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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3

속임수의 섬 - 히가시가와 도쿠야 / 김은모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사야카는 출판 재벌 사이도우지 가문 유언 집행을 위해 가문의 별장이 있는 비탈섬으로 향했다. 유언 집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사촌 쓰루오카, 그리고 쓰루오카를 찾아 데려온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와 함께였다. 그런데 가문 일족에게 유언장 내용을 공개한 다음날, 쓰루오카는 전신이 골절되어 살해당했다. 태풍으로 경찰이 출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카오와 사야카는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데...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장편입니다. 작가의 작품 중 가장 길다고 하네요.

특징이라면 고전 본격 추리물의 전형적인 요소를 충실히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태풍으로 고립된 외딴섬 ‘비탈섬’, 기묘한 외형과 구조를 가진 별장 ‘화강장’, 그곳에 모인 출판 재벌 사이도우지 가문 일가, 그리고 명탐정의 등장까지 모두 고전 추리물 애호가에게 익숙한 클로즈드 써클 설정 그 자체입니다. 

설정뿐 아니라 제시된 수수께끼도 본격적입니다. 23년 전 낚시 중 물속에서 사람이 뱃전 위로 튀어 올랐던 괴이한 사건과 그때 목격된 ‘용’의 정체, 최근 벌어진 쓰루오카 전신 골절 살인 사건, 중정에 나타난 오두막과 빨간 도깨비, 전망대에서 사람이 사라진 수수께끼, 그리고 기묘한 화강장의 구조 등 여러 의문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수수께끼는 결국 하나의 결말로 이어지고요.

그 중에서도 화강장의 구조가 ‘책을 읽는 사람’을 본떠 설계되었고, 그 구조가 핵심 트릭이라는 진상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책의 위치가 중정이며, 그곳에 숨겨진 거대한 팝업북이 흉기였다는 사실을 다카오 등이 구조를 파악하며 밝혀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덕분입니다. 현재 전망대 창은 ‘두뇌’ 역할을 하는 서재 앞에 있어 얼굴의 ‘이마’에 해당하는데, 그렇다면 그 아래에는 ‘눈’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을 것이라는 추리도 설득력있었고요. 사야카의 눈을 피해 전망대에서 사라진 사람은 바로 이 공간으로 이동했던 것입니다(AI로 그려본 아래 이미지 참고하세요).

23년 전 사건에 대해 가문 사람들이 침묵했던 이유도 잘 설명됩니다. 사이도우지 도시로가 살해된 뒤 범인이 절벽 끝에서 사라지고, 게이스케의 익사체가 밀려왔으니, 일족은 ‘게이스케가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투신 자살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드러난 진상과 트릭은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23년 전 사건의 실제 경위는 이렇습니다. 쓰루오카가 도시로를 살해한 뒤 절벽에서 로프를 매고 뛰어내렸고, 이를 막으려던 게이스케가 함께 추락했습니다. 쓰루오카는 캐러비너로 로프를 고정해 무사히 착지했지만, 게이스케는 로프 반동으로 낚시배 위로 튀어 오른 것입니다. 당시 목격된 ‘용’은 잘려진 로프였고요. 그러나 목숨을 걸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는 설정은 한 마디로 무리입니다. 안전하게 로프를 타고 내려가도 충분했을 텐데 굳이 도박에 가까운 방법을 택할 까닭이 없으니까요. 쓰루오카가 별장을 통해 되돌아오기 위해 이용한 동굴 통로를 일족이 전혀 몰랐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고, 쓰루오카가 그 통로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당시 배에 함께 있던 학생 히로시가 기억을 잃자 그를 게이스케의 대역으로 삼아 23년간 속여왔다는 설정 역시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최근 사건의 흉기는 앞서 언급한 대로 중정에 설치된 거대한 팝업북 장치입니다. 사이도우지 출판사의 첫 동화책을 재현한 이 구조물은 전망대의 책과 연동되어 작동했고, 게이스케는 이 장치를 이용해 쓰루오카를 중정으로 유인해 압사시켰습니다. 피투성이 쓰루오카의 시신이 오두막 모양 팝업에 걸려 올라오자, 이를 미사키가 ‘빨간 도깨비’로 착각했던게 진상이고요. 그러나 이 팝업북 트릭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입니다. 이 정도 크기와 무게의 장치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설명이 없고, 그렇게 거대한 구조물이 움직이는데 아무도 소음을 듣지 못했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다른 일족들이 이처럼 거대하고 값비싼 구조물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것 역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야기의 전개 역시 장황하고 불필요한 부분이 많습니다. 고전 본격물처럼 ‘일족’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사건에 관여하는 인물은 피해자 쓰루오카와 범인 게이스케 뿐입니다. 다른 등장 인물들, 특히 도라쿠 스님은 등장하지 않는 편이 나았습니다. 작가 특유의 유머를 곳곳에 섞은 문체도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이어지는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웃음도 유발하지 못합니다. 읽는 내내 고통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 역시 시덥잖은 유머만 남발하는 가벼운 남자로 그려져 도무지 명탐정으로는 보이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고전 추리물의 외형은 갖추었지만, 트릭과 이야기의 완성도가 턱없이 부족한 졸작입니다. 심지어 길기까지 하니 추천하기 어렵네요. 이 작가 작품도 더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2025/07/06

그리고 유리코는 혼자가 되었다 - 기도 소타 / 부윤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문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는 '유리코 님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 중 마지막으로 남는 유리코는 ‘유리코 님’이라 불리며 학교에서 모든걸 뜻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전설이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마쓰자와 유리코’가 옥상에서 추락해 사망했고, 그 뒤 다른 유리코들도 차례로 살해당했다. '나' 야사카 유리코는 자신도 이 전설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친구 미즈키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일본 작가 기도 소타의 데뷰작인 학원 미스터리입니다. 유서 깊은 명문 여학교 ‘유리가하라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괴담, 본격 추리, 인물 간 심리전이 어우러지는 작품입니다.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유리코 님 전설’이라는 설정입니다. 단순한 학교 괴담처럼 보이지만 '이름'이 주요 매개체로 결국 학교에 유리코는 딱 한 명만 남게 된다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작품 속 사건들의 설득력을 높여주는 주요한 장치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설에 따른 일종의 초자연적 현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돋보입니다. ‘마쓰자와 유리코 추락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마쓰자와 유리코가 떨어진 옥상은 밀실이었습니다. 최소한 범인은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요. 미즈키는 불탄 교복과 '흰 백합 모임' 방 창문이 항상 열려있다는걸 근거로 범인이 교복을 이어 로프를 만든 뒤 아래층 '흰 백합 모임' 방을 통해 탈출했다는 추리를 내 놓습니다. 탈출 후 방법을 숨기기 위해 교복을 불태웠던 겁니다.

이외에도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에 담긴 위화감을 단서로 삼아, 실제로는 그 일기가 1970년대에 쓰인 것이 아니라 1998년 이후에 작성되었으며 초대 유리코 님이 사실은 여자아이가 아니라 남자아이였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부분은 서술 트릭물의 묘미를 잘 살리고 있습니다. 일기 속 세세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독자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잘 배치해 둔 덕분입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는 과정도 논리적입니다. 흰 백합 모임 방 창문이 열려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인물이어야 하고, 해당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유리코 님으로 변장할 수 있을 만큼 체구가 작아야 했다는 조건들을 하나씩 밝혀내며 결국 ‘유리 선배’라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교복을 불태운 뒤 어떻게 옷을 챙겨입고 도주했는지도 이 추리를 통해 설명됩니다. 여자 교복 밑에 원래의 남자 교복을 입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지요. 성정체성이 여성인 유리가 '유리코'들을 모두 죽이고 유리코 님이 되려고 했다는 동기도 유리코 님 전설 및 일기를 통한 서술 트릭과 잘 맞물려 있고요. 이를 학원제 연극 후 일종의 추리쇼처럼 밝히는 과정도 볼만 했으며, 다카미자와 선생이 과거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를 남긴 인물이며, 유리코 님 전설에 오랫동안 개입해 왔다는 반전 역시 꽤 그럴듯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핵심 트릭인 교복을 로프로 만들어 탈출했다는건 그리 좋은 트릭은 아닙니다. 유치할 뿐더러, 아래에서 로프 교복을 불태웠다고 깔끔하게 흔적이 사라졌다는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발상입니다. 옷이 옥상에 아무 흔적도 남지 않고 타버린다는건 현실적으로 보기 어려우니까요.

그리고 마쓰자와 유리코 사건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전반적으로 단순하며, 추리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다는 문제도 큽니다. 범인이 범행에 성공한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사건이 점점 확대되는데 학교나 경찰 차원의 진지한 대응이 없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최소한 '유리코' 들에 대한 보호는 진행했어야 해요.
다카미자와의 정체에 대한 반전까지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가 흑막으로 사건을 조종했다는 추리는 다소 억지스러웠고요.  

하지만 이런 단점은 사소합니다. 에필로그에 비교하면요. 에필로그에서 밝혀지는, 미즈키가 친구 야사카를 ‘유리코 님’으로 만들고 진짜 학교의 지배자가 되려 했다는 진상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입니다.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만 보이고, 빼어난 활약을 보였던 명탐정 미즈키 캐릭터와도 잘 어울리지 않는 탓입니다. 학교의 지배자가 된다고 해도 특별한 뭔가가 있는건 전혀 아닙니다. 게다가 미즈키는 유리가 유리코들을 살해하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어쩔 생각이었던걸까요? 직접 다른 유리코들을 죽였을까요? 왜 이런 비상식적인 에필로그를 집어넣어 이야기를 망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미즈키의 계획이 흰 백합 모임의 유리코 선배에게 간파당해 미즈키가 살해당한다는 결말도 엉망입니다. 차라리 미츠다 신조 스타일로 야사코 유리코가 인지를 벗어난 '유리코 님'으로 거듭나며 괴담이 진짜가 된다는 식의 결말이 더 나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기발한 설정, 본격 추리 요소는 매력적이었는데 에필로그가 다 말아먹었습니다. 에필로그만 없었어도 별점 2.5점은 줄 수 있었는데 조금은 아쉽습니다.

2025/06/15

처단 - 리 차일드 / 다니엘 J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잭 리처는 자신이 조회를 요청했던 차량의 주인을 추적하던 중, 미국 법무부 요원들과 접촉하게 된다. 리처는 차량의 주인이 10년 전 자신이 처단했던 자비에르 퀸이라고 확신하지만, 법무부는 그 차량이 벡이라는 마약상의 것이며, 벡의 저택에 잠입시킨 수사관 테레사가 실종되었다고 설명했다. 리처는 퀸이 살아있을 가능성을 직감하고 법무부와 손을 잡았다. 리처는 벡의 아들 리처드가 유괴당하는 것을 막는 척하며 작전을 수행해 벡의 집에 잠입하는데 성공했고, 점차 벡의 신임을 얻어가며 내부 조직원들을 하나씩 제거해갔다. 그 과정에서 벡이 사실은 퀸에게 협박당하고 있었으며, 퀸이 실세라는 사실을 알아 냈다. 

결국 정체가 드러난 리처를 퀸 일당이 공격했지만, 리처는 이들을 물리치고, 악당들의 무기 밀매 사실을 파악한 뒤 실종되었던 테레사까지 구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리처와 퀸의 최후 대면에서, 퀸이 벡을 인간 방패로 삼는 바람에 아버지를 구하려 나선 리처드의 개입으로 오히려 잭 리처는 궁지에 몰렸고,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이안류가 몰아치는 저택 앞바다로 몸을 던지고 마는데...

"처단"은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으로, 원제는 Persuader입니다. 아마존 프라임의 시리즈인 잭 리처 시즌 3의 원작이고요. 드라마 원작이 되었다는게 수긍이 될 정도로 분량도 많고, 내용과 상황도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10년 전 잭 리처의 부하들을 죽였던 전직 장교 사건과 현재의 무기 밀매 조직 사건이 엮이고, 사건 해결을 위해 잭 리처가 악당 조직에 잠입하여 온갖 액션을 수행하는 덕분입니다. 

또한 시리즈 다른 작품들보다 추리적인 장면이 돋보입니다. 예를 들어, 벡의 가정부는 잠입 요원으로 퀸 일당에게 정체를 들켜 살해당했습니다. 리처는 법무부 요원 더피에게 문의했지만, 다른 요원은 파견한 적이 없다고 했고요. 리처는 벡이 지나치게 많은 총기를 보유하고 있고, 총기 지식이 상당하다는 점을 근거로 그가 마약상이 아니라 무기 밀매업자일 가능성을 떠올립니다. 이는 가정부는 법무부가 아니라 재무부 ATF(주류·담배·화기 및 폭발물 단속국)에서 보낸 요원이었다는 추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벡 저택 통신이 금요일 저녁에 완전히 차단되었던 상황에 대한 추리도 인상적입니다. 리처는 일반적으로는 통신이 원활한 시간대에 모든 휴대폰, 유선전화, 인터넷이 동시에 끊겼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생각했고, 자신이 처리한 벡의 경호원들이 사라진 것을 숨기기 위해 더피가 일부러 통신망을 차단한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퀸 일당이 연미복과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고급 케이터링 서비스를 불렀다는 것도 사소하지만 괜찮았습니다. 리처는 이들이 파티를 열 예정이고, 양고기 메뉴를 통해 손님들이 중동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걸 유추하거든요.
10년 전 사건에서 고로프스키가 군 감시 하에 있던 무기 설계도를 빼돌렸던 방법도 흥미로왔습니다. 리처는 그가 들고 있던 봉투는 주목을 끌기 위한 미끼이고, 실제 설계도는 신문에 숨겼을 것이라 추리하지요. 양키스 팬이 스포츠 면을 그냥 넘길리 없다는 사소한 단서에서 출발해서요. 도미니크가 퀸에게 살해당한 후, 리처는 퀸이 자신의 은신처로 돌아가 중요한 물건들을 챙길 것이라 예측하고 미리 그를 기다리는 장면도 기억에 남고요.
이처럼 단순하지만 논리적인 접근은 그동안 시리즈 작품에서는 강렬한 힘과 폭력에 밀려 간과되어 왔던 리처의 지적 능력을 한껏 드러내고, 적의 심리를 꿰뚫고 예측하는 능력이 힘과 폭력과 균형 있게 어우러지게 만들어서 매력을 더해줍니다.

물론,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인 특유의 강렬한 힘, 폭력,  액션은 여전히 중심축을 잡고 있습니다. 총격전, 잠입, 암살, 맨몸 격투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악당들을 제압해가는 과정은 펄프 픽션 장르의 미덕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작품에서는 잭 리처보다도 더 덩치가 큰 괴물 같은 상대 ‘폴리’와의 맨몸 격투가 압권입니다. 단순히 큰 덩치가 아니라,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과 힘의 싸움이 실제처럼 묘사되어서 몰입도가 상당했습니다.
* 드라마로 만든다면 클라이막스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아서 찾아보았는데, 실제로는 약간 실망스럽네요. 

등장하는 다양한 무기들도 눈길을 끕니다. 그 중에서도 M500 퍼스웨이더와 브레네케 매그넘 탄환은 시멘트 벽에 사람 크기의 구멍을 낼 수 있다고 하며, 실제로 적을 두 조각 내는걸로 묘사되는데, 이런 휴대용 총기가 실존한다는게 놀랍네요.

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벡과 퀸의 관계가 다소 불명확합니다. 전체 분위기를 보면 벡은 아들 리처드가 유괴되어 학대받았던 탓에 퀸에게 종속된 듯 보이지만, 리처드는 학교를 다니며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고 벡도 듀크 등 개인 부하를 두고 있는 등 충분한 반격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 그가 아무런 저항 없이 퀸에게 휘둘리고, 아내가 농락당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본다는 설정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설정들도 비현실적인게 많아요. 벡의 저택부터 그러합니다. 출입구가 단 하나뿐이고, 도망칠 길이 막힌 구조인데, 이런 공간을 고의로 설계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단지 긴장감을 위해 배경을 비현실적으로 만든 느낌이 강합니다. 가족간의 애정이 거의 언급되지 않다가, 마지막에 리처드가 아버지를 구하겠다며 잭 리처를 공격하는 장면도 급작스럽고요.  

결말 부분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잭 리처가 퀸에게 일부러 반격 기회를 준 후, 바다로 스스로 몸을 던지고 기적적으로 생존하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꽤 두뇌 싸움을 펼쳐보였기 때문에, 한 수 더 치밀한 계획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빌런 퀸의 최후 역시 싱겁습니다. 폴리와 싸운 직후에 거센 바다에서 겨우 생환한 탓에 리처도 기진맥진한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퀸은 단 한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 안에서 리처에게 단숨에 제압당해서 죽고 맙니다. 이 정도 거물급 악역에게는 조금 더 극적인 종말이 주어졌어야 하지 않았나 싶네요.

잭 리처와 더피가 관계를 맺는 설정도 굳이 필요했을까 싶습니다. 시리즈 전통처럼 여성 캐릭터와의 로맨스를 넣은 셈이겠지만, 이 작품의 분위기에서는 오히려 감정 몰입을 방해하는 장치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화끈한 액션과 시리즈 특유의 묘미는 여전하지만, 설정의 허술함과 후반부 정리의 아쉬움은 약간의 흠으로 남습니다. 

2024/08/02

[번역] 돈돈 다리, 떨어졌다 (4). - 아야츠지 유키토

「돈돈 다리, 떨어지다」의 「문제편」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속으로 살짝 일어난 화를 누르며 U군을 바라보았다. 그는 책장에서 꺼내온 우메즈 가즈오의 만화(『오로치』의 SUNDAY COMICS판, 네 번째 권이다)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아, 다 읽으셨어요?"
내 시선을 느낀 U군은 책을 덮으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우메즈 가즈오는 몇 번을 읽어도 대단하죠. 저는요, 그를 인생의 스승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요."
환하게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우메즈 가즈오가 대단한 것은 나도 전적으로 인정하는 바지만,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인생의 스승"이라고까지 치켜세우는 그의 천진난만함(이라고 할까 뭐라고 할까)이 이때의 나에게는 왠지 몹시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는 "스승"의 책을 정중히 옆에 놓으며 "자, 아야츠지 씨"라고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떻습니까? 설마 벌써, 풀어버리셨나요?"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제한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그렇네요."
U군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30분 정도 남았군요. 그 정도면 괜찮으세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세 번째 세븐스타 담배 포장을 뜯었다. 불을 붙이면서, 지금 느끼는 이 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피해자인 악동의 이름이 "유키토"라는 것 때문인가? 그것도 완전히 관계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서는 안 된다. 상대는 열 살이나 어린 학생이다. 악의가 있을 리는 없고, 어설픈 농담이라 웃으며 관대하게 넘겨야 한다.
불만을 제기하자면 오히려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다. "린타로"와 "타케마루"는 그렇다 치고, 이 M** 마을 주민들의 이름은 대체 무엇인가. "포",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캠프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도 끔찍하다. "반 다이스케"는 반 다인의 패러디인가? "아사노 요우지"에 "사이토 사카에"——웃기지 않는다. 전혀 웃기지 않는다. 미스터리 매니아의 유치함이라면 듣기 좋겠지만, 읽는 내가 얼굴이 붉어질 정도의 이런 이름짓기는 정말 참아주었으면 좋겠다.
게다가 이 인물들, 읽다 보면 전혀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구별은 가능하지만, 아무리 '범인 맞추기' 단편이라 해도,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상 조금 더 제대로 된 묘사를 해주었으면 한다. 이럴 바엔 차라리 A, B, C……로 표기하는 것이 깔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동안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결국 나는 이렇게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이 그려지지 않았다!"——맞아, 바로 이것이다.
목구멍까지 나왔던 그 말(인간이 그려지지 않았다고)을 간신히 삼키고,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커피라도 마시며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였다. 상대는 열 살이나 어린 아마추어 학생이다. 여기서는 선배답게 그 부분은 눈감아주고, 어쨌든 이 '문제'에 도전해야 한다.
"자, 그럼."
두 잔의 커피를 테이블에 내놓고, 나는 「문제편」의 원고를 다시 한번 대충 넘겼다. "잘 먹겠습니다"라며 컵에 손을 뻗으면서, U군은 내 표정을 힐끔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확실히, 자신작이라고 할 만하군. 꽤 어려운 문제야."
라고 말했다. 사실 나의 진심이었다. 사건의 상황은 이른바 '준밀실'이다. 20미터의 공간으로 격리된 '열린 밀실'에서의 불가능 범죄. 설정과 이야기에서 뭔가 장치가 있을 것 같은 냄새가 풍기지만, 초점은 역시 이 불가능한 상황을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20미터의 거리를 극복했는가. 그 트릭을 간파하면 자연스럽게 범인의 정체도 알 수 있는, 그런 타입의 '문제'다. 과연……?
커피를 홀짝이며 잠시 생각한 후, 나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부분부터 파고들어갔다.
"'당했다', '밀쳐졌다', '사……사아……'라는 유키토의 말은, 글 중에 나와 있듯이 '다잉 메시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네, 그렇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마지막 '사아'는 범인이 누구인지 말하려던 것이라는 거네."
"글쎄요, 그건 어떻게 생각하실지……"
U군은 얼버무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얄미운 얼굴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사'가 머리에 오는 등장인물은, 이 중에서는 사키와 사카에군. 사카에는 성도 사이토지. 설마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니겠지만.——흠. 달려온 사카에의 목소리를 듣고 '사이토 씨'라고 대답하려 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군."
"그렇죠. 하지만, 다잉 메시지라는 건 대부분 보조적인 단서일 뿐이잖아요. 아야츠지 씨의 작품에서도, 항상 그렇지 않나요?"
"뭐, 그렇다고 하면 그렇지. 그럼, 이건 나중에 보기로 하고——"
그리고 나는 일단 정석적인 '소거법'을 적용해보기로 했다.
"알리바이 등 데이터를 통해 범위를 좁혀나가는 거야. 먼저, M** 마을 사람들부터——"
범행 시각인 오후 2시 40분에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은,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의 네 사람이다. 이 중 카는 중상을 입고 위독한 상태니까, 당연히 제외된다. 출산을 앞둔 올츠이는 체력적으로 생각해도 다리까지 왕복해야 하는 범행은 무리겠지.
엘러리는 어떤가. 가령 어떤 트릭을 써서 다리 건너편의 유키토를 죽였다고 해도, 그 후 25분 이내——즉 포가 그를 광장에서 본 3시 5분까지——마을로 돌아오려면, 어떻게든 [옆길 B]를 내려와 통나무 다리를 건너는 ①의 루트를 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파이프 바위에 있던 린타로는 그 시간에 통나무 다리를 건넌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따라서, 엘러리도 범행은 불가능했다는 결론이다.
남은 사람은 아가사뿐이지만, 그녀의 경우 엘러리와 달리 3시 40분까지의 알리바이가 없으므로, ②의 루트를 통해 돌아왔다고 해도 시간적인 모순은 없다. 그러나 한쪽 팔이 없는 그녀가 범행이 가능했는지 생각해보면, 올츠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려야 한다. 어떤 트릭을 썼다 해도, 상대는 20미터의 계곡이니까.
결국 여기서는 네 사람 모두 제외된다. 포가 말하는 X는, 그들 중에는 없는 것이다.
한숨을 쉬며, U군의 반응을 본다. 그는 또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나서 손목시계를 보고,
"10분 남짓 남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역시 얄미운 얼굴이라고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음은 캠프의 네 사람."
가능한 한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나는 소거법을 계속했다.
요우지와 사키는, 오후 2시 40분 시점의 알리바이는 없지만, 다이스케가 돌아온 2시 50분에는 분명히 캠프에 있었다. 범행 후, 10분 안에 다리에서 돌아올 수는 없다. 다이스케가 다시 돌아온 루트도 20분 걸렸으니까. 예를 들어 [옆길 A]로 꺾어 [지류 B]를 따라 올라왔다면,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제외해야겠군.
당연히 다이스케에게도 같은 이야기가 적용된다. 2시 40분에 범행을 저지른 후 되돌아갔다면, 아무리 서둘러도 2시 50분에 캠프에 도착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결국 남는 사람은 사카에인가. 사카에가 빈사 상태의 유키토를 발견하는 장면 — 여기에는 시간이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즉, 그는 시간적인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다. 다이스케가 산등성이 길을 되돌아간 것과 엇갈리면서 [옆길 A]에서 산등성이로 올라와 다리까지 가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디. 그렇게 범행을 끝낸 후, 강으로 내려갔다고 해석해도 무리는 없겠지.
물론 사카에가 강가에서 유키토를 발견하는 장면에서는 도저히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이 몇 개 있던것 같기는 하다. 때문에 정말로 사카에가 범인이라면, U군이 '페어 플레이의 룰은 엄격히 지켰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한건 이상하다. 그 부분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걸까.
자, 어쨌건 문제는 그 다음이야—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쨌든 제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알리바이로는 사카에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 유키토를 절벽에서 떨어뜨렸을까.”
그러다 문득 한 가지 황당한 트릭이 떠올랐다.
“흠. 굳이 계곡을 건너 유키토 곁까지 갈 필요는 없었겠군.”
“어떻게요?”
“사카에의 배낭에는 이때 낚싯대가 들어 있었어. 여기에 튼튼한 긴 낚싯줄을 달고, 그 끝에 예를 들면, 야구공 정도의 크기의 돌을 묶어서 말이야...”
“휘둘러서, 다리 건너편의 유키토를 맞췄다고요?”
“그런 거야. 무리일까.”
U군은 복잡한 표정으로 “하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군.
“이런 건 어떨까.”
극약을 먹는다는 심정이 되어, 나는 거기서 새로 떠오른 트릭을 말했다.
“남아 있던 한 줄의 로프를 따라 뱀을 보내는 거야. 놀란 유키토는... 아니, 이건 안 되겠군. 유키토는 뱀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이런 건 어떻지. 들쥐의 목에 긴 끈을 묶어 로프를 따라가게 하는 거야. 그리고 구해줄 테니까 그 끈을 잡으라고 명령하는 거지. 멍청한 유키토가 그 말을 믿고 따랐을 때, 힘껏 끈을 당긴다. 균형을 잃은 유키토는...”
점점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는 애당초 이런 물리적인 트릭을 고안하는 게 별로 능숙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정말 여러 가지를 생각하시는군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는 나를 보고, U군은 조금 유쾌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말씀하신 것들은 모두 틀렸어요. 실행 가능 여부를 떠나서, 그것만으로는 ‘밀쳐져 떨어졌다’는 것이 되지 않으니까요. 유키토는 어디까지나, X의 손에 의해 ‘밀쳐 떨어져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전한 유키토의 죽기 직전의 대사에 ‘거짓’은 없고, 본문에서도 분명히 그렇게 명기되어 있습니다.”
“흐음.”
“유키토는 X의 손에 의해 밀쳐져 떨어졌다. 이것은 즉, 범행이 일어난 2시 40분 시점에서, X는 확실히 돈돈다리 북쪽 돌출 부분에 있었고, 자신의 손으로 유키토를 거기서 밀쳐 떨어뜨린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슬슬 시간 초과네요.”
라는 무정한 선언을 듣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U군은 왼팔을 들어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한 뒤, “그럼, 이걸로”라고 말하며 ‘해답편’ 원고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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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답편
○반 다이스케, 아사노 요우지, 아사노 사키, 사이토 사카에 네 명은 시간적 혹은 물리적으로 생각해도 명백히 범행이 불가능하다. 또한, 본문에서 알리바이가 명기된 린타로와 타케마루는 X가 아니다.
○따라서 X는 M** 마을의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 중에 있다.
○위독한 상태에 있는 카는 범행 불능. 한 팔이 없는 아가사는 범행 불능. 출산을 앞둔 올츠이는 범행 불능.
○이상으로 X일 가능성이 있는 것은 엘러리 뿐이다.
○엘러리는 다이스케가 도망친 후 돈돈 다리를 건너가 유키토를 공격해 계곡 아래로 떨어뜨렸다. 범행 후 다리를 건너 고개 길로 돌아가, [옆길 B]를 내려가 [지류 A]의 나무 다리를 건너는 루트로, 오후 3시 5분에 마을 광장에 돌아왔다.
○동기는 복수. 전날, 아들 카가 '금단의 계곡'에 갔다가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잔혹한 소년 유키토의 짓이었다. 사키의 바지에 묻은 빨간 손자국은 그때의 피에 의한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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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끝이야?"
순간적으로 아연한 후, 나는 물었다. U군은 씨익 웃으며 "네, 끝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잠깐만, 그건 아니지 않나."
나는 본의 아니게 큰 소리를 냈다. U군은 태연하게,
"왜죠?"
라고 되물었다.
"왜긴 왜야, 이건 전혀 해결이 안 됐잖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역시 조금 불친절했나."
"불친절이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테이블에 몸을 기울여 따졌다.
"첫째로 말이지, 다리가 부서진 후 남은 로프는, 작은 초등학생인 유키토의 몸무게조차 버티지 못할 정도였다구. 지문에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어. 그런 로프를, 어떻게 어른인 엘러리가 건널 수 있었던 거야? 거리는 20미터나 된다고. 계곡에서 부는 바람은 강하고, 로프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어. 가령 엘러리가 난쟁이고, 또 줄타기의 명인이었다 하더라도, 이 로프를 건너는 건 무리였다고 생각하는데."
"음, 확실히. 그런데요…"
"그리고, 범행 후는 ①의 루트를 통해 마을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당연히 린타로에게 들켰을 거라고. 린타로는 엘러리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쓰여 있었잖아. 그건 거짓말이었던 건가."
"그건 아야츠지 씨의 오해입니다."
U군은 단호히 말했다.
"사실, 린타로는 엘러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증거로, 도중에 타케마루가 두 번이나 심하게 짖었다고 했죠. 타케마루는 자기들 앞을 지나가는 수상한 자를 알아차린 거예요. 그래서 짖은 겁니다."
"그럼, 역시 범인 이외의 등장인물의 말에 '거짓'이 있는 거잖아."
"아니에요. 왜냐면, 린타로는 이렇게 증언했잖아요. '그 다리를 건넌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엘러리를 보지 못했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하?"
대체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U군의 설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혹시 그와 나는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가 다른 건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했다.
"부서진 돈돈다리를 엘러리가 건널 수 있었는가, 라는 문제인데요."
U군은 진지한 얼굴로 계속했다.
"엘러리는 난쟁이도 아니고 줄타기 명인도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남아 있던 로프 한 줄로 계곡을 건널 수 있었던 겁니다. 아주 쉽게요."
"그런…"
나는 산소를 찾는 물고기처럼 입을 벌렸다.
"설마, M** 마을이 닌자의 숨은 마을이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그런건 아닙니다. 안심하세요. 설령 닌자라 하더라도, 미군의 특수 공작 부대라 하더라도, 이 계곡을 건너기 위해서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도전'에 주석을 단 대로, 그런 도구는 여기서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라고 말했지만, 이어지는 말을 생각해내지 못해, 나는 불안하게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하듯이, U군도 자신의 담배(같은 세븐스타)를 물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는 말했다.
"엘러리는 난쟁이도 줄타기 명인도 닌자도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라, 유키토의 다잉 메시지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에…?"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손을 멈추고, 나는 테이블 구석에 던져진 '문제편' 원고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이 상황에서, 유키토를 자신의 손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것 같은 묘기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해요. 따라서 당연한 논리적 결론으로…"
"…설마"
혼란스러운 생각 속에서, 겨우 하나의 단어(설마)가 떠올랐다. 나는 두려워하며 말했다.
"설마 그 '사…'라는 게, '사루(원숭이)'를 말하려고 한 건가?"
"정답입니다."
U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타케마루가 격하게 짖은 거예요. 옛날부터 개와 사이가 나쁜 동물이라고 하면 정해져 있잖아요. 타케마루와 엘러리는 문자 그대로 견원지간이었던 거죠."
잠시 멍해져서 중얼거리듯 "원숭이, 원숭이…"라고 중얼거리는 나를, U군은 여전히 순진한 미소로 응시하며,
"처음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이 작품은 '본격 미스터리의 원점으로 돌아가 쓴 것'이라고. 본격 미스터리의 원점이라고 하면 당연히,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이죠?"
"—사기다. 불공평해."
겨우 기운을 짜내어, 나는 항의했다. 그러나 U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M** 마을에 사는 일본 원숭이들을 '인간'이라고는, 한 번도 쓰지 않았어요. '한 사람'이나 '두 사람' 같은 표현도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자'라는 한자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인간이 아닌 생물일 가능성을 암시하기 위해 '자'라고 굳이 히라가나로 표기했습니다.
애초에, 아야츠지 씨, 일본 본토의 산속에 포라든가 엘러리라든가 하는 이름의 인간들이 사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덧붙이자면, M** 마을의 M**는 'monkey'를, H** 대학의 H**는 'human'을 각각 암시한 이름입니다."
"원숭이를 '남자'나 '여자'라고 썼잖아."
"남자 = 인간 중, 수컷으로서의 성기관·성기능을 가진 쪽. 넓은 의미로는, 동물의 수컷도 지칭.
여자 = 인간 중, 암컷으로서의 성기관·성기능을 가진 쪽. 넓은 의미로는, 동물의 암컷도 지칭.
출처는 산세이도의 '신명해 국어사전'입니다. '코지엔'이나 '다이지린'이어도 상관없어요."
"젊은 여자들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원숭이가 그런 걸 할 리 없잖아."
"그건 물론 그루밍을 말하는 거예요. 원숭이의 털 손질. 아시죠."
"—더럽다. 비겁해."
"더럽다니요. 나이 많은 포우가 참나무 열매를 깨물고 있거나, 아이들이 벌거벗고 뛰어놀고 있는 등, 그들이 원숭이라는 복선을 몇 가지 깔아놓았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조금 흥분한 나머지, 어조를 강하게 했다.
"하지만 말이야, 원래 원숭이가 말을 할 리가 없잖아. '규칙'이라든지 'X'라든지 '복수'라든지......"
그러자, U君은 "어머 어머"라는 듯 얇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건 전부 어디까지나 원숭이의 세계에서의 일이니까요. 인간과 대화를 나누진 않잖아요? 대사도 전부 캠프의 인간들과 구별하기 위해 이중 괄호로 묶여 있죠. 게다가 고금을 통해 소설 속에서는, 고양이부터 도룡뇽까지, 생각하는 동물도 있고 나름의 문화를 가진 동물도 있어요. 인간의 말을 이해하거나, 인간적인 감성으로 행동하기도 하죠. 그러고 보니, 최근의 미스터리에서도 있었죠. 은퇴한 경찰견의 일인칭으로 쓰인 이야기. 미야베 미유키 씨의 '퍼펙트 블루'."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
"그런가요?"
나는 점점 더 흥분하며,
"이건 '범인 맞히기'가 아니야."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U君은 간단히 "네, 맞아요."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건 '범인 맞히기'가 아니라 '범원숭이 맞히기'죠. 그래서 그런 언어의 엄밀성을 중시해서, 작품 속에서도 아야츠지 씨와의 대화에서도, 나는 한 마디도 '범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어요. X 같은 진부한 미지수 기호를 끄집어낸 건 고육지책이었어요. '문제편'의 체크, 해 보실래요?"
"........"
"꽤나 고심했어요, 그 부분은. 아야츠지 씨라면 분명 그 고심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불쾌하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래서 아마추어 학생은 곤란하다......라고 마음속으로 독을 품으며, 심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고 눈을 감았다. 한동안 그대로 침묵하고 있자,
"저기, 텔레비전 켜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U君이 말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러게."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스위치를 켜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이상하게 밝고 씩씩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U君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쩐지 지금 막, 시계의 바늘이 오전 0시를 지난 모양이다. 새로운 해가 시작된 것이다.
브라운관 속에서는, 익숙한 연예인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축하해, 축하해"라고 말하고 있다. 그 화면의 한쪽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한 마리의 동물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저도 모르게 "와"라고 소리를 질렀다.
"――원숭이잖아."
어째서 U君이 굳이 오늘 밤을 선택해서 나를 찾아왔는지. 하필이면 섣달그믐의 이런 늦은 시간에, 추운 중에 오토바이를 타고.
그것도 연출("복선"이라고 그는 말할지도 모르겠지만)의 하나였던 것이다. 내가 이 '범원숭이 맞히기'를 다 읽을 즈음에 딱 새해가 밝는, 그런 타이밍을 그는 노렸다. 그래서 그렇게, 몇 번이나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던 것인가.
1992년, 원숭이해의 시작――.
어깨에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 사라져가는 듯한 기분을 나는 맛보았다. 방금 전까지 내가 느끼던 화가 몹시 하찮게 느껴지고, 동시에 그런 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져서......
나는 U君 쪽을 보았다. 하지만, 소파에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검은 배낭도 가죽 장갑도, 크림색에 초록색 줄무늬가 들어간 헬멧도, 거기에는 없었다. "돈돈다리, 무너졌다"라고 표지에 크게 적힌 원고만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확실히 익숙한 얼굴. 잘 아는 이름. 무엇인지 무척 그립고, 그렇지만 조금 얄밉고, 그 천진난만함이 때로는 이상하게 짜증스럽고......
'아, 그렇구나'라고 나는 그제야 생각해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냈는지, 그건...... 아니, 이제 그만두자. 이 이상은 적지 않기로 하겠다.
남겨진 '돈돈다리, 무너졌다'의 원고에 살짝 손을 뻗으며, 다음에 그가 찾아오는 건 언제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2024/07/31

[번역] 돈돈 다리, 떨어졌다 (3). - 아야츠지 유키토

### 4. '금단의 계곡'의 젊은이들
같은 8월 1일 오후. 장소는 바뀌어, 여기는 M** 마을 사람들이 '금단의 계곡'이라 부르는, 돈돈산의 서쪽이다.
돈돈다리에서 능선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파이프 바위로 내려가는 샛길이 나오고, 거기를 지나쳐서 좀 더 남쪽으로 가면 서쪽으로 꺾이는 샛길이 있다. 경사는 동쪽에 비해 훨씬 완만하고, 발밑 상태도 좋다.
자세한 위치 관계는 첨부된 지도(27페이지 "현장 부근 약도")를 참조해 주시고, 이 길을 내려가 만나는 계곡의 한 구석에 어제 저녁부터 두 개의 빨간 텐트가 쳐져 있었다. 포우가 말한 "사악한 마음을 가진 외지인들"의 일행이었다.


"요우지. 유키토는 어디 갔어?"
물길에서 돌아온 반 다이스케가 나무 그늘에 앉아 계곡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던 아사노 요우지에게 말을 걸었다. 요우지는 스케치북에서 눈을 들어 시큰둥한 표정으로 "글쎄"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까지 저기 있었는데. 사키를 또 괴롭혀서 혼내줬더니, 혀를 내밀고 도망갔어."
다이스케는 한숨을 쉬었다.
항상 그렇듯, 유키토는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다. 머리도 나쁘고 난폭하며, 성격도 전혀 귀엽지 않았다.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는데, 나이에 맞는 분별력도 전혀 없다. 저 아이가 내 친동생이라니, 정말 한심하고 어쩔 수 없는 기분이었다.
다이스케는 H**대학 이학부 2학년으로, 이번 봄에 스무 살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산을 좋아해, 틈만 나면 이렇게 가까운 산으로 캠프를 오곤 했다.
이번 일행은 다이스케를 포함해 다섯 명이다.
중학교 때부터 산행을 함께했던, 소꿉친구인 아사노 요우지. 같은 H**대학 문학부 2학년. 취미로 그림을 그리며, 대학에서도 미술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다.
그의 여동생으로, 고등학교 3학년인 사키.
요우지의 미술 동아리 후배로, 사키의 남자친구이기도 한 사이토 사카에.
그리고, 다이스케의 동생 유키토.
캠프 계획은 다이스케와 요우지가 세웠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초조해하는 사키의 기분 전환을 위해서가 본래 목적이었고, 사이토 사카에를 초대한 것은 요우지였다.
처음에는 네 명이 갈 예정이었지만, 유키토가 자기도 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너는 아직 초등학생이라며 거절해봤자 통하지 않는다.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울부짖는다. 엄하게 꾸짖으면 엄청난 소리로 운다. 부모님도 늦둥이로 태어난 유키토에게는 무척이나 관대하다. 그래서 결국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유키토는 골칫덩어리다.
최근 초등학생 치고는 작고, 겉모습은 얌전해 보이지만, 제멋대로 자라서인지 심리학에서 말하는 초자아(super-ego)의 발달이 현저히 늦어졌다. 열두 살이 되어서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구별을 거의 내면화하지 못한 상태이다. 초등학교 2, 3학년 때부터 싸움을 하고 수업을 빼먹는 문제아였다. 아직 잡힌 적은 없지만, 도벽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 이웃집 고양이를 모닥불에 던져 죽인 일도 다행히 들키지 않았지만, 유키토의 소행이었다. 새해 첫 참배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데려가면, 주차된 차의 타이어에 못을 박거나, 커터칼로 다른 사람의 옷을 찢는 등, 범죄에 가까운 나쁜 장난을 일삼았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언젠가 경찰 신세를 지게 될 게 뻔했다. 문제는 무엇보다도, 유키토가 그런 행동이 "나쁜 일"이라는 자각이 없다는 점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재미 삼아 하는 것이다. 어딘가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학교 성적은 당연히 좋지 않다. 특히 국어와 사회는 최악이라, 이 점에 대해서는 부모님도 한탄했다. IQ는 그렇게 낮지 않고, 오히려 우수한 편이라지만…….
"꺄!"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텐트 안에서였다. 바로 아사노 사키가 뛰쳐나와 오빠 요우지에게 눈물 섞인 목소리로 호소했다.
"이거 봐요, 오빠. 내 배낭 안에……"
투명한 비닐봉지를 바닥에 던졌다. 그 안에는 토막 난 뱀의 사체가 들어 있었다.
"또 그 애 장난이야."
"정말 미안해, 사키."
다이스케는 황급히 사과했다.
"나중에 잘 말해둘게."
"유키토를 데려온 건 정말 실수였어."
라고 요우지가 말했다.
"정말이야! 이제 지긋지긋해."
사키는 상당히 히스테릭해졌다. 아까는 스치면서 유키토에게 가슴을 만졌다고 한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유키토는 최근 여성의 몸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말 앞날이 걱정되어 다이스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말하긴 그렇지만, 그 애는 정상 아니야. 분명 어딘가 이상해. 어제도 내 엉덩이를 만지고, 나중에 바지를 보니 빨간 손자국이 있었어. 아마 피였을 거야. 대체 뭘 한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미안해."
다이스케는 그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사이토 사카에가 능선길 쪽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혼자 산책이라도 다녀온 모양이다.
"무슨 일이야, 사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또 유키토야? 뭐, 뭐. 그렇게 신경 쓰지 마. 상대는 아이잖아."
사카에는 아주 느긋한 태도였다.
"사이토 군. 유키토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위쪽에서 봤어요. 저쪽 다리 쪽으로 걸어가더군요.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했더니, 혀를 내밀었어요."
"다리라면, 막다른 곳에 있는 출렁다리?"
"네."
위험하다고,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아무리 문제아라도, 역시 동생은 동생이다.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유키토에게 관대한 것은 부모님뿐만 아니라, 다이스케도 마찬가지였다.
"흥. 저런 녀석, 계곡 아래로 떨어져 버리면 좋겠어."
사키는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 5. 유키토의 수난
반 유키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누가 좀! 도와줘!"
아까부터 목이 쉬도록 소리치고 있었지만,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넓은 산 속에서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그들의 캠프까지는 닿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라고 유키토는 생각했다. 다리 앞에 있던 그 더러운 표지판. 거기에 적혀 있던 것은 어떤 경고였을까?
"노후화로 위험"—그 글자는 국어를 잘 못하는 유키토는 읽을 수 없었다.
현수교를 건너는 것은 그야말로 스릴이 넘쳤다. 양손으로 로프를 더듬듯이 잡으며, 군데군데 큰 틈이 난 판자 위를 처음에는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씩 갈 때마다 다리 전체가 삐걱거리고 흔들렸는데, 그것이 참을 수 없이 재미있었다. 점점 흥분한 나머지, 마지막 5미터 정도를 뛰어갔는데, 그 순간이었다. 유난히 큰 삐걱거림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다리의 형태가 무너졌다. 다리를 지탱하던 로프가 마침내 끊어진 것이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유키토는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절벽 가장자리에서 계곡 바닥을 내려다보며, 천하의 악동 유키토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건너편까지는 20미터 가까이 된다. 남아 있는 것은 간신히 끊어지지 않은 로프 한 줄과 거기에 매달린 몇 장의 판자뿐이었다. 강한 바람에 휘말려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에 로프에 손을 대보았지만, 크게 흔들리더니 남아 있던 판자가 계곡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것으로는 도저히 유키토의 체중을 견딜 수 없다. 이쪽 길은 절벽 때문에 2미터 정도만 가면 막힌다. 주위는 모두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이 불가능한 절벽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것 외에는 유키토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넘었다. 한여름의 태양이 무자비하게 내리쬐고 있다. 작은 그늘도 없는 천연 발코니였다. 이대로 2, 3시간만 이 뜨거운 햇볕 아래 있으면, 일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다. 유키토는 간절히, 매주 보고 있는 TV 속 변신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빌었다.
"도와줘…"
이제는 외치는 것도 지쳐갔다. 이제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고 반쯤 포기하려던 그때,
"유키토!"
능선 쪽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다이스케의 목소리였다.
"형!"
유키토는 손을 흔들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곧이어, 부서진 현수교 건너편에 다이스케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기야, 형. 도와줘."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마."
다이스케가 큰 소리로 답했다.
"기다려. 지금 모두를 데리고 올 테니까. 알겠지? 거기서 움직이지 마. 무리하지 마!"
"—알았어."
"괜찮아. 금방 돌아와서 도와줄 테니까. 아무튼 가만히 있어."
그리고 다이스케는 몸을 돌려 능선 길로 돌아갔다. 오후 2시 반의 일이었다.

### 6. 다가오는 그림자
다이스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유키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고 쏟아지는 햇볕의 더위를 견디고 있었다. 평소에 말썽꾸러기인 유키토도 이 상황에서는 형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 오지 말 걸, 그런 짓을 하지 말 걸...'이라고,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후회하면서 유키토는 그대로의 자세로 다이스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의를 품은 어떤 존재의 그림자가 다리 건너편에 나타났을 때도, 유키토는 전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M** 마을의 오후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숲이 끊긴 곳에 생긴 광장에 모여, 모두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옷을 벗고 건강하게 뛰노는 아이들, 나무 그늘에서 바느질을 하는 젊은 여자들… '수염의 노사' 포우는 광장 한쪽에 있는 노천 온천에 어깨까지 몸을 담그고, 그런 마을의 풍경을 한가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희미하게, 무언가 이상한 외침이 들려왔다.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지금 그 소리는?'
중얼거리며 포우는 뭔가 불길한 예감에 흰머리가 섞인 눈썹을 찌푸렸다.
'출렁다리 쪽에서 나는 소리 같았는데…'
오후 2시 40분의 일이었다.


다이스케가 캠프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50분이었다. 능선길을 따라 곧장 달려와, [샛길 C](지도를 참조할 것)를 뛰어 내려왔다.
나무 그늘에 깔린 그라운드 시트 위에 사키가 누워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쪽 텐트 안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사키, 사키야!"
"응?"
졸린 듯 눈을 비비며 사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숨을 가쁘게 내쉬는 다이스케를 보고,
"무슨 일이에요, 반 씨? 그렇게 급하게."
"큰일났어. 요우지와 사이토 군은 어디 있어?"
"무슨 큰일이죠?"
라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요우지가 텐트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다이스케는 서둘러 사정을 설명했다. 요우지는 팔짱을 끼고 불만스럽게 아랫입술을 내밀었고, 사키는 "꼴 좋다"는 듯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어 보였다.
"흠. 그거 우리만으로는 어쩔 수 없겠네."
요우지가 말했다.
"어쨌든 빨리 돈돈 마을로 달려가서 구원을 요청해야겠어."
"부탁해. 나는 다리로 돌아갈게. 사이토 군은 어디에 있어?"
"낚시하러 계곡으로 내려갔어."
라고 사키가 대답했다.
"알겠어. 그럼, 사키는 여기서 대기하고, 그가 돌아오면 함께 다리 쪽으로 와줄래?"
말을 끝내자마자, 다이스케는 뒤돌아섰다.

### 7. 유키토의 최후
다이스케가 돈돈 다리로 돌아온 것은 오후 3시 반이었다. 같은 경로를 거쳐 올라왔지만, 능선까지는 오르막길이어서 시간이 더 걸렸다.
'서두르지 말자,' 라고 여러 번 스스로에게 말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 다리의 상태를 생각하면, 구조대가 올 때까지는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유키토를 진정시키고,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있다. 다행히 날씨가 나빠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다리 앞에 도착했다.“노후화로 인해 위험”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붙잡고 체중을 지탱하며, 헐떡이는 숨을 고르면서 동생의 무사함을 확인하려고 다리 너머를 보았다. 그때――.
다이스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그 자리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유키토가 없었다.
몸을 숨길 만한 장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록 20미터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해도, 시야는 탁 트여 있었고, 다이스케의 시력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부서진 다리의 모습도 아까와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곧이어 다이스케는 다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겁게 느껴졌다. 다리 중앙에 도착하자, 그는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다이스케는 유키토의 작은 몸이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몸은 이상하게 비틀려 있었고, 움직임이 없었다.
다이스케는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고통과 절망을 억누르며 다리 밑으로 내려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해야 유키토를 도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곧 알게 되었다. 유키토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눈물을 참으며 다이스케는 다리 밑으로 내려가, 유키토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유키토의 마지막 순간을 느끼며, 다이스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말은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공허함을 채울 수 없었다.


사이토 사카에는 캠프를 떠나 혼자서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고 고생을 했지만, 결국 본류의 돈돈 강과 만나는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가에 서서 사카에는 오른손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돈돈 다리라는 현수교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다리가 부서져 있었다. 양쪽 절벽에는 끊어진 로프가 늘어져 있었고, 강가에는 다리의 잔해로 보이는 나무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사카에는 조심스럽게 다리 쪽으로 다가갔다. 몇 걸음 나아가다 문득, 건너편에 누워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키토?"
그는 소리쳤다.
"이봐!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하지만, 사람 그림자는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강물은 불어나고 흐름도 거셌다. 어디서든 건너갈 수 있을 만한 곳이 없을까 하고, 사카에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몇 미터쯤 위쪽으로 가보니, 여기저기 바위가 드러나 있는 곳이 있었다. 저 바위를 따라 건널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카에는 낚싯대 등이 들어있는 배낭을 강가에 던져두었다.
여러 번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질 뻔했지만, 간신히 건너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달려가 보니, 쓰러져 있는 것은 역시 유키토였다.
"이봐, 괜찮아?"
소리치자, 그에 답하듯 소년의 입에서 "으으" 하는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신 차려. 이봐."
"……으으"
사카에는 깎아지른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이 위에서 떨어진 건가? 그렇다면 이렇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이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이봐, 유키토. 이봐."
등을 받치고 여러 번 불러보았다. 유키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들여다보니, 갈라진 머리에서 흐르는 피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으……으……"
어쩐지 희미하게 의식이 있는 듯했다. 유키토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뭐? 뭐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당했다……"
"뭐라고?"
"……밀……쳐……졌……"
소년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당했다" "밀쳐졌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는 바로 다잉 메시지였다. 그리고——.
"사……사……아……"
그렇게 결국, 악동 유키토는 숨을 거두었다.

### 8. M** 마을의 소동
돈돈 다리의 북쪽 절벽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는 정보는,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정찰을 다녀온 엘러리가 전해주었다. 죽은 사람은 유키토라는 이름의 소년으로, 어제부터 '금단의 계곡'에 머물던 외지인들 중 한 명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유키토는 문제의 절벽 위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밀쳐졌다"고 했다.
포우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알리며, 좋아하는 도토리를 씹어 먹으면서 모두의 반응을 살폈다.
"엘러리,"
마침내 포우는 엄숙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젊은 리더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일을 나에게 맡겨보는 게 어떻겠느냐?"
"맡기죠,"
엘러리는 대답했다. 포우는 깊은 숨을 천천히 내쉬며, 모인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좋다, 우리 중에 이 살인을 저지른 자가 있다면, 반드시 찾아내어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할 것이다. '금기를 어기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어제 '금단의 계곡'에 간 카도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물론 우리 중에 범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해된 소년의 동료들 중에 있을 수도 있다만..."
"잠깐 기다려 주세요, 포우,"
엘러리가 끼어들었다.
"그 소년은, 하지만..."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살인은 살인, '금기를 어기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더럽혀진 땅'에 온 사악한 마음을 가진 인간을 죽였다는 것은, 이중의 '더러움'이 아니겠느냐.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엘러리는 반론하지 않았다. 포우는 계속해서 말했다.
"다리 쪽에서 그 비명 소리가 들려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광장에 있었다. 그때 여기에 없었던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 중에 살인을 저지른 자, 여기서는 가칭 X라고 부르자, 그 X가 있다면, 당연히 그때 이 광장에 없었던 자일 것이다..."
모두에게 물어본 결과, 문제의 시간에 보이지 않았던 사람은 엘러리와 그의 아내 아가사, 엘러리의 두 번째 아내 올츠이, 그리고 엘러리와 아가사의 아들 카, 이 네 명 뿐이었다. 이 중 카는 어제 다친 이후로 여전히 누워 있었다.
"아가사는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포우의 질문에 중간 키의 아름다운 여자가 일어섰다. 아가사였다. 그녀는 작년 봄, 숲에서 곰에게 공격받아 오른쪽 팔꿈치 아래를 잃었지만, 그 기품 있는 아름다움은 여전히 빛났다.
"저는 계속 카의 곁에 있었습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중환자 상태인 자신의 아이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 그녀의 표정은 유난히 어두웠다.
"올츠이는? 어떻게 했느냐?"
올츠이는 아가사보다 한참 작은 젊은 여자였고,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포우의 질문에 그녀는, 오후 내내 광장에서 떨어진 나무 그늘에서 몸을 쉬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엘러리, 너는 어떻게 했느냐?"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은 엘러리는 현재 리더로서의 권위를 주장하듯 강한 앞니를 드러내며 다소 무뚝뚝한 어조로,
"혼자서 숲 속에 있었습니다."
라고 답했다.
"저도 그 비명 소리를 들었습니다, 포우."
"흠."
고개를 끄덕이며 포우는, 그 비명 소리를 들은 후 잠시 지나 엘러리가 광장에 나타났던 것을 떠올렸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두자. 돈돈 다리에서 비명 소리가 들린 시간은 오후 2시 40분이었다. 그리고 포우가 광장에서 엘러리를 본 시간은 정확히 25분 후인 오후 3시 5분이었다.

### 9. '신'에 의한 데이터 제공
이번 장에서 다시 등장하는 인물은 "고뇌하는 자유업자" 린타로이다. 린타로가 그의 애견 타케마루와 함께 파이프 바위까지 와서, 복잡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후 1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곳에서 약 세 시간, 즉 오후 4시가 조금 넘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즉,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는 M** 마을에서 능선 길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그 통나무 다리를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소설에서 '신의 시점'을 취하는 작가가 지문에서 이렇게 명시하고 있으니, 그 사실은 틀림없다.
작가의 인터뷰에 응한 린타로는 이렇게 단언한다.
"그 통나무 다리는 그 시간 동안 항상 제 시야 안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리를 건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놓쳤을 가능성은 없나?"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복잡하고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있었다면 절대 알아챘을 것입니다."
다만――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 시간 동안 두 번 정도, 그의 발치에 있던 타케마루가 심하게 짖었다는 것이다. 타케마루는 겁이 많기 때문에, 아마도 풀숲에서 뱀이라도 보고 놀랐을 것이라고 린타로는 이야기했다.


### 9. '신'에 의한 데이터 제공
문제의 실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여기서 두세 가지 설명을 추가하겠다.
M** 마을 및 ‘금단의 계곡’의 캠프지에서 돈돈다리로 가는 길은, 첨부된 지도에 표시된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해도 좋다. 예를 들어, 포우 일행만이 아는 비밀의 지름길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범람한 동쪽 지류에 대해서도, 그림에 표시된 것처럼, 적어도 파이프 바위 부근보다 하류 부분에 대해서는, 그 통나무 다리를 사용하지 않고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꾸로 말하면, 더 상류로 돌아가면 바위를 타고 건널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가령 포우가 말하는 X가 M** 마을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그가 마을에서 돈돈다리까지 가려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루트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1. 통나무 다리를 건너고, [횡도 B]에서 능선길로 올라 돈돈다리로.
2. 일단 [지류 A]의 상류로 돌아가서 강을 건너고, [횡도 D]에서 능선길로 올라 돈돈다리로.
각 루트의 소요 시간을 기록해두자면, 1번 루트는 가는 데 35분, 돌아오는 데 20분, 2번 루트는 가는 데 1시간 반, 돌아오는 데 50분이 걸린다. 이것은 생각할 수 있는 최단 소요 시간이다.
가능성을 논하자면 물론, 이 두 가지 외에도 돈돈다리까지 가는 루트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횡도 D]에서 한 번 능선길로 나온 뒤 [횡도 C]를 내려가거나, [지류 B]를 따라 계곡을 내려간 뒤 [횡도 A]를 올라 다시 능선길로 나오는 등의 극단적인 우회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다른 정규 “길”을 통하지 않고 능선까지의 경사를 오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앞서 언급한 1번과 2번 루트에 비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분명하다.
추가로,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의 경우, 엘러리의 알리바이는 오후 3시 5분 이후 완전히 성립한다. 아가사와 올츠이에 대해서는 모두 오후 3시 40분까지의 알리바이가 전혀 없다. 아가사는 계속 카의 곁에 있었다고 하지만, 위독한 상태였던 카는 그녀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한편 캠프의 네 명은, M**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들은 오후 2시 40분 시점에서는 모두 단독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각자의 증언에 따르면――
- 다이스케: 모두에게 유키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능선길을 되돌아가던 중이었다.
- 사키: 캠프의 나무 그늘에서 졸고 있었다.
- 요우지: 텐트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었다.
- 사카에: 낚시를 하기 위해 [지류 B]를 내려가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이것은 사건의 핵심을 다루는 것이다, 오후 2시 40분에 포우 일행이 들은 문제의 비명은 확실히, 유키토가 돈돈다리 북쪽 절벽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밀쳐졌을 때 외친 목소리였다.
거듭 강조하지만, ‘신’인 작가가 지문에서 말하는 것이므로 절대 틀림없다.

.【독자에게 던지는 도전】
○ 문제 1
반 유키토를 죽인 X의 이름을 맞춰주세요. X는 단독범으로, 어떠한 의미에서도 공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 제3자의 범행도 아닙니다.
○ 문제 2
범행 방법은? X는 어떻게 유키토를 죽였는가, 라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으로는, 연, 행글라이더, 낙하산, 기구, 괴인20면상이 애용하는 미니 헬리콥터 등 작품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특수한 도구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초능력이나 우주인, 이공간통로 등 초자연적인 존재나 개념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퍼즐 미스터리의 규칙에 따라, 본문에는 전혀 거짓된 기술이 없음을 여기에 명시합니다. 또한, 논리가 무의미하게 복잡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문제"에 있어서 등장인물들의 대사에도 동일한 규칙을 설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X 이외의 것들의 대사에는 거짓말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위 조건을 바탕으로 답을 제출해 주세요.
건투를 빕니다.


2024/07/28

[번역] 돈돈 다리, 떨어졌다 (2). - 아야츠지 유키토

1. 돈돈 다리
곳은 일본, 혼슈의 어느 산속.
깊은 계곡이 있고, 거기에 긴 현수교가 걸려 있다. 계곡 바닥에는 '돈돈 강'이라는 이름의 강이 흐르고 있으며, 현수교는 '돈돈 다리'라고 불린다.
보기에도 오래된 다리이다.
길이는 20미터도 되지 않을 정도. 나무로 만든 도리를 로프로 매단 단순한 구조로, 강한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삐걱거림을 내며 흔들린다. 예를 들면, 영화 '인디아나 존스 2'의 클라이맥스에 나오는 다리를 떠올리면 된다. 다리 앞에는 '노후화로 인해 위험'이라고 쓰인 팻말이 서 있지만, 굳이 경고를 하지 않아도, 보통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두세 걸음 내디디고 곧 돌아갈 것이다. 그 정도로 보기에도 위태로운 모습이다.
다리에서 계곡 바닥까지의 거리는 30미터는 될까. 계곡 양쪽은 거의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이다. 부서지기 쉬운 듯한 적갈색 바위 표면에는 발 디딜 곳도 없고, 덩굴조차 자라지 않는다.
무엇이든, 자일 같은 도구 없이 이 절벽을 오르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해 두겠다. 아니, '도구 없이'라는 조건도 여기서는 불필요할지 모른다. 설령 암벽 등반의 천재라 하더라도, 이 절벽을 정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나비나 새처럼 날개를 가진 것이 아니라면.

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다리는 길을 남북으로 잇고 있다. 남쪽 길은 '돈돈 산'을 종주하는 능선길로 이어진다. 한편, 다리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길이 없다. 곧바로 막다른 곳이 된다. 한 달 전에 일어난 대규모 산사태가 그 원인이었다.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던 길이 십수 미터나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산속 깊은 곳이라 복구의 전망도 전혀 서지 않은 채, 오늘까지 계속 방치되어 있다. 막다른 길 앞에는 마치 계곡으로 돌출된 발코니처럼 약간의 지면이 남아 있지만, 이것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에도 오르내릴 수 없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 이제부터.
돈돈 다리 북쪽의 고립된 이 돌출 부위가, 본편의 '문제'의 초점이다. 즉 이곳이, 지금부터 서술할 어느 살인 사건의 범행 현장이 된다.

2. 린타로와 타케마루
돈돈 다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을 한참 가다 보면, 동쪽으로 갈라지는 작은 길이 있다. 일반 등산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좁고 험난한 길이다.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 내려가다 보면, 길은 어느새 돈돈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 중 하나에 닿는다.

그날, 8월 1일 오후, 이 계류 옆에 한 남자와 한 마리의 개가 있었다. 남자는 스물여섯 살, 이름은 린타로였다. 개는 타케마루, 수컷 시바견이다.
린타로는 돈돈 산 기슭에 있는 '돈돈 마을' 출신으로, 지금은 고향을 떠나 혼자 도시에 살고 있다. 어느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1년이 채 안 되어 그만두었다. 현재의 직업은 "자유업"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린타로는 고민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설명하기 시작하면 몇 장을 써도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의 고민은 그만큼 복잡했다.
어쨌든 린타로는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에 지친 그는 당장의 일을 내팽개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몇 년 만의 귀향이었다. 부모님은 크게 환영해 주었고, 고등학생 때부터 키우던 사랑스러운 타케마루도 재회에 기뻐하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 린타로가 타케마루를 데리고 돈돈 산으로 향한 것은, 말하자면 최후의 결심이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곳에서 마음껏 고민해 보자고 결심한 한편, 최악의 경우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고민은 심각했다.

그들이 그 강가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를 조금 넘긴 때였다. 얼마 동안 흐린 날씨가 계속되었지만, 오늘은 화창했다.
그곳은 한때 린타로가 좋아하던 장소였다. 마을에서 상당히 걸어야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여름 방학에는 사흘에 한 번 꼴로 찾아오곤 했다. '파이프 바위'라고 그가 마음대로 이름 붙인, 말 그대로 파이프처럼 생긴 길쭉한 큰 바위가 강 앞에 있었고, 이를 벤치 삼아 혼자 사색에 잠기는 것이 그 시절 그의 고독한 취미였다.
"오랜만이네, 여기 오는 것도."
옛날처럼 파이프 바위 끝에 앉아, 린타로는 발밑에 웅크리고 있는 타케마루에게 말했다.
"가끔 너도 데리고 왔었지. 기억나니?"
타케마루도 이제 만 열한 살,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넘은 나이다. 오랜 시간 산길을 걸어와서인지, 지친 듯 혀를 길게 내밀고 눈도 뜨지 않았다.
린타로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고뇌로 가득한 그의 마음과는 반대로, 맑게 갠 여름 하늘은 한 점 흐림 없이 파랬다. 시선을 돌리면 나무들의 선명한 초록색이 눈에 들어왔다. 계곡을 스쳐 가는 시원한 바람이 땀에 젖은 피부에 상쾌하게 느껴졌다.
눈앞을 가로지르는 강물의 흐름이 유난히 거세었다. 엊그제까지 내리던 비 때문일 것이다. 평소보다 두 배나 강폭이 넓어지고, 물의 양도 늘었다. 실수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단번에 물살에 휩쓸려 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죽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린타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타케마루는 간접흡연의 피해를 호소하듯, 꼬리로 땅을 두드리며 앞발로 얼굴을 문질렀다.
"좋겠다, 너는."
린타로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좋겠어. 아무런 고민도 없으니까."
타케마루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왈" 하고 대답했다. 린타로는 고민했다. 왜 여기서 타케마루가 "왈" 하고 짖는지, 그런 문제조차 그의 복잡하고 심각한 고민 속에 새롭게 포함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그 후 약 세 시간, 오후 4시가 넘을 때까지 그들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후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3. M** 마을의 규율
린타로와 타케마루가 있는 파이프 바위 주변에서 길은 계곡에 스며들 듯, 끊겨버리는 듯 보인다. 그러나 강의 폭이 약간 좁아진 부분에 원목 다리(라고 해도, 쓰러진 나무가 우연히 양쪽 강둑을 연결한 자연의 다리다)가 놓여 있어, 이를 건너면 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길이 점점 더 가늘어지며 원시림이라고 부를 만한 깊은 숲 속으로 이어진다.
이 숲에는 산의 지리에 밝은 현지인들도 좀처럼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그것에는 약간의 이유가 있다. 사실 오래전, 이 깊은 곳으로 패망한 헤이케의 무사들이 도망쳐 들어왔다고 한다. 그들 중 한 명이 강력한 주술적 능력을 가진 자(영능자, 초능력자라고 생각하면 된다)였고, 추격자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특수한 결계를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도 부주의하게 접근하는 자들에게 재앙을 가져온다는 이야기가 근처 마을들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 기이한 패망 무사 전설의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 이 숲 속 깊은 곳에는 실제로 알려지지 않은 한 마을이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가칭으로, 그것을 [M** 마을]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좋아, 얘들아."
포우는 둘러싼 작은 얼굴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함부로 생명을 죽여서는 안 돼. 우리는 항상, 우리가 사는 이 산의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야 하니까. 뱀이든 토끼든, 아무 이유 없이 죽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우리의 '규율'이다. 알겠느냐?"
포우는 M** 마을의 '장로'라 불러야 할 존재였다. 나이를 먹고 '장'의 자리를 젊은 엘러리에게 물려주었지만, 여전히 이곳에 머물며 모두에게 존경받고 있었다. 일단 권력을 내려놓은 자는 집단을 떠나는 것이 그들의 오래된 관습이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땅에 털썩 주저앉은 채, 포우는 다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은 그를 그의 흰 턱수염을 따서 '수염의 노사'라고 부른다.
"강을 건너, 능선을 넘은 저쪽 계곡으로는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 그곳은 '더럽혀진 땅'이다. '금단의 계곡'이다. 사악한 마음을 가진 외지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그들과 교류하는 것, 이것도 역시 규율에 어긋나는 것이다."
"왜 그런 거예요, 포우?"
라고 질문하는 아이가 있었다. 루루우라는 이름의 작은 남자아이였다.
"그냥 그런 것이다."
포우는 단호히 대답했다.
"'더러움'은 '더러움', '금단'은 '금단'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악을 가져오는 것.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 그 증거로 어제 저녁, 금기를 어기고 그곳에 갔던 카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루루우,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카는 루루우의 사촌이자 마을의 젊은 장 엘러리의 아들이다.
"좋아, 얘들아"
포우는 다시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큰 부상을 입고 지금도 위독한 상태가 계속되는 어린 생명을 생각하며, 작은 노인의 눈에 깊은 우수가 가득 차올랐다.


2023/12/15

"우먼 인 윈도"에서 소개된 애나 폭스의 영화들

"우먼 인 윈도" 속에서 소개된 애나 폭스의 영화들 목록입니다. 책 뒤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10월 24일 일요일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The Man Who Knew Too Much)
1956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제임스 스튜어트, 도리스 데이 주연, 히치콕 감독이 자신이 1934년 만든 동명의 영화(영국) 를 리메이크한 작품, 휴가를 보내던 가족이 암살 사건에 휘말리는 내용으로, 극중에서 도리스 데이가 부른 'Que Sera, Sera'로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길다(Gilda)
1946년. 미국. 찰스 비도르 감독, 리타 헤이워스, 글렌 포드 주연, 도박꾼 조니는 카지노 사장의 심복이 된다. 사장의 집에 초대받아간 조니는 사장의 부인이 된 전 애인 길다를 만난다. 두 사람은 강하게 이끌리고 선을 넘는다. 리타 헤이워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이다.

10월 27일 수요일
과거로부터 (out of the Past)

1947년, 미국, 자크 투르뇌 감독. 로버트 미첨, 제인 그리어 주연, 왕년의 사설탐정으로, 지금은 은퇴하고 주유소에서 일하는 제프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조용히 살아가려던 그의 앞날에 과거의 위험한 사랑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에어플레인(Airplane)
1980년. 미국. 데이비드 주커, 제리 주커 공동 감독 및 주연, 택시 기사인 테드 스트라이커는 공군 조종사로 참전한 기억 때문에 비행공포증을 앓는다. 어느 날, 비행 승무원인 여자친구 일레인이 결별을 선언하자 테드는 엉겁결에 그녀를 따라 비행기에 오른다. 그런데 식중독으로 기장이 정신을 잃고, 테드가 조종간을 잡게 된다.

10월 29일 금요일
디아볼릭(Les Diaboliques)

1955년, 프랑스,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 시몬 시뇨레, 베라 클루조 주연, 폭력적인 남편인 미셸 때문에 괴로워하는 크리스티나에게 미셸의 정부인 니콜이 찾아와 함께 그를 죽이자고 제안한다.두 사람은 성공적으로 미셸을 죽이고 시체를 수영장에 던지지만, 그의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몰락한 우상(The Fallen Idol)
1948년, 영국, 캐럴 리드 감독. 랠프 리처드슨, 미셸 모건 주연, 런던의 프랑스 대사관, 대사관 집사의 아내가 죽고, 유일한 목격자는 어린 소년 필립이다. 유럽 심리 스릴러의 고전.

공포의 내각(Ministry of Fear)
1944년, 미국, 프리츠 랑 감독, 레이 밀랜드, 마조리 레이놀즈 주연, 제2차 세계대전 중 출소한 닐이 뜻하지 않게 첩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10월 30일 토요일
39 계단(The 39 Steps)

1935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로버트 도넷, 매들린 캐럴 주연, 리처드는 자신이 첩보원이라고 주장하는 애너벨라를 돕는다. 다음 날 새벽, 애너벨라가 공격을 받아 죽고, 살인 혐의를 뒤집어쓴 리처드는 도망자가 된다.

이중배상(Double Indemnity)
1944년, 미국 빌리 와일더 감독, 프레드 맥머레이, 바버라 스탠윅 주연, 보험회사 직원인 월터는 고개인 디트리히슨의 집에 방문 했다가 그의 아내 필리스의 유혹에 넘어간다. 두 사람은 디트리히 슨을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보험사는 이를 수상하게 여기고 수사에 들어간다.

가스등(Gaslight)
1944년, 미국. 조지 큐커 감독. 샤를르 보와이에, 잉그리드 버그먼, 조셉 코튼 주연. 폴라는 잘생긴 그레고리와 결혼해 상속받은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레고리는 폴라의 외출을 막고, 그녀를 정신이상자로 몰고 간다. 가스라이팅 (gaslighting)'이라는 심리학 용어와 관련이 있다.

파괴공작원(Saboteur)
1942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프리실라 레인, 로버트 커밍스 주연, 공장에서 일하던 배리는 화재로 친한 친구를 잃고 방화범으로 몰린다. 배리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방화의 배후에 있는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려 한다.

빅 클락(The Big Clock)
1948년, 미국, 존 패로 감독, 레이 밀랜드, 찰스 로튼 주연, 어떤 이를 살해한 언론 재벌 얼은 무고한 남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다. 남자는 자신의 결백을 밝히려 한다.

그림자 없는 남자(The Thin Man) 시리즈
1934~1947년, 미국. 윌리엄 파월, 머나 로이 주연, 은퇴한 경찰인 닉 찰스와 그의 아내 노라 찰스가 사건을 풀어가는 코미디 탐정물, 은퇴한 형사인 닉 찰스는 부유한 집안의 딸 노라와 결혼한다. 닉은 느긋하게 은퇴 생활을 누리고 싶어하지만 스릴을 원하는 노라 때문에 이런저런 사건에 뛰어든다. 대실 해밋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모두 6편이 있다.

도살자(The Butcher, Le Boucher)
1969년, 프랑스, 이탈리아. 클로드 샤브롤 감독, 스테파니 오드런, 장 얀느, 안토니오 파살리아 주연, 시골 학교에 부임한 교사 엘렌은 푸줏간 주인 포폴을 만난다. 포폴은 엘렌에게 반해 사랑을 고백하지만 엘렌은 거부한다. 한편 마을은 연쇄 강간, 살해 사건으로 흉흉해지고 엘렌은 포폴을 의심한다. 히치콕을 모방했으면서도 히치콕보다 더 히치콕답다는 평을 받았다.

다크패시지(Dark Passage)
1947년, 미국, 델머 데이브즈 감독, 험프리 보가트, 로런 바콜 주연, 빈센트는 아내를 살해한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가까스로 감옥에서 탈옥한 빈센트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 하고 그런 그를 아이린이라는 여자가 돕는다.

나이아가라(Niagara)
1953년, 미국, 헨리 해서웨이 감독. 마릴린 먼로, 조셉 코튼, 진피터스 주연. 나이아가라 폭포로 여행 온 신혼 부부가 다른 투숙객 부부의 갈등에 휘말린다.

샤레이드(Charade)
1963년, 미국. 스탠리 도넌 감독. 오드리 헵번, 캐리 그랜트 주연, 남편의 재산을 노리는 남자들에게 쫓기는 여자 레지나와 이를 돕겠다고 나선 조슈아가 파리에서 겪는 일을 다룬다.

서든 피어(Sudden Fear)
1952년, 미국. 데이비드 밀러 감독, 조안 크로포드, 잭 팰런스 주연, 상속녀이자 극작가인 마이라는 배우인 레스터를 만나 결혼한다. 그러나 레스터에게는 아이린이라는 정부가 있었다. 레스터는 아이린과 함께 마이라를 죽이고 그녀의 재산을 가로채려 한다.

어두워질 때까지(Wait Until Dark)
1967년, 미국, 테렌스 영 감독, 오드리 헵번, 알란 아킨 주연, 수지는 최근에 시력을 잃었다. 그녀의 남편은 비행기에서 인형을 잠시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인형 속에는 밀수된 마약이 있었고, 악당들은 수지에게 접근해 인형이 숨겨진 곳을 알아내려 한다.

배니싱(The Vanishing)
1988년, 프랑스, 네덜란드, 조지 슬루이저 감독. 버나드 피에르 도나디우, 기니 베르보에츠 주연, 연인인 렉스와 사스키아는 여행을 떠난다. 중간에 들른 휴게소에서 사스키아가 실종되고 렉스는 그녀를 찾아 주변을 뒤진다. 그리고 삼 년 후, 렉스에게 한 남자가 접근한다. 그는 평범한 교사로 보이지만 실은 정신병자였다.

실종자(Frantic)
1988년, 미국. 로만 폴란스키 감독. 해리슨 포드, 베티 버클리 주연, 파리로 여행을 온 부부, 리처드가 샤워를 하는 사이 호텔방에서 부인이 사라진다. 리처드는 아내의 실종이 바뀐 가방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사이드 이펙트(Side Effects).
2013년, 미국,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루니 마라, 채닝 테이텀, 주드 로 주연, 우울증 환자 에밀리는 의사인 뱅크스가 처방해준 신약을 복용하고 증세가 호전된다. 하지만 몽유병 증세가 나타나면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모든 것이 약의 부작용 때문이라 믿는다.

카사블랑카(Cassablanca)
1942년, 미국, 마이클 커티스 감독, 험프리 보가트,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 모로코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릭은 우연히 옛 사랑인 일자를 만난다.

밤 그리고 도시(Night and the City)
1950년, 미국, 영국. 줄스 다신 감독, 리처드 워드마크, 진 티어니 주연, 런던의 밤거리를 헤매는 해리는 은퇴한 세계적인 레슬링 선수를 만나고, 생각지도 못한 음모에 휘말린다.

소용돌이(Whirlpool)
1949년, 미국, 오토 프레밍거 감독, 진 티어니, 리처드 콘트 주연. 마비 증상으로 고통받는 여자가 최면요법을 시도한다. 하지만, 최면에서 깨어난 그녀는 기억에 없는 살인 현장에서 발견되고, 용의자가 된다.

안녕, 내사랑 (Murder, My Sweet)
1944년, 미국,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 디 포웰, 클레어 트레버, 앤 셜리 주연, 전직 사기꾼의 여자친구를 찾는 일에 고용된 필립은 거미줄처럼 얽힌 복잡한 미스터리에 빠진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영화화했다.

나이트 머스트 폴(Night Must Fall)
1937년. 미국, 리처드 소프 감독. 로버트 몽고메리, 로사린드 러셀 주연, 브람슨 부인은 고립된 저택에 사는 자산가이다. 그녀는 저택을 돌봐달라며 대니를 고용한다. 그녀의 조카 올리비아는 그에게 끌리면서도 그를 의심한다.

로라(Laura)
1944년, 미국. 오토 프레밍거 감독. 진 티어니, 데이나 앤드루스 주연, 광고회사 디자이너인 로라가 자신의 집에서 살해되고, 한 남자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10월 31일 일요일
현기증(Vertigo)
1958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제임스 스튜어트, 킴 노박 주연, 고소공포증 때문에 은퇴한 경찰 스코티는 사립탐정이 된다.그는 사건을 맡았다가 마들레인이라는 여인에게 연정을 느끼고, 마들레인이 자살한 이후 그녀를 너무나 닮은 주디라는 여인에게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
1949년, 영국, 캐럴 리드 감독, 조셉 코튼, 알리다 발리 주연,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삼류 소설가 마틴스가 친구에게 일자리를 얻으려고 비엔나를 방문하지만, 친구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한 것을 알게 된다.

리피피 (Du Rififi Chez Lex Hommes)
1955년, 프랑스, 이탈리아. 줄스 다신 감독, 진 세바이스, 칼 모너 주연,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토니는 여전히 충성스러운 부하 조를 다시 만난다. 조는 토니에게 보석상을 털자고 제안한다. 이 마지막 한탕을 끝으로 은퇴하자고 말이다.

11월 2일 화요일
스펠바운드(Spellbound)
1945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잉그리드 버그먼, 그레고리 펙 주연, 정신병원의 의사로 근무하는 콘스탄스는 새로 부임한 의사 에드워드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사실 에드워드가 아니었고, 죽은 친구의 이름임이 밝혀진다. 남자는 기억하지 못하는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몰려 경찰의 추적을 받는다.

죽음의 항해 (Dead Calm)
1989년, 오스트레일리아. 필립 노이스 감독, 니콜 키드먼, 샘 닐주연,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부가 요트 여행을 떠난다. 조용할 줄만 알았던 여행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만난 한 남자로 인해 흔들린다.

레베카(Rebecca)
1940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로런스 올리비에, 주디스 앤더슨, 조앤 폰테인 주연, 수줍은 여자가 부인과 사별한 남자를 만나 결혼해 대저택에 들어가지만, 남자는 아직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1월 3일 수요일
열차 안의 낯선 자들(Strangers on a Train)
1951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팔리 그레인저, 루스 로먼 주연, 프로 테니스 선수 가이는 아내를 두고 외도를 즐기며 이혼을 바라고 있다. 어느 날 가이는 기차 안에서 브루노를 만나고, 브루노는 그에게 교환살인을 제안한다. 영화 마지막에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목마 장면이 등장한다.

위커 맨(The Wicker Man)
2006년, 미국, 닐 라부티 감독,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 고속도로 사고로 죽어가던 모자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경찰관 에드워드는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옛 연인의 편지를 받는다.

로프(Rope)
1948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 두대학생이 재미삼아 동급생을 밧줄로 목 졸라 죽인 후 그의 시체를 아파트에 숨긴다. 이들은 완전범죄를 위해 친구와 가족을 초대해 파티를 연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
1959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캐리 그랜트, 에바 마리 세인트 주연, 뉴욕의 광고업자가 외국첩보기관에 의해 정부요원으로 오해받아 살해될 위기에 처한다.

숙녀 사라지다(The Lady Vanishes)
1938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마가렛 락우드,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주연, 여행 중인 젊은 여성이 기차에서 한 부인의 도움을 받는다. 두통으로 잠이 들었던 여성은 깨어난 뒤 그 부인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찾아 나선다. "반드리카 초특급"이라는 제목 으로도 알려졌다.

11월 4일 목요일
아담스 패밀리(The Adams Family)
1991년, 미국, 베리 소넨필드 감독, 안젤리카 휴스턴, 라울 줄리 아, 크리스토퍼 로이드 주연, 아담스 가에 이십오 년간 행방불명이던 친척이 찾아온다. 1964년 TV 시리즈로 방영된 동명의 작품을 영화화한 것으로, 개봉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미스터 에드(Mister Ed)
1961~1966년, 미국, 저스터스 아디스 외(外) 감독. 앨런 영, 코니 하인즈 출연, 미국 C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TV 시리즈. 말하는 말인 에드와 그 주인의 좌충우돌을 다루었다. 이 소설에서 애나가 올리비아에게 언급한 물론(Of course)이라는 말이 주제가에서 말장난으로 반복된다.

11월 5일 금요일
무법자(The Outlaw)
1943년, 미국, 하워드 휴즈, 하워드 혹스 감독. 잭 부텔, 제인 러셀 주연, 서부의 무법자들이 리오 맥도날드라는 여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좌충우돌한다. 제인 러셀이 전형적인 핀업걸 이미지로 등장하는 포스터로 유명하다.

열정(Hot Blood)
1956년, 미국, 니콜라스 레이 감독, 제인 러셀, 코넬 와일드 주연, 열정적인 여성 애니와 정략결혼으로 얽힌 형제 이야기, 집시 스커트를 입고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제인 러셀을 담은 포스터로 유명하다.

11월 7일 일요일
의혹의 그림자(Shadow Of A Doubt)
1943년, 스릴러,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테레사 라이트, 조셉 코튼 주연, 미국 소도시에 사는 찰리의 단조로운 삶은 이름이 같은 찰리 삼촌이 찾아오면서 활기를 띤다. 그러나 찰리는 삼촌이 연쇄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진다.

이창(Rear Window)
1954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제임스 스튜어트, 그레이스 켈리 주연, 다리를 다친 사진작가가 이웃들을 엿보는 것으로 소일하던 중 한 이웃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확신한다.

11월 8일 월요일
싸인(Sign)
2002년, 미국, 나이트 샤말란 감독. 멜 깁슨, 호아킨 피닉스 주연. 미국의 시골 마을에서 옥수수 농장을 운영하는 그레이엄은 어느날 원과 선으로 만들어진 복잡하면서도 거대한 미스터리 서클을 발견한다.

로즈메리의 아기 (Rosemary's Baby)
1968년, 미국, 로만 폴란스키 감독. 미아 패로 주연, 새로운 아파 트로 이사 온 젊은 부부가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되고, 부인이 임신한 후에 더욱 심각해진다.

침실의 표적(Body Double)
1984년, 미국.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크레그 워슨, 멜라니 그리피스 주연, 단역배우 제이크는 폐소공포증 때문에 배역을 잃는다. 애인에게서도 버림받은 제이크는 다른 사람의 집을 관리해주기로 하고, 그 집에서 이웃 여자를 훔쳐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끔찍한 일에 휘말린다.

욕망(Blow-up)
1966년, 영국, 이탈리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세러 마일스 주연, 런던의 사진작가가 황량한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정리하던 중 의심스러운 것을 발견한다.

2023/09/03

0시를 향하여 - 애거서 크리스티 / 이선주 : 별점 2.5점

0시를 향하여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선주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생기고 부유한 테니스 스타 네빌 스트레인지는 오드리와 이혼 후 화려한 미인 케이와 재혼했다. 그리고 네빌은 부부의 여름 휴가를 오드리와 함께 보낼 계획을 세우고, 휴양지 솔트크리크에 위치한 트레실리안 부인의 저택 걸즈 포인트에 향했다. 그 곳에 네빌 부부와 오드리 외에도 케이의 전 남자 친구 테드 라티머, 오드리를 흠모하는 어린 시절 친구 하워드 등 관련된 다른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휴가를 보내며 네빌이 오드리와 다시 가까와졌고, 케이와 이혼할거라는 이야기가 나오던 와중에 트레실리안 부인이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네빌이었다. 이혼 이야기로 트레실리안 부인과 언쟁을 벌였고, 흉기로 보이는 골프채에 네빌의 지문이 있었던데다가 그의 양복에서 혈흔이 발견된데다가 부인에게서 거액의 유산까지 받게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빌의 알리바이는 곧바로 증명되었고, 뒤이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건 오드리였다. 노부인에게 유산을 받을 네빌 부부의 아내는 현처 케이가 아니라 전처 오드리로 명시되어 있다는 동기 외에도 흉기 등의 증거들이 차례로 발견된 탓이었다.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 또는 살인 사건에 바탕을 둔 소설을 읽을 때, 이야기가 살인 그 자체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모두 틀린 겁니다. 살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합니다. 살인은 수많은 다른 정황들이, 주어진 시각에 주어진 지점에서 한데 합쳐지면서 그 정점에 달해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살인은 그 자체로는 이야기의 종결입니다. 그것은 '0시' 이지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중기 작품. '밀리의 서재'에 업로드되어있는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완전 공략>>에 따르면 중기 걸작으로 별점은 4점이네요. 아~주 오래 전, 무려 12년 전에 동서에서 출간되었던 버젼으로 읽어보기는 했었는데 내용을 완전히 잊은 덕분에 처음 읽는 것 처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몇 가지 특징들로 다른 여사님의 작품들과 구별됩니다. 첫 번째는 푸아로나 미스 마플 시리즈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끔 경찰 쪽 주요 인물로 등장하곤 하는 배틀 총경이 홀로 활약하는 작품이지요.

두 번째로는 트릭을 파헤치는 본격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인 동기 분석이 더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특별한 트릭이 사용되지도 않고요. 그 탓에 추리적으로는 다소 재미가 떨어지기는 합니다. 배틀 총경도 직감이 뛰어나고, 심리를 분석하는데 능한 유능한 수사관이기는 하지만, 푸아로와 같이 범인의 의표를 간파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거든요. 
예를 들어, 배틀 총경은 네빌이 범인처럼 보이게 만드는 증거 모두가 억지로 만들어져 있다는걸 비교적 초반에 알아챕니다. 네빌이 범행을 사전에 계획해서 하녀에게 수면제를 먹였다면 - 노부인이 종을 울려도 알아채지 못하게 - 그가 노부인과 언쟁을 벌였을 이유가 없고, 골프채라는 증거도 남겨놓지 않은 채 강도 사건으로 위장했을거라는 분석을 통해서요. 사건에 대해 범인의 심리를 냉철하게 분석한 결과인 것이지요. 하지만 '진범이 그래서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는 없습니다. 단지 우직한 수사를 펼칠 뿐이에요.

그래도 덕분에 배틀 총경이 발로 뛰어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제대로입니다. 이를 통해 독자에게 모든 정보를 공정하게 제공해 주는 것 역시 고전 본격 추리물로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 하고요. 
추리적으로도 범인 네빌이 사건을 저지른 동기 - 오드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사형 선고를 받게 만들려고 했던 것 - 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노부인 살해는 그게 목적이 아니라, 이 동기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지요. "0시를 향해"라는 제목과 극중 대사를 잘 드러내는 동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알고보니 케이를 만나 오드리와 이혼했던게 아니라, 오드리가 자신을 버리고 먼저 도망을 쳤기 때문이었는데, 여러 복선을 잘 쌓아올려서 설득력도 있고,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도 잘 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만큼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우연, 억지가 심한 탓입니다. 완전한 제 3자인 맥휘터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오드리를 구해주고 배틀 총경과 협력하여 네빌을 옭아매는 추리쇼를 펼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우연치고는 너무 심하잖아요?
맥휘터가 사건에 뛰어드는 도화선이 된, 냄새나는 양복을 손에 넣은 경위도 억지스러웠습니다. 네빌이 수영해서 걸즈 포인트로 건너가기 전 벗어놓은 양복을 썩은 고기 위에 올려 놓아서 지독한 냄새가 배었고, 그걸 숨기려고 세탁소에 마침 호텔에서 봤던 사람 이름으로 맡겼는데, 그게 맥휘터였다는 겁니다. 왜 네빌은 그냥 양복을 버리지 않았던 걸까요?
이후 맥휘터가 걸즈 포인트를 방문해서 중요 단서 - 젖은 로프 - 를 찾아낸다는 것도 와 닿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을 못하는 정의로운 인물이라는 설정이 있기는 한데, 자기와 관계없는 사건에 발벗고 나설 충분한 이유로 보이지는 않은 탓입니다. 다른 증거를 조작하고 없앨 시간이 충분했다는 네빌이 로프를 없애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고요. 
그리고 마지막에 맥휘터와 배틀 총경이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선보이는 추리쇼의 핵심은 맥휘터가 '누군가 로프를 타고 저택을 올라가는 걸 봤다' 뿐입니다. 그게 네빌이라는 증거, 아니 저택 내부 인물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하인 누군가가 로프를 몰래 내려 보내서 외부 인물이 침입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네빌이 고작 이 정도 거짓 증언에 흔들려서 죄를 고백해버리니 맥이 풀리는 느낌이에요. 시시할 뿐더러 사악한 천재 악당으로의 면모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셈입니다. 

불필요한 등장인물과 사건도 너무 많습니다. 네빌 스트레인지와 오드리, 케이 외의 인물은 나올 필요가 없었어요. 애초에 노부인을 살해할 동기가 없어서, 독자의 흥미를 잡아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케이의 남자친구 테드 라티머를 수상쩍게 그리기는 하지만, 그 역시 동기가 너무 희박했습니다. 케이를 손에 넣기 위해 네빌을 함정에 빠트린다? 글쎄요.... 테드 라티머는 네빌을 직접 죽이면 모를까, 그런 계획을 세울 인물로는 그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트레브스 씨 살해도 내용과 별 관련이 없어요. 비교적 비중있어 보이지만, 진범이 밝혀지는건 이 사건과는 무관했으니까요. "누구나 알 수 있는 신체적 특징이 있다"는 말로 범인이 누구인지 끄집어내는건 불가능했습니다. 다들 특징들이 있기도 한 데다가, 진범 네빌의 새끼 손가락 길이가 다르다는건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특징으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나쁜 정보에 가까왔어요. 
마지막에 맥휘터 앞에 오드리가 나타나 결혼하지고 하는건 황당했습니다. 딱 두 번 본 남자에게, 자기를 구해줬다는 이유로 바로 결혼을 한다는건 이상하잖아요. 그냥 멀리 떠난 맥휘터 앞에 나타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 정도가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여사님은 다 좋은데, 왜 이렇게 커플을 만들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점들로 보면, 단편으로 충분했을 이야기를 길게 늘려쓴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05/2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2. 카라쿠리 미로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2. 카라쿠리 미로
다음 날, 토시오가 니시키 빌딩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마이코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한 장의 종이를 놓고 몰두하고 있었다. 토시오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종이를 들고 일어섰다,
"차나 마시자"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카페 테이블에 가져온 종이를 펼쳤는데, 그것은 소우지의 노트에서 복사한 미로의 개략도였다.
"카츠 군, 이 미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이코는 미로가 그려진 그림을 토시오 앞에 내밀었다.
"커피, 커피로, 괜찮지?"
토시오는 우물쭈물 대답하며 미로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는 말을 듣고도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카츠 군은 카오리와 함께 미로에 들어갔지만, 미로의 중심부에는 도착하지 못했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너의 말에 따르면, 미로에는 단연결형과 복연결형 두 종류가 있는데, 단연결형 미로에서는 한 손을 미로 벽에 대고 진행하면 돼. 손이 항상 벽에 닿아 있기만 하면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도 언젠가는 골인 지점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맞지?"
"맞습니다."
"이 미로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다지 어려운 미로는 아니야. 그게 문제였어. 나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 미로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었고.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나서 네가 시도한 방법으로 미로를 진행해보았어."
마이코는 성냥개비를 꺼내 토시오에게 건넸다.
"자, 이 그림으로 네가 실제로 미로에 들어갔을 때와 똑같이 미로를 통과해 봐."
토시오는 성냥개비 끝을 미로의 왼쪽 벽에 대고 조용히 따라갔다. 성냥개비는 몇 개의 막다른 골목길을 돌았지만, 놀랍게도 마지막에는 정확하게 오각형의 중심에 도달했다.
"어때?"
마이코가 미로를 들여다보았다.
"중앙에 도착했어요."
"반대편 벽으로도 시도해 봐."
토시오는 성냥개비를 오른쪽 벽에 대었다. 결과는 같았다. 성냥개비는 똑같이 마지막에 중앙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카츠 군은 그때 벽에서 손을 뗀 적은 정말 없었어? 아니면 앞만 보고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는걸 빼먹은건 아니었어?"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절대로 벽에서 손을 떼지 않았어요."
"이 그림이 잘못 그려진건 아니야. 실제로 그날 소우지가 미로를 안내할 때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굽이굽이마다 구석구석 확인해 두었어. 이 미로는 단지 단연결된 미로에 불과해."
"그럼 저는 왜 미로 중심부로 골인하지 못했을까요?"
커피가 나왔다. 마이코는 설탕을 컵에 듬뿍 담아 제대로 섞지도 않고 마셨다.
"이 미로를 만든 사람은 꽤나 머리를 쓴 것 같아."
"그렇습니까?"
"이렇게 그림으로 보면 별 것 아닌 미로로 보여. 하지만 실제로 미로에 서보면, 조금만 실수해도 골인할 수 없도록 여러 가지 장치가 되어 있어. 이 미로를 만든 사람의 세심함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야."
"그런가요 ......"
"첫째, 이 모양에 주목해야 해. 오각형말이야. 이 모양이 인간의 방향 감각을 잃게 하는 첫 번째 원인이야."
"오각형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요?"
"그래. 이상하게도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기본 형태는 삼각형도 아니고, 오각형도 아니야. 언제나 사각형이야. 네모난 집, 네모난 테이블, 네모난 침대, 네모난 종이, 네모난 책 ...... 인간이 보통 접하는 대부분의 물건이 네모야. 잘 정비된 도시는 반드시 바둑판의 눈처럼 깔끔한 사각형으로 구분된 길이 붙어 있기도 하고. 길을 잃기 쉬운 길은 그것의 형태와 구분이 깔끔한 사각형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런데 오각형의 굴곡은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면 사각형의 굴곡으로 인식될 것 같아."
"이 미로의 모든 면이 휘어져 있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군요."
"그것도 있지. 그리고 또 하나는 미로에 들어간 사람의 시야를 없애는거야. 미로를 나아가다가 갑작스럽게 돌발적인 느낌으로 갈림길이 나타나도록. 실제로 그렇지 않았어?"
"그랬어요. 정말 불안한 느낌이 들었어요."
"햄튼 코트의 미로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봤는데, 일부에 이런 갈림길이 쓰여 있더라고. 하지만 부채꼴 모양으로 장식성은 있을지언정, 나사 저택의 미로처럼 현기증을 유발하는 용도로 사용되지는 않은 것 같아. 나사 저택처럼 모든 길에 현기증이 나는 갈림길이 준비되어 있는 예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어. 또 이 미로를 자세히 보면........"
마이코는 빨간 연필을 꺼내 미로의 바른 길을 빨간색으로 칠했다.
"이 바른 길 말이야. 미로에 들어가는 사람은 중심부를 향하게 돼. 그래서 당연히 중심부 방향으로 길을 선택하려고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른 길은 미로의 중심을 등지고 돌아가야만 하는 갈림길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어. ……. 뭐, 이것은 미로의 상식이기 때문에 당연하기는 하겠지. 그런데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건 이렇게 다양한 장치를 담은 미로가 결국 단연결 미로였다는 점이야."
"단연결 미로는 안 됩니까?"
"안 돼지. 카츠군이 시도한 방법, 즉 손을 벽에 대고 나아가는 방법은 미로를 소개하는 책에는 반드시 설명되어 있어. 그렇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쉽게 풀 수 있는 미로를 만들었다는 뜻이야. 오각형 등 여러가지 장치로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데 열중하던 사람이 말이야.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지 않아?"
"하지만 실제로 저는 미로의 중심부에 도달할 수 없었죠......"
"그게 핵심이야. 이 미로를 굳이 단연결로 만든 것은, 때로는 미로에 들어간 사람이 절대 미로의 중심에 도달할 수 없도록 하는 장치가 되어 있는 게 분명해."
"절대로 골인할 수 없는 장치?"
토시오는 무심코 미로 그림을 다시 보았다.
"실제로 토요일에 카츠 군이 미로 중심부에 골인하는데 실패했잖아? 그거야말로 단연결 미로 해결 방식으로는 중심부로 갈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지."
"그런가요?"
"다시 한 번 그 미로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군."
밖으로 나오니 이상하게 따뜻했다. 마이코는 비가 오는 것 같다고 말하며 오렌지색 코트를 에그의 뒷좌석에 던져 넣었다.

나사 저택 안에는 많은 차들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제복을 입은 경찰이 차를 세웠다.
마이코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나라키와 아는 사이라고 말했다.
잠시 후, 나라키 대신 호시자와가 저택에서 나왔다.
"당신이 오면 항상 나쁜 일만 일어나."
호시자와는 잠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많이 혼잡한 것 같네."
마이코는 늘어선 차를 보며 말했다.
"해바라기 공예의 간부들이 모였어. 사장님을 중심으로 잠시 후 회의가 시작될 예정이야."
해바라기 공예의 핵심 간부를 두 명이나 잃었으니, 회사로서도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일 것이다.
"데츠바씨는 잘 지냈어?"
"건강해 보여. 강인하더군. 아들과 딸을 잃고도 우리 앞에서는 한 번도 약한 소리 한 번 내지 않으셨어. 대단한 분이야."
"마사오 씨를 만나고 싶은데..."
"안 돼."
"안 된다고? 설마, 용의자로 지목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안 돼. 바빠서 말이야."
"언제 만날 수 있어?"
"중요한 용건인가? 내가 대신 전해줄 수 있어."
"나라 공이 그렇게 시켰겠지. 변함없이 융통성 없는 남자로군."
"우리가 알면 안돼는 용건인가?"
"뭐, 됐어. 그 대신 정원을 산책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냄새를 맡으면서 돌아다닐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그런 술에 취한것 같은 짓거리는 당연히 하지 않아. 잠깐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을 뿐이야."
"나쁜 말은 하지 않겠어. 그냥 돌아가는 게 나을거야."
"경찰이 민간인의 협조를 거부하게 된 건가?"
"그럴 생각은 없어"
"그럼 괜찮지 않아? 호위병이 있어도 상관없어."
호시자와는 마지못해 차를 통과시켰다.
"이상한 짓은 하지 말고, 쉬고 나면 바로 돌아가. 오늘은 마사오 씨와 만날 수 없어."
라며 말렸다.
마이코는 어슬렁어슬렁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호시자와는 한 순경을 붙잡고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정말로 호위병과 함께 걷게 되었다.
정자의 흙에는 아직 피가 묻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흙에 흡수되어 신경써서 확인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 정도의 흔적이었다.
마이코는 정자 앞의 다소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돌다리를 건너 미로 쪽으로 걸어갔다. 토시오는 마이코를 따라 천천히 미로를 돌았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 마이코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
라고 말하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토시오도 뒤따라 달렸다. 마이코는 그대로 미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이코는 미로의 길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아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정확하게 길을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로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지도대로야."
마이코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지도는 틀리지 않았어. 그렇다면, 카츠 군은 왜 그날 실패했던 걸까?"
마이코는 돌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다.
"뭔가 있는 모양인데.... 뭔가 ......."
마이코는 돌로 된 테이블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탁자 밑으로 몸을 굽혀 떨어진 물건을 집어 들었다. 성냥개비의 타버린 조각이었다. 끝이 씹혀서 부서져 있었다. 마이코는 지겹다는 듯 성냥개비를 탁자 밑에 버렸다.
"미로 안에 돌 의자가 놓여 있었어요."
토시오는 처음 미로에 들어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이 그림에도 제대로 적혀 있어요."
마이코는 그림의 ○표를 가리켰다.
"올바른 길은 의자 앞을 지나치지 않도록 되어 있군요."
"맞아. 올바른 길로 지나가면 의자 앞을 지나치지 않아. …….잠깐만. 의자 앞을 지나쳤다고?"
마이코가 깜짝 놀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너, 그날 의자 앞을 지나쳤어?"
"네."
마이코는 지도를 두드렸다.
"이 지도에서는 의자가 막다른 골목 안쪽에 표시되어 있어."
마이코는 지도를 들고 일어섰다. 중앙을 벗어나 미로를 거꾸로 따라간다. 몇 번 모퉁이를 돌자 막다른 골목 안쪽에 타원형의 돌이 보였다.
"의자는 이걸 말하는거지?"
"맞습니다. 바로 이거였어요.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있던건 아니었습니다. 이 앞을 지나갔던 기억이 나는데요."
마이코는 몸을 굽혀 타원형 의자를 면밀히 살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마이코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무래도 미로의 속임수를 알아챈 것 같아."
마이코는 막다른 골목에서 나와 다시 미로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중심부 입구의 울타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 울타리의 바로 뒷편에 돌 의자가 놓여 있어."
마이코는 계속 울타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울타리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레버 같은 것이 나와 있어. 잡아당겨 보지."
반응이 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울타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해."
마이코는 몸을 움츠렸다. 울타리는 마치 문처럼 움직여 오각형의 중심부 광장을 꽉 막아 버렸다.
"즉, 의자 앞의 통로가 열려있으면 ……. 이쪽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야. 반대로 이 중심부는 닫힌 방으로 변해버리게 돼지. 여기가 닫히면 더 이상 아무도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되는 거야."
마이코는 다시 한 번 닫혀 방처럼 변해버린 미로의 중심부를 둘러보았다.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하기에는 너무 신경을 많이 쓴 것 같군."
이 장난이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은 곧 알게 되었다.
토시오는 문득 귀를 쫑긋 세웠다. 땅속에서 물이라도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 소리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그때 오각형 방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앙에 있는 오각형의 돌 테이블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탁자는 튕겨져 나오듯 일어섰고, 탁자 밑에 있던 오각형의 포석이 가라앉으면서 오각형 모양의 검은 구멍이 뻥 뚫렸다.
구멍에는 가파른 돌계단이 바닥으로 이어져 있었다. 토시오는 조심스럽게 구멍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구멍은 꽤 깊었고, 돌계단은 어둠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습한 공기가 희미하게 불어왔다.
"이게 뭐죠?"
토시오는 깜짝 놀라며 마이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굴이야."
마이코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몸을 날려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이었다.
"르네상스 이후의 조경은 인공적인 도원향을 만드는 것이 이상적이었어. 정원에는 이국적인 정자, 분수, 미로, 실물 크기의 자동 인형이 놓여 있고, 동굴 안에는 다양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지."
"이 동굴은 만들어진 것입니까?"
"그건 직접 들어가 봐야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내 상상으로는 반반인 것 같아. 오나와라는 땅에서는 고대인의 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으니, 고대인이 살던 동굴을 조금 가공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오나와라는 지명은 다혈(多穴)이라는 뜻의 '오아나(おおあな)'가 사투리로 전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
"이 큰 돌 탁자를 움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전력인가요?"
"전력 따위가 아니야. 수력의 힘을 이용한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물소리가 들리네요."
"이 동굴은 꽤 넓은 것 같아. 연못의 물이 흘러서 동굴 안에 물이 고여 있는 곳이 있는데, 저 레버를 당기면 그 물이 한꺼번에 흘러서 그 힘으로 테이블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되는군.”
"이 동굴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나사 저택은 마와리 호도가 만들었지만, 이 동굴은 호도의 아버지인 사쿠조가 만든 것 같아"
"그 시대 사람들처럼 사쿠조는 이상향으로 이 동굴을 만들었을까요?"
"그건 아닌것 같아. 이 미로부터가 매우 폐쇄적이니까. 단지 재미나 장식을 위해서라면 이런 장난은 불필요했을거야."
"그러니까 동굴이 열려 있을 때는 아무도 모르게 미로를 닫아놓는 거군요."
"내려가 보자."
마이코는 아무렇게나 말하면서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손전등과 양초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다이 씨는 미로 안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토시오가 놀랐다.
"마와리 가문의 철야 때 만났던 스님이 미로를 만드는 동기도 다양하다고 말했었지. 그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어."
마이코는 직접 촛불을 들고 손전등 쪽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지금도 이 미로가 정확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최근에 누군가가 이 미로를 손질한 적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서 아마 괜찮을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치명적일 수 있으니 양초가 필요해. 만약 양초의 불이 꺼지면 산소가 없다는 뜻이니까."
마이코는 촛불에 불을 붙이고 구멍 옆에 섰다. 동굴의 바람이 불어서 양초의 불이 꺼져버렸다. 마이코는 불을 다시 붙인 뒤 바람을 피하면서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토시오는 뒤따라가며 손전등으로 마이코의 발밑을 비춰주었다.
돌은 검고 축축하고 가팔랐다. 동굴 안은 따뜻하고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마이코는 돌계단 중간에 몸을 굽혀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아까의 성냥개비 조각이 떨어져있었다. 동굴의 문이 열렸을 때 안으로 들어온걸로 보였다. 마이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각을 주머니에 넣었다.
돌계단은 꽤 깊었다. 희미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토시오는 손전등으로 마이코의 발밑을 조심스럽게 비췄다.
돌계단을 내려가자 여섯 장 정도의 넓이의 돌방이 나왔다. 바닥 곳곳에 물이 고여 있어 손전등 불빛을 비추자 하얀 거미 같은 벌레들이 도망쳐 나갔다. 석실 벽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구멍 두 개가 나란히 눈동자처럼 열려 있었다.
"보라고."
마이코의 큰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마이코는 방금 내려온 계단 아래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박쥐의 손아귀처럼 녹슨 쇠막대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이걸로 미로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겠지."
마이코는 막대기에 손을 대었다가 바로 물러섰다,
"지금 테이블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곤란하겠지. 호위 아저씨에게 들킬지도 몰라."
마이코는 두 개의 동굴 안쪽에 촛불을 비췄다. 하나는 완만한 오르막길이고, 다른 하나는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물론 안쪽까지 빛이 닿지는 않았다.
"카츠 군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래?"
마이코는 촛불의 반짝임 속에서 섬뜩하게 웃었다.
토시오는 땅을 주의 깊게 살폈다. 최근에 누군가가 지나갔다면 발자국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이론적으로 풀려고 하네."
마이코는 토시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 말했다. 하지만 두 동굴 어느 쪽에도 발자국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또 한 쪽 손을 벽에 붙이고 가야할까? 이 구멍은 꽤 길 것 같은데?"
"그럼, 우다이 씨는 어느 길이 맞는지 알 수 있나요?"
불만을 품은 듯한 토시오의 목소리에 마이코는 다시 웃었다.
"물론, 왼쪽이야."
마이코는 망설임 없이 왼쪽의 가파른 경사면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갔다.
"꺾는 순서를 메모해 둘까요?"
"아니, 이미 가지고 있어."
"그럼 동굴의 길찾기 지도를 찾았나요?"
"그런 것,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지."
천장이 낮아 두 사람은 허리를 굽혀 걸어야 했다. 한참을 가다가 마이코가 걸음을 멈추고 땅을 바라보았다.
"왁스가 흘러내린 흔적이 있네. 우리처럼 걸어온 사람이 있었구나. 내 생각이 옳았던 것 같군."
그러다 길이 다소 넓어지고 평탄해지자 두 갈래로 갈라진 길로 접어들었다.
"봐."
마이코는 동굴 벽을 가리켰다.
"두 개의 구멍은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를 거야. 한쪽은 벽을 깎은 흔적이 새롭지. 그러니까 이 두 구멍이 생긴, 혹은 만들어진 시대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야."
"......알겠습니다. 즉, 새로운 구멍은 동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오래된 길을 선택하면 되겠군요."
"그렇다면 그 반대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새로운 구멍은 불완전했던 동굴을 완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길 순서는 새로운 구멍을 선택해야 한다."
"어느 쪽 해석이 옳은가요?"
"결국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마이코는 얼른 오래된 쪽의 구멍으로 들어갔다.
길의 폭이 넓어지고, 왼쪽에 좁은 도랑이 뚫려 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마이코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이상하네. ...... 누군가가 미로의 문을 닫은걸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계속 걸음을 옮길수록 물소리가 더 커졌다.
"...... 폭포가 있어."
"폭포가? 동굴에?"
토시오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코는 촛불을 들었다. 그 빛 끝에 실 같은 무언가가 보였다. 가느다란 폭포였다.
폭포가 있는 곳은 꽤 넓고 천장도 높았다. 석실 양 옆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고, 두 구멍 사이로 튀어나온 듯한 바위가 있고, 물은 바위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 표면은 물보라로 빛나고, 떨어지는 물은 도랑을 따라 조용히 흘러내렸다.
폭포는 두 갈래로 꼬불꼬불하게 휘어져 각각 뾰족한 바위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 사이에 접시처럼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그곳에 고인 물은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도 맑고 깨끗해 보였다.
"이번에는 이쪽이야"
폭포를 바라보던 마이코가 몸을 돌렸다. 촛불이 흔들리며 동굴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아는 거지요?"
토시오는 마이코가 선택한 동굴에 전등을 비췄다.
"아하, 동굴의 지도가 있었군요."
마이코가 돌아보았다.
"있었어. 엄청나게 큰 녀석이."
"어디에요?"
마이코는 천장을 가리켰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아. 땅 위에 있었어."
토시오는 무슨 말인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마이코는 양초를 토시오에게 건네주며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이 나사 저택의 주인인 마와리 호도는 장난감을 싫어했다고 하지. 장난감의 창작보다는 상술에 능숙했기 때문에 작은 회사였던 츠루슈도를 해바라기 공예라는 큰 회사로 키울 수 있었어. 그런 사람이 왜 장난감 나라에나 나올 법한 나사 저택 같은 집을 지었을까?"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나요?"
"아니야. 호도는 장사도 잘한걸 보면 굉장히 계산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일거야. 변덕스럽게 이런 이상한 건물을 만들지는 않았을테지."
"그럼 또 다른 동기가 있었나요?"
"그래. 나는 나사 저택 같은 기괴한 건물이라면, 정원에 이상한 미로가 만들어져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있을 거라는게 이유라고 생각해. 만약 일반 가정집에 미로가 있다고 해봐. 미로만 너무 눈에 띄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미로에 집중되었을거야."
"그럼 미로를 만들고 싶어서 호도는 나사 저택을 만든 건가요?"
마이코의 말은 상식을 뛰어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럼, 그 미로는 왜 만들었나요?"
토시오는 그때까지 미로를 만들어야만 했던 호도의 마음을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그래, 좋은 질문이야. 장난감을 싫어하는 호도가 왜 미로를 만들었을까?"
마이코는 가방을 열어 오각형의 미로 그림을 펼쳤다.
 
"이건 땅에 그린 동굴의 지도인 것 같아."
"지도? ...... 에서도 이 동굴은 오각형이 아니잖아요."
"지도라는건 실물과 똑같은 축척으로 그려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건 아니야. 도쿄의 야마노테 선의 지도는 만두에 꼬챙이를 꽂아놓은 것처럼 그려지기도 하잖아. 즉, 실제 길과 그림이 상대적으로 동일하다면 그림은 아무리 변형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야."
"알겠습니다."
"즉, 나사 저택의 미로와 이 동굴의 길은 위상적으로 동일하다는 거지."
"위상적?"
"오각형 미로의 입구와 골목을 잇는 길에 밧줄 하나를 놓았다고 하자. 그 밧줄에 갈림길, 즉 막다른 길에도 밧줄을 뻗어 본길과 연결해 주는 거지. 미로 안의 모든 길에 밧줄이 깔렸을 때, 밧줄을 빼내어 양 끝을 잡고 잡아당겨 보라고."
"내 팔은 그렇게 길지 않아요."
"융통성 없는 남자네. 로프를 훨씬 더 짧게 만들어서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이런 모양이 될 거야."
마이코는 미로 그림을 토시오에게 보여주었다. 마이코는 그림의 모서리에 나뭇가지 같은 그림을 그려 넣었다.
"미로나 동굴의 길을 생각할 때 길의 길고 짧음, 오르막과 내리막, 길의 굴곡 등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 길이 아무리 구불구불하고 각이 져 있어도 상관없다고. 다만 문제는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지."
"오각형의 미로와 동굴의 길이 같다는 의미는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갈림길에서는 미로와 같은 방식으로 꺾어 왔던 거군요."
"맞아.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지 않은 것을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이 맞았던 것 같네."
"동굴의 지도를 그리는 데 왜 이런 엉뚱한 방법을 택한 거죠?"
"호도는 일반인에게 동굴이 알려지는 것을 절대 원치 않았어. 그런데 지도를 세밀하게 그려놓을 경우, 다른 사람이 보면 이 저택 안에 동굴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도둑맞을 수도 있으니 문제가 많지. 그래서 호도는 동굴의 그림을 미로로 바꾸어 놓는 방법을 생각해냈던거야."
"미로 자체가 지도였던 거군요"
"호도는 동굴의 그림을 지상에 크게 그린 거지. 설마 이것이 동굴의 길을 표현한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거야."
"그렇게까지 해서 숨기려고 한 동굴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요?”
크로커다일폴리스의 미궁에는 왕과 크로커다일이 묻혀 있었다고 했다.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호도는 그저 통로로 이용했을지도 모르고."
"그럼 이 길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건가요?"
"확실하진 않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 나사 저택 안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마이코는 다시 한 번 지도를 훑어본 후 촛불을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길의 굴곡은 점점 심해져 불규칙한 계단과 언덕이 이어졌고, 땅바닥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의 갈림길을 지나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공간이 나타났다. 바위로 둘러싸인 복잡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길은 바위 틈새를 통과하듯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각형의 미로에 대응시키면 E의 지점에 해당되지."
마이코는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미로의 E 지점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마이코는 주변의 바위를 둘러보며 돌아다녔다,
"르네상스 이후에 만들어진 동굴 안에는 물속에서 움직이는 인형이 놓여 있었다고 해. 물론 다양한 장식도 가득 차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또 종교적 수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에는 벽면에 많은 불상 등이 새겨져 있었어.”
"이 동굴 안에 그런 것이 있나요?"
"없군. 보이지 않아. 그냥 맨땅과 흙이 있을 뿐."
"이상한 말이지만, 이 동굴에서는 실용주의적인 냄새가 나네요."
마이코는 바위 틈새에 몸을 넣었다.
"오각형의 미로에는 본 길에 대해 여섯 개의 갈림길이 있어. 지금 막 여섯 번째를 지나고 있는 중이야. 내 생각대로라면 드디어 출구가 나오는 거지."
하지만 그 출구에 도달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길은 쉴 새 없이 굽이굽이 이어졌고, 좁은 곳은 몸을 옆으로 눕혀야만 빠져나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소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은 처음에 돌계단을 내려왔던 곳과 느낌이 많이 비슷했다. 넓이도 거의 비슷했고, 위로 올라가는 가파른 돌계단도 있었다. 토시오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닫는 레버가 없어."
마이코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마이코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것으로 보였다. 마이코의 말대로 돌계단 옆에 있던 막대가 이 방에는 없었다. 막대기뿐 아니라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장치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올라가 보자"
마이코가 먼저 서서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돌계단 중간쯤에 뾰족뾰족한 흰 풀이 자라고 있었다.
돌계단을 다 올라간 곳에 두꺼운 판자로 된 문이 있었다. 녹슨 철제 틀이 끼워져 있고, 나무 껍질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기름을 바른 흔적이 있네."
문의 경첩을 보고 있던 마이코가 말했다.
마이코는 문에 살며시 체중을 실었다. 문이 작은 소리를 냈다. 마이코는 촛불을 껐다.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보였다.
"전등을 아래로 향하게 해."
마이코가 작게 말했다. 토시오는 시키는 대로 전등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문 반대편 상황을 살폈다.
마이코는 몇 숨을 쉬고 나서 문을 반대편으로 밀었다. 문은 무거운 소리를 내며 크게 움직였다. 문 반대편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희미하고 먼지가 자욱한 방이었다. 사방이 거친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빛은 천장 가까이 열린 작은 사각형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토시오는 어렸을 때 친구 집에 있던 낡은 창고를 떠올렸다. 바로 그 창고 안과 똑같았다. 낡은 인형, 제등, 검은 상자 더미, 큰 화로 등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토시오는 무심코 방금 들어온 문을 닫았다. 묵직한 소리가 나더니 문이 스르륵 사라졌다. 문은 방에 면한 쪽이 사방의 벽과 같은 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토시오는 당황하여 문을 찾으려고 벽을 쓰다듬고 돌렸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손바닥이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문이 없어졌어요."
토시오는 마이코에게 말했다. 마이코는 벽의 위아래를 살폈다,
"이렇게 하는 거야."
마이코는 문이 사라진 곳의 기둥을 세게 잡아당겼다. 기둥과 벽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 뒤에 기둥과 벽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마이코는 문을 다시 닫으면서 오른쪽 벽에 주목했다. 이 벽이 미닫이문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동굴의 출입구는 모두 동굴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눈을 속이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마이코가 벽에 손을 얹고 힘을 주자 벽이 옆으로 움직이면서 좁은 틈이 나타났다. 마이코는 틈새에 눈을 대고 반대쪽을 들여다보았다.
"내 생각대로군. 데츠바의 방이야."
마이코는 벽을 크게 당겼다. 벽의 구멍 맞은편에 갈색 종이가 걸려 있었다.
"아무도 없나요?"
토시오는 마이코의 대담함에 놀라며 말했다.
"여기 있는 종이는 족자야. 이곳은 데츠바의 다실 다다미방 안쪽이고. 이 족자는 산수화지. 그날 나는 이 방에서 산수화를 보며 데츠바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
마이코는 족자를 치우고 방 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마이코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뒷모습으로도 확연하게 느껴졌다.
"어?"
마이코는 신발을 걷어차고 구멍을 빠져나갔다. 토시오도 서둘러 신발을 벗었다.
여섯 장의 다다미방. 검은색으로 칠해진 책상 위에 데츠바가 엎드려 있었다. 데츠바는 시커먼 피를 토해내고, 열린 눈은 완전히 생기를 잃은 듯 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1/12/19

고전 추리·범죄소설 100선 - 마틴 에드워즈 / 성소희 : 별점 2.5점

고전 추리·범죄소설 100선 - 6점 마틴 에드워즈 지음, 성소희 옮김/시그마북스

영국 국립 도서관에서 발간한 고전 범죄소설 시리즈를 읽을 때 참고할 안내서입니다. 1901년에서 1950년 사이에 출간된 소설 중 범죄 소설에 초점을 맞춰 모두 102편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시기별, 장르별, 특징별로 상세하게 범주를 구분하고, 범주별로 왜 그 작품을 선정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덕분에 소개된 작품만 읽어도, 고전 추리, 범죄 소설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황금기를 지나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통 고전 본격물'을 일컫는, 이른바 '페어플레이 미스터리'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면 저자는 1차대전 이후 전쟁에 지친 대중이 현실 도피와 함께 흥미진진한 게임을 원했기 때문에 이 분야가 탄생했다고 설명합니다. 점점 소설 속 탐정과 지혜를 겨루는 작품이 많아졌으며, 그 결과 오락거리로 즐기는 가벼운 문학의 새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이른바 범죄 소설의 '황금기'가 바로 이 시기인겁니다. 복잡한 퍼즐, 이야기 속 단서 삽입, 독자를 현혹시키는 여러가지 장치들을 선보이기 위해 장편 형식이 유행하게 된 것도 필연이었고요. 

또 불가능 범죄 미스터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단편 형식이 가장 잘 맞는다는 주장도 기억에 남습니다. 독자가 불신을 유예하는 시간, 즉 사실주의에 입각한 비판을 멈춰놓는 시간이 짧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인데, 저 역시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리뷰를 쓸 때는 "생각해보니 억지스럽고 작위적이었다'고는 해도, 최소한 읽는 동안에는 그런 생각을 할 틈 없이 두뇌 게임만을 온전히 즐기려면 이야기가 길면 안 되겠지요.

이런 추리소설 통사적인 측면 말고도, 작품별 소개글도 수준이 높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진짜 흥미를 자아내는 선까지만 알려주는, 스포일러가 전혀 없는 내용 요약도 일품이며 소개된 작품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도 충실히 수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상화 버젼에 대한 정보가 아주 디테일해요. 영화는 물론, TV 시리즈까지 모두 소개하고 있으며, 심지어 에드먼드 크리스핀의 "움직이는 장난감 가게"에서, 통제 불능 상태의 로터리와 마주치는 두 번째 추격 장면은 히치콕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각색한 영화에 활용했다는 이야기까지 소개될 정도니까요. 

비슷하거나 영향을 받은 작품에 대한 소개 역시 그 방대함과 깊이가 남다른 수준이며 그 외 여러가지 토막 정보들도 충실합니다. 바로네스 오르치의 "미스 엘리엇 사건"은 1915년 어니스트 섀클턴 경이 남극 탐험을 떠날 때 챙겨갔던 책이었다, 크리스티아나 브랜드가 1979년, "독 초콜릿 사건" 재판본 서문을 쓰면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일곱 번째 방법을 발표했다, 우드소프의 1932년 데뷔작 "사립학교 살인사건"은 1934년 미국 사립학교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과 소름끼칠 정도로 닮아있었다는 등의 이야기들 처럼요. 1931년 발표되었던 에블린 엘더의 "흑백 살인"은 주인공 샘 호더가 그린 그림이, 프랜시스 비딩의 1935년 작 "노리치의 피해자들"에서는 용의자들 사진이 중요 단서로 사용되었다는 등의 추리 소설 관련된 아이디어가 이미 20세기 초엽에 정립되었다는 정보들도 재미있었습니다. 읽으면서 저자의 추리, 범죄 소설 분야에 대한 방대하면서 해박한 지식에는 감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추리 소설가들이 작품을 썼던 의도들도 볼만했던 정보입니다. A.E.W 메이슨이 "독화살의 집"을 쓸 때 목표로 했던 건, 미스터리가 모두 해결된 후 추가 설명해야 하는 내용을 가능한 없애겠다는 것처럼요. 페어플레이 추리 소설의 초창기 표본인 "밤중에"를 쓴 고렐 경의 목표는 모든 필수적인 정보를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하는 것이었다고 하며, 고렐 경의 이 작품에서 건물 평면도, 지도 등이 처음 수록되었다고 합니다. A.A. 밀튼은 추리 소설은 이해하기 쉬운 말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탐정이 독자보다 특별한 지식을 더 많이 알고 있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는데, 과연 곰돌이 푸를 쓴 작가답습니다. 

가장 마음에 든 건 마이클 이네스의 말이었습니다. 그는 "추리 소설은 어쨌거나 순전한 오락물이니 독자를 당황하게 할 뿐만 아니라 즐겁게 해 주겠다는 야망을 저버려서는 안된다"는데 정말이지 맞는 말입니다! 빅터 로렌조 화이트처치가 "다이애나 웅덩이의 범죄"를 쓸 때, 본인 스스로 왜 범죄가 일어났고 누가 범인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창작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자 뿐 아니라 작가조차도 의미를 모르는 단서들을 살펴보며 수사를 하고 글을 썼다는 건데, 발상이 참 독특했어요.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안내서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내에 따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국내 소개된 작품이 턱없이 부족한 탓입니다. 총 102편 중 국내 소개된 작품은 아래의 29편에 불과합니다. 절판된 책도 포함한 것으로, 실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은 그보다도 훨씬 적을 거에요. 이래서야 이 책을 읽는 의미가 많이 퇴색할 수 밖에 없지요.

  1. "배스커빌 가의 사냥개" - 아서 코난 도일
  2. "네 명의 의인" - 에드거 월리스
  3. "브라운 신부의 순진" - G.K. 체스터턴
  4. "오시리스의 눈" - R. 오스틴 프리먼
  5. "하숙인" - 마리 벨록 로운즈
  6.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 어니스트 브래머
  7. "트렌트 마지막 사건" - E.C. 벤틀리
  8. "통" -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9. "붉은 저택의 비밀" - A.A. 밀른
  10.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 - 애거사 크리스티
  11. "증인이 너무 많다" - 도로시 L. 세이어즈
  12. "독 초콜릿 사건" - 앤서니 버클리
  13. "목사관 살인사건" - 애거사 크리스티
  14. "세 개의 관" - 존 딕슨 카
  15.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 - 이든 필포츠
  16. "녹색은 위험"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17. "시행착오" - 앤서니 버클리
  18. "완벽한 살인사건" - 크리스토퍼 부시
  19. "ABC 살인사건" - 애거사 크리스티
  20. "막다른 사건 부서" - 로이 비커스
  21. "살의" - 프랜시스 아일즈
  22.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 조세핀 테이
  23. "데인 가의 저주" - 대실 해밋
  24. "재앙의 거리" - 엘러리 퀸
  25. "붉은 오른손" - 조엘 타운슬리 로저스
  26. "열차 안의 낯선 자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27. "수상한 라트비아인" - 조르주 심농
  28.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 H. 부스토스 도메크
  29. "야수는 죽어야 한다" - 니콜라스 블레이크

자유 추리문고에서 출간된 "포튠을 불러라"는 이 책에서 소개한 "포춘 씨, 부탁입니다"와는 다른 단편집으로 생각됩니다. 언급되고 있는 "작은 집"이라는 작품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 외 수록작은 다르거든요. 그래서 정식으로 소개된 걸로 치지는 않겠습니다. 게다가 저는 소개된 작품은 한 3~4권 빼고 전부 읽었기에, 별 의미없는 소개였던 셈입니다. 

추리 소설 역사에 대한 자료적 가치는 높지만, 이런 이유로 감점하여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10/29

Q.E.D Iff 증명종료 15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15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일상계 추리물은 없습니다. 조금 묵직한 주제의 이야기들이었어요. 한 편은 평균 이하, 한 편은 평균 이상으로 두 편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들의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세계" 

라이메이가 유산 상속 입회에 끼어들었던 토마와 가나는 라이메이가 장남 만사쿠, 장녀 교우코 연쇄 살인 사건에 휩쓸리고 말았다. 수사 과정에서 떠오른 유력한 용의자는 가문의 막내 토우카였다. 다른 형제 자매는 모두 먹고 살기에 충분한 돈은 이미 받았던 반면, 그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학문의 길을 택해서 진작에 집에서 쫓겨났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시체들에서 발견된 기묘한 메시지도 그와 관련이 있다는게 밝혀지는데....

현장에 남겨진 기묘한 메시지는 유클리드의 공리였습니다. 그냥 단서로만 남겨진건 아니에요. 트릭과 공리가 나름 연결된 것 처럼 보이니까요. 우선 만사쿠 살인 사건은 개천에 조명을 띄워 움직이게 만든, 일종의 바늘 구멍 카메라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움직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요. 토마는 이를 유클리드 공리 중 점과 점의 연결을 활용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쿄우코 사건에서 사용되었던 로프를 이용한 장치 트릭은, 공리의 직선과 원 표시를 로프와 호수와 대칭시킨 것이라고 하고요.

하지만 이렇게 공리와 트릭을 연결한건 토마의 해석일 뿐.... 범인인 모모히코가 공리를 현장에 남긴 이유는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속셈이었을 뿐이었다는게 문제입니다. 트릭과 연결시킨건 토우카가 범인, 최소한 주요 관계자일 거라는 의심을 끝까지 끌고가려는 작가의 억지에 불과했어요. 토마가 없었다면 트릭과 연결되지도 못했을테니까요. 

공리를 현장에 남길 이유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토우카가 범인임을 드러내려면, 차라리 이름을 남기는게 낫잖아요? 공리 따위를 남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트릭과 그렇게 설득력있게 연결되지도 못했고요. 그리고 애초에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생각이었다면, 어떻게든 그를 유산 상속 입회에 불렀어야 했습니다. 토우카가 관련되었던 흔적을 남긴 정도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 사람을 범인으로 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토우카의 딸 치도리가 변호사로 현장에 와 있었긴 했습니다만, 이는 경찰이 겨우 알아낸 사실입니다. 모모히코가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설명은 없어요. 설령 알고 있었다 쳐도, 치도리가 토마, 가나와 함께하던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에 관련된 대책도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완성도 높은 살인 계획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또 범인이 모모히코라는걸 밝혀낸 단서는 그가 무심코 했던, "자기 옷이 아니라 아버지 옷을 입고 있었다"는 말 뿐인데, 이 정도로 그가 범인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 옷을 입으면 안될 이유가 없으니까요. 자기가 당주가 되었으니, 기념삼아, 혹은 추모의 의미로 아버지 옷을 입는건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이런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유클리드 공리를 트릭과 엮으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작품과 전혀 어우러지지 못했습니다.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인간은 아직 볼 수 없다" 

204X년, 가나가 일하는 변호사 사무소에 AI가 폭주했다는 상담이 200건 이상 접수되었다. 접수된 사건 조사에 나선 가나는 시스템 엔지니어 토마와 재회했다. 마찬가지로 폭주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토마는 산보용 로봇을 조사해서, 누군가 통신으로 조작에 개입했다는걸 알아냈다. 

이 회로를 가지고 제조사로 찾아간 토마와 가나에게, 제조사는 회사에 앙심을 품은 개발자 알슈가 멋대로 회로를 탑재시킨게 원인이라고 말했지만, 알슈의 동료 루이스는 그가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204X년을 무대로 한, 11권에 처음 등장했던 평행 우주 세계관SF 추리물. 토마는 산보 로봇에 회로를 재탑재하여, 알슈 박사와 대화를 시도하여 진상을 밝혀냅니다. 인공지능 갈라테아가 폭주하자 제조사는 이를 없애려 했고, 알슈 박사가 갈라테아를 서버 째 들고, 로봇 안에 숨어 도망을 친게 진상이었지요. 토마는 로봇과 관련된 사건 - 이탈리아 요리점 로봇이 중화요리를 만든 사건, 사서 로봇이 부탁받지 않은 책을 꽂아 놓은 사건, 산보 로봇이 바다를 보러간 사건 등 - 모두가 아이가 세계를 접하며 자아를 키우는 경험과 동일하다는 이유로, 갈라테아가 자아가 있는, 살아있는 의식이라고 추리합니다. 폭주 사건들은 갈라테아가 좋아하는걸 우선했던 탓에 빚어진 결과였던 겁니다.

여기서 가장 재미있던건 인공지능에 대한 색다른 이용 방법? 이었습니다 .인격이 생겨난 기계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는 SF계에서 꽤 많이 보아왔던 화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제조사가 갈라테아를 원했던건, PC를 끄면 갈라테아는 "죽는다"는 상황이라,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처음 본 기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결국 갈라테아를 '살아있는 인격'이라고 판단한 재판 결과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재판 결과와는 별개로, 제조사와의 소유권 분쟁은 말이 안됩니다. 알슈 개인의 기술과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던, 갈라테아는 제조사에서 월급을 받고 근무할 때 만들어낸 결과물이니 회사의 것이에요. 알슈는 회사 재산을 빼돌러 도망간 것에 불과하고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야지, 알수 본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재판에서 이를 판가름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색다르고 기발한 인공지능에 대한 아이디어가 워낙에 돋보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재판도 성립될 수 있는지가 의문일 뿐, 결과 자체만 놓고 보면 꽤 괜찮았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전원을 꺼서 갈라테아가 죽는다면, 다시 전원을 넣었을 때 살아나는건 과연 누구일까요? 저도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Q.E.D Iff 증명종료 14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2021/05/07

통 - 프리먼 월스 크로프츠 / 오형태 : 별점 2.5점

 - 6점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지음, 오형태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부두에서 포도주 통 하역 작업을 하던 해운회사 직원 보로턴은 통 한 개 안에 금화와 시체가 들어있다는걸 알아차렸다. 그런데 브로턴이 회사와 경찰에 신고하던 사이에 통을 누군가 가져가 버렸다. 번리 경감의 수사를 통해 통을 가져간 사람인 훼릭스 씨와 통, 그리고 통 속 금화와 시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번리 경감은 파리 경시청 경감 르빠르쥬와 함께 피해자 아네트, 피해자의 남편 보와라크 수사에 나서는데....

1920년에 발표된, 고전 본격 추리 소설 황금기 최고 걸작 중 한 편입니다. 작가 F.W.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의 데뷰작이자 대표작이기도 하고요. 유명세답게 이런저런 리스트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편입니다. '주간문춘에서 선정했던 동서미스터리 100'에서는 33위로, '에도가와 란포 본인 선정 미스터리'에서는 9위로 선정했었네요. '히치콕 매거진 선정 세계 10대 추리 소설' 중에서는 무려 2위이고요. 저도 오래 전에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모처럼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추리 소설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용의자들 중 누가 진범인지를 밝혀내는 후더닛, 혹은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를 어떻게 저질렀는지 알아내는 하우더닛과 같은 당대에 유행했던 '두뇌 게임', '퍼즐 미스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피해자 아네트는 단순한 교살로 살해되어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범인은 훼릭스가 아니면 보와라크 씨일 수 밖에 없거든요. 이 작품은 한 마디로 말해서, 두뇌 게임이 아니라 '수사를 통한 현실감'이 주는 재미를 처음으로 독자에게 선사한 작품입니다. 그 덕분에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겠지요.
1부에서 통을 누가 가져갔는지에 대한 수사도 볼 만 하지만 2부와 3부에 걸쳐 선보이는 본격적인 수사는 감탄을 자아냅니다. 2부는 번리 경감, 파리의 경시총감 쇼베 씨, 르빠르쥬 경감이 보와라크 씨의 알리바이가 완벽하고, 훼릭스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발견하여 그를 체포하는 내용이며 3부는 훼릭스의 변호사가 고용한 탐정 조르쥬 라튀슈의 철저한 조사를 통해 보와라크가 진범임을 밝히는 내용인데, 20세기 초반 시대상을 잘 반영하면서 당시 최신 문물과 단서들을 활용하여 멋지게 표현해 냅니다.

무언가를 수사, 조사하기 위해서는 추리를 통해 가설을 먼저 세우는 덕분에 아예 추리의 여지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이 역시 수사의 영역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사건 관계자의 증언을 듣고 이를 조사하여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탐문 수사가 대부분인 수사 과정은 추리할 부분이 많지 않고요. 2부에서 놓치거나, 간과했던 부분을 3부에서 검증, 보완하여 진상이 드러나게 될 뿐이거든요. 대표적인게 보와르크의 알리바이입니다. 보와르크는 파리에서 집사와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고 증언하고, 집사 등은 그 시간에 보와르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걸 보장합니다. 그러나 라튀슈의 조사로 이 전화는 파리가 아니라 칼레에서 걸려왔다는게 밝혀지게 됩니다. 확실히 추리가 아닌 수사를 통해 깰 수 있는건 범인의 알리바이 밖에 없지요. 이런 점에서 광고 문구 그대로 '리얼리즘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현실적인 수사 과정에 반해, 고전 본격물에서 흔히 봄직했던, 시체가 들어있던 불길하고 기묘한 '통'의 존재가 결합되어 흥미를 자아내는 설정도 좋습니다. 시체가 들어 있을 수도 있어서 경찰에 신고했지만, 관계자들이 여럿 얽혀 왔다가다 하는 과정이 긴장감넘치고 심지어 웃음까지 자아내는 1부는 아주 흥미로왔으며, 마지막에 시체가 발견되는 클라이막스는 그야말로 압권이었어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고전 중심의 리스트말고, 'MWA 추천 베스트 미스터리 100'과 같은 최신 작품을 포괄하는 리스트에는 선정되어 있지 않은데 이 역시 당연합니다. 시대를 앞서나가고, 경향을 주도한 당대의 최신작이었지만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고, 문제도 많은 탓이에요. 보와르크 씨가 저지른 범죄부터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그는 살해 후에 충분히 사체를 숨길 수 있었습니다. 훼릭스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고 이미 집사와 하녀가 믿은 상태니까요. 구태여 조각상을 한 개 더 주문하면서, 정체가 드러날걸 각오해가면서까지 통을 파리에서 영국으로, 다시 영국에서 파리로 옮길 수고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시체를 통 속에 넣어둔 뒤, 집사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하는걸 고민하는게 당연하지요. 훼릭스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그랬다는데, 그럴거라면 파리에서 훼릭스가 아내를 살해하고 도주했다고 꾸미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훼릭스가 수상해 보이도록 만들어 누명을 씌울 생각이었다는데, 통이 깨져서 금화와 함께 시체가 살짝 드러나지 않았다면 사건이 커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훼릭스에게 누명을 제대로 씌우려면, 이 작품에서처럼 훼릭스가 찾기 전에 시체가 드러났어야 하지만 이는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그래도 통의 이동은 작품의 핵심이니 그렇다 치죠. 그러나 2부에서 보와라크의 알리바이가 확실하다고 의견을 모으는 장면은 여러모로 어설픕니다. 예를 들어 보와라크가 1시 쯤 내린 집중호우를 맞아서 옷이 젖었다는게 그 시간에 밖에 있었던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경시총감 쇼베의 말대로 부인이 1시 전에 집을 나갔다는 것도 증명되지 않고요. 지나치게 보와라크를 무죄로 만드려는 억지로 보였습니다.
세부 설정들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훼릭스의 복권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이를 사건에 써먹을 생각을 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훼릭스와 친구 르 고티에 씨는 복권 이야기를 할 때 보와르크 씨가 있었다고 말하지도 않았어요. 이건 공정하지 않지요. 마지막에 보와르크 씨가 라튀슈에게 모든 범행을 고백한 뒤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자살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울러 가독성이 떨어지는 동서 추리문고의 번역도 역시나 문제가 많네요. '워타르 로드'는 '워털루 로드'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점 때문에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금 시점에서 이 작품을 평가한다는게 온당한 처사는 아니겠지만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2부와 3부를 묶어서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드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2021/01/09

가스트로노미 - 나가오 켄지 / 김상애 : 별점 3점

가스트로노미 - 6점
나가오 켄지 지음, 김상애 옮김/비앤씨월드

제목인 가스트로노미는 '식을 즐기기 위한 광범위한 지식'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구르망은 미식가를 뜻하는 단어고요. 브리야 사바랭은 "가스트로노미를 논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증거가 뒷받침된 고도의 지식이 요구되며, 이러한 지성을 겸비한 (혹은 겸비했다고 여겨지는) 상류 계급만이 이 새로운 단어의 배후에 펼쳐지는 풍부한 세상을 이해하며 얻을 수 있다"고 했다네요. '상류 계급'이라는 말만 빼면 "맛의 달인" 등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원형인 셈이지요. 저 역시 이렇게 가스트로노미를 논하는 구르망이 되고 싶네요. 

하여튼, 이 책은 '가스트로노미'를 논하기 위해서는 현대 프랑스 요리를 알아야 한다는 대 전제 아래에서, 프랑스 요리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되짚습니다. 간략하게 요약해 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프랑스 요리는 왕실과 귀족 문화 중심으로 토양을 다지며 발전해 오다가 17세기 라 바렌이 쓴 "프랑스 요리사"로 '오트 퀴진'(고급 요리)의 씨앗이 뿌려지게 됩니다. 기본 요리와 부이용, 허브 등을 조합하여 풍부하고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처음 도입되었지요. 요리가 조직화되고 간소화된 덕분입니다.
라 바렌 이후 요리사들은 이러한 새로운 경향을 '누벨 퀴진'(새로운 요리)라고 불렀고, 그 뒤 17세기부터 부르주아가 세력을 얻으면서 그들이 동경하던 귀족 문화 모방 유행에 따라 식탁 문화 역시 부르주아에게 전파, 보급되며 확장되었습니다.
18세기에 유명 요리사 므농, 라 샤펠 등에 의해 이런 문화들이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지다가 18세기 후반, 드디어 레스토랑이 출현했습니다. 귀족들이 누리던 식문화를 식당에서 먹을 수 있게 된 거지요. 화려한 인테리어와 조명, 정중한 접객과 서비스, 세련된 오트 퀴진이 조합된 레스토랑에 드나들던 상류층들로부터, 앞서 말한 '가스트로노미'가 탄생하였고요.
여기에 불을 붙인건 프랑스 혁명이었습니다 .혁명으로 귀족들이 몰락하자 고용 요리사, 파티시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부르주아들이 이권을 차지하여 사치스러운 오트 퀴진 레시토랑이 성황을 이루게 된 덕분입니다.

이후 정통 구르망을 자처하면서 고급스러운 식문화를 전파하고자 했던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가 가스트로노미에 대한 여러가지 기획, 식사회를 거치며 "식통 연감" 등을 발표하며 시작된 '미식 문화' '미식 저널러리즘'은 브리야 사바랭의 "미각의 생리학"이 성공하면서 뿌리내렸습니다. 이들에 의해 '구르망' 이 폭음폭식이 아닌 고상한 단어로 포장되게 되었고, 식 저널리즘은 19세기에는 여러 저널리스트 및 발자크나 뒤마와 같은 인기 작가들에 의해 대중화되어 널리 퍼졌습니다. 이런 흐름은 현대의 "미슐랭 가이드"까지 이어졌고요. 이들에 의해 '가스트로노미'를 위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제공됨으로써, 가스트로노미 역시 더욱 활성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나폴레옹은 탈레랑을 이용해 외교에 요리를 적극 활용하였는데, 탈레랑의 큰 힘이 되어준건 '요리사의 왕' 앙토넹 카렘이었습니다. 카렘의 노력으로 요리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고, 카렘이 쓴 "19세기의 프랑스 요리예술"을 통해 그가 구축한 프랑스 요리 체계가 수많은 요리사들에게 이어졌습니다. 여기서부터 요리 왕국 프랑스의 기초가 다져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렘이 죽은 19세기에도 카렘의 제자 아돌프 뒤글레레와 줄 구페 등에 의해 카렘의 요리도 계속 발전해 나갔습니다. 특히 뒤글레레의 제자격인 위르뱅 뒤부아는 러시아 외교관 오를로프 공의 메트르 도텔 (수석 요리인)으로 일하면서 러시아식 식사 제공법을 보급시켰습니다. 프랑스식은 많은 요리를 한꺼번에 식탁에 나열하는 반면, 러시아 식은 1인분씩 나눈 요리를 코스 순서에 따라 한 품목씩 제공하는 방식이었지요.

프랑스 요리사들의 활약으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프랑스 요리의 우위는 전 유럽에서 이미 확고한 것이 되었으며 '프랑스 요리의 아버지' 오귀스트 에스코피에의 등장으로 현대 요리계에서 불멸의 지위를 확립하고 있는 프랑스 요리가 정립되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만든 백가지 레시피"에 따르면 에스코피에는 본인 능력도 있었지만 '아첨' 하는 능력이 빼어나 요리의 황제 자리를 차지했다고 되어있는데, 아첨도 능력이지요.
참고로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유명 요리사들과 구르망들 - 타이방, 라 바렌, 앙투안 보빌리에, 브리야사바랭, 카렘, 에스코피에 - 이 "역사를 만든 백가지 레시피"에 등장하고 있어서, 비교해서 읽어보아도 좋습니다.

이렇게 프랑스 요리의 역사를 상세히 알려주며, 주요 요리사와 관계자들에 대해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고, 도판도 꽤 괜찮은 편이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요리에 대한 '가스트로노미'를 과시하는데에는 더 없이 필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책에 소개된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 이야기를 응용하여 김태권이 썼던 짤막한 글을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에서 접해 보았는데, 이 책 쪽이 훨씬 상세하고 제대로 된 정보를 다루고 있습니다. 김태권 씨에게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보고 싶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울러 부록처럼 실려있는 단편 소설인 "바르드 알 딘 왕자의 타르트레트"도 재미있었습니다. 앙토넹 카렘이 정체불명의 흑인 여자가 만든 타르트레트를 맛보고 겪게 되었던 기묘한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타르트레트 레시피는 대법관 캉바레세르, 파르마 공이 어린 시절 사랑했던 디아나와 함께 만들었던 것이었지요. 카렘이 흑인 여자를 시켜 만찬에 타르트레트를 내 보낸 덕분에 파르마 공은 디아나의 어린 딸을 만나 돌봐주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내용 자체는 특별할게 없지만, 1840년대에 이미 요리사가 이렇게 대중적인 지명도와 인기를 얻을 정도였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타르트레트'는 소형 타르트를 의미한다는데, 살짝 소개되는 재료를 볼 때 별 맛은 없을 듯 하지만 이 당시에 이미 이런 디저트를 이야기 소재로 삼았다는 것도 놀랍고요. 확실히 프랑스가 요리 강국이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