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중국 호남 팔선채에 영국식 저택 이인관이 위치하고 있었다. 원래는 옥스퍼드의 인류학자 휴 로렐 교수의 연구 설비였는데, 현재는 외동딸 로렐 부인이 거주 중이었다. 진격해 온 묘족 군대의 지휘관 자로프는 이곳을 사령부로 정하고 머물렀다. 하지만 저택 안에서 남자들을 상대하던 집시 헤더가 완벽한 밀실에서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흑사관 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오구리 무시타로의 중편입니다. 데뷔작이라고 하네요.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동호회 하우미스터리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자리를 빌려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작품은 전형적인 밀실물입니다. 핵심 사건과는 별개로 약간 독특한 암호 트릭도 등장하고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고전 정통 본격물인 셈이지요. 피해자 헤더가 미친 듯 웃던 와중에 남자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 경비를 서던 정이 목격했던 파란 옷의 인물, 이상한 곳에 떨어진 비누거품, 방에서 풍기는 꽃향기, 헤더 몸에서 발견된 모기에게 물린 자국이라는 몇 개의 단서만을 가지고 자로프의 추리가 연달아 펼쳐지며 마무리 추리쇼로 이어지는 전개를 보면 "흑사관 살인사건"의 원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단서와 상황을 잘 결합한 추리들도 꽤 볼 만했는데, 특히 "소리"를 통해 색깔을 착각한 것이라는 이론이 가장 기발했습니다. 정말 가능했을까 싶긴 했지만, 과학적 근거를 들어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작가가 눈이 인식하는 색깔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다는건 확실한 것 같네요. 여하튼, 여러 아이디어를 연달아 쏟아내는 자로프의 상상력에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나 트릭이 많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이 작품은 짤막함에도 불구하고 단점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읽기 어렵고 지루하다는 점입니다. "흑사관 살인사건" 때도 그랬던 걸로 보면 번역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장황하고 드라마는 딱히 두드러지지 않으며, 읽는 사람 머리만 아프게 만드는건 작가의 스타일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추리적으로도 문제가 큽니다. 사건의 동기가 너무 황당하기 때문입니다. 우생학 이론에 바탕을 둔 동기인데, 특정 성씨를 멸족시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성씨 사람들을 볼 때마다 죽일 수도 없을텐데 말이죠.
트릭도 장황한 설명에 비하면 진상은 너무 허술합니다. 일종의 장치 트릭으로, 부인이 치던 오르간 소리가 엉망이었다는 단서와 연결시킨건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전부 수준 이하였던 탓입니다. 오르간 특정 키와 헤더의 방이 연결되어 웃음 가스와 독가스를 내보냈다는 설정인데, 거창하고 복잡할 뿐더러 애초에 이렇게까지 기이하게 사건을 벌일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자로프를 말로 꼬드겨 헤더를 죽이게 만드는 게 더 쉬웠을 것 같아요.
암호 트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한자를 사용한 트릭을 영국인이 만들 수 있었을까 같은 사소한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굳이 암호로 만들 정도의 비밀은 아니었거든요. 흔히 보는 “사실 너의 어머니는...” 류의 내용인데, 어차피 본인은 죽을테니 그냥 말로 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930년대, 묘족 군대, 중국 호남 팔선채의 이인관이라는 독특한 설정이 작품 속에 잘 녹아들었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밀실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는 사건 당시 바로 옆방에 있었던 간부 4인방을 대상으로 추리쇼가 이어지는 것이 전부라서, 일본 어딘가의 독특한 건축물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중국적인 배경이 묘사되는 여정 미스터리 스타일로 쓰여진 것도 아니고요. 왜 이렇게 설정을 잡았는지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는 볼 만하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리 퀴즈의 해답을 이어 붙인 것 같은 느낌이에요. 독특하다는 점과 역사적인 가치를 빼고는 점수를 줄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적절한 가격과 분량은 매력적이므로, 초창기 일본 추리소설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덧 : 항상 알라딘을 이용하다가 이번에는 yes24 e-book으로 증정되는 이벤트라 별 수 없이 yes24 e-book으로 읽었는데, e-book 뷰어 자체는 너무 별로네요. 화면이 자동으로 꺼지는 설정을 어디서 끄는지도 모르겠고, TTS로 읽어주는 기능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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