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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9

스트로베리 나이트 - 혼다 테쓰야 / 한성례 : 별점 1.5점

스트로베리 나이트 - 4점
혼다 테쓰야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택가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후 버려진 사체의 정체가 사무기기 임대 회사 오쿠라 상회의 영업맨 카네하라라는게 밝혀졌다.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는 착실한 인물로, 수상한 점이라고는 매월 두 번째 일요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점, 그리고 최근 급작스럽게 업무에 열의를 보인 점 뿐이었다.

사건을 담당한 히메카와 레이코는 직감적으로 사체는 원래 발견 장소 바로 옆 우치다메 낚시터에 유기될 계획이었다고 추리했다. 단서는 피해자 복부 사후에 생긴 절창이었다. 이를 배에 가스가 차 떠오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낚시터에서 기생 아메바에 감염되어 사망한 젊은이 사건과 엮어 상부에 설명한 후, 낚시터를 긴급 수색한 끝에 낚시터 안에서 다른 시체를 발견했다.

발견된 피해자는 잘 나가는 광고맨 나메카와로, 그 역시 매월 두 번째 일요일의 약속, 그리고 최근 급격하게 업무에 열의를 보였다는게 카네하라와 일치했다...

혼다 테츠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 첫 번째 작품입니다. 2006년도 발표된 작품으로, 동명의 드라마를 추천받은 적이 있는데 미처 감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자주 가는 도서관에 책이 있길래 연휴 때 읽을까 하고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최악이었니다. 세간의 평가가 높은 이유를 도무지 알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백야행"처럼 드라마가 원작을 초월하는 완성도로 제작되어 높은 평가를 받는걸까요?

아주 약간이지만 장점을 언급하자면, 특정인에게 공개되는 살인쇼라는 설정은 "호스텔"과 유사하지만 살인쇼 참가자 중에서 피해자를 골라낸다는 아이디어만큼은 신선했습니다. 인터넷 뒤에 숨어 즐기는 비겁자가 많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같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또 초반 레이코와 검시관 쿠니오쿠가 국수를 먹으면서 나누는 시체 태우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레이코가 이오카와 조를 이루어 카네하라 주변 인물에 대한 사정청취에 나섰을 때 등장하는 취조 방법에 대한 약간의 팁(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 말을 기록한다고 의식하면 입이 무거워지는 법이었다. 그래서 이오카는 보란 듯이 노트를 덮고 오자와가 입을 열기 쉽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등 몇몇 경찰 수사 과정의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과거 성폭행을 당했던 레이코가 방범 카메라에 찍히기 위해 큰길을 통해 비디오 대여점과 편의점을 거쳐 집으로 간다는 설정과 묘사도 마찬가지고요.

가혹 행위를 당하며 살아온 한 소년의 추억과 현재 시점의 사건이 살짝 엮이며 진행되며, 이 소년이 후카자와(일 것)라는 것은 비교적 초반에 밝혀지지만, 경찰 시점에서는 후카자와가 이미 사망한 사람이라는게 밝혀지며 호기심을 자아내는 전개도 비교적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이외에는 건질 게 없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 너무나 별 볼일 없습니다. 사건의 원인이 매월 두 번째 일요일의 만남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기에 이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밝혀내는지가 핵심인데 이 과정이 나메카와의 친구에 의해 너무 쉽게 해결되어 다음 단계로 진행되는 탓입니다. 경찰 수사에 따른 결과라고는 해도 이래서야 너무 시시하죠.

게다가 뒷골목 탐정이라는 타쓰미가 돈 몇 푼에 수사의 핵심에 접근한다는건 해도 너무한 전개입니다. 약간의 돈과 시간으로 키타미가 진범이라는 것을 알아내는데, 이럴 거라면 경찰은 왜 필요한 걸까요? 자기들끼리 세력 다툼이나 하는 쓰레기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경찰을 전부 해고하고 타쓰미를 고용하는 게 훨씬 가성비가 높아 보여요.

소소한 전개 역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기만 알고 레이코를 극도로 싫어하는 이기적인 형사 카쓰마타와의 대립, 레이코를 놓고 벌이는 부하 오쓰카 - 키쿠타의 대립 등 수사 과정에 있어 불필요한 드라마가 너무 많아요. 특히 카쓰마타는 상사도 아니고 계급도 같은데, 레이코가 성희롱을 넘어서는 폭언을 듣고도 참아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 됩니다. 게다가 '사실은 카쓰마타도 좋은 경찰이었다!'라는 엔딩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맛의 달인"의 우미하라, "분노의 늑대"의 야규 캐릭터 변절급인데, 앞선 작품들은 수십 권의 에피소드를 쌓아놓기라도 했지 이건 뭐... 요즘 말로 우디르급 태세 전환?

자극적이고 진부한 묘사도 무척 거북합니다. 특히 '스트로베리 나이트'의 실체가 살인쇼라는 것이 밝혀진 후 등장하는 고어한 묘사가 대표적이죠. 히메카와 레이코에 대한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당했던 성폭행은 비록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녀가 경찰이 되게 만들었다는건 뻔함과 진부함 그 자체였으니까요. 은인인 시타 형사 이야기는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고요.
후카자와 유카리가 진범이고 그녀가 자신이 여성임을 부정하는 행동을 보인다는 것, 그것이 과거 성폭행의 결과라는 것 역시 진부하다는 틀을 깨기는 역부족입니다. 여기에 더해 후카자와 유카리가 진범임을 숨기기 위한 장치도 작위적이라 짜증 날 정도예요. 담당 의사라 면담을 거부할 수는 있지만, 개인 기록은 당연히 넘겨줬어야 합니다. 초반에 주치의가 몇몇 특이 사항만 경찰에 이야기했더라도 사건은 바로 해결되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장점이라고 했던 살인쇼 참가자 중 피해자를 고른다는 아이디어도 발상에 비하면 디테일은 모두 부족합니다. 참가자 모집 방법도 현실적이지 못하고, 이 상황에서 참가자들이 죽음이라는 현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가치관을 재인식하게 해줘 삶에 열의를 갖게 한다는건 억지스럽기 짝이 없는 탓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망가지 못해 안달이 났을텐데 말이지요. 또 결국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찾아올게 뻔한데,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흥행을 의식한 저속한 펄프 픽션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세간의 고평가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네요. 세간의 평가는 드라마에만 한정된 듯합니다. 아주 약간의 장점이 있기에 제 별점은 1.5점입니다만, 도저히 후속권은 읽어 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2021/11/07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2.5점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소설 자체를 풍자했던 "명탐정의 규칙" 시리즈에 이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블랙 코미디 풍자 단편 모음집입니다. 이번에는 추리 문단에 관련된 모든 인물들, 즉 작가, 독자, 편집자, 평론가 모두를 비판하고 풍자합니다. 돈벌이에만 골몰하는 작가, 잘 팔리기 위한 화제를 만드는데 집중하는 편집자, 제목과 약간의 설정만 다른 똑같은 작품을 유명 작가의 시리즈라는 이유만으로 소비하는 독자들. 책의 완성도 따위는 관심없고, 쉽게 돈 벌 생각에, 생각과는 다른 평론을 써 제끼는 평론가가 등장하거든요. 2001년 발표작이라는데, 데뷰한지 15년이 지났고 여러 히트작으로 업계에서 탄탄한 지위를 굳힌 히가시노 게이고였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만큼 과격한 풍자가 많습니다.

돈벌이에만 골몰하는 작가를 풍자하는건 "세금 대책 살인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작중 추리소설가 '나'가 막대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고액의 영수증을 비용 처리하려고 원래는 홋카이도가 무대인 소설에 하와이를 집어 넣고, 여러가지 옷을 구입한 이유와 골프 비용 등을 집어 넣으면서 작품이 산으로 가게 만든다는 내용이니까요. 소설을 어떻게 바꿔 썼는지가 자세히 등장하는데, 이게 굉장히 웃기더라고요. 결국 '나'의 작품은 망해서 연재마저 끊기고, 세금 대책에도 실패한다는 결말이고요.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블랙 코미디 풍자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서점의 명탐정" 수록작이었던 "일상 업무 탐정단"에 소개되었던 작품인데, 이렇게 읽게 되어 굉장히 반가왔습니다.

잘 팔리기 위한 화제를 만드는데 집중하는 편집자는 "장편소설 살인사건"에 등장합니다. 긴쵸사의 편집자 오기는 그는 '초대작' 이어야만 팔린다고 작가 구주하라 만타로를 꼬드겨서, 800장의 완성도 높은 작품을 2,000 장으로 늘려버립니다. 별 거 아닌 문장을 몇 배로 늘리고, 쓸데없는 묘사를 덧붙이는 식으로요. 게다가 신작 "커브볼"은 3,000장을 목표로 작품과는 상관도 없는 정보를 다수 삽입하여 분량을 늘려가다가, 결국 '무게'로 승부하고 만다는 황당무계한 짓거리를 저지르고 말지요.
구즈하라가 작품 길이를 늘리기 위한 분투를 상세히 묘사한 내용은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알맹이는 없는데, 이상하게 긴 대작 장편이 많은건 저도 불만이었는데, 정말로 이런 짓거리가 벌어진게 아닌가 의심스럽군요. 

"마카제관 살인사건"은 아주 짤막한데, 편집자에게 휘둘려 본의아닌 작품을 쓰게 되었던 작가의 절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편집자를 풍자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물론 작가 문제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자기가 썼던 내용도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연재 소설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90대 고령 치매 작가 야부시마 기요히코가 등장하는 "고령화 사회 살인사건"은, 제목 그대로 '고령화'가 닥친 추리 작가의 비극(?)을 그려낸 블랙 코미디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독자들을 비판하는 작품이에요. 야부시마 기요히코가 엉망인 작품을 쓰면서도, 심지어 이전에 출간했던 작품과 같은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팔리는 이유는 독자들이 유명 작가의 시리즈라는 이유만으로 소비하기 때문이거든요. 독자들도 고령이라 전작을 다 잊었다는 식으로 끝맺기는 하는데, 전작을 잊지 않았더라도 현실에서 실제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독자로서 반성하게 되더군요.
예를 들어 요코미조 세이시의 "삼수탑"은 "여왕벌"의 자가 복제에 불과했는데도 불구하고, 작품이 발표될 수 있었던건, 이름값만으로 무조건적으로 소비하는 독자 탓도 분명 크다고 생각됩니다. 

"이과계 살인사건"은 내용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읽은 척, 잘난 척을 해대는 매니아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 역시 추리 애호가로서 많이 와 닿았습니다.

"독서 기계 살인사건"은 책을 읽지도 않고, 편집부 요청대로 호평과 혹평을 써갈기는 평론가 몬마가 주인공입니다. 이는 '쇼혹스'라는 기계를 구입한 덕에 가능했었지요. 쇼혹스를 만든 회사는 쇼혹스를 평론가들과 출판사에 팔아먹은 뒤, 쇼혹스의 비평을 최고 점수로 통과할 수 있는 요령을 알려주는 쇼혹스 킬러를 만들어 작가 지망생들에게 팝니다. 마지막 제품은 일반인용의 시타카브릭스로 책의 요약과 재미있고 지루한 부분을 알려주는 장치였고요.
단순히 평론가들만 비판하는건 아니고, 책을 읽지도 않는데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책이 팔리지도 않는데 베스트셀러가 발표되고, 일반 독자는 알지도 못하는 상이 들어나는 등 책은 사라지고 있지만 책을 둘러싼 환상만은 요란한 현 세태를 풍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컨텐츠가 넘쳐나서 사람들이 책을 예전만큼 읽지 않는건 명확한 사실인데 차라리 시타카브릭스같은 장치가 상용화된다면 팔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줄거리는 물론 스포일러까지 가득 담고 있는 제 리뷰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한데, 조회수를 보면 이나마도 안 읽는게 요즘 세태가 아닌가 싶어 좀 씁쓸하기도 하네요.

이런 블랙 코미디나 풍자극으로 즐길 수 있는 작품 외에도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작품들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범인 맞추기 소설 살인사건"이 그러합니다. 유명 작가 시마부쿠로는 직접 쓴 추리 소설 '문제편'을 해결하는 편집자에게 신작 장편을 넘기겠다고 말하고, 각 회사 편집자들의 두뇌 싸움 끝에 긴초샤의 가타기리가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시마부쿠로가 쓴 신작 장편 따위는 없었습니다. 얼마전 죽은 그의 아내가 진짜 작가였기 때문으로, 시마부쿠로는 아내가 남긴 소설 문제편의 해답을 알 수가 없어서 편집자를 동원했던 겁니다. 즉, 어떻게든 돈벌이를 만들기 위해 있지도 않은 장편을 걸고 편집자를 이용한거지요.
악덕 작가의 표본처럼 묘사되는 시마부쿠로를 통한 적절한 풍자도 인상적이었지만, 편집자가 그럴듯한 해답을 추리해 낼 수 있게끔 문제편에서의 단서 제공이 완벽한 덕분에 정통파 본격 추리 소설로 보아도 충분했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예고소설 살인사건"에 등장하는 마쓰이 기요후미는 매 화마다 제복을 입은 여자가 살해되는 작품을 연재하는 인기없는 추리 작가입니다. 그런데 그가 쓴 내용대로 실제로 제복을 입은 여자들이 살해되기 시작하고, 마쓰이의 작품도 덩달아 큰 인기를 얻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마지막 화에 범인이 '자살'한다고 쓴 마쓰이는, 범인과 대결하려다 오히려 살해당하는데 그 탓에 범인으로 몰리고 만다는 결말입니다. 마쓰이는 중반 이후. 범인과 결탁해서 원고를 썼기 때문에 돈벌이에 골몰하는 작가를 풍자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풍자보다는 일종의 범죄물에 가까왔던 작품이에요.

결론적으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블랙 코미디이자 풍자극으로도 재미있지만 정통 추리적인 요소도 없지는 않은 만큼, 독특한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추리 문학 애호가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12/01/08

UN-GO : 별점 2점

정말 오랜만에 애니메이션 한 시즌을 끝까지 감상했습니다. 추리 애니메이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관심이 생겨 보게 되었습니다.

사카구치 안고의 오래된 단편집을 원작으로, 배경을 근미래로 각색하여 제작된 작품으로 총 11화 완결입니다. 단편 옴니버스 형식이지만, 에피소드를 거치면서 점차 세계관과 주인공들의 관계 및 정체를 밝혀가는 긴 호흡의 이야기가 함께 전개됩니다.

근미래가 무대이긴 하지만, 원작이 워낙 오래된 작품이어서인지 사건 수사는 탐정들의 추리에 의존할 뿐입니다. 이 때문에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후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공권력과 거대 자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잘 각색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거대 자본이 인터넷 기업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인터넷 기업의 수장이자 자본과 공권력을 모두 상징하는 인물인 카이쇼 린로쿠의 사상을 비교적 디테일하게 보여준 점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전후 일본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분위기가 잘 묻어났습니다. 다만 원작을 읽어보지 못해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네요.

그러나 문제는, 추리 애니메이션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에피소드의 길이가 고작 20여 분밖에 되지 않아 정교한 추리 구조를 만들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이야기들이 추리물이라기에는 다소 얄팍한 편이었습니다. 20여 분은 등장인물과 사건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초반에는 단편 에피소드 형태로 진행되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긴 호흡의 구조로 바뀝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전체를 하나의 장편으로 그려갔으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가장 길었던 마지막 3편의 에피소드가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또한, 탐정 신쥬로의 파트너 인과의 능력이 '그가 물어본 질문에 인간은 반드시 답을 하게 된다'는 설정인데, 이런 능력이 있다면 용의자들에게 "너가 범인이냐?"라고 묻는 것이 더 빠르지 않았을까요? 그나마도 초반 이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이야기 전개에 크게 필요 없는 판타지스러운 설정에 불과했습니다. 차라리 이 설정을 제외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RAI 카자모리 정도의 조력자였다면 훨씬 설득력 있었을 텐데 말이죠.

한마디로, 이 작품을 추리물이라고 홍보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던져놓은 떡밥을 제대로 회수하지도 않고 끝맺었다는 점, 그리고 연출과 작화에서도 다소 저렴한 느낌이 들었던 점도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세간에는 백전백패의 '패전 탐정'으로 알려진 주인공 신쥬로의 추리가 사실은 옳고, 명탐정으로 알려진 IT 거물이자 공권력의 흑막인 카이쇼 린로쿠의 추리가 틀린 것이라는 설정은 정말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권력 집단의 조작으로 인해 카이쇼의 추리가 매번 옳은 것으로 발표된다는 설정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다른 작품에서도 주요 반전 요소로 써먹어도 될 정도로 훌륭한 설정이었는데, 1화에서 너무 쉽게 소비해버린 점이 아쉬웠습니다.

이 설정 하나 덕분에 감점 요소를 감안하더라도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추리물로서는 기대 이하였던 만큼, 혹시 다음 시즌이 제작된다면 보다 추리 요소에 진지하게 접근해 주었으면 합니다.

에피소드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화

"당신에게 있어 남편은 뭐야?"

파티장에서 살해당한 부도덕한 기업회장 사건.

캐릭터 소개와 세계관 등을 설명하는 것이 주요 내용으로 카이쇼 리에 - 카이쇼 린로쿠 - 유우키 신쥬로라는 주요 탐정역들의 추리를 연달아 보여주며 사건을 해결하는 전개입니다. 그런데 짧은 시간 탓에 추리가 그냥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구조인 탓에 추리적인 내용은 그닥이었습니다. 트릭도 고전적이라 신선함이 떨어졌고요.

숨은 그림 찾기 같은 재미는 있었지만 작품의 기본 설정 소개 이외의 가치는 별반 없는 에피소드였습니다.

2화

"정말 네번째 요나가히메는 누구야?"

아이돌 요나가히메의 프로듀서 살해사건을 다룬 에피소드. 요나가히메의 죽었다는 네번째 멤버에 얽힌 동기는 그럴싸했는데 범인이 딱히 변장까지 해 가면서 다른 멤버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은 것이 옥의 티였습니다. 그래도 작품 설정과 이야기가 잘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평작 수준은 되는 듯 싶네요.

3화

"사사 카자모리는 누구?"

사사가문의 당주 카자모리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이야기. 전개는 깔끔하나 7년 전 폭사한 전당주 사사 코마모리가 인공지능의 권위자였다는 것에서 카자모리의 정체가 쉽게 예상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동기가 부실하다는, 아니 아예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입니다. 부유하지만 기괴한 콩가루 집안이라는 일본 본격물의 전통적 설정을 근미래 배경에 걸맞게 각색하고 나름의 트릭으로 구현했다는 것은 좋았는데 추리적으로는 그닥이어서 아쉽네요.

4화

"그 시체는 누구?"

3화에서 이어지는 에피소드. 사사 카자모리의 정체가 밝혀진 이후 시체는 그럼 누구였는지를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이 에피소드에서부터 인과의 질문이 효과가 없고 신쥬로의 추리에 의해 사건이 밝혀지는 비중이 높아집니다.

그래도 추리 자체가 워낙에 별볼일 없고(경찰 공조수사였다면 단박에 결판났겠죠), 인간의 욕망에 더해 정의가 무엇인지를 세계관과 믹스하여 보여주는 부분은 지나친 훈계조라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덧붙이자면 작화도 이 에피소드부터 뭔가 미묘하게 변해서 그닥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5화

"어젯밤 너는 여기에 돌아왔었지. 거기서 뭘 봤지?"

'일륜의회'라는 우익단체(로 보이는) 리더 시마다 하쿠로우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시마다 하쿠로우의 아들 시마다 지로가 배우라는 것은 뭔가 고이즈미를 연상케도 하지만 내용은 풍자와는 별 관계는 일종의 보물찾기 이야기였습니다.

신쥬로의 최초 추리가 실패하고 인과와 신쥬로의 인연이 살짝 드러나며 인과의 다른 능력 (파워)이 드러나는 등 설정면에서 특이한 부분이 많이 보여지는 에피소드이긴 하나 추리적으로는 정말로 심각할 정도로 별 내용이 없더군요... 외려 카이쇼의 추리가 더 그럴듯했을 정도이니 말 다했죠. 희생자와 살아남은 자에 대한 정의 이외에는 건질게 없었던 수준 이하의 에피소드였습니다. 덧붙이자면 작화도 여전히 별로였고요.

6화

카이쇼의 옛친구 야지마가 신쥬로에게 카니쇼의 장서 중 한권인 책 속에서 발견된 암호에 대해 의뢰하는 내용으로 야지마가 아내의 잠자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같은 일상계적인 요소가 괜찮았던 소품입니다. 야지마의 아내와 카이쇼간의 불륜을 암시하는 전개에서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결말도 좋았고요. 마지막 카이쇼의 "진실은... 언제나 하나인 걸까" 라는 모 유명작품 명대사를 비트는 센스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도 인과의 기묘한 능력을 통한 활약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설득력 측면에서 점수를 줘야하는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이렇게 판타지스러운 설정 없이도 잘 만들 수 있었는데 대관절 왜 인과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켰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7화

신쥬로가 6화 사건의 흑막인 야지마의 동료 죄수인 소설가를 면회하던 중 그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 이야기를 듣고나서 전쟁 전 영화 촬영현장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이야기. 전쟁에 대한 나름의 시각은 있으나 여러 수수께끼같은 설정을 가지고 장난친 느낌만 드는 알 수 없는 에피소드였어요. 뭘 이야기하려는지도 모르겠고 사건도, 추리도 없지만 무엇보다도 재미가 없어요. 물론 다음 에피소드와 이어지기에 이 에피소드만 놓고 평가하기는 좀 무리이긴 합니다.

8화

전편 마지막에 벌어진 영화 촬영 현장에서의 감독 살인사건과 주요 용의자로 몰린 신쥬로가 추리를 통해 진범을 밝혀내는 이야기.

교도소라는 무대에서 모니터 가능한 수감자 번호를 이용하여 만든 트릭은 작품에 꽤 잘 어울렸고 마지막 추리쇼에서 결정적 단서로 내민 상자에 가린 범인에 대한 피해자의 대사도 제법 디테일이 살아있는 부분이었어요.

그러나 전편에서 부터 이어지는 다양한 설정들의 떡밥이 해결되지 못하고 범죄 자체가 우발적이기에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설가와 별천왕 (벳텐오우)의 관계라는 핵심 요소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네요.

9화

카이쇼 린로쿠가 적들을 모아놓은 TV토론회에 참석했다가 폭발사고에 휘말리고 그들을 살해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는 이야기로 전편에 등장한 별천왕의 최면술을 주요 트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기억 디테일이 어긋나는 사소한 장치는 돋보이지만 완결되는 에피소드가 아니라서 에피소드만의 평가는 어렵습니다.

10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데 숨겨야만 하는 것은?"

9화의 사건으로 용의선상에 오른 카이쇼가 TV 청문회로 결백을 증명하려하나 인과에 의해 심복인 코야마 검사가 카이쇼의 비밀인 정보조작을 고백하여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고 이후 자동차 폭발사고로 사망하게 된다는 이야기.

추리는 신쥬로가 별천왕의 존재를 알고 카이쇼의 죽음을 의심하는 것이 전부지만 간만에 등장한 인과의 활약(?)과 함께 주요 인물들의 극적인 행동 등에서 서스펜스가 제법 느껴지기에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단지 하나의 진실에 만족하는 것은 거기서 사고를 멈추는 것에 지나지 않아"라고 카이쇼 린로쿠가 대중이 쉽사리 빠지게 되는 음모론에 대해 설명하며 내뱉는 대사도 인상적이었어요. 이 친구 "하나의 진실" 이라는 말을 꽤 좋아하는 듯 싶군요.

11화

"너의 바람은 뭐지?"

9, 10화에서부터 이어져 카이쇼 린로쿠 죽음과 별천왕 존재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에피소드로 대망의 최종회입니다. 3화에 걸친 장편 에피소드답게 복선도 확실하고 단서도 풍부할 뿐 아니라 반전도 괜찮았습니다. 확실히 장편답게 디테일했어요. 무엇보다도 별천왕 능력에 대한 설명을 보여줘서 일종의 두뇌게임을 보여주는 것이 마음에 들더군요.

그러나 하야미가 별천왕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후루써클이라는 조직과 함께 어떻게 인과까지 조종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등 시청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설득력도 함께 놓친 점은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정통 추리물이 되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부분을 좀 더 신경썼어야 했을텐데 말이죠.

아울러 몇몇 설정을 끝까지 밝히지 않는 것은 요사이 유행인 듯 한데 별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혹 시즌 2를 염두에 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인기를 끈 작품같지는 않네요.

2022/10/30

무엇을 위한 해체? 엽기 토막 살인이 등장하는 추리 소설들

* 자주 소개드리는 honto의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입니다. 이번에는 토막 살인이 등장하는 추리 소설들로 대체로 좋은 작품들입니다. 하지만 <<데드맨>>보다는 이런 류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이나 <<문신 살인 사건>> 등을 포함시키는게 더 나았을것 같네요.


엽기 범죄의 대명사인 시체를 해체하는 토막살인. 추리 소설 작가들은 주로 "범인이 왜 일부러 시신을 토막내야만 했을까?"라는 동기에 주목하지요. 이 매력적인 수수께끼에 큰 속임수, 그리고 드라마를 숨겨서 독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전개를 보여주는 추리 소설들을 모아보았습니다.

"점성술 살인사건" 시마다 소지 

시마다 소지의 데뷔작이자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제1탄. 밀실 살인과 엽기적인 토막 살인, 관계자의 수기, 독자에의 도전장 등 본격 추리 요소가 가득한 작품. 일본의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추리 소설에 빠져든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 명작.

"치아키의 해체원인" 니시자와 야스히코 

신체의 일부를 토막내고 해체하는 살인 사건을 다룬 9편의 단편이 수록된 보기드문 단편집. 수록작 모두 '왜 시신을 해체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동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퍼즐같은 정교함을 맛볼 수 있는 작품들로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데뷔작이자 '다쿠미 치아키 시리즈' 제1탄.

"살인 방정식" 아야츠지 유키토 

신흥 종교의 교주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살해되고, 머리와 팔이 절단된 시체로 발견된다.누가, 왜, 그리고 어떻게? 라는 본격 미스터리의 묘미를 즐길 수 있는 작품. 대담한 트릭과 의외의 진범, 완벽한 복선 회수를 통해 논리적으로 해결되는 수수께끼. 과연 아야츠지 유키토!라며 탄복할 수 밖에 없다. 속편도 추천.

"망량의 상자" 쿄고쿠 나츠히코 

연쇄살인으로 시작되어 민속학, 요괴, 전기 소설 등 여러 장르가 혼합되어 전개되는 작품. 화제가 되었을 정도로 두껍지만 질리지 않는 재미가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시작해보시길. 최고의 세계관에 푹 빠질 수 있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대표작이라는 이야기도 많은 걸작.

"데드맨" 가와이 간지 

신체의 일부가 사라진 6구의 시체.그리고 그 부품을 연결해서 만들었다는 '데드맨'으로부터 메일이 보내지는 장면에서 시작되는, 시마다 소지의 걸작 "점성술 살인 사건"에 오마주를 바친 작품. 의외의 전개를 통해 오락성이 강한 서스펜스 추리물이다.

2020/08/09

테미스의 검 - 나카야마 시치리 / 이연승 : 별점 3점

테미스의 검 - 6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를 동족 인간이 판단하는 행위 자체가 불손하고 오만하네. 구로사와 재판관 (시즈카 재판관의 스승) 

쇼와 59년 (1984), 부동산업자 구루마 부부가 살해당했다. 우라와 경찰서 검거율 1위인 나루미 경부보는 유력한 용의자 구스노키 아키히로를 불법으로 연행하여 심문한 뒤 자백을 이끌어냈다. 나루미의 파트너인 신참 형사 와타세는 나루미의 방식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말없이 따랐다.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아키히로는 결국 몇 년 뒤 구치소에서 자살했다. 

헤이세이 1년 (1989) , 나루미의 은퇴 후 도지마와 파트너가 된 와타세는 가미키자키에서 발생한, 고급 주택에서 아이와 아이 엄마가 강도에게 살해된 사건 수사에 나섰다. 주변에 목격자가 없는 환경이라 수사는 난항을 겪지만, 도지마와 와타세 컴비는 이 사건이 단순 빈집털이 사건인 오하라 현장과 유사하다는걸 알아낸 뒤, 흉기와 도구에서 열쇠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확인하고 관련자들을 수사해 나간 끝에 범인 사코미즈를 체포했다. 그리고 와타세는 이 사건이 쇼와 59년 부동산업자 살인 사건과 유사하다는걸 깨닫고 심문을 통해 사코미즈가 진범임을 밝혀냈다. 

와타세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다가 조직으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지만, 시즈카 재판관 등의 조언을 받고 사코미즈의 조서를 공개했다. 이후 언론의 대대적인 공세와 함께 사건 관계자들은 모두 좌천되거나, 해임되고 말았다. 그러나 핵심 수사관이었던 나루미는 이미 퇴임한지 3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리고 와타세는 내부 고발자로서 온다 검사로부터 보호받아 처분에서 빠져나갔다. 와타세 본인은 이에 대해 크게 자책하며 두 번 다시 수사에 오점을 범하지 않는 형사가 될 것을 결심한다.

23년 뒤인 헤이세이 24년 (2012).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사코미즈는 출소 직후 공중 화장실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고, 수사 1과 1반을 맡는 경부가 된 와타세는 독자적인 사건 수사에 나선다...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 등으로 접했던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의 장편입니다. 잘못된 수사와 판결에 의한 '원죄'를 주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 왜 가해자보다 피해자 가족이 더 비참해져야 하는지, 흉악한 살인범도 인권이라는게 있는지 등 여러가지 질문을 많이 던져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파 소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사회파스러운 소재에 더해진 본격 추리라는 작풍이 작가의 특징인 듯 한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에요. 특히 '재판, 특히 사형 판결을 내린다는게 얼마나 무거운 행위인지' 알려주는 작품은 여러 편 보아 왔지만 묵직한 내용을 추리적으로 잘 포장한 작품은 "데이비드 게일"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그런 점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이야기는 시대순으로, 사건별로 구분되어 전개되지만 크게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중반부까지 이어지는, 부동산 업자 부부 살인사건 용의자 아키히로의 자백을 받아내어 그는 사형 선고를 받지만, 5년 뒤 일어난 고급 주택가 모자 강도 살인 사건 수사를 통해 진범이 드러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사에 대한 묘사는 빼어납니다. 우선 부동산 업자 부부 살인 사건에서는 나루세 경부보가 용의자 아키히로를 옭아매는 조작 수사와 그 결과에 의한 재판이 아주 상세하고, 5년 뒤 일어난 고급 주택가 모자 살인 사건에서는 와타세 형사의 추리에 이은 수사에 대한 설득력이 높습니다.
모자 살인 사건 범인은 '열쇠업자' 일거라는 착안이 특히 빼어납니다. 범인은 도주하면서 직접 만든 자물쇠 따는 도구인 '피크'를 버렸는데, 와타세는 다시 만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리한 뒤 관련자 수사에 나서 범인을 체포하게 되거든요. 이후 범인 사코미즈가 전편에 등장했던 부동산업자 살인도 저질렀다는걸 알아차리는 과정 역시 이치에 합당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중반 이후, 진범 사코미즈가 모범수로 감형되어 23년 후 출소하자마자 살해된 사건에 대해서 다룹니다. 앞서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수사 중심이지만, 의외로 본격 추리물 느낌도 강하게 전해 줍니다. 알리바이 조작, 흉기 은닉과 같은 정통 트릭이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마지막에 와타세 경부가 범인인 아키히로의 부친을 찾아가 사건 시각에 경운기에 탔던건 치매에 걸린 아내이고, 흉기는 농기구인 경운기 부품이었다고 밝히는 장면은 추리쇼와 다를게 없고요. 여기에 사코미즈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반전 -그를 죽이려는 온다 검사의 음모였다는 - 까지 더해져 추리적으로는 아주 풍성한 편입니다.

주인공인 와타세 경부도 매력적이에요. "연쇄 살인범 개구리 남자"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수사 기계처럼 등장했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 이유가 잘 드러납니다. 과거 원죄를 저지른 과오를 깊게 인식하고 두 번 다시 수사에 오점을 범하지 않는 형사가 될 것을 결심하는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수사 기계보다는 인간적인 모습, 고뇌하고 고민하는 입체적인 모습이 많이 보여져서 좋았습니다. 내부 고발자라 주위의 눈총을 받는 탓에 출세를 포기하고 범인 체포에 열중하는 모습도 설득력 높고요. 작품 속 진짜 수사 기계인 나루미 경부보는 알고보니 사건 해결에만 집착하는, 자기 중심적인 악당이라서 대비가 강렬했던 탓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 같습니다. 본 작품이 와타세 경부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라는데, 후속권도 계속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개구리 남자"의 주인공이었던 고테가와의 카메오 출연도 반가왔고요.

그러나 '진짜 흑막은 온다 검사!'라고 내세운 반전은 지나쳤습니다. 초반에 정의로운 모습을 보였던 온다 검사가 부동산 부부 살인 사건의 목격자로, 사건 당시 현장 근처 러브호텔에서 불륜을 저지르다가 범인을 목격했지만 나서서 증언하지 않은 바람에 애꿎은 아키히로가 사형 선고를 받고 죽게 되었다는 설정까지는 그럴싸 합니다. 범인 사코미즈도 '커플에게 들켰지만 경찰은 찾아내지 못한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비오는 밤에 커플이 사코미즈의 얼굴을 기억했을지 여부도 불투명하거니와, 사코미즈가 당시 목격자인 온다 검사의 얼굴을 기억하여 협박하려 했다는건 정말이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무려 28년 전 비오는 밤에 잠깐 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을겁니다.

또 와타세 경부의 수사처럼, 28년 전 사건의 첫 목격자가 당시 '유명 연예인을 닮은 사람'을 보았던걸 떠올린 덕분에 그 선을 수사하여 진상을 알아냈다는건 그나마 말은 됩니다. 허나 이 역시 그 연예인 닮은 사람이 진짜 그 연예인이었다는건 지나친 우연으로 느껴집니다. 이런 불확실한 목격 증언에 기대는 것 보다는, 사코미즈가 출옥한다는 편지를 피해자 가족에게 보낸 누군가를 상세히 캐 보는게 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싶군요.

그리고 사코미즈가 아키히로 부친에게 살해당한다는건 더욱 억지스러웠습니다. 직접적인 피해자 가족인 부동산 업자 부부의 딸이나, 모자 살인 사건의 남편이 살해했다면 말은 됩니다. 하지만 아키히로의 부친이 진범 사코미즈를 살해한다? 부친이 원죄 사건에 대해 복수를 하고자 하면 최우선 목표는 나루미 경부보가 되어야 합니다. 사코미즈는 원죄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아키히로가 사형 판결을 받고 자살한건 경찰의 무리한 수사, 검찰의 무리한 기소, 그리고 이를 제대로 확인못한 재판관의 잘못이니까요. 그리고 와타세 경부도 이야기 하듯, 무려 28년을 (아키히로가 자살한 것부터로는 25년 쯤?)참고 살다가 급작스럽게 복수를 결심한다는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아울러 이 세 명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온다 검사는 어쩔 셈이었는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문제에요. 사코미즈를 없애기 위해서는 세 명의 피해자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는 정도로는 불충분했을텐데 말이죠. 애초에 편지를 보내는 것 보다는 그냥 사코미즈의 주장을 무시하는게 정답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리고 중반부에서 경찰 조직이 과거의 실수를 알아채고 증거 (조서)까지 확보한 와타세가 이를 밝히려하자 철저히 격리시키고, 심지어 폭행까지 저지르는 과정이 지나치게 뻔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조직의 잘못을 알게 된 언론도 대중과 영합하여 총 공격에 나서며, 관계자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보호되고 처벌받으며 이 와중에 지나친 관료 주의가 대두되는 등등 모두가 이런 류의 작품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던 묘사들이에요. 게다가 와타세가 관계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며 사죄하는 모습은 솔직히 어이가 없더군요. 당연한 결과인데 말이지요. 본인이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은 것은 의아해할 수 있어도, 이는 조직에서는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내부 고발자는 보호하는데 마땅하니까요. 와타세는 나루미 경부보만 처벌받으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일까요? 말리는 선배까지 힘으로 눌러버리던 모습은 다 어디갔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묘사는 와타세 경부라는 캐릭터를 위해서는 불필요했다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비록 단점은 있지만 묵직한 주제를 추리적으로 재미있게 포장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원죄에 대한 뻔한 묘사는 조금 줄이고, 온다 검사 수사에 조금만 더 설득력을 부여했더라면 별점 4점도 충분했을거에요. 물론 이 정도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니만큼,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께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2012/06/10

혼진 살인사건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혼진 살인사건 - 4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혼진 살인사건"은 이미 예전에 동서 추리문고로 읽었지만, 이번에 시공사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어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세 편의 중,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록된 작품은 중편인 "혼진 살인사건"과 단편인 "왜 도르레 우물은 삐걱거리나", 중단편 길이의 "흑묘정 사건"입니다.

수록작의 전체 평균 별점은 2점. 표제작 외 다른 두 작품이 점수를 좀 깎아먹은 탓입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보다는 예전 동서 추리문고의 "나비부인 살인사건"이 더 좋았습니다. 이쪽은 별점 3점은 충분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나만의 요코미조 세이시 순위"에 추가한다면, "혼진 살인사건"은 공동 2위이고 이 책 전체적으로 따지면 7위입니다. 긴다이치 시리즈 팬분들께는 추천드리지만 그냥 추리 애호가분들께는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다는 점 참고하세요.

수록작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혼진 살인사건"

이 작품은 기념할 만한 긴다이치 시리즈 첫 작품으로 시리즈의 전형적 특징 - 시골 마을 지역 유지 가문에 얽힌 원한 관계와 오싹한 살인사건, 그것을 해결하는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밀실 살인사건이 펼쳐지며, 공들인 트릭이 등장하는 본격 추리소설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 점도 시리즈 다른 작품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공정함에 있어 큰 문제가 있긴 합니다. 작품 속 공개된 정보만 가지고 트릭을 독자가 풀어내기는 거의 불가능한 탓입니다.

그래도 기념비적인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역사적 의미도 확실하며, 지금 읽어도 충분한 재미를 전해줍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왜 도르레 우물은 삐걱거리나"

전형적인 긴다이치 시리즈다운 소품. 긴다이치는 아주 잠깐 언급될 뿐 화자는 혼이덴 가문의 병약한 막내딸 쓰루요로, 그녀의 1인칭 시점 서간문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러나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추리적으로는 스기 죽음의 진상과 에마를 숨긴 이유를 쓰루요에게 숨긴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은 탓입니다. 게다가 오노 가문의 쇼지가 죄를 뒤집어쓰고 자수했다는 결말부는 어이가 없더군요. 강도, 퍽치기 전과가 있는 인간이 약간의 호의 때문에 살인죄까지 뒤집어써 준다는 게 말이 되나요? 협박을 하면 했지...
편지로 진행되는 전개 역시도 몇몇 단락을 제외하면 그냥 소설이라 해도 될 정도로 편지 특성을 살리지 못했고요.

한마디로 쓰루요의 쓸데없는 오해가 내용의 대부분인 작품으로, 일종의 순간이동 알리바이 트릭은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이 너무나 부실하기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흑묘정 사건"

추리소설가 Y가 긴다이치 코스케와 함께 밀실 살인, 1인 2역, 얼굴 없는 시체라는 전통적 추리소설 트릭에 대한 견해를 나눈 뒤, 얼굴 없는 시체에 관련된 사건을 실제로 긴다이치가 해결하고 알려준다는 내용입니다.

얼굴 없는 시체 트릭은 전형적인 피해자·가해자 바꿔치기 트릭에서 한 발자국 정도 더 나아간, 나름 고심한 트릭이 펼쳐집니다. 특히 장지문과 다다미에 묻은 혈흔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라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뜬금없이 오노 지요코라는 여인이 등장해서 딱 맞는 역할을 수행하고 사라진다던가, 그냥 봐도 수상한 변장과 뒤이은 밀회 쇼를 그냥 성격 문제였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기는 부분은 심하게 거슬렸습니다. 트릭 자체도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았고요. 아유코와 시게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너무 뻔했어요. 그 외에도 닛초가 공범이 되는 동기와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 것도 석연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긴다이치 코스케의 개그스러운 만담과 과거사가 잠깐이나마 펼쳐져 팬으로서는 즐길 거리가 있고, 본격 추리 소설로서는 나쁘지 않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았다는게 아쉽기만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4/01/22

당신의 판결은 - 모리 호노오 / 조마리아 : 별점 3.5점

당신의 판결은 - 8점
모리 호노오 지음, 조마리아 옮김/말글빛냄

도쿄 등에서 판사 재직 후, 현재는 변호사인 저자가 여러 가지 소설과 영화 속 사건에 대해 현실 법정에서의 판결이 어떨지를 설명하면서 형사 재판의 큰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책입니다. 유명한 소설, 영화 속 등장 사건에 대한 정리, 해당 사건에 대한 현실 법정에서의 판결 및 구형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작을 몰라도, 원작의 내용과 핵심 사건을 상세하게 소개해주기 때문에 읽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도진기 작가의 "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죽였을까" 와 굉장히 유사한데, "성냥팔이 소녀는..."은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유치한 설정과 소설적인 전개 때문에 많이 감점했었지요. 반면 이 책은 실제 소설과 영화 속 사건에 대한 실제 판결에 대해서 굉장히 담백하게, 아무런 치장 없이 깔끔하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분위기는 금태섭 변호사의 "확신의 함정" 쪽에 더 가깝달까요? 물론 "확신의 함정"은 판결이 아니라 개인적인 단상 중심이라서, 역시 이 책 쪽이 더 낫기는 합니다.

여튼, 전부해서 24건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내용 몇 가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격돌" - 우연히 거대 트럭에 쫓기게 된 주인공 데이비드가 격렬한 추격전 끝에 트럭을 벼랑 아래로 떨어뜨린다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초기작.

이 사건에서 데이비드는 명백한 살인의도, 즉 확정적 살의가 있기에 살인죄가 적용된다고 합니다. 생명이 위험했던, 방어에 적합한 행위라는 것을 입증하기 불가능하고 상식적으로는 서로 차에서 내려 이야기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판결은

    1. 계획적 살인에 해당
    2. 피해자 잘못도 존재
    3. 고의성 있던 확정적 살인.

즉, 피해자에게 잘못이 인정되는 계획적 살인으로 고의성 있는 확정적 살인. 징역은 10년 정도 구형될 것이라고 합니다.

"태양은 가득히" - "리플리 1"를 원작으로 한 첫 영화. 알랭 들롱의 꽃미모가 폭발하는 고전 명작이죠. 친구 톰을 죽이고 그의 행세를 하면서 재산과 심지어 애인까지 가로채는 리플리의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여기서 피해자의 물건을 횡령하고 처분하는 정도라면 생전에 자기에게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피해자 행세를 한 것은 빠져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혐의도 상해치사와 살인 중, 살인에 가까워지고요. 고의적 상해라면 보통 그 사람 행세는 하지 않기 때문이죠. 피해자와 알고 지내던 사람이 피해자와 실제로 만나본 후 증언하지 않으면 존재 증명으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결국 톰 행세를 한 것도 법정에서는 밝혀지기 마련이고요.

단, 열받아서 죽인 후 금품을 취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면 강도 목적임을 증명하기는 어렵고 범행을 완전히 부인하면 살인 입증도 힘들다고 하니.. 일단 끝까지 우겨볼 일입니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 소설로도 유명한 작품이죠.

알리바이는 어떤 불리한 증거가 있더라도 입증만 되면 무죄가 되는 극적인 효과가 있는 마술봉 같은 존재! 그러나 그 외의 경우는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되지 않는답니다.

"재와 다이아몬드" -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영화던가요? 영화는 본 적이 없는데 테러리스트의 테러에 대한 판결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 재판에서는 계획성에 금전 목적이 더해진 경우에만 사형이 적용되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나 암살자라도 한 명밖에 죽이지 않았다면 사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군요. 쉽게 말해서 사람을 죽여도 한 명이라면 사형을 선고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일본 기준입니다만.

그리고 쇼와 초기 1인 1살인을 신조로 정치권 주요 인물 암살을 실행한 혈맹단 사건에서 실행한 단원 두 명 모두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특사로 석방되어 성공한 인생을 보낸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출판사 사장과 도의원이 되었다고 하네요)

"네 멋대로 해라" - 저는 고다르의 원작이 아니라 후대에 리메이크된 리차드 기어의 "breathless"를 봤습니다. 막사는 주인공이 경찰을 총으로 쏴 죽인 뒤 벌어지는 폭주를 그린 작품이죠.

그런데 경찰을 죽였다고 사형이 구형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네요! 단지 속설에 지나지 않는다는군요. 물론 무기징역과 같은 중형을 선고받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작품에서 미셸의 범죄는 즉흥적이기에 총기 사용을 고려하더라도 징역 17~18년 수준일 것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적과 흑"

줄리앙 소렐이 레날 부인을 쏜 죄는 실제로는 징역 10년 이하 정도, 이유는 피해자가 상처만 입었지 사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살인죄가 아니라 살인미수죄죠. 작품에서도 금세 회복되는 것으로 묘사되고요.

살인미수는 피해자에게 생긴 상처의 정도와 범행이 생명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되었는지 두 가지 사항에 따라 결정되는데 전자는 결과, 후자는 행위의 위험성이라는 것이죠.

즉, 줄리앙 소렐의 범죄는 결과는 중간 정도의 상해이고 행위의 위험성은 통상적이지 않은 흉기(총)로 평균적인 징역보다 약간 높은 징역 8~9년 정도라고 합니다. 치정사건은 재판에서 감형되는 경향도 있고요. 감정이 격해져 냉정함을 잃은 상태라는 것이 참작된다는군요. 줄리앙 역시 자신의 출세길을 막은 전 연인에 대한 분노로 벌인 범죄니까요.

그러나 소설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인 베르테 사건은 반대로 베르테가 불행의 원인을 미슈 부인에게 돌리며 협박성 편지를 보내고 총을 쏜 것으로, 재판에서 불륜 관계였음을 폭로하나 평소 미슈 부인은 정숙하고 평판이 좋아서 베르테를 동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호의를 원수로 갚은 것이라 형은 더 무거워졌다고 합니다. 호의를 원수로 갚는 범행은 범행의 집요성이 높다고 판단되기 때문이죠.

"제3의 사나이" - 로로가 범죄자로 변해버린 친구 하리를 사살한 것이 유죄인가?

현실에서 일반인의 범죄자 체포는 현행범 체포에 한해서라고 합니다. 법률적으로는 사립탐정이 수사를 하고 범인을 찾아내서 체포하는 것도 안 되고, 체포하면 역으로 체포죄라는 범죄가 된다는군요. 미행도 집요하게 하면 범죄이고요(경범죄법 위반).

물론 경찰과 협력했을 경우는 좀 더 넓은 범위가 허용되기는 해서 통상 체포도 가능하기에 로로의 행위도 인정될 수 있고, 첫발은 하리가 쏜 총에 맞은 경찰이 “쏴!”라고 해서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쓰러진 하리를 향해 쏜 두 번째 발은 절대로 인정되지 못한다네요. 경찰이라고 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일. 로로는 살인죄로 기소되어야 마땅하답니다. 소설에서처럼 '이 일은 모르는 일입니다'로 끝날 일은 절대로 아니라는 거죠.

"용의자 X의 헌신"

여기서의 범행은 전 남편에 대한 과잉방어 살인으로, 형량은 평균 6~7년입니다. 그러나 가정폭력, 스토킹 등의 상대방의 행위가 있다면 형은 더욱 내려가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일이 드물지 않다는군요. 집요하게 따라다닌 전 남편 살인은 집행유예가 내려질 가능성이 높고요. 아울러 중학생 딸은 형사재판에 부쳐지지도 않고 가정재판소의 조치로 끝날 일이라 불기소처분으로 끝날 공산이 큰 상황.

그러나 수학교사 X가 뒤이어 저지른 범행은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고 독선적이고 편집증적인 행동으로 유기징역의 상한인 20년형이 예상되며, 모녀 역시 사체 유기죄가 성립되고(공모공동징발) 엄마가 경찰서에 출두해봤자 뒤늦은 것이라 자수도 성립되지 않는, 그야말로 완벽한 삽질이라 할 수 있는 결과라 합니다. 용의자 X의 삽질! 옆집에 수학교사가 아니라 변호사가 살고 있었어야 했어!!!

대충 이 정도만 정리했지만 이외의 이야기들도 유익하고 재미난 것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판결의 기준이 일본 기준이라는 것 때문에 약간 감점하지만 재미와 더불어 형법과 판례에 대한 유익하고 기본적인 지식까지 알 수 있는, 그야말로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게 해 주는 보기 드문 책이죠. 제가 원했던 스타일의 책으로 이런 류의 법률 상식책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한국 판례를 응용한 한국 버전이 나와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15/04/09

완전범죄 - 오구리 무시타로 / 신정원 : 별점 2점

1930년대, 중국 호남 팔선채에 영국식 저택 이인관이 위치하고 있었다. 원래는 옥스퍼드의 인류학자 휴 로렐 교수의 연구 설비였는데, 현재는 외동딸 로렐 부인이 거주 중이었다. 진격해 온 묘족 군대의 지휘관 자로프는 이곳을 사령부로 정하고 머물렀다. 하지만 저택 안에서 남자들을 상대하던 집시 헤더가 완벽한 밀실에서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흑사관 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오구리 무시타로의 중편입니다. 데뷔작이라고 하네요.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동호회 하우미스터리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자리를 빌려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작품은 전형적인 밀실물입니다. 핵심 사건과는 별개로 약간 독특한 암호 트릭도 등장하고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고전 정통 본격물인 셈이지요. 피해자 헤더가 미친 듯 웃던 와중에 남자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 경비를 서던 정이 목격했던 파란 옷의 인물, 이상한 곳에 떨어진 비누거품, 방에서 풍기는 꽃향기, 헤더 몸에서 발견된 모기에게 물린 자국이라는 몇 개의 단서만을 가지고 자로프의 추리가 연달아 펼쳐지며 마무리 추리쇼로 이어지는 전개를 보면 "흑사관 살인사건"의 원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단서와 상황을 잘 결합한 추리들도 꽤 볼 만했는데, 특히 "소리"를 통해 색깔을 착각한 것이라는 이론이 가장 기발했습니다. 정말 가능했을까 싶긴 했지만, 과학적 근거를 들어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작가가 눈이 인식하는 색깔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다는건 확실한 것 같네요. 여하튼, 여러 아이디어를 연달아 쏟아내는 자로프의 상상력에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나 트릭이 많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이 작품은 짤막함에도 불구하고 단점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읽기 어렵고 지루하다는 점입니다. "흑사관 살인사건" 때도 그랬던 걸로 보면 번역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장황하고 드라마는 딱히 두드러지지 않으며, 읽는 사람 머리만 아프게 만드는건 작가의 스타일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추리적으로도 문제가 큽니다. 사건의 동기가 너무 황당하기 때문입니다. 우생학 이론에 바탕을 둔 동기인데, 특정 성씨를 멸족시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성씨 사람들을 볼 때마다 죽일 수도 없을텐데 말이죠.
트릭도 장황한 설명에 비하면 진상은 너무 허술합니다. 일종의 장치 트릭으로, 부인이 치던 오르간 소리가 엉망이었다는 단서와 연결시킨건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전부 수준 이하였던 탓입니다. 오르간 특정 키와 헤더의 방이 연결되어 웃음 가스와 독가스를 내보냈다는 설정인데, 거창하고 복잡할 뿐더러 애초에 이렇게까지 기이하게 사건을 벌일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자로프를 말로 꼬드겨 헤더를 죽이게 만드는 게 더 쉬웠을 것 같아요.
암호 트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한자를 사용한 트릭을 영국인이 만들 수 있었을까 같은 사소한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굳이 암호로 만들 정도의 비밀은 아니었거든요. 흔히 보는 “사실 너의 어머니는...” 류의 내용인데, 어차피 본인은 죽을테니 그냥 말로 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930년대, 묘족 군대, 중국 호남 팔선채의 이인관이라는 독특한 설정이 작품 속에 잘 녹아들었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밀실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는 사건 당시 바로 옆방에 있었던 간부 4인방을 대상으로 추리쇼가 이어지는 것이 전부라서, 일본 어딘가의 독특한 건축물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중국적인 배경이 묘사되는 여정 미스터리 스타일로 쓰여진 것도 아니고요. 왜 이렇게 설정을 잡았는지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는 볼 만하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리 퀴즈의 해답을 이어 붙인 것 같은 느낌이에요. 독특하다는 점과 역사적인 가치를 빼고는 점수를 줄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적절한 가격과 분량은 매력적이므로, 초창기 일본 추리소설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덧 : 항상 알라딘을 이용하다가 이번에는 yes24 e-book으로 증정되는 이벤트라 별 수 없이 yes24 e-book으로 읽었는데, e-book 뷰어 자체는 너무 별로네요. 화면이 자동으로 꺼지는 설정을 어디서 끄는지도 모르겠고, TTS로 읽어주는 기능도 없고요...

2004/08/21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 애거서 크리스티 / 황해선 : 별점 3점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황해선 옮김/해문출판사

네, 바로 이어서 또다른 단편집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을 읽었습니다. 사실 아주 오래전에 읽기는 했지만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어차피 단편집은 좋아하니 소장용으로 구입해도 괜찮다 싶어 구입하게 되었네요.

첫번째 단편이자 표제작인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은 크리스티 여사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춰서 쓴 듯한 경쾌하고 유쾌한 단편입니다. 한 외국 왕자의 스캔들을 해결하기 위해 왕자가 도둑맞은 보석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포와로가 도둑이 초대받았다는 영국 시골의 킹스 레이시 저택에 찾아가 레이시 가문 사람들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벌이며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사건 자체가 살인사건이 아니라 소박하기도 하고, 아무도 죽지 않으며 악당만 손해보는 전형적인 권선징악형 스토리 구조로 이루어져 추리소설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에요. 포와로의 캐릭터도 잘 살아있어서 아주 유쾌하고요. 특히 아이들과 벌이는 두뇌게임(?)이 재미있습니다.
"완전범죄"형 사건이 아니라서 트릭이랄게 별로 없다는 점이 좀 아쉽지만 별다른 사건과 트릭 없이 복잡한 복선들과 대화들만을 가지고 하나의 수준높은 단편으로 완성했다는 점에서 크리스티 여사의 거장으로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두번째 단편 "스페인 궤짝의 비밀"은 밀실에서의 의문의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정통파 퍼즐 미스터리 본격 추리물입니다.
리치 대령이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 예정이다가 급한 일로 스코틀랜드로 가게되어 불참하게 된 클레이턴씨가 다음날 리치 대령의 집 거실에 놓여있는 스페인 궤짝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클레이턴 부인의 도움을 요청받은 포와로가 "회색의 뇌세포"를 이용하여 사건을 명쾌하게 풀어낸다는 내용이죠.
살인사건의 트릭 자체도 괜찮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레몬양의 캐릭터가 아주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마음에 들었어요. 사건의 해결에 아무런 증거가 없다.. 라는 것 정도가 유일한 약점이랄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세번째 단편 "꿈"은 매일 특정시각에 자살하는 꿈을 꾸는 백만장자의 상담을 받은 포와로가 실제로 그 시간에 백만장자가 자살하게 되자 참고인으로 불려언 뒤, 그야말로 앉은 자리에서(!)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으로 포와로의 추리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죠.. 트릭 자체야 신선할게 없지만 독자와의 두뇌게임이 비교적 공정한 편이고 사건의 해결도 깔끔한 우수한 단편입니다. 역시나 별점은 3점.

마지막 작품 "그린쇼의 아방궁"은 마플양이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단편입니다. 부유한 노부인 그린쇼 양의 의문의 살인사건을 현장 한번 방문하지 않고 관련자들의 증언과 진술만으로 진상을 짚어내는 마플양 특유의 모습이 잘 그려진 작품이죠. 다만 트릭면으로는 "꿈"과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에 "꿈" 바로 뒤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린쇼 양의 의미없어 보이는 말들과 마플양의 사소한 주변 사건들이 결국 진상으로 연결되는 구조는 역시 명불허전이에요. 역시 별점은 3점입니다.

결론 내리자면 전체 평균 별점은 3점. 포와로와 마플양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좋은 단편집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예전에 읽었던 기억은 있지만 정말 십년이상 된 듯 하고 그래서인지 트릭이나 내용이 모두 신선하게 느껴져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그러나 해문측의 편집인지, 아니면 전집에서 원래 그렇게 편집을 했는지 전부 6편의 작품이 실려있는 단편집이 4편만 실려있는 것으로 편집되어 있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쁘네요. 모처럼 크리스티 여사가 요리에 비유하며 소개글까지 써 놓았는데 2편이나 빠지다니... "패배한 개"는 이번에 단편집을 구입했지만 24마리의 검은 티티새때문에 "쥐덫"을 또 살 생각은 없으니 이빨을 맞추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2023/03/12

생피아크르 사건 - 조르주 심농 / 성귀수 : 별점 1.5점

생피아크르 사건 - 4점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그레는 생피아크르 성의 관리인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을 찾았다. 살인을 예고하는 편지를 받고 마음이 쓰인 탓이었다.
그리고 예고 편지에서처럼 생피아크르 성당 미사에서 백작 부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메그레는 백작 부인의 미사 경본에 끼워져 있었던 가짜 신문 기사가 일종의 흉기였다는걸 밝혀낸다. 그리고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고향 마들을 무대로 비공식적인 수사를 벌이기 시작하는데....


메그레가 비공식적으로 고향을 방문해서, 지역 유지였던 백작 부인 죽음에 얽힌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 국내 출간된 메그레 시리즈의 13번째 작품입니다.
미사에 참석해서 자리에만 있었던 백작 부인이 급작스럽게 사망하는 장면은 메그레 시리즈답지 않은 본격물적인 냄새를 풍겨서 두근두근했습니다. 작품 내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인이 일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총소리가 들린 것도 아니다! 누구도 백작 부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매그레는 그녀에게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라고 하는 사건이니까요.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실망스럽습니다. 알고보니 미사 경본 사이에 끼워 두었던 도발적인 신문기사 때문에 심장마비를 일으켰던 겁니다. 백작 부인 아들이 자살했고, 그 이유는 모친 탓이었다는 가짜 기사였지요. 심장이 약했다니 위험했을 수는 있겠지만, 살인 흉기로 쓰기에는 부정확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냥 운에 맡겼을 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게다가 백작 부인과 아들 사이는 소원했고, 백작 부인은 정부에게 남은 재산을 가져다 바치고 있었으니 이런 기사로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도 의문이고요.
수사도 그다지 치밀하지 못합니다. 메그레가 정처없이 거리를 쏘다니다가 무언가를 본 뒤, 그걸 계기로 조사를 한다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치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즉흥적인 수사라는건 다른 메그레 시리즈와도 비슷하기는 한데, 비공식적인 고향 마을에서의 수사라 그런지 더 두서없이 느껴졌습니다. 자기가 예전에 살던 집, 어린 시절 알고 지낸 사람들 이야기가 마구 뒤섞이거든요.

마지막 사건 해결은 더 어이가 없었습니다. 살해 동기가 있었던 사람들을 불러모은 모리스 백작이 일종의 추리쇼를 벌인 뒤, 범인을 도발하여 자백하게 만드는 내용으로 드라마틱하기는 합니다. 범인 에밀이 자제력을 잃을만한 분위기를 잔뜩 자아내는 연극적인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줄 여지가 전무합니다. 범인 에밀이 자폭할 이유가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에밀은 모리스 백작을 쏘고 자기가 범인을 죽였다라고 해명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증거도 없었는데, 긁어서 부스럼만 잔뜩 만든 셈이에요. 범인은 백작 부인의 정부 장 매테예아니면 모리스 백작인 것 처럼 분위기를 몰고가고 있었는데, 왜 법적인 효력도 없을 추리쇼에 압도되어 자제력을 잃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백작에게는 동기가 없었습니다. 어머니 유산으로 남은 푼돈 얼마라도 지키려고 했다? 너무 때늦은 행동이었을 뿐더러 실제로 남은 유산이 거의 없었다는게 이미 설명되고 있으니까요. 백작 부인의 정부 장 메테예가 범인인 것 처럼 몰고가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장이 돈줄을 억지로 끊을 이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범인이 백작 부인이 살해당할거라는 예언을 경찰에 보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그 예언 탓에 메그레가 사건에 뛰어들게 되었는데, 에밀 입장에서는 경찰이 없는게 더 나았을거에요. 구태여 장 매테예를 범인으로 몰아서 치워버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냥 백작 부인이 자연사한 것 처럼 보이게 만들고, 몰래 빼돌린 백작 부인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하면 되니까요. 백작이 추리쇼를 벌여 범인을 색출하려고 했을 수는 있지만, 공식적인 효력이 없는 거덜난 귀족의 마지막 발버둥에 동참해 줄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약간 고딕 호러물스러운, 고풍스러운 성에서 벌이는 추리쇼 분위기는 그럴싸했지만 추리물로 보기 힘든 기묘한 드라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차라리 좀 더 호러스럽게 끌고가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백작 부인의 사체가 벌떡 일어나는 식으로요!

2023/06/10

유리탑의 살인 - 치넨 미키토 / 김은모 : 별점 2점

유리탑의 살인 - 4점
치넨 미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진범, 반전,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약물 전달 시스템 트라이던트를 개발하여 엄청난 부를 거머쥔 코즈시마 타로는 자신의 저택 '유리관'에 조촐한 행사를 위해 여러 손님 - 유명 추리 소설가 쿠루마 코신, 편집자 사쿄 코스케, 영능력자 유메요미 스이쇼, 형사 카가미 츠요시, 그리고 명탐정 아오이 츠키요 - 을 초대했다. 유리관에는 손님 외에 집사 오이타 신조, 메이드 토모에 마도카, 요리사 사카이즈미 타이키와 코즈시마 타로의 주치의 이치조 유마가 함께 있었다.
행사 직전, 이치조 유마는 코즈시마 타로를 독살했다. 코즈시마가 동생의 난치병 치료를 특허 분쟁으로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사로 위장할 계획은 즉사하지 않은 코즈시마가 전화를 건 탓에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뒤이어 집사 오이타, 메이드 마도카가 연달아 밀실에서 살해당한채 발견되자, 유마는 명탐정 아오이 츠키요의 조수, 왓슨 역을 자처하여 컴비를 이루게 되었다. 두 사건의 범인에게 코즈시마 살해까지 떠넘기기 위해서였다.


발표 당시, 미스터리 애호가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 대부호가 만든 기묘한 저택이라는 무대
  • 저택이 고립된 상황에서 벌어지는 3건의 연쇄 살인 사건
  • 모든 사건들은 일종의 밀실 상황
  • 사건은 명탐정이 해결
는 점에서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이 중 한 사건은 화자인 이치조 유마가 이미 저지른 도서 추리물이기도 하고요. 미스터리 애호가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는 모두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또 사건의 이런 저런 상황이 여러 미스터리 명작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애호가들을 자극하는 요소입니다.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유리관의 살인>>이라고 부르고, 코즈시마가 남긴 다이잉 메시지는 <<비뚤어진 집>>, <<Y의 비극>>, <<독 초콜릿 사건>>을 의미한다던가, 마도카 사건에서 남겨져 있던 메시지는 '관 시리즈'와 관련이 있으며, 결국 이 모든 진상은 '관 시리즈'와 연결된다는 식입니다.
트릭도 모두 유명 작품에서 따 왔습니다. 오이타 신조 사건에서 특정 시간에 자동 발화시킨 트릭은, 의도적으로 창문이 아침 햇빛을 집중시키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엉클 애브너 시리즈인 <<둠도프 사건>>과 유사합니다. 토모에 마도카의 시체를 밀실 안으로 집어넣는 트릭은 작 중에서도 언급되듯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가 떠오르고요. 만화 <<외천루>>에서는 아래와 같이 아예 동일하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미스터리 애호가들이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온갖 작품들이 언급되고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후기 퀸 문제 - 작품 속 해결이 진짜 해결인지를 작품 속에서는 증명할 길이 없다 - 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던가, 비밀 통로와 암호, 심지어 '독자에게의 도전장'까지 삽입된건 그야말로 미스터리 애호가의 피를 끓게 만들지요.

무엇보다도 '작위적인 상황들은 알고보니 저택 주인 코즈시마 타로가 꾸민 연극이었기 때문이었다!'는 반전은 신선했습니다. '작위적'인게 당연한 상황을 설득력있게 만드는데 이보다 나은 아이디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괜찮았어요. 엄청난 부자인 코즈시마 타로는 미스터리에 푹 빠진 나머지, 스스로 위대한 걸작을 쓰고 싶어서 트릭을 고안한 뒤, 추리와 관련된 이런 저런 손님들 - 명탐정, 추리 소설 작가, 편집자, 영매 - 을 초대하여 실제로 추리를 하게 만든 것입니다. 연극이니 당연히 코즈시마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죽지 않았었습니다. 지하 감옥에서 등산 조난자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한게 들통나서 살해당했다는 유치한 동기 역시 가짜였고요.
코즈시마가 연극을 위해 '유리탑' 안에 이중 나선 구조와 같은 비밀 나선 계단을 설치했다는 진상도 적절하게 써먹고 있습니다 (이 진상이 <<미로관>>과 유사하다는 점도 과연 코즈시마 타로답더군요). 영능력자 유메요미, 그리고 화자 유마까지 알 수 없는 인기척을 계속 느꼈다는 식으로 비밀 계단과 통로에 대한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고요.
트릭도 다른 작품에서 따 온게 많다고는 했지만, 그런대로 볼만했습니다. 특히 오이타 사건에서 식당을 밀실로 만든 트릭은 괜찮았어요. 각설탕을 회전 빗장에 꽂아 넣고 화재를 일으키면, 스프링쿨러가 작동하여 각설탕이 녹아서 빗장이 걸린다는 것인데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체에 등유를 끼얹어 화재를 일으킨 원인도 위장하는 등 디테일도 꼼꼼했고요. 명탐정 아오이 츠키요가 괜찮았다고 말할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미스터리 애호가를 위한 장치와 반전 외에는 과연 그렇게까지 절찬을 받을만한 작품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우선 본인이 명탐정임을 주장하는 아오이 츠키요는 작위적인걸 넘어서는, 그야말로 현실과는 백만광년은 떨어진 듯한 만화같은 캐릭터라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래서야 "모든게 '연극' 이라서 작위적이었다"는 아이디어는 빛이 바랩니다. 그래봤자, 핵심 등장인물이 가짜보다 더 한 만화라서 영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을 위해서는 보다 진지한, 현실적인 탐정으로 묘사되는게 바람직했습니다.
아오이 츠키요의 비현실성은 진상 부분에서 극에 달합니다. 그녀는 연쇄 살인이 연극임을 초반에 간파하고 실제로 피해자들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졸작 <<유리관의 살인>>을 납득할 수 없어서 본인이 범인이 되는 걸작 메타 미스터리로 만들기 위해서라고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살인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이러한 '메타' 방식 설정은 일본 일부 작품에서 가끔 보곤 했는데, 적절히 잘 사용된 경우는 생각나지 않네요.
명탐정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명탐정을 부르기 위해 불가능 범죄를 저지르곤 했다는 아오이 츠키요의 또다른 배경 설정도 한심하기 그지 없었어요. 시로다이라 쿄의 <<명탐정에게 장미를>>에도 등장했던 설정인데, 그 때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리뷰를 남겼었지요.
그리고 악당 - 명탐정 대신 명범인 - 이 되기로 결심하고 살인을 저질렀다면, 초지일관 그렇게 나갔어야죠. 마지막 순간에 유마를 구해주고 키스까지 한 다음 사라지는건 최악이었습니다. 캐릭터만 희미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만화나 라이트 노벨 세계관이라면 모를까, 정통 본격물에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코즈시마 타로의 추리 소설이 엉망이라는건 츠키요가 이미 언급했지만, 실제로도 트릭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소설에서 진범은 카가미였습니다. 딸이 코즈시마 일당 - 코즈시마와 집사 오이타, 메이드 마도카 - 에게 납치되어 생체 실험을 받다가 죽었다는걸 알고 복수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는 모든 진상이 밝혀지고 난 뒤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다며 자살합니다. 그렇다면, 복수를 마치고 죽을 결심을 한 범인이 밀실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는건데, 이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경찰이 수사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면, 카가미의 동기가 밝혀지는건 시간 문제였습니다. 어차피 빠져나갈 방법도 없으니 트릭을 사용해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없지요. 손님들이 초대되었을 때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당연히 없습니다. 카가미는 이전에도 코즈시마를 방문해서 같이 식사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다음에도 혼자 찾아와 모두를 죽이는게 더 쉬운 복수였을거에요. 관 시리즈, 특히 <<십각관의 살인>>이 걸작인 이유 중 하나는 범인이 트릭을 만든데 타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처럼 아무런 설득력없이 수수께끼를 만들기 위해 트릭을 사용한게 아니고요.
또 딸의 복수를 위해서였다면, 조가타케산 사건을 언급하는 것도 이상했고 - 딸은 조가타케산 사건의 피해자라기 보다는, 최근 사건의 실종자이므로 -, 코즈시마 일당의 범행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면 돌려 말할 까닭도 없습니다. 직접적으로 복수의 이유를 쓰면 되지요. 나카무라 세이지를 죽이라면서 비밀 통로를 은근히 알려주는건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코즈시마가 유마가 자신을 독살하게끔 유도하여 연기했다는 설정도 어처구니를 상실케 했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원래는 모든게 연극이었다는 발상을 제외하고는 딱히 건질게 없었습니다. 쉽게 읽히는 라이트 노벨스러운 작풍은 분명한 장점이지만, 추리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네요. 진지한 본격 추리물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전 <<데드 트릭>>리뷰 에서, 본격 미스터리는 프로레슬링과 비슷하다는 말에 동의한다고 했었는데, 프로레슬링도 형편없고 장난스러운 각본은 욕을 먹기 마련입니다. 제가 나이가 있는 탓에 요새 트렌드와 거리가 있어서 이런 작품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건 사실이겠지만, 살인을 장난스럽게 다루는 작품은 진심으로 없었으면 합니다. 

2015/11/24

가면 산장 살인 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가면 산장 살인 사건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카유키는 사고로 죽은 약혼녀 도모미의 가족과 함께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그녀 가족의 산장으로 향했다. 도모미의 부모, 오빠와 친지 등 모두 여덟 명이 산장에 모인 당일, 두 명의 은행 강도가 침입해서 그들 모두를 감금했다. 은행 강도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던 중, 도모미의 사촌 동생 유키에가 칼에 찔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꽤 인기 있는 작품인데 읽는게 늦었네요. 부유한 가족, 그리고 그들과 엮인 인물들이 모인 폐쇄된 산장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설정의 흥미진진한 본격 추리물입니다. 

두 개의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 사건, 즉 도모미의 죽음은 마지막에서야 진상이 설명될 뿐더러 범인은 관계자 증언밖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어서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이 사건은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설정일 뿐이지요. 허나 두 번째 사건인 유키에 살인 사건은 고전 본격물의 원칙에 충실합니다. 일종의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진 기묘한 범죄, 용의자는 공간 내 모두라는 상황 덕분입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유키에를 살해하는건 인질인 아쓰코 외의 모든 사람들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 전의 상황, 즉 레이코가 몰래 적은 SOS를 지우고 타이머를 망가뜨린 사람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 뒤 그 사람이 범인일 것이다!라는 식으로 연결되는 추리의 흐름이 설득력 높기 때문입니다. 타이머 관련 트릭 - 범인이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시간만 바꿔 놓은 뒤,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망가졌다고 하는 순간에 부순 것 - 도 간단하지만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고요.

허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탓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노부히코의 마지막 증언 - 레이코가 일기 페이지를 입에 넣었으며 그 페이지에 진상이 적혀 있을 것이다 - 부터가 그러합니다. 칼에 찔렸는데 죽어가면서도 일기장의 특정 페이지를 찢어서 입에 넣는다? 인간의 정신력이 아무리 놀랍다 하더라도 이건 무리지요. 그리고 일기에 뭐라고 적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필케이스 약통의 약이 정상적인 것으로 밝혀진 이상 큰 증거가 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노부히코가 감금된 상태에서 유키에를 죽여야 하는 타당성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누군가를 살해한다? 탈출 후 유키에를 따로 손보는 게 상식적입니다. 최소한 풀려난 뒤 죽이고, 범인들에게 뒤집어 씌우는게 훨씬 나았겠지요. 진범을 밝히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는 후지의 협박 역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목격한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범인을 밝혀냈다고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노부히코가 자살한 시점에서는 협박할 건덕지가 사라져 버렸으니 다 죽이는 게 당연합니다.

하긴, 이 모든 게 거대한 연극이니 작위적이라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겠지요. 그보다는 다카유키를 옭아매기 위해 이런 추리쇼를 펼친 이유를 모르겠다는게 더 큰 문제입니다. 단지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타당치 않습니다. 도모미의 행동을 유키에가 보고 들었다는데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했을까요? 다른 추리 소설에서는 복수를 하고도 남을 증거인데 말이지요. 기껏 그걸 보강하려고 거대한 연극을 꾸민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범행 증명이 목적이었다면 이런 성공 가능성도 떨어지는 연극을 벌이는 것 보다는, 산장에서 다카유키를 제압하고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는 게 비용과 시간, 그리고 기분 등 모든 측면에서 나았을 겁니다.
마지막에 노부히코를 다카유키가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즉 연극이 실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다카유키 역시 그 순간에 노부히코를 죽인다 해도 빠져나가는건 거의 불가능했을 텐데, 마지막에 이르러 이런 발악을 하는게 납득이 되지도 않았고요. 약혼녀를 죽일 때에도 남이 슬쩍 보고 다른 약임을 눈치챌 수 있는 약으로 바꿔칠 정도로 무신경한 놈이니 이런 대책 없는 행동도 당연하다고 본 걸까요?

아울러 상황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어서 긴장감을 떨어트린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일 뿐더러 설정이 완전 말도 안 됩니다. 은행 강도 같은 케케묵은 설정이 통할 리 없어요. 핸드폰 세대에게는 도저히 먹힐 수 없는 설정이기도 하고요. 읽으면서 후지가 죽은 줄 알았던 레이코고, 그녀가 사람들을 동원해 도모미 사건의 진범을 밝히려고 하는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야기였다면 좀 더 괜찮지 않았을까 싶네요.

최근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인데, 화자라 할 수 있는 다카유키가 도모미 살해를 꾸몄다는 것 역시 반칙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과 스토리를 보면 영상물, 혹은 만화가 더 어울립니다. 유일한 가치라면 모든 잠재적 범죄자들은 최후의 그 순간, 즉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속영장이 청구될 때까지는 무조건 무죄를 주장하며 헛짓거리하지 말고 버티라는 교훈 하나만큼은 제대로 전달해 준다는 것? 그 외의 무언가는 딱히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덧붙이자면, 범인이 사랑하는 이를 잃은 뒤 도주 중인 흉악범을 가장하고 범행을 저지른다는 유사 설정의 작품인 소년탐정 김전일의 "비련호 살인사건"과 비교해 본다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다 죽이겠다!("비련호 살인사건") 와 누군지는 알지만 확실치 않으니 확인해 보자!("가면산장 살인사건")의 차이인데 저는 "비련호 살인사건" 쪽에 점수를 더 주고 싶네요. 

그나저나, 최근 읽은 작품 중에서는 가장 리뷰하기가 힘들었는데 이유를 모르겠군요. 리뷰는 별거 없지만 거의 2주에 걸쳐 썼습니다. 리뷰 완성도도 낮고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지만 이게 한계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2024/02/11

놀라운 반전이 있는 미스터리들 - 북오프 칼럼

가끔 소개해드리는 이러저런 미스터리, 추리소설 추천 정보. 이번에는 북오프 온라인 칼럼 하나를 찾아 소개해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의역이 많은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촘촘히 짜여진 수많은 복선, 상상할 수 없는 전개, 충격적인 결말 ...... 소름이 돋는 오싹함을 찾아 추리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많을겁니다.
그 중 '반전'이 뛰어난 미스터리 작품들을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들과 유명 작가들로 나눠 소개해 드립니다.
꼭 한번, 그 '반전'에 감탄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만 '반전'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
"가면병동" 치넨 미키토
"If의 비극" 우라가 가즈히로 (국내 미출간)
"신의 숨겨진 얼굴" 후지사키 쇼
"출판금지" 나가에 토시카즈 (국내 미출간)

유명 작가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 나카야마 시치리
"미로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
"어둠 속의 기다림" 오츠 이치
"살인귀" 아야츠지 유키토

"가면 병동"
강도로 인해 밀실로 변한 병원, 숨 막히는 심리전의 막이 오른다!
요양병원에 강도가 침입해 자신이 쏜 여자의 치료를 요구한다. 사건에 휘말린 외과의사 하야미즈 슈고는 여자를 치료하고 탈출을 시도하던 중 병원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 폐쇄된 병원에서 펼쳐지는 궁극의 심리전.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현직 의사가 그리는 단숨에 읽을 수밖에 없는 '본격 미스터리×메디컬 서스펜스'. 저자 첫 문고판 장편소설!

인기 시리즈 제1탄.
의료 소설이라고 하면 난해하고 접근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알기 쉽고, 읽기 쉽습니다. 라이트 노벨 같은 경쾌한 터치로 독자를 쏙쏙 끌어당깁니다.
게다가 치넨 씨는 현직 내과 의사로 의사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문적 견해를 바탕으로 집필되어 있어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점도 매력적인 점입니다.
마음에 드셨다면 속편인 '시한부 병동'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If의 비극"
소설가 가노는 사랑하는 여동생의 자살을 의심한다. 결국 여동생의 약혼자였던 오쿠츠의 불륜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오쿠츠를 불러내어 살해한다. 하지만 위장공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노가 운전하는 차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는데....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두 가지로 나뉜다. A는 남자를 치어 죽인 경우, B는 아슬아슬하게 남자를 치지 않은 경우. 두 개의 평행세계가 하나로 연결될 때, 예측할 수 없는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진다!
식인 작가(사람을 잡아먹는 소설을 많이 써서)로 알려져 '미스터리계의 기인'으로 불리는 우라가 카즈히로 씨의 작품. 경력이 거의 공개되지 않아 그 수수께끼 같은 부분을 좋아하는 독자도 많다고 합니다.
"절대 속지 않는다!"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이 작품이지만, 절대 속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 반전에 역시나 격침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의 숨겨진 얼굴"
신과 같은 청렴결백한 교사, 츠보이 세이조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통곡의 밤은 슬픔에 휩싸여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참석자들이 '신'을 추모하는 가운데, 엄청난 의혹이 제기되었다. 사실 츠보이가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었을까...? 츠보이의 아름다운 딸, 후배 교사, 제자인 중년 남성과 요즘 여자, 이웃집 주부와 개그맨. 두 번, 세 번 뒤집어지는 그들의 추리는? 반전이 있는 결말이 화제!!!
제34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대상' 수상작. 아리스카와 아리스, 온다 리쿠, 구로카와 히로유키, 미치오 슈스케라는 쟁쟁한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를 받았다는 놀라운 작품입니다.
'웃음을 자아내는 절묘한 유머 감각이 있고, 서비스 정신이 넘친다 (온다 씨)', '개그맨으로 활동한 경험 때문인지, 말투가 매우 유쾌하고 유머 감각은 본받고 싶을 정도였다 (미치오 씨)'라는 심사평에서 알 수 있듯이, 어쨌든 유머가 넘치는 작품입니다. 반전도 훌륭하고요. 꼭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출판금지"
작가인 나가에 씨가 손에 쥔 것은 "카뮈의 자객"이라는 소문난 원고였다. 저자는 작가 와카바시 고세이. 내용은 유명 다큐멘터리 작가와 동반 자살을 시도했지만 살아남은 신도우 나나오와의 단독 인터뷰였다.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산장, 동반 자살의 모든 것을 기록한 영상. 불륜의 끝에서 벌어진 비극인가? 왜 여자만 살아남은 것일까? 숨막히는 전개, 무서운 반전. 기형적인 걸작 미스터리.
작가인 나가에 씨는 원래 호러와 서스펜스를 전문으로 하는 TV 감독이었습니다. 컬트적인 인기를 자랑했던 프로그램 '방송금지'(후지TV)의 기획, 각본, 감독도 담당했다고 하네요. 이 책은 그런 경력을 가진 나가에 씨가 가상의 사건을 취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읽다 보면 마치 논픽션처럼 느껴져서, 도중에 공포에 질려서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를 불러일으키는, 스릴 있고 무서운 작품이라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
어느 도시에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시신은 아파트 13층에서 갈고리에 매달린 알몸의 여성이었다. 그런 시체 근처에는 어린아이가 쓴 것 같은 히라가나로만 쓰여진 조악한 범행 진술서가 있었다. 이후 제2, 제3의 엽기 살인이 일어난다. 한 기자는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는 범인에게 '개구리 남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
이 작품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에서 최종 후보까지 올랐던 작품입니다. 기괴한 살인을 다룬 서스펜스 넘치는 미스터리지요.
마지막 반전에 이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반전은 볼만한 가치가 충분해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범인의 책임능력을 묻는 형법 제39조가 강하게 개입된 사회파 미스터리의 면모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미스터리로서도 재미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미로관의 살인"
추리소설계의 거장 미야가키 요타로에 의해 신예 작가 4명이 '미로관'이라는 기괴한 관에 모였다. 미야가키의 비서는 미야가키가 자살했다며 카세트 테이프를 대신 건네 주었다. 테이프에는 '미로관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써달라', '가장 좋은 작품을 쓴 사람에게 유산의 절반을 주겠다'는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도리없이 네 사람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관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관 시리즈'는 "십각관의 살인", "시계관의 살인" 등 반전과 의외의 결말이 있는 작품이 많은데, 이 작품 역시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다.
곳곳에 깔려있던 복선이 회수되고 여러 가지 장치가 차례로 밝혀지는 후반부 전개가 특히 압권입니다. 이 작품은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까지 눈을 뗄 수 없는 걸작이에요.
참고로 이 작품은 시리즈 작품이지만, 이 작품만으로 독립된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 권부터 읽어도 무방합니다.

"어둠 속의 기다림"
살인 혐의로 경찰에 쫓기던 아키히로는 눈이 보이지 않는 미치루라는 여자가 혼자 사는 집에 숨어들었다. 미치루는 '자신의 집에 누군가가 있다'며 아키히로의 기척을 느꼈지만 계속 모른척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맹인 여자와 살인 용의자인 남자의 기묘한 동거 생활이 시작되는데...
여자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살인 용의자인 남자가 무단으로 여자의 집에 숨어든다 - 이런 줄거리를 보면 앞으로 도대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작품이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점차 유대감 같은 것이 싹트기 시작하거든요.
마지막에는 깜짝 놀랄 만한 반전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살인귀"
'TC멤버스'는 중학생부터 성인까지가 소속된 친목 단체다. 그런 TC멤버스 일행이 후타바산으로 캠핑을 떠난다. 하지만 즐거워야 할 캠프는 후타바산 살인마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참극으로 변해가고, 한 명, 또 한 명씩 살해당하는데............
이 작품은 스플래터 호러 소설입니다. 그 모습을 극명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상당히 그로테스크해서 이런 작품을 싫어하는 분들께는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전부는 아닙니다. 후반부에는 아야쓰지 유키토다운 깜짝 놀랄만한 장치가 준비되어 있으며, 거기서 그려지는 반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로테스크한 작품에 면역이 있는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2023/09/03

0시를 향하여 - 애거서 크리스티 / 이선주 : 별점 2.5점

0시를 향하여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선주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생기고 부유한 테니스 스타 네빌 스트레인지는 오드리와 이혼 후 화려한 미인 케이와 재혼했다. 그리고 네빌은 부부의 여름 휴가를 오드리와 함께 보낼 계획을 세우고, 휴양지 솔트크리크에 위치한 트레실리안 부인의 저택 걸즈 포인트에 향했다. 그 곳에 네빌 부부와 오드리 외에도 케이의 전 남자 친구 테드 라티머, 오드리를 흠모하는 어린 시절 친구 하워드 등 관련된 다른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휴가를 보내며 네빌이 오드리와 다시 가까와졌고, 케이와 이혼할거라는 이야기가 나오던 와중에 트레실리안 부인이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네빌이었다. 이혼 이야기로 트레실리안 부인과 언쟁을 벌였고, 흉기로 보이는 골프채에 네빌의 지문이 있었던데다가 그의 양복에서 혈흔이 발견된데다가 부인에게서 거액의 유산까지 받게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빌의 알리바이는 곧바로 증명되었고, 뒤이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건 오드리였다. 노부인에게 유산을 받을 네빌 부부의 아내는 현처 케이가 아니라 전처 오드리로 명시되어 있다는 동기 외에도 흉기 등의 증거들이 차례로 발견된 탓이었다.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 또는 살인 사건에 바탕을 둔 소설을 읽을 때, 이야기가 살인 그 자체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모두 틀린 겁니다. 살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합니다. 살인은 수많은 다른 정황들이, 주어진 시각에 주어진 지점에서 한데 합쳐지면서 그 정점에 달해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살인은 그 자체로는 이야기의 종결입니다. 그것은 '0시' 이지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중기 작품. '밀리의 서재'에 업로드되어있는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완전 공략>>에 따르면 중기 걸작으로 별점은 4점이네요. 아~주 오래 전, 무려 12년 전에 동서에서 출간되었던 버젼으로 읽어보기는 했었는데 내용을 완전히 잊은 덕분에 처음 읽는 것 처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몇 가지 특징들로 다른 여사님의 작품들과 구별됩니다. 첫 번째는 푸아로나 미스 마플 시리즈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끔 경찰 쪽 주요 인물로 등장하곤 하는 배틀 총경이 홀로 활약하는 작품이지요.

두 번째로는 트릭을 파헤치는 본격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인 동기 분석이 더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특별한 트릭이 사용되지도 않고요. 그 탓에 추리적으로는 다소 재미가 떨어지기는 합니다. 배틀 총경도 직감이 뛰어나고, 심리를 분석하는데 능한 유능한 수사관이기는 하지만, 푸아로와 같이 범인의 의표를 간파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거든요. 
예를 들어, 배틀 총경은 네빌이 범인처럼 보이게 만드는 증거 모두가 억지로 만들어져 있다는걸 비교적 초반에 알아챕니다. 네빌이 범행을 사전에 계획해서 하녀에게 수면제를 먹였다면 - 노부인이 종을 울려도 알아채지 못하게 - 그가 노부인과 언쟁을 벌였을 이유가 없고, 골프채라는 증거도 남겨놓지 않은 채 강도 사건으로 위장했을거라는 분석을 통해서요. 사건에 대해 범인의 심리를 냉철하게 분석한 결과인 것이지요. 하지만 '진범이 그래서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는 없습니다. 단지 우직한 수사를 펼칠 뿐이에요.

그래도 덕분에 배틀 총경이 발로 뛰어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제대로입니다. 이를 통해 독자에게 모든 정보를 공정하게 제공해 주는 것 역시 고전 본격 추리물로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 하고요. 
추리적으로도 범인 네빌이 사건을 저지른 동기 - 오드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사형 선고를 받게 만들려고 했던 것 - 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노부인 살해는 그게 목적이 아니라, 이 동기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지요. "0시를 향해"라는 제목과 극중 대사를 잘 드러내는 동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알고보니 케이를 만나 오드리와 이혼했던게 아니라, 오드리가 자신을 버리고 먼저 도망을 쳤기 때문이었는데, 여러 복선을 잘 쌓아올려서 설득력도 있고,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도 잘 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만큼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우연, 억지가 심한 탓입니다. 완전한 제 3자인 맥휘터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오드리를 구해주고 배틀 총경과 협력하여 네빌을 옭아매는 추리쇼를 펼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우연치고는 너무 심하잖아요?
맥휘터가 사건에 뛰어드는 도화선이 된, 냄새나는 양복을 손에 넣은 경위도 억지스러웠습니다. 네빌이 수영해서 걸즈 포인트로 건너가기 전 벗어놓은 양복을 썩은 고기 위에 올려 놓아서 지독한 냄새가 배었고, 그걸 숨기려고 세탁소에 마침 호텔에서 봤던 사람 이름으로 맡겼는데, 그게 맥휘터였다는 겁니다. 왜 네빌은 그냥 양복을 버리지 않았던 걸까요?
이후 맥휘터가 걸즈 포인트를 방문해서 중요 단서 - 젖은 로프 - 를 찾아낸다는 것도 와 닿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을 못하는 정의로운 인물이라는 설정이 있기는 한데, 자기와 관계없는 사건에 발벗고 나설 충분한 이유로 보이지는 않은 탓입니다. 다른 증거를 조작하고 없앨 시간이 충분했다는 네빌이 로프를 없애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고요. 
그리고 마지막에 맥휘터와 배틀 총경이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선보이는 추리쇼의 핵심은 맥휘터가 '누군가 로프를 타고 저택을 올라가는 걸 봤다' 뿐입니다. 그게 네빌이라는 증거, 아니 저택 내부 인물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하인 누군가가 로프를 몰래 내려 보내서 외부 인물이 침입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네빌이 고작 이 정도 거짓 증언에 흔들려서 죄를 고백해버리니 맥이 풀리는 느낌이에요. 시시할 뿐더러 사악한 천재 악당으로의 면모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셈입니다. 

불필요한 등장인물과 사건도 너무 많습니다. 네빌 스트레인지와 오드리, 케이 외의 인물은 나올 필요가 없었어요. 애초에 노부인을 살해할 동기가 없어서, 독자의 흥미를 잡아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케이의 남자친구 테드 라티머를 수상쩍게 그리기는 하지만, 그 역시 동기가 너무 희박했습니다. 케이를 손에 넣기 위해 네빌을 함정에 빠트린다? 글쎄요.... 테드 라티머는 네빌을 직접 죽이면 모를까, 그런 계획을 세울 인물로는 그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트레브스 씨 살해도 내용과 별 관련이 없어요. 비교적 비중있어 보이지만, 진범이 밝혀지는건 이 사건과는 무관했으니까요. "누구나 알 수 있는 신체적 특징이 있다"는 말로 범인이 누구인지 끄집어내는건 불가능했습니다. 다들 특징들이 있기도 한 데다가, 진범 네빌의 새끼 손가락 길이가 다르다는건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특징으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나쁜 정보에 가까왔어요. 
마지막에 맥휘터 앞에 오드리가 나타나 결혼하지고 하는건 황당했습니다. 딱 두 번 본 남자에게, 자기를 구해줬다는 이유로 바로 결혼을 한다는건 이상하잖아요. 그냥 멀리 떠난 맥휘터 앞에 나타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 정도가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여사님은 다 좋은데, 왜 이렇게 커플을 만들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점들로 보면, 단편으로 충분했을 이야기를 길게 늘려쓴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05/04/10

가든 살인사건 - SS 반 다인 / 김민정 : 별점 2점

가든 살인사건 - 4점 S.S. 반 다인 지음, 김민정 옮김/해문출판사

파일로 반스는 수수께끼의 전화 제보를 받고 상류층 자제들이 모여 경마 내기를 벌이는 저명한 화학교수 가든 교수의 집을 찾았다. 그 곳에서 교수의 아들 플로이드와 플로이드의 사촌 우디를 만났고, 우디가 전 재산을 건 "냉정함"이라는 말이 경주에서 우승하지 못하는 순간, 총소리와 함께 우디가 시체로 발견되는 것을 목격했다.
반스는 현장 조사를 통해 우디가 경마의 실패로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 당했다는 것을 밝혀냈지만, 사건의 중요 인물인 간호사 비튼 양의 살인 미수, 가든 교수의 부인 마샤가 독살당하는 등의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반스는 최후의 순간에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 내어 모든 관계자들을 모아 놓고 "추리쇼"를 벌이게 되는데...

반 다인의 파일로 반스 시리즈로 해문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출간한 책을 우연찮게 헌책방에서 구입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해문같은 추리 전문 출판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시리즈를 기획하고 출간해 주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반 다인의 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미루고 있던 차였는데 마침 기회가 되었네요.
먼저 반 다인의 작품들을 좋아하지 않은 이유부터 설명하자면, 그동안 제가 읽었었던 "벤슨"과 "비숍" 두 작품 모두 유명세에 비해 별로였기 때문이에요. 탐정인 파일로 반스부터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했고 두 작품 다 추리적으로 저에게 그다지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죠. 벤슨은 그다지 평가할 만한 내용도 별로 없었고 지루하기만 했으며, 비숍은 추리적으로는 괜찮긴 했지만 동기의 현실성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그런데 이 작품 역시 같은 점이 불만스럽네요. 파일로 반스는 언제나처럼 지나친 잘난척을 연발하여 읽는 저의 짜증을 불러 일으키며 추리적으로도 동기의 설득력이 너무 약하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범인의 동기가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
또한 마지막의 해결부에서 사건의 증거 자체가 거의 전무하므로 "추리쇼"를 통한 범인의 방심을 노리다는 식인데, "추리쇼"에서 결정적 증거를 제시한다면 모를까 사실상 "방심" 하나만 믿고 연극을 한다는 것은 본격 추리물로서는 최악의 해결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심리적인 부분을 물고 늘어지는 반스 특유의 추리법으로 포장되긴 하지만 동기나 단서가 불명확한 상태에서 그러한 심증만으로 추리를 전개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죠.

그래서 별점은 2점. 반 다인 스스로가 "추리소설 작가는 6편 이상의 걸작을 쓸 수 없다"라고 했는데 이 작품은 반 다인의 12편의 장편 중 9번째로 발표된 작품이라서 격이 더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새롭게 번역되어서 야심차게 나온 작품답게 번역은 깔끔하고 책 자체도 이쁘게 나온 편이나 단점이 더 많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시리즈를 더 읽어야 하는지 심히 고민되네요.

PS : 책 표지와 디자인은 좀 더 깔끔하고 이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조금 아쉽군요.

2019/01/13

시인장의 살인 - 이마무라 마사히로 / 김은모 : 별점 2.5점

시인장의 살인 - 6점 이마무라 마사히로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립 신코 대학의 미스터리 애호회 회장 아케치 교스케와 조수? 하무라 유즈루는 소녀 탐정 겐자키 히루코의 부탁으로 영화 연구회 여름 합숙에 참가했다. 영화 연구회 합숙은 이상한 협박장 때문에 취소되기 직전이었던 탓에, 외부인의 참석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합숙이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아 급작스러운 좀비떼의 습격으로 일행은 3명의 사망자를 낸 채 합숙 장소인 '자담장'에 갇히고 말았다. 일행은 여러가지 바리케이트로 좀비의 습격을 막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려 했지만 첫 날 밤이 지나고, 영화 연구회 회장인 신도가 좀비에게 물려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문제는 신도의 방은 좀비가 들어올 수 없는 밀실이었다는 점이었다....

신인 작가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데뷰작으로 '2018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2018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2017 「주간 분슌」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제18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 제27회 아유카와 데쓰야상 수상, 2018 서점대상 노미네이트' 등 온갖 상을 휩쓸었던 화제작입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유명세만 듣고 읽기 시작했는데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마다라메 기관" 이라는 정체 불명의 연구소에서 마지막 테러를 위해 선택한 것이 좀비 바이러스의 살포로, 테러의 성공으로 수천명의 사람들이 감염된 후의 이야기를 다룬 좀비물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사실 좀비가 등장하는 추리 소설은 이미 좀비의 특성 자체를 핵심 트릭으로 써 먹은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은 미국을 무대로 시작부터 좀비물임을 드러내며 분위기가 살짝 블랙 코미디 느낌인데 반해, 이 작품은 초중반의 좀비 등장 전까지는 상큼한 대학교 신입생인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대학생들 여름 캠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는 전형적인 일본풍 청춘 클로즈드 써클 미스터리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덕분에 좀비가 처음 등장할 때는 상당히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갑자기 좀비물이 되는 셈이니까요.

또 좀비가 처음 주인공 일행을 습격하는 담력 시험에서 신코대학 미스터리 애호회 회장인 '신코의 홈즈' 아케치 교스케 가 바로 좀비에게 물려 이야기에서 퇴장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놀랐습니다. 물론 아케치 교스케는 이름과 별명만 거창한 단순한 추리 소설 매니아로 별다른 능력은 없으며, 진짜 명탐정은 겐자키 히루코라는 설정은 진작부터 있기는 했지요. 그래도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탐정 에가미 지로 정도였던 초반부 비중에 비하면 너무나 허무한 퇴장이었습니다. 흡사 영화 "파이널 디씨젼"에서 스티븐 시걸이 초반에 활약도 못하고 죽어버리던 장면이 떠오를 정도였어요.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다양한 수상 경력에 값합니다. 첫 사건인 영화 연구부 부장 신도 살인 사건이 그 중에서도 가장 괜찮아요. 밀실에서 좀비에 물려 죽었는데, 좀비가 어떻게 밀실에 들어갔는지? 에 대한 수수께끼가 핵심으로, 신도의 연인인 호시카와의 존재와 좀비의 특성을 잘 활용한 괜찮은 트릭이 등장합니다. 좀비가 된 호시카와와 신도가 사투를 벌일 때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는지, 신도가 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지 등 세세하게 파고들면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나무랄데 없습니다.

허무하게 죽어버린 아케치 외의 다른 캐릭터들도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고전 본격물 애호가인지라 화자인 하무라가 밴 다인 (반 다인)과 쓰즈키 미치오도 모르는 미스연 회원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건 굉장히 와 닿았습니다. 미스연 회원들이 즐겨 읽는다는 라이트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비판도 인상적이고요. 미스터리에 대해 잘 모르고, 태생적으로 사건을 불러 일으켜 희생자를 만드는 소녀탐정 히루코 설정도 좋아요. "천재지변급으로 희생자를 만드는 인물" 들인 코난과 김전일 캐릭터에 관련된 인터넷 농담을 조금 더 진지하게 구현해 놓았는데, 본인 스스로 희생자를 줄이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추리를 한다는 이유는 충분한 설득력을 지닙니다. 하무라를 원한 이유가 '조수'가 있으면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그럴 듯 했고요.

그러나 두 번째 살인 사건인 다쓰나미 살인사건부터는 여러모로 애매해집니다. 범인의 원한이 아무리 깊다 한들, 좀비가 된 다쓰나미를 또 죽인다는 범행을 저지른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동상을 옮기는 등 엄청난 수고가 추가로 필요할 뿐 아니라, 지나치게 위험한 방법으로 자신과 다른 일행의 생명까지도 걸어야 하는 행위인 탓입니다. 동상을 이용해 다쓰나미의 몸무게 이상으로 탑승이 불가하게 조작해 놓았다 한 들, 좀비들이 다쓰나미를 끌어내 먹어 치우고 다른 좀비가 타고 2층으로 올라올 수도 있잖아요? 좀비 설정에 너무 무리수를 둔 느낌이었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범행 사전 준비를 위해 카드키를 바꿔치기하고, 그 순간에 CD 플레이어의 음악이 멈추었다는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었어요.
세 번째 살인 사건인 나나미야 살인 사건은 트릭도 뭐도 아니라서 딱히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마지막 대단원도 그닥 예상을 벗어나지 않아 조금 실망스러웠고요. 좀비가 몰려드는 와중에 펼쳐지는 추리쇼라는 상황 설정만 긴박할 뿐, 내용은 딱히 새롭지 않습니다. 범인도 하무라 아니면 시즈하라 정도로 압축되고 있던 상황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전형적인 좀비물을 청춘 클로즈드 써클 미스터리와 엮어 본격물스럽게 만든, 일종의 하이브리드 장르라는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첫 번째 사건과 몇몇 디테일을 제외하고는 본격물로서의 가치는 높지 않아 감점합니다.
하지만 분위기, 느낌은 나쁘지는 않아요. 전형적인 좀비 호러물을 박진감있게 묘사하여 독자를 사로잡는 맛도 분명 있고요. 1급 추리물은 아니지만 1급 오락물임에는 분명하다는 점에서 여러 상을 휩쓴 이유도 수긍은 갑니다. 좀비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인상적인만큼 좀비물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2013/09/09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 아놀드 베넷 외 : 별점 1.5점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 4점 아놀드 베넷 외 지음, 한국추리작가협회 엮음/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도서출판 한스미디어에서 야심차게 선보인 추리소설 앤솔러지. 유명 고전 작가들의 단편은 물론이고 초창기 추리 이론까지 풍성하게 실려있습니다.
1, 2권으로 출간되었는데 1권은 읽은 작품이 너무 많고 지나치게 고전 취향이라 2권부터 구입하게 되었네요. 2권 역시 다른 책에서 읽어본 작품이 제법 많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워낙에 목차가 괜찮고 또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고전 황금기 작품들을 주력으로 하고 있기에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러웠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번역입니다. 일본어 중역 느낌이 물씬 날 뿐더러 그 자체가 별로 매끄럽지 않아 읽기 힘들었어요. 악명 높은 동서 추리문고 최악의 번역도 이거보다는 좋게 느껴질 정도니 말 다했죠. 고전 황금기 걸작이 아닌 몇몇 현대 일본작가 작품이 섞여 있는 것도 기획 의도가 모호해 보여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기획의도만으로 3점은 충분하지만 번역은 용서가 안되네요. 좋은 기획의도가 번역 때문에 다 망가진 것 같아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한스미디어의 다른 작품들은 괜찮았었던 것 같은데 대관절 영문을 모르겠군요.

몇몇 작품은 걸작이지만 대부분 다른 책에서 훨씬 좋은 번역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사라진 기억" | 배리 퍼론

극작가 애닉스터가 완벽한 밀실살인 트릭을 생각했는데, 교통사고로 트릭을 잊어버린 탓에 술집에서 트릭을 알려주었던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내용.

교통사고로 딱 필요한 기억만 상실한다는 작위적인 설정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꽤 그럴듯한 전개, 그리고 마지막에 애닉스터가 상황을 깨닫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남자에게는 애닉스터만이 유일한 위험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서늘한 반전류의 교과서적인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

"살인!" | 이넉 아놀드 베넷

명백한 살인사건인데, 경찰이 수사 결과 몇몇 남겨진 단서를 통해 자살로 결론 내린다는 내용의 소품. 솔직히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심리 묘사에 대한 번역에 문제가 많았던 것 같은데 제대로 된 번역으로 다시 읽고 싶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피트 모란, 다이아몬드 헌터" | 퍼시벌 와일드

"탐정 피트 모란"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그때는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번역이 너무나 별로인 탓에 작품마저도 후지게 느껴지는 기묘한 체험을 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실망하신 분들께서는 "탐정 피트 모란"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번역 때문에 별점을 주기조차 어렵네요.

"골초는 빨리 죽는다" | 이자와 모토히코

"역설의 일본사" 말고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이런저런 상을 많이 수상했던 유명 작가의 단편.

두 명의 대화로만 전개되는 형식과 담배로 촉발된 살의라는 설정은 독특한데, 결말이 너무 심하게 별로였습니다. 반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좀 어이없는 결말이었거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먹이" | 토마스 테셔

이형 생물체가 등장하는 크리쳐 호러물. 스티븐 킹의 비슷했던 작품(한 소년의 아버지가 점액질 괴물이 된다는 이야기)와 비슷한데, 이 작품은 "애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비극적 결말이라는게 차이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라서 평하기는 어렵지만 공포도 아니고 심리묘사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결말에서 반전이 돋보이는 것도 아닌 그냥저냥한 소품이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콜 Y의 비극" | 노리즈키 린타로

제가 개인적으로 번역했던 작품이죠. 읽어보니 원작을 "직역"한 번역으로 읽기가 어렵더군요. 순수하게 작품만 놓고 평가하면 별점은 3점인 좋은 작품인데 안타깝네요. 솔직히 제 번역과도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녀들의 쇼핑" | 쓰쓰이 야스타카

다른 앤솔러지에서 접해본 적 있는 이색작.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부들이 강도단을 조직한다는 내용입니다. 작품 자체의 수준은 그냥저냥이지만, 작가 특유의 섬뜩한 풍자 하나만큼은 인상적입니다. 특히 마지막 대사가 백미! 순수하게 작품만 놓고 평가하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살의" | 다카기 아키미쓰

역시나 다른 앤솔러지에서 접했던 작품으로, 굉장한 걸작입니다. 이른바 "일사부재리" 원칙의 모순을 정면으로 다루는데, 마지막 반전까지 빼어난 단편의 모범 답안 같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그러고 보니 "살의"라는 말이 들어간 작품들 ("이런거"라던가 "이런거"라던가 "이런거"라던가....)은 하나같이 괜찮네요.

"아버지" | 토마스 H. 쿡

토마스 H. 쿡의 장편은 몇 권 읽어보았지만 단편은 처음입니다.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지만 장편 못지않은 묵직함이 잘 전해지는 묘사가 아주 좋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무대 뒤의 살인" | 에드워드 D. 호크

총 3편의 초단편 Short-Short로 이루어진 작품.

예전에 읽었던 "4페이지 미스터리"와 유사하나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3편의 이야기 모두 논리정연하면서도 예상을 뒤집는 정통 추리물이거든요.

첫번째 작품은 사진 필름 원판을 가지고 협박하는 협박자가 살해된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는 이런저런 논리 퍼즐에서 많이 보았던, 다섯 번째 남자마다 처형당하는 상황에서 살아남는 주인공의 이야기, 마지막 이야기는 이집트 전시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입니다.

첫번째 작품은 에스터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 돋보였어요. 특히나 1만 2500달러라는 애매한 비용과 30분이라는 시간 공백을 설명하는 게 제법이었거든요.
마지막 작품은 살인사건은 전혀 상관없는 동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는 반전이 인상적이었고요.

결론내리자면 단편의 제왕 에드워드 D. 호크의 명성에 걸맞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오번 가문의 비극" | 매슈 핍스 실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단편 미스터리 시리즈인 "프린스 자레스키" 시리즈!

그러나 별로 건질 게 없었습니다.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인 프린스 자레스키 설정은 너무나 만화 같았고 사건도 설득력이 너무 떨어지거든요. 아버지가 광인이 된 것을 왜 숨겨야 하는지도 불분명하고 사건 현장 윗층에서 과학교실을 열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조작을 하는 것도 와닿지 않았어요. 그냥 본인이 자살하는 것이 더 빠른 해결책이었을 텐데 말이죠.

한마디로 수준 이하의 작품.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한 것은 물론 번역까지 별로라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불도그 앤드류" | 아서 체니 트레인

터니게이트 - 애플보이 사이의 영토 분쟁에서 불도그 앤드류가 지나가던 터니게이트를 문 뒤 기소되어 법정에 선다는 법정극.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좀 무리지만 유머스러운 일상계 법정극으로는 충분히 읽을 만 했습니다. 재판장의 마지막 한마디를 통해 약간의 반전이 있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번역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마크 트웨인이 연상되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아내의 외출" | 자크 푸트렐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에 수록된 사고기계 시리즈 단편(이 책에 수록된 제목은 "녹색눈의 괴물"이죠). 당대 보기 드문 일상계로 가치 높은 수작입니다.

그러나 별점을 주기 민망할 정도로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서 도저히 읽을 맛이 나지 않네요.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로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A 분장실의 수수께끼" | 자크 푸트렐

역시나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에 수록된 것과 같은 사고기계 시리즈 단편. 여배우의 증발사건을 다룬 작품인데 장치적으로는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가 선보입니다.

그러나 트릭의 핵심이 "최면술"이라는 게 문젭니다. 당시 최면술이 마법처럼 받아들여진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물로 생각되는데 지금 읽기에는 너무 설득력이 떨어지니까요. 번역 역시 수준 이하였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알리바바의 주문" | 도로시 세이어즈

피터 윔지 경 단편.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던 "검은별"과 동일한 스타일의 모험극. 추리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는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오필리어 살해" | 오구리 무시타로

"흑사관 살인사건"의 오구리 무시타로가 쓴, 범죄학자이자 탐정 노리미즈 린타로가 등장하는 단편. 셰익스피어 스타일 연극 무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무대 장치를 이용한 기계장치 트릭에 더해 심리적 착각을 이용한 트릭이 등장하죠.

현실적이지 못한 트릭,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현학적인 전개와 묘사, 거기에 동기까지 애매하여 전체적인 완성도가 낮습니다. 정통추리물로 보기도 어려웠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그의 마음은 찢어졌어" | 크레이그 라이스

"스위트홈 살인사건"의 크레이그 라이스가 쓴 단편. 주인공인 술꾼 찌질이 변호사 말론은 시리즈 캐릭터라고 하네요.

의뢰인인 사형수 폴 파머 자살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폴 파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끊어지지 않았어"를 단서로 마지막에 추리쇼까지 펼쳐 보이며 사건을 해결하는 정통파 추리물입니다.

정통파답게 추리적으로는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습니다. 초반부 딕슨 의사와의 대화로 병원에서 탈옥한 죄수가 있다는 단서를 전해주는 등 독자에게 공정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도 좋았고요.

메들레인 스타가 그냥 폴 파머와 결혼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을 텐데 성공 확률이 낮은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옥의 티이긴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2/11/05

마안갑의 살인 - 이마무라 마사히로 / 김은모 : 별점 2점

 

마안갑의 살인 - 4점
이마무라 마사히로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무라와 히루코는 마다라메 기관의 자취를 쫓다가 이전 기관의 연구소였던 '마안갑'을 찾았다. 그곳에는 기관에서 연구하던 예언자 사키미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마지막 이틀 동안 그곳에서 남녀 각각 2명 씩 죽을거라는 사키미의 예언을 두려워한 마을 사람들이 마안갑과 마을을 잇는 유일한 다리에 불을 지른 탓에, 둘은 예지 능력이 있는 여고생 도이로, 기자 라이타, 여행자 오즈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마안갑에 갇혀 버렸다. 뒤이어 예언대로 기자 라이타는 산사태에 휩쓸리고, 사키미 독살 미수에 이어 도이로가 처참하게 살해되고 마는데....

"시인장의 살인"에 뒤이은 시리즈 제 2작입니다. 

비현실적인 소재에 의한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는 점에서는 전작과 유사합니다. 전작에서의 좀비가, 이 작품에서는 '진짜' 예언자가 등장하니까요. 고전적인 정통 본격물 스타일을 추구한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클로즈드 서클'에서의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외부에서 경찰이나 구조대가 오면 남아있는 사람들 중 범인이 있을게 뻔하니 클로즈드 서클에서의 범행은 불합리한데, 이 범행을 나름대로 설득력있게 풀어낸게 작품의 핵심이기도 하고요. 범인 오즈가 범행을 실행한 이유는 바로, 사키미의 예언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클로즈드 서클이건 뭐건간에 자기가 죽을 수도 있으니, 자기가 죽기 전에 다른 사람들을 죽였던 거지요. 와 정말이지 제가 여태까지 읽어보았던 추리 소설 중에서도 동기의 참신함으로는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듯 합니다. 

완전 범죄를 위해 오즈와 도키노가 서로 다른 성별을 한 명씩 죽이는 교환 살인을 계획했는데, 오즈가 도이로를 살해한 뒤 공범 도키노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아서 생겨나는 딜레마도 흥미롭습니다. 도이로가 살해당한 뒤 히루코마저 죽은 것으로 가장하자, 도키노는 죽음의 예언에서 벗어났으니 당연히 사람을 죽이려 할 리 없지요. 하지만 기껏 살인까지 저질렀는데 여전히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해있는 오즈는 필사적일 수 밖에 없고요.

히루코의 추리쇼를 거쳐, 마지막에 사키미가 진짜가 아니었다는게 드러나는 반전도 괜찮았습니다. 그녀는 진짜 사키미를 연구하던 도이로 할아버지의 조수였던 오카자키였습니다. 사키미와 도이로가 도주할 때 대역으로 남겨졌다가 예언자 역할을 떠맡게 되었던 거지요. 다행히 사키미가 예언을 기록한 노트가 있어서, 예언자 행세를 할 수 있었고요. 예언이 다 떨어지자, 자살해서 예언도 맞추고 자신의 신화도 유지하려 했지만 자살에 실패한 뒤 원수와도 같은 도이로 - 자기를 버린 박사와 사키미의 손녀 - 를 죽이도록 상황을 조작했다는 진상도 꽤 그럴싸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전작보다 못합니다. 앞서 "'클로즈드 서클'에서 범행을 저지른 동기" 만큼은 말이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정작 범행은 정교하지 못한 탓입니다. 죽은 네 명 중 라이타 기자와 구키자와의 사인은 사고로 살해당한건 도이로와 도키노 둘 뿐입니다. 그런데 도이로 사건은 공범 둘이 저질렀다는게 전부입니다. 별다른 트릭은 없어요. 이 정도라면 경찰이나 구조대가 오면 바로 범인이 밝혀졌을겁니다. 아무래도 어린 초등학생 아들이 포함된 시시다 부자나 도이로의 숭배자 구키자와가 범인일 가능성은 낮으니 단순 소거법에 의해서도 오즈와 도키노가 공범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셈이고요. 

물론 다른 방에 둘만 있었다는 사키미와 핫토리가 공범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고요. 하지만 핫토리는 작중에서 건물이나 가구 정도의 비중으로,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런 그녀가 범인이라는건, 추리 소설로는 반칙일 수 밖에 없습니다. 

도이로 사건의 단서로 제공되는 박살난 시계 역시 공정한 단서는 아닙니다. 독자는 왜 시계를 부쉈는지를 직접 보고 판단할 수 없으니까요. '시계 바늘 두 개가 모두 비슷한 위치에서 부서져 있었다' 정도의 묘사만으로 두 바늘이 겹쳐진 시간에 범행이 일어났다는걸 추리해내는건 어렵습니다. 방음이 철저한 방과 같은 작위적인 무대 설정도 거슬렸고요.

도키노 사건에서 창을 든 도키(로 보였던 흰 천을 뒤집어 쓴 누군가)가 달아나면서 젖은 수건을 밟아 발자욱을 남겼는데, 젖은 발자욱은 이전에 찍어 놓았고 범인은 맨발로 자기 방으로 이동했다는 트릭은 너무 간단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창은 벽지를 말아 만든 소품이었다는 것도 예전 "미스터리 탐정 야쿠모"에서 접했던 트릭이고요. 한마디로 말해 추리 퀴즈 수준에 불과했어요. 

그러나 트릭보다도 더 큰 문제는 이 범행이 일어난 이유입니다. 범인 오즈는 앞서 발생한 딜레마 - 도키노는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다 - 로 도키노와 다투다 우발적으로 그녀를 빈사 상태에 빠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 이 범행을 저질렀는데, 도키노를 괴한으로 몰아봤자 도이로를 살해하려면 공범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도이로를 살해할 수 없었던건 명백한 사실이니까요. 도키노를 범인으로 몰아봤자 그녀가 깨어난 뒤 사실을 증언하면 오즈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으니 도키노를 죽일 필요가 있는데, 그렇다면 이런 유치한 조작을 벌일 필요는 반대로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차라리 누구든 범인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더 나으니까요. 아니면 생존자들을 다 죽이던가....

그 외에도 헛점은 곳곳에서 눈에 뜨입니다. 사키미 자살 미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살 실패 후, 도이로를 죽이기 위해 꽃을 흩뿌렸다는 설정부터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도이로가 그녀의 죽음을 예지한다는 보장이 일단 없거든요. 모든 사건을 예지하고 그림을 그리는건 아닐테니까요. 사키미가 죽은건 아니니 그림을 안 그릴 수도 있고요. 게다가 그림에 꽃까지 그린다는건 더더욱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또 오즈가 사키미 방 밖에 꽃을 뿌려 놓은 것 역시 시간대를 겨우 맞춰서 발생한 우연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여러가지 장치와 단서, 복선으로 정교함을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단점도 많습니다. 다소 무리한 설정들도 눈에 뜨이고요. 시리즈를 계속 읽을 필요가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2009/08/05

극락도 살인사건 (2007) - 김한민 : 별점 2점

 


작지만 평화로운 섬 극락도에서 섬 주민 모두가 사라지는 괴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은 마을이 우수 낙도로 선정되어 포상받은 직후 마을 잔치날 벌어진 화투판 살인사건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영화를 본건 2년전인데, 리뷰를 작성하고 비공개로 돌려놓고 잊어먹고 있다가 이제서야 올립니다.^^ (앗싸 하나 건졌다~)

일단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 크리스티 여사님의 "열개의 인디언 인형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둥 하며 정통 추리물인 것 처럼 포장하여 선전했던 영화죠. 

그러나 아니니다를까 뚜껑을 열어보니 정통 추리물과는 약 10만광년 정도 떨어진 작품이었습니다. 차라리 블랙 코미디 성향이 짙은 호러물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죠. 마을 주민들이 죽어나가는 연쇄살인의 동기, 범인의 정체 모두 "약물"에 의한 환각 때문이었다는 설정 때문에 추리의 여지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범행이 다 우발적인 것이었다는데 추리할게 있을리가 없잖아요. 또 어차피 제정신들이 아닌 상황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살인사건이라면 마을 주민들이 하나씩 좀비가 되면서 벌어지는 호러물하고 다를게 없겠죠.

다만 마을 주민들을 중독시킨 "약물" 의 정체와 극락도에 반입된 이유가 반전으로 등장해서 약간 추리적으로 사건을 마무리하기는 하는데, 문제는 사건의 핵심인물인 박해일이 연기하는 "제우성"이라는 캐릭터의 설정과 묘사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가득차 있기에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습니다. 지가 사건을 저질러 놓고 그 수수께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 처럼 묘사해놓으니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물론 마을 주민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연기력이 좋으며 전체적으로 짜임새나 얼개는 잘 갖추어 놓은 잘 만든 영화이긴 합니다. 더운 여름 보기에는 서늘한 감이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추리 애호가로서 전체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별점은 2점밖에는 못 주겠습니다.

그나저나 왜 우리나라에서는 추리물이라고 하면서 호러를 찍을까요? 추리물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단서나 전개는 전무하고 불필요할 정도로 피와 깜짝쇼가 난무하니 저같은 추리물을 기대하고 본 관객은 김이 샐 수 밖에 없잖아요. 중요하지도 않은 귀신은 왜 이리도 자주 등장해서 사람 김을 빼 놓는건지 원....

2005/08/02

재앙의 거리 - 엘러리 퀸 / 정태원 (시그마 북스 001) : 별점 4점

재앙의 거리 - 8점 엘러리 퀸 지음, 현재훈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엘러리 퀸은 소설을 쓰기 위해 엘러리 스미스라는 가명으로 한적한 시골마을 라이츠빌을 찾았다. 마을 창시자의 후예이자 지역 유지인 은행장 라이츠 씨의 집에 세를 든 퀸은 라이츠 가족과 친해졌다.
라이츠의 세 딸은 모두 미인인데, 둘째 노라는 약혼자가 사라져 버려 몇 년째 집안에만 은둔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약혼자 짐이 돌연 돌아왔고, 둘은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짐의 짐을 옮기던 엘러리와 셋째딸 패트리샤는 짐이 쓴, 아내 살해를 예고하는 듯한 편지를 발견했다. 둘은 짐을 철저하게 감시했지만, 새해 전야 파티에서 노라가 한두 모금 마시던, 짐이 만든 칵테일을 억지로 빼앗아 마신 짐의 동생 로즈매리가 죽었고, 여러 정황 증거로 짐이 범인으로 몰리는데...

엘러리 퀸의 기념비적인 라이츠빌 시리즈 제 1편입니다. 1942년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현재까지도 추리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요. 게으른 탓에 이제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가공의 마을 라이츠빌의 폐쇄적인 분위기와 소도시 특유의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 그리고 사건의 주 대상인 라이츠 가의 미녀 3자매 같은 설정은 명백히 이후 작품에 강력한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일본 본격물에 비슷한 설정과 묘사가 많지요. 

내용은 기념비적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합니다. 딱 한 명만 살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살인계획을 눈치챈 엘러리와 패트리샤의 고민을 다루는 초, 중반부와 실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난 이후 휩쓸려 들어간 라이츠빌의 군중 묘사와 법정극으로 이어지는 구성이고요. 

그래도 작가 명성에 걸맞게 추리적인 장치는 굉장히 탄탄한 편입니다.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아도 드라마와 잘 어우러지고요. 덕분에 국명 시리즈보다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국명 시리즈는 트릭에 너무 집중한 탓에 실제 이야기 전개의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너무 많았던 반면, 이 작품에서는 보다 현실감있는 전개를 보여주는게 독특하면서도 좋습니다. 엘러리 특유의 추리쇼같은 사건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어요.
비극적인 결말과 인간 관계의 묘사가 많이 등장하는 점은 드루리 레인이 등장하는 "비극" 시리즈가 연상되는데, 엘러리 퀸의 트릭과 드루리 레인의 서정성이 합쳐진 시너지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외에도 법정극의 묘사도 좋고 라이츠빌이라는 마을과 마을 사람들에 대한 묘사 역시 읽는 재미를 느끼게끔 하는 디테일이 잘 살아있으며 퀸의 잘난척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을만 합니다.

그러나 여주인공이라고 할만한 패트리샤 라이트의 묘사가 그간 엘러리 퀸 작품에 등장하던 말괄량이 아가씨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점은 아쉽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엘러리는 여성 캐릭터 묘사에는 서투른 것 같아요.
단 한 건의 살인사건만 등장하며, 살인이 최소한이나마 가능했던 인물이 한정되어 있어서 정통 퍼즐 미스테리보다 추리적 흥미는 떨어진다는 문제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소합니다. 그간 작품들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덜어낸 것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제가 읽었던 엘러리 퀸 장편 중에서는 최고작입니다. 헌책방에서 운 좋게 구입했는데, 마침 정태원씨가 번역한 전설의 시그마북스였다는 것도 좋았고요. 역사적인 작품이자 엘러리 퀸 작품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인데 이제서야 읽어서 좀 후회가 되기도 하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과거 읽었었던 라이츠빌 시리즈 "열흘간의 불가사의"와 "폭스가의 살인"도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