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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7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위한 뷔페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 권도희 : 별점 2점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위한 뷔페 - 4점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지음, 권도희 옮김/엘릭시르

"녹색은 위험", "제제벨의 죽음"으로 유명한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단편집. 5부 구성으로 모두 1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통 본격물, 범죄물,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등으로 수록작 장르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기대했던 정통 본격물의 비중은 무척 적은 탓입니다. 트릭도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추리도 억지스러워서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주기 어려운 작품들이 많아요. '기묘한 맛' 장르 느낌으로 마지막 한 줄, 한 문단으로 반전의 매력을 전해주려고 노력한 티는 역력하지만 이 역시 모두 성공한건 아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5부 구성도 1부 코크릴 칵테일을 코크릴 경감 시리즈로만 모아 놓았다는 것 외에는 어떤 의도로 분류하여 구성되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예를 들어 "살인 게임"은 앙트레로 묶기 어려운, 이 단편집 최고의 메인 요리라 생각되거든요. 오히려 앙트레 선택에 5부 블랙 커피에 수록된 심리물들을 포함시키고, 범죄물을 메인 요리로 묶어 구성하는게 더 일목요연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범죄물도 심리 묘사가 중심이거나 조금 가벼운 이야기와 묵직한 본격물을 구분하여 배치하고요. 제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부 아페리티프(식전주) : 코크릴 칵테일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
"피를 나눈 형제"
* 기존 구성에서 코크릴 경감의 등장을 알리는 작품 한 편, 그리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선정.

2부 앙트레 선택
"이 집에 축복을"
"수군거림"
"발코니에서"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
* 심리 묘사 중심의 작품들로 구성.

3부 르 푸아송 (생선 요리)
"말벌집"
"너무나 괜찮은 사람"
"신의 힘"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 말벌집은 '굴'이 사용되어서 생선 요리로 분류했고 다른 작품들은 심리 중심의 범죄물들.

4부 리플렛 프로스펠 (메인 요리)
"살인 게임"
"희생양"
"여기 잠들다"
"회전 목마"
정통 본격 추리 범죄물들.

5부 데세르 (디저트)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가볍고 유쾌한 이야기.

6부 블랙 커피
"잔 속에 든 독"
도서 추리물로 '커피'가 핵심 소재라는 점에서 블랙 커피로 분류.


마지막으로 수록작들의 간략한 리뷰는 아래에 요약하였습니다.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읽으시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1부 코크릴 칵테일.
코크릴 경감이 활약하는, 늙은 형사의 회고담인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 뺑소니 살인과 정부 살인 사건을 저지른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인 "피를 나눈 형제", 성질 고약한 부자 노인이 후처를 맞은 결혼식 날 독살당한다는 "말벌집", 남편의 정부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독살한 아내 시점의 도서 추리 소설 "잔 속에 든 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두 범인의 조작을 코크릴 경감이 간파한다는 작품들로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에서는 유명 극단의 톱 스타 주연 배우 제임스 드래건의 아내가 살해당했는데, 극단 배우들이 모두 나서 경찰 앞에서 연극을 펼칩니다. 이를 통해 제임스 드래건이 경찰에 연행되지만, 알고보니 범인이 제임스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아서 드래건이었다는게 밝혀집니다.
"피를 나눈 형제"에서는 쌍둥이 형제 둘 중의 한 명이 범인이고, 한 명은 알리바이가 확실히 있었다면 누구를 체포해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가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둘 다 자기가 알리바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밝혀내는건 쉽지 않아 보였거든요. 쌍둥이 형제가 서로 상대방의 옷에 증거를 남겼다는 반전도 기발했고, 결국 진흙탕 속으로 서로를 밀어넣어 파멸하는 결말도 깔끔했습니다.
"말벌집"은 1부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처집니다. 1966년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이 후원한 영국추리작가 협회 회원 대상 단편소설 경연대회 1등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기대가 컸는데 말이죠. 이유는 범인 엘레자베스를 체포할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훈제 연어를 준비하는게 어려웠다'는 말이 그렇게 큰 증거가 된다는건 믿기 힘듭니다. 엘리자베스가 사건을 연출했다는 것도 정황 증거에 불과하며 굴 안에 청산가리 캡슐을 숨겨 먹였다는 트릭도 억지스러웠고요.
"잔 속에 든 독"은 범인 스텔라가 범인으로 몰리자, 임기 응변으로 남편 등을 범인으로 지목한다는 내용으로 도서 추리 소설과 심리 스릴러를 잘 결합한 좋은 작품입니다. 완벽하게 처리한 줄 알았던 독이 든 커피잔이 결정적 증거가 된다는 마지막 한 마디도 좋았고요. 1부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괜찮았어요.

2부 앙트레 선택.
유명한 밀실 트릭이 등장하는 "살인 게임", 일종의 시간차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하는 "희생양", 거짓 증언으로 선량한 히피가 파멸에 이른다는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의 세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살인 게임"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에서도 소개되었던 단편이지요. 이전에 다른 단편집을 통해 읽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범인이 경찰로 변장한 뒤 밀실이었던 현장에 숨어있다가, 밀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경찰 중 한 명으로 위장했다는 트릭이 기발합니다. 마지막에 이야기를 듣던 노인의 한 마디로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도 서늘했고요. 다만 범죄자의 혈통은 유전된다는 주장이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는건 현재 시점에서 보기에는 낡은 사고방식이라 아쉽네요. 그래도 2부에서는 최고작입니다.
"희생양"은 13년 전, 유명 마술사 미스테리오소가 저격당해 충직한 하인 톰이 대신 죽었던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저격용 총의 방아쇠에 묶인 끈에 사과 봉투를 위에서 떨어트린 장치 트릭인 것 처럼 풀어나가지만, 일종의 시간차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트릭이 너무 별로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범인이었던 경찰이 사과 봉투를 터트려 총소리를 위장한 뒤 진짜 저격은 나중에 벌였다는데, 사과 봉투를 터트려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총 소리로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것 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두 번째 총소리는 어떻게 숨겼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 마지막에 소년이 미스테리오소를 살해한다는 결말은 이게 뭔가 싶더군요. 마지막에 반전 요소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강박같은게 있었던걸까요? 2부, 아니 수록작 전체를 통틀어서 최악의 작품이었습니다.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는 웨일스를 무대로, 아이들이 자신들의 일탈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했던 거짓말에서 시작된 거짓말의 연쇄가 진범의 알리바이를 굳건하게 만들며 선량한 히피 무리의 리더 크리스토가 누명을 쓰고 마는 과정이 숨이 턱턱 막히도록 묘사됩니다. 셜리 잭슨이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방불케할 정도에요. 정통 추리물은 아니지만 볼만한 범죄 심리 스릴러였습니다.

3부 입가심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한 편이 소개됩니다. 블란쳇 부인의 진주 목걸이를 훔치려는 컴퍼트 양과 스네이스 씨의 작전, 그리고 이들을 농락하는 진짜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호지 양이 얽힌 재미난 범죄극이 펼쳐집니다. 진짜 도둑은 하녀 글래디스였다는 마지막 반전도 일품이고요. 그야말로 '입가심'에 적절한 유쾌하면서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쾌작입니다.

4부 프티 푸르
'프티 푸르'는 한 입 디저트라고 하는데, 수록작들 대부분이 완전범죄 계획 살인물입니다. 한 입에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내용들이네요.
하여튼, "여기 잠들다"는 아내를 사고사처럼 위장하여 죽이려는 제럴드의 치밀한 계획을 그립니다. 아내가 수영을 좋아해서 익사시킨다는 계획은 나쁘지 않았어요. 실제로도 거의 성공했고요. 하지만 알리바이를 위해 고용했던 타이피스트 부처 부인이 제럴드를 죽인다는 반전은 뜬금없었습니다. 부처 부인의 외모라던가 성격 묘사를 덧붙여주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회전 목마"는 자신을 협박하던 빈들 씨를 살해한 하틀리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범죄물로도 좋은 수준이지만, 빈들 씨와 하틀리 부인의 꼬마 아이들이 범죄에 대해 모든걸 알고 서로의 속내를 감춘채 진상을 이야기하는 묘사도 서늘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는 악당 호러호러 족장을 살해한 이야기인데, 계획에 따른 완전범죄는 아니었습니다. 범인이 풀려났던건 목격자였던 존스 부인이 유리창 반사로 일으켰던 착각 탓이었지요.
"발코니에서"는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웃 때문에 히스테리를 일으킨 제닝스 부인이 남편을 살해하기에 이른다는 내용의 심리 스릴러 범죄물입니다. 히치콕의 "이창"을 뒤집어 놓은 설정과 제닝스 부인을 바라보는 이웃 시점의 묘사를 곳곳에 삽입하다가, 이웃들이 실존하지 않았다는게 마지막 반전으로 드러나는 결말이 독특했습니다.

5부 블랙 커피
수록작 네 편 중 세 편은 여자의 심리 중심의 이야기입니다. "이 집에 축복을"은 자신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를 예수라고 믿는 여자의 심리를, "너무나 괜찮은 사람"은 그야말로 딱 한가지만 제외하고는 너무나 괜찮았던 남자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심리를, "수군거림"은 자신의 실수로 거짓말을 지어내서 사촌과 아빠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여자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 "신의 힘"은 완전 범죄물입니다. 범인 에반스 경관의 범행 계획은 그냥저냥이지만, 딸과 손녀를 죽게만든 범인 젤링크스를 옭아맨 설정은 일품이었습니다. 에반스 경관의 거짓 증언으로 젤링크스는 반박하지 못하고 무죄를 받아들인 뒤 협박받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는건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였습니다.

2021/06/04

사형에 이르는 병 - 구시키 리우 / 현정수 : 별점 2.5점

사형에 이르는 병 - 6점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에이치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케이 마사야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는 승승장구했지만 고등학교 입학 후 전락했다. 그래서 지금은 3류 대학교에 겨우 입학하여 아웃사이더로 다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린 시절 단골 빵집 주인 하이무라 야마토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9명을 연쇄 살인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였다. 마사야와의 면회에서 그는 9번째 범행만은 저지르지 않았다며, 진실을 밝혀달라고 부탁했다. 

하이무라 야마토의 과거, 그리고 범행에 대해 조사에 나선 마사야는 어머니 에리의 과거를 알아냈다. 그녀는 야마토와 같은 학대 아동으로 어린 시절 한 때. 같은 양모 밑에 있었었다. 그리고 결국 변해가는 자신과 함께 충격적 사실에 마주하게 되는데...

천재 연쇄 살인범이 저지르지 않았다는 살인 사건의 진상을 더듬어가다가,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는 내용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천재 범죄자가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는 하늘의 별처럼 많습니다. 감옥 안에 갖혀 있는 천재 범죄자는 하니발 렉터라는 거물이 수십년 전에 이미 보여줬던 설정이고요. 그러나 이 작품에는 주인공과의 두뇌 대결이나, 주인공을 도와 또 다른 범죄를 막는 다른 천재 범죄자 작품들과는 분명히 차별화 되는 점이 있습니다. 천재 범죄자 하이무라 야마토의 진짜 목적이 가케이 마사야를 조종하는데 있었다는 반전입니다. 이 반전이 몇 가지 의문들, 왜 마사야에게 편지를 보냈는지? 9번째 범행인 네즈 가오루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 등이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답으로, 작가는 마사야가 야마토의 아이인 것 처럼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흥미로운 전개이지만, 이는 마사야의 모친 에리에 의해 부정됩니다. 그리고 야마토가 사이코패스이며 자신의 통제력을 발휘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마사야를 골랐다는게 밝혀집니다. 네즈 가오루를 살해한 진범으로 의심되었던 가나야마 이츠키를 통해서요. 즉, 마사야는 수많은 야마토의 조종 희생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는게 진상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나야마 이츠키를 우연히 만나게 된 이유도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그 역시 희생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이무라 야마토의 목적을 사이코패스에 대해 비교적 충실한 사례와 근거들로 뒷받침하면서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작가가 저도 얼마전에 읽었었던 "사이코패스"라는 책을 많이 참조한 듯 싶더군요. 그 책에 나왔던 사이코패스의 특징 - '강력한 통제력'과 '빼어난 거짓말 솜씨',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능력' - 이 이야기 안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거든요. 아울러 사이코패스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면서, 야마토가 이츠키를 조종하기 위해 '3초 안에 대답할 것' 등의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를 9번째 네즈 가오루 사건과 연결시키는 과정도 감탄스러웠습니다. 어쨌건 9번째 범행도 야마토가 저질렀다는것 뿐만 아니라, 왜 그 사건이 다른 사건과 범행 수법이 사뭇 달랐는지, 왜 네즈 가오루가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는지, 왜 이츠키가 계속 그 사건과 엮였는지가 명확하게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독특한 점을 제외한 다른 모든건 반전이 있는 일본 범죄 스릴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단점은 큽니다. 전능한 천재 사이코패스 야마토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일본 소설이나 만화에서 수도 없이 등장해 왔던 쿨한 천재 악당 그대로인 탓입니다. 그 외 캐릭터도 극단적으로 과장되어 있습니다. 사람 대하는게 서투른 마사야가 여러 증인들과 만나 인터뷰를 서슴없이 능숙하게 진행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졌고요. 그 외에 시점을 간혹 바꿔가며 독자에게 혼돈을 준다던가, 불필요하게 과장된 잔혹한 범죄 묘사 등은 그야말로 일본 범죄 스릴러물의 단점만 모아서 집대성한 느낌이었습니다.

야마토의 목적을 드러내는 전개는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세세하게 들어가면 억지스러운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마사야가 진행하는 야마토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조사의 경우, 솔직히 불필요했습니다. 9번째 살인을 야마토가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조사라면, 야마토의 과거는 조사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소설로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였던 셈이지요. 

야마토의 피해자이자 사건 증인 중 한명이었던 가나야마 이츠키를 9번째 범행 용의자라고 단정짓는 과정도 마찬가지에요.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마사야와 엮이기는 했지만, 다른 근거는 하나도 없어서 억지스러웠습니다. 그 외에도 마사야의 친부가 누구인지, 가나야마 이츠키는 어떤 인물인지를 조사하는 과정도 작위적입니다. 마사야가 야마토의 아들인지는 어머니에게 전화로 물어보면 됐고, 가나야마 이츠키도 그냥 만나면 됐으니까요.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억지로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요?

아무리 일본 검찰이 기소한 범죄를 유죄로 만드는 경향이 강하다 하더라도, 3류 대학 법대생도 금방 눈치챌 정도로 이상한 사건을 엮어서 야마토의 범죄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긴, 애초에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찐따 가케이 마사야가 중학교 시절 약간의 접점밖에 없었던 야마토의 부탁으로 조사에 나선다는 것 부터가 억지스러웠으니 더 말해 무얼 하겠습니까.

마지막에 마사야와 사귀게 된 아카리도 야마토에게 조종받고 있었다는 에필로그도 과했습니다. 사족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녀는 야마토가 납치했지만 운 좋게 살아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는 소녀일텐데, 그렇다면 그녀가 야마토에게 조언을 얻으며 조종당하게 된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걸작 잔혹 서술 트릭 작품인 "살육에 이르는 병"이 떠오르는 제목이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나름의 독특한 맛은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전형적인 일본식 범죄 스릴러가 취향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05/07/23

정인숙 사건 - 나명순 르포집 : 별점 2점

1988년에 나온 책이니 당시에는 화제가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냥 잊혀진 한국 현대사의 한토막인 정인숙 사건에 대한 르포집입니다.

정인숙 사건은 아마 지금은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간략히 소개한다면, 박정희 독재 당시 주미대사를 손가락으로 부르며 상당한 재력과 권력을 손에 넣었던 미모의 여인(아마도 고급 콜걸?) 정인숙이 1970년 자동차를 타고 귀가중 운전하던 오빠 정종욱의 총을 맞고 살해당한 사건을 말합니다. 당시에, 그리고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미스테리가 몇 가지 존재하기 때문에 이 여인의 이름이 역사에 한토막으로 남게 되었지요.

미스테리는 크게 2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정인숙이 낳은 아이는 누구인가? 이미 수차례의 임신 중절 수술을 경험했으며 직업 특성상 아이를 가지는 것이 불리했을 것이 당연한 정인숙이 애써 낳아 기른 아이는 누구의 아이였을까? 이 아버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정인숙을 죽이고 희생양으로 오빠 정종욱을 내세워 이 사건의 수사를 졸속으로 처리하게 하였을까?
  2. 집에서 가까운 위치에 동기마저 불명확한 오빠의 충동적 살인은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진범은 과연 누구인가?
물론 이외에도 사건에 관련된 소소한 수수께끼들, 예컨데
  1. 결국 발견하지 못한 권총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2. 범행에 사용된 권총을 제공했다는 신현정씨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등도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앞서 말한 저 두 가지라 생각됩니다.

첫 번째 미스테리는 정인숙의 부와 권력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던 부분이기도 해서 더욱 관심을 자아내는데, 일단 이 책에서는 소문과 추론을 통해 인물을 두 명, "박정희"와 "정일권"으로 좁히고 있습니다.
두 번째 미스테리도 당시 수사와 재판은 졸속이었고 다른 곳에서 살해당해 옮겨졌다라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을 만큼 정종욱은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추론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고요. 거기에 사건의 정황에서 수사 과정과 재판 과정, 그리고 정인숙의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 까지의 행적, 당시 사회상 등을 소상하게 추적하여 기술하고 있고 관련자 인터뷰도 진행하는 등 소문보다는 "사실"에 가까운 무언가를 전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별로 팩트에 기초한 것 같지는 않고 추정과 당시의 소문 등에 많은 할애를 하고 있어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어요. 무엇보다도 미스테리 자체를 밝혀내는데에는 결국 실패했다는 점에서 실망이 큽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새롭게 알 수 있는 사실이 없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르포집이라는 책을 읽어본 것은 처음인데 나름 좋은 경험이었어요. 국내 현대사에도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 많은 만큼 이런 장르의 책들도 많이 나와 주길 바랍니다.

덧 : 그나저나, 몇년전에 아들인 정승일이 정일권씨에게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여 DNA검사를 했지만 결국 친자가 아닌것으로 증명된 일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친부는 누구였을까요? 정말이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2006/08/26

팔묘촌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3점

팔묘촌
요코미조 세이시

팔묘촌은 에이로쿠 9년, 멸망한 가문의 젊은 무사 8명이 삼천냥의 황금을 가지고 숨어 지내다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참살된 전설이 있는 마을. 그러나 황금은 결국 발견되지 않고 여러명에게 저주가 내린 듯 죽음이 닥치자 마을 사람들은 8명의 무사를 공양하고 그들을 마을의 신으로 삼는다.

그로부터 300여년 뒤, 나 데라다 타츠야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양부에게 얹혀 지내다 전쟁 후 양부의 집마저 불타 혼자 살아가고 있는 중 라디오에서 나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회사 과장에 의해 내가 팔묘촌이라는 마을 최고 갑부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팔묘촌으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 다지미 요조는 일찌기 내가 태어난 직후 어머니와의 부적절한 관계때문에 발광하여 마을사람 20여명을 살해하고 행방불명된 과거가 있는 인물이었다.

팔묘촌으로 출발하기 직전 처음 만난 외할아버지가 독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처음 만난 의붓 형, 그리고 의붓형의 장례식에서 마을 스님마저 독설당하고 이 모든것이 아버지의 업보를 뒤집어 쓴 내가 돌아왔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돌며 흉흉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나의 편인줄 알았던 마을 두번째가는 유지의 며느리인 미야코도 서서히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마을 사람들의 폭동을 일으켜 어쩔 수 없이 비밀 통로를 통해 도망친 후 유일한 힘이 되어 주었던 의붓 누나인 하루요마저 살해당한것을 발견하고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노리코와 함께 정체모를 인물인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모든것을 의지한채 지하 동굴에 숨어 있게 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집요한 추적이 이어지고 노리코와 나는 동굴 깊숙한 곳으로 계속 쫓겨 결국 막다른 곳에 이르게 되는데...


간만에 읽은 추리소설인 것 같네요. 블로그의 정체성에 좀 더 충실해져야 하나.... 하여간 지인이자 은인이신 decca님의 도움으로 전에 TV 드라마로 먼저 보았던 긴다이치 코스케 등장 추리물의 대표작 "팔묘촌"을 드디어 책으로 완독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제일 큰 특징이라면 에도가와 란뽀의 "고도의 마인 (외딴섬 악마)" 처럼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의 수기 형태로 기술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유행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쨌건 주인공 타츠야의 시점으로 모든 전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이나 추리는 마지막 추리극 형태의 설명 부분을 제외하고는 크게 보여지지가 않으며 외려 타츠야에게 닥치는 공포스러운 사건들과 상황들을 변격물 형태로 잘 포장하여 보여주는데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고도의 마인" 처럼 트릭도 많고 추리적인 장치도 잘 짜여진 편이지만 아무래도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변격물의 성격을 띈 모험소설로 보입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 본다면 이야기의 큰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연쇄살인과 보물찾기 중에서 연쇄살인 쪽은 꽤 잘 짜여진 트릭을 보여주고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8명의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미신에서 비롯된 무차별 살인을 보여주는 설정이 꽤 그럴싸하거든요. 가장된 동기 아래에서 벌어지는 무차별 살인 와중에 꼭 죽여야 하는 인물을 죽여야 하는 전개는 크리스티 여사님의 "ABC 살인사건"과도 굉장히 흡사하고요. 그러나 범행 자체가 완전범죄에 가까웠다는 점은 좋았지만 범인이 최초에 대신 죄를 뒤집어 쓸 희생양을 잘못 골랐다는 것 때문에 사건의 결정적 해결이 범인의 자백에 의존한다는 점은 많이 아쉬웠습니다. 희생양이 버젓이 살아있던 중반까지는 참 좋았는데 말이죠... 뭐 이러한 점은 완전범죄 트릭물의 가장 큰 맹점이기도 하고 다른 고전 정통 트릭물에서도 많이 눈에 뜨이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은 탐정역인 긴다이치의 활약이 굉장히 적어서 최소한의 추리쇼는 보여주었어야 하지 않나 싶거든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결과적으로 마지막의 해결 장면, 그리고 긴다이치 코스케의 캐릭터가 많이 약해져버리더군요. 막판에 긴다이치가 사건이 다 끝난 다음에, 범인도 결정적 단서가 남겨져 있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하며 마무리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허무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보물찾기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뭔가 근사한 트릭이 등장할 줄 알았는데 결국은 치밀한 탐색과 우연에 의한 발견이라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앞부분에 미완성된 지도와 수수께끼같은 싯구, 지명 등 괜찮은 암호트릭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니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숨겨진 보물은 이야기의 핵심 요소로 등장하긴 하지만 결국은 사족에 가까운 내용인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무려 60여년전에 발표되었다는 시대를 뛰어넘는, 최소한 드라마 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소설이여서 무척이나 재미있고 만족스러웠던 독서였습니다. 위의 아쉬운 점은 분명히 존재하더라도 이야기의 진행과 소설적 구성이 참으로 완벽해서 흡입력도 굉장했기 때문이죠. 덕분에 저는 손에 잡고 거의 2~3시간만에 다 읽어버렸을 정도였습니다. 소설을 읽고나니 무려 세번의 영화, 여섯번의 드라마 (띠지에서 인용)로 영상화 되긴 했지만 이 소설을 영상화하는것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다시 듭니다. 아무래도 긴다이치의 비중이 너무나 작기 때문인것 같네요.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이 너무나 미미해서 탐정 캐릭터물의 팬이라면 2% 부족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김전일의 팬이라면 굉장히 즐겁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원전격의 내용으로 김전일 시리즈의 교과서적인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좋은 의미이건 나쁜 의미건 말이죠) 그 외에도 많은 곳에서 패러디된 회중전등을 머리띠와 가슴에 둘러맨 싸이코 연쇄살인마의 원전이라는 의미도 있고요. 국내에 이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옥문도"와 "팔묘촌", 그리고 동서에서 나온 "혼징 살인사건"까지 세권이 정식 출간되었는데 앞으로도 계속 출간되길 희망합니다.

2023/08/05

하얀 마물의 탑 - 미쓰다 신조 / 민경욱 : 별점 2.5점

하얀 마물의 탑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모토로이 하야타는 2차대전에 해군으로 참전했던 탓에 등대지기가 되었다. 해군 시절 등대의 중요함을 느꼈던 탓이었다. 양성학교를 거쳐 첫 부임한 곳은 간토의 다이코자키 등대였다. 그곳에서 자살하려는 소녀를 구해주는 등의 경험을 겪고 2년 후, 도호쿠 지방에 있는 고가사키 등대로 전근이 결정되었다.
어선으로 고가사키 등대에 접근하던 하야타는 등대에서 이상한 햐얀 형체를 목격했고, 이 때문에 어부가 직접 상륙을 거부해서 등대 아래 아지키 마을에서 육로로 이동해야 했다. 
하야타는 이동을 위해 안내인 모스케를 고용했지만, 모스케가 사라져버려서 홀로 출발했다. 그리고 하야타는 숲길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쫓는걸 알아채고 서두르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해까지 진 상태에서 발견한 민가는 기묘하게 생겼고 무척 낡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집은 마을 사람들이 '하얀집'이라고 부르며 피해가라고 했던, 시라가미를 모시는 무녀의 집이었다. 가면을 쓴 무녀와 손녀가 살고 있었는데 하야타는 친절한 손녀 하쿠호의 도움으로 하룻밤을 보낸 뒤, 그녀에게서 받은 부적 덕분에 무사히 등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등대에는 아무도 없었고, 밤이 되어서야 등대장 이사카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하야타를 찾으러 숲에 갔다왔다고 한 이사카는 하야타가 겪었던 일을 듣고,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주었다. 다이코자키에서 자살하려는 소녀를 구해주었었고, 고가사키 상륙 전에 하얀 형체를 목격했었고, 숲 길로 이동하다가 무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었다는 등 하야타와 거의 똑같은 이야기였다.
등대장의 회고는 마을 신주의 딸 미치코와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하듯 홋카이도로 전근을 갔는데, 딸은 신주가 부리는 시라몬코에게 납치되어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하야타는 자신의 경험담을 합리적으로 해석한 뒤, 이사카의 아내 미치코는 마을 신사 신주의 딸이 아니라 하얀집의 딸 시라쓰유였다는걸 추리해 내는데....


"불가해한 일을 겪을 때는 합리적인 해석이 중요하다."

미쓰다 신조의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신간 코너에 있길래 시리즈인줄 모르고 별 생각없이 집어들었는데, 읽다보니 시리즈더라고요. 다행히 첫 번째 작품은 읽지 않았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지장은 없었습니다.

작품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사관장>>과 비교적 흡사합니다. 시골 마을에서 대대로 전승되는 무속 신앙과 그들이 부리는 신(?)에 관련된 기묘한 능력, 그것에 얽히게 된 민간인이라는 핵심 소재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이 무녀와 연을 맺는 전개와 사람들이 겪는 기현성이 '하얀색'이라는 것도 유사하고요.
하지만 주인공 모토로이 하야타의 존재가 결정적 차이를 만듭니다. 그는 모든 현상을 '합리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래서 온갖 기현상에 대한 나름의 추리를 펼칩니다. 이게 꽤 그럴싸해서 재미있었어요.
 
우선 '세기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유명한 아일린모어섬 등대 사건부터 자신만의 해석을 내 놓습니다. 등대장인 마셜이 미쳤다는 것이지요. 실제로는 폭풍우가 오지 않았지만 일지에 폭풍우가 덮쳤다고 적혀있던건 마셜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고, 부하 중 듀커가 '화를 냈다'는건 마셜이 미쳤기 때문에, 그리고 듀커가 '여전히 조용했고' 맥아더가 '기도했다'는건 마셜이 듀커를 죽여서 맥아더가 기도했다고요. 실종의 진상은 마셜이 비옷과 장화를 신고 듀커의 시체를 버렸는데, 그걸 안 맥아더가 비옷과 장화를 신고 뛰어나와 말리다가 둘 다 물에 빠져 죽은 것이라 추리합니다.
홀로 숲 길을 해메던 하야타를 추격했던 하얀 괴물체에 대한 추리도 합리적이었습니다. 길 안내를 부탁했던 모스케였다는 겁니다. 슬쩍 수풀 사이로 본 거대한 하얀 형체는 모스케가 짐을 나르며 짐 위에 덮어놓았던 흰 천이고요. 하야타가 마을 여관의 딸 기리에와 사이가 좋은걸 봤기 때문에, 질투심으로 저지른 일종의 장난(?)이라는 동기까지도 잘 설명해줍니다. 밤에 돌을 던지고, 다음날 등대로 향할 때 숲 속에서 하야타를 포위했던건 원숭이들이었을거라는 추리도 괜찮았고요.
자료 조사도 충실해서 등대의 역사 등 온갖 정보들도 가득한데, 그 중에서도 오사카 케이키치 등대 소설을 읽는 묘사는 반가왔습니다. <<등대귀신>>은 <<등대귀>>라는 제목으로 읽었었던 적이 있지요. 다른 작품들도 언급되는데 어떤 작품일지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전개는 다소 지루한 편입니다. 모토로이 하야타가 고가사키 등대로 향해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게 거의 1/3 지점일 정도거든요. 하야타의 과거라던가, 신념에 대한 묘사, 그리고 등대의 역사 등 관련 자료가 너무 많이 등장하는 탓입니다. 작품과는 별 상관이 없는데 말이지요.
또 합리적으로 모든걸 설명하려고 했으면 그렇게 모든걸 설명해 주었어야 했는데,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너무 많습니다. 이사카 부부는 유령(?)이었다는 결말은 어처구니를 상실케하며, 이사카 부부와 다른 등대지기 하마치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애초에 이사카가 고가사키로의 전근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인지 등은 아예 설명이 되지 않아요.
그 외에도, 하얀 집과 마을과의 관계처럼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았어요. 한 때는 그 집에서 출산을 했다고 하는데, 불길하게 여기는 집에서 왜 출산은 했을까요? 출산을 앞 둔 임산부가 가기에는 너무 험한 산길로 보이는데 말이지요. 좋은 일은 마을 신사에, 나쁜 일은 하얀집에 기원한다는 설정도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좋고 나쁨의 구분 자체가 애매하잖아요. 예를 들어, 먼 곳에 있는 가족에게 선물을 보내기 위해 시라몬코를 이용하면 안되는 걸까요?
등대에서 보이던 하얀 형체가 하얀 집의 딸 하쿠호 (이전에는 시라쓰유)의 하야타 (이전에는 이사카)를 향한 연심이라는 해석도 별로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이 맞다면 하얀 형체는 이사카와 하야타에게만 보였어야 했습니다. 시라쓰유, 하쿠호의 연심은 그들이 자살하려 할 때 구해주었던 젊은 등대지기에게 향해 있었으니까요. 즉, 마을 어선 선장이 '하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 들, 그걸 목격했다고 등대 상륙을 거부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얀 사람'이 귀신을 볼 수 있는 모두에게 보인다면, 그걸 '연심'이라고 하기도 힘들테고요. 무언가에 대한 집착이 구체화된다는 해석이었다면 말은 되었겠지만 그런 설명은 없습니다.
이런 경험에 진절머리가 난 하야타가 등대지기를 그만둔다는 결말도 영 아니었어요. 물론 하야타가 하쿠호의 사랑을 받아줄 리는 없지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도 없이 유령이 되어버린 이사카 부부를 봤으니까요. 하지만 작중 묘사를 보면 하얀 집의 무녀는 시라몬코를 부려 일본 각지를 조사하고, 심지어 아이를 납치할 수 있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등대지기를 그만 둔 걸로 하쿠호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쿠호에게 누군가 다른 남자가 희생양이 되기 전에는 말이지요. 하쿠호에게 희생양으로 모스케라도 던져주는게 바람직했습니다.

이렇게 설명이 부족하고 결말이 대충이라는 점에서는 완성된 소설보다는 괴담에 가까왔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리즈 1편인 <<검은 얼굴의 여우>>는 추리물이라고 하는데, 1편이나 읽어봐야겠습니다.

2004/02/03

스파이의 역사 1 : 작전편 - 20세기를 배후 조종한 세기의 첩보전들 : 별점 4점

스파이의 역사 1 : 작전편 - 8점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이창신 옮김/이마고
이 책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스파이들과 그 정보전을 다루고 있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워낙 소재가 독특하고 제 취향에 맞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간략하게 목차와 내용을 잠깐 소개해드리자면,
“제1부 기만작전: 사상 최대의 속임수”는 가공의 저항 자유 조직을 만들어 서방세계를 속인 소련과, 쿠바인을 스파이로 고용했던 CIA를 역이용하고 농락하는 쿠바와 같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속여 먹는 이야기입니다. 무적으로 느껴지는 CIA의 멍청하고 한심한 일면을 다루고 있어 상당히 통쾌하게(?) 읽었습니다.
“제2부 암호와 감청 전쟁: 보이지 않는 스파이들”은 주로 2차대전을 다루고 있는 편으로 에니그마와 일본 암호 해독 등 서로의 암호를 해독하여 전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명한 에니그마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상당히 디테일하게 이야기를 다루고 있네요. (물론 “암호의 세계”라는 이 분야의 바이블 같은 책이 있습니다만…)
“제3부 반역작전: 내부의 적을 색출하라”는 제목 그대로 조직 내부의 스파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원자폭탄 관련 정보를 입수하게 되는 소련과 소련의 최 고위층 비밀 요원 “톱해트”의 이야기가 흥미롭네요. 흡사 영화 같습니다.
“제4부 두더지작전: 미로 속의 첩보 게임”은 역사속에 묻혀진, 그리고 역사의 희생양이 된 몇몇 스파이들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스웨덴의 “발렌베리” 사건이 인상적입니다. 스웨덴의 명문 출신이자 인도주의자였던 외교관 발렌베리가 어떻게 누명을 쓰고 죽어갔는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가슴 아프기도 하고요.
“제5부 실패한 작전: 첩보역사상의 대실수들”은 실패로 끝난 작전들이 나옵니다. 일본과 미국의 진주만을 둘러싼 암투라던가, 동유럽의 공산화 방지를 위해 노력했다가 실패하는 CIA이야기도 있고 태평양의 한 섬을 둘러싼 미-일 간의 첩보 공방전 이야기 등이 실려 있습니다.
“제6부 성공한 작전: 대규모 작전의 눈부신 성과들”은 성공한 유명한 스파이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던 미국의 “배신자” 워커일가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잡혔을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같은 곳에서 특집으로 낼 만큼 유명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네요. 그 외에도 영국의 엘리트 5인방 스파이 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7부 무의미한 작전: 첩보역사상 최대의 코미디”는 제목 그대로 무의미 했던 정보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 뿌리기 위해 만든 반체제 우편물과 우표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지금은 그 우표 (반은 해골, 반은 히틀러)가 수집가들 사이에서 굉장히 고가에 거래된다는 이야기까지,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재밌네요.
이렇게 역사적 정보전과 유명 스파이들을 다루고 있는데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어떤 부분은 역사책, 그 중에서도 2차대전 물인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부분은 미스터리물 같다는 점도 흥미로왔고요. 읽고나니 스파이와 정보전의 중요성이 굉장히 크게 느껴지네요. 역사를 움직이는 “흑막”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고 말이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역사서적으로의 가치와 재미를 모두 갖춘 보기드문 책입니다. 우리나라 정보기관이나 유명한 (영화로도 나왔죠) “뻐꾸기 알” 이야기가 없는게 조금 의아하지만, 2편을 계속 읽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2013/08/26

일본의 검은 안개 (하) - 마쓰모토 세이초 / 김경난 : 별점 3점

일본의 검은 안개 - 하 - 6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모비딕

상권을 읽었으니 하권을 안 읽을 수는 없죠. 반쯤은 의무감으로 읽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논픽션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상권과 마찬가지로 반세기가 지난 현 시점에서 이국의 독자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제국은행 사건"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은 재미있었으며, 무엇보다도 6.25에 대해 다룬 "그들의 이상한 전쟁"은 우리에게도 확 와닿는 주제며 내용이기에 상권보다는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어요.

결론내리자면 전체 별점은 3점. "그들의 이상한 전쟁" 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수록된 이야기를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7장 열여섯 잔의 독배 - 제국은행 사건의 수수께끼

괴한이 은행 직원들에게 전염병 예방약이라고 속이고 독약을 먹인 뒤 현금을 가지고 사라진, 익히 알려진 유명한 사건이지요. 저자는 범인으로 발표된 화가는 단지 희생양일 뿐, 진범은 세균부대 출신으로 GHQ에 속한 인물일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근거도 탄탄하여 설득력이 높고요. 전체적인 전개가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가 느껴져 역시나 거장다웠습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추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는데, 정치적 이유로 사건이 제대로 수사되지 않은 것에 불과했다는건 좀 맥이 빠집니다. 이 논픽션의 가장 큰 테마인 미군정의 모략으로 인한 사건에 불과할 뿐이거든요.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능가하는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좀 아쉬웠습니다.

8장 소설가인가 스파이인가 - 가지 와타루 사건

소설가 가지 와타루가 미군정에 납치되어 1년간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사건을 다룹니다. 결국 누군가의 모함이 원인이었고, 목숨을 건진 것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내용인데 현실적이기는 하나, 재미는 없었습니다. 수십 년간의 독재정권을 거친 우리가 보기에는 별다를 것 없는, 오히려 평범해 보이는 내용일 뿐이었으니까요.

허나 반세기 전 일본에서조차 이런 일이 큰 사건이 되었는데, 지금 우리 현실은 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지네요.

10장 다이아몬드를 사랑한 사람들 - 정복자와 다이아몬드

전쟁 당시 일본이 모았던 막대한 양의 다이아몬드가 사라진 경위를 파헤치는 내용. 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전 국민에게서 약 62만 캐럿의 다이아몬드를 확보했지만 전쟁 후 남은 것은 16만 캐럿에 불과했다는 사건의 진상을 추적합니다. 점령군인 미군과 일본의 정치 권력 쪽으로 은닉되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 결말로 이어지고요.

사실 일본의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딱히 관심이 가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구전 설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고종의 독립운동을 위한 황금"도 이와 비슷하게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울러 중간에 언급되는 인도의 독립운동가 찬드라 보슈가 독립운동 자금을 가지고 소련으로 향하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을 때,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보슈의 트렁크 사건도 흥미로웠고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논픽션을 써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나저나 이쯤 되면 완벽한 본말전도네요...

12장 그들의 이상한 전쟁 - 모략 한국전쟁

6.25에 대한 이야기. 일단 서두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하여 위기에 처한 이승만 정부의 도발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부터 신선했습니다. 이렇게 대놓고 돌직구를 날리는 책은 처음 본 것 같아요.

그리고 전쟁의 진행 과정을 묘사하면서, 북한군의 뛰어난 유격 전투 능력과 실제 남한 주민의 협조를 언급하며 "이 전쟁은 미군이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방조한 것"이라는 식으로 서술합니다. "한국은 하나의 축복이었다. 이 땅 혹은 세계의 어딘가에 한국이 없으면 안 되었다"라고 말한 미군 사령관 밴 플리트의 말이 진실의 모든 것이겠지요.

전쟁이 확대된 것은 남한군의 무능과 북한군의 실력 탓이었다는 점, 그리고 정말로 놀라운 북한군의 전과 등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내용이 많습니다. 그 외에도 일본을 중심으로 한 극동 아시아의 세력 관계라든가, 맥아더의 중국 진출론 등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하고요.

한마디로 추천작. 이 책이 아니라 논픽션 전체를 놓고 보아도 손에 꼽을 만한, 그야말로 논픽션의 명편입니다.

2016/03/01

주토피아 (2016) - 바이론 하워드, 리치 무어 : 별점 3점

"굿 다이노"가 망하기는 했지만 최근 분위기 좋은 디즈니의 최신작 애니메이션입니다. 주말에 딸아이와 함께 감상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른들이 보아도 충분히 즐길 거리가 많은 괜찮은 작품입니다. 우선 전형적인 버디 액션 수사물의 형태로 시간 제한 있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벌어지는 긴장감이 제법입니다. 음모도 적절하게 구성되어 충분히 몰입할 수 있고요. '공포'를 통해 특정 집단을 자신의 추종 세력으로 만든다는 정치적인 행동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설득력이 높지요.

동물들을 소재로 한 작품답게, 그리고 이쪽 바닥의 전설적인 명가 디즈니의 작품다운 깨알같은 개그들도 마음에 듭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씬 스틸러는 엄청 빠른 나무늘보 반짝반짝 플래시겠지만, 그 외 다른 동물들 모두 원래 동물 특성이 잘 보이도록 구현되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토끼와 여우의 빠른 몸놀림을 적극 활용한 속도감 넘치는 액션씬도 아주 볼 만하고요. 주토피아의 디테일과 아트웍 역시 최고 수준입니다.

무엇보다도 동물을 소재로 민감한 부분인 "인종 차별"과 "선입견"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작중 편견의 희생양이 되는 동물은 토끼와 여우인데 토끼 쥬디는 작고 약하다는 편견으로 평생 소원인 경찰이 되지만 경찰 내부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합니다. 여우 닉은 포식자에다가 약삭빠르고 교활하다는 편견으로 모든 집단에게서 신뢰할 수 없는 동물로 낙인이 찍혀 있고요.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흑인은 무조건 잠재적인 범죄자로 생각하고, 중동 이슬람 교도는 모두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생각하는 편겸과 선입견 가득한 작금의 행태와 엮어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중반부에 사라진 동물들이 야수화된 것에 대해 쥬디가 설명하는 장면에서 결정적으로 폭발합니다. 사실 작중의 포식자보다는 현실을 빗대어 생각하면 훨씬 와 닿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소녀 백인 경찰이 거리의 사기꾼인 흑인과 친해졌는데, 사건을 해결하고 인터뷰에서 흑인을 싸잡아 잠재적인 범죄자라고 말하는 꼴이니까요.

그러나 허술하게, 조금 쉽게 넘어간 부분이 눈에 띄긴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시장 보좌관의 음모로, 포식자를 야수로 만드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이를 어떻게 드러낼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어 보였습니다. 무려 12마리나 야수가 되었는데 그 시점까지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으며, 드러나게 된 것은 쥬디가 운 좋게 활약했을 뿐이잖아요? 공공장소에서 시장을 중독시키면 한방에 끝났을 텐데 왜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진행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더군요.

또 마지막에 닉이 경찰이 되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사기꾼이 경찰이 될 정도로 경찰이 만만한 조직은 아니죠. 이게 무슨 "폴리스 아카데미"도 아니고... 차라리 닉이 어렸을 적 레인저가 되려다 왕따당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대신, 경찰학교에 입학했었는데 주위의 편견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더 설득력 높지 않았을까 싶네요.

허나 이런 부분들은 아이 시각으로 보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지나치게 편견에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봐서 느낀 문제점들이죠. 작품에 큰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냥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재미와 더불어 생각할 거리를 전해 준다는 점에서 추천합니다. 후속편이 기대되네요.

2004/01/11

실미도 - 강우석

 


주말에 푹 쉬라는 하늘의 명을 받잡아(^^) 그간 수차례 보길 시도했으나 줄창 실패한 "실미도"를 보러 갔습니다.

내용은 익히 알려진 대로,
북으로 간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사회 어느 곳에서도 인간대접 받을 수 없었던 강인찬(설경구 분) 역시 어두운 과거와 함께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살인미수로 수감된다. 그런 그 앞에 한 군인이 접근, '나라를 위해 칼을 잡을 수 있겠냐'는 엉뚱한 제안을 던지곤 그저 살인미수일 뿐인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는데... 누군가에게 이끌려 사형장으로 향하던 인찬,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인천 외딴 부둣가, 그곳엔 인찬 말고도 상필(정재영 분), 찬석(강성진 분), 원희(임원희 분), 근재(강신일 분) 등 시꺼먼 사내들이 잔뜩 모여 있었고 그렇게 1968년 대한민국 서부 외딴 섬 '실미도'에 기관원에 의해 강제차출된 31명이 모인다.

영문 모르고 머리를 깎고 군인이 된 31명의 훈련병들, 그들에게 나타난 예의 그 묘령의 군인은 바로 김재현 준위(안성기 분),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주석궁에 침투, 김일성 목을 따 오는 것이 너희들의 임무다"는 한 마디를 시작으로 냉철한 조중사(허준호 분)의 인솔하에 31명 훈련병에 대한 혹독한 지옥훈련이 시작된다.

'684 주석궁폭파부대'라 불리는 계급도 소속도 없는 훈련병과 그들의 감시와 훈련을 맡은 기간병들... "낙오자는 죽인다, 체포되면 자폭하라!"는 구호하에 실미도엔 인간은 없고 '김일성 모가지 따기'라는 분명한 목적만이 존재해간다...


1971년, 대방동 앞에서 자폭한 실제 실미도 대원들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한국 영화계의 마이더스 손이라는 강우석 감독의 신작입니다.

영화는 초반에는 실미도 684 부대원들의 지옥훈련을 중심으로, 중반부터는 그 훈련 와중에 싹트는 동료애와 전우애를, 마지막에는 시대의 희생양으로 사라져 가는 부대원들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확실히 초,중반의 훈련장면과 동료, 기간병들과 싹트는 전우애 같은 부분의 묘사는 좋더군요.
각본도 꽤 탄탄히 틀이 잡혀 있어서, 어떤 한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냉정한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며, 힘을 잃지 않는 구성을 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무엇보다 설경구 등 배우들의 연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올드보이의 최민식씨와 비교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정도까지 광기를 보여주진 못하는것 같습니다만...)

저도 군대갔다온 예비역이라 더욱 재미있게 본 것 같기도 한데 제 군대있을 때 동기들 생각도 나고해서 (명식아! 정현아! 현곤아! 이거 보면 연락해라~!)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딱! 기대한 수준 정도의 영화였어요.

중간 중간 좀 지루한 부분이나, 별 필요없는 에피소드같은것은 조금 더 편집해도 좋았겠지만 (원희의 강간 에피소드같은....), 벌써 300만이 봤다고 하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히트칠만한 미덕은 분명히 있는 영화입니다. 특히, 군대갔다온 사람들이나 "김신조사건"을 알고 있는 세대라면 강추입니다. (김신조 아들이 저하고 초등학교 동기 동창이었다는.....)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이 "도대체 80억 어디다 썼냐?"라고 하시던데, 확실히 티는 크게 안나더군요. 쩝.

PS: 향후 수출이나, 내용을 고려했을 때 제목을 "실미도" 보다는 "684" 로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2010/05/29

밤의 기억들 - 토머스 H 쿡 / 남명성 : 별점 4점

밤의 기억들 - 8점
토머스 H. 쿡 지음, 남명성 옮김/시작

"주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50년 전 일어났던 한 소녀의 살인사건을 재구성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범죄소설작가 폴 그레이브스가 사건의 현장이기도 한 부유한 별장지 리버우드에서 진실을 추적해 나가는 내용으로 "심문"의 토머스 H 쿡 작품입니다. 50년 전의 페이예 살인사건과 더불어 그레이브스의 소년 시절에 있었던 누나 그웬의 잔인한 살인사건이 회상 형식으로 겹쳐져 진행되는데, 460페이지나 되는 대장편임에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심문"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으로 장편의 힘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네요.

먼저 50년 전 페이예 사건부터 살펴본다면, 범행이 실제로 가능했던 용의자는 한 줌도 안됩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용의자에게 타당한 동기를 부여하고 용의자별로 상세한 수사가 펼쳐지기 때문에 지루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것이 대단합니다. 또한 트릭이 등장하고 단서들이 앞부분부터 교묘하게 배치되어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된다는 점에서 정통 추리소설로 보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특히 사소한 단서가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많아서 정말 쉴 틈 없는 짜임새를 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주요 사건인 그레이브스 사건의 경우는 이야기 전개 상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주로 그레이브스가 페이예 사건을 수사하면서 떠올리는 심리 묘사를 통해 전개되죠. 이러한 전개는 본편의 수사 과정과 다른 심리 스릴러스러운 맛을 전하면서도 페이예 사건의 전개와 절묘하게 맞물리며 독자의 마음을 강하게 건드리는 맛이 정말 탁월하더군요. 아울러 제대로 된 반전의 힘을 보여주기 때문에 반전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 반전이 작품을 효과적으로 마무리하고 있어서 결말 역시 아주 깔끔합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설득력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아쉽습니다. 일단 미국의 유서 깊은 가문의 별장지에서 벌어진 사건이 2차대전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의학 실험과 연관되어 있다는건 터무니 없어 보였습니다. 이런 의학 실험에 비교하면, 꽃의 교잡 실험이라든가 의학에 관심이 있다는 수준에 그친 복선은 너무 미미했습니다. 워런 데이비스와 그로스먼이 나치 독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전혀 설명되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페이예라는 소녀에게 이런 몹쓸 실험을 가해야 했을 타당성을 찾기 어려웠다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지역을 장악하다시피 했던 워런 데이비스의 영향력이라면 뒤끝 없었을 희생양을 골라내는 것이 가능했을 텐데, 왜 딸의 친구이기도 한 이웃 소녀를 골랐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등장인물들에 비하면 워런 데이비스라는 캐릭터에 대한 표현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기도 한데, 조금만 더 설명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그래도 수사와 단서가 잘 결합된 수사물이면서도 여러 가지 트릭이 등장하는 정통 추리소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수작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문학적 성취를 이룬 듯한 미국의 오래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뛰어난 심리 묘사와 군더더기 없는 전개는 "앵무새 죽이기"의 추리물 버전이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심리 추리 스릴러 장편의 교과서 같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 아직 읽어보지 못하셨다면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2026/03/07

워 머신 : 전쟁 기계 (2026) - 패트릭 휴즈 : 별점 2점

미육군 최강 부대 레인저 부대원이 되기 위한 8주간 훈련에 도전한 81번 훈련병은 우여곡절 끝에 최후의 시험인 '죽음의 행진'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훈련병들은 예정된 훈련 대신 외계에서 온 전투 기계를 만나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데...

넷플릭스 최신 영화입니다. 주말 맞이로 감상했습니다.

별 기대하지 않았는데, 초반부의 지루했던 배경 설명이 끝난 뒤, 핵심 이야기인 레인저 훈련생들이 벌이는 외계에서 온 로봇 상대 생존기는 어마어마한 몰입감을 선사해 줍니다.

미약한 희생자들이 도주하면서 생존하려 노력하는, 거대 크리처 호러물 장르물로의 가장 중요한 재미 요소인 '긴장감'을 잘 살린 덕입니다. 나침반 등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등으로 로봇 등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식으로요. 망가진 무전기, 움직일 수 없는 부상자, 고장난 장갑차 등의 여러 제약 사항들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도 긴장감과 재미를 더해주고요.

크리처 호러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 크리처의 강력함 역시 훈련병들을 압도하며 무자비하게 죽이는 장면들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우리 편이 다 죽는 영화는 정말 오랫만에 봅니다. 최소한 여군은 살릴 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레인저 훈련병'이라는 미 육군 최강 군인들이 희생양 역으로 설정된 점도 좋습니다. 절벽에서의 레펠 기동을 비롯한 생존을 위해 벌이는 인간 이상의 활약이 꽤 설득력있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활약의 핵심인 주인공이 '잭 리처' 앨런 리치슨이라는 캐스팅도 딱 맞아 떨어지는 점입니다. 캐스팅이라면, 추억의 배우 데니스 퀘이드의 노병 연기도 반가왔어요.
아울러 주인공이 공병 출신이라서 로봇의 약점을 눈치채고 해치운다는 마지막 장면의 설득력도 꽤 높은 편입니다. 맨 앞의 차량 정비 장면과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군인들이 강력한 외계 크리쳐와 싸워 극히 일부만 겨우 살아남는다는건 "에일리언(2)"과 비슷하고, 이 마지막 장면 전까지는 엇비슷한 재미를 주지만 마지막 10여분이 영화를 완전히 망쳐버려서 아쉽습니다. 외계 로봇의 습격이라는 전 지구적인 재앙이 닥쳤는데 레인저가 되는 결승 라인에 도달하는게 지상 목표라는 주인공의 모습부터 황당했는데(최소한 부상자는 의무병에게 바로 인계했어야지요), 이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미국식 영웅 만들기는 도대체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게다가 막 복귀해서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다시 전우들과 출동한다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비유하자면 "에일리언"의 리플리가 살아서 귀환한 뒤, 군인들 앞에서 일장 연설하고 선봉에 서서 에일리언을 박살낸다는 에필로그가 이어지는 셈입니다. 

이 마지막 10여분 때문에 감점해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거만 없었어도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한데 아깝네요.
그래도 앨런 리치슨이라는 배우의 액션은 믿을만하다는 확신이 생기기는 합니다. 다른 작품도 찾아보고 싶군요.

2019/01/18

서치 (2018) Searching - 아니쉬 차간티: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이빗 킴은 사랑하는 아내 파멜라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홀로 고등학생인 딸 마고를 키워 왔다. 하지만 딸과의 거리감을 강하게 느끼던 어느 날 밤, 급작스럽게 걸려온 딸의 전화를 자느라 받지 못했다. 결국 다음날이 되어서야 딸의 실종을 알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의 부탁으로 딸의 SNS 계정에 접속한 데이빗은 그녀가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2019년 첫 감상한 영화네요. 얼마전 국내에서 개봉해서 깜짝 흥행한 스릴러로 짤막한 소개글이 아주 흥미로와서 관심이 있었는데, 오랫만의 출장길 비행기에서 감상하였습니다.

딸이 실종된 후 아버지가 그녀를 찾아 나선다는 설정은 뻔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돋보이는 이유는 현대인이 많이 사용하는 컨텐츠와 솔루션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 속에서 데이빗의 행동은 페이스 타임, 각종 뉴스 화면, SNS 등 여러가지 메신저, 검색창 등으로 드러나거든요. 이 과정에서 정말로 최신 IT 트렌드는 다 등장하고요. 심지어 넷카마까지 나올 정도이니 말 다했지요.

하지만 단지 트렌드에 편승하는 수준으로 그치는건 아닙니다. 데이빗의 개인적인 수사는 이런 편집이 아니었다면 관객에게 쉽게 설명되기 어려웠을거에요. 딸의 계정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과정, 각종 검색어를 통한 검색, 그 외의 개인 정보에 의지한 수사 과정은 해당 컨텐츠와 솔루션 화면의 적절한 활용으로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을 정도로 명쾌하게 전달됩니다.
그 외의 각종 전개들도 어떻게 이렇게 이어갈 수 있었는지 감탄이 나옵니다. 편집에 2년이나 걸렸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대표적인게 자신의 동생 피터와 마고의 관계를 의심한 데이빗이 설치한 몰래 카메라로 동생과의 갈등을 전개하는 장면입니다.

사건을 담당한 형사 로즈마리 빅의 아들이 마고를 절벽에서 밀어버렸기 때문에, 로즈마라가 사건을 덮기 위해 여러가지 공작을 펼쳐 범인까지 날조했다는 반전도 괜찮습니다. 경찰이 피해자 가족을 어떻게 속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득력도 상당히 높고요. 물론 로즈마리가 데이빗을 속였다는 진상이 드러나는 상황은 우연에 가깝고, 별다른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지만 스릴러로서는 충분한 수준입니다.

부녀지간,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제가 딸 하나를 키우는 아빠이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각종 컨텐츠와 솔루션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아이디어에 너무 집착한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해피엔딩 정도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풀어주는게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딸과의 갈등을 해결하고, 부녀의 관계가 좋아졌다는걸 더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을텐데 아쉽습니다.
범인으로 날조한 희생양이 자살 직전 동영상을 남겼다는 설정도 무리수이며, 피터 킴과의 SNS 대화가 중반 이후에 드러나는 등 헛점이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왜 경찰이 처음부터 마고의 노트북을 가져가서 조사하지 않았는지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괜찮은 스릴러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감상하지 않으신 추리, 스릴러 애호가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04/02/22

태극기 휘날리며 - 강제규 : 별점 3점


드디어 봤습니다. 정말 대단한 흥행을 하고 있어서 3주동안 계속 예매까지 매진이라 보지도 못했는데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종인이형 덕분에 보게 되었습니다. (종인이형 고마워!)

다들 알고계실 스토리는 생략하고요, 일단 이 영화는 고생해서, 돈들여서 찍은 티가 팍팍나는 영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때깔에 어울리게 6.25 라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좌-우 어느쪽에도 걸치지 않고, 단순히 이념 때문에 죽어나가며 광기어린 살인마로 돌변하는 주인공들과 그 희생양들을 그린 각본도 굉장히 좋습니다, 한마디로 “Well-Made”영화입니다. 국내 블록버스터 영화중에서 이만한 각본의 완성도를 갖춘 작품은 처음인 것 같네요. 역시 시나리오 작가 출신인 강제규 감독 답습니다.
캐스팅도 완벽합니다. 요새 “연기파” 배우로 변해가는 장동건의 연기야 기본은 먹어준다고 해도 원빈의 연기가 의외로 뛰어나더군요. 더군다나 둘다 “꽃미남” 계보라서 그런지 형제라는 설정도 별로 어설프지 않고요. 조연들 (기억나는 건 공형진 뿐이지만…)의 연기도 평균이상은 다들 해 주고 있습니다. 우정출연이라는 최민식, 김수로도 기억에 남고요.
특히 감동과 눈물의 폭풍! 마지막의 감동의 도가니탕(^^)에서는 저도 눈물을 찔끔 흘렸을 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늙은 진석의 모습과 진석이 형의 유골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은 좀 사족이라 생각되었고 몇몇 CG가 튀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별로 흠 잡을데 없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이런 블록버스터가 나와주는군요. 한마디로 흥행할 만한 영화가 흥행한다는 생각입니다.

딴지일보의 모 기자는 이 영화에 중간점수를 주며 기존의 전쟁영화의 룰을 답습하며 기존 헐리우드 영화와 비스무레 하다고 했는데 저는 6.25의 특수성, 즉 같은 동포들끼리 별다른 이유없이 살육하는 비참함과 이념의 허무함을 잘 그렸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도 꽤 많은 스크린으로 개봉한다는 뉴스를 어디선가 보았는데 히트쳤으면 좋겠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요사이 “빨갱이”운운 하는 보수 우익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더군요. 저도 중학교때까지 “때려잡자 공산당” 포스터를 그리고 표어를 만들었던 세대인데(평화의 댐 성금까지 냈답니다. 젠장…) 결국 우리는 다 형제 아니겠습니까….

2024/08/04

저지먼트 - 고바야시 유카 / 이영미 : 별점 1.5점

저지먼트 - 4점
고바야시 유카 지음, 이영미 옮김/예문아카이브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XX년, 급증해가던 범죄를 막기 위해 일본에서 범죄자가 피해자에게 가한 폭력이나 가학 행위를 똑같이 형벌로 집행할 권리를 피해자 측에 주는 '복수법'이 제정되었다. 단, 복수법을 선택한 경우 피해자 측이 직접 형벌을 집행해야 한다. 도리타니 아야노는 복수법 집행자를 보호하고, 집행 현장을 감찰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복수 감찰관'으로, 복수 현장을 지켜보면서 복수법의 존재 의미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게 되는데...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단편집으로 일본 신인 작가 고바야시 유카의 데뷔작입니다. 책 소개를 보고 관심이 생겨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 별로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법률, 그리고 화자가 이 법률을 수행하는 공무원이라는 점에서 만화 '이키가미'와 비슷한데, 수준은 크게 차이가 납니다. '이키가미'에서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 주는데 반해, 이 작품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탓입니다. 과연 이런 복수가 정당한지, 그리고 복수 때문에 선량한 집행자들이 살인자가 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묻는데, 등장하는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라서 별로 고민할 게 없거든요. 신림동 묻지마 칼부림 사건의 조선, 평택 아동 암매장 사건의 원영이 부모같은 인간 말종들을 단죄하는게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이렌'에서 복수가 복수를 낳는 장면도 같은 이유로 전혀 공감되지 않았습니다. 범죄자라 하더라도 그를 아끼는 어머니가 있어서 자식의 복수를 한다는 건 말이 되지만, 워낙에 지은 죄가 커서 적반하장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범죄자 가족이 판사에게 복수한다는 것과 다를 게 없어서 불합리하기도 하고요.

억지 설정도 많습니다. 마지막 이야기 '저지먼트'에서 복수자 하야토가 죽는 게 대표적입니다. 여동생을 아사시킨 부모에게 복수법을 집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알고 보니 여동생을 학대의 희생양으로 내세웠던 자신에게 벌을 가해 굶어 죽는다는 건데, 공공기관에서 소년이 죽어가는 걸 방치했다는 게 말이 되나요? 소년의 죽음이 복수법 반대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복수법 반대에 활용하려면, 집행 대상인 범죄자가 사실은 무고한 인물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어야 했습니다. 

장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야기마다 약간의 반전이 있는 건 좋습니다. '사이렌'에서 피해자의 아버지도 피해자에 대해 잘 몰랐었다라든가, '앵커'에서 엔도는 피해자 리오와 결혼할 생각을 접었던 상태였다든가, '페이크'에서 피해자의 엄마가 피해자를 학대하고 있었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이런 반전이 일종의 조사와 추리로 밝혀진다는 전개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특히 어머니를 살해한 딸 엘레나를 어머니가 복수법으로 죽이려 했지만, 알고 보니 딸 엘레나는 가스라이팅당하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고, 이 사실이 밝혀지자 어머니가 유아 퇴행 현상을 일으켰다는 '보더'는 추리적으로, 그리고 결말의 의외성 측면에서 제일 괜찮았습니다. 물론 엘레나의 행동이 친구 나쓰키의 편지 하나로 밝혀진다는 점에서 추리의 여지가 많지 않으며, 할머니의 가스라이팅도 복선은 잘 짜여져 있지만 억지스럽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대한 과대평가가 지나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선한 인간성'을 상징하는 화자 아야노를 내세워 어설픈 휴머니즘 드라마로 만들기보다는, 복수의 쾌감이 느껴지는 하드고어 복수 포르노로 만드는 게 더 재미있었을 겁니다. 아야노 대신 처절한 복수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인물을 등장시켜서요.

2020/06/14

빅 클락 - 케네스 피어링 / 이동윤 : 별점 2.5점

빅 클락 - 6점
케네스 피어링 지음, 이동윤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지 스트라우드는 거대 출판업체 재노스 엔터프라이즈 산하의 잡지 "크라임웨이"에서 편집주간으로 일하다가, 한 파티에서 재노스의 연인 폴린 델로스를 만난 뒤 그녀와 불륜 관계에 빠졌다. 그러나 스트라우드와의 밀회 직후 그녀는 재노스를 게이라고 비난하다가 살해당했고, 재노스는 자신의 범행을 숨기고 희생양으로 내세우기 위해 그녀가 살해당하기 직전 만나고 있던 남자를 찾아 나섰다. 그를 찾기 위해서 출판사에서 선택한 인재는 바로 조지 스트라우드였다.

케네스 피어링이 1946년에 발표한 고전 범죄 소설입니다. 잘 알지 못하는 작가의 잘 알지 못하는 작품입니다만, "블러디 머더"에서 줄리언 시먼스가 추천했기 때문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국내 출간본에서는"커다란 시계"라고 언급됩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줄리언 시먼스의 말 그대로, 조지 스트라우드가 사주의 명령에 의해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데 그 누군가가 자기라는 딜레마,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활용하여 어떻게든 조사를 흐리지만 점차 궁지에 몰리는 과정입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피해자와 잘 알고 있으며 유력한 용의자인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 사람을 찾는 척하면서 진상을 밝혀낸다는 이야기는 덴젤 워싱턴이 주연이었던 "아웃 오브 타임"이 떠오르는데 이 작품은 이런 류 이야기의 원조일 거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특이한건 "아웃 오브 타임"과 마찬가지로 앞 부분이 조금 지루하다는 점입니다. 출판, 잡지업계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함께 조지 스트라우드와 폴린 델로스가 불륜에 빠지는 과정이 장황한 탓입니다. 특히 폴린과 함께 한 일종의 데이트 코스에 대한 디테일은 뭘 이런것까지 설명하나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 데이트 과정이 용의자를 찾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에, 이야기의 핵심과도 잘 맞아 떨어져서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이외의 디테일들의 독특함도 볼거리입니다. 손님이 원하는 그 어떤 물건도 보여준다는 골동, 고물상과 바가 합쳐져 있는 '길의 바'에서의 에피소드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도 무명화가 루이즈 패터슨과 그녀의 작품 때문에 빚어지는 서스펜스가 압권이에요. 조지 스트라우드가 '유다'라고 부르는 그녀의 작품을 골동품상에서 구입하는데, 구입을 경쟁했던 여자 손님이 루이즈 패터슨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지 스트라우드가 그녀의 팬이라 그림을 사무실에 걸어놓기까지 했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설정도 재미있고, 조지 스트라우드를 찾기 위해 출판사는 루이즈 패터슨과 접촉하고, 결국 둘의 상봉이 이루어지는 부분이 작품의 클라이막스이기도 하니까요. '나는 그를 본 순간 고함을 치려 했지만, 숨을 쉴 수 없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는 건데, 정말 기가 막혔어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교묘하게 '유다'라는 그림을 없앨 수도 있다고 협박하는 조지 스트라우드의 협박도 일품이고요. 이 그림은 마지막까지 등장합니다. 결국 '승리자'가 된 조지 스트라우드의 전리품으로요. 50달러주고 구입했지만 여러모로 화제가되어 최고 1만달러 정도를 받을 수 있다니, 나름 해피엔딩이기도 합니다. 조지가 얻은건 돈이 아니라 나름의 교훈이지만요.

그러나 조지 스트라우드에게 닥친 위기 탓에 서스펜스가 발생하기는 하지만, 해결하려는 노력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스스로 조사를 훼방놓는다고는 하지만, 그런 작전이 그닥 정교하게 드러나지 않거든요. 순전히 우연으로(출판사에서 일종의 현상금을 걸자 조지를 찾아나선 관계자가 미행해서 출판사 건물을 찾아냄) 점차 포위망이 좁혀지고, 결국 회사 건물 안에 범인이 있다!는 결론으로 직접 대면 수사하는 상황에 몰립니다. 그러나 조지 스트라우드는 앞서 설명한 루이즈 패터슨과의 대면 시의 협박 외에는 별로 하는게 없어요. 뭘 할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빠져나가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마지막 위기 탈출은 출판사가 얼 재너스에게 닥친 문제 (수사 대상) 등으로 다른 회사에게 인수되어 조지 스트라우드를 찾는 노력이 바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맥이 빠질 정도로 시시합니다. 운, 우연 등이 겹친 결과일 뿐 조지 스트라우드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지요.

또 이 인수합병으로 모든게 마무리된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조지 스트라우드는 재너스가 진범이 아니라는게 밝혀지기 이전에는 진범일 가능성이 있으며, 진범이 아니더라도 주요 참고인이라는건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단지 출판사에서의 조사가 끝났다고 모든게 해결된다? 솔직히 억지스러워요. 경찰마저 나서서 찾고 있다는 설정이 있는 한 이렇게 대충 넘길 수는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재너스의 투신 자살로 사건이 해결되는 듯한 결말도 마찬가지로 납득이 잘 되지 않았어요.

아울러 작가가 시인 출신이라는 경력 때문에 그런지, 지나치게 멋을 많이 부린 느낌도 많이 듭니다. 제목이기도 한 "빅 클락"이 대표적이에요. 시간은 뭘 해도 흐르고, 사람들은 모두 시계 속 부품일 뿐이라는 논리를 풀어내는 등으로 꽤나 의미 부여를 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냥 있어보이게끔 하는 소재에 불과합니다. 이야기와는 별 상관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흥미로운 범죄 스릴러로 쑥쑥 읽히는 맛은 좋고 비슷한 이야기 구조의 원조격이라는 역사적 가치는 크지만 잘 짜여진 범죄물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노 웨이 아웃"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영화화되었다고 하는데 영화로 보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모래톱의 수수께끼"도 "블러디 머더" 추천으로 읽었지만 별로였었는데, 이런 류의 추천에도 그만 좀 낚여야 겠습니다.

2024/09/07

오렌지와 빵칼 - 청예 : 별점 2점

오렌지와 빵칼 - 4점
청예 지음/허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벗어나지 않게 순종하며,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따라하며 모든걸 속으로 삭이며 살아가는 유치원 교사 오영아는 심리 상담을 통해 전두엽 기능을 일부 조절하는 시술을 받았다. 그 뒤 영아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고, 억압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모든 금기를 범하며 엄청난 쾌락을 얻는다. 그러나 시술 효과는 4주만 지속될 뿐이었다.

통제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금기를 범하는, 도덕에 반하는 행동(배덕의 맛)은 쾌락을 주지만 이는 마약과 같다는 설정의 일상 심리물. 

뇌를 건드려 사람이 변모한다는 설정의 작품은 많습니다. 전두엽 절제로 멀쩡한 사람을 로봇처럼 만든다던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혹성탈출 1" -, 아니면 바보를 천재로 만드는 - "앨저넌에게 꽃을", "론머맨" - 식으로요. 이 작품처럼 자기 통제를 없애는 설정은 뇌 조작으로 사악한 범죄자를 사회 규범에 충실하게 만드는 "시계 태엽 오렌지"의 반대 버젼이고요. 사회 비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비슷합니다. 다들 자기가 옳다고 믿지만, 그걸 타인에게 강요하는건 잘못되었고 이런걸 추종하지말고 자기 자신의 뜻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자기 통제, 죄의식을 없애는 설정이라면 SF나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에서 완벽한 군인이나 범죄자, 혹은 킬러를 만들 때 써먹음직 한데, 이를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평범한 일상으로 풀어나간건 분명한 차별화 요소입니다. 사회 비판적 요소도 공정무역, 환경보호와 친환경, 기부 등과 같은 일상과 맞닿아 있는 소소한 것들이라 신선했어요. 이런 작품이 체제와 제도의 비판을 하지 않는건 거의 처음 본 것 같네요.
덕분에 신선한 느낌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온갖 통제에 얽매여 살아가는 오영아의 답답한 모습에서,시술 후 통제를 다 부숴버리고 자신을 힘들게 했던 주변인들을 날려버리는 모습으로 변모하는 묘사는 통쾌했고요.

그러나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서 극도의 쾌락을 느낀다는 핵심 설정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왜 쾌락을 느끼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무한 탓입니다. 자기 통제가 강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인지, 오영아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상황인지도 모르겠고요. 영아의 연인 수원도 피실험자로 영아를 희생양삼아 공짜 시술을 받은 듯 한데, 평상시에 철저한 자기 관리와 영아에 대한 지극정성을 보여준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수원이 은우의 친부였다는 일종의 반전도 그다지 새롭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식의 결말도 아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어딘가의 추천에서 접해서 읽어보았는데, 저는 그닥이었습니다. 기대했던 '장르 문학'은 아니었던 탓이 가장 큽니다.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4/05/06

사형집행인의 딸 - 올리퍼 푀치 / 김승욱 : 별점 3점

사형집행인의 딸 - 6점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문예출판사

18세기 독일을 무대로, 사형집행인이 마녀로 위심받아 화형당할 위기인 산파 마르타의 생명을 구한 뒤 마르타가 죽였다고 의심되는 고아들 사망 원인과 아이들 어깨에 있는 기이한 문양의 정체, 그리고 나병진료소를 파괴한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힌다는 역사 추리 소설입니다. 상세한 시대 묘사, 독특한 직업의 탐정이 등장하는 역사 추리 소설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역사 추리 소설은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장르입니다. 추리, 역사에 관련된 소재를 모두 좋아하며 그냥 독서가 아니라 뭔가 배우는 느낌이 드는게 좋거든요.
이러한 현학적인 재미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상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필수인데, 이 작품은 기대에 충분히 값합니다. 사형집행인 야콥 퀴슬 및 조력자인 젊은 의사 지몬 프론비저 등 등장인물들은 물론 군인들, 짐마차꾼들과 같은 다양한 직업과 숀가우라는 도시 및 작품의 중요한 요소인 마녀 심문 (고문) 절차 등의 행정적 설정과 같은 모든 요소가 현실감있게 제대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이 중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야콥 퀴슬입니다. 전직 군인으로 고문에도 능한 사람 죽이는 명수가 실제로는 의사보다도 뛰어난 학식을 지닌 진짜배기 르네상스맨이라는 설정인데, 아주 독특하고 신선했습니다. 수많은 역사추리물을 읽어봤고, 실존 유명인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직업 - 고대 로마의 포도주 상인, 로마 장군, 수도사, 18세기 영국의 해결사, 터키 환관, 중국 판관 등 - 의 탐정들을 봤지만 사형집행인은 처음 접해보거든요. 단지 직업의 기발함으로 승부하는건 아닙니다. 디테일 역시 장난이 아니에요. 작가 올리퍼 푀치가 실제로 바바리아 주의 사형집행인 집안인 퀴슬가(家)의 후손이기에 가능했던 아이디어와 묘사라 생각됩니다. 덕분에 야콥 퀴슬이 지나치게 먼치킨으로 미화되었다는 단점도 있기는 하지만요.

그러나 다른 역사 추리소설과 동일한 단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추리 소설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복선이 정교하거나 단서가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거든요. 괜찮은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고요. 그냥 특정 단계를 클리어하면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식의 전개가 대부분입니다. 비교적 초반부터 진짜 범인인 군인들이 드러나는 등 수수께끼 풀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작위적이고 우연에 의지한 전개도 비교적 많고, 악마가 고아들의 은신처를 때맞춰 발견한 경위나 흑막의 정체 등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도 눈에 뜨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마녀의 표식이라는 것이 아이들끼리의 장난이었다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단서가 애들 장난이라니!

또 야콥 퀴슬이 중요한 정보를 항상 한박자 늦게 알아챈다는 전개도 너무 반복되어 식상하며, 결말부에서 법원서기가 모든걸 알고있었다!고 밝히는 장면은 정말로 불필요해 보였습니다. 덕분에 마르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동기가 죄다 사라져버린 탓입니다. 흑막을 알고 있었다면 깔끔하게 사건을 정리하는건 일도 아니었을텐데, 사건을 키운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잖아요? 한명 죽인다고 나병진료소나 군인들이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고, 파괴와 살인이 계속되면 수습이 더욱 어려워질 것은 당연할텐데 말이지요. 이런 점은 작가의 데뷰작이라는게 이유라 생각됩니다. 너무 쉽게 써 내려 갔어요.

아울러 야콥 퀴슬 외의 다른 캐릭터들이 주인공만큼의 존재감이 없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젊은 의사 지몬은 처음에는 힘의 야콥 - 지혜의 지몬으로 역할이 분배되나 싶었는데 내용에서는 야콥이 훨씬 뛰어난 학식을 갖춘 것으로 묘사되기에 별 쓸모가 없습니다. 위기와 문제만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에요. 그나마 활약이라면 은신처에서 클라라와 조피를 구해낸 정도밖에 없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사형집행인의 딸 막달레나 역시 지몬과 야콥을 엮어주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고요. 미인에다가 나름 여러가지 능력을 갖춘 것으로 소개되지만, 정작 사건에 있어서는 후반부에서 군인들에게 납치당하는 식으로 민폐 역할에만 소비될 뿐입니다. 이래서야 제목이 왜 "사형집행인의 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사형집행인"이거나 "사형집행인과 사윗감"이라면 모를까.

그래도 기본적인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해서 흥미롭고 쑥쑥 읽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독특함은 물론 마녀사냥이라는 당대의 소재를 잘 녹여낸 줄거리는 매력적이고 산파를 고문해서 자백을 받아내야 하는 시간제한이 존재하여 긴박함을 더하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역사추리물이 아니라 역사모험물이라고 하는게 더 어울리겠다 싶더군요. 악인은 모두 응분의 벌을 받고 주인공 일행은 모두 상응하는 보답을 받는다는 완벽한 권선징악 서사를 갖추고 있으니까요.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고 적나라한 고문과 처형 묘사가 관건인데, 이것만 조금 순화한다면 어린이용 모험소설이 될 수 있어 보입니다. 알렉산드르 뒤마나 쥘 베르느의 역사모험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3/12/25

내 안의 살인마 - 짐 톰슨 / 박산호 : 별점 3점

내 안의 살인마 - 6점
짐 톰슨 지음, 박산호 옮김/황금가지
이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텍사스 작은 마을의 신뢰받는 부 보안관 루 포드는 창녀 조이스와 얽힌 뒤, 과거 자신을 괴롭혔던 정신적인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조이스를 그녀를 짝사랑하는 엘머 콘웨이와 엮어 살해했지만 조이스가 큰 상처를 입고도 살아있는 채 발견되자 루는 걷잡을 수 없게 폭주하게 되는데....

심각한 정신적인 문제를 앓고 있지만, 운 좋게 그것을 숨겨온 주인공 루 포드가 특정 사건을 계기로 폭주를 벌이는 이야기를 1인칭으로 그린 범죄 - 심리 서스펜스물입니다. "MWA 추천 베스트 미스터리 100"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1952년도에 발표된 고전이기도 합니다. 이 리스트가 없었더라면 아마 읽게 되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여튼 찾아 읽어보게 되었네요.

작품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돌직구'입니다. 죽이고 싶고, 죽여야 하면 바로 죽입니다. 이렇게 시종일관 돌직구 스트라이크가 팍팍 꽂힙니다. 때문에 루 포드 캐릭터 묘사가 가장 중요한데 캐릭터 묘사, 즉 직구의 구위 역시 일품입니다. 지역 주민들에게 굿 가이로 통하지만 실상은 잔인무도한 살인마 주인공이 이렇게 설득력 있게 표현된 작품도 드물지요. 1인칭 시점으로 여러 가지 살인 계획을 세우고 수행하는게 냉정하면서도 하나의 게임처럼 그려지고 있는데, 정말로 오싹할 정도였어요. 그야말로 소시오패스 그 자체인 인물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귀공자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가 살짝 연상되는데, 작품 발표 시기가 테드 번디 사건 20여 년 전이라는걸 보면 그야말로 이 분야의 선구자라 불러도 무방할 겁니다.

이러한 캐릭터를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그리는 묘사도 대단합니다. 하드보일드 작가가 맘먹고 그려낸 "나쁜 놈"이라는 이미지인데, 1인칭 하드보일드 스타일 범죄물은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번 울린다" 등의 작품이 있기는 하나 이 작품의 범인은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달라요. 타당한 동기는 뒷전인 살인마니까요.

아울러 최초 범행에서 받은 뒤 우연찮게 사용한 20불의 존재가 동네의 껄렁한 불량아인 조니에게 이어지고, 교도소 안에서 살해한 조니가 사실 알리바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다른 희생양을 찾아 약혼녀를 살해하고, 협박범을 강도로 위장하여 살해하는 등의 모든 범행이 1인칭으로 그려져서 도서 추리물 같은 느낌을 전해주는 것도 독특했어요. 마지막의 조이스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사실상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는 점에서 더더욱 말이죠.

그러나 불필요한 잔설정이 많은 것은 좀 아쉽더군요. 초반에 루 포드가 다국어를 하고 심심풀이로 미적분을 푸는 지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 이후 그러한 설정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루 포드가 정신적 문제를 가지게 된 계기인 가정부와의 에피소드, 그의 죄를 뒤집어썼던 의붓형 마이크에 대한 이야기도 솔직히 사족이었습니다. 이왕지사 돌직구를 날리려면 그냥 나쁜 놈이다는 식으로 가는 게 더 좋았을 겁니다.

전개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콘웨이는 처음부터 진범을 알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초반에 보안관 밥에게 무언가 이야기했다는 것이나, 조니 파파스의 아버지 가게를 리모델링하는걸 돕는 식으로요. 그런데 왜 루 포드를 그냥 방치해서 사건을 키우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또 변호사 빌리 보이 워커가 루 포드를 정신병원에서 꺼낸 것 때문에 불필요한 마지막 사건이 또 일어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이렇게 설정면의 오류나 이해하기 어려운 전개는 어딘가의 연재물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만듭니다(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문제는 있지만 강력한 소설로, 컨트롤은 별로지만 돌직구 하나로 타자를 제압하는 투수가 연상되는 작품입니다. 지나치게 잔인하고 묵직한, 불쾌감 남는 묘사 탓에 모든 분들께 권해드리기는 어려우나 명성에 어울리는 가치는 충분하죠. 시대를 뛰어넘어 여러 차례 영화화 된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크리스마스에 읽고 리뷰를 올리기에는 좀 너무하네요....

2011/02/01

웃지 않는 수학자 1, 2 - 모리 히로시 / 윤덕주 : 별점 2점

웃지않는 수학자 2 - 4점 모리히로시/서울문화사

전설적인 천재 수학자 텐노지 박사가 자신의 저택 '삼성관'에서 가족들을 중심으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모에와 사이카와는 모에의 아버지와 텐노지 박사와의 인연으로 초대받았다. 크리스마스 파티의 흥이 한껏 오른 저녁, 텐노지 박사는 저택 입구의 거대한 청동상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시연했고 참석자들은 모두 크게 놀랐다. 그리고 그 수수께끼를 풀기도 전에 텐노지 박사의 며느리 리츠코와 손자 순이치가 차례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모든 것이 F가 된다"의 사이카와 - 모에 컴비 시리즈입니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죠. 국내에는 1996년이라는 국내 추리소설 시장 암흑기에 소개된 탓인지 광속으로 절판되었었습니다. 7~8년 전에 읽었었지만, 얼마 전 아무 생각 없이 다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올해 첫 완독한 책이기도 하네요.

그러나 예전 감상과 비교하자면 영 아니올시다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제일 큰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트릭과 동기, 그리고 모호한 결말의 세 가지죠. 그 외에도 이상한 번역 등 꼽고 싶은 게 많습니다만...

일단 트릭은 장치 트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교적 참신하고 스케일은 크지만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비현실적인 수준이 도를 넘었어요. 그러한 장치를 만든 이유도 불분명하고 말이죠. 만화였다면 어울렸을지 모르지만, 진지한 본격 추리물에는 그다지 어울리는 트릭으로 생각되진 않습니다. 덧붙이자면, 무대가 된 '삼성관'이 원래 '천문대'였다는 중요한 단서를 너무 대충 넘겨 이야기를 모호하게 만든 것도 공정하지 않은 처사라 생각되네요.

그래도 트릭은 '왜 1호실의 리츠코가 밖에서 죽고 아들인 순이치가 헝클어진 침대 아래에서 죽어 있었나?'라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푸는 데에는 딱 들어맞고, 나름 재미도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동기에요. 범인이 왜 범행을 저지르는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어이가 없을 정도에요. 이후의 과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 단순한 미움으로 이렇게 오래 범행을 준비한다는 것이 가능할지도 의심스럽지만, 이렇게 때를 기다려 왔다면 왜 불필요한 등장인물인 사이카와 - 모에 컴비가 초대되었을 때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 설득력이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비하자면 완전 범죄에 희생양을 등장시키지 않는 범인의 실수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겠죠...

마지막의 모호한 결말은 "모든 것이 F가 된다"를 의식한 탓일까요? 천재 괴물의 탄생을 알리는 결말로 보이는데, 괴물의 정체와 이러한 결말로 흐르는 이유 자체를 알 수 없기에 작위적으로만 느껴졌습니다. 그냥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끝내는 것이 훨씬 좋았을 텐데, 괜히 뒷맛만 찜찜해져 버렸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실제 공학교수이기도 한 저자의 특기를 살린 수학자의 두뇌 배틀이라는 테마와 함께, 앞서 말한 주요 수수께끼의 전개 과정과 중간중간의 수학 퀴즈, 그리고 사이카와 - 모에의 알콩달콩 귀여운 밀당은 볼 만했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는 평균 이하였습니다. 제가 나이를 훨씬 더 많이 먹은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예전의 좋았던 기억은 절판된 책을 구했다는 기쁨이 컸던 게 원인이 아니었나 싶군요. 절판된 지 한참 지났지만, 구태여 구해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2017/11/04

고양이는 알고 있다 - 이상우 : 별점 1.5점

국내 대표적 추리 작가 중 한 분이신 이상우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하여 일곱 편의 꽁트 및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우연찮게 읽어보았는데, 수준은 낮은 편입니다. 평균 별점은 1.5점 정도? 때문에 권해드리기는 무리지만 그래도 딱 한편, "황매실의 하룻밤"은 괜찮았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이 작품 하나만큼은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낭랑 18세" 

수위와 짜고 빈 사무실을 터는 보일러실 직원의 실패담입니다. 굉장히 짤막한 꽁트인데, 나름 재미있는 트릭이 등장합니다. 지하에서 일하는 직원이 어떻게 빈 사무실을 알아냈나?는 것으로 답은 공범자인 수위가 휴게실에 틀어놓은 음악 테이프였습니다. 음악을 듣고, 보일러실 직원이 레코드 가게에서 그 노래의 길이로 몇 호인지를 알아낸 겁니다. 4분 12초 짜리면 412호라는 식으로요. 그러나 결국 덜미가 잡히는데, 그 이유는 가게 점원에게 부탁하여 낭랑 18세를 찾은 탓이었습니다. 점원이 찾아준게 오리지널이 아니라 최근에 유행한 리메이크 버젼이었기 때문이지요.

발상은 재미있지만, 문을 따기 전에 최소한 안이 비었는지 아닌지 정도는 최소한 확인하고 문을 땄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리 현실적인 아이디어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백사도"

김내성스러운 제목에, 주인공인 그로테스크한 화풍으로 유명하다는 화가 김몽산도 김내성스러운 설정이라서 혹시나 했는데, 내용을 보니 정말로 김내성의 백사도에서 모티브를 따온 작품이더군요. 김몽산의 최신 대표작 제목이 "백사도" 거든요.

그러나 내용 자체는 김내성 작품과는 무관합니다. 자신의 작품을 혹평하는 평론가 곽충빈에게 살의를 품고 독이 든 얼음을 만든 김몽산의 계획이 실패하고 허무한 결말에 이르는 내용으로, 독이 든 얼음을 직접 챙기지 않고 딸에게 운반시킨 잔꾀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김몽산의 계획이 성공하여 곽충빈이 죽었어도 김몽산이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도 지극히 회의적이고요.

거장의 명성에 기대기만 한 수준 이하의 내용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예고 살인"

유전공학을 이용한 제품으로 유명한 주식회사 무진에서 일하는 천재 학자 김묘숙 박사와 그녀와 함께 기술팀을 이끌던 장주석 기술 이사가 차례로 살해당하는데...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추경감과 강형사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이 단편집 속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추리적으로는 완성된 편입니다. 김묘숙 박사에게 1시간 이상 지나야 녹는 독약 캡슐을 전해주고, 100kg이 넘는 장이사의 체중을 이용하여 일정 무게 이상의 사람이 밟아야 독이 주입되는 독 주사기를 장치하는 식으로 트릭이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범인인 변사장이 범인으로 삼을 희생양(이이사)을 준비하여 사건을 꾸미고 이이사가 범인이라고 몰고 간다는 점, 마지막으로 변사장의 동기가 비교적 상세하게 등장한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이 모든 점들이 잘 연결되어 완성되어 있지는 않아서 아쉽습니다. 일단 김묘숙 박사에게 준 캡슐이 1시간이 지나야 녹는다는 것은 마지막 추경감의 추리 외에는 그 어떤 단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트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요. 장이사 체중을 이용한 트릭은 조금 낫기는 하지만 너무 뻔할 뿐더러, 경찰이나 다른 사람이 과체중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은건 문제입니다. 또 이이사라던가, 비서 미스 구 등을 엮어서 범인으로 꾸미려는 변사장의 계획도 그닥 치밀하게 전개되지 않고요.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증거인 "괴문서"를 만든 신문이 변사장 집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좋은 추리물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증거 앞에서 또 다른 추리들은 전부 불필요해져 버리니까요. 그 외에도 변사장의 계획은 헛점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추경감과 강형사의 툭탁거리는 캐미는 좋고, 앞서 말씀드렸듯 추리물로서의 기본 조건은 갖추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조금만 더 신경썼더라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아내의 남자들"

우연찮게 추경감은 한 주부의 불륜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 주부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전해듣고 사건 수사를 돕기 위해 나섰다.

지극히 평범한 불륜 치정극입니다. 약간의 수사가 진행된 후 현장에 남겨진 증거 - 현장 도어 손잡이 지문과 체모 - 로 범인이 체포되기에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무리입니다. 정숙해 보였지만 사실은 문란했던 한 주부에 대한 묘사를 선보이는게 목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쪽으로도 많이 부족했고요. 딱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황매실의 하룻밤"

두 쌍의 젊은 부부가 시골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이동 중에 별장 옆 황매실이라는 작은 촌락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 모두 부부를 보고 말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급한 일로 밤에 전화를 쓰려 별장에서 황매실로 이동한 부부는 황매실 마을이 텅 빈 것을 보고, 황매실 마을이 전설처럼 구미호들이 사람 행세를 하고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하며 두려움에 떠는데...

몇 페이지 되지 않는 꽁트인데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입니다. 공포스러운 상황도 설득력이 넘칠 뿐더러, 결말 역시 와 닿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한국적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진상은 바로 '황매실 주민들은 할아버지 제사로 밤에는 모두 아랫 마을에 다녀온 것이며, 제사드리는 날은 목욕 제계하고 외간 사람들과 말도 나누지 않는 법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정말 그럴듯 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공포스러운 하룻밤에 대한 묘사가 조금만 더 생생했더라면 5점도 충분했겠지만, 이대로도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고양이는 알고 있다" 

최건일이 청산 중독으로 사망했다. 원인은 팔에 난 상처로, 경찰 수사를 통해 상처의 원인이 된 고양이 발톱에 청산이 발라져 있었다는게 밝혀졌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수사를 통해 최건일의 복잡한 가정사에 주목하는데...

니키 에쓰코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표제작으로, 전형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콩가루 집안이 등장합니다. 빚에 쪼들리는 동생(최건식), 방탕한 아들(최호정), 아버지가 반대하는 남자와 교제하는 딸(최현아), 최건일의 오랜 불륜 대상인 가정부(석이네) 등 등장인물 모두 전형적이니까요.

그러나 콩가루 집안에 대한 묘사 외에는 추리물로 볼 만한 여지가 전무합니다. 강형사의 현란한 헛다리짚는 추리가 펼쳐지는 것 정도는 볼거리이지만, 실상 진상은 별 볼일 없기 때문이에요. 차라리 고양이 발톱에 바른 청산이 흉기였다는게 더 재미는 있었을텐데, 실상은 건식이 소독약을 바꿔치기한게 진상이라니 허무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것이 밝혀지는 것도 최호정의 자백에 불과하고요. 도대체 고양이가 뭘 알고 있었던건지 당쵀 알 수가 없네요. 

무엇보다도 방탕하고 철없던 최호정이 마지막 순간에 휴머니스트로 돌변하여 눈물까지 쏟는다는 결말은 최악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고로 별점은 1점입니다.

"아내는 탐정"

술을 끊은 김말구는 아내 박순임, 딸 김민희와 무인도로 캠핑을 떠났다. 그런데 텐트에서 소주병이 발견되고, 김말구는 새벽에 몰래 술을 마시러 나오는데...

남편이 술을 사다가 텐트에 숨겨놓은 후, 오래전 술을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위장하여 다시 술을 입에 대려고 한 것을 알아챈 아내가 술을 물로 바꿔치기했다는 내용의 꽁트입니다. 아내가 이를 알아챈 이유는 술병을 쌌던 신문지가 올해 것이었다는 겁니다. 여러모로 딱히 점수를 주기 애매한 수준의 작품이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