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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7

리뎀션 - 안데슈 루슬룬드, 버리에 헬스트럼 / 이승재 : 별점 1.5점

리뎀션 - 4점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중요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베트 그랜스 경정은 손님을 걷어차 뇌출혈을 일으키게 만든 밴드 가수를 체포했다. 그런데 존 슈워츠라는 가수의 여권은 위조였다. 가수의 정체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던 존 메이어 프레이였다. 존 메이어 프레이는 오하이오의 사형수였는데, 6년 전 탈옥했었다. 그가 무죄라고 믿었던 교도관 버논 및 사형 폐지 연합의 도움 덕분이었다. 버논은 식사에 독을 섞어 건강 이상을 유발시킨 뒤, 사형 폐지 연합 소속 의사가 마취제 등을 투여하여 존의 사망을 위장했었다. 시체 운반 부대를 통해 교도소에서 빠져나온 존은 러시아 등을 거쳐 위조 여권으로 스웨덴에 입국할 수 있었다.
존의 생존을 알아낸 미국 정부는 송환 후 사형 집행을 원했다. 스웨덴은 사형과 같은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개인의 송환요구는 거부하고 있었지만, 미국과의 관계에 금이 갈까 우려하여 존을 러시아로 추방하는데 합의했다. 존은 러시아에서 곧바로 미국으로 끌려가 사형 집행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사형제를 반대하던 교도관 버논의 계획이었다...


모르는 스웨덴 컴비 작가의 범죄 스릴러. 에베트 그랜스 경정 시리즈 중 하나로 내용의 핵심은 교도관 버논이 엘리자베스 피니건을 살해하고 존이 사형 선고를 받도록 만든 음모입니다. 존이 사형 집행을 당한 다음에, 자신이 진범임을 밝혀 체제를 뒤흔들 생각으로요. 사형 제도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사형과 같은 '동해보복'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자살할 때 에드워드 피니건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조작하여 에드워드를 살인 사건의 피고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합니다.
버논이 계획을 밀고 나가던 중간에 존을 불쌍히 여겨 교도소에서 탈옥하게 만든 과정도 재미있었습니다. 약물로 심장에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킨 후, 교도소에 고용된 같은 편 의사들이 존을 언뜻 보기에 죽은 것처럼 마취시키도록 만들어서 사망 선고를 내렸고, 그 뒤에는 시체 안치실에 집어 넣었다가 부검 절차를 핑계로 시체 운반 부대에 넣고 빼돌리는 과정 모두가 설득력있게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송환되면 죽을게 뻔한 존의 처리(?)를 놓고 고민하는 스웨덴 정부 관계자들의 모습도 흥미로왔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대한 딜레마는 항상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소재이니까요.

하지만 작품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해 살인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사람이 사형당하게 만든 뒤, 이를 폭로한다는 핵심 계획부터 영화 "데이비드 게일"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게일은 강간 살인죄로 사형을 당했는데, 알고보니 그가 살해했다는 피해자는 자살했었습니다. 피해자는 데이비드 게일의 공범이었고요. 이 사실은 게일의 사형 집행 직후에 드러납니다. 사형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서였지요.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죠. 게다가 이 작품은 이보다도 훨씬 못합니다. 데이비드 게일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피해자로 알려진 콘스탄스도 불치병에 걸려 자살했던 공범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버논은 무려 세 명 - 사형 선고를 받은 에드워드까지 - 이나 죽게 만든 살인범입니다. 버논의 존재가 사형 제도가 유지되어야 하는 근거인 셈이지요. 살인마가 사형 제도 폐지를 논한다는건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큰 문제입니다. 누가 보아도 살해당했던 엘리자베스 피니건의 아버지 에드워드 피니건은 작 중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명입니다. 그가 존에게 엄청난 복수심을 불태우는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작가들은 에드워드 피니건을 복수심 때문에 제 정신을 잃은 변태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버논은 꽃다운 청소년 두 명을 희생시킨 살인범입니다. 에드워드 피니건마저 자신을 죽인 살인자로 조작한건, 에드워드가 그가 사랑했던  앨리스와 결혼한 것에 대한 복수로 보이고요. 그런데 작 중 버논은 시종일관 나름의 정의와 신념을 굳게 지키는 정의로운 인물처럼 등장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에드워드가 사형 선고를 받고 존이 갇혔던 사형수 동에 감금되었다는 에필로그도 억지스럽습니다. 끈을 이용하여 자살 후 총이 튕겨 나가도록 만들고, 끈은 까마귀가 먹어치우도록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미국 경찰이 '초연 반응' 정도를 검사하지 않을리 없어요. 존이 자살한게 아니라 살해당했다는걸 입증하기는 쉽지 않았을겁니다. 설령 수사가 미비하여 에드워드가 버논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썼다고 치죠. 그래도 딸을 살해한 범인을 직접 처단한 아버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버논이 그의 딸을 살해했다는건 이미 밝혀진 다음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워요.
다른 인물들도 엉망이거나 별볼일 없습니다. 기껏 목숨을 건진 존이 분노를 참지 못해 사건을 저질러 정체가 드러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솔직히 이렇게 멍청하다면 죽어도 싸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그와 가족과의 이야기는 너무나 뻔해서 지루했고요.
에베트 그랜스도 영 마음에 드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하는게 거의 없습니다.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지 주변 인물들에게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자신의 실수로 뇌손상이 온 아내(?) - 전작을 읽지 않아 이 설정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은 안 됩니다만 - 안니에 대해 신경쓰는 것 밖에는요. 나이 많고 화도 많은, 붙임성 없는 거구의 경찰이라는 인물 설정도 "메그레" 경감과 똑같습니다. 그나마 독특한건 스웨덴 가수 시브 말름크비스트의 광팬이라는 것 뿐입니다. 마리안나 헬만손 경위도 이런 상사 밑에서 일하는 미모의 여성 형사의 스테레오 타입에 그칩니다.

그리고 버논의 계획은 스웨덴 형사 에벤트 그랜스와 별 관계도 없습니다. 오히려 에베트 그랜스가 존의 무죄를 믿고 송환에 반대할 까닭도 없지요. 한 국가의 고위 경찰이 남의 나라 사법 제도를 존중하지 않는게 더 이상하니까요. 한마디로. 스웨덴 형사 에베트 그랜스 시리즈일 필요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에베트 그랜스의 등장 부분을 거의다 잘라내고, 존과 버논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며도 충분했어요.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탈옥에 대한 디테일 외에는 전부 꽝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시리즈를 더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17/08/13

왕의 목을 친 남자 - 아다치 마사카쓰 / 최재혁 : 별점 2점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사형 집행인 샤를 앙리의 일대기적인 기록을 통해 프랑스 대혁명을 조망하게 해 주는 독특한 역사서입니다.

대대로 사형 집행인인 상송 가문의 4대 째인 샤를 앙리의 이력도 독특하고,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에서 보아왔던 사형 집행인에 대한 사회적인 냉대, 차별에 대한 일화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도 사형 집행에 대한 갖가지 에피소드들이 눈길을 끕니다. 대표적인게 제목 그대로의 에피소드, 즉 루이 16세의 사형 집행이고요. 왕에 의해 임명된 사형 집행인임에도 왕의 사형을 집행했다는 자체가 굉장히 드라마틱합니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칼로 목을 베는 과정에서 빚어진 실수들 - 그 중에서도 3대 집행인 장 바티스트 상송과 인연이 있었던 랄리 톨랑달 백작의 사형 집행 -, 기요틴의 도입과 기요틴 칼날의 형태에 대해 루이 16세가 적절한 지적을 해서 개량했다는 것, 기요틴에 의해 최초로 처형된 인물에 대한 이야기 등 다른 곳에서 접하기 어려운 정보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형 집행에 관련된 내용을 빼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좋은 텍스트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혁명이 일어난 이유도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못하며, 루이 16세와 왕가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좋은 평가를 하고 있는 탓입니다. 루이 16세에 대한 평은 그 중에서도 압권입니다. 굉장히 총명하고 백성을 생각한 계몽 군주로 그려지더라고요.
글을 써내려간 묘사도 부담스럽습니다. 역사서다운 객관적 서술이 아니라, 샤를 앙리의 심리 묘사를 과하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담담하지도 않고 굉장히 감정적으로 쓰여져서 묘사력도 좋다고 할 수 없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프랑스 근대의 사형 집행에 대해 궁금한 독자가 아니라면 딱히 건질건 없습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나온 것 이상의 새로운 이야기도 없으니까요. 차라리 상송 가문이나 사형집행에 대해 디테일하게 파고들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겁니다.

2014/05/06

사형집행인의 딸 - 올리퍼 푀치 / 김승욱 : 별점 3점

사형집행인의 딸 - 6점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문예출판사

18세기 독일을 무대로, 사형집행인이 마녀로 위심받아 화형당할 위기인 산파 마르타의 생명을 구한 뒤 마르타가 죽였다고 의심되는 고아들 사망 원인과 아이들 어깨에 있는 기이한 문양의 정체, 그리고 나병진료소를 파괴한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힌다는 역사 추리 소설입니다. 상세한 시대 묘사, 독특한 직업의 탐정이 등장하는 역사 추리 소설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역사 추리 소설은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장르입니다. 추리, 역사에 관련된 소재를 모두 좋아하며 그냥 독서가 아니라 뭔가 배우는 느낌이 드는게 좋거든요.
이러한 현학적인 재미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상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필수인데, 이 작품은 기대에 충분히 값합니다. 사형집행인 야콥 퀴슬 및 조력자인 젊은 의사 지몬 프론비저 등 등장인물들은 물론 군인들, 짐마차꾼들과 같은 다양한 직업과 숀가우라는 도시 및 작품의 중요한 요소인 마녀 심문 (고문) 절차 등의 행정적 설정과 같은 모든 요소가 현실감있게 제대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이 중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야콥 퀴슬입니다. 전직 군인으로 고문에도 능한 사람 죽이는 명수가 실제로는 의사보다도 뛰어난 학식을 지닌 진짜배기 르네상스맨이라는 설정인데, 아주 독특하고 신선했습니다. 수많은 역사추리물을 읽어봤고, 실존 유명인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직업 - 고대 로마의 포도주 상인, 로마 장군, 수도사, 18세기 영국의 해결사, 터키 환관, 중국 판관 등 - 의 탐정들을 봤지만 사형집행인은 처음 접해보거든요. 단지 직업의 기발함으로 승부하는건 아닙니다. 디테일 역시 장난이 아니에요. 작가 올리퍼 푀치가 실제로 바바리아 주의 사형집행인 집안인 퀴슬가(家)의 후손이기에 가능했던 아이디어와 묘사라 생각됩니다. 덕분에 야콥 퀴슬이 지나치게 먼치킨으로 미화되었다는 단점도 있기는 하지만요.

그러나 다른 역사 추리소설과 동일한 단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추리 소설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복선이 정교하거나 단서가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거든요. 괜찮은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고요. 그냥 특정 단계를 클리어하면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식의 전개가 대부분입니다. 비교적 초반부터 진짜 범인인 군인들이 드러나는 등 수수께끼 풀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작위적이고 우연에 의지한 전개도 비교적 많고, 악마가 고아들의 은신처를 때맞춰 발견한 경위나 흑막의 정체 등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도 눈에 뜨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마녀의 표식이라는 것이 아이들끼리의 장난이었다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단서가 애들 장난이라니!

또 야콥 퀴슬이 중요한 정보를 항상 한박자 늦게 알아챈다는 전개도 너무 반복되어 식상하며, 결말부에서 법원서기가 모든걸 알고있었다!고 밝히는 장면은 정말로 불필요해 보였습니다. 덕분에 마르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동기가 죄다 사라져버린 탓입니다. 흑막을 알고 있었다면 깔끔하게 사건을 정리하는건 일도 아니었을텐데, 사건을 키운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잖아요? 한명 죽인다고 나병진료소나 군인들이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고, 파괴와 살인이 계속되면 수습이 더욱 어려워질 것은 당연할텐데 말이지요. 이런 점은 작가의 데뷰작이라는게 이유라 생각됩니다. 너무 쉽게 써 내려 갔어요.

아울러 야콥 퀴슬 외의 다른 캐릭터들이 주인공만큼의 존재감이 없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젊은 의사 지몬은 처음에는 힘의 야콥 - 지혜의 지몬으로 역할이 분배되나 싶었는데 내용에서는 야콥이 훨씬 뛰어난 학식을 갖춘 것으로 묘사되기에 별 쓸모가 없습니다. 위기와 문제만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에요. 그나마 활약이라면 은신처에서 클라라와 조피를 구해낸 정도밖에 없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사형집행인의 딸 막달레나 역시 지몬과 야콥을 엮어주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고요. 미인에다가 나름 여러가지 능력을 갖춘 것으로 소개되지만, 정작 사건에 있어서는 후반부에서 군인들에게 납치당하는 식으로 민폐 역할에만 소비될 뿐입니다. 이래서야 제목이 왜 "사형집행인의 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사형집행인"이거나 "사형집행인과 사윗감"이라면 모를까.

그래도 기본적인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해서 흥미롭고 쑥쑥 읽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독특함은 물론 마녀사냥이라는 당대의 소재를 잘 녹여낸 줄거리는 매력적이고 산파를 고문해서 자백을 받아내야 하는 시간제한이 존재하여 긴박함을 더하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역사추리물이 아니라 역사모험물이라고 하는게 더 어울리겠다 싶더군요. 악인은 모두 응분의 벌을 받고 주인공 일행은 모두 상응하는 보답을 받는다는 완벽한 권선징악 서사를 갖추고 있으니까요.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고 적나라한 고문과 처형 묘사가 관건인데, 이것만 조금 순화한다면 어린이용 모험소설이 될 수 있어 보입니다. 알렉산드르 뒤마나 쥘 베르느의 역사모험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20/09/06

죽음과 모래시계 - 도리카이 히우 / 정대식 : 별점 1.5점

죽음과 모래시계 - 4점
도리카이 히우 지음, 정대식 옮김/영상출판미디어(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동의 작은 산유국 제리미스탄은 고갈되는 석유 자원 이후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감옥 국가"로 거듭났다. 거대한 사형수용 감옥을 만들고, 세계 각지의 사형수들을 돈을 받고 수감한 뒤 사형까지 집행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사형 제도가 쇠퇴함에 따라 흉악 범죄와 무기수의 종신 수용을 위한 비용 증가에 고심하던 각 국은 사형수 한 명당 수만 달러의 비용으로 제레미스탄 "종말 감옥"에 처분을 맡겼다. 

이 "종말 감옥"에 부모를 죽인 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앨런 이시다가 수감되었고, 그는 사형수로 감방장을 맡고 있는 슐츠의 조수가 되어 감옥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 해결에 나서는데....

2016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입니다. 모르는 작가의 모르는 작품이지만, 본격물의 애호가로서 놓치기 힘든 수상 이력이라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사형수를 수감하는 "종말 감옥"이라는 설정은 재미있습니다. 감옥의 운영, 죄수의 관리 및 감독 방식 - 죄수 몸 속에 삽입되어 죄수가 특정 지역을 벗어나면 전기 충격으로 기절하게 만드는 마이크로 칩 - 등을 꽤 그럴싸하게 그려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런 설정들을 트릭에 잘 활용하고 있기도 하고요. 고작 수만불로 흉악한 사형수를 받아들인다는게 말은 안되지만, 이 정도는 눈 감아 줘야겠지요. 안그러면 이야기가 성립이 안될테니까요.

하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 거의 모두가 설득력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망작들인 탓입니다. 그나마 처음의 두 편, "마왕 샤보 돌마얀의 밀실"과 "영웅 첸 웨이츠의 실종" 정도만 조금 볼만한 트릭이 나올 뿐이고, 다른 작품들은 이야기하기도 민망한 수준입니다.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다운 본격물도 별로 없고요. 읽어보신 분들이 대부분 칭찬하는 마지막 에필로그의 반전도 저는 별로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평균 별점은 1점 이하 수준이지만, 종말 감옥의 설정만큼은 그런대로 재미있었기에 0.5점을 더합니다. 강호순 같은 범죄자는 이런 곳으로 보내버리면 좋겠네요.

짤막하게 요약한 수록 단편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 담겨있으니 참고하세요.

"마왕 샤보 돌마얀의 밀실" 

맨 몸에서 칼이나 만년필을 끄집어내는 물질화 마술로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샤보는 사형 집행 전날 독방에서 난도잘당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맞은편 독방의 용병 출신 사형수 난조는 목이 베여 죽었다. 완벽한 밀실이고 흉기도 발견되지 않은데다가, 사형 집행 전날 살인을 저지를 이유도 불분명한 상태였다...

샤보는 전쟁 때 손상된 엉덩관절을 인공관절로 교체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장착한 넙다리 인공골두 안이 텅 비어 있있지요. 그래서 그 안에 이런저런 물건을 넣어두었다가 꺼낼 수 있다는게 물질화 마술의 정체입니다. 피부에 작은 구멍을 통해 손을 넣어서 빼낸거지요. 때문에 물질화 마술로 꺼낼 수 있는건 가늘고 긴 물건들(만년필)로 한정되고요. 샤보는 이 트릭으로 몸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내어 던져 난조를 죽였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전쟁 때 용병 난조에게 가족을 잃었는데, 그 복수를 직접 하기 위함이었지요. 난죠를 죽인 뒤 칼(에 묶어둔 실 따위로)을 회수하여 자신의 몸을 난자한 뒤 실혈사했습니다. 난자한 이유는 마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피를 다 흘리기 전에 칼을 다시 숨길 수 있고, 상처가 많으면 칼을 꺼내는 구멍의 존재도 숨길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물질화 마술이라는 흥미로운 설정과 대담한 트릭은 볼 만 하지만 트릭이 그렇게 설득력 높아보이지 않으며, 자살한 뒤 칼을 다시 숨길 이유가 없다는건 눈에 거슬립니다. 마술의 트릭을 밝히지 않는게 마술사의 사명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죽을거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몸을 난자한다는건 말도 안되잖아요? 구태여 사형 집행 전날 난조를 죽인 이유도 별로 와 닿지 않고요.

그나마 이게 이 단편집 최고 작품 중 하나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영웅 첸 웨이츠의 실종" 

종말 감옥에서 탈옥한 사람은 딱 한명, 의사 출신의 반체제 정치범 첸 웨이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마이크로 칩을 무력화하였을까? 그리고 왜 훤한 보름달이 뜬 밤 탈옥을 하였을까? 왜 가장 건장한 경비원 다르위시가 감시탑에서 근무할 때 탈옥을 하였을까? 다르위시는 어떻게 죽였을까? 제레미니스탄의 수장 사리흐 아리 파힐은 슐츠에게 사건 해결을 명하는데...

감옥이 나오니 탈옥 이야기가 안 나올리가 없겠지요. 두 번째 작품이 바로 탈옥물입니다.

첸 웨이츠가 의사 출신으로 중국인 죄수들의 신임을 얻은 뒤, 그들의 사체를 이용하여 마이크로 칩이 어디있는지 알아냈다는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100Kg이 넘는 다르위시가 경비하는 날을 노린 이유도 그럴듯해요. 다르위시의 목에 가죽 밴드를 엮은 끈을 걸어 살해하고, 그의 시체를 버팀돌 삼아 감시탑을 올라간게 진상이니까요. 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체중이 제일 무거운 경비원이 필요했던 겁니다. 보름달도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어 다르위시의 주목을 끌기 위한 목적이었고요.

하지만, 트릭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은 모두 설명도 부족하고 설득력도 낮습니다. 의무실의 허술한 보안으로 메스 한 두개, 죄수 구속용 밴드 여러개를 빼돌려 탈옥에 이용했다는 것부터가 그러하지요. 사형수들이 많은 감방에서 메스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3미터 위의 감시원 목에 올가미를 던져 건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 있는 고정된 목표라면 모를까, 살아있는 경비원이 자신의 목으로 날아오는 올가미를 보고 피하지 않는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밝은 보름달 밤이라 죄수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하지요.
이거에 비하면 담을 넘은 뒤 야생 낙타를 올가미로 잡아 사막을 가로질렀다는 탈출 방법은 오히려 쉬워보이네요. 이렇게 거대하면서 대단한 감옥 도시가 CCTV없이 감시원에게만 의지하고 있으며, 감시원도 2인 1조가 아니라 1명만 근무를 선다는 등의 허술함에 바탕을 둔 탈옥이라는 점에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아울러 영웅 첸 웨이츠가 탈옥 후 현실의 벽에 부딛힌 나머지 3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고 진짜 사형수가 되어 종말 감옥에 복귀한다는 결말은 최악입니다. 안 나오니만 못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발상은 나쁘지 않지만 추리 퀴즈 이상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감찰관 제마이야 칼리드의 도회"

종말 감옥을 감찰하기 위해 찾아온 감찰관이 배를 칼로 찔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감찰에 걸려 좌천될 예정이었단 옥졸 무바라크였다.

악덕 옥졸 무바라크의 혐의가 짙어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작중 최악의 빌런이 용의자라면, 없던 죄도 만들어 누명을 씌울 판인데 그를 위해 진상을 밝힌다? 영 와닿지 않아요. 사건을 조사하는 슐츠와 앨런 입장에서는, 감찰관이 자살했건 살해당했건 아무 상관이 없는데 진상을 밝힐 이유도 없고요. 감찰관이 자살하면서 악덕 옥졸인 무바라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다는 진상도 별로입니다. 업무에 대한 사명감으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감찰관이 지병을 앓고 있었으며, 이를 그의 삭발과 구토 흔적으로 추리해내는 부분 외에는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많이 줘 봤자 1.5점입니다.

"묘지기 라쿠파 걀포의 긍지"

티벳 출신 사형수로 제리미니스탄 어를 익히지 못해 소통이 불가한 죄수 라쿠파 걀포는 홀로 사형 집행된 죄수의 묘를 파는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그가 사체를 다시 파헤쳐 먹었다는 소문이 돌고, 조사를 통해 최근에 묻힌 사형수 사체의 일부가 훼손되어 사라진건 사실로 확인되었다. 슐츠는 고심한 끝에 이를 숨기지만, 사형수 로드리고 소토홀의 시체가 완전히 훼손된게 밝혀지자 걀포 역시 곧바로 사형 집행을 받게 되는데...

소토홀과 걀포가 친구였으며, 티벳인 걀포는 소토홀을 위해 최고의 장례인 '조장鳥'을 치뤄주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앞서 시체를 훼손했던건 그 고기(?)로 독수리를 모으기 위해서였고요. 이 정도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오네요. 애초에 수천명의 사형수의 묘지를 감옥 내에 만든다는 설정부터가 말도 안되지요. 본국 가족에게 인계하거나, 화장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증거도 걀포가 티벳인이라는게 전부입니다.

소토홀이 언어 천재였다는 복선으로 그가 걀포와 친구였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 외에는 뭐 하나 건질게 없는 망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여죄수 마리아 스코필드의 잉태" 

남감방과 분리된 여감방의 죄수 한 명이 임신했다게 알려지고, 이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해 여감방 의사 라일라는 추리력으로 유명한 슐츠의 도움을 받고자 찾아왔다. 그러나 슐츠는 이야기만 듣고 사건 조사를 앨런에게 위임했고, 앨런은 직접 여감방에 방문해서 임신했다는 여죄수를 만났다. 그런데 그 여죄수는 앨런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마리아였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교도소 안에서 임신을 할 리 없지요. 그냥 앨런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작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어린 시절부터 앨런을 좋아했었고, 정말로 그의 아이를 임신하기 위해 레즈비언 관계였던 여의사 라일라에게 부탁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유와 동기, 결말 모두가 황당하고 어이가 없습니다. 이런 소문이 난다고 해서, 앨런이 여죄수 감방에 방문한다는건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슐츠와 앨런에게 사건 의뢰가 전달되지 않았다면 라일라는 거짓말의 뒷 수습을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도 궁금하고요. 또 이미 임신 3개월이라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 시점에 앨런의 정자로 마리아를 임신시키면 주차가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점수를 줄 수 없는 망작입니다. 이 정도면 나무한테 미안한 수준이에요. 별점은 0점입니다.

"확정수 앨런 이시다의 진실" 

앨런 이시다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4일. 그 동안 앨런은 독방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된 부모 살인 사건의 진상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는데...

앨런 부모가 죽은 사건에 대한 앨런의 회고라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나마 부모 사건의 도화선이 된 친아버지가 보낸 편지 - 자신이 TS 바이러스의 보균자라는걸 밝히는 - 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친아버지가 슐츠라는걸 알아내는 과정만 추리라 할 수 있지요.
슐츠는 생화학 병기를 연구하던 테러리스트로 신분을 드러낼 수 없어서 앨런의 어머니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이후 테러로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된 뒤, 종말 감옥에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메일 등을 활용할 수 없었던건 감옥이었기 때문으로, 앨런은 종말 감옥의 편지지 등을 확인하고 자신의 추리가 맞다는걸 확신합니다. 예상대로지만 나쁘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어지는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제레미니스탄의 수장 파힐이 직접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인으로, 홀로 권총 한 자루에 의지해 사형을 집행한다는건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이런 집행인 상대라면 인간 흉기급 사형수라면 너끈히 제압하고도 남을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죽을거, 발악이라도 해 보는게 당연하고요.
파힐이 앨런에게 신경을 쓰는 틈을 타 몰래 잠입한 슐츠가 파힐을 협박하여 통행증을 받아 앨런에게 건네주고 탈옥시킨 뒤, 파힐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는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 감옥 경비의 허술함, 파힐의 무능함이 합쳐진 결과인데 이 정도라면 진작에 사단이 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또 파힐이 전 세계 부호들에게 사형 순간을 생중계해 주는 댓가로 돈을 받고 있었다는 설정은 왜 넣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지않아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아예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릴 뿐입니다.

이야기가 끝났다는것 하나만 위안이 되는 졸작. 별점은 0.5점입니다.

"에필로그" 

슐츠는 파힐의 시체를 숨긴 뒤 바이러스 발작이 일어남을 느낀다. 그는 갓난아기 앨런에게 TS 바이러스를 주입해 보균자로 만든 과거를 떠올리며 죽어간다...

읽어본 사람들 모두가 인상적이라 칭했던 반전이 등장하는 마무리입니다. 생화학 병기를 이용한 테러를 꿈꾸던 슐츠가 전 세계에 자신이 만든 TS 바이러스를 흩뿌린다는 결말로, 앞서 망작이었던 5, 6편 이야기는 모두 이 반전을 위한 복선이었습니다. 그 두 편이 왜 망작이었는지는 살짝 이해가 됩니다. 반전을 위한 부품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나 위기에서 벗어난 순간 뒷통수를 쎄게 후려치는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그렇게 빼어난 반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앨런이 보균자였다면 투옥되기 이전 생활에서부터 착실히 주변인들에게 감염을 이어왔을겁니다. 앨런의 탈옥이 무슨 계기라도 된 것처럼 부풀릴 필요는 없어요. 잠복기 수십년인 바이러스의 발작이 때마침 마지막 순간에 일어났다는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렸고요.

이런 류의 작품을 너무 많이 읽었나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4/08/23

괴물이라 불린 남자 - 데이비드 발다치 / 김지선 : 별점 1.5점

괴물이라 불린 남자 - 4점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이머스 데커는 미해결 사건을 다루는 FBI 수사팀의 일원이 되었다. 팀의 첫 사건은 데커가 주목한, 고등학교 미식축구 스타 출신 사형수 마스 사건이었다. 멜빈 마스는 20여년 전 부모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집행 당일에 찰스 몽고메리라는 사형수가 자신이 진범이라고 주장하여 형 집행이 정지되었다.
데커와 수사팀은 몽고메리가 돈을 받고 위증을 했다는 증거를 찾아냈지만, 몽고메리는 사형 집행을 당했고 그의 아내도 폭발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데커는 마스의 부모 사진이 없는 것, 마스가 전국구 스타가 된 뒤 사건이 시작되었다는 것에 주목하여 마스의 부모가 증인 보호 프로그램 대상자와 같이 의도적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고 추리했다. 그리고 마스의 아버지 로이가 사건의 핵심 인물이라는걸 밝혀내는데...


특이한 능력을 지닌 수사관이 미궁에 빠진 사건을 수사하다가, 사건 배후에 거대한 국가적인 음모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챈다는 흔해빠진 스릴러. 전작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서 이어지는, 미식축구 선수 출신 수사관으로 과잉 기억 증후군에 시달리는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입니다.

멜빈 마스 시점에서의 전개는 흥미롭습니다. 사형 집행 당일, 누군가 자기가 진범이라고 고백해서 살아났는데 그 누군가가 알고보니 진범이 아니었다면, 나는 다시 사형수가 된다는 뜻이니 매 순간 순간이 긴장될 수 밖에 없지요. 20년이나 버려두었다가 사형 집행 당일이 되어서야 그를 구해준 '누군가'의 의도도 흥미를 자아냅니다. 구해줄거면 더 빨리 구해주던가, 아니면 아예 죽게 내버려두는게 맞을텐데 왜 하필 이 시점에?
마스의 어머니가 말기 뇌종양이어서, 남편이 그녀가 편한 죽음을 맞도록 도와준 뒤 살해당한 걸로 위장했다는 진상도 괜찮습니다. 원래 아버지 로이는 소싯적에 흑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테러에 가담했다가, 보험삼아 테러 증거물을 훔치고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스가 슈퍼스타가 되어 행적이 노출되자 다시 죽은척 몸을 숨기게 된 겁니다. 이는 마스의 부모님이 전국방송에 등장했던게 사건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추리와도 연결되며, 숨어 지내고 싶었지만 아들의 출세가 발목을 잡고 만 아이러니한 상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스 이야기 외 다른 모든 부분은 모두 기대 이하입니다. 너무 엉망이라서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우선 사건부터 설득력이 없어요. 마스에게 누명을 씌운게 아버지 로이였다는 것부터 당황스러웠습니다. 마약 조직의 성노리개였던 여자를 사랑해서 탈출했는데, 그 여자가 마약 조직 보스의 아이를 임신했었고 그게 마스였다! 더러운 놈에게 복수를 직접 하지 못했으니 그 자식에게 복수하겠다!는 동기인데 황당하기가 그지 없어요. 이걸 추리해내는건 더더욱 말도 안되니, 추리물로 볼 여지도 없습니다. 등장하는 단서라고는 마스의 어머니가 스페인어를 잘했다던가, 집에 은제품이 있었다(조직의 물건을 훔쳐서 나온것)는 정도인데, 이걸로는 턱도 없지요.
마스에게 최면을 걸어 들은 '초차'라는 말을 근거로 로이가 죽은 척 몸을 숨겼다고 추리한 것도 말이 안됩니다. '초차'는 콜롬비아 칼리 지방의 방언으로는 '주머니쥐'이고 주머니쥐는 죽은척한다는 이유인데, 근거도 빈약하고 억지로 가져다붙인 느낌만 전해줍니다. '창녀'라는 명확한 일반 명사가 있는 단어에 전 세계에서 딱 한 지방에서만 쓰는 방언으로 해석한다는건 억지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20년만에 구해준 이유도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의 '아이는 구해달라'는 유언을 따르기 위해서였다는데 어처구니가 없지요. 병주고 약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과거 마스 사건에서 마스가 사형 선고를 받은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사건 당일, 모텔 직원의 증언으로(나중에 위증일 수 있다는게 밝혀지지만) 마스가 집에 들러 범행을 저지를 시간이 있었다는건 증명됩니다. 그런데 마스가 사건을 저지를 동기는 제대로 증명되지 못합니다. 가정 불화가 특별히 언급되지도 않았는데, 얼마가 될 지도 모르는 미래의 계약금 일부 때문에 부모를 죽인다는게 그렇게 설득력있는 동기인가요? 누가 보아도 마스는 수천만불의 연봉을 받을 슈퍼스타가 되었을텐데 말이지요. 어머니 루신다의 혈흔이 마스의 차에 남아있다는건 증거가 될 수 없어요. 이전에 코피를 흘리거나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변호사만 잘 선임했어도 마스가 사형선고를 받을 일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로이가 마스에게 누명을 씌우는게 그렇게 철저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따라서 이야기도 치밀함, 정교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지게 만듭니다.

데커가 NFL에서 뛰었던 미식축구 선수였고, 오래전 시합에서 마스와 겨루었다는 과거가 마스와 연결되어 사건이 시작되고, 결국 둘이 친분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지만, 데커의 독특한 특기(?)인 과잉 기억 증후군이 이 작품에서 하는 역할은 전무하다는 점에서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의 정체성을 흐립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제대로 된 팀을 꾸리지만 팀원들이 하는 역할도 없어요. 심지어 동료 대븐포트는 비교적 초반에 납치되어 멤버에서 빠지는데,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정도에요. 다른 멤버들도 별다르지 않습니다.
동료로 여겼던 마스의 변호사 올리버가 알고보니 과거 테러를 저질렀던 삼총사의 밀정이었다는 반전도 별로입니다. 올리버가 주장하던 마스를 위해 제기했던 소송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는 증거입니다. 삼총사 중 한 명인 매클렐런과 함께 찍은 사진같은 억지 증거는 불필요했습니다.
로이가 소싯적 손재주(?)가 좋아서 폭탄을 만들어 테러에 가담했지만, 70대가 된 현재에도 신출귀몰하며 FBI와 거물 킬러들을 엿먹이는 전문가가 된 경력도 불분명하고, 죽기 전 데커에게 지갑을 남겨 도서관증 --> 대출한 책 --> 금고 열쇠로 이끄는 과정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과거 삼총사가 저질렀던 테러 증거가 황당할 정도로 상세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지요. 뭐 하나 제대로 와 닿는게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초반부는 분명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질낮은 흔해빠진 헐리우드 스릴러로 마무리됩니다. 인기 요소는 잔뜩 집어 넣었지만 설득력도 낮고 정교함도 떨어지는 탓입니다.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리즈가 이 뒤로도 몇 편 더 이어지는 듯 한데, 더 읽을일은 없겠네요.

2015/07/13

공허한 십자가 - 히가시노 게이고 / 이선희 : 별점 3점

공허한 십자가 (보급판)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자음과모음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하라는 딸이 살해당한 뒤, 아내 사요코와 이혼했다. 그리고 5년 후 그녀마저 살해당했다는걸 알았다. 이전 장인, 장모를 통해 사요코가 남긴 원고를 전해받은 나카하라는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강도 살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알라딘 이벤트로 무료 대여해 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수수께끼 풀이가 핵심인 추리물은 아닙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음으로써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신념이 생긴 사요코가 그 신념으로 무리한 추궁을 하다가 본인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으로, 죗값과 사형제도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 볼 만한 메시지를 전달하는게 핵심이거든요. 이러한 메시지를 사요코의 죽음이 그녀의 신념과 관계되어 있다는걸 추리적 서사를 통해 밝혀내는 과정 안에 잘 녹여내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과연 베스트셀러 작가다운 솜씨에요. 그 외에도 생명이 얼마나 큰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와 청소년 피임에 대해 확실한 주의를 주는 점도 좋았고요.

그러나 사요코 사건이 단순 강도 사건이 아니고 다른 의도가 있었으리라는 것이 초반에 밝혀진 후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은 작위적입니다. 나카하라가 지즈코를 우연히 장례식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진상을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 등이 그러합니다. 아무래도 메시지 전달에 치중한 나머지 디테일을 놓친 느낌이 있습니다.

또한 사요코 죽음의 원인이 된 신념이, 딸아이의 죽음이라는 계기가 있다손 치더라도 너무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중생이 몰래 낳은 아이를 죽였다는 것은 심각한 범죄이지만, 사리분별 못하는 아이들이 벌인 일이라는 점, 공소시효가 훌쩍 지난 점, 중절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인데다가 사오리는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지옥일 정도로 인생 자체가 망가졌다는 점 등을 놓고 보면, 속죄나 정의를 실현해야 할 만큼의 죄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든 느낌이에요.

그래도 재미와 함께 생각할 거리를 전해 준다는 측면에서는 좋은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무료로 읽어서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참고로 죗값과 사형제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작중 나카하라의 입을 통해 "사람을 죽인 자는 어떻게 속죄해야 하는가, 아마 이 의문에 대한 모범 답안은 없다"라고 설명됩니다. 이것도 정답일 수는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사형 제도에 찬성합니다. 무기징역 같은 처벌로 제 세금을 흉악범들에게 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작중에서도 설명되듯, 감옥 안에서 반성하거나 갱생하는 걸 기대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목 그대로 공허한 십자가일 뿐이죠. 아울러 저 역시 딸아이 아빠로서, 작중 사건처럼 어린 딸이 무참히 살해당했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부모라면 이런 경우가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사형 제도의 문제라면 "데이비드 게일" 등에서 지적하듯 무고한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13계단" 등에서 말하듯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 역시 또 다른 살인이라는 딜레마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범인에게, 그것도 모두에게 공분을 산 흉악범에게는 확실하게 사형을 적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예를 들면 강호순, 유영철 같은 사형수들 말입니다. 제발 이런 인간들은 사형이 빨리 집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품에서 사요코가 쓴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마무리합니다.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 — 이 판단의 최대 장점은 그 범인은 이제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2014/01/22

당신의 판결은 - 모리 호노오 / 조마리아 : 별점 3.5점

당신의 판결은 - 8점
모리 호노오 지음, 조마리아 옮김/말글빛냄

도쿄 등에서 판사 재직 후, 현재는 변호사인 저자가 여러 가지 소설과 영화 속 사건에 대해 현실 법정에서의 판결이 어떨지를 설명하면서 형사 재판의 큰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책입니다. 유명한 소설, 영화 속 등장 사건에 대한 정리, 해당 사건에 대한 현실 법정에서의 판결 및 구형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작을 몰라도, 원작의 내용과 핵심 사건을 상세하게 소개해주기 때문에 읽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도진기 작가의 "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죽였을까" 와 굉장히 유사한데, "성냥팔이 소녀는..."은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유치한 설정과 소설적인 전개 때문에 많이 감점했었지요. 반면 이 책은 실제 소설과 영화 속 사건에 대한 실제 판결에 대해서 굉장히 담백하게, 아무런 치장 없이 깔끔하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분위기는 금태섭 변호사의 "확신의 함정" 쪽에 더 가깝달까요? 물론 "확신의 함정"은 판결이 아니라 개인적인 단상 중심이라서, 역시 이 책 쪽이 더 낫기는 합니다.

여튼, 전부해서 24건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내용 몇 가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격돌" - 우연히 거대 트럭에 쫓기게 된 주인공 데이비드가 격렬한 추격전 끝에 트럭을 벼랑 아래로 떨어뜨린다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초기작.

이 사건에서 데이비드는 명백한 살인의도, 즉 확정적 살의가 있기에 살인죄가 적용된다고 합니다. 생명이 위험했던, 방어에 적합한 행위라는 것을 입증하기 불가능하고 상식적으로는 서로 차에서 내려 이야기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판결은

    1. 계획적 살인에 해당
    2. 피해자 잘못도 존재
    3. 고의성 있던 확정적 살인.

즉, 피해자에게 잘못이 인정되는 계획적 살인으로 고의성 있는 확정적 살인. 징역은 10년 정도 구형될 것이라고 합니다.

"태양은 가득히" - "리플리 1"를 원작으로 한 첫 영화. 알랭 들롱의 꽃미모가 폭발하는 고전 명작이죠. 친구 톰을 죽이고 그의 행세를 하면서 재산과 심지어 애인까지 가로채는 리플리의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여기서 피해자의 물건을 횡령하고 처분하는 정도라면 생전에 자기에게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피해자 행세를 한 것은 빠져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혐의도 상해치사와 살인 중, 살인에 가까워지고요. 고의적 상해라면 보통 그 사람 행세는 하지 않기 때문이죠. 피해자와 알고 지내던 사람이 피해자와 실제로 만나본 후 증언하지 않으면 존재 증명으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결국 톰 행세를 한 것도 법정에서는 밝혀지기 마련이고요.

단, 열받아서 죽인 후 금품을 취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면 강도 목적임을 증명하기는 어렵고 범행을 완전히 부인하면 살인 입증도 힘들다고 하니.. 일단 끝까지 우겨볼 일입니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 소설로도 유명한 작품이죠.

알리바이는 어떤 불리한 증거가 있더라도 입증만 되면 무죄가 되는 극적인 효과가 있는 마술봉 같은 존재! 그러나 그 외의 경우는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되지 않는답니다.

"재와 다이아몬드" -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영화던가요? 영화는 본 적이 없는데 테러리스트의 테러에 대한 판결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 재판에서는 계획성에 금전 목적이 더해진 경우에만 사형이 적용되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나 암살자라도 한 명밖에 죽이지 않았다면 사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군요. 쉽게 말해서 사람을 죽여도 한 명이라면 사형을 선고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일본 기준입니다만.

그리고 쇼와 초기 1인 1살인을 신조로 정치권 주요 인물 암살을 실행한 혈맹단 사건에서 실행한 단원 두 명 모두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특사로 석방되어 성공한 인생을 보낸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출판사 사장과 도의원이 되었다고 하네요)

"네 멋대로 해라" - 저는 고다르의 원작이 아니라 후대에 리메이크된 리차드 기어의 "breathless"를 봤습니다. 막사는 주인공이 경찰을 총으로 쏴 죽인 뒤 벌어지는 폭주를 그린 작품이죠.

그런데 경찰을 죽였다고 사형이 구형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네요! 단지 속설에 지나지 않는다는군요. 물론 무기징역과 같은 중형을 선고받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작품에서 미셸의 범죄는 즉흥적이기에 총기 사용을 고려하더라도 징역 17~18년 수준일 것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적과 흑"

줄리앙 소렐이 레날 부인을 쏜 죄는 실제로는 징역 10년 이하 정도, 이유는 피해자가 상처만 입었지 사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살인죄가 아니라 살인미수죄죠. 작품에서도 금세 회복되는 것으로 묘사되고요.

살인미수는 피해자에게 생긴 상처의 정도와 범행이 생명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되었는지 두 가지 사항에 따라 결정되는데 전자는 결과, 후자는 행위의 위험성이라는 것이죠.

즉, 줄리앙 소렐의 범죄는 결과는 중간 정도의 상해이고 행위의 위험성은 통상적이지 않은 흉기(총)로 평균적인 징역보다 약간 높은 징역 8~9년 정도라고 합니다. 치정사건은 재판에서 감형되는 경향도 있고요. 감정이 격해져 냉정함을 잃은 상태라는 것이 참작된다는군요. 줄리앙 역시 자신의 출세길을 막은 전 연인에 대한 분노로 벌인 범죄니까요.

그러나 소설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인 베르테 사건은 반대로 베르테가 불행의 원인을 미슈 부인에게 돌리며 협박성 편지를 보내고 총을 쏜 것으로, 재판에서 불륜 관계였음을 폭로하나 평소 미슈 부인은 정숙하고 평판이 좋아서 베르테를 동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호의를 원수로 갚은 것이라 형은 더 무거워졌다고 합니다. 호의를 원수로 갚는 범행은 범행의 집요성이 높다고 판단되기 때문이죠.

"제3의 사나이" - 로로가 범죄자로 변해버린 친구 하리를 사살한 것이 유죄인가?

현실에서 일반인의 범죄자 체포는 현행범 체포에 한해서라고 합니다. 법률적으로는 사립탐정이 수사를 하고 범인을 찾아내서 체포하는 것도 안 되고, 체포하면 역으로 체포죄라는 범죄가 된다는군요. 미행도 집요하게 하면 범죄이고요(경범죄법 위반).

물론 경찰과 협력했을 경우는 좀 더 넓은 범위가 허용되기는 해서 통상 체포도 가능하기에 로로의 행위도 인정될 수 있고, 첫발은 하리가 쏜 총에 맞은 경찰이 “쏴!”라고 해서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쓰러진 하리를 향해 쏜 두 번째 발은 절대로 인정되지 못한다네요. 경찰이라고 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일. 로로는 살인죄로 기소되어야 마땅하답니다. 소설에서처럼 '이 일은 모르는 일입니다'로 끝날 일은 절대로 아니라는 거죠.

"용의자 X의 헌신"

여기서의 범행은 전 남편에 대한 과잉방어 살인으로, 형량은 평균 6~7년입니다. 그러나 가정폭력, 스토킹 등의 상대방의 행위가 있다면 형은 더욱 내려가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일이 드물지 않다는군요. 집요하게 따라다닌 전 남편 살인은 집행유예가 내려질 가능성이 높고요. 아울러 중학생 딸은 형사재판에 부쳐지지도 않고 가정재판소의 조치로 끝날 일이라 불기소처분으로 끝날 공산이 큰 상황.

그러나 수학교사 X가 뒤이어 저지른 범행은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고 독선적이고 편집증적인 행동으로 유기징역의 상한인 20년형이 예상되며, 모녀 역시 사체 유기죄가 성립되고(공모공동징발) 엄마가 경찰서에 출두해봤자 뒤늦은 것이라 자수도 성립되지 않는, 그야말로 완벽한 삽질이라 할 수 있는 결과라 합니다. 용의자 X의 삽질! 옆집에 수학교사가 아니라 변호사가 살고 있었어야 했어!!!

대충 이 정도만 정리했지만 이외의 이야기들도 유익하고 재미난 것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판결의 기준이 일본 기준이라는 것 때문에 약간 감점하지만 재미와 더불어 형법과 판례에 대한 유익하고 기본적인 지식까지 알 수 있는, 그야말로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게 해 주는 보기 드문 책이죠. 제가 원했던 스타일의 책으로 이런 류의 법률 상식책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한국 판례를 응용한 한국 버전이 나와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05/08/01

데이비드 게일 (The Life of David Gale) - 알란 파커 (2003) : 별점 4점


강간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과거 텍사스 오스틴 대학의 지적이며 존경받던 철학과 교수 데이비드 게일(케빈 스페이시). 6년간의 수감 생활 후 사형 집행일을 불과 4일 앞두고 게일은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인터뷰를 요청 하게 되며, 세인의 관심을 모았던 데이비드 게일의 살해 혐의에 대한 인터뷰는 빗시 블룸(케이트 윈슬렛)을 통해서만 할 의사를 밝힌다. 인터뷰는 화,수,목 3일간 매일 2시간씩 진행하며 금요일은 그가 사형당하는 날. 빗시는 그가 살해범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며 과거 그가 사건에 이르기까지에 행적과 진상을 알아가게 된다. 

과거 데이비드 게일은 저명한 교수이자 사형제도 폐지 운동 단체인 '데스워치'(Death Watch)의 지역부장으로 부와 명예를 함께 누려왔으나 자신이 가르치던 벌린이라는 여학생에게 유혹당해 한순간 자제력을 잃고 관계를 가지지만 학교에서 성적부진으로 퇴학당해 앙심을 품은 벌린에 의해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다. 결국 무혐의로 풀려 나긴 했지만, 그 순간부터 게일은 자신이 누려왔던 모든 것 - 사랑하는 가족, 학자로서의 명예, 최소한의 자존심 등 -을 송두리 채 잃고 만다. 이제 그에게 친구는 데스워치의 회원이자 오스틴 대학 교수인 콘스탄스 (로라 리니)만이 유일하게 남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데이비드 게일은 콘스탄스가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유일하게 남은 친구인 콘스탄스의 불치병은 그에게 커다란 낙심을 안겨준다. 하지만 그러한 콘스탄스는 성폭행 당한 후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 된다. 곧바로 경찰은 데이비드 게일을 의심하게 되며 벨린의 강간범으로 기소 되었던 그를 의심한다. 부검 결과 콘스탄스의 몸에서는 데이비드 게일의 정액이 검출이 되고 그는 강간 살해범으로 구속된다.

빗시 블룸은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점점 더 그가 무죄이며 누군가의 음모로 누명을 쓴 것 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인터뷰 중간 숙소에 침입한 누군가에 의해 콘스탄스 살해 직전의 촬영 비디오를 손에 넣은 블룸은 그의 무죄를 확신하게 되지만 이제 그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도 채 남지 않게 된다...


사회파 감독으로 이름 높은 거장 알란 파커의 2003년도 작품.
영화의 줄거리는 빗시를 주인공으로 해서 과연 데이비드 게일이 무죄인가?를 증명하고자 하는 이야기, 그리고 데이비드 게일의 과거에서 사건에 이르는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이야기의 두 가지로 짜여져 있습니다. 내용이 좀 길고 복잡해 보이지만 빗시와 데이비드의 첫 만남에서 시작해서, 관객들에게 차분히 과거 사건에 대한 회상과 증거를 하나씩 보여주며 마지막까지 끌고가는 과정이 교묘하게 잘 짜여져 있어서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인터뷰에 의한 회상과 현재 시점의 조사, 행동이 교차 편집되는 화면은 굉장히 감각적이고 독창적이어서 알란 파커가 거장이라는걸 다시금 느끼게 해 주었고요.
하루 하루 시간이 흐르며 점차 데이비드가 무죄라는 사실을 점차 관객에게 암시해 주며 그의 사형까지 빗시가 모든 증거와 단서를 모아 그를 구해낼 수 있을지?에 포커스를 맞추며 데이비드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단서를 쫓는 후반부 전개 방식은 "환상의 여인"과 비교적 유사한데, 빼어난 긴박감을 보여줍니다.
정보가 하나씩 쌓여가며 해답에 이르므로 추리 영화 매니아도 즐길거리가 많다는 장점도 큽니다. 복선도 명확하고 내용면으로 허술한 부분도 거의 없는 꽉 짜여진 덕분입니다.
그리고 "The Wall"이나 "The Commitments" 같이 음악 관련 영화로 유명한 감독답게 음악의 선곡이 상당히 좋은 것도 마음에 듭니다. 오페라 "투란도트"의 기본 내용과도 살짝 겹쳐지는 중의적 구조 역시 상당히 고급스러운 감각이 느껴졌어요.
케빈 스페이시와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도 좋았고 무엇보다 재미와 더불어 진한 메시지가 있는 묵직한 영화라 추천할 만 합니다. 
 
하지만 개봉 당시 소개되었던 것 같은 극적 반전은 별로 없습니다. 이야기가 관객에게 공평하게 모든 정보를 제공하며 흘러가서, 결말을 예상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초중반까지는 정통 추리 스릴러물의 형태를 따라가지만,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깊은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결말로 완결되기 때문에 추리물이나 반전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편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마지막에 빗시가 최후의 증거를 가지고 사형 집행장으로 달려가는 와중에 자동차가 고장나는 장면은 너무 작위적이었고, 관객에게 부가 설명을 하기 위한 사족이 약간 긴 감도 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비슷한 메시지라도 저에게는 한없이 지루하기만 했던 "데드맨 워킹" 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2026/05/16

사형집행중 탈옥진행중 - 아라키 히로히코 : 별점 1.5점

"죠죠의 기묘한 모험"으로 유명한 아라키 히로히코의 만화 단편집입니다. "사형집행중 탈옥진행중", "돌치 ~ 다이하드 더 캣",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 고해소", "데드맨즈 Q"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 특유의 기묘한 상상력과 불길한 상황 설정을 짧은 이야기 안에 압축한 이야기들로, 인물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던져진 뒤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거나 무너지는지를 주로 보여줍니다. 

감옥인지 호텔인지 알 수 없는 공간, 바다 위 요트에서 사람과 고양이간 벌어지는 기묘한 생존극, 죽은 뒤에도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듯한 인물이라는 소재는 확실히 아라키 히로히코답습니다.
아라키 히로히코 특유의 기괴한 상상력도 돋보입니다. 평범한 공간을 순식간에 불안하고 위협적인 장소로 바꾸는 감각, 인물의 육체를 과격하게 몰아붙이는 작화와 연출, 현실적인 논리보다 불길한 이미지로 독자를 압박하는 방식은 분명 개성적입니다. 또한 "돌치 ~ 다이하드 더 캣"처럼 제한된 상황에서 작은 두뇌 게임을 활용하는 대목도 눈에 띕니다. 작가의 재치를 잘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단점이 더 큽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서는 아무리 기묘한 사건이 벌어져도 스탠드라는 설정과 대결의 규칙이 있기 때문에 독자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책 수록작들은 그런 뒷받침 없이 기괴한 상황만 먼저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기묘하다는 인상은 강하지만,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인물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은 부족합니다. 결말도 대체로 시시한 편이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별로 추천할 작품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형집행중 탈옥진행중"

표제작. 한 남자가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듯한 방에 갇히면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공간은 단순한 감옥이 아닙니다. 음식과 생활 시설은 지나치게 잘 갖춰져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호화로운 호텔 방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안의 모든 사물은 죄수를 죽이기 위한 장치처럼 움직이지요. 침대, 욕실, 식사, 창문까지 일종의 함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 방 안의 구조를 파악하며 조금씩 탈출 가능성을 찾아갑니다.

이렇게 사형 집행과 탈옥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역설적인 상황이 핵심으로 주인공은 계속 죽음의 위협을 피하면서, 결국 탈옥 직전의 상황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그는 오랜 세월 탈옥을 포기한 채 그 안에 머무는 쪽을 택하는게 결말입니다. 

기괴한 발상은 인상적이고 중반부의 위기와 탈출 묘사는 흥미롭지만, 갖은 노력을 통해 탈출 직전의 상황을 만든 주인공이 수십 년 동안 그대로 남는다는 결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최소한 몇 년 안에는 결정을 내렸어야 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대충 의도는 알겠지만 마무리의 설득력이 약해서 감점합니다.

"돌치 ~ 다이하드 더 캣"

난파한 요트 위에서 남자와 고양이 돌치가 생존을 두고 얽히는 이야기인데, 이 단편집에서 그나마 두뇌게임과 반전의 재미가 살아 있는 작품입니다. 단순히 기괴한 상황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한된 공간 안에서 상대를 속이거나 유인하는 장면이 들어가는 덕분이지요. 특히 손가락을 이용해 돌치를 낚는 장면에서 아라키 히로히코 특유의 과장된 연출과 잔혹한 아이디어, 일종의 두뇌 게임이 잘 드러납니다. 대단히 정교한 추리나 전략은 아니지만, 짧은 단편 안에서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장치로는 꽤 효과적입니다.

다만 이 작품 역시 결말까지 놓고 보면 강렬한 설정에 비해 뒷맛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돌치가 생각보다 엄청난 능력이 있었다는 정도인데 반전도 아니고, 별로 통쾌한 결말도 아닌 탓입니다. 애초에 돌치의 능력에 대한 설명도 전무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 고해소"

나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내용과 작품 완성도만 놓고 보면 이 책 최고의 수록작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를 통해 이미 접했다는 점입니다. 책 값도 제법 나가는 편인데 중요한 수록작 하나를 이미 접했다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데드맨즈 Q"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제4부와 이어지는 성격이 강한 단편입니다. 키라 요시카게가 죽은 뒤의 존재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은 상태에서, 어떤 의뢰나 임무를 수행한다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작품이 독립적인 단편으로 읽기에는 설명이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키라 요시카게가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탓입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제4부를 읽은 독자라면 키라 요시카게라는 인물 자체에서 오는 흥미는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배경을 모른다면, 알 수 없는 인물이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알 수 없는 일을 하는 영문모를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어요.

즉, 단독 작품이라기보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을 이미 읽은 독자를 위한 후일담이나 외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2005/02/16

밀랍 인형 (Wax Work) - 피터 러브시 : 별점 4점

밀랍인형 - 8점
피터 러브제이 지음/뉴라이프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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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 식물원이 있는 고급 주택가 큐 스트리트의 고급 사진 스튜디오에서 사진사 하워드 클로우머의 조수 퍼시벌이 독살당했다. 경찰은 그가 사진사의 아내 미리엄을 협박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미리엄을 기소했다. 그녀는 피해자가 즐겨 마시던 와인 디캔터에 사진관에서 쓰던 청산가리를 넣어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자술서를 제출했고,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며칠 안 남은 어느날, 형사부장 크리브에게 이 사건에 대한 엄중 조사 명령이 하달되었다. 사실은 독약을 꺼낼 수 있는 금고의 열쇠는 피해자 퍼시벌과 남편 하워드만이 가지고 있었고, 미리엄은 열쇠를 손댈 수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건 수사에 나선 크리브는 미리엄 주변에 비슷한 형태의 자살-독살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하워드의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하워드가 종적을 감춘 탓에, 크리브는 법으로 엄중히 금지되어 있는 사형수 미리엄과의 면회를 통해 진상을 밝힐것을 결심하는데.... 

"마지막 형사"와 "가짜경감 듀"로 접했던 영국작가 피터 러브시의 작품. 작가에 대해 호감도 있었지만, 이 작품에 대한 다른 여러분들의 호평을 인터넷 상에서 익히 접해왔기에 헌책방에서 눈에 띄었을때 주저없이 구입하였습니다.

고전 황금 시대인 19세기 후반의 영국이 무대입니다. 손에 잡힐 듯한 시대 묘사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고보니 이 작가의 시대 묘사는 특출합니다. 3편의 장편 모두 다른 시대가 배경인데도 말이지요. 현대가 무대인 "마지막 형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20세기 초엽의 "가짜경감 듀"나 이 작품 모두 창문 밖 거리를 보고 쓴 듯한 현실감 넘치는 묘사가 압권이거든요. 특히나 이 19세기 후반의 영국이라는 무대는 "적당히 수사와 재판 등의 조직이 살아 있으면서도 무언가 2% 부족한 듯한" 고전 추리소설적인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대인데 작품과도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작가가 그것을 의도하고 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작품 속 탐정역의 크리브 형사 부장은 시리즈 캐릭터라고 하는데, 상사에게 치여살며 만년 형사부장에 머물러 있는 궁상맞은 현실적인 모습과 함께 자존심도 있고 행동력, 추리력이 탁월한 능력있는 탐정의 모습도 잘 보여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홈즈를 의식하진 않았겠지만, 당시 경찰에도 레스트레이드같은 무능한 인물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설정은(출세는 못하지만) 재미있는 아이디어였어요. 뭐 레스트레이드도 우직하고 성실하다는 점에서는 능력있는 인물이겠지만요.

하지만 이 크리브 형사 부장보다 이 작품을 빛내는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미리엄이라는 영국 스타일 "팜므파탈"입니다. 주로 "몸"으로 승부하는 경향이 짙은 미국식 팜므파탈에 비교해서 상류계급의 귀부인이라는 사고방식, 엄숙하고도 단정하면서도 곧은 행동거지로 무장하고 약점과 눈물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치밀하고 독사같은 면모를 갖춘 독특한 악녀의 모습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뽐냅니다.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움 역시 갖추고 있고요.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은 굳은 마음과 치밀함도 큰 무기입니다. 비록 마지막 장면에서 결정적 실수를 범하며 무너지긴 했지만, 아주 흥미로운 캐릭터였습니다. 이야기도 스토리텔러로서의 피터 러브시의 진가를 잘 보여줍니다. 크리브 형사부장이 서서히 사건을 파헤치며 드러나는 과거의 또 다른 자살 사건, 그리고 과거 사건과의 이해할 수 없는 연관성에서 비롯된 추리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승부! 결국 마지막에 "일사부재리 원칙"이라는 결정적 법 조항으로 밝혀지는 진범의 정체와 반전 모두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독자를 서서히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서 나중에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드러내는 솜씨는 그야말로 대가다왔습니다. 제목 그대로 사형집행인과 타소 밀랍 인형관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보다 긴장감을 자아내면서도, 당시 시대상을 느끼게 해 주는 연출 역시 발군이고요.

하지만 작 중에서 가장 큰 의문인 "도대체 그 여자는 어떻게 자물쇠를 열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을 마지막 승부에서 크리브 형사부장이 이끌어내는 부분은 약간 치밀함이 부족했고(물론 이 사건에서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는 나름대로의 전제조건이 있어서 좀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해답이 급작스럽게 돌출된다는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래도 상당한 수준의 트릭으로 지적 흥분과 재미를 가져다 준다는건 분명합니다. 중편 정도의 부담없는 분량도 매력적이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추리 소설사에 길이 남을만한 매력적인 팜므파탈이 등장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PS : 그나저나 "마지막 형사"와 "가짜경감 듀"는 물론 엄청나게 재미있게 읽은 책이지만 좀 길었다고 느껴졌었는데 이 책은 깔끔하네요. 아무래도 이 정도 길이가 저한테는 딱 맞는 것 같습니다.

2018/10/21

불티 - 시즈쿠이 슈스케 / 김미림 : 별점 2.5점

불티 - 6점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미림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 지방법원의 판사 가지마 이사오는 일가족 살해 혐의를 받던 다케우치 신고 재판을 마지막으로 퇴관했다. 그의 마지막 판결은 무죄판결이었다. 그리고 2년 뒤, 다케우치기 가지마 이사오 바로 옆 집으로 이사왔다. 가지마 가(家)의 모든 대소사에 성의를 다하는 그에게 집안 사람들 모두는 호감을 느꼈지만, 며느리 유키미만은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는데...

법률 미스터리로 유명하다는 작가 시즈쿠이 슈스케의 장편입니다. 한번 손에 잡으면 내려 놓을 수 없다는 뜻의 '철야책' 이라는 별명이 있다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조금 다르더군요. 작가의 이력, 그리고 초반부의 판사 가지마 이사오의 재판과 그에 관련된 딜레마 때문에 당연히 법률 미스터리인 줄 알았는데 싸이코 살인마 다케우치와 가지마 가(家)의 대결을 그린 전형적인 서스펜스 스릴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대결에서 전해지는 서스펜스가 읽는 내내 넘쳐서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해 주기 때문에 '철야책' 이라는 별명에는 충분히 값합니다.
다케우치가 가지마가(家)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하면서 유일하게 비협조적인 인물인 며느리 유키미를 배제해 가는 첫번째 과정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의심들이 쌓여 진상을 알게 된 어머니 가지마 히로에가 위험에 처하는 전개, 뒤이어 집안일에 무심했다가 뒤늦게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가지마 이사오와 그를 돕는 유키미의 활약이 교차되는 후반부까지 정말로 흥미진진한 덕분입니다. 다케우치가 수상하다는건 상당히 초반부터 암시되어서, 어떻게 남은 500여 페이지를 끌고 갈까 궁금했는데 여러가지 장치를 통해 흥미를 더하는 솜씨가 일품이에요. 특히 유키미 배제에 그녀의 딸 마도카를 이용하는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쿠르트로 밤 잠을 못 자게 하고, 창문으로 보이는 자기 집에서 약간의 조작으로 마도카가 인형 놀이를 과격하게 하게끔 유도하면서 유키미의 폭행을 끌어내는 식인데 치밀하면서도 설득력이 높아 감탄했습니다.

아울러 싸이코 다케우치의 설정도 독특해서 나름의 재미를 선사합니다. 사실 착하고 평범해 보였던 지인이 알고 보니 싸이코 살인자더라.. 라는 설정의 작품은 쎄고 쎘죠. 스플래터 고어 호러가 아닌 싸이코 살인자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작품이 아마 비슷한 설정일 거에요. 주인공이 살인자의 정체를 알아내지만 주위 사람들은 주인공 말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주인공이 살인자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다는 식의 이야기 전개 역시 대부분 비슷할테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살인자 다케우치가 자신의 재력을 활용하여 상대방에게 무한에 가까운 호의를 베풀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상대방으로부터의 애정과 호감을 강요하는 인물이라는 설정이 큰 차이점입니다. 한마디로 애정과 호감을 자신의 돈과 성의로 사려고 하고, 이를 거절당했을 때 격렬한 살의를 품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호감을 자신만의 기준으로 착각하는 스토커, 혹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싸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들처럼 자신의 이득을 중시하는 인물이 아니라는게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다케우치는 가지마 이사오가 재판관 시절 무죄 판결을 내린 피고 출신이라는 설정도 새롭습니다. 이는 다케우치가 가지마가(家)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정말 무죄로 보이는 다케우치의 묘사를 통해 독자들도 정말 진범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중반부의 가장 큰 승부인 피해자 유족 이케모토와 대면한 다케우치가 이케모토가 진범이 아니냐고 되묻는 장면이 특히 그러합니다. 주인공인 유키미마저 속아넘어갈 정도이니 독자야 오죽 하겠습니까.

하지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원죄 운운한다던가, 재판관으로서 사형 선고를 내리는 심경을 그려내는 등의 법률 미스터리스러운 설정은 내용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불필요한 묘사였습니다 제목의 '불티' 부터가 사건의 원인이 된 다케우치의 무죄 판결을 뜻하는데(아마도), 내용만 보면 이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다케우치를 스스로 단죄하고 죗값을 받는 가지마에 대한 에필로그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자기 눈 앞에서 아들을 죽이려 하는 살인자를 누가 가만 놔 두겠어요? 이러한 전개를 통해 사형 선고 등 현재 사법 시스템의 문제와 딜레마를 짚고 넘어가려면 앞부분에서 가지마 이사오가 사형 선고에 극도의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더 드러냈어야 합니다. 현재 수준으로는 죄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걸 간접 살인이라고 생각하던 인물이 스스로 사람을 죽인 상황에 대한 딜레마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억지로 법관 설정과 모호한 주제 의식을 끼워 넣은 탓이 큽니다. 그냥 평범하고 착하게만 살아온 동네 할아버지가 주인공이었다면 그럴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분량과 내용도 훨씬 깔끔했을테고요.

그 외에도 다케우치의 무모한 범죄가 이어지는 와중에 그가 수상하다는 걸 가지마 이사오가 몇일에 불과한 조사로 알아내는 전개는 경찰과 검찰이 대체 무엇을 했는지 의심을 품게 만들며, 사건의 핵심인 다케우치 등에 나 있던, 도저히 혼자서 낼 수 없는 상처를 낸 트릭도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방망이에 줄을 묶어 기둥을 축으로 회전시켜 등을 때렸다는 건데... 이 정도로 세 명이나 살해당한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무죄 판결이 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히로에의 시어머니 간호와 고부 갈등, 유키미의 집안 문제도 사족입니다. 시어머니의 죽음이 사건의 도화선이며 장례 일정과 이야기가 발 맞춰 돌아가기는 하지만 시어머니, 시동생 이야기는 뺐어도 됐을 것 같아요. 읽으면서 가장 짜증이 났던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충분하지만 단점도 있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드라마화도 두 번이나 되었을 만큼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조금 고급진(?) 킬링 타임용 소설을 찾으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참고로, 두번째로 제작된 드라마는 다케우치 역을 춤추는 대수사선의 마시타 유스케 산타마리아가 연기했다니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조금 조사해보니 결말 부분이 다르긴 하지만요. 가지가 이사오가 마지막에 다케우치에게 진짜 유죄 판결을 내리고 다케우치는 자살을 택하는 결말인데 앞서 말씀드렸던 제가 느꼈던 문제점 - 가지마가 살인을 저지르고 죗값을 받는다는 와닿지 않는다 - 을 제작진도 공감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2020/08/09

테미스의 검 - 나카야마 시치리 / 이연승 : 별점 3점

테미스의 검 - 6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를 동족 인간이 판단하는 행위 자체가 불손하고 오만하네. 구로사와 재판관 (시즈카 재판관의 스승) 

쇼와 59년 (1984), 부동산업자 구루마 부부가 살해당했다. 우라와 경찰서 검거율 1위인 나루미 경부보는 유력한 용의자 구스노키 아키히로를 불법으로 연행하여 심문한 뒤 자백을 이끌어냈다. 나루미의 파트너인 신참 형사 와타세는 나루미의 방식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말없이 따랐다.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아키히로는 결국 몇 년 뒤 구치소에서 자살했다. 

헤이세이 1년 (1989) , 나루미의 은퇴 후 도지마와 파트너가 된 와타세는 가미키자키에서 발생한, 고급 주택에서 아이와 아이 엄마가 강도에게 살해된 사건 수사에 나섰다. 주변에 목격자가 없는 환경이라 수사는 난항을 겪지만, 도지마와 와타세 컴비는 이 사건이 단순 빈집털이 사건인 오하라 현장과 유사하다는걸 알아낸 뒤, 흉기와 도구에서 열쇠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확인하고 관련자들을 수사해 나간 끝에 범인 사코미즈를 체포했다. 그리고 와타세는 이 사건이 쇼와 59년 부동산업자 살인 사건과 유사하다는걸 깨닫고 심문을 통해 사코미즈가 진범임을 밝혀냈다. 

와타세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다가 조직으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지만, 시즈카 재판관 등의 조언을 받고 사코미즈의 조서를 공개했다. 이후 언론의 대대적인 공세와 함께 사건 관계자들은 모두 좌천되거나, 해임되고 말았다. 그러나 핵심 수사관이었던 나루미는 이미 퇴임한지 3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리고 와타세는 내부 고발자로서 온다 검사로부터 보호받아 처분에서 빠져나갔다. 와타세 본인은 이에 대해 크게 자책하며 두 번 다시 수사에 오점을 범하지 않는 형사가 될 것을 결심한다.

23년 뒤인 헤이세이 24년 (2012).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사코미즈는 출소 직후 공중 화장실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고, 수사 1과 1반을 맡는 경부가 된 와타세는 독자적인 사건 수사에 나선다...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 등으로 접했던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의 장편입니다. 잘못된 수사와 판결에 의한 '원죄'를 주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 왜 가해자보다 피해자 가족이 더 비참해져야 하는지, 흉악한 살인범도 인권이라는게 있는지 등 여러가지 질문을 많이 던져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파 소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사회파스러운 소재에 더해진 본격 추리라는 작풍이 작가의 특징인 듯 한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에요. 특히 '재판, 특히 사형 판결을 내린다는게 얼마나 무거운 행위인지' 알려주는 작품은 여러 편 보아 왔지만 묵직한 내용을 추리적으로 잘 포장한 작품은 "데이비드 게일"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그런 점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이야기는 시대순으로, 사건별로 구분되어 전개되지만 크게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중반부까지 이어지는, 부동산 업자 부부 살인사건 용의자 아키히로의 자백을 받아내어 그는 사형 선고를 받지만, 5년 뒤 일어난 고급 주택가 모자 강도 살인 사건 수사를 통해 진범이 드러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사에 대한 묘사는 빼어납니다. 우선 부동산 업자 부부 살인 사건에서는 나루세 경부보가 용의자 아키히로를 옭아매는 조작 수사와 그 결과에 의한 재판이 아주 상세하고, 5년 뒤 일어난 고급 주택가 모자 살인 사건에서는 와타세 형사의 추리에 이은 수사에 대한 설득력이 높습니다.
모자 살인 사건 범인은 '열쇠업자' 일거라는 착안이 특히 빼어납니다. 범인은 도주하면서 직접 만든 자물쇠 따는 도구인 '피크'를 버렸는데, 와타세는 다시 만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리한 뒤 관련자 수사에 나서 범인을 체포하게 되거든요. 이후 범인 사코미즈가 전편에 등장했던 부동산업자 살인도 저질렀다는걸 알아차리는 과정 역시 이치에 합당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중반 이후, 진범 사코미즈가 모범수로 감형되어 23년 후 출소하자마자 살해된 사건에 대해서 다룹니다. 앞서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수사 중심이지만, 의외로 본격 추리물 느낌도 강하게 전해 줍니다. 알리바이 조작, 흉기 은닉과 같은 정통 트릭이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마지막에 와타세 경부가 범인인 아키히로의 부친을 찾아가 사건 시각에 경운기에 탔던건 치매에 걸린 아내이고, 흉기는 농기구인 경운기 부품이었다고 밝히는 장면은 추리쇼와 다를게 없고요. 여기에 사코미즈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반전 -그를 죽이려는 온다 검사의 음모였다는 - 까지 더해져 추리적으로는 아주 풍성한 편입니다.

주인공인 와타세 경부도 매력적이에요. "연쇄 살인범 개구리 남자"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수사 기계처럼 등장했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 이유가 잘 드러납니다. 과거 원죄를 저지른 과오를 깊게 인식하고 두 번 다시 수사에 오점을 범하지 않는 형사가 될 것을 결심하는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수사 기계보다는 인간적인 모습, 고뇌하고 고민하는 입체적인 모습이 많이 보여져서 좋았습니다. 내부 고발자라 주위의 눈총을 받는 탓에 출세를 포기하고 범인 체포에 열중하는 모습도 설득력 높고요. 작품 속 진짜 수사 기계인 나루미 경부보는 알고보니 사건 해결에만 집착하는, 자기 중심적인 악당이라서 대비가 강렬했던 탓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 같습니다. 본 작품이 와타세 경부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라는데, 후속권도 계속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개구리 남자"의 주인공이었던 고테가와의 카메오 출연도 반가왔고요.

그러나 '진짜 흑막은 온다 검사!'라고 내세운 반전은 지나쳤습니다. 초반에 정의로운 모습을 보였던 온다 검사가 부동산 부부 살인 사건의 목격자로, 사건 당시 현장 근처 러브호텔에서 불륜을 저지르다가 범인을 목격했지만 나서서 증언하지 않은 바람에 애꿎은 아키히로가 사형 선고를 받고 죽게 되었다는 설정까지는 그럴싸 합니다. 범인 사코미즈도 '커플에게 들켰지만 경찰은 찾아내지 못한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비오는 밤에 커플이 사코미즈의 얼굴을 기억했을지 여부도 불투명하거니와, 사코미즈가 당시 목격자인 온다 검사의 얼굴을 기억하여 협박하려 했다는건 정말이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무려 28년 전 비오는 밤에 잠깐 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을겁니다.

또 와타세 경부의 수사처럼, 28년 전 사건의 첫 목격자가 당시 '유명 연예인을 닮은 사람'을 보았던걸 떠올린 덕분에 그 선을 수사하여 진상을 알아냈다는건 그나마 말은 됩니다. 허나 이 역시 그 연예인 닮은 사람이 진짜 그 연예인이었다는건 지나친 우연으로 느껴집니다. 이런 불확실한 목격 증언에 기대는 것 보다는, 사코미즈가 출옥한다는 편지를 피해자 가족에게 보낸 누군가를 상세히 캐 보는게 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싶군요.

그리고 사코미즈가 아키히로 부친에게 살해당한다는건 더욱 억지스러웠습니다. 직접적인 피해자 가족인 부동산 업자 부부의 딸이나, 모자 살인 사건의 남편이 살해했다면 말은 됩니다. 하지만 아키히로의 부친이 진범 사코미즈를 살해한다? 부친이 원죄 사건에 대해 복수를 하고자 하면 최우선 목표는 나루미 경부보가 되어야 합니다. 사코미즈는 원죄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아키히로가 사형 판결을 받고 자살한건 경찰의 무리한 수사, 검찰의 무리한 기소, 그리고 이를 제대로 확인못한 재판관의 잘못이니까요. 그리고 와타세 경부도 이야기 하듯, 무려 28년을 (아키히로가 자살한 것부터로는 25년 쯤?)참고 살다가 급작스럽게 복수를 결심한다는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아울러 이 세 명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온다 검사는 어쩔 셈이었는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문제에요. 사코미즈를 없애기 위해서는 세 명의 피해자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는 정도로는 불충분했을텐데 말이죠. 애초에 편지를 보내는 것 보다는 그냥 사코미즈의 주장을 무시하는게 정답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리고 중반부에서 경찰 조직이 과거의 실수를 알아채고 증거 (조서)까지 확보한 와타세가 이를 밝히려하자 철저히 격리시키고, 심지어 폭행까지 저지르는 과정이 지나치게 뻔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조직의 잘못을 알게 된 언론도 대중과 영합하여 총 공격에 나서며, 관계자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보호되고 처벌받으며 이 와중에 지나친 관료 주의가 대두되는 등등 모두가 이런 류의 작품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던 묘사들이에요. 게다가 와타세가 관계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며 사죄하는 모습은 솔직히 어이가 없더군요. 당연한 결과인데 말이지요. 본인이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은 것은 의아해할 수 있어도, 이는 조직에서는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내부 고발자는 보호하는데 마땅하니까요. 와타세는 나루미 경부보만 처벌받으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일까요? 말리는 선배까지 힘으로 눌러버리던 모습은 다 어디갔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묘사는 와타세 경부라는 캐릭터를 위해서는 불필요했다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비록 단점은 있지만 묵직한 주제를 추리적으로 재미있게 포장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원죄에 대한 뻔한 묘사는 조금 줄이고, 온다 검사 수사에 조금만 더 설득력을 부여했더라면 별점 4점도 충분했을거에요. 물론 이 정도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니만큼,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께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2020/08/28

사고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유혜자 : 별점 3점

사고 - 6점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유혜자 옮김/아래아

섬유회사에 다니는 나이 마흔다섯 살의 신체 건강하고 외무 준수한 알프레도 트랍스는 그의 애차 스투데베커의 급작스러운 고장으로 한 시골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트랍스를 저녁 식사와 함께 하는 그들의 게임에 초대하고, 트랍스는 초대를 받아들였다. 게임은 전직 판사, 검사, 변호사에 사형 집행인이었던 집주인과 손님들이 벌이는 모의 법정 놀이로, 그 날은 트랍스가 피고가 되어 그의 유죄를 증명하게 되는데....

독일 작가 프레드리히 뒤렌마트의 짤막한 단편입니다. 평범한 영업맨으로 보였던 트랍스가 상사였던 기각스를 해치우기 위한 범행을 계획하고 실천한 살인범이라는게 드러난다는 내용으로 일종의 완전 범죄물이지요. 

트랍스는 직장 상사 기각스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서 기각스가 심장이 약하다는 걸 알게되고요. 그 뒤 회사 내에서 기각스와 잘 소통하는 직원에게 불륜을 털어놓아 기각스가 그 사실을 알게끔 만들었고, 그 탓에 기각스는 심장 이상으로 죽고 맙니다. 

문제는 어느정도 고의였다 하더라도 트랍스의 행위만으로는 범행을 증명하기는 애매하다는 점입니다. 진지한 법정에서라면 트랍스가 유죄 판결을 받는건 불가능했을거에요. 그런데 이를 '모의 법정 놀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돌파하고 있습니다. 모의 법정 놀이는 트랍스가 방문한 시골 마을에서, 은퇴한 옛 법조인들이 함께 하는 저녁 만찬에서 벌어지는 놀이인데, 판사와 검사, 변호사와 사형 집행인까지 조합은 완벽하지만 놀이인 탓에 분위기는 시종 일관 난장판입니다. 참석자들이 나오는 음식과 술을 과다 섭취한 탓도 있고요. 이렇게 반쯤은 미쳐 날뛰는 광란의 도가니탕이라 트랍스마저도 스스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할 정도로 휩쓸려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스스로 범행을 저지른 살인자임을 자각하게 되지요. 

이렇게 왁자지껄 떠들썩한 모의 법정 놀이는 그야말로 현대적이면서도 참신한 아이디어였습니다. 1956년 출간된 작품이니 무려 반세기도 더 지난 고전인데도 말이지요. 작중에 나오는대로 소크라테스, 예수, 잔다르크, 드레퓌스의 모의 법정 놀의 결과도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이러한 현대적인 설정과는 반대로 혼외 정사, 불륜을 전혀 범죄라 인지하지 못하는 트랍스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시대를 느끼게 해 주고요.

하지만 마지막 결말은 좀 뜬금없었습니다. 트랍스는 자신이 완벽한 범죄를 저지른 전능한 범죄자로 인식되어 유죄, 그리고 사형 판결을 받아 굉장히 기뻤던 나머지, 법정 놀이를 완벽하게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하지만 오히려 남은 전직 법조인들에게는 짜증나는 결과였다는 결말인데, 납득이 가지는 않았어요. 사람은 모두 죄를 짓기 마련이고, 인생사는 결국 희극이라는걸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였을까요? 짐작하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충분히 좋은 작품입니다. 모의 법정 놀이라는 아이디어도 기발하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굉장히 짤막하고 읽기도 편한 만큼,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작가의 이름값(?)도 있는만큼, 읽고 난 뒤의 만족감은 두 배 이상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2018/06/02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 - 시미즈 기요시 / 문승준 : 별점 4점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 - 8점
시미즈 기요시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모두 5명의 어린 여자 아이들이 유괴된 후 살해되거나 실종된 북관동 연쇄 아동 납치 살인 사건에 대해 파고든 탐사 보도 논픽션입니다. 미제 사건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취재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는 "그것이 알고 싶다"가 떠오릅니다. 이런 류의 컨텐츠에 관심이 많기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추천작입니다. 재미 측면만으로도 나무랄데 없는 덕분입니다. 전체적으로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5건의 사건 중 1건의 사건에 대해 유죄로 판결받아 무기 징역을 선고받고 17년 반 동안 투옥되었던 스가야가 진범이 아님을 증명하여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게 만드는, 400여 페이지 분량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야기부터 그러해요.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증거였던 DNA 감정의 오류를 취재를 통해 밝혀내는 과정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얻어낼 정도로 탄탄한 논리와 함께 드라마틱하게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스가야가 자전거로 피해자 마미를 유괴했다는 거짓 자백이 17년 후 만난 마미 어머니에 의해 마미는 유아용 안장에만 탄다는 게 밝혀지며 부정되는 장면, 스가야가 무죄이기에 곧 풀려날 것으로 믿고 미납한 세금을 내려고 했다는 등의 디테일과 누명을 쓴 피해자의 구명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루팡 3세"를 닮았다 하여 "루팡"이라 부르는 실제 범인은 누구인지?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 역시 추리 소설을 연상케 합니다. 이미 알려져 있거나 아니면 이 책에서 언급되듯 "기자라도 제대로 조사할 수 있었던 것" 들만 제대로 조사하여 얻은 정보를 토대로 범인의 조건 - 지리에 밝고, 담배를 피우고, 휴일에 파친고를 다닌다는 등 - 에 맞는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추리 소설 그 자체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스가야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시미즈 기자가 이 사건을 파헤치며 경찰의 한심한 작태를 고발하기 위해 예를 든 "오케가와 사건", 잘못된 DNA 형 감정이 주요 증거로 사용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된 "이이즈카 사건" 에 대한 취재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중에서도 "이이즈카 사건" 에 대한 비중이 높은데 스가야 씨가 누명을 쓴 과정처럼 모순된 DNA 감정, 잘못된 목격 증언 등 경찰이 입맛대로 고른 증거만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집행되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이즈카 사건"은 DNA 형 감정 결과는 주요 증거의 하나일 뿐 다른 증거도 많아서 사형된 구마 씨가 진범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시미즈 기자가 다른 증거들 - 자동차 목격 증언 들 - 을 시뮬레이션을 통해 잘못된 증거라는 걸 밝혀내는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에요. 경찰이 이런 정도의 검증도 하지 않고 증언 만으로 범인임을 확정했다는 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경찰이 스가야를 범인으로 이미 확정한 후, 신발 밑창의 무늬를 기억하고 그리라고 하면서 따라 그리라고 샘플을 전해 주었다는 식으로 증거들을 그에 맞춰 조작하거나 날조했다는게 밝혀지는 과정과도 일맥상통하기도 하고요. 일본 경찰은 우수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런 취재를 접해 보면 과연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약촌 오거리 사건' 같은 사건이 있으니 남의 이야기라 할 수도 없네요.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경찰이 마음을 먹고 범인으로 몰면 빠져나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 싶습니다. 무섭군요.

이렇게 재미를 안겨다 주지만 결말은 조금 아쉽습니다. 스가야 씨의 무죄는 증명했지만 경찰과 검찰의 제대로 된 사과는 별로 이끌어 내지도 못했고, 모순 투성이의 DNA 형 감정 문제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진범 체포 노력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현실을 그리고 끝나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세상은 바뀌고 있고 바뀔 것이라는 나름의 희망섞인 메시지는 전해지지만 아직까지는 많이 부족한게 사실인 듯 합니다.
또 진범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실체는 여러가지 이유로 공개하고 있지 않은 것도 아쉽습니다. 일개 기자의 취재 결과로 특정인을 범인이라고 지목하기는 무리일테고, 이미 경찰에 그 존재는 알린 만큼 더 이상 기자의 일은 없겠지만 후일담이 무척 궁금한데 말이지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책 자체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재미 뿐 아니라 생각해 볼만 한 메시지를 함께 전해주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와 같은 미제 사건을 다룬 컨텐츠를 좋아하신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 책을 원작으로 한 만화 버젼도 있다고 하는데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2009/05/02

처형 6일전 - 조너슨 라티머 / 문영호 : 별점 3점

처형 6일전 - 6점
조너슨 라티머 지음, 문영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로버트 웨스틀랜드는 이웃 사형수의 자살소동을 보고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깨우친 뒤, 자신의 돈을 이용하여 단 일주일 남은 사형 집행때까지 진범을 잡고자 한다. 유일한 단서는 그의 무죄를 증언해 줄 수 있다는 정체불명의 편지 뿐이었다. 웨스틀랜드는 유능한 변호사 핑클슈타인, 사립탐정 윌리엄 크레인과 그의 조수 윌리엄즈를 고용한 뒤, 자신의 지인과 친구들을 총 동원하여 자신의 누명을 벗고자 하는데 남은 시간은 단 6일!

조너선 (조나단?) 라티머의 대표작이자 하드보일드 스릴러의 명편으로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멋진 고전입니다. 어렸을 때 아동판으로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이번에 알라딘에서 동서 추리문고 할인 행사를 하길래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요새 야구만 보는 것 같아서 연휴도 되고 했기에 맘잡고 한번에 읽고 포스팅합니다.

이 책의 특징이라면 위의 줄거리처럼 윌리엄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을 많이 연상케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두 작품을 착각한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환상의 여인"은 정말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단 한명의 목격자를 찾기 위한 고난의 과정을 강렬한 서스펜스와 함께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서스펜스보다는 하드보일드적인 탐정의 수사과정과 주인공이 뒤집어 쓴 누명을 파헤치는 추리 부분이 더 돋보이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추리물에 가깝다는 명확한 차이점도 있습니다.
굉장히 간단하긴 하지만 맹점을 찌르는 밀실 트릭, 그리고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시간차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하는 등 추리적으로는 정말이지 나무랄데 없는 수준이며, 진범을 밝히는 과정 역시 설득력이 넘치고 중요한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는 등 추리 애호가로서 즐길거리가 충분합니다. 트릭이나 구성이 지금 읽으면 굉장히 쉬운 발상이라 식상할 수 있는데 작품과 잘 어울리도록 구성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반전과 진범의 정체도 납득할 수 있으며 합리적인, 타당한 결말이라 무척 만족스럽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중반 이후부터 서스펜스가 확 죽긴 합니다. 추리물로 돌변하면서 주인공이 탐정 윌리엄 크레인으로 바뀌기 때문에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심리묘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거든요. 단점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전체적인 균형 면에서 약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죠. 뭔가 더 끄집어낼게 있어 보였던 옆방 사형수들도 흐지부지 사라져버리는 것도 좀 애매했습니다.

덧붙이자면, 윌리엄 크레인이라는 캐릭터가 작중에서 하드보일드 탐정다운 간지도 없고 일체의 호감도 느껴지지 않아 몰입하기 어려운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하드보일드 치고는 두뇌가 결합된 행동파 탐정이라는 독특한 면은 있지만 지나치게 본능 - 술과 여자 - 에 탐닉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불성실해 보였거든요. 이런 친구한테 목숨을 내 맡긴 웨스틀랜드가 불쌍해질 지경이었어요.

그래도 고전적 하드보일드 스릴러물이면서도 "정통 추리"의 요소를 잘 도입한 이색적인 작품이라 지금 읽어도 그 매력이 충분한 고전명작이라 생각합니다. 걸작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추리와 하드보일드 모두를 좋아하신다면 추천할만한 작품으로 제 개인적인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웨스틀랜드는 살아나긴 했어도 잃은게 너무 많아 보이네요...

덧붙이자면, 솔직히 별점은 3점 이상을 줄 수 있는 작품인데 번역이 너무 별로라서 도저히 3점이상은 못 주겠습니다.... 동서 추리문고의 가장 큰 단점이기도 한데 몰입해서 읽기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어요. 대사의 구분도 이상해서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불필요한 장황한 묘사를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직역으로 표현하는 등 읽다보면 머리가 아플 정도였거든요. 예를 들자면 '해걸음은 점점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환등기 앞에서 누군가가 모슬린을 두 겹 네 겹을 차곡차곡 접어서 포개 놓아가는 듯 했다' 라는 문장을 들 수 있겠네요. 뒷부분이 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불필요한 묘사이기도 하고요. 그냥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정도면 얼마나 좋아? 하여간 이런 문장이 전편에 난무합니다...

2009/07/08

파리의 밤은 깊어 - 노엘 칼레프 / 김두남 : 별점 2점

파리의 밤은 깊어 - 4점
노엘 칼레프 지음, 김두남 옮김/해문출판사

간만에 본업(?)인 추리소설의 포스팅인 것 같네요. 이번에 읽은 작품은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로 이미 접한 프랑스 작가 노엘 칼레프의 데뷰작인 "파리의 밤은 깊어" 입니다. 제 고전 선호 취향 탓에 집어든 작품이죠.

마약 운반책으로 일하며 사랑하는 약혼녀와의 행복을 위해 조직 탈출을 꿈꾸는 바스티앙은 자신이 속한 "아르메니아인" 조직의 라이벌 조직을 찾아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대신, 자신의 탈출을 보장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라이벌 조직은 바스티앙의 축구공 대신 안에 "폭탄"이 들은 축구공을 주고 폭탄을 아르메니아인에게 가져다 주라고 시키지요. 하지만 바스티앙의 실수로 동네 꼬마들 축구공과 공이 바뀌어 버린 뒤, 파리 경찰, 범죄조직, 꼬마들, 병원 등 다양한 사람들과 얽히고 섥힌 하룻밤의 대 소동이 시작됩니다!

일단 읽으면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줄거리 요약만 봐도 비슷하지요? 마약을 운반하는 운반책과 범죄조직, 그리고 시한 폭탄을 동네 꼬마들과 바람난 남편, 이탈리아인 떠벌이 트럭 운전사, 꼬장꼬장한 병원장과 간호사들을 한데 묶고,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소해 보이는 일부터 시작해서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리는 사건들, 복잡한 이야기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들에 대한 묘사 등 기본 뼈대가 그야말로 형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똑같습니다. 또한 마약을 숨겨 운반하는 축구공에 대한 아이디어 말고는 추리소설이라고 부를만한 요소가 거의 없는 범죄-서스펜스-스릴러 물이기 때문에 추리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는 것, 그리고 추리적 요소가 없는 대신 폭탄을 찾고자 하는 경찰과 방송의 노력을 한발자국씩 빗겨나가는 폭탄 주인의 모습 같은 서스펜스 요소가 굉장히 강력하다는 것도 역시 동일하고 말이죠. 

그러나 이러한 서스펜스들이 대부분 우연에 의지하고 있으며,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 비한다면 아무래도 범죄조직이 등장하고 살인 청부나 총격전 같은 묘사가 많기때문에 블랙코미디적인 부분이 잘 드러나지 않아서 유쾌함이 떨어지며, 마지막에는 결국 무고한 형사가 사망하는 등 뒷맛까지 찝찝해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더군요. 무엇보다도 반전같지 않은 반전이 포함된 결말이 가장 큰 감점요소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뻔하고 낡은 결말이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50년대 프랑스 추리소설에 대해 관심이 없으시다면 챙겨보실 필요는 딱히 없을 것 같네요. 차라리 영화에 더욱 더 잘 어울렸을 것으로 보이기에 영화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혹 온다면 그때 챙겨보시는 것이 더 나을테고 말이죠. (그런데 영화가 나오려나...)

2015/09/01

팡토마스 1 - 피에르 수베스트르, 마르셀 알랭 / 성귀수 : 별점 2점

팡토마스 1 - 4점 피에르 수베스트르.마르셀 알랭 지음, 성귀수 옮김/문학동네

아주 어렸을 적, 아마 초등학교 시절 "팡토마"라는 영화를 TV를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로는 보기 드문 프랑스 액션 영화로 시끌벅적한게 재미있었지요. 무엇보다도 “팡토마”가 주인공이 아니라 악당 조직의 우두머리 범죄자 이름이라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범죄자가 주인공인 작품이야 뤼뺑을 필두로 많긴 하지만 그래도 악당이라기보다는 안티히어로 같은 캐릭터인데 반해, 팡토마는 잔인무도한 악당이라는 점 때문이었지요. 만화 버전 루팡 3세 스타일이었달까요? 시퍼런 얼굴빛의 범죄 신사로 두 편의 시리즈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잡히지 않고 도망친다는 결말도 기억에 남네요.

이 작품이 사실은 100년도 더 된 옛날 프랑스에서 발표된 범죄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영화를 감상한 한참 이후, 장르문학 애호가가 되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보만 있을 뿐 국내에서 출간된 이력이 없기에 입맛만 다셔왔습니다. 어린이용으로 발표된 절판본을 어렵사리 구하기는 했지만 번역도 문제였고, 축약이 심해서 제대로 감상했다고 보기는 어려웠고요.
그런데 이러한 기다림의 시간에 보답하듯 "뤼뺑" 시리즈 완역으로 유명한 전문 번역자 성귀수 씨께서 직접 손댄, 정말로 제대로 된 원작이 출간되었습니다. 사실 출간은 어언 3년 전이긴 하지만요.

하여튼, 뒤늦게 읽은 이 작품은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위에서 절절히 소개한 대로 오랫동안 관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읽지 않은 이유는 기대가 별로 되지 않았던 탓입니다. 걸작으로 유명한 고전에서 뒷통수를 맞은 경험이 많아서인데, 역시나 이 작품 역시 오랜 기다림과 기대에 값하는 작품은 아니더군요.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시간이 오래 흘렀기 때문입니다. 발표 당시 충격을 안겨다 주었을 여러 설정과 아이디어는 이미 다른 작품들에서 숱하게 써먹은 탓에 신선함이 휘발된 지 오래거든요. 예를 들어 변장에 능숙한 천재 범죄자와 뛰어난 추리력을 갖춘 탐정의 대결, "괴인 20면상" 시리즈와 다를 게 없잖아요?

소설로서의 완성도 역시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창작 배경부터가 철저한 상업성이었고, 신속한 저술이 더욱 중요했다고 하니 애시당초 완성도가 높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지만 정말 기대 이하였어요.
일단 사건이 반복되는 전개부터가 문제입니다. 랑그륀 후작부인 살인사건, 벨담경 살인사건, 에티엔 랑베르 재판 (랑그륀 후작부인 사건과 이어지는), 소냐 대공비 강도사건, 거언 체포, 돌롱 살인사건이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데, 사건 하나하나는 흥미진진하지만 이어지는 방식이 영 뜬금없기 때문이에요. 랑그륀 후작부인 살인사건 - 벨담경 살인사건 - 소냐 대공비 강도사건의 전혀 다른 세 가지 이야기가 연결된 느낌으로, 이야기의 얼개를 제대로 갖추어 놓고 썼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추리·범죄물로 보기에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애호가로서 아쉬운 점입니다. 오직 등장하는 것은 변장밖에는 없어요. 밀실 트릭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 랑그륀 후작부인 살인사건의 진상은 에티엔 랑베르로 변장한 팡토마스가 방문한 것이고, 대공비 사건에서 팡토마스가 깜쪽같이 호텔을 빠져나간 방법 역시 변장이며, 심지어 주변 인물인 샤를 랑베르조차 변장하여 은신해 있었고 쥐브 반장의 주요 수사 방법도 변장해서 탐문 수사하는 겁니다. 작가가 변장 외에는 다른 아이디어가 전무했구나! 라는 생각마저 들어요.

물론 범죄자가 주인공인 범죄물에 꼭 대단한 트릭이 등장할 필요는 없긴 합니다. 허나 팡토마스가 익히 알려진 만큼 천재적인 범죄자로 잘 그려졌느냐, 그리고 범죄가 정말 잘 짜여진 치밀한 범죄냐 하면 그 역시 아닙니다. 에티엔 랑베르가 아들 샤를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 초중반 장면이 대표적이죠. 에티엔 랑베르가 무죄 방면된 것은 순전히 운일 뿐으로, 배심원 설득에 실패했더라면 과연 어떻게 빠져나갔을까? 라는 문제에는 답이 없어요.

무엇보다도 거언(팡토마스)이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탈옥하기까지는 어이없음의 정점을 찍습니다. 돌롱 집사를 살해하기 위해 잠깐 빠져나갔다가 돌아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형 집행 전날 자신을 닮은 연극배우를 끌어들여 대신 죽게 만드는 결말까지 전부가 설득력이 전무하더군요. 팡토마스가 그 시점에 정부인 벨담 부인을 찾아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도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돌롱 집사를 살해하기 위해 쉽게 빠져나갔음에도 다시 돌아와 사형 전날까지 목숨을 걸고 운에 의지한 채 버틴다? 이게 말이 될 리가 있습니까. 그냥 돌롱 집사를 죽이고 도망가면 그만이지... 연극배우 발그랑 포섭에 실패했다면 어찌 되었을지에 대한 답도 없고 말이죠. 돈으로 몇 시간 빠져나오는 게 가능하다면 도주는 더 쉬웠을 텐데 일만 크게 벌인 꼴 아닌가 싶어요. 한마디로 변장과 행동력은 있지만 명성만큼의 전설적인 범죄자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추리력만 따지자면 오히려 라이벌 쥐브 반장의 캐릭터가 더 낫더군요. 초반 살인사건에서 외부에서 범인이 침입했음을 설명하는 장면 등에서 제대로 추리력을 선보이거든요. 직접 발로 뛰면서 증거를 모아 범인이 어떻게 기차를 타고 내렸으며 어디서 뛰어내렸는지 등을 확인한 증거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은 동시기의 셜록 홈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싶긴 하지만 추리애호가로서 충분히 만족할 만했습니다.

그런데 쥐브 반장의 추리가 샤를 랑베르를 범인으로 만드는 저주받은 유전자 논리와 엮이는 부분은 좀 특이했습니다. 근대와 중세적 사고관의 충돌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거든요. 작중 시대가 증기기관차와 자전거, 마차가 공존하는 근대화 초입기라 그러한 것 같은데 상당히 이색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베르티용 측정법이 효과적으로 쓰이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래도 좋은 점은 너무 적네요. 전설임에는 분명하기에 역사적 가치까지 평가한 별점은 2점입니다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퇴색해버린, 낡아버린 이야기일 뿐입니다. . 소개가 너무 늦은 것이 아쉽기만 할 따름입니다. 2권은 아무래도 읽게 될 것 같지 않군요.

2023/07/0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5. 즌부리코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5. 즌부리코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마사오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시락을 주면 먹고, 차를 내밀면 조용히 마셨다. 목적지도 신경 쓰지 않는듯 했다. 마이코의 코트에 감싸여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기차 여행 내내, 약한 비가 모든 곳에서 끝없이 내렸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객들은 언제나 익숙한 표정과 모습으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둘만 이질적인 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타미의 바다는 하늘과 같은 회색으로 저 멀리에서 그대로 하늘과 이어져 있었다. 후지산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의 후지산이 보이지 않는게 이 여행에 더 어울렸다.

토시오는 미시마에 내려 곧바로 공중전화로 에토를 불렀다. 에토는 상대가 토시오라는 것을 알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카츠? 라디오 들었어?"
"안 들었어."
에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너, 살인 용의자와 함께 도망쳤다는 게 정말이야? 방금 뉴스에서 들었어."
오랜만에 듣는 에토의 억양에는 사투리가 돌아와 있었다.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그보다 여관 방 하나만 잡아줘."
"그건 맡겨 둬, 지금 어디야?"
"미시마 역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사이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거야? 되도록이면 사람들에게 얼굴을 드러내지 말라고."
"...... 슈젠지까지 갈 수 있을까?"
"야, 잠깐만. 사람이 많은 곳은 위험해. 이렇게 해. 오히토(大仁)에서 내려서 상가를 지나 가노가와(狩野川)의 오히토 다리 쪽으로 걸어가. 그러면 내가 차로 데리러 갈게."
전화를 끊자 마사오가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친구에게 폐를 끼치는 건가요?"
"당신이 신경쓰실 일은 없습니다."
토시오는 그렇게 말하고 걸어 나갔다.
미시마에서 이즈 하코네 철도를 탔다. 차 안에는 학생들이 많았다. 에토의 말에 따르면, 자신도 뉴스에 보도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토시오는 전철 구석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마사오의 모습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전철은 느리고 정차역이 많았다. 오히토까지는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거리지만, 멀게만 느껴졌다.
오히토에서 내리는 승객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눈에 띌 정도로 적지도 않았다. 토시오는 에토의 배려를 알게된게 기뻤다.
오히토 역을 나와 앞에 있는 짧은 언덕을 오르면, 옆 쪽으로 상가가 펼쳐져 있었다. 상가를 오른쪽으로 가면 가노가와 강이 나온다고 에토는 말했다. 상가에 들어서자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차가운 비바람이 거세게 두 사람을 감쌌다.
우산을 샀다. 비는 약하게 내렸지만, 우산을 쓰는게 사람들 시선으로부터 훨씬 안전할 것 같았다.
상점가는 길지 않았다. 상점가 끝에서 제방으로 이어지는 길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걷고 있던 두 사람 곁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푸른색 경트럭이었다. 운전석에서 에토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로 봐서는 아주 건강해 보이네."
에토는 두 사람을 차에 태우며 말했다. 차 안은 생선 비린내가 진동했다.
"미안해…."
토시오가 말했다.
"아냐, 오히려 날 기억해줘서 고마운걸."
에토는 뻣뻣한 얼굴의 수염 사이로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구마사카에 친숙한 여관이 하나 있어. 작지만 조용하지. 그곳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차는 가노강을 건넜다. 넓고 깊은 강바닥은 검은 돌로 채워져 있고, 물은 그 사이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가노강을 건너자 차는 좌회전해 제방 위를 달렸다. 건너편 제방 위를 달리는 차의 불빛이 작게 이어졌다.
여관으로 향하면서 에토는 자기 얘기만 했다. 약혼녀가 미인이라는 것, 일이 바쁘다는 것 등이었다.
제방을 내려와 밭을 지나 낮은 산자락을 돌았다. 산 중턱에 성처럼 생긴 건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오히토 산이야. 아무리 채굴해도 더 이상은 광물이 나오지 않지만 폐광은 남아 있어. 여름에도 그 안은 시원하지."
좁은 길을 한참 달리다 '섬집'이라고 적힌, 불이 켜진 작은 간판 아래에 차를 세웠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전화해줘."
에토가 말했다.
"그리고 너 이름은 야마다 타로야. 한심한 이름이지만 워낙 급했으니 참아줘."
작지만 잘 정돈된 숙소였다. 이름을 말하자 두 사람은 별채로 안내되었다. 벌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조용하네."
마사오가 중얼거렸다.
토시오는 유카타와 단젠 (*일본의 남성용 겨울 실내복)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식판이 정리되자 마사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거짓말 같네요........ ......"
마사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도망칠 수 있었던 건 당신 덕분이에요. 하지만 카츠 씨까지 도망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당신이 곤경에 처한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나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기로 했어요. 어떤 행운이 닥쳐오더라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당신이 체포되더라도요?"
"그래요."
"사형에 처해지더라도요?"
"그래요."
"사형에 처해지면 죽습니다."
"사형에 처해지지 않아도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거예요. 같은 거에요. 사람을 죽여도, 안 죽여도 마찬가지에요."
마사오는 멍하니 말했다.
"당신이 죄가 있다는게 오히려 나에게는 다행입니다."
마사오의 침착함이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토시오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당신을 경찰의 손에서 구해냈고, 앞으로도 운명을 함께 할 겁니다."
".... 내가 살인자라고요?"
마사오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한 일을 모두 알고 있어요. 나한테만 숨기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 내가 살인자가 아니라면요?"
마사오는 같은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은 너무 똑똑하고 아름다워요. 나 같은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괜찮아요......"
마사오는 천천히 일어선 뒤, 등을 돌려 미닫이 문을 열었다. 옆 방은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마사오는 전등을 껐다. 침대 옆 스탠드만 켜져 방을 살짝 붉게 물들였다.
단젠이 마사오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마사오는 유카타의 끈을 뒤로 풀고 바닥에 떨어트렸다.
"......데츠바의 약병에 독을 넣은 것은 나에요."
마사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사오는 인형처럼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마사오에 대한 애정은 가까워질수록 더욱 강렬해졌다. 그것은 광기 어린 격정으로 변했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온몸을 휘감았다. 그 격정을 마사오는 조용히 받아들였다.
몸을 떼어내자 마사오는 눈을 떴다.
"...... 나, 이제 안 되겠어요."
목소리를 담은 숨결이 토시오의 어깨에 닿았다.
"안 된다는 말은 싫어요. 슬퍼지니까요. 우리는 이제 막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은 것 아닙니까?"
토시오가 말했다.
"그랬군요. 미안해요."
마사오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미로 속에 있는 것 같아요."
"...... 나사 저택의 동굴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군요."
"토모히로에게 들었어요. 토모히로는 동굴의 지도까지 만들어 놓았어요."
토시오는 문득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췄다.
"그 동굴 어딘가에 제니야 고헤에의 은닉 재산이 있다는 것도?"
"그것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꿈같은 일은….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실제로 동굴에 들어갔었잖아요?"
"그야 저도 호기심은 있었으니까요. 토모히로가 죽고, 토모히로가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제니야 고헤에의 재산 이야기가 허황된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토모히로의 지도를 믿고 동굴에 들어갔는데, 도중에 겁이 났어요. 캄캄한 동굴의 맞은편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
"폭포 소리예요."
"맞아요, 살아있는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동굴 안에서 구불구불하게 움직이는 폭포를 보고 순간 겁이 났어요. 나는 중간에 돌아섰지만, 저렇게 큰 무대가 있는 걸 보니 토모히로가 말하는 숨겨진 재산의 존재를 믿을 수 밖에 없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소우지, 카오리, 데츠바 씨 등은?"
"소우지 씨가 알았다면 바로 손을 대서 써버렸을 거에요. 카오리 씨가 알았다면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 것 같고요. 데츠바 씨가 알았다면 사업을 더 확장했을테죠."
"즉, 숨겨진 재산이 있다는 건 당신과 남편,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는 거군요"
"그런 것 같아요."
"토모히로 씨는 그 재산을 혼자서만 갖고 싶었던 것이고요."
마사오는 입을 다물었다.
"그 토모히로 씨의 유지를 당신이 이어받으려 한 것이군요."
마사오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목구멍에 걸려서 마치 흐느끼는 소리처럼 들렸다.
"당신은 소우지와 인연을 끊지 못한 탓에, 토모히로 씨에 대한 죄책감이 마음속에 무겁게 쌓여 있었어요. 이번 여행에서 토모히로 씨에게 고백과 사과를 하려고 했는데, 토모히로 씨가 기이한 사고를 당해 그 기회가 영원히 사라져 버려서 당신의 마음속에는 죄책감만 무겁게 남아 버렸죠."
"맞아요......."
"토모히로 씨의 죽음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토우이치 군까지 죽었죠. 토우이치 군의 죽음은 자신의 실수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고였고요. 이 사고는 토모히로씨에 대한 죄책감을 더욱 더 키워서 당신이 짊어지기 버거울 정도로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지요."
"나는 계속 남편을 외면하고 있었어요. 미안한 마음에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당신은 미쳤어요. 마음의 평형을 잃고 자신을 잃고 말았죠. 지금 당신은 사람을 죽여도 괜찮을 것 같은,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당신은 토모히로 씨에게 사과하기 위해 그의 유지를 이어받기로 결심했죠."
마사오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귀로 흘러내렸다.
"당신의 마음속에 토모히로 씨의 인격이 들어갔습니다. 항상 토모히로 씨를 경멸하던 소우지가 미웠습니다. 소우지는 토모히로 씨의 아내까지 빼앗아 농락하고 있었으니 소우지의 죽음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나는 소우지 씨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마사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오노 벤키치의 역립인
형에 독침을 장치했어요. 그 인형은 오직 소우지만이 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우지가 당신에게 태엽을 감게 하려고 했습니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곤란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기계를 잘 모른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할 수 있었어요."
마사오는 조용히 토시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역립인형에 독침을 장치했을 때, 당신은 이미 소우지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대담해진 당신은 카오리 씨를 총으로 쏴 죽였어요. 총소리가 났을 때 나는 미로 속에 있었지요. 우다이 씨는 테츠바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요. 소우지는 방에서 막 뛰쳐나온 참이었습니다. 당신만이 카오리 씨 곁에 서 있었어요........"
"맞아요, 나만 카오리 씨 곁에 서 있었죠."
"그때 나는 절대로 당신을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범인이라고 믿고 있었죠. 그 범인은 발자국도 남기지 않았고,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매우 신기했어요. 그런데 당신을 범인으로 생각하니 모든 것이 설명이 되더라고요. 또 당신이 다가왔다면 카오리 씨도 경계를 하지 않았을테죠."
"카오리 씨를 쏜 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트릭이 사용됐어요. 나사 저택에서 일어난 세 건의 살인 사건은 모두 교활한 트릭이 사용된게 가장 큰 특징이죠. 소우지를 죽이기 위해 역립 인형을 이용했듯이, 카오리 씨를 죽인 흉기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카라쿠리 즌부리코가 사용되었어요."
"즌부리코?"
"예전에 길거리나 장터 등에서 장난감으로 만든 움직이는 오리를 팔았어요. 오리는 일반 셀룰로이드 재질로 만들어졌지만, 움직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장난감 오리 목에 실을 묶고 그 끝에 미꾸라지를 연결해 탁한 물이 담긴 수조에 넣는 거지요. 그러면 장난감 오리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헤엄쳐 다니거나 먹이를 잡아먹는 듯한 동작을 하게 됩니다. 카오리 씨를 죽인 흉기는 없앤 방식은 이와 같아요. 그때 당신 곁에는 연못의 오리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카오리 씨를 쏜 후 바로 종이끈으로 권총을 오리에 묶어 놓았습니다. 오리는 곧장 연못으로 돌아갔고요. 종이끈은 물에 녹아내리고 권총은 연못 바닥에 가라앉게 된 겁니다."
마사오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토시오는 그것을 패배자의 웃음으로 해석했다. 자신도 권투에서 패하고 나서 마사오처럼 웃은 적이 있었다.
"데츠바 씨의 약병에 독을 넣는 데에도 트릭이 필요했죠. 데츠바 씨는 두 자식가 죽고 나서 극도로 조심스러워졌습니다. 방에 자물쇠를 걸어놓고 그 누구라도 거의 접근하지 못하게 했죠. 그 데츠바 씨의 약을 독약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요. 아무도 그 약병에 손도 대지 못했죠.”
"그래서 트릭이 필요했던 겁니다. 이번 트릭에 사용된건 아무도 모르는 동굴이었고요. 당신은 데츠바 씨가 살해당하기 전날 밤, 미로에서 이어진 동굴로 데츠바 씨의 방으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잠든 사이, 약병의 캡슐을 독이 든 캡슐로 바꿔치기했고요. 당신은 자신말고는 나사 저택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다이 씨는 동굴을 찾아냈어요. 만약 동굴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누구도 당신의 범행을 입증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마사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세 가지 범행은 모두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산에서 벗어난, 예상치 못한 일도 일어났어요. 그 중 첫 번째는 우다이 씨가 동굴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데츠바 씨의 약병 속 캡슐을 바꿔치기한건 당신 외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는 소우지가 그 장소에서 역립인형을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서 소우지는 카라쿠리를 움직이려고 했고 당신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어요. 억지로 막으면 오히려 의심을 받게 되니까요. 그 결과 우리는 범인의 수법을 알게 된 겁니다. 역립인형 안에 독침을 장치해 둔 범인의 수법 말이에요. 범인은 역립인형으로 소우지를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텐데 말이죠.”
"알려지는걸 원치 않았다고요?"
마사오의 눈빛이 한 곳을 응시하며 멈췄다.
"그렇습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소우지의 시신은 무수한 장난감들 속에서 발견됐을 거예요. 역립인형은 다른 장난감들 속에 섞여 있고, 안에 장치된 독침은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테고요. 당신은 범인이 외부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 아닙니까?"
"외부인?"
"그래요, 그래서 당신은 또 다른 미끼 주사기를 준비해서 나사 저택 밖에 떨어뜨려 놓았던 것이겠죠."
"미끼 주사기......."
"그것도 오늘 우다이 씨가 찾아냈어요. 주사기 안에는 액체가 남아 있었고요. 분명 소우지를 죽인 독극물과 같은 것으로 밝혀질테죠. 바늘에는 소우지의 피가 묻어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겠지만, 소우지에게 주사를 놓아본 당신에게 불가능한 공작은 아니였겠죠."
마사오의 눈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들어 올린 뒤 입술을 탐했다.
"...... 내 말에 틀린 점이 있습니까?"
마사오는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서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은 사라졌다.
"조금 다른 부분이 있지만 ...... 괜찮아요."
"다른 부분? 어디가요?"
"괜찮아요."
마사오는 팔을 뻗어 토시오의 손을 잡았다.
"부탁이 있어요."
마사오는 토시오의 손을 자신의 목에 갖다 댔다.
"...... 이대로, 힘을 주세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토시오는 마사오의 팔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마사오의 상체가 드러났다.
토시오 밑에서 마사오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등에 팔을 두르고 몇 번이나 하얀 목을 내밀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냄새를 맡았다.

반쯤 깨어난 상태에서 토시오는 팔을 뻗었다. 토시오는 그렇게 하면서 마사오의 몸을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토시오의 팔은 하늘을 향해 뻗어 버렸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마사오는 없었다.
방은 밝아져 있었다. 옆의 침구류가 가지런히 접혀서 쌓여 있었다. 토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시오는 옆방을 열었다. 정리된 책상 위에는 흰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 종이 위에는 빨갛고 하얀 눈을 드러낸 마도죠가 문진으로 놓여져 있었다. 토시오는 마도죠를 치우고 종이를 손에 쥐었다.
"카츠 씨의 호의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있을 수 없습니다.
부디 저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것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마사오”

…….죽으려고 하는구나. 토시오는 직감했다.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마사오가 숙소를 떠난 시간은 7시였다. 한 시간 전이었다.
"어디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토시오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물었다. 물론 마사오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 뒤 전화가 걸려왔다. 에토였다.
"무슨 일이야? 그녀는?"
에토가 물었다.
"......그게, 사라져버렸어."
토시오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망쳤지?"
"그래."
"이거 참… 도망가는게 유행도 아니고. 그럼 너는 어떻게 할거야?"
"...... 아직 생각하지 못했어."
"하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사라져버리는게 괜찮을 것 같은데. 그나저나, 정말 여자는 알 수가 없군."
토시오는 우스갯소리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에토의 말에 의심이 생겨났다.
“...정말 여자는 알 수 없네…. 라고?”
마사오는 나사 저택으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어제는 자기가 방해가 된 것이다. 마사오는 다시 한 번 동굴에 숨겨져 있는 비밀 재산을 되찾으러 나간 것이다. 그 때문에 마사오는 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무일푼으로 마사오가 따라올 거라 생각한 자신의 생각은 얄팍했다.
여종업원이 와서 아침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토시오는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종업원이 가지고 온 새 손전등을 방 안의 비상용이라고 적힌 꼬리표 아래에 걸려고 했다.
"그건?"
토시오는 무심코 물었다.
"어머, 모르셨나요? 먼저 가신 손님분께서 실수로 떨어뜨려서 망가뜨렸다고 하셔서 ...... 네, 대금은 받았습니다."
마사오는 손전등을 들고 떠났다. 마사오의 행선지는 나사 저택의 동굴이다. 확실하다.
토시오는 옷을 갈아입고 숙소를 나섰다. 여전히 가랑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저녁에 산 우산은 그대로였다.
마이코의 코트를 입고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마사오의 작은 등이 보이는 듯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1/06/04

사형에 이르는 병 - 구시키 리우 / 현정수 : 별점 2.5점

사형에 이르는 병 - 6점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에이치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케이 마사야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는 승승장구했지만 고등학교 입학 후 전락했다. 그래서 지금은 3류 대학교에 겨우 입학하여 아웃사이더로 다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린 시절 단골 빵집 주인 하이무라 야마토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9명을 연쇄 살인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였다. 마사야와의 면회에서 그는 9번째 범행만은 저지르지 않았다며, 진실을 밝혀달라고 부탁했다. 

하이무라 야마토의 과거, 그리고 범행에 대해 조사에 나선 마사야는 어머니 에리의 과거를 알아냈다. 그녀는 야마토와 같은 학대 아동으로 어린 시절 한 때. 같은 양모 밑에 있었었다. 그리고 결국 변해가는 자신과 함께 충격적 사실에 마주하게 되는데...

천재 연쇄 살인범이 저지르지 않았다는 살인 사건의 진상을 더듬어가다가,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는 내용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천재 범죄자가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는 하늘의 별처럼 많습니다. 감옥 안에 갖혀 있는 천재 범죄자는 하니발 렉터라는 거물이 수십년 전에 이미 보여줬던 설정이고요. 그러나 이 작품에는 주인공과의 두뇌 대결이나, 주인공을 도와 또 다른 범죄를 막는 다른 천재 범죄자 작품들과는 분명히 차별화 되는 점이 있습니다. 천재 범죄자 하이무라 야마토의 진짜 목적이 가케이 마사야를 조종하는데 있었다는 반전입니다. 이 반전이 몇 가지 의문들, 왜 마사야에게 편지를 보냈는지? 9번째 범행인 네즈 가오루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 등이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답으로, 작가는 마사야가 야마토의 아이인 것 처럼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흥미로운 전개이지만, 이는 마사야의 모친 에리에 의해 부정됩니다. 그리고 야마토가 사이코패스이며 자신의 통제력을 발휘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마사야를 골랐다는게 밝혀집니다. 네즈 가오루를 살해한 진범으로 의심되었던 가나야마 이츠키를 통해서요. 즉, 마사야는 수많은 야마토의 조종 희생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는게 진상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나야마 이츠키를 우연히 만나게 된 이유도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그 역시 희생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이무라 야마토의 목적을 사이코패스에 대해 비교적 충실한 사례와 근거들로 뒷받침하면서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작가가 저도 얼마전에 읽었었던 "사이코패스"라는 책을 많이 참조한 듯 싶더군요. 그 책에 나왔던 사이코패스의 특징 - '강력한 통제력'과 '빼어난 거짓말 솜씨',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능력' - 이 이야기 안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거든요. 아울러 사이코패스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면서, 야마토가 이츠키를 조종하기 위해 '3초 안에 대답할 것' 등의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를 9번째 네즈 가오루 사건과 연결시키는 과정도 감탄스러웠습니다. 어쨌건 9번째 범행도 야마토가 저질렀다는것 뿐만 아니라, 왜 그 사건이 다른 사건과 범행 수법이 사뭇 달랐는지, 왜 네즈 가오루가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는지, 왜 이츠키가 계속 그 사건과 엮였는지가 명확하게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독특한 점을 제외한 다른 모든건 반전이 있는 일본 범죄 스릴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단점은 큽니다. 전능한 천재 사이코패스 야마토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일본 소설이나 만화에서 수도 없이 등장해 왔던 쿨한 천재 악당 그대로인 탓입니다. 그 외 캐릭터도 극단적으로 과장되어 있습니다. 사람 대하는게 서투른 마사야가 여러 증인들과 만나 인터뷰를 서슴없이 능숙하게 진행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졌고요. 그 외에 시점을 간혹 바꿔가며 독자에게 혼돈을 준다던가, 불필요하게 과장된 잔혹한 범죄 묘사 등은 그야말로 일본 범죄 스릴러물의 단점만 모아서 집대성한 느낌이었습니다.

야마토의 목적을 드러내는 전개는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세세하게 들어가면 억지스러운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마사야가 진행하는 야마토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조사의 경우, 솔직히 불필요했습니다. 9번째 살인을 야마토가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조사라면, 야마토의 과거는 조사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소설로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였던 셈이지요. 

야마토의 피해자이자 사건 증인 중 한명이었던 가나야마 이츠키를 9번째 범행 용의자라고 단정짓는 과정도 마찬가지에요.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마사야와 엮이기는 했지만, 다른 근거는 하나도 없어서 억지스러웠습니다. 그 외에도 마사야의 친부가 누구인지, 가나야마 이츠키는 어떤 인물인지를 조사하는 과정도 작위적입니다. 마사야가 야마토의 아들인지는 어머니에게 전화로 물어보면 됐고, 가나야마 이츠키도 그냥 만나면 됐으니까요.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억지로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요?

아무리 일본 검찰이 기소한 범죄를 유죄로 만드는 경향이 강하다 하더라도, 3류 대학 법대생도 금방 눈치챌 정도로 이상한 사건을 엮어서 야마토의 범죄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긴, 애초에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찐따 가케이 마사야가 중학교 시절 약간의 접점밖에 없었던 야마토의 부탁으로 조사에 나선다는 것 부터가 억지스러웠으니 더 말해 무얼 하겠습니까.

마지막에 마사야와 사귀게 된 아카리도 야마토에게 조종받고 있었다는 에필로그도 과했습니다. 사족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녀는 야마토가 납치했지만 운 좋게 살아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는 소녀일텐데, 그렇다면 그녀가 야마토에게 조언을 얻으며 조종당하게 된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걸작 잔혹 서술 트릭 작품인 "살육에 이르는 병"이 떠오르는 제목이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나름의 독특한 맛은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전형적인 일본식 범죄 스릴러가 취향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1/03/06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권일용, 고나무 : 별점 3점을 읽는 자들 - 권일용, 고나무 : 별점 3점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6점
권일용.고나무 지음/알마

권일용은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입니다. 경찰 학교를 졸업하고 일선 형사로 근무하다가 발탁되었지요. 감식 업무에서 재능을 발휘했던걸 눈여겨 보았던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장 윤외출의 덕이었습니다. 그 뒤 여러 수사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프로파일러로서의 입지를 굳혔고요. 

이 책은 권일용이 프로파일러로서 수사에 참여했던 6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국내 수사 기관에서 프로파일링이 어떻게 시작되어 성장했는지를 설명해주는 논픽션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2001년 조현길이 저질렀던 여아 살인 사건입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피해 여아 사체를 냉동실에 보관해서 사체 등 부분에 생겨난 일정한 간격의 가늘고 긴 눌린 흔적으로 냉장고 모델을 찾아낸 겁니다. 해당 냉장고는 업소용 중대형이었고, 이를 비롯한 여러가지 직접 확인한 단서를 토대로 권일용은 한국 범죄 사건 수사 역사상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보고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그의 보고서가 수사에 기여한 바가 있고, 보고서 속 범인상이 진범 조현길과 대체로 일치했던 덕분에 이후 국내 범죄 수사에서도 프로파일링이 활용되게 되었고요. 국내 프로파일링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뒤이어 권일용이 투입되었던 2003년 유영철 사건에서는 연쇄 살인을 알아채지 못하는 실패를 겪게 됩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유영철이 경찰 수사 방향을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유영철은 범행 수법을 바꾸었고, 그 탓에 권일용은 이전 사건과 이후 사건을 연결짓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정통 수사기법의 한계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수사팀은 대낮에 범행을 저지르고 피가 묻은 상태에서 도망을 갔는데도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차량을 이용한 범죄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습니다. 그리고 차량 수색에 집중했지요. 하지만 권일용은 시대가 바뀌어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는걸 깨닫고, 차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들어맞았습니다.
최초 노인 살인 사건 현장 근처에 교회가 있었던게 나름 의미가 있었다는 것도 권일용의 생각대로였습니다. 유영철은 '교회가 옆에 있지만 바로 앞에 사는 이 사람도 무참히 죽는다’라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물론 사체 매장 현장에 표식을 한건 완전히 헛다리를 짚기는 했습니다. 권일용은 범인이 자신의 살인 행위를 반추하고 되돌아볼 것이라는 낭만적인 추정을 했는데, 유영철은 그냥 '사체를 묻은 데를 또 파면 귀찮아서' 표시를 한 것 뿐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단순한 실패보다는 나름 성과가 있었던 유영철 사건이 있었던 덕분에 권일용은 더욱 성장했고, 경찰 내에도 프로파일링 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뒤이은 정남규 사건에서는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단순 강도 상해범으로 체포되었던 정남규가 서울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임이 드러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자백을 권일용이 이끌어내게 되거든요.

2009년 강호순 사건에서도 권일용 팀의 분석이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범인은 '호의동승'으로 피해자들을 유인했고, 이를 위해 고급차를 탔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물일거라는 분석이었는데 실제로 강호순은 에쿠스를 탔으며, 범행 당시 깔끔한 양복을 입기도 했고, 차 대쉬보드 위에 개와 함께 있는 사진을 장식해 놓는 등 치밀하게 본인을 위장했다고 밝혀졌으니까요. 주변 사람들 평가도 굉장히 좋았다고 하지요

강호순 사건 중간에 맡았던 2007년 제주에서 발생했던 아동 성범죄자 성유철 사건은, 프로파일링의 활용보다는 아동 성범죄에 대한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2007년에 벌어졌던 고정민 (가명) 양 실종 사건에서는 사람의 자백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실제 범행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거짓 자백에 이르는 과정과 거짓 자백 후 범행의 줄거리를 지어내는 모습 모두 교과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더라고요. 흔히 이야기하는, 성폭행 피해자들이 확 물어버리고 소리를 지르는걸 왜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힘든 '공포심' 때문이라는데 굉장히 와 닿았어요.

또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1960~1970년대에는 살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죄였는데, 왜 그 양상이 달라졌는지에 대한 분석도 상세합니다. 자본주의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회가 일부 구성원들을 스트레스로 압착할 때 일부 반사회적인 범죄자들이 복수심으로 무차별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살인자의 반사회성은 후천적 영향일 가능성이 높고요. 서구 사회에서는 반사회성에 유전적 요인이 있다고 여기지만, 단일 민족인 한국에서 유전적 이유로 누구는 괴물이 된다는 건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복수심, 사회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있었던 유영철, 정남규와는 다르게 진짜 서구적인 쾌락 연쇄 살인을 저지른 강호순과의 차이도 잘 드러나고요. 하지만 저는, 과거에도 잔혹 범죄는 존재했던 만큼 연쇄 살인이 양극화로 더 증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경찰 수사력의 발달로 과거 사건화되지 않았던 사건들도 밝혀지고, 이게 과거보다 발달한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진 탓에 증가한걸로 보이는게 아닌가 싶거든요. 이런 부분에 있어 깊게 연구된 자료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 외 단순히 당시 벌어졌던 범죄와 그 수사, 해결 과정 뿐 아니라 수사에 참여했던 프로파일러들의 생각과 행동도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프로파일러가 무슨 마법사나 천재가 아니라, 수사를 돕는 역할이라는게 잘 드러나지요. 수사 현장에서 쓰이는 전문적인 은어 등 디테일도 좋습니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의 가슴 아픈 현실도 충분히 설명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사형 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잠깐 스쳐지나가듯 등장하기는 하지만, 권일용도 사형 집행에 찬성하는 입장이더군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도소에서 교정, 교화가 가능하다고 쳐도,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의 중죄를 저지른 범인을 교정, 교화시켜 사회에 복귀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읽어 볼 만한 논픽션인건 분명한데, 건조한 르포르타쥬 문체가 아니라 권일용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적인 구성과 문체로 쓰여진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데, 저는 확실히 불호 쪽이에요. 분명 실화인데 뭔가 각색되어서 왜곡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 프로파일링의 역사를 담기 위한 취지 탓이었겠지만, 익히 알려진 사건에서 누구나 다 아는 정보를 빼곡하게 채워 놓은 부분들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한국 범죄사, 프로파일링 역사에 대해 알고싶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