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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9

바다의 어둠, 달의 그림자 - 시노하라 치에 : 별점 2.5점

바다의 어둠, 달의 그림자 17 - 6점
시노하라 치에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사이좋은 쌍동이 자매 코바야카와 루카와 루미는 같은 학교 육상부 소속으로 육상부 선배 토우마 카츠유키를 서로 짝사랑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배는 루카를 선택했고, 육상부 합숙에서 의문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루미는 자신에게 생긴 초능력으로 루카를 죽이려 했다.
루미는 선배의 도움과 조사로 초능력은 바이러스 때문에 생겼으며, 바이러스에 감염된 날은 선배의 고백으로 루카에게는 인생 최고로 기쁜 날, 루미에게는 최악의 날이 되었기 때문에 루카는 선한 마음을 유지한 채 초능력을 얻었고 루미는 사악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걸 알아냈다.
루미는 자신의 혈액으로 다른 사람을 감염시켜 조종하는 능력으로 가족과 학교 친구들, 마을 사람들을 감염시켜 루카를 궁지로 몰아갔지만, 루카의 혈액은 루미에게 감염된 사람들에게 혈청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이를 이용해 루카는 지배와 정복욕이 커져 가는 루미에게 맞서 싸우는데...


꽤 오래되긴 했지만 상당히 유명한 만화죠. 애니메이션까지 만들어진 히트작이기도 하고요. 한번 읽어 보고 싶었었는데 그동안 기회가 닿지 않다가 우연찮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기본 설정만 놓고 보면 뻔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초능력물로 착한(?) 여주인공이 나오는 약간 순정만화적인 분위기는 "붉은 이빨"과 유사합니다. 초능력자들이 초인 록크의 "에스퍼"들 처럼 자연 발생(?)한게 아니고, 어떤 핏줄이거나 돌연변이도 아니라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건 바벨 2세의 한 장면을 생각나게 하고요. 그리고 자매(쌍둥이)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비극도 많이 등장했던 설정입니다. "데카맨 블레이드"처럼요.

하지만 단지 뻔하고 단순한 초능력물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인기를 끌만한 요소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선과 악의 숙명적인 싸움이 "한 남자" 때문이라는, 굉장히 작으면서도 개인적인 이유라는게 독특하고 좋았습니다. 루카가 욕망을 이루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조종하고 잔인하게 살해하는 과정, 여기서 욕망이 서서히 발전해 나가는 전개도 굉장히 현실적이라 마음에 드네요. 
그리고 캐릭터의 성격이 확실해서 이야기의 중심이 잘 서있다는 장점도 큽니다. 주인공들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갈팡질팡 심리를 보이지않고 선역은 끝까지 확고한 선역, 악역 역시 끝까지 확실한 악역으로 남음으로 단순하지만 확실한 스토리 전개를 보여주거든요. 
두 쌍동이 자매의 순정만화같은 디테일한 심리묘사도 좋아서 몰입하여 읽도록 해 주고요.

그러나 의문의 사나이 존슨의 등장 이후에는 스케일도 엄청 커지고, 새로운 초능력자들이 나오면서 뻔한 초능력물의 궤도를 따라가버려 아쉽습니다. 무협지스러운 재미는 있지만, 보다 현실적이고 소박한(?) 한 마을과 가족을 서서히 침식해 가는 악의 세력 확장 부분이 색다른 매력을 전해주었는데 그런 맛은 사라지고 마니까요.

그래도 평범한 초능력 액션물을 넘어서는 재미는 전해 줍니다. "바벨2세"의 무한루핑 대결이나 "붉은 이빨"의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에 비추어본다면, 이 두 전설(?)같은 작품들보다 나은 점도 분명 있고요. 선과 악의 대결이 펼쳐지는 초능력물에 대한 모범답안 중 하나랄까요?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은 아니고 지금 읽기에는 낡은 느낌도 들지만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가 워낙 마이너하고 컬트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0/11/01

가다라의 돼지 - 나카지마 라모 / 한희선 : 별점 3점

가다라의 돼지 - 6점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북스피어

아프리카 주술 전문가 오우베 교수는 과거 현장 탐사에서 딸 시오리를 사고로 잃은 뒤, 아내 이쓰미와도 마음을 닫은 채 술에 의존하며 방송 출연으로 시간을 보내는 '탤런트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우연히 한 방송의 아프리카 기획에 참여하게 되면서 오랜만에 케냐를 방문하고, 그곳의 주술사 마을에서 죽은 줄 알았던 딸 시오리를 발견했다. 시오리를 구해냈지만, 곧바로 그녀를 자신의 '키시투'(일종의 주술 도구)로 여기는 최강의 주술사 바키리의 복수에 직면하게 되는데...

7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과 그에 걸맞은 무게감으로, 읽기 전부터 독자를 압도하는 나카지마 라모의 대장편입니다. 일본 추리작가협회 장편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네요.

작품은 크게 다음의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부 : 오우베 교수가 사이비 종교에 빠진 아내 이쓰미를 구하기 위해 마술사 미스터 미라클, 제자 도만과 함께 종교의 '기적'을 폭로하는 이야기

2부 : 오우베 교수 일가가 TV 프로그램을 위해 아프리카 케냐를 방문한 후, 케냐 최고의 주술사 바키리로부터 실종된 줄 알았던 딸 시오리를 구해내는 이야기.

3부 : 일본까지 찾아온 바키리와 오우베 일가의 최종 결전.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엄밀히 말해 이 작품은 추리 소설보다는,   초능력과 아프리카 주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모험 소설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재미만 놓고 본다면 최고입니다. 1부에서 등장하는 '초능력', 특히 사이비 종교 교주가 공중 부양한다는 '기적'의 실체를 폭로하는 과정은 "신비의 사기꾼들"을 연상시키는 트릭물 같은 재미를 제공합니다. 또한, 2부에서는 케냐의 상세한 묘사와 긴박감 넘치는 탈출 장면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들며, 3부에서는 본격적인 주술 대결이 펼쳐지면서 트릭과 긴장감이 조화를 이루어 끝까지 몰입하게 해 주고요. 덕분에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손에서 놓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작가의 전작인 "인체모형의 밤"과는 전혀 다른, 블랙 코미디 같은 분위기도 볼거리였고요.
엄청나게 디테일한 자료 조사를 통해 구축된 초능력과 주술에 대한 설명도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모두를 압도하고 조종하는 바키리의 주술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부족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특히 후반부 오우베의 각성 이후 펼쳐지는 '초능력 대결'은 너무 과장이 심했어요. 오컬트와 초능력, 주술이 결국 '존재한다'는 식의 결말은, 앞서 철저하게 구축했던 과학과 상식에 기반한 초능력과 주술이라는 테마와도 동떨어진 느낌입니다. 또한, 여러 범행에 대한 설득력도 부족했고요. 일본만의 독특한 오컬트 문화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영향이 크겠지만, 이렇다 보니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는지조차 모호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목을 가져온 '마태복음'의 가다라 돼지 일화처럼 실제로 악령과 주술이 존재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미스터 미라클의 말처럼 모두 트릭에 불과한 것인지...

또한, 마지막 방송국에서의 대결은 "서브리미널 광고 효과"와 집단 최면을 너무 과장되게 묘사하면서 설득력을 잃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봤던 초능력 소년 기요카와와 마술사 미스터 미라클이 너무 일찍 퇴장한 것도 아쉬웠던 부분이고요.

결론적으로, 1부는 작품의 테마와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도입부로서 아주 괜찮은 중편이었고, 2부는 아프리카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주술'이라는 소재를 흥미롭게 풀어낸 모험소설로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3부는 속도 조절 없이 너무 폭주해버린 느낌이 강합니다. 전형적인 B급 감성이 넘치는 데다가, 3부의 결말만 놓고 보면 이 방대한 작품이 '새로운 영능력 히어로 탄생'의 프롤로그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니까요. 막 나가는 재미는 있었지만, 1부와 2부처럼 보다 진지하고 과학적인 접근을 유지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재미는 있었지만, 모호한 방향성과 후반부의 급전개 때문에 선뜻 추천하기는 애매한 작품입니다. 1부는 별점 3점, 2부는 3.5점, 3부는 2점, 전체적으로는 대략 별점 3점입니다.

2010/06/30

구적초 - 미야베 미유키 / 김은모 : 별점 2.5점

구적초 - 6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북스피어

초능력자들이 등장하는 3편의 작품이 실려있는, 미야베 미유키의 중단편집입니다.

보통 초능력자 SF는 능력자들이 여러가지 무거운 사명을 짊어지고 의문의 조직과 싸워나가는 한편, 자신의 운명과 힘에 대한 두려움같은걸 느끼고 고뇌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에 반해, 이 작품은 너무나 평범한 일상계에 가깝습니다. 힘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힘에 대한 대단한 배경설명이 있지도 않고(자연발생적인 것), 힘의 소유자들도 평범한 일반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일상계 초능력 SF물'이라는 장르가 있다면 그 안에서 대표를 다툴 것 같은 느낌이에요.

이렇게 쓰면 시시해 보일 수도 있는데, 미야베 미유키의 글 쓰는 재주 하나만큼은 역시나 반짝반짝 눈이 부실 정도! 읽는 재미도 탁월하고 특유의 심리묘사는 여전히 발군이라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추리적으로 조금 더 볼만한 부분이 많았더라면 하는 아쉬움, 그리고 두번째 작품 "번제"가 좀 이질적이라 감점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읽다가 들은 생각인데, 이 책에서처럼 약간의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큰 이득은 없다는 것이 맞는 이야기같아요. 뭔가 예지는 할 수 있지만 그 사건이 일어날때 까지는 뭘 예지했는지 알 수 없는 예지능력, 사람과 접촉해야만 하고 접촉 순간에 얻어지는 단편적인 의미를 조합해야 하는 투시능력 모두 한계도 명확할 뿐더러 이러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별로 쓸데가 없거든요. 혼인빙자 사기범한테는 무척이나 유용한 능력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러질 때까지"
어렸을적 사고로 부모를 잃은 도모코가 유일한 남은 혈육인 할머니의 죽음 이후 집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

비디오 테이프에 찍힌 어린 도모코의 행동과 말은 예지능력이었다는 전개는 흥미진진한데, 실의에 빠진 도모코의 자살 시도라는 뻔한 결말은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그냥저냥 무난한 작품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번제"
어린 동생을 말도 안돼는 사고로 잃은 가즈키에게 아오키 준코라는 회사 동료가 접근하여 범인을 죽여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녀는 염화능력자(파이로키네시스) 였고, 자신의 능력을 정당하게 사용하기를 원해왔었다.

이 작품집 속에서 가장 처지는 작품입니다. 아오키 준코가 가즈키에게 접근한 이유부터가 설득력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면 그냥 신문이나 TV 방송에서 죽어 마땅한 인간들을 골라내면 됩니다. 
그리고 아오키 준코는 전형적인 강력한 초능력자이기 때문에 내용이나 전개가 기존의 초능력 SF물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이 작품집의 가장 큰 매력은 '일상계스러운 맛'인데 너무 이질적이며, 뻔했기 때문입니다.
가즈키 동생의 뺑소니 사고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조금 여성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본 여운을 남기는 묘사는 인상적이지만, 앞서의 단점이 더 크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구적초"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천리안 다카코는 능력을 활용하여 형사가 되지만 서서히 자신의 능력을 잃어간다.

'초능력 일상계 추리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카코의 능력을 통해 단서가 입수된다는 점에서는 '초능력', 공원에 출몰하는 변태 사건과 고사카 미치루 유괴 사건은 '추리물'로서도 출중하고 '일상계'스러운 맛도 잘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다카코의 능력이 감퇴해가는 과정과 더불어 이야기가 전개되는 부분에서 명확한 이유라도 좀 밝혀주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긴박감이 있긴 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조금 답답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8/03/24

마음의 지배자 - 김현중 : 별점 3점

마음의 지배자 - 6점
김현중 지음/온우주

언젠가 인터넷에서 원사운드가 그린 "묘생만경" 만화를 읽고 관심이 가던 차에, 알라딘 헌책방에서 저렴하게 파는걸 확인하고 구입한 작품입니다. 헌 책을 충동 구매하지 말자고 결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가격이 너무 착했단 말이지요. 

다행히 결과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꽤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특징이라면 우선 독특하고 기발한 설정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입니다. 듀나의 작품들처럼요. 그러나 듀나 작품들보다는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설정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작가의 생각을 충실히 이야기에 담아낸 덕분입니다. 남과 다른, 뛰어난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는 특징도 있는데, 작가의 영원한 화두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말도 확실하고, 작가의 고민과 다양한 시도 및 이야기 별 다양한 결말 -그냥 한 계단 위에서 바라만 본다는 "묘생만경", 남들의 두려움을 통해 신으로 거듭난다는 "마음의 지배자", 블랙 코미디인 "그의 지구 정복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남과 다르다고 가장하고 있을 뿐 다 똑같다는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 능력을 발휘 못하고 찌질하게 살다가 한걸음 더 내딛는다는 "물구나무 서기" 등 - 을 선보이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기존에 널리 알려진 아이디어의 변주가 많은 등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단순한 설정 바꿔치기는 아닙니다. 나름의 아이디어가 바탕이 되어 있으며 재미도 수준급인 좋은 단편집입니다. 한국 SF 와 장르 문학이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장르 문학 팬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원사운드가 그린 리뷰 만화를 읽고 책을 산게 이번이 두 번째인데(첫 번째는 이거) 제게는 100% 확률입니다. 원사운드는 리뷰 만화만 그려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요? 하여튼, 제가 언젠가 책을 낸다면 제 책 리뷰를 좀 부탁드리고 싶네요.

단편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묘생만경"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원사운드 만화의 원작입니다. 만화는 3~4페이지 분량에 불과한데, 원작을 굉장히 잘 압축한 결과물이라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대사도 그대로인데 만화에 적절한 것만 잘 가져다 썼고, 꼭 필요한 설정 중심으로 이야기를 짤막하게 잘 풀어내었더라고요.

그런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원작에는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많다는 말도 됩니다. 무엇보다도 화자인 고양이 '나'가 영물로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갖추었다는 설정은 불필요했어요. "펠리데"처럼 뛰어난 지능 자체가 설정과 이야기의 핵심으로 활용되면 모를까, 이야기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군더더기였을 뿐입니다.

그래도 세 가족과 닭 스무 마리, 개 세 마리라는 전원 주택을 무대로, 닭들 사이의 치정극을 통해 무시무시한 사건이 휘몰아친다는 범죄 스릴러라는 독특함은 누가 뭐래도 최고였습니다. 이런 작품을 또 볼 수나 있을까요?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부럽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마음의 지배자" 

표제작으로 초능력자가 어떻게 주위의 두려움을 불러오고, 어떻게 박해 받으며, 또 어떻게 신이 되는지를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보통 이런 류의 이야기는 초능력자들이 능력을 각성한 뒤 무언가 사명을 짊어진다는 이야기, 혹은 자신이 세계 정복 같은 야심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를 고등학교를 무대로 하여 일상계처럼 담담하게 풀어내었다는 나름의 차별화 요소가 돋보입니다. 초능력자인 민국이 아니라 주변인물들 중심으로 묘사와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도 신선했고요.

두려움과 탄압만 있을 뿐 추종자는 없다는 점이 실제 현실과 괴리감을 느끼게 하며, 초능력자가 악인들과 손을 잡는 이유도 불분명한 등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아요. 그래도 신과 기적 등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그의 지구 정복은 어떻게 시작됐나" 

김사장의 맘모스 마트와 우주행성 K9242의 정복 유닛이 서로의 이해가 일치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블랙 코미디 SF입니다.

사람이 많이 오가기를 원하는 김사장, 그리고 기억 유닛을 찾기 위해 이동하는 사람들에게 부분체를 부착하기를 원하는 정복 유닛이 같은 목적을 위해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김사장의 계획은 충분히 그럴듯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들이며, 정복 유닛의 씨앗 옮기기 계획 역시 전형적인 식물의 행태를 잘 응용하고 있어서 설득력도 아주 높아요.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입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지배인의 머릿 속에 기억 유닛이 들어가 있었다는 결말입니다. 앞 부분에서 약간의 설명이라도 있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이대로라면 급작스러운 감이 없잖아 있거든요. 그래도 재미 만큼은 보장할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 

아인 시술이라는, 머리가 좋아진다는 수술이 유행한 뒤의 세계를 그린 SF 단편입니다. 아인 시술은 효과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비용, 그리고 흉터가 남기 때문에 부자들이 주로 시술 받고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이룬다는 설정이 핵심이고요. 

사실 이 시술을 통해 선민 의식을 갖는다는 설정은 특별한 건 없습니다. 부자만 기계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와 다를 건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 시술이 효과가 없을 수 있다!는 반전이 기가 막힙니다. 시술이 사기인지 아닌지 결국 밝혀지지 않는 점도 좋으며, 시술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한 일종의 트릭도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재미를 더하네요. 수진을 통해 상류층도 결국 허상일 뿐이라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다만, 앞서 언급했듯 뻔한 설정 탓에 이야기의 전체 분위기와 느낌에서 여러 다른 작품들이 떠오르며(개인적으로는 "가타카" 가 많이 연상 되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건 아쉽습니다.

그래도 매력적인 이야기 임에는 분명하기에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우리나라에 장르 문학 원작을 주로 다루는, 미국으로 따지면 "환상특급" 같은 TV 쇼가 있다면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구나무서기" 

일종의 투시 능력을 갖춘 초능력자 김서권의 일대기입니다. 종도라는 섬에서 물구나무 서기를 혼자서만 못했던 김서권이 어느새 모든 것이 거꾸로 투영되는 투시력을 갖추고, 이를 이용하여 여러가지 일을 경험하다가 최후를 맞는다는 내용이지요.

김서권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종도에서의 이야기와 현재의 대형 운석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가 교차 편집되다가 '물구나무 서기'로 현재의 초능력이 시작됨을 알려주고 끝나는 구성입니다. A와 B가 동시에 전개되는데, A는 B의 발단이라는 결말과 함께 B도 끝나는 식이지요.

우선 '물구나무 서기'라는 것을 키워드로 한 디테일이 볼거리입니다. 한번도 물구나무 서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런걸 이런 이야기로 만들어 낸 작가의 상상력이 참 대단하구나 싶었어요. 물구나무 서기와 초능력이 연결되다니! 그 외에도 김서권이 꿈에서 보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의 정체가 운석이라던가, 한발두발 내딛어 물구나무 서기를 함으로 투시를 하고, 물구나무 서기와 같은 원리라 투시는 뒤집혀서 보인다는 등의 디테일들도 볼 만 합니다.

하지만 한 편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는 좀 애매했습니다. 죽음 직전에 신을 본다는 신학적 담론을 SF의 형태를 빌어 써내려간 작품인가? 싶은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부수적인 이야기가 많아 혼란스럽거든요. 어린 시절 종도에서의 할아버지 환갑 잔치에 대한 장황한 묘사, 현재의 김서권이 무당과 손 잡았다던가 결혼에 실패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그러합니다. 재미는 있는데 주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더라고요.

책 뒤의 편집자 글이나 인터넷 상에서의 리뷰를 보면 이 작품을 최고로 치는 분위기인데 개인적으로는 그냥 그랬어요. 너무 멋을 부리려고 하지 말고 핵심에 집중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피노키오" 

로봇들을 활용한 전쟁이 끝난 후, 이야기를 꾸며내는 재주가 있는 로봇이 발견되었다. 그 로봇은 자신의 사명을 잃은 채 극장에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데...

역시나 재미있는 설정을 갖춘 작품이지만,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작위적인 요소가 강하고 설정도 별로 디테일하지 않으며 결말도 예상에 가까운 범작입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우화에 가깝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거짓말만 하는 로봇 둘이 일종의 논리 게임을 펼치는 식으로 전개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서로 진짜 사명이 무엇인지, 폭발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거짓말만 하면서 내용을 파헤치는 두뇌 게임 스타일로 말이지요. 이러려면 지금보다 거짓말 조건이 더 상세하게 설정되었어야 했지만요.

하여튼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평범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부안 왕손이" 

거대 포크레인이 약간의 고장으로 무의미한 작업만 반복하는 현장으로 팔려간 후,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는 소녀의 하트 수신호를 받은 후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거대한 하트를 그린다는 일상계 판타지입니다.

실제로 전라도 사투리 가득한 왕손이의 의인화 묘사가 돋보이며, 아파트 단지 소녀의 하트 수 신호의 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도 흥미롭습니다. 무엇보다도 롯데 월드 공사 시에 작가가 목격했던, 단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진행된 무의미한 단순 반복 작업을 가지고 이러한 이야기를 그려낸 작가의 상상력에는 박수를 칠 수 밖에 없네요.

그러나 하트 수 신호의 진상은 조금 생뚱맞은 데가 있고, 결말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해피 엔딩이라는 건 별로였습니다. 매력적인 도입부, 설정, 전개에도 불구하고 결말 때문에 맥이 풀리는 느낌까지 들거든요. 분위기 상으로는 판타지 버젼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처럼 사회 고발적인 내용으로 흘러가는데 훨씬 좋았을 거에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뱀과 소녀" 

뱀 신을 모시는 섬에서 뱀을 죽인 아이들에게 닥치는 일을 그린 단편입니다. 초자연적 존재(?)에 의한 일종의 호러물로 섬을 벗어날 수도 없고, 재앙이 다가오는 막막한 상황은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어떤 마을이 있고, 이방인이 그 마을의 금기를 어겨 끔찍하게 살해 당한다는 흔해빠진 이야기를 이방인이 아니라 그 마을 주민, 그것도 반항심 많은 꼬마 아이가 금기를 어긴다는 약간의 변주만 준 셈이라 애초에 새롭거나 신선한 느낌을 받기는 힘듭니다.
또 민박집 손님은 누구고, 뱀을 어떻게, 왜 모시는 지와 뱀의 영향력도 설명되지 않아서 공포심을 자아내기는 무리입니다. 뭐가 어떻게 될지 대충은 알아야 무서운데, 지금은 그냥 수희 혼자 어둠 속에 남은게 전부니까요. 이래서야 한 편의 이야기로 성립하기도 힘들죠.

지금의 결과물은 주인공 소녀 수희가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뭐 그런 거 있잖아요, 뱀 신상 뒤에 피로 글자를 쓴다던가), 그것이 이후 섬을 찾아와 금기를 어기고 쫓기는 신세가 된 이방인에게 발견되는 장면에서 효과적으로 쓰임직한, 긴 이야기의 도입부 정도에 불과해 보입니다. 이 단편집을 위해 새롭게 쓴 작품이라는데 이래서야 차라리 수록하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거에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15/03/12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카렐 차페크 / 정찬형 : 별점 3.5점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8점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모비딕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를 처음 읽고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왠걸, 전작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수록 작품 하나하나의 재미와 소설적인 완성도 모두 빼어난 수준이었어요. 또한 추리적 속성의 작품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진실과 정의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왜 미스터리가 벌어지는가? 그 사이에는 어떤 차이들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 덕분인 듯싶네요.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메이즈리크가 명탐정이라는 것도 잘 드러나 있고요.

아울러 책 뒤 소갯글을 보니, 차페크는 실험적인 소설을 쓰는 데 가장 완벽한 형식이 단편소설이라고 깨달았다고 하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단편도 그냥 단편이 아니라 호시 신이치와 같은 "쇼트쇼트" 스타일의 초단편들이 많은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장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수록 작품의 편차가 있는 편이고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이야기들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세대를 뛰어넘는 아우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단편집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 몇 개를 소개해봅니다. 쇼트쇼트 스타일이라 수록 작품이 워낙 많아 전부 소개하기는 어렵네요. 아울러,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발자국"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의 발자국이 딱 한 지점에서 사라졌다는 수수께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내용은 이 수수께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수수께끼와 현실 사이의 문제를 냉정하게 지적하는 바르토세크 반장의 독백 - "우리가 범죄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미스터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당을 쫓는 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입니다." - 이 핵심입니다.

때문에 좋은 미스터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발상은 괜찮았습니다. 하기사, 경찰에게 상상력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떤 사건"

메이즈리크 형사가 선배에게, 최근 금고털이를 체포했던건 사실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고 털어놓는 이야기입니다. 우연이 겹쳐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이 코믹하게 전개되는데, 메이즈리크는 본인을 너무 폄하하는 것 같아요. 범인 신발에 묻은 "가루"를 인지한 것은(그것도 비 오는 상황이라는 걸 특정해서!) 분명 뛰어난 수사 능력이죠.

"푸른 국화"

희귀한 푸른 국화를 찾는 정원사의 활약을 그린 작품입니다. 마을 바보가 가져온 푸른 국화 뿌리에 묻은 흙의 종류와 잎에 묻은 이물질을 통해 "어딘가의 정원에 있을 것"이라 추리하는 장면에서부터, 마을을 전부 뒤졌지만 찾지 못했던 이유는 보행 금지 표지가 있었던 철로 건너편 경비원 관사에 피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말까지 완벽한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바보는 글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통행 금지 표지판을 무시하고 건넜다"는 핵심 트릭도 좋았고요. 그 외에도 경비원과의 언쟁, 정원사의 일탈 등 재미있는 부분이 많은 작품입니다.

"점쟁이"

점을 쳐서 생계를 유지하는 마이어스 부인을 의심한 서장이 자신의 아내를 손님으로 위장시켜 수사에 나선다는 내용입니다. 마이어스 부인을 사기로 옭아매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녀의 점이 실제로 들어맞는다는 기묘한 블랙코미디 같은 반전이 돋보였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다소 예상 가능한 전개지만, 시대를 앞선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통력의 소유자"

필적만 보고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초능력자를 시험하기 위해 검사가 자신이 맡은 사건의 냉혹한 살인범이 쓴 편지를 보여주는데, 능력자의 평가 결과가 너무나 정확해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편지가 자신이 쓴 메모로 바뀌어 있었음을 깨닫고, 그 초능력자의 분석은 그냥 일반화된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여기까지는 흔한 초능력 격파물인데, 이후 전개가 흥미롭습니다. 검사는 그 초능력자가 묘사한 말들을 활용하여 실제 재판에서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거든요. 이 정도면 호시 신이치 급의 쇼트쇼트 거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필적 미스터리"

아내의 편지를 전문가에게 필적 감정받은 기자의 이야기입니다. 자칭 전문가의 현란한 말에 휘둘려 이십여 년 동안 행복하게 살아온 아내를 의심하고 매도하게 되는데, 백여 년 전 이야기임에도 인터넷상 자칭 전문가나 SNS 루머 등으로 판단을 내리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이 인상 깊었던 소품입니다.

"도둑맞은 서류"

마카로니 통 안에 숨겨 놓은 비밀 서류 도난 사건을 다룹니다. 지역 경찰관이 일종의 DB 기반 추론으로 범인을 검거하는 독특한 수사 방식이 돋보이며, 동시에 속물적이고 유쾌한 블랙코미디 요소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보티츠키 가문의 몰락"

메이즈리크가 역사학자의 의뢰로 15세기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역사 추리물입니다. 두 남자의 죽음, 사라진 딸, 국왕으로부터의 처벌 등을 단서로 펼치는 추리는 꽤나 흥미롭습니다. 실화가 아니라 허구의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진리는 시간의 딸"보다는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한 단편이 연상되더군요.

"영수증"

메이즈리크 반장이 등장하는 정통 추리물입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가 발견되고, 단서는 전철 티켓과 영수증 뿐. 하지만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영수증을 통해 피해자가 중국 도자기 가게에서 산 물건을 추리해내고, 그 이유까지 밝혀냅니다. 도자기를 산 이유는 그것을 깨뜨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추리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명작입니다.

다만 전개 면에서는 약간 아쉬움이 있습니다. 청자인 두 연인 민카와 페파, 그리고 화자인 소우체크의 이야기는 서사의 흐름에 꼭 필요해 보이진 않았거든요. 여운을 남기기는 했지만, 감정적으로 깊게 와닿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배우의 실종"

천재 배우 얀 벤다가 실종된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벤다의 친구인 의사 골드베르크가 탐정 역할을 하며 사건을 해결하는데, 벤다가 '메소드 배우', 즉 배역에 몰입해 자신을 바꿔가는 배우였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벤다가 부랑자 역할을 맡으면서 자신을 완전히 부랑자처럼 바꾸어 버린 탓에, 결국 시체가 부랑자의 변사체로 오인되었다는 것이지요. 지금 봐도 설득력 있는 설정과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우체국에서 생긴 사건"

단돈 200코루나가 사라진 사건으로 감사관에게 적발당하고 자살한 불쌍한 우체국 직원 헬렌카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화자인 경감 '나'는 다음과 같은 정보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밝혀냅니다.

1. 헬렌카의 시선을 잠시만 돌리면 200코루나 정도는 쉽게 훔칠 수 있었다는 점
2. 시선을 돌리려면 전보나 소포를 보내야 했다는 점
3. 사건 당시 익명의 편지가 파르두비체에서 대거 발송되었다는 점
4. 파르두비체에 사는 우체국 아가씨와 교제 중인 감독관이 소포를 보냈고, 주소 오류로 반송되었다는 점

이 정보들을 바탕으로, 감독관이 애인을 자신의 근무지 근처로 전근시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고, 애인이 익명으로 그 사실을 고발해 감사가 이루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일상계 추리물로도 수준이 높고,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을 꿈꾸며 벌인 일탈이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씁쓸한 결말도 매우 인상 깊습니다. 지금 읽어도 전혀 낡지 않은 걸작으로, 별 5점은 충분한 작품입니다.

2025/12/13

피안장의 유령 - 아야사카 미쓰키 / 김은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야마모토 히나타는 강력한 염동력으로 사고를 일으킨 뒤 가족과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소꿉친구 사라와 함께 기지마 그룹 후계자 렌의 의뢰를 받고 외딴 저택 '피안장'으로 향했다. 피안장에 일어나는 괴현상 조사에 협조해 달라는 의뢰였다. 조사에는 예지 능력자 시게키, 사이코메트러 미즈키, 정신감응 능력자 도시코, 자동서기 능력자 아키라, 일렉트로키네시스 나기도 함께 참여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저택의 괴현상은 실재했고 첫날 밤 시게키가 소파 속 비밀 공간에서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일행은 저택의 의지에 의해 감금되어 버리고 마는데...

제미나이로 그려본 피안장

초능력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물임과 동시에 하우스 호러물과 정통 본격 미스터리도 결합되어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초능력과 저주받은 피안장 내 특수한 조건에 의해 일어난 괴사건을 정통 본격물처럼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진상을 드러내거든요.

특히 나름대로 정통 본격물이라는 게 밝혀지는 마지막 히나타의 추리쇼가 빼어납니다. 논리적으로도 확실하며, 단서들과 추리에 대한 근거 모두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히나타의 추리에 따르면, 첫 번째 사건인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시게키 사건은 사고였습니다. 시게키가 사라에게 장난치기 위해 소파 빈 공간에 들어갔는데, 근처에 있던 나기가 천둥번개와 정전으로 놀라서 일렉트로키네시스 능력을 발동했던 겁니다. 이 충격에 시게키가 휩쓸려 체내 혈액이 전기분해되어 피는 수소와 산소로 분해되어 사라지고, 발생한 수증기 탓에 신체 표면이 파열되어 죽었습니다. 나기의 고의가 아닌 일종의 사고였기 때문에 도시코의 정신감응 능력으로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고요.

두 번째 사건인 도시코 추락 사건은 밤이 되면 옥상 테라스에는 한 명만 올라갈 수 있어서, 사람을 심리적으로 쫓기게 만드는 저택의 능력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나타는 과거 모녀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죽었던 기사를 통해 '의식을 잃은 사람'은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추리합니다. 즉, 누군가가 도시코를 때려 기절시킨 후 테라스로 끌어올려 떨어뜨려 죽였던 겁니다.
이는 미즈키의 사이코메트리로 도시코가 뒷통수를 가격당했다는 게 밝혀져 증명되고, 범인은 렌의 독살 미수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독이 든 와인잔은 아키라 앞에 놓여 있었는데, 아키라는 포도 알레르기라고 전날 아침에 밝혔습니다. 포도 알레르기인 사람을 와인으로 독살하는건 말이 안되니 범인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지요. 그때 자리에 없던건 렌, 가즈히사, 유토였고요. 이 중, 독을 마시고 죽을 뻔한 렌은 제외됩니다. 유토는 앞서 테라스 살인에 사용된 머릿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사를 볼 기회가 없었고요. 즉, 소거법으로 범인은 가즈히사입니다. 렌이 독으로 쓰러졌을 때 신속하게 위세척 등을 진행한 행동이 그가 독을 넣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주요 사건에 대한 본격물스러운 추리에 더해서 소소한 추리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재미를 더합니다. 렌의 이모부 부부가 자살했던 사건에 대한 추리 — 이모부가 렌에게 성적인 학대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이모가 이모부를 죽이고 자살했다 — 라든가, 사라의 염동력 힘의 원천이 히나타였다는 추리 등이 그러합니다.

정통 오컬트 호러 판타지 스타일의 마지막 박진감 넘치는 피안장 탈출 묘사는 꽤 볼만 했고, 히나타가 조사에 아르바이트로 참여한 연구 조수 유토와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 이른다는 완벽한 결말과 에필로그도 마음에 듭니다. 최근 작품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수미쌍관식 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 꽃잎 묘사도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우선 렌이 초능력자들을 저택에 모은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저택을 깨우기 위해 초능력자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전무한 탓입니다.
또 조사 참가자들이 머문 사흘 동안의 사건은 확실히 진상이 밝혀지지만, 과거 피안장에서 일어났던 괴사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택 안에서 행방불명된 남자가 일주일 후 온몸의 피를 잃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단지 저택의 저주라고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저택이 이런 능력이 있다면, 렌 일행을 모두 직접적으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고요..
첫날 밤 위기에 처했던 도시코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설명이 없으며, 가즈히사의 동기가 결국 ‘저택에 사로잡혔다’는 게 전부라는 것 등도 여러모로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뭔가 있어보였던, 아키라가 자동서기 능력으로 그렸던 '스페이드 모양 문고리가 달린 문' 설명도 흐지부지 넘어가고요.

전개 부분의 완성도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미즈키, 도시코, 아키라 등으로 시점을 전환하는 부분이 특히 별로입니다. 저택 괴현상 때문에 놀라는 심리 묘사 외에는 시점을 전환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키라만 별도 설정을 풀어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키라 시점 부분의 전개는 워낙 비호감으로 그려지는 탓에 짜증만 났습니다. 
그리고 예지 능력자 시게키의 죽음 이후에도 참가자들이 무방비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입니다. 도시코의 능력으로 시게키 사건의 범인이 조사 참가자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면, 협력해서 움직이는 게 당연했을 겁니다. 왜 저주받은 저택에서 밤을 홀로 보내다가 위기에 처하는 걸까요? 이 부분의 설득력이 낮아서 감정 이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항상 그래왔지만, 거의 모든 묘사가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점도 아쉽습니다. 지나치게 쿨한 염동력 미소녀 사라, 입이 험하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색기 넘치는 누님 미즈키 인물 묘사 및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피안장에 대한 묘사는 물론 저택 내에서 반복되는 괴현상 역시 식상한 헌티드 하우스 호러물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실망스럽습니다.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하우스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의 혼합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19/10/20

기억 파단자 - 고바야시 야스미 / 주자덕 : 별점 1.5점

기억 파단자 - 4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주자덕 옮김/아프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낯선 방에서 깨어난 니키치는 머리맡에 놓여 있는 한 권의 노트를 발견했다. 그리고 노트를 통해 자신이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타인의 기억을 개조하는 초능력을 가진 살인마와 대면하게 되는데……. 의지할 수 있는 건 노트와 잃어버린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해 발달한 뛰어난 추리력과 판단력을 가진 두뇌뿐이다. 니키치는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출판사 책 소개 인용)

"앨리스 죽이기" 등으로 접했었던 공학 박사 학위를 지닌 공대생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의 장편 스릴러입니다. '기억 파탄'이 아니라 '기억 파단 (記憶破断)' 이라는 제목과 책 소갯글 그대로, '기억의 단절'을 핵심 소재로 다룹니다. 기억을 이어 나갈 수 없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환자 니키치와 타인과 접촉하여 연속된 기억 속에 기억을 추가하여 기억 그 자체를 조작할 수 있는 초능력자 키라와 한 판 승부에서 단기 기억 상실증은 기억파단 그 자체이고, 기억 속에 다른 기억을 집어 넣어 왜곡하는 것 역시 연속된 기억을 파괴하는 행위니까요.

니키치는 자신이 기록한 노트로만 이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대응하며, 이 노트를 통해 키라와 맞서 싸우는데 이를 위해 등장하는 설정들이 상당히 괜찮습니다. 노트의 사용법과 생활 방법 등에 대한 디테일이 꽤 그럴싸한 덕분입니다. 그리고 기억을 온전하게 노트에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을 반전 요소로 써먹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반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후 키라의 범죄 행위가 담긴 USB 메모리를 '서랍에 넣어 놓았다'는 노트 메모를 통해 알게 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데 애초에 이 메모 자체가 거짓이었습니다. 키라에게 헛수고를 하게 만들고 실제로 교코를 통해 USB를 안전하게 빼돌리려는 계획이었거든요. 이렇게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기억' 그 자체가 '단기 기억 상실증'이라는 병 때문에 쉽게 왜곡할 수 있다는게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또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에 기억을 조작하는 키라의 초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아이디어도 괜찮았어요. 본인이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던 사고 이후의 기억이 전혀 없는데, 새로운 기억이 생겨난건 분명 누군가의 조작이라는 논리인데 설득력있지요. 이걸 이렇게 써먹나 싶어 감탄스럽기도 했고요.

그러나 사실 이 반전 외에 딱히 건질게 많은,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니키치 관련 주요 설정은 명백히 영화 "메멘토"에서 설정을 따 온 것이니까요. 노트의 메모가 중요하며, 또 자신의 '글씨체'로 기록한 메모만이 중요하는 점과 사진을 주요 기적 보조재로 사용하는 점이 그러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억은 쉽게 왜곡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판박이에요. 나쁜 기억 대신 자신이나 타인이 왜곡한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부분의 메시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단기 기억 상실증은 "메멘토" 등을 통해 구축된 설정과 세계관이 반영되어 나름 설득력이 높은데 반해 키라의 초능력은 너무 허황됩니다. 접촉을 통해 기억을 조작한다는 설정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구멍이 많아요. 누군가 모르는 사람의 접촉을 쉽게 허용한다는건 상식적이지 않으니까요. 왜곡된 기억이 많아지면 당연히 일어날 여러가지 모순을 정신 붕괴를 일으킨다며 대충 퉁치는 것 역시 마찬가지지요. 잘못된 기억이 주입된다면 그 이유를 따져 볼 사람이 없을리 없잖아요? 특정 기억에 대한 반대 기억이 명확한 경우, 예를 들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다' 가 '그 때 다른 누구와 무언가를 했다' 라는 분명한 기억과 겹칠 경우 더욱 그러할테고요. 기억 조작이라는건 전후관계와 디테일을 모두 고려해야 성공할 수 있을텐데 그런 부분은 이런 식으로 모두 대충입니다. 최소한 독자가 흥미를 가질만한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어요.
범행도 어이가 없습니다. 이 정도의 능력자가 편의점이나 털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을 폭행하고, 여자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하는 수준 이하의 범죄만 저지른다는게 말이 될까요? 심지어 기억 조작도 어설퍼요. 지하철에서의 성추행같은 경우는 피해자와 정의감에 불타 나섰던 사람 2명의 증인의 기억만 조작해서 빠져나가는데, 실제로 니키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이 기묘한 상황을 눈치챕니다. 이렇게 백주대낮에 대중 앞에서 벌이는 범죄 행각들이 많다면, 아무리 CCTV의 사각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결국 꼬리를 잡혔을 겁니다.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립니다. 살인마를 쫓고 있는 상황에서, 또 살인마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니키치가 기억을 잃더라도 굉장히 필요한 정보만 잘 떠올리고 기억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침 딱 좋은 위치와 장소에서 노트 속 필요한 페이지를 읽게 되는 식이거든요. 기억을 잃는 시간도 정해져 있어 보이지 않고요. 뒤로 가면 갈 수록 이 친구가 기억 상실증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에요. 억지로 세계관을 확장하려는 이런저런 설정들도 좋아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니키치를 비롯한 캐릭터들의 묘사가 밋밋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살인마 키라는 그냥 나쁜 놈, 니키치는 성격 묘사없이 그냥 키라와 싸우는 정의의 사도라는 이분법적인 구분만 있을 뿐 별다른 묘사는 없어서 평면적이고 만화적이기 때문입니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한데, 매력적인 세계관과 설정 창조는 잘 하지만 캐릭터를 묘사하는 능력은 없는 듯 합니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조력자 도쿠 할아버지나 화법 교실 강사 교코도 다 어디서 본 듯한, 평면적인 캐릭터라는 점에서 다를게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일부 매력적인 설정과 돋보이는 아이디어가 없지는 않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단기 기억 상실증 관련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이 그러합니다. 작가의 팬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관심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2016/12/16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 - 구이 료코 (쿠이 료코) / 김완 : 별점 3점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 : 쿠이 료코 작품집 - 8점
구이 료코 지음, 김완 옮김/㈜소미미디어

"용의 학교는 산 위에"만큼의 긴 제목을 지닌 쿠이 료코의 단편집으로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용의 학교는 산 위에"는 영 아니었지만, 그래도 팬심으로 구입했는데 다행히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발상도 기발하며, 모두 길이에 걸맞는 완결성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서랍 속 테라리움"과 비교하자면, 의외성은 덜하지만 완성도가 더 높은 편이에요. 쇼트쇼트와 일반 단편의 차이점처럼요.

작품별 편차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가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쿠이 료코 팬들께는 적극 추천드립니다.

"용의 소탑"

바다 나라와 산 나라의 전쟁을 가로막는 국경 지대 용의 새끼가 부화하여 둥지를 떠날 때까지,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머물렀다. 교류가 끊긴 양국은 기본적인 물자 보급에도 문제가 생겼고, 마침 산 나라에 포로로 잡혔던 청년 '사난'은 소금을 가져다 준다는 약조 후 풀려나는데...

전형적인 중세풍 세계관에 '용'이 등장하는 식으로 약간의 판타지가 결합된 시대물로, 막강하면서도 기묘한 존재 탓으로 적대하던 사람들이 하나가 된다는(외계인이 쳐들어오면 힘을 합치듯이), 왕도스러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쿠이 료코스러운 변주가 딱 하나 들어간 덕분에 독특한 매력을 전해 줍니다. 바로 '교역'입니다. 전형적인 이야기에 딱 한 가지의 설정 추가로 독특함을 만들어 낸다는 점은 "던전밥"과 똑같네요. 결국 사난과 유르카가 하나가 된다는 해피엔딩도 마음에 들었고요.

등장하는 크리쳐는 '용'이라기보다는 그리폰 같았다는건 조금 이해가 안되지만,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인어금렵구"

누가 봐도 인어인 기묘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무대로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는 않아요. 인어가 멀리 떨어진 학교로 가고 싶어하고, 주인공은 그것을 도와준다. 그리고 그것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라는, 한여름날 짧은 만남 이후 추억과 여운을 남기고 각자의 길을 간다는 전개는 전형적인 "보이 미트 어 걸" 그대로고요. 이 와중에 약간의 성장기 느낌을 전해주는 것 역시 동일합니다.

그러나 "용의 소탑"이나 "던전밥"처럼 '인어'라는 설정이 추가되어 독특한 매력을 풍깁니다. 이 설정에 더해 비교적 짧은 분량 안에서 '서로 다르기에 마음을 전하기 힘들다'는 주제를 설득력 넘치게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실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깔끔하면서도 흑백톤 위주의 작화 역시 이야기에 꼭 맞아 떨어져서 마음에 들었고요.

한마디로 익숙한 주제에 약간의 변주를 더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작가의 능력이 최고치로 발휘된 작품. 별점은 4점입니다.

"나의 신"

중학교 입시를 앞둔 소녀가 갈 곳을 잃은 물고기 신을 어항에서 키운다는 이야기로 신은 별다른 능력이 없고, 소녀는 입시에서 떨어진다는 현실적이면서 일상적인 결말이 눈길을 끕니다.

하지만 이야기만 놓고 보면 딱히 대단할 것은 없는 소품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늑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늑대인간이 주인공인 드라마로 남녀 관계가 아니라 모자 관계 설정이 신선했습니다. 늑대인간이 실제 인간 세계에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상세한 설정들도 인상적이고요.

단, 지나치게 일상계스러운 내용으로 주인공 케이타의 약간은 철없는 행동이 사건, 드라마의 전부라는 것은 조금 시시했습니다. 그만큼 설득력은 높았지만, 이만큼의 상세한 설정을 만들었다면 더 극적인 이야기를 전개해도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무일푼 뱌쿠로쿠"

천재 화가 타카가와 뱌쿠로쿠가 무일푼이 된 후, 자신이 그렸던 사자, 호랑이, 용 등을 실체화시켜 큰돈을 벌고자 한다는 시대극 판타지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일본화를 모티브로 한 작화입니다. 붓을 주로 사용한 듯한데 정말로 빼어나고 시원시원한 구도도 돋보인 덕분입니다. 뱌쿠로쿠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위작의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나중에 아들이 그린 그림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한마디로 쿠이 료코라는 작가의 넓은 스펙트럼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 자식이 어여쁘다고 용은 운다"

왕자 준이 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용의 비늘을 얻으려 나섰다. 길 안내를 맡은건 마을 이방인 준이었다.
용을 잡으러 가는 험한 길에서 병사들은 계속 낙오되었고, 결국 부상당한 왕자만 남았을 때 준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왕이 자신의 아들을 죽였기에 그것을 복수하려 한다는 것...

뻔한 복수극으로 의외성도 없고, 이야기도 좀 막 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용의 알과 자식을 동일시하는 전개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처집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누타니 일족"

초능력 가문 이누타니 일족의 집에 소년 탐정 도다이치 코우스케가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실수로 일족의 초능력이 들통날 위기에 처해 그것을 숨기려 하나, 오히려 도다이치 코우스케는 연쇄 살인극으로 의심하며 겉잡을 수 없이 폭주하는데...

제목(원전은 "이누가미 일족"이지요)과 설정부터 여러 작품을 패러디하고 있는 작품으로 다양한 초능력을 지닌 가족들의 행동을 ‘살해당했다’고 오해해 진상을 추리하려는 탐정의 행동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나 싶을 정도로 기발하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오렌지로드"에서 초능력을 감추려는 카스가 패밀리의 노력이 겹쳐져 왠지 모를 향수가 느껴진 건 덤이고요.
강대한 힘을 과신하다가 화를 부른 상황에서, 가장 쓸모없을 줄 알았던 아리사의 ‘입고 있는 옷을 파자마로 바꾸는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반전도 돋보였습니다.

또 보통 소년 탐정이 사건에 뛰어드는 이유 — 자기와 관계도 없고 부탁한 사람도 없는데 왜 이렇게 애를 쓰지? — 에 대해 ‘자기 능력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힘을 써야 할 때 쓴다’라는 슈퍼 히어로스러운 마인드로 알려주는 점도 괜찮았어요. 하기사 명탐정이 슈퍼 히어로와 다를 건 별로 없지요.
‘힘을 써야 할 때는 최선을 다해서 쓴다, 그러나 힘을 과신하지 말라’는 주제 역시 여러모로 생각해볼 거리가 많아서 좋았습니다.

다양한 장르물에 대한 깊은 이해에 더해 유쾌한 분위기, 적절한 반전, 심오한 주제까지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명작입니다. 단점이라면 너무 짧다는 것과 결말이 약간 시시했다는 것 정도? 그래도 별점 4점은 충분합니다. 장르소설 애호가라면 이 작품만큼은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004/06/22

Kimagure Orange Road! (변덕쟁이 오렌지 로드)

간만에 옛 추억이 생각나서 적어 봅니다. 

이 만화-애니메이션은 그야말로 저의 청춘기를 지배한 작품입니다. 중3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정말 미친 듯이 좋아했던 작품이거든요. 당시 얼마 안 되는 용돈으로 관련 상품을 사 모았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원작 만화는 초능력 가족의 장남인 주인공 카스카 쿄우스케(春日恭介), 이사 온 첫날의 산책 길에서 우연히 날아온 빨간 밀짚모자를 잡아준 인연으로 묘한 인연이 생기게 되는 아유카와 마도카 (鮎川まどか), 카스카가 우연히 초능력을 쓰는 것을 보고 그를 좋아하게 되는 후배 소녀 히야마 히카루 (檜山ひかる), 이 3명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한 청춘 러브 코미디입니다.
지금 보면 뻔한 설정에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포맷으로 들쭉날쭉하는 작화는 짜증마저 불러 일으키지만, 초능력이라는 설정을 도입하여 작품에 감칠 맛을 주고 주인공 3명 이외에도 여러 다양한 캐릭터들의 유머스럽고도 디테일한 묘사로 상당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잔잔하고 진지한 사랑이야기를 다루며 또 다른 느낌을 전해 주고요.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80년대 후반을 강타한 TV 애니메이션입니다. 당시 작품들과 비교해서도(같은 시기에 “시티헌터” 1기가 시작했었지요) 뛰어난 작화와 다케다 아케미씨가 디자인한 캐릭터들, 그리고 국내 영화 “무사”의 음악 감독까지 맡았던 음악감독 사기스 시로(鷺巢詩郎)의 음악이 잘 조화된 수작입니다.
거기에 당대를 주름잡았던 최고의 여성 캐릭터 아유카와 마도카의 존재로 이 작품은 더욱 빛났습니다. 싸움과 운동, 공부, 거기에 음악성까지 뛰어나다는 초월적 캐릭터로, 다케다 아케미씨의 묘한 느낌의 성숙함까지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당대의 아이돌이었지요.

만화 엔딩의 멋진 대사(Like or Love? Like! 한없이 Love에 가까운….)가 나오지 않던 TV 애니메이션은 조금 불만이었지만, 극장판에서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조금씩 흔드는 슬픈 사랑의 결말을 보여주면서 오히려 더 리얼하고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듯한 캐릭터들로 저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메종 일각"과 더불어 80년대 청춘 러브 코미디의 양대 산맥이자, 미소녀는 긴머리와 단발머리 두명!이라는 공식을 정의하고 훗날 수많은 작품에서 패러디 되고 인용되는 작품 오렌지 로드….
이사가려고 짐을 정리하는데 우연히 몇 년전에 모 동호회에서 사 둔 미국판 오렌지로드 TV판 DVD 박스 셋트(라지만 LD버전을 그대로 옮긴 듯한)가 눈에 띄어 몇자 적어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저도 예전같지는 않지만 아직도 이 작품을 보면 무언가 느껴질만큼 인상적이었던 제 청춘의 초상입니다.

2023/07/30

이런 설정은 있을리 없다! 트릭이 변화하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

honto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오랫만에 소개드리네요. 국내 소개된 작품은 3편입니다. 이 중 '사쿠라다 리셋 3부작'은 라이트 노벨 같은데, 이미 절판되었고 중고 시세는 사악하네요. 구해 읽기는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만, 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겠지요.
그나저나 지나치게 일본 작품 위주라는건 좀 거슬립니다. 이런 류라면 '다아시 경 시리즈'를 빼 놓을 수 없었을텐데 말이죠


특수 설정 미스터리란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처음부터 설정으로 포함되어 있는 미스터리를 말한다. 예를 들어 현실과 다른 물리법칙, 심령현상이나 초능력, 판타지나 공상과학과 같은 설정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미스터리의 트릭과 추리 논리에 특수한 설정으로 인한 구속력이 더해지는 것이 매력이다.

"마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없다" - 가모우 다츠야
19세기 영국을 연상시키는, 마법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 총 6편의 연작 미스터리. 이 세계의 마법에는 엄격한 규칙이 존재하며, 결코 무법천지가 아니다. 마법이 개입된 세계의 법칙에 따라 왕립 마법원 수사관인 데이븐포트가 논리적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앨리스 죽이기" - 고바야시 마스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의 주민이 된 꿈을 꾸는 주인공들. 꿈속에서 누군가가 죽으면 현실 세계에서도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을 깨달은 주인공들은 꿈속의 범인을 찾기 시작한다.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꿈과 현실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설정은 파격적이지만, 세계관은 매우 논리적이다.

"일곱 번 죽은 남자" - 니시자와 야스히코
주인공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같은 하루를 9번 반복하는 특이한 체질을 가진 소년. 그에게는 가끔씩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루프에 빠진 두 번째 바퀴에서, 첫 바퀴에서는 무사했던 할아버지가 살해당하고 말았기 때문. 주인공은 루프의 법칙에 따라 할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밝혀낸다.

"명탐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아쓰카와 다쓰미
탐정이 경찰 아래 움직이는 조직이 되어버린 세상. 증거를 조작해 죄를 면했다는 의혹으로 명탐정의 탄핵 재판이 열리는데........ 이 책의 특수 설정은 탐정 조직의 존재 뿐 아니라, 특수한 조건에서 죽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환생한다는 것. 환생자도 참여하는 탄핵 재판의 행방과 사건의 진실이 복잡하게 펼쳐진다.

"고양이와 유령과 일요일의 혁명 (사쿠라다 리셋 3부작)" - 코노 유타카
주민의 절반이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도시 '사쿠라다'를 배경으로 한 소설. 주인공은 기억을 완전히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그리고 여주인공은 세상을 3일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초능력자들로 가득한 마을에서 두 사람이 다양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데, 능력끼리 조합하는 퍼즐 같은 논리성이 매력적.

2007/08/17

히어로즈. 일상 생활에서의 초능력자

제 주위에는 초능력을 소유한 인물들이 참 많습니다.

가장 독특한 능력의 소유자는 같이 근무하는 디자인 팀의 김과장.

그의 초능력은 "어디서 뭘 주문해도 항상 가장 늦게 음식이 나온다!"는 것이죠. 능력이 점차 진화하여, 급기야는 오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켰는데도 가장 늦게 나오는 궁극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일상 생활에는 아무 보탬도 되지 않지만, 아니 외려 불편하지만 가끔 이 능력을 보고 있자면 신기하기만 하더군요.

저도 간단한 능력이라도 하나쯤 가지면 참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일단 제일 원하는 능력은 "지하철에서 내 앞에 앉은 사람이 바로 일어나는 능력" 입니다. 이 정도면 소박하면서도 CIA 등에 쫓기지 않고 일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이 아닐지...

2019/11/24

엘데가인 - 인도하는 신 1~3 - 츠부라 히데토모 : 별점 2.5점

아먀야데와 루아이소테라는 두 제국이 10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날개달린 용족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소년 장은 우연히 루아이소테의 비행정에서 떨어진 류미르라는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엘데가인'의 비밀을 알고 있는 불사신 소녀로, 스스로 세계의 지배자가 되려고 하는 루아이소테의 가로우즈 준장이 노리는 탓에 다시 납치되었다.
모진 고초를 겪던 류미르를 장이 대활약하여 구조했지만, 엘데가인의 기동을 멈추기 위해 찾아간 죽음의 섬에서 결국 장은 죽고 류미르는 가로우즈에 흡수되고 말았다.

강대한 힘을 손에 넣은 가로우즈는 세계를 멸망시키고 모든 동식물을 스스로 만들어내어 새 시대의 창조주가 되려고 나섰고, 용족이 초능력으로 가로우즈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상황에서 장은 류미르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재생되어 가로우즈와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데....

츠부라 히데토모의 판타지 액션 만화입니다. 국내에서는 잊혀진 전설의, 비운의 명작 쯤으로 추억되고 있는 덕분에 절판된 국내판 해적판의 중고가가 엄청난 가격으로 형성되어 있지요.
"우주 영웅 전설"과 "사일런트 메비우스" 정도만이 그나마 이름을 남긴 가도카와 계열의 월간 코믹 COMP에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고등학생 때인가.... 강남 고속 터미널에 있었던 일본 서적 판매 서점에서 단행본으로 구입해 보았던 책인데, 우연찮게 다시 보게 되어 리뷰를 남깁니다.

그런데, 솔직히 다시 보니 '잊혀진 비운의 명작'은 절대 아닙니다. 전형적인 '보이 미트 어 걸' 이야기의 재탕이니까요. 게다가 "라퓨타"나 "미래소년 코난"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기도 했고요. 여주인공 류미르가 강력한 힘을 가진 인간형 로봇과 함께 엮여 있으며, 그녀가 기묘한 최종 병기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설정은 이 두 작품과 판박이입니다. 현재의 세계는 과거의 고대 문명이 멸망한 뒤의 세계라는 설정, 판타지와 SF가 기묘하게 섞여 있는 묘사들도 '미야자키 월드'의 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고요. 심지어 지배자인 '흑룡'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 힘을 자신이 손에 넣어 세계를 자기 뜻대로 하려는 가로우즈 준장 역시 '무스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전형적인 미야자키 악당입니다.

물론 미야자키 월드와의 분명한 차이점은 존재합니다.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 장이 '순동술'이라는 기술을 쓸 수 있는 초능력자로 액션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장의 형인 소시유와 시안 등 술사 동료들, 가로우스와 루아이소테 제국의 술사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초능력자들의 대결은 별다른 새로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바벨 2세"이후 "초인 로크" 등 수많은 작품에서 반복된 것을 또 보여줄 뿐입니다. 오히려 가로우즈가 마지막에 융합한 류미르와 분리되며 '칩'을 잃은 뒤 살아있는 고깃덩어리같은 형태로 폭주하는 장면 등에서 당대에 큰 충격을 안겨다주었던 "아키라"의 영향만 강하게 느껴지고요.

이야기도 많이 허무합니다. 달랑 3권 분량인데, 1권과 2권에서는 장이 납치된 류미르를 구한다, 다시 류미르가 납치된다, 그녀를 다시 구해온다, 다시 납치된다...만 반복되며 3권에서는 가로우즈와 장이 파워업하여 일기토를 벌이는 내용이 전부라 밀도가 높다고 할 수 없으며 독특한 세계관과 매력적인 술사들의 개성을 모두 다 잘 살렸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그래도 지금도 가끔 회자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인상적인 작화 때문일 겁니다. 꼼꼼한 펜터치가 돋보이는 정성 가득한 아날로그 시절의 작화로 작가의 노력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 작화로 그려낸 액션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에요. 정말 손으로 한 땀 한 땀 그려내고 있거든요. 주요 등장인물 및 몬스터까지 아우르는 캐릭터 디자인도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류미르가 굉장히 귀엽게 묘사되어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요. 류미르의 매력이 작품의 절반 이상은 충분히 차지한다고 생각되네요. 솔직히 3권에서 장이 파워업한 뒤 급작스럽게 성장한 외모는 전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요.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았고, 시대를 뛰어넘을만한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신인급 작가가 정성들여 그린 작화와 통통 튀는 매력이 넘치는 등장인물들, 화려한 액션 모두 평균 이상이지만 기본적인 이야기에서 참신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시대에 이름을 남기는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느끼게 해 주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04/16

안락 탐정 - 고바야시 야스미 / 주자덕 : 별점 1.5점

안락 탐정 - 4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주자덕 옮김/아프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연작 단편집. 제목 그대로 의뢰인의 이야기만 듣고 진상을 추리해내는 탐정이 등장합니다. 모두 다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딱히 좋아하는 작가는 아닌데 설정과 뒷 표지 소개가 그럴듯해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작가의 특기라 할 수 있는 기발한 설정은 여전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 <<소거법>>이 대표적이에요. 왕따를 당하던 회사원 토코가 탐정에게 자기가 초능력자라고 밝힙니다. 자기가 누군가를 "사라져"라고 하면 그 사람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사라진다면서요. 그래서 회사의 적(?)들을 없애나가다가 같은 능력을 가진 사원 야마히를 만나서 둘 중 하나만 남아야 하는 상황에 빠진 뒤 탐정을 찾게 된 것이지요. 이를 여러가지 '인간 소거' 일화와 함께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다이어트>>는 의뢰인이 엄청 말랐을 거라는 분위기를 풍기지만 알고보니 200kg 정도의 뚱보였다는 반전이 꽤 좋았어요. 의뢰인에 대한 단서가 전무한데, 마른 사람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전개가 절묘한 덕분입니다. 다이어트 식품인줄 알고 먹었던게 알고보니 냉동 피자였다는 진상도 유쾌했고요.

그런데 역시나,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줄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아니, 추리의 결과가 얼토당토하지 않아서 화가 날 정도입니다. 앞서 흥미진진하다고 소개해드렸던 <<소거법>>이 대표적입니다. 알고보니 토코는 초능력자가 아니었다는게 진상입니다. 회사 사람들 모두가 합심해서 장난을 쳤다는 거지요. 회사 밖에서 사라지라고 한 사람들은 모두 무시하거나 화를 냈다던가, 토코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는걸 알려주는 등 몇 가지 단서가 있기는 합니다. 허나 그렇다고 진상의 설득력이 생기지는 않아요. 이런 장난을 합심해서 칠 정도로 한가한 회사가 있을리 없으니까요. 게다가 구조조정을 앞둔 상황에서, 여러 명이 없어져 업무가 늘어나고 심지어 조직까지 변경되는 상황에 처하면서까지, 심지어 여러 명 - 도코, 야마히 - 을 대상으로 회사에서 합심해서 장난을 친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초능력이 실재할 수 없으니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리긴 했어야 했겠지만, 그 답이 '장난이었다'니 맥이 다 빠집니다. 이래서야 제목이 무색할 정도죠.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기묘한 헛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지막 이야기 <<모리아티>>에서 탐정이 알고보니 사기꾼이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건 역대급 최악의 결말을 다툴만 합니다. 모든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지만 추리해내는건 척 했으며, 헛점들은 모두 탐정이 미리 알고 추리하는 척 했기에 생긴 오류들이었다는건데, 소설의 기본 설정 - 안락의자 탐정물 - 을 흔들 뿐더러, 설득력도 한없이 낮은 탓입니다.
일단 탐정이 이 모든걸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는지는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홈즈가 명탐정이 된 건 그가 사실은 범죄계의 나폴레옹 모리어티였기 때문이라는게 거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하지만 탐정이 추리한 사건은 그라비아 아이돌 스토킹 사건, 특정 회사에서 벌어진 장난, 다이어트 블로거에게 가짜 식품 배달 사건 등 거리의 불특정한 누군가에게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모리어티가 저질렀거나 관여했음진한 큰 도난 사건같은 중범죄가 아니에요. 의뢰인들은 간판을 보고 찾아온 사람도 있는 등, 사전에 탐정을 알지도 못하고요. 심지어 경찰에 신고도 되지 않은 사건도 많습니다. 이를 모두 탐정이 뒤에서 조종했다? 턱도 없는 주장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을 위해 일부러 탐정의 추리에 헛점을 만든 건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탐정의 추리에도 헛점이 있고, 이를 설명하는 추리도 설득력이 전무하니 양 쪽 모두 점수를 줄 수 없는 괴작이 탄생하고 말았네요. 이런 에필로그 형태의 결말보다는 처음부터 탄탄하게 이야기를 완성하는게 더 좋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기발하다는 측면에서는 볼 만한 부분이 약간 있습니다만 딱히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2024/03/24

라플라스의 마녀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1.5점

라플라스의 마녀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 및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물 영화 제작자 미즈키 요시로가 아카쿠마 온천에서 황화수소에 중독되어 사망했다. 나카오카 형사는 요시로의 아내 치사토의 범행을 의심했지만, 경찰 수사 협조를 요청받은 환경 분석 화학 전문가 아오에 교수는 고의로 중독 사건을 일으키는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도마테 온천에서 유사한 황화수소 중독사가 또 일어났고, 나카오카와 아오에는 피해자들이 영화 감독 아마카스 사이세이와 연관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아마카스도 수년 전 가족을 황화수소 중독으로 잃었던 과거가 있었다. 
뇌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아마카스의 아들 겐토를 쫓는 소녀 우하라 마도카와 만난 아오에 교수는 마도카와 그녀 주변인물들을 통해 결국 사건의 진상을 깨달았다. 이 모든건 뇌수술로 물리 현상을 예측할 수 있게 된 겐토의 복수극이었다....

"인간은 원자야. 하나하나는 범용하고 무자각으로 살아갈 뿐이라 해도 그것이 집합체가 되었을 때, 극적인 물리법칙을 실현해 내는 거라고.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어. 단 한 개도."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주년 기념작인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 밀리의 서재에 있길래 읽어보았습니다.
 
겐토와 마도카가 가진, 물리법칙으로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은 현상에 대한 물리적인 데이터를 구비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는 등으로 꽤 그럴싸하게 설명됩니다.
겐토가 저지른 범죄의 원인인 과거 아마카스가 가족을 살해했던 사건의 동기도 놀라왔습니다. 아마카스가 작성했던 블로그 글과는 사뭇 다른 가족 관계가 밝혀지는 등의 설명으로 반전이 효과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아마카스가 주장하는 천재 이론 -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아무런 진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다 - 과는 반대되는 주제의식 -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는 없다 - 도 와 닿았고요. 암요, 천재도 중요하지만 일반 대중들이 있어야 천재도 빛을 보는 법이지요.

그러나 장점은 이 정도 뿐이고 대체로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우선, 전개부터 예상 그대로라 굉장히 평이합니다. 황화수소에 의한 살인은 온천을 방문했던 청년이 일으켰다는건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그 정체도 읽다보면 아마카스 겐토라는걸 쉽게 눈치챌 수 있고요. 전문가 아오에 교수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 황화수소를 이용한 살인을 어떻게 저질렀는지도 대단한 수수께끼는 아닙니다. 마도카의 특수 능력이 초반에 밝혀지는 탓에, 그런 능력을 이용한 범죄라는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상상을 초월하는 일종의 '초능력'을 활용한 범죄라는 점에서 추리 소설로 보기 어렵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지 않게 전개도 깔끔하지 못합니다. 주인공이 많아서 시점이 자주 전환되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마도카 등 다른 인물들 시점으로의 전환은 필요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이럴 바에야 아오에 교수, 나카오카 형사를 중심으로 끌고가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나카오카 형사의 수사가 '위'에서의 지시로 마무리되지 못한다는 것도 억지스러웠고요.

뇌 수술 덕분에 미래를 예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초능력도 앞서 말씀드렸듯 설명은 잘 되어 있지만 신선함은 떨어집니다. 결국은 '머리가 좋아진 것'에 불과하거든요. 즉, 아래와 같이 '아마데우스 조'가 미사일 궤도를 흐트러트리는 것과 똑같아요.
물이 흐른다던가, 공기의 흐름을 이용한다던가 하는 식의 물리법칙 이용은 듀나의 SF 단편 "나비전쟁"에도 유사한 설정이 등장했었고요.
게다가 이 능력에 대한 것 모두는 온갖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는 하나 결국 과학이라기보다는 판타지입니다. 여기에 특수 능력자를 나라에서 관리한다 등의 설정에 '라플라스의 마녀'라는 코드네임(?)까지 더해지니 이거야 원, X-men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드네요.

등장인물들도 진부하고 평이합니다. 겐토는 특히 문제입니다. 그가 아버지 아마카스를 살해하려는 동기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 치사토를 유혹하여 범죄에 끌어들이고 마지막에 함께 죽여버리려고 하면서 정의, 복수를 당당하게 주장하는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심지어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말이죠!
아오에 역시 불가능하다는 말만 해서 전혀 교수답지 않았을 뿐더러, 아오에가 가족 붕괴를 앞두고 있다던가 하는 설정은 불필요했습니다. 
우하라 교수가 딸 마도카의 뇌수술을 하게 된 동기인 '토네이도' 사고도 굉장히 억지스러웠어요. 설령 이런 사고가 있었다한들, 딸에게 검증되지 않은 뇌수술을 한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겐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을 해야지....
 
이렇게 추리적으로도, SF적으로도, 전개와 완성도 측면에서 별로이며 문제 투성이라 점수를 줄 여지가 없습니다. 과학과 미스터리의 절묘한 융합이라는 광고 문구는 과대 포장에 가깝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뻔하고 유치한 마블 히어로물입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래도 영화는 좀 궁금하네요. 예고편을보니 아오에 교수를 주인공으로 해서 복잡했던 시점 분산을 깔끔하게 정리한 듯 보여서 책보다 좋아보이거든요. 평이하고 쉬운 전개는 영화에는 분명 장점일테고, 물리법칙을 이용하는 장면들 - 특히 클라이막스의 '다운버스트' - 은 화면에서는 꽤 그럴싸하게 보일테니, 최소한 소설 후속권보다는 기대가 됩니다.

2021/03/07

ON 온 - 나이토 료 / 현정수 : 별점 1.5점

ON 온 - 4점
나이토 료 지음, 현정수 옮김/에이치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갓 형사과에 입사하여 서류 정리 업무를 맡은 신참 형사 도도 히나코는 미해결 사건 파일들을 암기하다가, 처음으로 자살로 보이는 어느 택배 배달원의 변사 사건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그 자살 피해자는 히나코가 암기 중이었던 미해결 성폭행 사건의 유력 용의자였다. 자신의 음부에 병을 박아 넣고 죽은 참혹한 시신은 당연히 살인으로 의심할 만했다.

하지만 자살이라는 완벽한 증거가 곧 발견되었다. 피해자가 자신이 직접 자살하는 장면을 촬영한 스마트폰이 발견된 것이다. 게다가 경찰서에 보관된 스마트폰 속 자살 동영상이 어느 날 인터넷 동영상 투고 사이트에 공개되고, 연이어 유사한 자살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일본산 범죄 스릴러물로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던 범죄자들이 연쇄 자살한 사건 수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범죄자들이 자살하게 만들었는지를 풀어내는게 핵심인데, 검시를 통해 자살한 범죄자들 뇌에 종양이 있다는게 발견됩니다. 당연히 자살은 뇌 종양이 원인이고요. 정상적인 검시 과정에서 밝혀진거라 추리의 여지는 별로 없습니다. 때문에 추리의 여지를 남기고,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는 "누가 어떻게 피해자들에게 뇌종양을 만들었는지?"를 밝혀내는 후더닛+하우더닛 이야기로 흘러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런 구조를 만드는데 실패했습니다. 우선 후더닛 측면으로 보자면, 유력한 용의지 나카시마 다모쓰가 초반에 등장해서 범인이라는 인상을 팍팍 심어주는 탓에 점수를 줄 여지가 없습니다. 의외성이 전무하니까요. 

도도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양념통 지문과 자살 현장의 콜라병 지문이 일치한다는게 밝혀지는 클라이막스는 나쁘지는 않아요. 양념통을 나카시마가 만졌던 적이 있었고, 이를 통해 나카시마가 피해자 미야하라 아키오를 마지막에 만난 인물이라게 입증된 셈이거든요. 하지만 이미 나카시마가 근무하는 병원이 피해자들의 접점이라는게 드러난 이상, 곧 밝혀질 일이었어요. 뭔가 대단한, 결정적인 단서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나마 이 정도는 봐줄만 한데, 하우더닛 측면에서는 아예 빵점입니다. 상식적으로 뇌종양을 만들려면 외과적인 수술이 필요했을겁니다. 이전에 읽었던 "숙명"에서 처럼요. 그러나 감옥에 수감된 사형수마저 종양이 생긴걸 보면, 다른 방법을 썼을 겁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전혀 셜명되지 않습니다!

나카시마가 끼고 있던 큰 반지가 자살을 시작하게 만드는 하이테크 장치였다는 설정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서야 초능력자가 염력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스캐너스"와 별로 다를게 없는 SF, 판타지스러운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중간에 이런저런 가능성을 타진하며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조건반사, 최면술 조작이 차라리 나아 보일 정도입니다.

캐릭터들도 진부하거나, 묘사나 설명이 지나칩니다. 주인공 도도 히나코는 착하고 순진하다는 점에서, 이런 범죄 스릴러 속 스테레오 타입이었던 강단있고 강한 여형사가 아니라는 차별화 포인트는 명확합니다. 그러나 흔하디흔한 일본 컨텐츠 속 착하고 열심히 사는 여주인공 그 자체라서 스테레오 타입인건 마찬가지죠. 게다가 그녀가 절대적인 암기력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은 왜 등장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에서 별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않거든요. 히토미가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잘생긴 점원에 대해 이야기한 걸 떠올린게 수사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는 합니다. 허나 이 정도는 절대 암기력까지는 필요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구태여 이런 초능력같은 설정을 붙일 이유는 없었습니다. 살인 방법과 더불어 작품의 현실성을 급락시키는 또 다른 원인만 제공할 뿐이었어요. "탐정학원 Q"스러운, 만화같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연쇄살인마 오토모 이야기는 진부하기 짝이 없을 뿐 아니라 전개 상 불필요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나카시마가 뇌를 조종하여 자살하게 만드는 장면을 히나코 앞에서 보여준다는, 극적인 클라이막스를 위해 억지로 등장시켰을 뿐입니다. 살해당한 히토미가 언급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잘생긴 직원이 오토모라는게 밝혀지면, 체포는 시간문제였을테니 추리의 여지도 없고요. 그 외 범죄자들의 자살과 그들의 범행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거북했습니다. 지나치게 잔인한 탓이지요. 범죄자들이 천벌을 받게 만드는, 일종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는 합니다만 좀 지나쳤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게 천벌이 내리기를 바라는 독자의 소원을 충족시켜주며, 천벌을 위해 뇌를 조작해서 자살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꽤 흥미로왔습니다. 그러나 그걸 이야기로 잘 풀어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설득력도 낮고요. 싸구려 헐리우드 스릴러 수준에 불과해요. 시리즈라고 하는데, 후속권을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2014/10/22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2014) - 브라이언 싱어 : 별점 2.5점

트라스크 박사가 발명한, 돌연변이 (뮤턴트)를 찾아내어 살육하는 센티널 때문에 X맨들은 전멸의 위기에 빠졌다. 그들은 키티 프라이드의 능력으로 울버린을 1973년 과거로 보내어 현재를 바꾸려고 시도했고, 무사히 과거에 도착한 울버린이 찰스 (자비에르)와 에릭 (매그니토)와 함께 사건의 발단이 된 레이븐 (미스틱)을 막으려고 노력해 나갔다. 한편 미래의 X맨들에게 센티넬 대부대의 공격이 시작되는데...

출장 중 감상한 영화 두 번째 작품. 시리즈의 최신작이죠. 그동안 날개 없이 추락하던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간만에 복귀했군요.

작품의 특징이라면 이전 X맨 3부작과 리부트된 전작의 세계관을 이어준다는 겁니다. 그러나 단순한 연결고리는 아닙니다.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재미도 상당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미래 시점에서의 액션씬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전에 등장하지 않았던 다양한 뮤턴트들의 멋진 액션들이 굉장히 화려하게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블링크의 능력이 아주 멋졌어요. 악역인 궁극 병기 센티넬의 강함도 인상적으로 표현되고요. 최강자 중 한 명이라 생각했던 스톰의 죽음 등 X맨들이 하나씩 박살나는 묘사는 나름 충격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정말 ‘아작난다’는 표현이 적당했거든요.

그에 비해 과거에서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액션보다는 스토리에 집중한 느낌이라 화려함은 덜합니다. 그래도 퀵실버의 등장과 활약은 명불허전이었고, 마그네토 역시 기차 레일로 센티넬을 장악하는 장면 등에서 기대에 걸맞는 최강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초능력의 특성상 뭔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힘든 찰스(자비에르)가 능력을 회복한 뒤, 공항에서 레이븐(미스틱)과 일종의 텔레파시로 대화를 나누는 씬은 정말 명장면이었어요. 또 그간 비중이 적었던 레이븐 (미스틱)의 활약이 멋지게 그려진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모든 사건의 발단이자 중간까지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마지막 대단원을 장식한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진주인공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 외에도 제 출생년도와 같은 1973년이 무대라는 것도 아주 반가웠는데,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디테일이 상당해서 깨알 같은 재미를 안겨줍니다. 의상이나 자동차와 같은 소품은 물론, 케네디 암살이라는 토픽을 적절하게 이야기에 녹여내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했습니다. 일단 울버린은 처음 등장해서 조무라기 악당들을 해치우는 것 외에는 당최 하는 게 없어서 울버린 빠로서는 실망스러웠어요. 마그네토도 좋아하는데 하이라이트 장면에서의 모습은 비행하는 폼이라던가 의상이 뭔가 코스프레한 듯이 어색해서 별로였고요.

세세한 부분에서 설명이 부족한 전개 역시 아쉬운 점입니다. 마그네토(에릭)가 트라스크 박사 습격 장소에서 레이븐을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냥 트라스크 박사를 죽이고 레이븐을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 레이븐이 스트라이커에게 사로잡히지 않은 것으로도 미래가 바뀌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다리를 쓰면 초능력을 못 쓴다는 찰스의 설정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불구가 된 건 총알에 맞아서인데, 백신은 뮤턴트 능력을 억제하는 것이니 전혀 관계가 없어요. 마지막으로 마그네토(에릭)가 센티넬을 자기 것으로 만든 시점에서 왜 야구장을 들어다 놓는 쇼를 펼치는지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위해 만들었다는 센티넬이 공개 장소에서 인간을 때려잡는 영상만 나가도 박사와 센티넬을 뭉개버리기에는 충분했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나쁘지는 않지만 성공적인 리부트였던 전작보다는 스토리의 탄탄함이 부족해 보입니다. 미스틱의 활약이 괜찮다고 쓰기는 했지만 울버린이나 다른 액션 히어로가 활약하는 게 화려함 면에서는 더 도움이 되었을 테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세계관을 잘 짜 맞추면서 재미를 주는 데에도 성공한 만큼 후속작도 기대해 볼 만할 것 같네요.

덧 1 : 늙지 않는다는 울버린이 많이 늙은 게 티가 나서 안타까웠습니다.

덧 2 : 마그네토는 대체 어떻게 나는 겁니까?

2022/02/27

미스테리아 36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3점

미스테리아 36호 - 6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지음/엘릭시르

출간되는 것 자체가 고마운 추리, 장르 문학 전문 계간지 미스테리아 36호입니다. 80년대 대중 문화에 대해 분석하는 특집 때문에 구입하였습니다. 

잡지 특성 상 '대중 문화'도 추리, 장르 문학을 기반으로 한 부분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인간시장"과 "어둠의 자식들"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여, 80년대 추리문학계의 왕성한 움직임을 '영상화'를 통해 잘 설명해주는 부분이 시선을 잡아 끌었습니다. "추리극장"과 "베스트셀러 극장"이 많은 한국 추리 소설을 원작으로 영상화했다는 것도 새로왔지만, 뒤이어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무단으로 번안하여 영상화했다는 건 정말 처음 알았거든요. 심지어 대표작인 "제로의 초점"을 그냥 무단으로 표절해서 방영했다니 놀랍습니다. 그 외에도"과다 지불한 중매 사례비", "안개의 깃발", "얼굴", "수사권 외의 조건", "목소리", "조난"까지 모두 일곱 편이 드라마화 되었는데, 이 중 제대로 원작을 알린건 "베스트셀러 극장"에서 제작했던 3편 뿐이라니 정말 무식한 시대였네요. 

그나마도 제대로 베끼지 못해서 사건이 시작되는 기본 설정 정도만 따 온 정도에 그쳤다는데, 예를 들어 "제로의 초점"의 핵심은 어려웠던 시기 몸을 팔았던 과거를 은폐하려 했던 여성의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무단 영상화 버젼에서는 이걸 그냥 '화류계에 몸 담았던 과거' 정도로 퉁치고, 남편을 위해 자살한다는 순애보로 바꾸었다니 이래서야 통속적이고 전형적인 신파극일 뿐입니다. "수사권 외의 조건"도 핵심 소재였던 흘러간 유행가가 '그때 그 사람' 이라는건 와 닿는 변주였지만, 역시나 내용은 치정 멜로물이었다고 하고요. 이 책에서 소개된대로, 사회파 추리소설에서 '사회성'과 '역사성'을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 남는건 개개인의 사연과 이를 포장하는 한국식 신파 밖에는 없게 된 셈입니다. 이런 류의 번안은 생각도 못했는데 한 번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런 반쪽짜리 표절 드라마 이야기 다음에는, 영화를 통해 80년대를 설명하는 글이 이어지는데, 당대의 히트작이었던 "적도의 꽃"은 '아파트'에 대한 특별한 해석이, "서울 무지개"는 외설, 에로 영화가 사회물로 포장될 수 있었던 여러가지 배경에 대한 설명이 상세해서 볼 만 했습니다.

80년대 일어나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우범곤 대량 살인 사건'에 대한 글도 좋았습니다. 사건이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커졌고,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와 그 후일담까지 모두 알 수 있었던 좋은 르포르타주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쓰여진 사건과 실화 논픽션을 모아 출간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유리 겔러의 초능력 소동을 다룬 글도 빼 놓을 수 없네요. 왜 '초능력'이 인기를 끌었는지를, 10년 전 일본에서의 대 유행과 결합하여 설득력있게 설명해 주고 있는 덕분이지만, 무엇보다도 저 역시 유리 겔러 쇼를 80년대 TV로 직관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 당시 사회에 준 충격은 정말 어마어마했었습니다.

물론 이번에 수록된 기사들이 80년대 사회, 문화 현상을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TV 드라마와 영화, 추리 소설 등 굉장히 지엽적인 부분의 분석에 그치고 있는 탓입니다. 그것도 드라마의 경우는, 좋은 부분이 아니라 나쁜 부분을 언급한다는 측면에서 딱히 가치있는 정보는 아니었고요. 제 기억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번안했던 "열 개의 제웅 인형"은 노래와 분위기 모두 굉장했던 수작이었는데, 이렇게 성공적이었던 번안물도 함께 소개해 주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지만 대중 문화, 특히 추리, 장르 문학과 관련하여 80년대를 조망한다는 특집의 기획 의도에는 충분히 부합하는 좋은 기사들이였습니다. 제 기대에도 역시나 충분히 부합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수록된 단편 3편에 대한 상세 리뷰는 아래에 따로 소개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모두의 약점" 

지후는 친구 이하리와 함께, 떡볶이 집 주인 동생 서소하의 부탁으로 한 2학년 여학생을 찾아 나섰다. 부족한 소하의 인상착의 설명에도, 가방이 없었던 등의 디테일에 주목하여 조사한 끝에, 그 여학생이 박재이라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소하가 여학생을 찾은 이유, 그리고 박재이가 멀리 떨어진 식자재 마트 근처에 간 이유 등은 모두 밝혀지지 않았는데...

여고생들이 탐문 수사와 추리를 통해 특정 학생을 찾아낸다는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단편 부문 상을 수상했다는 작품과 이어지는 세계관이라는데, 딱히 특별한 설정이 사용되지는 않아서 읽는데 부담은 없었습니다. 지후가 박재이를 찾아내는 과정은 잘 짜여진 추리물로 손색이 없는 수준이라 만족스러웠고요.

그러나 지후와 새아버지, 새언니와의 관계 설정은 비중에 비하면 딱히 의미가 없었습니다. 최소한 이 작품만 볼 때는 말이지요. 그리고 서소하의 부탁을 지후와 하리가 선뜻 받아들이는 것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식자재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어묵을 사려던 할아버지의 행동을 목격했을지 모를 여학생을 찾는다는 서소하의 동기 역시, 여학생을 찾기 전에 걱정했던대로 소문이 날 거였다면 이미 났을 거라 설득력이 약했습니다. 오히려 그 여학생인 박재이를 찾아내어 입막음을 부탁했다면,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었을테고요. 또 박재이 입으로 식자재 마트에 간 이유를 털어놓는 결말도 좋은 추리물로 보기는 어려웠어요. 박재이가 이혼하여 따로 사는 친아빠를 찾아가려 했다는 이유는, 작중에서 추리할 수 있는 단서가 거의 없어서 공정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나쁘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아주 좋지도 않았던 평작입니다. 연작 단편 중 한 편이라 따로 떼어놓고 읽으면 좀 애매했던 부분이 있었던게 아닐까 싶네요. 시리즈 전체를 한 권에 모은 단편집이 출간되면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사라진 궁녀" 

조선 태종 시대의 궁궐을 무대로 한 괴담물입니다. 기승전결이 없고, 제대로 된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야기를 시대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는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궐 내에서 사라진 궁녀가 어디로 갔을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 '승은을 입어서 다른 신분이 되었다'는건 상당히 기발했지만, 그렇다면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 리 없다는 점에서는 문제입니다. 사라진 정의궁주의 궁녀 단지의 행방도 설명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였고요. 단지가 승은을 입어 궁주가 되었다면, 그걸 궐내 궁녀들이 모른다는건 애초에 말이 안되겠지요. 효순 궁주가 병화어였다는 결말도 이게 뭔가 싶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 편의 이야기로는 완결성도 없고 여러모로 애매해서 감점합니다. 괴담물로는 나쁘지 않지만, 별로 무섭지 않다는 문제도 큽니다.

"수전 데어의 첫 번째 사건" 

여류 추리 소설가 수전 데어는 친구 크리스타벨의 저택에서 조 브롬펠의 아내 미켈라가 크리스타벨의 동생 랜디를 유혹하는걸 목격했다. 미켈라는 크리스타벨과 결혼을 약속했었던 조 브롬펠을 꼬드겨 결혼했던 악녀였다. 그리고 그날 밤, 조 브롬펠이 살해당했고, 자수정 반지를 끼고 있던 크리스타벨이 유력한 용의자로 몰리게 되었다. 범인의 손만 목격했다는 하인 마스가 범인이 '붉은 색 보석' 반지를 끼고 있었다고 증언했던 탓이었다.

발표 당시에는 애거서 크리스티와 맞먹는 인기를 누렸다는 미뇬 에버하트의 명탐정 수전 데어 시리즈입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시리즈 첫 작품이기도 하지요. '수전 데어 비긴즈'랄까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별 볼일 없었습니다. 추리소설 황금기 단편답지 않게 '트릭'이라는게 등장하지도 않고, 동기는 마지막 해결 과정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공정하지도 않고, 독자가 풀어낼 수수께끼도 별로 없다는 뜻이지요. 

범인 트라이언 웰스가 끼고 있던 반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등장하기는 합니다. 반지 보석 알렉산드라이트는 주광과 야광에서의 색깔이 달라서, 낮에 확인했을 때는 초록색이었다는 거지요. 하지만 이건 범인의 의도도 아니었고,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또 이 정도로 극명하게 색깔이 바뀐다는건 설득력이 약합니다. 차라리 총을 쏠 때 불 붙인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어서, 그걸 반지로 착각했다면? 이라는 식으로 풀어내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랜디에게 빌려준 돈 대신, 크리스타벨의 저택을 압류하여 사업상 급한 불을 끌 생각이었던 트라이언 웰스의 동기도 그럴싸 하기는 했지만, 경찰 수사 과정에서 이를 계속 숨길 수 있었을 것 같지도 않고요. 동기만 드러나면 범인이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을테니, 잘 짜여진 범죄물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결론내리자면 추리 퀴즈에 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나마도 그렇게 흥미로운 퀴즈는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12/11/24

칠석의 나라 1~4 - 이와아키 히토시 : 별점 3.5점

칠석의 나라 4 - 8점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지금은 거장 대우를 받는 이와아키 히토시의 90년대 작품. "타지카라오"를 읽은 뒤 생각이 나서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설정 자체는 뻔해요. 80~90년대 유행했었던 "외계에서 찾아온 지능체와의 만남, 그리고 그 후예들의 후일담"이라는 설정이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마루카미 교수의 실종과 주인공 미나미마루의 초능력을 둘러싼 미스터리 스릴러 형태로 전개됨으로써 흔해빠진 작품들과는 차별화된 재미를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외계인 등장 설정도 마루카미의 문장(까치 - 원 - 손)에서 시작해서, "창을 본다"라고 불리는 외계를 보는 능력과 "창에 손이 닿는다"라고 불리는 물질을 외계로 보내는 능력에 대한 설명, 그리고 이 능력이 발현된 이후 외계인이 더 찾아오지 않게 된 이유 등이 작가 특유의 전개로 설득력 높게 표현되는 덕분에 유사품과는 격이 다릅니다.

주인공 미나미마루의 캐릭터도 마음에 들어요. 이런 류의 작품들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낙관적이고 천하태평인 성격에다가 강력한 초능력을 가졌지만 당면한 고민은 취직일 뿐이라는 점, 능력에 대해 어떻게 사용할지를 긍정적으로 고민하면서 스스로를 감추는 점 등이 현실적이면서도 매력적이거든요.

이러한 탄탄한 설정과 이야기가 요새 기준으로는 길지 않은 4권이라는 분량으로 완결되도록 빠른 호흡을 지녔다는 것 역시 큰 장점입니다(특히나 요새는 보기 힘든 장점이죠). 물론 호흡이 너무 빠른 탓에 마루카미 교수라던가 요리유키 등 주요 등장인물들 설명이 많이 부족하고, 정부가 나섰음에도 결국 별다른 해결 없이 대충 정리되는 결말 등 소소한 단점이 조금 있습니다. 그래도 불필요하게 길게 늘어지는 것보다는 마음에 들어요.

한마디로 다시 읽어도 여전한 재미와 완성도를 갖춘 수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천편일률적인 외계인 이야기가 식상하시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01/02

Q.E.D. iff 4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4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 iff 3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1.5점 

전에 읽었던 2, 3권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걱정했는데, 이번 권은 다행히 괜찮았습니다. 수록작 중 "아이디"는 망작이지만 "바다의 무녀"가 꽤 괜찮은 덕입니다. 간만에 힘을 내 주었기에 별점은 2.5점 주겠습니다. 

수록된 에피소드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바다의 무녀"

이즈 제도 남쪽에 있는 작은 섬 아이가시마에서 리조트 찬성파와 반대파가 첨예한 대립을 벌이는 와중에 도쿄에서 온 측량사가 살해당했다. 무녀 유나 아오이가 측량사 시체가 묻힌 섬을 예언한 뒤, 경찰은 그녀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유나 가문은 섬의 수리권을 가지고 있고, 리조트에 물을 나누기 힘들어 건설을 반대하고 있던 터라 더욱 의심을 샀다.
유나가 섬을 나간 적이 없다고 확신하는 동생 시오미는 가나와 토마에게 사건 해결을 부탁했다. 토마와 가나가 섬을 방문한 뒤, 유나 가문의 수리권 고용한 변호사, 리조트 회사 직원마저 차례로 시체로 발견되는데...

이야기에 대단한 트릭은 없습니다. 시체가 있는 장소를 무녀가 알아낼 수 있던건 범인이 그녀에게 워드 프로세서로 만든 편지(뒤에 밝혀지지만 이것도 조작)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인 하마치 변호사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동굴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동굴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여 공정한 트릭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발자국없는 모래밭 한 가운데에서 시체로 발견된 호시즈나 씨 사건은 나름 트릭으로 값어치가 있습니다. 땅에 묻힌 장대를 진동시켜 발자국을 없앴다는 방법이 꽤 현실적이었거든요. 나뭇가지가 부러진걸 트릭과 연결시킨 과정도 좋았고요. 무녀의 전설에 나오는 초능력 - 하늘을 날고 천리안으로 모든 걸 본다 - 을 범행과 연결시키는 전개도 돋보였어요. 세 건의 사건 모두 사람이 날지 않으면 범행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로트카, 볼테르 방정식이라는 수학 이론을 녹여낸 솜씨도 오랫만에 과거 Q.E.D의 향수를 느끼게 해 줍니다. 이야기와 이론이 잘 조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태계에 있어 포식자와 피식자의 증감 속도 관계를 표현하여 '조화'를 나타낸 식인데, 조화는 '진동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대화가 없어지면 싸움이 일어나고, 그게 싫어지면 대화로 돌아온다는 이 수학 이론은 무녀 유나 아오이의 의도를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녀는 싸움을 끝내는게 아니라 질릴 때 까지 끌고가는게 목적이었거든요. 물의 양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사람들이 더 이상 수리권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상황을 노렸던 겁니다. 심지어 그녀의 동생마저도 섬을 위해 나름의 역할을 다했다는 마지막 장면도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조금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간만에 본 역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아이디"

맷은 카지노 홈페이지를 해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지만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 후, 토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스케일은 거대합니다. 미국, 일본, 러시아, 두바이, 벨기에를 오가니까요. 그러나 해커의 두목 크래시의 정체는 물론, 증거를 확보하는 과정 모두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가나의 변장을 전가의 보도처럼 쓰는게 영 와 닿지 않네요. 그리고 이전 작품에서 영어도 그리 잘 하지 못하는 걸로 묘사되지 않았었나요? 또 토마의 대학 동창 하산이 토마를 돕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 말이죠.

그렇다면 Q.E.D 특유의 현학적인 재미라도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해킹을 소재로 한 것 치고는 디도스 공격이 메인이라 너무 흔해빠진 정보만 나오거든요. 해커들이 비트 코인도 아니고 현금을 가지고 거래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맷이 사랑하는 아슈라의 딸 클로에가 전설의 해커 위저드라는 것도 억지스럽고요.

도저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는 망작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2014/02/20

11인이 있다! - 하기오 모토 / 서현아 : 별점 2.5점

11인이 있다! - 6점
하기오 모토 지음, 서현아 옮김/세미콜론

애니메이션으로 미리 접했었던 작품. 생각해보니 하기오 모토 작품을 책으로 읽는 것도 처음이네요. 유명세에 비하면 읽는 것이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한데, 뭐 국내 소개가 늦은 탓이 크겠죠? 여튼 표제작 "11인이 있다!"와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이라는 두 편의 중편과 함께 권말 보너스 만화 수준의 "스페이스 스트리트"라는 짤막한 개그 꽁트가 실려있더군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어요. 오래된 걸작을 읽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시간이 흐른 탓에 명성만큼의 재미나 가치를 느끼기는 어려운건 모든 고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이겠지요. 가끔, 정말이지 아주 가끔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 있기는 한데, 이 작품은 그럴 정도의 명작은 아닙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좋은 번역과 디자인으로 국내에 소개하여 주신 출판사 세미콜론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드리나 가격이 너무 쎄요. 정가가 거의 만 원이라니! 할인된 금액으로 구입하긴 했지만 이른바 "가성비" 측면에서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한 번쯤 볼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한 만큼 아직 읽지 못하신 장르문학(만화) 팬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지 나름 시대를 앞서간 반짝이는 부분은 확실히 있으니까요. 가격 부담만 없으시다면...

간단한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1인이 있다!"

동명 애니메이션의 원작으로, 우주대학 입학 시험을 그린 작품입니다.

10명의 수험생이 시험을 치루는 우주선에 11명의 수험생이 타고 있다는 기발한 설정 하나만큼은 최고입니다. 고립된 단체 속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설정은 흔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한 명이 수상하다!"라고 알려주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작품은 보기 드무니까요. "우주해적 코브라"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소위인지 중위인지가 두 명이라 둘 중의 한 명이 가짜다! 라는 이야기였는데...
어쨌거나 이 설정 하나 덕분에 우주선에 닥치는 갖가지 위기에서 서로 단합하기 어렵고 누가 11번째인지를 찾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기에 단순할 수 있는 입학시험이 흥미롭게 흘러가게 됩니다.

또 천편일률적이기는 해도 몇몇 캐릭터는 아주 괜찮았어요. 특히 여성이 될지 남성이 될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설정의 히로인 프롤의 독특함이 기억에 남네요. 여러 가지 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히로인입니다. "남자"가 될 것을 주장하는 히로인이라니!

허나 시대를 거스르기는 힘들었던 것일까요? 솔직히 이야기의 완성도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일 큰 문제점은 초반 테스트에서 꽤나 강력해 보였던 타다의 초능력이 왜 먹히지 않았는지에 대해 설명되지 않는 점입니다. 여기서 11번째는 충분히 밝혀졌어야 하지 않나요?
또 흥미로운 전개에 비해 11번째가 결국 자백(?)에 의해 밝혀진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설득력은 있지만 시시했거든요. 뭔가 단서라도 던져줘서 독자에게 함께 추리하게 만들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죠.

결론적으로 흥미로운 설정에 비하면 전개는 부족하고 결말은 시시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재미있게 감상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이러한 단점이 과연 시대가 흐른 탓인지, 아니면 애니메이션은 각색을 잘 했었던 것인지 궁금하네요.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

"11인이 있다!"의 후일담으로, 우주대학에 합격하여 훈련받는 타다 - 프롤 커플이 마야왕 바세스카의 초대에 응해 마야에 방문하나 급진파 - 전통파의 충돌로 전쟁 목전의 상황에 처한다는 이야기로 전형적인 SF 판타지 군웅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일 캐릭터를 등장시켜 약간 하드한 SF에서 판타지로 이어지는 구조는 초인 로크의 "신세계전대" - "빛의 검" 구성과 유사하네요.

그러나 이 작품은 "11인이 있다!"보다도 더 문제가 많습니다. 행성 마야의 위기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악당들의 음모도 유치하기 그지없으며,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과 그 와중에 낀 타다와 프롤의 행동 역시 별다른 긴장감을 느끼기 어려웠던 탓입니다.
또 타다와 프롤이 대체 이 사건에서 무슨 역할을 담당하는지도 애매하고, 입학 동기인 4세의 죽음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다른 동기들의 활약은 거의 전무하다는 점에서 후일담치고는 부족한 점도 많아요. 전혀 별개의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니까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페이스 스트리트"는 정말이지 권말 보너스 만화 수준이라 별점을 주기는 애매합니다만, 후일담 성격으로는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재미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