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판결은 - 모리 호노오 지음, 조마리아 옮김/말글빛냄 |
도쿄 등에서 판사로 재직한 뒤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인 저자가 여러가지 소설과 영화 속 사건에 대해 현실 법정에서의 판결이 어떨지를 설명하면서 형사 재판의 큰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책. 유명한 소설 - 영화 속 등장 사건에 대한 정리와 해당 사건에 대한 현실 법정에서의 판결 및 구형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작을 몰라도 내용에서 원작의 내용과 핵심 사건을 상세하게 소개해주기 때문에 읽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도진기 작가의 <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죽였을까>와 굉장히 유사한 컨셉이죠. 그러나 <성냥팔이 소녀는...>은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유치한 설정과 소설적인 전개 때문에 많이 감점했는데 반해 이 책은 실제 소설과 영화 속 사건이 실제로는 어떻게 판결이 내려질지를 굉장히 담백하게 아무런 치장없이 깔끔하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성격적으로는 금태섭 변호사의 <확신의 함정> 쪽에 더 가깝달까요? 물론 <확신의 함정>은 판결 중심이 아니라 개인적인 에세이 중심이라 역시 이 책 쪽이 더 낫다 싶긴 합니다.
여튼, 전부해서 24건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내용 몇가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격돌> - 우연히 거대 트럭에 쫓기게 된 주인공 데이비드가 격렬한 추격전 끝에 트럭을 벼랑 아래로 떨어트린다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초기작.
이 사건에서 데이비드는 명백한 살인의도, 즉 확정적 살의가 있기에 살인죄가 적용된다고 합니다. 생명이 위험했던, 방어에 적합한 행위라는 것을 입증하기 불가능하고 상식적으로는 서로 차에서 내려 이야기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판결은
1. 계획적 살인에 해당
2. 피해자 잘못도 존재
3. 고의성 있던 확정적 살인.
즉, 피해자에게 잘못이 인정되는 계획적 살인으로 고의성 있는 확정적 살인. 징역은 10년 정도 구형될 것이라고 합니다.
<태양은 가득히> - <리플리 1>의 영화버젼. 알랭 들롱의 꽃미모가 폭발하는 고전 명작이죠. 친구 톰을 죽이고 그의 행세를 하면서 재산과 심지어 애인까지 가로채는 리플리의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여기서 피해자의 물건을 횡령하고 처분하는 정도라면 생전에 자기에게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피해자 행세를 한 것은 빠져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혐의도 상해지사와 살인 중 살인에 가까워지고요. 고의적 상해라면 보통 그 사람 행세는 하지 않기 때문이죠. 피해자와 알고 지내던 사람이 피해자와 실제로 만나본 후 증언하지 않으면 존재 증명으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결국 톰 행세를 한 것도 법정에서는 밝혀지기 마련이고요.
단, 열받아서 죽인 후 금품을 취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면 강도 목적임을 증명하기는 어렵고 범행을 완전히 부인하면 살인 입증도 힘들다고 하니.. 일단 끝까지 우겨볼 일입니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 소설로도 유명한 작품이죠.
알리바이는 어떤 불리한 증거가 있더라도 입증만 되면 무죄가 되는 극적인 효과가 있는 마술봉같은 존재! 그러나 그 외의 경우는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되지 않는답니다.
<재와 다이아몬드> -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영화던가요? 영화는 본 적이 없는데 테러리스트의 테러에 대한 판결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 재판에서는 계획성에 금전목적이 더해진 경우에만 사형이 적용되기에 테러리스트나 암살자라도 한명밖에 죽이지 않았다면 사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쉽게 말해서 사람을 죽여도 한명이라면 사형을 선고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일본 기준이겠지만요.
그리고 쇼와 초기 1인 1살인을 신조로 정치권 주요 인물 암살을 실행한 혈맹단 사건에서 실행한 단원 두명 모두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특사로 석방되어 성공한 인생을 보낸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출판사 사장과 도의원이 되었다고 하네요)
<네 멋대로 해라> - 저는 고다르의 원작이 아니라 후대에 리메이크된 리차드 기어의 <breathless>를 봤습니다. 막사는 주인공이 경찰을 총으로 쏴 죽인 뒤 벌어지는 폭주를 그린 작품이죠.
그런데 경찰을 죽였다고 사형이 구형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네요! 단지 속설에 지나지 않는다는군요. 물론 무기징역과 같은 중형을 선고받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작품에서 미셸의 범죄는 즉흥적이기에 총기 사용을 고려하더라도 징역 17 ~18년 수준일 것이라고 결론내립니다.
<적과 흑>
줄리앙 소렐이 레날 부인을 쏜 죄는 실제로는 징역 10년 이하 정도, 이유는 피해자가 상처만 입었지 사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살인죄가 아니라 살인미수죄죠. 작품에서도 금새 회복되는 것으로 묘사되고요.
살인미수는 피해자에게 생긴 상처의 정도와 범행이 생명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되었는지 두가지 사항에 따라 결정되는데 전자는 결과, 후자는 행위의 위험성이라는 것이죠.
즉, 줄리앙 소렐의 범죄는 결과는 중간정도의 상해이고 행위의 위험성은 통상적이지 않은 흉기(총)로 평균적인 징역보다 약간 높은 징역 8~9년 정도라고 합니다. 치정사건은 재판에서 감형돠는 경향도 있고요. 감정이 격해져 냉정함을 잃은 상태라는 것이 참작된다는군요. 줄리앙 역시 자신의 출세길을 막은 전 연인에 대한 분노로 벌인 범죄니까요.
그러나 소설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인 베르테 사건은 반대로 베르테가 불행의 원인을 미슈부인에게 돌리며 협박성 편지를 보내고 총을 쏜 것으로 재판에서 불륜관계였음을 폭로하나 평소 미슈 부인은 정숙하고 평판이 좋아서 베르테를 동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져서 호의를 원수로 갚은 것이라 형은 더 무거워 졌다고 합니다. 호의를 원수로 갚는 범행은 범행의 집요성이 높다고 판단되기 때문이죠.
<제3의 사나이> - 로로가 범죄자로 변해버린 친구 하리를 사살한 것이 유죄인가?
현실에서 일반인의 범죄자 체포는 현행범 체포에 한해서라고 합니다. 법률적으로는 사립탐정이 수사를 하고 범인을 찾아내서 체포하는 것도 안되고 체포하면 역으로 체포죄라는 범죄가 된다는군요. 미행도 집요하게 하면 범죄이고요 (경범죄법 위반)
물론 경찰과 협력했을 경우는 좀 더 넓은 범위가 허용되기는 해서 통상 체포도 가능하기에 로로의 행위도 인정될 수 있고 첫발은 하리가 쏜 총에 맞은 경찰이 쏴!라고 해서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쓰러진 하리를 향해 쏜 두번째 발은 절대로 인정되지 못한다네요. 경찰이라고 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일. 로로는 살인죄로 기소되어야 마땅하답니다. 소설에서처럼 '이 일은 모르는 일입니다'로 끝날 일은 절대로 아니라는거죠.
<용의자 x의 헌신>
여기서의 범행은 전 남편에 대한 과잉방어 살인인데 형량은 평균 6~7년입니다. 그러나 가정폭력, 스토킹 등의 상대방의 행위가 있다면 형은 더욱 내려가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일이 드물지 않다네요.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전 남편 살인은 집행유예가 내려질 가능성이 높고요. 아울러 중학생 딸은 형사재판에 부쳐지지도 않고 가정재판소의 조치로 끝날 일이라 불기소처분으로 끝날 공산이 큰 상황.
그러나 수학교사 x가 뒤이어 저지른 범행은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고 독선적이고 편집증적인 행동으로 유기징역의 상한인 20년형이 예상되며, 모녀 역시 사체 유기죄가 성립되고 (공모공동징발) 엄마가 경찰서에 출두해봤자 뒤늦은 것이라 자수도 성립되지 않는, 그야말로 완벽한 삽질이라 할 수 있는 결과라 합니다. 용의자 X의 삽질! 옆집에 수학교사가 아니라 변호사가 살고 있었어야 했어!!!
대충 이 정도만 정리했지만 이외의 이야기들도 유익하고 재미난 것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판결의 기준이 일본 기준이라는 것 때문에 약간 감점하지만 재미와 더불어 형법과 판례에 대한 유익하고 기본적인 지식까지 알 수 있는, 그야말로 두마리의 토끼를 한번에 잡게 해 주는 보기드문 책이죠. 제가 원했던 스타일의 책으로 이런 류의 법률 상식책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한국 판례를 응용한 한국 버젼이 나와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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