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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8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 - 미쓰다 신조 / 김은모 : 별점 3점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미스터리 편집자 미쓰다 신조가 공포소설 투고를 의뢰받은 뒤, 집필을 위해 우연히 발견한 폐가에 가까운 서양식 저택에 기거하면서 소설과 현실이 뒤섞이는 기이한 경험을 한다는 내용의 작품으로 미쓰다 신조의 장편 데뷰작입니다. 작가는 최근 도조 겐야 시리즈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지요. 도조 겐야 시리즈는 한 권밖에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본격물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호감을 느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이 작품은 "정통 호러 소설"이었습니다. 별로 호러물은 좋아하지 않는데, 일정 주기를 기점으로 참혹한 사건이 반복되는 흉가라는 아이디어가 괜찮더군요. 뭔가 스물스물하면서 섬찟하게 만드는 전개도 좋고요. 괴물이 나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상황" 자체가 섬찟한데, 이를 정말 잘 살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작가 미쓰다 신조라던가, 작품 발표 시기에 진짜 그가 편집자로 일하며 발표했던 여러 서적들이 소개된다던가, 지명들이 실존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현실이 굉장히 깊게 개입하여 논픽션 느낌을 주는, '메타 소설' 계열의 작품이라는 특징도 이러한 섬찟한 상황에 한몫 단단히 합니다. 덕분에 흉가가 실제 있는 것 같이 느껴지거든요. 요새 말로는 페이크 다큐 스타일인 것이지요. 

실제로 존재하는 수많은 유명한 추리, 호러 작품들이 소개되는데, 그 방식도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냥 방대한 장르문학에 대한 지식을 독자들에게 광고하는 수준이 아니라, 실제 작품에 연결시켜 녹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쓰다 신조가 "세계 미스터리 투어 13"의 도쿄편 관련 사진 촬영을 위해 아사쿠사 일대를 배회하면서 에도가와 란포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인 작가 미쓰다 신조와 그가 이사 온 저택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작품 "모두 꺼리는 집"과 뒤섞여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과정도 볼만했는데, 이러한 전개는 "메두사"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액자소설은 많이 있긴 하나 이렇게 실제 현실과 작품이 하나로 귀결되는 작품은 흔한 것은 아니죠.

허나 단점도 있습니다. 흉가 자체의 존재를 그려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대체 왜 흉가가 되었는지 결국 밝히지 않고 끝내는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7에 얽힌 주기는 무엇이며, 혼자 살아남은 소년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등 궁금했던 떡밥도 하나도 회수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귀신에 씌인 것 같은데 그냥 그뿐이라는 결말은 "알고 보니 꿈이었다"와 별다를 게 없지 않나 싶습니다.
마지막의 대 활극(?) 묘사는 긴장감이 넘치기는 하나 앞선 흉가 그 자체에 관련된 오싹함과는 거리가 있고, 통속적인 작품이 된 것 같아 아쉽고요.

그래도 복잡한 구성임에도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는, 그리고 장르 자체의 속성에 충실한 좋은 작품입니다. 데뷰작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역시나 떡잎부터 다른 법이네요. 몰입해서 읽게 만드는 재미도 특출나니 호러 소설을 좋아한다면 괜찮은 선택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계절도 이제 슬슬 여름이니까요!

그나저나... 작중에서 요코미조 세이시의 말이라며 "아무리 멋진 아이디어가 있어도 소설로 쓰지 않는 한 평가할 수 없다."라는 글귀가 등장하는데 정말 와 닿습니다. 깊이 반성하고 하루에 10분이라도 내 글을 쓰는 시간을 가져봐야겠습니다.

2021/09/25

좀비 연대기 - 로버트 E. 하워드 외 / 정진영 : 별점 2.5점

좀비 연대기 - 6점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책세상

근대 시기 유명 장르 소설가의 좀비 관련 중단편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작가들의 명성과 장르 문학치고는 고전급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 성격은 유사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낡은 느낌이 강했던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는 다르게, "지옥에서 온 비둘기"라던가 "좀비 감염 지대"같은 시대 초월 명작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최초로 '좀비'라는 말을 만들고, 아이티 부두교 좀비 설정을 확립했다는 "마법의 섬"과 같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작품도 눈여겨 볼 만 하고요. 크리쳐 호러물 외에도 저주받은 저택, 호러 모험 액션, 판타지에 SF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장르 스펙트럼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열 두편의 수록작 중 수준 이하 졸작도 제법 됩니다. 발표된지 100여년이 다 되어가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요. 그리고 제목에서 기대했던, 우리가 지금 '좀비'라고 하면 떠올릴 몬스터가 등장하는 작품도 없습니다. 아이티 등 열대 섬나라에서 부두교 주술 등으로 죽은 사람을 되살려 노예처럼 부렸다는 초기 좀비 전설에 기반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거든요. 물론 이게 단점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일한 설정을 그대로 반복한 판박이같은 작품이 많다는거지요.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가 그러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클래식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그런 앤솔러지였습니다. 좀비라는 크리쳐의 창작 초기 설정과 이야기들이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옥에서 온 비둘기" 

그리스웰과 존 브래너는 비둘기 떼가 날아가버린 폐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게 되었다. 밤중에 공포스러운 휘파람 소리에 잠을 깬 그리스웰은 2층으로 올라간 뒤, 도끼에 맞아죽은 브래너가 자기를 죽이려고 해서 도망쳤다. 도망치던 그리스웰을 구해준 보안관 버크너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수수께끼와 브래너 살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자 늙은 부두교 주술사를 찾아갔지만, 주술사도 뱀에 물려 죽었다.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버크너와 그리스웰은 흉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지만, 그날 밤 그리스웰은 악령에게 홀려 2층으로 향하는데...

좀비물이라기 보다는, 저주받은 저택 장르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죽은 브래너의 습격, 마찬가지로 사람을 습격해 죽이는 실비아 블래슨빌 모두 시체가 되살아난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복수를 위해 부두교 주술로 저주한게 원인이고, 사람을 잡아먹지도 않으니, 저주물에 더 가깝고요.

저주받은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다가 악령에게 습격받는 초반부 묘사는 지금 읽기에는 다소 진부하고 심심했지만, 버크너 보안관 등장 이후부터는 아주 재미있었어요. 특히 버크너가 브래너의 시체를 발견한 뒤의 전개는 추리 소설을 떠올리게 해서 독특했습니다. 상황은 그리스웰이 범인일 수 밖에 없어요. 둘만 있던 흉가에서 한 명이 도끼에 머리를 맞아 죽었으니까요. 그러나 버크너는 그리스웰의 옷에 피가 전혀 튀지 않았던 점, 그리고 그리스웰이 범인이라면 죽은 버크너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주장을 했을리 없다는 이유로 추가 조사를 벌입니다. 그리고 핏자욱을 따라 2층의 사건 발생 현장으로 이동한 뒤, 무언가 이상한 존재가 얽혀있다는걸 알게 되지요. 단서를 통한 추리,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수사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비밀 방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3명의 가족이 목을 메고 죽어 있었다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진상도 오싹했습니다. 사람들을 습격해 죽였던 괴물 '주벰비'가 실비아 블래슨빌을 원망했던 혼혈 하녀 조안이 아니라, 실비아 블래슨빌이었다는 반전도 충격적이었고요. 조안은 주벰비가 되는 검은 술을 자기가 먹지 않고 주인에게 몰래 먹였던 겁니다. 이거야말로 진짜 복수네요.

믿음직하고 용감한 보안관 버크너와 겁 많은 애송이 그리스웰의 조합도 반 헬싱 교수와 조나단 하커 관계와 좀 비슷한데, 전형적이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에 딱 맞는 조합이더군요. 무서움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겁쟁이와 사건을 해결하고 악령을 응징하는 용감한 보안관이 조합되니, 두려움과 공포, 액션과 정의의 응징을 다 얻을 수 있잖아요!

그러나 딱 한 가지, 너무 옛스럽게 쓰여졌다는 건 좀 아쉽습니다. 공포를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여러모로 부족한 묘사가 특히 거슬렸어요. 오래된 폐가, 몰락한 가문, 뱀으로 상징되는 저주의 주술,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령, 도망쳤던 생존자가 남긴 일기 등 모든 면에서 미쓰다 신조의 "흉가"가 떠오르는데, 공포를 자아내는 묘사와 전개는 전혀 미치지 못했거든요. 미쓰다 신조가 같은 작품을 썼다면 훨씬 무섭게 쓸 수 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차라리 지금 방식으로 영상화하면 훨씬 대단한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되네요.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검은 카난" 

커비 버크너는 고향 카난에서의 긴급 호출을 받고 귀향하다가 혼혈인 마녀의 유혹을 받았다. 최면에 걸렸던 버크너는 운 좋게 정신을 차리고 습격한 거구의 흑인 세 명을 물리쳤다. 마을에 도착한 버크너는 마을 흑인들이 모두 도망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고, 조사를 통해 늪지대에 사는 괴인 솔 스타크가 배후에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조사 중 버크너는 마녀의 최면에 걸려 솔 스타크의 본거지로 본의 아니게 끌려가게 되었고, 친구 브랙스턴이 그를 돕기 위해 따라가는데....

부두교 주술사가 카난이라는 마을을 장악하려 하지만, 마을 지도자 버크너가 이를 물리친다는 호러 액션 활극입니다. 마녀의 최면, 주술로 만든 물고기 인간같은 공포스러운 요소가 등장하지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버크너 시점의 심리 묘사만 있는 탓이 큽니다. 버크너 캐릭터는 전형적인 서부 영화의 쾌남 영웅 스타일이라 공포를 크게 느끼지 않거든요. 공포에 사로잡힌 묘사도 잘 와 닿지 않더군요. 마녀와 괴물들이 총에 맞으면 죽는다는 것과, 최면술말고는 주인공을 크게 위협하지 못한다는 것도 작품이 무섭지 않은 이유이고요.

그래도 모험 활극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주인공 버크너는 전작의 버크너 보안관의 선조, 혹은 동일인물이 아닐까 싶은데, 버크너 유니버스도 한 번 제대로 소개되면 좋겠네요.

"천 번의 죽음" 

물에 빠진 나를 구해준 건 아버지와 그 부하들이었다. 알고보니 아버지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나도 물에 빠져 죽었었지만 아버지의 연구 덕분에 살아났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죽이고 되살리는 식으로 연구를 계속하는데....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등장하는 SF 호러 범죄물을 잭 런던이 썼다는건 특이했지만, 내용은 평이합나다.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는건 "프랑켄슈타인" 에서부터 내려온 고전적인 설정이니까요.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섬에 틀어박혀 생체 실험을 한다는건 "닥터 모로의 섬"과 똑같고요. 물론 생체 실험의 대상이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로, 그가 반복적인 죽음과 소생을 거듭한다는 설정으로 확실히 차별화되기는 합니다. '폭력에 의하지 않고, 신체 장기에 아무런 훼손이 없는 죽음은 단지 생명의 보류 상태'라며 죽음과 소생을 보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점도 독특했어요.

하지만 차별화 요소를 잘 살렸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독약, 질식 등으로 수차례 죽음을 맞는 고통이 잘 그려내지 못한 탓입입니다. 생체 실험의 고통을 극명하게 그려냈다면 호러물로 충분히 값했을텐데 말이지요. 과학적인 설명도 그럴듯해 보일 뿐, 실상 알맹이 없는 서술에 불과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갖은 노력 끝에 물질을 원소 상태로 되돌리는 장치를 개발했고, 이를 이용하여 아버지와 그 부하들을 없애고 탈출한다는 결말은 최악이네요. 아버지의 흑인 부하들이 자기 방으로 한 명씩 차례로 들어올 때 마다 없애고, 마지막에는 방에 들어선 아버지를 없앴다는데, 이럴 바에야 그냥 방에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칼로 찌르는게 빨랐을겁니다. 특별한 장치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고, 피해자들도 한 명씩 들어와 사라질 정도로 감시가 느슨했는데 왜 진작에 탈출하지 않은건지도 이유를 모르겠고요. SF스럽게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엄청난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보였던 아버지의 최후라기에는 너무 허무했고요.

유사한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되는 요소가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호러물로는 공포를 자극하는 요소가 부족했고, 결말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아이티 호텔에서 머물다가, 호텔에서 일하는 노파 마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지역 주민들과 호텔 직원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과거 아이티 독립 전쟁 당시 '소금을 먹지 마라'는 금기를 어겼다가 시체가 된 연인 트레생에 대해 말해 주는데...

뒤에 수록된 "좀비와 함께 걷다"를 읽어야 설정이 이해가 되는 작품입니다. "좀비와 함께 걷다"에 따르면, 좀비는 소금을 먹으면 자신이 죽었다는걸 깨닫고, 무덤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트래생은 물론 마리도 진작에 죽었던 좀비였다는 뜻이고요. 트래생이 흑인 해방 등의 의식을 가질 정도로 똑똑했던 이유는 설명되지 않지만 노예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였다니, 다른 좀비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고 보면 되겠지요.

문제는 이 설정 외의 특별한 내용은 없다는 겁니다. 마리도 좀비였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고요. 죽었다는걸 깨달은 좀비들이 무덤으로 폭주하는 장면 묘사 정도만 괜찮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귀환자들의 마을" 

좀비 전설이 있는 열대 섬마을에 어느날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에게 유혹당한 파파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괴담 소설로 유명한 라프카디오 헌의 단편인데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좀비와 다른, 열대 섬나라 좀비에 대한 설명과 파파가 관련된 이야기가 아예 별개로 진행되어 혼란스럽고, 별다른 내용도 없는 탓입니다. 섬마을의 여러 풍광에 대한 관능적이면서도 상세한 묘사를 걷어내고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한, 두페이지로도 충분했을 이야기입니다. 수록작 중 최악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나트에서의 마법" 

조티크 대륙의 절반이 사막인 나라 지라의 왕자 아다르는 노예 상인 샤라그에게 납치된 약혼녀 달리리를 찾아 여러 왕국을 헤멨다. 그러다 그녀가 향했다는 요로스 왕국으로 가는 상선에 탑승했지만 항해 중 폭풍에 휘말렸고, 상선은 사악한 섬 나트로 표류하다가 침몰했다. 달릴리의 구조로 홀로 살아남은 아다르는 나트의 마법사 우두머리 바카른을 만나, 그녀는 바카른이 되살려낸 익사자라는 걸 알게 되는데....

"코난 더 바바리안"을 연상케 하는 작품. 존재하지 않는 고대 왕국을 무대로 마법사와 영웅이 등장해서 대결을 펼치는 고대 판타지라는 점에서요. 그런데 결말이 예상 외라 놀랐습니다. 영웅 포지션인 아다르가 권력과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바카른의 두 아들 음모에 가담하여 바카른을 죽이려다고 되려 찔려 죽고 말거든요. 그리고 바카른의 아들에 의해 되살아나 좀비가 된다는게 끝입니다. 달릴리와 뭔가 관계가 이루어진다던가, 정의가 이루어진다던가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중간에 등장하던 족제비 괴물은 어떻게 되는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이런 이유로 방대한 설정으로 이루어진 긴 서사물의 일부만 수록된 느낌입니다. 최소한 아다르와 달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었어야 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아이티 공화국 헌법에 좀비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는 말에서 시작해서, 아이티에 진짜 좀비가 있다는 다양한 증언들이 이어지는 작품. 페이크 다큐멘터리 방식의 파운드 푸티지 영화같은, 페이크 논픽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고, 좀비가 소금 맛을 보면 죽었다는걸 깨닫고 열일 제쳐놓고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무덤으로 향한다는 설정에 기반한 경험담이 이어질 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화이트 좀비" 

아프리카 엔스와지 지방의 행정관 제프리 에일럿은, 어느날부터 느껴지는 악취 탓에 겁에 질렸다. 안개 자욱한 어느날, 결국 에일럿은 쓰러지고 말았다. 그를 돌봐준 신부는 과거 에일럿과 함께 했던 전우 싱클레어의 미망인이 수상하다고 말했고, 에일럿은 탐문과 잠복 끝에 그녀가 부두교 주술로 시체들을 조종하는 현장을 목격하는데...

서인도 제도가 아니라 아프리카를 부대로 부두교 주술이 등장하는 이색작입니다. 서술은 장황하지만, 정작 내용은 에일럿이 잠복해서 부두교 좀비 축제? 현장을 목격하고, 거기서 싱클레어의 모습을 확인한 뒤 부두교 주술솨를 쏴 죽인다는게 전부입니다. 악취라던가 불길한 안개 등의 설정은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신부의 존재도 불필요했어요.

게다가 좀비 사건의 원인, 결과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싱클레어 부인이 부두교 주술에 빠져 시체를 되살렸는지는 아프리카의 심장 운운하며 농장 관리 목적이었다고 소개되지만 명확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싱클레어를 되살릴 이유도 없었고요. 에일럿이 악취를 느낀 이유 역시 밝혀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딱히 아프리카일 이유를 찾기도 힘들었습니다. 묘사만으로 작 중 무대가 아프리카처럼 느껴지지도 못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할로 맨" 

한 남자가 아프리카로부터 15년만에 영국으로 찾아왔다. 그는 부두 거리를 헤메다 모모의 식당으로 들어섰다. 

모모는 자신이 15년 전에 죽여 매장했던 고팍이 자기 식당으로 들어오는걸 보고 경악했다. 고팍은 표범 인간이 자신을 깨웠다며, 자기를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모모가 자신을 죽였기 때문이라면서. 식당에 고팍이 머문 뒤, 식당은 서서히 망해갔고, 딸 버블스마저 고팍에게 홀려 생기를 빼앗기자 모모는 고팍을 또 다시 한 번 죽일 결심을 하게 되는데....

죽은 자가 돌아왔다가, 다시 죽음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찾는다는 내용의 작품. 그렇게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무서울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무서운 포인트를 제대로 묘사하고 있지 못하는 탓입니다. 일단 모모 시점의 심리 묘사가 부족해요. 과거에 저지른 죄로, 손을 씻고 가족과 열심히, 단란하게 살아가던 소시민에게 지옥문이 열린 상황인데, 고팍의 존재를 너무나 쉽게 인정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묘사에서는 절박함이나 어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거든요. 내용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습니다. 왜 표범 인간이 고팍을 되살렸는지, 고팍이 영국에는 어떻게 왔는지 등이 모두 드러나지 않아요. 버블스의 생기를 빼았는다는 것도 대충대충 넘어가고요. 결말도 허무합니다. 결국 고팍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걸로 마무리되는데, 이럴 거였다면 왜 진작에 없애지 않았는지 의문이에요.

여러모로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만 물씬 났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나는 농부 폴리니스로부터 아이티 지역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다양한 존재들에 대해 들었다. 다른건 유럽과 흡사했지만, 이 지역에만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건 바로 좀비였다. 나는 좀비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했다

"좀비"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작품으로 아이티에서 사람들이 단단한 대리석 무덤에 묻히고 싶어하고, 자기 집 마당에 묘를 만들고, 사람들 왕래가 많은 길가나 도로변에 무덤이 많은 이유로 좀비를 설명하는 등, 좀비를 실존하는 것 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장치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아이티 형법을 증거로 내미는 장면도 그런 장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폴리니스가 해 준 늙은 추장 조제프가 데려온 좀비 이야기는 이 책에 앞서 수록되어 있는 다른 아이티 좀비 이야기들과 똑같습니다. 좀비가 소금기를 접한 뒤 다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최후까지요. 좀비가 되었던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조제프에게 복수를 했다는 결말 정도만 차이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원조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발표 당시에는 굉장히 새롭고, 무서운 이야기였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잘 짜여져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오히려 이 작품을 다른 유사 작품들보다 앞서 수록하지 않은 이 책의 문제가 너무 커 보입니다. 지금 책의 구성은, 후대의 아류작으로 원조의 가치가 퇴색되는 셈이거든요.

하여튼, 원조라는 역사적 가치를 더해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투셀의 창백한 신부" 

흑인 부자 마티외 투셀은 스무살은 어린 혼혈 아가씨 카미유와 결혼했다. 그리고 첫 번째 결혼 기념일에 투셀은 카미유를 시체와 함께 하는 파티에 초대했고, 카미유는 미쳐버리는데....

화자가 직접 들었다는 이야기를 쓴 글 형태로, 화자의 말대로 '흐지부지되었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작품입니다. 결말이 없거든요. 투셀이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투셀이 파티가 연 의도가 무엇인지, 시체들은 누구였는지, 아내에게 1년간 비밀을 지키다가 갑자기 시체 파티에 초대한 이유는 무엇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아요. 그렇다고 딱히 무섭지도 않았고요.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는 문제가 많았던 소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점비" 

그랜빌리 씨는 1차 대전에서 폐를 다친 뒤, 서인도 제도 세인트크로이 섬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섬에서 친해진 제프리 다 실바와 럼주 칵테일을 함께 하던 어느날, 그랜빌리 씨는 '점비'에 대해 물었고 다 실바는 자기가 젊었을 때 목격했던 일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나온 집사 출신이라는 작가 이력이 특이했던 작품. 이런 이력이라면 좀비가 실제 있는 것 처럼 묘사되는 작품은 쓰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그러나 작품은 작가 이력만큼 특이하지는 않습니다. 다 실바가 친구 이베르센이 죽은 날, 이베르센의 유령을 만나고, 밤길에서 공중에 떠 있는 점비를 목격하고, 이베르센 집에서 개 인간을 만났다는 체험담이 이어질 뿐으로, "내가 했던 무서운 체험" 류의 기승전결없는 괴담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점비'나 개인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도 없고요.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줄 래야 줄 수가 없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좀비 감염 지대" 

고든 파넘 박사는 아발론 섬에서 불사에 관련된 연구를 하다가, 죽은 시체를 되살리는 혈청을 개발했다. 마침 섬에 닥친 화산 폭발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박사는 혈청을 이용하여 그들을 되살릴 생각을 하는데...

부두교 주술로 되살아난 시체가 아닌, 과학의 힘으로 되살린 좀비가 등장하는SF 호러물입니다. 앞서 잭 런던의 단편과 비슷한 소재이지만, 되살리는 과정을 나름 과학적으로 잘 설명해 주는게 큰 차이점이자 볼거리입니다. 특히 인체는 기계와 같다는 등의 고든 파넘 박사의 생명에 대한 이론이 아주 재미있고 풍성했어요. 이 이론과 박사가 여러 동물로 진행하는 실험으로 이야기 여러 개는 충분히 뽑아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요. 예를 들어 '불멸성을 부여받은 실험체들이 번식을 통해 불멸성 유전을 증명했지만, 태어난 실험체들이 태어난 상태를 유지할 뿐이었다'는 이야기는 별도의 단편으로 꾸며도 재미있겠더라고요.

시체가 되살아나지만, 영혼과 두뇌가 없이 본능만 남은 상태라 야수로 돌변한다는 발상도 아주 좋았어요. 이들이 죽지 않는 상태로 군대, 경찰을 휩쓸어버리고, 잘려진 손발이 꿈틀대며 잘린 조각들이 엉망으로 붙어 괴물이 되어버리는 묘사도 일품이었고요. 절대 죽지 않는 존재를 없애기 위해 화산 폭발을 이용하여 우주 공간으로 날려버린다는 아이디어도 신선합니다. 스케일이 정말 남달라요.

물론 화산 폭발을 사람이 제어한다는건 지금도 상상하기 힘들기에,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이 정도 허풍은 충분히 허용범위 안쪽이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시대를 앞서간, 아니 시대를 초월한 끔찍한 아비규환을 그려낸 SF 좀비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영화로 나와도 아주 근사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20/08/15

사관장 - 미쓰다 신조 / 김은모 : 별점 2점

사관장 - 4점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의 도피를 한 뒤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죽자 '나'는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는 아버지와 함께 귀향했다. 그 뒤 다섯 살 '나'는 아버지의 옛 정혼자인 새어머니와 거의 노망이 든 할머니에게 기묘하면서도 가혹한 학대를 받았다. 나의 편은 아버지와 숙부들의 유모였던, 집 안에서는 존재감없는 다미 할멈 뿐이었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할머니가 쓰러진 어느 날, 나는 백사당에 갖혀 기묘한 존재의 추격을 받다가 기절하고 말았다. 그런 나를 구해준건 다미 할멈이었고, 그 때문에 다미 할멈은 십여년의 나이를 갑자기 먹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식 때 햐쿠미 가의 관례대로 홀로 할머니의 시신을 탕관하기 위해 백사당에 갇힌 아버지가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미쓰다 신조의 시리즈물인 작가 삼부작 세 번째 작품입니다. 8년 전에 읽었던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이 시리즈 첫 번째인데, 두 번째를 건너뛰고 세 번째부터 읽게 되었네요.
그런데 주인공인 '나'가 작가라는 설명이 없어서 작가 시리즈가 맞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아직 편집자거든요. 스스로 작품 활동을 하는 묘사도 없고요. 오히려 작가 시리즈가 아니라 '집 시리즈' 였던 "흉가"와 더욱 관련이 깊어 보입니다. 괴이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무섭고 공포스러운 저택을 보유한 지역 명문가 '햐쿠미 가(家)', 햐쿠미 가와 관련된 괴이를 뜻하는 '마모우돈'은 명백히 "흉가"의 '타츠미 가(家)', 그리고 '뱀 신'과 겹치니까요. 그 외에도 무섭고 커다란 저택, 공포스러운 할머니, 공포와 괴이가 얽힌 산들과 여러가지 사당 등 비슷한 설정이 많습니다.

작 중 등장하는 공포스러운 소재, 설정이 특히 많은데 크게 다음과 같습니다. 

  1. 햐쿠미 가에서 할머니에게 당했던 폭행과 학대
  2. 백사당에서 겪었던 무언가의 습격
  3. 아버지가 사라진 할머니 장례식 날 찾았던 도도야마 산에서의 기억나지 않는 체험
  4. 삼십 년 뒤 방문한 어린 시절 친구 스나가와가 살았던 흉가에서 만난 무언가
  5. 새어머니 장례식 날 백사당에서 진행한 탕관 의식과 무언가의 습격

이는 모두 주인공 '나'의 체험으로, 직접 겪은 듯한 묘사는 무척이나 생생합니다. 공포를 불러오는 공간들 - 햐쿠미가, 백사당, 도도야마 산 등 - 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섬찟함을 더해주고요. 이런 공간 묘사는 작가의 특기이기도 하지요.

이 공포 체험 중 첫 번째인 어린 다섯 살 때 겪었던 할머니의 학대는, 말 그대로 '첩의 아이'에게 명문가 대가 이어진다는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비정상적인 광기는 끔찍하기는 한데 괴담은 아니에요. 

두 번째 체험인, 백사당에서 '나'를 습격했던 '무언가'는 작 중 정체가 밝혀지는 유일한 마물인 '마모우돈'입니다. 다미 할멈의 말에 따르면 성불하지 못한 햐쿠미가 사람의 영혼이라지요. 뱀 요괴로 사랑했던 사람들을 사로잡아 함께 저승길로 간다고 하는군요. 햐쿠미가는 여자들의 힘이 강해서 마모우돈은 대부분 여성 혈족으로 짐작되고요.
이에 따르면 아버지 실종 사건의 진상은, '나'의 아버지가 할머니 장례식 날 제대로 탕관을 하지 않은 탓에 벌어진 일입니다. 성불을 하지 못한 할머니가 마모우돈이 되어 버린 후, 사랑하는 아들을 잡아간 거지요. 마지막에 백사당에서 새어머니의 탕관 의식을 진행한 '나'를 습격한건, 마모우돈이 된 새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버지를 똑 닮은 '나'를 잡아가려 한 것이고요.

하지만 이 두 가지 외 다른 괴이 현상, 체험에 대한 설명은 전무합니다. 도도야마 산에서의 체험과 스나가와가 살았던 흉가에서의 체험은 그 이유, 정체가 드러나지 않아요. 이야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백사당에서 탕관을 진행하는, '장송백의례'라 불리우는 햐쿠미가 전통 장례 의식도 상세한 설명에 비하면 왜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요. 작 중 딱 두 번 - 할머니와 새어머니 - 의 장례식이 있었는데, 두 번 모두 당주를 '마모우돈'이 습격해버리니 이래서야 이 의식을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거든요. 이럴거라면 당주가 산제물이라는 설명이 있었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또 이렇게 자주 출몰한다면 구태여 사당으로 세워 모실 이유도 없잖아요? 퇴마사든 뭐든 불러다 빨리 제령하고 불태워버리는게 낫지요. 그 외에도 '나'의 목덜미에 있는 뱀 비닐 모양 반점은 무엇인지, 햐쿠미 가에 시집오려 한 미와코와 새어머니는 처음부터 뱀 요괴였는지, 스나가와의 신분은 무엇인지 등등 알 수 없는게 많아서 답답합니다.

대부분 '나'의 체험일 뿐이고, '나'가 더 이상 햐쿠미가와 얽히지 않는다는 내용이라 이야기도 완결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붉은 눈" 속 단편들같은 개인 체험 괴담류의 이야기에 가깝거든요. 문제는 괴담이라면 최소한 무섭기는 해야 하는데 별로 무섭지 않다는 점이지요. '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다미 할멈이 나타나 구해주는 탓입니다. 다미 할멈은 '마모우돈'에게 십여년의 수명을 빼앗기고, 마지막에는 죽어버리지만 그래도 두 번이나 '나'를 구해내는데 성공하는 탓에 마모우돈의 공포와 강함이 상대적으로 퇴색해 버립니다. 이래서야 정과 사랑이 넘치는 할머니 히어로물이라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 싶네요. 소설로 읽지 않고 영상화한다면, 아이들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될 정도에요! 아울러 여러가지 섬찟한 묘사들도 그 정도가 지나친 감이 듭니다. 반복적인 부분도 많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고, 일부 묘사를 제외하고는 무섭지도 않아서 감점합니다. 후속권으로 "백사당"이라는 책이 있는 듯 한데, "백사장"과 합쳐진 긴 '뱀 신' 괴담의 도입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그렇다면 설명이 부족한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아닌데, 빨리 "백사당"을 읽어봐야겠습니다.

2020/07/25

흉가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4점

흉가 - 8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산 윗집에 살면 안 돼! 지금 당장 도망쳐! (토코의 일기)

초등학교 4학년 쇼타는 아버지의 전근으로 교토 근처 안라 시의 시골 신흥 주택으로 이사왔다. 그러나 쇼타는 어린 시절부터 흉조가 있을 때 마다 느꼈던 불길함을 새 집에서 느꼈고, 집 안에서 유령과 같은 형체들과 조우했다. 다음날 어린 여동생 모모미마저 한 밤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히히코'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말하자, 쇼타는 혼자서 집에 관련된 조사를 나섰다. 그러다가 마을 소년인 코헤이와 친구가 되는데...

납량특집용으로 읽게 된 미쓰다 신조공포, 호러 소설입니다. 이른바 '집 시리즈' 중 한 권이지요.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불길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집과 관련된 여러가지 묘사에서 시작해서, 이런저런 수수께끼들이 하나씩 던져지기 때문입니다. 대충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 쇼타가 집에서 본 기묘한 형체는 무엇인지?
  • 왜 마을의 대지주였던 타츠미가가 붕괴하고, 일족이 몰살당해 당주인 센 할머니만 정신 이상이 된 채 폐가인 집에 남아 있는지?
  • 산에서 내려온다는 뭔가 안 좋은 것은 무엇인지?
  • 마을 사람들은 왜 산 윗집, 아래 맨션 사람들을 배척하는지?
  • 모모미에게 찾아온 '히히노'와 '히미코'는 무엇이고, 그들은 왜 모두 여섯명인지? 이들은 토코의 일기 속 '도도츠키' 등과 어떻게 다른지?
등입니다.

이에 대한 답도 산에 사는 '뱀신'을 중심으로 효과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쇼타가 집에서 본 기묘한 형체, 특정 장소를 내려다 보는 모습이라던가 매달린 끈은 가족들이 모두 목 매달아 자살하는 미래의 모습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타츠미가가 뱀신이 살고 있는 신성한 산을 난개발하려다 뱀신의 저주로 죽었는데, 그 와중에 유일하게 개발된 쇼타네 집이 뱀신을 불러들이는 형태가 되어 뱀신이 씌워진 탓이지요.
산에서 내려온다는 안 좋은 것은 당연히 뱀신이며, 마을 사람들은 산 윗집과 아래 맨션 사람들 모두 뱀신의 저주를 받는다는걸 알고 있어서 멀리 했습니다. 누군가 윗 집에 살고 있는 동안은 괜찮다는 묘사 (센 할머니의 말)가 살짝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일종의 '산제물'로 여겼을 여지도 충분하고요.

이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섬찟함, 오싹함을 불러 일으키는 묘사는 명불허전입니다. 특히 가장 섬찟했던 건 '히히노' 등의 정체입니다. 뱀신에게 씌워진 아버지, 어머니, 누나 등 쇼타의 가족이거든요. 밤 중에 모모미에 의해 눈을 뜬 쇼타 앞에 아버지가 나타나 "처음 뵙겠습니다. 히히노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어요.
기묘한 이름은 원래 아버지, 어머니 등의 이름 한자를 분해하여 읽은 것이라는 일종의 암호 트릭도 아주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쇼타에게도 '뱀신'이 발현된다는 마지막 말에서 효과적으로 한 번 더 사용됩니다. 쇼타와 여동생 모모미만 남긴채 일가족이 죽어버려 둘은 후쿠오카의 외할머니 댁에서 살게 되는데, 모모미가 쇼타에게 쇼타의 이름을 분해한 누군가가 나타났다고 하거든요. 뱀신의 저주는 산 윗집에서만 효과가 있는게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 번 저주의 집, 흉가에 머물렀던 가족은 어디에 가서도 그 주박을 벗어버릴 수 없다, 즉 쇼타와 모모미도 곧 자살해버릴거라는 내용인 셈이지요. 놀러온다는 코헤이까지 같이요. 씁쓸하면서도 뱀신의 집요함이 무섭습니다.

핵심 열쇠 중 하나로 등장하는 토코의 일기도 현재의 쇼타 상황과 맞물려 섬찟함을 배가시킵니다. 여러가지 말을 할 줄 알았던 앵무새 구리코가 이사를 마친 뒤, "온다"라는 말만 반복하다가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특히나 소름돋았습니다.

"화가"에서 처럼 초등학생이 주인공인이라 일종의 모험물 속성도 있어서 관련 묘사도 많은데, 중반에 쇼타가 미친 할머니에게 쫓기는 장면 묘사는 개중 압권입니다. 이전 윗집에 살던 소녀 토코의 일기를 구하러 센 할머니 집에 갔다가 쫓기게 되는데, 박진감이 철철 흘러 넘치는 덕분입니다. 히히노의 정체는 일종의 오컬트, 심령 호러라면 이 쪽은 일종의 크리처물이나 슬래셔 호러물을 방불케합니다. 쇼타와 코헤이가 맨션 이웃집 코즈미 키미로부터 탈출하는 장면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조금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눈에 뜨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전에 세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던, 쇼타네가 살고 있는 윗 집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예' 기사화가 되지 않은 점입니다. 쇼타의 가족이 동반자살한 사건도 온갖 매체에서 기자들이 달려왔다는 설명이 있을 정도인데, 왜 이전 사건은 기사화가 아예 되지 않았을까요? 토코의 일기는 마지막이 훼손되어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람이 죽은건 분명한데 말이지요. 바로 이사를 가서 괜찮았다 치더라도, 이전의 세 가구 모두 무사했을리가 없는데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아랫 맨션에 사는 코즈미 키미가 이상한 색녀가 되었다는 전개도 이상했습니다. 아랫 맨션까지 뱀신의 영향이 미친다는 묘사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그런 것 치고는 묘사는 과했고 설명은 부족했어요.

무엇보다도 코헤이가 나타나자 '히히노' 등이 자살한 이유는 알 수가 없네요. 코헤이가 오면 6명이 되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숫자에 딱히 집착하는 모습은 없었고, 외부에서 온 할머니까지 뱀신에게 씌워진걸 보면 '한가족' 이라는 형태도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고작 초등학교 4학년 소년이 나타났다고 모든 상황이 종료된다는건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코헤이가 자주 집을 비우는 등 평범한 소년이 아니라는 암시가 일부 있기는 한데, 다른 시리즈에서도 활약하는지 좀 두고 봐야 될 듯 합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호러, 공포 소설로서의 가치는 높습니다. 충분히 무섭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흥미진진함도 잘 살아있으며 재미도 충분하니까요. 제가 읽었던 미쓰다 신조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 하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더운 여름, 납량 특집용으로 아주 제격인 작품이라 생각되니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2/02/04

금요일의 괴담회 - 전건우 : 별점 1.5점

금요일의 괴담회 - 4점
전건우 지음/북오션

한국 작가의 괴담 모음집입니다. 금요일에 리뷰 올리기 좋은 제목이네요. 모두 열 일곱 편의 괴담이 수록되어 있는데, 수록작 대부분은 괴담답게 기승전결보다는 괴이현상, 섬찟함 등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수록작 중에서 "여우고개", "열세 번째 계단"의 두 편은 아주 좋습니다. 뻔한 이야기를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범죄, 사건과 결합하여 독특하게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모두 평균, 수준 이하입니다. 괴담치고는 별로 무섭지 않았던 탓이 가장 큽니다. 지나치게 짧다는 것도 단점이고요. 설명도 부족할 뿐더러, 설정 등에서 아무런 밀도를 느낄 수 없습니다. 미쓰다 신조 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야기가 성립할 수 있도록 기본 바탕은 깔아주었어야 했어요. 그리고 너무 뻔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대체로 어디선가 접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답습할 뿐입니다. 최소한의 반전, 아니면 최소한의 새로움이라도 더해 주었다면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겠지만, 예상을 벗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를 살리지 못한 측면도 없지 않아요.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여러모로 그리 권할만한 책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용한 집" 

새로 이사온 집에서 불길한 기운을 느끼다 독감에 걸려버린 규선에게 그 집에 살다가 요양원에서 죽은 노인의 가족이 찾아와 노제를 하고 떠났다. 그래도 이상한 꿈을 꾸는 등 괴현상이 계속되자, 규선은 빈 집을 찍울 수 있도록 핸드폰을 셋팅하고 외출했다. 나중에 확인한 핸드폰 영상에는 소리를 지르는 시커먼 형체가 찍혀 있었다... 

노망에 걸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노인의 원혼이 집에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이야기로 보기에는 완성도가 낮습니다. 일단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노인이 왜 집에 집착하는지 설명되지 않습니다. 규선이 저주를 받을 이유도 딱히 없고요. 또 노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노제를 했다면 원혼이 사라졌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게 아니라면 구태여 노제는 전개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원혼이 규선을 덮치는 결말도 예상 가능했고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여우고개" 

할머니는 어린 시절, 색연필을 훔쳤던 자기를 쫓아온 여우 '매구'를 매실의 힘을 이용하여 자기 대신 친구를 잡아가게 만들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무에 걸려있던 빨간 카디건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카디건이 사라지자, 할머니는 다른 동료 할머니 3명이 카디건을 숨겼다고 오해하고 그들에게 농약 사이다를 먹이고 마는데... 

가끔 뉴스에 나오곤 했던 '농약 사이다' 사건을 '매구'라는 요물 여우가 배후에 있다는 괴담 형태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작품 속 매구는 특정 물건에 집착하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여 다른 사람을 해치고 죽게 만든다는 설정인데, 이를 정신이 나간듯한 할머니 시점의 끔찍한 묘사들과 잘 섞어서 설득력있게 그려낸 솜씨가 일품이에요. 한국식 사회파 호러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매구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걸 명확하게 하는게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 할머니 친구가 실종된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할머니가 죽였다는 진상이 드러나는 식이었다면 말이 됐을테니까요. 지금처럼 매구가 있는지 없는지, 카디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호한 상태로 끝나버리면 할머니가 나쁜게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인데, 이런 마무리는 호러물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싶거든요. 깔끔한 느낌도 들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그 여름의 흉가" 

여름 한 철, 나는 호러 가이드로 일하면서 어머니처럼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그리고 강원도 흉가 체험을 한 어느날, 열정적으로 살라는 투어 멤버의 조언을 듣는데... 

손님을 가장하여 투어에 참가한 어머니의 영혼을 만나 정신차리고 열심히 살게 된다는, 성장물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한 명 더 있던 손님, 죽은 어머니의 영혼과 사진의 존재 등 전형적인 괴담 클리셰를 모아서 만든 이야기로 뻔한 내용에 주인공이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이유도 설명되지 않는 등,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자살하는 캐릭터" 

신작 게임 블라인드 테스트 중, 이상한 NPC가 발견되었다. 그 NPC를 참혹하게 죽여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었다. 알고보니 개발팀에서 폭언을 듣고 자살한 신입 개발자 은정이가 NPC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 뒤 개발팀 멤버들이 하나, 둘씩 은정이가 게임에서 죽은 방식대로 죽어갔다... 

저주를 게임의 NPC를 통해 풀어낸건 참신했지만, 그 외에는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작품입니다. NPC 목을 베어 죽였던 주인공 목에 금이 간다는 결말까지 뻔했습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이라던가, 저주의 실체에 대해 보다 심도깊게 파고들었다면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 되었을텐데 아쉽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한밤의 엘리베이터" 

여자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배달원과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와 함께 갇히고 말았다. 엘리베이터는 곧 정상 가동되었지만, 찜찜함을 느낀 여자는 중간에 내려 계단으로 향했다... 

배달원이 여자를 쫓고 있었다는 결말인데, 너무 뜬금없을 뿐더러 흔해빠진 이야기라 반전의 묘사도 느낄 수 없습니다. 수십년 전에 보았던 영화 "캠퍼스 레전드" 도입부가 바로 떠올랐거든요. 한 여자가 주유소였나? 어딘가에 잠깐 들렀는데, 굉장히 수상해보이는 주인이 갑자기 쫓아오기 시작해서 부리나케 도망을 칩니다. 그러자 주인은 뒤에서 "차 뒷 자리에 누군가 숨어있단 말이야!"라고 소리친다는건데, 거의 똑같지요? 

게다가 이야기의 완성도만 놓고 보면 "캠퍼스 레전드"쪽이 훨씬 낫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양복입은 남자의 존재가 제도로 설명되지 않는 등 단점이 더 많은 탓입니다.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인형 뽑기" 

회식에서도 팀장에게 시달리던 세호는 우연히 인형 뽑기 기계를 마주쳤다. 기계에는 인형에 눈, 코, 입을 그려 넣고 이름을 붙이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세호는 뽑은 인형에 팀장의 이름을 붙인 뒤 눈, 코, 입을 그리고 인형을 패대기쳤다. 다음날, 세호는 팀장이 사고로 인형과 똑같은 부분에 큰 부상을 입고 당분간 회사를 쉬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세호가 인형을 뽑아 자기를 괴롭히던 상사들에게 복수하지만, 세호도 부하 직원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입니다. 기승전결이 명확한 하나의 이야기라는건 장점이지만 그 외는 그닥입니다. 진부하기 짝이 없으니까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저주받은 숲" 

미스터리 사이트에 무서운 숲 사진을 올리고, 그 곳에서 캠핑을 하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누군가가 회색 숲은 음기가 강하고 귀신이 많으니 도망치라는 글을 올렸지만 처음 글쓴이는 캠핑을 감행했고, 뒤이어 이상한 현상에 대한 글을 계속 올리기 시작하는데... 

미스터리 사이트 게시판에 올라온 글과 댓글들로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파운드 푸티지라는,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선보이고 있는 호러 영화 장르물을 글로 옮기면 이런 형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하지만 저는 이 장르를 싫어합니다. '현실감'을 주는데 치중해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는 볼 수 없는 작품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블레어 위치"가 대표적이지요. 이야기 결말도 보통 주인공이 사라지는 형태로 애매모호하게 끝나곤 했었지요. 이 작품 역시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고, 처음에 글쓴이, 구해주러 갔던 직업 군인, 숲에 대해 썰을 풀어놓는 박수무당 등 주요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 등에서 똑같습니다. 

이렇게 제가 싫어하는 점을 답습했을 뿐더러, 새로운 아이디어도 딱히 찾아보기 힘들어서 좋은 점수는 줄 수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화분" 

선미는 시장에서 빨간 색 꽃이 핀 화분을 사 왔다. 그리고 꽃에게 자기 소원을 이야기한 다음날, 소원이 이루어져 연적인 이 대리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선미가 생기, 젊음을 댓가로 김 대리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이상한 꽃에게 소원을 빌지만, 마지막에 소원을 빈 목적이었던 김 대리마저 죽게 만든 뒤, 자기에게 꽃을 팔았던 할머니처럼 선미도 시장에서 화분을 팔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저주받은 물건'에 대한 이야기는 하늘의 별만큼 많습니다. 그 중에서 변별력을 가질 만큼의 새로운 이야기로 생각되지는 않네요. 김 대리가 죽고 만다는 결말은 괜찮았지만, 그 외는 평이했습니다. 소원은 이루어졌지만, 본인도 불행에 빠진다는 전형적인 결말도 뻔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열세 번째 계단" 

한 계단 씩 올라갈 때마다 피를 한 방울 흘리면, 열세 번째 계단까지 올라가서 뒤를 돌아볼 때 서 있을 여자 아이에게 소원을 말해주면 뭐든지 들어줄 것이다. 

전교 1등을 죽이면 자기가 전교 1등이 될 거라는 괴담의 파생형입니다. 여기에 성적 때문에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고요. 

짧은 분량 안에서 할 이야기는 다 하고 있고, 깔끔하게 마무리되는건 좋습니다. 1등 원석이가 계단에 소원을 빈 게 아니라, 노는 척 하면서 죽을만큼 공부했다는 진상이 특히 와 닿네요. 괴담을 현실로 만드는데 정말로 적절한 소재였다 생각되거든요. 부모를 죽이고, 원석이의 장난까지 알아버리자 완전히 미쳐버려 계단에서 여자 아이를 보게 된 주인공의 시점 변화도 탁월했고요.

주인공의 부모의 비정상적인 집착이 좀 더 묘사되었더라면, 그리고 부모를 죽인 주인공이 부모로부터 피를 받아 왔을텐데, 그 이야기를 더 무섭게 푸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기는 합니다. 부모 머리를 잘라왔다는 식이었다면 더 충격적이지 않았을까요? 좀 은근하게, 지나치게 흉칙하지 않게 묘사하는게 이 책 수록작들의 특징이기는 한데, 이 이야기만큼은 보다 엽기적인 묘사를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차피 범죄 자체가 극단적인 패륜 범죄이니까요.

그래도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약간 사회파 느낌을 전해 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어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위" 

주인공 혜미가 가위에 눌린 이야기가 전부인 소품. 무섭지도, 재미있지도 않았습니다. 괴담으로 보기에도 너무 알멩이가 없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외로운 아이 부르기" 

중학교 2학년 친구들 세 명이 몰래 학교에 숨어들었다. '외로운 아이 불러내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제목은 좀 있어보였지만, 알고보니 '외로운 아이 불러내기'는 '분신사바'와 거의 똑같더군요. 불러낸 외로운 아이가 질문을 잘못한 탓에 화가 나서 아이 하나를 데리고 가는게 전부인 이야기는 무섭지도 않고, 의외성도 없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자유로 귀신" 

헌팅한 여자가 파주로 가자는 말에 남자는 차를 몰고 자유로를 탔다. 여자는 '자유로 귀신' 이야기를 꺼냈다. 

뭔가 했더니, 음주 운전 차량에 희생된 여자가 원혼이 되어 자유로를 음주 운전으로 지나가는 운전자들을 응징한다는 내용이더군요. 그렇게 완성도 높은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어요. 별로 무섭지도 않고요. 함께 수록된 사진이 더 무서웠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음주 운전자는 죽어도 싸다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어서, 그 부분에 약간의 점수를 더합니다. 모든 음주 운전자가 이런 귀신을 만나서 천벌을 받기를 바랍니다.

"유괴" 

지수는 아영을 데리고 놀이 공원에 갔다. 그런데 한 할머니가 자기가 미래를 볼 줄 안다면서, 아이 앞날이 어둡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수는 유괴범이었고, 아영이를 놀이 공원에 데리고 온 건 몸값을 받으러 왔던 거라는 진상이 반전으로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현실적인 범죄가 등장하는 범죄물로 유괴범 시점으로 바라본 유괴극이라는 아이디어는 꽤 독특합니다. 그러나 이상한 할머니의 존재는 도무지 뭔지 모르겠어요. 할머니가 지수의 정체가 유괴범이라는걸 알아낸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건 미래를 본다는 능력과 별 상관도 없잖아요? 또 할머니가 아영이를 지수 몰래 데리고 가려고 했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경찰에 신고하는게 당연하니까요. 

별로 무섭지도 않았고,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라는 점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요소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더블"

진수는 자기와 똑같이 생긴 남자를 두 번째 본 뒤, 옛 군대 선임인 박수무당 영우를 찾아갔다. 영우는 산 사람한테 붙어 영혼을 빨아먹는 악랄한 홉혼귀라며 부적을 한 장 써 주었다. 한 번 더 홉혼귀를 보면 죽는다는 말과 함께. 그러나 세 번째로 홉혼귀를 마주치자, 영우는 분노에 휩싸여 그를 죽이고 마는데... 

자기와 똑같은 사람에게 분노를 품고 죽였는데, 죽이고나니 하나도 안 닮았더라... 는 이야기. 홉혼귀다, 도플갱어다 하면서 뭔가 설정을 깔기는 하는데 그런게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을 정도로 허무한 결말이었어요. 진수를 홉혼귀가 쫓아다니는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1킬로미터" 

한수는 이상한 문자 메시지를 따라가 어플을 하나 깔았다. 깔고나니 일종의 매칭 어플이었다. 한수는 어플에서 이상형인 박수희를 발견해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는데... 

어플을 통해 젊은 남자를 납치한 뒤 고깃배에 태우는 범죄 조직이 등장하는데,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어요. 대한민국에서 백주대낮에 건장한 남자를 폭행 후 납치한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어림반푼어치도 없지요. 마지막에 GPS로 위치를 확인하여 한수의 집까지 침입한다는 결말은 어이를 상실케 했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화장실" 

데이트 중에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을 찾았는데, 옆 칸에서 누군가 노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화장실 안에 붙어있는 장기 매매 스티커 번호를 물어보았다... 

장기가 적출되는건 나였고, 이건 여자 친구의 음모였다는 이야기.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화장실 장기 매매 스티커를 이야기 전개에 활용한건 좋은 아이디어였는데, 그 외 모든 내용과 과정은 뻔하고 억지스러웠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그 목소리" 

윤미 일행은 도심 근교 펜션으로 여행을 떠났다. 우울증 약을 건너 뛴 윤미는 남자친구 동민과 친구 영화가 윤미를 몽키 스패너로 처리할거라는 음모를 엿들었다... 

우울증 약을 먹지 않아서 정신착란을 일으킨 윤미가 남자친구, 자기 친구와 그 남자친구까지 모조리 죽인다는 이야기입니다. 

피해자로 보였던 여주인공이 알고보니 가해자였다는건 많이 보아왔던 설정입니다. 그러나 이 설정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는 못했습니다. 윤미에게 우울증이 있다는게 밝혀지자마자 곧바로 살인으로 이어져버리니까요. 이런 급발진 전개 덕분에 아무런 복선이나 반전도 없어서 시시했습니다. 이야기의 설득력도 낮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2004/08/31

R-Point - 공수창 : 별점 2.5점


1972년, 베트남 전쟁의 막바지, 200명의 부대원 중, 혼자 살아 남은 혼바우 전투의 생존자 최태인 중위(감우성)는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의 본대 복귀 요청은 철회되고, CID 부대장(기주봉)은 그에게 과실을 덮어주는 댓가로 비밀 수색 명령을 내린다.

작전은 6개월 전 작전 지역명 '로미오 포인트'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18명의 수색대원들로부터 계속적인 구조요청이 오고 있었던 것. 그 흔적 없는 병사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3일 후, 좌표 63도 32분, 53도 27분 _ 로미오 포인트 입구. 어둠이 밀려오는 밀림으로 들어가는 9명의 병사들 뒤로 나뭇잎에 가려졌던 낡은 비문이 드러난다.

不歸! 손에 피 묻은 자, 돌아갈 수 없다!!! 7일간의 작전이 시작되며 점차 소대원들에게 R-포인트의 끔찍한 과거와 그 과거에 얽힌 환상이 닥치기 시작한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별로 호러라는 쟝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공포라는 감정을 의사 체험하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는 것 부터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그래도 워낙 예고편이 멋졌고, 각종 사이트와 잡지에 올라왔던 설정 시놉만 가지고도 관심이 가던터라 개봉 소식을 듣고 주저없이 보게 된 영화입니다.

영화의 설정은 기대치를 충분히 반영해 주듯, 괜찮은 부분이 많습니다. 6개월전 R-포인트에서 사라진 수색대원들과 R-포인트에서 계속되는 무전.... 그리고 여러가지 잔혹한 과거를 지닌 R-포인트와 흉가처럼 변모한 대 저택... 기묘한 현상들과 환상을 목격하는 소대원들....
이런 설정을 바탕으로 한 서스펜스도 만만치 않아서 흡입력 있게 관객을 끌어 당기는 매력도 제법이라고 할 수 있죠. 중반부에 소대원들의 숫자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부분 (예고편에도 등장했지만 소대원이 한명 죽어서 현재원 9명이라고 보고하는 최중위에게 본부에서 "너희들은 출발할 때 원래 9명이었어!") 이나 최중위 (감우성)가 밤에 목격하는 프랑스 군의 묘지의 환상, 그리고 전력 공급차 방문한 미군 부대원들과 봉인된 무전실에 얽힌 비밀 등이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니까요.
특히 유령의 시선을 구분한 촬영이나 미지의 영역의 존재들을 드러나지 않게 처리하는 부분, 별다르게 잔인한 장면 없이도 긴장감을 충분히 전해주는 연출은 좋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멋진 소재와 설정을 호러라는 장르로 제대로 살려내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별로 무섭지가 않아요! 잔인함이나 무서움이라는 표현을 자제하며 관찰자 입장에서 담담하게 표현하는 것은 좋긴 했습니다만 너무 평범하게 찍은 느낌이에요. 보다 공포스럽고 전율을 느끼게 할 만한 내용으로, 특히 흉가나 환상같은 것은 조금 더 오버해도 영화가 괜찮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또 유령들의 증오와 소대원들에게 닥치는 공포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동기가 약해서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손에 피를 묻혀서" 라면 동기가 너무 약하잖아요? 특히 마지막 생존 병력에게 덥치는 유령들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진중사는 갑자기 왜 정신이 나가버렸는지, 여자 유령은 왜 최중위 앞에만 나타나는지 무엇하나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고 영화는 끝나버립니다. 마지막에 무전기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전설의 고향 목소리로 무전을 보내는 장면은 또 왜 나오는지....
마지막으로 한국 영화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한 싸구려 신파가 등장한다는 것도 감점 요소에요. 비교적 비중이 컸었던 한 실종된 소대원(카메라를 구해달라던)의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결론적으로, 공포영화라는 쟝르에는 아주 약간, 한 2% 정도 부족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국내 최초의 밀리터리 호러라는 수식어는 아깝지는 않고 충분히 흥행할만한 재미를 전해 주기 때문에, 인터넷 소설 영화나 수준낮은 코미디가 범람하는 한국 영화계에는 충분히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PS : 친구에게 영화 줄거리를 대충 설명해 줬더니 "일단의 부대가 미지의 모처에 들어가서 각자 환상을 보며 자멸한다.... 그거 스피어 아냐?"

2020/12/29

2020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열 일곱번 째 블로그 리뷰 총 결산입니다. 블로그 나이가 성인이 될 날도 얼마 안 남았네요.

올해 특징이라면, 독서가 취미이신 모든 분들이라면 마찬가지겠지만 독서량이 엄청나게 늘었다는 겁니다. 이 결산을 시작하고 책을 가장 많이 읽있네요. 코로나 사태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숫자로 정리해보면, 2020년 읽은 책 중 리뷰를 남긴 책은 추리 / 호러 장르문학 77 (48)권, 기타 장르문학 4 (1)권, 역사서 9 (15)권, 디자인 or 스터디 4 (4),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25 (11)권, 기타 도서 14 (18)권으로 모두 133 (97)권입니다(괄호는 작년). 작년보다 30% 정도 늘었군요. 분야로 따지면 추리 / 호러 등 장르 문학과 Food 및 구루메 관련 책을 많이 읽은게 눈에 띄고요. 방콕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좀 자극적이고 재미있거나, 주요 관심사를 찾아 읽기 마련이니 당연합니다.

그럼 언제나처럼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를 소개해드립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20년 베스트 추리소설 : "흉가" 

올해 읽은 작품 중 별점 3점 이상 작품은 21편입니다. 꽤 수확이 많았던 한해였어요. 읽은 작품 중 1/3 가까이가 수작 이상인 셈이니까요. 이중 올해의 베스트는 "흉가"입니다. 무섭고 재미난 이야기 전개도 훌륭하지만 복잡한 설정, 복선 회수, 결말까지 완벽했습니다. 욕설, 육두문자 없이 초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끌고간다는 점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요. 코로나로 외출도 못하는 더운 여름 휴가철에 탐독할만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아울러 올해 읽은 단편집 중에서 최고의 단편도 뽑아 보겠습니다. 별점 4점 짜리 작품으로는 아카가와 지로 "유령 열차" 수록작인 "비 옷을 입은 시체", 곤도 후미에의 "타르트 타탱의 꿈" 수록작인 "텅빈 카슐레", 스티븐 킹의 "악몽과 몽상 1" 수록작인 "돌런의 캐딜락", 마쓰모토 세이초의 "현란한 유리" 수록작인 "비와 2층", 미쓰다 신조의 "괴담의 테이프" 수록작인 "빈 집을 지키던 밤", 이사카 고타로의 "남은 날은 전부 휴가" 수록작인 "작은 병정들의 비밀 작전",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수록작인 "탐정 스페이드",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수록작인 "푸른 히아신스 향기", "뇌물과 부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별점 4.5점짜리 작품이 무려 2편이나 있어서 4점 정도로는 후보가 될 수 없었어요. 별점 4.5점을 받은 작품은 미야베 미유키의 "희망장" 수록작인 "희망장"과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2" 수록작인 "두 개의 양념병"입니다.
이 중 베스트로는 "희망장"을 선정합니다. "두 개의 양념병"도 걸작이지만, 발표된지도 오래되었고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니 양보해도 될 것 같네요.

2020년 워스트 추리소설 : "너무 예쁜 소녀" 

많이 읽은 만큼 실망스러웠던 작품도 많았습니다. 75권 중 별점 2점 이하 작품이 28편이었거든요. 그래도 평균 이하 작품이 2/3를 넘었던 작년보다는 1/3에 불과하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졸작 오브 더 졸작, 정말로 종이가 아깝고 나무에게 미안한 별점 1점의 작품도 세 편이나 됩니다. "너무 예쁜 소녀", "콜드게임", "루팡의 딸"이 그 주인공이지요. 이 중 워스트로는 "너무 예쁜 소녀"를 선정합니다. "콜드게임"은 잔혹한 왕따 가해자를 편드는 듯한 설정이 문제였을 뿐 재미면에서는 나름 합격점을 줄 만 했고, "루팡의 딸"은 최소한 짧기라도 하니까요. "너무 예쁜 소녀"는 추리도 없고 스릴도 없는데 길기까지한 완벽한 시간 낭비였습니다. 끝까지 참고 읽은 저에게 상을 주고 싶습니다.

2020년 베스트 /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올해 기타 장르문학은 4권만 읽었는데 모두 고만고만했습니다. 별도의 베스트, 워스트는 없습니다.

2020년 베스트 역사 도서 :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올해는 아홉 권밖에 읽지 않았는데 일곱 권이 별점 3점 이상이었습니다. 별점 4점짜리 책도 "펜슬 퍼펙트",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의 세 권이나 되고요. 

이 중 베스트로는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을 꼽겠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알기 위한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해 줄 뿐 아니라, 재미도 있고 가격까지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워스트 역사 도서 : 

올해 역사 도서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가장 나쁜 별점이 2점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워스트로 꼽기에는 너무 가혹하기에, 올해는 별도로 선정하지 않겠습니다. 역사 도서는 대체로 선방한 한해였어요.

2020년 베스트 디자인 or Study : "명작순례" 

이쪽 분야 책들은 도판만 괜찮아도 평균 이상은 해 줍니다. 그래서 실패가 별로 없는 분야인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올해 유일의 별점 5점을 받은 책이에요.요. 수록된 글들도 좋고, 도판까지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을 사지 않으면 무슨 책을 사겠습니까.

2020년 워스트 디자인 or Study : 

올해 이 분야는 네 권 밖에는 읽지 않았는데 가장 나쁜 별점이 2.5점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워스트 도서가 없습니다.

2020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커리의 지구사" 

'지구사' 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식문화 역사 시리즈 중 한 권. 제가 읽었던 시리즈 중에서는 최고작입니다. 커리에 대한 역사는 물론, 세계화된 과정과 세계속 커리 요리들, 그리고 커리의 현재까지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커리를 좋아하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0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중세 유럽의 레시피" 

제목에서 기대했던 중세 유럽 요리에 대한 깊이있는 정보는 커녕, 최소한의 재미와 자료적 가치도 기대하기 어려운 별점 1점짜리 망작입니다. 담고있는 내용에 비하면 가격도 어처구니 없는 수준이고요. 저처럼 낚이는 분이 없으면 좋겠네요.

2020년 베스트 기타 도서 : "탱크의 탄생" 

올해 읽은 기타 도서는 특출나게 빼어난 책은 없었지만, 평균 이상 재미를 전해주는 괜찮은 책들이 제법 많았었습니다. "심리 조작의 비밀", "탱크의 탄생", "망령의 기억", "깃털 도둑"이 별점 3점을 받은, 그런 책들이었지요.

다 좋은 책이지만 이 중 베스트로는 "탱크의 탄생"을 꼽겠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라하는 '도감' 분야의 책으로 도판, 일러스트가 완벽하게 제 취향이었기 때문이에요. 이 책의 가장 단점은 제법 비싼 가격일 뿐이에요. 무기 도감을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마시길.

2020년 워스트 기타 도서 : "편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인데 장르 문학이 아니라 드라마라서 기타 도서로 분류하였습니다. 작위적이고 뻔한 전개도 감점 요소이지만 무엇보다도 핵심 주제 - 범죄자 가족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 에 대해 주인공의 심정을 공감하기 어려웠기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었어요.

2020년 베스트 Movie : "포드 V 페라리" 

많은 영화를 본 건 아니지만 올해 최고의 영화는 코로나 사태 직전 영화관에서 감상한 이 영화입니다. 남자 가슴을 뛰게 만드는 웅장한 화면과 음향 효과가 발군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영화관에서 보지 않았다면 베스트 영화는 다른 작품이 되었을거에요.

그나저나, 언제쯤 극장에서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2020년 워스트 Movie : "머더 미스터리" 

'정통 미스터리'라고 소개된 글에 낚였네요. 일견 전형적인 미스터리물로 보이지만, 실제 영화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코미디 영화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추리적으로 건질건 전무해요. 게다가 별로 웃기지도 않고요. 왜 애덤 샌들러를 요새 보기 힘든지 새삼 느끼게 해 준 망작이었습니다.

2020년 베스트 Comic - 추리 or 호러 : 

올 한 해는 "시마 코사쿠의 사건부"를 제외하고는 추리 or 호러 만화는 전통의 시리즈인 Q.E.D와 C.M.B의 후속권을 읽었을 뿐입니다. 이 중 최고는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 목록 36" 이었습니다. 수록작 중 "산의 의사"와 "카스미장 사건"이 아주 좋았기 때문입니다.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 

에피소드별로 살펴보자면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5" 수록작인 "도토리와 솔방울",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9" 수록작 "상상 속 살인", "Q.E.D iff 12" 수록작 "재생의 시간"도 별점 3.5점의 좋은 작품들이었습니다.

2020년 워스트 Comic - 추리 or 호러 : 

책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이 가장 낮은데, 이 정도로 워스트로 꼽기는 좀 가혹하지요. 그래서 에피소드로 워스트를 꼽아 봅니다.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7" 수록작인 "크로스로드"와 "종려나무 동전"이 별점 1점입니다. 동기, 트릭, 진상 모두 작위적이고 납득하기 어려운 졸작이었어요.

2020년 베스트 Comic - 기타 : "모로호시 다이지로 자선 단편집" 

2020년 만화들은 별점 3점짜리가 무려 14편이라서 많아서 한 편을 꼽기 어렵네요. 그래도 이 중에서 딱 한 편!을 꼽으라면 "모로호시 다이지로 자선 단편집"입니다. 다른 단편집에서 이미 접했었던 작품들이 많이 수록된 탓에 감점했을 뿐, 모로호시 다이지로라는 작가에 대해 잘 알려주는 좋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단편집을 읽어보지 않고 이 책만 읽는다면, 별점 4점도 거뜬했을거에요.

2020년 워스트 Comic - 기타 : "지구빙해사기" 

대가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이 불명예스러운 올해의 워스트네요. 당대를 풍미했던 오토모 가즈히로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야기, 설정, 작화와 분위기를 적당히 섞어 만든 하이브리드 혼종이나 결과물은 전혀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결산평 : 

이글루스 블로그 운영도 17년 째인데, 올 한해가 가장 변화도 많고 드라마틱했습니다. 다른 해에 비해 유별나게 책을 많이 읽기도 했고요. 그러나 코로나라는 예상치못한 질병 탓이라서 마냥 좋아할 수는 없네요. 코로나 때문에 많은 분들이 힘들어 하셨고, 지금도 계속 힘든 분들이 계실 터라 가슴도 무척 아프고요. 모쪼록 코로나 사태가 빨리 진정되어, 기쁜 마음으로 블로그 운영을 비롯한 일상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면 좋겠네요.

여러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는 원하시는 일 다들 이루시는 그런 한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이라면 남들이 관심갖지 않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정말로 세심한 분일테니 내년에는 더욱 잘 되실게 분명합니다. 사랑합니다~!

2020/07/12

붉은 눈 - 미쓰다 신조 / 이연승 : 별점 3점

붉은 눈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레드박스

여덟 편의 단편과 작가가 수집한 네 편의 짤막한 실제 괴담이 수록된 공포 단편집입니다. 즐겨찾는 블로거이신 각시수련님이 올리신 미쓰다 신조 관련 글을 읽고 구해 읽었습니다. 여름에는 역시 공포 소설이지요.

미쓰다 신조 작품은 많이 읽어보지 않았지만, 제가 읽었던 작품들과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모두 집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무섭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무서운 집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 이어, 이런 집에 대한 사는게 정상적인 무언가일리가 없다는 식으로 긴장감을 끌어냅니다. 그러나 다른 장편과의 차이점이라면, 수록작들 대부분인 작가이자 편집자인 미쓰다 신조가 직접 수집했거나 경험했던 '괴담'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현실감이 더해져 무섭고 오싹하기는 한데,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소설로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괴담으로서,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본연의 목적에는 충실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붉은 눈" 

초등학교 1학년 시절 동급생이었던 마도 다카리가 사람에게 찾아와 죽음을 선사하는 붉은 눈을 지닌 무언가였다는 이야기.

마도 다카리가 이상하다는 묘사에서 시작하며, '나'와 함께 마도 다카리의 집을 찾아갔던 요네쿠라가 병으로 죽어버리고, '나'를 무당이었던 할머니가 지켜주었다는 결말까지 전개는 일직선입니다. 사악한 뭔가에 씌워져, 친구는 죽고 나는 할머니 덕분에 겨우 살아남는다가 이야기의 전부니까요. 마도 다카리의 정체라던가 퇴치 방법이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반전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덕분에 읽기 쉽고, 전개도 깔끔하지만 그렇게 무섭지는 않더군요. 

고전적인 설정과 내용인 탓도 큽니다. 무언가에 씌워지면 죽는다는 설정부터 고전적이잖아요? 꿈을 통해 마도 다카리가 근처에 있다는걸 느끼게 되면, 그 사실을 빨리 다른 사람에게 알리라는 결말은 "링"과 흡사하고요. 마도 다카리가 이상한 아이라는게 초반부터 드러나서 별다른 의외성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괴담 성격에는 충실하나 그렇게 무섭지 않고 새롭지도 않아서 감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어린 시절 경험했던 괴담'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괴담 사진 작가" 

월간지 부편집장인 '나'는 특집 기사 때문에 사이언 마스든이라는 괴기 사진 작가 사진집을 출간한 출판사 트레빌을 찾았다. 그리고 업무 후 귀가 중에 트레빌에서 일하는 미즈키 요리코라는 여성을 만나 모쿠노 요시미라는 사진 작가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모쿠노 요시미의 자택을 찾는데, 그 곳은 화마가 휩쓸고 간 흉가였다....

괴기 사진 작가가 온갖 괴기스러운 사진을 찍고 현상하다가, 그 현장에 있던 '무언가'를 집으로 데려온 꼴이 되어 결국 본인은 죽고, 여동생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광인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오래전, 사진이 처음 도입될 당시에는 사람들이 사진 찍기를 기피했었습니다. 사진이 영혼을 빼 내어 간다는 소문때문에요. 간단한 조작으로 사람을 그대로 종이로 옮겨버리니 그런 소문이 돈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지요. 만약 이 소문이 소문이 아니라면, 피사체의 영혼과 사진이 찍히는 장소에 있는 '무언가'도 빼 내어 갈 수 있다는 뜻도 될 테고요. 이런 발상을 토대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그리 많이 보지는 못한 설정도 신선했고 모쿠노 요시미의 자택, 비서를 자칭하는 여동생, 자택 가득한 모쿠노 요시미의 사진들 모두 괴기스러운 묘사로 가득차 있어서 흥미진진합니다. 모쿠노 요시미와 그 여동생의 정체가 드러나는 클라이막스까지의 전개도 깔끔해요. 

편집자 미쓰다 신조 시점의 경험담으로 쓰여졌다는 것도 공포를 배가시킵니다. 엄청난 현실감을 가져다 주는 덕분이죠. 그 중에서도 '나'가 발견한 모쿠노 요시미는 등신대 사진을 잘라놓은 종이 인형에 불과했고, 여동생이 '나'를 이 곳으로 끌어들인 미즈키 요리코였다는게 드러나는 클라이막스 묘사는 백미입니다.
또 이 클라이막스 반전을 위해 앞 부분에 뿌려놓은 복선, 단서도 적절하고 공정합니다. 번역자가 공들여 이 단서를 설명하기 위해 이름 부분만 공들여 한자를 병기하여 표기한 탓에 이게 뭔가 의미가 있다는 티가 물씬 났던건 문제였지만요. 어차피 한국 독자가 해석하기는 무리였고요.

그런데 미즈키 요리코가 '나'를 이 집으로 끌어들여 뭘 어떻게 하려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미즈키 요리코는 그 저택에서 어떻게 되는건지, '나'가 저택에 남아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등도 마찬가지고요. 속 시원하게 밝혀진게 전무한 탓에 완성된 이야기로는 약간 부족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공포만큼은 확실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영상화에 적합한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미쓰다 신조 시점의 현재와, 괴기 심령 사진을 찍다가 데려온 무언가가 여동생에게 씌워져 파멸하는 모쿠노 요시미 시점을 오가며 모쿠노 요시미에게 씌워진 무언가가 현재, 과거에서 동시에 '개화'하는 장면을 클라이막스로 만들면 아주 좋을 것 같아요.

"내려다 보는 집"

어린 시절, 교차로 벼랑 위쪽에 지어져 '나'를 내려다 보는 느낌을 가져다 주었던 집이 있었다. 흉가는 아니었지만, 지어진지 오래 되었지만 아무도 사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 집 때문에 기묘한 느낌을 받던 나와 친구 K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집을 조사해 볼 계획을 세운다. 마침 함께 있었던 K의 어린 동생과 함께 4~5명의 아이들은 집 수색에 나서는데...

작가 미쓰다 신조로 보이는 '나'의 어린 시절 있었던 추억 괴담으로 "괴담 사진 작가"와 마찬가지로 작가 본인이 경험했었던 정말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식의 묘사가 탁월하며, 작품과 잘 어울립니다. '내려다 보는 집'에서 K의 동생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여자를 만나 사람 얼굴이 그려진 유리 구슬을 받고 놀았다는 상황도 상당히 공포스럽고요.

그러나 '공포'를 전해줄만한 실체는 친구 K의 동생의 이상한 행동과 증언 뿐이며, '내려다 보는 집'에 대해서는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빍혀지는게 없는 결말은 많이 답답합니다. 이야기의 현실감을 유지하면서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결말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듯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조금 기묘한 이웃집을 무단 침입한 아이들 이야기 정도니까요. 덕분에 현실감넘친다는 장점도 있지만.... 별점은 2.5점입니다.

"한밤중의 전화"

공포 소설가인 '나'에게 새벽 2시에 전화가 걸려왔다. 어린 시절 친구가 5년전 취한 채로 찾아갔던 심령 스폿에 방문해 있다는 전화였다...

친구인줄 알고 긴 통화를 이어가는데, 알고보니 친구가 아니고 이형의 존재였다는 내용의 이야기로 전형적인 괴담입니다.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건 고전 괴담 '너는 내가 아직 니 엄마로 보이니?'와 다를게 없지요.

하지만 심령 스폿인 묘지에 있는 괴상한 집에 대한 묘사 - 코 앞에 늪이 있는, 연한 빨간색에 집 안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고 온갖 불쾌한 쓰레기가 가득한, 창무하나 없으며 대문의 위치도 기묘한, 기분 나쁜 그림이 붙어있고 안 쪽에서 회반죽이 칠해져 입구가 봉해진 - 는 아주 빼어납니다. 전작들인 "화가", "기관"는 물론 이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 모두 마찬가지인데, 미쓰다 신조는 공포스러운 공간을 그려내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는게 분명합니다. 불현듯, 미쓰다 신조가 개포동 은마 아파트를 보고 그에 대한 글을 쓰면, 그 자체가 바로 괴담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단지 무서운 공간 묘사에 그치지 않고 '내가 그쪽으로 가면 되니까.' "다 왔다.."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도 섬찟합니다. 뻔하지만 이야기로서도 잘 완결되기는 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나방 남자의 공포"

'나', 즉 미쓰다 신조는 S 지방의 어느 온천 마을에 머무르던 중, 온천 여관 뒷 쪽에 있는 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산책을 나섰다. 그 길의 끝에서 이런저런 정체 불명의 폐가와 폐허를 목격하고 돌아온 뒤, 자정이 넘은 시간 노천탕을 찾았다가 낯선 남자를 만났다. 그는 여관 선선대 부인의 오빠라면서, 미쓰다 신조에게 과거 '재나방 남자'라는 살인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데...

재나방 남자 사건은 가즈오라는 소년이 기묘하게 살해된 사건입니다. 낯선 남자는 당시 용의자로 몰렸지만 곧바로 풀려났다고 합니다. 곤도 순경의 증언 덕분에요. 그는 가즈오와 헤어진 5분 뒤, 곤도 순경과 스쳐 지나갔는데 곤도 순경은 시체가 발견된 연못 옆에서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연못을 지나 반대쪽 길로 향하던 순경은 두부 장수 오누키와 마주쳤고, 바로 뒤 오누키가 시체를 발견했고요. 그래서 낯선 남자는 범인이 될 수 없다는게 증명된 것입니다.

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게 이야기의 핵심이기 때문에, 여관 뒤 오솔길에서 발견한 폐허와 박쥐 남자, 재나방 남자라는 기묘한 살인귀 이야기가 덧씌우져 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본격 추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인 미쓰다 신조의 추리도 대담하며 그럴듯합니다. 범인은 곤도 순경이거나, 낯선 남자일 것이라는 추리인데, 낯선 남자가 범인일 경우 가즈오의 시체를 감춘 트릭을 파헤치는게 특히 인상적이에요. 낯선 남자는 사건 당시가 절분이라 가지고 있던 콩을 곤도 순경이 나타나기 직전 순간적으로 시체 위에 뿌린겁니다. 비둘기를 불러모아 시체를 숨기 위해서라는데, 주어진 정보 제공도 공정한 편이며, 실현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살짝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현실감있게 잘 포장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괴담으로서의 역할도 그리 빠지지는 않습니다. 결말에서 낯선 남자는 살인귀 재나방 남자로 오래전 죽었으며, 지금도 가끔 노천탕에 출몰한다는 마무리는 뻔하지만 확실해서 이야기 완성도 측면으로는 마음에 들고요.

한마디로 공포와 추리 양쪽 모두 기본 이상의 재미를 전해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뒷골목의 상가"

미쓰다 신조는 E씨에 대한 으스스한 이야기를 "백사당" 안에 녹여내려다가, 무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오싹한 바람 소리와 함께 하는 누군가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쓰다 신조는 원고 속 E씨 체험담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 뒤 취재원이었단 야카게 씨가 E씨가 죽었다며, 괴담에 대한 섬뜩한 원고를 보내오는데...

도입부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모두 E씨 시점의, E씨가 겪었다는 괴담입니다. E씨가 어린 시절 야반도주하여 숨어 살게 된 교토 '뒷골목' 집에서 공포스러운 존재와 마주한다는 내용이죠.

어떤 거리, 공간이 특정 시간이나 특정 조건에서 이계와 연결되어 그 곳의 이형과 조우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많습니다. 러브크래프트 작품에서도 보아왔던 내용이니까요.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어떤 조건에서 이계와 연결되는지, 이형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형이 노리는게 무엇인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냥 공포스러운 존재로만 묘사될 뿐입니다. 공포의 핵심도 E씨가 '지이이이이잇.....' 소리를 내는 소름끼치는 여자에게 쫓기는 과정이고요.

하지만 이 여자가 E씨의 뒤를 쫓고, 집 안으로 숨어들어오는 과정의 묘사는 가히 일품이라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겨우 드나들 틈새를 지나 뒤로 나타나서 뒷쪽 창틀을 움켜쥐는 장면 묘사는 특히 압권이었습니다.
E씨는 아직 그 곳에 살고 있다는 말로 시작되는데, E씨 원고의 결말은 E씨가 그 곳에서 이사를 갔다는 모순 가득한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아예 아무 것도 드러내지 못할 바에야, 모든 걸 이렇게 모호하게 풀어내는 방법도 나쁘지는 않네요.
괴담으로서는 최고 수준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맞거울의 지옥"

미쓰다 신조가 젊은 시절 교토에 있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할 때, 도쿄 출장 중 캡슐 호텔 화장실에서 맞거울을 보며 에도가와 란포의 "거울 지옥"을 떠올리다가 다른 손님을 만났다. 그도 괴담을 좋아해서 의기투합한 미쓰다 신조는 함께 호텔 로비에서 캔 맥주를 나누며 괴담으로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그 남자의 동생과 맞거울에 얽힌 괴담을 듣게 되는데...

거울과 거울 사이, 맞거울의 무한 공간에는 귀신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작품. 작품은 그다지 의외성이 없지만 겹쳐진 거울 속 어딘가에 있는 귀신이 거울을 건너뛰면서 나이를 먹고, 결국 나 자신의 모습으로 거울 앞에 나타난다는 클라이막스는 아주 근사합니다. 소설로도 멋지지만 영상화한다면 정말 환상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클라이막스만으로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죽음이 으뜸이다. 사상학 탐정" 

사람에게 나타나는 죽음의 상, 즉 사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슌이치로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사상이 보이지는 않지만 죽음 그 자체로 보였기에 슌이치로는 쫓아내지 않았다. 이누마는 자기처럼 괴담을 좋아하는 친구 가이즈카, 요코가와, 이와세와 함께 한 밤중에 인터넷 상에 유명한 오드아이 소녀가 얽힌 괴담이 있는 폐가를 찾았다가, 친구들이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이 단편집 표제작이자 첫 번째 작품인 "붉은 눈"의 마도 다카리와 그녀의 집이 또 다시 등장하는 작품. 그리고 친구들과 무모한 심령 스폿 탐험을 나선다는 설정은 "한밤중의 전화"와 같습니다. 거기에 주인공이 사상학 탐정 슌이치로이고, 마도 다카리가 거주하는 흉가에 대한 오싹한 묘사까지 곁들여져 있으니 가히 미쓰다 신조 월드를 집대성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집대성 작품답게 오싹한 묘사는 역시나 대단합니다. 무너져가는 집을 탐험하는 과정부터 오싹해요. 불당 안의 불상 눈이 파내어져 있었다는 묘사가 특히 기억에 남네요. 무엇보다도 차로 돌아가던 4명에게 닥친 공포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폐가 방문을 거절하고 차 안에 남아있던 이와세가 "그 여자애가 왔다. 계속 차에 들여보내달라고 애원했다. 그래서 들였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지요. 등골이 서늘해 집니다! 친구들이 절규하기 시작했다는 직후 묘사도 오싹합니다. 대체 무엇을 본 걸까요?

본인 경험 괴담이 아니라 소설적인 구성을 갖추어서 그런지 기승전결 구조도 좋습니다. 슌이치로를 찾아온 이누마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또는 그에 가까운 상태였다)는 결말이 특히 좋아요. 이누마에게 사상이 보이지 않은 이유, 슌이치로의 고양이 보쿠가 이누마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가 합리적으로 설명되니까요.

중반부의 오싹한 장소를 뒤지는 전개는 담력 시험 수준이라 특별한건 없고, 마도 다카리의 정체와 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죽게 만드는지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건 여전하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4/03/07

심판의 날 - H.G 웰스 / 도서출판 불새 : 별점 2점

심판의 날 - 4점
H. G. 웰스/도서출판불새

"타임머신"으로 잘 알려진 SF소설의 선구자 H.G. 웰즈의 작품. 국내 미발표 SF를 엄선하여 번역 출간하는, 용기 있는 출판사 도서출판 불새의 e-book 단편집으로(날아오르라 주작이여~!) "심판의 날", "시간탐험대", "에피오르니스의 섬"이라는 총 3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재미는 없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SF 소설이 아니라 신학, 풍자소설이 아닌가 여겨지는 작품 성격 탓입니다. 소개된 홍보문구와 작가의 이름에서 기대한 결과물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에서 "목요일의 남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조금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심판의 날"은 최후의 날에 벌어지는 신의 심판을 우화처럼 풀어낸 작품인데, 아무리 착한 인물이라도 흠결이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장황하게 펼쳐 놓았을 뿐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시간탐험대"는 흉가로 이사 온 박사가 온갖 수상한 행동을 벌여 마을 사람들이 그를 타도(?)하기 위해 들고 일어나지만, 박사가 그들 눈앞에서 사라진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타임머신을 발명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결말은 제목으로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박사가 살던 저택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의 괴이한 진상(사실은 박사가 범인일지도 모른다?)은 나름 여운을 남기지만, 반전으로 보기엔 약하고 설명도 부족해서 아쉬웠고요. 아울러 전개 역시도 너무나 장황하고 지루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에피오르니스의 알"은 그나마 재미 면에서 제일 괜찮았어요.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에피오르니스의 알을 발견한 모험가가 무인도에 표류한 뒤 알이 부화하고, 새가 커지면서 모험가를 위협하여 어쩔 수 없이 죽여야만 했다는 내용인데 나름 그럴듯했습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대국과 식민지의 관계가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이렇게 별점 평균은 1.6점이나, 국내 초역되었다는 것과 역사적 의미를 더하여 별점은 2점으로 하겠습니다. 권해드리기는 조금 어렵습니다만 불새 출판사의 건투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04/08/30

검은 집 - 기시 유스케 / 이선희 : 별점 4점

검은 집 - 8점 기시 유스케 지음/창해

쇼와 생명 보험 교토지사에 근무하는 와카쓰키 신지는 어린 시절 형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고모다 시게노리라는 보험 가입자가 불만을 토로하며 방문을 요청했고, 고모다의 "검은집"에 방문한 신지는 고모다의 아들 가즈야가 자살한 시체를 발견하였다. 가즈야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점을 느끼는 신지는 보험금 지급을 미루고 사건을 독자적으로 조사해 나갔다. 그러면서 점점 공포스러운 과거의 여러 사건들을 발견하지만, 그에게 점차 위험이 닥치는데....

이전부터 읽고 싶었었지만 절판되어 구하지 못했던 기시 유스케의 "검은집"이 양장본으로 재간되었길래 잽싸게 구입했습니다.
제목만 보았을 때에는 "검은집"이라는 흉가를 무대로 한 호러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가즈야의 죽음을 토대로 고모다와 그의 아내 사치코를 조사하며 알게되는 공포스러운 과거와 과거 죽음들의 실체, 그리고 신지와 그 주변인물들에게 닥치는 위협과 죽음을 세련된 문장으로 묘사하고 있는 서스펜스 스릴러물이더군요.

주인공에게 위기가 찾아오면서부터는 전형적인 스릴러-호러 물의 전개를 답습하지만 스티븐 킹이나 클라이브 바커류의 소설처럼 유령이나 초현상,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평범하면서 주위에 얼마든지 있는 보통 사람들 중에 "감정이 없는 인간 (싸이코패스)"을 악역으로 설정하여 인간의 광기와 잔인성을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 다른 평범한 호러소설과 구분됩니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 꺼리낌없이 살인을 반복하는 "싸이코패스"들이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하게 묘사됩니다. 유령이나 괴물보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잔인함의 극한으로 치닫는 전개가 더 무섭네요.

이러한 현실적인 공포를 뒷받침하는 작가의 필력도 장난이 아닙니다. 특히 중반 이후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작가의 능력에는 정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어요. 덕분에 서스펜스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유명한 작품들에 비해서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또다른 악몽을 예감하며 전율하는 신지의 모습을 그리며 끝맺는 엔딩도 인상적이었고요.

구태여 단점을 찾자면, 신지의 과거에 있었던 형의 죽음과 그에 따르는 괴로움을 묘사하는 부분은 불필요했다고 생각되며, "감정이 없는 인간", 즉 "싸이코패스"라고 현대적으로 정의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아주 약간 지루했습니다.

그래도 워낙 문장이 흡입력있고 전개가 흥미진진해서 쉬지않고 손에 잡으면 단숨에 읽어버리게 되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생명보험"이라는 사회적 장치를 토대로 발생할 수 있는 현실에 기반한 실질적인 공포와 위험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카드빛으로 인한 신용 불량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살인을 소재로 다룬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와 유사한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사실적인 소재로 극도의 서스펜스를 만들어 내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높이 평가할만하죠. 별점은 4점입니다.

조금 자료를 찾아보니 이미 영화화가 되었는데 소설을 거의 각색없이 찍어도 일정 수준 이상의 비쥬얼과 공포를 충분히 전해줄 것 같아 한번 구해볼 생각입니다.

PS : 그래도 신지의 애인 메구미의 말처럼 "인간은 근본적으로 모두 선하다" 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게 훨씬 세상 사는데 도움이 되겠죠? 아직 세상은 살만한 곳이니까요.^^

2021/04/03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 정운현 : 별점 5점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 10점
정운현 지음/개마고원

친일파를 조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서론 이후,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았던 친일파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친일 행각과 후일담까지 소개해주는 인물사 서적입니다. 크게 관리, 경제인 (갑부), 지식인, 언론인, 작가 및 예술가, 종교인, 직업적 친일분자라는 7개 분류로 소개됩니다.

서론에서 소개되는, 타국 친일파 처벌 사례와는 다르게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국립묘지에 안장되거나 3.1 문화상을 수상한 친일파가 있을 뿐더러 심지어 친일파의 이름을 딴 상까지 있다는 우리나라의 실태는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뒤이은 친일파들의 매국 행각도 화려하기 짝이 없더군요. 이 친일파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선대의 재산에 힘입어 해방 이후 한 자리씩 차지했던 후손들의 이름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부분 반성은 커녕 친일 재산을 되찾으려는 등 뻔뻔함으로 일관했으니까요. 최소한 '친일을 해서 잘 살고, 독립 운동을 해서 못 사는' 나라가 아님을 지금이라도 증명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반대로, 친일 행각을 반성했던 소수는 이 점을 감안해서 대접해야 햘 테고요. 윤서인같은 인간들이 망발을 내뱉는 사회가 된 건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역사는 바로잡고 바로 세워야 할 겁니다.

그럼 몇 명의 인상적이었던 친일파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김대우입니다. 3.1 의거에 참여할 정도로 애국 청년이었지만 감옥살이 이후 변절하여 일제하 도지사를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했던 친일파이지요. 반민특위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는데, 1960년 총선에 출마했다는 뻔뻔함이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이끌며 수백명의 독립군을 체포, 사살하는데 기여했던 김창영이 반민특위에서 고작 '공민권 정지 3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것도 어이를 상실케 했습니다. 당연히 능지처참을 해도 마땅한 악질 친일파인데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김창영이 다른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해방 이후 권력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이 정도로 죗값을 치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김희선은 원래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독립운동 경력이 있었지만, 알고보니 변절자로 상하이 임시정부 밀정 노릇을 했다니 기가 찹니다. 

유명했던 친일경찰 노덕술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독립 운동 사건만 취급했던 악질 고등 경찰 출신으로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될 당시, 무려 34만 1천원이라는 도피 자금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조선인의 고혈을 빨아먹은 악질이었지요. 게다가 친일파에 의한 반민특위 테러 음모에도 가담하고 있었다니, 이 정도면 바로 사형을 시켰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 등으로 수감 후 얼마 되지 않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네요. 그 뒤 제 1사단 헌병대장을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6.25 때 김창룡 특무대장에 의해 구속된 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조금 늦었지만 제대로 된 응징을 받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조선 제일 갑부의 한 명이었던 공주 갑부 김갑순 이야기도 볼 만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관직에 있으며 개발 정보를 빼돌려 땅 투기하여 치부한 인물이거든요. 단순 치부였다면 모를까, 재산 증식 및 인맥 확보를 위해 친일파들과 적극적으로 사돈 관계를 맺었으며 본인 스스로도 일본 밀정 노릇을 하기까지 했다네요. 그나마 그 많던 재산은 해방 이후 다 날리고, 제실도 흉가가 되었다니 조금 위안이 됩니다. 이런 정보로 치부한 공직자들도 모두 패가망신하면 좋겠네요. 

영덕 갑부 문명기도 친일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에 골몰했던 친일파인데, 1935년에 일제에 10만원을 헌납해 비행기를 기증했다는 일화가 재미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니 복엽기!더라고요. 일제에서 누군가 문명기 돈을 빼돌린 모양인데, 전쟁에 도움이 별로 되지 않았을거라 생각하니 기분은 좋습니다. 문제는 문명기의 손자 문태준이죠. 국회의원을 비롯한 이런저런 공직에 종사하며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니까요. 연좌제처럼 공직을 박탈할 필요야 없지만, 할아버지 재산이 친일재산국가귀속 결정이 나자 이를 취소해달라는 취지로 소송을 냈던 할아버지 못지않은 파렴치한이라는건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민족운동가로 알려졌던 이선근은 열렬한 친일파였던건 물론이고 박정희 시절 유신 독재 찬양에 전두환까지 찬양했던, 그야말로 아부의 달인이더군요. 국립묘지 안장에 아들과 손녀들이 모두 떵떵거리며 산다니, 지금이라도 국립묘지 파묘는 물론 그의 정체와 후손들 모두 널리 알리는게 당연합니다.

조선에 있었던 신사에서 신직, 즉 신관으로 일했던 조선인 이산연 이야기는 신기했습니다. 아무리 할 게 없어도 그렇지.... 덕분에 이산연은 일제 치하에서는 일본인처럼 대접받았다고 합니다. 해방 후 행방불명된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는 것 하나만 위안거리네요. 

조선 불교 총 본산 조계종이 일제 강점기 때 생겼으며, 이를 주도했던 첫 종무총장 (총무원장) 이었던 불교계 거두 이종욱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방 후 국회의원 등을 지내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을 뿐더러 그 아들은 동국대 대학원장까지 지냈기 때문입니다. 친일해서 후손이 잘 사는 세상을 더 이상 만들지는 말아야 하잖아요. 

1급 친일파 조병상 이야기는 좀 놀라왔어요. 직업이 아예 친일이었는데, 학병 출정을 독려하며 자기 아들도 5명 중 3명이나 출병시켰다니 그 충정이 대단합니다. 아들들이 다 생환해서 모두 출세했다는게 좀 쓰린데, 조병상 본인은 6.25때 실종된 걸로 추정된다는게 위안입니다.

친일파 정보는 물론, 일제하 공직자 관등과 같은 볼만한 자료도 많습니다. 최상급은 일왕이 친히 임명하는 친임관으로 조선 내에는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두 명 뿐이고 그 다음이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순서입니다. 주임관 이상이 고등관이고요. 지금의 5급 공무원 이상에 해당하는 직위며, 군수는 판임관에서 승진하거나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현재의 행정고시) 합격자가 임용되었다고 합니다. 즉, 군수는 5급 공무원 수준이니 이 정도면 친일파로 보는게 타당하겠죠. 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권한과 재량이 더 많았고, 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면 당연합니다.

좌옹 윤치호의 친일 논리도 곱씹어볼만했습니다. 윤치호가 친일파가 된 건, 미국 유학시절 겪었던 인종차별, 그리고 개화기부터 잠재되어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 통치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 그리고 105인 사건 때 겪었던 가혹한 고문이 합쳐진 결과물이라는군요. 이후 윤치호는 '황인족 담합론'과 강자에게 약자가 순종해야 평화의 기틀이 마련된다, 일본의 스코틀랜드가 되는게 조선이 살 길이라는 등의 등의 사상적 기반과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다는데, 이렇게까지 변명거리를 만들어 낸게 더 웃깁니다.

민족대표였던 최린은 변절하여 친일을 한 이유를 '늙은 노모에게 불효를 할 수 없어서 망명도, 자살도 못하고 일본에 항복했다'고 고백했는데, 차라리 이게 더 합리적이지요. 최린은 반민특위 법정에서 진솔하게 반성과 후회를 보였다니, 같은 친일파라도 인간적으로는 더 나은 인물이었다 생각됩니다.

강화도 조약 체결을 도운 친일파 1호 김인승, 여자 밀정 배정자 같은 경우는 친일의 이유가 나름 합당해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 좀 애매했습니다. 김인승은 조선 말기, 지역 수령과 의견충돌 끝에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탈주했던 인물이거든요. 공권력과 싸워서 패배하여 도망친 뒤, 자신을 버린 공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은 셈입니다. 따지고 보면 조선판 오자서인 셈이지요.
배정자의 일생은 더 기구합니다. 아버지가 대원군 실각 때 한 패로 몰려 처형된 뒤 유랑생활을 하다가 관기로 팔렸고, 그 뒤 중이 되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뒤 김옥균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되었다거든요. 조선에 대해 증오심을 품는 것도 당연하고, 일본에 충성을 바친 이유도 타당해서 친일파라고 매도해야 할 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고요. 결과야 친일인데, 그 이유는 수긍할 만 하니....

이렇게 친일에 대해 여러가지를 깨닫게 된 좋은 독서였습니다. 박흥식, 김활란 등 익히 잘 알려진 친일파가 함께 소개된다거나, 그 외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친일파들이 많은건 조금 아쉽지만, 책의 취지 상 쉽게 빼지는 못했을거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 빠진 친일파가 세간에서 잊혀질까 두렵네요. 역사 바로세우기 측면에서 모든 분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제가 읽은 구판은 절판되었지만, 아래의 책으로 재간되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 정운현 지음/인문서원

2022/02/05

마가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3.5점

마가 - 8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사건 진상과 진범 등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마는 새아빠의 동생인 삼촌과 여름 방학을 보내게 되었다. 재혼한 엄마가 임신 후, 미국 이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탓이었다. 삼촌의 별장인 고무로 저택은 오래전에 부자 고무로 도쿠야로부터 받은 선물로, 실종되었던 도쿠야의 손자 히사시를 찾아 주었던 보답이었다. 그러나 별장은 왠지 모르게 섬뜩한 장소였다. 별장 뒤 숲에서는 아이들이 여러 명 실종되었었고, 근처 별장에서는 참극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유마는 별장에 머물면서 어린아이 형상의 누군가가 3층 다락방에 머물고 있다는걸 눈치챘다. 결국 '세이'라는 아이를 만난 뒤, 세이의 꼬드김으로 유마는 혼자 들어가면 안된다는 사사 숲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유마는 한 남자의 추격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되는데....

저주받은? 귀신들린? 저택을 무대로 한 호러의 명수 미쓰다 신조의 작품. 제가 읽은 작가의 유사 소재 작품만 해도 "흉가", "백사당", "사관장", "기관" 등이 있습니다. 대부분 평균 이상의 수작이었던걸 보면 '명수'라는 호칭이 과한건 아니겠지요.

작품의 특징이라면 다른 작품들과는 목표하는 독자 연령대가 낮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영 어덜트 판타지를 연상케하는 표지에서부터, 초등학교 6학년이 '잘 모르는 넓은 저택'과 '넓은 숲, 동굴' 에서 펼치는 모험 활극에 가까운 내용, 그리고 피가 튀기는 고어물도 아니고, 아주 무섭지도 않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호러 작가로서의 솜씨가 사라진건 아닙니다. 유마가 저택 안을 배회하는 정체 불명의 무언가와 말없이 암투를 벌이는 광경, 이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사 숲과 나무 동굴 속에서 벌어지는 목숨을 건 추격전 등의 묘사는 공포심을 충분히 자극시켜 줍니다. 

작가 특유의 호러와 범죄, 추리 소설과의 결합도 성공적입니다. 특히 초, 중반까지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반전을 통해 '범죄 소설'로 전환되는 구성이 인상적이에요. 반전을 통해 삼촌이 유마를 돌보려고 했던게 아니라, 유괴를 했던 거라는게 드러나거든요. '삼촌이 삼촌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한 것 같았다'는 유마의 느낌, 밤중에 삼촌이 기묘한 목소리로 유마와 사람들의 이름을 표준어로 말하는 연습을 했던 것등은 모두 공포스러운 연출이라고 여겼었지만, 사실 전부 유괴라는 범죄에 대한 단서였던 겁니다! 별장으로 향할 때 삼촌이 해 주었던 말, 삼촌이 별장에 유마가 머물 줄 알고 미리 책을 사 두었던 이유, 어머니와의 통화 등도 알고보니 모두 단서와 복선이었고요.

고무로 히사시를 비롯한 과거 유괴 사건들도 사실은 삼촌이 일으켰었고, 이 때 사사 숲에 아이를 숨겨두면 아이들이 유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는걸 눈치채서 범행을 계획했다는 진상도 이야기와 잘 맞아 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10년 전, 고이즈미 마사토는 실수로 죽이고 말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도 깔끔했고요. 유마가 저택에서 만났던건 고이즈미 마사토의 유령이었던 거지요. 유령도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수행합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과거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유마에게 알려주는 식으로요. 

이렇게 등장하는 설정, 소재를 허투루 소비하지 않고 모두 이야기에 녹여내는 것도 돋보였던 장점으로, 유마가 이계 공간을 오갈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능력 덕분에 삼촌의 공범이었던 유괴범에게 쫓기다가 혼자서 사사 숲 이계 공간에서 무사 귀환할 수 있었으며, 삼촌도 유마를 아예 죽일 생각이었다는걸 명확하게 독자에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다소 뜬금없었던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적절히 활용한 셈이라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확실히 대가는 다른 법이네요. 무엇보다도 맨 마지막 한 줄의 반전, 유마가 옥상에 RC카를 두고 온건 실수가 아니었다는건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유마에 의해 삼촌이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최후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여러가지 치밀함을 발휘하여 유마를 옭아매던 삼촌의 최후치고는 너무 허무했으니까요. 세이의 유령이 뭔가 도움을 줄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고요. 

추리적으로도 호러와 결합은 잘 하고 있지만, 정교함은 부족한 편입니다. 유괴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몸값을 받는 부분입니다. 이전 고이즈미 마사토 사건에서는 마사토의 새아버지로부터, 마사토가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돈을 받았으니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유마의 어머니는 그럴리가 없으니, 깜쪽같이 돈을 받아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몸값을 받는 계획이 조금이나마 등장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건 유괴물로는 큰 단점입니다. 

범행 후 삼촌이 유마를 죽이고 사체를 유기했더라도, 관리인이 유마를 목격한 이상 수사가 이루어지면 삼촌이 빠져나가기는 힘들었을거라는 점도 문제입니다. 관리인도 살해할 생각이었을까요? 그렇다 해도 조카가 유괴당한 후 실종되었는데 그 삼촌은 갑자기 생긴 거액의 돈으로 사업상 위기를 해결했고, 삼촌 소유의 별장이 있는 별장지 관리인이 살해당했다면, 경찰 수사가 시작될 경우 용의선상에 올라 철저한 조사를 받는건 당연했을겁니다. 여러모로 허술한 범죄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드네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한 편이며, 읽다보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공포는 덜하지만, 범죄 소설로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분량도 적당하고요. 호러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미쓰다 신조 월드 입문자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24/05/03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 미쓰다 신조 / 권영주 : 별점 2점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 4점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괴기소설가 도조 겐야가 괴담 수집 취재를 위해 향한 가가구시촌은 신사를 맡은 '백'의 '가미구시가', 뱀 신을 모시는 '흑'의 '가가치가'라는 두 가문 세력으로 나뉘어진 곳이었다. 도조 겐야가 도착한 직후, 가가치가 무신당에서 수행승 젠토쿠 도사가 교살당한 사건에서 시작하여 가가치가 어른들이 잇달하 살해당했다. 사체는 모두 허수아비 복장을 하고 있었다.
사건들이 일종의 밀실같은 상황에서 벌어진 탓에 수사는 미궁에 빠졌지만, 도조 겐야는 추리쇼를 펄쳐 진범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데....


"처음부터 생각해 보지 않고 괴이를 받아들이는 건 인간으로서 한심한 일이야. 그렇다고 인지를 뛰어넘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건 인간으로서 오만한 거고. 세상의 모든 일은 흑백을 명확히 가릴 수 있는게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으로서 생각하기를 포기하면 안 돼."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 제 1작. 시리즈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을 읽고나서 14년만에 읽게 되네요. 
550페이지를 넘기는 대장편으로 일본의 괴담을 섬찟하게 그리면서, 괴담과 관련된 괴사건이 일어나지만 이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추리해서 해결한다는 아이디어를 잘 살린 작품이지요.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전개와 설정 모두 나무랄데 없습니다. 후속권이 계속 이어지는 인기 시리즈가 된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에요.

일단 미쓰다 신조 작품답게 괴기 현상에 대한 묘사가 좋습니다. 어린 시절 렌자부로와 함께 모험을 떠났던 렌타로가 사라졌던 사건이 특히 굉장했어요. 귀기어린 구구산의 분위기, 기묘한 계단을 통해 이어지는 당집과 지하실, 뒷 계단을 통해 나왔을 때 뒤를 쫓아온 괴이 등이 렌자부로의 시점으로 설명되는데, 한 편의 괴담으로도 완벽한 수준이었습니다.

오래전 벌어졌던. '신령 납치'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시즈에 실종 사건은 '시즈에가 스스로 몸을 숨겼던게 아니었을까?'라는 추리에서 시작해서, 마을을 덮친 괴이한 연쇄 살인 사건까지 추리해 내는 도조 겐야의 추리도 볼거리입니다. 등장하는 괴담, 괴이 현상에 가까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수수께끼 중 주요한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지요가 지장갈림길에서 목격했던 사기리 생령의 정체는?
  • 누가 숨어있기 힘들었던 나루터에서 가쓰토라를 어떻게 살해했는지?
  • 구니하루 찻잔에 독을 넣고, 잠깐 사이에 피해자를 허수아비처럼 꾸민 방법은?
  • 기누코를 살해하고 오솔길에서 사기리, 렌자부로, 도조 겐야 눈을 피해 달아난 방법은?
이에 대해서 도조 겐야는 한 개가 아닌 여러 개의 추리를 내 놓고, 실패를 반복하는데 왠지 모르게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내 놓는 추리들도 아예 말이 안되지 않고요. 예를 들어 맨 처음 '범인은 사기리 할머니의 시종인 구로코다!'라는 추리를 내 놓습니다. 구로코는 젠토쿠 도사 범행 당시 무신당 안에 있었고, 구니하루 범행 때에도 현장에 있었으며 맨 처음 장소를 이탈했기에 옆 방에 숨어들 수 있었고, 기누코 사건 때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터부시하는 허수아비님 속에 숨어 렌자부로의 눈을 피했으며, 이는 구로코가 마을 사람이 아니어서 가능했다는 등의 내 놓는 근거 역시 꽤 탄탄한 편입니다. 이는 구로코의 정체는 렌자부로의 형 렌지로라는 추리로 이어지고요. 이 역시 나름대로 근거를 잘 제시해줍니다.
구구의례라는 의식을 행하며 할머니가 조제했던 약을 먹은 사기리가 좌반신에 마비가 남고 잘 걷지 못하게 된걸 보고, 그녀가 뇌경색에 의한 시야협착 증세를 가지고 있어서 왼쪽을 돌아볼 때 뒤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추리, 그리고 범인이 사기리의 쌍둥이 언니 사기리였다는 진상도 괜찮았습니다. 처음부터 사기리는 2명이 아닐까라는 단서를 계속 던져주고 있기도 하고요. 애초에 도조 겐야의 취재 노트, 렌자부로의 수기와 함께 작품을 전개하는 축인 '사기리의 일기'가 주인공인 동생 사기리가 아니라 언니 사기리의 일기였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알고보니 모든게 허수아비 속에 숨어 있었던 사기리 시점이었던 거지요.
아울러 언니 사기리가 모든 범행을 허수아비 속에 숨어서 행할 수 있었던건, 그녀가 구구의례 뒤 허수아비님과 같은 산신님이 되었기에 가능했다는 핵심 트릭이야말로 괴담과 추리가 잘 결합된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이외에도 젠토쿠 도사를 살해한 범행은 이모 사기리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아서 특별한 수수께끼가 있다고 보여지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다른 범인이 있었다는게 드러나며 이 사건에서의 목격 증언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된다는 점에서 잘 짜여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작답게 부족한 부분도 느껴집니다. 일단 첫 살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는 상당히 지루합니다. 가미카쿠시 촌을 양분하고 있는 흑, 백 세력의 필두 가가치가, 가미구시가 양 가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가족 관계를 엄청나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탓입니다. 문제는 이 설정은 미쓰다 신조 작품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신선하지도 않다는 점입니다. 
우선 '뱀 신'을 모시면서 떠받드는 가가치가의 묘사는 "백사당", "사관장", "흉가" 등 다른 작품 속 가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가치가 무신당에서 행해지는 의식 역시도 비슷하고요. 
물론 이건 이 작품이 작가의 초기작이라는 점을 놓고 볼 때 다소 부당한 비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불필요한 내용이 과하다는건 분명합니다. 마을 이름의 유래 등을 통한 마을 마귀 신앙 설명처럼요. 사건과 별로 관계가 없는 부분을 모두 쳐 내었더라면, 200페이지는 충분히 줄일 수 있었을겁니다. 

도조 겐야의 캐릭터도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외부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는 시골 마을을 찾아온 긴다이치 코스케와 별다를게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만화적으로 독특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이렇게 무색무취한 것도 문제네요. 게다가 괴담을 무척 좋아한다는 설정은 관련된 설명이 늘어지게 만들 뿐이라 오히려 감점 요소였다 생각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사건은 풍성하고, '누가 죽였는지?'를 밝히는 후더닛 측면으로는 볼만하나 본격 추리물에서 가장 중요한 트릭면에서는 아쉽습니다. 범인이 빠져나갈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던 허수아비 속에 숨는 트릭인데, 이는 이미 도조 겐야로부터 그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렌자부로 등이 마을 사람들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부인해서 흐지부지 넘어가버리고 말았지요. 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극단적 상황에서 심리적 거부감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던것 아니었을까요? 렌자부로와 마을 사람들 의견으로 불가능하다고 쉽게 단정지을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설령 도죠 겐야는 그랬다쳐도, 경찰이 이를 쉽게 납득하고 넘어간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사기리가 떠내려보낸 주물을 쌍둥이 언니가 몰래 다시 어깨에 얹은 이유라던가, 기타 등장하는 괴이와 괴담 모두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단점도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렌타로 실종 사건입니다. 할아버지가 찾으러 갔을 때 사당이 사라진 이유에 대한 도조 겐야의 추리는 그럴싸 했지만, 누가 왜 렌타로를 납치했는지?는 결국 밝혀지지 않으니까요. 이도저도 아니게, 어정쩡하게 정리된 느낌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아이디어는 돋보이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어차피 같은 설정이라면 "백사장", "사관장"같은 후기작을 읽는게 더 낫습니다. 외딴 지역에 전승되는 전설, 저주와 엮인 사건에 대한 추리 소설이라면 "흑사의 섬"도 나쁘지 않고요.

2006/02/12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민승남 : 별점 3점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 6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민음사

"낯선 승객"과 "리플리" 시리즈로 유명한 추리계의 거장 중 한명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여사의 단편집. (패트리샤라고 하지 않은 것도 좀 재미나네요)

순문학계열 출판물로 유명한 민음사에서 출간되어 의외라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이해가 됩니다. 추리쪽 성향이 덜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추리나 서늘한 맛을 기대했지만 의외로 순문학적인 작품들로 구성되었던 로얄드 달의 "당신을 닮은 사람"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로얄드 달의 단편집은 애초 생각과는 다르게, 정말로 순문학에 가까운 글들이 많았던 반면에 이 작품집은 기대한 만큼의 서늘함을 제공해 주는 작품이 많다는 차이가 큽니다. 대체로 "인간의 본성"을 극한으로 끌어내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는데 몇몇 작품은 읽으면서 감정이입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게 될 정도로 서늘하고 잔인한(?) 이야기들이더라고요. 
그 밖의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들도 단순하지만은 않고, 여사만의 독특한 기묘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도대체 다른 어떤 작가가 바구니짜기나 노인 입양같은 이야기로 이런 극한으로 치닫는 심리 묘사를 그려낼 수 있을까요?
일상 생활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소한 사건과 살인과 같은 큰 사건 모두 시종일관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짧은 길이의 작품 안에 담는 솜씨는 정말 기가 막힙니다. "지적인 암살자(?)" 리플리의 창조주답네요.
이야기들의 배경과 설정이 모두 다르며 다양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건 여사의 다채로운 생활 환경을 반영한 것 같은데, 이러한 세부 디테일들도 재미있었습니다.

범죄나 추리에 가까운 이야기는 많지 않아 추리쪽 장르로 구분하긴 어렵지만, 여사의 작품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책입니다.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단편집 3권도 빨리 구입해서 읽어보고 싶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개인적인 추천작은 "검은 천사가 지켜보다"와 "노인 입양"입니다.

작품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고양이가 물어온 것
한적한 시골에서의 한때를 보내던 허버트 부부와 손님들 앞에 키우던 고양이가 물어온 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우연찮게 발생한 사건에 휩쓸리게 되면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잘 그려낸 작품.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한 소품이지만 순간적인 분노와 폭발하는 심리묘사는 여사님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2.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뉴요커들 한 무리가 자신들의 친구지만 왠지 거리가 멀어지고 서먹해진 친구인 에드먼드에게 짖궂은 장난을 치는 음모를 꾸미는데,그 친구는 직장과 아내에 이어 목숨마저 잃게 된다...
한 집단의 이지메와 같은 행동을 통해, 무심코 저지른 행동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린 작품. 일종의 집단 광기를 일상생활속에 녹여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라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맨 뒤의 누군가가 죽은 다음에 찾아오는 일상에 대한 짤막한 묘사도 서늘합니다.

3. 바구니 짜기의 공포
광고 대행사에서 매채 담당자로 일하는 다이앤은 별장에서 한때를 보내던 중 우연히 자신에게 바구니 짜기의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서서히 광기로 빠져들게 되는데..
정말로 기묘한 작품입니다. 한 여성이 우연한 기회에 자신에게 바구니 짜기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것 때문에 서서히 자신의 통제권을 잃는다는 내용이거든요.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일 수 있는데, 소재가 너무 독특해서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결말은 의외로 현실적이라 조금 시시했어요.

4. 검은 천사가 지켜보다
시카고의 골동품업자 리 맨드빌은 자신의 어머니가 있는 양로원 비용때문에 고향집을 팔기 위해 몇년만에 고향에 찾아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이미 몇년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종의 사기극이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렸다는게 독특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흡사 피해자처럼 보이게 하는 전개도 기묘하면서도 색달랐고요. 여사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5. 네 삶을 경멸해
20살이 된 랠프는 록 밴드 생활을 하며 생활고를 겪어서 아버지에게 원조를 요청하지만 의절당한다.
우리나라에도 있을법한, 방탕한 자식과 아버지간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짤막한 드라마인데 아들 랠프의 심리묘사가 재미난 작품이었습니다. 결말도 인상적이었고요.

6. 에마 C 호의 꿈
남자들만 있는 요트 에마 C 호에 한 미녀가 표류하다 구조된 뒤, 에마 C 호의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헝클어지기 시작한다...
한 작지만 공고한 집단 안에 찾아온 불청객으로 관계의 붕괴가 일어나는 작품. 기묘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7. 노인 입양
매킨타이어 부부는 자식도 없던 차에 우연하게 순수한 선의로 포스터 부부라는 노인 부부를 입양하여 돌보게 되는데...
순수한 선의로 진행한 일이 점차 자신들도 통제하지 못하는, 극단으로 치닫는 서늘한 전개에 박수를 보냅니다! 무엇보다도 결말이 대단한 반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무척이나 참신하고 독특해서 인상적이네요.

8. 로마에서 생긴 일
고위 공무원의 아내인 이사벨라는 남편에 대한 반감과 무료함으로 자신을 쫓아다니는 스토커 우고에게 남편 유괴를 의뢰하는데...
이탈리아를 무대로 미모의 여성과 자작 유괴극이라는 설정이 왠지 "크리시"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인간 관계의 얄팍함을 다루고 있는데 묘사와 디테일은 좋았지만 결말이 시시한 편이라 좀 아쉽더군요.

9. 양손의 떡
잘나가는 뉴요커 해리는 결혼을 앞두고 두 미녀와의 양다리 관계를 즐기며 두명중 한명을 선택하기 위해 저울질 하던 중 즉흥적으로 두 여인을 모두 초대하게 되는데...
한 남성의 독특한 심리를 보여주는 작품. 전혀 이상하지가 않고 자연스러워 보이게끔 하는 묘사가 좋았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해봄직한 고민과 실수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러한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10. 연
폐렴으로 죽은 동생 엘지를 그리워하며 월터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거대한 연을 만들어 날리게 된다.
동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 지나쳤고 그 때문에 비극이 발생한다는 내용.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한 소년의 환타지가 어른들에 개입에 의해 비극으로 끝나는 짤막한 동화라 생각됩니다. 소년 시절 환타지는 거의 다 비극이기 마련이지요..

11. 검은집
팀은 마을 술집에서 자주듣는 마을의 흉가 "검은집"의 정체를 밝히려는 시도를 벌이지만...
환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대한 이야기. 책 뒤에 해설에서 여러 정신분석 이론을 가지고 추가로 설명해 주는데 해설 쪽이 더욱 재미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