 완벽하게 속이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단 둘의 흉터는 너무 노골적으로 속이겠다!는 의도가 보여 좀 별로였고, 어린 시절 쥐를 죽였던 원한으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하라는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 밖에 없었으니 억지스럽더라도 죽일 수 밖에 없는 동기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고충은 이해가 되지만, 억지는 억지에요. 그래도 심리 묘사가 탁월한 덕분에 생각보다는 잘 설명되는 편이라 다행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중생활"
마키코는 열 여섯살 많은 슈헤이에게 젊음을 바쳤지만, 자신을 버리려하는 슈헤이에게 증오를 느꼈다.

정부인줄 알았던 마키코가 진짜 아내이고, 반대로 나이많은 시즈코가 정부이자 불륜녀라는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이 반전을 결말 부분까지 잘 숨기면서 전개한다는 점에서는 서술 트릭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마키코가 남편 슈헤이와 불륜녀 시즈코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살해당한 것처럼 자살한다는 반전, 그리고 이를 위해 데쓰오와 시즈코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방법도 잘 짜여져 있어서 범죄물로도 우수한 수준이고요.

그런데 마키코가 정부 데쓰오를 범행에 끌어들인건 억지스럽습니다. 불륜을 저지르다가 살해당한 모양새이니, 마지막 순간치고는 영 폼이 나지 않으니까요. 데쓰오 없이도 현장 상황 - 슈헤이가 받아온 수면제가 들어있는, 슈헤이가 즐겨 마시던 와인 - 과 스토브 지문으로 슈헤이에게 누명을 씌우는건 가능했을것 같거든요. 시즈코마저 옭아매기 위해 데쓰오를 이용했다고보면 말은 돼지만, 이 역시 나이든 시즈코와 데쓰오가 불륜 관계라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작위적입니다. 조건이 갖춰진 뒤에야 실행 가능한 계획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었다면 좀 더 설득력있는 인간 관계를 쌓아올리는게 가능했다는 측면에서, 조금 긴 호흡으로 풀어나가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대역"
인기 배우 하세쿠라 슌은 아내 료코와의 이혼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자신과 꼭 닮은 남자 다카쓰 신야를 찾아냈다. 그러나 료코가 슌의 불륜을 알고 있었으며, 이혼할 생각도 없다는걸 알게된 뒤 료코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다카쓰 신야를 이용한 알리바이를 만들어서였다. 오사카에서 다카쓰를 자신인 척 연기시킨 뒤, 자신은 변장하고 도쿄로 가서 살해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료코는 없었고, 오사카로 돌아간 뒤 자신의 방에 죽어있는 기누에를 발견했다. 이 모든건 료코와 다카쓰의 음모였었다.


하세쿠라 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완전 범죄물로는 볼만합니다.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 하세큐라 슌의 대타가 다카쓰 신야가 아니라, 료코와 기누에 입장에서는 그 반대였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이야기의 현실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애초에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 주위에 같은 여자들이 엮이게 된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는 했는데, 말이 되는 이야기로 만드는 데에는 실패한 셈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베이 시티에서 죽다"
동거녀와 믿었던 아우에게 배신당한 조직원이 출소 후, 둘이 함께 도망친 항구 도시로 찾아가 모두 죽여버린다는 느와르.. 묘사도 멋있고 배신의 진상 - 없던 죄를 뒤집어 쓴게 아니라 원래 내가 지은 죄였다는 - 도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딱히 흥미롭지는 않았습니다. 추리적인 맛은 거의 없고, 내용도 신선함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그냥 서정적인 '사나이' 이야기를 한 편 쓰고 싶어 쓴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열린 어둠"
불량 학생들만 다니는 사립 세이에이 고등학교 음악교사인 미즈키 마사는 '마더'라는 별명으로 학생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어느날 퇴학당한 폭주족 블랙호크스 멤버 중 한 명인 노리코가 긴급한 도움 요청을 해 왔다. 리더 다카기가 살해당했다고 했다. 노리코와 함께 현장에 온 마사는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노리코가 유력한 용의자라는걸 알고 한 시간만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카기의 죽음이 학교 체육 교사 아카자와 다케시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아카자와는 동성애자였다.

불량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학생과 얼마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열혈 신입 교사가 해결한다는 내용으로 7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청춘 미스터리'의 영향이 가득 느껴집니다. 동성애로 인한 삼각관계가 원인이라는 점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신선한 편이고요. 요새 이런 설정이 유행이라는데, 나도 한 번 써볼까!라는 생각으로 쓴 듯한데 의외로 괜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카기가 폐소 공포증이라는게 핵심 단서인데 - 아카자와 선생의 차는 비가 오는데도 창문이 열려있었다 -, 이는 여러가지 단서로 독자에게도 공유됩니다. 노리코가 아침에 다카기의 방에서 쫓겨난 건 창문을 닫으려고 해서, 다카기가 초고층 맨션에서 뛰쳐나온건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어서, 다카기가 폭주족이 된 건 차를 타기 싫어서였다는 식으로요. 
미즈키 마사가 학생들 앞에서 추리쇼를 펼쳐 진상을 밝히는 전개도 정통 본격 추리물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다카기가 스즈타에게 아카자와 살인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고 현장을 조작했기에, 스즈타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려고 다카기를 살해하고 노리코에게 혐의를 씌웠다는 동기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후더닛 물로는 괜찮았지만, 와이더닛 측면에서는 좋다고 하기 어렵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23/11/18

명작 추리 소설 5선 : 이 서술 트릭이 굉장해!

소설에 대해 안내하고 소개해주는 일본 사이트 '소설마루' 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가볍게 소개해 드립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핵심 트릭이 노출되어 있으니, 읽으시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3/10/15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운을 즐기자! '기묘한 맛'의 신구 단편 모음집



honto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천. 대부분 국내 소개된 작품들입니다. 원조이자 대표작인 "특별 요리"를 추천하지 않았는데, 국내 출간되지 않은 마지막 작품 대신 "특별 요리"를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3/10/08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 히가시노 게이고 / 최고은 : 별점 2점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마술사면서 사기, 거짓말, 위조도 서슴치 않는 안티 히어로 '블랙 쇼맨' 다케시 삼촌이 활약하는 단편집. 전작은 묵직한 장편 추리물이었던 반면, 이번 작품들은 가벼운 단편 범죄 드라마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웠습니다. 핵심 매력 포인트였던 다케시의 안티 히어로적인 속성이 거의 사라진 탓이 큽니다. 손님들을 위해 솜씨를 발휘하는, '정의의 바텐더'로 캐릭터가 변해 버렸더라고요. 사건들도 대단한 추리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결말도 거의 예상대로였습니다. 칵테일이 주요 소재로 쓰이는 등의 소소한 디테일만 괜찮았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후속작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기대는 되지 않는군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맨션의 여자>>
마요는 손님 우에마쓰 가즈미와의 미팅 장소로 다케시 삼촌의 바 '트랩핸드'를 이용하게 되었다. 다케시는 거짓말과 사기로 가즈미 남편의 지인인 척 했다.
어느정도 마요, 다케시와 친해진 가즈미는 다케시의 바에서 오래전 연이 끊긴 오빠 유사쿠와 만나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흔쾌히 허락한 다케시와 마요는 도청장치로 유사쿠가 가즈미가 가짜라고 협박하는걸 들었다. 다케시는 간단한 조사와 추리로 가즈미는 가짜가 맞지만 진짜와 협력했을거라 생각하고, DNA 검사를 요구하는 유사쿠를 가짜 사진으로 물리친 뒤 가즈미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나나에는 가즈미의 부탁으로 역할을 수행했고, 그 이유는 췌장암으로 곧 죽게 되는데 유산이 자기에게 끔찍한 짓을 한 오빠에게 상속되는걸 막기 위해서였다.

다케시가 사기꾼으로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가짜 가즈미의 정체를 꿰뚫고, 조작한 사진으로 유사쿠를 물리치는 등의 활약을 보이는 전반부, 그리고 나나에의 입을 통해 가짜 가즈미가 된 이유가 설명되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탐정(?)의 활약과 범인(?)의 고백이 1, 2부 구성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셜록 홈즈와 같은 고전 추리물을 연상케합니다. 

다케시의 DNA 검사 요구를 퇴치하기 위해, 유사쿠는 아빠의 블륜으로, 가즈미는 엄마의 불륜으로 낳은 자식이라는 사실을 조작한건 기발했는데, 그 외에는 딱히 눈여겨 볼 부분이 없습니다. 나나에와 가즈미가 꼭 닮았다는 우연에 모든게 기반하고 있다는 점도 감점 요소였고요. 이런 우연보다는 가즈미의 재산을 이용하여 나나에에게 성형 수술을 시켜주고, 회복 기간 동안 바꿔치기를 위한 학습을 했다고 풀어가는게 더 현실적이었을거에요. 추리, 범죄물이라기보다는 드라마에 가깝다는 점도 아쉽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위기의 여자>>
나미는 만남 어플로 만난 기요카와로부터 그가 가지고 있다는 하와이 별장 이야기를 듣고, 함께 트랩핸드에 방문해서 칵테일 '블루 하와이'를 마셨다. 연이어 자기 재산을 자랑하던 기요카와는 다케시의 칵테일 한 잔을 더 마신 뒤 미친듯이 졸려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알고보니 기요카와는 어플로 만난 여자에게 재신이 많다는 거짓말로 환심을 산 뒤, 수면제를 먹인 뒤 몹쓸 짓을 하는 악당이었습니다. 이를 꿰뚫어 본 다케시가 술잔을 바꿔치기했던 겁니다. 이 과정에서 칵테일 '블루 하와이'가 트릭의 주요 소재로 사용된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면 유도제가 범죄에 악용되는걸 막기 위해 물에 녹으면 파랗게 변하게 만들었는데 (일본 이야기겠지요?), 그걸 숨기기 위해 원래 색이 파란 블루 하와이를 선택했다는 아이디어가 괜찮았거든요. 바텐더 다케시에게도 어울리는 소재였고요.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후속작이 나온다면 추가되어도 좋을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다케시가 기요카와의 수작을 눈치채고 경고를 하기 위해 '비트윈더시트'를 대접했다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재료만 듣고 칵테일 이름을 떠올리고, 이게 '경고'라고 느낄 사람은 많지 않을테니까요. 또 같은 재료라도 비율에 따라 여러 결과물이 나오는게 칵테일이라서, 경고의 의미로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뭐, 이 모든게 다케시 삼촌의 억지라면 할 말이 없지만요.

그래도 나름 트릭도 사용되었고, 다케시의 활약도 빛나며 기승전결도 깔끔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환상의 여자>>
유즈키는 치과의사이자 재즈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도모야와 불륜 관계였다. 그러나 도모야갸 교통사고로 죽은 뒤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다독이는 절친 야요이와 함께 트랩핸드를 찾은 유즈키는 도모야가 과거 요코스카에서 연주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모야의 과거를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코스카에서 도모야가 '딸'이라는 여성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걸 알아내는데....

표제작. 도모야가 딸과 함께 보냈던 과거는 모두 조작으로, 유즈키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 일으키려는 친구 야요이의 계획이었다는 내용.

불륜녀인 친구를 위해 본처를 설득하기까지 한 친구 야요이의 엄청난 노력은 절절이 전해집니다만, 이런 계획이 유즈키의 새로운 시작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차라리 요코스카에서도 불륜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조작해서 정나미가 확 떨어지게 했더라면 모를까요. 불륜녀의 사랑이야기라는 소재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재미도 없고 알멩이도 없는 졸작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3/10/05

Nervous Breakdown 너버스 브레이크다운 1~13 - 타가미 요시히사 : 별점 3점


90년대 초, 중반에  '타누마 사립탐정 사무소' 멤버들이 - 특히 브레인 역할인 안도와 액션 전담 미와 컴비 -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한다는 추리 만화. 지금은 없어진 월간지 "코믹 NORA"에 연재했었지요. "그레이" 등 성인 취향의 어둡고 비정한 SF, 범죄물로 유명한 타가미 요시히사의 작품입니다. 저는 "그레이" 때부터 좋아했던 작가라 이런저런 작품들 - 예를 들어 "화석의 기억" - 을 원서로 구해 읽었었는데, 이 작품은 "메탈헌터"와 함께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유이한 작품입니다. 소개 당시 한 권씩 구입해서 읽었고,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지요. 
예전에 스핀오프 "Night Adult Children" 리뷰를 올렸던 적은 있었는데, 추석 연휴를 맞아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전 13권을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등장인물들이 3등신과 8등신을 오가는 작화가 가장 큰 특징으로, 대부분의 경우 3등신인데  아래와 같이 특정 컷에서만 8등신으로 등장하는 식입니다. 


3등신 캐릭터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추리를 하고 시니컬하고 분위기있는 대사를 내뱉는게 묘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특별히 모든 등장인물들이 8등신으로만 등장하는 에피소드도 두 편 있습니다. - 안도가 주인공인 "고즈에로 가는 마지막 버스", 미와가 주인공인 "살인자에게 인사를" - 두 편 모두 의외의 재미를 가져다주는 좋은 작품으로, 전부 8등신으로 진지하게 그렸어도 좋았을 것 같아요.

등장인물들도 독특합니다. 안도는 포지션은 전형적인 명탐정이지만, 정의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거든요.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진범을 체포하는데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정해진 보수를 받은 만큼 일하고요. 사건 도중에 일어난 트러블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의뢰인에 대해서 "그 여자가 죽건 말건 난 상관없어"라고 말할 정도고, 아래처럼 지인의 죽음에도 눈 하나 깜빡않는, 인정머리 없는 남자입니다.



몸이 굉장히 약하고, 여자들이 쉽게 반하는 미남이라는 속성도 붙어 있는데 이런 캐릭터는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네요. 아래와 같이 멋진 말을 남기는 장면은 과연 여자들이 반할만하다 싶기도 하고요.

"미야한테 전할 말이 있는데...."

미와는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개그 캐릭터에 가깝지만, 그 초인적인 체력이 유용하게 활용될 때가 많다는 점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입니다. 아래와 같이 가끔은 멋지게 등장합니다. 그냥 개그컷에 가깝지만....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작가의 추리물에 대한 나름대로의 애정이 잘 녹아 있거든요. 목차부터가 고전 명작의 패러디들이 많을 정도로요. 
하지만 트릭이 사용된 본격물보다는 범죄 드라마, 스릴러에 가까운 에피소드들이 더 완성도가 높습니다.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전개도 좋고, 사건에 몰입하게 만드는 상황과 심리 묘사가 탁월한 덕분입니다. 작가도 이런 특성을 알아챘는지 뒤로 갈 수록 트릭보다는 드라마에 집중하며, 덕분에 더 볼 만해집니다.
이외에도 죽어가는 남편의 첫사랑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조사에 나선다는 "어느 조용한 죽음" 처럼 잔잔한 일상계로 인간 관계를 되새기게 만드는 에피소드들도 독특합니다. "고백의 십자가", "마지막 Chiristmas" 같은 일상계 러브 스토리까지 수록되어 있는 등 다루는 장르의 폭도 넓고요. "노리코의 죽음"같이 SF 등 다른 장르물과 혼합된 사랑 이야기(?), 미와가 맹활약하는 액션물들도 괜찮습니다. 

정통 본격물 맹점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 패러디들도 큰 재미를 가져다 줍니다. 과거 잔혹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던 곳에서 실종자가 한 명 나왔지만 안도가 "아직 기껏해야 실종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런 사건은 다음 피해자가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라고 말하는 장면처럼요. 아래의 밀실 살인에 대한 비판 역시 공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추리 만화로서 논리적이거나, 감탄할만한 트릭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많지 않다는건 다소 아쉽습니다. 만들기 쉬운 암호 트릭 - 10권 "산쥬노출"의 "미키가 노래하는 미버 (タレラヤ小さぃ子羊肉)"처럼요 - 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 오히려 트릭이 사용된 에피소드는 다소 억지스럽다는 점은 단점입니다. 예를 들어 "바이바이 엔젤"에서는 수조로 이루어진 밀실에서 수조를 치우는건 불가능하다고 등장인물들이 이야기하지만, 수조를 어떻게든 치웠다는게 진상이었습니다. 이런건 반칙을 넘어서는 억지죠. 

3등신 캐릭터가 등장하기 때문인지 개그도 많은데, 안도의 약한 체력과 미와의 야수같은 육체, 의뢰인이었다가 타누마 탐정 사무소에서 일하게 되는 미야가 재벌 이나바 테츠노스케의 손녀라는 등의 캐릭터 설정을 활용한게 많습니다. 문제는 다소 뻔하고 식상한 개그들이라는 겁니다. 반복적이기도 하고요. "15세" 딱지가 붙을 정도로 외설적인 개그도 많은데,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아서 안 나오느니만 못했습니다. 마지막 에피소드 "마지막은 참극"은 미와가 등장인물 모두를 죽이는 꿈을 꾼다는 내용인데,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았고요.
아울러 학산 문화사 초기 번역 소개작이라 그런지 여성의 노출 장면을 어거지로 덧칠하는 등의 문제도 크며, 3등신 캐릭터들의 얼굴 구분이 쉽지 않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3권의 "모두가 닮은 사람"이라는 에피소드에서 모두가 닮았다는걸 트릭으로 써먹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래도 다시 읽어도 여전한 재미를 가져다주는건 분명합니다. 수록작들 편차는 크지만 몇몇 작품들은 충분히 '걸작' 소리를 들을만 하다 싶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각 권별 수록작들 제목을 소개해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제가 아는 한 원제를 달아보기는 했는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1권 :
갑자기 사라져 버린 케이코
그래도 사랑스러운 여인이여
원과 면 : 점과 선
황색의 연구 : 주홍색 연구
 
2권
일요일은 죽는 날
걱정일세, 여탐정!
여름빛깔 카루이자와
타누마 소장 최후의 사건 : 트렌트 마지막 사건
얼어붙은 파도 : 얼어붙은 섬 또는 얼어붙은 송곳니
 
3권
도둑은 가득히 : 태양은 가득히
모두가 닮은 사람 : 당신을 닮은 사람
제로의 정점 : 제로의 초점
한여름 낮의 꿈 : 한여름 밤의 꿈
어느 조용한 죽음

4권
하얀 커튼 : 검은 커튼
입학 : 졸업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새빨간 거짓말
사라질 뻔한 탐정 : 사라진 남자 (?)
 
5권
새벽녘의 시선 : 새벽의 데드라인
그리고 소녀는 사라졌다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변호인측 괴인 : 검찰측 증인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내일도 무사하게 하소서

6권
오발탄
타누마 가의 일족 : 이누가미 일족
노리코를 위하여 : 요리코를 위해
분수령
마진테 부인은 죽었다

7권
귀여운 설녀
어느 비오는 오후 갑자기
Midnight Fool
매장 지도
50의 살인

8권
시체와 여행하는 남자 :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고백의 십자가 : 공허한 십자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남자들
토모여, 고이 잠들라 :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 (기타가타 겐조)

9권
바이바이 엔젤 : 바이바이, 엔젤
추억의 매장
모르그 가의 살인 : 모르그 가의 살인
레이디 하트브레이크
" " (무제)

10권
산쥬노출
마지막 Chiristmas
고즈에로 가는 마지막 버스 : 우드스톡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
불타는 사나이 (Man on Fire) : Man on Fire (크리시 시리즈)
치에는 어디에
사람은 어째서 살해당하는가 :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11권
악몽같은 여자 : 악마같은 여자 ("디아볼릭")
환상의 여인 : 환상의 여인
의뢰인으로부터 한마디 (과거 연재작 특별편) 시리즈
  • 귀여운 여인
  • 설녀가 보고 있었다, 또는 "고립된 산장"을 주제로
  • 울부짖는 여자

12권
보디가드
살인자에게 인사를
셀룰로이드 살인
어설픈 시체
움직이는 시체

13권
여자에게는 맞지 않는 직업 :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랑의 탐정들
가장 위험한 유행 : 가장 위험한 게임
도중의 집 : 중간 지점의 집
리틀 루즈 걸 : 리틀 드러머 걸
마지막은 참극


본편 외에도 "스페셜 리포트"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유명 추리 소설들을 패러디한 4컷 만화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당시에 만화책이 3,500원이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모든 물가가 3배 이상은 올랐을텐데, 만화책만은 거의 오르지 않았네요.

2023/09/27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 1~16 - 이시구로 마사카즈 : 별점 3점


마사토끼 등 여러 리뷰어들에게 낚여서 이런저런 만화책을 구입하곤 했는데, 별로 성공을 거두지를 못해왔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재미있게 읽었던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다시 구입하기로요. 그래서 첫 번째로 선택한게 바로 이시구로 마사카즈의 히트작인 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라 선택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천국대마경>>도 재미있게 감상하기도 했고요.

작품은 다시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더군요. 미치오 슈스케의 <<N>> 보다 앞서 시계열을 바꾼 전개를 시도했다는게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띄엄띄엄 발매될 때마다 한 권씩 읽었을 때는 쉽게 알아채지 못했던 부분인데, 한 번에 읽으니 호토리의 헤어스타일 등으로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몰아 읽은 덕분에 대책없는 동네 말괄량이에서 '탐정'으로 성장해나가는 호토리를 비롯하여, 스스로가 쳐 놓은 울타리를 호토리의 도움으로 하나 씩 넘어서는 콘 선배 등 등장인물들의 성장도 눈에 더 잘 들어왔고요.
학원물로도 볼만했습니다. 예전에는 별 생각없이 넘겼는데, 다시 읽어보니 수학여행, 학원제, 운동회, 부활동 등 청춘 학원물의 필수 에피소드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부 합숙 정도만 빠져있는데 이건 등장인물들이 하리바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귀가부' 소속이기 때문인데, 대신 상점가 여행, 그리고 밴드 '메이즈' 활동이 등장하니 엇비슷하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초반의 번역은 아쉬웠습니다. 일본어 말장난을 억지로 한국말로 바꾼 탓에 "사나다 사카나 사라다 (사나다 생선 샐러드)"같은 언어 유희들이 사라져버리고 말았거든요. 후반부처럼 그냥 일본어로 쓰고 해석을 덧붙이는게 훨씬 나았습니다.

그래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학원물, 청춘물, 추리물, 개그물 등 모든 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주니까요. 아직 읽지 않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추리물로 볼 수 있는, 추리가 핵심인 에피소드만 꼽아보며 글을 마칩니다. 
1권 
<<눈>>
모리아키 선생님의 할아버지가 그린 기묘한 그림의 정체는?
호토리가 추리력을 발휘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 
가족들이 나눠 가졌다는 그림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2권
<<파자마 천사>>
화창한 날 정해진 시간에 선글라스를 끼고 정해진 장소에 나와 시간을 보내는 환자의 목적은?
일종의 일상계 추리물. 현장 조사만으로 풀 수 있는 수수께끼입니다.

4권
<<아라시야마 보물 조사단>>
시즈카 언니로부터 얻은 보물 지도가 품고 있는 보물은?
지도의 나무 그림과 강 형태가 일치하고, '황금 호수'는 안개에 덮인 마을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진상 등 소소한 재미가 가득했던 작품. <<C.M.B>>의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습니다.

5권
<<시내 설방 이야기>>

타츠미야 시로를 찾는 온나 유키는 누구였나?
일상계라면 일상계, 말장난이라면 말장난.

<<학교 미궁 안내>>
학교 관찰 연못 속 괴수 메시의 수수께끼
경비 아저씨의 잘못으로 만들어진 소문으로 보였지만, 알고보니 진짜 괴물이 있다는 반전.

6권
<<환상의 소년>>

도랑 속 수박을 공으로 바꿔치기한 이유는?
일상계. "탐정 교훈 첫째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놈은 탐정으로서 실격입니다."가 딱 들어맞는 이야기.

8권
<<호토리와 수수께끼 왕국>>

판타지 세계에서 조세핀이 내 놓는 퍼즐을 풀어라!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레이튼 교수>>가 연상되는 판타지 퀴즈물.

<<대괴수 오야 고교에 나타나다>>
영화연구회에서 만든 촬영용 괴수 오야코돈을 부순건 누구?
추리물로 보기는 다소 부족했지만, 후쿠자와가 호토리를 '명탐정'으로 존경하게 되는 에피소드.

9권
<<대량구매 계획>>

베치코 과자는 어디서 만들어서 유통된 것인지?
추리물이라기보다는 SF에 가깝지만 시즈카 언니의 추적 수사는 볼거리.

10권
<<콘 데드엔딩>>

콘 선배가 방에서 살해한 사체를 힘을 합쳐 유기한다!
호토리를 위해 준비한 깜놀 이벤트. 나름의 반전도 좋았다.

<<Detective Girls 2>>
세탁소 아저씨 아라이는 어디로 사라졌나?
호토리의 추리에 탓층이 진심으로 놀라는 (그리고 호토리를 진짜로 인정하게 되는) 에피소드

11권
<<어둠 속에 도사린 목소리>>

옛 구민 센터 자리에서 있을리 없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토리가 타카부라는 별명의 아이를 착각했던게 진상. 
"탐정 교훈 첫째,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놈은 탐정으로서 실격입니다."

<<헌대판 얼룩 띠의 비밀>>
타케루의 친구 맛키가 줄넘기 줄에 다친 날, 친구들과 같이 쓰는 노트에 '긴 줄로 전원 죽인다'는 섬뜩한 문구가 써 있었다.
우연이 겹쳐 일어난 사건.

12권
<<호토리는 탁상 난로 안에서 추리한다>>

호토리 사촌이 취주악부 합숙을 갔는데, 스키장 통나무 집 1층 객실에 있을 남자아이들이 깜쪽같이 사라졌다...
1층이 2층이었다 - 눈에 파묻힌 1층이 있었다 - 는게 진상으로, 호토리 사촌은 2층을 1층으로 잘못 알았던 것. 추리 퀴즈에 가깝다.

13권
<<폐허촌>>

유령이 나온다는 폐촌 스사비 마을 탐험을 떠난 시즈카, 호토리, 콘은 마을에서 기묘한 조각상과 가면을 쓴 사람들을 목격하고 도주한다....
3부작으로 이어지는 긴 호흡의 모험 추리물. 재미와 흥미 모두를 갖춘 수작.

<<저주받은 비디오>>
오래전 영화 동호회 자료에서 발견된 수수께끼 비디오. 오야 고교의 이상한 풍경이 찍혀 있었다.
오야 고교 7대 불가사의를 찍었던 비디오로, 원래 불가사의였던 우물이 사라지고 화단이 새로 등장한 이유를 밝히는 조사로 이어진다. 세리자와 선생의 고백(?)으로 진상이 밝혀지기 때문에 추리의 맛은 부족하지만, 일상계로는 나무랄데 없다.

15권
<<안경 행방불명 사건의 전모>>

안경을 잊어버렸던 토시코에게 돌아온 안경은 지저분해져 있었다. 수영 보충 수업을 받던 토시코가 사라졌던 사건과 관계가 있었다.
토시코에 빙의(?)한 호토리의 '메소드 추리'가 돋보인다. 일상계로는 나무랄데 없다 (2) 

16권
<<대사건>>
호토리가 협박장을 받았다. 모리아키 선생님과 사귄다고 착각한 누군가로부터였다.
과거 모리아키 선생님을 좋아했다는 여선생이 범인으로, 일상계스러운 추리에 더해 호러블한 작화가 인상적.
<<악>>
모리아키 선생님 할아버지가 남긴 붉은 그림에 블랙 라이트를 비추자 기묘한 그림이 떠올랐다.
1권의 주사위와 조합하여 금고를 여는 방법을 알려주는 암호였다는 내용.
암호도 재미있지만, 할아버지가 연구했던게 '사람을 죽이는 그림'이라는 진상도 이렇게 끝내기에는 아까왔다.

2023/09/15

꽃밥 - 슈카와 미나토 / 김난주 : 별점 2점

꽃밥 - 4점
슈카와 미나토 지음, 김난주 옮김/예문사

공포 소설에 가까운 환상 소설 <<도시전설 세피아>>로 접했던 작가 슈카와 미나토의 단편집. 몰랐는데 나오키 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수상 이력이 중요한건 아니지만, 흥미가 생겨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전부 주인공 화자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오사카 변두리 어딘가에 있는 서민가 뒷골목을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웃간 소통이 많고, 아이들끼리는 항상 어울려 놀곤 했던, 우리나라로 따지면 <<검정 고무신>>이 떠오르는 그런 시대 그런 거리입니다. 이 거리에서 살아가는 소년, 소녀들이 접하게 된 다소 기이하고 환상적인 경험들이 그려지는데, 환생, 성불하지 못한 영혼과 같이 뻔한 것도 있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도 있습니다. 서정적인 묘사는 나오키 상을 수상할만하다 싶고요.

그런데 소년, 소녀가 묘한 경험을 한 뒤 한 뼘 성장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들이 겪은 경험은 기억에 깊숙한 자국을 남기기는 하지만, 그 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뻔하지 않아서 좋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래서 어쩌라고?'처럼 기승전결없는 단순한 추억담이에요. 그들이 겪은 기묘한 경험에 대한 설명도 거의 없고요.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으려던 작가의 의도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답답했습니다. 별다른 설명없이, 기승전결없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미쓰다 신조의 괴담물과 별로 다를게 없어요. 결말은 명확해서 괴담물보다는 이야기로서 완성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결말은 모두 추억과는 별 관계가 없어요....
무엇보다도 추리물도 아니고 호러도 아닙니다. 장르 문학 팬이 평가할만한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포일러를 알아봤자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지만요.

<<꽃밥>>
초등학생인 여동생 후미코가 열병을 앓고 난 뒤, 스물 한 살 때 살해당한 시게타 기요미라는 여자의 환생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기요미의 집을 보러가자고 졸라서, 나는 후미코를 데리고 히코네라는 동네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요미의 아버지가 딸이 살해당할 때 튀김을 먹고 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곡기를 끊었다는걸 알게 된 후미코는 기요미가 어릴 때 만들었다는 꽃으로 만든 밥을 기요미의 아버지에게 전해준다...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는 표제작. 후미코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초, 중반부는 사뭇 흥미진진했습니다. 후미코가 노트에 시게타 기요미 가족 이름을 써 둔 것, 어린 아이임에도 보이는 기묘한 행동들로 공포물스러운 느낌을 전해주거든요. 약간 <<오멘>> 같은 분위기였달까요?
아직 어리지만 여동생을 끔찍히 아끼고 가족으로 여기는 나의 모습을 통해서, 가족과 추억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 주는 것도 좋았어요. 이런 부분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하지만 환생임을 밝히고 난 뒤, 아버지에게 꽃밥을 전해준다는 최루성 가족 드라마스러운 전개는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너무 뻔했어요! 결말도 예상대로였고요. 뻔하고 무난한 탓에 점수를 줄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도까비의 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도쿄에서 오사카 서민촌으로 이사온 나 (유키오)의 주변에는 또래 친구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 중 모두가 은근히 따돌리던 한국인 형제가 있었다.
나는 형제 중 동생 정호와 친해졌지만 몸이 약했던 정호는 그 해 여름 죽고 말았다. 그리고 마을에 정호 귀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친구 중에 한국인 형제가 있다는 설정은 반가왔습니다. 도까비 라는 제목도 도깨비에서 따 왔으며, 귀신을 퇴치하기 위해 고추를 문에 걸어둔다는 한국적인 설정까지 등장하는 걸 보면, 실제 작가 유년 시절에 한국인 친구가 있었던게 아닌가 싶네요.
여튼 읽으면서, 정호 귀신 소동은 몸이 튼튼하고 강했던 정호의 형 준지가 자기들을 왕따시킨 마을에 대한 작은 복수극일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정호의 도까비가 소동을 일으켰고, 이유는 원래 정호의 몸 상태 - 몸이 아프고 약해서 방에만 있었다 - 때문이었다는건 의외였어요. 그래도 죽은 뒤 아프지 않고 자유로와져서 온 마을을 싸돌아다녔다는 건 꽤 신선했습니다. 유키오의 장난감으로 신나게 논 뒤, 드디어 성불하게 되었다는 결말도 그럴싸 했고요.

그러나 진짜 도까비였다는건 개인적으로는 별로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복수극으로 생각했던 탓입니다. 너무 추리, 범죄 소설에 뇌가 찌들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별다른 재미를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요정 생물>>
오사카 변두리 주택가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 소녀 세쓰코는 정체불명의 상인으로부터 '요정 생물'을 구입하게 되었다. 키우면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말처럼, 아빠의 부하로 잘생긴 훈남 다이스케가 찾아왔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엄마와 함께 도망가 버렸고, 세쓰코는 요정 생물을 죽여서 버렸지만, 그 뒤 아빠의 다른 부하 지로에게 강제로 몸을 빼앗긴 뒤,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


요정 생물이라는 기묘한 존재로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환상 소설에 가깝습니다. 요정 생물의 계란 프라이같은 생김새와 키우는 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 - 물은 사흘에 한 번 갈아줄 것. 물에 티스푼 절반 정도의 설탕을 풀 것. 강한 햇볕을 쬐면 안되고, 더운 곳에 두어도 안됨. 병을 바꿀 때는 같은 크기로. 병이 커지면 덩치도 커진다 - 등을 통해 <<그렘린>>과 비슷한 크리쳐 물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 알고보니 어린 소녀가 '성'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을 '요정 생물'과의 접촉에 직접적으로 비유하여 전개하는 작품이더군요.

디테일한 설정이 뒷받침된 요정 생물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었지만, 그 외에는 별로였습니다. 엄마와 다이스케가 불륜을 저지를거라는건 너무 뻔했으며, 성적인 소재를 일본 특유의 변태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낸 느낌이라 즐겁게 읽을 수가 없었어요. 세쓰코가 비참한 상황에 처한다는 결말도 와 닿지 않았고요. 왜 요정 생물이 세쓰코에게는 행운을 가져다 주지 않은걸까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참 묘한 세상>>
아키라의 백수 삼촌이 죽었다. 술에 취해 육교를 건너다 계단에서 떨어진 탓이었다. 그런데 장례식 후 화장터로 향하던 영구차가 멈춰버렸고, 관을 꺼낼 수도 없게 되었다. 영문을 모르던 어른들은 당황했는데, '나'는 삼촌의 애인이었던 가오루 씨를 부르면 될 것이라 여겼다...

장례식에서 난봉꾼 망자의 관 이동을 놓고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극. 사실혼 관계의 아내 외의 애인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는 반전은 살짝 깼고, 이 여자들이 모두 친구가 된다는 결말도 유쾌합니다. 제목 그대로 참 묘한 세상이에요. 하지만 딱히 재미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오쿠린바>>
40년 전, 나는 어린 나이로 '오쿠린바'인 먼 친척 할머니의 조수가 되었다. 오쿠린바는 주문으로 사람의 혼과 몸의 연결을 끊어 죽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임종하면서 나에게 주문을 알려주었지만, 나는 그 일을 잇지 않기로 결심했다.

줄거리 요약은 단순하지만 실제 작품에서는 오쿠린바가 주문을 외워 사람을 죽게 만드는 일화가 여러개 소개되며, 주문에 대한 디테일한 설정도 갖추어져 있습니다. 주문은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듣게 만들어야 효과가 있으며, 중간까지 들려주면 살아있지만 나머지를 듣게되면 바로 죽는다는 등으로요. 
하지만 일화들은 모두 비슷비슷했고, 설정도 작 중 그렇게 효과적으로 쓰이지 못합니다. 그냥 오쿠린바 할머니의 또다른 회고로만 설명되며, 주인공 화자 미사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재미있고 극적인 드라마로 끌고 나갈 수 있었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함 그 자체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얼음 나비>>
수십년 전, 오사카 변두리 거리 동네에 살았던 나(미치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왔다. 친구가 없는 탓에 묘지에 놀러갔다가 18살이라는 누나 미와와 친해졌다. 그녀는 아픈 동생을 구하기 위해 머나먼 타지로 나와 일하고 있다고 해다. 그리고 겨울에도 살아남는 신비한 나비 이야기를 해 주었다....

겨울에도 살아있는 나비를 통해 어린 시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아픈 사랑(?)과 사라져버린 추억을 형상화한 작품.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신비로운 상황이라는게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요. 겨울 나비를 보고 미와와 헤어지는 미치오의 모습은, 청춘의 환영인 메텔을 떠나보내는 테츠로의 모습과 겹쳐지기도 합니다. <<은하철도 999>>의 서정적인 버젼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하지만 겨울 나비에 대한 묘사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습니다. 미와가 유령이 아니라면 몸을 팔고 있을 거라는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결말은 둘의 파국이라는게 너무 뻔해서 의외성도 없었고 진부했습니다.
환상 소설 측면으로 보아도 '겨울 나비' 자체는 실존하는 것이기에 딱히 언급할게 없네요. 마지막에 함께 본 나비는 환상일 수 있지만, 그건 단지 관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상징일 뿐입니다. 특별히 장르 문학적으로 바라볼 부분은 없어요.
그 외에도 미치오가 왜 왕따를 당하는지 설명되지 않고, 미와와의 이별 후 급작스럽게 마사히코가 친구가 되자고 이야기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럴 바에야 왕따 설정은 빼고 그냥 외로운 아이였다고 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3/07/29

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 - 우타노 쇼고 / 이연승 : 별점 2점

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 - 4점
우타노 쇼고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우타노 쇼고에도가와 란포의 단편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결과물. 이런 류의 기획물은 그리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었는데, 역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도가와 란포의 원작을 이야기와 별 관계없이 무리하게 집어넣는 등 억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에도가와 란포와 상관없는 독립된 작품으로 발표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의자? 인간!>>
인기작가 스즈카는 창작 동반자였던 아키히로를 차버리고 부유한 간부급 공무원 하라구치와 결혼했다. 아키히로에게서 사람을 써서 접근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그리고 5년 뒤, 아키히로가 문자를 보내왔다. 지난 5년간 그가 어떻게 복수를 계획하여 실행해 왔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는 스즈카의 소파 속에 들어가 있다고 말했고, 스즈카가 문자를 보내자 정말로 소파 안에서 진동이 울려왔다.....


<<인간 의자>>에서 따 온 이야기. 의자 안에 남자가 들어간다는 설정을 따왔고, 비현실적인 인간 의자 제작과 안에 들어가는 과정, 방법에 대한 디테일은 유사하지만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원작에서 인간 의자가 변태의 집요함을 그리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여기서는 복수를 위한 장치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스즈카가 궁지에 몰리는 심리 묘사도 범인의 서간문으로만 이루어진 원작과의 차이점인데, 나쁘지 않았습니다. 결말로 이르는 빌드업 측면에서도 설득력이 충분했고요.

다만 진상, 그리고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아키히로는 의자에 여벌 휴대폰을 넣어놓고 전화를 걸면 진동이 오게 했을 뿐으로 실제로 안에 들어가 있던건 스즈카의 남편 하라구치였다, 그래서 아키히로가 의자 안에 있다고 굳게 믿은 가즈키가 의자를 난도질해서 하라구치는 죽고 말았다는건데 억지스럽고 뻔했기 때문입니다. 아키히로가 "나를 죽이세요"라는 메시지를 이렇게나 장황하게 보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스마트 폰 속 여자와 여행하는 남자가 등장하는 괴담물 (?). 현대 문명의 이기로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스마트폰'을 일종의 다른 세계(사후 세계?)와의 연결고리로 활용하고 있는건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자신이 너무 사랑해서 죽여버린 아이돌 그룹 멤버의 인공지능을 만들고, 인공지능을 학습시킨다는 설정도 꽤 참신했습니다.

하지만 설정을 빼면 <<어느날 갑자기>> 등에 나오는 이야기와 다를게 없는 단순한 괴담에 불과합니다. 기승전결도 애매하고, 이야기에서 합리적인 설명도 이루어지지 않는 탓입니다. 남자마저도 사후 세계에 속한 인물이라는 결말도 어정쩡했고요. 보다 독특한 반전 정도는 나와주는게 좋았을거에요. 환상 소설에 가까운 원작에 현대적인 설정을 덧붙였을 뿐, 새로움을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D의 살인 사건>>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이지만 주로 흥신소 의뢰로 먹고 사는)인 '나'는 도쿄 뒷골목 거리에서 살인 사건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거리에서 친해진 초등학생 세이야와 함께였다. 피해자 노조미는 SM 플레이를 즐기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였는데, 밀실에 가까왔고 접근 가능했던 인물들도 제한적이어서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하지만 '나'는 세이야가 범인일 것이라 추리했다. 목격자 두명의 증언 - 범인이 입은 옷을 각각 주황색과 검은색이라고 다르게 말한 - 이 근거였다. 사건 당시 세이야가 입고있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티셔츠는 주황색과 검은색 양쪽 모두에 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다소 변태적인 성행위 도중 살해당한 피해자, 밀실에 가까운 현장, 범인의 옷을 서로 다르게 말하는 목격자라는 소재를 따 와서 현대적으로 재 구성한 작품.
'나'의 추리는 좋았습니다. 옆 건물과 좁게 붙어있던 창문으로 초등학생은 충분히 침입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합리적이었고, 목격자의 증언이 달랐던 이유라며 제시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티셔츠도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으로 세이야를 범인이라고 지목하는건 솔직히 무리였습니다. 동기가 설명되지 못하니까요. '나'가 제시한, 성범죄를 저지르려다가 살인까지 저질렀다는건 너무 억지스러웠습니다.
진상은 더 억지에요. HR 기기 등 가상 현실을 활용하여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기다가 사망했다는건데, 가상으로 채찍질 같은 자극을 주는 기기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있다손 쳐도 사람이 죽을 정도의 충격을 줄 수는 없습니다. 안전 기준이라는게 있을테니까요. '비가시 광선' 때문에 옷이 두 가지 색깔로 보였다는 것도 요미우리 자이언츠 티셔츠만큼이나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고요.
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장비를 해체하고 숨겼다는 마사코의 행동도 말이 안됩니다. 그래봤자 SM플레이를 즐긴 흔적을 숨길 수는 없었거든요.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기다 '실수로' 죽었다는 것 보다는, 차라리 '살해당했다'는게 낫다고 여겼을 수는 있겠지만....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고, 단순 변사가 살인 사건으로 확대되어 버린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혹시라도 무고한 사람이 누명을 쓰게되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게다가 세이야가 '나'에게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나'에게 아동 성 추행범이라는 누명을 씌운다는 마지막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배신감을 느꼈다는걸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뒤의 설득력없는 추리와 결말을 덧붙이지 말고, '나'의 추리로 이야기를 끝내는게 바람직했습니다. 동기만 좀 합리적으로 만들어서요. 이 인물 구도에서 합리적인 동기를 만드는건 불가능해보입니다만.

<<오세이 등장을 읽은 남자>>
스무살 가까이 차이나는 어린 여성과 결혼 후 실직해 기둥서방처럼 얹혀사는 타로는 그 탓에 치매에 걸린 장인어른 고스케를 떠맡아 돌보게 되었다. 그게 끔찍하게 싫었던 타로는 란포의 소설 오세이 등장을 읽은 뒤, 고스케를 사고로 가장하여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소설처럼 고스케를 의류함에 넣고 질식사시킬 속셈이었다. 치매 탓에 유아 퇴행 현상을 일으키던 고스케가 했음직한 행동으로 의심을 살 이유는 없었다.
아내의 파리 출장에 맞춰 범행을 결의한 타로는 사전 조사차 직접 의류함 안에 들어갔다가 갇히고 말았다. 고스케가 별 생각없이 다른 물건들을 함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타로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서 아내와 통화할 수 있었다. 아내는 직접 구조를 요청하겠으니 기다리라고 말했다....


타로가 나이가 많은 탓에 평소에 스마트폰에 대해 무지했고, 잘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는 설정이 핵심입니다. 아내 유코가 원래 자기 것이었던 타로의 폰을 원격잠금하고, 회선도 정지시켜 통화를 못 하게 막아서 죽게 만든다는 트릭이 사용되었거든요.
이렇게 원작에 굉장히 충실한데다가, 나름의 트릭까지 사용된 점 만큼은 좋았습니다.

문제는 유코가 타로에게 품었던 살의가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유코가 진작부터 불륜을 저질러 왔다는 설명은 있는데, 이를 살의로 이어지게 만드는 설명은 좀 부족했어요.
치매 노인 탓에 의류함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늙은 치매 노인이 의류함 뚜껑 위에 무언가 덮어놓았다고 뚜껑을 열지 못한다? 저는 잘 와 닿지 않더라고요. 뭔가 다른 이유 - 자물쇠를 잠갔다던가 - 가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치매 노인이 평소에 무언가를 잠그는 (?) 행동을 많이 했다는 식의 설명이 덧붙여졌다면 더욱 좋았을테고요. 여러모로 설명이 부족해서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원작과도 유사하고, 현대적인 설정과 트릭을 효과적으로 사용한건 분명합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치매 노인 관련된 복수극은 오가와라 히로시의 <<냉혹한 간병인>>이 아직까지는 최고네요.

<<붉은 방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붉은 방에 모여 일탈을 즐기는 일곱 명의 남자들.
에도가와 란포의 붉은 방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 상영되는 극장에서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다. '죄를 물을 수 없는 살인'을 저질러온 T역의 배우가 공포탄이 아닌 실탄에 맞은 사건이었다. 관객 중에 경찰이 있어서 곧바로 수사가 시작되었고, 관객들은 모두 중요 참고인이 되었는데....


사건도 연극의 일부로 마지막 공연에서 선보인 특별 부록이었다는 이야기. 비교적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경찰관 투입과 수사가 지나칠 정도로 빨랐고, 이후의 과정이 모두 작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포일러를 막을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스포일러를 이용하여 관객들에게 더 충격을 주려고 했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흥분했던 관객이 무대로 난입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결말은 영 아니었습니다. 역시나 연극으로 여긴 관객의 반응 등 볼만한 점이 없는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없는게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더 깔끔했을거에요. 이 결말 탓에 감점하여 별점은 2점입니다.

<<음울한 짐승의 환희>>
나는 어린 시절부터 여자의 육체만 생각하는 변태였지만, 스스로를 철저하게 통제하여 교육자로 잘 살아오고 있었다. 어느날 산책 중 이상형인 여자 유키를 알게되어, 그녀가 운영하는 북유럽풍 잡화점 락카우스의 단골이 되었다.
그리고 두달 쯤 뒤, 내가 란포에 대해 잘 알고있다는걸 알게 된 유키가 도움을 청해왔다. 오에 슌데이라는 발신자가 트위터 DM으로 그녀에게 버림받았었는데, 그녀를 다시 발견하여 복수한다는 글과 에도가와 란포의 귀한 초판본, 그리고 그녀를 스토킹하는 글을 연달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짐작가는 사람이 없냐는 질문에 유키는 20년 전 사귀었던 여자 후배 가야코 이야기를 꺼냈다....


'그'라는 3인칭에서 '나'로, 다시 '그' 전환되는 시점이 급작스럽고 미묘한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 의도인지, 번역 오류인지 헛갈리네요.
여튼 변태인 '그'가 카메라를 설치해 유키를 협박하는 한편, 착한 단골로 위장하여 조력자 위치에 올라가지만 유키에게 정체가 드러나버리는 일련의 과정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키의 펜던트가 카메라였고, 그 때문에 '그'의 범행이 발각되는 결말은 억지스러웠습니다. 카메라를 몸에 달고다닐 이유가 딱히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키가 알고보니 트랜스젠더라서 살해했다는 일종의 반전도 신선하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영화 <<크라잉 게임>>이 발표되었을 때 정도의 시기였다면 모르지만요. 지금은 그렇게 대단한 트릭이라고 보기는 힘들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비인간적인 사랑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나는 마니와 가즈키를 유혹하다가 가즈키는 '시짱'이라는 피규어를 사랑한다는걸 알게 되었다. 분노가 폭발한 나는 가즈키를 속여 집에 침입한 뒤 시짱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가즈키가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시신의 옷 주머니에 부서진 인형 머리가 들어 있었다고 했다.....
라는 증강현실 게임 엔딩을 접한 나는 다시 가즈키를 골라 게임을 시도했다. 그런 나를 방해한건 남편 가즈키였다. 게임에 빠진 나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가즈키와 다툼을 벌이다가 그를 살해하고 말았다.
출소 후 70세 노인과 혼인 관계를 맺고 조용히 살게 된 나는우연찮게 노인 스나무라 다케오에게 교도소 주문에 대해 털어놓았다. 노인은 혼자서 주문에 대해 조사한 뒤,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주문에 등장하는 단어는 모두 1990년에 방영된 TV 프로그램이었고, 주문은 방송 채널 번호를 이용하는 암호문이었다. 암호문은 특정 지역을 의미했고, 노인은 그 곳에 무언가를 숨겼으며 그건 1990년에 일어났던 흉악한 강도사건의 절도품이라고 추리했다.
하지만 방문한 장소는 이미 신축 빌라가 들어서 있었다....


기괴한 사이버 애정극에서 시작해서 암호 해독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은 짤막한 쇼트쇼트 블랙 코미디로 이어지는 독특한 작품. 수록작 중 유일하게 원작을 접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암호 해독은 재미있었습니다! 교도소에서 구전되는 '행운을 불러오는 주문'이 90년대 당시 TV 프로그램의 명칭이었다는 아이디어도 좋고, 이걸 어떻게 글자로 치환하는지?에 대한 연구와 노력이 잘 그려지고 있거든요. 노인은 시간이 남아돌기 때문에 끈기있게 도전하여 풀어낼 수 있었다는 설정도 좋고요. 암호문을 풀어낸 뒤, 암호문이 가리키는 장소에 무엇이 있을지?에 대한 추리역시 합리적이었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를 조사해서 밝혀내는데 아주 그럴싸하게 설명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야기가 따로 논다는 겁니다. 특히 화자인 유리나가 겪은 게임 속 사건이 그러합니다. 재미는 있는데, 암호 해독 이야기와 별로 관계는 없어요. 유리나가 감옥에 간 이유인 남편 살해 동기에 불과하거든요. 이렇게까지 펼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란포의 원작을 너무 의식한 것 같아요. '비인간적인 사랑'을 이렇게 무리하게 삽입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차라리 두 개로 분리하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만큼 두 이야기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보물이라 생각했던 증권이 버블 지나면서 파산한 회사라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는 결말도 뜬금없었을 뿐더러, 어디서 많이 보아왔던 결말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다른 설정은 다 없애고, 나이 많은 노인과 함께 사는 손녀딸이 교도소 자원 봉사를 갔다가 주문을 들었다는 정도로 풀어나가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이상한 설정과 앞과 뒤의 곁가지 이야기는 불필요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남편을 살해해서 복역 후 출소한 유리나가 오갈데 없어서 나이 많은 노인과 결혼했다는 설정은 의아했습니다. 아무리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라도, 남편 살인범과 함께 살고 싶을까요? 젊은 여자가 필요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일본에서는 흔히 있는 상황인지 궁금해집니다.

2023/06/09

All of panpanya

최근 푹 빠진 작가 panpanya의 국내 소개된 작품 8편을 모두 완독하였습니다. 제 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주먹밥이 굴러가는 마을>> (5)
  2. <<두 번째 금붕어>> (4)
  3. <<동물들>>, <<구아바노 홀리데이>>, <<게에게 홀려서>>, <<물고기 사회>> (3)
  4. <<침어>> (2.5)
  5. <<아시즈리 수족관>> (1.5) 
전권 평균 별점이 3점 이상이라니 놀랍네요. 
완독 기념으로 전권 리뷰를 올립니다. 상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시즈리 수족관 - 4점
panpanya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초기작 중심 단편집. 작화는 안정되어 있지 못합니다. 편안함과 거침이 공존하고 있어요. 특유의 부드럽고 편안한 그림체가 아닌, 정석적인 만화식 펜 드로잉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몇 편 수록되어 있는게 특이했습니다. 뎃생력은 영 아니었습니다만.
수록작은 기묘한 수족관, 기묘한 상점가, 기묘한 박물관, 두 번째 교토 타워와 같은 비현실적인 공간을 방문한 방문기가 많습니다. 심지어 프랑스까지 가서 망자의 거리를 방문할 정도입니다. 환상적인 공간 구성을 보여주기는 하는데, 문제는 대부분 '우연히' 그 곳에 가서 기묘한 공간을 보고 올 뿐 특별히 기승전결이 갖추어진 완성된 이야기가 없다는 점입니다. 설정이 치밀하지 않고 기존 작품들의 재구성이나 패러디가 많아서 신선함도 부족하고요.
그나마 이야기로 볼 수 있는건 <<심부름>> 정도입니다. 어머니가 써 준 심부름 메모에서 알 수 없는 글자로 쓰여진걸 사기 위해 없는게 없다는 완전 상점가 까지 여정을 떠나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를 구입해 온다는 이야기죠. 

주인공의 기묘한 착안에 따른 노력과 그 결과를 보여주는 특유의 매력 포인트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판기 안에 동물들이 들어가 움직인다는걸 알고 나서, 전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자동 자판기를 자유연구 과제로 제출하여 동물들에게 자유를 선사한다는 <<자판기>> 정도만이 기대에 값합니다.
그 외에는 수족관에서 보여줄 물고기를 잡으러 떠나는 이야기로 주인공을 구하고 격류에 휩쓸린 레오나르도가 물고기가 되어 돌아온다는 결말의 <<너의 물고기>>가 눈여겨볼만 했습니다. 딱히 재미가 있던건 아니지만, 파트너 레오나르도가 첫 등장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반면 제목의 수록작이야말로 일종의 맥거핀에 가깝습니다. 열 페이지도 안되는 짤막한 작품으로 별 비중은 없거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기대와 전혀 달랐고, 습작 수준의 수록작도 많아서 점수를 줄 여지가 없습니다.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구해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침어 - 6점
panpanya 저자/미우(대원씨아이)

단편보다 짧은, 쇼트쇼트라 부를 만한 초단편이 많이 수록된게 특징. 
벌 서면서 이런저런 새로운 걸 깨닫는다는 <<벌 서는 법>>, 일상 속 이야기를 짧은 분량 안에서 무려 12년에 걸쳐 빌드업하고, 평범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끝맺는 <<가로수의 순서>>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비교적 긴 이야기로는, 비가 올락말락 하다가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질 때 우연히 만난 개구리 덕분에 무사히 귀가한다는 <<비 오는 날>>이 기묘하면서 따뜻하고 서정적인 느낌이라 좋았고요.

표제작, 그리고 젤리같은 물고기 뉴 피시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을 그린 <<뉴 피시> 두 작품은 '물고기'를 주 소재로 삼은 단편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뉴 피시>>는 물고기들이 살기 위해 만들어낸 식품이었는데, 맛이 없어서 외면받았지만 주인공 활약으로 기사회생하게 된다는 내용이고, 표제작은 전설의 편안한 오더메이드 베개 '침어'의 존재를 알고 쿠슈 카고시마로 떠난 주인공과 레오나르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너무 편안해서 베개로 쓰이던 물고기 '침어'는 실존했습니다. 그러나 하룻밤 베고나면 죽어버려서 (물밖에 나와 하룻밤이 지나게 되니까), 그것과 최대한 비슷하게 베개를 만든게 현재의 '침어'였습니다. '침어' 베개를 구입한 주인공은 운 좋게 해변에서 진짜 침어를 한 마리 주웠고, 그래서 가끔 침어에 얼굴을 파묻곤 한다는 결말로 끝나는데,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일상 이야기처럼 펼쳐놓는 전개가 매력적이었습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반면 신주쿠 지하의 이상한 공간에서 피자 만두를 찾는 <<지하답사>>는 제법 길지만, 작화나 전개 모두 초기작 느낌으로 <<아시즈리 수족관>>과 비슷하더군요. 솔직히 별로였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직은 스타일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감점합니다만, 볼 만한 작품도 제법 많았습니다.


두 번째 금붕어 - 8점
panpanya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연구'를 바탕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많다는게 특징. 소재도 다양합니다. <<멜로디>>는 저녁이 되면 마을에 울려퍼지는 음악의 정체가 무엇인지 찾아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서 울려퍼지는지를 찾아내기 위해 고민해서 아이디어를 짜내는 과정도 재미있고, 결국 찾아낸 음악의 정체도 기발했어요. '숨바꼭질'을 잘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와 고민이 펼쳐지는 <<숨바꼭질의 주의사항>>, 매미 소리를 겨울에 틀면 따뜻함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계절 보내는 법>>, 완벽한 등교길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펼쳐보이는 <<통학로의 소양>> 등도 모두 독특하고요. 그 외에도 소품 서랍을 정리하는 방법, 풍선 편지를 개조했더니 영원히 날게 될 지도 모르는 물건이 되었다는 등 다른 수록작들도 갖가지 분야에 대한 연구와 고민을 망라하여 선보여줍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주인공이 항상 무언가를 깨닫거나 익히고 끝나는데, 그게 예상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것도 재미요소였어요.

연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상 생활 속 사물에 대한 독특한 고민을 보여주는 작품도 많습니다. 전자동 부적 제작 기계가 어떻게 '공덕'을 부여 받는지를 그려낸 <<길흉화복 챙기기>>는 정말 생각도 못했던 전개를 보여줍니다. 해변의 집과 해수욕장의 시즌 오프 방법이 등장하는 <<바다 폐장하는 법>>도 그러하고요.

학교에서 키우던 금붕어를 잃어버린 뒤 새로운 금붕어를 구입하러 나서는 표제작은 그닥이었지만, 전체적으로 panpanya의 독특함과 기발함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좋은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구야바노 홀리데이 - 6점
panpanya 지음, 장지연 옮김/미우(대원씨아이)

단편집이기는 한데, 무려 3부작 여행기 <<구야바노 홀리데이>>가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
표제작 외에는 작가의 다른 단편들처럼 뭔가를 만들고, 찾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엉터리 일기술>>, <<비교 비둘기학 입문>>, <<부호>> 등 일상에 밀착해 있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일상 속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린다는건 분명 대단한 재능이라 생각됩니다. <<고구마 줄기 원더랜드>>는 는 고구마를 캐면서 땅 속을 헤집고 다닌 끝에 진짜 맛있는 군고구마를 알게되지만, 다시 캐 낼 수는 없게 되었다는 다소 환상적인 이야기인데, 결말만큼은 현실적이라는게 인상적이었고요.

그런데 표제작은 구야바노를 찾기 위해 필리핀을 간 여행기라 달리 기발한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지는 못해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바라보는 시각이 독특해서 재미있기는 했는데, 작가의 특징이 온전히 발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게에게 홀려서 - 6점
panpanya 지음/미우(대원씨아이)

기묘한 반전들이 있는 작품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게 특징. 
워싱턴 조약에 위배되는 왕도룡뇽을 키우다가 아마존으로 가서 놓아주지만, 알고보니 왕도룡뇽은 일본 원산의 고유종이었다는 <<왕도룡뇽 사건>>처럼요. 최고는 완벽한 일요일을 보내기 위해 토요일 하루를 온전히 일요일 준비에 바치는 <<perfect sunday>>입니다. 완벽한 일요일을 위해 온갖 기계 장치를 만들고, 일요일 산책 코스까지 사전에 답사하는 등 준비를 마치지만 '소풍은 당일보다 전날 준비와 저녁이 더 설레었던 것 같다'는걸 깨닫고, 알고보니 그 날이 일요일이었다는 반전, 다행히 다음날도 공휴일이었다는 반전이 계속 이어집니다.
 
쇼트쇼트 중에서는 <<decoy>>가 기억에 남습니다. 호수에 띄워놓은 가짜 나무 오리를 디코이라고 하는데, 동료로 착각하고 찾아온 오리를 그리는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림을 계속 그러다보니 수면을 잘 그리게 되있다는 다소 황당한 결말로 끝납니다.
암흑 전골 세트가 초심자 용이 있었다는 <<전골>>, 파인애플이 어떻게 열리는지 몰라 조사하러 나섰지만 결국 사실을 알아내지 못한다는 <<파인애플을 모르신다>>, 살아있는 돌고래 계산기가 리만 가설을 풀어낸다는 <<계산기의 마음>>도 재미있었고요. 인터넷에서 먼저 유명해진, 단무지만드는 프라모델이 나오는 <<DANMUJI DREAM>>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별다른 내용이 없었던 표제작이나, 전철에서 몸을 두고 내린다는 등으로 비교적 평이한 발상의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어서 수록작별로 재미와 수준에 있어 다소 편차가 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동물들 - 8점
panpanya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앞 부분은 일상 생활을 소재로 - 특히 이사에 대해서 - 에서 지극히 평범하지만 비현실적인 느낌을 전해주는 단편들이, 뒤에는 제목에 걸맞게 붉은귀 거북이라던가, 야생동물 마미와 같은 동물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 주인공을 쫓아다니는 동물 마미에 대해 그려낸 <<마미>>는 panpanya 작품 치고는 꽤 큰 스케일 - 일종의 대형 로봇까지 등장하는 등 - 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반면 <<무지나>>는 마미와 똑같은 동물인 무지나가 등장하는데, <<마미>>와는 다르게 일상과 결합된 전개를 보여준다는게 재미있었어요. 주인공이 무지나를 구해주자, 무지나는 은혜를 갚기위해 도토리를 가져오고 주인공이 도토리로 빵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는 식으로 전개되거든요. 같은 동물로 정 반대 분위기의 이야기를 그려낸, 일종의 '빛과 그림자'인 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일상계 쪽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panpanya 특유의 상상력과 기발함이 가득하며, 뒤에 용어집이 수록되어 있는 등의 디테일도 좋았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주먹밥이 굴러가는 마을 - 10점
panpanya 지음, 장지연 옮김/미우(대원씨아이)

환상의 동물 츠치노코를 발견하고 난 뒤 생활을 그린 <<츠치노코 발견하다>>, 츠쿠바산 관광 이벤트에 당첨되어 말하는 여행권과 함께 투어를 떠나는 꽤나 긴 이야기인 <<츠쿠바산 관광 불안내>>, 쓰레기도 돈을 주고 사는 상점에 대한 <<도가니>>는 기발한 상상력을 토대로 한 가공의 세계관을 재미나게 묘사한 작품들입니다.
표제작인 <<주먹밥이 굴러가는 마을>>은 주먹밥이 굴러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내용인데, 비현실적인 설정을 일상과 결합하고, 그것을 '연구'하면 어떤 결과물이 될까?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이고요.
언덕 위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올라가는 <<거기에 언덕이 있으니까>>와 카스텔라풍 찜케이크의 맛에 빠져 잘 수급되지 않는 찜케이크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카스텔라풍 찜케이크 이야기>>는 일상의 디테일을 극대화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끔 등장하는 짤막한 일기도 이러한 일상성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환상, 기발한 설정, 연구, 일상 등 panpanya의 대표적인 매력 포인트를 잘 알려주는 좋은 작품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엘리베이터와 케이블카의 차이가 뭘까요? 좌석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하네요. <<츠쿠바산 관광 불안내>>에 나옵니다!


물고기 사회 - 6점
panpanya 지음, 장지연 옮김/미우(대원씨아이)

'일상'을 특별하게 그려내는 panpanya의 매력 포인트가 잘 살아있는 작품집. 
<<맞지않는 계절>>은 크리스마스 산타 썰매의 순록은 아르바이트였고, 썰매도 평상 시에는 주차 중이라는 독특한 일상성이 좋습니다. 일상과 환상의 결합을 보여준달까요. 기묘한 일상성이 돋보이는 작품들도 매력적이었어요. 여행을 갔다가 이상적인 기념품을 직접 만드는 <<선물의 마음가짐>>이 대표적입니다. 최애빵 '카스텔라 풍 찜 케이크'를 소재로 한 연작은 일상성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카스텔라 풍 찜 케이크 생산 종료를 앞두고 마지막 생산품을 구하기 위해 편도 2시간 반 걸려 3개를 확보한다던가 -서울에서 대전 정도를 가서 호두과자를 사온 느낌 -, 직접 만들기위해 다양한 연구를 거치고, 생산이 재개된 후 재 구입을 위해 발품을 팔다가 안정적인 주문 방법을 알아내는 과정을 담담하지만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레시피 소개도 충실하고요.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을 정도에요.


하지만 물고기가 진화하여 인간의 해산물 가공 공장을 인수하여 자체 통조림을 납품하게 된다는 표제작은 별로였습니다. 일상도 아니고, 환상으로 보기에는 상상력이 다소 부족했습니다. 일상 쪽에 집중하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