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의 노인 사건집 - 에마 오르치 지음, 이경아 옮김/엘릭시르 |
세상 많이 좋아졌네요. 이 책마저도 새롭게 출간되고... 확인해보니 전 3권 총 37편으로 이루어진 시리즈 중 일부 내용만 가려 뽑은 단편선입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동서판 <구석의 노인>과 거의 겹치지 않는 다른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네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에도 몇편 수록되어 있긴 합니다만 역시 겹치지 않고요.
그러나 책 자체는 좀 미묘합니다. 황금기 단편에 걸맞는 트릭이 수록된 정통 추리물로 거의 모든 사건에서 안락의자 스타일의 멋진 추리를 보여주지만 전체적으로는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거든요.
이유는 여러가지 있는데 그 중 황금기 단편에서 기대하는 추리적인 재미가 부족한 탓이 가장 큽니다. 일단 비슷한 트릭이 너무 많이 쓰였어요. 예를 들어 범인이 피해자를 가장하여 알리바이를 만드는 변장 트릭은 <펜처치 스트리트 수수께끼>, <리슨 그로브 수수께끼>, <퍼시 스트리트의 기묘한 죽음>, <폴턴 가든스 수수께끼>, <황무지 사건> 등 5편의 작품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13편 중 5편이니 상당한 비중이죠. 두어편 읽다보니 트릭과 전개가 대충 눈에 보일 정도였어요. <황무지 사건>은 변장 더하기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등과 유사한, 전형적인 시체가 바뀌었다!라는 트릭이기도 하고요.
다른 작품들도 대부분 처음에 기소된 유력한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흘러가는데 소거법에 의하면 결국 범인은 한명밖에 남지 않는 작품들이라 정교한 추리적 재미를 느끼기 힘든건 마찬가지였고요.
그리고 안락의자 스타일을 너무 남용해서 구석의 노인은 기자 메리에게 자신의 추리를 들려줄 뿐 추리가 옳았는지 틀렸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는데 이러한 형태는 작가가 손쉽게 마무리할 수 있긴 하나 독자에게는 불친절하며 너무 안일한 스타일이었다 생각됩니다. 기자 메리도 왜 등장하는지 모르겠어요. 구석의 노인이 스스로 사건에 대해 모조리 이야기하고 추리까지 이야기하는 구성이라면 그녀가 등장할 필요조차 없으니까요.
그래도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함으로 꼼꼼하게 그려진 작품도 많습니다. 특히 두 작품, <앵그르 수수께끼>와 <진주 목걸이 사건>이 마음에 들었어요. 이유는 두 작품 모두 기이한 범행에 대한 동기, 이유를 굉장히 설득력있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앵그르 수수께끼>는 앞서 짤막하게 소개한 공작부인의 재능을 복선으로 범행을 설득력있게 해석하고 있는데다가 결말까지 깔끔했고 <진주 목걸이 사건> 은 범행을 이용하여 협박범을 없애는데 성공한다는 발상의 역전이 돋보이는 아주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뻔한 변장 트릭이지만 <리슨 그로브 수수께끼>도 나름 복잡한 변장, 치밀한 작전에 더해 현대물에서나 봄직한 끔찍한 범행까지 벌어지기에 상당히 재미있었고요.
아울러 선정된 단편들이 구석의 노인이 사라지는 이야기 바로 다음에 20년 뒤의 재회를 그리는 등 시간적인 경과를 느낄 수 있게끔 실려있는 것도 괜찮더군요. 솔직히 수록된 작품의 평균 수준은 동서쪽이 더 나은 것 같긴 하나 이러한 디테일 면에서는 확실히 앞서고 있다 보여집니다.
그 외에도 유명한 변호사라는 아서 잉글우드의 활약 등으로 유력한 용의자가 전부 풀려나는 식의 전개로 인하여 당시 영국의 판결 제도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좋았던 점입니다. 명확한 증거 없이는 기소할 수 없다는 것과 무죄 추정의 원칙이 통용되었다는 것인데 역시나 영국이 선진국은 선진국이었나봐요.
또 "엘릭시르" 레이블을 달고 나온 책들이 모두 장정과 디자인이 예뻐서 소장가치를 불러 일으키는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군계일학으로 각 단편 뒤에 소개된 다양한 토막 상식 정보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특히나 메리와 구석의 노인이 만나는 "ABC 찻집"이 실존하는 카페 체인이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습니다. 저도 언젠가 여기서 커피 한잔 먹고 싶네요. (아직 있으려나?)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좋았던 시절의 좋은 작품이기는 하나 지금 읽기에는 시대가 너무 많이 지났죠. 정확하게 10년전에 읽었던 동서판본은 별점이 4점이었는데 10년사이 1.5점이 깎였군요. 동서판본을 다시 읽고 지금의 별점은 몇점일지 다시 체크해봐야겠습니다.
그래도 이런 작품이 계속 나와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기에, 또 몇몇 작품은 여전한 재미를 선사하는 만큼 추리 애호가시라면 한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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