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집 살인사건 - 도진기 지음/황금가지 |
<<아래 리뷰에는 진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진은 암으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오빠 남성룡의 유산 상속에 대해 의뢰한 남광자를 만나러 우면동 붉은 집에 방문했다. 붉은 집 1층에는 서씨 가문, 2층에는 남씨 가문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진은 1순위 상속자인 남성룡의 딸 남진희가 모든걸 상속받기에 상속은 오빠와의 협의가 전부라며 자리를 뜨려 했지만, 과거 있었던 2건의 사건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바꾸었다. 과거 서씨 가문의 가장 서판곤이 남씨 가문의 모친 이분희와 재혼 후 아내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백솔 사체로 발견되었던 사건과 서판곤의 아들이자 현재 서씨 가문의 가장 서태황의 아내 박은순이 강도에게 살해당했던 사건이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며, 뒤이어 다른 사건이 일어날거라 여겼던 고진의 직감대로 6개월 뒤 남진희가 실족사라는 형태로 사망했다. 고진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미모의 맹인 남진희에게 매료되었던 탓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낼 것을 결심하고 친구이자 우면동관할서의 반장 이유현과 함께 사건 수사에 뛰어드는데....
과거 판사였던 도진기 씨의 데뷰작이자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첫 작품. 제목이 달라져서 몰랐는데, 10여년 전에 읽었던 <<어둠의 변호사>>와 같은 작품이더군요.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바뀐 제목에 낚여서 다시 완독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주요 트릭과 진상은 대충 잊어버렸던 터라 새롭게 읽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네요.
한국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채로운 트릭과 두뇌 싸움, 복선이 가득하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크게는 아래와 같이 서형일이 만든 트릭 세 가지, 그리고 남성룡의 계획 두 가지가 눈에 뜨입니다.
서형일의 트릭
- 박은순 살해 당시 알리바이 트릭
- 남진희 사건을 일으킨 원격 조종 트릭
- 남진희 사건 당시 알리바이 트릭
남성룡의 계획
- 서형일의 다아잉 메시지를 이용하여 서태황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던 계획
- 서형일을 움직여 남진희를 살해하도록 만든 계획
서형일의 첫 번째 알리바이 트릭은 유럽 여행 중 살인을 위해 이미 한국에 들어왔지만, 유럽에 남아있던 지인애게 당일 한국 날씨를 확인하여 엽서를 보내도록 만든 것입니다. 단순히 '서형일의 필적'이 근거라는건 증거로 삼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이지만, 한국 날씨 예보 종류는 몇 개 없기에 날씨에 대해서만 여러가지로 다르게 기입한 엽서를 준비해서 - 같은 내용으로 "맑음", "흐림", "비" 등으로 만들어 놓는 식으로 - 해당 날짜 예보에 맞는 엽서를 골라 보냈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문제는 인어공주 동상에 돼지 피를 뿌린 것도 서형일의 공범이었다는 겁니다. 만약 현장에서 체포되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최대한 몸조심하면서 숨어다녀도 모자랄 판인데 이런 조작까지 해 가면서 엽서를 만들어 보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의 원격 조종 트릭은 남진희 침실 구조를 이용하였습니다. 남진희가 수면제에 취한 틈에 침대 위치를 정 반대, 대각선 위치로 옮겨놓았던 겁니다. 원래 위치에서 문을 열면 거실로 나갈 수 있지만, 바뀐 위치에서 문을 열면 계단으로 추락하도록요. 수면제, 방의 구조 등 여러가지 단서와 상황을 잘 조합한 멋진 트릭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침대 위치를 옮기는 조작을 위해 사고 전날 부산으로 이동할 때 알리바이를 만든 트릭입니다. 상, 하행선 고속도로 휴게소를 오갔다는 다소 간단한 내용이지만 실행이 용이하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었어요.
남성룡의 첫 번째 계획은 서형일이 남긴 '아버지'라는 말이 녹음되었다는걸 알고 녹음기를 그대로 두었던 겁니다. 자신이 서형일의 친부라는건 아무도 모르니, 서형일의 양부 서태황이 죄를 뒤집어 쓸 거라 여겼기 때문이지요. 사건의 진상과 동기 를 밝히는 핵심 소재가 된다는 정메서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남성룡이 서형일을 조종하기 위해 유언장 정보를 흘려 살의를 부추켰다는건 뻔했지만, 언제나 설득력을 보장하는 동기인건 분명하고요.
하지만 확실히 처음 읽었을 때 보다는 별로였습니다. 일단 '잘 쓴' 작품은 아닙니다. 묘사가 튀는 부분이 많고, 고진과 이유현의 추리가 중구난방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고진이 중심을 잡고 사건을 끌고가는 맛이 부족해요.
인물 설정과 묘사도 별로입니다. 일본 변격물을 연상케하는 엽기 범죄가 명문가 - 서울대학교 교수와 2성 장군 집안이니... - 에서 이어진다던가, 맹인과 트랜스젠더가 혼재하는 복잡한 가족 설정들 모두가 비현실적이었거든요. 거의 마지막까지 서태황과 서두리를 악역으로 묘사하는건 '얘네들이 범인일거야! 그렇겠지?'라는 작가의 의도가 심하게 드러났고요. 무엇보다도 범죄자의 피는 유전된다는 이론을 작품 전체의 밑바탕에 깔고 있는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고루할 뿐더러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전혀 찬동할 수 없어요.
그리고 본격 추리물을 추구한 작풍 탓이겠지만, 작 중에서 주요 정보를 노골적으로 알려주어서 추리하기 쉬웠다는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뭔가 상세한 묘사가 있거나 하면 금새 이게 단서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남진희가 추락사한 침실 현장에 대한 극도로 상세한 묘사, 그리고 박은순 사건 당시 서형일의 알리바이에 관련된 묘사들이 대표적입니다. 남진희 사건은 묘사만 보아도 트릭은 잘 몰라도 수면제로 깊이 잠든 남진희와 방의 구조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서형일의 알리바이도 신문 기사를 통해 곧바로 가짜라는게 드러나고요. 날씨에 대해서 어떻게 조작했는지는 몰라도, 범인이 서형일이라는건 금방 알 수 있어요.
남진희 사건 때 서형일이 톨게이트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것도 알리바이 조작일거라는게 너무 뻔했습니다. 작품 발표 시기는 2000년대 이후인데, 이 때 고속도로 CCTV가 없었을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요. 무슨 차를 탔는지를 알면 고속도로를 이용한 서형일의 알리바이는 금방 깨트릴 수 있었을 겁니다. 이외에도 경찰 수사를 거의 없다시피 묘사한 것도 옥의 티입니다. 서형일은 유럽 여행에서의 알리바이, 고속도로 휴게소 알리바이 모두 협력자가 필요했습니다. 주변 인물과 연락 내용만 살폈어도 협력자를 알아내어 범행을 밝힐 수 있지 않았을까요? 최소한 그런 수사는 벌였어야 했는데 수사에 대한 묘사는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남성룡이 서형일을 살해하고 그 죄를 서태황에게 뒤집어 씌우려 한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녹음된건 우연에 불과합니다. 그 다이잉 메시지(?)만 없었어도, 남성룡 역시 용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살의가 넘쳤다 한들, 이렇게 무모하게 범행을 저지를 이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0여년 전 보다 감점하여 2점입니다. 데뷰작인 탓에 여러모로 욕심을 부린 티가 많이 납니다. 서형일의 억지스러운 알리바이 트릭에 관련된 이야기는 다 빼고, 남성룡이 남진희에게 살의를 품은 이유 - 아내가 떠나면서 자기 딸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 - 와 괜찮았던 남진희 원격 살해 트릭만 가지고 짧고 깔끔하게 다듬는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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