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로라 - 비라 캐스퍼리 지음, 이은선 옮김/엘릭시르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모의 유명 여성 카피라이터 로라 헌트가 자택에서 총살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녀는 연인 셸비와 결혼을 앞둔 상태였다. 사건을 맡게 된 형사 마크 맥퍼슨은 수사를 진행하면서, 얼굴도 본 적 없는 그녀에게 빠져드는데...
원제는 "로라(Laura)". 여성 작가 비라 캐스퍼리의 작품입니다. 여성 작가가 쓴 하드보일드물의 대표작 중 한 편입니다. MWA 추천 베스트 미스터리 100에도 당당히 선정된 고전으로, 챈들러와 말로우가 모두 소개된 현 시점에서 본다면 국내 출간은 외려 늦어보이기까지 합니다(챈들러 완역은 하루키가 팬이라는 것이 잘 알려진 탓도 클 것 같긴 하지만요).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팜므파탈과 마초 탐정(또는 형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서사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형사 마크는 본인 스스로 무식하다고 여기지만, 꾸준한 독서를 통해 이지적인 면을 갖춘 노력가입니다. 여성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혐오하지도 않고요. 강렬한 폭력 충동도 보이지 않는 냉정한 인물입니다. 여성 주인공 로라 역시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남자를 농락하고 벗겨먹으려는 악녀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현재의 지위를 차지했고, 남자를 고르는 것도 본인의 주체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하는 독립적 여성입니다.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너무 빛나서 주변 남자들이 나방처럼 몰려들고, 그래서 서로가 불행해진다는 측면에서 보면 궁극의 팜므파탈일 수도 있겠지만, 여튼 이렇게 등장 인물들부터 전형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현대적으로 느껴질 정도에요.
또한, 이러한 등장 인물들이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로 그려져 설득력을 더해 줍니다. 영화 각본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답게 상황별로 장면이 연상되는 묘사력도 빼어나며, 등장 인물들에게 딱 들어맞는 명대사가 잘 어우러져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명곡 "Smoke Gets in Your Eyes"가 초연되었던 뮤지컬 "로버타"의 언급 등 당대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묘사 역시 깨알 같은 재미를 느끼게 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화자가 월도 - 마크 - 로라 순으로 바뀌며 전개되는 것도 좋습니다. 최근 유행하는 서술 트릭같이 이야기를 꼬아놓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확실하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1인칭 시점 덕분에 각 캐릭터들에 대해 독자가 더 깊게, 상세히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월도가 얼마나 현학적이고 자기 과시욕으로 똘똘 뭉친 질투의 화신인지, 마초 경찰로 보였던 마크가 피해자로 알았던 로라에 대해 알아갈수록 왜 흔들리는지, 로라는 대체 어떤 여자인지에 대해서 이보다 더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요. 아울러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동기, 즉 월도 스스로 영원히 조종할 수 있었던 로라가 자신의 품을 벗어나게 되자 격렬한 살의를 품게 되었다는 것도 꽤 그럴듯하게 설명됩니다.
그 외에 셸비가 잃어버린 금담배갑, 그가 산 싸구려 술이 단서가 된다는 복선도 나름 잘 짜여져 있는 등 전체적인 전개도 충실합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일단 사건이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이앤이 로라의 집에 머물게 된 것, 셸비가 바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 모두 우연입니다. 최소한 경찰 신고만 제대로 이루어졌더라도 월도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나는 건 어려웠을 거에요. 아울러 로라의 유죄가 강하게 시사되는 상황에서 마크가 아무런 단서도 없이 그녀의 무죄를 믿는다는건, 기존 하드보일드에서 팜므파탈에게 사로잡혀 진실을 망각하는 남성 피해자 역할이 반복되는 것에 불과해 이 작품의 장점을 퇴색시키는 듯하여 아쉬웠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앞서 이야기한 복선 이외에는 별다른 인과관계 없이 사건이 벌어지는 편이라 눈여겨볼 부분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낭비된 복선이 거슬립니다. 예를 들면 꽤나 중요하게 언급되던 왈도의 골동품 사랑이 실상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최소한 로라에게 선물한 화병은 좀 더 비중 있게 다루어졌어야 하는데, 전형적인 맥거핀에 불과해 실망스러웠습니다. 마지막 왈도와의 사투를 다룬 결말도 헐리우드스러워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차라리 본인의 의지는 아니지만 모두가 불행해지는, 운명대로의 결말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장점도 확실하고 읽는 재미도 뛰어난 고전임에는 분명합니다. '엘릭시르' 시리즈다운 예쁜 디자인과 일러스트도 아주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전형적인 남성향 하드보일드물에 식상하신 분들께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영화화되어 큰 히트를 치고 하드보일드 영화 걸작선에 이름을 올렸다는데, 영화도 꼭 한번 구해보고 싶어지네요. 호러 영화로 더 알려진 빈센트 프라이스가 잘생긴 매력덩어리 셸비 역으로 출연한다니 더더욱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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