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라이프 -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
영국추리작가협회상, 캐나다추리작가협회상, 영미서점협회 딜리스상, 앤서니상, 배리상 5관왕에 빛나는 루이즈 페니의 데뷔작. 선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 스리 파인스, 그러나 그들 중 한 명이 곪아있다. 추수감사절 이른 아침 안개가 걷히고 스리 파인스의 집집마다 새로운 하루가 찾아든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천국이나 다름없는 캐나다 퀘벡주 시골 마을의 단풍나무 숲에서 노부인의 시체가 발견되자 마을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그것은 분명 사슴 사냥철 사냥꾼의 오발에 의한 사고였음이 틀림없다. 누가 온화하고 선량한 아마추어 화가의 죽음을 원하겠는가? 하지만 눈부신 경력의 퀘벡 경찰청 아르망 가마슈 경감은 하얀 말뚝 울타리 너머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채는데…
자신의 그림 전시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숲 속에서 죽음을 맞은 제인 닐은 과연 사고사인가? 고의적인 살인인가? 제인의 그림 속에 숨겨진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도대체 무얼 말하려고 했던 것인가? 영어권과 불어권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국적인 문화 배경을 토대로 목가적인 풍경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개성적인 등장인물들이 어우러져 있는 작품이다. <인터넷 서점 책 소개 인용>
퀘벡 경찰청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첫 번째 작품. 분량이 무려 450페이지나 됩니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후덜덜한 볼륨을 자랑하지요.
스리 파인스 마을을 무대로 한 살인 사건을 그리는데, 최근의 현대적인 작품들에서는 보기 드문 크리스티 여사류의 전형적 후더닛 계열 미스터리물입니다. 폐쇄된 작은 공동체 안에서 벌어진 딱 한 건의 사건, 그리고 범인은 누구이냐가 핵심입니다. 그러나 잘 짜여진 후더닛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닙니다. 책 해설에서 크리스티 여사님의 작품과 비교했는데 엄청난 무리수에요. 비교가 안되니까요.
가장 큰 이유는 추리적인 가치가 거의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가마슈 경감은 명문장과 시를 외우고 다니는, 약간은 P.D 제임스의 달그리쉬 경부를 연상케 하는 지적이고 섬세한 인물인데 작품 내내 폼만 잡을 뿐 실상 추리를 하거나 탐정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습니다. 사건이 해결되는 결정적 계기도 클라라가 제인이 그린 그림의 이상을 발견한 덕분이고요. 이래서야 "명탐정 코난"의 멍청한 지방 현경(이름이 뭐더라?)과 별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범행 동기가 무의미하다는 것도 추리물로는 있을 수 없는 단점입니다. 이미 중반에 벤의 어머니 살해 사실을 증명하는건 불가능하다고 언급됩니다. 그런데 단지 그림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여 일을 키운다? 말도 안됩니다. 사실이 폭로되었다 해도 벤이 잃을 건 아무것도 없었을테니까요. 제인과 벤 사이의 인간관계가 약간 금이 갈 뿐이었겠지요. 증거가 없으니 무고죄로 물고 늘어지는 것도 가능했을 테고요. 이렇게 동기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 정통 후더닛 계열 작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동기로서는 반칙에 불과해요.
그림을 덧칠해서 수정한다는 것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쉬운 작업도 아니었을 텐데, 차라리 그냥 지우는게 당연했습니다. 또 그림을 이미 다섯 명이나 보았는데, 본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라 여긴 이유도 모르겠고요. 최소한 피터와 클라라 부부가 지인들을 찾아봤다고 여기는게 당연하지 않았을까요?
결국 진상을 눈치챈 클라라를 지하실에서 살해한 뒤, 피터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마지막 결말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마을에 상주한 경찰을 허수아비로 봐도 유분수지, 이미 경찰이 피터를 찾아가 클라라의 행방을 물은 시점에서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저 같으면, 찾아온 클라라에게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 마을 잔치에 참석한 것으로 그려진 자신이 너무 싫어서 그림을 지웠다 정도로 우기고 끝냈을 겁니다. 제인을 살해한 것은 정황 증거밖에 없으니 빠져나가기도 어렵지 않았을 거예요.
또 왜 화살을 사용했는지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총을 사용했더라면 사냥꾼의 오발로 충분히 몰고 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피터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목적이었더라 하더라도 적절치 못한 선택이었어요.
이외에도 어설픈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볼륨에 비하면 등장인물이 너무 적어요. 피터와 클라라 부부, 벤, 욜랑드 가족, 크로프트 가족, 루스, 머나에 올리비에 - 가브리 커플이 다거든요. 물론 폐쇄된 공동체에 등장인물이 적다는건 전형적일 수 있습니다. 허나 등장인물들을 적절히 배분하여 누가 범인인지를 모르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 텐데, 작가는 클라라 중심의 심리묘사에 더해 크로프트 가족을 중반에 용의자에서 리타이어시켜 버림으로써 용의자를 스스로 대폭 줄여버리고 맙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심리도 이해 불가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말도 안 되는 장식으로 벽을 뒤덮은 욜랑드의 행동이죠. 그 시점에서 어차피 자기 집인데 왜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인테리어를 하지 않았을까요?
아울러 이베트 니콜이라는 제가 여태까지 본 추리소설 등장인물 중 최고 수준의 짜증을 유발하는 캐릭터가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것은 용서가 안되네요. 무능하고 사회성도 없는 캐릭터 자체가 짜증날 뿐 아니라 존재 의미 역시 전무합니다. 그녀의 등장을 전부 잘라내어도 전개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어요. 거진 100여 페이지를 재미도 없고 쓸데도 없는 멘토링에 낭비한 거나 다름없죠. 솔직히 이베트 니콜이 없는 버전으로 책이 한 권 더 나오는 게 판매에는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베트의 존재는 작가가 "넬레 노이하우스" 작품을 인상적으로 읽은 탓이 아닌가 의심스럽네요. 생각만 많은 고위 경찰에 사고뭉치 애송이 여자부하가 딸렸다는 설정은 판박이니까요.
물론 한 할머니가 혼자서만 간직하다가 발표하게 된 그림이 일종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는 발상만큼은 괜찮습니다. 무려 60년 동안 사람을 들이지 않은 거실은 할머니가 손수 그린 그림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림은 60년간을 기록한 하나의 역사였다는 설정도 찬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크로프트의 알 수 없는 행동을 여운을 남기면서 설명하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그리고 현대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고전적 후더닛 소설의 기본적 얼개를 갖추었다는 것도 분명 장점이기는 합니다. 초중반에 뿌려지는 떡밥도 공정하게 회수하고 있으며, 퀘벡의 불어권 - 영어권 주민들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도 볼거리이고요.
그러나 장점보다 단점이 명확하고 방대하여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데뷔작임을 감안하더라도 부족함이 더 많았습니다. 위에 이야기한 대로 이베트 니콜 등장 부분을 싹 날려버리고, 가마슈 경감은 그냥 수사하러 나온 담당자로 역할을 최소화한 뒤 클라라를 탐정역으로 전개하여 250페이지 정도로 완결하였더라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 거예요.
후속작이 어떨지 약간 궁금하긴 한데 이베트 니콜이 계속 등장한다면 읽게 될 것 같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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