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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5

꽃밥 - 슈카와 미나토 / 김난주 : 별점 2점

꽃밥 - 4점
슈카와 미나토 지음, 김난주 옮김/예문사

공포 소설에 가까운 환상 소설 <<도시전설 세피아>>로 접했던 작가 슈카와 미나토의 단편집. 몰랐는데 나오키 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수상 이력이 중요한건 아니지만, 흥미가 생겨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전부 주인공 화자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오사카 변두리 어딘가에 있는 서민가 뒷골목을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웃간 소통이 많고, 아이들끼리는 항상 어울려 놀곤 했던, 우리나라로 따지면 <<검정 고무신>>이 떠오르는 그런 시대 그런 거리입니다. 이 거리에서 살아가는 소년, 소녀들이 접하게 된 다소 기이하고 환상적인 경험들이 그려지는데, 환생, 성불하지 못한 영혼과 같이 뻔한 것도 있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도 있습니다. 서정적인 묘사는 나오키 상을 수상할만하다 싶고요.

그런데 소년, 소녀가 묘한 경험을 한 뒤 한 뼘 성장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들이 겪은 경험은 기억에 깊숙한 자국을 남기기는 하지만, 그 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뻔하지 않아서 좋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래서 어쩌라고?'처럼 기승전결없는 단순한 추억담이에요. 그들이 겪은 기묘한 경험에 대한 설명도 거의 없고요.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으려던 작가의 의도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답답했습니다. 별다른 설명없이, 기승전결없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미쓰다 신조의 괴담물과 별로 다를게 없어요. 결말은 명확해서 괴담물보다는 이야기로서 완성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결말은 모두 추억과는 별 관계가 없어요....
무엇보다도 추리물도 아니고 호러도 아닙니다. 장르 문학 팬이 평가할만한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포일러를 알아봤자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지만요.

<<꽃밥>>
초등학생인 여동생 후미코가 열병을 앓고 난 뒤, 스물 한 살 때 살해당한 시게타 기요미라는 여자의 환생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기요미의 집을 보러가자고 졸라서, 나는 후미코를 데리고 히코네라는 동네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요미의 아버지가 딸이 살해당할 때 튀김을 먹고 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곡기를 끊었다는걸 알게 된 후미코는 기요미가 어릴 때 만들었다는 꽃으로 만든 밥을 기요미의 아버지에게 전해준다...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는 표제작. 후미코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초, 중반부는 사뭇 흥미진진했습니다. 후미코가 노트에 시게타 기요미 가족 이름을 써 둔 것, 어린 아이임에도 보이는 기묘한 행동들로 공포물스러운 느낌을 전해주거든요. 약간 <<오멘>> 같은 분위기였달까요?
아직 어리지만 여동생을 끔찍히 아끼고 가족으로 여기는 나의 모습을 통해서, 가족과 추억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 주는 것도 좋았어요. 이런 부분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하지만 환생임을 밝히고 난 뒤, 아버지에게 꽃밥을 전해준다는 최루성 가족 드라마스러운 전개는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너무 뻔했어요! 결말도 예상대로였고요. 뻔하고 무난한 탓에 점수를 줄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도까비의 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도쿄에서 오사카 서민촌으로 이사온 나 (유키오)의 주변에는 또래 친구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 중 모두가 은근히 따돌리던 한국인 형제가 있었다.
나는 형제 중 동생 정호와 친해졌지만 몸이 약했던 정호는 그 해 여름 죽고 말았다. 그리고 마을에 정호 귀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친구 중에 한국인 형제가 있다는 설정은 반가왔습니다. 도까비 라는 제목도 도깨비에서 따 왔으며, 귀신을 퇴치하기 위해 고추를 문에 걸어둔다는 한국적인 설정까지 등장하는 걸 보면, 실제 작가 유년 시절에 한국인 친구가 있었던게 아닌가 싶네요.
여튼 읽으면서, 정호 귀신 소동은 몸이 튼튼하고 강했던 정호의 형 준지가 자기들을 왕따시킨 마을에 대한 작은 복수극일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정호의 도까비가 소동을 일으켰고, 이유는 원래 정호의 몸 상태 - 몸이 아프고 약해서 방에만 있었다 - 때문이었다는건 의외였어요. 그래도 죽은 뒤 아프지 않고 자유로와져서 온 마을을 싸돌아다녔다는 건 꽤 신선했습니다. 유키오의 장난감으로 신나게 논 뒤, 드디어 성불하게 되었다는 결말도 그럴싸 했고요.

그러나 진짜 도까비였다는건 개인적으로는 별로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복수극으로 생각했던 탓입니다. 너무 추리, 범죄 소설에 뇌가 찌들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별다른 재미를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요정 생물>>
오사카 변두리 주택가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 소녀 세쓰코는 정체불명의 상인으로부터 '요정 생물'을 구입하게 되었다. 키우면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말처럼, 아빠의 부하로 잘생긴 훈남 다이스케가 찾아왔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엄마와 함께 도망가 버렸고, 세쓰코는 요정 생물을 죽여서 버렸지만, 그 뒤 아빠의 다른 부하 지로에게 강제로 몸을 빼앗긴 뒤,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


요정 생물이라는 기묘한 존재로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환상 소설에 가깝습니다. 요정 생물의 계란 프라이같은 생김새와 키우는 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 - 물은 사흘에 한 번 갈아줄 것. 물에 티스푼 절반 정도의 설탕을 풀 것. 강한 햇볕을 쬐면 안되고, 더운 곳에 두어도 안됨. 병을 바꿀 때는 같은 크기로. 병이 커지면 덩치도 커진다 - 등을 통해 <<그렘린>>과 비슷한 크리쳐 물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 알고보니 어린 소녀가 '성'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을 '요정 생물'과의 접촉에 직접적으로 비유하여 전개하는 작품이더군요.

디테일한 설정이 뒷받침된 요정 생물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었지만, 그 외에는 별로였습니다. 엄마와 다이스케가 불륜을 저지를거라는건 너무 뻔했으며, 성적인 소재를 일본 특유의 변태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낸 느낌이라 즐겁게 읽을 수가 없었어요. 세쓰코가 비참한 상황에 처한다는 결말도 와 닿지 않았고요. 왜 요정 생물이 세쓰코에게는 행운을 가져다 주지 않은걸까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참 묘한 세상>>
아키라의 백수 삼촌이 죽었다. 술에 취해 육교를 건너다 계단에서 떨어진 탓이었다. 그런데 장례식 후 화장터로 향하던 영구차가 멈춰버렸고, 관을 꺼낼 수도 없게 되었다. 영문을 모르던 어른들은 당황했는데, '나'는 삼촌의 애인이었던 가오루 씨를 부르면 될 것이라 여겼다...

장례식에서 난봉꾼 망자의 관 이동을 놓고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극. 사실혼 관계의 아내 외의 애인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는 반전은 살짝 깼고, 이 여자들이 모두 친구가 된다는 결말도 유쾌합니다. 제목 그대로 참 묘한 세상이에요. 하지만 딱히 재미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오쿠린바>>
40년 전, 나는 어린 나이로 '오쿠린바'인 먼 친척 할머니의 조수가 되었다. 오쿠린바는 주문으로 사람의 혼과 몸의 연결을 끊어 죽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임종하면서 나에게 주문을 알려주었지만, 나는 그 일을 잇지 않기로 결심했다.

줄거리 요약은 단순하지만 실제 작품에서는 오쿠린바가 주문을 외워 사람을 죽게 만드는 일화가 여러개 소개되며, 주문에 대한 디테일한 설정도 갖추어져 있습니다. 주문은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듣게 만들어야 효과가 있으며, 중간까지 들려주면 살아있지만 나머지를 듣게되면 바로 죽는다는 등으로요. 
하지만 일화들은 모두 비슷비슷했고, 설정도 작 중 그렇게 효과적으로 쓰이지 못합니다. 그냥 오쿠린바 할머니의 또다른 회고로만 설명되며, 주인공 화자 미사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재미있고 극적인 드라마로 끌고 나갈 수 있었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함 그 자체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얼음 나비>>
수십년 전, 오사카 변두리 거리 동네에 살았던 나(미치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왔다. 친구가 없는 탓에 묘지에 놀러갔다가 18살이라는 누나 미와와 친해졌다. 그녀는 아픈 동생을 구하기 위해 머나먼 타지로 나와 일하고 있다고 해다. 그리고 겨울에도 살아남는 신비한 나비 이야기를 해 주었다....

겨울에도 살아있는 나비를 통해 어린 시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아픈 사랑(?)과 사라져버린 추억을 형상화한 작품.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신비로운 상황이라는게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요. 겨울 나비를 보고 미와와 헤어지는 미치오의 모습은, 청춘의 환영인 메텔을 떠나보내는 테츠로의 모습과 겹쳐지기도 합니다. <<은하철도 999>>의 서정적인 버젼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하지만 겨울 나비에 대한 묘사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습니다. 미와가 유령이 아니라면 몸을 팔고 있을 거라는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결말은 둘의 파국이라는게 너무 뻔해서 의외성도 없었고 진부했습니다.
환상 소설 측면으로 보아도 '겨울 나비' 자체는 실존하는 것이기에 딱히 언급할게 없네요. 마지막에 함께 본 나비는 환상일 수 있지만, 그건 단지 관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상징일 뿐입니다. 특별히 장르 문학적으로 바라볼 부분은 없어요.
그 외에도 미치오가 왜 왕따를 당하는지 설명되지 않고, 미와와의 이별 후 급작스럽게 마사히코가 친구가 되자고 이야기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럴 바에야 왕따 설정은 빼고 그냥 외로운 아이였다고 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3/09/16

[소설가 감수] 미스터리 소설 추천 인기 랭킹 33선 (2023년 최신판)

NTT에서 운영하는, 리서치 설문조사와 접속수를 바탕으로 모든 장르의 랭킹을 망라한 종합 랭킹 사이트인 goo 랭킹에서 선정했던 랭킹입니다.
전부 33편의 작품이 소개되는데, 랭킹을 감수했다는 소설가 OO씨가 선정한 작품 5개만 소개해드립니다. 상세한 내용은 원문에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까지 결말을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스릴은 미스터리의 묘미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의 세계에서도 미스터리는 인기 있는 장르이지요. 재미있는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이번에는 소설가 OO 씨의 감수를 받아 '읽고 싶다! '라고 생각되는 작품을 추천해 드립니다. 수상작과 영상화된 작품, 그리고 선택 방법도 함께 소개하니 꼭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설가가 알려드립니다! 미스터리 소설을 고르는 방법
취재 협조 소설가 OO : 엔터테인먼트 계열의 작품을 출간하고 있는 소설가. 일반 소설,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을 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작품도 창작에 활용하기 위해 열심히 보고 읽는다.
OO 씨에게 미스터리 소설을 고를 때 중요한 포인트를 물어보았다.

POINT① :
각종 랭킹 상위권이나 문학상 수상작은 수준이 높다! 그런 작품인지 체크!
화제작이나 실력파 작가의 작품을 우선적으로 읽고 싶은 분들에게는 '고노미스', '서점대상', '나오키상' 등 각종 미스터리 랭킹 상위권 작품이나 문학상 수상작을 추천합니다. 매년 진행되는 랭킹에 오른 작품들은 수준이 높고 읽기 쉬운 작품도 많기 때문입니다. 저도 발표될 때마다 체크해서 소설을 쓸 때 참고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골라 읽다 보면 '최고의 미스터리 소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작품들의 줄거리를 확인하고 자신에게 맞는 작품을 골라보세요.

POINT②
깜짝 놀랄 만한 트릭과 논리가 충분히 전개되는 본격 미스터리 작품인지 확인하자.
미스터리라고 하면 예상치 못한 트릭이나 논리적인 구조가 재미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본격 미스터리 대상'은 본격만을 다루는 상이므로 트릭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POINT③
숨 막히는 전개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스펜스 작품인지 확인하자
서스펜스 요소가 있는 작품은 독자로서 비일상을 맛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경찰 소설이나 모험 소설, 하드보일드 소설 중에서 미스터리 요소가 있는 작품이 많으니 그 중에서 고르는 것도 추천합니다.

POINT④
사람이 죽는 이야기가 싫다면 '일상의 미스터리'를 다룬 작품인지 확인하자.
'사람이 죽거나 흉악한 범죄가 일어나는 이야기는 싫다'는 분들에게는 '일상의 미스터리'를 다룬 소설을 추천합니다. 가게나 학교 등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수수께끼와 궁금증을 풀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여운이 남는 작품이 많은 것도 특징입니다.

편집부
미스터리 소설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나 '어려울 것 같다'는 이유로 피했던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이나 선택 포인트가 있을까요?

OO 씨
사회파 미스터리나 서스펜스는 트릭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외로 쉽게 읽을 수 있어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요코야마 히데오의 '64' 등은 좋은 작품입니다.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와 같은 가벼운 미스터리도 쉽게 다가갈 수 있고요.
그중에서도 첫 책으로 추천하고 싶은 것은 아야쓰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입니다. 본격 미스터리 붐의 시발점이 된 작품으로, 다양한 정수가 응축된 작품이거든요. 이 작품을 발판 삼아 점점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면 좋겠습니다.

편집부
반대로 '대부분의 작품은 다 읽었다'는 미스터리 소설 마니아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의 종류와 선택 방법이 있나요?

OO 씨
미스터리 계열의 신인상은 많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스타일이나 설정 등의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고, 보다 폭넓게 미스터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참고로 최근 트렌드 장르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입니다. 독자적인 세계관을 만들어 그 안에서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으로, '시인장의 살인', '젤리피쉬는 얼어붙지 않는다' 등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소설가 OO 씨 추천! 미스터리 소설 5선
<<까마귀의 엄지>>
사기가 생업인 중년의 두 남자의 이야기. 점차 동거인이 늘어나면서 인생을 건 거대한 계획이 시작된다. 충격적인 전개와 감동적인 결말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걸작.
'고노미스'의 단골손님인 미치오 슈스케의 첫 나오키상 후보작으로, 제62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상쾌한 느낌의 초인기 작품을 읽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OO 씨 comment :
사기꾼인 중년 2인조가 동거인들과 함께 사기 계획을 세웁니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에 '당했다!'는 놀라움과 함께 짜릿한 쾌감도 느낄 수 있는 명작입니다.

<<13계단>>
가석방 중인 청년과 정년을 앞둔 교도관 두 사람은 10년 전 살인사건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조사를 하게 된다. 범인으로 지목된 인물은 범행 당시의 기억이 없고, '계단을 올라갔다'는 단서만 알고 있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무고한 남자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데뷰작이자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작품. 2003년에는 영화화되기도 했다. 서스펜스를 충분히 맛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OO 씨 comment
사형수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해 조사를 시작하는 주인공 교도관. 단서 몇 개와 사형 집행까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과연 그는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숨 막히는 서스펜스와 함께 독서 후의 만족감도 큰 작품입니다.

<<제 3의 시효>>
F현 경찰 수사 제1과를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집으로, 등장하는 형사들의 개성이 강하고 경찰 내부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장감 넘치는 걸작. 제16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후보작으로 드라마화되기도 했다.
독서 후의 충격과 고양감을 맛보고 싶은 분이나 형사 드라마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
OO 씨 comment :
살인사건의 공소시효에 얽힌 '제3의 공소시효'를 파헤쳐 나가는 형사들. 시효 성립 직전의 범인을 체포할 수 있을까? 경찰소설이자 단편소설의 대가인 저자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단편소설집입니다.

<<최후의 증인>>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인 주인공이 불리한 상황에 도전하는 법정 미스터리 작품. 점차 밝혀지는 새로운 사실과 충격적인 전개에 빠져들게 된다. 2015년에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시리즈도 방영되었으니, 소설을 읽고 흥미가 생겼다면 확인해 볼 것.
OO 씨 comment :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가 활약하는 법정 미스터리. 반전이 있는 법정 장면은 물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데, 꼭 시리즈 전부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하늘을 나는 말>>
사람이 죽지 않는 '일상계 수수께끼'의 명작으로 여대생과 만담가가 '일상 속 수수께끼'를 추리해 나가는 연작 단편집. 살인 사건이나 흉악 범죄와 같은 무서운 소재가 아닌, 일상에 숨어 있는 위화감을 풀어간다. 미스터리 추리의 짜릿함을 맛보고 싶은 분이나 따뜻한 소설을 읽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두 사람의 여유롭고 차분한 분위기와 곳곳에 등장하는 라쿠고(만담) 이야기 등 전체적으로 느긋한 느낌이지만, 그 안에는 무거운 내용의 이야기나 인간의 무서움을 느끼게 하는 묘사도 존재.
OO 씨 comment :
여대생과 만담가가 일상 속에 숨어있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본격 미스터리로, '일상계 수수께끼' 장르의 선구자격 작품입니다. 살인 사건 등 흉악 범죄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미스터리이면서도 안심하고 이야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2005/09/22

부드러운 볼 - 키리노 나츠오 / 권남희 : 별점 3점

부드러운 볼 - 6점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남희 옮김/황금가지

홋카이도 작은 바닷가 마을의 소녀 카스미는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찾기위해 가출 후 도쿄로 나오고 직장 사장과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그러나 여전히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그녀 앞에 남편 회사의 주요 거래처 인사 이시야마가 나타나고 두 사람은 곧 불륜 관계에 빠진다.
카스미와 이시야마는 두 사람의 밀회를 위해 대담하게도 두 가족이 함께 떠나는 여행을 계획하는데, 장소는 홋카이도 시코츠 호반의 어느 별장. 가족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기던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둘의 관계를 위해서라면 아이를 버려도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다음날 카스미를 꼭 닮은 다섯 살짜리 큰딸 유카가 거짓말처럼 실종된다.

생사도 알 수 없는 아이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두 가족은 물론 별장을 통해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이 크고 작은 사건에 휩쓸리게 된다. 마침내 남편과 남은 딸에게서마저 "탈출"한 카스미는 우연히 아이 찾기에 도움을 주겠다고 연락한 시한부 인생의 암 말기 전직 형사 우츠미와 함께 고향에서 본격적으로 유카를 찾기 시작한다.

별장 관련 인물들을 통해 사건 당시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유카의 종적을 다각도로 추적하는 동안 서로에게 누구보다 필요한 존재가 되는 두 사람은 우츠미의 죽음에 임박해서야 서로를 통해 모든 사건과 의문의 실마리를 찾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얼굴에 흩날리는 비" 라는 작품을 썼던 일본 여류 추리작가 기리노 나츠오의 작품입니다. 20세기 마지막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카피가 먼저 눈에 들어오네요. 동호인들 사이에서 평가가 좋길래 내심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유카의 유괴사건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된 소재이며, 여기에 더해 주인공 카스미의 불륜이라는 상황과 여러 색다른 등장인물들을 등장시켜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이에 따르는 가정과 개인의 붕괴, 그리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는 일종의 성장기에 가깝기 때문에 추리소설보다는 순문학 드라마로 보입니다. 특히나 우츠미에게 점차 죽음이 다가오는 종반부로 갈수록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네요.
이외에도 사건 자체를 풀어나가기 위한 동기나 단서도 이야기 중에 거의 던져주지 않고, 다양한 성격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입체적으로 흥미롭게 묘사되는 주변 인물들 역시 탐정역의 우츠미가 묻는 단순한 질문에 이미 과거에 경찰에게 말했던 사실 그대로의 답변만 해 줄 뿐이라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 우츠미도 적극적인 사건해결을 위한 질문보다는 사건에 대한 "감상"을 주로 물어보기 때문에 전개 과정에서 증언을 조합하여 어떤 새로운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는 점도 이 작품이 추리소설이 아님을 입증합니다. 단순히 주인공들의 상상과 작가에 의한 일방적 사실 묘사에 의해 사건이 덜컥 종결될 뿐 범인이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는 결말까지도 그러하고요.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하고 재미도 있습니다. 나오키 상을 수상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글의 묘사가 뛰어나기도 하고 여류 작가다운 꼼꼼함이 작품 전체에 묻어나오는 것도 좋았고요. 그러나 추리적인 뭔가를 기대한 저로서는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묘한 여운을 주는 나름 매력적인 소설임에는 분명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매니아보다는 감성적인 순문학 취향의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PS : 원제가 더 의미심장하고 좋은데 왜 저렇게 단순하고 직설적인 번역 제목으로 출간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다행히 번역 자체는 괜찮은 편이지만... 

* 2013년 3월 6일 수정하였습니다. 제목이 이제 바뀌었네요.

2007/10/06

얼어붙은 송곳니 - 노나미 아사 / 권영주 : 별점 2점

얼어붙은 송곳니 - 4점
노나미 아사 지음, 권영주 옮김/시공사

어느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갑자기 한 남자가 자연 발화,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기동수사대 소속 오토미치 다카코는 사건 해결을 위한 특별팀에 소속되어, 15년차 고참 형사 다키자와와 파트너가 되어 수사를 시작했다. 다카코가 다키자와의 냉대를 참아가며 수사에 임하던 중, 어떤 남자가 개에 물려 죽었는데 개의 이빨 자국이 자연발화한 시체의 발목 상처와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다키자와-다카코 컴비는 급작스럽게 "개"를 추적하는 임무를 맡게 되는데...

그동안 바빠서 통 책을 읽지 못했네요. 오랫만에 읽은 신간입니다. 저번 추석때 고향에서 가져온 책인데 읽는데 너무 오래 걸렸네요.

사실 제가 일본 추리소설을 고를때 가장 경계하는 타이틀은 "나오키상 수상작"입니다. 아무래도 추리관련 상이 아니고, 문학적인 부분을 많이 고려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수상작들이 추리소설이라고 해도, 추리보다는 그 외의 묘사나 전개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수상했다고 보여집니다.
이 작품도 역시나! 그러한 예상에 조금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체 자연 발화라는 소재와 그 트릭은 나름 과학적이고 기발했으며, 개를 훈련시켜 살인 도구로 쓴다는 것도 잘 전개하여 설득력이 넘치지만 작품에서는 이러한 트릭이나 추리적 요소가 별로 크게 부각되지는 않습니다. 범인의 동기 등 기본적인 요소까지 쉽게쉽게 넘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단순하고요. 이런 추리적인 부분보다는 주인공의 심리묘사나 다른 부분에 훨~씬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물론 심리묘사는 나오키상 수상작답게 좋기는 합니다. 특히 작가의 늑대개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묘사도 재미있었고요. 그러나 지나치게 길어서 지루했고, 추리소설의 기본적인 측면, 즉 추리의 과정에 있어서는 불필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솔직히 짜증날 정도였어요... 결국 사건의 해결은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기에 더더욱 그러했고요. 
또한, 중반까지 보여지는 다카코와 다키자와의 충돌이 어느 순간 갑자기 늑대개에 대한 집중적 묘사로 전환되는데, 이는 주요한 심리적 갈등의 해소를 명쾌하게 정리하지 않는 느낌을 줍니다. 한마디로 어정쩡했어요.

즉, 제 기대와는 사뭇 다른, 추리물이라고 보기에는 미진한 작품입니다. 구태여 장르를 구분하자면 "수사물" 정도는 될 수 있겠지만 요것도 애매한게 결국 "수사"에 의해 단계별로 밝혀지는건 "늑대개"의 추적에 한정되어 있고, 인체 자연 발화 트릭은 과학 수사팀에서의 보고 결과를 토대로 밝혀집니다. 사건은 목격자들의 제보, 또는 범인의 증언에 의해 해결되고요. 이래서야 수사극의 탈을 쓴 오토미치 다카코의 성장 심리 드라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습니다. 오토미치 다카코 시리즈 첫 작품이라고 하는데 후속 작품은 별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일본 소설 특유의 심리묘사를 즐기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추천할 만 하지만, 추리물 독자에게는 지나치게 긴, 약간은 지루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제 취향은 전혀 아니었어요.

2007/03/16

죽음의 유역 (삼중당 미스테리 명작 20) - 미나까미 쓰도무 / 김성일 : 별점 3.5점


석탄 채굴이 주 산업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폐광이 되어 몰락해가는 광산도시 시노에서 어느날 59명이라는 광부가 지하에 매몰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사고와는 별개로 손가락 한개, 그리고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강둑에서 타살당한 시체로 발견되고 피해자가 손가락의 주인임이 밝혀진다. 후쿠오카에서 파견나온 경위 이와다는 탄광 사고의 격심한 혼란 와중에서도 사건 수사에 집중하며 특히 피해자가 가지고 있던 새 조롱과 카나리아를 추적하여 하나씩 단서를 포착해 나간 뒤 결국 놀라운 사건의 진상을 알아낸다.

전후 사회파의 대표 작가인 미나카미 츠도무(책에는 미나까미 쓰도무 라고 나와 있긴 하지만)의 작품.

사회파 대표 작가답게, 광산과 광부들의 처참하고 위험한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인간의 치졸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설득력 넘치게 그리고 있는 정통적인 사회파 추리 소설입니다. 순문학 작가 출신으로 나오키 상을 수상한 이력답게 문학적 정취가 넘치며, 세밀하면서도 세련된 묘사로 손에 잡힐 듯한 현장감을 전해 주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작품에서 벌어지는 2개의 큰 사건, 즉 광산 매몰 사건과 살인 사건을 교묘하게 연결하여 완성도 높은 이야기로 구성한 솜씨가 놀랍습니다. 작가가 드러내고 싶은 사회파적인 테마는 광산 매몰 사건으로 다루면서도, 추리적인 얼개는 살인사건으로 진행시키다가 결말에서 하나로 이어내는데 억지스럽지도 않게, 매끄럽게 마무리합니다.
이와다 경위의 우직한 수사로 하나씩 단서가 밝혀지며 결국 범인이 드러나는 전형적인 사회파 추리소설 전개를 보여주는데, 첫 단서인 카나리아가 너무 결정적이라는 것과 중반 이후 용의자가 특정된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진상이 놀라운 수준이라 추리적으로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용의자들 자백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결말, 그리고 불필요한 수상한 인물의 묘사 같은 것은 약간 아쉬우나 아무래도 좀 오래된 작품이니 납득할만 하고요.
결론내리자면 무척 재미있게 읽었고 사회파 추리소설로도 완성도 높은, 그야말로 한 시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동시기의 사회파 거장인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과 비교해 본다면,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회적 이슈를 드러내면서도 굉장히 치밀한 묘사로 대표되는 문학적 서정성을 지니고 있기에 충분한 경쟁력과 가치가 있다 생각됩니다. 다른 작가들에 비해 국내에 소개가 많이 되지 않은 것이 이해가 안되는데, 작가의 대표작이라는 나오키 상을 탄 "기러기의 절"이나 이 작품과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기아해협"이 국내 출간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이 작품 역시 번역이 많이 부실해서 제대로 작품의 "맛"을 느끼기 힘들었는데, 더더욱 제대로 된 출판물로 다시 나와 주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래된 작품이라 구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책인데 귀중한 책을 선뜻 제공해 주신 이영진님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4/08/07

맨발의 청춘 - 후지와라 신지 / 김현영 : 별점 1.5점

맨발의 청춘 - 4점
후지와라 신지 지음, 김현영 옮김/눈과마음(스쿨타운)

제목 그대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희대의 표절작 "맨발의 청춘"의 원작인 표제작 외 9편, 총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집입니다. 50~60년대를 무대로 하여 힘들고 아픈, 심리적으로 연약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많은데, 이색적인 문체와 분위기는 제법 인상적입니다. 2차대전 직전, 직후의 생활상, 시대상에 대한 묘사도 괜찮고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아빠진 고색창연한 설정이 가득하며, 등장인물과 내용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단점이 너무 큽니다. 전개도 급하게 정리 후 마무리되는게 많고요. 이는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닌 요약된 시놉시스를 보는 느낌을 전해 주어서, 짤막한 작품들임에도 불구하고 읽는게 힘들었습니다. 작가의 유명세와 수상 경력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가 부실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개인적으로는 관심이 많았던 작품이기에 완독했다는 기쁨은 있지만 딱히 구해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Oldies이기는 하지만 Goodies는 아니었습니다.

10편 중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던 3편을 짤막하게 소개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무정한 여자"

1952년 나오키상 수상작으로 남편이 있는 술집 여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땅끝까지 걸어갈 것처럼 앞으로 나아갔다"라는 묘사로 자뭇 웅장한 맛까지 느껴지는데, 솔직히 나오키 상을 탈 수준의 작품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하지만, 교도소에서 곧 출옥할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신을 떠납니다.. 라는 너무너무너무나 낡아빠진 설정 탓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렸습니다.

"맨발의 청춘"

원제는 "진흙투성이의 순정". 수록작 중 거의 유일하게 순정파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야쿠자 꼬붕 겐이 우연히 구해준 재벌이자 화족의 딸 마사미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죠. 당연히 영화하고도 거의 똑같습니다. 너무나도 전형적이라서 지금 읽으니 솔직히 좀 웃기더군요. 그래도 "동반 자살한 여자는 완전한 처녀의 몸이었다"라는 마지막의 약간의 반전에는 좀 놀랐습니다. 그야말로 플라토닉 러브였네요.

"잘가요"

가정이 있는 여자와 남자의 짤막한 일탈을 다룬 작품인데 내용과 전개 모두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불륜이라는 감정에 휩싸이는 과정이 상세한 심리묘사로 잘 그려지며, 일상으로 돌아가는 마무리까지 제법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 하나만큼은 시간이 흘렀어도 기본적인 작품 내의 설정이나 감정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2023/10/15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운을 즐기자! '기묘한 맛'의 신구 단편 모음집



honto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천. 대부분 국내 소개된 작품들입니다. 원조이자 대표작인 "특별 요리"를 추천하지 않았는데, 국내 출간되지 않은 마지막 작품 대신 "특별 요리"를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4/08/10

열린 어둠 - 렌조 미키히코 / 양윤옥 : 별점 2.5점

열린 어둠 - 6점
렌조 미키히코 저자, 양윤옥 역자/모모

"회귀천 정사"로 유명한 렌조 미키히코의 단편집. 원제는 "夜よ鼠たちのために (밤이여, 쥐들을 위해)".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983년에 출간된 나름 고전(?)으로 일본에서도 꽤 오래 절판 상태였었는데,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2014년 판에서 '복각(재출간) 희망! 환상의 명작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한 덕분에 2014년에 복간된 이력이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아래와 같이 극찬하는 인터뷰와 글을 남겼을 정도로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 미스터리의 재미 중 가장 큰 것은 무엇인가 하면, 역시 마지막의 반전, 결말의 의외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편에서 그걸 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단편집은 모든 작품이 놀라운 반전 구조를 그립니다. 생각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전개를 실현한 작품들입니다. 마치 네거티브 필름이 포지티브로 바뀌는 것처럼, 결말에서 흑백이 뒤바뀝니다. 모든 작품에서 완전히 속아버릴 수 밖에 없어요. 전후 미스터리 단편집 중에서, 저는 이 책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표제작입니다. 미스터리라는 성격상, 스토리를 말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되므로 삼가겠습니다만, 제가 만약 단편을 쓴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an・an」 1990년 11월 23일호, 아야츠지 유키토 「나의, 한 권. 멋진 반전의 구조. 전후 최고의 미스터리 단편집」에서)
  • 아야츠지: 렌조 작품은, 일반적으로는 나오키상 수상작인 연애소설 『연문』이 유명합니다만, 충격적이었던 것은 역시 먼저, 『회귀천 정사』, 『은밀한 상복』 등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지금은 고분사 문고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밤이여, 쥐들을 위해』입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실업지일본사에서 신서판으로 나왔고, 신초문고와 하루키 문고로 차례로 옮겨졌는데, 현재는 절판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서술 트릭 계열 단편집의 최고봉인데......아깝네요. (「작가의 독서도 제150회: 아야츠지 유키토」에서)

읽어보니 이 정도 극찬을 받을만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호평은 이해가 됩니다. 서정성과 트릭이 잘 결합되어 있던 작가 최전성기 시절("회귀천 정사" 시절)답게, 추리적으로 굉장히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트릭이 사용된 정통 본격 추리물에서 유괴극, 복수극, 서술 트릭 반전극, 느와르 등 수록작의 장르도 다양합니다. 과하게 느껴졌던 작가의 묘사도 다른 후기작에 비하면 절제되어 있어서 부담이 덜하고요.
모든 수록작이 다 괜찮은건 아니지만, 더운 여름, 한 번 읽어볼만하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가득하다는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개의 얼굴"
화가 마사키 유스케는 아내 게이코가 신주쿠 호텔에서 살해당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택 침실에서 유스케가 살해해 뒷마당에 파묻었다. 호텔 사건의 여자가 게이코라면, 유스케가 집에서 죽인 여자는 누구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유스케는 죽인 여자의 얼굴을 그날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유스케는 호텔 사건에는 알리바이가 있었기 때문에, 호텔에서 발견된 여자를 게이코로 만들어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진상은 유스케의 범행을 목격한 동생 신지가 자신을 협박하던 꽃뱀 여자를 함께 처치해 버렸던 겁니다. 마침 몸매가 비슷해서 속일 수 있었지요. 이 때 집 안에 전화가 두 대 있는 것을 이용해서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입니다. 전화가 걸려와 안부를 물으면 당연히 외부에서 전화를 했을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같은 집 안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유스케가 살해한 아내의 사체가 이동한 이유도 잘 설명되고 있으며, 사건에 대한 유스케의 심리묘사도 독자의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입니다. 서스펜스가 제법이었어요.
하지만 단편이라서 설명이 부족하며, 작위적으로 전개한 부분은 눈에 거슬립니다. 우선 신지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건 너무 뻔했습니다. 신지를 협박하던 꽃뱀 여자가 유스케 집까지 찾아와 지문을 남긴건 억지스러웠고요, 마지막 신지의 장난도 이유를 알기 어럽습니다.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7인 1역"과 유사하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과거에서 온 목소리"
'나'는 금수저 출신으로 형사일을 견디다 못해 2년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뒤, 그만 둔 이유에 대해 강 선배에게 편지를 썼다.
1년 전, 전일항공 부사장 야마후지 다케히코의 외아들 가즈히코 유괴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부인을 전화기에 붙잡아 놓은 상태에서, 담을 뛰어넘어 아이를 유괴했다. 경찰은 몸값을 확보하고 도주하던 범인을 미행하다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몸값을 받은 범인은 아이를 무사히 풀어주었고, 이후 공개 수사로 전환한 경찰에게 정체가 드러난 범인 오카다는 자동차 사고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유괴범에게 동정심을 느낀 '나'는 당시 일부러 범인이 도주하도록 수사를 방해했다. 유괴범 중 한 명이 강 선배라는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건 범인이 '내일'이 금요일인지 토요일인지 정하지 못했던 상황을 통해, 범인이 두 명이며 둘 사이 커뮤니케이션이 원할하지 않다는걸 추리해 내는건 아주 좋았습니다. 두 명 중 한 명이 아이를 유괴당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부잣집 아들을 유괴해 몸값을 받아내려 했다는 발상도 재미있었어요. 실행범은 자기 아이를 유괴한 범인의 요구사항을 자기가 유괴한 사건 피해자에게 그대로 전달만하면 된다는 아이디어인데,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강 선배가 오카다를 살해했을거라는 결말도 합리적입니다. 오카다가 체포되면 진상이 드러날 수 있으니, 경찰이 체포하기 전 정보를 흘려 유인한 뒤 살해했다는건 말이 되니까요.

그러나 유괴가 이렇게 겹쳐서 강 선배가 피해자이자 범인이 된다는건 다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나'가 강 선배의 눈에서 이십 년 전 범인 눈빛을 떠올린 덕에 진상을 깨달았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나'가 집 안에 있는 신이치가 사실은 유괴당한 가즈히코라는걸 눈치챈건 앞선 복선으로 설명되지만, 독자는 눈치채기 힘들다는 점에서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유괴 피해자가 몸값 마련을 위해 유괴범이 된다는 아이디어는 아주 좋았던만큼, 이를 확장한 장편으로 묵직하게 썼다면 "킹의 몸값"과는 또 다른 딜레마를 안겨다주는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것 같은데 아쉽네요. 그래도 아이디어만으로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

"화석의 열쇠"
하반신 마비 소녀 지즈가 목이 졸려 죽을 뻔 했다. 피해자 집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창문은 모두 안에서 잠겨 있었고, 출입구는 현관문밖에 없는데 열쇠는 관리인 사와가 보관하고 있었다.

지즈가 엄마를 집에 들이기 위해 자물쇠 바꾸는 청년을 속여 헌 자물쇠를 달게 했고, 엄마와 아빠 모두 지즈가 부담되어 살해하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한 정보 제공은 공정합니다. 지즈가 자물쇠 바꾸는 청년에게 상황에 맞지 않는 초콜릿 부탁을 한 것, 관리인 사와가 엄청나게 청소를 열심히 한다는 등 상황에 대한 공유는 확실하니까요. '열쇠 화석'이라는 말도 단서로서는 좋았습니다. 사와가 이 모든걸 깨닫는 전개는 일상계스러워서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 둘이 동시에 딸을 살해할 생각을 한다는건 와 닿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면 자기가 빠져나갈 생각을 할까요? 신파적인 결말도 별로였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기묘한 의뢰"
흥신소에서 일하는 나에게 쓰치야 마사하루라는 의뢰인이 찾아왔다. 아내 동향 조사 의뢰를 위해서였다. 아내 사야코는 하릴없이 이곳 저곳에서 시간만 보냈다. 알고보니 그녀는 나의 미행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고, 나에게 오히려 남편 쓰치야의 행적 조사를 부탁했다. 알고보니 나를 이용해서 몰래 불륜 행각을 저지르기 위함이었다. 이 역시 쓰치야에게 들켜버렸고, 쓰치야는 자기 행적 조사를 거짓으로 전달하라고 했다. 전달하기 위한 쓰치야의 행적은 애인 유리의 맨션 주소와 연락처로 받으려 했는데, 그 뒤 유리가 살해되었다...

쓰치야는 유리의 다른 애인으로, '나'와 유리의 관계를 알고 유리를 살해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조사를 맡긴건 유리와 나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내기 위해서였고요.

나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그리고 냉소적인 심리묘사가 대부분으로 추리적으로 딱히 눈에 뜨이는 부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묘사로 '나'의 별로인 모습만 드러나 작품에 몰입하기 힘들다는게 문제입니다. 쓰치야 부부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모습은 무능력했고, 유리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자신이 쓰치야에게 농락당한 것에 불과하다는걸 알아 버렸지만, 그냥 그대로 끝나버리는 결말은 이게 뭔가 싶더군요.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어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이여, 쥐들을 위해"
어린 시절 불우했던 나는 교정을 받아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를 잃은 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복수를 결심했다. 
병원 원장 요코즈미 다다오는 '나'의 협박 전화를 받고 서둘러 집을 나선 뒤 살해당했다. 경찰은 백만엔이라는 돈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나'의 원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추정했다. 이후 원장 사위이자 내과 부장 이시즈의 사체도 발견되었다.

'나'인 쓰무라의 아내는 불치병 뇌종양이었고, 병원의 과실로 죽은게 아닙니다. 그런데 왜 백만엔이라는 돈을 건네려고 했을까요? 이 수수께끼는 흥미롭습니다. 알고보니 이하라의 아내 후미요에 대한 오진을 숨기려고 원장과 내과 부장이 그녀가 백혈병에 걸리게 만들었다는게 진상입니다. 생각도 하지 못했네요. 쓰무라와 이하라의 정체가 독자가 알고 있던 것과 정 반대라는게 드러나는 반전도 좋았습니다. 잘 짜여진 서술 트릭물로, 독자를 완벽하게 속이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단 둘의 흉터는 너무 노골적으로 속이겠다!는 의도가 보여 좀 별로였고, 어린 시절 쥐를 죽였던 원한으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하라는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 밖에 없었으니 억지스럽더라도 죽일 수 밖에 없는 동기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고충은 이해가 되지만, 억지는 억지에요. 그래도 심리 묘사가 탁월한 덕분에 생각보다는 잘 설명되는 편이라 다행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중생활"
마키코는 열 여섯살 많은 슈헤이에게 젊음을 바쳤지만, 자신을 버리려하는 슈헤이에게 증오를 느꼈다.

정부인줄 알았던 마키코가 진짜 아내이고, 반대로 나이많은 시즈코가 정부이자 불륜녀라는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이 반전을 결말 부분까지 잘 숨기면서 전개한다는 점에서는 서술 트릭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마키코가 남편 슈헤이와 불륜녀 시즈코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살해당한 것처럼 자살한다는 반전, 그리고 이를 위해 데쓰오와 시즈코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방법도 잘 짜여져 있어서 범죄물로도 우수한 수준이고요.

그런데 마키코가 정부 데쓰오를 범행에 끌어들인건 억지스럽습니다. 불륜을 저지르다가 살해당한 모양새이니, 마지막 순간치고는 영 폼이 나지 않으니까요. 데쓰오 없이도 현장 상황 - 슈헤이가 받아온 수면제가 들어있는, 슈헤이가 즐겨 마시던 와인 - 과 스토브 지문으로 슈헤이에게 누명을 씌우는건 가능했을것 같거든요. 시즈코마저 옭아매기 위해 데쓰오를 이용했다고보면 말은 돼지만, 이 역시 나이든 시즈코와 데쓰오가 불륜 관계라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작위적입니다. 조건이 갖춰진 뒤에야 실행 가능한 계획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었다면 좀 더 설득력있는 인간 관계를 쌓아올리는게 가능했다는 측면에서, 조금 긴 호흡으로 풀어나가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대역"
인기 배우 하세쿠라 슌은 아내 료코와의 이혼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자신과 꼭 닮은 남자 다카쓰 신야를 찾아냈다. 그러나 료코가 슌의 불륜을 알고 있었으며, 이혼할 생각도 없다는걸 알게된 뒤 료코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다카쓰 신야를 이용한 알리바이를 만들어서였다. 오사카에서 다카쓰를 자신인 척 연기시킨 뒤, 자신은 변장하고 도쿄로 가서 살해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료코는 없었고, 오사카로 돌아간 뒤 자신의 방에 죽어있는 기누에를 발견했다. 이 모든건 료코와 다카쓰의 음모였었다.


하세쿠라 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완전 범죄물로는 볼만합니다.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 하세큐라 슌의 대타가 다카쓰 신야가 아니라, 료코와 기누에 입장에서는 그 반대였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이야기의 현실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애초에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 주위에 같은 여자들이 엮이게 된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는 했는데, 말이 되는 이야기로 만드는 데에는 실패한 셈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베이 시티에서 죽다"
동거녀와 믿었던 아우에게 배신당한 조직원이 출소 후, 둘이 함께 도망친 항구 도시로 찾아가 모두 죽여버린다는 느와르.. 묘사도 멋있고 배신의 진상 - 없던 죄를 뒤집어 쓴게 아니라 원래 내가 지은 죄였다는 - 도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딱히 흥미롭지는 않았습니다. 추리적인 맛은 거의 없고, 내용도 신선함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그냥 서정적인 '사나이' 이야기를 한 편 쓰고 싶어 쓴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열린 어둠"
불량 학생들만 다니는 사립 세이에이 고등학교 음악교사인 미즈키 마사는 '마더'라는 별명으로 학생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어느날 퇴학당한 폭주족 블랙호크스 멤버 중 한 명인 노리코가 긴급한 도움 요청을 해 왔다. 리더 다카기가 살해당했다고 했다. 노리코와 함께 현장에 온 마사는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노리코가 유력한 용의자라는걸 알고 한 시간만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카기의 죽음이 학교 체육 교사 아카자와 다케시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아카자와는 동성애자였다.

불량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학생과 얼마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열혈 신입 교사가 해결한다는 내용으로 7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청춘 미스터리'의 영향이 가득 느껴집니다. 동성애로 인한 삼각관계가 원인이라는 점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신선한 편이고요. 요새 이런 설정이 유행이라는데, 나도 한 번 써볼까!라는 생각으로 쓴 듯한데 의외로 괜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카기가 폐소 공포증이라는게 핵심 단서인데 - 아카자와 선생의 차는 비가 오는데도 창문이 열려있었다 -, 이는 여러가지 단서로 독자에게도 공유됩니다. 노리코가 아침에 다카기의 방에서 쫓겨난 건 창문을 닫으려고 해서, 다카기가 초고층 맨션에서 뛰쳐나온건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어서, 다카기가 폭주족이 된 건 차를 타기 싫어서였다는 식으로요. 
미즈키 마사가 학생들 앞에서 추리쇼를 펼쳐 진상을 밝히는 전개도 정통 본격 추리물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다카기가 스즈타에게 아카자와 살인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고 현장을 조작했기에, 스즈타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려고 다카기를 살해하고 노리코에게 혐의를 씌웠다는 동기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후더닛 물로는 괜찮았지만, 와이더닛 측면에서는 좋다고 하기 어렵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13/01/02

그림자 없는 범인 (일본 추리소설 단편집) - 사카구치 안고 외 : 별점 2점

그림자 없는 범인 - 일본 추리소설 단편집 - 4점
사카구치 안고 외/유페이퍼

장르문학 전자책 전문 독립 출판이라는 미증유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페가나 북스의 책. 현재까지 페가나 북스 출간작 중 최고의 베스트셀러 (페가나 북스 자료 참조)라고 합니다.

저자 사후 50년이 지난, 총 5편의 퍼블릭 도메인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불연속 살인사건"의 사카구치 안고, "도구라 마구라"의 유메노 큐사쿠, 나오키상 수상작가 히사오 주란, "연애곡선"의 코사카이 후보쿠, "혈액형 살인사건"의 코가 사부로로 구성된 저자 목록은 꽤 화려한 편이라 할 수 있죠.

상세하게 소개하자면, 첫 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이기도 한 사카구치 안고의 "그림자 없는 범인"은 마에야마 이사쿠라는 재산가의 죽음 뒤 벌어진, 이해관계자들의 좌충우돌 군상극입니다. 그런데 누가 진범인지도 드러나지 않는 등, 사건만 있고 추리의 과정이 없어서 추리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좀 더 과장되게 묘사했더라면 시대를 앞서간 괜찮은 블랙코미디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도 아니고요. 범죄소설도 아니고 풍자소설도 아닌 애매한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두 번째 작품인 유메노 큐사쿠의 "S곳 교살사건 서양부인"은 기이한 상황에서 벌어진 문신녀 마리 부인 살인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나가는 내용으로, 그로테스크한 범행 현장, 종잡을 수 없는 증언, 명탐정 이누타 박사의 등장 등 고전 정통파 분위기를 한껏 내 주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밝혀진 진상이 영 아니라는 점과, 추리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비현실적이면서도 대충대충 넘어가는 요소가 너무 많다는 점이죠. 예를 들면 문신은 설득력 없는 설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소도구일 뿐이고(비밀 정보를 숨기기 위한 문신이라는 설정이 과연 말이 될까요? 어떤 멍청한 정보원이 핵심 증거를 몸에다 새긴답니까?), 수수께끼의 핵심인 토사쿠 노인의 증언—보름달을 보았다—은 단지 각성 상태에서의 착각일 뿐이라는 것 등이 있겠습니다. 이런 점을 전부 걷어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작품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세 번째 작품인 히사오 주란의 "곤충도"는 변격물 분위기의 초단편 호러 판타지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았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오싹한 맛을 전해주었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 외에는 너무 짧아서 별로 이야기할 건 없군요. 별점은 2점입니다.

네 번째 작품인 코사카이 후보쿠의 "바보의 독"은 정통 추리 단편으로, 잘 짜여진 설정과 복선에 의외의 반전까지 등장하는 통쾌한 소품입니다. 오쿠다 부인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사건을 놓고 부인의 아들인 켄키치, 야스이치에게 혐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게 전개하다가, 부인 죽음의 진상과 야마모토 의사의 살의를 밝혀내는 결말이 아주 깔끔하거든요. 야마모토 의사가 켄키치의 연적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밝히는 것이 약간 반칙 같기는 하나, 그 외에는 완벽한 좋은 의학 미스터리물입니다.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별점은 3.5점입니다.

마지막 작품은 코가 사부로의 "호박 파이프"로, 이전에 읽었던 "혈액형 살인사건"에도 수록된 작품입니다. 작품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링크로 대신합니다. 별점은 역시나 2점.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전체적으로 기대에 미쳤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코사카이 후보쿠의 "바보의 독" 한 편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되기에 초창기 일본 추리문학에 관심 있는 분들께 권해드리고 싶네요.

물론 단편 5편(그중 1편은 초단편) 수록된, 일반 책으로 친다면 문고판 100여 페이지짜리 전자책 가격이 2,000원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 같긴 하나, 최소한 저는 돈은 아깝지 않았습니다. 우려했었던 번역 문제도 크지 않았으니 만족합니다.

덧붙여 페가나 북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점이 있는데, 첫 번째로 출판사명으로 책들이 검색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알라딘에서는 유페이퍼가 출판사로 잡혀 있어서 검색이 안되더군요. 두 번째로는 네이버북스에서도 구입할 수 있었으면 하고요.

마지막으로, 국내 장르문학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페가나 북스의 도전이 성공을 거두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퐈이팅~!

2016/11/19

백미진수 - 단 카즈오 / 심정명 : 별점 4점

백미진수 - 8점
단 카즈오 지음, 심정명 옮김/한빛비즈

나오키상 수상작가이자 일본 현대 문단의 원로로 다자이 오사무와 친구이기도 했던, 단 카즈오의 4계절 음식을 다룬 에세이집입니다. 저자가 음식을 정말로 좋아하고, 술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소재에 깊은 애정이 담겨있는 글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문단의 실력자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에 대해 글을 썼으니 애초에 재미가 없기는 힘들겠죠? 짙은 애정이 묻어나는 재미있고 좋은 글들이 가득합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묘사 역시 빼어납니다.

"바깥 껍질을 벗긴 멍게를 알맞은 크기로 썰어 오이와 함께 식초로 무쳐 먹으면 후두부를 콕 찌르는 것처럼 형언하기 어려운 냄새와 맛이 난다. 잊고 있던 여름. 잊고 있던 유카타를 입은 여인. 잊고 있던 여인의 색정. 문득 입에서 후두부 언저리에 걸쳐 이런 것들을 까닭도 없이 상기시키는 듯한 희한한 느낌이다.", 예레반이라는 도시의 코냑을 설명하며 "내게 천상의 여인이 아니라 지그시 다가오는 지상의 여인 같은 맛이었다."처럼 공감각적이면서도 소재를 넘나드는 상상력을 그려낸 묘사가 특히 좋았습니다.

요리를 즐겼다는 말에 어울릴만큼 인상적인 레시피도 몇가지 수록되어 있습니다. 몇가지 참고삼아 정리해 봅니다.

"금병매"에 적혀있는 족발 삶는 방법.

'돼지 발의 털을 깨끗이 밉니다. 그리고 긴 땔나무를 하나만 아궁이에 넣고, 기름과 간장을 큰 그릇에 가득 채운 뒤 향신료인 회향과 팔각을 더해 잘 섞은 다음 뚜껑을 꼭 닫습니다. 두 시간이 지나기 전에 좋은 냄새가 솔솔 올라오면서 다섯 가지 맛이 고루 갖춰지는데, 그러면 이것을 깨끗한 큰 접시에 담아 생강과 마늘을 넣은 작은 접시와 함께 찬합에 넣어...'

본인 스스로 본고장의 맛 (클램차우더?)과 비슷하다는 바지락 차우더.

우선 냄비에 물을 두세 컵 정도 넣어 끓인 뒤 바지락을 집어 넣고 뚜껑을 덮는다. 바지락이 입을 벌리면 바로 불을 끄고 그대로 식힌다. 베이컨은 가능하면 뜨거운 물에 데쳐 작게 조각내고 양파는 잘게 썬 다음 프라이팬에 버터를 넣고 약한 불로 살살 볶는다. 이 때 마늘을 조금 넣고 볶는 편이 더 맛있다.

양파가 반투명한 색이 되면 밀가루를 적당량 넣고 볶다가 밀가루, 베이컨, 양파가 흐물흐물 이겨지면 바지락 맛국물을 붓고 덩어리가 생기지 않도록 정성껏 섞는다. 다 풀렸다면 약한 불에서 잘 저으면서 우유를 두 통쯤 부으시라. 적당히 걸쭉하다 싶을 때까지 우유나 바지락 맛국물을 보태면서 끓인 다음 소금 간을 하면 수프는 완성이다.

이제 건더기 차례다. 바지락을 껍데기에서 분리해 조금 남은 맛굴물 속에다 헹궈 모래를 제거한다. 바지락은 기호에 따라 잘게 써는 편이 좋을 수 있다. 셀러리도 잘게 썬다. 그 외에 감자를 작게 깍둑썰기 해서 오 분 정도 소금물에 삶아 꺼내놓는다. 그다음 미리 만들어둔 걸쭉한 수프를 불에 올리고 셀러리와 감자를 넣어 한소끔 끓기 시작할 즈음 바지락을 더해주면 끝이다. 싱겁다 싶으면 소금을 치고 너무 되다 싶으면 우유로 묽히고 부드러움이 부족하다 싶으면 버터를 더 녹인다.

중국의 동남참게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

우선 동남참게를 잘 씻은 뒤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리를 실로 묶는다. 따로 자잘한 톱밥을 준비해 이 톱밥 속에 다진 생강, 다진 파, 후추 등을 섞어둔다. 여기에 고급술과 식초를 따라 흠뻑 스며들게 한다. 이제 동남참게의 표면을 톱밥으로 빈틈없이 감싸고, 그 위에다 잘 반죽한 점토를 동그랗게 둘러싸서 굽는다. 점토에 전체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하면 재빨리 점토와 톱밥을 치우고 아직 뜨거운 게살을 입맛에 맞는 간장에 찍어 먹는다.

맛의 달인에서 완벽한 찜요리 대결에 나옴직한 독특한 조리법이네요. 뭔가 걸식계도 떠오르고요. 

단순히 음식 이야기 이외의 다른 소재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두터운 작가의 인맥을 활용한 이야기들, 또 전쟁 당시에는 중국에서 보도반원 생활을 했고, 그 외 해외 여행 경험 등 워낙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기에 담고 있는 소재의 폭도 넓어요. 여기에 본인의 유쾌하면서 대책없고 화끈한 성격이 더해져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꼽는 베스트 에피소드는 중국 신징 근처 러시아인 부락에서 러시아인 바우스 부부와 1년 정도 함께 살 때의 잼 만들기 에피소드입니다. 보드카를 마시면서 잼 만들기를 하는데 부부가 다른 곳으로 가게되어 단 가즈오가 잼 젓기를 맡았는데, 그들이 돌아올 때 까지 젓기만 해서 결과물이 잼을 넘어선 그 무언가가 되었다는 결말입니다. 러시아인과 보드카, 그리고 단 가즈오가 만나서 제대로 시너지를 보여주는 그런 이야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즐겁고 재미있으며 때로는 유용한 좋은 에세이집입니다. 최근 읽은 음식, 요리 관련 에세이 중에서도 최고로 꼽고 싶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음식과 요리를 사랑하시는 분들이라면 모두 즐겁게 읽으실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덧붙이자면 "술안주라는 놈만큼 반가운 게 없다. 정말 술꾼에게만 주어진 하늘의 은혜 같다. 마시는 사람이 마시지 않는 사람보다 신의 가호를 많이 받는다니, 술꾼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지 않은가."라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로 대단한 애주가라는게 눈에 띄는데, 이러한 점과 대책없고 유쾌한 성격을 미루어 볼 때 로산진이 우미하라(가이바라)라면, 단 가즈오는 이와마 소다츠같은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간만에 준 4점이라는 높은 점수는 제가 "술 한잔 인생 한입"의 광팬인 탓도 클 듯 합니다.

2026/07/31

명탐정의 유해성 - 사쿠라바 카즈키 / 권영주 : 별점 2점

20년 전 명탐정 가제의 조수였던 나루는 결혼 후 가업인 카페를 운영하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유튜버 코롱이가 명탐정들의 폐해를 고발하는 영상을 공개한 탓에 가제가 거센 비난을 받게 되었다. 자신의 행동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가제는 나루와 함께 과거 사건의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당시의 진실을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잊고 있었던 기억을 하나씩 떠올렸고, 명탐정의 추리가 언제나 절대적인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도 마주했다. 

결국 여행은 끝났고, 나루는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나오키 상 수상 작가 사쿠라바 카즈키의 장편입니다. 제목만 보면 본격 추리소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명탐정이라는 캐릭터와 추리 소설의 관행을 풍자하는 성격이 훨씬 강합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덴카이치 탐정 시리즈같은 완전 풍자 유머 소설은 아닙니다. '명탐정'이라는 존재를 통해 헤이세이와 레이와라는 두 시대를 대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중년 성장기에 가까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헤이세이는 미디어가 만들어 낸 화려한 명탐정들의 시대입니다. 사건만 생기면 어디든 나타나 극적인 추리를 펼치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던 명탐정들은 현실적인 인물이라기보다 만화 속 히어로처럼 그려집니다. 반면 레이와는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시대입니다. 한때 명탐정의 조수로 이름을 알렸던 나루는 오십 대가 되었지만 이제는 누구도 알아보지 않는 평범한 동네 중년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화려했던 헤이세이와 소박한 레이와를 '명탐정'이라는 의외의 소재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나루가 가제와 함께 화려했던 헤이세이의 영광을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거를 다시 돌아보면서 잊고 지냈던 즐거운 기억뿐 아니라 외면했던 상처까지 마주합니다. 그러면서 지나간 시절을 되찾는게 아니라 현재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요. 그래서 중년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성장기라고 보아야 합니다.

추리적인 재미도 아예 없는건 아닙니다. 초반 나루와 가제가 처음 만났을 때 나루가 사는 곳을 추리해 내는 가제의 추리나 AI 탐정이 사실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사람이 연기하고 있었다는 진상을 나루가 사소한 단서만으로 밝혀내는 장면 등은 꽤 그럴듯 합니다.

명탐정 풍자도 재미있습니다. 사건만 생기면 어디에나 나타나고 화려한 언행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작품 속의 헤이세이 명탐정들은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과장된, 초법적인 히어로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매스컴을 통해 만들어졌던 겁니다. 그야말로 만화와 다를게 없었던 것이지요. 

명탐정의 추리를 비판적으로 비판하는 시각도 흥미롭습니다. 당시 주어진 단서만 놓고 보면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추리였더라도, 나중에 새로운 정보가 밝혀진다면 그 결론 역시 왜곡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즉, 명탐정이라는 존재는 현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지금은 DNA 검사 등으로 나중에 증거는 얼마든지 추가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부족한 정보로 산 사람의 운명을 가지고 노는데 불과하다는 코롱이의 비난도 꽤 합리적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추리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작품 속 추리들은 대부분 이미 해결된 사건을 되돌아보는 형식이고, 그나마 등장하는 사건과 트릭들도 만화적인 아이디어들이 많은 탓입니다. '크리스마스 연쇄 살인'에서 피해자들이 받았던 장식물의 순서대로 살해당했단게 대표적입니다. 순록 - 굴뚝 - 벽난로 순으로, 이건 산타의 이동 경로라는 추리거든요. 

코롱이를 중심으로 한 현재 시점의 전개도 다소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유튜브 폭로 영상 하나가 과거 사건을 다시 확인하는 긴 여정의 계기가 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후반부에 코롱이가 가제와 나루의 일행이 되는 전개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솔직히 등장하지 않는게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케이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루가 처한 현재 상황 - 모두가 무시하는 투명 인간 - 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라는 의도는 이해되지만, 성격과 행동이 지나치게 거슬려 등장할 때마다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명탐정을 주제로 그려낸 성장기라는 아이디어는 독특하고, 명탐정에 대한 재해석은 흥미습니다 그러나 추리 소설로는 별볼일 없어서 감점합니다.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네요.

2023/10/01

류 - 히가시야마 아키라 / 민경욱 : 별점 3점

류 - 6점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해피북스투유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할아버지와 의형제가 되었는지 묻자, 마 할아버지는 만두를 입에 넣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알았고, 뭐, 네 할아버지와 있으면 굶지는 않았으니까.”
리 할아버지와 구오 할아버지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는데 먹는 것과 목숨을 거는 일은 같은 거라는 사실을 이때 새삼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함께 먹는 것, 제대로 먹는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시대에 살았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었다.

예치우성의 할아버지가 살해당했다. 단순 강도 사건은 아니고 국공내전 때 많은 공산당원을 살해해서 원한을 샀기 때문으로 보였다. 예치우성은 대리 시험을 보다가 퇴학당해서 3류 고등학교로 전학가고, 거기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다가 대학을 떨어지고, 소꼽친구인 두살 연상 마오마오와 사랑에 빠지지만 어릴 때 부터의 친구 사오잔과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군대에 갔다가 마오마오와 헤어지는 등 질풍노도와 같은 청춘을 보내며, 할아버지 사건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버블 일본에 농산물 등을 수출하는 회사에 일하면서, 중국에 있는 할아버지의 의형제 마 할아버지로부터 온 편지를 받고 범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범인은 삼촌 위우원으로, 알고보니 할아버지가 살해했던 왕커창 일가의 유일했던 생존자 아들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의형제 슈알후의 아들인 척 하여 할아버의 양자가 되었었다.....


대만계 일본 작가의 작품. 추리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집어들었는데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인공 예치우성의 고등학교에서 군 생활까지가 내용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청춘 소설이자 예치우성의 성장기더라고요.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는 이력답게, 묘사는 출중합니다. 70년대 대만을 이렇게까지 실감나게 그린 작품은 정말이지 처음 보네요. 숨막히는 더위로 대표되는 이국적인 풍광이 가득하지만 70~80년대를 거쳤던 한국인 독자에게 친숙한 광경들이 많다는 것도 재미요소였어요. 가학적이고 거친 학교 생활, 무식한 군대 생활,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을 비롯하여 레코드 가게에서 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해준다는 등 당시 우리나라와 그리 다르지 않은 분위기가 많이 느껴진 덕분입니다. 특히 전쟁으로 본토에서 쫓겨난 외성인들과 본성인들의 갈등 상황은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고요. 의형제, 의리를 강조하는건 확실히 중국스러웠습니다만.
등장인물들도 하나같이 모두 강렬하며, 이들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치우성의 그야말로 폭풍같은 청춘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파괴적이기도 하면서, 연민도 불러일으키는 온갖 상황이 펼쳐져서 눈을 떼기 힘들정도였어요. 살짝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떠오르더군요.
치우성이 제대한 뒤인 80년대는 나카모리 아키나의 <<세컨드 러브>> 등이 언급되는데 묘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저도 익히 잘 아는 시대니까요. 그런데 치우성이 마오마오와 헤어진 뒤 '두 번째 사랑'을 만났다는걸 의미하기 위해 이 곡을 일부러 등장시켰을텐데 이렇게 노골적인 제목보다는 은근하게 <<슬로 모션을 다시 한번>>처럼 접근하는게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영 아닙니다. 추리 소설이라고 분류할 수도 없어요. 작품 내에서 할아버지가 살해당한 사건이 중요하게 언급되며, 치우성도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살인범을 찾아나서는 노력을 펼치기는 합니다. 그러나 단서도 없고, 치우성의 수사도 근거없는 헛된 노력에 그칩니다. '분신사바'가 중요한 단서인 것처럼 등장할 정도니 말 다했지요.
범인이 삼촌 위우원이었다는건 나름대로 반전이지만, 중국에서 할아버지의 친구 마 할아버지가 보낸 사진으로 드러나는 탓에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이전에 쌓아 올렸던 단서들, 예를 들어 위우원이 했던 거짓말 등이 있기는 하지만 피상적이며, 단서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사건의 설득력이 부족해서 추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위우원이 십 수년이 지난 뒤에야 예준린을 살해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예준린을 살해했을 때 치우성을 포함한 다른 예씨 일가를 모두 살해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고요. 예준린이 위우원이 슈알후가 아니라 왕커창의 아들이라는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걸 위우원이 깨닫는건, 예준린을 살해하고도 몇 년이 지난 후입니다. 그 동안 복수를 멈추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점들을 본다면 이 사건은 추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위우원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진짜 아들처럼 대했다는 묘한 상황을 통해 중국과 대만 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그리는 소재로 쓰였을 뿐입니다. 치우성의 질풍노도와 같은 정춘은 과거를 벗어나 새로운 대만으로 향하는 성장통인 셈이고요.

후기를 보니 작가는 캐릭터가 마음대로 날뛰도록 작품을 쓴다던데, 그 말대로 전체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를 구성하고 쓰지 않은 티도 물씬 납니다. 치우성이 어리석게 사오잔과 어울리며 비슷한 사고를 치고다니는 전개도 그렇지만, 치우성이 마오마오와 헤어지게 된 이유가 둘이 이복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급작스러운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황당해서 할 말을 잃게 만들더군요. 치우성이 중국으로 위우원 삼촌을 찾아가 담판을 짓는 결말도 이게 뭔가 싶었고요. 사랑하는 연인도 새로 생기고, 안정된 직장도 있는데 지금와서 왜? 라는 의문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읽는 재미만큼은 분명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우리나라를 무대로 각색할 수 있어 보이네요. 한국 전쟁 때 북한의 부역자라는 이유로 학살당했던 가족의 생존자 아이가 흥남 철수 때 남한으로 탈출에 성공한 뒤, 학살을 주도했던 국군 집안에 어찌어찌 양자로 들어갔다는 식으로요. 그리고 양부와 기묘한 애정을 쌓다가 20여년이 지난 후, 복수를 위해 양부를 살해하지만 양부가 자기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걸 깨닫고 허무함을 느낀다, 그리고 뿌리를 찾기 위해 일본을 통해 북한으로 향한다 정도로요. 
이렇게 정리하니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전쟁의 아픔과 분단이라는 현실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그리 특별한 이야기는 아닌 탓이겠죠. <<최후의 증인>>이 전쟁으로 인한 양쪽 세력의 악행과 비극을 더 잘 그려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증인>>이나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2010/09/07

플루토 1~8 - 데즈카 오사무 / 우라사와 나오키 : 별점 3점

플루토 Pluto 8 - 6점 테츠카 오사무 지음, 우라사와 나오키 그림/서울문화사(만화)
데즈카 오사무의 "지상 최강의 로보트"가 원작인, 우라사와 나오키의 SF 추리 스릴러입니다. 완결된지는 꽤 되었는데 마지막권 구입이 늦어 이제서야 완독하게 되었네요. 워낙에 제가 원작의 팬이기도 해서 관심이 가던 기획이었습니다.
발상의 전환이랄까요? 아톰을 주인공으로 하는 대신 세계 제일의 로봇 수사관 게지히트를 주인공으로 한 사회파 수사물 분위기는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사의 과정도 합리적이며, 게지히트 본인에게 있었던 과거의 아픈 경험이 현재의 사건들과 겹쳐지며 벌어지는, ’한없이 인간에 가까운 로봇의 고뇌’도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죠. 마지막 흑막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 역시 원작팬도 납득할만 한, 최고의 반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작 "지상 최강의 로보트"의 핵심인 플루토와 최강 로보트들 간의 격투, 그리고 아톰이 주인공인 후반부는 별로였습니다. 로봇들 간의 격투는 원작에 비해 너무 심심했기 때문입니다. 리얼한 SF스릴러라는 작품 성격상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화끈함을 선사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후반부에 밝혀지는 음모의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보라’가 거의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데 구태여 플루토에게 먼저 복수를 시킨 이유, 갑작스러운 플루토의 변심(?) 등이 별로 설득력있게 표현되어 있지 않은 탓입니다.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불필요하고 복잡하게 꼬아놓고, 애매하게 넘어가는 부분들도 거슬렸으며 '이라크전'을 풍자하는 듯한 설정은 너무 노골적이라 작품에 잘 녹아들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게지히트가 주인공인 부분만큼은 최고의 SF 하드보일드 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추리물'로 분류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또한 작중에 등장하는 '거액을 받고 불가능한 수술을 실현하는 일본인 무허가 천재 외과의사'를 비롯해서 텐마박사, 오챠노미즈박사, 반 슌사쿠 등 많은 데즈카 오사무 캐릭터를 만나는 즐거움도 큽니다. 한없이 인간에 가까운 로보트의 감정이라는 어려운 테마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도 좋았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08/12/15

마크스의 산 - 다카무라 카오루 : 별점 4점

마크스의 산 I - 8점
다카무라 카오루 지음/고려원(고려원미디어)

1976년, 미나미 알프스에서 알콜중독자 노무자가 등산객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진 날, 같은 장소에서 일가족이 자살을 시도했고 어린 아들만 겨우 구조되었다. 1988년, 미나미 알프스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백골 사체가 발견되어 76년 사건의 범인 이와다가 재구속되었다. 
1992년, 전직 폭력단원이던 한 사나이가 알 수 없는 흉기로 두개골이 함몰된 사체로 발견되었고, 이후 연쇄 살인사건으로 발전했다. 수사 7계의 고다 형사는 사건 수사 중, 이 연쇄살인 사건이 76년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내는데...

"석양에 빛나는 감" 이후 두 번째 다카무라 카오루 작품 리뷰입니다. "석양에 빛나는 감"의 주인공 고다 형사가 등장하는 "추리소설"로서, "석양에 빛나는 감"이 순문학에 가깝다면, 이 작품은 추리물로 보기에 손색없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추리적인 요소만 놓고 본다면, 약간은 도서추리적인 성향을 띄는 일종의 사회파 추리물입니다. 범인이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의 행동과 사고를 독자가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도서추리적인 성격이 엿보이며, 사회의 모순과 비리에 대한 고발성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은 물론 경찰, 형사들이 사건을 수사해서 진범을 밝혀 나가는 부분은 전형적인 사회파 추리-수사물의 유전자를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습니다.

치밀하거나 잘 짜여진, 범인과 두뇌싸움을 펼치는 정통 추리 범죄물은 아니지만, 언뜻 보기에 관련없는 사건들에서 불거진 사소한 단서들을 통해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이 잘 짜여져 있어서 수사물로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무려 16년에 걸친 범죄의 복잡한 사슬이 상당히 치밀한 덕분이고요. 작가의 능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우연에 의지한 요소도 별로 없고 드러난 사실이 공정하다는 점도 추리적으로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다카무라 카오루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묘사 역시 굉장히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심리, 성격묘사가 극한으로 잘 뽑혀 나온 작품이기도 합니다. 전작에서의 "석양에 빛나는 감"이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시적인 묘사는 없지만, 그 대신 범인인 "마크스"의 심리 - 특히 광기 -에 대한 디테일이라던가 7계 반원들에 대한 캐릭터들의 묘사가 흡사 현미경을 보듯 잘 살아있습니다.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산"에 대한 묘사 역시 엄청난 자료 조사와 내공을 보여주었고요.

물론 과거의 사건에서 비롯되는 "마크스"라는 이름은 실존하는 유명 소설 "마크스의 산"을 지나치게 의식한 작위적인 설정으로 보였으며, 범인인 마크스의 사고방식이나 범행의 동기가 그다지 현실적이지는 못하다는 점, 범행이 나름 "운" 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 등은 약간 아쉽습니다. 그래도 작품의 가치를 저해할 정도는 아닌, 납득할만한 수준이었습니다. 범인의 병력이 사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유라던가 간호사 피격사건 이후 폭주의 과정 등이 설득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죠. 사실 가장 큰 단점은 이 모든 사건이 탄탄했던 5명의 원조 "마크스" 중 한명의 유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라는 것이었습니다만...

어쨌건 나오키상을 수상하는 등 작가의 명성과 화려한 수상경력에 일조한 걸작답게 십수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고 메시지를 전해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저 역시 10여년 전에 한번 읽었던 책이지만, 다시 꺼내어 읽어 보아도 새로움이 느껴지는 것이 과연 좋은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추리적 요소도 충분해서 추리 매니아도 공감할 수 있고, 화려한 문체와 심리묘사가 펼쳐지는 순문학적인 특성도 가지고 있어서 일반 독자분들께도 권해드릴만 합니다. 현재 절판 상태이긴 한데 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니까요...

2020/05/24

폐허에 바라다 - 사사키 조 / 이기웅 : 별점 2.5점

폐허에 바라다 - 6점
사사키 조 지음, 이기웅 옮김/북홀릭(bookholic)

"에토로후 발 긴급전"의 작가 사사키 조의 단편집입니다. 홋카이도 도경 경부보 센도 타카시가 이런저런 부탁으로 개인적인 수사를 벌인다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탐정사전"에서 멋지게 소개된 덕에 기억하고 있다가, 우연찮게 읽게 되었네요. 

센도는 이전 사건 때문에 PTSD 장애를 입어 현장에 복귀하지 못하고 장기 요양 중으로, 의사 말에 따르면 "경찰에 관련된 일은 모두 잊어라, 가능하면 신문도 읽지 마라, 책은 읽어도 상관없지만 범죄 소설은 금물이다"라는 상황이지만 주위의 요구에 응해 이런저런 방법으로 수사를 돕습니다.

니세코 스키장, 홋카이도 동부 토카치 온천 여관, 유바리 시, 삿포로 시내, 히다카 등 북쪽 지방 이곳저곳을 자동차로 돌아다니며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데, 관련 묘사들이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폐허에 바라다" 속 소도시는 가공의 마을 같지만 그렇게 생각되지 않아요. 유바리 시 인근 쿠라야마 초 등 현존하는 곳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덧붙여진 덕분입니다. 마을로 향하는 길에 대한 묘사는, 지금이라도 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거든요. 연어 정치망 어업과 가리비 양식이 주인 오오츠크해 연안 항구 마을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러한 묘사 덕분에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강하게 전해 줍니다. 또 매 이야기마다 실제 사건을 담당한 형사가 등장하는데, 제각각 독특한 개성을 뽐내는 것도 재미요소에요. 사건 해결을 위해 센도를 이용하는 형사가 있는가하면 센도를 방해꾼 취급하면서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형사도 있고, 애주가도 있고 패션 감각이 빼어난 패셔니스타도 있거든요. 무엇보다도 나오키 상을 수상했을 만큼 문학적인 묘사가 돋보입니다. 사회파스럽게 현실에 대한 고발, 비판 의식을 이야기에 잘 담아낸 솜씨도 빼어나고요.

그러나 현실 고발없이 단순 범죄에 대한 이야기로만 끌고간 몇 몇 작품들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냥 멋드러지게 쓴 범죄가 등장하는 드라마일 뿐, 추리 소설이나 범죄, 수사물로 보기에는 영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합한 별점은 2.5점. 문학적으로는 근사하고, 뭔가 품격이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추리적으로 빼어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저와 같이 추리물에는 어느 정도 수수께끼 풀이나 트릭같은 요소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추리 애호가 분들께는 별로 권해드리고 싶지 않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지가 좋아하는 마을"

60여 페이지에 불과한 짤막한 단편입니다. 이야기도 대단한건 없어요. 센도 타카시가 휴직 중인 탓에 치밀한 수사를 벌일 수도 없고요. 하지만 고작 하룻밤 조사로 아서에게 쏠린 혐의를 돌릴만한 정황 증거를 담당 형사에게 들이민다는건 너무하다 싶었어요. 그것도 잠깐 관계자 옆자리에 동석했던 정도라면, 현재 담당 경찰들이 수사를 등한시 했다는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현지 경찰들이 '오지'에게 한 번 맛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치더라도, 이건 너무 심하죠. 용의자 아서의 아내는 일본인이고, 그의 자식 역시 일본인일테니 이렇게 푸대접을 받을 이유도 없고요. 특별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으며, 인간 관계 및 경제적인 이득 등 동기까지 명확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사토미와 아서가 관계를 맺었다는 등의 설정도 불필요했습니다.

스키장 마을의 묘사라던가, 이야기를 쉽고 명쾌하게 전달하는 전개는 나쁘지 않은데 특별히 점수를 줄 만 한 부분도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폐허에 바라다"

지독한 가난으로 어린 시절, 여동생을 죽이고 자살하려는 어머니를 목격한 뒤 범죄에 빠져버린 후루카와의 범행을 건조하게 그려냅니다. 후루카와를 한 때는 융성했지만 지금은 쇠락해버려 폐허가 되어버린 탄광촌 마을에 빗대는게 인상적이에요. 후루카와가 바란건 죽음이었고, 결국 자살로 센도 앞에서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장면은, 제목과 겹쳐지고요. 폐허에 바라는건 결국 흉물스러운 모습을 창피하게 드러내어 명줄을 유지하는게 아니라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는 뜻으로 읽히거든요. 이런 내용으로 본다면, 사회 고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파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사건이 워낙 명확한 탓이에요. 후루카와와 만나기로 한 센도의 의도를 야마기시가 어떻게 알고 추적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있기는 하나,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아닙니다.

이렇게 형사가 등장하고, 비참한 현실과 그 때문에 생겨난 비극을 범죄 드라마로 그려내었다는 점에서는 김성종의 "어느 창녀의 죽음"과 비슷합니다. 드라마로서 볼 만하고, 묘사도 특출난 부분이 있지만 추리적 요소는 거의 없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일본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도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일본의 버블 붕괴 및 지방 경기의 몰락을 그렸기 때문에, "어느 창녀의 죽음"만큼이나 우리에게 와 닿기는 힘들지요. 이런 점을 감안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오빠 마음"

'토'라는 어부들의 조합 때문에 사건이 벌어지는데 흉기가 어부들이 쓰는 마키리라는 등 어업과 관련된 디테일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지저분한 마을 유력자의 음모, 그와 손을 잡은 폭력단의 만행이 동기라는 점에서 사회파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사회 고발에만 그치지는 않습니다. 사건 속 수수께끼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용의자 이시마루가 피해자 다케우치를 폭행한건 인정했지만, 칼은 가져가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단지 칼을 가져가지 않았을 뿐, 칼로 찌른건 명백한 사실이며 이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끝에 그냥 손에 잡힌 칼로 범행을 저지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를 밝히기 위한 수사를 진행하면서, 이시마루의 가족들이 이시마루가 범인이라고 못 박은 이유가 드러나는 과정은 볼 만 했어요. 앞서 이야기한 사회파적인 고발이 함께 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단순한 센도의 추측 - 추리라고 하기는 어려운 - 만으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전개는 너무 뜬금없었습니다. 지나치게 쉽고 짧게 소비되어 버린 느낌도 들고요. "붉은 수확" 처럼 마을의 실력자,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분투하는, 장편 사회파 하드보일드물로 그려낼만한 이야기였는데 말이지요.

센도의 추리에 좀 더 설득력을 부여하고, 좀 더 드라마틱한 세력간 갈등을 그려낼 수 있는 장편이었다면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했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별점 2.5점입니다.

"사라진 딸"

범행은 강력하게 의심되지만, 시체가 없어서 본격적으로 수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작품. 경찰이 직접 일을 벌일 수 없어서 경찰 타나베가 미야우치에게 센도를 소개시켜 준 것입니다. 센도가 사건을 해결한 건 타카다 방에서 발견한 평범한 스냅 사진 속 인물에게 주목했던 덕분이고요. 그 인물의 정체를 알아낸 뒤, 전화 한 통으로 시체 은닉 장소를 알아내게 되거든요. 경찰이 수사 중 간과했던 단서에 주목한게 주효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경찰 수사의 디테일 부족으로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꽤 그럴듯했습니다. 추리적으로 대단하지는 않지만 나름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서 타카다의 과거를 상세하게 조사할 정도로 경찰이 수사를 확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도 설득력을 더합니다.

아주 빼어나지는 않지만, 실감나는 이야기라는건 분명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바쿠로자와의 살인"

저자 후기를 보니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아들들이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원수로 여기는 젊은이가 살인을 저지르도록 유도했다는 진상이 좀 비슷하기는 합니다.
여기에 더해 유언장이 주요 동기 중 하나로 등장하며, 지방 영주의 성 같다는 오하타 목장의 저택 묘사, 말을 키우는 목장 묘사 등이 더해져 굉장히 이국적인 느낌을 전해 줍니다. 일본이 아니라 영국 어딘가를 무대로 한 작품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작가의 의도는 러시아였겠지만요.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 외에, 추리적으로 건질건 없습니다. 내용을 보면, 17년 전 피해자였던 나가누마의 어린 아들이 장성해서 복수를 한게 뻔해 보이고, 새로 온 잡역부 청년 하라다가 마침 18살이라 수수께끼고 뭐고 이야기할게 별로 없네요. 오히려 하라다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지 않은 경찰의 무능함만 돋보일 뿐이에요.

추리 소설이 아니라 범죄에 대한 순문학, 드라마를 그리고 싶었다면 좀 더 길고 풍성한 묘사가 필요해 보였던 작품입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복귀 전날"

센도의 PTSD의 원인이 된 사건이 회자되며 센도의 완쾌를 알리는, 단편집의 대단원을 이루는 작품. 그러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추리적으로 대단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유미코의 전화는 도움 요청인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하루카가 진범이라는걸 드러내기 위한 목적의 밀고 전화였다는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이 역시 그렇게 의외의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화 내용이 사실과 달랐다면, 전화를 건 사람이 거짓말을 한게 당연하니까요. 오히려 왜 이렇게 밀고를 하려 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라던가, 범행에 무언가 트릭이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내용도 없어서 이게 추리 소설인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에요. 유미코의 동기는, 센도가 처음 만났을 때 손에 반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라는 디테일과 하루카가 피해자인 나오와 남자 문제로 다투었다는 증언이 순차적으로 드러나니 그리 대단한 수수께끼는 아니거든요. 하루카의 범죄 역시,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나오를 죽이고 불에 태웠는지에 대한 진상은 드러나지 않고 그냥 그녀가 범인일 수 있다는 정황 증거 정도만 추가될 뿐이라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도 않고요.

물론 이렇게 추리적으로 허술하다는게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차피 이 단편집 수록작 모두가 마찬가지이기도 하고요. 또 아는 사람, 잘 해주는 듯한 사람이 더 무섭다라는 명제를 잘 전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를 위해 억지로 센도를 엮었다는 점입니다. 수록된 다른 작품들은 모두 센도가 사건에 개입되는게 나름 이유가 명확한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미코 본인이 와인바 사장인 유키에가 겪은 일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게 중요한 단서가 될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걸 그냥 경찰에 제보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구태여 센도를 중간에 연락책으로 사용할 이유가 없어요. 오히려 가족을 밀고한다는 자신의 치부를 아는 사람을 만들 필요도 없고요.

이렇게 시리즈를 위한 억지 투성이인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0/03/16

마노스케 사건 해결집 - 하타게나카 메구미 / 김소연 : 별점 3점

마노스케 사건 해결집 - 6점
하타케나카 메구미 지음, 김소연 옮김/가야북스

한시치 체포록에 이어 연이어 읽게 된 에도물. 마을의 나누시 (일종의 동네 이장?) 후계자인 주인공 마노스케가 마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을 중재하는 이야기가 실린 단편 옴니버스물입니다. 제목은 "사건해결집"이라고 되어 있고 홍보도 일상 미스터리라고 하고 있는데 반해 그다지 대단한 추리물은 아닙니다. 하긴 17~18세기의 에도에서 봉행소에서 관여할 정도가 아닌, 소소한 상인급 인물들의 재정이 주였던 나누시에게 대단한 사건이 있을리가 없었겠지만요. 추리물보다는 일상 속 유쾌하면서도 소소한 드라마 정도로 보는게 맞습니다.

그래도 일단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일상계 작품이라는 특이함이 좋았고, 워낙에 작품 자체가 유쾌하면서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이야기들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건을 의뢰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주요 이야기이기에 추리적인 부분도 약간이나마 포함되어 있으며, 주인공 마노스케와 그의 친구들같은 독특한 캐릭터가 그야말로 작품에서 뛰어논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톡톡튀는 맛도 좋습니다. 나누시의 후계자이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청년이 되면서 정줄을 놓아버렸다는 평가를 받는 허술해보이고 장난기넘치지만 의외로 총명한 청년 마노스케가 아주 마음에 들기도 했고요.
에도물다운 치밀한 묘사 역시 볼거리입니다. 에도의 유곽 요시와라와 기녀들에 대한 묘사, 당대 사람들의 생활사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요시와라같은 경우 생각보다는 꽤 자유분방하고 일반 백성들과 연계된 오픈된 공간으로 묘사되는 등 참고할만한 (?) 내용이 많더라고요. 차남은 완전히 찬밥신세였다던가, 가게를 이어나가는 우선순위 같은 당대의 시대상을 알게되는 현학적 재미도 충분하고 말이죠.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은 결국 마노스케와 세이주로도 철이 들고 성장한다... 는 성장기 같은 느낌도 전해주는 탓에 만약 시리즈가 이어진다 하더라도 이전만큼 유쾌한 모습은 보여주지 못할 것 같다는 것입니다. 마노스케의 유쾌한 매력을 계속 즐기고 싶은데 후속작 소식도 없고 하니 작가의 다른 작품이나 찾아봐야겠네요.

개인적인 별점은 3점으로 추리적 요소가 부족해서 점수를 좀 짜게주기는 했는데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나오키상 후보에 오를 정도의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어쨌건 역사물을 좋아하시면서도 유쾌하고 가벼운 소품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네요.

덧붙이자면, 저자는 원래 만화가 출신이라고도 하는데 작가 정보에 만화쪽 이력은 나와있지 않군요. 작품에서의 디테일한 묘사와 유쾌한 분위기 때문에 만화도 한번 찾아보고 싶었는데 약간 아쉽네요. 설마 일본에서도 만화쪽을 소설에 비해 차별하는 풍토가 있는건 아니겠죠? 혹 작가의 만화 작품 아시는 분 계시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오노부의 진실>
시집안간 마을 처녀가 임신했는데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그 가족의 청을 마노스케가 묘한 인연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로 마노스케가 사건에 발을 담그게 되는 과정부터 시작해서 결말까지 일사천리로 달려주는 유쾌한 작품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대단한 것은 없지만 "함정수사"의 초창기같은 발상이 에도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무릎을 치게 만들더군요.

<감 반개>
자수성가했지만 상처한 뒤 홀로 살아가는 전당포 주인의 감나무에서 감을 훔쳐 따 먹은 인연으로 마노스케와 친구들이 전당포 주인의 옛 사랑 이야기와 엮이게 되는 내용인데 그야말로 소품이라 별로 언급할건 없네요. 일상 속 드라마 그 자체라 생각되긴 합니다.

<만년청의 주인은?>
고가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화분일 뿐인 "만년청"이라는 화분의 소유권 다툼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재미 포인트는 세가지인데 첫번째는 에도시대 유행했다는 "만년청"이라는 화분에 대한 현학적 재미, 두번째로는 갑자기 등장한 마노스케의 약혼자(?)와 그에 따른 왁자지껄하는 분위기, 세번째는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나름 진지한 추리적인 탐구가 벌어지는 것이죠. 약혼자를 자칭한 오스즈씨의 당찬 모습과 설득력있는 추리가 마음에 들었던 작품입니다.

<누구의 아이인가>
다이묘 휘하 무사가 자신의 후계자인 손자를 찾는 이야기로 한장의 편지를 통해 진지한(?) 수사를 펼쳐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중간에 삽입된 유령 이야기를 통한 복선과 결말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 외에도 마노스케가 갑자기 정줄을 놓아버린 이유를 짐작케 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등 여러가지로 즐길거리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병문안 가는 길>
마노스케가 약혼자 스즈와 인연이 있는 마타시로를 병문안 가는 길에 선물을 사기 위해 들른 가게에서 주운 개(칭)와 불량배들에게서 구해준 아가씨 오신을 둘러싼 소동이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이 단편집 안에서 가장 추리적인 재미가 많은 작품입니다. 정체를 숨기려고 하는 오신이 어느 동네 사람인지를 맞추는 과정이 셜록 홈즈식의 디테일한 관찰에 따른 추리로 펼쳐지는 것도 볼만했고 오카핏키가 찾는 고린이라는 아가씨의 정체를 밝히는 마노스케의 모습 역시 추리적으로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나름의 설득력은 갖추고 있더군요. 그 외에도 마노스케가 정줄을 놓아버린 이유가 살짝쿵 등장하기도 하는 등 잔재미도 쏠쏠해서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싶네요.

<고타 유괴사건>
마노스케의 친구이자 역시 나누시의 후계자인 세이주로의 동생 고타가 유괴되는 이야기로 에피소드들 중에서 가장 강력범죄가 일어납니다. 마지막 편이기 때문인지 모든 등장인물이 총 출동하며 - 마노스케의 첫사랑 오유와 드센 약혼자 오스즈양까지! - 추리적으로도 재미가 쏠쏠해서 몸값의 에도스러운 전달방법도 기발하고 사건 해결까지의 과정 역시 설득력있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결국 마노스케의 결혼식으로 마무리되는 대단원 역시 깔끔하게 정리되고 있어서 단편집을 잘 마무리하고 있다 생각되네요. (마노스케의 성장으로 대미를 장식하는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2012/11/17

죽이러 갑니다 - 가쿠타 미쓰요 / 송현수 : 별점 3점

죽이러 갑니다 - 6점
가쿠타 미쓰요 지음, 송현수 옮김/Media2.0(미디어 2.0)

나오키상 수상작가 가쿠타 미쓰요가 '살의'를 테마로 쓴 단편집.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잘 모르는 작가로 독특한 범죄 스릴러물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죽이러 갑니다"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과거 초등학교 때 자신을 가혹한 악의로 대했던 선생이 떠올라 찾아간다는 표제작 "죽이러 갑니다" 같이 일상 속 소소한 살의와 그것에 대처하는 일반인의 모습을 그린 소품들이더군요. 여성 작가가 일상 속 살의를 주제로 썼다는 점, 주제를 디테일한 심리묘사를 통해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고이케 마리코가 연상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이케 마리코 작품과 가장 큰 차이점은 살의는 그냥 살의로 끝날 뿐이라는 점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본격적인 노력이나 적극적인 행동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살의를 품은 이유가 확실하고,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체력을 키우는 등 가장 적극적이었던 "잘 자, 나쁜 꿈 꾸지 말고"의 사오리조차도 살의의 대상인 전 남친 고타와 마주치자 아무런 액션 없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과를 하고 도망칠 뿐이에요. 여기서 범죄를 저지르면 고이케 마리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살의와 절망이 끝없이 업그레이드될 뿐이라면 기리노 나쓰오가 되겠지만... 이런 비겁함이 보통 현실인 거죠.

또 약간 독특했던 것은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젊은 여성을 주요 매개체의 하나로 등장시키고, 각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비록 이름은 다르지만 이어지는 느낌을 주는 식이라서 하나로 이어진 연작이 아닌가 생각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독특했어요.

그런데 아주 일상스러운 느낌을 주기에는 극단적인 상황과 설정이 많다는 점은 좀 아쉽더군요. 일본에서는 흔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단편이 히키코모리, 왕따, 학대, 이유 없는 증오 등이 등장하고 그에 따르는 트라우마를 주요 소재로 삼고 있는데, 이런 일이 실제로 자주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일상스러우면서도 오싹한, 서늘한 느낌을 주면서도 여운을 남긴다는 점에서 좋은 작품들이라 생각되네요. 대부분 "살의"를 어떻게든 극복하는 결말로 이어지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멀어져 가는 부부관계를 몇몇 대사로 표현하는 "스위트 칠리소스"와, 어렸을 적 동경의 대상이던 친구가 사소한 왕따 등의 증오를 스스로의 내부에서 키워나가다가 붕괴하는 모습을 회상하는 "우리의 도망"이 개인적으로는 베스트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소설도 아니고 장르문학으로 보기도 어렵지만, 소소한 일상 속 디테일한 심리묘사를 즐기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3/03/11

흑뢰성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3점

흑뢰성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내용 및 트릭 등 주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리오카 성의 성주이자 셋슈 지방의 영주 아라키 무라시게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 구로다 간베에는 이를 막기 위해 찾아왔다가 아리오카 성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고, 아라키 군과 오다 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라시게 믿었던 모리 군의 참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초반에는 잘 버텼던 무라시게 군의 기강도 나날이 해이해져 갔다. 그 와중에 아리오카 성 내에서는 여러가지 기묘한 사건들이 일어났고, 아라키는 사건 해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구로다 간베에의 도움을 청하는데....


요네자와 호노부에게 나오키 상을 안긴 대작 연작 장편 소설. 발간된지는 꽤 되었지만 이제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전국시대 아리오카 성 전투를 배경으로 전투의 시작에서 끝까지를 그리고 있는 역사 추리물입니다. 그런데 <<대망>>같은 전국시대 군웅물로 보아도 무색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대하 역사극 서사를 잘 그려내고 있거든요. 아리오카 성을 기반으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은 아라키 무라시게와 그의 군대가 오다 군에게 포위당하고 1년여간 서서히 무너져가는 과정이 치밀하게 그려져있는데 기가 막힙니다. 원래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고등학생들이 등장하는 청춘물을 주로 쓰던 작가가 대하 서사물을 이런 수준으로 발표했다는데는 탄복할 수 밖에 없네요.
군웅물 대하 역사극답게 등장인물들 모두 관련된 배경 설명도 충실하며 캐릭터들이 확실하게 잡혀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문무를 겸비한 인재인 주인공 아라키 무라시게를 비롯하여 직속 수하들인 호위대 오본창, 철없는 애송이 나카니시 신파치로, 호전적인 노무라 단고, 냉정한 규자에몬, 이케다 이즈미 등 모두가 그러합니다. 특히 애송이 나카니시 신파치로가 처음에는 아라키 무라시게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다가, 1년여가 흐르면 적장과 주군 몰래 교류를 하는 묘사 등으로 인물 설정과 배경 묘사를 통해 아라키 군의 해이와 패망의 전조를 알리는 잘 짜여진 구성은 매력적이었어요.
구로다 간베에가 아리오카 성 전투 당시 지하 감옥에 갇혔었다, 아라키 무라시게는 리큐의 진전을 받은 다도인으로 천하가 흠모하는 명품 다기 "도라사루'를 가지고 있었다, 무라시게의 아내 지요호는 과거 나가시마에서 겪었던, 일향종 신도들의 떼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체험을 겪었다는 실제 사실을 이야기에 녹여내는건 팩션 느낌을 전해주며, 호위대 오본창과 사이카 병사 등이 각자 지니고 있는 힘, 창, 검, 총포 등의 특기, 그리고 남만종을 믿는 다카야마 다료의 입장 등이 이야기와 맞물린다는건 설정 하나하나를 깊게 고민한 티도 물씬 났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합니다. 수록된 네 편의 이야기 중에서 두 편은 본격적인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 본격물이기도 하거든요. 첫 번째는 <<설야등롱>>에서 인질 아베 지넨이 죽은 사건입니다. 아베 지넨은 복도 양쪽을 충실한 호위대가 지키고, 장지문 앞 마당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 화살을 맞고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화살마저 사라져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요. 핵심 단서는 마당 가운데에 서 있던 석등이었습니다. 석등 안쪽에서 핏자욱이 발견되었거든요. 즉, 벽을 따라 순찰하던 호위대원 모리 가헤에가 창 두개를 이어붙인 긴 봉 끝에 화살촉을 매단 뒤, 석등을 통과시켜 아베 지넨을 죽인 일종의 원격 살인 트릭이었던거지요. 봉이 너무 길어서 가운데 받침대가 필요했던겁니다. 모리 가헤에가 호위대 오본창에서도 특히나 창의 명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범행이지요.
세 번째 작품 <<원뢰염불>>에서는 무라시게가 밀정으로 쓰던 행각승 무헨과 그를 호위하던 오본창 아키오카 시로노스케가 살해됩니다. 무헨이 머물던 암자는 호위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범인은 어떻게 둘을 살해하고 깜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범인은 승려 행색을 하고 다니던 장수 노토 뉴도였습니다. 그는 호위대가 도착하기 전 무헨을 찾아갔다가 살해한 뒤, 무헨의 삿갓과 지팡이, 고리짝을 훔쳐 무헨으로 위장한 뒤 호위대 아키오카를 살해하고 도주했습니다. 변장을 통해 일종의 알리바이 조작 및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인 셈입니다. 이를 무헨 (으로 위장했던 노토 뉴도) 스님이 기묘한 진언을 읆었고 평소와 다르게 일꾼을 험하게 대했다던가, 고리짝을 훔쳐간 이유 등으로 독자에게도 단서를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어서 본격 후더닛물로 손색없는 수준이었고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한 작품이냐? 라고 물으면 그 정도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일본에서야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본격 추리물을 결합한 독특함과 그 완성도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을거라 생각되는데, 국내독자가 이 부분에 대해 평가할 여지는 많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호적수이자 일종의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구로다 간베에가 너무 별로였습니다. 적이지만 그 두뇌를 인정하여 죽이지는 않고, 필요할 때 가서 조언을 구한다는 핵심 설정은 유사한 캐릭터, 설정을 많이 모방한 탓입니다. 대표적인게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지요. 구로다 간베에도 한니발 렉터 못지 않게 아라키 무라시게의 마음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요. 이 설정 때문에 괜찮은 팩션이 그냥 가공의 픽션으로 바뀌어버린 느낌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아라키 무라시게에 비하면 구로다 간베에는 그야말로 전국구 인기 무장이라 이렇게라도 끼워 넣은 작가 의도는 대충 알겠습니다만, 구로다 간베에의 등장 없이 아라키 무라시게 혼자서 북치고 장구쳤어도 이야기 전개에는 무리가 없었을겁니다.
무라시게가 일세의 영웅처럼 묘사되지만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지는 문제도 두드러집니다. 모리가 원군을 보내지 않는다는걸 진작에 알아챘는데도 불구하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오다 노부나가와의 화의를 신청하는 밀사를 보내는 것 외에는 딱히 하는게 없거든요. 이것도 밀사 무헨의 죽음 뒤로는 흐지부지되어버리고, 도라사루에 대한 애착만 드러내며 끝난다는 점에서는 도대체 뭘하는지 알 수가 없어집니다. 별다른 계획도 없이 패배와 죽음으로 이어질 시간만 질질 끌 뿐입니다. 심지어 유력 가문 무장 노토 뉴도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드러난 상황에서도요. 그러니 무라시게에게 전국에 대해 동등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건 자신밖에 없다고 일갈하는 간베에의 모습도 아첨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닥친 위기에 대해서도 생각이 없는데 무슨 전국에 대해 논한단 말입니까? 대학 입시도 치루지 않은 학생에게 대기업 입사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과 다를게 없어요. 오히려 자기 혼자 살겠다가 홀로 도망치는걸 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승리하리라! 는 결심으로 포장하는건 헛웃음마저 났습니다. 그럴거면 원군을 진작 보냈겠죠. 다 진 싸움에 누가 원군을 보낸답니까.

추리적으로도 다른 두 편은 그리 대단한 트릭이나 내용이 있는게 아니라서 전체적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베 지넨을 죽게 만들고, 적장의 수급을 흉상으로 만들고, 노토 뉴도를 쏘아 죽이려고 했던게 누구인지?는 너무나 단순한 소거법이라서 추리라고 하기도 어렵고요.
트릭도 디테일은 다소 부족합니다. <<설야등롱>>에서 범인 모리 가헤에가 아베 지넨을 살해한 동기, 그리고 트릭을 떠올린 방법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모리 가헤에는 지적인 면은 다소 부족한 인물로 묘사되기에 이런 복잡한 트릭을 떠올린다는건 현실적이지 않거든요. 게다가 호위대 오본창으로 아라키 무라시게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갖추고 있기에, 주군 명에 반하는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석연치 않고요. 무라시게의 아내 지요호가 부처의 벌을 가장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지요호가 트릭을 가헤에에게 알려주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트릭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도 썩 납득이 가지는 않을 뿐더러, 전국시대 호위대 무사가 주군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종교, 그리고 주군 아내의 뜻을 따른다는게 말이 되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다카야마 다료의 말처럼 종교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이용할? 도구 정도에 그치는게 당시 현실이었을텐데 말이죠. <<원뢰염불>>에서 노토 뉴도가 벼락에 맞아 죽는다는건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뭐, 그래도 명성에 걸맞는 재미만큼은 충분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소 단점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사소합니다. 전국시대 군웅물 팬이시라면, 혹은 <<노부나가의 야망>>과 같은 게임을 즐겨 하신다면 엄청나게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겁니다.

2008/11/03

석양에 빛나는 감 - 다카무라 카오루 : 별점 3점

석양에 빛나는 감 II - 6점
다카무라 카오루 지음/고려원(고려원미디어)

어느 뜨거운 오후, 동경 하이지마 전철역에서 한 여자가 선로로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건을 목격한 경시청의 형사 고다 유이치로는 사건 현장에서 도망친 한 여인 사노 미호코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한편 사노 미호코의 결혼전 애인이었던 노다 다쓰오는 사건 이후 다시 미호코와의 밀회를 시작하게 된다...


다카무라 카오루의 범죄소설입니다. 이전에, 아주 오래전에 구입했었지만 이제서야 완독하게 되었네요.

일단 이 작품은 아주아주 광의의 의미에서의 추리소설입니다. 범죄가 약간 등장하며, 추리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두명의 주인공, 즉 고다 유이치로와 노다 다쓰오의 심리묘사를 통해 범죄와 악의의 발생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일종의 범죄소설로 순문학에 가까운 작품이거든요. 범죄가 이루어지는 과정 형사의 수사가 중심이니 만큼 구태여 구분하자면 "도서형 사회파 범죄 순문학소설" 정도 될까요?

개인적으로는 카뮤의 "이방인" 과 굉장히 유사한 작품이라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범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더위"라는 너무나 하찮은 것이지만 작품 전반에 걸친 더위와 태양에 대한 짜증나는 묘사를 통해 독자를 설득시키고 공감에 이르게 하는 것 처럼, 이 작품도 거의 700여페이지에 달하는 장편 분량의 대부분을 더위와 두통, 짜증과 우울함만 가득한 일상생활의 묘사를 통해 두명의 작중 주인공의 비이상적인 심리상태를 독자에게 감정이입시킨다는 점에서는 똑같아 보였으니까요.

또한 순문학스러운 작품 답게 굉장히 디테일하면서도 문학적인 묘사도 많습니다. 제목부터 멋지지만 제목과 연관되는 마지막의 "석양에 빛나는 감빛으로 내리는 불타는 비" 라는 묘사 같은 것은 정말 흉내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뛰어나다 생각되고요.

그러나... 사실 약간 지루한 것도 사실입니다.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작품이 대부분 그러한 편인데, "추리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음에도 추리 애호가로서 즐길거리가 별로 없다는 점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죠. 작중에 등장하는 고다 유이치로가 원래 맡고 있는 "호스테스 강도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그나마 추리적인 요소가 많은 부분인데 작품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의 매력적인 요소는 많지 않았습니다. 지나치게 장황하고 디테일한 묘사 덕분에 너무 이야기가 늘어지는 감도 없잖아 있고 말이죠.

작품성 측면에서만 따진다면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라 국내에는 차라리 순문학 작품으로 알려졌다면 어떨까 싶기도 한데 주인공이 경시청 형사이고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 만큼 어필하기는 쉽지 않았겠죠? 문학성이 높다는 점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만 추리소설로는 아쉬운 부분이 더욱 많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2005/07/18

끝없는 추적 (追いつめる) - 이쿠시마 지로 / 이경재 : 별점 3점


이제는 대기업의 풍모마저 느껴지는, 고오베의 항구를 장악하고 있는 하마우찌 구미를 처단하기 위해 형사부장 시다 시로오는 경찰 본부장 구사야나기의 은밀한 지시를 받고 행동에 나섰다. 시다의 첫 타겟은 하마우찌 구미의 간부 아오다니였다. 
구와다 살해 혐의로 아오다니의 검거에 나섰지만, 검거 도중 시다는 동료 형사 노리마쓰를 쏘고 말았다. 검거마저 실패한 탓에 형사를 그만 둔 뒤, 가족까지 잃은 시다는 혼자서 하마우찌 구미에 대항하기 위해 나섰다. 
사다의 끈질긴 추적으로 아오다니 검거에 성공했고, 이어 구사야나기 본부장이 발족시킨 특수 대책반의 활동으로 아오다니를 통해 하마우찌 구미의 경영을 책임지던 오쿠다마저 체포함으로써, 하마우찌 구미는 결국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베스트셀러 작가 이쿠시마 지로의 작품입니다. 나오키 상까지 수상했었네요.
하드보일드 분위기를 풍기지만 하드보일드 추리물은 아닙니다. 캐릭터나 전개 방식이 니시무라 쥬꼬나 오사와 아리마사가 연상되는, 구태여 장르 구분을 하자면 "하드보일드 풍 모험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의 시다 시로오의 수사 방식은 "혐의자를 협박하거나 때린다 >> 혐의자가 진실을 말한다 >> 진실을 추적해서 다른 혐의자를 잡는다 >> 다시 혐의자를 협박하거나 때린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인간 관계 속에 진실이 숨어있는 하드보일드 추리물과는 다르게 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추리라는 것도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건 자체도 단순하고, 일개 개인과 거대 조직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별로 숨길 것도 없고요.
주인공이 복수심으로 혈혈단신 외로운 늑대로 싸워나간다는 점에서는 과거 사무라이 활극이 연상되며, 그래서 더욱 더 모험소설처럼 보이는 것 같네요.

이렇게 비록 추리적 요소는 거의 없지만 "재미"라는 기본 요소에 굉장히 충실하다는 것도 특징입니다. 거대 조직 하마우찌 구미의 치밀한 묘사를 비롯하여 협박과 공갈, 폭력 및 각종 상납 등 여러 범죄에 대한 디테일이 워낙 뛰어나서 진부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속에 독자를 빨아들이는 매력이 대단하거든요. 작가가 나가사키 출신이라는데, 항구 도시 묘사는 본인 체험에서 우러나온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이러한 재미에는 하드보일드에 걸맞게 외롭고 고독하면서도 터프하고 냉소적인 유머를 갖춘 쿨가이 시다 시로오의 매력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예를 들자면 산토리 위스키를 찾는 장면 같은 디테일에서 시다의 고집이 잘 드러나 보여 마음에 들었어요. 이야기속에 작게나마 나름 반전이 있는 것도 이채로왔고요.

한마디로 결론내리자면 추천작입니다. 현대의 일본식 하드보일드 액션 스릴러의 원조격, 할아버지 뻘로 한번쯤 읽어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허무하긴 하지만 여운을 남기는 엔딩이 인상적이었는데 뭔가 속편을 암시하는 듯 해서 조사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후 10여편의 시다 시로오 시리즈로 이어졌네요. 1972년에 영화화 되었는데 구하기는 어렵겠지만 영화도 궁금합니다.