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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3

0시를 향하여 - 애거서 크리스티 / 이선주 : 별점 2.5점

0시를 향하여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선주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생기고 부유한 테니스 스타 네빌 스트레인지는 오드리와 이혼 후 화려한 미인 케이와 재혼했다. 그리고 네빌은 부부의 여름 휴가를 오드리와 함께 보낼 계획을 세우고 휴양지 솔트크리크에 위치한 트레실리안 부인의 저택 걸즈 포인트에 향했다. 그 곳에는 네빌 부부와 오드리 외에도 케이의 전 남자 친구 테드 라티머, 오드리를 흠모하는 어린 시절 친구 하워드 등 관련된 다른 사람들까지 모여들게 되었다.
휴가를 보내며 네빌이 오드리와 다시 가까와지며 케이와 이혼할거라는 이야기가 나오던 와중에 트레실리안 부인이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네빌이었다. 이혼 이야기로 트레실리안 부인과 언쟁을 벌였고, 흉기로 보이는 골프채에 네빌의 지문이 있었던데다가 그의 양복에서 혈흔이 발견된데다가 부인에게서 거액의 유산까지 받게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빌의 알리바이는 곧바로 증명되었고, 뒤이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건 오드리였다. 노부인에게 유산을 받을 네빌 부부의 아내는 현처 케이가 아니라 전처 오드리로 명시되어 있다는 동기 외에도 흉기 등의 증거들이 차례로 발견된 탓이었다.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 또는 살인 사건에 바탕을 둔 소설을 읽을 때, 이야기가 살인 그 자체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모두 틀린 겁니다. 살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합니다. 살인은 수많은 다른 정황들이, 주어진 시각에 주어진 지점에서 한데 합쳐지면서 그 정점에 달해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살인은 그 자체로는 이야기의 종결입니다. 그것은 '0시' 이지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중기 작품. '밀리의 서재'에 업로드되어있는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완전 공략>>에 따르면 중기 걸작으로 별점은 4점이네요. 아~주 오래 전, 무려 12년 전에 동서에서 출간되었던 버젼으로 읽어보기는 했었는데 내용을 완전히 잊은 덕분에 처음 읽는 것 처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몇 가지 특징들로 다른 여사님의 작품들과 구별됩니다. 첫 번째는 푸아로나 미스 마플 시리즈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끔 경찰 쪽 주요 인물로 등장하곤 하는 배틀 총경이 홀로 활약하는 작품이지요.

두 번째로는 트릭을 파헤치는 본격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인 동기 분석이 더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특별한 트릭이 사용되지도 않고요. 그 탓에 추리적으로는 다소 재미가 떨어지기는 합니다. 배틀 총경도 직감이 뛰어나고, 심리를 분석하는데 능한 유능한 수사관이기는 하지만, 푸아로와 같이 범인의 의표를 간파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거든요. 
예를 들어, 배틀 총경은 네빌이 범인처럼 보이게 만드는 증거 모두가 억지로 만들어져 있다는걸 비교적 초반에 알아챕니다. 네빌이 범행을 사전에 계획해서 하녀에게 수면제를 먹였다면 - 노부인이 종을 울려도 알아채지 못하게 - 그가 노부인과 언쟁을 벌였을 이유가 없고, 골프채라는 증거도 남겨놓지 않은 채 강도 사건으로 위장했을거라는 분석을 통해서요. 사건에 대해 범인의 심리를 냉철하게 분석한 결과인 것이지요. 하지만 '진범이 그래서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는 없습니다. 단지 우직한 수사를 펼칠 뿐이에요.

그래도 덕분에 배틀 총경이 발로 뛰어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제대로입니다. 이를 통해 독자에게 모든 정보를 공정하게 제공해 주는 것 역시 고전 본격 추리물로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 하고요. 
추리적으로도 범인 네빌이 사건을 저지른 동기 - 오드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사형 선고를 받게 만들려고 했던 것 - 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노부인 살해는 그게 목적이 아니라, 이 동기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지요. "0시를 향해"라는 제목과 극중 대사를 잘 드러내는 동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알고보니 케이를 만나 오드리와 이혼했던게 아니라, 오드리가 자신을 버리고 먼저 도망을 쳤기 때문이었는데, 여러 복선은 잘 쌓아올려서 설득력도 있고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도 잘 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만큼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우연, 억지가 심한 탓입니다. 완전한 제 3자인 맥휘터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오드리를 구해주고 배틀 총경과 협력하여 네빌을 옭아매는 추리쇼를 펼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우연치고는 너무 심하잖아요?
맥휘터가 사건에 뛰어드는 도화선이 된, 냄새나는 양복을 손에 넣은 경위도 억지스러웠습니다. 네빌이 수영해서 걸즈 포인트로 건너가기 전 벗어놓은 양복을 썩은 고기 위에 올려 놓아서 지독한 냄새가 배었고, 그걸 숨기려고 세탁소에 마침 호텔에서 봤던 사람 이름으로 맡겼는데, 그게 맥휘터였다는 겁니다. 왜 네빌은 그냥 양복을 버리지 않았던 걸까요?
이후 맥휘터가 걸즈 포인트를 방문해서 중요 단서 - 젖은 로프 - 를 찾아낸다는 것도 와 닿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을 못하는 정의로운 인물이라는 설정이 있기는 한데, 자기와 관계없는 사건에 발벗고 나설 충분한 이유로 보이지는 않은 탓입니다. 다른 증거를 조작하고 없앨 시간이 충분했다는 네빌이 로프를 없애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고요. 
그리고 마지막에 맥휘터와 배틀 총경이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선보이는 추리쇼의 핵심은 맥휘터가 '누군가 로프를 타고 저택을 올라가는 걸 봤다' 뿐입니다. 그게 네빌이라는 증거, 아니 저택 내부 인물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하인 누군가가 로프를 몰래 내려 보내서 외부 인물이 침입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네빌이 고작 이 정도 거짓 증언에 흔들려서 죄를 고백해버리니 맥이 풀리는 느낌이에요. 시시할 뿐더러 사악한 천재 악당으로의 면모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셈입니다. 

불필요한 등장인물과 사건도 너무 많습니다. 네빌 스트레인지와 오드리, 케이 외의 인물은 나올 필요가 없었어요. 애초에 노부인을 살해할 동기가 없어서, 독자의 흥미를 잡아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케이의 남자친구 테드 라티머를 수상쩍게 그리기는 하지만, 그 역시 동기가 너무 희박했습니다. 케이를 손에 넣기 위해 네빌을 함정에 빠트린다? 글쎄요.... 테드 라티머는 네빌을 직접 죽이면 모를까, 그런 계획을 세울 인물로는 그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트레브스 씨 살해도 내용과 별 관련이 없어요. 비교적 비중있어 보이지만, 진범이 밝혀지는건 이 사건과는 무관했으니까요. "누구나 알 수 있는 신체적 특징이 있다"는 말로 범인이 누구인지 끄집어내는건 불가능했습니다. 다들 특징들이 있기도 한 데다가, 진범 네빌의 새끼 손가락 길이가 다르다는건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특징으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나쁜 정보에 가까왔어요. 
마지막에 맥휘터 앞에 오드리가 나타나 결혼하지고 하는건 황당했습니다. 딱 두 번 본 남자에게, 자기를 구해줬다는 이유로 바로 결혼을 한다는건 이상하잖아요. 그냥 멀리 떠난 맥휘터 앞에 나타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 정도가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여사님은 다 좋은데, 왜 이렇게 커플을 만들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점들로 보면, 단편으로 충분했을 이야기를 길게 늘려쓴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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